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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보스꼬의 초년시절
1815 ― 1841
또리노에서의 자신의 성과에 대한 기록물인(오라또리오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하면서 돈보스꼬는 서두에 자신의 소년시절 이야기를 써넣음으로써 그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소년기는 살레시안적 삶의 씨앗들이 농촌의 토양 속에서 그리고 지방도시와의 접촉 속에서 힘을 길러 가고 있던 시기였다. 돈보스꼬는 26살 때까지의 자신의 삶 안에서 훗날 그를 따르게 된 이들에게 감화를 주게 된 뚜렷한 모습들을 점차 형성해 나갔다.
1815년의 이태리
요한 멜키올 보스꼬는 1815년 8월 16일에 태어났다. 요한 보스꼬가 태어난 해인 1815년은 유럽과 이태리의 역사에 있어서 전환점을 이루고 있는 해였다.
그 해 6월 18일에 있었던 워터루 전투로 말미암아 나폴레옹의 전설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황제가 사라지자 이태리는 다시 열강의 편의에 따른 단순한 지리적 표현으로 전락되었다. 옛 통치자들에게 국권이 반환된 대신 이태리는 오스트리아의 심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 2세는 롬바르디와 베니스를 지배하였으며, 파르마와 모데나 및 투스카니의 대표자로 행세했다. 그는 스스로를 양시칠리아 왕국과 교황형 (비오 7세가 장기간의 억류 후에 소유권을 탈환함) 및 사보이 왕가 (빅토르 엠마누엘 1세때 또리노에서 재지배함) 의 보호자라 칭했다.
1815년은 새 시대에 대한 종지부이자, 시대의 조류를 역류시켜 혁명 전의 구질서로 돌아 가고자 하는 노력의 출발점이었다. 열강들은 신성동맹을 톡해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으며,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의 원리 및 그 원리의 지지자들에 대항키로 했다. 왕은 교회의 동맹자로서 재건에 필요 불가결한 존재로 생각되었다.
한편, 그에 맞서는 사상이 강력히 자라났다. 어찌됐건 간에 이태리에서는 프랑스라는 존재는 열렬히 환영받은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달갑지 않은 존재라고만 여겨진 것도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이태리에 안전을 가져다 주었으며, 삶에 대한 가치와 나아가 삶의 위대성을 심어 주었다. 이리하여 국가통일에 대한 강조와 역설이 애국심을 조장시키고 있던 반면, 사람들은 자유 사상과 시민 각 개인의 권리 의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1815년 이후의 이태리의 운명은 자유와 애국심을 향해 전개될 양상을 띠고 있었다. 중산층은 새로운 사상에 특히 민감했다.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자 했으며 경제성장을 원하였고 또 사람들이 혁명사상에 열광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전체 군주를 개심시키거나 전복시키고자 했으며, 프리메이슨 조합이나 카르보나리당과 같은 비밀 결사조직들과 쇄신을 촉진시켜줄 다른 공화적 반성직자적 혁명적 요소들을 끌어 들이려고 했다.
피에몬태
1815년에는 새로운 사상들이 아직 정치적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 피에몬테에서는 군주제와 자유주의가 서로 팽팽히 맞서 있었다. 한편, 사보이 왕가는 국가통일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역량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 통치자들이 1814년 또리노토 귀환하는 것을 환영했으며, 사르드니아는 중흥을 맞이했다. 사르드니아는 니스와 사보이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인구 400만에 달하는 재노아를 합병했다. 빅토리노 엠마누엘 1세의 지배권은 전통적으로 군주정을 지지해 온 귀족과 성직계급 및 군인에 의해 유지 되었다. 성직자들은 정권 초기에 축일을 부활시키고 독신 죄를 벌하며 교회 재산을 되돌려 주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등 그 맘에드는 조치들을 취해준 정권과 긴밀히 제휴했던 것 같다. 다행히 빅토리노 엠마누엘 1세는 1821년, 보다 자유로운 요소들을 위해 퇴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정부제도에 있어서 어떤 실제적인 개선이 이뤄진 것은 1848년에 가서야 가능했다.
가정과 시골의 작은 세계
이 복고시대 동안 요한 보스꼬는 피에몬테에서 자라났다. 그는 모리알도, 즉 아스띠의 싸스텔누오보 고구에서 태어났다. 더 정확히 말하지면, 몇몇 오막살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베끼촌에서 태어났다. 베끼는 또리노에서 겨우 2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당시의 피에몬테의 시골들은 수도 또리노와는 전혀 별개의 세계였다.
그의 아버지 프란치스꼬(1784―1817)에게는 전처 소생의 아들 안토니오(1809―1849)와 딸 대레사가 있었는데 대레사는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프란치스꼬는 말가리따 오끼에나(1786 ― 1856)와 재혼한 후 아들 둘을 더 얻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요셉(1813 ― 1862)이 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요한 (1815 ― 1888)이었다. 또한 프란치스꼬의 모친인 말가리따 주까 할머니도 계셨는데 그분은 돌아 가신 해인 1826년까지도 아주 정정하셨으며, 집안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일꾼도 둘 있었다.
보스꼬네 가족은 가난했지만 궁색스럽진 않았다. 그들에게는 조그마한 집 과 땅 몇마지기가 있었다. 하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선 아버지가 이웃 부잣집에 가서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를 여의다.
“하느님께서 그분의 자비로 우리 가족에게 큰 불행이 닥치는 것을 허락하셨을 대 나는 겨우 두 살도 채 안됐었다”는 말로써 돈보스꼬는 1817년 5월 11일에 일어났던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어느 날 프란치스꼬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일터에서 돌아와 차가운 지하 포도주 창고에 들어 갔다가 감기에 걸려 열이 오르더니 며칠 뒤에 죽어 버렸다. 그의 나이 서른 세상이었다. 요한 보스꼬는 아버지가 죽어 있는 방에서 자신을 데리고 나오면서 어머니가 들려 주셨던 말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 “불쌍한 우리 애가, 자 이리 온. 이제 네게는 아빠가 없단다”
다행히도 남은 가족에게는 총명하고 맘씨 고운 어머니 말가리따가 있었다. 성 요한 보스꼬의 모친은 침착한 성품과 분별력 및 돈독한 신앙심 등의 탁월한 자질들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골 여인의 가장 위대한 자질은 의욕과 결단력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소녀시절에 오스트리아 군인 몇 명이 말들에게 자리 발의 곡식을 뜯기자 그말들을 쫒아 버렸다 한다. 그녀는 겨우 스물 아홉 살에 과부가 되고 말았지만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해쳐 나갔다. 더욱이 그녀는 아이들을 거느린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했으며 잠을 적절히 줄이도록 가르쳤다. 완고한 안토니오에게는 매번 관응을 베풀었으며, 요한에게는 보호적이었고 인내로 왔다. 그녀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지만 고리문답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대해서는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막내 아들의 진로에 대해서 조금도 반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정에 어려움과 위기가 밀어닥쳤다. 복고 초기에 무서운 기근이 피에몬테를 휩쓸자 보스꼬네 가족은 물질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817년, 굶주린 군중이 E리노로 몰려갔을 때 베끼의 보스꼬 가족도 역시 아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겪으로 맏아들 안토니오가 의붓 어머니의 권위에 반항하고 또 두 의붓 동생들을 억누르려 했기 때문에 가정의 일체감과 조화가 깨지는 등 감정적 문제까지 겹쳤다. 격렬한 감정 폭발과 무례한 자폐증 등의 행동을 보였던 것으로 보아 안토니오는 양친의 죽음이라는 충격적 경험에 의해 쇼크를 받아 신경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안토니오와 막내 동생 요한과의 관계는 한 지붕 밑에서는 도저히 함께 살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공손하고 조용한 사랑스런 소년인 요셉은 전혀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어린시절
요한은 베끼라는 조그많고 한적한 마을에서 천진난만하게 자라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들일을 거들었다. 그는 옥수수단을 묶었으며 소와 양을 뜯기는 일을 도맡았다.
그는 시골 소년들 특히 요한 필리펠로와 또 장난감으로 함께 게임을 하거나 두려움과 자랑거리를 함께 나누었던 세콘도 마타와 친하게 지냈다. 덫으로 새를 잡거나 둥지에서 새를 꺼내는 일에서는 그를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재치있고 튼튼했던 그는 이웃 장터에서 본 광대나 곡예사를 즐겨 흉내냈다. 그는 훗날 자신이 자기 또래나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소년들 뜸바구니에서 대장이 될 수 있었던 방법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의 성격상의 주된 특징들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요한은 빈틈이 없었으며, 상상력이 풍부했고, 사람들과 또 일의 긍정적 면을 재빨리 알아챘다. 그는 매우 예민했으며 곧잘 흥분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기르던 찌르레기가 죽자 몹시 상심했던 적도 있었다. 르몽 신부는 돈보스꼬의 신중한 정신자세와 자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의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돈보스꼬는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으며 상대편에 맞게 적절히 행동하기 위해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사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겨우 다섯 살 때 그는 “소년들을 한데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그의 여러 재능들은 특별한 이 열망에 성공을 가져다 주었으며, 요한은 본당신부나 자기어머니로부터 배운 고리들을 친구들에게 전해 주었다.
돈보스꼬가 말한 날짜들이 맞는 것이라면, 돈보스꼬가 아홉 살이나 열 살이 되었을 때 쯤에 기묘한 사건이 일어났다. 50년이 지난 뒤 살레시오회의 창립자는 (오라또리에 관한 회고록)속에서 결코 잊은 적이 없었던 자신의 소년시절의 꿈을 자세하게 애기하고 있다. 그는 사나운 짐승들로 화한 소년들의 무리가 순한 양때로 변하는 것 을 보았다. 또한 욕설과 손찌검으로 다른 아이들의 잘못을 고쳐 보려는 헛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온유와 사랑”을 일깨워 준 고귀한 사람을 만났다. 꿈의 둘째 부분에서는 처음의 비밀스런 사람의 어머니인 “눈부신 옷을 입은 어떤 부인”이 나타났다. 그 부인은 요한에게 그녀의 “자녀들”들 돌보아 달라고 맡기면서 “겸손하고,강건하며,힘차게”지냄으로써 스스로를 준비하라고 부탁했다. 꿈은 그분의 다음과 같은 말로써 끝을 맺는다: “때가 되면 너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돈보스꼬의 많은 꿈들 중에 첫 번째 것이다. 이 꿈을 계기로 돈보스꼬는 인생 전반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였다. 어린 소년이었기에 할머니의 말씀대로 꿈같은 것은 믿지 않기로 한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실은 그는 그 꿈을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보라는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초대라고 느꼈다.
이 꿈을 서술한 뒤에 돈보스꼬는 소년과 선생과 사도로서의 1인 3역의 경험에 대해 회고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친구들을 분별할 수 있었다. 어떤 아이들 바라보면 대게 그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내 친구들은 나에 대해 경탄하거나 또는 두려워했다. 그들은 나를 심판관이나 친구로 삶고자 했다. 나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결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없다” 돈보스꼬는 육순이 넘어서는 어린시절의 아주 흥미로왔던 성공담을 아주 상세하게 즐겨 이야기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열 살 혹은 열한살 때 이미 약 100여명의 군중을 압도할 수 있었다. 긴긴 겨울밤 요한은 이웃집 아이들에게 프랑스 왕들에 대한 이야기책을 읽어 주었으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요술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항상 신심이었다. 그에게는 기도보다 더 중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으며 놀이를 시작하거나 끝마칠 때에는 항상 묵주기도를 함께 바쳤다.
1826년에는 요한은 천 영성체를 했다. 우리는 아마 이 때 그가 처음으로 자기 어머니께 신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애기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배움에의 첫걸음
요한 보스꼬는 아이들을 매우 좋아했지만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은 그가 독서도 아주 좋아함을 금방 알았다. 독서는 그의 사명과도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정이 좋지 못했다. 베끼는 지방학교가 있는 까스뗄누오보로부터 3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1824년 말가리따는 집에서 좀더 가까이에 있는 카프릴리오의 라쿠아 신부의 학교에 요한을 입학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준비는 갈수록 점점 난폭해지는 안토니오의 성질에 부딪혀 그만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안토니오는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서 항상 미래의 위대한 일들을 생각하며 걸어 다니는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요한의 운동기술을 그의 시기심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불화가 심해지자 말가리따는 아토니오와 요한을 갈라놓는게 더 나을 것 같아 요한을 집에서 떠나 보냈다. 그가 14살가량 되었을 때의 일이니 아마 1828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요한은 몬쿠꼬 마을의 몰리아씨댁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에게는 이때가 가장 슬픈 시기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 시기에 대해선 언급하고 있지 않는데, 이는 아마 그의 어머니에 대한 배려였던 것 같다 그는 몰리아씨네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허락을 받아 여가시간에는 본당 사제에게 가서 공부를 배웠다. 1829년 11월에 그의 외삼촌 미카엘 오끼에나는 요한을 다른 곳에 살게 해 주었지만, 그와 큰형 안토니오와의 갈등은 여전히 계속됐다.
며칠 후, 그는 부띠그리에라라는 마을에서 열리고 있는 피정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리알도 본당에 새로 오신 요셉 갈로쏘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노인 사제는 뚜 강론을 각각 길게 인용하여 암기해 내는 소년의 천부적 재능을 즉시 알아 보고서 1829―30년에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요한이 이 선량하고 소박한 사제 ― 갈로쏘 신부는 오직 자신의 경력따위에만 관심을 가진 당시의 뭇 성직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와 함께 이제 막 안정을 누리기 시작했을 때인 1830년 11월 21일에 불행히도 갈로쏘 신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30년 한해는 좋게 끝을 맺었다. 보스꼬 가족은 유산을 분배하여 분가를 했는데 말가리따에게 돌아 온 몫―그녀의 침대와 부엌 살림 일부―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말가리따와 요셉은 베끼를 떠나 수쌈브리노로 이사했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제 끼에리 고등학교의 입학 준비 기간동안 까스땔누오보 지방학교에 자유로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이 열다섯살이나 열여섯살 쯤 되었을 무렵, 마침내 그의 삶은 원하던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없이 자라나고 배다른 형의 미움을 받고 또 가난으로 인해 고통 받는 등 불행에 의해 단련된 그는 더욱 더 강하고 현명하게 앞길을 헤쳐 나갔다. 한편 이 시절은 그에게 많은 보상을 안겨 주기도 했다. 바로 이 시절에 그는 강인한 여성의 손아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속에서 건전한 훈련을 받았으며, 거친 인생살이를 헤쳐나갈 능력을 얻었고, 최초의 사도적 성공들을 거두었으며, 그의 사명을 점차 인식했던 것이다.
끼에리의 학교에서 1831―1835
가스텔누오보에 있는 학교는 수준이 낮은 학교였기 때문에 요한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되는 그 기간 동안에 그가 세들어 살던 양복점 주인 로벨또씨로부터 옷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또한 “모리알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여러 친구들의 중심 인물이었다. “학업에 매진하기 위해 1831년 11월가지 그는 까스텔누오보에 있었다.
끼에리는 베끼와 또리노의 중간 쯤에 위치한 곳으로서 그곳에는 많은 고적이 있었다. 끼에리는 기껏 수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직물공들이 들끓는 조그만 읍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힘껏 배우려고 덤비는 호기심 많은 젊은이의 눈에는 이웃의 수도를 조금 축소해 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시골 면 정도의 생활조차 제대로 구경하지 못할 만큼 구석진 촌에서 자란이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강한 인상을 풍겼다!!
1831년 이태리 한쪽에서는 중대한 사건들이 일어나 나라 안이 발칵 뒤집혔다. 1830년에 파리에서 일어났던 혁명의 소요가 시골을 통해 각지에로 번져간 것이다. 이태리 중부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어 이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즉각적인 개입이 뒤따랏다. 그레고리 16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개혁을 시도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시는 즉각 퇴위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반도 전체에 걸쳐 정치적 자유와 국가 독립, 통일 등의 사상이 점차 지지를 얻었다.
새 왕 카알 알베르또의 진보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피에몬테에서는 공식적인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교육분야에서는 관용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교육제도와 학생들의 행동은 1822년 7월 23일에 발포 되었던 카알 펠릭스 왕의 포고령에 의해 엄중히 통제 되었다. 거기에는 방과 전후의 기도, 매일미사, 고백성사표, 선행중, 미사기간 기도서 지참 및 사용등의 종교적 의무 등이 상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당시의 끼에리의 학교들에서보다 더 종교적이며 성직자적인 제도들을 발견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돈보스꼬는 종교가 “교육의 근본전체”임을 유감스럽게 여기진 않았다.
요한의 학업 성적은 매우 좋았다. 그는 첫해(1831―1832)동안에 중등학교 과정을 빨리 마쳤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공백기간을 거의 매꿀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문법(1832―1833)과 인문학(1833―1834)과 수사학(1834―1835)의 정규과정을 밟았다. 요한은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는 고전에 아주 열성적이었으며 밤늦게까지 이탈리아와 라틴작가들의 평민 문학을 즐겨 탐독했다. 그는 선생님들 중 베르토 바나우디 선생님을 좋아했는데 그분은 “아무에게도 결코 벌을 주는 일이 없으면서도 모든 학생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존경하도록 만드는”분이셨다.
여가활동
끼에리에서 요한은 처음에는 동향 사람인 루치아 마따 부인 집에서 살았다. 방값은 돈으로 지불했고 식비는 집안 일을 거들어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후에 피안타라는 친구가 요한에게 자기 집에서 함께 살자고 하여 요한은 그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피안타의 집에서는 카페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요한은 그곳이 “매우 위험스런”곳임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여러가지 과자와 술과 아이스크림과 다과”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얼마 동안 그는 양복점 주인인 토마스 꾸미노씨 집에서 살기도 했다.
트몽 신부는 돈보스꼬가 목수나 대장장이 노릇도 했다고 한다. 요한은 주로 자기의 수공 기술로 생계를 꾸려갔고, 가정교사 노릇을 해서 용돈을 벌어 쓰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나 생계에만 온통 정신을 빼앗겼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생활에 대한 언급을 살펴보면 교양과 오락활동이 끊임없이 계속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자기 모습을 가수나 배우, 그리고 즉흥시인 내지 마력을 지녔다고 고발 받은 마술사라고 즐겨 표현했다. 그의 명성은 그를 “학생들의 대장”으로 만들었으며, 그는 이 명성에 힘입어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친구집을 돌면서 “종교에 관해 애기하는”모임인 명랑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소명을 따르는 데 있어서 부딪히는 갖가지 난관들
졸업이 다가옴에 따라 학생들이 각자 장차의 직업을 선택하고 있을 무렵 요한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이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며, 이는 그가 전혀 준비해 오고 있지 않은 길을 따르기도 거의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보스꼬는 이 미결정 기간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남겼다 ; 나는 생활 방식과 내 심성의 경향, 그리고 성직에 알맞은 자질의 완전한 결여로 말미암아 결정을 내리기가 몹시 힘들었으나, 마침내 나는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결정했다!!
1834년 4월, 요한 보스꼬는 프란치스꼬회의 지원자로 받아들여졌다. 일년 후 그가 끼에리에 있는 프란치스꼬회 소속의 평화의 수도원에 들어가려할 무렵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속에서 그는 혼란과 부조화를 보았으며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 “너는 여기서 평화롭지 못할 것이다. 너에게는 다른 곳이 기다리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신뢰하던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그는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끼에리 대신학교 1835―1841
1829년에 세워진 끼에리 대신학교는 키아베로띠 또리노 대주교의 드높은 희망의 한 표현이었다. 키아베로띠 대주교는 또리노보다는 키에리의 조용한 분위기가 자유사상이나 자유주의적 견해로 인한 동요들로부터 방해를 덜 받으리라고 믿었다.
요한 보스꼬는 10월 30일에 신학생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의미심장한 충고말씀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나의 생활을 철저히 변화시켜야한다. 나는 여지껏 사악했던 적은 없었지만 게을렀고, 게임과 여러 가지 오락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냉랭하고 침울한 쟌세니즘적인, 간단히 말해서 연구보다는 경건성을 강조하는 당시의 교회 풍조들에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 그의 최초의 성직 훈련이었다.
끼에리에서의 6년 (1835―1837의 철학과정, 1837―1841의 신학과정)은 요한 보스꼬에게 많은 반발 요소들을 제공했다. 교수진과 친해지기가 무척 어려웠다. 교수들의 신학은 매울 조야했으며― 그들은 극히 안전한 것만을 가르칠 뿐이었다. ―그들의 교수법은 난해하고 딱딱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덧붙여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단지 자신의 경력에만 관심을 쏟을 뿐이었다. 보스꼬는 이런 분위기에 심한 반발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자기 훈련 및 금욕주의로 인해 점점 심해지는 좌절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감정의 압박이 육체적 상태에 영향을 미친 시기라고 어겼었다는 베드로 스렐라의 생각이 옯은 것일지도 모른다.
보스꼬는 그렇게도 좋아했던 게임과 오락을 멀리하고 자기 자신에게 조용히 살 것을 강요했다. 모두에게 접근해 본 이후, 그는 이제 몇몇 친구들 하고만 가까이 지내기로 했다. 친구들 중 특히 그의 옛날 학교 친구인 루이스 고몰로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보스꼬와 고몰로는 성격이 전혀 딴판이었다. 루이스는 절제와 의무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으로 이름나 있었다. 보스꼬는 루이스를 모범적인 신학생으로 여겼으며, 심한 단식과 엄격한 금욕주의를 빼고는 모든 면에서 그를 본받으려 애썼다. 1839년 4월 2일에 있었던 루이스의 죽음은 돈보스꼬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보스꼬가 자시 친구의 덕을 낱낱이 애기하고 또 루이스의 천국행을 알려주었던 이상한 사건들에 관해 애기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여러 해가 흘러야 했다.
그는 여전히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제 그가 선택하게 된 주제들은 아주 심오한 것들이었다. 사실 그는 “이교적” 고전들에 낭비한 시간에 대해 스스로를 책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 우연히 그는 (그리스도의 모방)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은 그의 새로운 사고방식과 완전히 일치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성서와 교회사에 열정을 쏟게 하였다. 훗날 그가 깨달은 바대로 그의 많은 독서는 그로하여금 윤리신학과 교의문제에 있어서 친갈리칸적. 반토마적인 것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의 엄격개연설 (개연론보다도 더 엄밀한 이론)에 대한 지식은 알라시아로부터 얻은 것이었으며 갈라칸적인 것들은 프레우리의(교회사)에서 얻은 것이었다.
서품 1841
신학과정 3학년 말에 해당하는 1840년 3월 29일 요한 보스꼬는 탁발식과 더불어 4가지 곳P율을 받았다. 특별 허가를 얻어 그는 여름방학 기간동안에 4학년에게 규정된 내용들을 공부하여 가을학기에는 바로 5학년으로 진급했다. 1840년 9월 19일 부제가 되었으며 1841년 6월 5일에 루이스 프랑소니 또리노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았다.
신품을 받은 후 곧장 노동과 포기, 사도로서의 사제적 삶으로 그를 내몬 이는 어린 시절의 여러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로 그의 어머니셨다. 위의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돈보스꼬의 삶을 그대로 요약해 놓은 것이다. 노동은 그의 영원한 동반자였으며, 시련과 고난은 그의 인간됨을 형성해 나가는 대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그의 활동의 원천은 사도직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성직자로서의 체험에 의해 성숙된 요한 보스꼬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사제적 의무를 시작하였다. 비록 3년을 공부하는데 더 보냈지만, 1841년부터의 그의 삶을 그의 사명과 분리시켜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2
초기의 오라또리오
1841 ― 1847
1841년은 살레시안 사업이 탄생된 해라고 할 수 있다. 신학교를 갓졸업한 젊은 사제 요한 보스꼬는 청소년들에게 헌신하기를 더욱 갈망했다. 일이 잘 풀려나간 덕분에 그는 자신이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신속히 나아갈 수 있었으며, 신품을 받은 뒤 몇 달 후의 또리노에로의 이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리노에서의 돈보스꼬
요셉 가파쏘 신부는 여러 해 동안 “영적인 문제와 세속적인 문제 양면 모두에서 돈보스꼬를 지도 하였다. 요한은 가파쏘 신부의 충고에 따라 1841년 가을에 받았었던 몇가지 제안들(제노아에서의 교사직, 모리알도의 본당신부직)을 거절하고, 가파쏘 신부도 가르치고 있던 또리노의 콘비또 에끌레시아시트코 신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1841년 11월 3일부터 거기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콘비또 신학원은 1817년 루이스 괄라 신부에 의해 세워졌었는데 괄라 신부는 여전히 그곳의 학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곳은 젊은 사제들을 철저히 훈련시켜 그들이 성무를 실제 이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킴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우리들은 그곳에서 성직자가 되는 법을 배웠다”며 콘비또 신학원을 격찬했다. 그는 콘비또 신학원이 “그들 간에 여전히 성행해 있던 쟌세니즘을 일부나마 뿌리뽑음으로써”성교회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말했다. 교수들은 성알풍소 드 리귀리의 모범을 따라 계율보다는 사랑의 탁월성을 지지했다. 그들은 예수성심과 성모님과 교황님에 대해 “온화하고 신실한” 사랑을 갖도록 권장했으며, 영성체를 자주 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국 돈보스꼬의 영성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한 것들은 얻게된 곳을 알게 되고 또 끼에리 대신학교의 엄숙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에 더 잘 어울리는 보다 기쁨에 찬 크리스챤적 삶의 형태를 적용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 것은 잘된 일이었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런 특징들은 피에몬테의 수도에서 젊은이들을 위해 벌렸던 그의 초기 사업의 촉진제이기도 했다. 콘비또 신학원의 사제들은 연구나 명상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교구의 직무를 맡기도 했다. 돈보스꼬 역시 또리노에 있는 여러 쎈터들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고 고백성사도 주고 고리도 가르치는 등 온갖 열성을 다 쏟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이 다소 다른 어떤 것에로 이끌리고 있음을 알았다. 미카엘 루아는 “돈보스꼬께서는 바로 그 맨 첫 일요일들 때부터 젊은이들을 에워싸고 있는 도덕적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해 거리를 돌아 다니셨다”고 전한다. 돈보스꼬가 얻어낸 결론은 주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에서 “거리를 배회하며 공원에서 서성이고 있는 여러 연령층의 청소년들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특히 교외에서는 짓궂은 장난을 치며 빈둥거리는 그리고 또 욕설을 퍼부으며 부정한 행실을 저지르고 있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통탄스런 것은 청소년들의 도덕성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생활방식과 숙소, 일자리 등도 역시 불량했으며 이것들은 종종 말썽의 온상지이기도 했다. 로몽 신부의(전기적 회고록)이 상상적 문체와 매우 비관적 진술을 담고 있는 건 사상이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나타나 있는 상황은 정말 옳은 것이었다. 르몽 신부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은 산업화의 시작으로 말미암아 시골에서 도시로 인구가 유입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인구 13만명의 수도 또리노에는 여러 방직 공장이 있었으며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 팽창 일로에 있던 또리노에는 거대한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비엘라와 롬바르디로부터는 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밀어 닥쳤다. 그들은 대부분 건축 공사장의 인부나 미장이, 목구, 페인트공으로 고용되었다. 르몽 신부는 교회와는 인연이 멀어져 버린 이 수많은 뿌리없는 사람들의 싸움, 잡흔, 변두리의 밀집된 생활 조건 등을 생생하고 상제하게 묘사하고 있다.
괄라신부와 가파쏘 신부의 지도와 조언을 받았던 돈보스꼬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숙소에서 그러한 상황을 목격하고서 괴로워 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청소년들의 비참한 처지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르몽 신부는 “햇볕과 바람과 비에 노출된 채 모르타르나 벽돌 등을 담은 나무통을 짊어지고서 흔들거리는 발판이나 쓰러질 듯한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며 인부들을 돕고 있는, 조롱과 주먹다짐을 받음으로써 실수를 피하길 배운 것 외에는 학교라곤 문턱조차 디뎌본 적이 없는 여덟살 내지 열두살의 어린애들”로 붐벼대는 건축 공사장에 대해 애기하고 있다.
부모들에게서 쫓겨난 애들은 구걸하며 돌아다녔다. 특히 일요일에는 십대들의 무리가 포강둑과 들판을 배회하며 변두리로 몰려 다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돈보스꼬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것은 그의 서품 직후 가파쏘 신부와 함께 방문했었던 감옥 안의 상황들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건강하고 튼튼하며 생기있는 열두살에서 열여덟살까지의 많은 젊은이들이 하는 일도 없이 이에 물어 뜯기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탈진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는 이미 마음 속으로 ”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을 돌봐주고 도와줄 친구이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병원과 특히 성 요셉 코또렌고의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곳에 1800여 수용자중에 많은 수가 고아들이었으며 대부분 아주 어렸다.
초기의 이런 체험들 덕분에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으며, 우연의 일치로 그는 그러한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오라또리오의 기원 1841
어느 날 돈보스꼬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성당의 제의방에서 제의를 입고 있을 때, 어린 소년 하나가 살그머니 들어오더니 그곳이 낯설었던지 구석에 서서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때 저의방지기가 들어 와서 그 소년을 복사로 착각하고서 가까이 오라고 했다가 보미사를 드릴 줄 모른다는 것을 알고서 소년을 사정없이 내쫓아 버렸다. 어서 가서 그앨 데려오시오. ? 그앤 내 친구요. 어서 가서 그앨 데려오시오. 난 그 아이와 애기를 나누고 싶소!! 라며 항의했다. 돈보스꼬는 주눅이 들어 슬금슬금 다가 온 소년을 안심시켰다. 그러자 소년은 “어떤 좋은 것에 관해 애기 하기 위해” 미사가 끝날때까지 기다리기로 하는 데 동의했다. 사제경이 끝난 후 돈보스꼬와 소년은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소년의 이름은 바르톨로메오 갈래리였다. 그는 16살 이었으며 부모님이 모두 돌아 가시고 안 계셨다. 소년은 학교에 가 본 적도 고리를 배운 적도 없었고 일만하고 있을 뿐이었다. 프란시스 배윌로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돈보스꼬는 도움을 요청하는 가난하고 집없는 소년의 외침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아침의 애기는 소년의 첫 고리수업으로 끝을 맺었다.
돈보스꼬는 이 사건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날짜를 표시해 두었는데 그 날이 바로 1841년 12월 8일 섬모 무염시태 축일이었다. 이 우연의 일치는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항상 “섭리의 계획”에 귀기울였던 돈보스꼬는 12월 8일 오라또리오의 탄생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초기 모임들 1841 ― 1844
돈보스꼬로부터 초대를 받은 갈레리는 그 다음 주 일요일 날 친구 6명과 함께 왔다. 돈보스꼬는 그들을 친절히 맞이해 주었으며 그들 실정에 알맞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모임이 계속됨에 따라 소년들의 숫자도 점점 불어났다. 2월 2일 주의 봉헌 축일에는 약 20명이 그리고 3월 25에는 30여명이 모이는 등 금새 장소가 비좁게 되어 소년들의 수를 80명 선으로 제한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모인 소년들은 대부분 벽돌공이었으며 모두 멀리 시골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겨울철에는 집으로 돌아 갔으며 요셉 부제띠와 같은 아이들은 더러 돈보스꼬와 함께 머물렀다. 돈보스꼬는 아주 빈곤한 아이들에게 “몇 주 간의” 음식과 옷가지를 마련해 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렸다. 그는 “가장 절박한 사정에 처해 있는, 특히 소년원에 간 적이 있는” 소년들만을 함께 모으고자 했다.
모임은 축일 즉 일요일과 공휴일에 열렸다. (1814년 11월 9일에 발표된 교황 회칙에 의해 결정된 축일은 20개 가량 된다.) 모임은 오락적인 동시에 종교적이었다. 소년들이 필요로 한 것은 소풍과 게임, 노래 등이었다. 소리수업과 성사(고백성사, 미사, 영성체)는 그날의 프로그램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모임을 갖기 시작했던 당초부터 적당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했다. 돈보스꼬는 첫 3년 동안엔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교회에 딸려 있는 방에서 소년들에게 고리를 가르쳤으며 괄라 신부는 오락시간에 소년들이 콘비또 교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소년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 라 떠드는 소리도 점점 더 커지게 되자 돈보스꼬는 소년들을 거리나 교외로 대리고 나가야 했다.
돈보스꼬는 영적인 것을 모임의 주목적으로 여겼으며 그 의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모임들을 “축일의 오라또리오”라 불렀다. 여하튼 돈보스꼬는 자신을 로마의 주교이자 16세기의 처음으로 “오라또리오”를 시작했던 성 빌립보네리와 결부시켜 주는 이명칭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오라또리오의 오박적 측면을 고려하여 이들 보다 엄밀히 “어린 아이들의 종교적 의무 후에 건전한 오락을 계속 하도록 계획된 곳”이라 정의했다. “축일의”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은 돈보스꼬의 오라또리오가 본래는 일요일과 축일에만 열렸기 때문이었다.
초기엔 매우 고무적이던 오라또리오도 얼마 가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거리가 발생했다. 소년들의 수가 늘어 났기 때문에 적당한 회합 장소를 찾는 일이 시급해졌다. 뿐만 아니라 인원 문제도 있고해서 돈보스꼬는 괄라신부나 가파쏘, 혹은 그가 자신의 주위에 모아 둔 “품행 바르고 잘 훈련된” 소년들과 같은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후원자들”에게만 의존하고서는 도저히 더 이상을 일을 해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새롭고 다소 시끄러운 사건들에 대한 반대 소리가 점점 드높아졌다. 1844―1846년의 일들은 여러모로 교훈이 되었다.
일들이 차츰 조직화 되어 가다 1844―1846
1844년 콘비또에서의 사목훈련기가 끝나게 되자 돈보스꼬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형태의 성직을 선택해야 할 기로에 다시 서게 되었다.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 했다; “당시 나는 네 자신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소년들의 무리에 둘러 싸여 있음을 발견했다!! 그의 어린 친구들은 주교님이 그를 또리노에서 떠나 보낼까봐 길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돈보스꼬는 400여명의 소녀들이 살고 있는 바롤로 후작 부인의 ”고아원의 영적 지도자로 보내졌다. 이러한 조치는 그리 만족할 만한 것은 못되었지만 소년들과의 일을 가능케 해 주었다. 후작부인의 허락에 의해 44년 10월 13일 빈방 두 개가 딸려 있는 성 프란치스꼬 드 살레시오에게 봉헌된 고아원의 소성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곳의 원장인 보렐 신부는 돈보스꼬의 가장 좋은 후원자였다. 그러나 마침내 후작 부인은 소년들의 소동에 분개했다. 돈보스꼬를 해고 하기에 앞서 후작 부인은 소년들이 소녀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하여 돈보스꼬로 하여금 소년들을 멀리 보내 버리도록 하려고 애썼다. “지상의 천국”과도 같았던 7개월 간의 안정 후에 돈보스꼬는 오라또리오를 한번 더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1845년 5월 25일의 모임은 사실상 버려져 있는 채인스의 이웃 성당에서 열리였으나 성미 급한 가정부 아주머니가 본당신부께 소년들을 쫓아내 버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돈보스꼬와 소년들은 그날로 당장 쫓겨나 버렸다. 다음에는 프랑소니 대주교의 추천에 따라 또리노 시당국이 돈보스꼬에게 도라강 옆의 방앗간에 가까운 성마틴성당 옆에서 모임을 갖도록 허가해 주자 이웃 사람들은 시에 자꾸 진정서를 냈다. 그리고 이 모임들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며 “선동적인 소요”를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1845년 11월, 돈보스꼬는 요한 모레따 신부 사택의 방 세 개를 세냈으나 그곳은 고아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고 이웃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넉달도 채 못되어 딴 곳으로 이사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그는 1846년 3월에 “3―4백명의 소년들이” 재미있게 놀고 노래하고 고리를 배우고 고백성사를 받을 수 있는 들판을 빌렸는데, 그 들판을 소유한 빌립비 형제들이 마치 아딸라의 역병과도 같이 잔디 뿌리마져 밟아 죽이는 소년들에게 진저리를 내기 전까지는 그곳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사정이 극도로 악화 되었다. “어떤 이들은 돈보스꼬를 혁명가라 여겼고 또 어떤 이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나 혹은 이단자로 여겼으며 또리노 교구 사제들은 돈보스꼬가 소년들을 자기 교에서 빼내 간다고 비난했다. 돈보스꼬는 소년들이 대부분 ”사보이와 스위칠란드, 발 다오스타, 비엘라, 노바라, 롬바르디“등 또리노와는 전혀 다른 지방”의 출신이란 점을 지적했다. 또리노 시당국의 경찰국장인 마르뀌스 벤소 까브르는 돈보스꼬를 심문하면서 불량배 편에 들어 “괜스레 날 피곤하게 만들지 말라”며 돈보스꼬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돈보스꼬는 대주교님의 위임장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어려움들을 모면하였다. 보렐 신부를 포함하여 돈보스꼬의 절친한 친구들은 돈보스꼬가 자기 사업의 영광스런 미래에 관해 애기하는 것을 듣고서 그의 정신 상태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두 “지체높은 분”들이 선의를 가지고 자기를 비용으로 돈보스꼬를 정신병원에 강금시키려 했으며 바롤로 후작 부인은 돈보스꼬에게 자기의 고아원을 맡아 주는 일을 재고해 달라고 사정했다. 돈보스꼬는 “400명의 소년들과 외로이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1846년 4월 5일은 바로 빌립비씨네 들판에 대한 게약의 만기일이었다. 그리하여 돈보스꼬의 용기가 혹독하게 시험당하였다. “그날 저녁, 밤이 다가옴에 따라 나는 뛰노는 소년들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면서 그들 중에 도대체 몇 명 정도나 사제 성소를 갖게 될까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거기엔 나 혼자 뿐이었다. 아무런 도움도 없이 지치고 병들고 앞으로 소년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서 모이게 할까를 걱정하며... 나는 완전히 동요되었으며 아마 난생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몇분 후 그는 판크라찌오 소아베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돈보스꼬에게 프란시스 파날디 소유의 헛간을 구경시켰다. 돈보스꼬는 당장 그 헛간을 “320프랑”에 세내었다.
피날디씨의 헛간을 얻게 됨으로써 오라또리오의 생활에는 새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피날디 헛간에서 1846
“그 다음 주 일요일인 4월 12일은 마침 부활절이었다. 모든 미사도구와 오락기구 및 시설들이 새 곳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은 이제 우리것이 되었다!! 그 헛간은 천정이 매우 낮아서 발도끄 지역에 흘어져 살고 있는 몇몇 세탁부 아주머니들의 ”빨래 창고“로 쓰일 뿐이었다. 지붕이 땅에서 겨우 3피트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피날디씨는 땅바닥을 18인치 가량 파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 헛간은 그러고서도 몇가지 것을 더 개조하고서야 사용될 수 있었다. 중앙부분(50피트 20피트)은 성당으로 사용되었으며 두 개의 소부분엔 부속 방들이 만들어졌다. 처마 밑의 좁고 긴 땅은 운동장이 되었다. 피날디 헛간에는 주목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침내―이번엔 범적 구속력을 지닌 계약이 이루어졌다. ―영구적인 곳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오라또리오를 위해서는 아주 대단한 잇점이었다.
돈보스꼬는 이 새로운 상황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 전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영구적인 장소 대주교님의 확고한 승인, 엄숙한 의식, 음악, 운동장에서의 이야기는 이곳 저곳에서 소년들을 끌어 왔으며, 많은 사제들도 되돌아 왔다!! 경찰국장 마르뀌스는 여전히 그 모임을 금지시켜 했으나 카알 알베르또 왕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섯달 동안 돈보스꼬는 ”시보호소“의 편의를 위해 그곳에 출석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날 감시하려 했지만 거꾸로 그들은 소년들을 주의 깊게 살피려는 날 도와 준 셈이었다!!
바로 그 때, 그해 7월에 돈보스꼬는 심하게 앓았다. 이로 인해 소년들은 자신들이 돈보스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 줄 기회를 얻게 되었다. 병석에서 일어나 베끼에서 몇주간 회복기를 보낸 후 또리노를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왔다. 1846년 11월 3일에 그들은 돈보스꼬가 빌렸던 피날디씨 집 방 두칸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매우 가난했지만 나중에 그는 방세개를 더 세낼 수 있게 되었다.
오라또리오에서의 생활
돈보스꼬가 자선과 사도적 정신의 모범이신 성 프란치스꼬 드 살레시오의 보호아래 두었던 오라또리오가 일단 발도꼬에 세워지자 뚜렷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돈보스꼬는 오라또리오의 조직과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5년동안 성공적인 팽창을 이룩한 이후 그는 자신의 방법을 완성했으며, 몇가지 규칙들의 조안을 마련했다.
일요일과 축일의 시간표는 전통이 되었다. 아침에 일찍 돈보스꼬는 헛간―성당의 문에서 소년들을 맞아 들였다. 즉시 고백성사가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미사시간가지 계속 되었다. 미사는 대개 8시 정각에 시작되었지만 고백성사가 길어질 때는 때로 9시까지 혹은 그보다 더 늦게 가지 연기 되기로 했다. 몇몇 나이 많은 소년들은 미사 시간 동안 고행을 계속했다. 성당에서 나오기 전에 돈보스꼬는 피에몬때 지방의 사투리로 소년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면서 잠깐 애기하거나 성서나 교회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그는 “아주 단순하고도 격의없이” 애기하였다. 몇분간 잠시 오락을 가진 뒤 훈화시간과 노래 시간이 시작되어 정오까지 계속 되었다.
오후에는 1시 정각부터 2시 30분까지 게임이 있었으며, 고리시간에는 뒤이어 로사리오와 짧은 강론, 그리고 성체강복이 있었다. 남자는 시간에 아직도 여전히 끠 운동을 잘하며 또한 하앙 기꺼이 자신의 옛날 곡예 기술들을 보여주는 돈보스꼬와 함께 놀았다. 이 놀이는 황혼 때까지 계속되었다 저녁기도 후에 그는 때로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들을 바래다 주었다. 그에게는 이별이 항상 아쉬웠다.
이런 날에는 돈보스꼬는 새벽 4시에 일어났으며 밤 10시 잠자리에 드는 시각엔 “반쯤 녹초가 되어” 골아 떨어졌다. 소년들은 돈보스꼬가 자신의 주위에 모아든 거대한 집단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데 있어서 아무런 어려움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돈보스꼬를 사랑하였다.
주간 동안엔 돈보스꼬는 소년들을 위해 항상 바빴다. 루아 신부는 “그분은 항상 소년들을 찾으러 시내를 돌아 다니셨으며, 소년 견습공들이 많이 있는 공장들을 방문하러 가셨다. 모든이들, 특히 비엘라와 롬바르디로부터 온 건축 노동자들과 같이 또리노 시에 새로온 젊은이들을 오라또리오에 오라고 초대했다. 그는 일이 없는 소년들을 발견 할때면 언제나 그들에게 근무시간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대신 축일엔 쉬게 해줄만큼 좋은 고용인 밑에서 일하게 해 주려고 애썼다”고 전한다
야간 수업
피날디 헛간에서 일들이 일단 잘 풀려 나가자 다음엔 부탁한 큰 문제는 학교 교육이 아주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돈보스꼬는 대부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그의 소년들을 위해서는 수업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바롤로 후작 부인의 고아원에서 매 일요일마다 읽기 수업을 실시했던 이유이다. 그는 모레따 집에서는 보다 조직적으로 읽기 수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소년들은 다음 일요일이 오기도 전에 배운 것을 모조리 잊어버리곤 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소년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기 위해 그리고 좀 더 나중에는 산수와 그림 그리기를 가르치기 위해 야간 수업을 시작했다. 돈보스꼬는 야간학교 교사를 모집하여 훈련시켰는데 그들은 대개 아주 어렸다. “야간 수업은 2가지의 좋은 결과들을 낳았다; 교사들은 소년들에게 열심히 하도록 그리고 읽기를 배우도록 용기를 복돋아 주었으며 또한 그러하기를 확실히 갈망했다. 동시에 그들은 고리 수업에 대한 황금 기회를 제공했으며 고리 수업은 우리의 주요 관심사 였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비록 그리스도의 형제회 수사들이 이러한 교수형태를 이미 실시했노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개척자로서의 재능을 보여 주었다. 돈보스꼬는 또한 1845년 9월 11일 왕병에 의해 학교에 도입된 미터제를 통용시키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돈보스꼬의 방법과 결과들에 감탄한 지방 당국자들은 돈보스꼬에게 조그마한 연금혜택을 주었다.
돈보스꼬는 그의 학생들을 위한 책이 필요하여 읽기 연습을 위해 사용될 수 있게 출판된 다양한 기도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사(1845)), (미터법에 관한 초고(1846?)), (성서사(1847))등을 저술하였다.
강화
돈보스꼬는 관리 뿐만 아니라 종교적 수양을 위한 일련의 규칙을 마련함으로써 자신의 사업을 공고히 하고 싶었다. 1847년에 그는 오라또리오에 관한 규칙들(“일의 처리방식”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는)에 대한 조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규칙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개정되었다.
많은 소년들을 영성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하여 그는 성 알로시오 신도회라는 특별회를 만들었는데, 그 회는 보다 진실되게 크리스챤적 삶을 살려고하는 이들을 한데 모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회는 1847년 4월 12일 또리노의 대주교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발도꼬에 있는 오라또리오는 점차 금건해졌으며, 반대 소리도 줄어 들었다. 1847년 6월 29일에는 일종의 봉헌의식까지 행해졌으며 프랑소니 대주교님께서 처음으로 그곳을 방문하셨다. 대주교님은 일의 성과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셨다. 돈보스꼬가 말했듯이 “격심한 채찍질 속에서 성장한 오라또리”는 한창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정치적 위기를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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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 1862 사이의 오라또리
견습공들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
피에몬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열광적 시기는 1847년부터 이다. 변화의 바람이 카알 알베르트의 영토에 불어 닥쳤으며 복고시대의 운영은 막을 내렸다. 그 전해인 1846년에는 자유주의적 교황이라 생각되는 비오9세가 선출 되었으며, 그가 감행한 행정상의 혁신은 이태리에 기대감을 안겨 주었다. 파리와 비엔나, 베를린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러한 혁명들은 모두 새로운 경치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피에몬때에서는 자의적으로 그런 것인지 혹은 강제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도 모호하지만 여하튼 왕 자신이 솔선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1847년 10월에 카알 알베르트는 대대적인 환호를 받으며 그의 첫 개혁들은 선포하였다. 위소는 말하길 “거의 날마다 비오9세의 왕과 재건 이태리의 영광에 대한 환호와 세레나대와 찬가가 펼쳐졌다”고 한다
다음해 새 헌법이 절찬리에 채택되었다.
성장 일로에 있는 자유주의는 국가주의 운동을 강화시켰다. 오스트리아를 쫓아 내야 하며 국가를 다시 영원토록 통일 시켜야 한다는 요구에서 비롯된 많은 토론이 있었다. 카알 알베르트는 자신의 이상주의를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스스로를 전쟁에 몰아 넣게 되었는데, 좋게 평하자면 시기가 적절치 못했다. 그는 1848년 롬바르디에 쳐들어 갔다가 결국 쿠스토짜와 노바라에서 오스트리아인에게 패하고 말았다. 1849년 3월, 그는 아들 빅토르 엠마누엘 2세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반동이 반도전체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피에문때인들과 그들의 왕은 바로 자유주의적 애국주의적 이태리의 열망을 대변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라또리오에서 일어난 일들
오라또리오 안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반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르몽 신부는 “돈보스꼬에게는 1848년 1849년의 나날이 아주 지긋지긋했다!!고 전한다 사제단이 분열 되었다. 귀족인 프랑소니 대주교의 지도를 받은 부제들은 자신들이 프로테스탄트적인 것 들이라고 비난했던 변화들을 좀체로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다. 한편 많은 사제들을 종교와 자유와 애국심을 연결시키려 했다. 그러나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사업에 완전히 빠져 있던 돈보스꼬는 현명하게도 정책을 논한다거나 혹은 정치적 파벌들에 가담하는 것을 거절했는데, 그러한 태도는 그의 협력자들에게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려 하지 않고 급기야는 오라또리오의 소년들을 잠시 데려 가려 했다. 몇주 동안엔 오라또리오에 참석하는 숫자가 500명에서 3―40명으로 줄어 들었다. 소년들을 되돌이키기 위해 돈보스꼬는 소년들의 전쟁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그들에게 ”나무칼과 나무총“의 무장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을 느꼈으며 사람들의 열광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다. 성직자들에 대한 혐오감이 점점 증대되고 있었으며, 비오 9세와 이태리 내의 거대한 자유주의적 운동의 지도자들 간의 관계가 점점 더 긴장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돈보스꼬는 1847―50년 이후엔 점점 전진해 갔으며 오라또리오도 퍼져가기 시작했다. 시의 남부 포르타 누오바에 성 알로이오 오라또리오가 개관했던 게 아마 1847년의 일이었던 것 같으며, 시의 동부지역인 반칠리아에 세 번째 오라또리오가 문을 열게 된 것은 1849년의 일이었다.
새로운 토대 1847
한편 돈보스꼬의 목적과 전적으로 조화되어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을 위한 의욕이 솟구쳤다. “시의 오라또리오에 참석하는 소년들 중 어떤 아이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정신적 도움도 아무 쓸모 없을 만큼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실, 그 아이들은 직업훈련 뿐 아니라 잠자고 먹고 입는것등을 제공 받아야 할 처지였다.
이러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돈보스꼬는 1847년 오라또리오에 옆에다 극빈자를 위한 숙소를 마련했다.
그해 5월 어느 날 비오는 날 아침에 15세 가량의 소년이 돈보스꼬네 집의 문을 두드렸다. 굶주린 채 비에 흠뻑 젖은 소년은 집안에서 쉬어가고 싶다고 애걸했다. 돈보스꼬의 어머니는 소년을 부엌으로 데려가 아궁이 옆에 앉히고서 그에게 뜨끈한 스프와 빵을 내주었다. 그러는 사이 돈보스꼬는 소년에게 소년의 환경을 물어보았다. 소년의 환경은 말이 아니었다; 소년은 고아였으며, 도시에 새로온 아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에겐 돈도 일자리도 없었으며, 당장 그날 저녁에 갈 곳 조차 없었다. 돈보스꼬는 부엌에 짚요를 깔고 소년을 자게 했다. 그것이 그 때 돈보스꼬가 해줄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예방책으로 그는 부엌문을 잠갔다. 그보다 먼저 언젠가 그의 손님들이 시이트와 담요를 가지고 달아나 버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돈보스꼬는 소년에게 일자리를 찾아 주려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첫 번째 살레시안 기숙사
그 소년은 돈보스꼬가 “성프란시스코 드 살레시오 오라또리오의 부속 기숙사”라 명명한 첫 번째 살레시안 기숙사의 첫 기숙생이었다. 그러한 명칭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창설자의 마음 속에서는 뭐니뭐니해도 오라또리오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오라또리오”라는 용어는 결국 발도꼬 계획 사업 전체를 뜻하게 되었다.)
다른 소년들도 1847년에 약간의 숙박시설을 제공받았다. 방이더 없었기 때문에 당분간 7명으로 숫자를 제한 시키기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돈보스꼬는 점차로 피날디씨 집의 다른 방들을 세내었으며 1857년 2월에는 마침내 그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 1852―1859년간의 여러 가지 건축 계획 덕분에, 그리고 빌립비 형제들의 소유지에서 가까운 소유지를 획득한 덕분에 “오라또리오 기숙사”가 결국 아주 커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는 이들의 숫자도 알맞게 늘어났다: 1848년―15명, 1849―30명, 1852―36명 1853―76명, 1854―115명, 1855―153명, 1586―163명, 1857―199명, 1860년―470명, 1861―600명이었다. 1851년부터 돈보스꼬는 더 이상 사용할수 없게된 헛간을 대신하여 그곳에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1852년 6월 25일이 성당의 낙성식이 엄숙하게 거행되었으며, 성 프란치스꼬 드 살레시오께 헌당 되었다.
“오라또리오 기숙사”는 처음엔 주로 일하는 소년들을 위한 것이 었다. 1856년 현재, 학생들이 더 많아진 까닭은 주위 상황에 소스라쳐 놀란 돈보스꼬가 사회 문제의 절박성에 이끌려 활동에 뛰어 들었기 때문이다.
1848년 또리노의 사회문제
유럽 내의 선진 산업화의 반동을 느낀 많은 이태리 노동자들은 참을수 없게 되었다. 또리노에서의 이러한 사태는 주로 자유주의자들의 승리와 정치지도자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경제계에 있어서의 자유주의는 현대의 용어를 사용하여 말하자면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의미했다. 1791년 6월 프랑스에서의 Le Chapelier 의 법률이 바로 이러한 예였다. 피에몬테에서는 1844년 포고령이 비슷한 결과를 가져 왔다. 그것들은 과거의 “대학” 길드와 다른 사회 동맹들을 억압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노동자를 고립시켜 무방비상태로 몰아 넣었다. 또리노 노동자들의 진정서에 대한 회답에서 카알 알베르트는 마지 못해 그들에게 상호부조를 위한 연합을 허락했는데, 그러한 연합체는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연합조차도 용서하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의 무관심은 만일 국가통일과 독립에 대한 그들 몰두를 기억한다면 다소 덜 놀라운 것으로 보인다. 격앙된 몇몇의 목소리―구스타보 카브트와 로스미니와 같은 이들―는 여론에 전혀 감동을 주지 못했다.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는 그들의 견해를 반동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돈보스꼬는 비록 “혁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는 사회가 고통받고 있는 잘못들을 확실히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의 전기작가는 그가 보았던 상황에 대한 분석을 남겨 놓았다; “그는 출발점부터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극히 적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주 혁명운동만이 해결 방법은 아니며 약속된 것 중 어떤 것은 훌륭하고 또 제럽 국민의 여망에 따른 것이다고 말하였다. 국민들은 평등과 계급차별의 폐지를 갈망했다. 그들은 정의와 그들의 처지의 향상을 원하였다. 돈보스꼬도 역시 고립되고 무방비 상태에 처해 있는 노동자들을 착취한 인정머리 없는 자본가들에게 부가 어떻게 독점되고 있는가를 알았다. 교회 축일을 지키는 것이 금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필연적으로 노동자들간의 신뢰를 상실시켰으며 불행히도 집에서 함께 전복을 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자제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제가 그들과 접촉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돈보스꼬의 공헌
돈보스꼬는 그 때 당시의 이용가능한 수단을 가지고 이 불행한 상황을 개선 시키려 애썼다. 전생애를 통해 그는 가톨릭 노동자 회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1859년 그는 자신의 소년들을 위해 상호협조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의 개인주의와싸우기 위한 그의 방법이었다.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후에 상업학교가 된 그의 야간 학교에 참석하는 소년 노동자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려고 노력 했다. 게다가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소년들이 일하고 있는 곳의 조건을 알아 보았다.
그의 우선적 관심은 정직한 고용자와 함께 고용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의 배당을 위해 계약을 맺기도 했으며, 모든 조항들이 충실히 지켜지길 요구하기도 했다. 1851년부터 1852년까지의 몇가지 재미있는 사례들이 남아 있다. 소년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과 일요일과 축일의 자유시간, 직업상의 적절한 견습, 아팠을 때의 보살핌 등이 보장되어 있었다. 견습 소년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고 오라또리오의 지도자는 소년의 풍행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서약했다. 만약 고용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거나 소년을 착취하거나 혹은 거칠게 다루었을 때에는 돈보스꼬는 그 일을 당장 그만두게 했다. 주간에 돈보스꼬는 시내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자기 소년들을 방문했다.
초기의 오라또리 기숙사
오라또리오 기숙사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은 기요하고 다채로왔다.
모든 것, 특히 공간이 부족했다. 소년들은 여러 방에서 작은 그룹으로 잠을 잤다 피날디 십이 점점 돈보스꼬 것이 되어감에 따라 이용 가능한 모든 구석마다 침대가 놓이게 되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소년들은 뜰에서 식사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계단이나 혹은 부엌에서 가까운 곳이며 어디서건 식사를 했다. 모두 “말가리따 엄마”라 불렀던 돈보스꼬의 어머니께선 스프와 죽을 준비하였으며 그러는 동안 그분의 아들은 부엌일을 돕거나 식탁을 차렸다. 펌프에선 그들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한 충분한 신선한 물을 퍼올릴 수 있었다. 일하러 가기 전에 소년들은 시내에서 빵을 사먹을 돈으로 25센트를 각각 받았다.
돈보스꼬와 그의 어머니는 모든 청구서를 지불해야 했으며 모
든 일을 도맡아야 했다. 그들은 세탁하고 깁고 수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옷까지 마련해 주어야 했다. 다행히 그 지도자는 소년시절에 배웠던 기술들을 잊어 버리지 않았었다.
아주 곤란했을 때에는 그는 부잣집 문을 두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그 일을 하기가 몹시 힘들었지만 소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다할 각오였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사실, 그 어떤 소년도 먹여 살리지 못해 그냥 보내진 예는 단 한번도 없었다.
작업장의 시작
처음 6년 간의 오라또리오 기숙사에서의 생활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853년에 새부분이 완성되었을 때, 돈보스꼬는 오라또리오 내에 작업장을 설치할 때가 왔다가 결정했다. 이 결정의 저변에 숨겨진 이유들을 설명하면서 르몽신부는 무엇보다도 “부도덕과 불신앙” 그리고 특히 프로테스탄트 “이단”의 출현등 시내도처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소년들을 기다리고 있던 위험들을 강조했다. 또리노는 혼란속에 있었다. 1848년 2월 17일에 떨어져 나갔던 왈도파교도들이 그들 주장에 대한 지지자들을 획득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돈보스꼬는 당시 여러차례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들었던 그들을 비난했다.) 그건 그렇다 하고 오라또리오의 지도자는 아마 기숙학생들을 위한 선발과 옷, 숙박 설비 등을 더 쉽게 조달하기 위해 상점을 원했을 것이다.
1853년 가을에는 양화점과 양복점이 문을 열었다. 상점은 피날디집의 복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옛날의 부억을 이용한 것이었다. 소년들을 가르칠 사랑이 나타날 때까지 돈보스꼬 자신이 직접 소년들을 가르쳤다. 그는 그 계획이 경제적, 도덕적 관점 모두에서 아주 가치있는 일이라고 여겨 그곳에 역할과 책임들을 규정한 규칙을 부여했다. 그곳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기술 뿐만 아니라 품행까지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도덕적 행위에도 역시 책임을 져야 했다.
다른 필요들이 생겨남에 따라 거기에 대응하여 새로운 상점들이 문을 열었다. 돈보스꼬는 많은 양을 출판했기 때문에 1856년에 책제본을 도입 했으며, 뒤이어 1861년엔 인쇄―그에게 큰 도움을 중―를 도입했다. 끝으로 1862년에는 현재 기술학교의 전신인 금속세공인을 위한 상점을 열었다.
조직
견습소년들의 생활을 조직화 하는 일은 문제를 일으켰으며, 오라또리오의 지도자는 여러 가지 해결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상점을 운영함에 있어서 처음에는 유료 조수들에 의존 했었다. 그런데 그 조수들은 그들의 제자들의 향상이나 상점에 효율성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돈보스꼬가 그들에게 일을 조직하는데 있어서 전책임을 지워 주자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대가나 된 것인양 학생들을 도제처럼 취급했으며 돈보스꼬의 권위에 복종치 않았다 그 외에도 그들은 오라또리의 시간표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모든 것을 자기 개인에게 유리하도록 조정하려 했다.
돈보스꼬 자신이 그 기구를 관리하고 있을 땐 선생들은 자기 도구를 가지고 그것을 이용했으며 오라또리오는 학생들의 공구만을 제공했었는데 사태가 점점 악화되어 가면서 주로 선생들이 학생들 공구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선생들에게 학생들의 직업훈련만을 책임지게 하고 상점의 도덕적 책임과 경영책임은 자신이 떠맡기로 했다. 그런데 이 조치는 아주 심각한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들이 우수한 학생들과 교체될까봐 두려워하는 선생들은 학생들을 무시했다. 끝내 돈보스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전적으로 따르는 살레시안 수사 단체를 만들어 그들에게 상점을 맡겼기 때문이다.
오라또리오에서의 견습공들의 생활
1847년에 처음 문을 열었던 오라또리오가 각각의 지역에서 점차 확고한 지반을 다져가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무엇보다도 오라또리오가 가족적 분위기를 띨 것을 원했지만 동시에 오라또리오를 효율적인 교육 쎈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854―1855학년도에 일련의 규칙들이 제정되었다. 설립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공식적 변화를 겪지 않았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다. 입학 조항들은 12―18살 사이의 “고아나 극빈자 및 방치된” 소년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돌봐 줄 수 있는 형들이나 삼촌이 있는 아이들은 제외됐다. 사실 돈보스꼬는 비행을 저지를 위험이 있는 고아들이나 집이 있긴 해도 고아나 다름없이 불행한 아이들만을 받아 들였다. (학생들에 관한 부칙 조항에서는 이와 동일한 “조건”을 요한 것은 아니었다.)
1853년에는 견습공들의 일과가 아주 빨리 시작되었다. 기상 후 에 소년들은 돈보스꼬가 드리는 미사에 참석했으며,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시내나 오라또리오에 있는 일터로 나갔다; 학생들은 학교에 갔다. 정오엔 점심을 먹기 위해 모두 함께 모였다. 한시간 가량 오락을 한 뒤 다시 저녁식사때까지 일하러 갔다. 그후엔 야간 수업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보통운동장에서 기도를 드린 후 돈보스꼬의 말씀을 잠깐 들었다. 돈보스꼬는 하루의 마지막 시간에 그의 “가족”에게 들려주는 이 “밤인사”를 훌륭한 교육 수단으로 여겼다.
종교적 생활y
돈보스꼬는 일반적으로 학생들보다 더 다루기 힘들 소년 노동자들에게 너무 과중한 종교적 의무를 요구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오라또리오에는 미사, 묵주기도, 기도, 성체조배, 밤인사 등 경건한 마음을 기르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식들이 있었지만, 사실 돈보스꼬는 소년들에게 그것을 조금이라도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일상적 의식들에 덧붙여 “성스런 죽음을 위한 연습”이라 불리우는 피정이 매달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연말에는 또 다른 피정이 있었다. 체리아 신부는 이태리에서 젊은 노동자들을 위한 피정을 실시한 것은 돈보스꼬가 처음이었다고 전한다.
1848년에는 처음으로 피정을 시도한 결과 그에 힘입어 정기적으로 피정을 실시하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결국 1859년, 견습공들을 위한 크리스챤 길드를 설립할 목적으로 성 알로이오 신도회를 본 따 요셉 신도회를 만들었다.
오락
소년 노동자들의 교육기간 동안에도 항상 오락을 빠뜨리지 않았다. 기숙생들은 일요일 날에는 오라또리오의 활동과 게임에 참석했다. 주간에는 노래와 음악을 연습하는데 여가 시간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실의 공연을 벌였다. 1848년에 시작된 이 공연들은 이후 여러교회의 요청에 의해 또리노 시내를 돌면서 열렸다. 밴드부가 추가되었고 연극도 공연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자기 집에 받아들인 이 아주 천진난만하고 때로 거칠기조차 한 소년들을 선량한 크리스챤들로 만들길 바라면서 그들을 순화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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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 ― 1862 사이의 오라또리오
학생들
돈보스꼬와 학생들
돈보스꼬는 소년 노동자들의 정신적 물질적 복지에 관심을 가져 보다 긴급한 요구들에 응하느라 분주한 속에서도 학생들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사실, 돈보스꼬가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47년 전부터이다. 오라또리오의 출발 당시 돈보스꼬는 그를 도와 다른 소년들을 가르칠 보다 숙련된 몇몇 소년들을 모집했었는데 이 “작은선생님들”은 결국 학생 그룹의 첫회원들이 되었다. 시내에서 학교에 다니는 소년들이 휴일을 보내려고 으르르 오라또리오에 몰려 오곤 했던 목요일에도 학생들에 대한 돈보스꼬의 관심이 표적이 나타났다. 이 소년들은 좋은 가문 출신이었으며 돈보스꼬와 함께 여러 주제를 가지고 즐겨 대화를 나누었다. 돈보스꼬는 그들 나름대로 시합을 하거나 체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해주었으며, 그들은 종종 밤늦게까지 놀다 갔다.
1847년 처음으로 피날디 집에 견습생을 받아 들인 후 몇 달 뒤, 돈보스꼬는 첫 학생 기숙생을 입소 시켰다. 카스텔누오보의 유지였던 그 학생의 아버지 알렉산더 페스카모나씨는 매월 기숙비를 내기로 약속했다. 돈보스꼬는 “형편이 괜찮으면서 이곳에 들어 오고자하는 사람까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모아진 기부금으로 편의를 얻게 된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입니다”라고 주장 했다. 페스카모나는 돈보스꼬와 그리고 첫 견습생과 함께 살았지만 라틴어 수업을 받으러 시내로 나다녔다.
모집상의 문제
이미 기술생들로 꽉찬 집에 돈보스꼬가 학생들을 받아 들인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돈보스꼬는 장차의 사제들의 교육을 꿈꾸고 있었기 ]문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그의 주기적인 “꿈들”에서 영감을 받은 한가지 계획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미래, 즉 장차의 사업에서 그를 돕게 될 사제들과 성직자를 위해 많은 조수들을 길러냈다. 정치적 변화들 때문에 생겨난 피에몬때의 새로운 현상인 사제지망자의 부족 현상은 그를 크게 걱정시켰다. 복고기에는 성직자들이 호의를 받았지만 자유주의 정부하에서는 더 이상 그런 특권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 취해진 조치들 중 우리는 1848년에 또리오네 있는 대신학교가 폐교 되었으며(돈보스꼬는 거의 20년동안 그 신학생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또리노의 프랑소니 대주교가 체포되어 1850년에 리용으로 추방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데라모 신부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남겼다; “제도적 교회를 위태롭게 한 정신성이 있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적대적 경향들 ―돈보스꼬의 적대자들은 오라또리오를 경멸하여 “사제들과 고집통이를 만들어 내는 공장”이라 불렀다―에도 불구하고 돈보스꼬는 그의 어려운 과업들을 의연히 밀고 나갔다.
첫 시험적 부르심
1849년에 미래의 사제를 만들기 위해 첫 번째 시도를 진지하게 단행했다. 란조의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실시한 피정 동안 돈보스꼬는 사제직에 필요한 자질들을 지닌 듯이 보이는 소년들 넷을 선발했다: 그들은 펠릭스 레비글리오(17살의 건장한 소년이자 또리노에 있는 소년들의 지난 번 대표임), 요셉 부제띠(오라또리오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자기 형제와 함께 자주 오라또리오에 다님), 카를로스 가스티니(1년전 돈보스꼬가 이발관에서 만났었음), 제임스 벨리아(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아직 자기 이름도 읽고 쓸 줄 모르는 동안에 이미 국민학교 과정을 끝마쳤음)이었다. 로몽신부에 따르면, 돈보스꼬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나의 조수가 되지 않으련? 나는 너희들에게 초보적인 학교교육을 시키고 또 라틴어 기초를 가르치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너희들은 적당한 때에 그분의 사제가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여 지체없이 곧장 공부에 임했다. 1851년 2월 2일에 그들 네사람은 모두 성의를 받았다. 레비글리오와 벨리아는 사제가 되었으나 다른 두 소년은 도중에 공부를 그만 두었다. 돈보스꼬가 다소 실망을 느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돈보스꼬는 어린 소년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1850년, 그는 후에 그의 후계자가 되었던 13살의 소년 미카엘 루아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미카엘 루아는 그 때까지 그리스도의 형제회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오라또리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었지만 2년 후 그는 오라또리오의 기숙생이 되었다. 안젤로 사비오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그는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얼마 안 있어 로끼에띠, 갈리에로, 프란체시아, 투르치등 다른 소년들도 가들에게 가담했다.
학생 그룹은 계속해서 꾸준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1850년 ―12명, 1854―55년―35명, 1855―1856―63명, 1857―1858―121명....의 기숙생이 있었다
시내 학교
처음에는 오라또리오의 지도자인 돈보스꼬가 그들의 유일한 학교 선생님이였다. 그 후 1851―1852 학년도가 시작했을 때, 돈보스꼬는 시내에서 개인 지도를 하고 있는 두 교수에게 의존했다. 카를로스 본자니노 교수님의 학교는 실비오 펠리꼬가 (I mie prigioni)를 썼던 집인 피아짜 샌 프란체스꼬 드 아씨시에서 가까 왔다. 본자니스 교수는 1,2,3학년 라틴어를 가르쳤고, 콘솔라타 쉬리네에서 가까운 성 아오스딩 성당 근처에 사시는 마태오 피끄 신부님은 중학교 인문학과 수사학을 가르쳐 주셨다. 또리노에서 두분의 개인지도는 높이 평가되고 있었으며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두분께 사사를 받고 있었다. 돈보스꼬와 아주 절친했던 두분은 몇 년 동안 무료로 오라또리오 소년들을 지도해 주셨다.
내일 아침, 오라또리오 소년들은 두그룹으로 나뉘어 돈보스꼬가 세심히 일러준 길을 따라 수업을 받으러 갔다. 그들은 특히 날씨가 나쁜 날에는 국방장관으로부터 선사받은 닳아빠진 옛날 군모를 쓰고 다녔기 때문에 멀리서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르몽신부는 그 모자들이 소년들을 나쁜 요인들로부터 보호해 주긴 했지만 “모자 때문에 소년들이 좀 이상하게 보였다”는 농담말을 남기고 있다 미카엘 루아는 거리에서 소년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성격이 거친 갈리에로 때문에 몇차례 끠 어려움을 겪었다. 갈리에로는 훗날 교회의 추기경이 되었다. 교수님은 그들이 교식 안에 들어서기 전에 다른 동료 학생들의 관심을 끌런 유일한 표지인 그 모자들을 벗게 했다. “양가집 자제”들과 “가난한 개구쟁이”들을 한 의자에 나란히 앉게 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아주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그로 인해 빚어지는 경쟁심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오라또리오 중학교
이러한 해결책은 이상적인 것은 못되었다. 기숙학생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돈보스꼬는 계속 시내를 오가야 하는데 대해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교수님들의 제자가 점점 많아지게 되어 오라또리오 학생들이 거기에 다니는 것도 힘들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학생들을 말을 사람을 얻자마자 집에서 수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17살의 젊은 신학생 세레자 요한 프란체시아는 그때 막 라틴어 과정을 끝낸 참이었다. 돈보스꼬는 당장 그에게 1855년 11월에 피날디 방에서 3학년 과정을 맡아 시작하도록 했다. 이듬해는 일찌기 포글리짜 방문시 친해졌었던 평신도 비안치 교수에게 1,2학년 과정을 설강하도록 부탁했다. 1859―60학년도가 시작되었을 때, 오라또리오에서는 2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진 중학교가 운영되었다. 1861년 돈보스꼬는 자격증을 갖춘 3명의 교사들을 포함한 7명의 교사진에 의존할 수 있었다. 프란체시아와 마찬가지로 오라또리오의 최초의 교사들은 프로베라, 안포씨, 루란도,체루띠 등의 젊은 사제들이었다.
학생들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견습공들에 비해 더 나은 환경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한가지 이상한 것은 돈보스꼬가 “좋은 본을 받게 하기 위해” 좋은 집안의 아이들 몇몇을 사제들의 식탁에 오게 하여 그들에게 특별 대우를 베풀었다는 점이다.
때로 견습생이 학생 그룹으로 옮기고자 했다. “돈보스꼬는 통창력을 지니고 있었다. 부유한 가정 출신의 소년들 가운데 몇 명은 육체노동에는 잘 맞지 않았다. 거친 직종을 맡기면서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에게 공부를 더 시켰다.
학생들을 입학시키는 데 있어서 그는 마음속으로 최우선적으로 진짜로 부르심을 받은 이를 찾겠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오라또리오 집의 규칙들(학생들에 대한 부칙조항)에서 돈보스꼬는 “공부에 알맞은 특별한 적성”, "투철한 신심“, ”사제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등의 세가지 조건 만으로 학생을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있다. 라틴어는 오로지 사제직을 지망하는 학생들을 위한 필요해서 가르쳐 졌던 것이고, 그 의 과목에서는 학생들이 자기들의 직업을 추구하도록 자유롭게 놔 두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일은 그 누구에게도 오라또리오 비용으로 자기 자신의 공부를 해나가도록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친조카인 프라시스와 루이스에 대한 그의 행위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자기 조카들이 사제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돈보스꼬는 그들을 집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예외가 있긴 했지만 1학년생 대다수가 가난한 가정의 출신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모이야기는 그점을 보여준다. 돈보스꼬자신이 사제직을 가꿔 나감에 있어서 ”괭이와 망치를 쥔 이들“에게 더 관심을 보이리라고 다짐했었다.
일상생활
오라또리오에서의 학생들의 일상생활은 기도, 공부, 오락에 배정된 시간에 따라 반복되었다.
매일 아침 기상 후에 미사에 참석했는데, 미사 동안엔 보통 기도문을 암송했으며 그 후엔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다. 끝에 가서 15분동안엔 묵상이나 영적 독서가 있었다. 나머지 오전 시간은 교실에서 보냈다. 점심 후에 학생들과 견습생들은 오후 수업 전 한시간 동안 함께 오락을 즐겼다. 44시 정각엔 간식(주로 일하는 견습생들이 그것을 먹었다)후 다시 오락이 있었으며, 5시 정각엔 문법학교 학생들이 저녁식사 시간까지 공부하러 갔다. 2시간이나 1시간 반동안의 정신 활동은 너무 심한 것으로 밝여졌기에 마지막 20분 동안엔 학생들 중 하나가 읽어주는 “교훈 이야기”를 들으며 보냈다. 저녁식사 후에는 모두 노래를 부르며 보냈다. 9시 정각 저녁기도 뒤에는 “밤인사”가 있었다.
오라또리오 내의 가족정신
오라또리오에서의 학생들의 생활은 견습생들에 관해 말할 때에도 이미 언급되었듯이 그 지도자가 아주 중시했던 도 다른 독창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돈보스꼬의 전기작가는 “1858년가지 돈보스꼬는 아버지가 가정을 다스리듯이 오라또리오”를 다스리고 지도해 나갔으며, 소년들은 자기 가정과 오라또리오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오라또리오에는 특별한 규정도 실한 감독자도 그리고 사소한 규칙의 압박도 전혀 없었다. 아침에 누가 일어나지 않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문 결의 나무판 위에 쓰인 이름 옆의 구멍에 각자가 간단히 나무 못을 박아 두면 됐다!!고 말한다. 그 전기작가는 “그들의 양심에 맡기는 것이 제일 좋았다”는 낙관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돈보스꼬가 가능한한 자신의 “아들들”가운데 있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854년 알라소나띠 신부님이 도착할 때까지 오라또리오에 신부라곤 오직 그 혼자뿐이었으며 꽤 오랫동안 그의 주요 조수들이 어린 신학생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가 왜 동시에 여러 곳에 있으려고 노력해야 했던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소년들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그는 소년들을 보다 더 잘 알고 더 잘 교육시키기 위해 항상 소년들 사이에 파묻혀 있기를 원하였다. 소년들과의 접촉에 있어 돈보스꼬가 가장 중히 여긴 시간은 오락시간과 게임시간이었다. 돈보스꼬는 아주 심각한 문제들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소년들과 더불어 애기하고 놀기 위해 항상 그 시간에 참석했다. 르몽신부도 단언하고 있듯이 돈보스꼬는 ”그의 다음저서를 저술하거나 곰곰 생각해 보기 위해“종종 소년들과 함께 자습실에 가기도 했다.
돈보스꼬와 학생들간의 애정과 신뢰는 매일 “아주 감동스런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식사 끝에, 특히 저녁 식사 후에, 돈보스꼬가 식사를 끝마쳐 가고 있는 방으로 소년들이 우우 몰아 닥쳐 서로 더 돈보스꼬 옆에 앉아 질문도 하고 이야기도 듣고 또 돈보스꼬의 농담 소리를 들으려고 경쟁했다. 그들은 앉거나 무릎을 끓거나 식탁과 의자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를 에워싸고 모여있었다. 이러한 자연스런 애정표시는 “돈보스꼬의 초라한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최고의 양념”이었으며 돈보스꼬를 아주 기쁘게 해줬음에 틀림없다.
학교 공부
돈보스꼬가 학생들에게 가장 강력히 권고한 것 중 하나는 “공부하기를 좋아하라”는 것과 게으름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돈보스꼬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자신이 불굴의 노력가였으며 그의 모범은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가 자주 일에 관해 훈계(신심, 일,즐거움이 주된 주제였다)한 것은 오라또리오가 명성을 얻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이점은 감안한다면, 1863년 돈보스꼬는 “여러분은 돈보스꼬의 집에서 여러분이 공부를 했었다는 덕, 진심으로 공부했었다는 것을 압니다”라는 어떤 대학 교수의 말에 틀림없이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또리노의 꾸리아에서는 오라또리오 사제들의 지적 훈련이 부족하며 그가 책임을 회피했다고 비난했다.
전기작가들은 학생들의 선의의 경쟁심을 가장 감동 깊게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또한 학교를 “지독히 귀찮게”여기는 이들의 몇가지 불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보통 발도꼬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보통 발도꼬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학습분위기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공부에 대한 열성“의 한 예로써 르몽신부는 1854년에 학생들이 아침에 더 발리 일어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던 일을 인용하고 있다. 학생들의 이러한 성화는 4시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허락되었다. 자습실은 성스런 곳이었다 한다. 르몽신부(그가 과거를 이상화 시켰던 것은 사실이다)의 말을 믿는다면,”엄숙하고 종교적인 침묵“이 항상 그곳을 감싸고 있었다. 자습실만이 그러한 열성을 반영했던 게 아니고 집안 구석구석(휴게실, 운동장, 공동침실)불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보충학습을 하거나 권장도서를 읽는데 사용되었다. 때로 당번들이 너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치달아 공부하지 않도록 말려야 할 정도였다. 다소 혹가적 성격을 띤 몇가지 묘사들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오라또리에서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열띤 활동에 대한 동기들이 때로는 다소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 모든 의무에서와 마찬가지고 돈보스꼬는 공부가 영혼을 정화 시키고 또 영혼에 고무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 때문에 공부를 응호했다. 그리하여 그는 “공부는 게으름을 맞아주며 의지를 발전시키도록 도와 줍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돈보스꼬가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모임을 위해 유능한 회원과 적임자를 양성하려 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선량한 크리스챤을 양성하다
오라또리오에서는 주로 학생들의 정신적 도덕적 발전을 강조했다.
만일 이것이 견습생들에 대해 사실이었다면 성소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이었다 해야 말이 맞는다. 신심 도야의 측면에서 볼 때, 돈보스꼬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오라또리오에 충만히 퍼져있던 종교적 분위기를 골려해 볼 때, 학생들 스스로 기꺼이 신앙을 길러 나갔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오라또리오에서 요구하는 신심의 윤곽은 세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학생들은 성사와 마리아와 교회를 존중해야 했다.
돈보스꼬는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자주 받도록 강조했다. 평일에도 날마다 그는 두세시간씩 고백성사를 주었으며 휴일 전날에 그의 고백소에는 평일보다 더 오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겉출한 제자들(사비오, 마고네, 베수꼬)의 전기문 속에서, 돈보스꼬는 자신의 지도를 받은 이들 중 훌륭한 소년은 매주일 혹은 적어도 “보름에 한 번”은 꼭 고백성사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돈보스꼬는 별로 열렬하지 않는 소년들에게 조차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기를”바란다면 매일 영성체를 하라고 권했다.
오라또리오의 영성적 분위기 속에서는 성모님께 대한 헌신이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오라또리의 학생들은 성모님의 동정녀개념을 존중하여 1863 경부터는 Ausiiiatrice(도움이신 분)이라는 명칭 밑에 동정녀 라는 명칭을 넣었다. 그들은 헌신은 묵주기도, 성모님의 작은 사무실, 성모의 달, 9일 기도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끝으로, 교회에 대한 애착은 교황님께 대한 존경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의 지도자로부터 권고를 받은 오라또리오 학생들은 교황님은 위해 기도했으며 비오 9세를 돕기 위해 기부금을 모으기까지 했다.
학생들의 영성적 발전을 항상 갈망해 왔던 돈보스꼬는 학생들이 그들의 공부에서 진전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다른 중요한 문제들을 무시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매수요일마다 “주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돈보스꼬는 견습공들에 비해 학생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것을 당연스레 여겼다. 학생들 사이에 사제적 삶에 대한 취미를 길러 주기 위해 돈보스꼬는 그의 집에서 조직되었던 청소년회나 혹은 청소년 “단체”(신도회)를 이용했다.
축일과 공휴일
소년들의 생활 중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부분―공휴일과 축일―은 돈보스꼬와 크게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후세의 교육가들이 논하게 된 자기 자신의 개인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1855년 그의 전기작가가 말한 바이기도 한다: “돈보스꼬는 공휴일에 학생들이 집에 가지 말거나 혹은 갔다면 빨리 오라또리오로 돌아 오는 것을 자신이 더 좋아한다는 걸 학생들에게 알게 했다....... 돈보스꼬는 전에 다른 모든 학교들의 눈을 의식하여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크리스마스 휴가나 재의 수요일 전 3일간의 휴가를 이미 없애버렸다. 몇 년 동안 그는 여전히 부활절 휴가를 보류해 왔다!! 그는 또한 여름 방학을 줄이기도 했다.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모든 학생들이 참석하지 않으면 안될 여름코스를 편성했다. 무단 결석생들은 다음 학기 등록시에 받아 주지 않았다. 학생들이 자기집 가족들에게로 돌아 가기 전에 발도꼬의 지도자는 ”덕과 소명“을 위협하는 위험들을 특히 강조하면서 학생들에게 많은 충고를 해 주었다.
맺음 말
돈보스꼬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1847년에 그렇게 시험적으로 시작되었던 학생 그룹은 기분 좋은 결과들을 달성했다. 성소―모둔 것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에 관한 통계치는 그의 성공을 증명해 주고 있다.
1861년 한해만 하더라고 학생 그룹에서는 성소지망자가 34명이나 나왔다. 그들은 교구신부가 되거나 새로 생겨나고 있는 살레시오회에 가입할 사람들이었다. 사실 오라또리오는 피에몬때 신학생들의 온상지가 되었다. 일반 직업을 택한 이들은 오라또리오에서 얻은 고귀한 사상을 잊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생활 속에서도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교회의 성원임을 보여 주었다.
5
학생 단체들
우리는 이미 오라또리오 기숙생들 사이에 그리고 또한 오라또리오 롱 학생들 사이에 만들어졌던 소년단체들을 언급했다. 그러한 단체들이 전체 계획상 “본질적이고 필요불가결한 부분”이었음을 지적하지 않는 다면 성 요한 보스꼬의 교육사업의 윤곽을 안전하게 내보이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명랑회
돈보스꼬가 학생회를 사랑했으며 친목단체를 자발적으로 결성하기를 매우 좋아했다는 것은 사싱이다. 끼에리 소년학교에서 명랑회를 조직했던 게 바로 그 증거이다.
돈보스꼬는 자신이 명랑회의“회칙”을 만들었다. 그는 거기에서 “기쁨과 흥겨움에 이바지 하며 슬픔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것, 특히 하느님의 겨울을 방해할 지도 모르는 것을 피하게 하는 책이나 화제거리, 오락등을 찾아내는 것이 각 회원의 의무이다”고 말하고 있다. Mem―orie dell`Oratorio (오라또리에 관한 회고) 는 두가지 기본 규칙들은 인용하고 있다:
1. 각 회원은 선한 크리스챤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이야기나 행동을 피한다.
2. 학습상의 의무와 신앙상의 의무를 꼭 수행한다.
이것은 놀랍게도 성알로시오 신심회 회칙의 1,3,5,6항과 아주 유사하다. 돈보스꼬가 학생 시절에 만들었던 단체가 오라또리오 학생 단체들의 선구였다는 증거를 여러 군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단체들의 탄생
돈보스꼬의 소년시절이나 혹은 유사한 종류의 운동들 (예수회의 “모임들”과 같은)안에서 오라또리오의 단체들과 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 된다 하더라도, 오라또리오의 단체들은 또리노의 오라또리오에서의 돈보스꼬의 사업이라는 연계선상에서 검토 되어야 한다. “신심회의 탄생은 성요한 보스꼬의 사업과 밀접히 결부된 것이었다”고 요한 마르꼬는 쓰고 있다.
신심회는 그들의 결성 이야기가 보여 주듯 명확한 정신적 요구 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일정한 환경 속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성 알로이시우스회, 1847년
우리가 이미 보아 왔듯이 오라또리의 첫 단체는 성알로이시우스회였다. 성알오시오회는 1847년에 주간학생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방랑하는 오라또리오”로서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막 피날디 집에 정착했던 돈보스꼬에게는 무엇보다도 신앙심을 길러주는 영역에 단단하고 영구적인 어떤 것을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초조히 밀려왔다. 젊은 사도는 매일요일과 공휴일에 발도꼬로 몰려 드는 100여명의 학생들을 정신적으로 어떻게 굳세게 만들 수 있는가를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그는 “보다 덕스런 소년들을 함께 모아 그들 사이에 선의의 경쟁심을 불러 일으키고 친구들 사이의 불건전한 압력 형성에 대항하여 다수의 순수한 힘으로 그들을 강하게” 하고자 했다.
성알로시오 신심회는 바로 이러한 염려들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그 회는 복음 말씀을 발이 표현하자면“ 친구들 사이에서 땅의 소금과 빛나는 빛”이 되도록 회원 서로를 돕는 것이었다. 돈보스꼬가 재정한 규칙들은 이러한 두가지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다. 그 규칙들은 또리노의 대주교님께 제출되어 1847년 4월 12일에 인가 되었다.
회원들에 대한 돈보스꼬의 요구들은 단순한 것이었다. 그는 좋은 모범을 보일 것(제1항), 자주 영성체 할 것(제2항), 나쁜 친구들을 피할 것(제3항), 자선(제4항), 노동과 복종(제6항)에 대해 특히 강조했다. 그는 회의 조직을 명확히 밝혀 놓기 위해 이 규정들 외에 8개 “조항”을 덧붙여야 했다. 네 번째 것은 재미 있는 것이었다; “영적 지도자라는 직함을 가진 사재가 의장이 되며, 평신도가 그들의 회장이 된다!!
새단체는 “대단한 열성”을 가지고 받아들여졌다. 회원에 가입하고자 하는 이들이 쇄도하자 돈보스꼬는 한달간의 “시험 기간”을 두기로 했다. 제1차 등록은 이 새사건에 참석하기 위해 미리부터 밀어닥친 오라또리오의 군중들 앞에서 행해졌다. 1847년 5월 21일의 일이었다. 다음달 29일 성알로이오 축일은 프랑소느 대주교께서 참석한 기념된 날이었다.
해가 거듭하는 동안 알로시오회는 급속한 진전을 보였다. 발도꼬의 소년들 중 빼어난 이들은 모두 알로시오회의 첫 회원들이었으며, 1851년까지 모든 기숙생들은 알로시오회의 회원이었다. 돈보스꼬 자신이 월래회를 관장했다. 일년에 한번 그는 선발된 회원 몇을 점심에 초대했다. 이러저러한 사이에 시내의 다른 오라또리오들에 서도 알로시오회가 창립되었다. 돈보스꼬는 아주 유명한 저명인사들을 “명예회원”으로 가입시킬 수 있었다. 그 명단에는 비오 9세와 또리노에 계신 교황대사 안토넬리 추기경 외에도 피에몬때 수도의 여러 중심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브르조차도 성알로시오를 찬양하는 성가를 부르며 손에 촛불을 들고서 행렬에 참가했던 것 같다. 1854년 콜레라가 또리노를 휩쓸고 있는 동안 오라또리오에 살고 있는 회원들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죄를 짓지 않으면 목숨이 안전할 것이라고 약속한 돈보스꼬에 의해 격려를 받은 소년들은 병원과 가정에서 죽어가고 있는 환자들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가난한 열대여섯살된 소년들의 그러한 용기는 사람들 사이에 많은 찬사를 불러 왔으며, 아르모니아지는 9월 16일 기사에서 소년들을 극친햇다. 사실 또리노 시에서 2,456명이 죽고 오라또리오에서 가까운 집들에서만도 40명이나 죽어갔던반면, 오라또리오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성알로시오회는 최초의 살레시안 학생회였다. 이 회는 그 다음에 생겨난 다른 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정 마리아회, 1855년
몇 년 뒤 오라또리오가 점차 학생들과 견습공들을 위한 기숙 시설로 변모해 가고 있을 무렵에 두 번째 회인 동정 마리아회가 창립되었다. 기숙생 수는 이미 150여명에 달했다.
동정 마리아회의 탄생은 도미니꼬 사비오의 이름 및 업적과 관련된다. 누가 “창립자”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소 분분하지만, 미래의 그 성인이 이 새 회의 시작과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돈보스꼬는 그의 제자의 전시 속에서 1854년 동정 마리아에 관한 고리의 선포가 도미니꼬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의 영광을 위해 무언가를 할” 마음을 갖게 했다고 한다. 도미니꼬는 자기 친구들 중 가장 쓸만한 아이들 몇을 골라 창립 중인 동정 마리아회에 함께 가입하자고 초대했다. “생활하는 가운데 특히 죽을 때에 자비로운 성모님의 보호하심을 얻자”는 게 그 회의 주목적이었다. 당시 오라또리오에 몰래 들어 왔던 어떤 품행 나쁜 소년이 “그곳의 모든 규칙들이 지켜지고 있나 알아 보려 했을 때” 가장 먼저 감동된 이가 곧 사비오 였다는 미카엘 루아(그 회의 회장이 되었던)의 증언이 있다.
돈보스꼬의 말에 의하면 “친구들의 합의에 따라” 도미니꼬가 회칙을 작성하여 돈보스꼬께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한다. 1856년 6월 8일 성모님의 제단 앞에서 회원들 그 회칙을 낭독하고 그것을 준수하기로 선서했다. 회칙 내용 중 선배 회원들 (제1항)과 하느님의 말씀(제2항)에 대한 “절대적 신뢰”, “오라또리오의 규칙들에 대한 철저한 준수” (13―18항, 성모 마리아께 대한 “헌신”(21항)등에 관련된 조항들은 흥미를 끈다. 새 회는 그 회원들의 자질과 그들의 행동으로 유명하였다. 성알로시오 신심회가 많은 사람을 위한 회라고 할 수 있는 반면 체리아 신분에 따르면 동정마리아회는 소수 엘리트 한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은“도덕적 도움이 아주 필요한 처지에 놓인” 오라또리오의 소년들에 관여하고 있었다. “크리스챤적자에에서 비롯된 온갖 수단을 가지고 회원들은 ”더욱 덕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도움을 받아야 할 소년을 각기 한사람씩 맡았다. 회합은 일주에 한번 열렸으며 회의 내용은 비밀에 붙여졌다.
그 의 단체들
성알로시오 신심회와 동정 마리아회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이 세 개 단체가 생겨났다.
본죠반니 신부는 1857년 돈보스꼬의 권고에 따라 (성체회)를 창설 했다. 이 회는 주로 2학년 이상의 나이든 회원들을 위한 것이었다. 돈보스꼬는 이 회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신성한 우정으로 맺어져 있던 도미니꼬 사비오를 도와 동정 마리아 회를 창설시킨 후에도 여전히 한명의 성직자에 불과했던 본죠반니는 헌신을 진작 시키는 성체의 영광을 위하여 또 다른 회를 창립했다!!
본죠반니 신부는 피끌로 클레로회를 창립하기도 했는데, 그 회는 “보다 덕스런 학생들을 성무에 봉사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두 번째 단체는 성체회의 산하에 있었다. 그는 성직이 강조하는 “전례의 장엄함과 예식에 의해 드러나는” 성직에 대한 성향을 학생들의 마음 속에 길러 주고자 했다. 본죠반니 신부의 이러한 계획은 성소자들의 출현을 고려해 볼 대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고 돈보스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견습공들이 무시받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사실 기존 단체들은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거나 혹은 견습들의 지적수준이나 능력엔 걸맞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견습공들만의 회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때 (1859년 3월) 돈보스꼬의 생각을 받아들여 성 요셉 신심회를 조직한 이가 보네띠 신부이다. 성요셉 신심회는 즉시 많은 회원을 확보했다. 성요셉 신심회는 회칙은 초창기 회원들에 의해 작성된 후 돈보스꼬의 검토를 받은 것이었는데, 회칙의 내용은 주로 “오라또리오의 원활한 운영”(제5항)에 관한 것이었다. 성요셉회는 (성체회와 마찬가지로) 성알로시오회의 규칙들을 자기 회의 회원들의 실정에 알맞게 적용했을 분이라고 볼 수 있다.
체리아 신부는 여섯 번째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1833년 프래드릭 오자남에 의해 파리에서 시작되었던 동명의 회의 지회였다. 돈보스꼬는 또리노의 이 빈첸시오회가 아주 맘에 들자 직접 자신이 발도꼬에도 빈첸시오회를 세웠다. 빈첸시오회의 회원들은 두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하나는 오라또리오 소년들에게 고리를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정신적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이드를 돕는 것이었다.
발도꼬의 외부 단체들
돈보스꼬는 발도꼬 오라또리오에서 생겨난 단체들이 발도꼬 수도원내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기를 바랐다. 이따금 돈보스꼬는 그 단체들을 다른 수도원으로 확산시키려는 뜻을 비쳤다.
1863년, 돈보스꼬는 미라벨로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했던 미카엘 루아에게 “피끌로 클레로회, 성알로시오 신심회, 성체회, 동정 마리아회 등이 장려되고 있는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살레시안들에게 보낸 1876년 1월 12일자 편지 속에서 돈보스꼬는 “모든 수도원은 소규모 단체들을 장려하는 대에 심혈을 기울여 줄것이며... 그 누구도 주저치 않고 그에 관해 애기하고 권고 장려하며 그 단체의 기원과 목적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하라”고 언명했다. 1886년 모든 장상들에게 보낸 “비밀 권고들”에서 그는 단체들, 특히 살레시안 신하의 모든 집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단체들을 시작하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단체들의 영역
돈보스꼬가 “소규모 단체들”을 얼마나 강조했는가는 이런 몇가지 예들 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단체들은 오라또리오 소년들의 개인적 사회적 발전에 크게 기여해 줌으로써 돈보스꼬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목적을 달성시켜 주었다.
그가 그러한 단체들에 부여했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그 단체들은 엘리트 양성하는 역할을 했으며, 사도들을 길러내는 “모판”이었으며, 궁극에는 그것들은 수도회의 형성에 기여하게 될 것이었다.
엘리트의 형성
단체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엘리트를 길러 내는데 주력했다: 그러므로 단체들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것은 아니였다. 가장 덜 배타적이었던 성알로시오 신심회조차 회원들에게 일정한 기본 기준을 부과했다. 이는 회원들이 얼마나 주의 깊게 선정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 규칙을 준수하고 선행을 행하며 자주 영성체 하며 나쁜 이야기를 피하도록 하는 일년 간의 시험기간이 주어졌다. 사실 모든 회원들은 “덕”을 익히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모범적 생활을 할 것을 맹세했다. 성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원들에게조차 영적 향상의 책무가 주어졌으니 그 이전의 타 단체들의 회원들에게는 더욱 더 그러했다.
각 회원들에게 제공된 인격향상의 방법과 신성함에 이르는 방법은 잘 알려져 있다. 또리노의 사도께서는 자신의 모든 영적 아들들에게 자신의 말은 바 책임을 다할것과 선행을 행할 것, 사회성, 순종, 순결에 대한 조심, 잦은 성체배령, 등의 방법을 추천 하셨다. 동정 마리아회의 회원들을 위한 영적 독서, 양심성찰, 형제적 보정과 같은 특별 훈련은 이미 언급되었던 대로다. 성인들에게서 완성을 향한 성장과 관련된 크리스챤적 모범을 발견했던 돈보스꼬의 모범에 따라 각 회의 회원들은 “자신들의 나이와 환경에 따라” 모델을 선정했다. 즉 동정마리아회는 돈보스꼬의 동료 신학생이었던 루이스 고몰로를, 그리고 성요셉회와 성빈센트 아 바오로회는 자기 회의 명칭이 된 성인들을 선택했으며, 성알로시오는 그 외의 세 단체들(성알로시오 신심회, 성체회, 피끌로 텔레로회)의 주보로 선정되었다.
각 개인의 향상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또 하나의 재미 있는 측면이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즉 돈보스꼬는 책임과 창의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항상 그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는 각기 단체들이 “소년들 자신의 사업”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했기에 돈보스꼬는 미라벨로의 새 수도원장에게도 단체들의 “지도자가 될 것이아니라 장려자”가 되라고 충고하였다. 자연히 단체들은 일반적으로 성직자를 영신적 지도자로 갖긴 하였지만 그 외 부분에 있어서는 모두 회원 자신들이 관할하였다. 즉 단체의 여러 가지 활동들에 관한 것은 회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러한 단체 생활은 모임을 조직화 하고 임원을 선출하며 대화 주제를 택하는 등의 무수한 활동과 책무, 타인들에게 추천된 바를 행할 의무, 결정의 중요성, 결정 사항의 준수와 실행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단체들은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 나름대로 인간적 크리스챤적 성격을 발전시켰다.
사도적 형성
실제로 돈보스꼬가 소년들에게 “사도적이란 말을 사용한 적은 없지만 개인의 발전은 반드시 타인에 대한 봉사라는 인간적이고도 크리스챤적인 이상에로 인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신에서 나온 것만은 분명하다. 도미니꼬 사비오의 전기문 속에서 발견되는 짧다란 어귀는 이 점을 고려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도미니꼬 사비오에게 성인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느님은 위해 영혼들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것이 곧 돈보스꼬의 평소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하느님을 위해 영혼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 회원들은 동료 친구들의 심신의 안녕을 위해 선행을 행하도록 요구 받았다. 신체적인 것에 관한 것으로는 동료들 사이에서 모범적인 친구로 인정된 도미니꼬 미카엘 마고네가 이미 행햇던 병자의 간호 뿐만 이나라, 침상을 정리하고 구두를 닦아 주며 옷을 털어 주는 등의 여러 가지 것들이 있었다. 정신적인 것에 관한 것으로는 친구들에게 무질서, 특히 도덕적 방종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친구들로 하여금 덕을 실천케하고 성체를 영하도록 하는 일이 회원들에게 요구되었다. 사도직을 좋은 모범으로 남긴다는 것으로 다소 한정해 본다면, 회원들 각자는 위와 같은 목적들을 달성키 위해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했다. 정회원들은 “동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항상마다의 동료들의 압력을 이겨내야 했다.
동료들의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회원들은 스스로를 자제하는데 더욱 더 전념해야 했다. 루아 신부는 “그것은 완성의 도상에 서 있는 소년들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눈금이 올라가는 일족의 저울이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몇 달간의 시험 기간 후에 소년들을 성 알로시오 신심회(학생들)나 혹은 성요셉 신심회(견습공들)에 가입하도록 보냈다; 그런 후에 차례로 성체회, 피끌로 클레로회, 동정 마리아회로 보냈다. 회칙에 따르면 동정 마리아회는 가장 최고로 잘 성숙된 소년들이 받아들여졌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덜 완전한 동료들, 특히 초심자들의 영성적 안녕을 돌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환경 변화
끝으로, 이와 같은 단체들은 돈보스꼬의 집들에서의 건전한 크리스챤적 분위기를 조장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단체들은 돈보스꼬의 집들의 영신적 분이기에 항상 관심을 기울였던 까닭에 돈보스꼬에게는 굉장한 자극이 되었다.
소극적 측면에서 살펴 보자면, 각 단체의 회원들은 죄를 피하기위해 전력을 쏟았다.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각 회원들은 자신들의 모범과 충고, 개인적 재간으로써 자기들의 단체나 학급내의 자비와 경건과 순결의 분위기를 창조하고 보전하려 애썼다.
발도꼬에서의 그들의 사업 성과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만한 기록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으나, 1865년을 다룬 (전기적 회고록) 속에는 수긍이 가는 생각을 전해줄 수 있는 구절이 들어 있다. 다음과 같은 르몽 신부의 군대식 어투로는, 후에 수백을 헤아리는 학생들이 살게 된 집내의 학생 단체들의 업무를 간과해 버리기 쉽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중 꾸중 듣는걸 참지 못한다거나 지시에 따르려 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몰래 숨어서 나쁜짓을 한다거나 불화를 조성한다거나 하는 예가 극히 드물었다... 학생들 속에 마치 밀집대원들처럼 섞여 있었던 회원들은 친구들에게 충고를 해주고 또 해악과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지키려 함으로써 가능한한 최대한대로 올바른 길을 견지해 나가려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돈보스꼬는 오라또리내의 질서와 도덕성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1866년에는 어떤 단체가 ”bongioannisti"를 습격했을 때처럼 이러 저러한 여러 단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오라또리의 지도자가 전권을 발휘해야만 할 때도 있었다.
한편, 이러한 단체들이 돈보스꼬에 의해 실행된 교육제도, 즉 교사와 학생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신임과 상호 협력이라는 개방과 합일의 분위기에 이르른 교육제도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활동여역을 주위 교구에까지 뻗치고 있던 거의 성인이 다 된 나이 든 소년들을 위한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를 제외하고는, 다른 단체들은 분명하게 규정된 영역 내에서만 활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단체들의 유일한 목적은 돈보스꼬의 청소년 사업을 돕는 것이었으며 돈보스꼬는 이 단체들을 크게 신뢰하셨다; “나는 이 단체들이 신심의 열쇠들, 도덕의 수호자들, 성직의 대들보로 불리울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확신을 갖게 된 데에는 도미니꼬 사비오의 모범에 대한 회상이 크게 작용했다.
6
도미니꼬 사비오
1842 ― 1857
첫 만남, 1854
1854년 10월 2일은 또리노의 사도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날이었다. 매년 그맘 때 쯤이면 돈보스꼬는 자신의 고향 마을인 베끼에 있었다. 이번에는 그 자기 형인 요셉의 건초간에 머물고 잇는 일단의 소년들을 데리고 “소풍”을 갔다. 그 날 아침 한 소년이 언덕 사이의 시골길을 다라 아버지와 함께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이웃 마을인 몬도니오로부터 돈보스꼬를 찾아 온 것이었다. 열두살 된 소년과 서른 아ㅅ홉상의 사제 사이엔 즉시 서로 완전한 신뢰가 싹텄다. 그들은 아주 흥겹게 대화를 나누었다.
“저어, 신부님. 어떻게 생각하셔요 ? 제가 또리노에 가서 공부 할 수 있도록 데리고 가 주지 않으실래요?”
“음 ―. 네게는 좋은 자질이 있는 것 같구나!!
“무슨 자질이예요?”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의복을 지어 드릴 자질 말이다!!
“아, 저는 옷감이고 신부님은 재단사란 말씀이군요; 그러니 저를 데리고 가셔서 주님의 고운 옷으로 만들어 주세요. ”
돈보스꼬의 글 중 도미니꼬 사비오와의 첫 만남에 대한 언급은 그 따스한 어조로 말미암아 매우 인상적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아마 도미니꼬 사비오에 대한 칭찬인 것 같다: “나는 그 소년 안에서 성신께 온전히 바쳐진 한 영혼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그처럼 어린 한 소년안에 벌써부터 하느님의 은총이 그다지도 풍부히 임하고 계심을 알고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 카빌랴 신부는 대담하게도 ”계시“라고 말하고 있다. 오라또리의 뭇 소년들과는 달리 사비오는 특별히 일찍부터, 비교적 잘 교육된 발도꼬에 들어 갔다. 우리는 도미니꼬 사비오에게 있어서 돈보스꼬는 항상 한 가족과도 같은 깊은 감화력을 수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선천적으로 덕행이 높은” 소년 1842 ― 1854
도미니꼬는 1842년 4월 2일 끼에리 근방의 리바에서 대장장이인 챨스 사비오와 양재사인 브리지다 아갈랴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자는 아니었으나 선량한 신자들이었다. 1844년 그들은 모리알도로 이사했다.
그는 항상 순종적이었으며 상냥하고 영리했고, 나이에 비해 퍽경건한 소년이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부모들의 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 아인 우리를 귀찮게 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항상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 했답니다!! 도미니꼬의 부모들은 그의 신심의 표현에도 깜짝 놀랐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한 방문객이 점심 식사를 하기 전에 성호를 긋지 않자 도미니꼬는 그 자리에서 당장 그 사람에게 항의했다 한다.)
우리는 또한 돈보스꼬가 그의 영웅의 소년기를 기록할 수 있도록 돈보스꼬에게 주요 소재를 제공했었던 도미니꼬의 학교선생님들 중 세사람( 그들은 모두 성직자였으며 연이어 도미니꼬를 담당 했었다. )의 증언에서도 도미니꼬가 그러한 소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선생님인 모리알도의 교장 요한 주까 선생님은 도미니꼬의 훌륭한 가정 교육과 “학교에서의 주의력, 유순한, 근면”과 “성스러운 의식들에 대한 도미니꼬의 사랑”을 칭찬했다. 요한 주까 선생님의 지도하에 도미니꼬는 1849년 4월 8일 7살이라는 적은 나이에 첫영성체를 그 때 그는 4가지 결심을 세웠는데 그중 마지막 두 개는 특이한 것이었다; “내 친구들을 예수님과 성모님으로 만들 것이며, 죄보다는 죽음을 택하련다!!
1852년 6월 초부터 도미니꼬는 카스텔누오보 지방 학교에 다녔는대 그 곳에서 만난 알렉산더 알도라도 선생님 역시 도미니꼬에 대해 요한 주가 선생님과 같은 말을 한다. 알렉산더 알도라도 선생님은 학교에 다니기 위해 매일 10마일 씩을 걸어다니는, 다소 연약한 열 살 된 이 소년이 보여 준 인내심에 특히 감동을 받았다. 그는 또한 도미니꼬가 “크리스챤 학생의 의무라면 가장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이행했으며. “그는 항상 반에서 1등이었다!!고 증언한다.
도미니꼬는 카스텔누오보에 있는 학교에서는 단 몇달 간만 있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1852년 말 (혹은 아마도 1853년 초)에 가족이 몬도니오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서 도미니꼬는 요셉 꾸글리에로 신부의 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분은 어느 날 도미니꼬가 자기 친구들에게 벌이 내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대신 벌을 받았을 때 그를 눈여겨 두었다. 자기 제자의 총명함과 신심“을 더 알게 되자 꾸글리에로신부는 그를 돈보스꼬에게 추천하는 게 가장 좋으리라 생각했다. 한편 도미니꼬로서는 오라또리에 가고 싶어 했던 보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나는 내가 성직자가 되어 보다 쉽게 내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잇게 되기를 바랬다!!고 말했다.
1854년 10월 2일의 돈보스꼬와의 만남은 도미니꼬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만남은 그 시골 소년을 새로운 환경, 즉 그를 성스러음에로 인도할 기술을 지닌 대교육자 앞으로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오라또리에서의 도미니꼬, 1854 ―1857
10월 말에 도미니꼬는 또리노 즉 “오라또리집”에 있게 되었다. 그곳은 견습공들과 학생들로 붐비는 (그해의 기숙생 수는 115명에 달했다.) 다소 특별한 유형의 시설이었다. 초기 상점들이 운영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시내에 수업을 받으러 갔다. 도미니꼬는 본자니노 교수의 수업에 참석했으며 1년 내에 2년 간의 라틴어 코스를 완전히 끝마쳤다.
“얼마 동안의 그의 생활 방식은 극히 평범한 것이었다”고 돈보스꼬는 말하고 있다. “그는 규칙을 정확히 준수 했기 때문에, 그리고 또 열심히 공부에 전념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1854년 12월 초부터 돈보스꼬는 도미니꼬의 “덕행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미니꼬는 동정마리아 교리의 정의에 대해서도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열성적이었으며, 첫 영성체 때의 결심을 새롭게 함으로써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했다. 그 후 도미니꼬의 삶은 더욱 더 “함양”되어 갔다. 석달 가량 후인 1855년 3월엔가에 성스러움을 주제로 한 강론 ( 대살로니까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다 )이 있었을 때, 도미니꼬는 “성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한 결심은 “마치 불꽃과도 같이, 그의 마음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타오르게” 했다.
그러나, 돈보스꼬의 도움 덕택으로 도미니꼬는 잡다한 일상사를 멀리 하지 않았으며, 규칙에 따라 일을 철저하게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 대해서도 날이 갈수록 더욱 관심을 가지며 오라또리의 생활에 참여했다. 오라또리에서의 첫해에 그는 서로 죽일 것처럼 보이는 두 학생간의 결투를 막는 데 성공했다.
도미니꼬는 오라또리에서 젊은 프란체시아 선생님의 학급에서 이듬해(1855―1856)를 보냈다. 그의 건강이 근심되기 시작했으나, 그러한 걱정도 동정마리아회를 조직하기 위해 일단의 친구들(그들 중에는 루아와 본죠반니도 끼여 있었다)과의 일에서 그를 떼어 놓지는 못했다. 비록 실제적인 세부사항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도미니꼬 자신이 그 회의 회칙의 개요를 기초했다. “많은 작업 끝에” 1856년 6월 8일, 성모님의 제단 앞에서 그는 친구들과 함께 그 회칙 조항들을 낭독할 수 있었다. 미카엘 루아는 도미니꼬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856년 여름 동안 도미니꼬는 “다소 심각한 병”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휴가 기간 동안 오라또리에 남아 있겠다는 도미니꼬의 간절한 원의에도 불구하고, 돈보스꼬는 휴식을 취하게 하기 위해 그를 가족에게로 보냈다.
집에서 돌아 온 후 그의 건강은 상당히 호전된 듯 했다. 새 학년도 초에는 도미니꼬는 수업료를 받지 않은채 자기 반에 들여 준 마테오 피꼬 교수의 사립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시내에 나다녔다. 그에게는 이듬해 겨울이 몹시 힘들었다; 그는 “계속 되는 심한 기침”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손발에 온통 동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봄이 올 때까진 여전히 다소 불규칙적이긴 하지만 계속 학교에 나갔다. 자기 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자, 그는 자신의 열렬한 노력과 “선행들!! 특히 오라또리 내의 병든 이들에 대한 노력과 선행을 배가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1857년 3월 1일, 돈보스꼬는 의상의 권유에 따라 그를 집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미니꼬는 자신이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몬도니오로 갔다. 잠깐 병이 호전되는가 싶더니 3월 4일 그는 다시 병석에 눕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는 “폐렴”이라는 진단을 내리고서 그 당시 폐렴에 대한 치료 방법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출혈을 가했는데 이러한 조치는 다만 그의 임종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도미니꼬는 3월 9일 순수한 영혼들이 갖는 그러한 평온 속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열다섯살이었다.
도미니꼬 사비오의 영혼
그토록 짧고 단순한 생애를 지켜 본 몇몇 목격자들은 여하튼 그가 색다른 사람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고 증언한다. 요한 프란체시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다만 그가 충실하고 덕스런 소년인 것 같았었다는 말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나는 그가 주로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혹은 어떤 면에서 영웅적이었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알지 못합니다!!
돈보스꼬는 도미니꼬 사비오의 전기 속에서 그의 어린 영웅의 모습을 훨씬 더 명확하게 그리고 있다. 미카엘 마고네의 전기의 서두에서 도미니꼬 사비오를 언급하면서 돈보스꼬는 도미니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영웅적 자질이 엿보이는 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돈보스꼬는 자신이 무엇에 관해 애기하고 있는가를 확실히 알았다. 돈보스꼬는 2년 반동안 도미니꼬 사비오의 “영적 지도자”였기에 이 소년의 영혼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미니꼬는 사비오의 “덕성”중 어떤 것들은 사뭇 “영웅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서는 차분한 용기, 신심, 사도적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것들은 곧 도미니꼬의 특별한 영성 구조상의 특성이기도 했다.
차분한 용기
이 어린 소년 성인에게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힘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일찍이 그는 어릴 적부터 한 겨울에 아침 일찍 보미사를 본다든지 혹은 먼 등하교길을 걸어 다닌다거나 또는 부당한 비난까지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등의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떠맡았다. 발도꼬에서는 이러한 그의 정신력이 여러 차례 드러났다. 그는 “먹을 것도 부족하고 또 겨울이라 해봐야 난로 하나 제대로 없는 다소 힘드는 오라또리오의 생활”에 주저없이 뛰어 들었다. 아주 공손하고 상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때로 동료 학생들의 “무례와 위협과 모욕”을 참아내야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곤 했지만, 그저 조용히 가만 있었으며 즉시 그들을 용서해 주었다. 그의 마지막 병석에서도 또렷히 나타난 바와같이, 돈보스꼬에 따르면 고통 안에서의 그의 용기가 그를 “성자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독특한 인내력이 바로 수동적인 것 이라는건 아니다. 도미니꼬의 강인한 정신력은 자신의 의무들에 대한 정확한 완수 속에서 그리고 또 필요할 때면 그걸 증언하고 기록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지대한 감화를 주었다 활동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미 자기 몸을 다치게 될 지도 모르는 위협을 무릅쓰고서 돌을 가지고 결투하고 있는 소년들을 멈추게 할 때의 그의 용감한 중재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며, 또한 성체가 지나가고 있는 대도 무릎을 꿇지 않은 군인을 비판한 일이나 또는 벌받아야 할 자신의 잘못을 돈보스꼬에게 자기 스스로 애기했던 일 등을 알고 있다.
도미니꼬는 무한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도미니꼬에게서 “온총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하나의 위대한 인간적 힘”을 발견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력은 위대한 이상, 즉 그의 마음가짐을 잘 나타내 주고 잇는 표현인 “성인이 되는 것”에로 향해져 있었다.
돈보스꼬에게서 “자신의 순결을 보존하고자” 원하는 소년에게는 참회가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배운 후로 그는 음식, 오락, 대화, “심한 두통을 앓을 정도까지의” 철저한 감각 억제 등과 같은 모든 종류의 고행을 자진해서 행했다. 마침내 그의 지도자는 참회에 대한 이러한 갈구를 완화시키고 또 거의 잃어가고 있는 도모니꼬의 평상시의 유쾌함을 회복시키도록 돕기 위해 그에게 이를 중지하라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미니꼬는 돈보스꼬의 충고를 절대적으로 존중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열애자는 돈보스꼬에게 친절하고 고요하게 미소를 띤, 그리고 그 미소 뒤에는 변함없는 목적을 가진 소년이라는 기억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신심
도미니꼬는 명상적인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생애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읽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풍부히 내려 주신 여러 은총들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기도에 대한 열정이었다!!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는 노력 없이도 그의 영혼은 하느님 왕국과의 조화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듯 했으며, 기도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를 아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돈보스꼬는 그를 성 알로시오에 비유했다. 학교에서의 수업시간 전후의 암송기도 동안 도미니꼬가 보여 준 행동은 이미 피꼬신부에게 큰 감동을 안겨 주었었다. 돈보스꼬는 도미니꼬의 이러한 천성적 신앙심을 성모님과 성체께로 향하도록 지도했다.
1854년에는 도미니꼬가 “두번째로 만난 이”는 바로 성모 마리아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모 무염시태 교리에 의해 상징화된 순결에 주목하여, 불순을 방지하기 위해 그것에 대한 신심 행위에 전력을 기울였다. 도미니꼬는 “언젠가는 천상 어머니를 뵈오리라”는 원의 때문에 그의 눈길을 극히 조심했다. 특히 성모성월인 5월달 동안엔 그는 자신의 일상적인 틀에다 여러가지 특별 기도들과 습관들을 추가시켜 나갔다.
영성체 순간엔 성체에 대한 그의 신심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는 성체를 영할 때에나 혹은 성체를 조배하고 있는 동안에 때로 “탈혼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감실 앞에서 무릎꿇고 있을 땐 “시간이 금새 지나가 버리는 것과 같은 놀라운 것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그는 성 프란치스꼬 드 살레시오의 성당에서 거의 다섯시간을 그렇게 있었다.
사도적 관심
도미니꼬는 본래 다소 내성적이었다. “성스러워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는 돈보스꼬의 강력한 권고가 없었던들 그는 필시 결코 자시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지 않았을 것이다. 틀리 없이 돈보스꼬는 그에게 성스러움과 사도직을 결합 시키도록 가르쳤을 것이다. 카빌리아 신부는 사비오의 전기중 다음과 같은 구절을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여겼다: “도미니꼬는 하느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영혼들을 획득하는 것이 성스러워지기 위해 해야 할 맨 첫 번째 일이라는 충고를 받았다. 사실, 영혼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더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마지막 보혈을 남김없이 흘리셨던 까닭은 바로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중요성“을 일단 깨닫게 되자 도미니꼬의 사도적 관심은 그것을 항상 잊지 않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느님을 위해 모든 친구들을 남김 없이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리고 특히 학교에서, 그는 가능한한 모든 면에서 친구들을 도우려 했다. 특히 새로 온 사람이랄지 혹은 병자랄지, 혹은 공부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소 불리한 입장에 처한 이들을 도우려 했다. 그는 “오락의 활력소이자 넋”이기도 했으며, 자신을 좋아하는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친구들의 충격과 경악은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였다.
어떤 형태로든 그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행했으며, 그것은 항상 영성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모든 말과 그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마다 전부가 다른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것이었다”고 돈보스꼬는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욕설을 해대는 이들에게 부드럽게 경고를 하거나 친구들에게 기도를 권하거나 고백성사를 보도록 설득하거나 혹은 고리를 가르치는 등 자신의 나이와 환경에 알맞은 단순한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그러한 경우에 그가 사용했던 요령과 재치는 그의 방법들이 때로는 강론보다도 더 효과적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를 잘 알고 있었던 갈리에로는 도미니꼬의 친구들이나 혹은 심지어는 도미니꼬가 우연히 만났던 어른들 사이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변화들”에 대해 말하곤 했다.
도미니꼬의 위대한 업적은 그가 동정 마리아회의 창립에 있어서 중추 역할을 담당했었다는 점이다. 동정 마리아회는 주로 성모님께 대한 헌신(“성모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회가 오라또리오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라또리오의 가장 “반항적인 학생들” 사이에서 중요한 사도직을 수행해야 내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도미니꼬는 그 회의 가장 활동적인 회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아주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인 마싸리아, 가비오, 루아, 안젤로 사비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돈보스꼬에 따르면, 그의 사도정신의 마지막 측면은 교회와 교황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언제든지 교환님에 대해 애기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영국에서의 가톨릭교의 발전에 대해 열중해 있었다. 선교를 위해 기도할 때면 그는 항상 “우리 주님을 위해 많은 영혼들을 얻기 위해”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
청소년의 귀감
돈보스꼬는 “몇몇 모범적인 이들”을 알고 있었지만 “진실로 놀라운 생활 방침을 지니고 있었던” 도미니꼬 사비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헨리 보스꼬는 소년 성인과 어른 성인간의 유사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천성적으로 대단한 기억력과 빠른 이해력, 친절한 마음씨, 열렬한 신앙등을 타고났기에 학교에서는 완벽한 학생이었던 도미니꼬는 요한 보스꼬의 쾌활함과 성급한 성격과 튼튼함을 제외한 나머지 소년기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돈보스꼬는 도미니꼬에게서 ”그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신성한 이상“을 보았다.
도미니꼬를 청소년들, 특히 오라또리오의 소년들(돈보스꼬는 이들을 위해 1859년 도미니꼬의 전기를 써서 출판했었다)의 귀감으로 제시하는 것보다 더 돈보스꼬의 마음을 부듯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도미니꼬의 전기는 돈보스꼬가 살아 계시는 동안 제5판까지 거듭나왔으며, 그 중 걸작으로 꼽히는 알버트 까빌리아 신부의 “작품”으로 인해 도미니꼬는 각지의 모든 살레시안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게 되었고 찬미를 받기에 이르렀다. 교회는 비오 11세께서 “작지만 위대한 사도”라고 부른 바 잇는 이 소년을 뛰어난 귀감으로서 받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차즘 발견했다. 도미니꼬는 195년 3월 5일에 비오 12세에 의해 시복 되었으며, 이어 1954년 6월 12일엔 시성을 받았다.
도미니꼬의 첫 경쟁자들
도미니꼬가 오라또리오를 떠났을 때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소년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가장 탁월한 이들은 미카엘 마고내(1845―59)와 프란시스 베수꼬(1850―1864)였다. 이 두 소년들은 도미니꼬와는 전혀 성격이 달랐지만, 도미니꼬와 같은 열렬한 원의를 가지고 있었다.
미카엘 마고내는 때로 학교에서 쫓겨나기까지 한 활발하고 괄괄한 성미를 지닌 소년이었으며, 어느 날 카르마뇨라의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돈보스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깡패단의 두목이었다. 1857년 가을에 오라또리오에 들어 온 이래 마고내의 그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태도는 여전했지만 그는 조금도 “개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의 13번째 생일이 지난 반년 뒤인 1857년 1월 21일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알프스산의 양치기 소년”인 프란시스 베수꼬는 보다 조용했다. 가족과 교구 신부님의 영향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그는 1863년 10월부터 발도꼬에 있으면서 그의 좋은 성품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가 그곳에 있게 된 기간은 14번째 생일을 3개월 앞둔 1864년 1월 9일에 죽기까지 겨울 5달 뿐이었다.
돈보스꼬가 지은 두 소년에 대한 전기 덕분에 그들은 비록 도미니꼬 사비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점차 유명해졌다.
7
오락
오락에 대한 돈보스꼬의 긍정적 태도
돈보스꼬는 한 사람의 교육가로서 청소년들이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했으며, 그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그는 늘 자신의 소년기를 떠올리곤 했다. 그는 즐거움이 학습 과정상에 미치는 좋은 영향들과 장점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오락을 중시하였다. 소년들의 생활에는 게임과 유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돈보스꼬는 몸소 소년들의 오락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오락을 발전시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돈보스꼬는 기묘한 솜씨로 오라또리오에서 행해지던 게임이나 음악, 연극, 소풍 등의 오락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게임들에 대한 돈보스꼬의 경험
돈보스꼬는 게임이나 체조에 대해 경험만을 지녔던 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진정한 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점을 감안해 볼 때, 우리는 그가 천성적으로 그것들을 타고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 리칼도네 신부가 지적했던 바대로, 돈보스꼬와 같은 그런 예외적 신체적 특성을 지니게 된 행운을 타고난 교육가는 극히 드물다.
돈보스꼬는 거의 전 생애동안 꾸준한 연습을 통해 근육의 힘이라든가 민첩함과 같은 재능들을 발전시켰다. 돈보스꼬는 젊었을 때에는 옆 재주넘기, 손으로 땅 짚고 거꾸로 서서 걷기 등과 같은 공중곡예와 여러 가지 묘기들을 행할 수 있었다. 그는 진짜 공중곡예사처럼 가느다란 줄 위에서 뛰고, 달리고, 춤도 추었다. 명랑회 시절 그는 전문 곡예사와 겨루어 이기기도 했다. 르몽 신부는 모두가 숨이 차 헐떡였던 1868년의 소동 하나를 증언하고 있다; 돈보스꼬는 오라또리오의 운동장에 8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정렬시킨 후 달리기 경주를 벌였는데, 54세나 된 돈보스꼬가 거기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1883년 파리 방문중에 돈보스꼬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 와하는 가운데 맨손으로 호두를 까고 있었다. 소년들의 게임을 장려하였으며, 때로 소년들의 게임에 직접 참여했던 까닭에 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그는 발도꼬에서 “아이들의 왕”이 되었다. 돈보스꼬의 우선적 관심사 중 하나는 오라또리오에 “구가용 나무공이나 죽마, 장난감총, 나무칼, 간단한 운동기구”등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소년들은 달리기, 뜀뛰기, 팀대항 경기등 모든 종류의 게임에 참여했다. 돈보스꼬는 소년들에게 자신이 소년시절에 배웠던 운동이나 요술부리기, 줄과 막대의 사용 요령 등을 가르쳐 주는 참으로 살아 움직이는 활동가였다. 그가 바라로따 게임에 참석할 때면, 게임의 열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한쪽 편은 돈보스꼬를 잡는 영광을 원하였고 다른 한쪽 편은 승리를 기뻐했다.”
기숙사의 운동장은 인기 있는 곳 중 하나였다: 돈보스꼬는 오락의 영향을 살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르몽 신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한쪽 편은 돈보스꼬를 잡는 영광을 원하였고 다른 한쪽 편은 승리를 기뻐했다.”
기숙사의 운동장은 인기 있는 곳 중 하나였다: 돈보스꼬는 오락의 영향을 살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르몽 신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운동장을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오락이 소년들의 생활에 가져다주는 소란과 순수함, 태평한 마음, 기쁨 등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운동장 구석구석이 경주자들의 발에 의해 평평하게 다져졌다; 돈보스꼬는 이 모든 활동의 생명이자 영혼이었다. 돈보스꼬가 그의 방에서 그들이 놀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면 언제나 그가 그들의 게임과 대화에 끼여들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발코니 위에 모습을 나타내기라도 하면 운동장 곳곳에서는 그 즉시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오곤 했다.”
교육수단으로서의 게임들
돈보스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게임들이 지니고 있는 교육적 진가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교육가로서 신체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게임은 소년들의 생활, 특히 학생들의 생활에 필요 불가결한 휴식수단이다. 그러므로 돈보스꼬는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움직임이 많은 것들보다는 “카드놀이나 장기, 또는 그 외의 여러 가지 테이블 게임”과 같은 정신을 요하는 것들을 더 좋아했다. 돈보스꼬께서는 “정신에도 역시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오라또리오의 운동장엔 벤취가 하나도 놓여 있지 않았다. 오락들은 재미있었고 자유스럽고 즐거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사실, 돈보스꼬는 여러 가지 오락의 선택과 조직은 소년들의 자유재량에 맡겨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으며, 필요한 경우 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교사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느님을 거스리거나 혹은 게임 참가자들에게 해악을 미칠 것 같은 게임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임은 신체와 정신의 발달수단이기도 했다. 돈보스꼬의 생각으로는 오락은 정신과 신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돈보스꼬는 게임에는 여러 잇점들 중에서도 특히 정신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가 게임 재능과 도덕적 덕성간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하곤 했던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 돈보스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결코 좋은 정신 상태일 리가 없는 권태를 게임이 예방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만일 그 놀이가 재미있었다면, 그것은 정직과 신뢰와 안정감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가 좋아했던 금언 중 하나는 “항상 웃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종종 가서 놀자는 초대말 이기도 했다.
게다가 돈보스꼬의 마음속에는 항상 영신적 사도적 동기가 꽉 차 있었다. 돈보스꼬는 성빌립보네리가 소년들에게 했던 말을 자주 반복해 말하곤 했다: “적절한, 시간에 마음껏 뛰어 놀아라. 하지만 죄에 빠져드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 여러 가지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돈보스꼬는 이를 훨씬 능가했다. 돈보스꼬의 생각은 1876년 6월 25일에 그가 성알로시오 신심회 소년들에게 들려주었던 다음과 같은 말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이 즐겁게 지내면서 게임도 하고 또 명랑한 걸 보니 무척 마음이 뿌듯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알로시오처럼 성스럽게 되는 길입니다.” 또리노의 사도 돈보스꼬는 “생활의 기쁨을 성화시켰다”는 말을 듣고 있다.
우리는 돈보스꼬가 살레시안 교육자들과 “영혼을 구원하길”갈망하는 소년들에게 보냈던 호소들을 바로 이와 같은 사도적 견해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돈보스꼬는 소년들에게 게임에 참석하라고 격려했으며, 교사들에게도 소년들과 함께 게임에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1884년 5월에 쓴 한 중요한 편지 속에서 돈보스꼬는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야말로 소년들의 교육과 훈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제1의 성공요소라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돈보스꼬는 교사는 운동장에서 소년들의 기쁨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자신의 애정을 잘 나타낼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교사가 소년들에게 요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의무와 관계가 소년들에게 항상 기쁜 것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운동장은 소년들로 하여금 선생님의 사랑과 관심을 느끼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사비오와 마고네와 같은 가장 훌륭한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오락이 “영혼에 좋다”는 것을 배웠었다.
돈보스꼬와 음악
음악은 돈보스꼬의 또 하나의 중요한 관심사인 동시에 교육 수단 중 하나였다. 음악과 노래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증거해 주는 얘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돈보스꼬는 자신의 “꿈들”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목소리들” “선율이 흐르는 합창” “천상의 하아모니”등에 관해 말하곤 했다. 대부분의 이태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보스꼬도 역시 항상 노래하길 좋아했다. 또한 그는 고운 테너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학생시절에 돈보스꼬는 카스텔누오보에서 바이얼린과 피아노, 오르간을 배웠으며, 그 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돈보스꼬는 오라또리오 초기에 소년들을 위해 성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성악분야에 있어서 최초의 대중 강좌
돈보스꼬가 1845년 성악 대중 강좌를 시작했을 때 그는 개척자라 불리울 수 있었다. 음악 교습은 당시만 해도 주로 극히 사적인 일이었다.
돈보스꼬는 음악가이자 올겐주자였던 루이스 나시와 미카엘 키아텔리노라는 두 성직자의 도움을 받아 학생들에게 성악과 단성율 성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명한 대가들”이 매일 저녁 그를 도우려 왔다.
돈보스꼬는 대단히 칭송 받을 일을 하는 합창단을 기어코 조직하려 했다. 당시 피에몬떼의 성당들에서는 여성 성인 합창단이나 여성 성인 독창자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기에 소년 합창단은 진가하게 여겨졌다. 발도꼬 오라또리오의 소년 합창단은 인기가 대단했으며, 또리노, 몬카리에로, 끼에리 등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종교음악에 있어서 돈보스꼬는 당신의 풍조를 따르지 않았다.
당시 교회 음악의 세속적 성격과 국적 효과에 불만을 느낀 그는 예전에 영예를 누렸던 그레고리안 성가의 영예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다 소박하고 단순한류의 음악을 발전시키려 했다.
기악
또리노에 있는 오라또리오의 성가에 마침내 기악이 결합되었으며 다른 살레시안집들 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오라또리오의 소년들이 빌립보씨네 들판에서 놀곤 했을 때의 드럼 소리와 트럼펫 소리는 돈보스꼬가 말을 하기 위해 주의를 끌려고 사용했던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또리노 주위로 소풍 갔을 때에는 드럼과 나팔과 기타가 밴드 전체였으며 “비록 전체적으로 소리가 잘 어울리지 않아 시끄럽긴 했지만 여하튼 소년들의 목소리와는 잘 융합되었다.”
공식문서상으로는 1855년에 처음으로 악대에 대한 언급이 있다. 돈보스꼬는 견습공들 사이에 악대를 조직했었으며, 처음 몇 년 동안에는 악기가 모두 12개뿐이었다. 돈보스꼬는 밴드부원들에게 선했을 요구했으며 1859년에는 불복종을 이유로 그것을 잠시 해체하기도 했다. 밴드부원들은 오라또리오 밖에서의 연주를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1876년에 악단은 란조의 철도 개통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란조라는 작은 고울 로서는 철도 개통식은 대단한 사건이었으며, 그 같은 초대는 당시 이태리의 교회기관으로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영광이었다.
1870년에 찍은 한 재미있는 사진을 통해 우리는 오라또리오 악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사진은 모자를 쓰고서 악기를 들고 있는 의기 양양한 음악가들에게 에워싸인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돈보스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음악과 교육
1859년경 오라또리오의 지도자는 음악실의 문에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내걸었다: Ne impedias musicam.(음악을 방해하지 마시오). 돈보스꼬는 노래와 음악을 방해 하기는 커녕 그것들을 장려했다.
흔히 얘기되고 있듯이, 돈보스꼬가 음악을 장려했던 동기는 확실히 실리적인 이유에서였거나 혹은 도덕주의적인 이유에서였다고 생각된다. 돈보스꼬는 음악은 “소년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의 하나라고 말했다. 소년들은 음악을 통해 그들 교구의 사제들을 도울 수 있었다; 음악은 특히 소년들을 “항상 바쁘게”만들었기에 소년들에 대한 “강력한 어씨스트 수단”이기도 했다; 음악은 학교생활에게 빚어지게 마련인 단조로움을 깨뜨려 주었다.
체리아 신부는 음악이 지니고 있는 교육적 가치를 지적하길 잊지 않았다; 돈보스꼬께서는 소년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음악적 방식을 좋아 하셨다. 즉 소년들을 정화시키고 함양시키며 발전시키는 음악의 방법을 좋아 하셨던 것이다. 언젠가 돈보스꼬께서 마르세이레스의 종교 집회에서 얘기하셨던 바와 같이 돈보스꼬에게는 ꡒ음악 없는 오라또리오는 영혼 없는 육체와도 같은 것이었다.ꡓ 돈보스꼬는 교육에 있어서의 성공비결 중 하나를 음악에서 찾아내기까지 했다.
돈보스꼬는 자격을 갖춘 음악교사들을 길러내길 열망했으며, 또한 그에게는 다른 사람의 재능을 발견하여 가꾸어 완성시켜주는 기묘한 솜씨가 있었다. 돈보스꼬가 길러 낸 최초의 음악선생은 “살레시안 음악 전통의 선두 주자”인 요한 갈리에로였다. 오라또리오의 음악선생님이었던 그는 베르디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유능한 작곡자였다. 1875년 갈리에로가 아메리카로 떠나자 돈보스꼬는 요셉 도리아나라는 살레시안 수사를 발견하여 그 후임자로 삼았다. 요셉 도리아니 수사는 이후 50여년 동안이나 Schola cantorum(합창단)과 오라또리오의 악단을 지휘하다 193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위대한 작곡가이기도 했으며, 브레스치아, 밀라노, 제노바, 로마, 마르세일레스 등지에서 자신이 거느린 성악가들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비오 10세께서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던 성음악의 개정을 도와 드리기도 했다.
소극장
진정한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극장(돈보스꼬는 그것을 “소극장”이라고 부르길 고집하셨다)은 음악과 더불어 오라또리오의 오락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극장의 기원은 “오라또리오인들”이 프랑소니 대주교님 앞에서 “나폴레옹의 하사관”이라는 제목의 희극(대주교님은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즐겁게 관람하셨다)을 상연했던 1847년 6월 29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소극장에 대한 생각이 실제로 구체화되기까지에는 또 다시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다. 통학생들에게 고백성사를 주는 시간인 일요일 오전에 기숙생들을 기숙사에 계속 붙들어 두기 위해 돈보스꼬는 칼 토마티스라는 청년에게 그가 지닌 코메디 재능으로써 소년들을 즐겁게 해주라고 권했다. 그리하여 토마티스는 꼭두각시 소극을 편성하였으며, 1851년 당시에는 익살극과 짧은 코메디를 상연하였다. 이러한 연극물 들은(시 “협회”나 음악 “협회”들과 더불어)오라또리오에서 으뜸으로 찬사를 받게 될 때까지 계속 발전되었다.
발도꼬에서는 돈보스꼬나 르몽신부가 직접 지은 쇼들이 피에몬떼사투리나 이태리어로 종종 상연되기도 했다. 때로 프란체시아 신부가 준비한 라틴어 작품이 프로그램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리노의 교양인들도 이러한 연극들을 무척 좋아했다.
1858-1866년에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당의 지하에 있는 식당방이 “소극장”으로 사용되다가 후에는 자습실이 소극장으로 사용되었다. 돈보스꼬의 후계자인 루아 신부는 돈보스꼬의 유업을 이러 받아 1895년 전용극장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다.
극장의 목적; 연출, 가르침, 교육
1871년 돈보스꼬가 초안을 쓴 소극장에 대한 요강은 연출과 훈련 및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돈보스꼬는 “소년들을 웃기는”가벼운 코미디물을 좋아했다. 그는 너무 비극적이거나 격렬하게나 우울한 연극은 싫어했다. 그에게는 공연 전과 공연 중의, 그리고 공연 후의 기대와 기쁨의 분위기가 중요한 학습 요소였다.
또한 그에 덧붙여 극장은 반드시 교육적이어야 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유명한 예를 알고 있다: 1849년 돈보스꼬는 “미터법과 십진법”이라는 3막 짜리 희극을 직접 쓰고 연출했다. 그 연극을 관람했던 아포르티라는 교사는 그것을 아주 좋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보스꼬는 그보다도 더 재미있게 십진법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연극이야말로 웃으면서 배우는 사례이다.” 돈보스꼬에 의하면 극장은 이 외에도 “발음을 교정하고 연설을 배우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는 막간의 휴식시간이 “훌륭한 문귀 들을 낭독”하는 시간으로 사용되기를 바랬다. 이는 돈보스꼬의 “소극장의 특색 중 하나였다.
때로 돈보스꼬가 극장에 대해서 간신히 참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나, 극장은 돈보스꼬의 교육 방법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극장을 “도덕성과 선한 삶과 거룩함을 위해 잘 선정된 연극들을 제공해 주는 학교”로 여겼다. 돈보스꼬는 연극에 의해 위험스런 주제들이 소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매우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과연 돈보스꼬는 극작가들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더덕을 가르쳐야 한다고 기대했던가? 너무도 도덕적인 해석을 가했던 르몽 신부에 대해 돈보스꼬가 지적했던 바를 미루어 보면 우리는 돈보스꼬가 “도덕을 별개의 실재물”로 다루려 하는 것보다는 이야기 속에 교묘하게 “도덕성”을 삽입해 넣는 접근법을 더 좋아했다고 할 수 있다. 돈보스꼬는 언제나 조악한 연출이나 연기 스타일에 대해서는 비난을 가했다. 항상 그렇듯이 돈보스꼬는 주의 깊으면서도 적극적인 접근법을 사용했다.
하이킹과 소풍
일찍이 루소는 장차 돈보스꼬가 동의할 그런 견지에서 산보의 잇점을 격찬한 바 있다. 성직자이자 교육자였던 돈보스꼬는 여러 가지 점에서 산보가 오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돈보스꼬는 오라또리오 초기에 꾀 오랫동안 산보와 순례를 실시했었다. 또리노 교외의 구릉지에 있는 순례지 수페르가에로의 산보는 1864년까지만 해도 하나의 전통으로 남아 있었다. (오라또리오의 회고록)속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글과 재미있는 설명들이 풍부히 남아 있다; 돈보스꼬와 함께 가벼운 식사를 나누던 일, 헐떡이는 말을 탄 돈보스꼬와 함께 바실리카에 오른 일, 여러 가지 악기들의 소음, “웃고 장난하고 노래부르고 소리치다 지친” 소년들의 기쁨, 도착과 동시에 “개걸스레 먹어대던 소년들의 식욕”... 그들은 때로 베네딕또회에서 “사그라 디 산 미켈레”라 부르던 곳과 “몬테데이 카쁘찌니”나 사씨, 베끼... 등지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1855년 봄에 돈보스꼬가 소년수들을 위해 마련했던 산보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돈보스꼬는 라따찌 장관으로부터 소년수들을 스투피니기로 데리고 나가 하루 동안 놀고 오겠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특전-더구나 돈보스꼬가 자신은 경관들이 뒤따라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여 사복 경찰관들의 도움마저도 거절했던 터에 법무관들을 다소 걱정케 만든-이었다. 돈보스꼬는 모든 책임을 자기로 약속하였다. 다행히도 소년들은 돈보스꼬를 노새에 태우고 노새가 싣고 가던 짐은 자신들이 짊어졌다. 야간 점호시간에 출석을 불러 보았더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돌아 와 있었다. 이러한 소풍들은 젊은이들 안에 열성을 부러 일으켰으며 돈보스꼬는 그들과 기쁨을 함께 했다. 사실, 돈보스꼬는 아주 재미있는 지도자였다. 그들이 지나는 곳들의 역사나 지리, 민간 전승 등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서는 돈보스꼬의 관심을 받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는 항상 지식을 나누어주고자 했으며 그런 기회들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가을 수학여행
소풍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847-1864년 동안에는 9,10월에 약 3-4주에 걸쳐 수학여행이 실시되었었다. 수학여행은 진짜 축일과 다름없는 중요한 경축일이었다.
우선 첫째로, 선행에 상응해서 참가권이 주어졌으며 수학 여행이 실시되기 몇주 전부터 음식, 잠자리, 음악, 노래, 연극 등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돈보스꼬가 미리 의견을 타진해 본 교구 사제들은 모두들 기꺼이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수학여행-대개 몬페라또의 언덕들을 빙 돌아오는 여행-은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에게도 유익한 체험이었기에 영성적 측면이 잊혀진 적이 없었다.
로사리오 축일엔 수학여행단은 전통적으로 베끼에 들렸으며, 거기에서 돈보스꼬는 소년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의 집과 헛간을 설명해 주었다. 마지막 몇 년 동안엔 돈보스꼬는 철도청으로부터 객차 두 칸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제노바나 지중해까지도 무료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객차들은 그들이 원하는 거라면 어느 열차에나 부착시킬 수 있었으며, 필요한 경우 그들은 “고관급”으로 대우받을 수도 있었다.
프로그램은 경건함과 즐거움을 조화시켜 짠것이었다. 그들은 대개 귀가 터져 나갈 듯한 악대소리와 함께 마을에 들어섰다. 그들은 곧장 그 마을의 성당으로 향했으며, 그들 뒤에는 선량한 그 마을의 사람들이 다소 놀란 채 뒤따라갔다. 간단한 예식과 강론 후에 이내 그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에는, 미사가 거행된 후에 여러 가지 오락과 음악회가 있었다. 저녁에 성체 강복 후엔 중앙 광장이나 실내에서 연극을 상연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수학여행 기간 내내 거듭 되풀이되었다. 그들은 때로 많은 군중을 매료시켰다.
돈보스꼬는 이 인기 있는 수학여행이 “휴가철의 위험”으로부터 소년들을 지켜 주리라고 생각했다. 수학 여행은 소년들에게 사도적 직무를 행할 기회를 부여해 주었다. 돈보스꼬의 전기작가의 말에 의하면, 돈보스꼬는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과 건전한 즐거움을 갖는 것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소년들에게 보여 주려”고 했다.
8
살레시오회의 탄생
1850-1864
라따찌 장관의 조언
1857년 어느 날, 돈보스꼬는 라따찌 장관을 배알하게 되었다. “오라또리오 사업”과 그것의 장래에로 이야기가 미치자 라따찌 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제 말을 받아들이신다면......신부님께선 우선 신부님이 신뢰하고 있는 평신도와 성직자 몇을 뽑아 하나의 조직체 안에서 그들을 결합시켜 당신의 정신으로 무장시키시고 당신의 체제 속에서 훈련시키시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협력자가 되게 할뿐만 아니라 장차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당신의 사업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뜻밖의 조언이었으며, 돈보스꼬로 하여금 회심의 미소를 띠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2년 전인 1855년 5월29일에만 해도 반교회적이었던 라따찌 장관은 “시민법이 인정하고 있던 도덕적 조직체들, 즉 수도회에 속한 집들에서 가르치거나 교육을 실시하거나 환자를 치료하는 등의 이를 못하게 하는”악명 높은 법률을 표결에 붙였었기 때문이다.
기존 종교 단체들에 타격을 가할 태세를 취하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 돈보스꼬에게는 새 수도회를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돈보스꼬가 그렇게 깜짝 놀랐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라따찌 장관의 그 말들이 돈보스꼬에게는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는 것이다. 돈보스꼬는 정부의 입장에서 보기에 “원하는 시민끼리 모여 사는 자선 협회”로 보일 모임을 창설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부의 의향을 알게 된 돈보스꼬는 장관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드린 후 장관의 부하 직원들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나 왔다.
라따찌 장관은 사실은 다만 “오라또리오의 사업”에 관한 돈보스꼬의 생각과 관심에만 성원을 보냈던 것이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돈보스꼬의 노력의 단초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한다.
1850년의 상황
1850년의 상황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돈보스꼬는 여늬 교구 사제나 마찬가지로 단순한 한 교구 사제에 불과했다. 물론 그가 당시에 발도꼬와 포르타 누오바, 반칠리아에 있던 “오라또리오”라 불리우던 다소 특별한 곳을 관장하고 있었음은 사실이다. 발도꼬 오라또리오는 집 없는 청소년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시작되었다. 돈보스꼬는 프랑소니 대주교의 인가를 받아 이 집들을 운영했다.
돈보스꼬는 그 일을 해나감에 있어서 오라또리오와 막연히 관련을 맺고 있던 “교구 오라또리오회”라 불리우는 단체의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도움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주교님이 항상 이 오라또리오들의 상관이었으며, 모든 것이 대주교님의 의견과 조언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른 모든 면에서는 어느 모로 보나 오라또리오에 근무하는 사제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서약은 없었지만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일을 하겠다는 단순한 약속에 따라 그들의 동료 돈보스꼬를 자신들의 상관으로 여기고 있었다.”
발도꼬의 지도자는 오라또리오의 확실한 권위자로 남기를 원했다. 1848년의 한 일화는 그가 항상 비난받아 왔던 “고집”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그해 그의 친구 캐논 로렌스 가스탈디는 “운영위원회”에 의해 운영되는 일종의 오라또리오 연맹체를 제안했으며 보스꼬는 거기에 가입하길 단호히 거부했다. “그의 가입은 그를 발도꼬 오라또리오만의 감독자의 위치로 몰아 넣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걸 돈보스꼬는 깨닫고 있었다.”고 체리아 신부는 말한다. 돈보스꼬는 “행동의 자유를 갖기 위해, 그리고 또한 사람들을 전적으로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이미 독립을 추구하고 있던 중이었다 연합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다.
돈보스꼬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회는 당시 자신의 밑에 있던 성인 원조자들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1850년에 이미 확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변절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정치적 동기에서 또 어떤 이는 개인적 동기에서 그를 싫어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다루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는 그 동안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얼마 동안 그는 자신의 사업에 필요한 수단을 알아보고 있었으며 원조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를 타진해 보면서 한편으론 자신이 가입할 수 있는 기존제도가 있나 를 살펴보았다. 이것은 결국 그에게는 시간 낭비였다.
가끔 마다 자신의 꿈들에 의해 “키워져 온”희망, 즉 미래의 “작은 목자들”은 양떼들 가운데에서 나올 것이라는 한가지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문제들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바로 그 시기에 그는 이 생각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서 학생들을 처음으로 오라또리오에 데려 왔다.
대주교의 계획
대주교는 망명지 리용으로부터 돈보스꼬에게 성원을 보냈다. 1852년, 대주교는 돈보스꼬가 더 많은 일을 해내길 바라면서, 또한 “오라또리오의 사업”기반을 굳건히 다지기 위해(이에 덧붙여, 돈보스꼬를 비방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기 위해) 3월 31일자 공식서한에서 돈보스꼬를 세 곳의 오라또리오들의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그 서한 속에서 대주교는 오라또리오들의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그 서한 속에서 대주교는 오라또리오의 사업이 “진전되고 확장”되길 바라며 아울러 자신은 “필요한 권한”을 승인해 줄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공표 했다.
한편, 프랑소니 대주교께서는 돈보스꼬는 그의 경험을 다른 이들과 공유해야 할 것이며, 그의 사업을 이끌어 온 정신을 다른 사람에게도 불어넣음으로써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리아 신부는 대주교님이 진실로 돈보스꼬로 하여금 수도회를 창설하라고 독촉했던 거라고 생각하나, 대주교님은 마음속으로 다만 교구적 모임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확실하다.
젊은 지도자들의 조직
오라또리오의 기초를 다지는 일은 몹시 힘든 일이긴 했지만 돈보스꼬가 그에게 확신을 주는 학생들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1852년에 오라또리오의 기초를 마련했던 것 같다.
당시엔 그런 모임이나 수사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조심스럽게 신중을 기해야 했다. 만일 어떤 이가 수사들에 관한 얘기를 꺼낼라치면 소년들은 웃어버리곤 했다 한다. 따라서 돈보스꼬는 자신의 작전을 이러한 분위기에 잘 적용시켜야 했다. 그는 몇몇 소년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훌륭히 던지곤 했다; “넌 돈보스꼬를 좋아 하니? 여기 오라또리오의 성직자가 되고 싶지 않니? 미사에 넌 돈보스꼬를 도와 젊은이들을 위해 일해 보고 싶지 않니? 너도 이미 알다시피 내가 만일 성직자 100명과 수도자 100명을 갖게 된다면 난 청소년들 모두를 위해 일할 수 있을 거다.”
그는 그의 첫 “지원자”들을 위해 그가 틀을 잡아 주었던 생활방식에 대해서도 똑같이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외적인 종교족 관습들, 즉 규칙적인 묵상, 너무 긴 기도들, 너무 엄격한 의식들을 피하고자 했다.” 돈보스꼬가 지원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착한 크리스챤들”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애쓰라는 게 전부였다.
다행히도 돈보스꼬는 많은 화살들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무엇보다도 그와 그의 집이 받고 있던 흠모와 사랑 덕분에 커다란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갈리에로가 “수사이든 아니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여하튼 전 돈보스꼬와 함께 살렵니다”고 말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애정 때문이었다.
애정을 별 문제로 치더라도 돈보스꼬는 어떤 숭상을 불러 일으켰다. 즉 그는 기적을 행할 수 있고, 꿈을 통해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으며, 상대방의 가장 내적인 생각들까지도 알아 낼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비공인 수도회, 1854-1859
1851년 2월2일, 4명(레비글리오, 가스티니, 부재띠, 벨리아)으로 구성될 첫 그룹이 오라또리오에서 착복식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이 오라또리오를 떠나거나 혹은 사제직에 이르지 못하게 됨으로써 이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대신에 다행히도 돈보스꼬는 보다 어린 소년들이 기대에 덜 어긋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기 마음속으로 구상하고 있는 수도회를 위해 점차 준비시킬 작정으로 보다 적당하게 뵈는 소년들을 “회의에”정기적으로 참석시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1845년에 처음 만났던 미카엘 루아가 이내 이 그룹의 두드러진 구성원이 되었다. 미카엘 루아는 1852년 6월5일의 “회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짤막한 말을 남기고 있다; 그 “회합”에서 돈보스꼬께서는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 둔 원대한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특별한 목적을 위해 우리들의 기도를 부탁한다고만 하셨다.
그로부터 약2년 뒤, 그 계획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54년 1월 26일에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축일에 앞서 돈보스꼬는 그의 방에 4명의 젊은이들-성의를 입은 두 명의 신학생(이들 중 한명은 미카엘 루아였다)과 학생 두 명(이들 중 하나는 요한 갈리에로 였다)을 불러 들였다. 미카엘 루아는 그 중요한 모임에 대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돈보스꼬께서는 주님과 성 프안치스꼬 살레시오의 도움을 빌어, 우선 우리가 우리 이웃들을 위해 선행을 행함으로써 우리 자신들을 시험한 연후 약속을 맺은 다음, 만일 가능하다면, 그리고 원한다면, 하느님께 정식 서약을 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셨다.” 동의한 사람들 혹은 동의할 이들은 그 날 저녁부터 “살레시안들”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용어들이 다소 애매했던 까닭은 돈보스꼬가 신중을 기했던 때문이었다. 돈보스꼬는 마음속으로는 사실 “수련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었으나 그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웃을 향한 자선의 실천에 대한 시험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당시 그들을 정말로 크게 감동시켰던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들이 기도하고 또한 일하게 될 거라는 기대였다.
왜 하필 “살레시안들”이라 불리우게 되었던가? 사실 이 용어는 전혀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제노바의 주교였던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에 대한 돈보스꼬의 헌신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돈보스꼬는 이미 오래 전에 오라또리오를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보호하심에 맡겨 드렸으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막 성당을 지어드렸던 참이었다. 그 외에도(해방법들에 의해 힘을 얻은)프로테스탄피즘이 피에몬떼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 돈보스꼬는 미래의 교회박사를 가톨릭 사상의 옹호에 대한 모범자로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돈보스꼬가 살레시오 성인을 모범자로 택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후에 그가 말한 것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우리 회는 지도하는 이나 순명 하는 이 누구 나를 막론하고 모두 살레시오 성인의 특징적 덕목들인 자비와 온화에 그 기반을 두어야만 합니다.”
돈보스꼬는 수련기-그 누구도 감히 이 명칭을 사용하지 못했다-의 마지막 해는 그 다음 단계와 더불어 동시에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의 중에 그는 다소 “학술적인”방식으로 수도서약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1855년 3월에 그는 미카엘 루아에게 정결, 청빈, 순명을 서약토록 한 후 그것을 승인하였다. 그 의식은 아주 신중하게 치러졌다. 돈보스꼬의 방에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끓고 돈보스꼬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카엘 루아는 1년간의 우기서약을 했다. 그것은 3월 25일에 있었던 간단한 의식이었있지만, “네 벽들 안에서 위대한 어떤 것이 탄생한, 즉 한 수도회가 이제 막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고 오후 레이 신부(상상을 무척 좋아하는)는 말하고 있다. 사실, 철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불과 18살의 그 젊은 미카엘 루아는 그 의식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오라또리오들의 사업”에서 돈보스꼬를 돕고 싶다는 것 뿐이었다.
몇 달 후 비슷한 의식이 그와 똑같이 간단하게 치러졌다. 이번에는 돈보스꼬의 오랜 친구인 빅토르 알라소나띠라는 사제를 위한 것이었는데, 그는 1854년 8월14일 오라또리오로 오기 위해 또리노 가까이에 있는 알비리아나의 교사직을 그만 두었었다. 오라또리오의 경리였던 그는 오라또리오의 규율과 경영에도 책임을 질 수 있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기에 돈보스꼬에게 굉장한 도움을 주었다. 42살의 나이로 서약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은밀히 일망정 돈보스꼬로부터 서약의 목적에 관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었을 것 같다.
1856년에는 18세된 세례자 요한 프란체시아가 서약을 했다. 그는 이미 얼마동안 오라또리오와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교양과정을 훌륭히 이수한 후 1855년에는 발도꼬의 1학년 교사로 임명되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점차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돈보스꼬는 적당한 사람을 발견할 때마다 일 이 년 동안 단순히 “자신과 함께 일하기로”하는 서약에 그 사람을 초대하곤 했다. 빈번한 비공식 회합을 통해 돈보스꼬는 그들이 수도회의 회원으로서 보다 투철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준비시켰다. 그 회합들의 특징이었던 친밀한 분위기는 돈보스꼬의 정신과 방법들을 그들의 공동목적으로 부각시켜 주었다.
공식 수도회, 1859
1859년 이전까지에는 돈보스꼬를 수도회의 장상으로 여길 만한 근거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그의 제자들도 그를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발도꼬의 지도자의 주위에는 자기 스스로 수단을 입었던 유능한 성직자들이 많았다. 이것은 오직 교구에서 “오라또리오사업”의 필요성을 인정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이들 성직자들 중 오라또리오에서의 일 때문에 면제를 받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교구참사회의 예비시험을 받아야 했으며, 신학교의 수업에도 참석해야 했다.
돈보스꼬는 이로 인해 자신의 계획들이 어그러지길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창설하고자 하는 수도회릐 획칙을 조용히 준비했다. 1857년에 그는 라따찌 장관으로부터 “계속하라”는 신호를 받았다. 프랑소니 대주교님과 자신의 몇몇 친구들의 격려를 받은 그는 로마로 갔다. 1858년 3월에 그는 “회헌”-이 때까지 그는 이 용어를 조심스레 피해 왔었다-의 초안을 비오 9세께 내보였다. 교황님 자신도 회원들이 모두 “교회에서 보기에는 수도자들이고, 일반 사회에서 보기에는 시민들인”회에 대해 호의를 보이셨지만, 돈보스꼬가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까지에는 그 여행 이후로도 여러 달이 지나야 했다.
1859년 12월9일, 돈보스꼬는 회원들에게 수도회에 관해 얘기해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남겨진 자료에 따르면, 돈보스꼬는 자신의 방에 “살레시안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랫동안 나는 수도회를 창립하는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왔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교황 비오9세 성하 께서는 나를 격려해 주셨으며 그러한 생각을 칭찬하셨습니다.
양심적으로 여러분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고 또 여러분도 양심상 전혀 얽매여 있지 않지만... 사실 이 회는 여러분이 이미 지켜 오고 있는 규칙과 규정 하에 이미 존재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이 정신적으로는 이미 이 회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여러분 중 몇 사람은 약속이나 임시 서약을 통해 그 규약들에 대한 입장을 보다 분명히 해왔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야만 합니다. 즉 우리는 그 모임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켜 그 모임에 명칭을 부여하고, 그 규칙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사숙고한 연후에 청빈과 정결과 순명을 서약코자하는 사람들만이 입회 허락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간 우리 회합에 참석해 왔던 여러분들 모두는 제가 택했던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장차 언젠가는 “살레시안”-이는 장차의 회가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보호하심에 맡겨질 것임을 가리켜 준다.-이란 이름을 얻게 될, 아니 그러한 이름을 가지게 될 회의 회원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었기에 여러분들을 선발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입회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이후로 내가 소집하는 회의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석치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입회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여러분에게 일주일간의 여유를 드리겠습니다.ꡓ
회합이 끝나자 평소 때 완 달리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으나 일단 말문이 열리자 그간 돈보스꼬가 계속해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일해왔던 것이 얼마나 잘한 일 이었나가 분명히 드러났다. 어떤 이들은 돈보스꼬가 자신들을 수사로 만들려 한다고 불평했다; 마음이 착찹해진 갈리에로는 이러 저리 뜰을 거닐었다.
그러나 대부분 “돈보스고와 함께 남아 있겠다”는 쪽으로 기울어 졌다. 일주일 후인 12월13일 저녁에 열린 “안준식”에는 두 사람만이 빠져 있었다. 그 회의에서는 살레시오회의 첫 의사록이 된 숨서가 작성되었다. 그 문서에는 돈보스꼬를 포함한 18명의 첫 회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집 없는 청소년과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을 위해 오라또리오가 요구하는 진정한 자에 정신을 증진시키고 보존하는 것.” 그리고 나서 그것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개인성화를 이룩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 특히 도움과 배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들의 영혼구원을 도모하는 회 혹은 모임을 만들고자 함이 여기 모인 이들의 바램이다.”
“평의회”가 구성되었으며, 돈보스꼬는 만장일치로 수도원장직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원장의 권한으로써 이미 오라또리오에서 관구장직을 맡고 있던 빅또르 알라소나띠를 그대로 유임시켰다. “영적 지도자”로는 부재인 미카엘 루아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으며, 안젤로 사비오 신부는 회계를 맡게 되었다. 선출하게 되어 있던 세 사람의 “심의 위원”으로는 요한 갈리에로, 요한 보네띠, 카알 치바렐로가 뽑혔다.
3개월도 대 안된 1860년 2월2일, 요셉 로씨라는 지원자를 심사하기 위해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회” 평의회가 소집되어 처음으로 그 업무를 수행했다. 관례적인 절차에 따라 “살레시오회의 규칙을 익히게 하기 위해” 그를 입회시키도록 결정했다. 그리하여 로씨는 최초의 살레시안 “평수사”가 되었다.
1860년 5월1일, 위와 같은 절차를 거쳐 베드로 까쁘라, 바오로 알베라(후에 총장이됨), 요한 가니노, 가브리엘 모모에게도 입회가 허락되었다. 이틀후, 또 다른 세 사람즉 도미니꼬 루삐노, 프란치스꼬 바쉐띠, 에드워드 도나또의 입회를 위해 평의회가 또 열렸다.
초창기의 살레시안들은 대부분 아주 어렸다. 왜냐하면 “살레시오회의 규칙들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돈보스꼬는 주저치 않고 순진한 중학생들을 입회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평범한 갖의 출신이었으며, 아주 가난한 이도 몇 있었다.
1862년 5월14일은 살레시오회가 그 토대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간 날이다. 모든 중요한 회의들이 열렸던 그 방에 모두 모여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회원들은 청빈과 정결과 순명을 서약함으로써, 앞으로 3년간 수도회의 규칙들을 지켜나가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다.” 창립자를 빼고 모두 22명이었다. 2년 전에 신부가 되었던 루아 신부가 그 서약들을 한 구절씩 선창했고, 돈보스꼬는 감격에 젖어 회원들에게 미래에 대한 용기와 확신을 내용으로 하는 말씀을 남겼는데 그 중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주께서 우리 회를 이용하셔서 선업을 행하실 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일 지금껏 우리를 도와 주셨던 것처럼 계속 하느님께서 우릴 도와주신다면 25년 혹은 30년 후에 우리 회는 세계각지로 퍼져 나갈 것이며, 회원도 천 여명에 이를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당시 그 같은 말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져 확실하게 믿기지 않았을 지도 모르나, 앞으로 차츰 알게 되겠지만 돈보스꼬의 그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초기 살레시안들의 교회법상의 지위
돈보스꼬가 거쳐왔던 긴 여정과 또한 그가 극복해내야 했던 편견들을 되돌아보면, 그가 지금까지의 결과에 대해 만족해하고 나아가 미래에 대해 더욱 더 희망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내적인 사정은 거칠 것 없이 분명하고 전도가 유망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외부 세계와의 관계들은 여전히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었다. 교구 참사회와는 때로 오라또리오의 신학생들에 관해 갈등이 있었다. 철학과 신학이라는 막중한 공부와 돈보스꼬가 오라또리의 신학생들에게 맡긴 그 수많는 업무들이 서로 어떻게 양립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 곧 문제였다. 하지만 오라또리오의 신학생들은 때로 우수한 시험성적을 얻었다. 그 문제 말고도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오라또리오의 신학생들 중 몇몇이 또리노에 있는 일반 대학교에 다녔던 것이다. 돈보스꼬는 장차 살레시오 학교들을 맡기기 위해 오라또리오의 신학생들이 문학, 철학, 수학등의 국가 공인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일반 대학에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혁신은 큰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교회법적으로 보자면 살레시안에게는 확실하게 이렇다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유효한 것이 있다면 다만 교구장의 구두인가가 있을 뿐이었다. 유배 중인 대주교에게로 보내진 1860년 6월11일 자의 요망서를 통해 이 방면의 조처가 취해졌다. 프랑소니 대주교님 개인으로는 이 새 수도회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분의 고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식인가가 자꾸 연기되다가 결국 1862년 3월26일 대주교가 세상을 떠났을 때까지도 공식인가를 받지 못하고 말았다. 그분의 후계자들은 자립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돈보스꼬의 계획에 대해 조금도 열의를 보여 주지 않았다.
체리아 신부에 따르면, 돈보스꼬를 중심으로 하는 살레시안들은 결국 1864년에 “전적으로 사적인 수도회”를 조촐히 창설했다. 평의회에서 행한 선출과 임명은 그들 창설자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시행되었다.
교회법상의 문제가 확실하게 해결(그것은 결국 해결되긴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돈보스꼬는 그의 계획 중 적어도 일부를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는 그의 후계자들이 될 “협조자”들에 대해 눈을 떴다.
살레시안 수사들
어씨스텐트
돈보스꼬가 소년들을 위해 벌인 대사업에는 도움을 받아야 할 부분들이 많았다. 평신도들 몇이 돈보스꼬를 돕고 있었으며, 돈보스꼬는 당연히 이들을 살레시오회에 통합시키려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살레시안 회헌 원본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본회의 목적은 성직자 회원들과 일반 평신도 회원들을 일치 시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성덕을 열심히 따름으로써,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도움으로써 완성에 이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한편, 돈보스꼬는 평신도들-세속 안에서 살고 있는 크리스챤이든지 혹은 서약을 맺은 수도자들이든지 간에-의 사도적 활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다. 평신도들에 대한 그의 이러한 관심은 콘비또 신학원 시절, 특히 요셉 카파쏘 신부로부터 얻게 된 것이었다. 돈보스꼬는 오랫동안 란조 근처에서 실시된 성 이냐시오회 평신도들을 위한 영성 수련에 충실했다. 자신의 경험과 또 여러 범주의 크리스챤들과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든 사람이 전부 “완성”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돈보스꼬가 수도회를 처음 구상하고 있을 때부터 수사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수사들에 대한 착상은 경험을 통해 나중에 새겨난 것이었는가를 가려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평신도 살레시안들에 관한 돈보스꼬의 설명 속에서 우리는 불확실한 것들 몇 가지를 그리고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기조차 한 것들 몇 개를 발견할 수 있다. 여하튼, 전문적 지위에 있는 자격을 갖춘 이들이 살레시안 사업에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옳은 것 같다.
오라또리오에서 기숙생들을 위한 작업장을 처음 열기 시작했을 때 돈보스꼬가 극복해 내야 했던 난관들과 불확실성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마다 조만간 에 항상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가 당시 직면하고 있던 문제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다; 돈보스꼬는 자기들의 독립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숙련공들에게 재량권을 주느냐, 아니면 일반 숙련공들의 업무를 한정된 영역에 제한시키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그렇게 되면 필시 일반 숙련공들의 흥미와 책임감의 결여로 인해 작업장이 결국 폐쇄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결과가 아주 좋지 않았다; 기술상의 지도가 미비했으며, 견습공들이 고통을 당하였고, 무질서가 배가되었으며...... 여러 가지 장비 실습들도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마침내 진실이 드러날 순간이 다가왔다. 숙련공들에게는 전문 능력이 필요불가결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돈보스꼬는 기술상의 능력과 또한 그 능력을 효과적으로 전해 줄 능력을 겸비하려는 회원들을 발견해 내지 못하고서는 아무런 기능 훈련도 시키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살레시안 수사는 이 문제에 대한 이상적 해결책이었다. 돈보스꼬는 확실히 유능한 수사들을 기러내어 그들에게 책임의식을 심어주고 수준 놓은 훈련을 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줄 평신도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사제들을 발견해 내기보다도 더 어려웠다. 한편, 우리는(후에 알게 되겠지만)수사라고 해서 모두가 기능공이 될 것은 아니었다는 걸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최초의 평신도 살레시안들
이미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요셉로씨는 1860년 2월2일에 “살레시오회의 규칙들을 익히도록”허락을 받았던 최초의 평신도였다. 파비아 지방 마떼오 출신인 25살의 이 젊은이는 그에 앞서 몇 달 전에 책을 통해 돈보스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로씨와 더불어 “수사”란 용어가 처음으로 살레시안 어휘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 대주교님께 보내진 1860년 6월11일자 살레시오회 서한 속에 로씨와 더불어 요셉 가이아라고 하는 또 한사람의 이름 뒤에 “수사”란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로씨는 1862년 5월14일에 있었던 첫 회원식 에서는 빠지게 되었으나, 거기에 참석했던 22명의 회원들 속에는 아주 상이한 배경을 지닌 두 사람의 평신도가 끼여 있었다. 가이아는 여러 해 동안 오라또리오에서 음식을 만들어 오고 있었다: 프레드릭 오레글리아 디 상또스테파노는 또리노의 귀족 중 한 사람이었다. 유진 체리아 신부에 의하면 프레드릭은 1860년에 성 이냐시오 수도원으로 은둔하러 가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여러가지 로맨틱한 사건들”을 체험했다 한다. 그곳에서 돈보스꼬는 프레드릭의 삶을 바꾸도록 격려했다. 그 후 프레드릭은 살레시안이 되었다. 9년 동안 오라또리오에 크게 공헌한 후 그는 그곳을 떠나 예수회에서 그의 생을 끝마쳤다.
돈보스꼬는 수사 성소를 찾아냄에 있어서 당연히 아주 신중을 기했으며, 오랫동안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거나 설명하기를 피해 왔다. 만일 돈보스꼬가 그것에 관해 조금이라도 얘기를 꺼냈다면, 그것은 그전에 사제 성소의 경우에서처럼 항상 간접적인 것이었다.
돈보스꼬는 1876년에만은 수사들에 관해 공개적으로 말했다: 남아메리카로 떠났던 최초의 사도들을 수행한 선교단에 대한 열정을 심어 주기 위해, 돈보스꼬는 소년들에게 “아르헨티나에서 요한 갈리에로 신부와 함께 일하고 있는 평신도들도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선교사라 불릴 자격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 해 3월 19일에 열린 한 회의-이 회의에는 특히 견습공들이 많이 참석했었다-에서 돈보스꼬는 사업의 확장을 위해서는 성직자들이 coadiuvato(도움)받을 필요가 있으며, 학생이건 혹은 견습공이건 간에 모두 “진정한 복음 전파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3월31일 “밤 인사”시간에 돈보스꼬는 견습공들에게 수사라는 특별한 성소에 대해 설명해 주었으며, 아울러 살레시오회 안에서는 이러한 성소가 어떻게 개발될 수 있나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들에게 돈보스꼬는 “성직자나 학생들뿐만 아니라 견습공들을 위해”새 수도회가 만들어졌음을 일러주었다. 그는 새 수도회를 “성직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좁기 위해 함께 일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행하려는 견습공들의 수도회”라 표현했다. 돈보스꼬는 작업장에서 전에 그들의 동료였던 지오이아, 스까비니, 벨몬테, 모라나리 이 네 사람들이 아메리카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수사가 되었으며 그곳 아메리카에 아주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설명들은 수사가 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을 충분히 극복하게 해 주었을까? 통계가 그 대답을 보여 주고 있다. 통계를 살펴보면 성직자들의 수가 항상 더 많긴 하지만, 수사들의 수도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860년에는 2명, 1870년-23명, 1880년-182명, 돈보스꼬의 임종시-284명(그중 100명은 수련자).
수사들의 태생
수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오라또리오의 견습공 출신이었다; 이 젊은이들은 돈보스꼬가 그것을 제안했기에, 그리고 그들 자신의 눈으로 수사들의 생활을 지켜보았던 까닭에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맨 첫 수사들은 프레드릭 오레글리아의 경우처럼 외부 출신들이었다. 돈보스꼬의 그의 많은 학교들 및 그의 책들의 명성은 젊은이들과 성인들을 매료시켰다. 1880년 1월, 새 수도회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을 즈음, 돈보스꼬는 “세속을 떠나 어떤 일이라도 떠맡을 각오가 되어 있는”사람 중 20에서 35세 사이의 젊은이들을 오라또리오로 보내달라는 부탁이 담긴 안내장을 여러 교구의 사제들에게 띄워 보냈다.
미래의 살레시안들 중 사제직과 평신도 수사직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엔 사제가 되려고 생각했다가 후에 수사가 되기도 했다.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해 1851년에는 착복식을 가지기도 했던 요셉 부제띠는 이 경우에 해당된 사람이었다. 그는 사고로 왼쪽 집게손가락을 잃고서 사제직을 포기했다. 이와 반대의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해 동안 돈보스꼬의 개인비서를 지냈던 안젤로 라고 신부는 처음엔 수사였었다. 제1차 총회에서는 이러한 “승격”에 관해 많은 논의를 벌였다; 다른 수도회에서는 그것을 금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돈보스꼬는 그 경우 해당 본인이 사제에게 요구되는 “품행과 성향”을 지니고 있는 한 괜찮다고 했다.
물론 배경과 능력이 서로 상이했기 때문에 수사들의 지위에 있어서 어려움을 낳았다. 좀더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할 때 어떤 난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1884년 9월에 루아 신부는 수사직 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범주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제안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변호사나 의사, 약사, 교수가 교육받지 못한 동료들 속에 섞여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돈보스꼬는 단호하게 이에 반대했다: “저는 두 계층으로 수사들이 분리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덧붙여 그는 거칠거나 바보 같은 사람도 그의 수도회에 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루아 신부는 그러면 프란체스꼬 제3회와 비슷한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그는 돈보스꼬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 없었다.
수사들의 직무
초창기 수사들인 프레데릭 오레글리아와 요셉로씨, 요셉 부제띠는 그들의 출신 성분과 능력이 서로 상이했듯이 그들의 직무도 서로 달랐다. 수사들은 외부 숙련공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는 작업장의 규율과 유지를 맡아보았다. 견습공이었던 수사들은 그들 자신이 훈련받은 그 작업장의 지도를 맡았다. 그러나 모든 수사들이 전부 전문적 분야에 임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인기 있었던 수사들 중 하나인 마르셀로 로씨는 48년 동안 수위였다. 도미니꼬 파레스트리노와 안또니오 란테리처럼 향방계원인 사람도 있었고 혹은 요셉 팔코나 프란치스꼬 마쉐로니, 요셉 루빠로처럼 요리사인 사람도 있었다.
(돈보스꼬께서는 살레시안집 하나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 적어도 세 사람-지도자, 수위, 요리사-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진료소에서 일하면서 작업장이나 부엌, 이발소 등의 일을 도왔던 루이스 나시나 혹은 때로 음악선생을 맡았다가 극장 책임자를 맡기도 하고 요리사, 페인트공, “가을소풍”편성 등을 담당했던 베드로 엔리아와 같은 잡역부도 몇 있었다. 돈보스꼬는 그들에게 “당신은 쓸모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인물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작곡자 요셉 도글리아니, 살레시안 기록 보관자 요셉 감비노, 페인트공 안드레아 펠라짜, 재단사 베드로 첸시, 그리고 돈보스꼬가 매우 신뢰하였으며 이태리와 해외에서 돈보스꼬를 위해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돌봐 주었던 관리인 요셉 로씨등과 같은 수사들은 자기들의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브레이도 신부는 초창기 시절의 수사들은 자기들의 전문업무만을 맡아 본 게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수사들은 직접적인 사목 분야와 교육분야에서도 사제들을 도왔다. 예를 들어, 짐꾼이었던 마르셀 로씨는 축제 오라또리오에서 일요일마다 교리를 가르쳤으며, 요셉 부제띠는 “교리반을 거들었다.” 또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향방 계원을 맡아보던 벨몬테는 음악가이자 교리교사이기도 했다.
점차적 보완
살레시오회 내에서의 수사의 위치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를 때에는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브레이드 신부는 “교리상 조금씩 명시되기 시작한 후 100년 뒤인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보여지고 있는 바와 같은 수사의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전적으로 기발한 ꡒ창작물ꡓ로서 세상에 출현했던 게 아니고, 동요와 불확실성 가운데에서 점차 나타났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수사”라는 용어가 한동안 살레시안 수도자들과 또한 살레시안 수도원에서 살던 “벗들”이라 불리우던 이들 모두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1867년에 씌여진 원고에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수사들은 요리사, 세탁부, 짐꾼 세 사람이 전부다. 용어상의 혼란은 수사들이 때로 자기들의 “종”으로 취급받고 있다고 불평했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돈보스꼬께서 살레시오회의 수사들을 격하시킬 가능성에 대해 반발을 보이셨다는 건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돈보스꼬의 말년에는 수사들의 위치를 격하시킬 가능성에 대한 반동조치들이 결정했다. 그 결과, 1886년의 총회에서는 평신도, 다시 말해서 수사들의 독특한 공헌들을 뚜렷이 그려내기 위해 보다 긍정적인 표현들을 사용했다. “오늘날 가톨릭적 사업과 우리 자신들의 수도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신도들의 효과적인 도움에 의존하고 있다. 때로는 오히려 평신도들이 사제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해내기도 한다.”
후에 살레시안들은 수도회 내의 모든 수도자들의 특성에 대해 주석 하거나 혹은 정의를 내릴 때면 종종 위의 돈보스꼬의 발언들에로 거슬러 올라갔다. 루이스 리날디 신부는 “살레시안 수사는 보조자나 일꾼이 아니며 더욱이 수도회 내에서 형제가 되는 사제의 오른팔도 아니다. 수사는 사제와 동등하며, 또한 완전성에 관해 말하자면,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 오히려 수사가 사제들보다 더 나을 때도 있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여기 이 아이러니한 점에 주목해 보라: 필립 리날디 신부는 수사는 사제의 보조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돈보스꼬가 말했던 “수사(coadjutor;조수․보좌인)”란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안토니오 칸델라 신부는 보다 법률적인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었다: “수사는 사제들의 종이 아니라 사제들과 동등한 사람들입니다. 이 때문에 수사는 사제들과 똑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똑같은 규칙들을 지키고 똑같은 신심업에 참여하며, 휴일에 대해서도 똑같은 권리를 지니며, 또한 사후에도 똑같은 대사기도로 은혜를 입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수사는 미사를 거행하지 않으며 영적 지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도이자 교육가로서의 수사
창립자의 말씀 몇 가지를 읽고서 돈보스꼬가 수사들에게 살레시안 집들의 운영에 필요한 물질적 “어씨스텐스”만을 요구했다고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들어, 위에서 언급된 바 있는 교구 사제들에게 보낸 서한 속에서 돈보스꼬는 살레시안 수사 지원자들의 사도적 혹은 교육적 임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요구했던 사람은 “수도회에 맞는 희생적 삶”을 살아 나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들과 정원과 부엌, 제빵소”에서 일을 도와주고 식당일 을 더욱 확고하고 자세하게 취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수사의 위치를 명시했던 것은 1883년 10월19일 산 베그니뇨에서 있었던 수사 수련자들의 회의와 1886년 총회 동안의 조정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돈보스꼬의 분명한 태도를 찾아보아야 한다.
살레시오회 내에서의 수사의 위치
그러므로 수사는 종도 단순한 평신도도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1876년 돈보스꼬는 “회원들 간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는 것에 주의하시오: 모든 사람들은 그가 견습공이건 성직자이건 사제이건 간에 모두 똑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형제들입니다.”라고 말했다. 1883년의 한 모범적인 강연 중에 돈보스꼬는 정확한 정의나 법률상의 용어를 빌려 말한 건 아니었지만 수사의 “존엄성”에 대해서 누누히 강조했다: “여러분은 괴롭고 고달프게까지 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컨대 여러분은 어떤 일정한 한계 내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는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지도할 임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작업장의 업무에 관한 한 그곳의 주인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레시안 수사의 이면에 숨겨진 근본의도입니다. 이 분야에서 절도와 줘야 할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알맞은 침상과 방들을 제공받게 되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하인이 아니라 주인이어야 하며 노역자가 아니라 감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언급들은 수사들을 2류 살레시안들로 여기려는 유혹에 대한 돈보스꼬의 반동을 보여준다. 그런데 돈보스꼬의 이와 같은 반동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유혹이 크게 밖으로 드러난 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살레시안 사제들에게도 그 죄가 있었다. 1883년 제1차 총회 때에 다음과 같은 제안들이 있었다: “수사들을 억눌러 분리된 그룹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안들에 대해 몹시 화간 난 돈보스꼬는 “안돼요, 안돼, 안됩니다. 수사들은 다른 회원들과 똑같이 모두 동등합니다.”고 회쳤다. 그 때 돈보스꼬는 이미 마음을 돌보며 집안 청소를 거들어 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만일 충분한 교육을 받은 사람의 경우라면 비서직을 수행할 사람을 돈보스꼬는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장차 우리 학교들에서 직업훈련을 마친 다음 우리 살레시오회의 여러 작업장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될 예정이었다.
체리아 신부가 얘기한 대도, 돈보스꼬는 오직 돈보스꼬 자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돈보스꼬는 마음속으로 수사들은 “진정한 복음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도원에서 소년들과 함께 하는 그들의 현존이 단순한 경영자적 현존이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보스꼬는 이것을 너무도 명백하게 느꼈기 때문에 그것을 성문화하는 데 별 곤란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제3차(1883년)와 제4차(1886년)총회 동안에 작성된 오라또리오들에 관한 회칙은 이런 유형의 일에서의 수사들의 사도적 임무를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모든 살레시안 회원들은,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간에, 그들 자신을 행복하게 여겨야 하며 자기의 일을 자아 중요한 사도직으로 여겨야 한다.”
교리교사 수사들의 예를 이러한 사도직이 이미 여러 가지 실적적 직무들에 참여한 사람들에 의해 수행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수사들의 사도적 교육적 사명에 대한 창립자의 통찰력은 이보다 훨씬 더 발전적인 것이었으며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알베라 신부는 수사들의 사도적 교육적 사명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들을 이끌어 냈다: “우리 살레시오회의 수사들은 교리를 가르치고 사회 종교적인 회의등을 개최하고 초등학교나 중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숙련공이 되고 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년들을 도와주기 위해, 다시 말하자면 우리 사도직의 다양한 프로그램 가운데 사제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지 않는 모두 직무들을 충분히 이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훈련시켜야만 한다.
수도자로서의 수사
살레시안 수사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수도자이다. 리날디 신부는 돈보스꼬께서는 “완전한 수도자”가 되시려 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복음의 완성이란 결코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 있다.”
수도자들은 일정한 의무들을 수행한다. 제4차 총회는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상황마다에서, 수도원 안과 밖에서, 말로 행위에 있어서 자신들이 언제나 훌륭한 수도자임을 보이십시오. 왜냐하면 수도자를 만드는 건 천성이 아니라 수도자가 지녀야 할 청빈, 정결, 순명의 덕들에 대한 실천이 수도자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세속과의 접촉을 용이하게 하고 또 좋은 모범을 보여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수사들의 복장이 일반 사람들의 복장과 구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돈보스꼬의 바램이었다는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Profili di trentatre coadiutori salesiani(살레시안 평수사 33인의 생애)의 저자인 유진 체리아 신부는 자신들의 품위와 단순성으로써 타인들을 감동시켰던, 그리고 꾸밈없는 상냥함과 사리를 갖춘 종교적 정신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교회시켰던 위대한 인물들에 대해 찬탄하고 있다.
그들이 수도자였기에 돈보스꼬는 늘 그들을 돌보아 주었고, 그들의 사명에 대해서 그들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었으며, 그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들을 도와주었다. 선교 생활에 지쳐버려 수도회를 포기하고자 했던 바르돌로메오 스까비니는 돈보스꼬로부터 짧은 쪽지를 받은 후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기가 배치되어 있던 수도원에서 떠나 얼마 동안을 밖에서 보냈던 리찌히라는 사람이 다시 되돌아오고자 결심했을 때 돈보스꼬는 그의 귀환을 아버지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돈보스꼬를 최근 재속 수도회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사상의 선구자로 간주하지 않고서는, 평수도자들에 대한 그의 견해들이 균형 잡힌 것이었으며 또한 그 언 때보다도 더욱 민주적으로 되어 가고 있었던 사회에 잘 적용되는 것이었다고 보기가 힘들어 질 것이다. 살레시안 회헌의 한 조항은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우리를 부르심으로써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해야 할 형제들을 주셨다. 사랑과 소박한 서약들로 맺어진 우리들은 서로를 돕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함에 있어서 한마음 한 영혼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10
1874년까지의 살레시안 회헌
우리는 1855년경의 살레시안 회헌의 초판에서부터 1874년의 회헌의 최종 인가까지의 과정 속에서 돈보스꼬가 초창기 살레시안들을 모집했던 방법을 추적할 수 있다. 회헌 인가 과정은 약 20년 동안의 끝없는 노력과 걱정을 수반하는 길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조사와 연구, 원문의 압축, 반대자들의 책략은 말할 것도 교회 권위자들의 체험과 제언들을 기초로 한 계속적인 수정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그것이 성공적으로 끝마쳐질 거라고 희망할 수 업게 하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러나 돈보스꼬는 그 일이 자기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이 그 일을 계속해 나갈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일을 해내고야 말했다.
준비
살레시안 회헌이 준비되기 시작했던 것은 최초의 수련기가 끝나 비밀 서약들이 행해졌던 해인 1855년에 시작되었음에 틀림없다.
돈보스꼬가 새 수도회에 대한 규칙들(혹은 회헌)의 초안을 대략 마련한 것은 그 때였다.
이 규칙들이 기본 전제들은 주로 돈보스꼬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고안된 것이었다. 여기서우리는 오라또리오와 발도꼬 집의 지도자로서의 그의 경험이 이미 1847년에 작성된 통학생들의 오라또리오를 위한 규칙과 1852-1854년 동안에 개발된 오라또리오 집을 위한 규칙들 속에 성문화되었음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문서는 훨씬 뒤인 1877년에 가서야 출판되었다. 1855년, 돈보스꼬는 자신의 이전 경험을 글로 옮길 수 있었다. 위의 문서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앞의 두 문서가 회헌의 기초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문용어와 정신성에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돈보스꼬는 정보를 입수하려 애썼고 여기 저기서 충고를 듣고자했다. 그는 교회사를 통해 수도회의 기원과 형태, 발전 과정을 연구했다. 돈보스꼬는 고대 수도회들의 규칙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로스미니의 자비의 회나 란테리의 동정녀 마리아의 수도회와 같은 최근의 수도회들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다. 돈보스꼬는 수도회에 대해 정통한 사람들의 의견도 수렴하려 노력했다.
수도자적 생활의 불변적인 본질을 보존하면서도 교회의 여건들을 그 시대상황에 맞게 적용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돈보스꼬는 확신했다. 수도원 억압을 위해 마련된 1855년의 법령 때문에 돈보스꼬는 더욱 이것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는 피에몬떼에서 일어났었던 변화들을 명확하게 고려하고 있었으며 반성직자적 자유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그 자신의 시대에 새 수도회를 적응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살레시오회의 창립자가 교회 당국자들 앞에서 그의 수도회의 시민적 자격을 철저히 옹호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또한 돈보스꼬가 자신의 수도회가 지니는 자애의 측면을 강조했던 것은 억제 법령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857년 그와 라따지 장관과의 대화만이 그의 생각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2년간의 준비 끝에 드디어 회헌이 마련되었다: 이 초판 회헌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회헌이 마련됨으로써 성직자 단의 인가를 얻기 위한 정식절차들이 시작되었다.
1858년의 회칙
유배지 리용에서 돈보스꼬의 최근의 동향을 전해들은 프랑소니 각하는 그를 크게 격려했다. 프랑소니 각하는 돈보스꼬에게 하지만 만약을 위해 교황 비오9세 성하께 가서 그의 계획에 대해 얘기하라고 충고했다. 돈보스꼬는 1858년 2월에 당시 신학생이었던 미카엘루아를 대동하고서 로마를 향해 떠났다. 그는 이 여행에 회헌의 원고를 가져갔다.
3월 9일 첫 알현 때부터 교황 성하께서는 그 후로도 결코 시들지 않았던 큰 친절을 보여 주셨으며 또리노에서 온 이 원기 왕성한 사제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성하께서는 무엇보다도 그 창립자의 의지와 목적을 인정해 주셨으며 돈보스꼬에게 관심 어린 몇 마디 충고를 덧붙여 주시면서 그가 지금껏 해 온 일을 계속해 나가라고 격려해 주셨다. 다음은 초창기 살레시안 역사가가 교황 성하께서 그 때 돈보스꼬에게 들려 주셨던 말씀을 요약한 것이다:
“정부가 당신의 수도회를 참견할 수 없도록 당신의 수도회를 건설하시오. 회원들을 결합시킴에 있어서 단순한 약속만으로 만족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회원들 간의 유대나 혹은 장상과 회원간의 유대가 충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기 전까지는 회원들을 완전히 믿어서도 안되고 또 회원들에게 의존해서도 안 될 것이오. 이러한 원칙들에 따라 회칙을 작성하시오. 그러면 그 뒤에 우리가 작성된 그 회칙을 검토하겠소.
당신의 과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명심하시오: 세상에 있으면서 눈에 뜨지 않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오.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분이 당신의 길을 밝혀 주실 것이오. 가서 기도하시오. 그리고 며칠 뒤에 다시 외시오. 그러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당신에게 말해 주겠소.ꡓ
교황 성하의 알현에 만족한 돈보스꼬는 본래의 회헌 원문을 교황님의 충고에 따라 고치고 수정했다. 루아 신부는 이 새 원본을 배껴 두었다.
교황님과의 두 번째 알현은 3월21일에 있었는데 성하께서는 이 두 번째 알현에서 자신의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나타내 주셨다.
“당신의 계획에 대해서 줄곧 생각해 봤소. 난 당신이 젊은이들을 위해 좋은 일들을 많이 해내리라 확신하게 되었소. 지금 하고 있는 대로 계속해 나가시오. 당신의 오라또리오를 존속시키고 또 젊은이들의 정신적 욕구들을 보살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길 밖에 없을 것이오 나는 이제 우리는 두 가지 전제들에 입각한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즉 새 수도회는 반드시 서약 위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이오. 서약 없이는 정신적 일치와 목적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오. 다른 하나는 하지만 그 서약들이 ꡒ단순ꡓ해야 한다는 것이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회원 중 어떤 사람의 잘못된 의지로 인한 문제와 불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오. 또한 그 규칙들이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해야 하오. ꡒ수도회ꡓ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그저 “회”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오. 간단히 말하자면, 교회의 눈으로 볼 때에는 회원들이 수도자가 보이나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자유로운 시민으로 보일 길을 발견하도록 하시오.ꡓ
돈보스꼬는 “성하, 당신은 여기에서 20여 년 동안 오라또리오에서 자신들을 헌신해 왔던 사람들을 지도해 주었던 정신과 규범들을 발견하실 겁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다듬은 회헌의 원문을 비오 9세 교황성하께 제출했다.
회헌의 맨 첫 초본은 1858년과 1859년 사이에 작성된 듯 하다. 그것은 짤막한 서문과 더불어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음은 그 각각의 장들의 제목이다: 본 회의 기원(이 부분은 후에 생략된다), 본회의 목적, 본 회의 구성, 순명서약, 청빈서약, 정결서약, 본회의 규칙과 규율, 장상들, 입회 교황 성하께서 권한 바에 따라 이 회헌은 겉보기에는 “수도회적”규정을 전혀 담고 있지 않았으며 번잡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가난한 소년들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다만 “말과 서류 상으로는”사람들 가운데서 가톨릭은 지지하고자하는)서약으로 결합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단체를 연상했다. 또한 그 회헌에는 설사 전통적인 수도회들에 대해서는 적대감정을 지니고 있는 정부라 할지라도 그 회헌에 대해 기분이 나빠할 만한 문구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살레시안들은 그저 보통의 시민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시민이었다. 사실 “서약한 뒤에도 각 회원은 자신의 시민적 권리와 재산 소유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자연히 “그 회원이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는 한 그의 재산에서 얻어진 이익이 수도회에로 돌아갔다.” 이것은 당시의 자유주의적 세속에서 수도회가 누렸던 참으로 이상한 특권이었다.
회헌 인가의 지연
조그마한 초창기 살레시안 그룹이 다달이 성장해 가고 또 1859년 12월에는 수도회가 정식적으로 설립되었던 반면, 돈보스꼬는 자꾸만 회헌을 다시 기초하고 다듬어야 했다. 5년 동안에 “마지막”초고가 무려 6번이나 재작성 되었다.
이처럼 회칙인가가 자꾸 연기되었던 주된 원인은 지방 교구장들의 함묵 때문이었다. 로마 교황청의 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돈보스꼬는 여러 교구장들의 추천서, 특히 그가 속해 있는 교구장의 찬성표를 확보해야 했다. 피에몬떼주의 주교들은 기꺼이 찬동해 주었던 반면, 프랑소니 주교는 돈보스꼬에 대해서는 지극히 선의를 보이면서도 그 문제를 서두르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또리노시의 참사 위원은 살레시오회와 또리노 주교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 같다. 1862년에 프랑소니 각하가 선종 한 뒤 그분의 후계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냉랭하게 내버려 둘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 예를 들어 회칙의 최종 원문과 주교들로부터 받은 추천장들이 로마에 보내졌었던 1864년 2월에는 회칙인가가 났다. 몇 가지 난점을 예견했던 돈보스꼬는 그가 변호하고픈 점들에 대해 해명서를 한 장 끼워 두었었다.
1864년의 회칙원문에 관한 해명서
로망의 성성에서는 돈보스꼬가 보낸 회칙 문서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그래도 그 문서들은 매우 엄밀하게 검토되었다. 1864년 6월23일 성성은 새 수도회의 존재를 인정하고 승인하는, 하지만 그 규칙들의 최후 승인만은 보류한다는 Decree of Praise(decretum laudis)를 발포했다.
1864년의 개정 회칙을 잠깐 읽어보면 1858년에서 1859년 사이에 일어나기 시작했던 중요한 변화들을 알 수 있다: 주교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수도회의 규칙이라고 하는 제목이 붙여진 새장이 삽입되어야 했다. 산하 각 수도원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또 다른 새 장은 살레시오회가 1858년 뒤부터는 또리노 바깥으로 퍼저 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개정 회칙의 뒷부분에서는 복장, 통학생, 서약선서와 서약 양식이라는 새 제목들이 나타난다. 마지막 부분의 뒤에는 “누구나 세속 즉 자기 집에서 자기 가족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조차도 본 회에 소속될 수 있다”고 한 대담한 조항이 담겨 있다.
이 개정회칙은 성성의 걱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비서 스베글리아티를 통해 decretum laudis에 13가지 소견들(개정 회헌에 대한 비평)을 덧붙였는데, 이것은 그 문서의 장차 의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정유하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회헌의 내용 중 일부를 재작성 해야 했다. 돈보스꼬는 그 소견들 속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제안들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 들였으나, 아무리해도
Dimissorials “외부 회원들” 및 살레시안의 시민적 지위에 대한 여러 조항들을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돈보스꼬는 자신의 망설임을 설명하는 주석을 작성했다. 이리하여 1867년에야 라티어판 회헌이 작성되었다. 제목들이 바뀌긴 했지만 외부 회원들에 대한 장은 부록에 삽입되었다.
“Dimissorials”(선임권)에 대한 투쟁
이 시기 동안에 돈보스꼬는 살레시오회의 총장이 서품 허가서를 수여할 권리(서품식을 위해 지원자들을 주교에게로 보낼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 데에 그의 모든 정력을 쏟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살레시오회를 주교제도의 권한 밖에 두려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로 인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 들이 야기 되었다.
바로 이 때부터 로마에서는 수도원에 대한 주교의 관할권을 지지하는 것에 대한 강한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또리노에서 1867년에 임명된 세 대주교 리까르디 디 네트로 각하가 자신의 옛 친구들(살레시오 회원들:역주)의 의도를 알고서 매우 깜짝 놀랐다. 그는 당장 앞으로 자신은 대신학교의 신학생들에게만 성직을 수여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유진 신부는 그러한 조치는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이 볼 때는 최후의 결과를 예시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리까르디 디 네트로 대주교는 “오라또리오의 사업”이 중단되기를 원치 않았기에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회에 가담하고자 하는 성직자들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시기상 매우 적절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살레시오회의 서약자 들이 그들의 장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창립자 돈보스꼬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 확실한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노력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그는 계속주교들의 추천장을 모았다. 그러나 또리노의 대주교나 혹은 주교와 수도회의 성성은 쉽게 설득되지 않으리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로마에 가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 여행은 별 소용이 없을 거라고 조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돈보스꼬는 1869년 1월8일 로마를 향해 출발했다. 루아신부는 “모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성모님을 신뢰하고 있던 돈보스꼬께서는 그들의 조언을 무시하고서 주님의 뜻으로 보이는 바를 포기하기를 거부했다”고 적고 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돈보스꼬는 자신이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그의 반대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음을 알았다: 안토넬리 추기경과 스베글리아티 각하는 병을 앓고 있어서 돈보스꼬를 귀찮게 여겼으며 베라르디 추기경은 조카의 건강을 몹시 염려하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그들 모두는 건강을 회복했다.
이 유력한 인물들의 지지는 결국 성성이 이 살레시오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한다는 1869년 3월1일자 교령으로 귀착된다. 선임권 문제도 해결되었다: 총장은 14살 전에 수도원에 들어 왔던 모든 신학생들에 대해 살레시오회의 이름으로 성직을 수여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한 용인이었으며, 돈보스꼬는 열렬한 환영 속에 오라또리오로 돌아 왔다.
회헌 인가를 향하여
살레시오회에 대한 승인이 자동적으로 그 규칙들까지를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1869년 3월1일에 발표된 교령은 회헌에 대한 확실한 인가는 연기 되었다는 것을 특별히 명시하고 있었다.
사실 회헌은 계속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찍이 스베글리아티 각하가 작성했었던 13조목의 소견들에서 나타난 비평이 다시 돈보스꼬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1873년에 성인은 교회 당국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시 변경된 새 규칙서를 출판했다. 반대 소리가 더 드높아 지리라는 걸 예견한 그는 그 13개의 소견들에 대해 라틴어로 설명를 가했다. 돈보스꼬는 1873년 2월28일에 다시 로마에 갔으며, 거기에서 그는 또리노의 대주교 가스탈디 각하가 보냈던 서한이 그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이 새 주교도 역시 그의 전임자처럼 그 새 수도회를 계속해서 자신의 교구 내에, 그리고 자신의 권한하에 두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살레시안들의 양성 과정에는 수련기와 정규 연구가 부족하다고 공공연히 비판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 도미니꼬 수도회의 총 대리인 새 고문관 비안치 신부에 의해 살레시오회 회헌이 검토되고 있었다. 비안치 신부가 1873년의 회헌과 스베글리아티 각하가 작성했던 13조목의 소견들, 그에 대한 돈보스고의 해명, 또리노 대주교의 이의를 비교 검토한 뒤인 5월9일에 새 심사평이 발표되었다. 비안치 신부는 모두 38가지에 이르는 소감을 피력했는데 그는 그것을 28조목으로 나타냈다. 돈보스꼬는 다른 주교들, 특히 마나코르다 각하와 포싸노 주교의 절찬과 상반되는 또리노 대주교의 이의에 대해 공손히, 그러나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돈보스꼬는 성성의 요구를 따라야만 했다.
회헌인가, 1874년
회헌의 최종인가를 바라면서 1873년 12월30일, 돈보스꼬는 다시 로마에 갔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우선 Positio, 즉 모든 필요서류들을 모아야 했다. 그는 비안치 신부의 소감을 모두 받아들여 한 번 더 회헌을 수정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추기경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차례로 방문했다. 한편 교황 성하는 인가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4명의 추기경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위원들을 임명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자 또리노에 있는 살레시안들은 3일간의 단식에 들어갔으며, 소년들도 마지막 성공을 위한 기도에 함께 참여했다.
네 추기경들은 3월24일에 처음으로 회의를 가졌다. 그 회의는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결정이 내려지진 않았다. 드디어 3월31일에 제2차 최종회의가 걱정 속에 맞이되었다.
4시간 넘게 심의가 계속되었다. 처음에 추기경들은 10년간의 잠정적인가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져 있었으나 교황성하의 명백한 공언으로 인해 인가 결정에 대한 투표가 요구되었다; 3명의 추기경이 찬성했으며, 나머지 한 추기경은 10년간의 잠정적인가 쪽에 투표했다. 3일 후 교황비오9세 성하는 논의가 끝맺어지기 위해서는 한 표가 부족하다는 얘길 듣고 “그렇다면 좋소. 내가 찬성표를 던지겠소.”라고 말씀하셨다. 1874년 4월13일, 성성에서 발표한 교령이 출판되었다.
그 동안 회헌의 본 내용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1874년 중에 연이어 3번이나 신판이 선을 보였다; 첫 신판은 학교운영과 수련기에 대한 새 내용이 포함된 반면 부칙에 있던 통학생들에 대한 조항은 생략되었다; 제3판은 제2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종인가를 받았던 것은 제4판이었다. 이것은 본래의 원안과 양식을 고친 것 두 가지 종류로 전해지고 있다.
회원들의 사용을 위해 1875년에는 이태리어로 된 회칙이 발간되었다. 우리는 돈보스꼬가 공식적인 라틴어 원본에 얽매이지 않고 한 두 가지 점에 대해 약간의 변경을 가했다는 것을 간과해 버리기 쉽다.
회칙 내용의 변화
명확환 회칙인가를 얻어내기 위한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우여곡절에 대해 얘기한 뒤에, 잇따른 회칙 변경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회의 규정들은 1858-1874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변화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을 좌우했던 것은 바로 성성에서 지적받은 점들이었다.
1864년 이전에 일어난 변화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1858-1864년 사이의 수정조항은 총장의 계승과 신하 각 수도원들의 생활을 준비해야 했던 회의 발전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돈보스꼬는 일반 생활을 하기 때문에 공동생활에서 빚어지는 제약을 받고 있지 않는 재속회원의 등록이 가능해지길 원하였다. 그러나 회의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1864년에는 스베글리아티 각하가 작성했던 13조목의 소견의 영향으로인해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1864년의 원문과 1874년의 원문 중 살레시오회의 행정, 교계제도와 살레시오회의 관계, 살레시안들의 수도생활과 양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조항들을 비교해 볼 때 그 변경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1864년 회칙과 1874년 회칙 사이의 근본 차이점들
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오회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도 미래의 사제들을 양성시키는 문제는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돈보스꼬가 신학생을 대신할 성직자들을 만들려고 획책하고 있다는 비난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청은 돈보스꼬에게 그러한 일을 계속해 나갈 권한을 명백하게 부여해 주었다.
1864년의 회칙에 나타난 행정형태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1874년에는 로마교교황청과 지역주교, 최고 회의(이후로는 존재하지 않음), 총회를 고려하여 원장과 본 원참사회의 권한이 줄어들었다. 원장은 일생동안 12년 동안만 재임할 수 있었고, 총회는 3년마다 열리게 되어 있었다. 로마교황청은 서약과 임시서약에 대한 특면권을 보유했다. 주교가 살레시안들의 고백 신부를 임명하게 되자, 살레시안들은 자신들의 “표현”(개인적 잡담)속에 더 이상 “마음의 비밀”을 감출 수 없었다. 수도회의 운영을 염려하여 교황청에서는 원장의 권한을 축소시킴으로써 일정한 지방 분권화 조치를 취했다고 할 수 도 있겠다.
살레시안들의 생활 방식은 다소 전통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변화되지 않았다. “살레시안들은 자신들의 시민적 권리들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집해야 했던 국면은 사라졌다. 한 수도원에 사는 최소 회원 수는 이제는 두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이었다. 스베글리아티 각하가 작성했던 소견에도 불구하고 신심업은 실제로 늘지 않았다. 그런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외부 회원들이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살레시안들은 모두 공동생활을 해야 했다. 대신에 1876년에 창설된“협력자회”가 “세속 안의 살레시안들”-돈보스꼬는 그들이 자기 수도회와 관련을 맺고 있기를 바랬다-을 대신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바는, 1874년의 회헌에 나타난 살레시안 양성방법은 전통적인 수도자 양성방법에 아주 가깝게 접근되었다는 점이다. “금욕적”수련기는 2년을 초과하지 않도록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걸 원하기도 했지만, 자유롭게 편성되었다. 신학생들은 필요한 겨우 외에는 외부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회헌의 변화에 대한 앞의 몇 가지 언급들로부터 로마교황청의 중재가 결국 초판 회헌 중의 몇 가지 다소 근원적인 문제점들을 해소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청빈과 정결과 순명(그리고 공동생활의 의무)이라는 서원을 지닌 살레시오회는 “트리엔트 시대의 고전적 수도회”의 길을 따르는 “독립된 교권체”로서 교회 조직 속에 끼여들 수 있었다.
돈보스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러한 발전을 고통스레 기다려 왔으나 일단 로마의 인가를 받게 되자 그는 자신의 사업이 지속될 거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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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부터 1875년까지의 이태리에서의 사도직
교회와 국가의 상태
살레시오회에 대한 승인과 회헌인가를 얻기 위해 자신이 해낼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서둘러 하고 있는 동안에도 돈보스꼬는 동시에 특히 피에몬떼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이태리의 다른 직역에서 그의 사업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데 결정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빅토르 엠마누엘 2세와 카브르가 영도하는 피에몬떼가 국가통일 운동을 채택하여 그 운동을 일으켰다.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이 오스트리아에 대해 승리를 거둔 후 롬바르디는 피에몬테에 기증되었고(1859년 마젠타와 솔페리노에서), 이태리의 다른 지역들도 사르디니아 왕국의 일부가 될 것 같았다. 1861년, 초대 이탈리아 국회가 빅또르 엠마누엘 2세를 이태리의 왕으로 선언했을 때에는 오직 베니스 지방만이 이태리 연맹국 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베니스는 나폴레옹 3세의 보호 하에 놓여 있던 로마와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니스는 불-독 전쟁 중에 이태리에 병합된 이후 통일 이태리의 수도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고려해 본다면, 이탈리아의 가톨릭인들의 의식상태를 짐작해 보기가 쉬워질 것이다. 상황의 기세로 인해 반교회적 성향을 띠게 된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교회와 교황의 충성심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교황의 현세적 권한을 명백히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국가에 대한 복종을 주창하여 몇 몇 자유주의적 각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이러한 현실주의적 외교 덕분에 여러 가지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그 때 또리노에 모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의 성당을 건립하는 일, 피에몬떼의 수도 외의 지역에도 살레시오회를 건설하는 일, 출판 사도직 등 세 가지 영역에 자신의 활동의 출구를 발견했다.
모든 크리스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성당의 건립, 1863-1868
이 성당의 건립은 살레시오회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유진 체리아 신부에 의하면, 돈보스꼬는 신비적 일치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수도회의 공공 지성소가 될 기념건물을 세우고자 했다 한다. 그런데 실은 돈보스꼬는 성 프란체스꼬 살레시오성당이 너무 작게 지어졌던 까닭에 그것을 대신할 만한 성당을 원하였던 것 같다.
성인 자신의 말에 의하면(우리가 그의 “자서전”을 옳게 해석하는 것이라면),성모님이 몸소 그에게 앞으로 그가 성모님의 영광을 위해 짓게될 성당을 예시해 주었다 한다. 1844년의 한 꿈속에서, 양치는 한 부인으로 가장한 우리 성모님이 “Hic domus mea,indegloria mea-이곳이 나의 집이다. 여기에 나의 영광이 있다.”라는 문귀가 큰 글씨로 내부에 적혀있는 굉장하고 웅장한 성당을 가리키셨다. 1845년 또 다른 꿈속에서 돈보스꼬는 “성모님”에 의하면 또리노의 순교자들인 솔루토, 아드벤토, 옥타비우스가 그들의 목숨을 바쳤던 바로 그 장소를 보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1862년 12월 어느 날 밤에 알베라 신부에게 자신의 계획을 조용히 얘기해 줬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당은 너무 적어서 이제 더 이상 소년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었소. 그래서 보다 크고 보다 훌륭한, 참으로 어마어마한 성당을 하나 지으려 하오. 우리는 그 성당을 ꡒ모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성당ꡓ이라 부르게 될 것이오.”
그들은 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어떻게 성당을 짓게 될 것인가가 문제였다. 돈도 한 푼 없었고 성당의 부지가 될 만한 땅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꿈에서 나타나곤 했던 들판ꡓ은 사실 이상하게도 몇 번이나 변경되었었다. 1850년 6월20일에 그 땅이 돈보스꼬의 손에 들어갔었으나, 돈보스꼬는 그 땅을 1854년 4월10일에 다시 팔았다.
그 이유는 너무도 뻔하다. 다행히, 돈보스꼬는 1863년 2월11일에 다시 그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위대한 어떤 것, 다시 말해서 정말로 어마어마한 성당을 원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되풀이하여 계획이 세워졌다. 마침내 돈보스꼬는 그가 꿈속에서 보았던 것은 더 웅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가 스페찌아의 설계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돈보스꼬의 힘으로 미루어 보아 그 계획은 다소 분별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리노 시의회는 이색적인 이의를 제기했다; 발도꼬 지역에서의 성당 건립을 승인하기는 하되, 살레시오회에서 신청한 성당의 이름은 전혀 승인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라는 말이 어떤 이에게는 편협 되게 보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다소 선동적으로 들린다고 하면서 그 명칭을 대중적이지 못한 부적당한 명칭이라고 했다. 돈보스꼬는 자기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그들이 말하는 이 “이상한 명칭에 대해서는 당분간 잠자코 있기로 작정했다. 결국 그는 필요한 허락들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성당 건립은 1863년 2월에 시작되어 5년 동안 계속되었다. 엄청 나게 많은 비용을 들여 놀랍도록 깊이 파 내려간 기초공사가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1864년 4월, 정초 식장에서 돈보스꼬는 상징적인 제스쳐를 보여주었다; 총 건축업자인 부제띠에게로 돌아서서 일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이제 그에게 불입금을 지불하겠노라고 말하고서 자신의 지갑을 열고서 그 안에든 돈을 부제띠의 손바닥에 쏟았다. 그것은 모두 정확히 40상띰 이었다.
이제 돈보스꼬는 정말로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는 공공기부금을 이용한 광범한 계획에로 생각이 미쳤다. 또리노와 피에몬떼는 편지와 안내장으로 홍수를 이뤘다: 기부금 신청 명부가 작성되기 시작했으며, 또리노와 플로렌스, 로마의 보자들은 도움 요청을 받게 되었고, 인상적인 복권제도가 조직되었다. 기부금이 쏟아져 들어오긴 했지만 돈보스꼬는 항상 자금난에 허덕였으며, 한 때 그는 그 성당의 최후를 장식하게 되어 있는 돔 형식의 둥근 지붕을 거의 포기했었다.
이런 형편 속에서 “가난한 돈보스꼬”가 모든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늘 절대적으로 확신 있게 말해 왔듯이 모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동정 마리아 덕분이었다. 돈보스꼬는 가장 성공적으로 자금을 거출한 분은 곧 성모님이시다고 말하고 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돈보스꼬의 성모님”의 강력한 도우심을 믿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적에 대해 얘기했으며, 은행가 코따씨가 동정마리아께 돈보스꼬가 빛을 청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뒤에 건강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성인의 초자연적 신앙에는 재정적 도움을 간청하는 대담한 단순성이 더하여졌으며, 그는 한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거기에 덧붙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옛 격언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발도꼬의 사도는 그 계획사업을 끝마칠 수 있었다. 1864년 4월에는 빅토르 엠마누엘왕의 아들인 아메데오 왕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감명적인 정초식이 열렸다. 그해 말에 도움이신 마리아의 성당에는 지붕이 올려졌다. 1866년 9월3일에는 돔 형식의 천장 공사가 완성된 데에 대한 축하식이 있었다. 모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성당은 1868년 6월9일, 마침내 리까르디 대주교에 의해 헌당식을 가졌으며 6여일 동안 축하잔치가 계속 되었다.
돈보스꼬는 1862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저는 한 푼도 없습니다. 어디에서 비용을 마련해야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이뤄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믿음과 노력은 모두 보상되었다.
이태리 내에서의 여러 공동체의 건설, 1863-1875년
도움이신 마리아의 성당을 건립하고 있는 동안에도 돈보스꼬는 또리노 밖의 이태리 여러 곳에 공동체를 새로이 건설했다. 이러한 팽창은 두 가지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돈보스꼬와 오라또리오의 명성이 페에몬테 전역에 퍼져 있었으며 자격 있는 교사들에 대한 많은 요구가 발도꼬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그 한 이유이고, 또 다른 이유는 돈보스꼬는 비젼을 지닌 인물이어서 자신이 특별한 사명을 지녔다고 늘 느끼고 있었고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서 그에게 팽창에 대한 욕구를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1860년에 지아베노에서 첫 시도가 있었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함으로써 그것은 다만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소신학교의 쇠퇴를 걱정해 오고 있던 대주교 각하는 그곳을 돈보스꼬에게 위탁했다. 돈보스꼬는 그 자리에 임명할 만한 적당한 살레시안들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던 터라 오라또리오의 방법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 친구 사제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세 명의 성직자들게 그를 도와 주라 명했다. 처음엔 모든 일들이 원활하게 풀려나갔으며, 나갔으며, 돈보스꼬의 명성은 그 학교에 다시 학생들을 끌어 모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내 그 지도자가 성인의 명성과 권위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중요한 문제들에서조차 돈보스꼬를 무시하기 시작했으며 돈보스꼬의 교육방법에 대해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살레시안들은 결국 2년만에 철수해 버렸다.
지아베노에서의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돈보스꼬는 카사레 몬페라또 교구내의 미라벨로에서 1863년에 재 시도를 했다. 그곳의 교구 사제는 자기 교구내에 학교를 갖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자신에게 제공된 그곳의 한 수도원 내에 학교를 열기로 했다. 이번에는 적어도 그 자신이 직접 그곳의 장상이 될 작정이었고 그 곳이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예비 책을 강구하였다. 미라벨로에는 사실 살레시오회의 인물들 중 중요한 인물들이 배치되었다. 26살의 루아 신부가 원장직을 맡았고 그의 참모진은 프로베라, 보네띠, 체루띠, 알베라, 달마쪼, 쿠삐아로 이뤄졌다. 돈보스꼬는 루아 신부에게 루아 신부가 “하느님을 위해 많은 영혼들을 얻는” 것을 보고 싶다는 바랭이 담겨진 “조언”즉 살레시안 원장이 명심해야 할 일종의 법전을 주었다. 마리벨로의 학교는 아주 훌륭히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돈보스꼬는 그곳 90명의 학생들 속에서 “누룩처럼 행동하게 하기 위해”또리노의 오라또리오 학생들 중 가장 모범적인 이들 몇몇을 그곳에 편입시켰기 때문이었다. 학원 당국과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안들은 우수한 결과를 얻었으며 특히 성소자들을 배출시키는데 있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성공을 걷을 수 있었던 것은 일지에서도 크게 찬양하고 있는 바대로 주로 원장의 힘이 컸다: “미라벨로에서의 루아는 또리노에서 돈보스꼬처럼 행동하신다.” 이 학교는 장소와 위생상의 이유들 때문에 1870년에 보르고 산 마르티노로 옮겨졌다.
마라벨로보다 1년 뒤에 문을 열게 된 란조는 살레시안 재단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란조는 미라벨로처럼 다른 모든 살레시안 집들을 위한 시험장이자 모델이었으며, 따라서 돈보스꼬는 그 곳에 오라또리오의 회칙을 적용시켰다. 이 학교는 또한 살레시안들의 피정과 총회를 위한 회합장소가 되었다. 초대 원장은 루피노 신부였다. 그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하여 르몽 신부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몇 가지 시설이 증설된 후인 1873년부터 그 학교는 300여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란조의 학교에서 이루어졌던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도 특히 성인 같았던 안드레아 벨트라미 신부는 언급될 만 하였다.
1865년에 돈보스꼬는 또리노 교외에 있는 트르파렐로에 작은 집을 한 구입했다. 그것은 휴일의 피정에 사용되었다.
트로파렐로 이 후 4년간의 휴지기를 거친 다음 살레시오회는 다시 새로운 팽창기에 들어섰다. 1869년에는 알바교구의 케라스꼬에 본당과 초등 및 중등과정의 기숙학교와 주간학교를 갖춘 사업이 시작되어 젊은 프란체시아 신부가 그곳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조악한 분위기 때문에 그 집은 3년 밖에 계속되지 못했다.
살레시안들은 1870년에 알라씨오에 그들의 재단을 창설함으로써 리구리아 지역에 들어갔다. 그들은 매우 영리한 인물이었던 프란치스꼬 체루티의 지도하에 아주 잘 되어 나갔다. 1871년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서 “사람의 아들들을 위해”마라씨에 있는 집 하나를 돈보스꼬께 기증했다; 살레시안들은 그곳에 작업장을 셋 열었다. 장소가 너무 비좁아 그들은 2년 후엔 삼피에르다레나의 테아티네 수도회 자리로 이사했다. 젊은 바오로 알베라 신부가 그곳의 원장이 되었고 거의 15년 동안이나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1871년은 또한 사보나와 제노바 사이에 있는 바라째에서 새 공동체가 출범한 해이기도 하다. 돈보스꼬는 “고전, 문법, 기술, 초등교육”을 가르칠 학교를 세우기로 시 당국과 합의했었다. 바로 얼마 전에 문을 닫았던 케라스꼬에서 그곳을 맡아 볼 사람들이 왔다.
1872년에 개교한 또리노의 발사리체에 있던 학교는 매우 특별난 곳이었다는 점 때문에 지적해 둘 만한 곳이다. 1864년 어느 날, 귀족의 자제들을 위한 학교를 열 것인가에 관해 의논하던 중에 돈보스꼬는 “내 아둔한 정신 좀 보게. 그런 곳은 결국 우릴 파멸시킬 걸세”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말을 통해서, 1872년 가스탈디 각하가 돈보스꼬에게 발사리체에 있는 쇠퇴해 가고 있던 귀족학교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때의 돈보스꼬의 망설임의 진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돈보스꼬는 당시 서로의 관계가 이미 상당히 긴장되어 있던 대주교를 화나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그 부탁을 받아 들였을 뿐이었다. 그 학교는 요한 달마쪼 신부의 지도하에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하여 100여명의 학생들이 다니게 되었다.
일반적인 경향
초장기의 이러한 창설의 물결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살레시안들의 교육추세를 알 수 있다. 1863년 미라벨로에서의 개교를 필두로 해서 초등, 중등, 기술훈련과정을 제공하는 학교들이 세워졌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이 발도꼬를 모범으로 하는 기술학교들이었다. 오라또리오는 돈보스꼬의 첫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학교들의 창설과는 연관되어 얘기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체라스꼬와 바라째, 그리고 삼피에르다레나에서의 살레시안들의 교구 활동이다.
학교의 학생들을 살표 보자. 발사리체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돈보스꼬는 결코 부자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수도원들은 학교나 혹은 기숙학교의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가난하고 버림받은”젊은이들을 위한 집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마라씨와 삼피에르다레나는 “숙박소”라 불리웠다.
확실히 이와 같은 학교들의 증설은 그 시대가 살레시안들이 가르치는 그리고 살레시안 재단이 그 질을 보증해 주는 학교들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돈보스꼬는 학교에 모인 청소년들의 교육에 주력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집들에서는 예외 없이 가능한한 많은 성소자들을 길러내겠다는 생각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그가 마라씨의 견습공들을 위한 부문에 덧붙여 사제 지망자들을 위한 부문을 두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후의 추세를 대강 살펴보면, 초창기의 공동체들이 살레시오 수도원의 일상 생활 속에 어떤 전통을 세우는 데 있어서 자연히 도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살레시안 당국자들은 지아베노의 실패를 거울삼아 그 후로는 경영부문에서 계약상의 자유재량권을 갖고자 했다.
1866년 루아신부는 공동체 생활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세 가지 일치의 원리에 대해 지적했다;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는 원장에의 방향일치, 형제애의 실천이 따르는 정신의 일치, 공동생활의 준수에 있어서의 일치 회원들과 수도원들 간의 일치를 촉진시키기 위해 돈보스꼬는 여러 공동체들을 정규적으로 방문했다. 그는 이러한 방문들 덕분에 각 살레시안은 물론이고 학생들과도 접촉할 수 있었으며 성장하고 있는 그의 “가족”성원들 간의 유대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출판 사도직
우리가 살레시안의 활동에 있어서 출판이라는 아주 중요한 사도직을 간과해 버린다면 돈보스꼬의 사도적 활동의 전모를 보지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성인이 출판했던 출판물들의 수와 내용을 대하게 되면, 특히 이처럼 위대한 작품이 그렇게도 많은 다른 예정사업과 동시에 추진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그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돈보스꼬는 이런 형태의 사도직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기에 그가 그 때문에 심히 과로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1885년에 자기 “아들들에게”출판사업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자신에게 맡겨진 본질적인 임무들 중하나이다 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렇게 선언했다: “좋은 책을 보급시키는 것은 우리 회의 주요 목적들 중 하나입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부단한 노력만 보아도 우리는 이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돈보스꼬는 29세 때에 자신의 첫 저서인 그의 친구 루이스 고몰로에 대한 전기를 발표했고 1844년에는 그것을 출판했다. 그 이후 40여 년 동안 돈보스꼬는 명백하게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그가 저자임이 거의 분명한 책들을 포함하여 수없이 많은 책들을 저술했다. 확실히 그가 지은 저작만도 150여권에 달한다.
저술가로서의 돈보스꼬는 언제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도적 교육적 이상에 충실했다. 돈보스꼬는 가톨릭 신앙을 변호하기 위한 저작들뿐만 아니라 기도서와 전기 및 교훈적인 이야기들을 저술했다. 교회와 성서에 대한 사랑은 그로 하여금 1845년에는 Storia Ecclesiastica(교회사)를, 1847년에는 Storia Sacra(구세사)를, 그리고 무수히 많은 Vite(전기문)들을 쓰게 했다. 교육과 교수분야에서는 1846년의 Sistema metrico(미터법)과 세속적 특징 대신 당신의 종교적 긴장상태의 형세를 나타내 주고 있는 1855년의 Storia d'italia(이태리 역사)를 떠올릴 수 있다.
돈보스꼬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되도록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여 글을 썼다. 그의 책들의 특징은 사실 여느 대중작가의 책과 다름없이 단순하고 명료했으며 미사여구를 늘여 놓기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인 편이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돈보스꼬의 저작들의 한결같은 도덕주의적 성격, 신학적 어조, 문헌제시의 결여 등이 마음에 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돈보스꼬가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재능 덕분으로 그의 책 등 중 몇 가지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기록에 따르면, 1888년 까지해서 그의 Storia Ecclesiastica(교회사)는 이미 제10판에 돌입했고 Storia d'italia(이태리 역사)는 제18판에 달했다 한다. 한편 (Il giovane provveduto)이라 명명된 소년들을 위한 기도서는 엄청나게 많이 퍼져 나갔다. 몬시뇨르 살로티는 돈보스꼬가 살아 있을 때에 그 책이 이미 600만부나 보급되었다고 주장했으며 베드로 신부는 19세기 후반기 30년 동안 그 책이 이태리에서 최고의 베스토셀러 자리를 누렸다고 말하길 주저치 않았다.
돈보스꼬의 활동은 저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편집분야에서의 그의 업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돈보스꼬는 대전집을 5종인 발행했다: The Letture cattoliche(가톨릭 문고), 1853년;The Biblioteca della gioventu italiana(이탈리아 청소년 문고)이 문고는 모두 24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문고로서 이 책들은 1869-1885에 이탈리아어로 된 가장 훌륭한 책들이다;The Brani scelti degli
autori latini(라틴작가선집)이 문고는 돈보스꼬가 죽을 때까지 모두 41권 출판 되었다; The Autori latini Cristiani(크리스챤 라틴 작가 전집);The Bolletino Salesiano(살레시안 회보)1877-1888년에 시작된 살레시안 협력자들을 위한 기관지
위의 다섯 가지 전집 중에서도 첫 번째 것인 가톨릭 문고는 돈보스꼬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돈보스꼬는 확실히 프르테스탄트의 선전에 대항할 수단을 그 안에서 찾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1853년부터 1888년 사이에 432종의 팜플렛이 발행되었으며 2중 70종은 돈보스꼬가 직접 쓴 것이었다. 가톨릭 문고는 매달 10,000여부 이상을 발행하게 될 만큼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가톨릭 문고는 피에몬테와 이태리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왈도파 교도들은 아주 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자신에 대한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를 이 왈도파들의 소행으로 여겼다.
성인은 보네띠나 르몽, 프란체시아, 바르베리스 등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작가가 되게 하는데 성공했다. 요한 보네띠 신부는(살레시안 회보)의 편집장이 되었으며, (오라또리오의 역사)를 저술했다. 유진 체리아 신부는 보네띠 신부의 (오라또리오의 역사)를 가리켜 “돈보스꼬에 대한 귀중한 기록물”이라 주장했다. 걸핏하면 자주 흥분하곤 했던 보네띠 신부에게 종종 돈보스꼬는 냉정을 회복하라고 충고해야 했다. 시적인 문장과 대화체의 문장에 능통했던 세례자 요한 르몽 신부는 돈보스꼬의 전기작가로서, 그리고 Memorie biografiche(돈보스꼬 회고록)의 처음 9권의 저자로서 유명해졌다. 항상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었던 침착한 요한 프란체시아 신부는 라틴 작가로 명성을 드날렸으며, 또리노의 유명한 발라우리의 친구이자 경쟁자이기도 했다.
실제적인 사람으로서의 돈보스꼬의 면모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말해 둘 것이 있다. 돈보스꼬는 자신의 책들과 간행물들을 인쇄하고 배포하기 위해 곧 바로 발도꼬에 살레시안 인쇄소를 시작했다. 삼피에르다레나와 산 베니그노 카나베세 에도 인쇄소가 차려졌으며, 이어 니스와 마르세이유, 릴, 바르셀로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도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 지를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어느 날 성인께서는 미래의 비오 11세께 오라또리오에 있는 인쇄기에 관해 얘기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점에 있어서 돈보스꼬는 영원히 선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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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사업의 시작
1875-1888
최후의 승인을 얻은 뒤인 1875년에는 살레시오회는 이제 약 300명 가량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고 점차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이태리 전역에 뿐만 아니라 유럽의 몇몇 나라에까지 그 활동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그의 생애의후반기 13년 동안 각지로부터 신청을 받게 되어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살레시안들에 대한 세간의 존경은 돈보스꼬의 업적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탈리아 내의 신설 재단들, 1875-1885
통일 이탈리아에서의 돈보스꼬의 사업은 확장 일로 에 있었다. 1875-1888년 사이의 신설 재단들 가운데에는 그 수명이 별로 오래가지 못한 것도 몇 있긴 했지만 그 기간동안엔 새로운 재단들이 연평균 2개씩 늘어났다.
그 중 최초의 것은 리구리아에 세워진 것이었다. 알라씨오, 바라째, 삼피에르다레나 기후 1876년에 벤티밀리야와 보르디게라 사이에 있는 발래크로시아에 새 집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교구에서 극렬하게 활동하고 있는 왈도파를 퇴치하기 위해 살레시안을 초청한 주교가 있었다. 1877년 라 스페찌아에 오라또리오 들과 초등학교 하나를 열음으로써 그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성직자들에 대한 상당한 적개심으로 인해 초창기에는 어려움이 아주 많았다. 그곳의 어떤 신문에서는 이런 기사를 썼다: “까마귀들이 왔다. 우리는 그 까마귀들이 먹을 것을 찾아내지 못하길 빈다”(역자 주: 까마귀란 검은 수단을 입은 살레시안들을 비꼰 말)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안들은 운동장에 서서 사람들을 성당과 학교에로 이끌어 들였다.
한편, 살레시오회는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으로 계속 확장해 내려가고 있었으며 돈보스꼬는 로마에 수도원을 갖기를 열망했다. 적당한 곳을 발견치 못하던 터에 아리끼아와 알바노에서 신청이 들어 와 돈보스꼬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운이 없게도 많이 사람들이 살레시안들을 피에몬테주 사람들이라 하여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음은 물론 고집과 중상비방의 희생물로 삼았다. 살레시안들은 1876년 11월에 그 곳에 도착했었으나 그로부터 2년 뒤에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간동안 살레시안들은 오늘날에는 리에티 지방에 속하는 마그리아노 사비노에서 신학교를 맡았었다. 그곳에서의 일은 크게 번창하기 시작했으나 복직된 그 지방 성직자와의 문제 때문에 몇 년 뒤에는 그곳을 단념해야만 했다. 한편 위의 기간 동안에 피에몬떼 주에서 일어난 상황을 살펴보면, 1876년 몬도비 근처의 트리니타에는 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인 품에 오르게 된 루이스 구아넬라를 원장으로 하는 살레시오 공동체가 세워졌다. 그 학교는 “구 지방에서 가장 가난한”소년들 120명을 수용하였으며, 그곳의 야간 수업에는 16세에서 50세에 이르는 사람들 100여명이 참석했다. 또한 그 곳의 오라또리오에는 200여명의 소년들이 늘 출입하였다. 그러나 3년 뒤, 땅주인과의 관계가 악화됨으로써 살레시안들은 어쩔수 없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마띠에 창설된 공동체는 다소 유별단 것이었다.
돈보스꼬는 살레시안 인쇄소들에 종이를 공급하기 위해 마띠에 있는 제지 공장을 취득했었고 안드레아 펠라짜라는 수사가 그곳을 담당했다. 1877년 돈보스꼬는 니짜 몬페라또에 수년원 성당을 두었다. 돈보스고는 그곳에 모르네제의 살레시오 수녀들을 이사 키고자 했다.
1878년과 1879년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탈리아 반도에 5개나 되는 새 공동체들을 설립했다. 그들 중 키에리와 산 베니그노 카나베세는 본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돈보스꼬는 카나베세에서 “정식수련소를 시작했으며 율리우스 바르베리스 신부에게 그곳의 지도를 맡겼다. 다른 공동체들은 아주 멀리에 세워졌다: 투스카니 지방 루까에 오라또리오가 있었다: 베니스지방-에스테에 학교가 있었다: 시질리섬-란다쪼시는 그 섬에서 최초로 학교와 오라또리오로 이루어진 살레시안 재단을 갖게 되었다.
새 공동체들이 계속 끊임없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존의 집들도 계속 발전했다는 것이 증명해 주듯 팽창이 회를 내적으로 약화시키진 않았다. 1880년에는 페난고와 몬페라또에 초등학교를 열었다. 이듬해에 살레시안들, 기록자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프로테스탄트의 선전의 홍수를 막아내기 위해”플로렌스에 초청되었다.
살레시안들은 곧 200명의 소년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오라또리오를 세웠고, 이어 “소신학교”를 세웠다. 그와 동시에 전에 교황령이었던 파엔짜에 또 다른 오라또리오를 열었다: 그 오라또리오는 반성직자주의로 유명한 “공화주의자들”사이에 격심한 증오심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라또리오는 존속하였다. 베네로 지방 모글리아노에 대학을 설립하는 일은 거의 수난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트레비소의 교구 참사회원인 요셉 사르로(미래의 비오 10세)가 오랜 동안 돈보스꼬와 그의 살레시안들을 매우 좋아했다 때문이었다.
이태리에서의 창립자의 맹렬한 활동은 1888년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실리섬의 카타니아에는 대규모의 오라또리오가 설립되었으며 이어 트렌트와 파르마에는 학교들이, 포글리짜 카나베세에 는 수련소(베니그노 카나베세의 수련소는 뒤에 수사들의 실습 학교가 되었다)가 세워졌다: 그리고 발사리체에 있던 학교는 철학과 신학과 정의 신학교로 바뀌어졌다.
위의 명부에는 아주 중요한 두 곳의 이름이 빠져 있다. 1878-1882년 사이에 돈보스꼬는 또리노에 두 번째 성당을 지었는데, 그는 그것을 성 요한 복음사가께 헌납했으며, 입구에는 비오9세를 기리어 그분의 상을 세웠다. 돈보스꼬는 1880년, 일과 다른 걱정거리들 때문에 심히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 13세 성하의 의뢰에 따라 로마에 예수 성심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이 일은 끝나던 해인 1877년까지 몹시 무거운 부담이 되었다. 위의 두 성당들은 모두 유스호스텔를 겸하였다.
프랑스에서, 1875년부터
수도회는 이태리의 여러 지역에로 퍼져 나가는 동안 프랑스를 필두로 하여 유럽 여러나라 에로도 과감히 나아갔다.
돈보스꼬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니스의 주교 몬시뇨르 피에르 솔라의 초청을 받고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줄 아는 이탈리아인 요셉 론차일 신부를 대동하고서 1874년 12월에 니스에 갔다. 그곳에 새 공동체를 설립해 달라는 제안들을 검토하는 게 바로 그들의 방문 목적이었다. 4명의 살레시안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프랑스에 처음으로 세워질 것이라는 취지의 협정서가 1875년 11월 9일에 조인되었다. 견습공들을 위한 오라또리오 겸 기숙학교로 구성된 그 집에는 그 곳 주교의 영광을 위해 Patronage Saint Pierre 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1876-77년 사이에 양화점, 양복점, 목공소가 문을 열었다. 1878-79년에는 대장간이 문을 열었으며 그와 동시에 학생들을 위한 이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학교에는 60명의 기숙생과 80명의 통학생이 있었다. 대부분의 시민들과 당국은 이 새 학교의 봉사를 감사히 여겨 매우 좋아했다.
3년 후인 1878년 7월1일에는 마르세이유시가 살레시안들을 받아들였다. 이 창설의 배후에는 성 요셉회의 교구 사제인 카논 클레멘스 귀올이라는 감동적인 인물이 있었다.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형제회가 운영하던 학교 시설을 인수하여 Pare Bologne 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 귀화한 안젤로 볼로냐 신부를 원장으로 하여 견습공들을 위한 작은 기숙사와 초등학교를 운영했다. 그 Patronage St.Leon은 조심스레 시작된 이우, 돈보스꼬의 개별적인 지도 하에서 날로 발전을 거듭했다.
Annecy 교구내의 Cannes와 Challonges에 설립되었던 다른 공동체들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파리의 Auteuil 에 있는 큰 고아원이 살레시안들에게 맡겨지기로 했었으나 그 계획사업은 사산되었다. 바르지방의 나바르에 설립된 공동체는 지속적인 성공을 누렸다. 그 공동체는 고아 출신의 청소년들이 장차 농사를 짓기 위해 살고 있던 “농업부락”을 경영하기 위해 젊은 신부 베드로 페로트의 지도하에 1875년 6월 5일에 그곳에 자리를 잡았었다. 돈보스꼬에 따르면, 이 학교는 1887년 8월에 돈보스꼬가 꿈에 본 집이기도 하다.
이제 돈보스꼬는 미래의 프랑스인 살레시안들을 위한 수련소를 출범 시키고자 했다. 그에게는 적당한 집이 필요했다-그는 꿈속에서 그런 적당한 집을 보았다. 돈보스꼬가 자시니 꿈 속에서 보았다는 집과 Pastre라는 어떤 부인이 돈보스꼬에게 기증하게 된 마르세이유 근처의 Sainte-Marguerite에 있는 큰 집을 서로 공통점이 있었다. 1883년 가을에 최초의 살레시안 프랑스수련소가 시작되었고, 1885년까지 그곳에는 16명의 수련자가 있었다. 1884년 1월19일; 일단의 살레시안들이 릴에 있는 성 가브리엘 고아원을 인수했다.
그곳의 원장은 양복점, 양화점, 목공소, 제본소, 인쇄소등을 세우기 시작했다. 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Aire-sur-la-Lys에살고 있는 돈보스꼬의 은인이자 친구인 어떤 사람이 새 사업을 크게 지원해 주었다.
프랑스 전역을 방문했던 1883년의 여행 중에 돈보스꼬는 Auteil에서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파리에 있는 성 아우구스틴회의 성직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곳 파리에도 니스나 마르세이유, 또리노에 있는 것과 같은 기관을 세울 길이 없을까요? 저는 이 곳에는 그러한 시설이 매우 필요하며 또한 그러한 시설이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보스꼬는 여러 가지 제안들을 받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그중 일찍이 Menilmontant 에 자신이 설립한 Patronage St. Pierre를 그에게 인계해 주고파하는 Abbe Pisani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합의가 이루어져 1884년에 살레시안들이 파리에 왔다. 그리고 전해에 살레시안이 되었던 Chartres사제 벨아미 신부가 그곳의 지도를 맡게 되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돈보스꼬가 프랑스에 세웠던 여러 공동체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도 그 공동체들을 파괴하려 위협했던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었다. 사실 프랑스에는 수도회에 반대적인 1880년 3월19일 이후 많은 난관이 있었다. 이 폭풍우 중에 돈보스꼬 홀로 살레시안들이 화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하고서 침착하게 있었다. 사실 살레시안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다시 회복시킬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1881년부터
살레시안들은 프랑수에 이어 스페인에로 찾아 갔다. 이태리의루까에서 살레시안을 알게 되었던 세빌랴의 대주교를 통해 1879년 스페인에 갈 기회를 얻게 되기까지 상당기간동안 돈보슥꼬는 이 나라를 유념하고 있었다. 안들시아의 귀족 마르뀌스 돈 디에고 디 카사 울로라가 자기의 고향 우트레라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싶어 돈보스꼬에게 조언을 청했다. 1880년 1월24일, 요한 갈리에로신부와 요셉 로씨 수사는 돈보스꼬의 명령을 받고서 그곳을 둘러 보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얘기해 보기 위해; 그리고 스페인에서의 첫 살레시안 공동체의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 그리고 나서 1881년 2월 초순에 요한 브란다 신부가 일단의 살레시안들을 거느리고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사도직 활동은 처음에는 후에 깔멜교구에 속하게 된 학교 내에만 제한되었다.
그러는 사이 또리노의 사도의 명서이 스페인에 널리 퍼졌다. 세빌랴의 대주교는(교구회보)에 돈보스꼬의 사업을 크게 찬미한 논문을 실었으며, 바르셀로나의 마드리드,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는 그논문이 단행본으로 출판 되었다.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던 돈나 도로테아 쵸피테아 드 세라라는 부유하고 신심 깊은 한 과부는 일직부터 집 없는 일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길 갈망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살레시안 회보)를 보고서 거기에서 돈보스꼬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살레시안 사업에 관해 이것저것을 알아본 뒤 1882년 9월에 돈보스꼬를 만났다. 일을 빨리 진척시키기 위해 그녀는 교황성하께 호소하기도 했다. 갈리에로 신부와 우르레라의 원장의 도움 덕분에 일이 곧 착수되었다. 돈나 쵸피테아 뷘은 바르셀로나의 사리아 지구에 있는 큰 저택을 구입했다. 그 집은 기술학교로 이용되었다. 1884년 2월15일에 그곳을 열었던 에네스트 오베르티 신부가 우트레아의 브란다 신부를 대신하게 되었다. 발도꼬의 작업장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바르셀로나의 직업학교도 아주 조용히 시작되었으나 금새 발전을 이룩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는 또 다른 계획이 의논되고 있었다. 유력 인사들이 모인 어떤 위원회가 살레시안들에게 비행소년을 위한 학교와 소년원을 인계해 주려 했다. 그 학교를 다른 살레시오 학교들처럼 운영하고자 했던 돈보스꼬에게는 그 학교의 명칭과 또한 그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법들이 전혀 마음에 맞지않았던 까닭에 여러 해 동안 교섭이 주지되었다.
1886년에 돈보스꼬가 몸소 스페인에 갔다. 이에 앞서 1885년 12월 브란다 신부는 돈보스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었다; “여기 있는 저희들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당신을 항상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당신에 대해 늘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들은 당신을 뵙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그런 여행이 가능하다면...”
돈보스꼬는 많은 조언을 보내 주는 대신 1886년 4월에 자신이 직접 바르셀로나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 도시를 굽어다보고 있는 티비다보 언덕에 돈보스꼬가 예수 성심 대성당을 짓겠다면 그 언덕을 돈보스꼬에게 기증하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그 제안이 돈보스꼬를 크게 감동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돈보스꼬는 그 여행 중에 계속해서 Tibi dabo, Tibi dabo...(“내가 네가 주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내적 목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1887년
살레시안들을 영국에 보냄으로써 돈보스꼬는 그의 생애 말년에 또 하나의 소망을 실현 시켰다.
성 빈체시오 아 바오로회의 런던 회의에서 Battersea 지역의 가난하고 집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돈보스꼬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던 때인 1884년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 살레시안들이 그곳의 본당을 운영하고 또한 그곳의 청소년들을 돌보기로 동의했던 1887년까지 계속된 교섭과정에서는 스톡풀 백작부인의 역할이 참으로 컸다. 1887년 11월 14일, 세 명의 살레시안들이 영국을 향해 또리노를 떠났다; 아이랜드인 맥키르난 신부(본당신부이자 원장)와 영국인 챨스 마케이 신부(보좌신부이자 교리교사), 그리고 로싸로 라는 이름을 가진 수사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 세 개척자들은 많은 어려움과 문제를 극복해 내야 했지만 마침내 영국에서의 살레시안 사업이 든든한 기초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다른 나라들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 외의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비록 돈보스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실제로 사업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들도 살레시안 사업의 확장과 창립자의 영향력에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출판물의 역할과 영향에 대해서, 특히 Mendre, d'Espiney, Boys가 지은 불어판 돈보스꼬 전기문의 영향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에서는 돈보스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번이나 그 나라 출신의 살레시안들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었다. 오포르토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선동으로부터 가난한 소년들을 구제하는 데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Pere Sebastien Leite de Vasconcellos 라는 한 사제가 있었다; 그는 1881년 요한 갈리에로 신부가 그를 만나러 가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권유할 때까지 계속 살레시안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 동안에 이 사제는 가능한 한 빨리 살레시안들이 와서 그걸 맡아 주길 바라면서 Oficina de San Jose를 열었다. 리스본에서도 역시 살레시안 재단을 원하였다; 그들의 요구는 고메즈 남작을 통해 전달되었다. 인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돈보스꼬의 생전에는 그 어떤 요구도 만족시켜줄 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다양한 민족들 중 이탈리아어를 쓰는 지역의 사람들이 살레시안의 영향에 가장 민감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 제국의 일부가 형성되었던 시기에 트렌트에 세워진 학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돈보스꼬는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에 해당되는 보헤미마에서도 역시 잘 알려져 있었다. 돈보스꼬의 교육 방법들은 Vlast지에 의해 프라그와 그외 다른 도시들에 널리 보급되어졌다.
벨기에 살레시안 공동체을 세우기도 한 것은 돈보스꼬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결정된 일이었으나 그것이 실제로 효력을 발생하게 된 것은 돈보스꼬가 죽은 뒤 3년 후의 일이었다. 주요 발기인인 Liege의 주교 몬시뇨르 Doutreloux는 돈보스꼬에 대한, 그리고 또리노에서의 사업에 대한 열렬한 찬미자 중 하나였다. 그는 자기네 도시에서도 똑같은 사업이 행해지길 바랬다. 살레시안들은 1891년에 Liege에 갔다.
새 공동체들의 의의
이 신설 공도체들의 의의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당신의 살레시안 사람의 특징들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선 리구리아 로마지역에 설립되었던 것과 같은 이태리 내의 몇몇 공동체들은 가톨릭 학교내의 프로테스탄트적 영향을 퇴치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살레시안들은 “이단자”들의 음모에 대항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도와 달라고 애원하는 발레크로시아의 주교의 초청을 받고서 그곳에 가야 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필히 뿌리 뽑아야 했던 라 스페찌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돈보스꼬의 아들들은 아주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서 캠페인을 벌이던 “성서회”의 주요 도구 중 하나인 조롱을 이겨낼 수단을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길 매우 열망했다. 사실 19세기에는 종파들간의 경쟁이 아주 극심했다. 하지만, 런던의 Battersea의 공동체에는 프로텐스탄트와 카톨릭의 소년들이 모두 공히 받아들여졌음에 주목해야 한다.
살레신아들에 의해 시작된 사업유형은 당대에 아주 유명해졌다: 살레시안의 사업은 일반적으로 기술학교들인(초등, 중등 혹은 기술)학교들로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나바르에서는 “농업부락”을 운영했다는 걸 잊지 않아 야할 것이다. 살레시안들은 본당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1875년 현재로는 주로 오라또리오를 운영했다. 그 이전에는 또리노와 삼피에르다레나에 오직 두 개의 오라또리오들 만이 있었으나 그들은 기술학교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오라또리오를 증설했다. 프랑스의 니스, 마르세이유, 파리에 있는 새 공동체들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살레시안 공동체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러나 특히 그 중에서도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에 있는 공동체들을 살펴보면 돈보스꼬가 보낸 수도자들은 가장 곤경에 처한 청소년들(그렇다고 필연적으로 비행 청소년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을 돌보기 위해 보내졌다는 게 분명하다. 나스와 마르세이유, 바로셀로나에 있었던 것과 같은 기술학교들(종종 실업학교들이라 불리 웠다)은 특별히 사람들의 요구에도 적격이었던 것 같다. 교회와 정부 당국자들은 또리노에서의 사업을 보고 살레시오회를 평가하여 돈보스고에게 그들이 일반 시민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학교들을 여는 동안에도 돈보스꼬는 사제 성소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 하고자 한다. 돈보스꼬는 그가 세운 기술학교들에다 곧장 부속 학부를 설치했는데 그것은 회의 팽창에 필요한 신입회원들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13
1888년까지의 살레시안 회칙
자발성과 방법
돈보스꼬는 무장한 감시인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유로우며 신념에 찬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경찰기질이 전혀 없었다. 바오로 크라우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돈보스꼬. 당신은 그분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의 사진만을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은 그분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결코 싫증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즉 모든 것이 다 잘 되나 가리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분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으면 당신은 결국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분께 모든 것을 말씀 드리고 싶은, 그분께 털어놓고 싶은, 이러한 값진 순간의 은혜를 받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젊은이들의 스승으로서 돈보스꼬는 아마도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는 한 마음껏 소리치고 달리고 뛰놀도록 하시오” 라고 말했던 성 빌립보 네리의 격언을 채택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돈보스꼬를 이상만 많이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실천에 옮길 능력은 없는 한낱 몽상가로 여기는 것은 큰 잘못일 게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돈보스꼬는 피에몬떼 농부의 인내와 고집, 그리고 수양과 “방법”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조직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로 하여금 몇 가지 “회칙들”을 작성케 했으며, 아마도 돈보스꼬가 했던 것처럼 자기 손으로 직접 많은 회칙을 초안한 성인도 드물 것이다.
이 열정적인 창시자의 발자국을 추적해 보자. 돈보스꼬는 결코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계획사업을 착수시켰으며, 곧 바로 최초의 시험적인 발자국을 내디뎠으며 불확성들을 극복하였고 장례를 위해 “경험에 바탕을 둔”중요한 사항들을 기록해 두었다.
사업이 전전됨에 따라, 그는 최초의 “회칙”을 작성하였으며 현안 문제의 요구들에 따라 그것을 고치거나 명백히 했다. 그러나 우리는 돈보스꼬가 항상 비슷한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회칙을 조회했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관념적인 지성을 의혹시하는 실제적인 사람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것은 또한 돈보스고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의 일들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효과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살레시안들이 사용하는 공식 회칙인 살레시안 회헌과는 별도로 그는 오라또리오의 회칙, 오라또리오 집들의 회칙(이것은 모든 살레시안 수도원의 회칙이 되었다), 그리고 총회의 “결의 사항”들을 작성했다. 모든 살레시안들 사이에서 현재 실시되고 있는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선 창립자의 삶과 경험에 비추어 그것의 기원과 발전을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라또리오 회칙
돈보스꼬는 일찍이 1845년부터 그의 갓 태어난 오라또리오를 위해 어떤 지시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규칙들은 고백성사를 특히 강조하고 있는 일요일 모임들의 일반적인 편성에 대한 것인데, 돈보스꼬는 고백성사를 아주 중시 여겼었다. 1846년 피날디시 집에 정착하자마자 돈보스고는 적절한 규율들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회칙을 작성하여(나는 오라또리오에서 그 규율들을 간단히 이끌어 냈다), 그것이 어떻게 실행되는가를 일일이 검토하는 것이 제일 우선적인 임무이다.”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이 회칙의 원문은 세례자 요한 르몽신부가(돈보스꼬 회고록)제3권속에서 출판했던 것으로서 1852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불행히도 그 속에조차 원래의 완전한 원문이 들어 있지 않다. 그 회칙은 2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1부는 오라또리오의 목적-휴일에 소년들에게 거룩한 교회의식 후 즐겁고 건전한 오락을 제공한다-과 함께 여러 가지 사무적인 것들(원장, Prefect 교리교사, 어씨스텐트, 향방계원, “감독자”, 성무감, 기록보관인, 노래지도자, 총감독, 후원자, 보호자)을 다루고 있다. 제2부는 입학, 지도, 종교적 실천 등의 여러 가지 규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제3부는 오라또리오와 관련된 학교에 주로 관계된 것인데 상당히 뒤에까지 출판되지 않았었다.
1862년에 나온 신판에서 돈보스꼬는 제2부 “크리스챤적 신심의 특별한 실천”을 그리고 제3부에는 “특별지침”을 덧붙였다.
마직막으로, 1877년에 나온 통학생들을 위한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오라또리오의 회칙은 돈보스꼬 하에서의 그 역사의 마지막 점을 찍은 것이었다.(이 최총판은 그 전에 나왔던 회칙을 단순히 재판한 것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특별지침”만을 제하고는 1852년 판과 1877년 판은 똑같다고 말한바있었다. 1852년부터 1877년까지(1887년까지)의 판들을 실제적인 내용의 면에서 비교해 보면 서로 본질상 동일하다는 게 드러난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제목에 따르면 1852년의 회칙은 발도꼬우의 오라또리오에만 관계된 회칙이라는 점이다.
돈보스꼬의 전기를 통해 우리는 그가 그 자신의 개별적 체험에 따라 오라또리오의 회칙을 작성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를 구하길 잊지 않았다. 르몽신부는 돈보스꼬의 개인 서류 속에서 밀라노에 있는 성 알로시오 오라또리오의 규칙들과 성 가족이라는 이름의 오라또리오의 규칙의 복사본 들을 발견했다. 우리 또한 로마에 있었던 성 빌립보 네리의 오라또리오와 밀라노에 있었던 성 샤를르 보로메오의 오라또리오에 대한 돈보스꼬의 지대한 관심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오라또리오들의 회칙들과 돈보스꼬의 회칙을 서로 비교해 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아주 큰 차이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다른 오라또리오들도 역시 축일에 젊은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그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나 그 중 몇 오라또리오들은 좋은 가문 출신의 행실이 바른 소년들만을 받다 들였다. 반면, 성 프란치스고 살레시오 오라또리오에서는 “신분이나 환경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받아 들였다.” 뿐만 아니라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오라또리오는 “가난하고, 가장 버림받고 무시받는 이들”을 위한, 더 나아가 불량 청소년들(I giovani discoli)-앞으로 더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개선되려 노력하기만 한다면-을 위한 곳이었다. 너무 어리다거나(8살 이하)혹은 전염병을 앓고 있다거나 혹은 다른 이들을 죄에로 유혹하는 소년들에게만 제한이 가해졌다.
그리하여 살레시오 오라또리오는 유진 신부가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그 민주적 정책 덕분에-부자나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진실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다른 오라또리오의 회칙들이 아침 몇 시간에만 그 활동을 국한시키고 있었던 반면, 방치된 소년들 특히 어린 노동자들에게 저녁이 더욱 위험스런 때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돈보스꼬는 자신의 오라또리오를 하루 종일 열고자 했다.
하지만 살레시안 회칙이 다른 오라또리오의 회칙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그 근본 정신, 즉 “아버지다운 그리고 형제다운 자애와 희생의 정신, 한 마디로 말해서 가족정신”에 있다. 어떤 오라또리오들은 출석부나 혹은 성체성사의 빈도를 조사하는 등의 심한 감독과 같은 다소 복잡한 규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 방식을 싫어하던 당신의 경향과는 별도로 돈보스꼬는 자기의 소년들을 “자발적이고도 사랑에서 우러나온 방식으로”대하려 했다. 이 때문에 특별히 그는 고백성사표를 폐지했다. “우리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성체를 영하라고 명령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자유롭게 나와야 하지 두려움 때문에 나와서는 결코 안됩니다.”
돈보스꼬의 “살레시안적”접근법은 오라또리외 회칙 맨 첫 페이지에서부터 그 품격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이곳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결과들의 근원이 되는 자애와 겸손에 있어서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인을 그들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오라또리오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인을 주보로 모시고 있다.” 그 이후 가장 자주 되풀이되는 말은 “자애”와 “인내”이다. 회칙은 아가가 원장과 어씨스텐트들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들의 관계와 같아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회칙은 또한 어씨스텐트들에게 소년들을 “친절하게”대하며, “심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때려서는 안되며;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거나 혹은 거치른 말씨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다”. 어씨스텐트들은 “모욕을 주는 언사를 절대 사용치 말고 용기를 주는 말을 사용하라”는 충고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돈보스꼬가 아주 정확한 조직 감각으로 오라또리오의 생활을 통제하는 걸 방해하진 못했다. 사람들은 살레시오 오라또리오에서 실행된 수많은 지시들에 깜짝 놀란다. 창립자는 오라또리오의 각 사람들에게 모든 가능한 상황들에 대한 행동방침을 지시해 주는 데 필요한 권한들을 지적해 주었던 것이다. 돈보스꼬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책무가 증가함에 따라 돈보스꼬는 많은 성인들과 젊은이들을 일반 경영에 참여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돈보스꼬는 소년들을 더 많이 “참여”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미래의 어씨스텐트들을 길러낼 수 있었다. 게다가 회칙은 아주 상세한 조항을 다루었다. 왜냐하면 오라또리오의 영신적 목적이 정확한 정의를 필요로 했다면, 장난감이나 장비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선 그 만큼이나 많은 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살레시안 규칙들 중 첫 번째 것인 오라또리오 회칙은 살레시오회의 조직에 들어 갈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그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오라또리오의 장상들에 대한 명칭은 수도회의 장상에 임명한 사람들의 명칭과 대응한다; 최고의 권한을 지닌 사람은 오라또리오의 회칙에서 이미 원장(rector)이라 불리웠다(이 명칭은 돈보스꼬 자신이 더 이상 그직을 떠맡을 수 없게 되었을땐 director로 바뀌었다). 원장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사람은 경리신부였으며, 영적지도자는 성무감 Cathechist이라 불리웠다. 그 외에도, 돈보스꼬가 오라또리오의 사업을 지속시키려고 생각했으며 또한 또리노 시에서 벗어나려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도 수없이 많다. 사실, 그 회칙에서는 원장은 “그의 후계자를 지며할 수 있으며” 또한 경리신부 prefect에 대한 대목은 경리신부 prefect 에게 사제들이 부족한 곳에서는 성무감 Catechist 의 임무를 맡을 것도 허락해 준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최초의 회칙을 특징이었던 정신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장차 완전한 수도회에 불어넣어질 바로 그 정신과 동일한 것이었다.
오라또리오 집의 회칙
모든 살레시안 집들의 예가 되었던 오라또리오 집에 대한 규율들은 결코 단시일에 작성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앞에서 통학생을 위한 오라또리오와 함께 오라또리오 집이라 불리웠던 청소년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급속히 발전했음을 보았다. 르몽신부에 따르면, “오라또리오 집에는 가족들에게 자연스럽게 관찰되는 것 외에는 처음에는 아무런 규칙도 없었다.”
얼마 후 숫자가 계속 증가하자 기숙생들 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몇 가지 규칙들이 필요해졌다.
1852년에 돈보스꼬는 11조항으로 이루어진 아주 간결한 “공동침실에서 규칙”을 마련했다. 기숙생들이 공동침실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방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져 있었기에, 그 규칙은 마치 공동침실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만 적용된 것 인양 오해를 받기 쉬우나 사실은 모든 기숙생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공동침실들에서의 올바른 행동(어씨스텐트에 대한 복종, 침실 왕래 금지, 청소, 침묵, 예절)에 관한 규칙뿐만 아니라 성체나 협동과 상호 원조의 의무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권장 사항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 규칙들은 매월 첫 일요일에 복창되었다.
기숙생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처음의 규칙으로는 불충분하게 되었으며 또한 돈보스꼬가 그의 집에 작업장들과 학교들을 세운 뒤로는 새로운 규율들이 요구되어졌다. 이 회칙을 작성함에 있어서 돈보스꼬는 통학생들을 위한 오라또리오의 회칙과 또한 몇몇 다른 회칙들을 참조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개인적 체험을 통해 얻은 바를 짜 넣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오라또리오의 회칙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초안의 원문은 2부로 나뉘어졌는데, 제1부는 오라또리오 집의 목적과 가입조건을 규정안 후에 원장과 경리신부, 성무감 catechist, 어씨스텐트, 지도자 monitor, 실장, 고용인, 기술자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1부는 “학생들에 대한 부가조항”도 포함하고 있었다. “집안에서의 규율”이라는 제명을 가진 제2부는 소년들을 위해 쓰여진 것으로서 신심, 노동, 웃어른과 동료들에 대한 대우, 겸손, 집안과 밖에서의 행동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제2부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아버지다운 어조로 오라또리오 집에 사는 “아들들”에 대한 몇 가지 권장 사항이 적혀 있다.
예비 검토를 거친 후 이 회칙은 1854-1855학년도에 처음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새 학년초에 학생들로 하여금 그 회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도록 했으며 소년들이 그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매주 일요일마다 한 장(Chapter)씩 읽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 그 회칙을 적용해 본 결과 그것이 충분치 않다는 게 드러났다. 돈보스꼬가 그 회칙을 그 때까지 인쇄하려하지 않았다는 게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돈보스꼬는 계속해서 그것을 수정하고 분명하게 했으며 완벽하게 다듬어 나갔다. 집의 발전으로 인한 특별 규칙들이 결국에는 통합되어 덧붙여졌다; 그리하여 그것은 작업장들에 대한 회칙(1853년 초판이후 몇 차례 개정 보완되었다), 1858년의 “소극장”에 대한 지침들, 1860년의 면회실에 대한 규칙들, 1876년의 부속진료소에 대한 규칙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살레시안 집들의 회칙들, 1877년
1863년 현재(지아베노에서의 실패까지를 포함시킨다면 1860년 현재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른 곳들에 오라또리오 집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새 회칙도 생겨났다. 돈보스꼬의 교육 강령과 방법들은 이젠 또리노 바깥에까지 퍼져 나갔다. 1863년에 개교한 미라벨로 학교는 견습공들에 관한 문제만 제하고는 발도꼬 오라또리오의 회칙을 거의 그대로 받아 들였다. 다른 집들은 다시 미라벨로의 규칙을 모방 했다. 자연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완비된 회칙이 요구되어졌다. 돈보스꼬는 1877년 여름부터 이 일을 착수하기 시작해서 자기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비평을 구한 뒤 같은 해에 칙서를 출판했다. 이 규칙들은 1877년 11월 5일과 6일에 발도꼬에서 공표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 후에 그 회칙은 여러 살레시안 집들에로 보내졌다.
“예방교육 제도”에 관한 연구보고서와 더불어 청소년들을 기르는 것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돈스꼬는 그것을 니스에 있는 the Patronage Saint-Pierre(성 피에르 고아원)의 개원식을 기념하기 위한 팜플렛으로 준비했었다. 그 연구 논문에는 “두려움 받기 보다는 사랑 받도록 하라”는 살레시안 학교교육의 근본 원리를 포함한 10조목의 “일반 조항”이 있었다. 그 논문은 “편지 쓰는 법”에 대한 충고로써 끝을 맺는다. 그 논문의 주요체는 오라또리오 집의 회칙과 비슷(제1부에는 여러 가지 공적인 조항이, 그리고 제2부에는 규율이 적혀 있다)하나, 특별히 견습공들을 위한 성무감 catechist의 직무와 교육에 관한 경리신부 prefect의 직무에 관한 몇 가지 새 요소들이 첨가되어졌다. 또한 “수사”들에 관한 부문과 “소극장”과 부속진료소의 규율에 관한 부문도 있다. 작업장에서의 행동에 관해서 한 장(chapter)이 할애되고 있으며, 소풍 때의 적절한 지도에 대해서도 또 한 장의 할애되고 있다.
20년도 넘게 살레시안들과 학생들 모두에게 시행되었던 이 논문은 돈보스꼬가 그의 “아들들”에게 남긴 문서 중 매우 중요한 것 중하나이다. 돈보스꼬가 거기에 부여했던 중요성을 모두가 알게 하기 위해 그 논문은 학년초마다 매번 정식수업 중에 낭독되었다. 그 규칙들이 교사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걸 학생들도 알고 있게 하기 위해 본문 중 직원들과 장상의 직무에 대한 부분도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 앞에서 낭독되었다. 돈보스꼬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학생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더 촉구할 것이며 또한 학생들과 그들의 교사들 간의 신뢰를 부러 일으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협의”
이른바 “협의”라고 하는 것을 제3형태의 회칙을 이루고 있다. 살레시안들에게는 이 말은 회의 장상들의 모임에서 나온 공식 결정을 의미한다. 두 종류의 모임이 이러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다: 원장들의 모임 혹은 회의와 1877년 현재로는 총회가 바로 그것이다.
매년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축일에 살레시안들을 위한 회의를 개최 하는 게 돈보스꼬의 관해 이었다. 1865년에는 이 회의가 본원의 평의회와 다른 모든 집들의 원장들의 공식 모임으로 바뀌어졌다.
1864년의 규정에 따르면 이 모임의 목적은 “회의 요구를 검토하여 그에 관련된 시기와 장소와 인원들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1865년에 처음으로 최근 미라벨로와 란조에 세워진 공동체의 원장들이 그들 학교의 발전에 관해 연설하도록 초대되었었다. 이듬해에 루아 신부는 돈보스꼬가 불참한 그 회의에서 의장직을 맡았었다.
초창기 회의들의 상세한 협의 내용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1871년에 소극장에 대한 규칙을 세웠다는 것은 알고 있다. 1873년부터 1876년까지의 회의는 시간표, 소년들의 마크, 고용인, 옷감, 회계, 서품식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항목들을 다루었다.
이 모든 것들을 약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생기자 수련장인 율리우스 바르베리스 신부가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돈보스꼬의 지도하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루아 신부의 지도하에 그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회의 총회에서 다루어진 협의 내용과 또는 우리 규칙들에 대한 주석이라는 제목의 모음집을 만들었다. 안젤로 아마데이 신부가 살레시오회의 “가장 중요한”문서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는 이 문서는 1875년부터 작성되었다. 일반 운영, 재정, 도덕, 교육이라는 표제들을 단 다섯 장들로 이루어진 결정판이 나왔다. 그 후의 협의 사항들은 오랫동안 위의 제재에 따라 협의 되었다.
마지막으로 열린 원장들의 회의는 1877년 살레시안 수호성인의 축일에 열린 회의였다. 1874년에, 매 3년마다 한번씩의 총회를 요구하는 회헌이 승인되었다. 1877년 가을, 란조에서 최초의 총회(그리고 가장 중요한 총회중 하나인)가 개최 되었다; 거기에서 논의된 협의 내용들은 1878년에 교육, 공동생활, 덕성, 재정, 관구 회칙 등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문서로 출판되었다.
1880년 총회 후 2년 뒤인 1882년에야 비로소 더욱 완비되고 다듬어진 문서가 선을 보였다. 이 문서는 그 전의 여러 가지 모든 결정들 즉 총회와 마찬가지로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었던 원장회의의 결정 및 제1차와 제2차 총회의 결정들을 포함했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은 제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 규정(총회, 최고 참사회, 관구 참사회, 원장, 수녀들의 총 지도자), 공동체 생활, 신심과 덕성(뒷부분에 살레시안 수사들에 관한 부분이 있다), 연구(그리고 출판)재정.
1883년과 1886년의 총회의 결정 사항들을 담고 있는 1887년의 의사록은 그 전에 것보다는 방대하지 않지만 그 전의 다소 불명료했던 점들을 명확하게 해 놓았다. 그 중에서도 본당을 인계받을 때의 조건들과 살레시안 교구 공동체와 외부와의 그것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본당들에 관한 아주 상세한 규칙들이 특별히 관심을 끈다. 소책자로된 그 문서는 이외에도 서품식, 수사, 오라또리오 회칙, 살레시안 회보, 병역의무(혹은 달리 말하자면 병역의무를 면제받는 방법)에 관해서도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결정들은 창립자의 정신 속에서 회헌이 이미 규정하고 있는 바를 다만 실행에 옮기는 것일 뿐이다. 1882년 문헌의 서문은 회의 발전은 회헌과 회헌의 실제적 적용을 지시해 주는 협의 사항에 달려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1887년 의사록의 서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엿보이는데 그 의사록은 협의 사항들은 규칙을 실천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1888년에는 살레시안들과 그들의 소년들의 매일의 활동을 규정하고 있는 문서를 모두 4개 갖게 된다; 하나는 오라또리오를 위한 그리고 하나는 살레시안 집들을 위한 두 개의 회칙과 두 개의 총회 의사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두 번째 의사록은 첫 번째 것을 완성한 것이다.
비록 아주 조그맣게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돈보스꼬의 따뜻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기다란 규칙 항목들을 통해 성 요한 보스꼬의 천재적 실천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돈보스꼬는 위대한 창립자의 표본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현실주의자이며, 대담무쌍하고 동시에 신중했으며, 개인적 명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허영을 지니지 않은 선동가나 사색가가 아닌, 견고한 현실적인 것의 건설자였다.
14
마리아 미자렐로
1837-1881
최초의 만남, 1864년 10월 8일
1864년, 돈보스꼬가 소년들을 데리고 리구리아 지방의 제노바로 수학여행을 가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알토 몬페라또 근처의 작은 마을 모르네제에 들렸다.
모르네제의 본당 신부인 도미니꼬 페스타리노 신부가 얼마동안 계속 또리노의 사도 더러 그를 방문해달라고 졸라댔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마침내 돈보스꼬가 오라또리오 밴드와 90명의 명랑한 소년들을 데리고 그곳에 당도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다음날인 1864년 10월8일, 페스타니노 신부는 그의 지도하에서 자신들을 기도와 사도직에 봉헌했던 일단의 처녀들을 그의 손님에게 소개했다. 그들 중 감동적인 사람은 농가 출신의 27살 난 처녀였는데 그녀는 너무 겸손한 나머지 앞으로 나가지 조차 못하고 그 그룹의 뒤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마자렐로였다. 돈보스꼬의 명성이 이미 모르네제에도 알려져 있긴 했지만 그를 직접보고 그의 말을 직접 드을수 있게 된 것이 그녀에게는 무한히 기쁘고 감격스런 일이었다. 매일 저녁 그녀는 돈보스꼬의 “밤 인사”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 서둘러 일을 끝마쳤다. 그녀는 돈보스꼬의 말을 아주 주의 깊게 경청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보스꼬는 성인이십니다. 저는 그분이 성인이 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 말은 제노바 주교(성프란치스고 살레시오:역자 주)의 강론 때 바로 아래에 앉아 있곤 했던 성녀 Jane Frances de Chantal의 말이기도 하다. 샨 프란시스 데 샹딸은 “저는 그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 곁에 있는 기쁨에 비견할 만한 기쁨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고 고백했다. 또한 그녀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성자다움에 관해 거의 똑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저는 제 마음 저 밑바닥으로부터 그분을 성인이라고 불렀으며, 또한 그분을 항상 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마자렐로와 Jane Frances de Chantal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결코 독단적인 묘사가 아니다. 두 사람은 모두 성인들의 재도 하에서 교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샹딸 백작부인과 모르네제의 농촌 처녀의 비슷한 운명을 그 누가 예견할 수 있었겠는가.
어린 시절
마리아 도미니카 마자렐로는 1837년 5월9일 제노바의 서쪽 악뀌 교구에 있는 마자렐리라고 불리우는 작은 모르네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요셉은 은 튼튼하고 정직한 농부였다. 철저한 크리스챤이자 다소 엄격했던 그는 그의 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마지렐로의 어머니네 말달레나 칼카뇨는 돈보스꼬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마리아의 어린 시절은 아주 단순했다; 그녀는 한시도 그녀를 잊지 않았던 본당신부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는 부모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녀는 집에서, 특히 그녀에게 복종과 신심, 겸손의 덕들의 가치를 가르쳐 주었던 아버지로부터 “다소 엄격한”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쾌활하고 활발했으며, 야심이 없었지만 자신을 억제할 줄은 알았다. 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였으며 항상 어머니를 도와 집안 일을 거들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 동안엔 특별히 이렇다할 유별난 일이 전혀 없었으며, 그 지방에서 일어난 유일한 한 사건만이 그녀의 전기작가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 콜레라가 유행하던 1836년에 약속한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지어졌던 성당과 가까운 집에서 그녀가 한동안 살았었고, 마리아가 겨우 여섯 살 되던 해인 1843년 5월24일에 이 성당이 크리스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로 헌납되었다는 것이다.(유진 체리아 신부는 당시에는 그와 같은 제목 하에 마리아찌 성당을 헌납하는 일이 흔치 않았으며, 돈보스꼬조차도 그보다 20여 년 뒤에 또리노에 있는 그의 성당에 크리스챤의 도움이신 마리아라는 명칭을 붙이려 했을 때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그 날 어린 소녀 마자렐로가 모든 본당 사람들 틈에 끼여 그곳에 참석했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한가지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네 가족이 딴 곳으로 이사해 뒤에조차도 그녀는 그곳의 성모님 성화 앞에 가서 기도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그 시절에 집이 파산했기 때문에 마자렐로씨네 가족은 라 발포나스까라고 불리우던 농장으로 이사했다. 그곳은 들과 포도원으로 둘러싸인 곳으로서 걸어서 45분쯤 걸렸다. 마리아는 20세가 될 때까지 그곳에서 아주 단순하게 살았다.
성장함에 따라 그녀는 동생들을 돌봄으로써 어머니를 도왔다. 그 시대에 그녀가 살던 지방의 소년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어떻게 해서 읽는 법을 배웠을까 궁금하게 여긴다 게다가 그녀는 암산에 아주 능해서 여러 차례 그의 아버지의 거래를 토와 드리기도 했다. 후에 그녀는 잘 교육받는 수녀들을 압도할 수 있게까지 된다.
종교적 형성
마리아 도니미까는 천성적으로 종교에로 이끌렸으며 또한 자기 성향을 그 방향에로 향하도록 했다. 어렸을 때 그녀는 자기 어머니로부터 교리문답을 배웠으며, 정신을 집중하여 조가와 만가를 배우던 모습은 그녀의 여동생 펠리치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성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자기 방 창문을 통해 성당 꼭대기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가 매일미사에 그녀를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기가 성당에 갈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엔 마리아보다 6살 위였던 사촌언니 도메니까와 함께 마리아를 성당에 보냈다. 첫 고백성사를 보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마리아에게 용기를 복돋아 줘야했다. 마리아가 너무 부끄럼을 탄 나머지사제 앞에 나가질 못했기 때문이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의 회원이었던 마리아의 아버지는 매 일요일마다 가장 먼저 나가서 영성체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굳건한 믿음과 올바름은 마리라 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녀는 후에 “아버지께선 제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는지 모릅니다. 제게 덕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 덕분입니다.”고 말했다.
마리아는 교리반에 가서 아주 조용히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려 귀를 기울였으며, 배운 것을 항상 완벽하게 암송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본당 신부는 마리아를 안아 올려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으로 보여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린이 여러분은 기도조차 할 줄 모릅니다. 시골에서 온 이 작은 여자아일 보십시오. 그녀는 기도를 아주 잘 알고 또 기도를 노래로 부를 줄도 압니다. 매주 교리문답 시합이 있습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서로 겨루어 말 그대로 ”영광의 점수ꡓ를 따게 됩니다. 마리아는 항상 자기 상대를 이길 수 있었으며 이렇게 외치곤 했습니다:” “나는 남자애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전 그 애들을 모두 이기고 싶어요.” 이것은 장차 마자렐로 원장이 되었던 여성의 성질을 보여 주는 말이었다.
마리아 마자렐로는 10살 가량 되었을 때 첫 영성체를 했으며, 그리고 나서 1849년 9월30일에 가비에 있는 성당에서 몬시뇨르 팔라비치니로부터 견진을 받았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우리는 그녀가 이러한 중대한 사건들을 잘 준비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모범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열망은 더욱 깊어졌으며 그녀는 당시 완전을 추구하는 법에 대해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사상을 따랐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피하라”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단과 방법을 발견했다.
그녀는 자기 남동생들에게 의무와 형제애에 충실하라고 충고했다. 동시에 그녀 자시는 자신의 크리스챤적 생활을 보다 열렬하게 하고 싶어, 자기가 지적 받았던 고쳐야 될 특별한 단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찾아낼 수 있었던 사람 중 페스타리노 신부보다 더 자상한 영적 지도자는 없었다.
도미니꼬 페스타리노 신부는 1817년 1월5일 모르네제의 한 유복한 가정에 태어났다. 그는 영성체를 자주 하라고 주장했던 위대한 인물이자 자기의 윤리신학 교수였던 요셉 프라씨네띠가 있었던 제노바의 신학교를 자주 방문했다. 1847년 그는 자기 교구로 돌아와서 얀센니즘에 대항해 실제 싸움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겨울날 아침에조차도 100명도 넘는 신자들이 평일미사에 나와 성체를 영하게 되었다”한다. 진취적이고 열성적이었던 그는 남자들을 위한 성 빈첸시오 아빠울로회와 여자들을 위한 크리스도교 신자 어머니들의 신심회를 조직했다. 사람들은 아무런 이의 없이 그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페스타리노 신부는 마리아 마자렐로가 매우 용기 있고 또 진전되려고 열망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서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선 그는 맨 처음엔 그녀에게 평일 미사 때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다음으로는 그녀가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보는 한 매일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는 특별히 금욕과 자제,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 자기애에 대항해 싸울 것, 죄에서 떠나 있을 것을 권장했다.
어떤 점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승리를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로부터 급한 성격을 물려받았다 한다. 그녀는 때로 너무 참을 수 없어서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감을 느꼈다. 때로 그녀의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머, 내 얼굴이 굉장히 붉어졌어.” 자신을 억제한다는 게 그녀로선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건전한 판단력과 상식뿐 아니라 굽히지 않는 강한 견해와 고집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영적 지도자는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마다 주저치 않고 그녀의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어느 날, 포도밭에서 일했을 때 그녀는 어린 가지들을 묶어주는 게 해로울 거라고 생각하여 그 가지들을 바르게 묶어주는 대신 그것들을 잘라내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고백신부는 그녀에게 자기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페스타리노 신부는 여성적인 허영이 조금이라도 엿보일라치면 통렬히 나무라곤 했는데, 특히 그녀의 친구들이 종종 그녀의 멋진 차림새를 들어 그녀를 칭찬했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경건한 것을 무척 좋아했으며 완전히 성장한 뒤에도 계속 매일 미사에 참석했다고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그녀는 낮 동안의 고된 일이나 동트기 전에 일어나야 된다는 사실이나 나쁜 날씨등 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미사에 참석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새벽인 줄로 잘못 알고 밤2시에 성당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사제가 성당문을 열 시간까지 인내롭게 그곳에서 참고 기다렸다. 성당에서 그녀는 보통 감실이 있는 어두운 구석에 쪼그리고 앉기를 좋아했으며 자기 신심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피하였다. 집에서는 그녀는 기도나 영적 독서를 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그녀의 또 다른 위대한 자질은 일에 대한 열성이다. 그녀는 집 안일을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포도밭에서도 그의 아버지의 일꾼들에게 큰 칭찬을 받았다. 그들 중 한사람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처녀는 무쇠팔을 가졌다니까; 글쎄 그녀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지독히 일해야 할 형편이라니까; 그녀는 리지외의 데레사 마르땡(Therese MartinOF Lisieux)과 같은 19세기의 진정한 크리스챤 소녀들 중 한사람이었다.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딸들
마리아 마자렐로에게서는 하느님께만 속하려는 생각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 말이다. 그녀는 “인가가 필요한 줄도 모른 채”자신이 어린애처럼 처녀로 살기로 서약했다고 확언했다.
그녀는 수도생활을 대단히 존중했으나 자신은 너무 가난하여 수녀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마침내 부분적으로나마 그녀의 바램이 실현될 기회 가생겼다.
모르제제에는 마리아처럼 보다 완전한 삶을 갈망하는 소녀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수녀원에 들어 갈 수 없었거나 혹은 세속 안에서 자신들을 성화 시키고 싶어 자기 가족들과 여전히 함께 살면서 그들 자신의 종교적 단체를 형성하기로 결정했다. 이 생각은 그 그룹에서 가장 년 장자였던 안젤라 마까뇨가 처음 제안했던 것이다. 안젤라는 그들 중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원죄없으신 성 마리아의 딸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심단체에 대해 생각해 왔으며, 울술리네스(Ursulines)회를 바탕으로 새 신심단체에 대한 기본 윤곽을 작성하여 1852년에 떼스타리노 신부께 그것을 보여드렸다.
그 원문은 회원들은 “마음과 정신과 정신에서 그리고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고백신부에 대한 복종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게 될 것이며, 1년에 한번씩 정결 서약을 갱신할 거라고 말하고 있다. 비록 세속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훌륭한 모범과 잦은 성체배령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동정녀께 대한 헌신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신앙을 실천하는데 자신들을 바침으로써 오히려 수녀원에 사는 이들보다 더 세속으로부터 초연하고자 했다. 그들의 모임은 비밀 모임이었으며 그들은 주변 시골이나 읍에서 비슷한 그룹을 출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페스타리노 신부는 그 생각에 대해 아주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인가하기 전에 검토와 조언을 얻기 위해 우선 그 원문을 자기의 오랜 스승이자 친구인 제네바에 있는 프라씨네띠 신부에게로 가지고 갔다. 페스타리노 신부는 무려 2년이나 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1855년 가을에 프라씨네띠 신부는 전에 그가 받았던 그 원문에 기초를 둔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딸들이라는 신심단체를 위한 회칙의 개요를 페스타리노 신부에게 보내 주었다.
페스타리노 신부는 1855년 12월9일 일요일에 그의 본당에서 비밀리에 그 단체를 창립했다. 안젤라 마까뇨와 마리아 마잘렐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 원죄없으신 마라아의 첫 딸들이었다. 아뀌의 주교 몬시뇨르 콘트라또의 사목 방문 때인 1857년에야 15명의 회원을 가진 그 신심 단체의 존재가 본당에 알려졌다.
마리아는 그 단체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으나 사람들은 그 중에서 그녀가 가장 열렬하고 헌신적이다 는걸알수 있었다. 규칙에 따라 그녀는 열심히 하느님과의 일치 및 고백성사, 본당의 소녀들 안에서의 사도직을 실천함으로써 그녀자신의 열렬한 천성의 욕구를 채워나갔다. 조모임 때, 한번은 마리아가 자기 동료들 앞에서 “한 시간이나 하느님을 생각지 않고 보냈다”며 자신을 자책했을 때 친구들은 모두 “큰 감동”을 받았다. 금욕에 대한 그녀의 목마름이나 너무도 강해 그녀의 지도자는 여러 차례 그녀에게 금욕을 금해야 할 정도였다.
그녀의 개성은 그 신심회를 통해 드러났다. 그녀는 “장상”이라할 수 있는 안젤라 마까뇨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했으나 훌륭한 판단력과 정열로 인해 자기 동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2주일마다 한번씩 열리는 크리스챤 어머니의 모임을 가장 잘 통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였으며, 그녀는 “마치 자석처럼”소녀들을 이끌어들일 수 있었다한다.
사도직의 시작
마리아가 20세 가량 되었을 때, 여러 가지 요소들-그들 모두가 다 기분 좋은 것들이지만은 않았으나-이 그녀의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1858년에, 마리아네 가족들이 모두 포도밭에서 바삐 일하고 있는 동안에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 결과 아버지는 외따로 떨어진 라발포나스까의 집을 떠나 모르네제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마리아는 성당과 그녀의 사도활동 지역과 더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1860년에는 장티푸스가 유행하여 그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마리아내 아저씨들 중 한 명이 그 병에 걸리게 되어 마리아는 한 달 동안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아저씨와 그 외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녀가 돌보던 환자들이 위험에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그녀가 병에 걸리게 되어 한동안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 왔다. 그녀는 결국 점차 회복되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그녀의 건강을 완전히 되찾진 못했다. “무쇠팔을 가졌던”그 소녀가 이제는 더 이상 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병고로 인해 생각할 여유를 가졌다.
그녀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해 양재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며, 이것을 계획하고 있는 동안 아마도 그녀는 자기 재능을 다른 소녀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의 부모들은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결국 승낙해 주었다. 그후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딸들 중 한 사람이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중 한 사람인 페트로닐라 마자렐로가 그녀와 합류하기로 동의했으며 하느님 자신도 그 계획을 반겨하는 것 같았다. 후에 마자렐로 원장은 그 시절에 일어났었던 이상한 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곤 했다. 어느 날, 모르네제 언덕을 걷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치 꿈 속 에서처럼 수녀들과 학생들이 가득찬 커다란 집을 보았으며 “내가 너에게 이집을 맡긴다.”라고 그녀에게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1860년 초가을에 마리아와 페트로날라는 발레티노 캄피에 양장점을 차렸다.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그들은 안토니에따 바로코라는 사람에게서 지도를 받은 이듬해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가게를 시작했다. 적당한 가게를 찾아내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몇 차례 이사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성당 가까이에 있는 적당히 큰 장소를 발견했으며, 첫 제자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본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마리아와 페트로닐라는 두 고아들을 받아들여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어 그들을 숙박시키기 위해 자기네 가게 옆방을 빌렸다. 마리아의 부모들이 그 곳에서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줄 때까지 페트로닐라 혼자서 그 어린애들과 밤에 그 방에 함께 있었다. 세 번째 네 번째 기숙학생이 오고 그 후에 또 세 명의 기숙생이 생겨나 더 많은 방들을 얻어야했다. 얼마 안 있어 가게 옆에 작은 숙박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그녀에게 바느질 기술을 배우러 오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있는 모든 사람들을 돕고”싶었다. 그리하여, 일종의 오라또리오가 시작되었다. 일요일마다 마리아와 페트로닐라는 소녀들을 한데 모아 성당에로 데려 갔으며 그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오락을 하기도 했다. 마리아는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규율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녀의 기지와 사람들에 대한 체험만으로 기숙생들과 통학생들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을 지도하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필요할 때 그녀의 학생들의 잘못을 고쳐주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애를 기르는 것에 대해 서슴지 않고 충고해주었으나, 그녀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의 영적 안녕 이었다. 마리아는 그녀의 사도직 안에서 소녀들이 또래의 압력을 피하고 또한 하느님을 거스리지 않도록 돌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어린이들에 대해 특별한 사랑을 품게 된 마리아는 아직 살레시안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이미 한 살레시안이었다.
돈보스꼬의 영적인 딸
특히 페스타리노 신부가 1862년 11월에 오라또리오를 방문한 후에, 마리아와 페트로닐라 두 친구는 또리노의 사도에 관한 굉장한 것들을 듣게 되었다. 돈보스꼬가 1864년에 처음으로 모르네제에 갔을 때, 마리아는 돈보스꼬가 하느님의 일군이란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녀도 자신의 일이 수녀회로 바뀔 가능성에 대해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만, 돈보스꼬 조차도 당신에는 그렇게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날 또리노에 있는 오라또라오와 모르네제에 있는 오라또리오 간에는 유대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페스타리노 신부가 살레시오회에 가입한 후 그곳 본당 구역에는 소년들을 위한 살레시오 학교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페스타리노 신부는 돈보스꼬와 합의하여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딸들 신심회 회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곳에 함께 살도록 거처를 마련해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마리아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으나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녀를 시집보내고 싶어하는 자기 부모님들의 반대를 극복해야만 했다. 결국 페트로닐라와 다른 두명의 소녀들이 그녀와 함께 이사하게 되었고, 그들과 더불어 몇몇 기숙생 견습생들이 미래의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수녀원의 첫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그 가족이 성장함에 따라 장상이 필요하게 되자 마리아가 장상으로 뽑혔다.
점차 돈보스꼬는 모르네제에 있는 그 단체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나, 수녀회에 대한 생각이 처음 생겨난 때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1868년 말 모르네제에 소풍 갔을 때 돈보스꼬는 회의에서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딸들을 만났으나, 우리는 그 다음 4년 동안의 일에 대해서는 돈보스꼬가 그들에게 그 집의 운영을 위한 계획과 일련의 규정들을 보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
1871년은 결정적인 해였다. 왜냐하면 돈보스꼬가 어린 소녀들의 크리스챤 교육을 위해 수녀회를 시작하기로 작정하여 페스타리노 신부에게 그 첫 성소자 들을 모르네제에서 찾아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돈보스꼬의 결정은 모든 사람들, 특히 그러한 생각을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해버렸던 마리아 마자렐로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더불어 “복종과 헌신을 위해”자신을 기꺼이 봉헌하겠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다.
1872년 10월5일, 마리아 마자렐로는 모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로서 착복식을 가졌으며 돈보스꼬 앞에서 그녀의 서약들을 선서했다. 돈보스꼬는 자연히 그녀에게 새 수녀회의지도를 맡겼으며, 이 때부터 그녀의 이야기는 점차 그녀의 수녀회의 이야기로 바뀌게 된다.
마리아 마잘레로의 영적인 면
강직했으나 겸손했던 마리아 마자렐로는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훌륭한 판단력과 열렬한 신앙 및 불온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존경받을 기품을 타고난 여성이었다.
비오 9세에 따르면 그녀는 다스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도 하나 사실 어떤 수녀가 말했듯이 그녀는 마치 겉치레가 아닌 진정한 관심을 가진 진짜 어머니처럼 장상직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복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설득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신념을 지녔던 그녀에게 모두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순순히 복종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사랑은 심오한 영성을 발전시켰다.
양장점을 시작했을 때 아직 나이 어린 재봉사에 불과한 마리아는 자기 친구에게 “한 바늘 한 바늘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가 되도록 하자”고 말할 정도였다. 세월이 갈수록 성체와 마리아께 대한 그녀의 신심도 점점 깊어만 갔다.
후에, 장상이 되었을 때에도 그녀는 “더 많이 교육받고 능력 있는 어떤 사람이 그녀의 자리를 차지해야 된다고 부탁했을 정도로 허영과 자만심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비천한 태생이었음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천한 일들을 기꺼이 함께 했으며 하느님을 찾는 일에만 몰두했다.
마자렐로 원장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랑으로써 모든 이에게 봉사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마치 수녀원에 아무도 없기나 한 것처럼 우리들 각각을 보살펴 주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쏟았다.” 그녀는 재치는 유명하다; 그녀의 재치는 타인들에 대한 그녀의 민감성과 존경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이것들은 다시 그녀의 순결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성스런 향기는 인위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 향기는 늘 살레시안적 위엄과 중용 속에 머물러 있었다. 마니피깔은 이 비천한 여종의 덕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마리아 도미니까 마자렐로는 1881년 5월14일에 44살의 나이로 주님 품에 안겼다. 그녀 1938년 11월20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되었으며 1951년 6월24일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 품에 올랐다.
그 동안에 모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이라는 그 작은 단체는 교회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수녀회를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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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
돈보스꼬의 선종 때까지
성녀 마리아 마자렐로에 대한 지식은 그녀가 성교회에 드리기 위해 도왔던 수녀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녀는 구석진 시골 태생으로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아주 소박한 소녀로서 몬페라또에 있는 작은 마을의 소녀들을 도움으로써 하느님께 봉사하려 했던 회를 조직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돈보스꼬가 오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그 회가 팽창되었던 것이다. 그 작은 단체는 더 잘 조직되게 되었으며, 회원수가 늘어났고, 학교들이 세워졌으며, 남아메리카로 선교사들이 보내졌다. 그리하여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딸들은 증가 일로 에 있는 회원과 명성을 지닌 아주 중요한 수녀회, 즉 모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로 성장하였다.
창설 단계
1857년 악뀌의 주교가 모르네재에 있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딸들이라는 단체를 공식적으로 승인할 때만 해도, 그 회는 결혼할 생각이 없는 혹은 금욕적인 생활을 원하는 몇몇 처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 모두는 자기 본당의 젊은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봉헌된 열렬하고 활동적인 크리스챤들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각기 자기 가족들과 함께 살았으나 종종 페스타리노 신부 지도하에 그리고 “장상”이라 불리우던 안젤라 마까뇨의 지도하에 모임을 가졌다. 서약을 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복음적 권고들(영적 지도자의 “장상”에 대한 복종은 물론 청빈과 정결까지도)을 실천했다. 하지만 곁으로 보기에는 그들과 다른 사람들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1860년 현재, 다른 회원들이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주장하는 데 반해 회원 중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길 바랬다. 마리아 마자렐로는 심한 병을 앓고 났던 터라 이제는 더 이상 전처럼 들판이나 포도밭에서 일할 만큼 튼튼하지 못했다. 그녀가 친구 페트로닐라와 함께 시작했던 바느질 가게는 오라또리오 혹은 클럽을 갖춘 작은 기숙사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안젤라 마까뇨를 비롯한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딸들의 나머지 회원들이 그들의 가족과 함께 계속 머무르는 동안 조만간 다른 회원들 몇이 마리아와 페트로닐라에게 가담했다.
그러는 사이 페스타리노 신부는 기차여행 중인 돈보스꼬를 만나 그에게 이 젊은 여성 단체에 관해 얘기했다. 돈보스꼬는 흥미롭게 그 이야길 경청한 다음 또리노에 있는 오라또리오를 방문해 달라고 그를 초대했다. 1862년 11월에 페스타리노 신부는 그곳에 갔으며, 자기가 그 곳 에서보게 된 것들에 도취되어 살레시안이 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또리노와 모르네제 간에는 친교의 정신 속에서 연락이 취해지기 시작했으며 페스타리노 신부는 종종 발도꼬를 방문하였다.
돈보스꼬로서는 멀리서나마 큰 관심을 가지고 마리아와 그녀의 동료들의 활동을 지켜보았다. 어느 날 그는 그들에게 자기의 자세를 말해 주는 짧은 편지를 보냈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될 수 있는 한 많이 젊은이들을 도우십시오.”
돈보스꼬의 계획
모르네제에서의 실험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언제 어떻게 돈보스꼬에게 떠올랐는지는 판단할 길이 없으나, 우리는 한동안 돈보스꼬가 소녀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생각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주저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는 자신이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사업에 말려들게 되었을까?
결정적으로 그를 행동으로 내몰았던 것은 주교들과 다른 당국자들의 끈덕진 요청이었다. “돈보스꼬는 살레시안들이 소년들에게서 거둬온 성공에 만족하여 소녀들을 간과해 버리는 걸까?” 간단히 말해서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종종 꾸었었던 꿈을 그가 꾸게 되었다. 이 꿈들은 당시의 그의 마음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1862년 7월5일 밤에 돈보스꼬는 자신이 바톨로 후작 부인과 얘기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돈보스꼬는 대화 끝에 “좋습니다; 소년 소녀 모두를 위해 우리 주님의 피가 헛되이 흘려지지 않았음을 제가 알아야 한다는거군요.”라고 말했었다.
프란체시아 신부는 돈보스꼬가 그 속에서 또리노의 광장에서 놀고 있는 “수많은”소녀들을 보았다는 또 다른 꿈을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소녀들은 “전적으로 자기들끼리 놀도록 내버려져”있었다; 소녀들은 돈보스꼬를 보자마자 그에게로 달려가 자기들을 돌보아 달라고 애원했다. “저는 그 소녀들에게서 빠져 나오려 했지요. 저는 그 소녀들에게 나는 그녀들을 도울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녀들을 돌봐주러 올 것이며, 그녀들을 돌보는 것은 나의 사명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어떤 고귀한 부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인자한 말씀으로 그 소녀들의 탄원에 응답하라고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이 소녀들을 돌보아 주시오. 그들은 나의 자녀들입니다.“라고 계속 반복해 말씀하시면서 소녀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고 후에 돈보스꼬는 그 꿈 이야길 자세히 들려주었다.
프란체시아 신부에 따르면, 돈보스꼬는 1870년에도 다시 “살레시안들이 소년들에게 해 준 바를 소녀들에게 해 줄 수녀회를 만들”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한다.
그 때까지는 일들이 아주 천천히 진행되는 것 같았으나,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그들이 신속하게 움직이라는 게 분명했다. “사랑하올 돈보스꼬여, 당신은 계속해서 새 계획들을 떠맡을 작정입니까?”고 프란체시아는 말했었다.
수녀회의 탄생
돈보스꼬의 결정은 1871년과 1872년 사이 2년 동안에 성취되었다. 1871년 4월, 총회에서 그는 처음으로 여자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에 관해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저더러 제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소년들을 위해 했던 일들을 소녀들을 위해서도 해달라고 재촉해 왔습니다. 제 자신의 성미대로 하자면 저는 소녀들을 위한 사도직에는 손을 대고 싶지 않습니다만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들로부터 너무도 자주 그러한 권유를 되풀이해서 받다 보니 저는 우리가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에 반대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되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전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논의해줄 것을 제안하는 바이며 하느님 대전에서 그 문제를 숙고해 보기 위해 여러분을 초대하는 바입니다.”
돈보스꼬의 이 말은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한다. 그들은 한달 후에 다시 만나 여자 공동체를 창설하자는 생각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비오 9세는 돈보스꼬를 연결하는 자리에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 빈첸시오 아빠울로의 사랑의 수녀회가 빈체시오 수도회에 의존해 있듯이 새 여자 공동체도 당신과 당신의 후계자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새 여자 공동체의 회헌을 작성하고, 그 사업을 시작하며, 나머지 일들도 추진하도록 하시오.”
1871년 말에 돈보스꼬는 페스타리노 신부에게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미래의 수련자들을 위한 회헌 초안을 주었다. 그런데 성인이 병에걸려 50일 동안이나 몸져눕는 바람에 일이 약간 연기되었다. 그러나 그는 1872년 1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인의 축일에 행하졌던 장상 선출과 회의를 명했다. 27표 중 21표가 마리아 마자렐로에게 던져 졌으나, 그녀는 너무도 겸손하여 “으뜸 원조자” 혹은 “대리”라는 명칭 외에 어떤 명칭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친구 페트로닐라는 “부원조자(Second assistant)”가 그리고 마리아의 동생 페리치나는 수련장이 되었다.
본원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었다. 수녀들과 그들이 맡고 있는 아이들이 묵을 수 있을 만큼 큰 분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자 공동체의 창설 이야기에는 예견치 못했던 상황들과 실망이 수없이 얽혀 있다. 1864년에 돈보스꼬가 처음으로 모르네제를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그 곳에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로 동의하였으며 열성적으로 학교를 짓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학교가 거의 다 지어졌을 때 그곳 교구 꾸리아(curia)는 학교의 개교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 학교가 교구의 소신학교와 경쟁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돈보스꼬는 그 건물을 수녀들에게로 주기로 결정하였으며 페스타리노 신부에게 필요 시설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일들이 제대로 풀려나가지 못하였으며 모르네제 주민들은 결국 자신들이 배신당하게 된 결과에 대해서 비난을 퍼부었다. 1872년 크리스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이 그곳으로 이사했을 때, 그녀들은 수도 생활 첫날부터 오해와 질시의 분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그들은 또한 가난으로 인한 곤란들을 견뎌야 하기도 했다.
1872년 8월5일은 새 수녀회에 있어서는 아주 대단한 날이었다. 돈보스꼬 앞에서 그곳 교구의 주교 몬시뇨르 그끼안드라가 첫 착복식과 첫 서약식을 주재하였다. 15명이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복장을 받았으며, 그들 중 11명이 그들의 첫 3년간의 서약들은 선언했다. 돈보스꼬는 그 의식의 끝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참아내야만 했던 괴로움과 비웃음에서 비롯된 어려움들을 제 눈으로 직접 지켜보아 왔습니다; 여러분의 친척조차도 여러분에게 등을 돌렸지만, 용기를 잃지는 마십시오. 거룩함을 위해 계속 분투하십시오. 그러면 때가 되어 여러분을 많을 사람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 입이다-그러나 여러분은 여전히 겸손하게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 이후 새 수녀회는 공식적으로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은혜로우신 성무님께 우리의 감사의 표시로 변함없는 불멸의 기념비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으며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이 바로 이 기념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기에”이 명칭을 택하였던 것이다.
통합
이러한 일들이 있은 후 그 단체는 새로운 열성을 가지고 일해 나갔다. 여전히 남아 있는 큰 문제 거리는 대부분의 수녀들이 별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돈보스꼬는 또리노에서 교사들을 급파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마리아 마자렐로도 글씨를 쓸 줄 알았다. 교사들을 보냄과 동시에 그들의 지도자는 그들에게 도시인들로 하여금 구구한 해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지방 사투리 대신 표준 이태리어를 사용하도록 하라고 부탁했다...... 1873년 2월, 그들에게 수도 공동체의 문제들에 관한 조언을 해주기 위해 또리노로부터 두 명의 안나회 수녀들이 돈보스꼬의 요청을 받고서 모르네제에 왔다.
한편, 돈보스꼬가 보낸 지원자들이 모르네제에 도착했다. 1873년 8월5일에는 9명의 새 회원들이 베일을 받았으며 세 명의 수련자들이 3년간의 허원을 했다. 피정 지도자 중 한사람인 몬시뇨르스코튼이 모르네제의 단체의 성과에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서 그 창립자들에게 무식과 무질서, 질적인 결핍 등의 결점을 숨김없이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자 돈보스꼬는 “좋아, 좋아요. 우리가 다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얘기했다 한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돈보스꼬는 살레시오 수도원들은 때로 혼란 가운데서 시작되지만 조만 간에 항상 질서 있는 유형에 도달되더라고 말했다 한다. 그로부터 3년 후 또 피정을 지도하기 위해 모르네제에 갔을 때 그 성직자는 자신이 자기 견해를 완전히 바꾸어야했다고 자인했다.
지원자들에 관한 젊은 “장상”마리아 마자렐로의 임무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돈보스꼬나 페스타리노 신부-그는 살레시안이 되었다-가 신입회원을 보내 주면 그들의 성소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그녀의 책임이었다. 불행히도 새로 온 사람들 중에는 상식이나 자제력 혹은 절제력이 부족한 사람이 항상 몇 사람 있게 마련이었다. 돈보스꼬가 보낸 또리노에서 온 어떤 젊은 과부는 모든 이에게 지시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충동과 또한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적인 수녀원에 따라 개혁을 실시하려는 집착으로써 거의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반항적인 사람들이 그러한 공동체에 불만을 품게 되어 결국 4명의 수녀들과 한 명의수련자가 떠나가게 되었다. 겉보기에는 성녀다워 보였던 그 지원자는 어떤 사람에 따르면 악마적이기 조차한 미심쩍은 자취들을 남긴 연후 슬픈 결과에 마주쳤다... 너무도 겸손하여 과감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마자렐로 원장은 그런 경우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회원들 중에는 때로 침착치 못한 이들도 있긴 했지만 수녀회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내적으로 통합되었다. 1874년은 이점에 있어서 중요한 해였다. 살레시안들의 회헌이 인가 과정에 있는 동안에 돈보스꼬는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을 살레시오회에 결합시키는데”성공했다. 이번부터 돈보스꼬는 “우리 수녀들”이라 말하기 시작했으며, 살레시안들의 장상이 법적으로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장상이 되었고, 모든 것들이 3년 전에 비오 9세가 표현했었던 개념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요한 갈리에로 신부가 총장을 대신하여 수녀회를 다스리는 책무를 가진 “총 지도자”에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느네제는 계속해서 “특별 지도자”를 갖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또리노의 살레시오회에 있어서 수녀회가 얼마나 중요해졌는가를 그리고 수녀회의 미래가 또리노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논의되었던가를 보여 준다. 최종적으로 1874년 6월5일 마자렐로가 수녀들의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총장직에 공식적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진짜 원장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그녀에게 부여해 주었을 지도 모를 “대리”라는 명칭을 이번에는 포기해야만 했다. 그시기에 다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874년 5월15일, 페스타리노 신부가 죽었다. 그가 죽자 수녀들은 수녀회 전체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페스나리노신부의 사촌인 요셉 갈리에로 신부가 총 지도자로서의 그의 직위를 맡게되었는데, 몇 달 후에는 그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몇 년 애에 모르네제 수녀원에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던 개성이 강한 지도자가 도착했던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코스타마냐였다. 강철같은 의지와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이 위대한 살레시안-그는 후에 아메리카에서 주교가 되었다 3년 동안 살레시안 정신의 역동적 특성을 구현시켰다. “마치 수녀원에 전류가 흘러 들어가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같이 보였다.”고 체리아 신부는 말하고 있다. 마리아 마자렐로에게는 다소 어려운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왜냐하면 그 지도자는 자기들의 주제를 다룰 때에만 교과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라 말해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는 마자렐로 원장에게 오라또리오를 발전시키도록 박차를 가했다. 그 자신이 직접 성악과 음악을 가르쳤으며 몇몇 수녀들을 교사로 만들었다.
8월 28일 돈보스꼬의 앞에서 마자렐로 원장과 12명의수녀들이 종신허원을 했으며 15명의 지원자들이 베일을 받았다.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규칙들이 아뀌 주교에 의해 인가를 받게 된 것은 1876년 1월 23일의 일이었으나, 창립자는 그것을 인쇄하기 전에 실험과정을 두었다. 그리하여 그 규칙들은 1878년에야 소책자로 인쇄되어 수녀들에게 주어졌다. 우리는 여기서 돈보스꼬가 로마의 교회당국자들로부터 수녀회의 인가를 얻어내려고 전혀 애쓰지 않았음을 지적해야 한다. 이것은 창립자의 생애에 있어서 일종의 이례적인 일이며, 교구로부터 살레시오회에 의존시킨 것에 대해 로마 교회당국이 반대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겨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살레시오 수녀들의 회헌은 살레시안들의 회칙과 아주 비슷했다.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달들의 목적은 사랑의 사업을 이룩해 나가면서 크리스챤적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기에 노동 계층의 소녀들에게 크리스챤적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했다. “점잖은 환경의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을 위해학교를”여는 것뿐만 아니라 도시와 시골의 가장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작업장이나 학교, 고아원, 탁아소, 축제 오라또리오등을 경영하는 것이 그들의 특별 사명이었다. 수녀들에게 요구되는 자질들 중에서도 살레시안 정신의 주요특징들이 되는 것은 자애, 단순성, 겸손, 초연, 명랑함 등이었다.
마리아 마자렐로는 규율을 아주 존중했으며, 그녀는 그것을 “돈보스꼬를 통해하느님으로 부터 온”것으로 여겼다. 그녀는 항상 그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강조했다. 규율의 존중에 대한 그녀의 엄정함은 그 규율들을 충실히 준수할 수 있게 해주었던 아주 영적인 성격에 의해 더욱 두드러졌다.
수녀회의 팽창
수녀회가 모르네제에서 한창 조직되고 있는 동안에 분원이 이미 고려되기 시작했다.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이 놀랄 정도로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은 창립자의 명성과 그들의 형제 수도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네제로부터 첫 분원이 생긴 것은 1874년 10월8일의 일이었다. 돈보스꼬의 요청에 따라, 펠리치나 마자렐로 수녀의 지도하에 작은 그룹이 보르고 산 마르티노의(전에는 미라벨로에 있었던)살레시오학교 옆에서 새 공동체를 시작하기 위해 떠났다. 보르고산 마르티노에 공동체를 세운다는 발표에 대한 수녀들의 첫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낙담이었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생동안 모르네제에서 살기를 바랬었기 때문이었다.
1876년에는 특히 예견치 않았던 발전이 많았던 해였다. 그것은 36명의 수녀들이 모르네제로부터 새로 다른 7군데로 갈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남자 살레시안 학교 옆에 소녀들을 위한 학교와 오라또리오를 시작했다. 3월29일에는 두 번째 그룹이 또리노의 “돈보스꼬 곁에 도착하여 발도꼬 지역에서비슷한 일을 시작했다. 비엘라의 주교가 살레시오 수녀들에게 자기교구 신학교의 식생활을 맡기고자 하여, 9월7일에 또 한 그룹이 그곳으로 갔다. 10월12일에 또 다른 그룹이 알라씨오에 있는 살레시오 학교에서 똑같은 일을 시작하였다. 11월8일에는 몇 사람이 카살레 교구의 루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탁아소와 오라또리오를 열었다. 12월에는 란조에 있는 살레시오 학교에서 일하기 위해 두 수녀들이 그 곳에 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또 하나의 임무-일시적이었긴 하나 특별한-에 대해서 언급해야할 것 같다.
1876년 여름,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 7명이 세스트리 레반테 해변에서 앓고 있는 일단의 어린이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간호했다.
위의 일들은 모두 단 일년 안에 일어났었던 일이었다. 1877년 2월에 열린 원장들의 회의에서 루아 신부는 모르네제에 대해 이 집은 “놀라운 진전”을 이룩했다고 말했으며, 돈보스꼬는 그의 만족을 감추지 않았다. 마자렐로 원장은 이 새공동체들에 대해 직접 아주 큰 관심을 쏟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각각의 새 모험을 위한 후보자들을 그녀더러 선정하라고 부탁했었으며, 그녀는 수녀들과 늘 접촉하고있었으며 가능할 때면 언제나 그들을 방문했다. 그녀가 가장 자주 권했던 것은 “모르네제 정신”을 간직하라는 것이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모르네제 정신이란 “내핍, 경건, 노동”으로 요약될 수 있다.
1877년에는 더 먼 곳에까지 공동체가 세워졌으며 해외선교에 대한 열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살레시안들은 이미 1875년부터 남아메리카에 공동체를 건설해 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수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문제는 1877년 가을에 열린 총회에서 결정되었으며, 마리아 마자렐로는 첫 선교단을 데리고 로마에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11월9일에 비요9세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제노바까지 동행해 주었다.
살레시안 수녀들은 코스타마냐 신부의 안내를 받아 12월17일에 우루구아이의 수도 몬테비데오로 향하는 배에 올랐으며, 그들은 살레시오 학교가 있는 그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빌라 코론에 자리를 잡았다. 1878년의 두 번째 선교여행 덕분에, 그들은 아르헨티나에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로 갈 수 있었다. 1880년에 그들은 파타고니아인들이 살고 있는 파타고니아의 진짜 선교 지역에 들어갔다. 그로써 살레시오 수녀들은 남미지역에 발을 디딘 첫 수녀회가 되었다.
1877년에,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은 프랑스에도 갔으며, 그해 9월1일에 그들은 니스에 Patronage Sainte-Anasta-sie(성 아나스타시 고아원)을 세웠다. 1878년에는 나바르에 그리고 1880년에는 Saint-Cyr에 다른 공동체들이 세워졌다.
이태리에서는 살레시안 수녀들은 1878년에는 키에리와 쿠아르덴토에 1879년에는 카스시네테에, 1880년에는 보르고마시노와 멜라쪼 디 알레산드리아와 페난고와 에스터에 갔다. 그들은 동년에 시실리 섬에 있는 카타니아와 브론테에도 갔다. 그들이 간 곳마다에서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은 여러 가지 사도직을 수행했다. 살레시안들을 위한 부엌일과 세탁일 은 물론 간호, 초등학교, 작업장, 교리반, 오라또리오 등을 담당했다.
학생들과 수녀원, 성소자가 배가됨으로써 수녀회가 번창하는 동안에도 그 어느 때나 다름없이 겸손하고 활동적인 “라 마드레(마자렐로 원장:역주)”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아 마자렐로 원장의 말년
1877년에 돈보스꼬는 니짜 몬페라또에 있는 수녀원과 이전에 성당이었던 건물을 획득하게 되어 그것을 수녀들의 모원으로 만들려했다. 모르네제는 사실 이제는 너무 작은 곳이었다; 통신이 어려웠고 아직도 약간의 반감이 남아 있었다. 1879년 2월4일에 이사하게 됐으나 마리아 마자렐로에게는 그 이사는 슬픈 작별이었다.
1880년 니짜에서 제2차 총회(살레시오 수녀회 총회)가 열렸으며, 당연히 새 선거가 있었다. 다른 사람을 총장으로 선출시키려 했던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마잘렐로는 만장 일치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이 이미 쇠잔해지고 있었다. 1881년 2월에 마르세일레스에로 세 번째 선교단을 전송하는 도중 그녀는 심한 병에 걸려 Saint-Cyr에 있는 수녀원에서 묵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그곳에 있는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에게 죽음에 관한 우화를 얘기해 주었다. 죽음이 수녀원 문을 두드리고서 적당한 사람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총장에게로 접근했다는 수녀회를 위해 이미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던 “라 마드레”는 그 암시를 알아챘다. 그녀는 니짜로 돌아 와서 그것에서 그 해가다 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39명의 수녀들과 50명의 수련자들, 그리고 26개의 수녀원이라는 풍부한 유산을 남기고서 떠나갔던 것이다.
다게로 원장
“공동 창립자”의 선종 후에 열린 총회는 수녀회의 조직을 확실히 했으며 25살 난 카테리네 다게로 수녀에게 총장직을 맡겼다.
1856년 3월17일에 또리노에서 가까운 쿠미아나에서 태어난 카테리네는 18살 때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었던 살레시오 수녀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침묵과 고독의 생활을 꿈꾸었었으나 모르네제의 수녀원에서 그러한 생활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처음 몇 년 동안은 힘들어했다. 그녀는 그녀의 가족, 특히 아버지께(어머니는 돌아가셨었다.) 몹시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한 향수병에 걸려 있었다. 마자렐로 원장은 그녀가 이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875년 8월28일에 첫 서원을 한 뒤 곧바로 카테리네 수녀는 여러 가지 책임들을 맡았다. 이듬해에 또리노에수녀원이 생겨 그녀는 엘리사 론칼로 수녀의 “대리”로서 그곳에 보내졌으며, 1879년 초에 그녀는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돈보스고와 가까이 있다는 것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그녀 자신의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오라또리오와 학교에서 많은 진취적 정신을 보여 주었다. 1880년 3월에 그녀는 Saint-Cyr에 있는 고아원의 원장으로서 그 계획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던 미묘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다게로 수녀는 대단히 존경을 받았으며, 얼마 안 있어 곧 총장대리가 되었다. 착실함과 상식, 친절 등의 덕으로 인해 그녀는 큰 존경을 받았던, 그녀는 결국 1881년 8월12일에 열린 총회에서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나이가 아직 적었던 터였기에 돈보스꼬로부터 특별 허가를 얻어야했다.
다게로 원장이 솔선하는 가운데 수녀회는 계속 팽창해 나갔다. 이태리와 프랑스, 남미에 새 수녀원들이 세워졌다. 선임자의 모범을 따라 그녀는 그녀의 딸들과의 개별적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여행을 했다. 그녀의 중요한 첫 여행은 1882년 2월의 프랑스에로 여행이었다.
돈보스고의 임종시에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은 불과 몇 년 안에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노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50여 개의 수녀원과 백 여명의 수련자들, 그리고 390명의 수녀들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도 항상 이제 막 총장직을 맡기 시작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늘 정력적이고 현명했던 다게로 총장하 에서 살레시오 수녀회는 끊임없이 발전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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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안 협력자들
돈보스꼬는 “재속 살레시안”을 갖길 원했으나 “살레시안 협력자”로 만족해야 했다. 아마도 이 말이 그가 아주 소중히 여겼던 계획이 실재로 돌아갔던 사실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말일 게다. 그는 서약에 얽매이거나 혹은 공동생활을 하지는 않고서도 수도회 내의 권리들을 완전히 지닌 살레시안을 만들려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가 본시 원했던 바의 절반마늘 성취했다. 그 자신의 이탈리안적 책략과 피에몬테인적 고집에도 불구하고 돈보스꼬는 그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단호한 결정에 굴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돈보스꼬의 계획은 참으로 실행 불가능한 것이었던 것 같다.
살레시안 협력자회는 살레시오회가 최종인가를 얻은 직후이자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회가 이미 발전하고 있던 1876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그것은 초기 오라또리오로 되돌아가려는 오랜 노력의 결정이었다.
초창기의 비 수도자 원조자들
수도회가 아직 형성되기 이전인 1841년부터 1859년 사이 돈보스꼬는 수많은 소년들을 돌보는 데 있어서-이 일은 그 혼자의 힘 만으론 도저히 해낼 수 없었다-도움이 필요했다. 돈보스꼬는 집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있던 자기를 도와주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 줄 친절한 어씨스텐트들을 늘 찾고 있었다.
최초의 원조자들은 당연히 사제들이었으며, 강론하고 고백성사를 듣고 또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였다. 요셉 가파쏘나 베드로 멜라, 프란치스꼬 마렌고, 루치스 나시, 로렌스 가스탈대(장차의 또리노의 대주교), 이냐시오 불라와 요셉 불라, 지아킨토 카르파노, 미카엘․히아텔리노, 세례자 요한 보렐 등과 같은 사람들은 참으로 이러한 사도직에 매우 열심이었다. 이 중에서도 보렐 신부는 특히 더 주목할 만한 사람이다. 그는 오랜 동안 돈보스꼬의 친구이자 카운셀러였으며 돈보스꼬의 아주 충실한 협력자 중 한사람이기도 했다. 1846년 심한 병으로 몸져눕게 되었을 때, 돈보스꼬는 오라또리오의 책임을 그에게 맡겼다. 돈보스꼬는 보렐 신부를 매우 존경했으며, 보렐 신부와의 대화에서 “사제적 열성과 끊이지 않은 훌륭한 충고, 봉사에 대한 자극 등을”얻었노라고 말했다.
보렐신부는 또한 자신의 전형적인 피에몬떼적 활성으로써 소년들을 매혹시키는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사제들뿐만 아니라 평신도 원조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의 사회적 배경은 아주 다양했다. 그들 중에는 훌륭한 가문의 사람들, 심지어 길레따의 카이스 백작(살레시안이 되었으며 상당한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 사제가 되었다), 마루뀌스 파싸티, 빅날래의 카롤리 백작, 프푸네이의 스까람피 백작과 같은 귀족 가문의 사람들도 있었다. 돈보스꼬는 비천한 집안 출신의 원조자들 중 죠셉 가그리말디라는 고물장수를 회상하길 좋아했는데, 그 사람은 오라또리오의 소년들에게 그의 여가 시간과 저금을 주었다. 돈보스꼬에게는 원조자들이 퍽 많았는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돈보스꼬는 그들 모두를 충실하게 기억하였다.
이 평신도들은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일에 자신들을 헌신했다. 그러나 돈보스꼬는 그들의 봉사를 일요일의, 그리고 사순절 동안의 평일의 “교리문답 선생님”으로 감사히 이용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야간 학교 수업을 돕기도 했다. 게다가, 그들은 “소년들을 데리고 미사를 드리고 있는, 혹은 소년들과 함께 오락을 즐기고 있는”지도자를 도왔다: 그들은 게임과 소풍을 편성했다: 그들은 물질적 요구에도 신경을 썼으며 대로 다과를 베풀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소년들에게 적당한 일자리를 찾아 주는 이를 도맡아 해내기도 했으며 오라또리오와의 접촉을 계속 유지하게 하기 위해 직장으로 그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원조자는 남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돈보스꼬의 어머니인 맘마 말가리따를 비롯하여 여자들이 소년들이 옷과 세탁을 맡아 열심히 일해 주었다; 이들 중에는 지체 높은 유지들도 몇 있었다. 돈보스꼬 여성들이 맡아 준 일들이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가난한 그 소년들 가운데에는 바꿔 입을 만한 셔츠를 갖지 못한 소년들이 항상 몇 명은 있게 마련이었으며, 혹은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고용주도 그들을 받아 들여 주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허름한 옷을 입은 소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천하고도 때로 냄새나기조차 한 일들을 도왔던 그 “협력자들”중 장차의 가스탈디 대주교의 어머니인 파싸티 후작 부인을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한다: 그녀는 매주 일요일마다 옷을 세탁하며 나눠주는 일을 떠맡았었다; 일요일에 그녀는 기숙생들의 침대를 검열하고 했으며, 그리고 나서 “군대의 하사관처럼”그녀는 자기 부대를 모아 놓고서 그들이 청결한가 면밀히 조사했다.
이들 원조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성직자는 물론 평신도들도 돈보스꼬를 돕기 위해 그들의 주머니를 뒤지곤 했다. 예를 들어한 사제는 소년들을 위해 돈보스꼬에게 부유한 자기 부모들로부터 받은 돈 모두를 내놓았다; 한 은행가는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냈다; 어떤 견습공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기 저금을 내놓았다. 오라또리오의 회계로 일하였던 보렐 신부는 이러한 너그러운 마음씨를 매우 고맙게 여겼다.
결성을 위한 계획들
돈보스꼬는 이 어씨스텐트드을 한 그룹으로 결속시키는 것이 그들의 영향과 효과를 크게 증가시킬 것이라는 걸 곧 깨달았다. 이것이 아마 사람들 가운데서 신앙을 옹호하고 교육을 실시하려는 “모임”에 대한 생각의 단초였을 것이다.
생각은 그러하였지만, 많은 원조자들이 돈보스꼬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너무 멋대로 행동했다; 갈등과 정치적 문제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탈퇴했다; 1848년의 소동은 일시적으로나마 오라또리오의 지도자에게 극적인 결과들을 안겨 주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 후로 돈보스꼬는 그의 사업의 존속을 위해 더욱 더 그의 소년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오라또리오의 소년들은 자연적으로 더 순종적이었다. 결국, 그의 꿈들은 목자들이 양떼들 가운데서 나올 거라는 걸 정확히 예시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49년 여름에; 돈보스꼬는 루아와 갈리에로와 프란체시아를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는 신부들로 만들길 희망하면서, “오라또리오를 경영하는데 있어서 자기를 도와 줄 원조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 네 소년을 초대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친절과 도움을 그만 받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어려움과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돈보스꼬는 또리노에 있는 세 오라또리오들에 있는 소년들에게 봉사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늘 찾았다. 돈보스꼬가 1850년경부터 그의 어씨스텐트들을 언급할 때에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수도회(congreg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호기심을 끄는 일이다. 이때 그는 비오9세 성하께 직접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었다; “또리노의 사제 요한 보스꼬는 성하께 종교와 신심 속에서 집 없는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그리고 제가 지도자로 있게 된 한 회의 법적 설립에 대해 감히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르몽 신부는 이 “모임”은 사제들과 평신도들로 이루어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같은 해에 돈보스꼬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돈보스꼬 회고록)의 저자에 의해 언급되어 있는 또 다른 시도를 하고 있었다.
11월17일 저녁에 신뢰하는 일곱 명의 “훌륭한 평신도 가톨릭인들”을 불러모아 놓고 그들에게 “종교적 문제들에 있어서의 출판의 폐해와 교리와 성직자들에게 반대하는 많은 나쁜 크리스챤들에 의해 선언된 신성모독의 전쟁, 그리고 신성한 종교가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피에몬떼주 내의 위험”을 얘기하고서 성 프란체스꼬 살레시오의 보호 하에서 한 잠정적인 신심단체를 시작해 보지 않겠는냐고 제안했다. 이 임시 단체는 성직자들을 제외시키지는 않을 것이나 “주로 평신도들의 회로 시작”될 것이며, “불 신앙의 진보를 방지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뿌리 뽑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사랑의 일들”을 조장시킬 것이라고도 했다.
이 계획은 성공치 못했다. 체리아 신부에 따르면 “평신도를 성직자에 버금가는 조직체로 만들겠다는 것은 당시엔 분노와 걱정을 일으키는 일이었기”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돈보스꼬가 결국 협력자회가 되었던 것의 윤곽을 자기 나름대로 조직하려 했음을 뒷받침 해준다.
선견지명이 있었건만 거부되었던 결성
해가 감에 따라 돈보스꼬는 헌신적인 성직자와 평신도 어씨스텐트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사도직을 계속해 나갔으며, 회의 결성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혀 가고 있었다.
1859년에 그는 서약에 따라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회원들-평신도 수도자-로 구성된 수도회를 창설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다른 원조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돈보스꼬는 세속성에 개의치 않고 그들을 그 수도회의 일부가 되도록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일에 대해 보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목적으로 그는 1864년에 로마로 보내진 회헌을 작성하였던 것이다. 그 회헌에는 세속의 회헌들을 다음과 같이 대우하는 조항들이 담겨 있다:
“1. 밖에서 그들 자신의 집에서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산다 할지라도, 그들은 본 회에 소속될 수 있다.”
“2. 그들은 서약에 의해 구속되지는 않겠지만, 학교공부나 교리문답을 가르치거나 훌륭한 책들을 탐구하도록 격려하거나, triduums,나 9일 기도 영적 묵상등을 장려하거나 혹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영신적 양육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사랑의 일들을 수행하도록 영향을 주는 등의 자기 연령과 직업과 위치에 적합한 규정의 일부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제5조는 회의 성원 중 충분한 이유로 인해 떠난 사람은 외부 회원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취지의 조항이기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로마 교황청은 외부 회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던가? 1864년 4월6일의 보고서에서 주교단의 비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수도회에 외부 사람들이 가입한다는 것은 특히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위험스런 일이기에 그에 관계된 16장의 모든 조항들을 삭제하는 게 현명하리라 생각합니다.”
담담 비서 스베른리아티의 발언은 이를 확인하고 있다: “외부인들이 가입을 통해 수도회에 입회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Approbandum non est ut extraneas pio Instituto adscribantur per ita dictam affiliationem.)”
돈보스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단락을 남겨 두려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그것을 부록에다 끼워 넣기로 하는데 동의해야만 했다. 그는 몇 가지 것을 고쳐(제5조의 삭제를 비롯하여)원본 전체를 다시 한번 로마의 당국자들에게로 보냈다. 그는 반박을 받은 단락들을 삭제하고서야 비로소 1874년에 회헌의 최종인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백년 전인 당시는 수도자들과 세속인들의 결합을 경솔하게 여겨 용납치 못했던 아직 덜 성숙된 시대였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돈보스꼬가 자기 시대 때 생각했었던 바로 그 노선들을 따르고 있는 “세속 단체들”을 실제 격려하고 있다.
일종의 제3회
돈보스꼬와 같은 사람은 결코 용기를 잃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의 제안이 회헌에서 삭제 당했긴 했지만 어떤 다른 방식으로든 그것을 실현시키려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면에서는 살레시안들과 관계를 가지면서도 분리된 연합체 즉 일종의 살레시안 제3회를 만들려고 생각했다. 1876년에 뚜렷한 모습을 출범시키기 전에 그는 몇 가지 다른 형태들을 시험해 보았었다.
1874년에 수도회 회헌을 인가 받고서 로마에서 돌아오자마자 돈보스꼬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협회(Union of St.Francis de Sales)의 윤곽을 작성했다. 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총회의 성원들과 여러 원장들은 그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돈보스꼬가 생각하고 있는 단체가 많은 신심 단체와 협회 중 또 다른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돈보스꼬는 그들에게 성 프란체스꼬 살레시오 수도회의 연합회(Associates of the Congregation of St.Francis de Sales)라는 제명 하에 작성했었던 프로그램을 보여주었다. 이“살레시안 연합회”의 목적은 살레시안들을 재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목적은 “살레시안들의 구원과 성 프란체스꼬 살레시오회의 규칙을 따르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한다는 하나의 단일한 목적 안에서 선량한 크리스챤들을 결합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살레시안들은 그 기획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돈보스꼬는 크리스챤 연합(Christian union)이라는 보다 일반성을 띤 제목 하에 그 구상을 단순하게 고치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수도생활을 닮아 보려는 세속 회원들을 위한 생활방식”을 제안했다. 그것은 크리스챤의 완성의 주요 특성이라고 익히 생각되던 신심업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집 없는 청소년들을 돕기 위해 특별히 봉헌된 활동적인 생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제하고는 옛날의 제3회의 일종이었다.
이 일련의 규칙들은 다시 바뀌어(Association of Good worles)라는 명칭을 취하였다. 1876년에만 해도 돈보스꼬는 명확한 조직을 추구하고 있었다. 살레시안 협력자, 혹은 시민사회 안에서 도덕을 증진시킬 실천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체없이 새 회칙을 인쇄하도록 했으며 그것에 대한 공식인가를 얻으려 했다. 1876년 5월9일에 돈보스꼬는 “살레시안 협력자회 union of Salesian Cooperators”에 대한 교회인 인가에 해당하는 비오 9세 성하의 훈령을 얻어냈다. 알현 중에 성하께서는 여성들을 포함시키되 또 다른 제3회를 만들지 말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과 관련을 맺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것은 언젠가 돈보스꼬가 실행하려 했었던 바였다. 여하튼 1876년의 교황 성하의 인가 덕분에 돈보스꼬의 오랜 계획은 비록 그가 바래왔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나마 구체화되었다.
1876년 회칙
돈보스꼬가 새 연합체를 빨리 결성할 수 있었던 경과를 살핌에 앞서 그 성공의 기초가 되었던 회칙의 기본 원리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회칙은 다음과 같은 제목은 지닌 8개의 짧은 장들로 구성되었다:
1) 선업을 위한 크리스챤 연합
2) 연합의 결속력으로서의 살레시오 수도회
3) 살레시안 협력자들의 목적
4) 협력의 양식
5) 회헌과 연합회의 관리
6) 특별의무들
7) 장점
8) 종교적 실천
협력자회는 일치를 위해 살레시오회에 의존하였다. 협력자회의 목적-돈보스꼬는 이를 투쟁이라는 말로 표현했었다-은 그들의 계획사업으로써 살레시안을 도와 악과 싸우는 것이었다. 돈보스꼬는 형제적 일치의 덕으로써 그들의 길에 가로 놓여 있던 수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내는데 성공했었던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모범을 인용했다; 협력자들은 청소년들을 위협하는 그리고 회 자체의 미래를 위험에 몰아 넣는 악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절박하게 요구되는 임무들이 특히 주목되었다. 이 사도적 사회적 방향은 가능한 한 공동생활을 닮은 생활을 하는 것에서부터 자선에 이르는 협력자회의 근본 목적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제3장 말미에서 우리는 “크리스챤의 완성”과 “우리 이웃과 특히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 관한 살레시안 회칙의 제1조의 반향을 발견한다.
섭리가 정해준 환경 속에서 살면서 협력자들은 살레시안들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는다. “정상적인 가족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수도회 안에 있는 것처럼”살 수도 있다. 1877년의 총회는 협력자들이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수도회의 정신을 세속 안에 퍼뜨리고”있다고 언급하게 된다. 그들의 영적 생활을 지도하고 풍부하게 하기 위해 돈보스꼬는 그들에게 단순성과 공정함에 대한 가치, 사회 안에서의 그들의 위치에 대한 의무, 연례 피정과 월례 피정의 은혜, “행복한 죽음을 위한 연습”, 잦은 성체성사 등에 관해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협력자들의 활동은 살레시안 수도자들의 활동과 비슷하다: 교리문답, 수업, 피정, 사제 성소자들을 발견하고 격려하기, “양서”의 보급, 젊은이들을 위한 활동들, 기도, 자선; 돈보스꼬는 자선이란 용어를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협력자의 활동은 살레시안의 활동이며, 수도자와 비 수도자 둘 다 모두 “똑같은 들판”에서 똑같은 방법을 가지고 똑같은 장상 밑에서 일하여 수확을 거둬들이기에 당연히 협력이라 불리 운다. 협력의 의미를 단순히 재정적 원조에만 한정시키려 했던 사람들도 몇 있었다.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하긴 했지만 돈보스꼬는 협력에 대한 이러한 협의의 해석을 거부했다. 돈보스꼬는 1882년 뚤롱에서 “우리는 신심회의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살레시안 협력자들은 우리 회를 위해 기부금을 모아야 할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그들의 형제들과 젊은이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법과 영적 방법 및 그 외 모든 방법들을 총 동원하여 일해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협력자회는 살레시안 수뇌들을 장상으로 하는 조직체이다. 그렇지만 “종교에 대해”그것은 철저히 위계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협력자회의 맨 처음 초안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이점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지역 수준에서는 살레시안 원장이 협력자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어 있었으며 만약 지역 수준의 살레시안 수도원이 없는 경우 협력자는 그룹의 책임 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협력자회의프로그램에 따르면 일년에 두 차례의 모임이 필요했다.
제6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본래 생각되었던 수도자 회원과 세속회원으로 이루어진 수도회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살레시오 수도회의 회원들은 그들의 협력자들 모두를 그리스도안에서의 그들의 진정한 형제들로 여기고 있으며,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영혼들의 선을 위해 협력자들의 도움이 쓰여질 수 있을 때면 언제든지 협력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협력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살레시오 수도회 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동료라는 말의 사용이 허용되지는 않았지만 허원한 수도자들과 그들의 세속 협력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애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다.
기획의 성공
인가를 받은 즉시 돈보스꼬는 논의와 여행과 회원 모집을 시작했다. 돈보스꼬는 약 2년간을 협력자회를 설립하는데 몸 바쳐왔으며 그에 따라 행동했다.
돈보스꼬의 방법들은 다양했으며 그 결과들은 모두 만족스런 것이었다. 아무런 반대를 예기치 않고 있었을 당시에는 그는 종종 미래의 협력자들에게 회칙과 회원 증명서를 보내기만 했었다; 협력자에게 포함시키고자 하는 몇몇 중요한 인물들에게는 개별적으로 편지를 띄웠다. 돈보스꼬는 협력자 명단에 영광을 더하기 위해 유명 인사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돈보스꼬의 생각들에 대해 매우 열광적이었으며 자신은 단순한 협력자가 아니라 협력자 중에서도 으뜸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던 비오9세의 이름이 협력자 명단의 선두를 장식했다. 후에 돈보스꼬은 엄격한 레오 13세께도 똑같은 제안을 했는데 레오13세 성하께서는 자신은 협력자뿐만 아니라 “조종자”가 되고 싶다고 답하였다.
이태리와 프랑스, 스페인을 두루 여행하는 중에 돈보스꼬는 협력자수를 크게 증가 시켰다. 로마에서 그는 많은 대 가문의 사람들과 수없이 많은 고위 성직자들을 그의 운동에 끌여 들였다; 제노바와 리구리아는 대규모 대표단을 제공했다. 프랑스에서는 니스가 중요한 센타가 되었다. 이것은 특히 그 도시의 세계 동포 주의적 성격 때문이었다; 마르세이유에서 돈보스꼬는 그들과 더불어 당장 편안함을 함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열렬한 협력자들을 발견했다.
아주 많은 협력자들 가운데 두드러진 사람이 몇 있었다: 스페인에는 장차 성인 품에 오르게 될지도 모를 도로테아 드 쵸피테아라고 하는 바르셀로나의 위대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나라에 있어서 살레시안 사랑의 진정한 어머니”였다. 프랑스의Claire Louvet d'Aire-surla-Lys와 Louis-Fleury Colle of Toulon의 백작이 기억될 만하다. 영적인 딸로서의 헌신과 후원자로서의 관대함을 겸비하였던 그 프랑스 여인과 돈보스꼬 간에는 열렬한 편지가 오갔다. 돈보스꼬의 생애 이야기 가운데에는 Colle백작의 이름이 종종 등장한다. 왜냐하면 그와 그의 아내는 특히 아들 우리의 죽음 후 돈보스꼬께 아주 너그러운 마음씨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도 역사가 체사레 칸투, 독일인 멜러, 헝거리인 론카이, 니스의 유대인 라테스(돈보스꼬에 따르 그는 매우 열정적인 협력자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챔보드 백작등이 있다.
돈보스꼬는 갖가지 계급 출신의 이들 협력자들에게 그들을 일치케 해줄 무언가를 제공하려 했으며 그와 동시에 수도회의 중추와 협력자회의 전초부대간의 유대를 마련하려 했다(협력자회의 장려와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1877년 8월에는 Bibliofilo Salesiano(이듬해에 이것은 Salesian Bulletin(살레시안 회보)로 바뀌었다)가 크건 작건 돈보스꼬에게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부되는 월간지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이 잡지의 발행 부수는 해마다 증가하여 1887년에는 4만 부에 달했다. 1879년에는 불어판이 나왔으며 다시 1886년에는 스페인어 판이 나왔다.
정기적 회합은 정신적 일치를 촉진하고 협력자들의 수를 늘리기 위해 또 다른 수난이었다. 돈보스꼬는 몸소 80회나 그 모임을 관장하였으며 그들 중 28번은 프랑스에서 열린 것이었다. 돈보스꼬는 살레시안의 활동 소식들을 널리 퍼뜨리고 또한 자신의 청취자들로 하여금 그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일하고 있는 사랑과 복음화라는 거대한 사업을 각 방면에서 “협력하도록”하기 위해 이러한 “가족적 재일치들”을 이용하였다.
우리는 협력자들에 대한 돈보스꼬의 생각들이 계속 성공적으로 확대되었음에 대해 감동을 받는다. 돈보스꼬는 당초에는 협력자를“수도회의 후원자”로 여겼었으나 점점 협력자회를 그 성원들에게 인격적 참여를 요구하는 교회 조직체로 여기기 시작했다. 1883년의 총회는 “그들의 목적을 진정으로 이해하고있는 협력자들은 우리를 도울 뿐만 아니라 살레시안들의 특별 계획을 수행하기도 할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듬해에 르몽신부와 함께 자기 생각들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돈보스꼬는 “살레시안 협력자들의 진정한 직접적인 목적은 살레시안 들의 지도하에서 교회, 즉 주교와 사제들을 돕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1888년 돈보스꼬가 죽을 때에 다음과 같은 한가지 사실만은 아주 분명했다: 살레시오 수도회의 사도적 역량은 그의 협력자들의 도움을 통해 10배로 증가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비록 교회 법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하나 모든 면에서 세속 안의 진정한 살레시안들로 여겨 질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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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에서의 살레시안들
초창기 선교지역들
1875-1888
돈보스꼬의 선교 이상
1875년에 살레시안들이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향해 출발했던 이야기는 돈보스꼬의 선교이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돈보스꼬는 자신의 전 생애가 선교적 이길 바랬었고 그의 전기작가도 그는 이미 키에리의 학생시절부터 선교에 관해 생각했었다고 말한다. 돈보스꼬의 지도자인 요셉 가파쏘 신부가 반대하지만 않았더라면 서품을 받은 후 돈보스꼬는 선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돈보스꼬는 신앙 전파 연보(Annals of the Propagation of the Faith)라는 책의 이태리판을 아주 열심히 읽었으며, 자신이 지은 Cattolico provveduto(1853)와 성모성 성월 소책자들(1858)을 설명하기 위해 그 책을 사용했다.
살레시오회를 창설했을 때에도 여전히 선교에 대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으며, 당시 자력이 그토록 부족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기꺼이 그의 수도자들을 파견했을 것이다. 로몽신부는 돈보스꼬가 오랜 동안 세계지도를 아주 열심히 연구하였으며 오라또리오의 소년들에게 선교사들의 일에 관해 이야기해 줬고, 이교들에게 당한 순교와 또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였던 이교도들에 대해 얘기했음에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다.
1971-72년경에 그의 꿈들 중 하나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돈보스꼬는 세로 혹은 제복을 입은 유럽인 병사들에 대항해 싸우거나 사냥을 하고 있는 원시인들이 살고 있는 광활한 평원에 넋을 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조금 뒤에 일단의 선교사들이 나타나더니 놀랍게도, 그들 모두는 학살을 당했다. 두 번째 선교사들이 흥겨운 태도로 나타났다; 그들 앞에는 일단의 어린애들이 앞서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단박에 그 선교사들이 살레시안들임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돈보스꼬는 그 잔인한 원시인들이 그들의 무기를 내려놓고 선교사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성모님께 찬가를 불러들이는 돌연한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다.
이 꿈은 다른 사람들이 실패한 곳에서 살레시안들은 성공할 것이라는 걸 지적해 주는 것 같았다. 돈보스꼬가 꿈에서 본 사람들과 나라를 확인해 보려고 무척 애썼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꿈은 돈보스꼬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틀림없다.
돈보스꼬는 여러 나라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3년 동안이나 문서들을 연구했다 한다. 한 대 그는 꿈에서 본 그 나라는 아비시니아임에 틀림없다고 여겼고, 그 다음에는 홍콩, 그 다음에는 오스트렐리아,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인디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르헨티나 공화국으로부터 한 요청이 왔다. 그로 인해 돈보스꼬는 파타고니아의 인디안들 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곳 사람들에 대해 연구해 본 결과 그는 그 나라와 그곳 주민이 그가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과 나라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그것을 섭리의 표징으로 여겼으며 오랫동안 그가 오랫동안 소중히 생각해 온 계획을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살레시안 선교사들을 거칠고 문명화되지 않은 부족과 접하지 않게끔 하는 특별한 복음전파 방법을 채택하기 위해 돈보스꼬는 그들의 선교적 노력들이 시작되는 곳으로부터 안전한 위치에 기지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위의 요청은 다음과 같이 생겨난 것이었다: 1874년 말 경돈보스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이태리인들의 본당과 산 니콜라스 드로스 말로이오스에 있는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인수해 달라고 청하는 편지들을 아르헨티나로부터 받았다. 사보나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영사 카쪼로가 그 요청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는 리구리아에서의 살레시안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자기 나라를 위해 살레시안들의 도움을 받고자 희망했었기 때문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네이로스 대주교가 살레시안들을 반가이 맞아들이겠다는 뜻을 보인 후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교섭들은 돈보스꼬에게 감명 받아 돈보스꼬에 대해 신뢰감을 가지고 있던 카쪼로의 친구인 산 니콜라스의 사제 페드로 세까렐리의 훌륭한 사무 덕분에 성공적이었다. 1875년 1월29일 잊을 수 없는 의식에서 돈보스꼬는 카쪼로 영사가 참석한 가운데 오라또리오에 대대적인 뉴스를 전달할 수 있었다. 2월5일에 돈보스꼬는 모든 살레시안들에게 보내는 회람장 속에서 지원자들은 서명으로 신청하라는 사실을 공표 하였다. 돈보스꼬는 첫 선교단은 10월에 출발한다고 하였다.
이 뉴스는 곳곳에 커다란 열광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실상 모든 살레시안들이 너도나도 선교를 지원하였다. 확실한 오라또리오와 신흥 수도회에 하나의 신기원이 한창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메리카에로의 잇따른 출발
살아 생전에 돈보스꼬는 남아메리카에 무려 11개나 되는 선교단을 파견했다.
당연히 첫 번째 선교단이 가장 유명했으며 아주 치밀히 준비되었었다. 돈보스꼬는 그의 아들들이 “친구들 중의 친구들”로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 현지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아주 주의 깊게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돈보스꼬가 금전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무엇이든지 공급해 주었던 그의 협력자들에게 호소하자 그들로부터 굉장한 도움이 쏟아졌다.
돈보스꼬는 그의 회원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선교사가 되길 바랬으며, 긴 지원자 명단 속에서 요한 갈리에로를 책임으로 한 6명의 사제들과 네 명의 수사들을 뽑았다. 갈리에로 신부는 당시 36살의 튼튼하고 쾌활하며 지적이고 원기 왕성한 사람이었으며 돈보스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가졌었던, 이 일에 매우 적합한 사람이었다. 또 다른 후보자는 전에 가리발디의 군인 중 한 명이었으며 개척자 정신을 지녔던 파냔노 신부였다.
출발에 앞서 엄숙한 의식들이 행해졌다. 맨 먼저 돈보스꼬는 교황 성하의 축복을 받기 위해 그의 선교단을 로마에 보냈다. 그리고 나서 11월11일날 또리노의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성당에서는 아주 감동적인 의식이 행해졌다. 그 의식에서 돈보스꼬는 선교사업의 프로그램을 대강 설명했다. 우선 그들은 아르헨티나에 있는 동포일인 이태리인들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며, 그 다음에 그들은 파타고니아의 복음전파를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전 세계를 단시일 내에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거나 혹은 그럴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어서 이러한 엄청난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이 선교단의 출발이, 이 보 잘 것 없는 시작이 거대한 나무로 성장할 씨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출발은 대단한 일들을 이룩할 수 있게끔 성장할 작은 겨자씨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날 돈보스꼬는 제노바까지 그들은 전송해 주었으며, 거기서부터 그들은 11월14일날 배를 탔다. 한달 후 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상륙했다. 이 개척자들에 뒤이어 규칙적 간격을 두고 다른 그룹들이 떠났다; 1876년 11월(보드라로 신부와 라사냐 신부가 끼여 있었음); 1877년11월(코스타마냐 신부, 베스피냐니 신부, 밀라네시오 신부, 그리고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이 최초로 함께 감); 1878년 12월; 1881년 1월; 1881년 12월; 1883년 11월; 1885년 2월; 1886년 4월; 1886년 11월; 1887년 11월; 1888년까지 그곳 남아메리카에는 거의 150명의 살레시안들과 50명 가까운 살레시안 수녀들이 일하고 있었다.
선교에 대한 꿈들
돈보스꼬의 꿈들에 대해 조금치도 신뢰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밤중의 환상들이 돈보스꼬의 선교사업의 팽창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파타고니아의 복음 전파를 예언한 듯이 보이는 그리하여 국가의 선정 과최초의 준비작업에 영향을 준 꿈에 대해 이미 언급했었다. 그것 말고도 선교를 주제로 한 그와 비슷한 꿈들이 네 가지나 더 있었다.
1883년 8월19일 밤에 꾸었던 꿈은 돈보스꼬에게 남아메리카를 횡단할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 여행의 안내자는 2년 전에 죽었던 뚤롱의 Colle백장의 아들 Louis Colle인 것 같았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 남아메리카를 횡단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Louis는 돈보스꼬에게 산업과 복음화 양분화에서의 그 대륙의 미래의 발전에 관해 열심히 묘사해 주고 있었다.
1885년 1월3일일 밤에 꾸었던 세 번째 꿈에서 돈보스꼬는 신비한 차를 타고 남아메리카를 날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로부터 한가한 시간에 돈보스꼬는 자기 시대 뿐 아니라 미래의 살레시안들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의 살레시안들을 기다리고 있는 풍부한 수확물에 감탄했다. “나는 우리 살레시안들이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것을 수확할 것이다. 더 많은 남녀들이 선교사로서 그들에게 가담할 것이다.”
1885년 어느 날 밤과 1886년 5월9일에 꾸었던 나머지 두 꿈들은 남아메리카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 살레시안들이 일할 것을 예언하였다.-꿈속에서 돈보스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스트리엘리아를 방문했다; 그 영상은 살레시안들이 “안일”에 빠지지 않는다면 다음 1세기 반 동안 혹은 2세기 동안 살레시안들이 위대한 미래를 갖게 될 것이라는 걸 예보해 주었다.
살레시안 자신들은 이 꿈들을 소중히 여긴다. 이 꿈들은 많이 논의되어졌으며 여러 가지 해석이 가해졌다. 체리아 신부는 그 꿈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정확성이 충분히 검증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자리학적 통계들을 인용하고 있다. 그 꿈들의 메시지가 살레시안들에게 용기를 주어 분발케 했으며 어려움이 많은 선교개척자들의 신앙을 강화시켰다는 데에 주목하는 것만도 우리에게 흥미를 준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구아이
1875년 12월14일 살레시안 첫선교단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상륙했을 때 그들은 돈보스꼬가 그들의 도착을 얼마나 면밀하게 준비해 주었나를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친구들”로 받아 들여졌으며 며칠 후 그들은 임시 숙소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미리 정해진 대로 갈리에로와 다른 두 사람은 Mater Misericordiae라 불리우는 이태일인들의 본당을 맡았다. 그 본당 구역에는 약 300여명의 동포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완전히 방치되어 있었으며 종교를 전혀 몰랐다. 살레시안들은 지체없이 곧장 일하기 시작했다. 설교와 의식과 오라또리오가 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들이 도착한 지 겨우 한 달만에 그곳의 대주교는 살레시안들 에게 그들이 그곳 수도의 사람들에게 쏟고 있는 “굉장한 은혜”에 관해 축하 했다.
선교단의 나머지 사람들, 즉 파냐노 신부와 다른 여섯 사람들은 산 니콜라스 드 로스 알로이오스에로 갔다. 그 곳에서 그 정력적인, 지도자는 어떤 조그만 집을 오라또리오를 갖춘 학교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는 시골에 널리 퍼져 있던 estancias를 위한 선교를 조직했다. 돈보스꼬에게 보내는 1876년 6월10일자 편지에서 그들의 보호자 세까렐리는 살레시안들은 “그 시에서 크게 존경을 받고”있다고 적고 있으며, 열광적인 말로 그는 “살레시안들의 이름은 이미 남아메리카 전역을 울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가지 것만은 분명했다: 새 공동체를 창설해 달라는 요청들이 쇄도하였다. 갈리에로는 계획을 세웠으나 인용이 부족했다. 갈리에로는 두 번째 선교단으로 왔던 23명의 살레시안들중 몇 명으로써 “실업학교”를 열었다. 그 학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그의 본당과 가까웠으며, 보드라로 신부가 관리하게 되었다. 오라또리오를 모범으로 한 그 학교는 양복 만들기, 구두 만들기, 책 제본, 목공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건물이 안락하지 못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회에 있는 알마그로에 있은 더 적당한 건물에로 1878년 학교가 옮겨졌다. 두 사제들이 프리메이슨 제도로 유명한 라 보카라는 까다로운 지역에 있는 성요한 복음사가 성당을 맡게 되었으며 또 다른 작은 그룹이 산 니콜라스를 강화시키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두 번째 선교단의 나머지사람들은 책임을 맡게 된 루이스 라사냐라는 탁월한 인물과 더불어 우루구아이에 첫 공동체를 건설한 예정이었다. 그 나라에서의 유일한 우루구아이에 첫 공동체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그 나라에서의 유일한 주교인 교황 대사 몬시뇨르 베라의 후원하에 그 살레시안들은 리마의 성로스 본당을 인계 받게 된 몬테비데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빌라 콜론에서 그들의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학교를 세워 비오9세께 헌납했는데 그 학교는 첫 달에 학생들을 100명이나 받아들였다. 사실 대륙의 어느 곳에서나 프리메이슨 조합원들과 프로테스탄드들은 새로 온 사람들을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했다.
용맹스럽고 유능했던 라사냐 신부는 그의 적들과 동등한 정력과 기량을 가지고 그들과 맞섰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기존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곧장 일터를 착수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용기를 복 돋았다. 그의 지도하에 비오9세 학교는 딱정벌레와 화성의 채집을 시작하였다. 학식 있는 이태리인 바르나비테의 도움을 받아 그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관상대의 설립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걸친 정보들을 수집하여 체계화하였다. 이제는 싸이클론과 허리케인을 예보할 수 있어서 항해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후에 1885년에 우루구아이에서 수도회들을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했을 때, 정부는 바로 이 빌라 콜론 관상대의 명성 때문에 살레시안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돈보스꼬가 죽을 때까지 많은 본당들과 다른 사업들이 아르헨티나와 우루구아이에 있는 본래의 공동체들에 덧붙여 조금씩 조금씩 나타났었다. 1885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지에 새 학교가 세워졌다; 1887년에는 이태리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그러나 적어도 처음 얼마간은 선교에 반대하던 라 플라타에서 또 다른 학교가 시작되었다. 우루구아이에서 살레시안들은 수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않은 라스피에드라스에 새 공동체를 세웠다; 1880년과 81년에, 서부의 파이산두에 선교단이 건설되었다. 후에 본당과 학교가 모두 덧붙여졌다.
또한 우리는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도 알마그로와 라보카, 라스피에드라스, 모론 등지에서 큰 진보를 이룩하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파타고니아
유럽 출신의 사람들이 종교적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긴 했지만 살레시안 사도직이 그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멀리 있는 목적지 파타고니아는 한시도 잊혀진 적이 없었다. 파타고니아라는 이름은 광활하고 신비롭고 탐험되지 않은 지역들, 좋지 않은 기후여야만 인디안-부에노스아이레스에 퍼져 있는 소문에 따르면 백인의 고기를 더 좋아하며 전쟁 포로를 서슴지 않고 잡아먹는-부족들을 의미했다.
그 광활하고 위험한 지역에 발판을 구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스타마냐 신부와 파냐노 신부, 라사냐 신부는 말을 타고서 그들의 선교대를 떠나 출발했으나 인디안들의 발자국조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후 돈보스꼬 자신의 제안에 의해 총 대리 몬시뇨르 에 스피노사와 코스타마냐 신부, 그리고 라바글리아티 신부가 1878년 봄 파타고니아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의 목적은 해로로 바히아 부란카에 도착한 다음 파타고니아에 가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들의 배가 심한 폭풍우 팜페로에 의해 거의 난파되었다.
1년 후 파타고니아에 도착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이 번에는 육로로 였다. 계속 서남부 주민들을 위협해 온 인디안의 침략에 지쳐 었었던 아르헨티나의 국방 장관 로카 장군은 “황무지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토벌대를 파견키로 결정을 내렸다. 몬시뇨르 에스피노사와 살레시안들, 즉 코스타마냐 신부와 보따 신부는 군종 신부로서 동행할 수 있었다. 이 종군 중에 선교사들은 마침내 인디안들을 만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팜파의 심장부인 카르후에에서의 휴식을 이용하여 그들은 곧장 트리파일아오와 마누엘 그란데라는 평화로운 부족들 속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코스타마냐가 따르고 있는 분견대는 파타고니아의 변경인 리오 네그로 기슭까지 힘차게 나아갔다.
그들은 1878년 5월24일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여러 주일동안 말을 타왔으며 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지독하게 여행에 지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인디안 들을 다루는 군인들의 야만적 행위에 반감을 느꼈다. 코스타마냐 신부의 열성에 찬 메시지에 대한 답장 속에서 돈보스꼬는 다음과 같이 기뻐하였다; “파타고니아의 문들이 드디어 살레시안들에게 열렸습니다.”
모든 목적들을 달성한 후인 1881년에야 선교 탐험이 끝났다. 그후에야 비로소 파나고니아에 대한 살레시안 선교가 시작되었다.
리오 네그로의 왼편 기슭에 있는 파타고니아와 비에드마에 있는 반대편기슭에 각각 하나씩 두 개의 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과 같은 세 명의 불굴의 선교사들이 이미 1880년에 그곳에 본부를 설치해 오고 있었다; 리오 네리로와 리오 콜로라도 사이의 모든 거류민들과 부족 및 파타고니아인들의 본당 신부인 파냐노신부 비에드마의 본당 사제 밀라네시오 신부, 밀라네시오 신부는 곧 베아우보이르 신부에 의해 교체되었다. 이는 말을 타고 다녔던 사도 여행에 능숙하였던 밀라네시오 신부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밀라네시오 신부는 멋진 수염을 가진 지칠 줄 모르는 그 당시의 전형적 선교사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얻어야할 지역들과 영혼들에게 가기 위해 언제든지 기꺼이 먼 거리를 답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인디안 들의 친구이자 변호인이 되었으며, 그들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
인디안들은 큰 문제로 남아 있었다. 자기들의 독립을 잃을까 봐 그들은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사람인 나문쿠라 추장 곁에 모여들었다. 군인들은 자기들 나름의 방식대로 모든 일들을 끝내려 들었다. 1883년에 폭동이 발발하였으며, 양측 모두에 잔학한 행위가 행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돈보스꼬계 보낸 편지 속에서 파냐노 신부는 서슴지 않고 타락한 군대와 나쁜 관리들을 비난하였다. 나문쿠라가 병에 걸려 무장한 군대와의 협상에 의해 자기 민족들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했을 때야 비로소 평화를 회복할 수 있었다. 밀라네시오 신부가 그들의 협상의 중재자이자 보증인으로 뽑혔다. 나문쿠라는 육군대령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아들들 중 하나인 제삐리노는 살레시안들의 제자가 되었다. 몬시뇨르 갈리에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있는 비오 9세 학교에 받아 들었으며 후에는 비에드마에 있는 학교에 받아 들였다. 나중에 갈리에르는 그를 이태리에로 데리고 갔으며 그곳에서 제삐리노는 비오 10세에게 영접을 받았다. 신심과 학구열로 유명했던 그는 자기 민족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해 사제가 되길 바랬으나 로마에서 1905년 5월11일에 18세의 나이로 일찍 죽고 말았다. 그의 시복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선교는 발전되었으며 1883년까지 5천명의 이교도들이 세례를 받았고, 성당 하나가 지어졌으며 두 개의 부속성당과 두 개의 학교(그 중 하나는 살레시안 수녀들에 의해 운영됨)가 문을 열었다.
돈보스꼬는 조직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립한 대리 구의 설립에 의해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미묘하고 감정이 상하기 쉬운 문제였으나 돈보스꼬는 그것을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1884년 12월7일에 갈리에로 신부가 주교로 서품 되었다. 이 것은 이 거대한 선교 지역의 복음화에 있어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티엘라 델 푸에고
그와 동시에 교황청은 파냐노 신부를 관구장으로하는 관구를 설치했다. 파냐노 신부의 담당 구역은 남부 파타고니아와 티엘라 델 푸에고(불의땅)을 포함하였는데 그는 특별히 후자에서 그의 사도직을 수행했다.
몬시뇨르 파냐노는 1883년에 선출되었었지만 1886년에야 이소라 그란데에 보내는 원정대에 합류함으로서 자기 구역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원정대는 10월31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보트로 두 해안을 따라 갔다.
도중에 파타고네스, 산타 쿠르즈(그곳에서 그는 사비오 신부와 베아우보이르 신부를 발견했다). 리오 갈레고스를 거쳐 마침내 11월21일에 산 세바스티안에 상륙했다. 며칠 후에 원정대와 인디안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 원주민들이 학살당했다. 파냐스 신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영웅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원정대는 그에게 이소라 그란데를 탐험하여 그 지역과 그 주민들을 알도록 허용해 주었다. 그는 매리의 가톨릭 선교단은 푼타 아레나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티엘라 델 푸에고와 칠레 및 팔크란드 섬들 사이의 통신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1887년 7월에 몬시뇨르 파냐노는 푼타 아레나스에 세 명의 살레시안들과 함께 정착하여 곧장 건물을 짓고 이주자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키고 인디안들 과 의 첫 시험적인 접촉을 벌이고 다손 섬을 탐험하는 등의 어려운 일들을 시작했다.
아주 각양각색으로 행동하는 그처럼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몬시뇨르 파냐노는 인디안들에 대해 “훌륭한 통솔자”가 되었다.
브라질, 치레, 에쿠아도르
아직 돈보스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아메리카의 다른 세 나라들, 즉 브라질과 칠레, 에쿠아도르에리도 살레시안 사업이 시작되었다. 1877년 리오데 자에이로의 주교인 몬시뇨르 라체르다가 직접 또리노에 찾아가서 그에게 선교사들을 파견해 달라고 성인을 설득하였다. 그 교구와 나라에서의 종교적 상황이 그 요청의 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지역 성직자가 부족했고, 청소년들, 특히 노예 해방 후에도 전에 노예였던 이들의 자녀들이 무시를 당했으며, 적도지대의 밀림의 부족들 사이에는 선교사들이 긴급히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돈보스꼬는 이미 우루구아이에서 바삐 지내고 있던 라사냐 신부를 브라질에 보내기고 하였다. 그는 1882년 초에 리오 데 자네이로를 향해 떠났다. 그는 “공포 때문에 겁을 집어먹고서, 그러나 동시에 그보다 더 큰 희망에 지탱되어” 그곳에로 떠났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수도 리오 데 자네이로를 굽어보고 있는 니테로이 언덕에 집을 열기로 약속했다. 페트로폴리스에서의 알현 도중 페드로 2세 황제는 자기 나라에서 살레시안 사업을 발전시키라고 친히 격려해 주었다.
라사냐 신부는 여러 지역들을 두루 여행하는 동안에 그곳의 주교들로부터 원조에 대한 간청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이태리인들이 많이 사는 사오 파울로에 학교와 본당을 세우기로 약속했다. 그는 벌써부터 이미 “남아메리카의 가장 중심부이자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마토 그로쏘의 인디아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1883년 보르히노 신부의 지도하에 니테로이에서 선교가 시작되었고 사오 파울로에서는 1815년 지오르다노 신부하에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밀라네시오 신부는 그의 다소 특별한 여행들 중 하나인 1886년의 여행 중에 칠레에 발을 디뎠던 첫 살레시안이었다-이 여행에서 그는 안데스 산맥의 코르딜레라를 횡단하여 살레시안 인원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던 교황대사 몬시뇨르 크루즈가 있던 콘세프시온에로 갔다. 1887년 5월6일에 합의서가 작성되어 라바글리아티 신부를 비롯하여 그 의 다섯 명의 살레시안들이 대단히 많은 군중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콘세프시온시로 들어갔다. 당장 건설이 시작되었다; 오라또리오가 지어졌고 뒤이어 학교와 작업장들이 지어졌다. 그와 동시에 이미 탈카와 산티에고 사이의 길 밑에서 유통이 이루어졌다.
에쿠아도르의 대통령 코라마노는 살레시안들이 퀴로에 도착한 데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와 오르도네쯔 대주교는 1885년에 돈보스꼬에게 호소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인원이 부족했던 관계로 약간 지역 된 후 칼카뇨 신부하에 한 그룹이 조직되었다. 1887년 12월6일 또리노에서는 돈보스꼬가 참석한 가운데 고별식이 열렸다. 돈보스꼬는 그 때 아파 있었으며 두 비서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그가 참석했던 선교사 출발식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888년 1월28일에 새 선교사들이 퀴로에 도착하였으며, 그들은 도착 즉시 또리노에 전보를 보냈다. 돈보스꼬가 그 전보를 읽은 것은 30일 아침이었으며, 그는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돈보스꼬는 이튿날 아침에 선종 했다.
결론
굉장히 많은 양의 일이 13년 내네 달성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다.
살레시안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5개국에서 스스로를 설립했다. 그들은 두 개의 광활한 선교 영지를 할당받았는데 그 중 하나는 1885년부터 아메리카에서의 돈보스꼬의 대리자이기도 했던 갈리에로 주교를 머리로 삼고 있었다.
“야만인”사이에서의 선교에 대해 다소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서 아메리카에 상륙했을 초창기 살레시안들은 인디안 들의 복음화를 잊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을 위한 긴급한 활동의 요구에 응하였다. 돈보스꼬에게서 격려를 받은 그들은 그들이 친숙했었던 학교들, 오라또리오들, 본당들을 가지고서 일에 열중하였다. 그들의 사업의 확립을 보장키 위해 이런 일이 위험스럽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살레시안들은 교회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정부와 지배 계층에게도 후원을 구하였다. 그들의 힘든 사업은 이미 열매를 맺고 있었으며, 다가 올 보다 큰 희망이 있었다.
18
수도회의 강화
1874-1888
꾀 많은 시도와 수고 끝에, 드디어 1874년에 최종 회헌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비록 아직도 어떤 어려움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살레시오 수도회에는 조직화와 강화라는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또리노의 교구 참사회와의 관계는 늘 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또리노 대주교가 로마의 인가의 명확한 성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몇 군데에서는 소규모 박해와도 비슷한 반종교적 반대가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1880년 3월19일 법령이 사전 경고를 발하였을 때 특히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수도회가 안정을 획득했다; 성소자들이 번성했으며 새 공동체들이 배기 되었다. 돈보스꼬 개인의 명성은 이태리 전역에 뿐만 아니라 이태리 바깥에까지 퍼져 나갔으며, 여러 외국 순례자들은 로마로 가는 길에 반드시 또리노의 오라또리오를 거쳐갔다.
유리한 영세를 이용하여 창립자는-자기 생애의 말년 동안에-나머지 조직화 문제들을 완성하고 자기의 사업을 공고히 하며 그 미래를 확실하게 만들 수 있었다.
수련기
수도회에는 그 성원들의 수도생활에 대한 형성보다 더 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돈보스꼬는 그것에 대해 당국자들을 만족시키려 했다. 사실 여러 해 동안 대주교 가스탈디의 매우 적의에 찬 공격의 초점은 바로 수련자 문제였다. 1872년 11월9일자 편지에서 그 고위성직자는 정확한 수련기와 엄숙한 금욕적 형성이 없음에 대해 개탄했다. 그는 오라또리오의 젊은 사제들에게 겸손 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 때문에 그는 오라또리오의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그 창립자를 “coram Deo et hominibus(하느님과 사람 앞에)”초대한다면 자기 편지를 끝맺었다.
1874년 3월에 로마에 보낸 각서에서 돈보스꼬는 그에게 번번이 반대해 왔던 비난들에 대해 다시 반박했다. 수련자들이 오직 “금욕적인 관습”에만 자신들을 바쳐야 하는 2년간의 수련기가 회에 강요되었을 때 돈보스꼬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언명했다: “이것은 옛날엔 가능했겠지만 우리 시대 우리 나라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한 수련기는 살레시오회를 파멸시키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부당국이 수련기를 알아채자마자 곧장 그것을 억압할 것이며 또한 수련자들을 흘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그러한 수련기는 활동적인 생활에 기반을 둔 살레시안 회헌 에는 맞지 않습니다...”
인가를 얻기 위해, 돈보스꼬는 결국에는 수련기 문제와 다른 문제들을 포기해야 했다. 사실, 인가된 최종 회헌을 1년에 한한다는 기간만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전통적인 형태의 수련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실망 뒤에 돈보스꼬는 어떠한 행동방침을 취했던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우선 수련장을 뽑았다. 당시까지 로아 신부가 주요 직무들을 수행해 왔었으나, 이제는 오로지 그것에만 관심을 쏟을 사람에게로 그 직무를 넘겨 줄 필요가 있었다. 돈보스고는 이 미묘한 임무를 위해 율리우스 바르베리스 신부를 뽑았다. 왜냐하면 바르베리스 신부는 살레시안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돈보스꼬는 “바르베리스 신부는 돈보스꼬를 이해하고있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러나 돈보스꼬는 교황 비오9세 성하의 구두 허락을 이용하여 서슴지 않고 수련자들에게 교리문답 가르치기, 공부 가르치고, 어씨스트하기와 같은 모든 종류의 일들을 하도록 했는데 이는 곧 다시 대주교의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수련자 그룹과 오라또리오의 나머지 사람들과의 철저한 분리가 점차 진행되었다.
수련자들이 산 베니그노 카나베세에 있는 옛 베네딕또 수도원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 때 그에 따르는 회칙에 대한 조치가 취해졌다. 돈보스꼬는 이 수련소에 너무 심한 교회적 분위기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곳에 작업장과 오라또리오를 열었다. 마지막으로 1886년에 수련소는 포그리쪼에 있는 새 소유지로 옮겨갔다. 이 단계에서 회칙이 명한 금욕적 형태로의 수련기의 점차적 진전이 완성되었다. 돈보스꼬는 신념보다도 필요성 때문에 양보해 왔었다.
성인 성소자들
그간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어떤 것, 즉 성소자 문제를 포함하는 또 다른 기획이 1875년부터 돈보스꼬의 관심을 끌게 된다. 어느 날 돈보스꼬는 오라또리오에서 학생들의 기록부를 쭉 훑어보다가 나이 많은 소년들 가운데서 성소자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이른바 늦게 성소자 들이라 불리우는 이들을 위해 어떤 것을 시작하도록 고무했다.
1875년 2월 로마에서 돈보스꼬는 비오9세 성하와 더불어 자기의 발견을 논의했다. 성하께서는 매우 열성적인 반응을 보여 주셨으며 많은 주교들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성직 성소자들을 위한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사업)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돈보스꼬는 가톨릭인들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 받을 실제 활동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돈보스꼬는 많은 지원자들이 그들의 학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을 거라고 내다보았고 또한 가난이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장애물이 되길 원치 않았다.
1875년 가을까지 그 계획이 이미 실시되었다. 다른 그룹은 또리노의 오라또리오에서 공부한 반면 늦된 성소자들-이들은 마리아의 아들들이라 불리웠다-을 위한 부문의 알베라 신부하에 삼피에르다래나의 수도원에 설립되었다. 첫 학년말까지 그 시험은 돈보스꼬의 “유별난 희망들”을 이미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삼피에르다레나에서의 그 기획은 미래가 보장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수많은 입회 신청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제1차 총회(1877년 9월)
회를 조직화하는 작업이 이 시기 동안에 더욱 절박해졌으며 총회들이 일차적으로 중요했다. 회헌에 따르면 “중요한 모든 문제들을 다루고 회의 여러 가지 요구들에 응하는데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기 위해”매 3년마다 총회가 개최 되기로 되어 있었다.
제1차 살레시안 총회는 1877년 9월5일 란조에서 열렸다. 7명의 최고 평의회원과 14명의 원장들을 포함하여 모두 23명이 그 회의에 참석했다. 개회사에서 돈보스꼬는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수도회를 위해 그들의 협의의 중요성을 모두에게 이해시키려 했다. 돈보스꼬의 전기작가들은 그때까지도 당시의 많은 사람들, 특히 또리오와 로마의 사람들은 살레시안들을 “소동을 일으킬 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잡다한 무식한 군중들”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 모임은 그 성원들이 대부분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숙성을 증명해 보여줘야할 필요가 있었다.
각지 수도회의 사활을 좌우하는 주요한 측면들에 대한 연구를 지시 받은 여덟 개의 사항들, 즉 살레시안 영성, 공동생활의 문제들, 물질적인 용무,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회를 다루는 것, 관구 평성 등이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29회의 “총 회의”가 있었는데 모두 돈보스꼬가 사회를 맡았다. 돈보스꼬의 바램들에 따라 너무 서두르지 않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논의되었던 것 중 몇 가지 것들을 골라 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Province(관구)나 Provincial(관구장)이라는 용어들은 편견을 가진 이들의 마음을 산란시킬 여지가 있었기에 그 대신에 “inspector”이나“inspectorship”이라는 용어를 사용키로 했다. 17번째 회의석상에서 돈보스꼬는 뒤의 용어에 관해 얘기하면서, 자신은 자기 아들들이 의무를 잘 수행하도록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수완을 발휘하도록 가르쳐야 할 책임을 지닌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총장의 권한에 대해 얘기하는 가운데 돈보스꼬는 수도회 총장은 중추적 지위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 자신의 특수한 위치를 제쳐두고 돈보스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저는 제 뒤에 올 사람들의 지위와 권위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24번째 회의 중에 이후 결코 잊혀지지 않은 여러 가지 선언들이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그들이 살고 있었던 어려운 정치적 배경 속에서의 살레시안들의 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법률을 준수하려 애쓸 것이다. 우리에게 세금이 가해지면 우리는 세금을 지불할 것이며, 만일공동소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별적으로 소유물을 가질 것이며, 만일 심문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그에 복종할 것이요, 면허증이나 허가증이 요구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따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계속해 갈 방법이다.”
돈보스꼬의 요구에 응해 총회는 “심의”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제재들(즉 회합에서 논의되었던 규정들)-을 개정하고 조정할 책임을 총장에게 위임하는 것을 마지막 결정사항 중 하나로 다루었다.
제1차 총회는 개최 이후 꼭 한달 만인 10월5일에 끝났다. 대부분의 “심의”내용은 1년 뒤에야 100여 페이지의 작은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책은 위에서 언급된 바 있다.
초창기 관구들
제1차 총회 때에는 비밀 관구장들(조사관들)만이 존재했다. 1876년까지는 각각의 수도원들 간에 아무런 연관이 없이 모두 “최고 평의회”에 직접 책임 지워져 있었다. 1877년에야 Annuario pontificio(교황청 연감)에 로마 및 아메리카 관구가 모습을 나타냈으나, 후자만이 갈리에로 신부를 그 “조사관”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듬해에는 피에몬테와 리구리아가 새 “조사구”들로 되었다.
그러나 1879년에야 비로소 진짜 관구 제도가 시작되었다. 2월7일 최고 평의회는 4명의 관구장들을 임명했다: 프란체시아 신부(계속 바라찌의 원장으로 남아 있으면서)는 본원을 본부로 하여 피에몬테 관구의 관구장이 되었다; 체루티 신부는 알라씨오를 본부로 하여 리구리아의 수도원들(니스에 있는 수도원 하나를 포함하여)의 책임을 맡았다; 알바노의 원장인 모나테리 신부는 로마 관구의 준관구장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보드라로 신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본부로 한 남아메리카 관구의 관구장이 되었다.
교황청과의 교회법적 관계, 1879년
수도회들에 대한 규칙에 따라 살레시안 회헌은 매3년마다 교황청에 수도회의 정신적 물질적 상태에 관한 보고서를 보내야 된다고 요구하였다. 1879년 3월의 보고서는 간단히 분석해 볼 만한 것이다.
돈보스꼬는 그 보고서를 신중하게 준비했었다. 그는 1841년부터의 수도회의 역사를 간단히 추적한 뒤 이태리, 프랑스, 아메리카에 있는 각 수도원들과 그곳들에서의 모든 살레시안 활동들을 언급하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회의 정신적 상태를 언급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살레시안들은 너무도 열심히 일한 나머지 그 중 어떤 사람은 이로 지쳐 쓰러지기까지 했다고 말하면서 살레시안들이 회헌을 준수하기 위해 매우 애쓰고 있음을 칭찬했다.
성성은 그 문서를 아주 면밀히 검토하였으며, 성성의 경리인 펠리에리 추기경은 돈보스꼬에 대해 특별히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좋지 않은 편견으로 인해 수도회를 창설할 만한 능력이 없는 불성실한 인물을 다루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재정보고서의 부재, 수련기에 관함 침묵, 교황청 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않은 “조사구”의 설립,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교회 법적 위치 등을 포함한 7가지 의견들이 돈보스꼬에게로 보내졌다. 그 중 마지막 조목은 손으로 씌여진 대신 인쇄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하여 돈보스꼬는 꾸짖는 내용이었다.
돈보스꼬가 그 성미 급한 추기경께 자기의 “서투른”회를 호의를 가지고 지켜봐 달라고 사정하는 등 최선을 다해 자신을 옳음을 증명하려 노력한 결과 새로이 9가지의 의견들이 10월에 도착했다.
행간의 의미를 살펴보면 재정 문제에 있어서 돈보스꼬가 오직 교회법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시민법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80년 초에 돈보스꼬는 새 규칙들을 채택하였다; 얼마 뒤 어려움이 극복된 듯 했으며 돈보스꼬는 안심하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어려움들 때문에 돈보스꼬는 법적인 점에서 그의 사업을 보다 구체적으로 건설해야겠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이것은 일을 보다 쉽게 풀려나가게 해줄 것이었다. 게다가 1879년 3월에 비서국(Secretary of State)의 로렌스 니나 추기경이 살레시오회의 후견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로마의 총대리(Procurator General), 1880
교황청에 처음으로 교회법적 보고서를 제출할 즈음, 돈보스꼬는 교회와 수도회와의 공식적 연락을 맡아보고 또한 수도회의 장상을 공식적으로 대표할 총 대리를 로마에 파견함으로써 또 다른 중요한 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교황청 연감(Annuario Pontificio)에 따르면 루아 신부가 1877년부터 이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루아 신부는 너무도 많은 다른 임무들을 맡아 활동중인 사람이었기에 로마에 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달마쪼 신부가 1880년에 이 책무를 효과적으로 떠맡게 되었다.
돈보스꼬는 영원한 도시 로마 내에 있을 살레시안 공관 자리를 적어도 3년 동안 물색했다. 많은 실망 끝에 드디어 그는 토르 데 스페치에 있는 한 수도원의 방들을 얻는 데 성공했다. 달마쪼 신부는 한 수련수사와 함께 그곳에 살러 갔다. 그 작은 공동체는 살레시안 수도원이라고 간주되어 로마 관구에 소속되었다.
제2차 총회(1880년 9월)
1880년에 총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돈보스꼬는 9월초에 란조에서 총회를 소집했다.
이번 총회의 첫 과제는 임기를 끝낸 최고 평의회원들(돈보스꼬는 예외였다 선출하는 것이었다. 핵심 멤버들은 재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루아 신부는 그대로 총 경리직을 계속하게 되었고, 갈리에로 신부 역시 남아메리카에서 선교단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영적 지도자”로 남아 있게 되었다. 토의 내용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번 토의 내용은 1877년에 비해 중요성이 덜했으며 전에 토의한 내용들을 다만 개정하고 완성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총회의 내용은 돈보스꼬에 의해 승인된 다음 1882년에 출판되었다. “이번 총회 중에는 1877년의 결정사항들이 다시 한번 검토되었으며 몇 가지 새로운 점들과 더불어 경험에 기초를 둔 수정이 행해졌다.” 보다 중요한 추가 사항은 살레시안들의 지적 형성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에 관한 연구라는 장과 철학적 문학적 연구라는 장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최고 평의원의 선출과 그들의 의무에 관한 부분도 새로이 덧붙여졌다.
1880년의 일 중 기억할 만한 또 다른 일은 기존의 네 관구에 덧붙여 두 개의 새 관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아메리카 관구가 코스타마냐신부 하의 아르헨티나 관구와 라사냐 신부하의 또 다른 관구(이 관구는 우루구아이와 브라질에 있는 수도원들을 포함하고 있다)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여태까지 리구리아 관구에 속해 있던 프랑스의 수도원들이 당시 삼피에르다레나의 원장이었던 알베라 신부 하의 자치 관구 승격하게 되어 알베라 신부는 마르세이유로 이동했다. 로마관구에 대해 말하자면, 그 관구는 토르데 스페치와 마글리아노, 포엔짜에 있는 수도원들 뿐만 아니라 시실리 섬의 란다쪼와 스페인의 우르레라에 있는 집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만 하다.
제3차 총회(1883년 9월)
제3차 총회는 발사리체에서 열렸으며 모두 35명이 참석했다. 이 총회는 1883년 9월1일에 열려 7일 후에 폐회되었다.
3차 총회는 여러 가지 것들 중(살레시안 회보)와 수련기, 피정, 도덕성을 다뤘다는 것 외에 우리는 그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수련기의 경우 프랑스 관구는 이태리에 수련자를 보낸다는 게 매우 불편하다고 지적했다. 돈보스꼬는 그에 대해 마르세이유 근처에서 수련소를 찾아보겠다고 답했다. 또한 수사 수련자들을 다른 수련자들로부터 분리하자는 결정이 내려져 곧 바로 산 베니그노에서 시행되었다.
돈보스꼬는 그들에게 시대의 동향을 잘 알아 그에 따라서 조정하며, 소년들에게 굴욕감을 주는 처벌을 삼가고, 감정적인 애착을 경계하라고 부탁하는 내용의 여러 가지 권고들로써 3차 총회의 마지막 부분을 끝맺었다; 또한 원장에게는 모든 이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부탁하였다.
이 총회의 결정사항들은 따로 출판되지 않고 1886년 총회의 결정사항들에 덧붙여 출판되었다.
우리는 1883년 말경 돈보스꼬가 또리노에 그 총회에 대한, 뿐만 아니라 미래의 총회들에 대한 사무들을 관장할 영구 비서를 임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첨언해야만 한다. 그는 당시 니짜 몬떼라또에 있는 수녀들의 지도 신부로 있던 세례자 요한 르몽을 비서로 뽑았는데 그는 후에 돈보스꼬의 막역한 친구이자 전기작가가 되었다. 돈보스꼬는 그의 르몽신부를 매우 신뢰했었기 때문에 그가 비서직을 맡게 되었을 때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수도회의 업무에 있어서나 내 자신의 마음속의 문제들에 있어서나 전혀 그대에게는 비밀이 었을 것이오.”
특전 공표, 1884년
돈보스꼬는 살레시오회를 다른 수도회 가족들과 동 수준에 올려놓기 위해 몇 년 동안 소위 말하는 “특전”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 말은 교황권이 전통적으로 수도회에 부여하는 모든 종류의 정신적 호의뿐만 아니라 크게 발전할 수도회의 생활을 위해 참으로 중요한 일정한 교회법적 “특허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특전들을 간청함에 있어서 돈보스꼬는 자주 로마 성청에 호소하는 걸 피하는 동시에 교구 권좌의 차이로 인해 빚어진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로마 성청은 새 수도회에 구원자의 특전을 부여해 왔지만 돈보스꼬는 그의 바램들을 실현시키기 전에 머나 먼 길을 거쳐야 할 형편이었다.
위의 것을 위해, 그는 1875년 로마에 갔다. 그는 처음에는 특전의 허락과 특히 살레시안들이 어느 주교에게나 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서임장을 발할 권리에 대한 허락을 요구했다. 교황은 그의 요구를 검토할 위원회를 임명했으나,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또리노의 대주교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일반 특전에 관해 돈보스꼬는 이제 자신의 신청서의 표현이 달라져야 한다는 걸 느꼈다.
그 계획을 훗날로 미루면서 돈보스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제시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대신에 그는 서임권을 포함하여 아주 한정적인 호의만을 간청했다. 그러나 그 응답은 역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돈보스꼬는 그 후에 레오13세(1878년에 교황으로 선출됨)께 직접 호소하였으나 여전히 이렇다 할 만한 것을 전혀 얻지 못하였다... 펠리에리 추기경의 반대는 결코 변함없이 여전했으며 그 추기경은 전 생애를 통해 내내 살레시오 수도회는 잘못된 것이며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었다.
1882년에 돈보스꼬는 새로운 행동계획을 가지고 다시 로마에 가서 레오13세를 배알했다. 레오13세는 새 위원회의 추기경들의 이름을 은밀히 가르쳐 주었다. 답변은 이번에도 분명치 않았다. “그대는 적들을 가지고 있소. 그리고 로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더지가 파놓은 흙으로도 산을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매우 신중을 기해야만 하오.”
2년 뒤인 1884년에 특별한 호의를 가지고 돈보스꼬를 대하던 레오13세 교황는 “돈보스꼬가 원했던 모든 것을”그에게 부여해 줄 태세가 갖추어 졌었다. 성하는 3월 25일의 가스탈디 대주교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러한 상대자를 갖지 않게 되었소.”라고 덧붙였다. 사실, 레오13세 교황 성하의 개인적 중재 덕분에 살레시오 수도회는 1884년 동안에 구원자의 모든 특권들에 해당하는 특전들을 허락 받았다.
비록 9년이나 걸려 얻게 되었지만 돈보스꼬는 이제는 “바라는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그것에 만족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3년 반은 비록 육체는 병으로 인해 고달프기 했지만 매우 평정된 시기였다. 게다가 교황 성하는 자신의 친구 카예탄 알리몬다 추기경을 또리노 대교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돈보스꼬에게 큰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총대리 루아 신부
창립자의 건강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수도회의 앞날에 대한 문제가 더 민감한 관심이 쏠렸으며 레도13세 교황은 매우 크게 염려했다. 성하는 1884년 10월에 돈보스꼬에게 후계자나 혹은 계승권을 지닌 대리자를 지명하라고 부탁했다. 회헌에 이미 총장 선출에 대한 준비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러한 부탁이 이상한 요구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보스꼬는 그의 수도회에 대한 교황 성하의 개인적 관심에 크게 감동되었다.
10월24일에 돈보스꼬는 최고 평의회에서 그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러자 평의회에서는 선출을 마다하고 그에게 그가 선택한 사람을 지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매우 극적인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보스꼬가 언젠가는 그들 곁을 떠날 것이라는 걸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돈보스꼬는 루아 신부를 지명했으며 교회 성하께 답장을 보냈다. 성하께서는 만족을 표명하시면서 인가를 발했다. 돈보스꼬는 그 결정이 아직은 공개적인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랬지만 점차 그의 후계자에게로 책임을 이양함으로써 그의 후계자로 하여금 그의 미래의 사명을 준비시키기 시작했다.
1885년 9월24일에야 “루아 신부가 살레시오 수도회의 총 대리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전해졌다. 계속해서 돈보스꼬는 “루아 신부는 수도회의 맨 초창기 회원 중 한사람이며 여러 해 도안 총 대리인의 입장에서 일해왔고 또한 이러한 선발이 모든 회원들을 기쁘게 할 것이기에” 루아 신부를 선발했다고 말했다. 또한 돈보스고는 그의 대리자는 총장의 모든 권한을 가지며 루아 신부의 현재의 관구장직을 셀레스티노 두란도 신부에게 넘긴다고 선언했다.
살레시안들은 이 중요한 뉴스를 1885년 12월8일자의 회람장 에서 받아 보게 되었다. 오라또리오에 도착했던 많은 축하편지들로 미루어 보아 이 선택에 대한 반응은 아주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제4차 총회(1886년 9월)
1886년 9월에 발사리체에 모였던 이 총회는 돈보스꼬가 관장한 마지막 총회가 되었다. 이번 총회에서는 최고 평의 회원, 관구장들, 총 대리인, 원장들, 총회 참석 파견위원 등이 모여 아주 눈에 띄는 일들을 다루었다.
최고 평의원들에 대한 선출이 즉시 행해졌다. 여기에는 물론 돈보스꼬가 그의 대리자인 루아 신부 및 특별한 직무를 맡고 있는 갈리에로 주교나 몬시뇨르 파냐노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선출에서는 주요부가 눈에 띄게 변화되었다: 도미니꼬 벨몬테 신부가 루아 신부의 관구장직을 떠맡았고, 갈리에로 주교는 명예직으로 갖고 있던 총영성지도 신부직을 요한 보네띠 신부에게 양도했으며, 프란치스꼬 체루티 신부가 교육 고문이 된 반면 안토니 살라 신부는 계속 총경리로 남게 되었다.
계속 심의가 이뤄지는 가운데 몇몇 살레시안들을 로마대학에서 공부하도록 보내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젊은 회원들의 군복무 문제가 제기되었다-군복무를 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들이 논의되었다. 총회는 라사냐 신부가 본당에 관해 얘기한 것을 듣고 나서 아메리카에서 연일 그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에 기초를 두고 본당문제를 논의했다.
또 다시 수련자들(돈보스꼬는 그들을 “ascritti”즉 등록자들로 부르라고 권고했다)과 그들의 서약 허락 문제가 논의되었다. 교황청의 교령에 의해 위의 각각의 사항들을 모두 검토할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여러 가지 점들 중에서도 기술학교들(살레시안 회보) 장상들의 수도원“방문”여러 관구에 학생들을 위한 소신학교를 만드는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앞서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돈보스꼬 에게는 결정사항들을 개정하고 조정하고 완성시킬 수 있는 전권이 주어졌다. 제4차 총회에서의 심의사항들은 지난번 총회에서의 심의 사항들과 함께 1887년에 출판되었다.
돈보스꼬의 죽음, 1888
걱정과 힘든 일로 인한 부담들 때문에 일찍이 1884년부터 돈보스꼬의 건강이 눈에 띄게 쇠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모든 것을 돌보았으며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말보다는 모범으로써 더 많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리고 멀리까지 뻗어나간 자신의 두 수도회들의 활동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모금을 벌이려고, 그리고 또한 무엇보다도 로마에 성심 성당을 짓기 위해 심지어 프랑스와 스페인에까지 갔다.
돈보스꼬는 일흔 두 살 5달 때인 1888년 1월31일 아침 이른 시간에 숨을 거두었다.
1884년 교령에서 말한 기간을 모르는 루아 신부는 승계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로마에 호소했다. 새 교령 Ex audientia Sanctissimi는 1888년 2월11일부터 2년 동안 그를 총장으로 지명하고 있었다.
죽기 1주일 전에 돈보스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성숙된 인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는 그가 옳았음을 곧 증명해줬다.
제 2 부
살레시안 사업의 강화와 세계적 팽창
1888년 이후
19
미카엘 루아-돈보스꼬의 첫 계승자
1837-1910
미카엘 루아 신부는 30여 년 동안 돈보스꼬의 제1의 공동 경영자였으며, 여러 측면을 지닌 돈보스꼬의 사업에 이 첫 계승자가 남긴 특징은 20세기 전반기에 계속 되었다. 루아 신부의 경영능력은 그의 엄청난 활동과 그로 하여금 살레시오회와 그 두 가지들을 붕괴로부터 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좌절 대신 그들의 진보를 보증해주는 섭리의 인간이 되게 했던 특별한 류 의 고결성을 결합시켰다. 이러한 문제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1888년부터 1910년까지의 그의 경영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루아 신부의 훈련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린 시절
미카엘 루아는 아직 아주 어렸을 때에 어린 부랑아들에게 둘러 싸인채 또리노의 거리들을 지나다니면서 칭찬을 받았던 혹은 경멸을 받았던 다소 이상한 사제에게 약간 놀라 있었다. 루아가 복사를 맡은 미사의 사제와 같은 이들, 즉 루아가 존경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루아에게 돈보스꼬는 “거의 구제하기 어려운 병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말들을 듣고 루아는 거의 울 뻔했다고 한다; 그는 그때 겨우 여덟 살 내지 아홉 살의 소년이었다.
루아가 좀더 자랐을 때, 루아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돈보스꼬 사이에 작은 비밀이 하나 생겼다. 어느 날 루아는 등교 길에 그 사제를 만났다. 돈보스꼬는 모든 소년들에게 상본을 하나씩 나누어주었으나 루아 에겐 주지 않았다. 대신에 돈보스꼬는 한 손을 쫙 편 채 내밀고서 다른 손으로 그 내민 손을 둘로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쪽을 가져가거라 미카엘, 그 쪽을 가져가거라.”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돈보스꼬는 그것은 자기 즉 돈보스꼬와 루아가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질 것이라는 걸 의미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미카엘은 1837년 6월9일 미래의 오라또리오가 생기게 된 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또리노의 발도꼬 지구에서 태어났다. 루아네 가족은 그의 아버지가 군수품 공장에서 검사자로 있었지만 부유하지 못했다. 세례자 요한 루아는 첫 번째 결혼에서 다섯 자녀를 두게 되었고 재혼한 후에 네 자녀를 더 두게 되었다. 미카엘을 막내둥이였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아주 건강이 나빠서 미카엘이 태어났을 때에는 자녀들 중 네 명만이 살아 있었다. 그 역시도 튼튼하지 못했지만 자기 가족들 중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았다. 그는 세련되고 조용한 소년이었으며 항상 말끔한 옷차림을 했다.
여덟 살 때 그는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그의 전기작가 중 한사람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그는 곧바로 그의 전 생애를 거쳐 그에게 아버지가 될 요한 보스꼬를 발견했다. 그 자신은 돈 보스꼬의 시복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내가 여덟 살 때인 1845년 9월에 이 하느님의 종을 알게 되었다... 한 친구의 초대를 받고 나는 구호소 옆의 오라또리오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루아는 오라또리오에서의 활동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 막내아들이 그처럼 수상한 소년들과 어울리게 될까 두려워했던 게 아니었을 까라고 체리아 신부는 짐작하고 있다. 여하튼 루아는 오라또리오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무엇이든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맏형 루이스가 그에게 돈보스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병에 관해 모두 이야기 해줬을 때인 1846년에 그는 깊이 감동되었다. 후에 루아는 프랑소니 대주교를 환영하기 위해 1847년에 발도꼬에 세워졌던 개선 아아치를 회상하곤 했다. 그 해에 그는 성 알로시오 신심회에 받아들여졌으며 그리하여 매달 바짝 가까이 에서 돈보스꼬를 관찰할 수 있었다.
1848년에 그는 드 라 살레 형제들의 제자가 되었으며 2년 동안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그의 아버지의 직업을 배우길 바랬다. 하지만 이것은 학교 성무감 중 한사람이었던 돈보스꼬로부터 그를 떼어놓지는 못했다. 그는 종종 거리에서 돈보스꼬를 만났으며 그리하여 이내 곧 그는 보다 자주 오라또리오에 참석하였다.
1850년 학년말에 미카엘은 생계비를 벌어 어머니를 돕기 위해 공장에서 일자리를 잡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 왔던 돈보스꼬는 그에게 “라틴어 공부”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 왔다. 소년은 당장 돈보스꼬가 말하는 바를 알아차렸으며 사제가 되기 위해 기꺼이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중등학교 공부
1850년 8월에 루아는 별 흥미 없이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이것은 그의 전기 작가들을 매우 당혹케 하는 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루아는 자기가 그의 “친구”(돈보스꼬를 가리킴;역자 주)를 실망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마자 자기 태도를 서둘러 고치고서 그 공부를 참아냈다.
그는 메르라 교수의 학생이었다가 다음에는 본짜니노 교수의 그리고 그 다음에는 피꼬 교수의 학생이 되었는데, 그는 피꼬 교수로부터 그의 응용 정신과 우수한 결과에 대해 최고의 칭찬을 받았다. 미카엘 루아는 높이 평가를 받은 덕분에 시내에 있는 학교를 오가는 길에 학생들 그룹을 책임 맡게 되었다. 이 임무를 완수함에 있어서 그는 선량했으나 아주 장난기가 심했던 어린 갈리에로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 동안에 미카엘은 계속 집에서 살았으나 가능한 한 한 자주 돈보스꼬를 보러 갔으며, 때로 그는 돈보스꼬와 함께 저녁밥을 먹기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루아는 이 사제의 특별하고도 점점 더해가고 있는 중대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오히려 독서나 신심서적에 대한 묵상보다도 비록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돈보스꼬의 낱낱의 활동을 지켜보는 것이 이 소년을 더욱 감동시켰다.
루아는 그의 성격의 본질 요소이던 심각함과 상냥함이 뒤섞인 착잡한 마음으로 학교 안팎에서 돈보스꼬의 이러저러한 일상의 잡다한 일을 지켜보는 가운데 돈보스꼬의 생활 속의 모든 것들의 근원은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루아가 막 오라또리오에 도착한 프란체시아더러 돈보스꼬를 그의 영혼의 아버지로 삼으라고 충고했을 만큼, 돈보스꼬는 루아가 행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서 그의 모범이 되었다.
1852년 가을 루아는 오라또리오의 기숙생이 되었으며 그해 10월3일 그의 나이 15세 되던 때에 베끼의 성당에서 성의를 입었다.
1853년에 고등학교를 마친 뒤 그는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또리노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살레시안이 되다.
한편 돈보스꼬는 수도회에 대한 계획을 전개시켜오고 있었다. 이러한 이상을 위해 돈보스꼬는 그가 가장 믿어왔던 소년들을 모아 점차 그들을 준비시키려 했다.
1853년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인의 축일 바로 전인 1월 26일에 루아와 갈리에로와 또 다른 오라또리오의 소년들 두 명이 “그들의 이웃들에 대한 실제적 사랑의 실천에 대한 시험”에 초대되었으며, 그때부터 그들은 살레시안들이라 불리웠다.
미카엘 루아는 돈보스꼬의 오라또리오의 주요 공동 경영자가 되었다. 돈보스꼬가 소년들을 맡겼었던 사람은 오직 그 한사람뿐이었다; 루아는 매주 교리반을 어씨스터 했으며 도서실의 책임을 맡았으며 필요할 때면 돈보스꼬의 일까지도 맡아보았다. 아무도 이에 대해 놀라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루아의 신심은 너무도 유명(그는 날마다 묵상을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했으며, 그의 의무감과 돈보스꼬에 대한 애착 역시 너무도 유명했고 또한 그는 그 일을 맡아 볼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미니꼬 사비오의 친구였으며 동정마리아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1855년 3월 25일에 그는 수도 서약을 했다.
1855년부터 1860년 사이에 그는 신학공부를 끝마쳤으며-전에 돈보스꼬가 그러했던 것처럼-(사변신학 쪽보다는)윤리신학이나 성서적 작품들을 훨씬 더 좋아했다. 오라또리오로 돌아 와서는 점점 더 효과적인 능력을 가지고 그의 스승을 계속 도와 드렸다. 1856년에 그는 포르타 누오바에 있는 오라또리오를 맡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반칠리아에 있는 오라또리오를 맡았다. 루아는 또한 돈보스꼬의 저작들에 대해서도 그를 도와주었으며(이탈리아 역사)의 재판 때에 원본 개정을 도왔던 사람은 바로 루아였다. 그 책은 현재도 팔리고 있다.
수도회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 된 이 후 1858년에 그는 돈보스꼬의 로마 방문에 따라 갔다. 1856년 12월 돈보스꼬가 많은 소년들에게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회에 등록하도록 초대했을 때, 루아도 그들 가운데에 분명히 끼여 있었다.
동년 12월 18일에 루아는 만장일치로 살레시오 수도회의 영적지도자로 선출된 반면, 돈보스꼬에 의해 경리(부원장)란 칭호를 부여받은 사람은 알라소나띠 신부였다. 미카엘 루아는 당시 차부제 였을 뿐이었다.
사제가 되다
미카엘 루라의 사제 서품 준비 피정 중에 돈보스꼬는 한 강화를 다음과 같은 마로 끝맺었다; “하느님을 신뢰하게 그리고 만일 내가 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난 항상 그대의 뜻에 따르겠네.” 그는 1860년 7월29일 카셀레에서 서품 받았으며, 그 다음 주 일요일에는 특별 축하식이 거행되었었다.
이제 사제 된 루아는 자신이 그의 스승처럼 수많은 일에 파묻혀 있음을 알았다. 이미 영적 지도자였던 그는 이제는 교육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직무들을 모두 다 잘 이행해 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반칠리아에 있는 오라또리오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1863년 돈보스꼬는 루아를 마라벨로에 있는 살레시안 학교의 원장으로 만듦으로써 훨씬 더 많은 책임들을 맡기기 위해 그를 훈련 시키길을 발견했다. 루아는 당시 겨우 26살에 불과했다. 루아는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긍지감을 지나게 될 만큼 원장직을 아주 잘 수행해냈다. 오라또리오의 연대기 속에서 루피노 신부는 다음과 같이 로아를 높이 찬양하고 있다; “미라버노로에서의 루아 신부는 마치 또리노에서의 돈보스꼬처럼 꼭 그렇게 행동한다. 그는 항상 그의 친절과 그가 계속해서 들려주는 재미있는 것들에 매혹된 소년들에게 에워싸여 있다. 학년초에 루아 신부는 교사들에게 너무 엄격하게 대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또니로에 그가 없어서는 안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1865년에 몸이 불편해진 알라소나띠 신부의 자리로 전임되었다. 새 책무는 또리노 수도원에 더하여 그곳의 700여 소년들의 물질적 배려 및 총 훈육을 포함하는 막중한 것이었다. 거기에다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성당 건립과(가톨릭 문고)의 사무처리 및 돈보스꼬를 도와 수많은 서신들을 처리해 주는 것도 책무의 하나였다. 그처럼 막중한 이로 인해 그가 1868년 본시 허약했던 건강을 망쳤다는 건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의사는 희망을 포기해 버렸으나 돈보스꼬는 종부성사에 쓰일 성유를 되돌려 보냈다. 돈보스꼬는 루아에게 “이봐, 루아. 자네는 창 밖으로 몸을 날린다 해도 지금 죽지는 못할 걸세.”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루아가 회복하여 전에 했던 일을 계속했다.
루아는 성실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어떤 일이나 기꺼이 말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써 항상 돈보스꼬 곁에 있었다. 돈보스꼬의 부재 시는 오라또리오의 일들은 루아에게 맡겨졌으며 때로 이런 일이 몇 달 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돈보스꼬가 미래의 어느 날 엔가는 루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 점차로 그를 준비시키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1869년에 돈보스꼬는 당시 자신이 사용하길 꺼려하던 수련장이란 직함을 쓰지는 않았지만 구라 에게 살레시안 지원자들의 형성를 맡겼다. 회의 총 대리의 자격으로 1872년에 여러 수도원에 인원을 배치했던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루아였다. 그보다 조금 뒤에 창설자는 정기적으로 그를 내보내어 수도원들을 방문하게 했으며, 새로 세워진 공동체들을 위해 필요한 사항들을 연구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으며 요한 갈리에로가 남미로 떠난 뒤에는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지도를 그에게 맡겼다. 루아는 1878년 파리와 1880년 마르세이유에 있는 수도원들의 개관식에 참석했으며 또한 그는 매년 마르세이유에서 실시되는 살레시안 연례 피정을 주관했다; 1885년에는 교회법상의 시찰관 으로서 시실리에 가기도 했다... 루아는 1881년에는 로마에서 그리고 1883년에는 파리에서 돈보스꼬를 수행했으며 동년에 오스트리아의 프로스도르프에서는 챔보드 공작의 시중을 들었고 1886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돈보스꼬를 수행했다.
교황 성하의 제안에 따라 돈보스꼬가 자신을 계승할 권리를 지닌 대리자를 선출하려 했을 때 여러 해에 걸쳐 그의 곁에 있어 왔던 루아 말고 그 누가 대리자로 뽑힐 수 있엤겠는가? 이 결정은 1885년 9월 2년 동안 맡아 왔던 경리(부원장직)직을 사임했다. 때가 되면 루아가 자기들의 아버지의 자리를 떠맡게 되리라는 걸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돈보스꼬는 때로 자기의 총 대리(Vicar general)에게 의견을 묻는 식으로 점차 자리에서 물러섰다.
돈보스꼬와 함께 거의 30여 년을 살아왔던 터였기에 돈보스꼬의 죽음은 루아를 몹시 동요시켰다.
총장(Rector Major) 1888-1910
돈보스꼬가 죽고 난 뒤, 교황 레오 13세 성하를 비롯한 몇몇 선의의 사람들은 가까운 장래에 살레시오회가 흩어져 버리지나 않을까 하여 그 장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로마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퍼져 있었다; 살레시오회를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더 잘 설립된 비슷한 회에 합병시키려는 회담이 열렸었는데 그 계획은 사실 살레시안들과 아주 가까운 친구인 포싸노의 마나코르다 주교의 일종의 중재에 의해 포기되었다. 당시 루아 신부는 12년 임기의 총장에 지명되었다.
루아는 한시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살레시안들에게 보낸 1888년 3월19일자 공식서한에서 그는 창립자의 인격과 위대한 사업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강령을 발표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그러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시작했던 사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하도록 해야 하며 그분이 가르치고 실천했었던 방법들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말하는 태도나 일하는 태도에 있어서 선하신 주께서 마련해 주신 그의 모범에 따라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는 이것이 바로 그자신의 강령이 될 것이며 모든 살레시안들도 각각 그것을 연구하여 그것을 각자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루아는 살레시오회의 최고 수뇌로 남아 있게 된 이후 21년 동안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그는 그의 사명의 특징상 심지어 태도에 있어서까지 자신이 돈보스꼬와 같아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외에도 창립자는 죽기 직전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자네 자신을 사랑 받을 수 있도록 만들게.” 확실히 루아 신부는 체격과 기질에 있어서 그의 모델(돈보스꼬)과는 매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오후레이 신부가 말 한대로 그 두 사람의 차이점은 표현했던 반면, 루아의 주위에는 조용한 진지함과 영성적 분위기 엄격한 기운이 감돌았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소년들 속에서 돈보스꼬는 즐겁고 개방적이고 성의를 다했다. 루아도 역시 성의를 다한 건 같았으나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기보다는 감추어 두는 편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루아 신부는 놀랄 만큼 부드러워졌으며 총장으로서 “그는 장상이기 보다는 아버지처럼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옛 모습을 징계자로서 기억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에 깜짝 놀랐다.
활동들
총장이 되었을 때 루아 신부의 활동들은 매우 크게 늘어났다. 새 직위에 취임되자마자 그는 또리노와 프랑스, 로마에 있는 빛을 갚아야 했다. 비록 그는 돈보스꼬와 같은 비상한 모금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천재성을 인용하는 법을 곧장 배웠다.
루아 신부는 단 한 장도 남김없이 모두 답변을 얻어내겠다는 신조 하에 수많은 편지를 띄웠다. 그의 후계자가 모든 살레시안들에게 보냈던 그의 “회람장”과 “교훈적인 서한들”을 출판했을 때 그 분량이 두터운 한 권의 책에 달했다. 루아는 자신이 지시하고 있는 회의 생활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정확하고도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루아 신부를 후 21년 동안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그는 그의 사명의 특징상 심지어 태도에 있어서까지 자신이 돈보스꼬와 같아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외에도 창립자는 죽기 직전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자네 자신을 사랑 받을 수 있도록 만들게.” 확실히 루아 신부는 체격과 기질에 있어서 그의 모델(돈보스꼬)과는 매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오후 레이 시누가 말한 대로 그 두 사람의 차이점은 현저했다: 돈보스꼬의 미소와 얼굴과 태도는 아버지다운 자애를 표현했던 반면, 루아의 주위에는 조용한 진지함과 영성적 분위기 엄격한 기운이 감돌았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소년들 속에서 돈보스꼬는 즐겁고 개방적이고 성의를 다했다. 루아도 역시 성의를 다한 것 같았으나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기보다는 감추어 두는 편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루아 신부는 놀랄 만큼 부드러워졌으며 총장으로서 “그는 장상이기 보다는 아버지처럼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옛 모습을 징계자로서 기억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에 깜짝 놀랐다.
활동들
총장이 되었을 때 루아 신부의 활동들은 매우 크게 늘어났다. 새 직위에 취임되자마자 그는 또니노와 프랑스, 로마에 있는 빛을 갚아야 했다. 비록 그는 돈보스꼬와 같은 비상한 모금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천재성을 인용하는 법을 곧장 배웠다.
루아 신부는 단 한 장도 남김없이 모두 답변을 얻어내겠다는 신조 하에 수많은 편지를 띄웠다. 그의 후계자가, 모든 살레시안들에게 보냈던 그의 “회람장”과 “교훈적인 서한들”을 출판했을 때 그 분량이 두터운 한 권의 책에 달했다. 루아는 자신이 지시하고 있는 회의 생활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정확하고도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루아 신부를 책상 앞에 앉아 있길 더 좋아하는 내성적인 인물로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그는 대단한 여행가였다. 체리아 신부가 지은 책에서는 루아 신부의 총장으로서의 긴 여행들에 대한 설명이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그의 전기작가들 중 한 사람은 루아 신부가 적어도 6만 마일을 여행했음에 틀림없다고 추산하고 있다-이것은 당시의 교통 수단을 생각해 볼 때 놀랄만한 거리이다.
명백한 것은 그는 결코 여행 그 자체를 위해 움직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두 가지 분명한 목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수도자들과 협력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각지에 돈보스꼬의 정신이 계속 살아 있게 하겠다는 게 그 중 하나였고, 수도회의 업무를 처리하려는 게 다른 하나였다.
대개 그는 몇 달씩 걸렸던 그 여행들을 봄에 시작했다-이것은 주로 그가 살레시안 수도원들에서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이태리 전역에 걸친 그의 잦은 여행은 제쳐두고 1890년 2월에서 5월에 걸쳐 행해졌던 그의 첫 해외 여행에 대해서만 언급하려 한다.
프랑스에 도착한 루아 신부는 니스에서 9일 동안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살레시안들에게 오라또리오를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음엔 나바르에 갔으며, 뚤롱과 cannes에서는 살레시안 협력자들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Saint-Cyr 에서는 살레시안들과 살레시안 수녀들을 만났다. 2월 28일 마르세이유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방문객들에게 에워싸였다. Sainte-Marguerite에서 수련자들과 얼마간 지낸 다음 후원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Aubagne와 Roguefort에도 들렀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가게 된 그는 마르셀로나에서 군중들에게 둘러 싸였다. 그 다음 마드리드를 거쳐 우트레라에 갔는데, 그곳의 학생들은 기념으로 남겨 두려고 그에게서 물건까지 가져가기도 했다 한다. 성주간 때문에 이태리로 돌아갔다가 곧장 리요과 파리를 향해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런던 바테씨(Battersea)지구에 있는 살레시안들을 방문하러 갔다. 다시 그는 릴을 경유하여 프랑스로 되돌아 왔다. 릴에서 그는 학생들의 피정에 참석한 다음 Guines에 있는 수녀들을 방문했다. 그리고 나서 Liege에 새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준비와 주요 도시들의 방문을 위해 벨기에에 갔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 가 파리에 있는 Menilmontant를 거쳐 Paray-le-Monial과 Cluny를 잠깐 둘러보았다. Cluny에서 그는 5월말에 또리노의 오라또리오로 돌아 왔다.
루아 신부는 살레시안들에게 보내는 한 회람장에서 이 여행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그가 갔던 곳 어디서나 보았던 돈보스꼬에 대한 존경과 또한 그가 방문했던 수도원들의 만족스런 상태가 큰 위안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에이어 그는 그레고리안 성가와 신학 공부에 대한 소홀함과 학생들을 위한 불필요한 기차 여행 등의 몇 가지 과실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그는 더 광대한 여행들을 여러 차례 떠나게 되었다. 1894년 그는 스위스에 갔다. 스트라스부르그 에서는 아주 많은 친구들에게 둘러 싸였으며, 그 다음 Liege에 들렀다가 멧츠를 거쳐 멀리 로테르담에까지 갔다. 이듬해에는 더욱 야망에 찬 계획이 실현되었다: 마르세이유(Marseilles)에서 배에 올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로 간 다음 하이파를 경유하여 팔레스티나로 들어갔다. 그 곳에있는 살레시안 공동체들을 방문한 뒤 성지를 순례했다. 1899년 루아신부는 관구장인 리날디 신부를 대동하고서 남프랑스와 스페인을 다시 둘러보았다. 포르투갈을 여행한 다음 루아 신부는 오란에 있는 살레시안 수도원을 방문하기 위해 알메리아에서 북아프리카로 가는 배를 탔다. 1년 후, 방문했으며 그는 튀니지를 방문했으며, 1904년에는 오스트리아와 폴란드를 방문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순간에 했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죽기 2년 전에 다시 성지에 갔다.
사실 1888년부터 1910년 사이에 있었던 살레시오 수도회의 전례 없는 발전은 루아 신부의 재임기간 동안의 그의 노력들 덕택으로 돌려질 수 있다. 그는 그에게 상당한 비판을 안겨 주기까지 한 공동체의 수를 늘리기 위해 거의 열광적인 활동력을 가지고 일했다. 그러한 비판에 대한 그의 답변은 모든 회원들이 새 성소자 들을 발견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한 명의 수련자도 만들어 내지 못한”관구에 대해 견책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여하튼, 루아 신부는 그가 죽기 일년 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만족스런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살레시오회는 어떤 이가 예언했던 것처럼 사라지기는커녕 전 세계에서 그 풍요로운 사도직을 계속해 나가고 있으며 섭리적 사업을 확장시켜가고 있고 또한 날마다 더 많은 호의와 존경을 받고 있다.”
시련들
한편 루아 신부는 양심적 문제들과 다른 시련들로 인해 시달림을 받았다. 고백성사를 집행하는 문제가 1899년부터 1901년 사이에 그를 괴롭혔다. 그때까지, 살레시안 장상들과 원장들은 그들의 수도자들과 학생들에게 고백성사에 관해 완전한 자유를 부려했던 돈보스꼬의 관례에 충실했다. 루아 신부는 오라또리오와 그 밖의 곳 에서 계속해서 고백을 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전통이 살레시안 방법의 근본적 부분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899년 7월5일의 교령이 로마에 있는 수도원들의 원장들에게 학생들의 고백을 듣지 못하도록 금행을 할 때 그것은 하나의 서글픈 강풍이었다. 성청에 따르면 이러한 조항은 고백자의 자유를 보호하고 장상들의 직책에 관한 가능한 혐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일견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큰 결과를 초래할 것을 염려하여 루아 신부는 타협 방안을 모색했다. 그런데 1901년 4월24일에 발표된 두 번째 교령은 모든 살레시안 장상들에게 그들 공동체내의 그 어떤 사람의 고백도 듣지 말라고 명백히 금하였다. 살레시안 전통에 대한 충성과 성청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분열된 루아 신부는 호소했으나 로마에 소환되어 성청에게 그에게 내린 집계를 감수해야 했으며, 이어 명령에 의해 당장 로마를 떠나야 했다. 그는 주저 없이 복종했으나 매우 심한 고통을 느꼈다.
1906년에 내려진 로마의 또 다른 결정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는 수없이 돈보스꼬의 유산 중 또 한 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이번에 그것은 성인에 의해 세워졌던 두 수도회의 완전한 분리를 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바라째에서 일어났던 일이 루아 신부를 가장 속상하게 했다. 그도시에 있는 살레시안 학교는 순조롭게 운영되어 오고 있었는데 1907년에 갑자기 문제의 돌풍이 불어 닥쳤던 것이다. 그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휴가 초에 나머지 학생들이 막 그들의 집으로 떠나려 했던 7월29일 아침이었다. 그 때 경찰들이 살레시안들에게 심지어 악마적 미사 거행을 포함한 여러 가지 비행혐의를 들이대면서 무례하게 수도원에 들어 왔다. 수도원이 수색되었으며 취조와 의학 검진등 별별 짓을 다 감행했다. 경찰에 따르면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 한 학생의 개인적 일기가 실증해 주는 피할 수 없는 죄과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두 명의 살레시안들이 사보나에 있는 감옥으로 보내졌으며, 한편 신문은 살레시안들과 살레시안 성직자들을 비방하고 있었으며 사보나와 라 스페찌아, 삼피에르다레나에서는 폭행이 난무했다. 문제의 학생이 이상이 있는 학생이며 그의 일기장은 거짓 투성이였다는 게 밝혀지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건의 내막은 이태래 내에서 수도회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들을 폐지시키기 위해 꾸며진 것이었다 한다. 확실히 그것은 루아 총장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 시기 동안에 루아 총장이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울하게 변해버렸다고 전한다.
그가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들 중 우리는 1896년 에쿠아도르의 수도원들의 폐쇄와 1902년 프랑스에서의 수도원 폐쇄 및 9명의 살레시안들과 39명의 학생들을 앗아갔던 매씨나 에서 일어 난 지진을 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특히 1909년 초부터 루아 신부는 정맥염이나 결막염과 같은 신체적 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10년 4월6일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놀라운 정력을 유지시켰다.
루아 신부의 영성
루아 신부는 그에게 규율과 수도생활에 대한 사랑 및 그리스도와 성모께 대한 헌신을 불어넣었던 돈보스꼬와 그의 사업에 대한 명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영성적 길을 발견했다.
그는 돈보스꼬의 위대한 유산의 일부라 여겼던, 그리고 그 자신 유별난 충실성을 가지고 지키려 애썼던 규율에 대한 특별한 존중을 변함없이 유지했다. 모든 규율에 대한 그의 고수는 소문난 것이었다.
돈보스꼬 자신도 언젠가 자신은 감히 루아 에게 고백성사를 보러 가기가 힘들다고 말하면서 루아 신부의 엄정성에 관해 농담했을 정도다.
루아 신부가 “살라 있는 법전”으로 불리 웠던 것도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총장으로서 루아 신부는 창립자가 남겨 준 관례들과 전통들, 회헌에 대한 충성을 계속 주창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로 하여금 1901년 총회에 의해 추천된 tirocinium 이나 1904년의 총회 자체의 개혁과 같은 중요한 몇 가지 쇄신을 도입하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다른 이들에게 되풀이해서 깨우쳐 주려 했던 규율에 대한 그이 존중은 규율은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그의 믿음으로부터 그 힘을 얻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규칙이란 곧 생명의 책이며 복음의 본질이며 우리 구원의 희망이며 우리 완성의 수단이며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쇄가 아닐까요?”라고 물었다.
루아 신부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상과 그의 태도, 그의 겉모습은(Cure fo Ars)를 생각나게 했다. 그의 스승의 모범에 따라 루아 신부는 일과 끊임없는 활동으로써 습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극복했다. 루아 신부는 자기 시간을 단 1분도 낭비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한다. 루아 신부는 하늘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돈보스꼬에게로 달려가서 인사한 다음 그에게 할 일이 없는가고 물어 볼것이라는 농담이 퍼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성모께 대한 그의 헌신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1900년 12월28일에 예수 성심께 살레시안 수도회를 봉헌했다. 그 때 그는 모든 수도원들에 “예수 성심께 대한 헌신에 관한 가르침”을 보냈다. 돈보스꼬처럼 그도 그리스도를 그분의 어머니로부터 따로 떼어 생각지 않았다. 그는 1903년 발도꼬의 마돈나(성모 마리아)께 왕관을 씌우는 의식에 큰 기쁨을 가지고 참석했다. 2년 후 루아 신부는 비오 10세로부터 로마의 테스타끼오 지구에 Santa Maria Liberatrice(해방의 성모)성당을 지으라는 부탁을 받아들였다.
루아 신부의 시복 시성을 위한 운동이 로마에 받아들어지고 있다. 1953년에 가경자로 선언된 그는 1972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로 선언되었다.
20
루아 총장하에서의
유럽의 살레시안들
총개관
돈보스꼬의 후계자의 모습과 그의 활동적 삶의 변천들을 이미 묘사한 지금 우리는 다음 두 장에서 살레시오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던 세계각지에서의 살레시오회의 전전을 요약하려 한다.
루아 신부의 총장직무가 시작된 맨 처음부터 아직 어린 살레시오 수도회는 호운의 물결을 타고 나아갔음이 인정되어야 한다. 돈보스꼬의카리스마적 인격은 갖가지 계층의 사람들을 모두 끌어 당겼다. 그가 죽었을 대 국제적 신문은 그의 위대한 사회적 업적들을 다시 한번 더 강조했다. 그 결과 세계각지로부터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돈보스꼬의 적들조차도 그들 식으로 돈보스꼬의 아들들의 활기를 증언했다. 프랑스 상원 위원회의 한 보고에 따르면 “살레시안들은 최근에 생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세계적 규모의 조직체”이다
루아 시누는 그의 임기처음 몇 달 동안엔 꾹 참고 있어야 했다. 돈보스꼬는 주기 바로 전에 루아 에게 새 공동체 건설이나 빌딩 축조를 일시 보류하고 이미 운영되고 있는 것들을 강화시키도록 하라고 충고했었다. 레오13세도 역시 1888년 2월21일 알현에서 그러한 강화를 주장 하셨다. 체리아 신부에 따르면 루아신부는 학교와 오라또리에 대한 요구들이 백중 하나만 만족시켜 줄 수 있을 정도로 많아졌을 때야 비로소 마침내 그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한다-루아 신부는 자기 이전의 돈보스꼬가 지녔던 것과 똑같은 믿음에 의해 내몰려졌다.
통계는 루아 신부의 재임시에 놀랄만한 팽창이 있었음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1888년에는 56개의 수도원이 있었는데 살레시안 들이 이미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일하고 있던 1910년까지 해서 모두 345개로 늘어났다.
유럽내의 국가들 중 새로 살레시오회가 시작된 나라들
스위스가 티치노(Ticino)주의 멘드리시오(Mendrisio)에 학교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1889년의 일인데 살레시안들은 이미 1877년부터 스위스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작업에 들어 갔었다. 돈보스꼬는 최고 평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원을 배치할 만큼, 그리고 그 곳에서는 일반 평복을 입어야 한다고 할 만큼 스위스의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93년 정부가 변화되었을 때 살레시안들은 추방되어 다른 곳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바레르나에 그리고 다음엔 마토끼아에 정착했다; 그들은 루가노 근처의 읍에서 오라또리오를 열기도 했다.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지역에서 그들은 무리에 있는 실업학교를 제공받았다. 메데르레트 신부(미래의 마드라스의 대주교)가 그곳의 초대원장이 되었다.
스위스보다 2년 뒤 일단의 살레시안들이 벨기에의 Liege 에 도착했다. Doutreloux주교가 그 곳 시에 있는 공동체에 대해서 책임을 맡았다. 그는 돈보스꼬를 찬미하였으며, 돈보스꼬는 죽기 전에 그 공동체를 승인했다. 1895년에 Tournai에서 두 번재 사업이 시작되었다. 뒤에 Hechtel이란 마을에 수련소가 문을 열었다. 1902년부터 벨기에의 수도원들은 스까로니 신부의 책임하에 자치적인관구가 되었다. 1904년 Grand-Bigard에 신학부를 개설함으로써 이 관구는 자체 내에 신학부를 두게 된 첫 관구들 중 하나가 되었다.
스페인 관구의 포르투갈을 답사한 뒤 1894년에 리날디 신부는 다음과 같이 공언했다; “조사해 볼 필요조차도 없이 나는 포르투갈 내에서 살레시안이 되고자 하는 집들이 6개나 있음을 알았다.” 그 해 몇 몇 살레시안들이 부라가(Braga)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고아원을 제공받았다; 그곳에서부터 그들은 그나라 내의 다른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리브본으로, 그 다음엔 비아나 도 카스텔로에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오포르토로 퍼져갔다. 곧 그들의 사업은 바다 밖으로까지 뻗치었으며, 1902년에는 코글리오로(Cogliolo)신부가 포르투갈의 첫 관구장이 되었다. 폴란드에서의 발단은 아주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변화 뒤에 Markiewicz 신부가 살레시안되 되었으며 루아 신부의 동의를 얻어 Przemysl 교구의 본당 사제로 임명되었다. 1892년에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학교를 열더니 그는 또리노와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나라 내에서 “매우 준법적인”살레시안들을 모집했다. 그에 따르면 살레시오회는 너무 연약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회원들에게 좋은 음식이 허용되고 있으며, 학생들은 몇 년 전 그가 그랬던 경우처럼 무료 교습을 받는 대신 학비를 비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살레시안들이 폴란드인 들에게 아무 것도 되돌려 주지 않은 채 폴란드인 들로부터 교묘히 돈을 우려냈다고 하면서 살레시오 수도회의 장상들은 물론 돈보스꼬까지 비난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우리는 Markiewicz신부가 자신을 폴란드의 돈보스꼬로 제시하려 했다는 비난들을 알고 있다.
이러한 오랜 동안의 실망스런 일들 뒤에 당시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에 위치해 있던 아우슈비츠에서는 1898년에 주요한 살레시안 사업이 시작되었다. 1905년에 전의 제국내에 있던 모든 수도원들을 포함하는 오스터리아 관구가 설립되었으 때, 마나쎄로 신부가 그곳 아우슈비츠에 정착했다. 살레시안들은 Daszawa에 나이든 성소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Przemysl은 후에 폴란등의 수좌 대주교 Hlond 추기경으로 유명해지게 된 한 살레시안의 활동 영역이 되었다.
우리는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Liubliana에 세워진 살레시안 공동체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에 세워진 공동체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서남아시아에서는 살레시안들은 이탈리아 식민자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던 스미르나와 이스탄불에 공동체들을 세웠다.
이 나라들에 덧붙여 당시 유럽 여러 나라들과 특별한 방법으로 연관되어 있던 몇몇 아프리카 나라들도 언급되어야 한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돈보스꼬의 약속을 받아 두었던 Lauigere 추기경이 꾹 참고 기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1891년에 살레시안들이 오란에 갔다는 말을 들은 Carthage의 대주교는 루아 신부에게 우정에 찬 꾸지람을 던졌다. 루니스에서 살레시안들은 1894년에 라 마르신에 있는 고아원을 인계 받았으며, 2년 뒤에는 로사리오에 “고아원”이 하나 개원 되었다. 그들은 또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케이프 타운에 기술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태리내에서의 팽창
루아 신부의 재임기간 동안 살레시오회가 이미발판을 굳히고 있던 유럽 내에서는 두 배로 공동체들이 늘어 났다. 특히 이태리는 살레시안 수도원들의 망상 조직으로 뒤덮혔으며 특히 대도시는 더욱 그러했다. 1888년부터 1910년 사이에 이태리에 생긴 새 공동체들을 일일이 추적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지면이 할애될 것이기에, 본국내에서의 살레시오회의 성장에 대한 대강의 인식을 제공하기위해 주요한 것들만을 언급하려 한다.
1890년부터 1892년 사이 이태리에서는 11개나 되는 공동체들이 새로 생겨났다. 그 중 다음 다섯 개는 피에몬떼에 있었다: 트리노(학교와 오라또리오), 포싸노, 피오바(철학과정 학생들을 위한 휴가의 집), 이브레아(신입회원 모집과 형성을 위한 국제적 쎈터), 끼에리, 트레비글리오와 베로나에도 새 공동체가 있었다. 이 중 베로나에 있는 공동체는 장차 한 관구의 본부가 되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아랫쪽으로 더 내려가 루고(로마냐)라는 곳에서도 공동체가 있었다. 그 곳에서의 사제들의 일은 꾀 어려움을 겪었다. 살레시안들이 그곳에 머물러 번영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돈보스꼬의 모토를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는 것뿐이었다: “정치에서 벗어나 있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프로그램은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것이다.” 마세라타에 있는 공동체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던 반면, 로테로에 있는 학교는 별로 번영하지 못하더니 결국 1910년에는 문을 닫아야 했다.
사실리를 살펴보면, 후에 관구의 본부가 된 카타니아에 이미 오라또리오가 번창하고 있었는데 살레시안들은 그 곳에 새로이 학교를 세웠다. 메씨나에도 역시 학교사 생겼는데 그 학교는 1908년의 지진 때에 심한 피해를 입었다. 알리 마리나와 브론테, 마르사라에도 수도원들이 있었으며 산 그레고리오에는 수련소가 있었다.
1893년부터 1895년 사이에는 더 많은 살레시안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사보나에 수도원이 생김으로써 리구리아는 모두 6개의 공동체를 갖게 되었다. 피에몬떼에는 노바라에 있는 학교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 개의 새 공동체가 있었다. 노바라의 학교는 롬브리아스꼬의 사제직을 열망한는 폴란드 소년들을 위한 학교였으며, 아비글리아나에 있는 학교는 아니든 성소자들을 위한 학교였다. 살레시안들이 밀라노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곳 대주교와 아주 활동적인 협력자 위원회가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준비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트렌트와 코리찌아에서도 수도원들이 문을 열었다. 그보다더 남쪽 옴브리아의 구알도 타니노와 트레비, 오르비에토 및 훨씬 남쪽에 있는 카스텔람마레 디 스타비아와 카탄짜로에소 새 공동체글이 생겼다. 카탄짜로에 있는 신학교에서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곳의 살레시안 총장 달마쪼 신부가 한 미친사람에 의해 총살되었던 것이다.
이 후에도 계속해서 살레시안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루아 신부는 수도회의 강화를 위해 1900년과 1906년에는 팽창을 멈추었다. 1910년까지의 기간 중에 새로 생겨난 것 중 대표적으로 다음의 것들만을 언급해 둔다: 카넬리 농업학교, 젠짜노 수련소, 펠라라, 모데나, 볼로냐, 파비아, 피사, 카세트타, 바리, 카살레, 라벤나, 산 지오반니, 델라 피냐, 로마의 산타 마리아 비레라트리체. 1910년 이태리에는 살레시안 들의 놀라운 발전을 증언해 주는 네 개의 번창중인 관구가 있었다.
스페인에서의 발전
스페인에서의 살레시안 활동은 이태리에서 만큼 널리 보급된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비율 정도로는 계속 진전되어 갔다. 1888년에는 우트레라와 바르셀로나 두 곳에만 공동체가 있었지만 1910년까지 해서 스페인 내에는 모두 30여개의 공동체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팽창을 낳은 위대한 건설자 중 한 사람은 바로 리날디 신부였다. 1890년에 살리아의 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이듬해에 이베리아 관구의 관구장이 되었으며, 많은 생각과 근면으로써 스페인 공동체들을 유지하고 증가시키는 임무에 헌신했다; 주위 여건 역시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정부 조차도 살레시안 사업을 고맙게 여겼다. 실제로 1893년 10월25일에는 긴급한 사회 문제들에 대한 살레시안들의 특별한 공헌을 치하하는 칭찬이 발표되었다. 이듬해에는 탈라고나에 있는 구제 가톨릭 회의에 대해서도 비슷한 찬사가 표해졌다.
1891년에는 제로나에 농업학교가 열렸으며, 1892년에 산탄디에 생긴 오라또리오는 놀라운 규모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반도의 다른 편에서는 버림받은 소년들을 위한 오라또리오가 세발랴에 열렸다; 급속히 증가되는 성소자들로 말미암아 바르셀로나 근처의 산 빈센스 델스 호르츠에 수련소가 생겼다. 리알프, 비고, 베파르, 에치야, ㅗ르모나, 바라칼도, 살라만카, 발레치아, 키우다델라, 몬틸라, 마드리드, 코르도바, 론다, 훼스까, 산 요세 델 발레 등도 있었다. 190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세 관구로 나눌 필요가 생겨 아이메 신부가 바르셀로나에서 오베르티 신부가 마드리드에서, 그리고 리칼도네 신부가 세발랴에서 각각 관구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리날디 신부는 보다 높은 책무를 맡기위해 또리노로 승진되어 갔다.
프랑스에서의 흥망성쇠
루아 신부가 재임하는 동안에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살레시안 사업은 현격한 차이를 지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초기엔 미래가 아주 유망한 것 같았다. 돈보스꼬 시절부터 있었던 공동체들 그 중(무엇보다도 니스, 마르세이유, 다바르, 파리, 릴, Sainte-Marguerite에 있었던 공동체들)은 착실한 발전을 보여 주었으며, 새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Besancon 근처 Gerigney에 농업학교가 생김, 이것은 후에 Rossignol에로 옮겨졌다. 1893년에는 살레시안들은 Montpellier의 Cabrieres주교에 의해 뚤롱에서 환영을 받았다. 1896년에는 활동적인 협력자 단체의 도움으로 Romans에 또 다른 오라또리오가 문을 열었다. 프랑스에서의 사업은 그때까지는 요셉 론차일 신부를 관구장으로 그리고 파리를 본부로 하여 프랑스 북부에 있는 수도원들을 관할하는 제2의 관구를 창설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전한 것 같았다. 그 뒤에 Rueil에 수련소가 그리고 Mordreux에 성인 성소자들을 위한 학교가 문을 열었다. 1900년 파리 세계 박람회 때에 살레시안들은 사회사업에 대한 공로 덕분에 2개의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러나 1년 뒤 수도회들에게 폭풍이 불어 닥쳤다. Waldeck Rousseau에 의해 준비되어 Combes에 의해 흉포하게 수행된 특별법률이 종교적 조직체의 성원들에게 국가의 승인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세속 생활로 되돌아 갈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북부 살레시안 관구는 전자를 택했는데 Dhuit 신부하의 파리 수도원만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해체 당한다. 후자를 선택한 남부 관구는 불안정하고 은밀한 존재로 남게 되어 많은 살레시안들이 그 나라를 떠났다.
어떤 이들은 Guernsey섬으로 갔고 어떤 이들은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사업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다시 회복되었다.
영국
런던의 한 지구 Battertsea의 공동체는 돈보스꼬를 그 창립자로 내세울 수 있다.(아주 묘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1896년 영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공동체는 돈보스꼬에게는 희망봉이었던 케이프 타운으로부터 6,0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미래의 웨스터민스터의 대주교 몬시뇨르 Bourne덕분으로 살레시안들은 서섹스의 Burwash 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본당을 맡아보았으며 1897년에는 토찌 신부 하에 학교를 조직했다; 뒤에 수련소와 철학부가 생겨났다. 1901년에는 Farnborough에 고아원이 개설되었으며, 1년 후 살레시안들은 Chertsey의 본당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영국과 남아프릭, 말타에 있는 집들은 처음에는 벨기에 관구에 속했다; 그러나 1902년에 그것들은 Macey신부하의 분리된 자치 관구로 편성되었다.
특별시설: 오라또리오
루아 신부하에서 개설도니 시설들은 모두 살레시안 기획들의 정규적 유형들, 즉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나이 든 성소자들을 위한 여러 가지 특별코스, 기술학교(프랑스의 장관Combes의 생각에 의하면 이것은 사제의 사명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농아학교, 고아원, 본당, 오라또리오 등이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살레시안들과 그들의 장상들의 관심과 평가에 있어서는 오라또리오가 제일 우선적인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루아 총장의 업적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살레시안들에게 살레시안 사업들과 신심회 자체의 출발점을 깨우쳐 주었던 회람장 속에서 이런 유형의 사도직을 계속해서 격찬했었기 때문이다. 1899년에 루아 총장은 각 관구에서 오라또리오에 관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나를 알아 보기 위해 관구장들을 초대했다; 그의 견해로는 모든 수도원이 오라또리오를 가져야 했다. 그는 대규모 오라또리오에 대해 우려하지 않았으며 그의 여행 동안에 300명혹은 500명 혹은 1,000명의 소년들이 있는 몇몇 오라또리오를 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에게는 살레시안들의 그들의 제1목적, 즉 크리스챤 교육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는게 가장 중요했다.
그 당시에 시작된 한 특별한 오라또리오에 관한 일화가 여전히 유명한 이야기거리로 남아 있다. 스페인의 세빌랴의 교회 당국자들이 살레시안들에게 “완전히 방치된 채 자라난 수많은 소년들”의 복지를 맡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시에 침입하여 공중 질서를 위협하는 소년들의 떼거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시당국도 이 부탁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1892년에 살레시안들이 세빌랴로 갔었을 때 그들은 많은 일거리를 발견했다. 경쟁 관계에 있던 소년 패거리들은 투석전을 벌이다가도 경찰이 나타나면 단결하여 경찰에 대항했다. 시의 가로등은 그들의 좋은 표적거리였다. 젊은 신부 리칼도네는 점차 소년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는 그들의 싸움을 중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이 500여 부랑아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음을 알았다.
어느 날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곤봉과 새총을 성모상 발 밑에 내려놓으라고 제안했다. 그들은 그의 말에 복종했다. 그리고 나서 이 위험한 무기들(몇천개나 되었다.)이 엄숙하게 불태워졌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거니와 세빌랴의 선량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다소 유별난 모닥불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몇몇 색다른 시설들
살레시안들은 소년들과 노동자들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도직들을 수행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살레시안들은 1909년 나폴리에서 농아학교를 떠맡았다. 확실히 루아 신부는 맹아 학교라면 다르겠지만 돈보스꼬도 그러한 기획을 반겨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살레시안들은 곧장 필요한 개혁을 시행했다. 즉 소년들에게 구걸을 금하였으며, 정규 수업시간을 편성했으며 더 좋은 건물들을 지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혁신은 언어 치료 요법 제도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말타섬의 Sliema에서 살레시오회는 1903년에 소년 범죄자들을 위한 학교를 인수했다. 이것은 색다른 일이었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제직 초기에 교도소를 사목 방문했던 돈보스꼬의 본래의 노력에로 되돌아 간 것이었다. 그곳에서 살레시안들은 그들 자신의 특별한 방법들을 그런 유형의 기관에 적용할 기회를 가졌다.
마지막을 Simplon(심플론)터널에서 일하고 있는 이태리 노동자들을 위한 계획 사업은 가톨릭인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큰 칭찬을 받았다. 그들을 위한 본당 겸 보험회사가 스위스의 Brigue에 설립되었다. “이탈리안 노동자 협회”는 그 곳을 시찰했던 다소 반성직자적 이었던 이탈리아인 Deputy(드푸티)에게도 찬사를 받았다. 그는 “성직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항상 앞장서서 행동하고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원 모집
성소자 수만 가지고도 1888년부터 1910년 사이에 생겨난 살레시안 시설들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시기 동안에 수련자 수가 치솟다가 그후에는 떨어졌다. 1900년에는 모두 803명의 수련자들이 있었다가 몇 년 뒤엔 그 수가 푹 떨어졌다. 통계를 살펴보면 1910년엔 겨우 371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체 통계치는 서약한 수도자들이 굉장히 늘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돈보스꼬 사망시 774명에서 루아 신부의 사망시 에는 4,001명으로 늘어났다.(이 숫자들은 전세계 살레시안들을 나타낸 것이긴 하지만 주로 유럽에 적용되는 것이다)
회원 모집면에 있어서도 역시 루아 총장의 솔선이 결정적인 요소였다. 끈질기게-아마도 끝까지 변함없이 계속 루아 신부는 필요한 경우 성소자들을 충분히 배출시키지 못한 것 같이 뵈는 관구들을 꾸짖으면서까지 성소자들에 대한 요구에 응했다. 1897년 1월 31일자 편지속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하는 수도회라는 배의 키를 잡고 있으면서 제가 진심으로 우리 회의 발전과 진보를 마음속에 두고 있지 않다면 저는 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노력들 뒤에 숨어 있는 동기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성소자들의 촉진에 대한 저의 특별한 관심을 알려 주고 싶습니다. 성소자들을 무시하는 날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회가 그 목적을 달성치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소자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루아 신부는 때로 거의 시적인 말을 사용하곤 했다. 그는 “살레시안은 다른 나머지 것들보다 더 건강하고 더 무성하여 새 수확을 위한 씨앗이 될 알곡들을 산출해 낼 연약한 작은 식물들을 특별한 관심을 쏟아 가꾸는 부지런한 정원사와도 같습니다.”고 설명했다.
수련소에 대한 관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아 신부는 각 관구가 자기 관구의 수련소를 가져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회람장속에서 모든 살레시안이 기뻐할 수 있도록 “살레시안들의 모판”의 건설을 언급함으로써 새로 수련소를 갖게 된 관구를 치하했다. 루아 신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수련자들을 위한 아주 자세한 프로그램의 초안을 작성했다.
한동안 수사 지원 수련자들을 분리시키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1900년에 루아 신부는 7명의 수사지원 수련자들을 발표할 수 있었고 1901년 총회는 이러한 조정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사실상 거기에는 실망스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1904년 총회에서는 다시 공통 수련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1910년까지는 거의 모든 관구가 자기 수련소를 갖게 되었다.
관구들
관구는 수련소와 맞먹었다. 여기에도 놀라운 진보가 있었다. 1888년부터 1910년까지 관구수는 6개에서 당시엔 언급될 수 없었던 프랑스의 두 관구를 포함하여 32개로 증가했다. 유럽의 관구를 살펴보면 4개의 이탈리아 관구들(피에몬떼, 리구리아, 로마, 시실리)과 3개의 스페인 관구들(바르셀로나, 마드리드, 세빌레)이 있었다.
루아 신부는 1902년 1월20일 로마로부터 교회법적 인가를 받은 후엔 특히 더 관구의 건설과 관구장의 선택 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루아 신부에 따르면, 관구장들은 총장의 아니 더 나아가 하느님 자신의 대리자였기에 그들의 책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서한들 속에서 관구장들과 원장들에게 이점을 고집스럽게 지적하곤 했다.
그의 전임자처럼 루아 신부도 살레시오 수도회를 철저하게 일원적으로 파악했다. 1904년의 제10차 총회때에 루아 신부는 돈보스꼬에 따르면 “inspectorates”는 다른 수도회들의 관구와는 같지 않은 거라고 설명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한 가족의 흩어진 파편들로서가 아니라 단일한 한 가족을 형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체리아 신부는 루아 신부가 살레시안들이 “분권화”의 유혹에 빠질까봐 두려워했다고 전하고 있다.
살레시안의 팽창에 있어서 루아 신부의 역할
19세기 말의 살레시오회의 팽창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중 중요한 한 요소는 많은 주교들과 시 당국자들 및 가톨릭의 여론이 돈보스꼬의 아들들의 사업이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올바른 해답이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시대의 종교적 사회적 요구들이 호의적 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돈보스꼬와 루아 신부의 인격이 더 큰 아마도 제1차적 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루아 신부의 도덕적 지배권은 이미 돈보스꼬가 살아 있을 때에서 지대했지만 그가 총장으로 있을 시 절정에 달하였다.” 루아 신부가 총장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심오한 영성”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늘 돈보스꼬에 대한 전적인 충성의 정신 속에서 행동했다. 그는 사실 돈보스꼬의 가장 위대한 기적이라 불리울만 했다. 그는 엘리야의 망토를 걸친 엘리샤와도 같았다. 그러했기에 그는 의심할바 없는 권위를 아주 자연스럽게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경영자로서의 그리고 조직가로서의 그의 재능들은 창립자가 살아 있을 동안에 이미 살레시안 생활을 잘 아는 이들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그가 재직하는 동안에 배가된 수도원들과 관구들의 성공적 발전을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협력자들의 역할
협력자들은 팽창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점은 새 시설들이 세워졌을 때 특히 명백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레시안 사업 소식을 퍼뜨리면서 물심양면으로 그 새 시설들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여러 여행 중에 루아 신부는 협력자들의 협조를 크게 강조하곤 했다.
1895년 4월 볼로냐에서 열린 살레시안 협력자 회의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돈보스꼬의 찬미자 중 한사람인 볼로냐의 대주교 스밤파 추기경의 요청을 받고서 살레시오회의 종비서 트리오네 신부가 조직했던 이 모임은 국제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루아 신부를 의장으로 하여 30여명의 고위 성직자들, 주교들, 추기경들을 포함해서 모두 약 200명이 참가했다. 푸아 신부의 가냘프고도 엄격한 모습과 그의 겸손과 정중함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엄숙한 종교 의식과 종교음악회와 강연이 있었다. 3일 동안 교육과 사회적 활동, 선교, 출판 분야에 있어서의 돈보스꼬의 사업이 가리어졌다. 58명의 이태리 및 외국 저널리스트들이 참석했던 관계로 이 거대한 회의에 대한 뉴스가 많은 나라에로 퍼져 나갔다. 회의가 끝난 뒤 5일 후에 씌여진 한 열정적인 서한 속에서 루아 시누는 살레시안들에게 살레시오회의 장래에 관한 돈보스꼬의 예언을 상기시켰다: “1895년경에는 커다란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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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에서의 진척과
아시아 아프리카에의 첫걸음
1888년 살레시오 수도회는 남아메리카에 두 개의 관구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아르헨티나-칠레 관구였고 다른 하나는 우루구아이-브라질 관구였다. 우루구아이-브라질 관구는 퀴로와 에쿠아도르에 있는 집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얼마 전 교황청에서 설립한 교회법상의 두 영토들, 즉 파타고니아의 중북부 지역을 포함하는 교황 대리구와 파타고니아의 남부와 티엘라 델 푸에고로 이루어진 prefecture apostolic 교황관구 두 곳에서 선교 활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다음 시기에는, 아메리카는 살레시안 팽창에 있어서 유럽과 계속 보조를 맞추었다. 기존의 시설들의 확장에 만족하지 않고 돈보스꼬의 아들들은 양미대륙들(캐나다를 제외한)의 주요 국가들 내에서 계속 시설들을 설립했으며, 새로운 선교지구들이 그들에게 위탁되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도 첫 발을 내디뎠다.
앞서 유럽에서의 활동을 살펴 본 식으로 여기서는 이 새 영토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아메리카의 새나라들
루아 신부가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살레시안들은 남아메리카에서 7개의 나라들에로 새로 나아갔다; 콜롬비아(1890), 페루(1891), 멕시코(1892), 베네수엘라(1894), 볼리비아와 파라구아이(1896), 산살바도르(1897), 1897년에 살레시안들은 미국에도 들어갔다. 콜롬비아는 보고타의 대주교와 정부가 계속해서 또리노와 로마에 요망서를 보냈던 까닭에 위의 나라들 중 처음으로 살레시안들이 들어 간 나라가 되었다. 루아 신부는 레오13세의 강력한 권유를 받고 돈보스꼬의 죽음에 의해 이론적으로는 이미 끊어졌던 시설들 간의 고리를 한번 더 재결합시켜 보기로 결심했다. 1890년에 일단의 살레시안들이 “레오 13세 대학”이라 불리 우는 기술학교를 세우게 된 라바글랴티 신부의 지도하에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안틸레스의 중요한 항구 발란귈라에서 브라아타 신부는 1892년에 본당을 맡게 되었으며, 그 해에 자치 관구가 생겼다. 관구장 라바글랴티 신부는 모스꿔라에 서둘러 수련소를 열었다. 살레시안들이 이 나라에서 나병환자들을 위해 했던 사업이 뒤에서 특별히 언급될 것이다.
그 다음 나라는 페루이다. 1890년에 사비오 신부가 정보 수집 차 그곳에 보내졌다. 그는 리마에서 루아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살레시안 사업에 대한 열광이 대단하며 제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은 우리가 페루는 생각지도 않고 칠레나 에쿠아도르, 콜롬비아에 수도원들을 열었다는 것에 대해 거의 질투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다시 레오13세의 요청에 따라 루아 신부는 살레시안 몇 을 리마에 보냈다. 그들은 1891년 말경에 도착하여 오라또리오를 세웠으며, 뒤에는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세웠다. 에쿠아도르에서 혁명이 일어났던 까닭에 살레시안들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페루에 새로이 두 수도원들이 문을 열었다; 하나는 1897년 아래 뀌파에, 다른 하나는 1898년 칼라오에 열렸다. 살레시안들은 1905년과 1906년에 각각 쿠즈코와 피우라라는 인디안 도시들에도 갔다.
1887년에 돈보스꼬는 로마의 라틴아메리카 대학의 학생들에게 “나는 멕시코에 살레시안들을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고 말했었다. 1892년 루아 신부가 몇 년동안 요청을 보내왔던 멕시코사 위원회에 양보함으로써 이 예언이 실현되었다. 안젤로 피꼬노신부 지도하의 기술학교가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시작된 첫 살레시안 사업이었다. 뒤에 푸에바, 모레리아, 괄달라야라에도 진출했으며 1902년에는 크란디스 신부하에 멕시코 관구가 설립되었다.
베네수엘라도 역시 여러 해 동안 돈보스꼬와 루아 신부의 명단에 올라 와 있었다. 실은 1886년에 카라카스의 한 사제가 협력자회를 조직히는 일을 위탁받았었다. 그 협력자회의 수는 600여명까지 이르렀다. 1894년 살레시안들이 베네수엘라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그렇게 많이 도와주었던 이들은 바로 그 협력자들이었다. 카라카스와 발레시나는 첫 중심지들이 되었으며 그곳에서는 기술학교들과 오라또리오들이 문을 열었다. 1898년 발레시나에 심한 전염병이 유행했을 때 살레시안들은 그곳 사람들을 위해 영웅적인 노력을 다하였다. 산 라파엘 드 마라카이보에 또 다른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볼리비아에 첫 발을 디딘 살레시안은 코스타마냐 신부이다. 볼리비아의 대통령 아니체로 아니체는 자기 나라의 청소년들을 위한 재단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1890년의 일이었으나 1896년에야 7명의 살레시안들이 처음으로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들은 안데스 산맥과 볼리비아 고원을 넘는 놀라운 여행 끝에 2월17일에 라 파즈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 정부당국과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라 파즈와 또 다른 수도 수크레에 두 학교가 동시에 문을 열었다. 그 나라에는 인디안들이 많이 있어서 살레시안들의 그들의 집에 인디안들을 위한 부문을 마련했다.
이제 남아메리카 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나라는 파라구아이뿐인 것 같다. 1894년에 정부와 라사냐 주교사이에 한 동의서가 작성되었다. 처음에는 알라베나 신부가 그리고 그 다음엔 사비오 신부가 잠시 그곳에 머물렀으나 1896년에야 첫 영구 그룹이 아순시온에 정착할 수 있었다. 보통의 방식에 따라 기술학교, 혹은 불리워졌던 대로 말하자면 기술직업학교가 제일 처음으로 세워졌다. 4년 뒤 콘셒시온(칠레)은 오라또리오를 갖게 되었고 그 뒤 초 중등 수준의 학교를 갖게 되었다. 시작할 때부터 살레시안들은 카코 지역의 인디안들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선교대가 조직될 수 있기까지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중앙아메리카를 살펴보면, 살레시안들은 1897년 후반에 엘살바도르라는 작은 공화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부가 제공해 준 농업학교를 받아들였으며 기술훈련학교에 오라또리오도 조직했다.
그보다 뒤 더치 안틸레스에 있는 쿠라카오에 고아원을 열었다.
미국에서의 살레시안 사업은 19세기 말 그곳에 정착했던 아주 많은 이태리 이민자들 속에서 시작되었다. 살레시안 사업이 시작되었던 명백한 장소들은 동부와 서부의 해안들에 있는 본당들이었다. 1897년에 대주교의 요청을 받고 살레시안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성 베드로 바오로 본당을 떠맡았으며 이듬해에는 그 시에 있는 또 다른 본당이 그들에게 맡겨졌다. 당시 뉴욕에는 40만 명 가량의 이태리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살레시안들이 1898년에 성 비르지드 본당을 그리고 1901년에 예수의 성스런 변모 본당을 설립했을 때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살레시안들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야간 반을 편성했으며 미국에서 l'italiano라는 주간지를 시작했다. 살레시안들은 또한 새 이민자들을 위한 기관인 “민족 사무국”을 설립했다; 이 기관은 고아들을 도와 줬으며 법정 문제 등을 수습해 주었다. 코뽀 신부는 이런 여러 가지 분야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02년에 보르히노 신부는 미국의 관구장이 되었다.
미 대륙에 있는 다른 나라들
살레시안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던 다른 나라들에서는 당연히 아르헨티나를 필두로 하여 끊임없이 진보를 계속했으며 진보의 속력이 빨라지기까지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알마그로에 있는 비오9세 대학은 일종의 모원 혹은 남아메리카에있는 살레시안들을 위한 발도꼬가 되었다. 유럽으로부터의 원조가 이 집을 통해 새 시설들에도 전해졌다. 이 시기 동안에 가장 먼저 언급될 것은 이태리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해 있던 산타페 지방의 로사리오이다. 살레시안들이 감으로써 갈리에로 주교가 일주일 동안에 6천명의 사람들에게 견진 성사를 베풀었다고 자랑해 댈 수 있을 만큼 많이 신앙과 종교의식의 재 각성이 일어났다. 돈보스꼬의 아들들은 1892년 코르딜레라의 밭 밑에 있는 맨도짜의 극빈자 지역에 새 수도원을 열었다. 그곳에 그들은 학교와 성당으로도 자주 쓰인 오라또리오를 세웠다. 그와 동시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내에서도 4번째 오라또리오가 문을 열었으며, 1893년까지 아르헨티나에는 모두 6개의 성당들이 지어졌다. 1894년에 살레시안들은 농업학교를 위해 우리 벨레아에 있는 넓은 부지를 제공받았다. 이듬해에는 알마트로로부터 베르날에 있는 더 적당한 장소에로 수련소가 옮겨졌으며, 동년 즉 1895년에 관구장 코스타마냐 신부가 주교로 지명되어 베스피냐니 신부가 관구장직을 계승했다. 1900년에는 라폴라타 근처의 엔세나다에 있는 본당을 맡게 되었으나 그곳에서는 일하기가 힘들뿐만이 아니라 위험스럽기조차 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와 같은 시기에 로데오 델 메디오에 또 다른 농업학교가 문을 열었다.
1900년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레시안들이 도착한 지 25년째 되는 해였다. 값진 기념 축하식이 열리는 동안 알마그로에 있는 비오 9세 대학에서는 볼로냐의 회의처럼 큰 국제적 회의가 열렸다. 루아 신부의 참석이 기대되었었으나 그는 알베라 신부를 대신 보냈다.
엄숙한 의식들 뒤에 알베라 신부는 살레시안들과 크리스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이 일하고 있는 250여 수도원을 모두 돌아보았다. 이 여행은 3년 걸렸다. 이 기간동안 세워진 지 얼마 안 되는 시설들 중 비그나우드의 정착 자들을 위한 사업과 일단의 협력자들의 발의를 통해 1905년에 세워졌던 코르도바의 사업이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우루구아이는 살레시안들이 남미국가들 중 두 번째로 들어갔던 나라이다. 라사냐 신부에 의해 빌라 콜론에 학교가 세워졌었다. 관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라사냐 신부는 아메리카 전지역에 널리 알려진 관 축소 때문에 큰 존경을 받았다. 곧 세 개의 새 시설들이 생겨났다; 파이산두에 오라또리오 겸 학교가 그리고 마르세데스에 루아신부의 영광을 기리어 성 미카엘게 봉헌된 학교가, 그리고 수도 몬테비데오에 달레레스 돈보스꼬라 명령된 직업학교가 세워졌다. 1893년 3월12일에 라사냐신부는 로마에서 주교로 서품 되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우루구아이-브라질 관구를 지도하다가 1895년에 철도사고로 죽게 되었다. 그후 그 관구는 몬테비데오의 원장 감바 신부에게 맡겨졌다. 감바신부는 수도 몬테비데오로부터 1000마일 떨어져 있는 마냐에 수련소를 시작했다.
브라질에서는 1889년에 혁명이 일어나 50년 동안이나 집권해 왔던 돈페드 2세가 전복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니테로이의 살레시안들은 그곳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890년에 대담무쌍한 성격을 지닌 라사냐 신부가 로렌나에 새 공동체를 출범시켰고 4년 후에는 페트남코주의 수도 레시페에서 전에 포르투갈 지배자들이 살던 곳에 살레시오학교를 열었다. 라사냐 주교는 카초에이라고 가던 길에 목숨을 잃었다 라사냐 주교가 죽은 뒤 1년 후에 카초에이라에서는 살레시안들이 장차 대주교와 주교를 배출하게 되어 유명해졌던 학교를 세웠다. 상파울로주의 제2의 도시 캄피나스에는 1897년에 돈보스꼬의 아들들이 도착했다. 살바토르, 야보아타오, 리오 그란데도 술, 바게 등지에도 수도원들이 세워졌다. 1902년에 브라질에 있는 수도원들은 두 관구로 분리되었다. 페레또 신부가 남부 관구를 맡았고 죠르다노 신부가 북부 관구를 맡았다. 마로 그로쏘 관구는 포함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특별한 내력이 있었다. 브라질에서의 사업은 다소 늦게 시작되었지만 빨리 번성했다.
칠레의 콘셒치온과 탈카에 있던 살레시안들은 1891년의 내전 동안에 비극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 그들은 그들의 집들을 피난민들을 위해 개방했다. 칠레의 수도 내에 세워진 수많은 시설들 중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1892년에 세워진 카르멘이었다. 그것은 매우 조용히 시작되었으나 곧 작업장과 오라또리오를 가진 학교로 발전했다. 카르멘의 원장 토마티스 신부는 자신의 막중한 일에도 불구하고 부속선교단의 활동을 위해 시간을 냄으로서 아라우카니아의 인디아들에게로 나아갈 수 있었다. 1896년에 칠레관구는 몬시뇨트 코스타마에게 맡겨졌다. 발파라이소와 마클(수련소), 메리필리, 이뀌뀌, 리나레스, 발디비아에 살레시안 센타들이 조직되는 동안에 산티아고에서도 새 수도원들이 증가되었다.
이러한 팽창의 이유와 특성
이 급속한 진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국민들, 특히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의 종교적 무관심을 걱정한 지역 교회 성직자들의 긴급한 요청이 있었고, 또한 급격한 공업발전과 농업발전으로 인해 가정과 교회의 단단한 결합을 잃어버린 새 세대들의 종교적 양육을 증진시키길 바라는 각국의 요청들도 있었다. 이러한 절박한 요청들은 살레시안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그들의 계획사업, 특히 거대한 도시 지역들에서의 계획사업을 늘리도록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긴급했던 것은 살레시오 수도회 가족 내에서 그러한 팽창 욕구가 일어났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여러 선교단의 출발들에 반영되어 있는 강력한 사도적 경향에 의해 특정지어진다; 즉 1891년에는 45명이, 1892년에는 60명이, 1985년에는 80명이, 그리고 1898년에는 많은 살레시안 수녀들을 포함하여 100명이 선교사로 떠났다. 협력자들 역시도 기반 준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러 차례 그들은 1890년 멕시코시의 경우에서처럼 직접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페루와 베네주엘라, 브라질(예를 들어 바히아), 아르헨티나(코르도바와 비그나우드)등지에서의 협력자들의 활동은 특히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선교시설들을 제쳐두고 보면 아메리카에서의 살레시안 사업들은 그 대륙의 독특한 요구들이 어떤 기소를 낳은 건 사실이지만 유럽에서의 사업과 구조상 다를 게 없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에는 사제가 부족했던 까닭에 많은 살레시안들이 그곳 주교들에 의해 본당에 배치되었다. 이탈리아인 이주자들은(즉 미국에 이주한 이탈리아인의 경우)때로 선택에 의해 혹은 필요성에 의해 그들의 일에 이러한 특별한 교구적 방향을 부여했으며, 살레시안들은 성당 건설자 들이 되었다.
살레시안 사업 중 우선 실시된 것 중에는 크게 요구되고 있던 기술학교와 농업학교의 운영도 있었다. “직업”에 대한 절실한 요청들도 자주 들어왔다. 공적 사적 도움에 힘입어 살레시안들은 아르헨티나의 우리베랄레아와 브라질의 카초에이라 등지에서 농사를 위해 광대한 토지를 개발했다. 우루구아이의 Manga에서 그들은 밀 재배법을 개선하여 그것을 아주 널리 확장시켰다. 브라질의 로레나에 있던 바다리오띠 신부는 그 나라의 곤충들과 지질 및 광물에 대한 지식으로 유명해졌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기상 관측소에 대한 살레시안들의 공헌 역시도 크게 평가되고 있었다.
정치적 영역을 살펴보면, 남미에서의 어떤 나라들의 정부의 불안정성은 살레시안의 사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립학교들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살레시안 계획사업은 새롭게 들어서는 정권들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에쿠아도르에서는 적어도 한 대 살레시안들은 참으로 큰 불행 속에서 살아야 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살레시안들은 1888년 돈보스꼬가 죽기 직전에 에쿠아도르에 들어갔다. 그들의 공동체들은 특히 칼카뇨 신부의 지도하에서 번영했다. 뀌로에 있는 수도원은 14개의 효율적인 작업장들에서 기적을 이룩하여 에쿠아도르의 두 대통령들로부터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 쿠엔카와 리오밤바에도 수도원들이 생겨났으며 상골뀌(Sangolgui)에는 수련소가 차려졌다. 1893년 교황청은 에쿠아도르 정부화의 협의 하에 멘데쯔와 쿠알라뀌짜에 교황 대리구를 창설하여 누구나가 만족할 수 있게끔 그것을 코스타마냐 신부에게 위임했다. 코스타마냐 신부는 2년 뒤에 주교가 되었다. 1894년 루아 신부는 에쿠아도르 관구를 창설하여 그것을 칼카뇨 신부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2년 뒤 알파로 장군의 권력 상승과 더불어 문제가 발생했다. 반정부적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고소되어 1896년에 파국을 맞았던 것이다. 살레시안들은 체포되었고 수도원들은 몰수 다했다. 관구장 외 8명의 살레시안드른 페루의 국경지대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정은 40일이나 걸렸으며 그들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는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살레시안 사업은 다시 번창하게 되었다.
이제 살레시안들이 나환자들을 위해 행했던 유명한 사업을 기록하는 일이 남아 있다. 그 사업은 콜롬비아 보고타 근처에서 1891년에 시작되었다. 몇 백 명의 나환자들이 살고 있던 아구아 드 디오스촌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거의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보고타 수도원에 살던 미카엘 우니아 신부는 이것을 알고서 몹시 괴로워했다. 어느 날 복음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치유된 10명의 나환자들의 이야길 읽고서 그는 자신이 이 불행한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들을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여겼지만 그는 원장의 승낙을 얻어냈다. “친애하는 나환자들”에게 개인적인 편질 보낸 루아 신부에 의해 용기를 얻은 우니아 신부는 나환자들의 영적인 요구들을 들어줌으로써 기적을 낳았다. 그는 또한 큰 병원을 짓기 위해 국가적인 공공 캠페인을 벌여 자금을 모금했다. 그 외에도 그는 성당을 개축했으며, 가까운 언덕으로부터 식수를 끌어오기 위해 수도관을 설치했고 종교적 축제들을 마련했으며 음악을 장려했다. 4년간의 열성적인 일은 희생을 요구했다. 우니아 신부는 치료를 받기 위해 이태리로 되돌아 왔지만 결국 1895년 12월9일 죽게 되었다. 그는 거의 돈보스꼬 만큼이나 많이 무한한 존경을 받았다. 그의 가장 뛰어난 후계자는 라바글리아티 신부였다. 우니아 신부의 죽음과 같은 결과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나병 문제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 꾸준히 노력했다. 지방의 당국자들에게 후원을 받은 그는 나환자들을 위해 대단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1904년에는 나환자촌 건설을 위해 정부 위원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파타고니아에서의 진전
루아 신부의 시대에는 남아메리카의 진정한 선교사업이 큰 진전을 이룩했다. 파타고니아의 중심부를 포함한 교황 대리구는 갈리에로 주교 하에서 훨씬 더 잘 조직되어졌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 로카 장군은 갈리에로를 “파타고니아를 문명화한 사람”이라 부르며 진정으로 높이 찬양했다.
갈리에로 주교는 처음에는 파타고네스에 그리고 그 후에는 비에드마에 살았다. 파타고네스와 비에드마는 리오네그로 강의 양편 둑에 위치한 읍들이었다. 그곳에는 백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적어도 처음에는 선교사들에 대해서 전혀 감사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당시에 인디안들은 널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들을 문명화하기 위해서는 필히 그들의 오두막을 방문해야 했다.
그러나 갈리에로 주교와 그의 어씨스테트드릐 야심은 더 멀리까지 미쳤다; 그들의 영향력은 이태리 크기의 세배나 되는 전 영토에 미쳤다. 본부로부터 그들은 여행을 몹시 어렵게 만들었던 바람이나 추위, 피로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타고 여러 방향으로 긴 탐험 여행을 떠났다. 밀라네시오 신부는 11,000마일도 넘는 기록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은 식민자들과 인디안들이 살고 있는 강둑을 따라 여행했다. 주민들이 널리 흩어져 있었지만 선교사들은 다음 경작하거나 교리문답을 가르치거나 세례를 주거나, 강론을 하거나, 원주민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여행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전지역에 영구적인 선교단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느꼈다. 1888년에 밀라네시오 신부는 정부의 명을 받고 코르딜레라의 기슭에 있는 초스말알에로 갔다. 그는 노이뀌엔 강과 쿠릴레오 가의 합류점에 유리하게 자리잡은 선교부를 시작하면서 부속 성당과 작은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1년 후 살레시안들은 리오네그로강의 왼편 둑에 있는 Pringles에 자리를 잡았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뒤 갈리에로 주교는 전도를 계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곳에 학교 둘을 짓게 했다. 리미이강과 노이뀌엔 강의 합류점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로카에도 지이 지어졌다. 스테페넬리 신부는 로까에 훌륭한 “농업부락”을 건설했다. 이 시기 동안에 비에드마 에는 병원이 지어졌다. 이것은 갈리에로 주교의 훌륭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비난받았던 사제들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90년부터 1895년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많이 크리스챤센터들의 수를 늘림으로써 교황 대리구는 남북 양쪽으로 그 활동영역을 넓혔다. 북쪽으로는 바히아브란카(Bahia Blanca)시를 시작으로 하여 리오콜로라도 강 너머 팜파지대가 범위 안에 들어 왔다. 갈리에로 주교에 따르면 바히아 브란카 시는 여지껏 그 이름을 지닐 가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진 무구”함을 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85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가 그곳에 사목 방문을 갔을 때 기차로 떠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살레시안들과 살레시안 수녀들은 청소년들에 대해 그들의 사업 덕분으로 그곳에 정착하는데 성공했다. 아르헨티나의 심장부를 뒤덮고 있는 팜파(대초원)지대는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당시 그곳에는 스페인 사람들의 자손인 가우초와 최근 스페인과 독일, 러이상, 피에몬떼로부터 이주한 이민자들 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도 추장 나문쿠라에게 지도 받던 인디안들을 포함하여 겨우 25,0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General Acha와 Santa Rosa de Toay와 Victorica에 선교 본부가 세워졌다; 이 선교부들로부터 살레시안들은 각 방면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남쪽의 대리구는 광대한 지역한 포함하고 있었으나(chubut)지역에 띄엄띄엄 거주했다. 1892년에 Rawson에 수도원이 지어졌는데 Rowson에는 주민이 겨우 1,000명뿐이었다. 밀라네시오 신부는 Tehuelches족에 속하는 그 지역 인디아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살레시안들보다 먼저 그곳에 들어갔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안들은 성당과 학교들과 오라또리오와 병원을 지었다.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대단한 공헌은 살레시안들 뿐만 아니라 그 곳 사람들에게도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그 광대한 지역에서의 활동 영역을 매년 증가하는 것 같았다. 1900년까지 그 곳에는 13개의 성당과 23개의 부속 성당, 14개의 남학교 10개의 여학교가 있었다. 갈리에로 주교가 1904년 그의 새 직책 교황 대리직을 떠맡기 위해 코스타리카로 떠났을 때, 그의 선교 조직체는 아주 잘 조직되어 있었다. 갈리에로 주교의 그전 직책은 미래의 두 대리자들 vicars이 맡게 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첫 살레시안 사제인 파글리에레 신부였다. 그는 그의 개척 적인 사업을 수행했다.
최 남부에서의 진전
몬시뇨르 파냐노의 관구는 파타고니아의 남부와 포클란드 제도뿐만 아니라 티엘라 델 푸에고를 포함하고 있었다.
용기 있는 이 성직자는 1887년에 Punta Arenas에 몸소 정착하여 그곳에서 선교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Beauvoir신부는 남부 파타고니아의 산타 쿠루즈와 리오 갈레고스에서 훌륭히 일하였다. 아일랜드인 살레시안 페트릭 다이아몬드 신부는 포클란드의 스탠리항에 살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을 개종시켰다.
몬시뇨르 파냐노의 사목적 관심은 티엘리 델 푸에고에까지 확장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구입한 작은 범선을 타고 선교 여행을 계속했다. 백인에 대한 인디안들의 증오심을 생각해 볼 때 그 위험이 얼마나 컸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냐노 몬시뇨르는 인디안들에게 음식과 선물을 줌으로써 그들과 접촉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인디안들이 한마을에 모여 산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더 잘 전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Dawson섬의 산 라파엘에 있는 아라카우프 족에게 이 일을 실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곳에 필요한 것 모두, 심지어 동물까지를 실어 날라주었다. 몬시뇨르 파냐노가 칠레 정부로부터 20년 동안이나 이 섬을 양도받았다는 건 특별한 사건이었다. 1893년에 그는 이소라 그란데의 동부 칸데라라에 선교부를 설치했는데 그 곳은 오나족 인디안들을 위한 집합 센터가 되었다. 몬시뇨르 파냐노는 인디안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이 집합 센터들에 부속 성당과 학교, 진료소를 지었으며 남자들에게는 가축을 돌보는 방법을 그리고 여자들에게는 요리법과 바느질하는 법을 가르쳤다. 1899년에 살레시안들은 이소라 그란데의 칠레 지역에 있는 포르베니르 본당을 떠맡았다. 1904년에는 케이프호온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우쉬아이아 본당이 살레시안들에게 맡겨졌다. 복음화 노력에 덧붙여 살레시안들은 인디안들을 문명화시키는 데에도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브라질의 마토그로쏘에서의 선교
이 여러 선교부의 살레시안들에 의한 진보는 성청으로 하여금 살레시안들에게 다른 지역들을 맡기게끔 만들었다. 코스타마냐 신부가 1893년에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그에게는 브라질의 전 인디안들에 대한 관할권이 주어졌다.
선교를 위한 적절한 중심지를 고르는 것이 항상 우선적인 일이었다. 몬시뇨르 코스타마냐는 그 나라를 여러 차례 여행한 끝에 살레시안들은 브라질의 심장부인 마토 그로쏘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백인 식민자들이 살고 있는 쿠이아바
Cuiaba에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살레시안들은 그곳으로부터 인디안 부족에게 갈 수도 있었다. 굉장히 멀고 복잡한 길, 정글로 거의 완전히 뒤덮여 있는 지역의 해로운 기후, 그리고 인디안들의 야만적 풍습으로 인해 선교가 어려웠다.
쿠이아바에서 말을 타고 6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보로토족의 코로아도파에 속하는 인다인들이 몇 명 살고 있었다.(그들의 명칭은 왕관을 닮은 그들의 머리 모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테레짜 크리스타나 Thereza Chistina라 불리우는 식민군대에 살고 있었다.
군대 당국이 많은 진전을 이룰 수 없어 정부는 그 인디안들을 선교사들에게 인계하기로 결정했다. 몬시뇨르 라사냐는 더 많은 지원자들을 찾아보기 위해 몬테비데오로 떠나기에 앞서 몇 명을 보냈다: 몬테비데오에서 돌아오는 길에 몬시뇨르 라사냐는 목숨을 잃었다. 1895년 11월6일, Juiz de Fora 근처에서 무서운 기차 사고가 일어나 그를 포함하여 그의 비서와 4명의 살레시안 수녀들이 죽었던 것이다. 살레시오 수도회와 아메리카 선교단은 참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다행히도 다른 위대한 선교사들이 그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쿠이아바 수도원장 말란 신부와 선교관저를 책임 맡은 발쪼라 신부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말란 신부는 여러 해 동안 마토 그로쏘의 살레시안 관구를 맡아 보다 주교가 되었으며, 발쪼라 신부는 인디안들을 잘 이해하고 있던 용기 있는 선교사였다. 그는 직접 노동을 했으며 비록 결과가 신통치 않더라고 곧 원기를 회복하는 끈기 있는 사람이었다.
1901년 사소한 이유들로 인해 살레시안들을 테레사 크리스티나 식민구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희망과 공포로 뒤범벅이 된 채 발레이로 드 키마 Barreiro de Cima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그 지역의 보로로인들과 접촉했다. 한편 리오 다스 가르카스 강과 산그라도우로 강을 따라서 그리고 팔메이라스에 다른 선교 시설들이 생겨났다. 느릿느릿하게 그리고 불확실하게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선교사들에게 이러한 특별한 종류의 사도직에 대한 경험을 얻을 시간을 주었다.
에쿠아도르의 키바토족 가운데에서
1893년 에쿠아도르 정부와 교황청 사이에 맺어진 협약으로 인해 키바로족의 영토에 교황대리구가 설립되었다. 그것은 코스타마냐 신부하의 살레시안들에게 맡겨졌다. 코스타마냐 신부는 1895년 서임 후 갈리에로 주교와 라사냐 주교에 이어 세 번째의 살레시안 주교가 되었다.
그는 구알리뀌짜 Gualaguiz에 첫 센터를 세웠다. 그 센터는 문명세계의 마지막 경계지 였다. 이 새 선교의 문제성이 당장에 드러났다. 강력하고 영리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기조차 하다고 알려진 키바로 족들이 즉시 선교 건물들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코스타마냐 주교가 에쿠아도르 혁명으로 인해 그의 대리구에 대한 출입을 거절당했기 때문에 또 다른 장애가 생겼다. 그러나 그곳의 우두머리인 마따나 신부와 그의 어씨스트들은 가만히 게으르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부속성당을 짓고 또 호전적인 태도를 지닌 몇 몇 인디안들을 부드럽게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1902년 그 선교사들이 위험천만의 여행을 해 온 바오로 알베라 신부를 맞이할 수 있었을 때의 그들의 기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동년 7월에는 코스타마냐 주교 자신이 도착했다. 그는 겨우 3개월간 머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 허가는 1903년에 갱신되었다. 그 이후 코스타마냐 주교는 무려 10년간을 기다려야 했다.
아주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오랫동안 정말 신통찮아 보였다. 키바로 족은 그들의 독립을 지독히 열망하고 있었으며 일부 다처제를 실시하고 있었고 야만적인 원수 갚기를 탐닉했다. 이렇듯 많은 장애들과 싸워야 했던 선교사들은 항상 그러했듯 그들의 희망을 젊은 세대들에게 두고 있었다.
팔레스티나에서의 살레시안들
(살레시오 회보)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중요하고도 영웅적인 살레시안 선교 모험담들이 늘 성의를 다해 서술되었지만 우리는 지구의 다른 부분들에 대한 살레시오 수도회의 진출들을 간과해 버려서는 안 된다.
살레시안들이 팔레스티나에 간 것은 통상적인 순서에 따른 것이었다. 성지에는 젊은이들을 위한 복지사업이 이미 벨로니 신부에 의해 창설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근처 베티기알라 Betigiala 신학교에서 아직 매우 젊은 성서 교사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벨로니 신부는 거리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의 비참한 상태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다. 그는 1874년에 베들레험에 고아원을 열어 그 아이들을 보호하고 교육시키기로 결심했다. 그 고아원은 45명의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그는 성 가족 형제들이라 불리 우는 교구 수도회를 창설했다.
해가 감에 딸라 여러 어씨스트들이 몰려 왔기 때문에 그는 베이트게말 Beitgemal에 농업학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학교에는 1874년에 15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1886년에는 크레미산 Cremisan에 세 번째 집이 문을 열었다.
자신의 사업의 지속성을 염려하여 벨로니 신부는 1875년에, 그리고 다시 1887년에 돈보스꼬께 문의하였다. 두 번째에 성인은 아주 간단히 답할 뿐이었다; “지금은 안되고 나중에 봅시다.” 1890년에 그는 또 한번 문의했다. 이번엔 루아 신부께 였다. 그는 자기 사업을 살레시오 수도회에 통합시킬 것을 요청했다. 협의서가 작성되었고 1년 뒤에는 두 명의 살레시안들이 베틀레헴에 도착했다. 어려움이 있었으며 성 가족 형제들 몇이 그 곳을 떠났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베틀레험 집을 책임 맡고 있는 벨로니 신부가 그러했듯 살레시안들이 되었다. 1895년의 루아 신부의 성지 방문은 남아 있는 장애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96년에는 과거 벨로니 신부의 제자였던 프룬 prun신부의 훌륭한 직무 수행 덕분에 나자렛에서 새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1902년 이 집들은 살레시안 중동관구를 형성했다. 이 관구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 스미르나에 있는 이태리인 학교와 예루살렘(1904)과 아빠(1906)에 있는 수도원을 포함했다.
중국과 인도와 아프리카의 첫 공동체들
루아 신부의 시기에 살레시안들은 극동과 아프리카에도 진출했다. 1906년 베르시글리아 Versiglia 신부와 그의 동료들은 중국에 있는 마카오라는 포르투갈시의 고아원을 맡게 되었다. 살레시안들은 중국인들만을 위한 오라또리오를 갖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그들은 유럽 사람들의 냉담함에 부딪혀야 했다.
인도에서 살레시안들은 남동부 해안에 있는 탄조레 Tanjore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아 기술학교를 시작했다. 그 살레시안들 중엔 토마티스 신부와 메델레트 신부가 끼여 있었다. 1909년 살레시안들은 마드라스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미라포레에서 소년들을 위한 계획사업을 받아들였다.
1896년 몇 명의 살레시안들이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1907년에는 또 다른 그룹이 학교를 인수받기 위해 그리고 뒤에는 룬가에서 선교부를 시작하기 위해 리스본으로부터 모잠비크를 향해 출발했다.
여기에 언급된 것들은 다소 시험적인 출발이었지만 나중에는 용기를 복 돋아 주는 발전을 이룩했다.
22
돈보스꼬의 제2 제3 후계자들
바오로 알베라와 빌립보 리날디
1910년부터 1931년 사이에는 두 명의 총장이 수도회를 다스렸다. 두 사람 모두 직접 돈보스꼬를 알고 있고 또 여러 해 동안을 돈보스꼬와 함께 일했기 때문에 창립자의 직접적인 후계자들로 간주되고 있다.
바오로 알베라는 1910년부터 1921년까지 총장직을 맡았었다. 그의 재직기간 동안 수도회의 성장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받게 되어 많은 잔혹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 후 리날디 신부 하에서 다시 새로운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선교가 급속히 발전했다. 두 사람 모두 성스런 기록을 남겼다. 리날디 신부의 경우, 그 특별한 의미는 그가 죽은 뒤에야 드러났다.
1. 바오로 알베라, 1845-1921
사근사근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어린이
바오로 알베라는 1845년 6월6일 또리노와 피네롤로 사이 노네에서 비교적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7명의 자녀들 중 막내였다. 그의 전기작가들은 그가 학교와 교회 의식을 좋아하는 다소 얌전한 훌륭한 어린이였다고 전하면서 바오로의 “고상한 온순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그러한 온순성은 알베라 신부의 일생을 통해 그의 특징으로 남아 있었다 한다.
바오로 알베라는 1858년 10월에 처음으로 돈보스꼬를 만났다. 성인은 그 때 노네 본당 사제의 손님으로 가 있었다. 이 기회에 본당 사제는 13살의 이 어린 소년을 성인께 추천할 기회를 가졌다. 루아 신부가 그의 가입을 검토했으며 어린 바오로는 즉시 받아들여졌다.
바오로 알베라 자신은 10월18일에 오라또리오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여느 소년들과 특별히 다를 게 전혀 없었다. 그는 침착하고 명랑했으며 공부를 좋아하였고, 그곳의 분위기가 완전히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가 오라또리오에 가기 1년 전에 도미니꼬 사비오가 세상을 떠났었다. 그러나 도미니꼬 사비오에 대한 기억이 바오로가 좋아했던 소년들을 크게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방의 미카엘 마고네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마고네가 잠시 아프더니 1859년 1월21일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미카엘 마고네와의 친교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돈보스꼬는 마고네의 죽음을 예견했었고 그러한 예언은 큰 감동을 주었다.
오라또리오에서의 초년 동안에 바오로 알베라의 한 친구였던 율리우스 바르베리스는 바오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는 게임을 무척 좋아하며 항상 움직이고 있는 반면 또한 그는 알라소나디 신부님을 도와 드리기 위해 그분의 사무실 주위를 서성이거나 그분의 사무실에 남아 있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공부하기를 아주 좋아하며 반에서 1등이다. 그는 재능과 대단한 의지력을 가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대단한 신심을 가지고 있어서 돈보스꼬로부터 귀염을 받았다.
마오로 알베라에 대한 돈보스꼬의 특별한 애정이 오라또리오 내에 잘 알려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알베라는 분명히 적의 없이“돈보스꼬의 베냐민”이라 불리 웠기 때문이다. 6년 후 알베라 신부는 다음과 같은 추억에 젖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분의 부드러운 애정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채워주었던 그 자애 깊은 관심의 죄수였습니다.” 알베라 자신이 말한 대로, 그의 친구들도 돈보스꼬에 대해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1861년 어느 날 돈보스꼬가 고백 성사를 주는 모습을 사진 찍히기 위해 자기 옆의 기도 대에 고해사로 앉게 했던 사람으로 뽑힌 이는 바로 다름 아닌 알베라였다.
살레시안
1860년 5월1일 알베라(당시 학생이었음)는 “회의 규율들을 실천”하기 위해 받아들여졌다. 그 당시 그는 겨우 15살이었으며 아주 어리게 보였다. 1861년 10월27일 그는 성의를 입었으며, 1862년 5월14일 그는 공식적으로 서약한 22명의 첫 살레시안들 중 하나였다. 그 때부터 돈보스꼬에 대한 그의 믿음과 그의 목적은 한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1863년 가을, 그 젊은 살레시안의 생애에 첫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오라또리오를 떠나 미라벨로로 가서 그곳의 새로 개교된 학교에서 교사 겸 어씨스테트로 일했다. 1855-56학년도에 그의 매우 쾌활한 생도들 중 하난가 빨간 머리의 루이스 라사냐였다는 사실을 그는 뒤에 1910년에 브라질의 살레시안 주교의 전기를 쓸 대 기억하게 되였다. 여러 가지 직무들에 덧붙여 알베라는 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그리고 사제직을 준비하기 위한 신학 강의에 참석하기 위해 시간을 냈다. 바오로 알베라는 1862년 8월2일 카사레에서 서품 되었다. 그 날 저녁 그는 자주 그러했듯이 조언과 혹은 기념품을 받기 위해 돈보스꼬에게로 갔다. 성인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첫 미사를 드리는 기쁨을 갖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 결코 용기를 잃지 않을 은혜를 달라고 청하게,” 알베라 신부는 이 말들의 중요성을 상당히 오랜 뒤-희미할 바 없이 시련기가 닥쳤을 때-에야 깨달았다고 시인했다.
이태리와 프랑스에서의 책무들
서품을 받은 직후 알베라 신부는 또리노로 귀환되었다. 그곳의 장상은 그를 총 학생들의 지도 신부로 만들었으며 그에게 입회허가의 책임을 맡겼다. 그는 오라또리오에서 혹은 여행에서 한번 더 돈보스꼬와 함께 있게 된 것이 행복했다. 그자신의 말을 인용해 보자면 그는 “쓸모 있는 아들이 되는데 필요한 것은 모든 것에서 돈보스꼬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확신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애정과 존경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아버지라 불렀던 돈보스꼬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1871년 현재, 그의 나이 겨우26살 때에 중요한 직책이 그에게 맡겨졌다. 우선 그는 마라씨의 원장으로 뽑혔으며 뒤에 1872년에 그 수도원이 옮겨졌을 때에는 제노아 근처 삼피에르다레나의 원장이 되었다. 그의 지도하에 그 수도원은 처음에는 기술학교로 출발하여 뒤에는 중등하교 과정을 포함하는 또한 1875년에는 “나이든 성소자”들을 위한 부문을 포함하는 학교가 되었다. 1877년에는 3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알베라 신부는 자신의 재능으로 인해 학생들과 제노아 대교구에 사는 그들의 가족들에게 큰사랑을 받았다.
1881년에는 그는 그를 심란하게 만든 소식을 받았다; 그가 프랑스의 관구장으로 전임되었다는 것이었다. 돈보스꼬로부터 부드러운 꾸지람을 들은 뒤 10월에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11년 동안 (즉 1881년부터 1892년까지), 그는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은 프랑스 관구의 발전에 전념했다. 그것은 생산적인 시기였다. 수도원이 3개에서 13개로 늘어났다. 알베라 신부는 특히 새로 공동체가 세워진 파리와릴, Dinan 방문하면서 프랑스를 쭉 돌아보았다. 때로 큰 문제가 되었던 방법의 부족과 프랑스 정부의 적개심으로 인한 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안 사업은 계속 발전되었다.
니스의 Cartier신부는 알베라 신부를 “행동적인,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적 행동의 인물”이라 묘사했다. 알베라 신부의 우선적 관심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 특히 그의 보호 하에 있는 소년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협력자들의 영적 진보였다. 이것이 바로 마르세이유 사람들이 그를 선의의 뜻에서 “작은 돈보스꼬”라 불렀던 이유 중 하나였다. 1892년에 또리노로 다시 불리어졌을 때 그로서는 마르세이유를 떠나는 게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는 보네띠 신부가 죽은 뒤에 비어 있던 총 성무감 자리를 맡게 되었다. 새 직무에 익숙해지는 게 쉽지 않았다. 그가 1893년부터 쓰기 시작했던 그의 개인 노트는 직접적인 성무의 결핍이 그를 얼마나 우울하게 만들었던가를 반영하고 있다.
건강이 걱정스럽게 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피정을 실시하고 또 이태리와 프랑스 벨기에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중에 생긴 가장 중요한 일은 이미 언급된 바 있는 여행이었다. 그는 1900년에 루아 신부의 특별 대리자로서 아메리카에 갔다. 이 여행은 3년 걸렸다. 그는 튼튼한 사람 마져도 죽게 만들었던 조건 속에서 수천 마일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에서 그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몇 차례 병에 걸렸으며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다.
총장 1910-1921
바오로 알베라는 1910년 8월16일에 제11차 총회에서 루아 신부를 계승하도록 선출되었다 선거에서 그는 당시 수도회의 prefect로 있던 리날디 신부보다 약간 더 표를 얻었었다. 자신의 위험한 건강을 생각하여 새로 선출된 원장은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저는 여러분이 곧 또 선거를 치르게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바오로 아레라 총장은 결코 그렇게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살레시안들을 신심 깊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만드는 게 자신의 주요 위임사항이라 여기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체리아 신부는 믿고 있다. 알베라 신부의 관조적 정신을 알게 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며, 알베라 신부의 글들에 대한 설명 역시 체리아 신부의 견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신심”이 곧 알베라 신부의 회람장의 지배적인 주제였으며 맨 최초의 회람장 중 하나는 그것만을 다루었다. 알베라 신부는 살레시안들이 “진정하고도 심오한 신심에 의해 쇄신, 정화, 성화”되지 않음으로써 미래의 어느 날에 활동에 대한 살레시안의 강조와 그들의 “명백히 지칠 줄 모르는 열성”과 “그들의 성공을 여태껏 유지해 주었던”추진력이 쇠약해질까 봐 걱정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저자들로 훈육, 사제직, 신앙생활, 순명, 순결, 자애-이것은 모두 살레시안 가치들을 격려하는 것들이었다-등에 관한 일련의 시론을 썼다. 그는 또한 Rector's Manual의 저자였다. 그는 그 속에서 장상직에 관한 전통적인 지침을 제시했다.
알베라 신부는 그의 전임자처럼 많은 여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살레시안 가족 성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직무상 이태리 전역을 여행했으며 로마에서는 교황 비오 10세와 베네딕트 15세로부터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베네딕트 15세는 1915년에 몬시뇨르 갈리에로를 첫 살레시안 추기경으로 만듦으로써 수도회에 영광을 주었다). 1913년에 알베라 신부는 다섯 달 동안 스페인을 둘러보았다. (살레시안 회보)는 이 여행을 “대단하고도 엄숙한 승리”라고 표현했다. 그는 또한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영국, 벨기에도 방문했다. 1921년 마르세이유에서의 그의 마지막 여행 중에 그는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각처에서 사람들은 그가 돈보스꼬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기를 좋아했다. 그는 돈보스꼬의 미소와 단순성을 아주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수도회와 장상에게 심각한 시련들을 안겨 주었다. 유럽에서는 거의 2,000명의 사례시안들이 무장을 갖추었고 회원끼리 서로 싸웠다는 예도 있었다. 전쟁의 또 다른 영향은 알베라 신부의 재임 시에 총회가 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알베라 신부는 그 상황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예를 들어 살레시안들에게 군대에 있는 살레시안 형제들에게 갖은 정신적 물질적 도움을 줘야 한다고 책임을 일깨우고, 수도원들의 유지를 주장하고 피난민들이나 전쟁고아들을 직접 만나 보는 등의 일을 했다. 1916년부터 1918년 말까지 그는 매달 군인 회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막사 속에서 그리고 참호 속에서 열심히 읽혀졌다 한다. 하지만 전쟁(아메리카에 미친 전쟁의 영향과 더불어)으로 인한 손실과 전반적인 침체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오회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새롭혀진 활기로써 계속 발전해 갔다.
알베라 신부가 수도회의 우두머리로 있을 동안에는 이렇다할 만한 일이 없었다하나 알베라 총장은 확실히 살레시안 사업의 발전에 공헌했다. 예를 들어 성청의 요청을 받고 그는 까다로운 새 선교지를 받아 들였다; 1911년에는 카타냐(중앙 아프리카)를, 1904년에는 리오네르로(브라질)를, 1917년에는 쉬-쵸(중국)를, 1920년에는 그란차코(파라구아이)를, 1921년에는 아샘(인도)지역을 받아들였다. 그 어려운 기간 동안의 인원과 수단의 부족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사업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주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알베라 총장하 에서 살레시안들은 새 나라들에도 들어갔다; 헝가리(1913년Szentkereszt와 1920년 부다페스트), 독일(1916년 부르쯔부르고, 1920년 엔스도르프에 수련소, 1922년에 에센), 1921년에 중앙 아메리카와 쿠바 돈보스꼬에 의해 창립되었던 남자 수도회와 여자 수녀회 간의 공식 관계가 1917년에 회복되었으며 1920년에는 국제 살레시안 동창연맹 International Federation of Past Pupils이 창립되었다.
알베라 신부는 오랫동안 건강이 약했지만 76살까지 살다가 1921년 10월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하느님의 진정한 사람이라 기억되고 있다.
2. 필립 리날디, 1856-1931
나이든 성소자
리날디 신부는 그가 살아 있을 때에 그를 알던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그가 죽은 뒤의 사람들이 역사에 미친 그의 영향을 더 잘 평가할 수 있었던 다소 이해하기 히든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오랫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길 주저하다가 돈보스꼬의 격려를 받은 다음에야 사제직으로 나아갔다. 그는 살레시안이 되었고 결국에는 총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다. 체리아 신부에 따르면, 리날디 신부는 극도의 단순성 속에 위대한 자질들과 특별한 덕목들을 숨겼다 한다.
필립 리날디는 피에몬떼의 몬페라또에 있는 루라는 마을에서 1856년 5월28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곳에서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린 필립은 5살 때에 처음으로 돈보스꼬를 보았다. 또리노의 사도가 그의 소년 악대를 이끌고서 위풍 당당히 루에 들어왔던 것은 1861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그 날 어린 필립은 이렇게 외쳤다. “저 신부님은 주교님 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구나.”
1863년 미라벨로에서 개교했던 살레시오 학교는 루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필립의 부모들은 구식풍의 사람들이었으며 자기아들에게 성소가 있음을 간파하고서 그를 1866년에 미라벨로에 보냈다. 그러나 필립은 전혀 열성이 없었다; 그는 어씨스텐트 중 누구하고도 친히 지내지 않았으며, 공부는 골치만 아프게 할 뿐 이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집으로 돌아 와 버렸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 있었을 때 그에게 두 번 이야기를 걸어 왔던 돈보스꼬와는 계속 접촉했다. 성인은 명백히 그를 무척 칭찬했으며 다시 노력해 보라고 열심히 그를 설득하였으나 필립은 자기가 사제직, 더구나 수도생활이나 살레시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기에 9년 동안이나 설득되지 않았다.
1876년 6월22일, 돈보스꼬는 우연히 리날디 집에 가게 되었다. 그 때 필립은 스무살 이었다. 돈보스꼬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때 필립은 갑자기 자기 태도가 전적으로 바뀌었음을 알았다: “나는 그 분이 나의 모든 반론에 답해 보고 있었으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설득해 왔음을 알았다”고 리날디 신부는 후에 자신의 회고록에 써넣었다. 물론 그가 돈보스꼬께 매어 있다고 느낀 그 때부터 모든 불확실성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그는 삼피에르다레나에 있는 “나이 든 성소자”들을 위한 학교에 갔다. 그에게는 여전히 의심의 순간들과 나아가 위기의 순간들까지 있었으나 그는 그 순간들을 극복하도록 도와 준 그의 원장 알베라 신부께 감사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리날디 신부는 자기의 천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굳게 확립되어 있는, 모든 이의 친구 리날디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 들였으며 다소 놀랍게도 그의 반에서 톱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장상들은 그를 칭송했으며 그가 1879년 산 베그니노로 옮겨갔을 대 수련장은 그를 어씨스텐트로 뽑았다. 리날디는 1880년 8월13일에 서약했으며, 철학과 기술을 공부하는 동안 어씨스텐트직을 보류해 두었다.
그는 다소 놀라운 상황하에서 사제가 되었다. 그는 후에 “나는 사제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수도자로서 족했지 사제가 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오직 순명 때문에 나의 모든 성직 수업을 해 나갔고 신학 시험을 치렀으며 성직을 받아들였고 마지막에는 서품까지 받았다. 돈보스꼬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아무 날 이런 시험을 치르게. 그리고 아무 날에는 이 시험을 치르고 이러이러한 성직을 받아들이게. 그 때마다 나는 순명 했다.” 체리아 신부는 자신은 돈보스꼬에 관해 리날디 신부의 경우에서와 비슷한 순간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돈보스꼬의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리날디 시누는 1882년 12월23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리날디 신부의 개인적 체험은 곧 유리한 장점이 되었다. 1883년에 그는 처음에는 마티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또리노의 성 요한 복음사가께 봉헌된 성당 근처에서 소위 “나이든 성소자”들을 책임 맡았다. 자기자신에 대한 본래의 의혹에도 불구하고 사제직 지망자들의 신뢰를 획득하였던 그의 진기하고도 내적인 선함 때문에 그는 자기 직무를 아주 잘 수행했다. 돈보스꼬는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셨다. 그래서 리날디 신부는 매주 돈보스꼬께 찾아가 자기 수도원의 발전에 대해 말씀 드렸고 고백성사를 보았다. 또한 돈보스꼬께서도 가끔 그를 최고 평의회에 초대하셨다. 이러한 일은 다소 예외적인 영광이었다.
스페인과 또리노에서의 중직
1889년 루아 신부는 리날디 신부에게 큰 희생을 감수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참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는 스페인에 가 달라는 것이었다. 새 원장은 스페인어를 몰라 어려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 거리에 두러 싸여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규율을 다시 세우고 수도원에 활기를 불어넣고 협력자들로 하여금 그의 주장을 따르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또한 성소자들의 마음을 끌었다. 그들 성소자들 중에는 미래의 살레시오 관구장 요세 카라산쯔 Jose Calasanz도 끼여 있었다.
그의 성공의 스페인의 살레시안들에 대한 그의 지도력을 향상시켜 주었으며, 새 공동체를 세워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다. 그는 아직 일개 원장에 불과 했지만 제로나와 산탄더에 수도원들을 세웠으며, 1892년에 총장이 스페인 관구를 창설하기로 결정했을 때 누가 관구장이 되리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1892년부터 1901년까지 리날디 신부는 노련한 솜씨로 자신의 새 직책을 잘 수행했다; 통계는 그가 9년 내에 16개나 되는 사례시안 수도원을 세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원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는 가장 열성적인 성소자 수색자가 되었다. 스페인에서 돈보스꼬의 사업이 깊이 뿌리 내리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보다도 바로 리날디 신부 덕분이었다. 리날디 신부는 특히 훌륭한 스페인 사람이기도 한 훌륭한 살레시안들을 만들려 했다. 출판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그는 1895년에 Lecturas catolicas(가톨릭 문고)를 펴내기 시작했다. 그 문고는 이탈리어판의 카톨릭 문고처럼 성공적이었다. 리날디 신부는 또한 스페인에서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사업을 확장시키는데도 공헌했다.
1901년에 살레시오회의 총 경리 신부인 벨몬테 신부가 죽었다. 루아신부는 스페인의 관구장 리날디 신부의 능력을 직접 알고 있었기에 그를 벨몬테 신부의 자리에 앉혔다. 리날디 신부는 거기에 순명 하여 또리노를 떠나 1901년 4월1일에 새 직책을 맡았다.
리날디 신부는 20여 년 동안 총 경리신부로 있으면서 두 총장들의 오른팔 역할을 해냈다. 돈보스꼬가 살아 계실 때에 총 경리직을 역임했던 루아 신부는 자기의 그러한 경험을 되살려 리날디 신부가 순조롭게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러나 알베라 신부 때에는 알베라 신부나 리날디 신부 양편 모두 좋은 뜻을 가지고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리날디 신부는 극히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인간이었던 반면 알베라 신부는 다소 사색적이고 머뭇거리는 유형이었기 때문에 일이 아주 잘 되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날디 신부는 총장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을 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돈보스꼬의 후계자들의 그늘 속에서 경리 즉 양심적이고 유능한 어씨스테트로 사는 것에 만족해했던 그는 곤란한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었던 능력 때문에 큰 존경을 받았다. 바르베리스 신부는 실제적 정신과 쾌활성과 적절한 결합은 모든 문제의 정신적이고도 조용한 해결을 보증해 주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리날디 신부는 창의성도 부족하지 않았다. 바라쩨 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반격을 시작했던 사람은 바로 그였다. 리날디 신부는 회의를 장려하고 친목회들을 조직하는 등 협력자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동창회를 조직하자는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고 1911년의 국제 회의도 그의 발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또리노에 있는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성당 앞 광장에 돈보스꼬를 기리어 기념상을 세우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 일을 끝까지 해 낸 사람은 바로 리날디 신부였다. 1920년 남녀 동창들과 협력자들의 모임에서 기념비의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그 장대한 때에 그 계획 전체를 뒤에서 도맡아 진행했던 리날디 신부는 군중들 속에 섞여 한 평범한 구경꾼으로서 그 식을 지켜보았다 한다.
리날디 신부는 자기 직책의 근본 의무들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몇 가지 다른 활동들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는 고백신부로서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서 매우 쫓기는 몸이었다; 그는 강론 내용을 기억하기가 몹시 어려웠지만 강론을 거절해 본적이 없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그는 포글리쪼 신학교의 정규 회의에 나갔다. 우리는 살레시오 수녀들과 소녀들 가운데서의 그의 위대한 사도직에 대해서도 잊지 않아야 한다. 발도꼬의 수녀회 오라또리오에서는 리날디 신부의 탁월함과 사회적 가족적 문제들에 대한 그분의 주의가 크게 평가되고 있었다. 리날디 신부는 몇몇 어씨스텐트들과 함께 1917년에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보호 하에 세속 속에서 살레시안 사업을 해 나갈 여자 평신도회를 창설했다. 오늘날에는 돈보스꼬 후원자들이라 알려져 있는 이 회는 1978년 교황청으로부터 재속회로 승인을 받았다.
총장 1922-1931
1910년에 거의 총장에 선출될 뻔했던 리날디 신부는 알베라 신부가 죽은 뒤인 1922년 5월24일에 아무 어려움 없이 총장에 선출되었다. 어떤 살레시안들은 교육을 덜 받기까지 한 사람이 선출되었다는 것에 대해 불끈 화를 냈다 한다.
9년간의 재직기간 동안 리날디 신부는 전쟁의 결과에 직면하여 수도회에 봉사하는 데 완전히 전념했다. 비참한 전쟁은 끝났고 그는 살레시오회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살레시안수가 6,000명에서 10,000명으로 늘었고 수도원이 250여 개나 새로 늘어났다. 이제 그에게 책임 지워진 거대한 가족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리날디 신부도 여행을 시작했다. 로마에서 리날디 신부는 비오 11세께서 살레시안들과 리날디 신부 자신에 대해 매우 호의를 가지고 계심을 알았다; 그는 볼로냐와 트리에스테, 시실리에로 갔다. 1925년 중부 유럽을 방문하는 중에 리날디 신부는 폴란드에서 Hloncl 신부에서 잘 조직된 무수한 협력자들과 더불어 12개의 공동체가 번창 일로에 있음을 보았다. 비엔나에 머무른 후 헝가리에로 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6개의 살레시안 수도원들이 있었다. 부다페스트로 가기 전 Szentke reszt에서 리날디 신부는 16명의 수련자들의 착복식을 거행했다. 비엔나로 되돌아 와서 독일을 계속 둘러보았고 엔스도르프에서는 63명의 또 다른 젊은이들의 착복식을 주재했다.
1926년에 리날디 신부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특별히 마르세이유를, 그리고 Sainte-Marguerite에 있는 수녀들의 수련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나서 계속 스페인-이제는 완전히 발전되어 52개나 되는 수도원을 가진-에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전통적인 매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마드리드에서는 알폰소 13세 왕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전임자들처럼 리날디 신부 역시 돈보스꼬의 선교정신을 이어받았다. 어느 날 성인은 그에게 리날디 신부 자신이 선교사로 가지는 않을 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선교지로 보낼 것이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선교책임을 맡은 최고 평의회원을 역임한 바 있는 총 경리 리칼도네 신부로부터 대단한 지지를 받은 리날디 신부는 수도회의 선교 활동을 크게 지원했다.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선교활동을 강조했으며 살레시안의 공헌은 아주 대단했다. 1922년에 리날디 신부는 미래의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브레아 Ivread에 갈리에로 추기경 회관을 열었다. 그 이듬해에 이미 160여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1925년에는 페난고 Penango에, 1926년에는 포글리쪼에, 그리고 Gaeta, 바뇨로 Bagnolo, 꾸미아나(수사들을 위한 것임), 또리노(Robaudengo)에 세워진 이런 유형의 다른 기관들도 똑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스페인에는 1928년 Astudillo에 그리고 이어 1929년에는 영국 Shrigley에, 1936년(리날디 신부 시대 이후)년에는 프랑스의 Coat-an-Dauh가 창설되었다. 사실 선교사 지원자들이 그렇게 몰려들 수 있었던 것은 1923년 살레시안 선교청년회에 의해 시작된 정기 간해울 Gioventu
missionaria와 1925년 바티칸과 이듬해 또리노에서 개최되었던 missionary exhibitions선교 대회의 도움이 컸다. 그러므로 살레시안 선교단이 또 다른 커다란 발전기를 향유했다는 건 전혀 의아스런 일이 아니다. 인원이 증가하였고, 1926년에는 브라질의 포르토 벨호 Porto Velho, 1928년에는 인도의 마드라스와 크리쉬나가르 Krishnagar, 1928년에는 일본의 미야사끼, 1930년에는 시암 Siam의
Ratburi 라트부리가 새 지역들로 받아들여졌다.
총장이 되자마자 리날디 신부는 회원들에게 신앙에 기초를 둔 사도직을 실천하기를 강력히 권고하면서 계속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체리아 신부는 리날디 신부-살레시안 총장은 베네딕또 15세의 교령에 의해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사도적 대리자가 되었었다-가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 사이에서 수행했던 일에 대해 전기문의 한 장 전체를 할애할 수 있었다. 리날디 신부는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창립 50주년 기념과 1922년에 있었던 그들의 총회에 활동적으로 참여했으며 살레시안 수녀들의 선교신장을 격려하기도 했다.
아주 실제적인 인물로서 상식과 조용한 기질을 부여받았던 리날디 신부는 그가 우연히 접한 독창적인 생각들에 대해서는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지식과 특별히 예방교육제도의 실천을 통해 회원의 종교적 도덕적 형성”을 도모코자 했던 일종의 교사들 사이에서의 가톨릭 액션 단체 였던 돈보스꼬의 Don Bosco Union를 격려했다. 이 회는 몇몇 이태리 도시들에로 퍼졌다. 리날디 신부는 또한 또리노에 있는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대성전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던 맨 최초의 인물이었다-그 생각은 처음에는 다소 경솔한 것으로 생각되어 나이든 갈리에로 추기경에 의해 반대되어졌다.
리날디 신부의 원장직의 절정은, 아니면 혹은 그가 관계했던 한에 있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의심할 바 없이 돈보스꼬의 시복 이었다. 몇 차례의 연기 끝에 1929년 6월2일에 시복식이 있었는데 그때 로마의 군중들의 열광과 열정은 그가 기대했던 바 이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새 성인이 그 전년에야 라테란 조약으로 구체화된 교회와 이태리 정부와의 “화해”를 바랬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리날디 신부는 생전에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던 것 같다. 리날디 신부는 본래의 그의 경향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좋아서 될 수 있는 한 뒷전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의 자애와 단순성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의 얼굴 표정은 너무도 아버지다워 많은 사람들에게 돈보스꼬를 연상시켰다. 성체와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그의 헌신은 유명했었다. 그가 죽은 쥐 그의 미덕에 대한 명성이 널리 퍼져 1947년에는 그의 이름이 시성을 위해 제출되었다. 이는 겸손하고 겸허한 동시에 또한 아주 유능했던 이 사제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23
성 요한 보스꼬의
제4부 제5부 후계자들
베드로 리칼도네와 레나로 찌끼오띠
베드로 리칼도네(Peter Ricaldone)와 레나토 찌끼오띠(Renato Ziggiotti)
살레시안 사업의 창시자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실제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적어진다. 1926년에는 갈리에로 추기경이 죽었다. 첫 세대 중 마지막 생존자는 입으로 뿐만 아니라 산문과 시로써 돈보스꼬에 대한 추억을 생생해 전해 주던 유쾌한 인물 프란체시아 신부였다. 그는 1930년에 9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로는 돈보스꼬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리날디 신부의 후계자가 바로 이 경우였다. 리날도네 신부가 살아 생전의 돈보스꼬를 보았던 건 사실이나 1952년에 선출된 찌끼오띠 신부는 새 세대의 등장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안의 활력은 돈보스꼬의 제4, 5 후계자들 하에서도 계속 모든 관찰자들을 놀라게 했다. 풀톤 쉰 Pulton Sheen 주교는 이렇게 말하였다: “살레시안들은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한 추진력은 매우 자주 그러했듯 총장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여기에서 그들의 약력만을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가 제시하는 약력은 1932년부터 1965년 사이에 수도회의 선두에 서 있었던 그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보여줄 것이다.
1. 베드로 리칼도네 1870-1951
준비기
베드로 리칼도네는 1870년 7월27일 미라벨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7년 전에 루아 신부는 미라벨로에 있는 살레시안 학교를 지도하게 되었었다. 베드로의 아버지는 인격자이자 상식을 지닌 모범적인 농부로서 미라벨로 시의 시장이 되었었다. 어린 베드로의 팔팔한 성미는 때로 그의 어머니의 걱정을 부러 일으켰으며, 그는 자기 집 주위에 있었던 느름 나무를 한 그루도 빼지 않고 모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알라씨오에 있는 살레시안 학교로 보내졌다가 후에는 보르고 산 마르티노에 있는 살레시안 학교로 갔다. 베드로는 또리노에서 다시 두 번째로 돈보스꼬를 보기 전 그곳에서 개인적으로 돈보스꼬와 이야길 나누었다. 신학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카살레 교구신학교에 있었던 걸로 미루어 보아 그는 살레시안이 되길 주저했던 것 같다. 그 단계에서 그는 살레시안들에게 돌아와 1889년에는 발사리체에 있는 수련소에 들어가 1890년 8월23일 날 그곳에서 종신허원을 했다.
그로부터 한달 후 그는 우트레라의 선생 겸 세빌랴의 신학생으로서 스페인에 갔다. 1892년에 돈 페드로-그는 이렇게 불리 웠다-는 그곳의 오라또리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1893년 5월 27일 사제로 서품 되었으며, 단지 1년 후에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부속기술학교를 세움으로써 그곳을 서둘러 발전시켰다.
1901년에 31살의 나이로 그는 세빌레의 관구장이 되었으며 관구장으로서는 그는 “그의 특유의 장점이 되었던 조직정신과 조직열”을 발전시켰다. 그의 관구내의 살레시안 수는 86명에서 184명으로 증가하여 그는 많은 새 수도원을 열 수 있었다. 1903년에 그는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출판분야에 관심을 돌렸다. 그 해에 그는 새 농업기술들을 보급시키기 위한 전집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Bibilioteca agraria Solariana로 불리 웠으며, 1928년 또리노 박람회에서 1 등상을 타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28년까지 그 전집은 150권까지 출판되었으며 모두 거의 100만 부 가량이 발행되었었다. 그는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오 10세의 성 음악 개혁에 영향을 준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1898년에 루아 신부는 그를 남미에 있는 수도원들을 방문키 위한 그의 개인적인 대표로 파견했다-그 여행은 1년도 넘게 걸렸으며 티엘라 델 푸에고를 마지막으로 해서 끝냈다.
남아메리카에서 돌아오자마자 알베라 신부는 최고 평의회의 고문으로서 기술학교들을 책임 맡게 하기 위해 그를 또리노로 불러 들였다. 베드로신부는 1911년부터 1927년까지 대단한 창의력을 가지고 그 직을 수행했다. 베드로신부는 기술 학교들의 프로그램을 새로운 요구에 맞게 조정했으며, 혼자서 혹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빌어 이론과 실제에 대한 소책자들을 저술했다. 그는 살레시안 인원을 훈련시키는 것, 즉 수사들을 잘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였다. 살레시안 학교들의 발전을 증진시키고 그들의 목적이 더 잘 알려지게 하기 위해 그는 매년 “기술교육 instinctive professional”전시회를 조직했다. 이 정력적인 고문에 의해 자극을 받은 살레시안들은 처음에는 지역 전시회에 다음에는 국제 전시회에 점차 성공적으로 참여했다. 예를 들어 1914년 라이프찌히에서 있었던 국제 서적 전시회에서는 제본과 석판인쇄에 관한 살레시안 전시물들이 거의 42개나 되는 진열대를 차지하여, 그 결과 명예 훈장을 수상했다.
여행들은 살레시안 세계에 대한 리칼도네 신부의 지식을 완성시켜 주었다. 알베라 신부에 의해 파견된 그는 1911-1912년에 북미와 중미를 방문했다. 1919년에는 동부 지중해와 이집트, 팔레스티나에 갔다. 다른 개인적 사명들 때문에 근 유럽의 몇 군데를 방문하기도 했다.
1922년 총회에서 prefect general로 선출된 그는 리날디 신부의 오른팔이 되었으며 리날디 신부가 총장으로 재직했던 기간 내내 그와 함께 나아 있었다. 이 시기에 관해 체리아 신부는 “그의 자연적인 창의력은 명령을 수행하는 것으로만 만족될 수 없어 새 길들을 모색했다”고 지적했다. 총장과의 동의하여 리칼도네 신부는 바로 선교 사업 속에서 자신의 재능의 배출구를 발견했다. 리날디 신부는 발기자 였으며 리칼도네 신부는 바로 그 일을 행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1926년 발도꼬에서 열린 선교대회 missionary exhibition의 책임자였다. 1926-27년의 극동 방문의 특별 방문객으로 뽑힌 그는 인도, 일본, 타이, 버어마, 중국에서 살레시안들을 만났다. 이 방문중에 리칼도네 신부는 많은 위험을 겪었다. 돌아 오자마자 그는 특별 센타 들에 있는 미래의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재원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막대한 부분의 “선교 십자군”을 출범시켰다.
1932년에 그는 만장일치로 리날디 신부의 뒤를 잇도록 뽑혔다. 이제 살레시오 수도회의 선두에는 그가 방문했던 세계의 주요 지역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진 실제적인 인물이 서게 되었다.
총장으로서의 리칼도네 신부의 사업, 1932-1951
새 총장 직무는 거의 루아 신부의 직무에까지 연장되는 19세기에까지 이르렀다. 알베라 신부의 시대에서처럼 수도회의 국제적 강화를 시련에 빠뜨린 소름끼치는 전쟁(1939-1945)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칼도네 신부가 재직하고 있던 동안의 무수한 사업들과 성공이 사람들이 주목을 끌었다.
리칼도네 총장 초기에 돈보스꼬가 성인품에 올랐다. 또리노의 사도의 대단한 찬미자인 비오 11세는 구원의 대사의 해가 끝나는 1934년 4월1일 부활절에 시성식을 가짐으로써 그 시성식이 특별한 주목을 끌게 하고 싶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 든 10만 명 가량의 인파가 새 성인을 환호키 위해 로마에 운집했다-물론 젊은이들이 그들 가운데서 가장 열광적이었다. 다음 날들에도 교황과 이태리 정부, 로마 사람들에 의해 성 요한 보스꼬에게 특별한 영광이 바쳐졌다. 또리노 시에서는 4월 18일 120여명의 고위 성직자들이 돈보스꼬 성인의 유해를 따라 시가 행진을 하는 가운데 새 성인을 환호하였다.
아주 많은 곳들에서 축하식이 열렸다. 런던에서는 성 요한 보스꼬의 열애 가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성당을 찾을 수 없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총 대주교와 성당이 사용되어져야 했다; 비엔나의 50개 본당들과 밀라노의 64개 본당에서는 돈보스꼬의 영광을 기리어 triduum이 바쳐졌다. 이 시기 동안에 돈보스꼬 전기들이 무수히 많이 씌여 졌으며, 통계는 성소자들이 대단히 많이 증가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리칼도네 신부가 이 대단한 사건을 준비 조직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음을 추론하기는 쉬운 일이다.
리칼도네 총장은 다른 살레시안들의 시복 시성과정을 지켜보았다; 도미니꼬 사비오의 시복 운동 매우 어려웠지만 마침내 성공적으로 끝맺어져 1950년 3월 5일에 시복식이 행해졌다. 리칼도네 총장이 재직하던 마지막 달 동안에 1951년 6월24일에 마리아 마자렐로가 성녀로 선포되었다. 교황 비오11와 비오 12세 성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리칼도네 신부로 하여금 이 까다로운 일들을 달성할 수 있도록 그를 크게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임자들과는 달리 리칼도네 신부는 총장으로서보다는 특별방문객으로 더 많은 곳을 방문했었다. 리칼도네 총장은 방문 업무를 그의 prefect General인 베루띠 신부에게 맡겼다. 신경통과 심장병 때문에 긴 여행이 어려웠으며 전쟁 중에는 전혀 여행이 불가능했다 그는 비록 또리노에 어울려 있었지만 그의 지시는 각지, 특히 이태리내의 각지로 퍼졌다. 그의 지시에서는 매우 중요한 다음 2가지 점들이 강조되었었다: 젊은이들의 크리스챤 교육과 살레시안들의 종교적 전문적 훈련
종교교육과 살레시안 영성
교리 교육과 종교교육을 보급시키는데 열성적이었던 리칼도네 신부는 종종 가톨릭적 환경 내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무지에 대해 구제책을 제공하려 열망했지만 살레시안적 사명을 명백히 완수하길 원하기도 했다.
1935년에 provido Sane교령에 따른 교리교육의 자각과 발맞추어 리칼도네 신부는 “교리교육 캠페인”을 창안했다. 전쟁 중인 1941년에 리칼도네 신부는 이미 다른 문제들이 원이니 되기도 했지만 돈보스꼬가 갈레리 소년에게 교리교육을 시켰던 일의 100주년 기념식을 준비했다. 1938년부터 1940년 사이에 살레시안 인쇄소 Salesian Institute of Graphic Arts라고 불리우는 위풍당당한 건물이 돈보스꼬의 출생지에서 가까운 돈보스꼬 학교 Colle Don Bosco에 세워졌다; 그것은 후에 Christian Doctrine Bookshop 크리스챤교리 서원의 본부가 되었다. 리칼도네 시누는 수도회와 교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살레시안 교리 센타 Salesian Catechetical Center를 설립했다. 리칼도네 신부 자신이 몸소 전문가 집단과 24명의 사제들로 구성된 집단의 수뇌가 되어 서적과 그림, 광고지 및 다른 출판물들의 출판 편성을 책임 맡았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적으로 800만 부를 발행한 Lux(빛)이라 불리우는 80권의 전집을 출판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집집마다 거리거리마다 500만 부에 이르는 광고지들이 배포되었다. Catechesi, Teatro dei giovani, Voci bianche와 같은 여러 가지 다른 잡지들도 나왔다. 10년 내에 살레시안 교리 센타 에서는 100여 차례의 교리 회의와 30여 차례의 전시회 exhibition가 열렸다. 리칼도네 신부는 주기 직전에 Colle Don Bosco의 살레시안들이 만들어 낸 칼라필림을 치하할 수 있었다.
살레시안들의 종교적 직업적 훈련 분야에 있어서 리칼도네 신부는 완고했으며 때로 도도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를 고무시켰던, 그리고 그가 전하려 했던 정신은 1936년의 잘 알려진 그의 기다린 회람장의 제목 속에 담겨 있다; “성 요한 보스꼬께 대한 충성.” 회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제가 돈보스꼬께서 행하셨던, 혹은 돈보스꼬께서 말씀하셨던 것 중 하나라도 바꾸려 한다면 저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게 될 것입니다. 열성을 다하여 돈보스꼬의 정신과 전통을 지키도록 합시다.”
방법상의 문제들과 조직상의 문제들은 특히 젊은 살레시안들의 훈련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저학년 신학생들과 수련자들, 신학교의 철학 신학 과정, tirocinium, 수사들을 위한 상급 코스 등의 살레시안 형성에 있어서 여러 가지 단계들에 대한 지침과 규범들로 꽉 채워진 기다린 회람장들이 또리노로부터 나왔다. 이러한 지침들은 1938년의 총회에서 정리되었다. 리칼도네 시누 덕택에 쿠미아나와 (Cumiana) 레바우덴고에 있는 학교들과 Colle Don Bosco는 수사들을 위한 상급 훈련 센타가 되었다. 1940년에 리칼도네 신부는 또린오의 크로체따 Crocetta에 있는 신학부가 Salesianum지를 그 특별 기관지로 가진 pontifical Salesian Athenaeum으로 승인 받는데 힘이 되기도 했다. 교회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는 Corona Patrum salesiana라 불리 우는 교부들에 대한 간행문을 시작했다.
한가지 더 지적해야 할 점은 수도원들과 관구들에 대한 정기적인 직무 검토이다. 교회법적인 방문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1939년의 그의 편지는 전례상의 문제들(liturgical matters)에 대한 특별한 강조 점과 놀랍도록 많은 세부사항으로 이뤄진 일련의 규범들을 포함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 리칼도네 신부의 걱정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의 정확하고도 기술적인 서한들 속에서는 회람정서와 공문서들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논의되었다.
리칼도네 신부의 저서는 총장의 직무를 감안해 볼 때 새로 놀랍도록 많았다. 그의 후계자는 리칼도네 신부는 실제로 저술 때문에 책상에 얽매어 있었다고 전한다. Formazione Salesiana라 불리 우는 리칼도네 신부의 전집은 14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성과 살레시안 교육 방법을 다루고 있다. 그는 주기 직전에 그의 걸작중 하나인 Don Bosco educatore의 마지막 줄들을 썼다.
리칼도네 신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1940년 6월1일 그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 때에 그의 개인적 슬픔과 당황을 표현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큰 비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도원들의 파괴와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 이룩되었던 많은 사업들의 붕괴와 분산, 그리고 이 소름끼치는 재난에 붙들려 죽어간 많은 회원들의 죽음까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1942년 11월20일 전쟁의 파괴가 점점 극심해져 또리노에 있는 오라또리오조차 파괴되었을 대 리칼도네 신부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베끼의 언덕에 돈보스꼬의 영광을 기리어 “성전”을 짓겠다고 맹세했다. 전쟁은 그렇다 하더라도 살레시안들은 또한 맨 처음엔 스페인에서, 그리고 나선 동구와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 1951년의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리칼도네 신부는 1900명이나 되는 살레시안들이 추방되거나 망명 중에 있거나 감옥에 갇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기쁜 일들도 있었다. 이러한 시련들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오 수도회는 계속 발전을 거듭했다. 1947년에 총회는 전반적인 재생을 확인했다. 1950년에 살레시안들은 이미 15,000명에 달했으며 1,000개도 넘는 수도원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1951년 19년간의 재직 끝에 리칼도네 신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수도회가 큰 은혜를 입은 위대한 장상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돈보스꼬의 처음 네 후계자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띠었다: 규칙자 루아신부; 신심가 알베라 신부; 아버지 리날디 신부; 사업가 리칼도네 신부, 리칼도네 신부는 특별한 정력과 지력 및 사람들을 활동하게 만들었던 조직 감각을 지녔었다. 어떤 사람은 리칼도네 신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분은 단단한 손과 조용한 마음을 가지고 다스리셨다.” 리칼도네 신부는 비타협적인 성품을 지녔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친절했으며 경청해줄 줄 알았다. 그 분은 자기의 책임을 의식하고 있는 사제였으며 그의 후계자 찌끼오띠 신부가 강조하기 좋아했던 아량을 보여줄 줄 아는 열렬한 살레시안이었다.
2. 레나토 찌끼오띠(Renato Ziggiotti)
리칼도네 신부의 후계자는 그가 죽기 1년 전에 그의 prefect general로 뽑았던 사람이었다. 이리하여 찌끼오띠 신부는 돈보스꼬의 다섯 번째 후계자가 되었으며 13년 동안 수도회를 이끌었다. 그는 피에몬테주 출신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던 살레시오회의 팽창을 의미한다.
레나토 찌끼오띠는 1892년 10월9일 파두아 지방의 캄포도로에서 태어났다. 7살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에스테에 있는 살레시안들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레나토는 후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저는 철들 나이 대부터 살레시안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첸찌 Vicenza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가라는 그의 본당 신부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레나토는 살레시안들의 수도 생활과 학문적 사업에 매력을 느껴 살레시안들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함께 그는 음악과 극장에 대한 그의 취미를 만족시킬 수 있었고 또한 대단히 성공적으로 체육훈련도 할 수 있었다.
1908년에 그는 포글리쪼 Foglizzo에 있는 수련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으며, 1909년 9월15일에 그는 루아 신부 앞에서 수도서약을 했다.
그후 레나토는 맨 처음 탈사리체에 가서 그곳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일요일에는 발도꼬에 있는 오라또리오에서 소년들에게 봉사했다. 1912년 그는 그의 실제 훈련을 위해 혹은 tirocinium을 위해 베로나에 파견되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찌기오띠는 1915년 6월에 소환되었다. 그는 결국 포병 중위가 되었는데 1917년에 군대에서 부상당하여 병원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다시 참호로 되돌아갔다가 1919년 4월에야 대위로 제대했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파두아 대학교에서 문학 학위를 얻었으며 1920년 12월8일에 사제로 서품 되었다.
찌끼오띠 신부는 매우 빨리 승진했다; 32살의 나이로 그는 포르데노네 있는 살레시오 수도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이 학교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이 시설을 급속히 발전시켰던 많은 특별 건물들의 축조를 지휘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젊은 사제의 생활이 바로 그 당시 다른 방향을 취하려 했었다는 점을 지적할까 한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를 매우 열망하여 1917년에는 첫 신청서를 제출했다. 전쟁 중에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매년 요청서를 갱신했다. 사실 그는 세 번이나 선교사 명단 속에 뽑혔었다; 1921년에 그는 에쿠아도르에 갈 뻔했다: 1923년에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킴버레이 Kimberley로 갈 뻔했으며 1924년에는 일본에 가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의 출발을 막는 일들이 일어났다.
1931년에 리날디 신부는 레나토를 중앙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했다. 그 관구는 1926년에 설립 되었으며 주로 살레시안 지원자들과 선교생활 지원자들의 교육을 위한 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찌끼오띠 신부는 4년 간 열심히 일 한 뒤 다음에는 시실리의 관구장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겨우 2년간 머물렀다. 1937년에 그는 교육 담당 prefect general이 되기 위해 최고평의회로 불리웠으며, 그는 제15차 및 16차 총회 때에 교육 당담 prefect general로 비준 받았다. 리칼도네 신부의 지도하에 그는 철학연구와 신학 연구를 조직화했으며 수도회 학교들의 발전을 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그에게는 다소 특별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1942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또리노가 심히 폭격을 받는 동안 찌끼오띠 신부는 당장 공습 당한 지역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혹은 방화지역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는 제1원조 단체의 장으로서 용기를 보여 주었다. 1942년 12월 어느 날 밤에, 그는 옛 오라또리오 도서관이 화형에 휩싸인 것을 발견하고서 여러 장서들뿐만 아니라 열려 잇는 창문을 통해 위층에 있는 돈보스꼬의 방들을 구했다.
1950년 5월1일 수도회의 prefect general이던 베루띠 신부(많은 사람들은 그가 다음 총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가 세상을 떠났다. 리칼도네 신부는 찌끼오띠 신부를 베루띠 신부의 후임으로 선출했는데 이로써 찌기오띠 신부는 회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었다.
1952년 리칼도네 신부의 후계자를 선출키 위해 총회가 열렸다. 절대 다수가 찌끼오띠 신부에게 표를 던져 당장 동의가 이루어졌다.
찌끼오띠 신부의 총장직 1952-1965
그의 방문들
루아 신부의 전통으로 되돌아 가 새 총장은 선출 후 당장 일련의 긴 여행들을 시작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그의 선임자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달성했는데 우리는 그 때부터 여행 조건이 상당히 변화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총장이 아메리카의 극동을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돈보스꼬의 대담한 꿈들이 실현되는 것 같은 상황들이 몇 번 있었다.
자연히 찌기오띠 신부의 첫 방문지는 이태리내에 있는 살레시안 수도원들이었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살레시안들을 형성시키는 집들에 편중되었다. 1952년 11월부터 1953년 1월 사이에 찌끼오띠 신부는 북부 이태리에 있는 수련소들과 신학교들을 모두 방문했다: 그 뒤 그는 중부와 남부에로 가 그 기회에 다른 많은 수도원들도 짧게 방문하였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는 자신이 몸소 다음과 같이 표현했던 매우 충일한 기운을 발산시켰다; “돈보스꼬의 모습은 살레시안들과 크리스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사업을 통해서, 그리고 과거의 학생들과 협력자 및 무수한 친구들에 의해 퍼진 명성을 통해 세계 속에서 계속 중요하게 살아 있으며 증가되고 있다.”
1953년에 찌끼오띠 신부는 여러 축일과 살레시안 기념일을 이용하여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을 방문했다: 그 해 10월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첫 방문들이 외국의 관구들과 수도원들을 방문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꾀하게 했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1954년에 그는 유럽을 횡단했다;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델란드, 영국, 아일랜드 떠나기 전에 그는 살레시안 가족에게 생각과 기도 속에서 그와 함께 동행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또한 그 방문을 일종의 공동 순례로 생각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먼저 이집트에로 가서 그곳에서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 있는 수도원들에 머무른 다음 성지에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다마스커스, 알레뽀 Aleppo, 베이루트, 테헤란에로 갔다. 중동의 이 나라들에서 찌끼오띠 총장은 살레시안들이 놓여 있는 복잡한 상황들을 직접 목격했다. 그 다음에는 인도에 갔다. 그가 얘기했듯이 그는 “카리키 Karachi로부터 봄베이로, 고아로부터 벨로레 Vellore와 마드라스로, 캘커타로부터 크리쉬나가르로, 실롱, Shillong으로부터 디브루가르 Dibrugarh로 소나다로부터 에베레스트 산 기슭에로 그리고 브라마푸트라와 갠즈스강에로 여행했다.” 마드라스에서 찌끼오띠 신부는 그 나라에서의 살레시안 사업의 개척자인 마티아스 대주교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마드라스의 많은 성소자들은 찌끼오띠 신부로 하여금 미래를 낙관하게 했다. 찌끼오띠 신부는 캘거타로부터 비행기로 미얀마의 랭군과 만달라이에로 그리고 살레시안 교육 방법이 그 나라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타이의 방콕과 반퐁 Ban-pong에로 갔다.
홍콩과 마카와에서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비크리스챤들조차도 크리스챤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불행히도 그는 중국 본토는 방문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상당한 후원 하에서 살레시안 사업이 시작되었던 필리핀에로 갔다. 일본에서는 그는 그 나라에 처음으로 갔던 살레시안 몬시뇨르 지마띠 신부의 금경 축을 도왔으며 국영 라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거대한 여행의 마지막 지점들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캐나다이다.
여섯 달 만 에 또리노로 돌아오자마자 찌끼오띠 신부는 1956년의 또 다른 세계 일주를 계획했다. 이번에는 그는 중앙 아메리카의 안틸레스와 멕시코 아르헨티나에 갔다. 아르헨티나는 “돈보스꼬의 꿈속에 나온 땅”이었으며 그러했기에 또한 특별히 찌끼오띠 신부의 관심을 끄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정부의 공식 손님으로서 넉 달을 보냈다. 오나스 인디안들 역시 그에게 명예 추장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그들의 존경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이 여행에서 돌아와 찌기오띠 신부는 다음과 같이 시인했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그리고 네기 느꼈던 모든 감정들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하였다.”
교황 비오 12세와 요한 23세 성하께서 가톨릭인들의 관심을 라틴아메리카로 돌리고 있는 중에 찌끼오띠 신부는 그곳을 두 번이나 더 방문했다. 1957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그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쿠아도르, 브라질에 있는 수도원들을 방문했다. 1960년에 그는 칠레, 페루, 볼리비아, 파라구아이, 우루구아이에 갔다. 이 남미 여행들 중에 그는 500여 살레시안 수도원을 방문했으며 거의 그 만큼의 살레시오 수녀원을 방문했다. 그 대륙에 대한 그의 마지막 기억들 중 하나는 아마 미래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의 살레시안 수도원의 낙성식이었을 것이다. 방문은 당장 효과를 낳았다. 전쟁이 끝남과 더불어 살레시안들은 돈보스꼬의 후계자를 중심으로 하여 살레시안 일치에 주력했다. 가는 곳마다에서 대단한 관심을 보여 주었고 그는 따뜻하고 열광적인, 그리고 때로 압도적이기까지 한 환영을 받았다.
사업의 조직화
찌끼오띠 신부는 또리노에서는 리칼도네 신부의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제17차 총회를 기초로 하여 그는 살레시안 형형을 위한 집들의 적당한 운영을 추구했다. 하나의 특별한 동기로 인해 그는 이 일을 추진하게 됐다: 즉 보다 많은 살레시안들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방문 덕분에 이를 아주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찌끼오띠 신부는 신심단체들에 대한 사업을 격려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방교육제도의 핵심 부분을 이루고”있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경우 그는 서한으로써 그에 간여하기도 했다. 신심단체는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찌끼오띠 신부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신심단체의 회원들은 가톨릭 활동을 위해 소년들을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었다. 결과적으로 신도회들은 회의와 모임, 재검토 등을 통해 쇄신되었으며, 1954년 6월 12일 도미니꼬 사비오의 시성을 계기로 더욱 고무되었다. 이태리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에서 소년 성인의 영광을 기리어 축제가 열렸다. “도미니꼬 사비오 클럽”이 생겨났으며, “도미니꼬 사비오의 친구들”과 Pueri cantores는 사비오를 그들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찌끼오띠 원장 신부의 재임기간 동안에는 여러 가지 엄숙한 의식들이 행해졌다. 1959년 5월 로마의 cinecitta에서 새 성당을 돈보스꼬께 봉헌했던 경우엔 특별한 축하식이 행해졌다. 아주 특별한 허가로 돈보스꼬의 유해를 담은 납곱 단지가 또리노로부터 옮겨져 왔다. 5월3일에 교황 요한 23세 성하께서는 10만여명의 군중들 앞에서 청소년들의 사도를 극구 칭찬하셨다. 찌끼오띠 신부는 베끼의 언덕에 성전을 세우겠다했던 그의 전임자의 맹세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기도 했다. 1962년에 요한 23세는 산티아고(칠레)의 살레시안 대주교 몬시뇨르 Raul Silva
Henriguez를 추기경으로 봉하였다. 찌끼오띠 신부는 교황창립 살레시안 대신학교(the pontifical Salesian Athenaeum)를 완전히 로마로 옮겼으며, 성청이 살레시안들에게 맡겼던 라틴어 학부를 증설했다. 마지막으로 찌끼오띠 총장은 그자신의 “나의 최고의 영예와 기쁨”이라 말하였던 바 있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첫 세 회기들에 참석했다.
1965년 로마에서 제19차 총회가 열렸을 때, 찌기오띠 신부는 유권자들에게 그보다 더 젊은 사람을 선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살레시안 총장이 총장직을 양도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찌끼오띠 신부는 품성 높은 단순성으로써 그렇게 했다.
찌끼오띠 신부가 재임했던 1952년부터 1965년 동안에 살레시오회는 말기에 약간 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회원수가 매우 증가하여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찌끼오띠 총장의 낙천성과 각국에 대한 그이 격려는 많은 성과를 낳았다.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그는 그의 사업을 통하여, 그리고 자신의 저작들을 통하여 살레시안들의 영신 생활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