생활지표 |생활지표 2022: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고 억지로는 아무 것도...

STRENNA 2022

"모든 것을 사랑으로, 억지로는 아무것도…."

성 프랑수아 드 살



성 프랑수아 드 살 선종 400주년:

살레시안 카리스마로 이어지는 두 거인


먼저 이 글의 의도가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생애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히며 시작합니다. 실제 전문가들이 작성한 훌륭한 전기들이 이미 많이 있고, 내게는 절대로 주제넘은 일이며 확실히 내 능력과 의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대신, 성 프랑수아 드 살이라는 훌륭한 인물 앞에서 그분의 선종 400주년을 맞아 이 글을 통해 그분에게 뿌리를 두며 살레시안 영성을 날마다 퍼 올리고 있는 우리 살레시오 가족, 돈 보스코 가족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시작하면서 살레시안 카리스마로 이어지는 두 거인에 해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둘 다 교회를 위한 큰 선물이었고, 돈 보스코는 누구도 생각치 못한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영적 힘을 교육과 자신의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일상적인 복음화 작업으로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살레시오 가족은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서 이 과제를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프랑수아 드 살과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 둘 다 요람에서부터 ‘상징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프랑수아 드 살은 알프스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급류가 파놓은 계곡 그리고 드넓고 푸른 하늘을 반영하는 호수가 아름다운 이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요한 보스코도 사브와 사람이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큰 성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프랑수아와 동일하게 신앙심이 깊은 감미로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젊은 새댁이었던 프랑수아즈 드 브와지는 첫아들을 잉태하고 안시에서 전시 중인 하느님 아들의 수난에 관해 말해주는 성수의를 접하고 감동을 하여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제 아기는 영원히 예수님께 속할 것입니다.”

어느 날, 맘마 마르게리타는 아들 요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너를 복되신 동정녀께 봉헌했단다.” 토리노에서 돈 보스코도 같은 성수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어머니들은 프랑수아같이 큰 성에서 또는 요한처럼 가난한 시골집에서 성인들을 낳았습니다.

프랑수아가 처음으로 완성한 문장은 “선하신 주님과 어머니는 나를 매우 사랑합니다.”였습니다.

그리고 선하신 하느님은 프랑수아와 요한을 돌보셨고 두 사람 모두에게 큰마음을 주셨습니다. 프랑수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이 있는 파리와 파도바에서 공부했습니다. 요한은 ‘카페 피안타’라는 선술집 계단 밑 귀퉁이 촛불 아래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인간적인 어려움 앞에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돈 보스코는 일단의 자기 아이들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를 살레시안이라 할 것입니다.”그 순간부터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는 돈 보스코의 가족, 살레시오 가족이라는 큰 나무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시간의 흐름 속에 그의 직관, 경험 및 영적 확신이 넓게 퍼진 덕택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게 성장한 역사상 인물 중 한 명입니다. 400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그리스도인 삶에 관한 제안, 영적 동반 방법,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서 인간학적 전망 등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올해 살레시오 가족을 위해 선택한 스트렌나의 주제는 항상 그렇듯이 돈 보스코께서 남겨주신 유산과 전통에 충실하며, 지금 선종 40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의 생각 중심에 계신 그분, 프랑수아 드 살의 펜촉에서 나온 것입니다.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회 회헌은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영성에서 찾아지는 많은 요소와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FMA를 비롯한 돈 보스코 가족에 속한 다른 많은 단체도 그들의 정체성 안에 살레시안 요소를 지니기에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프랑수아 드 살이 400년 전에 쓴 글과 우리 신원의 특성으로 삼는 살레시안 영적 유산에 속하는 것들 사이의 조화, 연결 및 직접적인 적용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1

특히, 이 글을 위한 지침으로, 우리 사명에서 그리고 교육 사목활동의 틀에서 예방체계의 특성들을 서술하는 살레시오 회헌 38조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38조는 마치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생각에 대한 쇄신된 해석의 항목처럼 내가 전개하고자 하는 측면들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는 교육 사목적인 봉사를 완수하도록 우리에게 예방체계를 물려줬다.

이 교육은 전적으로 이성, 종교 그리고 아모볼렛사(사랑)에 달려 있다.” 이 교육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성과 마음 그리고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에 호소한다.

이 교육은 가족적이며 신뢰와 대화의 분위기 안에서 교육자와 청소년들이 같은 생활을 체험하게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인내를 본받으며, 청소년들이 느끼는 자유의 수준에서 그들을 만난다. 또한, 그들이 굳은 신념을 가지고 성숙하도록 그리고 신앙 안에서 인간 성숙의 예민한 과정을 서서히 책임져 나가도록 동반한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사회와 문화에서 우리의 살레시오 가족을 구별 짓는 것은 바로 여러 다양한 상황에서 적용되고 알려지고 수용될 수 있는 돈 보스코의 예방체계입니다. 우리는 인용된 글 그리고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사상과 영성의 중심축 사이에 많은 공통 요소를 발견하며, 여기에서 발견한 것에 기초하여 성 프랑수아 드 살과 돈 보스코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눌 탁자를 마련하도록 나를 부추깁니다.


  1. 억지로는 아무것도….”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육체계가 “억압에 의존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2. 사람의 마음속에 계시는 하느님: 그렇기에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깨닫습니다.

  3. 하느님 안에서의 삶: 교육자와 청소년이 같은 삶의 체험을 하게 한다.”

  4.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방식: 가족적이며 신뢰와 대화의 분위기 안에서” 청소년과 함께 살도록 이끕니다.

  5. 조건 없고 제약 없는 사랑: 우리 가족 안에서 “하느님의 인내를 본받으며, 청소년들이 느끼는 자유의 수준에서 그들과 만남”을 가능하게 합니다.

  6. 영적 지도의 필요성: 그러니까 “그들이 굳은 신념을 가지고 성숙하도록 동반합니다.”

  7. 모든 것을 사랑”으로 살기까지: 신앙 안에서 인간 성숙의 예민한 과정을 서서히 책임져 나가도록” 합니다.


  1. 억지로는 아무것도….”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육체계가 “억압에 의존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사랑과 감미로움이 모든 면에서 저를 인도하시기를 빕니다.”2 돈 보스코는 키에리 신학교에서 성 프랑수아 드 살의 기본 업적을 자세히 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가 성품 단계의 첫걸음에서 한 결심은 그가 행동뿐 아니라 삶의 모델을 발견했음을 보여줍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이 평생 사람들과 관계에서 보여준 사랑과 감미로움은 돈 보스코가 아홉 살 때 꾼 꿈을 시작으로 평생 특징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3

억지로는 아무것도….” 이는 매우 아름다운 제안이며, 개인 삶의 소중한 규칙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이는 어떤 임무를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을 위한 책임 또는 봉사 및 사명을 수행하는 바른 태도를 취하도록 안내합니다. 이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자유를 주신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이 선택과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을 지지하고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왜’라는 질문 없이 단순히 강제로 부과된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경험으로 알고있습니다. 단지 명령이 살아있는 동안만 ‘억지로는’ 지속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움직이지 않으시며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사목 활동을 통해 이를 경험했습니다. 가톨릭 개혁의 주창자이자 미지근한 신앙에 맞서는 교육을 받은, 트렌토공의회를 따르는 주교로서 그는 힘의 길이 아니라 마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태도를 묵상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 딸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 아들의 손을 잡고 있는 선한 아버지처럼 그분께서는 그대의 보폭에 발을 맞출 것이고 그대보다 빨리 걷지 않은 것을 행복으로 느끼실 것입니다.”4

인본적인 성 프랑수아 드 살에게 자유는 인간의 가장 가치 있는 요소입니다.5 육화의 실체는 이 존엄성을 확증하는 숭고한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언급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우리의 형상과 모습대로 자신을 만드셨다.”6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위대함, 인격의 가치는 그를 책임감 있게 하는 자유를 통해 드러납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에게 자유는 마음의 삶이기 때문에 인격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느님 스스로 무한한 가치와 존엄을 지니시고 이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강제로 요구하지 않으시며, 요구를 받았을 때 우리가 진심으로 기꺼이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도 당신을 섬기도록 강요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7입니다.

하느님의 개입, 그분의 은총은 우리의 동의 없이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강한 힘으로 움직이지만, 강요나 억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으로, 완력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신 자유는 언제나 존중되었습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이 즐겨 말했듯이 친절한 초대로, 때로는 성소나 부르심으로, 때로는 친구의 목소리로 영감을 주거나 초대하듯이 또는 늘 앞서시기에 ‘예방’처럼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문을 두드리시고 열리기를 조용히 기다리십니다.8

마찬가지로, 돈 보스코도 발독코의 가장 불우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맞아들이고 교육적으로 동반을 하는 데 있어 마음의 길을 따르는 법을 취했습니다. 사목적 열성, 영혼 구원의 열망, 아이들의 전인적 발전을 위한 헌신 등을 실천하는 노력은 강제나 강요 없이 항상 이러한 우정의 관계를 맺으려는 제안을 젊은이가 받아들일 때 수행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속에서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으며 누군가 자신이 잘되길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믿음, 정의, 진리와 같은 다른 가치와 연계될 때라도 항상 지켜져야 할 가치입니다. 돈 보스코의 가족인 우리에게 이것은 기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 없이는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지 않는 곳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 프랑수아 드 살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통해 우리의 본성과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끄십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적인 의지의 띠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성 아구스티노는 아이에게 사탕을 보여주면 자석처럼 끌린다고 말합니다. 그는 육체의 끈이 아니라 마음의 끈에 의해 이끌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우리를 이끄시는지 봅시다. 그분은 가르치심으로써 우리를 기쁘게 하시지만, 우리에게 어떤 의무도 부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손길은 너무나 감미로우시며,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권능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데 그렇게 능숙하십니다. 우리의 의지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강력한 충동을 주시는 능력은 매우 능숙하십니다. 당신의 권능으로 부드럽게 우리에게 힘을 주듯이 그의 감미로움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강력하게 지켜주십니다. 구세주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듯이 만일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고 그대에게 “물 좀 주시오”라고 청하는 이가 누군지 알았다면, 그대는 그분에게 청할 것이고 그분은 생수를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테오티모여,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영감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것을 알고 난 뒤에는 이에 동의하고, 지지하고, 움직임을 따르거나 혹은 동의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을 느끼도록 해주지만, 동의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9


하느님은 성 프랑수아 드 살이 썼듯이 애가에서 말하는 향수처럼 끌어당깁니다.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매력을 조합하려는 시도는 감미롭게 수행됩니다. 강력하지만 폭력적이지 않은 하느님 매력의 힘은 그 매력의 감미로움 안에 있으며, 더욱이 성 프랑수아 드 살이 살았고 공유하는 영적 경험에 비추어 하느님 사랑은 피조물을 향한 인간적 사랑을 부러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어떤 사랑도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않으며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 하느님 사랑은 살레시안 신비이며, 타인을 향한 사랑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요구합니다.10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고 동시에 우리의 유익을 원하시며 당신 사랑의 많은 표징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이들 중 첫 번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자유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일 것입니다. 사랑은 강요하거나 요구하려고 하면 사라집니다. 여기에 성 프랑수아 드 살이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힘, 당신의 우정과 조물을 베푸시고, 당신과 통교를 통해 서로에게 자유의 여지를 남겨두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각 개인의 종교적 자유에 관한 배려와 존중을 일깨워줍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처럼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우호적인 현존, 증거를 통한 복음화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현존, 때로는 침착하고 조용하고 존중해야 하는 현존은 비폭력의 원칙뿐 아니라 그보다 중요하게 사람의 자유에 대한 깊은 존중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완벽하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 프랑수아 드 살이 그 시대의 종교 전쟁으로 인한 분쟁 지역에서 이미 실천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마리아의 모성적인 중재에 기반을 둔 방식을 통해 인내와 굳은 의지로 예언적인 증거의 삶을 살았던 이 현존 양식에 우리가 매우 근접한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살레시오 가족으로서 우리의 현존은 이런 방식의 현존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프랑수아 드 살의 유산을 심화하고 우리 시대의 구체적인 상황에 그의 영성을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살레시안 정신’ 안에서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1. 사람의 마음속에 계시는 하느님:

그렇기에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깨닫습니다.


억지로는 아무것도….”라 하는 것은 단지 전략이나 방식이 아니라, 무엇보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이 어떤 식으로든 세류에 맞서 살았던 인간으로서의 신뢰와 믿음에 관한 깊은 확신, 그리고 돈 보스코의 낙관주의와 젊은이와 자기 아이들에 대한 완전한 신뢰로 훌륭하게 발전하게 할 줄 알았던, 즉 그리스도인 휴머니즘입니다. 인간, 젊은이, 모든 사람, 우리 모두의 존재 안에는 하느님이 필요하고, 하느님을 원하며, ‘하느님께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습니다.11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열망은 우리 성인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그들 삶에서 오직 당신께서 선택하신 순간에 당신만 아시는 방식으로 각자에게 스스로 현존하시려 한다는 확신으로 변화됩니다.12

우리에게 너무나 현대적인 이런 신학적 원칙은 근본적으로 살레시안적이며,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협력하는 영적 태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성 프랑수아 드 살에 의해 이미 낙관주의, 긍정성,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정의 가치와 행복 추구 가능성이라는 형식을 취해 자유의 정신으로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우정을 주시는 하느님에 관한 긍정적인 개념을 가지면, 돈 보스코가 몸소 살았고 제안한 살레시안 영성을 드러내는 이 요소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도록 노력하십시오,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지 말고…”13 우리 아버지 돈 보스코는 성 프랑수아 드 살에 따라 두려움의 하느님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을 원했고, 만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성인에 이르는 길이라면, 그것은 전율할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에 밀접하게 연결된 두려움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비관주의, 부정적 인식 또는 두려움을 심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 그분의 우정을 갈구하고 그 보답을 보고자 하는 열망은 살레시안 영성의 기초입니다. 하느님을 법을 어기는 것을 억누르는 감시자이거나 멀리 있고 무관심한 분으로 여겼던 사람들과 달리, 프랑수아 드 살은 그분을 피조물과 피조물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항상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며 그들을 확신과 감미로움으로 인도하시는 헌신적인 하느님으로 경험했습니다.14

성 프랑수아 드 살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에 대한 열망, 행복을 향한 움직임,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자연스러운 욕구가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사상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행복으로 접근하는 첫 번째 길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행복 자체를 혼동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재물에서, 어떤 이는 쾌락에서, 어떤 이는 인간적 명예에서 이를 찾습니다. 실제로,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생각에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고의 선뿐입니다. 그리고 이 지고의 선이란 바로 인간의 마음이 본성적으로 지향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는 철학자 스승들로부터 ‘표피적 행복’은 지혜, 정직, 선함, 만족감 등의 소유로 이뤄지지만, 인간의 ‘본질적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 오직 그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로서 그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로 하느님을 직관하거나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고, 이러한 생각을 훌륭하게 요약한, 프랑수아 드 살이 자신의 강론에서 자주 차용했던 성 아구스티노의 고백록이 떠오릅니다. “오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 쉴 때까지 불안합니다.”(고백록, I, 1.1)15

그러나 우리가 자연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경향은 항상 주도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지만(하느님 만남과 동일시되고, 우리 혼자 이에 이를 수 없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려 하시고 최선을 다하신다는 확신을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자신의 영성을 통해 우리에게 줍니다. 이 충만함의 약속은 우리 안에 계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과 함께 많은 열매를 맺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인류학적, 신학적 전망이 믿음과 이성 간의 대화를 바르게 균형 잡아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 프랑수아 드 살은 자신이 형제라고 부르던 반대자들과 대화하면서 하느님을 지고의 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과 인간 본성 자체를 위한 뒷받침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직 성경에만 의존했던 사람들과 달리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이성과 믿음이 같은 근원에서 나오며 동일한 저자의 작품인 이상 상반될 수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신학은 이성의 사용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을 없애지 않고 완성합니다.

프랑수아 드 살이 자신의 성찰을 심화하고 영성을 발전시킨 맥락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행복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밝은 빛을 가져다주는 이 영적 흐름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프랑수아 드 살과 돈 보스코는 각자 자신의 시대를 강한 이 신념으로 살았고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프랑수아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농부의 헌신을 소출로 돌려주지 않을 만큼 무심한 땅은 없습니다.” 그래서 살레시안 영성과 교육학의 또 다른 근본 요소, 인내를 제안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인내를 본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는 또한 돈 보스코의 삶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영성에 참여하는 가족으로서 신뢰를 지속하고 우리의 지적 자원을 공고히 하며 온갖 어려움 앞에서 우리의 마음과 하느님 추구를 굳세게 하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연히 이 작업에는, 돈 보스코 역시 그렇게 믿었듯이 설령 감춰져 있더라도 모든 사람과 모든 청소년의 마음속에 선이 자리 잡고 있으며 모든 이의 마음은 하느님을 만날 능력을 지닌다는 신념을 지니고 이를 강하게 지키는 남녀 살레시안 교육자의 고유하고 잘 준비된 자질이 요구됩니다. 이 여정에서 모든 젊은이와 모든 사람을 돕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1. 하느님 안에서의 삶:

교육자와 청소년이 같은 삶의 체험을 하게 한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영적인 삶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현실이란 것을 제시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하느님 안에서의 이 그리스도인 삶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탁월한 용어는 배타적이지도 폐쇄적이지도 않은 특성을 지닌 것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의 표현인 ‘신심’입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자신의 존재로 살아가면서 온전히 하느님에게 속하고 싶은 것을 반대할 어떤 이유도 프랑수아 드 살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독창적이고 ‘혁명적인’ 그의 제안일 것입니다.

신심이 사랑이라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신심은 누구나 어떤 인간적 상황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사막으로 가거나 수도원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신심생활입문에서 그분은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필로테아라는 시적인 이름으로 부르면서 기도의 차원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의 날개를 펄럭여야 할 필요를 보여주고 동시에 거룩하고 우호적인 대화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기 위해 다리를 움직여야 할 필요를 보여주며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인 삶의 여정을 추적합니다.


필로테아님, 진실하고 살아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초로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심은 하느님의 참된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랑 자체를 신심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해질 때 이를 은총이라고 하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덕을 행하려고 노력할 때 이를 애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애덕으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자주 선을 행할 때 이를 신심이라고 합니다. [...]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활동함으로써 우리가 그 사랑을 통해 열성적으로 행하는 선행이 일상적인 것이 될 때, 이 자연스러운 행위를 가르쳐 신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애덕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지키게 하는 것은 신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명을 다 지키지 않는 사람은 선량한 사람이 아니고 신심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신심이 깊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애덕을 지녀야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할 때도 기꺼이 그리고 신속하게 해야 합니다.16


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언급하는 저자의 가장 밝고 가장 유익한 구절 중 일부를 여기에 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행복을 위한 계획이고 당신의 피조물 각자를 위한 하느님 뜻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계획입니다. 신심생활입문에서 성 프랑수아 드 살은 필로테아와 대화하는 가운데 모든 이가 각자 삶의 상태에 따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과 신하, 귀족과 평민, 미혼과 기혼, 그리고 소년과 소녀들이 제각각 자신의 처지에 따라 특성 있는 신심의 결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신심은 개인의 능력, , 직무에 적합한 것이어야 합니다. 필로테아님, 주교가 관상수도회의 수도자들처럼 은둔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한 집안의 가장이 수도자들처럼 가정경제에 관심이 없다거나, 일해야 할 노동자가 수도자들처럼 온종일 성당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지 않는다거나, 또는 수도자가 주교처럼 신자들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닌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무질서하며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비슷한 일들은 매우 많습니다. 사람 중에는 참된 신심과 무분별한 신심을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며 심지어는 신심을 배척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17


이 여정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선언한 바에 보조를 맞춰, 각자가 자신의 성소 추구의 과정을 실현하길 기대하는 그리스도인 성소 신학으로 이끕니다. 그토록 많고 강력한 구원의 방편에 의해 강화된 모든 신자, 모든 조건과 상태의 그리스도인은 성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각각 자신의 방식대로 성덕의 완성에 이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Cf. LG, 11)

성 프랑수아 드 살과 돈 보스코는 일상생활을, 자신들이 받았으며 되갚아 드린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 성인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삶에 가깝게, 삶을 하나님과 관계에 가깝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애정을 담아 말씀하신 ‘옆집 성인’ 또는 ‘성덕의 보편성’이라는 제안입니다. “저는 참을성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성인을 만나는 것이 기쁩니다. 큰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 가운데, 집으로 빵을 벌어오기 위해 일하는 남녀들 가운데, 병자들 가운데, 계속 미소 짓는 연로한 수녀들 가운데서 말입니다. 날마다 앞으로 나가기 위한 이 항구함 속에서 나는 전투 중인 교회의 성덕을 봅니다. 이것은 매우 자주 만나는 우리 가까이에 사는 ‘옆집’ 성인이며 하느님의 현존의 반영이거나 혹은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성덕의 보편성’입니다.”18

돈 보스코처럼 오늘 우리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성소와 성덕을 추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동행하는 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고 시급하게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청소년에 관한 시노드 동안 교회를 향한 그들의 호소, 여러 다른 것 중에 자신의 성소 식별에 동반할 것을 요청하는 호소의 메아리를 여전히 듣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응답하시려고 반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적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는 우리 살레시안 가족에게도 도전을 제시합니다.


그들의 성소 식별에서 젊은이들과 동행할 수 있는 사제, 남녀 수도자, 평신도, 전문가, 심지어 자질을 갖춘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삶의 길을 식별하도록 우리가 다른 이를 도울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경청입니다.19


이렇게 우리 영성의 또 다른 기본 요소를 거의 우리 손으로 건드립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 우리가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도와 우정의 관계를 맺고, 친밀한 만남을 설정하도록 하는 현존과 경청을 말하며, 이는 젊은이와 사람을 중심에 두는 살레시안 분위기를 다시 한번 추스르게 합니다. 돈 보스코의 그리고 그보다 앞서 앞서 프랑수아 드 살의 ‘Da mihi animas’는 아직 오늘날에도 온전히 유효합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사목적 삶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참여가 그를 착한 목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을 나누도록 인도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시작하여, 그는 이 열렬한 사랑 혹은 사랑하는 열정이 죄인의 회개로 인한 기쁨으로 또는 이 초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한 고통으로 바뀔 수 있음을 느낍니다. 이것은 성 프랑수아 드 살의 Da mihi animas에 대한 독특한 독해입니다.20

우리가 성 프랑수아처럼 그리스도 안에 삶의 뿌리를 굳건히 두고 있다면, 그 사목적 열정과 사랑을 훌륭하게 실현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만 사도적 활동이 결실을 보는데, 이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그 사랑을 전하려면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필요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서거 400주년에 드리는 아름다운 선물은 그분과 돈 보스코의 사목적 사랑으로 하느님과 아이들에게 우리를 바치며 Da mihi animas coetera tolle의 사도적 역동성을 쇄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복구하는 것입니다.

돈 보스코의 살레시안 영성은 일부 전문가들이 ‘추상적’이라고 부르는 다른 영성적 흐름과 비교하여 매우 다른 선상에 놓여 있는데, 이는 프랑수아 드 살과 같은 큰 스승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평범한 삶의 영성을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심으신 곳에서 우리는 번성해야 합니다.”라고 행복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살레시안 영성의 근본적인 특징 중 하나인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지닌 상황에 대한 사랑을 배우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으로써 그것을 사랑하는 등, 이렇게 하는 것이 수동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혹시 늘 있고 싶은 곳이거나 또는 있고 싶은 않은 곳일지라도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를 심으신 그곳에서 덕을 행하고 선을 실천하며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마음을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 보스코가 자기 아들들과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제안한 영성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도미니코 사비오의 극기들입니다.


가여운 내 영혼! 저는 정말로 당혹스럽습니다. 구세주께서는 보속을 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금지하시니, 과연 저의 천국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너에게 원하시는 보속은 순명이다. 순명하라, 네게 그거면 충분합니다.”

다른 보속을 허락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래, 너에게 허락하는 다른 보속은 네게 오는 모욕을 인내롭게 견디는 것, 더위 추위, 비바람, 피로 그리고 하느님께서 네게 주시는 건강상의 모든 불편 등을 기꺼이 참고 견디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필수적으로 겪는 것들인데요.”

부득이하게 겪는 것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네 영혼을 위한 덕과 공로가 된단다.”

아이는 이 충고에 만족하며 물러나 평온히 떠났다.21


우리 살레시오 가족은 의무를 완수하는 것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적인 활동과 그리스도의 왕국 건설에 우리가 호응하고 참여하고 협력하는 길이라는 인식을 하고 하느님과 관계를 삶으로 옮기는 고유한 방식을 만들어 왔습니다.

돈 보스코는 자기 젊은이들 및 살레시오회원들과 함께 하느님과 관계 속에 있는 이 단순하고 익숙하고 일상적인 방식의 특징을 몸소 살았고 발전시켰습니다. 이것은 일상의 성덕 실천을 제안하는 성 프랑수아 드 살의 방식에 호응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조건과 상태에서 상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에 식물에게 각기 종류대로 열매를 맺으라 명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살아 있는 식물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각각 자기의 성품과 소명에 따라 신심의 열매를 맺으라고 명하십니다.22


  1.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방식:

가족적이며 신뢰와 대화의 분위기 안에서” 청소년과 함께 살도록 이끕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은 무엇보다도 그의 선함과 감미로움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그의 편지 중 하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특히 친절한 마음, 가난한 정신, 단순한 삶, 이 세 가지 작은 덕을 좋아합니다. 또한 아픈 이를 방문하기, 가난한 이를 섬기기, 고통받는 이를 위로하기, 그 외 다른 보다 힘든 일들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의무감이 아니라 참된 자유로 합니다.23


성인의 삶과 성격을 연구한 사람들은 그의 상냥한 성격이 돈 보스코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24 성 프랑수아 드 살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25 본받은 모델로 제시되며 그의 특징적인 덕목은 감미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감미로움이란 단순히 세련된 매너를 소유하고 순전히 관습적인 호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성된 인위적인 다정함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떤 힘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냉정함과 분노해야 할 때도 감히 화를 내지 못하는 소심함과도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정겨운 효과처럼 성 프랑수아의 마음에서 자라났고 동정심과 부드러운 마음에 의해 양육된 이 자질은 그 자세의 본성적 진지함을 감미롭게 조절했고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애정 어린 존경을 받을 만큼 목소리와 태도를 부드럽게 했습니다.”26

이러한 감미로움은 또한 돈 보스코의 사목활동 초기부터 그를 매료시켰고 그가 아이들과 맺는 교육적 관계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로마에서 그의 선함과 감미로움에 대해 생각하면서, 돈 보스코 자신이 그의 소년들에 대해 지닌 감정, 1884510일 자신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마음의 아픈 감정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편지에서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명령도 사랑으로 하고 순명도 사랑으로 하여 언제나 성 프란치스코 디 살레스의 정신이 살아있게 하십시오.”27 돈 보스코는 환영, 정중, 친절, 선함, 인내, 애정, 신뢰, 감미로움, 온유함이 신뢰와 친밀함을 만들어내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레시안 영성은 태어났으며, 이해와 자비가 풍부하고 또한 환대하고 젊은이의 성장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능력으로 넘칩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과 마찬가지로 돈 보스코도 예수님 마음을 본받아 온유와 겸손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마태 11,29). 아홉 살 때 꿈에서 염소, , 고양이, 곰 및 기타 동물 무리 속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 여기가 네가 일해야 할 곳이다. 너를 겸손하고, 강하고, 강건하게 해라. 그리고 이 순간에 이 동물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내 아이들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28 돈 보스코가 순명의 마음으로 쓴 오라토리오 회상의 첫 번째 기억에서 어려움에 대응하는 겸손한 태도가 높이 우선시 됨에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랑수아 드 살이 샤블레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는 데 유일하게 도움을 준 것은 온유함과 겸손한 마음의 자질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오늘날 선교사의 사도적 방식의 본보기인 아름다운 사목 활동을 펼쳤습니다. 두려움을 주려 했던 여느 선교사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을 취해, 프랑수와 드 살은 식초 한 말보다 특유의 꿀 한 방울로 더 많은 파리를 끌어들였습니다!29

이 선한, 감미로운, 온유한 정신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전통에 속하기 때문에 초기 살레시오회원들에게 깊이 새겨졌습니다. 이 덕목들 중 어느것도 무시할 수 없고, 더욱이 그것들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카리스마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손상될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선함과 친절의 정신이 전달되고 우리 사이에 소통되는 방식은 살레시오회원이 된 아이들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 그리고 발도코의 첫 살레시오회원들과 함께 살면서 받은 친숙하고 환영하며 친절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 말입니다. 사실 초기에는 "살레시오회 제4서원"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먼저 선함, 노동 그리고 예방체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30

로마에서 보낸 편지가 언급하는 꿈속의 목격자들, 특히 1870년 이전에 오라토리오에 살았던 발프레가 꿈에 나타나 남긴 증언을 읽어봅시다.


오락 시간은 항상 즐거웠습니다. 뛰는 사람, 달리는 사람, 깡충깡충 뛰는 사람 [...] 한쪽에서는 청소년들 한 떼가 모여 어느 신부님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어떤 부제님을 둘러싸고 나르는 당나귀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에 친절과 신뢰로 가득 찬 분위기였습니다. [...] 친하게 되니까 정이 생기고 정이 생기면 신뢰도 갖게 됩니다. […] 마음을 엽니다.31


이 두드러지는 요소인 선함의 특성을 보이지 않는 어느 살레시오 사업,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회, 그리고 현재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 가족을 구성하는 32개 그룹이 세상에서 존재할 것이라고는 우리가 상상조차 못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발도코 선택’32이라고 찬란하게 표현하며 상기시켜주셨던 것처럼, 적어도 우리는 그 선함의 특징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은 친절, 정감, 친밀감 및 현존으로 구성된 살레시안 방식에 관한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보물, 돈 보스코로부터 받은 선물을 가지고 있고, 이제 그것을 되살리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살레시오 가족 신원헌장은 우리에게 정감과 아모레볼렛사가 살레시오 가족 정체성의 특징적인 측면임을 알려줍니다.


돈 보스코의 아모레볼렛사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교육 방법론의 특징적인 요소이며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 맥락이나 다른 종교에 속한 젊은이들이 사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 원리로만 축소될 수 없고 우리 영성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어야 한다.

사실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퍼오는 것이기에 참된 사랑이다. 단순한, 진실한, 충실한 언어를 통해 등장하는 사랑이다. 호응의 열망을 만드는 사랑이다. 신뢰를 불러일으키고 자신감과 심오한 의사소통의 길을 열어주는 사랑이다(‘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 함께 있는 것이 아름답고 풍요롭게 느껴지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며 스스로 확장하는 사랑이다.33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자신의 감미로움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성 빈센트 드 폴은 그를 우리 주님과 가장 비슷한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34 그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성 프랑수아 드 살과 돈 보스코에게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 예수의 마음에서 가장 웅변적인 사랑의 표현을 찾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자유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대하는 방식인 온유, 선함, 정감을 통해 살레시오 영성의 중심에 도달합니다. 이 중심은 우리의 존재와 삶의 모델, 즉 사랑입니다.

우리의 많은 젊은이가 온 세상에 있는 살레시오 가족과 만남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꼽은 것은 가족적인 분위기, 즉 그들이 대우받고 있다고 느끼는 환대와 정감입니다. 한마디로 가족 정신입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이 지닌 사랑과 우애의 능력, 증여와 자기 봉헌의 능력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스스로 하느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만든 두 번의 큰 위기를 이겨내고 도달한 깊은 확신에서 온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위기와 어두움의 경험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콜카타의 성녀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 위대한 성인들도 겪었습니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의지하게 하는 정화된 희망이 프랑수아 드 살의 내면에서 생겨났습니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인, ‘순수 사랑’을 향해 움직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가장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의 성취는 ‘자격이 없다’는 느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대한 희망으로 이뤄집니다. 이것이 살레시안의 낙관주의입니다. 이 관점은 하느님을 독단적인 집행자로 묘사하는 어떤 생각도 확실하게 거부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대신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자비와 사랑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하고, 프랑수아 드 살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달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떻게 넓어지는지를 묵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자신의 경험, 자기 삶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프랑수아 드 살은 하느님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그가 기도 중에 드리는 이 깊은 진심의 선언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주님, 어떤 일이 일어나던 모든 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고, 당신께서 저에 관한 예정 및 징벌의 영원한 결정을 어떻게 내리셨든 당신의 모든 길은 정의로운 진리입니다. 당신의 심판은 깊은 질곡이며, 당신께서는 항상 바르시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주님 제가 영원 속에서 당신을 사랑하도록 허락받지 못한다면 적어도 이승에서라도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나의 하느님,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당신을 사랑하겠나이다. 설령 사탄의 악령이 반대하도록 그리 꼬드겨도 항상 당신의 자비에 희망을 두겠고 당신 찬미를 반복하겠나이다. 오 주 예수님, 살아있는 사람들의 땅 위에서 당신은 항상 저의 희망이시고 저의 구원이십니다. 제 잘못으로 인해 제가 매우 감미로운 당신의 얼굴을 뵐 수 없는 저주받은 자 중에서도 가장 저주받은 자가 되어야만 한다면, 적어도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저주하려는 사람들 편에는 있지 않도록 해주소서.35


프랑수아 드 살의 위기는 그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즉 하느님 사랑에 빠진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올리브 동산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의 의지를 버리는 것이 순수 사랑의 정점임을 이해했습니다. 그러한 응답은 순수 사랑에만 드릴 수 있는 것이며 가장 숭고한 정신의 중심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충성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사랑입니다. 올리브 동산의 고통 속에 계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십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코 14,36)36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프랑수아 드 살 영성의 중심이며, 이는 돈 보스코의 모든 가족이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프랑수아는 시련 속에서도 충실함을 유지하며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하느님의 위로에서 위로의 하느님으로, 열정에서 참된 사랑으로 옮겨가는 여정이 필요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를 훌륭하게 표현합니다.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심 없는 순수 사랑은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은 온전한 사랑이란 모든 두려움을 몰아냄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사랑하도록 이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고 두려움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살레시안 영성에서 출발하여, 프랑수아 드 살이 그리고 이어 돈 보스코가 훌륭하게 발전시킨 사랑과 타인을 향한 사목적 열성이 지닌 모든 역동성의 중심으로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1. 조건 없고 제약 없는 사랑:

우리 가족 안에서 “하느님의 인내를 본받으며, 청소년들이 느끼는 자유의 수준에서 그들과 만남”을 가능하게 합니다.


모두를 위한 성덕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모든 사람 및 각 사람을 향한 사랑에 기초해 프랑수아 드 살이 남긴 영적 제안의 필수 요소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 성심께 드리는 신심으로 닮아야 하고 따라야 하는 굳건한 모델을 지니고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자세로 올리브 동산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뜻을 낮추는 것이 순수 사랑의 정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의지의 행위, 포기의 행위입니다.

신애론에서 프랑수아 드 살은 마음에 관해 300번 이상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인 인본주의자로서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모상과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그는 "우주의 완성"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우주의 완성이다. 정신은 인간의 완성이다. 사랑은 정신의 완성이고 자애는 사랑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은 우주의 목적이요 완성이며 경이로움이다. 이 안에 구세주께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라 하신 거룩한 사랑의 계명이 지닌 위대함과 우월성이 담겨 있다.37


인간의 마음은 선으로부터 멀어질 때 탕자 마음이 되는데,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께서 우릴 창조하신 방식에 따라 우리를 계속 선으로 이끌려는 의지가 유지될 것입니다. 당신의 도우심, 섭리, 은총과 사랑이 우릴 돕지 않는다면 우리의 힘만으로 인간 본성에 의존해서는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을 향한 자연적인 경향은 우리가 길을 떠나 걷도록 하기에 충분하며,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활동, 즉 이를 찾는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 당신의 은총은 바로 거기에 있으며 우리를 돕고 인도하십니다.

성 아구스티노가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 불안하다.”38 말했다면, 프랑수아 드 살의 생각에 따른 우리는 폰 발타사르와 함께 “오 하느님, 당신의 마음은 우리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 불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39

살레시안 전통에서 우리는 성 프랑수아 드 살에게서든 성녀 쟌느 드 샹탈에게서든 예수님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지향하는 신심의 수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매우 특별하게도 방문회 딸 중 한 명인 성녀 마리아 마르게리타 알라코크에게서도 이것이 발견됩니다. 돈 보스코 시대에 이르러 특히 교황 비오 9세는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을 크게 장려했습니다. 그는 마르게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를 시복하고 1877년 성 프랑수아 드 살을 교회 박사로 선언했습니다. 돈 보스코의 시대는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으로 두드러졌는데, 교황 비오 9세의 요청으로 우리 아버지가 로마에 성당을 건축한 이래 살레시오 가족은 그 마음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사랑과 결속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성 프랑수아 드 살과 돈 보스코 사이의 유사성이며 또 다른 접점일 것입니다. 교회와 복음 선포 사명에 충실하여 그리스도를 사목 활동의 중심에 두고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바르셀로나의 티비다보를 비롯하여 살레시오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물론 온교회에서 예수성심께 봉헌된 많은 성당처럼 로마의 예수성심 성당을 국제 성지’으로 정의하는 것이 부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육화된 하느님의 사랑이 현존하며 세상을 구원하려는 그분의 뜻이 살아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마지막 말씀이 당신, 즉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자신의 고귀하고 탁월한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사랑의 구체화, 인류 역사에 대한 하느님 개입의 표시로 묘사하며, 예수님 안에서 그 표현의 절정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 방탕한 아들을 보고 달려 나가 안아 주는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이는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 비유들은 그분의 존재와 활동 자체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위 죽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슬러, 인간을 들어 높이시고 구원해 주시고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행위의 절정입니다. 그것은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요한 19,37 참조)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 회칙의 출발점으로 삼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이 진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살아가고 사랑하여야 할 길을 찾아냅니다.40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의 이 작은 소풍은 또한 우리를 영성의 중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원천이 없다면 선함도, 궁핍한 자들에 대한 헌신도, 친절도, 자유도, 사랑도 없고 우리가 이제껏 말한 어떤 특성도 없습니다. 인간의 일부이자 우리 중 하나가 되려 하신 하느님의 자유로운 결정을 설명해주는 것은 죄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화, 즉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께서 끝까지 원하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다시 설계하신 '플랜 b'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되어야 할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하느님은 여전히 ​​사람이 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프랑수아 드 살의 심오한 신념입니다. 더욱이 육화는 역사적일 뿐 아니라 연속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인격적인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순수하고 거저 주시는 개입을 통해 우리 역사 안에 육화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도직 활동과 사명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려 자기 생명을 바치신 분을 본받아 충만한 의미를 지닙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바쳐 사랑하면서, 프랑수아 드 살이 ‘내리사랑’이라고 부른 그 겸손으로 다른 이들과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작은 이들을 사랑하고 높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춥니다. 이것이 ‘황홀경’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와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는 것과 같은 섬김의 자세로(요한 13) 다른 이를 만나려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주님 말씀의 빛으로 그리고 프랑수아 드 살의 좋은 본보기에 따라 가난하고 버림받고 위기에 처한 젊은이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표현, 즉 돈 보스코의 부성을 읽도록 합시다.

우리의 살레시오 영성에서 신심과 영적 생활은 사도직 활동 및 자애의 실천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돈 보스코는 자기 아이들을 위한 교육 및 양성 센터가 성당과 같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발독코의 경우처럼 그리고 세상 다른 모든 곳처럼 가장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집을 말합니다.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마당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이끄는 참된 신심이 완성되어 온전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돈 보스코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젊은이를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길 원했습니다. 이는 우리 삶이 지닌 살레시안 특징이고 돈 보스코 가족을 위한 지속적인 도전입니다.



  1. 영적 지도의 필요성:

그러니까 “그들이 굳은 신념을 가지고 성숙하도록 동반합니다.”


살레시오 가족은 프랑수아 드 살과 돈 보스코가 각자의 시대에 발전시킨 동반의 예술을 계속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살레시안 교육학 및 교육 체계를 통한 사목활동, 영적 지도 활동, 즉 동반은 교회 내에 있었고 진정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어 왔으며 우리가 더 잘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이 도전을 위해 우리는 프랑수아 드 살에게서 물려받은 살레시안 원칙인 선함, 친절, 인내, 경청, 기다림을 실천합니다.

모든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그들의 여정을 도와줄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드 살이 많은 사람에게 제공한 영적 지도는 돈 보스코가 자기 아이들에게 한 것과 같은, 그들이 처한 삶의 상태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적 환경을 통해 또는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그들 각자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돈 보스코가 ‘귀엣말’을 창안한 것은 그냥 된 일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성화와 성장을 위한 개인적인 여정을 제안해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꿈꾸신’ 것에 도달하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이 활동을 성찰해보면 그 개별적 동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심화하도록 격려합니다. 경청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여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귀중한 방법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관대하게 시간을 들이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약속, 다른 작업을 뒤로 미루고 환영하고, 경청하고, 제시하고, 안내하고, 제안하고, 동반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서거 400주년을 맞으며 우리는 젊은이들에 대한 이 단순하고 겸손한 봉사를 되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며, 경청하고 이해하고 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제안하신 계획을 삶에서 따르도록 도와주기 위해 우리의 시간을 바칠 때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가 보내는 인정과 중요성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의 방식으로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영성을 따르는 우리에게 있어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도록 돕는 일은 우리의 교육 및 복음화 성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 안에서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고, 성령께서 살레시오 카리스마를 돈 보스코를 통해 일으키시고 그의 수도 가족 안에 살아있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동반 사목활동의 이러한 차원에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에 대한 우리의 선호가 구체화하고 표현됩니다. 분명, 성 프랑수아 드 살이 동반했던 것과 동일한 문화적 환경이 아니며 같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삶에서, 젊은이의 삶에서, 우리 사명의 모든 수취인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일에 매겨진 중요성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의 삶, 그의 이야기, 그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다른 것을 제쳐둘 때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중요해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돈 보스코의 좌우명, “Da mihi animas, caetera tolle”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그에게 그랬듯이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급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살레시안 용어의 생동감 안에서 우리는 성 프랑수아 드 살이 그가 동반한 사람에게서 발생한 영적 우정을 경험한 것처럼, 많은 젊은이에게 ‘영혼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돈 보스코의 열망을 발견합니다. 돈 보스코는 프랑수아 드 살의 발자취를 따라 가장 평범한 상황이나 특별하고 어려운 순간이든 일상생활에서 모든 영적 삶의 중심인 하느님과 우정으로 젊은이들을 이끌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신뢰를 두고 있는 젊은이들의 친구이자 아버지로서 그들을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데려가고자 했습니다.


많은 아이가 자포자기에 빠져 그곳으로 다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밖에 누군가가 있어 이 아이들을 돌보고, 도와주고, 주일에 종교를 가르쳐준다면 그들이 파멸을 피하거나 적어도 감옥으로 다시 들어가는 아이들의 숫자를 줄일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나는 이 생각을 돈 카파소에게 전달했고 그의 조언과 그의 도움으로 그것을 수행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은총 없다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 되기에 그분께 결과를 맡겼습니다.41


신심생활입문에서 프랑수아 드 살은 인생길을 걸을 수 있도록 ‘영혼의 친구’를 찾으라고 제안하면서 어떠한 조건도 예시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입니다. 이것이 ‘살레시안 동반의 방식’ 입니다.42


청년 토비아가 아버지 토빗에게서 메디아의 라게스로 가라는 지시를 받자 “메디아로 가려면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같이 가거라.”라고 말했습니다. 필로테아님, 나도 그대에게 이와 똑같은 말을 하겠습니다. 그대가 신심생활을 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대를 지도해 줄 거룩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신심이 깊은 예수의 테레사 성녀가 말한 것처럼,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직접 실천하고 권해 온 겸손과 순명의 길을 걷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43


우리의 여정을 동반하는 ‘영혼의 친구’를 구하는 것도 이 살레시안 400주년의 아름다운 결실이 될 것입니다. 돈 보스코는 이를 매우 깊이 고려하였고 무조건적인 환영, 환경 및 현존에 대한 배려, 우정, 정감, 신뢰, 각 사람의 선익 추구, 우리의 고유 여정에서 우리를 동반하도록 배치된 사람을 통한 하느님의 뜻 경청 등으로 이를 구체화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 특히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동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6년 동안 나를 인도했던 돈 카파소는 나의 영적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내가 뭔가 잘한 일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내 삶의 모든 결심, 모든 연구와 모든 행동을 그분 손에 맡긴 이 합당한 성직자 덕분입니다.44


프랑수아 드 살은 신심생활입문에서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 사람은 하늘에서 그대에게 보낸 천사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대는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 지식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대를 사랑하시어 그대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지도를 그에게 맡기시고 그를 당신의 중재자로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를 하느님 나라에 길을 가르쳐 주려고 내려온 천사로 알고 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며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그대의 모든 행위를 고백하고 진실한 마음을 열어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그대의 장점을 발견하여 그것을 잘 발휘할 수 있게 해 주고 그대의 결정을 올바르게 고쳐 줄 것입니다. 또한 그대가 곤경에 놓일 때 그대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해 줄 것이며 그대가 바라던 바를 이룩했을 때 자만하지 않도록 주의를 줄 것입니다. 그대는 그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딸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처럼 그를 신뢰하고 아들이 어머니를 믿는 것처럼 그를 존경 하십시오. 그대와 그대 영적 지도자의 우정은 견고하고 달콤하며 거룩하고 신적이며 영적인 여야 합니다.45


토리노 사제학교의 기간이 끝나갈 무렵, 돈 보스코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도해주기를 바라며, 자신을 가장 잘 알고 또 잘 인도할 수 있는 사람들인 돈 카파소에게 그 판단을 맡겼습니다. 그와 짧은 대화에서 프랑수아 드 살이 무관심, 솔직한 탐구 및 동반에서의 순명 등에 관해 가르침과 어떻게 완전하게 동화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한 제안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먼저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돈 카파소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신부님은 공부 과정을 마치고 일하러 갈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추수할 것이 풍부합니다. 신부님의 마음을 끄는 어떤 일이 있나요?”

제게 권하시는 일을 하겠습니다.”

세 군데 자리가 있습니다. 아스티 부틸리에라의 보좌신부, 사제학교의 윤리 과정, 쉼터 곁에 있는 작은 병원의 지도신부. ,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신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어디 한 군데 다른 것보다 더 끌리는 곳이 없습니까?”

제 마음이 끌리기는 청소년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부님이 저를 위해서 원하시는 것을 하지요. 신부님의 권고 속에 주님의 뜻이 있음을 압니다.”

지금, 이 순간 신부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이 순간 제 마음은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많은 아이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몇 주 휴가를 가세요. 돌아오면 할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휴가가 끝난 후 돈 카파소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주를 보냈다. 나도 그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왜 묻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제 생각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신부님의 판단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짐을 싸서 보렐 신부님에게 가십시오. 이제 신부님은 상 필로메나 병원의 지도신부를 맡을 것입니다. 또한 리푸지오에서도 일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신부님의 손에 청소년을 위한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이 권고는 내 경향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병원의 지도신부와 400명이 넘는 시설에서 소녀들에게 가르치고 강론하고 고해성사를 주는 일은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바로 확인했듯이, 하늘이 바라는 것이었다.46


동반과 관련된 프랑수아 드 살의 영성 안에서 우리의 교육방식은 삶의 내면을 조명하고 인도하며, 하느님과 관계를 생성하는 교육적 우정을 통해 타인을 짊어지는 ‘영적 신비’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는 피상적이지 않고 각자의 여정에 동반하여 하느님 사랑으로 이끄는 능력인 우호적이고 유쾌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는 삶의 방식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또한, 살레시안 동반은 예방 체계와 사목적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의 고유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47



  1. 모든 것을 사랑”으로 살기까지:

신앙 안에서 인간 성숙의 예민한 과정을 서서히 책임져 나가도록” 한다.


(프랑수아 드 살의) 살레시안 영성 전체를 관통하는 요소는 기도에 부여하는 큰 가치입니다. 나는 이 해설서에서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 신뢰의 근본적인 태도, 섭리의 손길에 의탁, 우리 안에 ‘내적 성지’가 있다는 인식, 하느님과 우정을 길러야 함,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늘 도움을 주시는 하느님의 선하심 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프랑수아 드 살의 사목적 열성, 모든 사람에 대한 인내, 선함, 낙관주의,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려는 열망 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계의 모든 열매는 동시에 심오하고 단순하며 일상적이고 참된 우정과 같습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삶의 중심인 그의 마음과 성심 사이의 관계가 식지 않도록 그가 수행하는 진전과 수양을 통한 하느님 사랑의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프랑수아 드 살에게 있어 하느님과 소통인 기도란 주님의 마음에 말을 거는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는 육화된 영성의 기도 형태입니다. 하느님은 단지 사람 마음의 하느님일 뿐 아니라 ‘사람 마음의 벗’이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발견하도록 하며,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마음에 맞출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이 계단의 꼭대기에서 우리를 향해 몸을 굽히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포도주보다 더 감미로운 당신의 거룩한 가슴을 맛보게 하시기에, 헤아릴 길 없는 선하심의 감미로움을 맛보고 느끼기 위해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께 드립시다.”48

성 프랑수아 드 살은 기도를 하느님이 주도하시는 마음의 대화로 여기고 이를 몸소 살았습니다.


친구로부터 받을 때보다 더 기분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가장 달콤한 명령이라도 강압적이고 잔인한 마음으로 강요하면 가혹한 것이 되고, 사랑에 의해 주어진다면 매우 순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사랑에서 비롯된 예속이기에 이것조차 왕족처럼 여겨졌습니다. 많은 사람은 약을 먹듯이 계명을 지킵니다. 즉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즐거움보다 죽음과 단죄를 더 두려워하여 계명을 지킵니다. 반대로 사랑에 빠진 마음은 계명을 사랑하고, 더 어려운 계명일수록 더 기껍고 즐거운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랑하는 하느님께 더 큰 기쁨을 드리고 큰 영광을 드리기 때문입니다.49


하느님 뜻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실천하는 것, 그것을 완수하기 위한 최상의 지원을 기도에서 찾는 것 등을 다루는 말입니다. 이 영성의 열쇠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사랑하는 제자처럼 우리의 심장 박동이 주님의 박동과 일치하게 하기 위해, 기도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많이 하는 것이기에 관상을 하기 위해, 그리고 계속해서 사랑할 힘을 회복하고 되찾으려는 방법으로 그분 안에서 쉬기 위해 우리가 그분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척도인 자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기에 사랑은 우리 기도의 척도입니다. 이는 성 프랑수아 드 살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기도’입니다.50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의 지속적인 기도가 되는 방식으로 사랑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사랑을 위한 모든 활동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자선 활동을 하는 사람, 병자 방문, 운동장에서의 어스턴트, 다른 이를 경청하기 위한 시간 할애, 도움이 필요한 이에 대한 환대 등을 실천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직무와 직업이 하느님과 일치를 방해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형태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프랑수아 드 살에 따르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 그들의 생각은 항상 서로를 향하게 됩니다.

돈 보스코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있어 매우 귀중한 주제인 하느님과 일치에 도달하도록 하는 단순한 수단은 돈 보스코께서 자기 아이들과 초기 살레시안들에게 제안하였던 신앙의 실천 안에서 발견됩니다. 현세적인 일에 매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짧은 멈춤, 화살기도와 선한 생각 또는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기억하는 순간을 찾도록 권고하십니다. 대화나 활동 중에도 항상 하느님 현존 가운데 있기에 참된 기도는 일상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성 프랑수아 드 살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하고 가르친 것 그대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했으며, 이 ‘능동적인 기도’를 다른 것보다 더 좋게 여겼습니다. 그가 과제나 임무에 파묻혔을 때 형식적인 기도를 위해 따로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지속적인 기도였습니다.51

신심생활입문에서 프랑수아 드 살은 예수의 테레사 성녀의 모범을 가까이 따르면서 기도의 단계를 제시합니다(통성기도, 마음기도, 관상 및 침묵 기도). 우리의 일상적인 수행을 위해 프랑수아 드 살이 말한 묵상의 가치를 심화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는 마치 시계가 멈추지 않도록 태엽을 감는 것처럼 기도 및 묵상이나 양심성찰 또는 다른 신심업으로 주님께 드리는 시간은 우리의 열성, 사도적 열의, 하느님께 속하려는 의지를 살아있게 합니다. 번잡함과 활동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하느님과 마음과 마음으로 대화하는 순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시계라도 아침저녁으로 태엽을 감아 주어야 하며, 적어도 1년에 한두 차례는 기계를 분해하여 그동안 쌓인 녹과 먼지를 제거하고, 잘 맞지 않거나 마모된 부품을 교체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앞에서 말한 대로 아침저녁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영성 상태를 점검하고 성찰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또한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은 자신의 마음을 분석하고 자신의 정신과 감정 등을 세밀하게 살펴보아 결함이 발견되면 곧바로 이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시계 수리공은 시계가 부드럽게 작동되게 하려고 톱니바퀴와 태엽 그 밖의 시계에 모든 부품에 기름을 칠하여 녹슬지 않게 합니다. 이처럼 신심 수행의 뜻을 둔 사람도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여 쇄신하고자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기름으로 도유해야 합니다. 이 점검 기간을 통해 그대는 그동안 소모된 그대의 영성적인 기력을 보충하게 되며, 냉담해진 그대 마음을 덥히고 선한 지향을 소생시키기며, 영성의 선행을 꽃으로 피어나게 할 것입니다.52


그 과정이 진실할 때 기도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은 기도로 이어집니다. 진정한 기도의 또 다른 가치는 단순하고, 성 프랑수아 드 살이 말했듯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따름의 동기를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가 하느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게 하며, 우리 안에 진정한 자유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이 어머니께로 향하며 그분의 모성애를 간청합시다.


짧고 간결하게 언급만 하겠지만, 신앙 안에서 인간적인 성장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서 본보기를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쟌느 샹탈 수녀와 함께 설립한 방문수녀회의 문장으로 두 개의 화살에 꿰뚫린 심장, 왕관처럼 씌워진 십자가, 가시 면류관으로 둘러싸였고 예수님과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 새겨진 심장을 제시했습니다. 프랑수아 드 살의 신학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훗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신학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매우 유사합니다. 마리아는 교회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은 모든 사람을 당신 아드님에게로 이끌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 드 살은 일치의 근원이신 성령을 받기 위해 제자들처럼 마리아와 함께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고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를 특별한 애정으로 존경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시므로 우리의 어머니도 되십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 매달리듯이 우리도 그분께 매달립시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사랑을 갈망하고 그분께 의지하며 그분의 덕을 본받고 진심으로 그분을, 자식이 부모를 섬기듯 공경하십시오.53


또한 모든 덕의 모범이신 마리아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입었다”로 표현되며, 당신 아드님처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분의 뜻에 맡기며 겸손의 길을 걷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녀가 마니피캇에서 여종의 겸손을 노래하는 것은 그녀가 하느님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어머니시고 인도자이신 동정녀께 드리는 살레시안 신심의 특징은 돈 보스코가 당신 아드님을 따르는 모든 형제의 위로자시고 원죄 없으시며 도움이신 마리아로서 그분께 드리는 신뢰에 호응합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협력하고, 프랑수아 드 살의 말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상태에 적합하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성모님에게서 찾을 수 있도록 마리아가 삶의 모든 상태를 거치게 하셨습니다.”54 우리가 마리아와 같은 마음을 지닐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성모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면서 하느님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뜻에 맡기므로 그분은 그녀 안에서 큰일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묵상은 자기 삶과 하느님께 드리는 “예!”를 통해 십자가 위에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를 관조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깨달음을 얻어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향해 마음을 열도록 초대합니다. 마리아 안에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완성된 참 운명, 곧 하느님의 마음을 봅니다.


하느님을 전하는 그리스도 인본주의자, 프랑수아 드 살


아마도 우리 세상 문화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프랑수아 드 살의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언론인의 주보성인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우리 시대에, 프랑수아 드 살은 부인할 수 없는 장단점을 지닌 언론인이라는 직업에 존엄성을 제공하는 근본 가치, 즉 진실 추구 및 그 전파에서 귀감이 됩니다.

1923년 교황 비오 11세가 프랑수아 드 살을 언론인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면서 언론인들의 주요 특징들을 제시했습니다. 우리 성인이 추구한 성화의 길은 다른 이들에게 그가 쓴 글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성덕에 이르는 확실하고 단순한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프랑수아 드 살이 했던 것처럼 성덕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시민 삶의 모든 직분이나 조건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신앙과 종교의 내용을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유쾌한 언어로 전달하는 방법을 아는 것을 수반합니다. 가능한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진리를 전하는 이것이 살레시안 자질이며 특징입니다. 복음의 선포가 모든 사람에게 도달하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능력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이러한 열망은 그가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직접 설파할 강론대가 없었을 때, 공공장소 벽에 걸어두거나 대문 틈 아래로 밀어 넣은 전단지를 생각해낸 것처럼 비할 데 없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매체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간단하고 자유롭고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자신을 현존하게 했습니다.

비오 11세는 프랑수아 드 살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는 회칙에서 현대세계에 여전히 유효하며 올바르고 전문적이며 정직한 행동의 모델로 고려해볼 만한 기본 원칙들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엄한 기념일(프랑수아 드 살 서거 300주년)을 맞아 신문이나 다른 저작물의 출판을 통해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설명하고 촉진하고 옹호하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큰 결실을 얻게 되길 희망합니다. 그들은 토론에서 절제와 사랑이 결합한 프랑수아의 고유한 활력을 모방하고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그분은 자신의 본보기를 통해 그들에게 따라야 할 행실을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최선을 다해 가톨릭 교의를 연구하고 가능한 한 깨우쳐야 합니다. 그들은 진실이 결핍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적의 공격을 피한다는 구실로 진실을 축소하거나 은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과 같은 형태와 우아함을 유지하고, 독자가 진실을 즐길 수 있도록 명쾌함(명확성, 투명성, 명료성)과 단어의 정렬 등으로 생각을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적대자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잘못을 논박하고 무뢰한의 정직하지 못함에 저항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로움으로 활력을 얻고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감동됨을 알게 하는 방식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드 살이 사도좌의 공개적이고 엄숙한 문서를 통해 가톨릭 작가들의 주보성인으로 제정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상서로울 때를 기회로 삼아 우리는 사도적 권위로 이 회칙을 통해 제네바의 주교이자 교회의 박사인 성 프랑수아 드 살을, 그에 반대되는 여하한 것이 있더라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의 천상 주보성인으로 제정 또는 확인하며 이를 선언합니다.55


여기에서 우리는 진리와 진리의 선언을 위한, 선함과 감미로움이라는 살레시안 스타일을 위한, 단순한 선포를 위한, 항상 각 개인의 선익을 추구하며 모든 사람에게 진리의 선언이 도달하게 하는 바른 의지를 위한 소중한 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의 알림과 선포는 우리가 방금 말한 것에 외에도, 프랑수아 드 살이 그것에 충실했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포함합니다. 제네바의 주교로서 그는 항상 하느님 백성의 복음화와 무엇보다도 교리 교육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돈 보스코의 가족으로서 이 카리스마를 잃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실천되도록 전달하는 것은 우리 카리스마의 일부입니다. 살레시오회와 살레시오 가족은 단순한 교리교육에서 태어났습니다. 교회는 최근에 교리교사직을 설립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복음화 차원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돈 보스코 역시 당시 가능한 매체를 사용하여 40년 동안 318권의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 역시 프랑수아 드 살처럼 좋은 말 또는 영양가 높은 독서가 선한 일을 크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떠한 노력이든 누군가의 선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의도는 늘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 하느님 사랑이 주는 구원과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그 친절의 각별한 실천과 사목적 열정을 통해, 방문하고 만나려고 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찾고 격려하면서 실현했습니다. 쟌느 드 샹탈과 함께 방문수도회를 설립한 것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을 만나러 가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제안, ‘밖으로 나가는 교회’의 실천을 당시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해준 것입니다.

주중에 아이들의 직장을 방문하는 돈 보스코의 이미지, 본당 신자들을 방문하여 집 대문 틈 사이로 믿음과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를 밀어 넣는 프랑수아 드 살의 이미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동정 마리아의 영감을 주는 이미지 등은 우리를 격려하고 열광하게 하며, 거의 도전을 제시합니다.



결론


살레시오 가족으로서 우리도 ‘방문의 카리스마’를 표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있는 공간과 장소를 찾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절한 한마디, 만남, 존경으로 가득 찬 시선은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향한 지평을 열어 줄 것입니다.

요컨대, 젊은이들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그들을 만나기 위해 나가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가장 독특한 특성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돈 보스코의 의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젊은이와 함께 있겠다는 의지가 인도하는 곳이 어디이든 ‘현존의 살레시안 성사’를 참되게 살고 ‘애덕의 작은 실천’을 수행하면서 우리의 ‘발독코 선택’인 살레시안 정신을 전파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태어났고, 프랑수아 드 살 안에서 자신의 모델, 유사한 정신, 일종의 쌍둥이 영혼을 발견한 돈 보스코를 우리는 이렇게 따르고자 합니다.

올해 우리가 거행하는 이 기념이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정신을 담고 있는 돈 보스코의 살레시안 카리스마를 통해 우리가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위한 헌신의 영역에서 계속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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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나는 이 해설을 성 프랑수아 드 살, 돈 보스코,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는 내가 쓴 몇 가지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이것들은 아마도 우리가 스트렌나 해설을 읽은 후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우리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것들이겠습니다. 그중에서도 나는 다음의 것들을 모아봅니다.


  •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자애와 감미로움이 모든 면에서 저를 인도해 주시기를 빕니다.

  • 억지로는 아무것도…”는 아름다운 제안이며, 그것을 각자 삶의 소중한 규칙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 가톨릭 개혁의 주창자이자 미지근한 신앙에 맞서는 교육을 받은, 트렌토공의회를 따르는 주교로서 그는 힘의 길이 아니라 마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태도를 묵상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 하느님의 은총은 강한 힘으로 움직이지만, 강요나 억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으로, 완력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사랑하는 것으로 움직이십니다.

  • 성 프랑수아 드 살이 즐겨 말했듯이 하느님께서는 친절한 초대로, 때로는 성소나 부르심으로, 때로는 친구의 목소리로 영감을 주거나 초대하듯이 또는 늘 앞서시기에 ‘예방’처럼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문을 두드리시고 열리기를 기다리십니다.

  •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 없이는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지 않는 곳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 강력하지만 폭력적이지 않은 하느님 매력의 힘은 그 매력의 감미로움 안에 있습니다.

  • 우리가 말하는 이 하느님 사랑은 살레시안 신비이며, 타인을 향한 사랑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요구합니다.

  • 인간, 젊은이, 모든 사람, 우리 모두의 존재 안에 하느님을 필요로 하고, 하느님을 원하며, ‘하느님께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 하느님은 오직 당신께서 선택하신 순간에 당신만 아시는 방식으로 각 개인에게 현존하시고 또 현존하시려 합니다.

  • 성 프랑수아 드 살과 돈 보스코는 일상생활을, 자신들이 받았으며 되갚아 드린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 성인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삶에 가깝게, 삶을 하나님과 관계에 가깝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애정을 담아 말씀하신 ‘옆집 성인’ 또는 ‘성덕의 보편성’이라는 제안입니다. “저는 참을성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성인을 만나는 것이 기쁩니다. 큰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 가운데, 집으로 빵을 벌어오기 위해 일하는 남녀들 가운데, 병자들 가운데, 계속 미소 짓는 연로한 수녀들 가운데서 말입니다. 날마다 앞으로 나가기 위한 이 항구함 속에서 나는 전투 중인 교회의 성덕을 봅니다. 이것은 매우 자주 만나는 우리 가까이에 사는 ‘옆집’ 성인이며 하느님 현존의 반영이거나 혹은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성덕의 보편성’입니다.”

  •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 뜻의 성취는 ‘자격이 없다’는 느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대한 희망으로 이뤄집니다. 이것이 살레시안 낙관주의입니다.

  • 프랑수아 드 살은 하느님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 주님 제가 영원 속에서 당신을 사랑하도록 허락받지 못한다면 적어도 이승에서라도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나의 하느님, 항상 당신의 자비에 희망을 두겠습니다.

  • 프랑수아 드 살의 위기는 그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즉 하느님 사랑에 빠진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프랑수아 드 살 영성의 중심이며, 이는 돈 보스코의 모든 가족이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 하느님의 위로에서 위로의 하느님으로, 열정에서 참된 사랑으로 옮겨가는 여정이 필요합니다.

  •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타인을 위한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사랑하도록 이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고 두려움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성 아고스티노가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 불안하다.”56 말했다면, 프랑수아 드 살의 생각에 따른 우리는 폰 발타사르와 함께 “오 하느님, 당신의 마음은 우리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 불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돈 보스코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젊은이를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길 원했습니다. 이는 우리 삶의 살레시안적 특징이고 돈 보스코 가족을 위한 지속적인 도전입니다.

  • 그의 기도 생활은 하느님 사랑의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 프랑수아 드 살에게 있어 하느님과 소통인 기도는 주님의 마음에 말을 거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는 육화된 영성의 기도 형태입니다.

  •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발견하도록 하며,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마음에 맞출 수 있게 합니다.

  •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기에 사랑은 우리 기도의 척도입니다.

  • 이는 ‘삶의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의 지속적인 기도가 되는 방식으로 사랑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사랑을 위한 모든 활동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 번잡함과 활동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하느님과 마음과 마음으로 대화하는 순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우리가 마리아와 같은 마음을 지닐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성모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면서 하느님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뜻에 맡기므로 그분은 그녀 안에서 큰일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1편지 CCXXXIV. 샹탈 후작부인에게, OEA XII, 359. 16041014일자 편지에서 “내가 명령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못 할지라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시오. 굵게 쓰여진 우리 순종의 일방적인 규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하고, 아무 것도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불복종을 무서워 하기보다는 순종을 더 사랑 해야 합니다. 나는 그대에게 자유의 정신을 남겨줍니다. 순종을 배제하는 자유의 정신이 아니라(그것은 육체의 자유 이니까요), 강제와 소심증 또는 서두름을 배제하는 자유의 정신을 말입니다. 그대가 순종과 복종을 매우 사랑한다면, 그대신 신심 행위를 그만둘 정당하거나 자비로운 기회가 올 때에 그것이 그대에게 일정에 순종이 되고 그 규칙 위반이 사랑으로 보충 되기를 바랍니다.”

2 사제 서품 전 피정에서 젊은 돈 보스코가 다진 네 번째 결심, in ISS, Fonti salesiane. 1. Don Bosco e la sua opera. Raccolta antologica, LAS, Roma 2014, 971.

3 G. Bosco, 오라토리오 회상, in ISS, Fonti salesiane. 1. Don Bosco e la sua opera. Raccolta antologica, LAS, Roma 2014, 1176.

4 잔느 드 샹탈에게 보내는 편지(OEA XIV, 111).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인용문에서 많은 저자들이 동일한 출처를 인용하고 때로는 다른 명명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버전이나 언어에서 더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원본의 권과 장을 함께 인용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참고문헌은 OEA(Oeuvres Edition Annecy, 이 총서의 권과 페이지를 나타냄)라는 이니셜로 사용되는 성 프랑수아 드 살 총서다. 이는 그가 손으로 쓴 자료들과 안시의 방문수녀회 첫 수녀들이 역은 원본을 기반으로 한 27권의 완전한 판이다. 때로는 2차 출처만 인용하겠다. 독자들의 참고 및 독서의 즐거움을 위해 성 프랑수아의 다수 작품이 다양한 디지털 형식으로 제공되는 멋진 디지털 도서관도 있다: https://www.donboscosanto.eu/francesco_di_sales/index-fr.php

5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Un progetto di formazione integrale, LAS, Roma 2021, 76-77 참조.

6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76. 참조. 온전한 인용문: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아무도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그분의 뜻을 너무나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분은 창조 때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육화를 통해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취하셨습니다. 신애론, VIII, 4

7 성 아구스티노의 개종에 관한 강론(OEA IX, 335).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76에서 인용 참조.

8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140 참조.

9 신애론, II, 12: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따르든지 거부하든지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우리를 온전한 자유에 맡기셨다.

10 F. Vincent, Saint François de Sales, directeur d'âmes. L'éducation de la volonté, 264 (nota1).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140에 인용 참조

11 신애론, I, 18 참조: “만일 우리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할 수 없다면, 사랑하려는 그 자연적 경향은 왜 있겠는가? 본성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극하면 무익하지 않겠느냐? 만일 그 값진 물을 우리가 마실 수 없도록 하셨다면 왜 우리에게 그물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하셨겠는가? 테오티모여, 하느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착하게 대하시는고!”

12 사목헌장, 22 참조. “실제로,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 […] 그리스도께서 만인을 위하여 죽으심과(32)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32]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13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주석가들은 이 원칙의 깊이를 표현하는 구절이 성 프랑수아 드 살의 말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14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145 참조.

15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130 참조. nota 1: 15863월의 철학 과정 노트에 그는 성 아구스티노의 라틴어 문구를 큰 활자로 적어넣었다. “주님, 우리를 당신께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 돌아갈 때까지 우리 마음은 불안합니다.” (OEA XXII, 7). 그것은 또한 1594년의 강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OEA VII, 189).

16 신심생활입문, I, 1.

17 신심생활입문, I, 3.

18 Joseph Malègue, Pierres noires. Les classes moyennes du Salut, París 1958,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인용(7)

19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291

20 벨리 주교이자 프랑수아 드 살의 친구인 장 피에르 카뮈 주교는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정신에 관한 그의 책에서 영혼을 위한 열성을 다루면서 성인의 물질적 재화로부터의 초연과 순전한 사목적 관심을 칭찬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의 입술은 주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da mihi animas, coetera tolle" 이 다작 작가에게 있어 이 말은 항상 성인의 모든 사업을 이끌었던 열렬한 사목적 열정을 나타낸다. 4. 참조. J. P. Camus, El espiritu de San Francisco de Sales II, Balmes, Barcelona 1947, p. 339. E. Alburquerque, Don Bosco y sus amistades espirituales, CCS, Madrid 2021, San Francisco de Sales에서 인용. Afinidad y convergencia espiritual, p. 11-27.

21 요한 보스코, 성 프란치스코 디 살레스 오라토리오의 학생 도미니코 사비오의 생애, in ISS, Fonti salesiane. 1. Don Bosco e la sua opera. Raccolta antologica, LAS, Roma 2014, 1059.

22 신심생활입문 I, 3.

23 서한 308. 샹탈 후작부인에게, 160598. Consultado en la edición digital, p. 83/321. OEA XIII, 92. Citado en: Cfr. Eunan McDonnell, God Desires You, DeSales Resource Center, Stella Niagra, NY, 2008, p.56.

24 예를 들어: “많은 전기 작가들은 그가 화를 잘 내며 강하고 참을성이 없는 대부분의 사브와족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머리에 분노가 끓어올랐고, 무례한 말이나 경솔한 행동에 분개하고, 무질서에 짜증을 내며, 안색이 변하고, 모순 앞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이러한 본성에 맞서 끊임없는 투쟁, 경계, 금욕적 노력, 개인적인 숙달 및 은총의 도움은 그를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형상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온유한 사람으로 이끌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랑수아 드 살이 부드러움을 타고났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투쟁에 승리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참조 E. Alburquerque, Espíritu y espiritualidad salesiana, 사설 CCS, Madrid 20217, 105-12.

25 Cfr. Eunan McDonnell, God Desires You, p.56-67.

26 비오 11, 회칙 Rerum Omnium Perturbationem, 1923126.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선종 300주년을 위한 회칙을 쓰려고 했다. 1923년에 그의 후계자인 비오 11세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다가가는 거룩함을 강조하는 회칙을 발표했습니다. 마음의 온유함이 빛났고, 이것이 그의 특징적인 덕이라고 할 수 있다.

27 G. Bosco, 로마에서 토리노-발도코 오라토리오의 살레시오 공동체에 보낸 편지, in ISS, Fonti salesiane. 1. Don Bosco e la sua opera. Raccolta antologica, LAS, Roma 2014, 451.

28 G. Bosco, 오라토리오 회상, in Istituto Storico Salesiano, Fonti salesiane. 1. Don Bosco e la sua opera. Raccolta antologica, LAS, Roma 2014, 1176-1177.

29 참조 J.-P. Camus, L'Esprit du bienheureux François de Sales, partie I, section 3.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97에서 인용. 쟌 피에르 카뮤 주교는 그의 성격에 대해 말하면서 그의 반대자들과 적대자들 앞에서 사용한 표현을 강조하여 그의 겸손한 성품과 온유함을 잘 반영한다. 그는 형제들, 준비된 교회의 아들들, 구원에 대한 동일한 희마을 품는 형제들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항상 제네바 주교좌를 “내 가련한” 또는 “나의 사랑하는” 제네바라고 부르며 연민과 사랑을 표현했다.

30 A. Giraudo, oc p. 3-5 참조. “[…] 우리는 세 가지 제4서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상황에 따라: 선함, , 예방체계 […]” (p. 70). Cfr. el comentario de A. Alburquerque, Espíritu y espiritualidad salesiana, “El cuarto voto salesiano” y en nota: A. Caviglia, Conferenze sullo Spirito Salesiano, Istituto Internazionale Don Bosco, Torino 1953, p. 107.

31 G. Bosco, 로마에서 토리노-발도코 오라토리오의 살레시오 공동체에 보낸 편지, in ISS, Fonti salesiane. 1. Don Bosco e la sua opera. Raccolta antologica, LAS, Roma 2014, 444-445.

32 Cfr. Papa Francesco, 28차 총회에 보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메시지, ACG 433, “현대 청소년을 위한 살레시안은?” 성 프란치스코 디 살레스회의 총회 후 성찰, Roma 2020.

33 살레시오 가족 신원헌장, n. 32.

34 Eunan McDonnell, God Desires You, p. 57 참조.

35 OEA XXII, 19-20.

36Eunan McDonnell, God Desires You, p.18 참조.

37 신애론, X, 1

38 Agostino di Ippona, 고백록, I, 1.

39 HU The Heart of the World, Ignatius Press, 1979, Eunan McDonnell, God Desires You에 인용됨, p.30 참조.

40 Benedetto XVI,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2.

41 G. Bosco, 오라토리오 회상, in ISS, Fonti salesiane. 1. Don Bosco e la sua opera. Raccolta antologica, LAS, Roma 2014, 1234-1235.

42 동반에 관한 연구는 최근 몇 년 동안 다시 관심을 받았고 향후 연구에 대한 흥미로운 제안을 제시하는 작품이 매우 많다. 우리의 살레시오 범위 안에서 보면, cfr. Fabio Attard – Miguel Angel García (a cura di), L'accompagnamento spirituales. Itinerario pedagógico spirituale in chiave salesiana al servicio dei giovani, Elledici, Torino 2014, y también CRESPO-BUEIS, J. (coord.), Acompañar a los jóvenes, CCS, Madrid, 2021

43 신심생활입문, I, 4

44 Istituto Storico Salesiano, Fonti salesiane. 1. Don Bosco e la sua opera. Raccolta antologica, LAS, Roma 2014, documento n. 309: “memorie dell'Oratorio di S. Francesco di Sales dal 1815 al 1855”, p. 1234 참조.

45 신심생활입문, I. 4

46 Istituto Storico Salesiano, Fonti salesiane. 1. Don Bosco e la sua opera. Raccolta antologica, LAS, Roma 2014, documento n. 309 참조: “memorie dell'Oratorio di S. Francesco di Sales dal 1815 al 1855”, p. 1240. (Traducción española (José Manuel Prellezo): San Juan Bosco, Memorias del Oratorio, CCS, Madrid, 2003, p. 95-97).

47 Aldo Giraudo, “Direzione spirituale in san Giovanni Bosco. Connotazioni peculiari della direzione spirituale offerta da don Bosco ai giovani”, en: Fabio Attard – Miguel Angel García (a cura di), L'accompagnamento spirituales. Itinerario pedagogico spirituale in chiave salesiana al servicio dei giovani, Elledici, Torino 2014, 160 참조. “돈 보스코가 모델입니다. 그는 자신을 교육자, 고해 신부, 영적 지도자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정이 담긴 수용, 친절, 관대함 및 개인에 대한 보살핌, 젊은이들이 자신감과 신뢰를 표현하는 정감, 자발적이고 진심 어린 순명으로 양성과정에 협력 등을 강조합니다.”

48 Francesco di Sales, 신애론, oc,XI,12

49 Ibid, VIII, 5.

50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160 참조

51 M. Wirth, San Francesco di Sales, 160 참조. En nota, refiere este hecho en la carta de madre de Chantal a dom Jean de Saint-François, en Jeanne-Françoise Frémyot de Chantal, Correspondance, t. II, 305.

52 Francesco di Sales, 신심생활입문, oc V, 1 참조.

53 신심생활입문, II,16

54 OEA IX, 342. Citado en Eunan McDonnell, God Desires You, p.134.

55 Pio XI, 회칙 Rerum Omnium Perturbationem, 26 enero 1923. 이탈릭체는 강조를 위해 본인이 한 것이다.

56 Agostino di Ippona, 고백록, I,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