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성인 창립자
돈 보스꼬는 성인 창립자들의 대열에 드는 분이다. 실제로 그는 위대한 영적 후예들의 시조이다. 남녀 살레시오 수도회와 살레시오 협력자회는 그가 직접 세운 단체이다. 이외에도 성령에 의하여 생긴 다른 단체들이 잇는데, 역시 그의 정신으로 그의 사명을 제각기 특수한 기능으로 실현하고 있다. 이들 모두로 하여 “살레시오 가족”이 되는 이들 모든 단체들은 모두 그의 창립자의 카리스마를 이어 받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돈 보스꼬는 그가 “겪은 특수한 성령의 체험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들은 꾸준히 자라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상호 관계 11조)
성령의 은혜인 이 체험은 섬기려 오신 그리스도를 보다 잘 닮게 하며, 또한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이 체험은 항상 신비적 혹은 초자연적 환시에서는 언제나 있는 빛- 암흑으로 엮어져 있다. 이러한 이중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힘을 초월하는 어떤 사명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특수한 압력을 깨우치게 되고, 그들이 주님의 손에 있는 오로지 겸허한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께 절대 순종이 필요한데, 이는 무진장한 창의성의 셈인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이 만나야 하는 반발이나 반대 등을 극복할 줄 아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위에서 쏟아지는 분명한 뜻과 밑에서 솟구치는 어두운 세력이 새로 교차한다.
모순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것이 돈 보스꼬의 성덕에서도 형태와 내용을 이루어 주고 있다. 그의 일생의 여러 가지 사건들은 그가 그의 성소와 성덕을 위해 창립자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은 결코 가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창립자로서의 그의 삶에서 성령의 활동은 계속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간접적으로, 시대의 표징이나 사람이나 사물을 통하여 그에게 생각을 주시고 말씀해 주셨고 직접적으로 내적 섬광, 예언적 빛, 꿈과 환시 등을 통하여 말씀해주셨다.
성소
자문해 봅시다: 성령의 활동은 그의 삶에 언제 나타났던가? 아주 막연하게나마 청소년에 대하여 지니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지요 전달자가 되어야 할 부르심을 언제 느끼기 시작했을까?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꼬에게는 “성 복음의 형태대로 살아가도록” 촉구했던 그 “계시”의 순간이 있었다.
돈 보스꼬에게 있어서는 9세와 10세 사이에 고향집에서 꾼 꿈이 있다.
그의 나중의 고백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내 나이 9살에서 10살 무렵에 우리의 일들이 비상하게 시작 되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무수한 소년들이 있었는데, 그 때 어느 어른이 내게 가까이와 말씀하셨다: “왜 저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지 않니?” “가르칠 줄을 모르니까요.” “가거라, 가. 내가 너를 보낸다.” 그 일 이후 나는 어느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게 기쁘게 생활했다.”
그 꿈은 잘 알려져 있지만, 간단히 다시 훑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린 요한은 소리지르고 떠드는 무수한 아이들 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 어떤 아이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도 했다. “말”과 “주먹”으로 그들을 조용히 하려고 했다. 그 때 한 “존경할 만한 품위 높으신 어른”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성소) “그 아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어라.(사명)고 명령했다. 그들의 마음을 얻되, “때려서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방법),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며 덕행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그의 메시지의 중심내용)를 가르치라고 했다.
꼬마는 그 일을 해 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능력도 없고 배우지도 못했다. 그러나 꿈 속의 어른은 그에게 도움을 편다: “내가 여 선생님을 네게 보내마. 그 선생님 밑에서는 현명해 질 것이다. 그 분의 지도 없이는 어떤 지혜도 미련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위엄이 가득해 보이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의 “손을 친절하게”잡고 “무수한 이리 떼”와… 다른 동물들을 “가리키면서”말했다: “자, 여기 네 일터가 있다. 네가 어디서 일해야 하는지 잘 보아라. 겸손하고, 굳세고, 튼튼해져라: 이 동물들에게 지금 일어난 일들이 나의 아들들에게 있게 해다오” 어린 요한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 사나운 동물들은 어디로 가고 그 대신, 그 만한 수의 온순한 양들”을 보았다. 그 양들은 깡충깡충 뛰면서 그 어른과 부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는 좀 더 설명이 듣고 실었다. 그는 그만 답답해져서 울어다. 그러자 그 여인은 “내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대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꿈은 여기서 끝난다. 이 순간은 돈 보스꼬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우리는 믿고 있다. 이는 그에게 유일한 순간이었으니, 그날 밤 주님은 손을 그의 머리 위에 얹으셨으며, 그의 존재를 온전히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그때부터 하느님은 신비로이 은혜를 주시고 돈 보스꼬는 신비로이 이에 응답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아홉 살 때의 꿈은 돈 보스꼬의 삶의 스타일과 사고방식을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각자의 삶 안에 계시고 세상의 역사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는 방법을 바꿔놓았다. 성인은 이를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 그 꿈은 일생 동안 내 삶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꿈의 짜임새는 완벽했다: 돈 보스꼬가, 교황 비오9세의 명에 의해, “주일 학교 회고록”에 이를 기술할 때는 60이 가까운 때였기에 그 실현된 사실을 돌이켜 확인 할 수 있었지만, 아홉 살 때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에서 온 이러한 생각은 아직 자연적인 꿈에서 볼 수 있는 신비 정도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초성적인 사제직에 대한 예감이 강하게 들기는 했지만, 아직은 모호해서 더 두고 봐야 했다. 그 꿈이 그 후 여러 번 약간의 상이점으로 두고 되풀이되자, 이는 어린이의 마음에 신념을 주고 희망을 주었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의혹이 되기도 하여 그의 어린 시절을 힘겹게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체리아 신부의 표현을 빌면, “성소의 위기”가 되어, 수도회에 입회를 생각하게 했다. 사제직에로의 부르심이 문제 되진 않았으니, 이에 강하게 이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구신부냐 수사신부냐였다. 그 때, 그의 마음은 수도회 쪽에 기울어 있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들어갈 마음을 먹고 수도회 측에서도 허락이 되었다. 현명한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도 “아주 이상한 꿈”중의 하나였다고 그가 말한 어떤 꿈을 꾼 후, 그는 마음을 바꾸어 신학교로 들어갔다. 마음속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다른 곳, 다른 일터에로 주님은 너를 준비시키신다.”
앞서 말했지만, 신학교 생활은 그의 성덕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그의 창립자로서의 삶에 더욱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제 기숙사 체류 이후이다.
꿈 속의 소년들
도리노시의 첫 인상은 그를 크게 놀라게 했다. 도시 변두리 마을에 있는 방치된 많은 청소년들의 비참한 모습, 일거리를 찾아 방황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에게 새로운 각오를 하게 했다. 그에게 내린 성령은 그 무수한 “가난하고, 위태롭고, 버려진” 청소년들의 애타는 음성을 통하여 이제 그의 귀에 울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큰 자기가 꿈에 본 소년들이며, 이들에게 자신이 파견된 것임을 깨달았다.
돈 보스꼬는 이 가난한 소년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그것도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헤매는 청소년, 특히 감옥에서 나온 그들을 위하여 일을 시작할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느님의 시각은 1841년 12월 8일, 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축일에 울렸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성당 제의방에서 발뜰로메오 가렐리를 우연치 않게 만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교리 수업이요, 주일학교의 첫 발상이다.
실제로 그 이후 이 소년의 초대로 다른 소년들이 따라왔다. 돈 보스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들은 막 자라나는 소년들로서 공사장에서 벽을 쌓거나 바닥공사의 여러 가지 일을 맡아 했다.:
이렇게 하여 그 당시에는 조금도 예기하지 못한 돈 보스꼬의 거대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의 사제직이 어떤 방향으로 떠나가게 될지 알지 못했으나 하느님께서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였다. 아브라함처럼 그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저 유명한 란테리가 창립한 동정마리아 봉헌자회 쪽으로 기울었다. 선교사로 가고 실은 마음도 매우 커서 그 목적으로 다른 나라 말들도 공부했다. 그러나 가파쏘 신부의 단호한 거절이 있자 이러한 모든 계획을 포기했다.
어언간 사제 기숙사 체류의 3년 기간이 끝나자, 대교구의 사목활동에 참여할 순간이 왔다. 그에게 선택할 수 있도록 다음 세가지가 제시되었다:
사제 기숙사에 강사, 부틸리에라의 보좌신부, 바롤로 후작부인이 세운 성녀 필로메나 병원 원장겸 위안소에서의 보렐 신부의 보조자. 그는 스스로 설정하려 하지 않았다. 가파쏘 신부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말했다: “저는 청소년을 돌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신부님 생각대로 따르겠습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뜻을 보렵니다.”
그의 고백신부는 물었다: “이 순간 자네의 마음에 있고 자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즉시 대답했다: “도움을 청하는 수 많은 아이들입니다.”
가파쏘 신부는 현명한 사람답게 이 점을 더 두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자를 불러 명쾌하게 말했다: “짐을 싸가지고 보렐신부에게 가게…, 하느님께서는 청소년을 위한 자네의 모든 일을 보살펴 주실 것이네.”
세가지 제안 중에서 이것은 그의 천성에 가장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이것이 섭리적이었음이 드러났으니 사제 기숙사에서 시작한 주일학교가 위안소로 와서 계속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뚜렷한 방도 없이, 그의 주일학교는 여러 가지 모험을 하면서 2년이 흘렀고 그러는 사이에 수가 늘어난 소년들이 돈 보스꼬의 생활을 완전히 차지하려 하자 위안소 사업의 일을 동시에 하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바롤로 후작부인은 권위주의적으로 돈 보스꼬에게 강요했다: “소년들 사업에서 손을 떼든지 위안소 사업을 그만두시오.” 돈 보스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소년들을 선택했다. 그 결과 그는 불쾌한 소리를 들으면서 다소 냉정하게 해고 되었다.
“나는 불쾌한 소리를 기꺼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나 자신을 맡겼다.”
그 이후 전적으로 돈 보스꼬는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사람이 되어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몸바쳤으며, 아홉 살 때의 꿈은 그 후 여러 번 자세한 부분들을 제시 하면서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다. 꿈에서 자신은 동물들의 “그 이상한 무리”의 앞잡이가 되어 있었고, 여자 목동의 차림을 한 한 귀부인이 그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하며 그 이상한 무리를 인도하라고 지시했다. 걸어가는 동안 많은 동물들이 순한 양으로 변했고, 많은 양들이 또한 돈 보스꼬처럼 그들도 꼬마 목자들이 되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항상 주일학교가 있었다. 그 부인은 이 주일학교의 미래와 발전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본관건물, 회랑, 신학생들과 신부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람한 성당이 있으며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휘장이 영으로 쳐있었다.
“이 집은 나의 집, 여기서부터 나의 영광이 번져가리라(힉 도무스메아, 인데 글로리라메아).”
그의 일상과 사업에 관하여 위로부터의 빛이 있고 그 미래를 미리 보았다 해서 나날의 생활도 평탄하고 내적인 어두움도 없던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1846년 4월 5일, 성지 주일에 돈 보스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심한 “감각적, 영신적 밤”을 체험했다. 그의 주일학교를 위하여 뜰을 빌려 주었던 필립비 형제들에게서 쫓겨난 것이다. 그의 동 역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했으며, 기력도 쇠진하고, 건강도 약화되어 깊은 고독을 느꼈다.
다음 주일이 부활절인데 아이들에게 어디서 만나자고 말해야 할까.
끝없는 슬픔이 엄습해왔다. 뜰 한 구석으로 가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께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기도가 터져나왔다.
“나의 하느님, 어디에 이 아이들을 모아야 합니까? 알려주세요. 아니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라도 말씀해 주세요.”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는 피나르디 헛간 집을 새로 얻었고, 이는 곧 성당이 되었으며, 그 옆에 붙은 좁다란 땅은 첫 번째 주일학교의 고정된 장소가 되었다.
어려운 길을 지나 섭리는 그가 꿈에서 본 장소에로 드디어 그를 인도했으니, 이제 거기서 그는 그의 사명을 수행해야 했다. 그에게 창립자가 되어야 할 뜻이 더욱 분명히 서게 되었는데 1879년 그의 원장들에게 한 다음 이야기에서 이점이 잘 드러난다: “나는 바로 이 장소에서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 생각은 실현할 방도는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나의 발걸음 하나하나와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실었다. 많이 하고 실었다. 여기서 하고 실었다. 그 당시 가난한 신부였던 나의 이 같은 생각은 그저 꿈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이 가난한 자의 원을 이루어 주셨다.”
밝은 어두움
어떻게 이 원들이 이루어지는지, 어떻게 사업이 그의 손을 통해 번창해나갔는지, 성인은 설명할 길을 모른다. “하느님이 이 계획의 육화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 모든 것을 섭리하셨으며,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나는 거의 할 말이 없다. 나 자신은 설명할 수가 없다.” 하느님의 길은 항상 신비스럽고 창립자 돈 보스꼬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에게서 비롯된 적이 없는” 그 목표는 뚜렷했다: 버림받은 청소년에게 좋은 일을 하되 그 발도꼬의 풀밭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돈 보스꼬 성인만이 가난한 청소년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제는 아니다. 그 당시에 다른 기존 시설도 있어서 그 쪽으로 합세할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그이 주일학교는 더욱 안심하고 나아갈 수도 있었다. 이런 생각들이 자구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으므로 누차 이를 검토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잘 알아 보면 알아볼수록,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볼수록, 어떤 기존 시설도 결국에는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일학교”(오라또리오)에 대한 그의 경험은 너무나 성격이 뚜렷했고, 너무나 다른 시설들과 달랐다. 그의 최초의 발상에 충실 하려면 그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혼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혼자서 서서히 땀 흘려 이를 발전 시켜 나갔다. 옛길과 새 길을 통하여 그를 이끌어 가신 성령은, “이미 탁월해진 동료”들의 도움을 받던 다른 창립자들과는 달리, 돈 보스꼬 자신이 “선택하고, 교육하고, 양성시켜야 한” 청소년들의 도움뿐으로 해야 함을 이해시키셨다. 1847년 피나르디 성당을 입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관한 그의 매우 흥미 있는 증언들이 있다.
“동정녀 마리아는 환시 중에 내가 일할 일터를 보여 주셨다. 따라서 나는 이미 잘 구상된 어떤 계획이 있었고, 거기서 조금도 떨어질 수 없었으며 떨어지고 실이지도 않았다. 나는 이 계획의 성공에 전적인 책임이 있었다. 내가 갈 길을 일목요연 히 보고 있었고 이 사업에 필요한 방편마저 뚜렷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판단에 좌우되어 이 계획을 수포로 돌리고 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7년 그 해에도 나는 나의 사명의 수행을 보장해 줄 어떤 시설이 혹시나 있는지 더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아무리 정신과 목표가 거룩한 시설이라 해도, 나의 목적에는 다르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들이 바로 나의 어떤 수도회 입회를 막았다. 나는 결국 혼자 남았다.
공동생활에 이미 익숙하고 사도직의 이러 활동에도 경험이 있는 어떤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꿈들에서 내가 본대로 나 자신이 선택 해야 하고 가르쳐야 하고, 양성해야 한 어린 소년과 함께 하기 위해 그들을 찾으러 나서야 했다.”
이러한 말 중에는 하느님께로부터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 할 불가피한 사명을 받았음을 확신한 창립자의 뜻이 보인다. 후대에게 성령의 특수 체험을 전해야 하기에, 자신의 성공에 “절대적 책임”을 느끼는 이의 확신이 보인다.
이렇나 불굴의 확신은 미래의 삶에 대한 모든 불확실성과 실제적인 의심을 이겨내고, 뚜렷한 목표를 향하여 똑바로 나아가는 어떤 예언자를 인상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신비 가들에게 종종 일어나는 그대로, 돈 보스꼬는 그의 꿈에서-선교자의 꿈처럼 천문학적인 차원의 꿈들도 있으니 자아를 벗어나 돈 보스꼬 자신 안에 속속들이 침투하는 환시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오밤중의 번갯불과도 같았다. 무대를 한번 환히 비춘 다음, 다시 깜깜한 암흑에로 돌아온 것과 같았다. 다시 평상시로 돌아온 환시자는 그가 본 바를 기억해내고, 이야기하고, 글로 썼다. 그런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니, 돈 보스꼬가 자서전을 쓸 대, 수정하고 다시 쓰고 말을 바꾼 수고로운 작업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챠를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어떤 일정한 수도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고, 이를 실현하려면 구조적인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창립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교회에 있어야 할 새로운 현존의 형태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 아직 알지 못하였다. 때로는 자신이 세워야 할 수도회가 어떤 형태이어야 할지도 막연했다. 다만 창립자 자신의 눈에 역력히 드러나는 것은 점진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하는 그의 사업의 풍요성이었다.”
돈 보스꼬의 생애는 다음과 같은 서술 그대로 이다: “나는 항상 주님께서 알려 주시는 대로 주위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하고 곤란한 상황들이 생길 때마다 성인은 오래오래 인내로이 영적 식별의 작업을 했다. 그러므로 돈 보스꼬에 대한 더욱 정확한 개념은 하느님과 싸우고 있는 야곱의 그것이며, 날마다 예측할 수 없는 난관들 때문에 항상 땅에 두 다리를 꼭 붙이고 산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만사가 돈 보스꼬에게 분명했지만 또 만사가 안개에 쌓여 있었다.
이러한 이중성은 바로 그의 계획이 하느님의 손에 있다는 객관적인 표시였다. 고속도로식 발전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고, 모험적인 전진도 하고 적절히 수정도 하면서 발전할 것이라는 표였다.
피나르디집을 입수한 것은 약속의 땅에의 도착과 같았지만, 소유주가 된 것도 아니고, 꿈이 다 이루어 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하게나마 도리노 생활을 위하여 하느님과, 가파쏘 신부와, 그의 절친한 친구들에게 의탁하며, 늘 부심해야 했다. 사제적 사도 활동에서도 친구들과의 의견이 달랐다. 처음에는 악의라기 보다는 몰이해의 희생이 되었다.
본당 사제들의 뜻과도 어긋났기에 빗발 같은 비난을 당했다.”(스텔라)
그 후에도 돈 보스꼬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어느 날 그는 바르베리신부에게 이렇게 털어 놓았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반대하는 셈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법조계가 전적으로 우리를 반대한다. 기존 수도회들도, 자기들은 쇠해가는데 우리는 자꾸 발전하니까 우리를 마지 못한 눈으로 보는 수도 있다. 교구에서나, 가족들에서나, 사회에서 우리 쪽으로 역풍이 분다. 하느님이 원하시지만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들이 되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의 사업의 주인은 하느님으로, 하느님이 이끌고 가지고, 돈 보스꼬 자신은 그 도구일 뿐” 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큰 확신은 모든 난관 앞에서 불요 불굴하게 했다. “바로 이러한 동기로 하여 나는 모든 역경과 박해 중에서도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셨다.”
실제로 발도꼬에서는, 여러 어려움 중에, 한 십 년 사이에, “특별한 성령의 체험”이 꽃피어났으니, 이는 교육적으로 사목적으로 새로운 것이었고, 그 결과는 돈 보스꼬의 예상을 훨씬 능가했다. 이러한 체험에 성 도메니꼬 사비오와 같은 우수한 소년들이 함께했다.
1855년 3월 25일 돈 보스꼬의 방에서, 증인도 없이 조용히 루아 신학생은 16세로서 돈 보스꼬의 손에서 첫 유기서원을 발했다. 얼마 후 다른 서원자들이 성인의 손에서 약속을 발했다. 이어서 그의 수도회는 신속히 성장했다. 처음에는 피에몬떼, 다음에는 이딸리아, 그리고 세계로 확장되었다. 이제 돈 보스꼬는 그의 카리스마를 무한한 인내로 가꾸어 가야 할 뿐 아니라 역사에 이를 뿌리내리게 하고 교회의 인가와 인정을 받게 해야 했다. 이 일은 그에게 수십 년이 걸렸다.
수도회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살레시오 수도회가, 그의 회헌이, 인가를 얻게 된 이야기는 긴 순교의 이야기와 같다. “수도회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많은 반대와 공격을 당해야 하는 일인지를 미리서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나는 아마 이 일을 시작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관계당국으로 보낸 수많은 보고서들이 증명하거니와, 그의 생각은 교회 당국의 생각과 늘 잘 들어 맞지 않았다.
1847년 성청에서 회헌을 인가 받게 된 그 해까지도 돈 보스꼬는 실제로 되어져 나온 그런 수도회를 세울 생각을 안 한 것 같다. 1878년 10월 18일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 3개년 서원을 넣었다. 애초에 나는 주교를 돕는 수도회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아 달리 할 수 밖에 없게 되자, 3개년 서원은 우리에게 이득보다는 장애가 되었다.” 일년 후 같은 의견을 알라씨오에 모인 원장들에게 말했다:
“수도회에 대한 다른 생각 때문에 3개년 서원을 넣었었다. 현재와는 아주 다른 구상을 했었다. 그러나 할 수 없어 그렇게 되었으니, 그렇게 되게 둡시다.”
그러면 교회는 돈 보스꼬의 카리스마를 뒤엎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교회헌장”이 말하는 대로 교회의 임무는 “성령을 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검토하여 좋은 것을 간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를 탄생시키는 저 성령은 교회의 혼이며 따라서 그 반대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자. 돈 보스꼬의 수도회를 여러 다른 수도회의 대열에 들게한 성청은 그의 수도회로 하여금 그 자신으로 남아있으면서도 가장 잘 전파될 조건을 갖추게 해 주었다. 교회의 여러 사건들과 지침의 압력하에서 성인은 아직 불투명한 여러 측면들을 투명하게 했다. 사실상 그 당시의 사건들은 은총의 전달자 역을 했으니, 예초에 그가 구상했거나 혹은 꼭 그러게 되어져야 한다고 믿은 그대로의 수도회가 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형성 되어진 수도회가 그가 원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싫어 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스텔라)
수도회가 본래의 독창성과 현대성을 잃었다거나 돈 보스꼬의 전면모나 생각이 잘 반영되지 못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 점에 관하여 성인의 3대 후계자인 필립보 리날디 신부의 다음 생각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그가 구상한 수도회는 진짜 수도회였지만 전통적인 외적인 면은 갖추지 않았다. 수도정신, 즉 복음적 권유를 완전히 실천하려는 그것만 있으면 족했다. 나머지는 시대의 필요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류역사의 품 안에서 계속 생겨나는 모든 형태의 선업에 다 잘 맞게 하려는 이러한 융통성은 우리 수도회 회칙의 고유한 정신이다.
이 정신에 어긋나는 변화가 들어오는 날은 우리의 수도회로서 종말과 같다.”
“우리의 존경하올 창립자께서 그의 수도회를 세울 때 가지신 개념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그의 교육법의 핵심적인 정신을 엄격하게 보존하면서, 동시에 부수적인 것들이 되어 시대에 낙후되고 세월에 따라 변하게 될 것을 방지하는 그런 천재적 현대성이 들어있다. 우리의 회헌에는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저 무궁한 생명력의 숨결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는 어느 시대에나 맞으며, 항상 풍부한 생명력이 새로이 샘솟는다.”
“할 수 없이 그렇게 되었으니 그렇게 되게 둡시다.” 하는 그의 말은 따라서 고통스러운 포기가 아니라 끝까지 해본 예언자의 기쁜 “아멘”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살레시오회 회헌의 서언에 실린 엄숙한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들인 여러분, 우리의 회헌은 1874년 4월 3일에 성청으로 부터 최종적으로 인준 되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우리 회헌을 잘 지키는 일은 안전하고 확실한 기반이 된다는 것이며, 이를 인준한 교회의 최고 으뜸의 판단이 무류이니 이 회헌들도 무류라고 할 수 있다.”
성인에게 있어 회헌은 사랑에 이르는 “안전한” 길일 뿐 아니라, 무궁하게 발전하는 힘찬 그의 카리스마와 그의 정신을 감싸주는 황금 겉옷이기도 했다. 이러하여 회헌의 중요성과 실천성에 관한 그의 간곡한 당부가 이해 된다.
“회헌의 모든 조항을 나의 기념으로 여겨다오.” “수도회 정신을 전파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헌의 준수이다.” “좋은 일이라도 회헌에 반대되면 하지 말아라.”
아브라함은 그의 긴 여행의 끝 무렵에 가서야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의 깊이와 넓이를 파악했다. 돈 보스꼬에게도 이 같이 말할 수 있다. 1887년 5월에 로마의 예수성심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이는 그의 시기 및 계월전이다. 15회에 걸쳐 그의 눈은 눈물로 붉어졌다. 그는 먼 고장에 먼 세계에 가 있는 듯 했다. 벡키의 작은 집으로 돌아와, 첫 번째 꿈에서 들은 말을 다시 듣고 있는 듯 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제 6장 꾀가 있는 성인
“약다”, “꾀가 있다”라는 단어들은 오늘날 별로 좋은 뜻으로 쓰이는 단어들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1887년 10월 15일자 노동자 신문(가젯다 오페라이아)은 독설적인 어조로 “꾀 많은 돈 보스꼬”라는 제목을 걸어놓고, “수완이 좋고”, “약 싹 빠르고”, “교활하고”, 자기 이익 쪽으로 만사를 뒤엎을 수 있는 “신부”로 그려 놓았다.
그러나 여기에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꾀는 “실제로 지혜로운 판단력의 표현일 수도 있고, 상황을 거룩하고 건전하게 이용할 줄 아는 예리한 통찰력의 표현이기도 한다.” (에지디오 비가노) 따라서 약은 사람이란 미리 앞을 내다보는, 눈치 빠르고 총명한 사람, 머리를 돌려가면서 꼭꼭 얽힌 그물을 헤쳐 나올 줄 아는 사람,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 그 당장 나타나는 의외의 사건들도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하여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향에서 돈 보스꼬의 “꾀”를 바라보아야 한다. 한 성인에 대한 이야기인 만치, 이는 “지식”의 은혜에 직결되는 것이며, 그 지식의 특성은 성령의 밝은 인도 하에 신덕을 완전하게 해 주는 것이라는 거, 그리고 신덕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러나 보통 그리스도 신자 그 이상으로 모든 피조물을 바르게 판단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로 하자.
실제로 바보가 아니면서 바보인 척하기
거룩하게 꾀가 많은 신부라는 평판은 실제로 돈 보스꼬가 늘 듣던 것이다. 레뮈엥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가까이에서 그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 한테서 만이 아니라, 밖에 사람들한테서도 ‘참 유별난 사람이야. 이 사람은 무엇이나 다 알아 맞춘다니까! 대단한 꾀보!’라고 말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그에게는 둘러싼 구경꾼을 황홀하게 하는 옛날 요술쟁이들의 묘책이 항상 있었다. 자신의 이익을 놀랍게도 잘 방어할 줄 아는 농부들의 세련된 슬기의 그것과 같았다.
피에몬떼 지방에서 쓰던 “실제로 바보가 아니면서 바보인 척하기”라는 속담을 그는 잘 썼다. 그의 제자인 한 사제에게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꾀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나? 바보인 척 하는 것! 나는 그렇게 하지. 하고 실은 말 다 하게 하고 나는 듣기만 하면서 하는 말을 잘 들어 두지. 그러나 끝에 가서 결정할 때에는 모든 것을 다 고려하는데 이렇게 하면 모든 것을 완전히 알게 되지.”
니짜의 분원이 경제적 파산의 위기를 겪고 있을 때였다. 원장인 론체일 신부는 이미 너무 부담을 준 은인들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릴 용기가 없었다. 돈 보스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꾀를 내어 보아라. 돈은 너희의 아이들을 위하여 써야 한다. 굴욕은 네 자신만이 간직하여라.” 이 말은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말아라. 강하게 나아가되, 거룩한 꾀를 써서 하여라” 라는 뜻이다.
카빌리아의 말대로, 그는, 그의 선을 하기 위하여, 교황 파가 되었든지 반대파가 되었든지(괠피든지 길벨리니든지), 누구나가 다 필요하였다. 그의 재주는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지닌 좋은 점 모두를 이용할 줄 안다”는 그것이다. 전적으로 비관주의가 되지 않으려면, 좋은 구석이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당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누구에게나 좋은 면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간직되어 있는 선을 풀어주기 위하여, 그는 정당한 방법을 써서 상대자의 자존심과 결탁할 줄 알았다고 그의 첫 전기작가는 말한다. 그 자신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고, 협조할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할 경우, 예의도 애덕도 의무도 통하지 않을 것을 내다보게 되면, 그는 아주 섬세한 기술로 아부나 속임수의 기색은 전혀 없이 그들의 자존심과 결탁을 하여 자신이 의중에 품고 있는 그 생각에로 연결되게 할 줄 알았다. 한 마디 칭찬, 어떤 자랑스러운 추억, 존경하고 믿어주고 신뢰한다는 표시의 한 마디 말이나 몸짓 등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 어떤 난관이나 반감들도 사라지게 했다.”
그의 측근에게나 그의 은인들에게나, 누구에게나,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이러한 태도를 취하였다. 어머니의 나이를 그의 딸의 나이로 말할 때도 그랬고, 혹은 그의 인색한 친구에게 그의 인색한 하녀를 칭찬할 때도 그랬듯이, 그는 마음에 들 칭찬을 할 줄 알았으니, 거기서는 선 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가 원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었다.
왕실의 장래에 대한 그의 불길한 예언은 앙그로냐의 대백작의 격노를 샀는데, 그는 발도코로 달려와 돈 보스꼬에게 심하게 위협하며 욕을 퍼부었다. 성인은 대단한 자제력을 가지고 이에 대응하였으니, 비무장 병을 칠 수 있는 무장 병의 명예를 기억시키고, 그의 용기와 가치를 칭찬하여, 결국에는 그를 친구가 되게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축배를 들었다.
지롤라마 우쵸니 공작부인에게 보낸 감사의 축전이 있다. 피렌체에서 로마까지의 여행을 주선해 준데 대한 것으로, 여기서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수완 좋게 그의 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가를 알 수 있다. “나의 착하신 어머니, 우리의 여행은 훌륭했음. 최상급 병아리는 일등 봉사를 했음. 최고급 포도주는 병이 완전히 바닥 났음.”
속임수에 빠지지 않았다.
거룩하게 꾀가 있었기에, 돈 보스꼬는 꾀로 넘어뜨리거나 속임수 혹은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달마쪼 신부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추기경은 너를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도 잘 해 내기로 하자.”
외무부 장관이 그의 선교사들을 위하여 “바다와 산”등의 훌륭한 약속을 했다.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에게 바다와 산의 소유를 주면, 나에게는 이들을 지나갈 무엇 인가야 주지 않았지 두고 보기로 하자.”
로마에서 예수성심 대 성전의 건축비가 너무 엄청나서 가난한 돈 보스꼬를 숨막히게 할 무렵, 더구나 누구나 도 끼어들어서 모든 것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때 성인은 짧게 꿇으면서 달마조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부교구장 추기경께 물질적인 문제에 더 이상 머리를 쓰지 마시고 일들의 신속한 처리는 오로지 본당 신부에게 맡겨달라고 청하는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우리가 로마에 세우고 있는 건축을 비난하는 대신에, 유력한 인사들이 돈이나 내 줄 생각을 했으면 싶다.”
1884년에 도리노에 전국 산업 전시회가 열렸을 때, 돈 보스꼬는 그 당시 시중에서 가장 좋은 품질이 되는 인쇄기를 가지고 이에 참여했다. 그래서 즉시로 “기계 중의 여왕”이라 명명되었다. 구경꾼들은 쓰레기가 종이가 되고 종이가 인쇄물이 되고 인쇄물이 다시 책으로 제본되는 과정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전문가이건 참관인들이건 모두 최고상은 돈 보스꼬에게 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반 성직주의자들이요 비밀결사 단원들이던 심사 위원회는 그에게 겨우 은상만을 부여했다. 성인은 품위 있게 단호하게 이를 거절했다. 언론에게는 침묵도 요구해 두었다. 그의 항의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다: “나에게는 이탈리아 전국의 대 산업 전시회에 나의 작품을 내 볼 수 있었음 과 이러한 참여로써, 내가 지난 40여 년간,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정신적 물질적 손익과 더불어, 과학과 기술의 참된 진보도 촉진시키고 실어해 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음에 만족한다.”
순진한 꾀
돈 보스꼬의 꾀는 눈에 안 뜨일 듯한, 단순한 행위로도 표현되었으나 이들도 제 뜻이 있다. 부에노스 아리레스의 대주교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에서 우수한 포도주 두 상자를 보냈다. 그러나 아주 낡은 포도주가 든 병 같아 보이게 해야 했다.
돈 보스꼬는 왜 그랬을까? 그는 그의 비서에게 병에다 약간의 먼지를 뿌리라고 써 보냈으니, “포도주의 제조햇수가 다소 오래된 것 같아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작은 꾀를 써서 그는 그 선물이 더 상대방의 마음에 드는 것이 되게 했다.
큰 은인들에게는 그의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교회적이거나 사회적으로 보다 놓은 자리로 올라 갈 수 있도록 힘써 주었는데 그 공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게 했다. 로마로 달마쪼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비용이 드는 일이면, 돈을 써라. 그러나 내가 직접하고 실이다. 우리가 드리는 선물이라고 말 할 수 있기 위해서 이다. 결과적으로는 훨씬 더 이익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그 훈장들은 장엄하게 전달되기를 바랬으므로 세세한 점에 까지 지시해 주었는데 문화적인 풍토가 다른 데서 보면 웃음이 나오는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확실히 심리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갈리에로 신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베니떼스의 훈령과 치카렐리 신부의 자격증을 받거든, 화냐노 신부와 상의하여라. 모든 것을 네가 직접 하여라. 기숙학교의 위원회와 양 편의 친구들을 초대하여라. 도마티스 신부를 시켜 그 기회에 읽을 훌륭한 대화를 작성하여라. 그리고 두 아이를 시켜 쟁반 위에 삼급 훈 작사의 훈령과 자격증을 각각 들고 가게 하여라. 너와 화냐노 신부는 학생들을 인솔하고 가서 그것을 집어 그들의 손에 넘겨 주어라. 이러한 사항들은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가 “거룩한 술수”라고도 부른 이러한 그의 꾀는 완곡한 뜻으로 “거룩”하지 않다. 탁하거나 삐뚤어진 듯한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교활함이 없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사업이 주의를 끌게 하기 위한 모든 온당한 수단은 다 써보게 한 그의 건전한 실천 성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소년들도 거룩하게 꾀가 있기를 바람으로서 성 필립비 네리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미친 사람도 많고 약은 사람도 많다. 약은 사람들은 천국을 얻기 위하여 약간 수고하고 고통을 견뎌내는 사람들이고, 미친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성 아타나시오가 사용한 “약은 꾀”라는 것을 인용하면서, 그는 강론을 다음과 같은 확신에 찬 훈계로 끝맺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류의 성인들이 되어졌으면 한다. 그렇다.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아. 성인되는 길을 진지하게 찾아라. 그러나 선을 하게 될 때, 방법을 찾을 줄 알고,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수고를 아까와 하지 않는 그런 성인이 되어라. 하려고 하는 바를 성공시킬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슬기롭게 찾을 줄 아는 꾀가 있는 성인이 되어라.”
꾀가 있었다. 그러나 물론 성덕에 이르는 길에서, 꾀가 있었다. 이것이 돈 보스꼬였다.
제 7장 명랑한 성인
“돈 보스꼬의 성덕에서 우리에게 가장 인상 깊은 면, 그것 때문에 그의 내부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놀라우신 힘이 숨겨질 듯한 그러한 점은, 그의 단순 명랑한 태도이니, 이것으로 하여 실은 힘 드는 일이며 초성적인 일인 것이 힘안들고 자연적인 일처럼 보이게 했다” (에지디오 비가노).
명랑 성으로 외부에 나타나는 기쁨이란 것은 그리스도교적 성덕에 속하는 것이다. 바오로 6세가 기쁨에 관한 권고인 ‘주안에 기뻐하라’ 에서 말씀하셨듯이, 기쁨이란, 성령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 안에, 사촌 언니 엘리샤벳 안에, 시메온 노인 안에, 예수님 안에 불어 넣으신 것이다. 슬픈 성인은 없다. 불행한 성인들의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프린치스꼬 살레시오 성인의 말씀이다. 돈 보스꼬 역시 그렇게 주장했다. “마귀는 명랑한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모든 성인은 기쁨의 표현 형태가 저마다 다르다. 성 토마스 모어, 성 필립보 네리, 돈 보스꼬 등의 생애를 훑어 보면, “기쁨의 신학”을 연구할 자료들이 풍부하다. 농담을 할 때나,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나, 혹은 기도를 할 때도 돈 보스꼬는 그 삶에 용기를 주고 기쁨을 전파한다. 그의 빛나는 검은 눈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미소 띈 매력적이고 잊을 수 없는 그의 얼굴에서 사람들은 항상 기쁨을 읽을 수 있었다. (해학과 유모어로 찬 그의 대화에서도 그랬다. 그를 죽일 뻔 했던 총격사건 후에도, 가련한 수단 자락, 네가 대신 당했구나” 하고 외쳤다. “될 대로 되어라 다만 잘만 되어라.”, “주인 없는 망아지 한 마리만 생겨라, 즐겁게 잔치를 할 테니” 라고 말하곤 했다.
“레따레 에트 베네화체레, 즐거워라. 그리고 잘 하여라) 참새들은 지줄 대게 두자” 라고 되풀이 하였다.
신발 없는 소년에게 “토리노로 오너라. 거기서 네 신에 못을 박아 주마”라고 말했다. 임종의 침상에서도 여전했다. “빌리엤띠아, 얼음이 든 냉 커피를 좀 다오. 단 뜨거워야 해.”
돈 보스꼬 안에 가득 차 있는 풍부한 기쁨 안에서 에제디오 비가노의 섬세한 표현대로 많은 것이 함께한다. “그의 기쁨은 일상에서 증거되는 삶의 기쁨이며, 희망을 향한 구체적이며 모험적인 길로서 모든 상황을 받아들임이며 각 개인의 장단점을 알아 차려 가족을 이룰 줄 아는 직감력이며, 선은 우리 안에서나 역사 안에서 악보다 강하는 것을 마음 속 깊이 확신하는 데서 나오는 선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실천력이며, 새 시대의 가치들을 중용의 도로 흡수하기 위하여 미래에로 상상의 나래 띠면서 창의적인 유연성을 추구할 줄 아는 청소년 시기를 향하여 특별한 사랑을 지닌 은혜이며, 친구처럼 사랑을 받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는 신뢰와 대화의 풍모를 교육학적으로 이룩할 줄 아는 호감 성 이며, 무수한 가시들 때문에 꽤 두툼한 구두를 신었지만 웃고 노래하면서 걸어가는 장미꽃 그늘 길이다.”
청소년은 매우 강렬하게 행복을 그리워한다. 돈 보스꼬가 이를 깨닫는 것은 느닷 없는 광대와 요술사가 되어, 그의 어린 친구들을 즐겁게 하면서 그들을 더 착하게 하던 그때부터였다. 키에리 학생 시절에 그는 “명랑한 사회”를 창설했다. 목적은 우울을 멀리한 항상 명랑한 생활, 학업이나 종교의 의무들의 정확한 수행이었다. 그 후 모든 그의 오라또리오나 학교 시설이 명랑한 모임이 되게 했다. 그가 그의 친구들을 떠나 보낼 때 늘 하는 인사가 “명랑하게 지내라” 였고, 이런 인사 그의 친구들을 기쁨에 차게 했다.
레뮈엥은 기록했다. “어느 하루도 즐거운 이야기나 재치 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즐겁게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식 모임에서나,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야 할 때나, 그의 주변에 몰려드는 그의 살레시오 회원들과 그의 청소년들과 시간을 보낼 때나, 여행을 할 때나. 일반 가정에서나, 광장에서나, 아무튼 그가 어디에 나타나든지 이런 식이었다.”
그의 삶이 말없는 순교였음이 확실하다 해도, 그는 항상 즐거운 표정이었다. 괴로운 일이 있으면 있을 수록, 더욱 즐거운 표정이었다.
제 11 명
명랑은 “살레시오 집의 제 11계명이다.” 이는 예방교육법의 대비결의 하나이다. 성 필립보 네리처럼, 돈 보스꼬는 청소년들에게 결코 지치는 일 없이 되풀이 했다. “항상 명랑하게 지내라”, “즐거움 속에서 주를 섬겨라’, “죄 짖는 일을 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기쁘게 살아라.”
이는 경험이나 확실한 교육학적 직감력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청소년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자라나려면 기쁨이 마치 빵처럼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브라이도는 기록했다. “돈 보스꼬는 어떤 부모보다도 이해심이 많고 이해가 빠르다. 소년은 소년임을 그는 알고 이해했으며, 또한 그러하게 허락했고 원했다. 소년의 생활형태는 기쁨, 자유, 놀이, “명랑한 사회”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정상적인 교육 활동을 깊이 있게 하려면 청소년은 존중되어야 하고 사랑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의 자연성 그대로의 청소년이 존중되고 사랑 받아야 하며, 억압이나 강요나, 폭력은 쓸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바오로 6세는 그의 권고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자연적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전제된다고 하셨다. “존재와 삶의 신나는 기쁨, 자기 의무를 다 했을 때의 기쁨과 만족, 순결이나 봉사나 참여에서 오는 투명한 기쁨, 희생의 감격적 기쁨 등, 창조주께서 우리의 발걸음에 놓아주시는 무수한 인간적 기쁨들을 단순하게 누릴 줄 알기를 사람들이 배우거나 다시 배우기 위하여 교육의 인내로운 노력도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이 기쁨들을 정화하고, 보완하고, 승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고 하셨다.
우리는 돈 보스꼬를 이상의 말씀 가운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 그는 소란스러운 오락이나 운동이나, 소풍이나, 음악이나, 노래나, 연극이나, 체조 등에서 오는 떠들썩한 기쁨이 그의 청소년들에게 행여 부족할세라, 항상 너그러이 배려했던 것이다. 그에게 여력이 있는 한, 집안에 있을 때면, 그 자신이 오락시간의 혼이 되었다. 달리기 경기에 마지막 참여한 해가 1868년인데, 그의 나이 53세였고, 그의 다리가 이미 부어 올랐을 때였으나, 그의 민첩함은 여전히 놀라웠었다.
오라또리오에 사육제가 있는 날은 모두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루피노 신부는 일지에 그 날의 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른 아침에 미사, 아침식사, 한 시간 반 동안의 놀이, 포도주와 과일이 곁들인 특별한 점심식사, 오후에는 학급별로 전통적 항아리 터뜨리기 놀이, 보렐리 신부와 갈리에로 신부 사이의 유쾌한 대화를 즐긴 후, 저녁기도, 성체 강복, 마지막으로 연극과 특별한 저녁식사로 그 날 하루의 막을 내렸다.
밤 기도와 돈 보스꼬의 자상한 말씀을 들은 후, 소년들은 자러 갔는데 그들은 죽도록 피곤했지만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찼었다. 사육제 동안에 가벼운 오락을 일체 금했던 알라마노 신부와는 달랐으니, 돈 보스꼬는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 없이 거룩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즐겨 가르쳤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일을 들어주면서, 돈 보스꼬는 그들이 본래는 싫어하는 것, 즉 공부나, 일이나, 의무수행이나, 신심업 같은 것을 스스로 좋아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운명은 청소년기에서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확신한 그는 이를 그의 저서 “죠바네 프로베두또”(건전한 소년)에서 가르쳤다: “사람이 젊어서 시작한 길은 노년기까지 간다. 청소년인 지금 좋은 생활을 시작한다면, 늙어서도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그의 청소년들이 일을 잘하고 민첩하고, 능동적이고 항상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기를 원했다. 게으름은 참아주지 않았다. 의무를 완수했을 때의 만족과 기쁨을 알도록 청소년을 교육할 줄 알았고, 그가 사랑하는 명랑성, 공부, 일, 신심업이라는 세 단어가 지닌 진리를 깨닫도록 교육할 줄 알았다. 이 세 단어는 그의 교육학에서 불가분적인 3대 가치였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게 하지 않는 신심업을 믿지 않았고 신심업을 무시한 열심한 일도 믿지 않았다. 이러한 통합에 행복의 셈을 두고 있었다. “신심업, 공부, 명랑성은 꿀처럼 단 무수한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이다.”
베수꼬 프란치스꼬 전기에서 우리는 그가 이렇게 쓴 것을 읽을 수 있다: “네가 착해지고 싶으면 세가지만 하여라. 그러면 만사가 잘 되리라… 자, 명랑성, 공부 그리고 신심업이다. 이는 위대한 계획이니, 이를 실천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이는 네 영혼에 매우 유익할 것이다.”
오레스따노는 다음과 같은 진실을 이야기했다: “성 프란치스꼬가 본성과 가난을 성화시켰다면, 성 요한 보스꼬는 일과 기쁨을 성화시켰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열광의 성인이며, 일하면서 즐겁게 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성인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교적 열광에 기도 훈련, 하느님과의 관계가 뚜렷이 나타나길 원했다. 따라서 지루하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것은 금물이었으니, 이는 청소년에게 실증과 거부를 안겨주기 때문이었다.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마저 “기쁨의 시간”, 축제가 되어야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어렵지 않고, 놀라게 하지 않고, 피곤하게 하지 않고, 오래 끌지 않는 기도일 것.” 신심업은 “시원한 바람처럼 결코 억압적도 아니고, 지루하지도 않아야 한다. 비록 어깨에 아주 무거운 기둥을 짊어 지고 간다 해도, 전혀 피곤하지 않아야 한다.”
한 학년도는 전례적 축일과 3일기도, 9일 기도 등의 열심한 신심업이 여기저기 끼어 있었는데, 이를 전혀 아무도 지루해 하지 않았다. 돈 보스꼬는 청소년을 “축일”에 맞게 준비 시킬 줄을 알았다. 축일이 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와의 성사적인 기쁜 만남의 날이 되게 했다. 축일에서 영원한 행복의 전주곡을 맛보게 했다. 노래와 예절의 휘황함에 취하여, 발도꼬에서 하는 전례적인 예절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토리노 시의 신자들을 매혹시켜 끌어 들였다.
성당에서의 기쁨은 생활에로 흘러 넘쳤다. 정신 없이 뛰고 노는 오락시간으로, 맛있고 즐거운 식사시간에로 전해졌다. 돈 보스꼬는 결코 영혼과 육신의 제각각 평행선을 허용하지 않았으니, “육신도 즐거웁고자” 했다. 우울은 금물이었다. “밥그릇, 컵들의 마찰소리도” “좋은 화음”을 이루어야 했다. 죄로 파괴되지 아니한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이, 이처럼 그의 교육방법에서 낙관적으로 이용되었다.
명랑성: 성덕의 길
돈 보스꼬는 기록했다: “종교와 은총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혹은 “건전한 소년” 초판(1847)에서 이미 읽을 수 있듯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사는 이들은 항상 명랑하며, 괴로운 일 중에도 마음이 행복하다.”, 반면에 “쾌락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들은 곧잘 화를 내고 살며… 점점 더 불행해 진다.” 그가 이런 글을 쓴 것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지상적 행복이나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과의 관계의 문제인 것임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행복과 기쁨에로 이르는 길은 단 하나 뿐이니, 이는 곧 사랑과 구원에 관련된 종교를 통해가는 그 길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과의 우정, 그 친밀한 관계를 통해가는 그 길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과의 우정, 그 친밀한 관계를 통해가는 그 길인 것이다.
그러니까 돈 보스꼬의 교육학은 “철저하게 그리고 핵심적으로 영혼들의 영적 교육학”(카빌리아)이다. 즉 은총의 생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생활의 교육학이다. 한 마디로 해서 “성덕과 기쁨의 교육학”이니, 기쁨은 성덕의 구조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토리노 학파는 성덕에의 보편적 성소를 믿었다. 성 요셉 가파쏘는 그의 “교수형을 당한 성인들”을 말했고, 성 레오나르도 무리알도는 “착한 목자의 보호소”의 탈선한 소녀들을 성덕에로 격려 했으며, 돈 보스꼬는 그의 개구쟁이 들과 그의 악당들에게나 그의 모범적인 소년들에게나 똑같이 성덕을 최상의 목표로 제시했다. “청소년 칫수”의 성덕이지만 까다롭고 영웅적이기도 한 성덕이었다.
그 당시 로마 관례에서는 청소년을 시복 시성 하는 일은 제안할 바가 못 된다고 믿었으니 어른 이라야 영웅적인 정도로 덕을 실천할 수 있음을 전제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성인 돈 보스꼬는 사비오 도미니꼬를 암시하면서 단언하였다. “제대의 영예에까지 올려질 소년들의 우리 집에서 나올 테니 두고 보라.” 교회는 그의 말이 맞았음을 증명했다.
적지 않는 공로는 그가 청소년 성덕을 믿는 데 있고, 더 큰 공로는 그가 성덕을 청소년에게 제시할 때 명랑 성 이라는 매력을 덧붙여서 명랑 성이 방해가 되기는커녕 성덕으로 가는 길인 것으로 소개했다는 접이다.
“나는 여러분이 즐겁게 놀고 즐기면 기쁘다. 죄를 짓지 않도록만 한다면, 이것은 성 루이지 처럼 여러분들의 성이니 되게 하는 방법이다.”
그는 1885년에 성덕에 관한 유명한 강론을 했는데 이에 관하여 우라는 중요한 말만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되어야 함은 하느님의 뜻이다. 성인되기는 매우 쉽다, 자신이 성인이 되게 하는 사람에게는 큰 상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 이 강론을 들은 도미니꼬 사비오는 돈 보스꼬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쉽게 서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즐겁게 지내면서도 성인이 될 수 있다니, 이제 저는 꼭 성인이 되겠습니다. 저는 꼭 성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춘기 청소년다운 환상에 젖어 그는 대 고행자들처럼, 엄한 대제를 지키고, 긴 기도를 하려 했다. 이에 스승은 성인이 되겠다는 그의 결심을 우선 칭찬하고 그 지나친 이상주의는 견제하면서, 현실적으로, 그의 나이와 조건에 맞는 성덕의 계획을 세워 주었다. ‘첫째가는 일로서” 그는 “꾸준하고 절도 있는 명랑성을 제시했고, 다음은 “신심업과 공부에 대한 그의 의무”를 정확히 수행할 것, 그리고 “이 세상에서 더 없이 거룩한 일인 하느님께 영혼들을 얻어드리도록 노력하는 일”을 제시했다.
이러한 권고들을 그는 사비오, 마고네, 베수꼬의 전기에서 자세히 전개했는데 여기서 그들 주인공의 생애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 충만한 성덕을 향한 점진적인 발전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그의 노력이 잘 나타나 있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이 간단하나 줄기찬 세 마디에 요약된다. 명랑성, 공부-일, 신심업, 도미니꼬 사비오가 친구 가밀로 가비오에게 “우리는 항상 즐겁게 지내는 것에 성덕이 있게 한다” 라고 권한 말에는 성령의 손길이 있다. “그러니까, 놀라운 일들이 단순과 기쁨으로 감추어질 듯한 신적인 보배인 것이다”(비가노).
과연 돈 보스꼬가 제시한 성덕이란 복잡하거나, 신비에 싸여 있거나, 특별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일상의 성덕, 일상적인 일을 일상적이 아니게 행하는 그런 성덕이니, 도메니꼬 사비오가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돈 보스꼬 성인이 그를 칭찬하기를, “그 이상은 더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그의 의무수행에서 정확했고 생활태도가 모범적이었다”고 했다.
앞에서 말한 세 마디로 된 성덕 제안에는, 우리 성인 교육자가 항상 강조해온 다른 그리스도교적 덕행들이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복종과 순결이 소년의 생활에서 갖는 중요성을 돈 보스꼬는 매우 강하게 강조했었다. “소년에게 있어 모든 덕의 기초는 복종이다” 라고 했다. 그는 그의 학생들과 다정하게 이야기 하는 중에 그들의 머리를 자르게 해달라든가, 거의 맹목적으로 따라오라든가, 그들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인 그에게 그들의 마음을 주어 달라고 청했다.
순결에 대하여 말할 때엔 시인이 되어 소년들을 황홀케 하였다. 성서가 지혜에 대하여 적용한 것을 그는 기꺼이 순결에 적용했다: 모든 선은 순결의 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발도꼬에서 피어난 성덕이 예방교육법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라고 말들 할 때, 우리는 즉시 성덕의 주인이신 성령의 활동을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는 그의 충실한 종 돈 보스꼬의 섬세하고도 조심스러운 활동을, 청소년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이용하셔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돈 보스꼬가 그의 지도자로서의 사명, 영적 안내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기준으로 삼은 것을 카빌리아가 매우 적절하게 요약했는데, 여기에 다시 옮겨 볼만하다: “정신과 행동의 자유, 은총의 자유에 대한 존중, 의무를 거룩하게 실천하기, 하느님께 대한 관심, 예수 성체와 마리아께로의 방향지도, 생활의 절제: 이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 평안한 마음, 기쁨, 명랑성, 어두운 공포나 괴상함이 없이, 천국에 대한 희망: 이 모두를 사랑으로, 사랑 때문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이는 물론 돈 보스꼬 전체는 아니지만, 돈 보스꼬인 것은 사실이다.
끝으로 덧붙힐 것은, 돈 보스꼬가 제시한 성덕은 “상”혹은 “천국”의 생각과 떨어져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성인이 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에 큰 상이 마련되어 있다.” 발도꼬의 하늘에는 “낮이나, 밤이나, 개인 날이나 흐린 날이나, 항상 천국이 보였다”(비가노). 우리 성인은 자주 천국에 대한 말을 했다: “한 조각의 천국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힘들고 괴로울 때 천국에 마련된 큰 상을 잊지 말 것.” , “빵, 일, 그리고 천국.” 1861년 4월 3-4-5일, 사흘 밤을 계속해서, 그는 천국에서 그의 소년들과 “소풍”을 하는 꿈을 꾸었다. 그의 아이들의 전기를 쓸 때, 임종의 고통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그들이 죽음의 공포 그 이상으로 천국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을 즐겨 강조했다.
천국에 대한 생각은 성령의 현존의 열매이며, 돈 보스꼬는 “성령의 영혼”이었다. 이 땅 위를 걸으면서도, 마음과 정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제 8장 어떤 그늘이 있는 성인?
교회는 시복 시성 절차 진행에 있어서 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생애의 마지막에서 어떤 고의적인 잘못 하나만 있어도 제대의 영광에로 올려 주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성인에게서 절대적 완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아무리 높은 덕에도, 어떤 불완전하고, 부족하고 연약한, 항상 미완성의 무엇이 들어있는 법이다.
따라서 성인들을 본받으려 할 때에는 항상 이러한 점들이 참조되어야 한다. 교회가 성인이나 복자들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할 때,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완전의 모델로서 제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 전체가 모델로서 제시되긴 하지만, 교황의 지침에서 강조된 어떤 면들, 그들 안에 특별히 두드러진 어떤 덕들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이러한 성인들에게 역시 가벼운 약점들이 있었으니, 이런데서 예외적인 사람은 없는 법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바쳤다 하여 즉시 정상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들 대부분에게서 만복할 만한 “거룩한 열광” 들을 찾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은총의 비상한 영감 없이는 본받기 어렵다.
어떤 작은 실수들
이런 일은 돈 보스꼬에 대하여 말할 때, 그리고 그를 모델로서 제시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그림의 어떤 작은 실수들은, 뜨거운 사랑의 행위로 구제되어, 그림이 망치지 않는다. 성 에로니모는 보속을 너무 강조했다고 성 바오로를 비난했다. 성 베르나르도는 그의 수사들에게 엄한 규율을 주었는데 이는 지나쳤다는 판단을 받았다. 성 빈첸시오 데 바올리는 산딸에게서 흠을 찾아냈다. 돈 보스꼬의 생애에서 역시 고의적이 아닌 어느 유약성의 가벼운 그늘이 발견된다 치자,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 성인의 시복 시성절차에서 신앙의 옹호자역을 맡았던, 미래의 추기경 샬롯때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떤 아주 비상한 사람에게서 어떤 그늘이 그것도 실제보다 과장되어 발견 될 때 이로 인하여 그의 큰 공덕이나 거룩한 활동의 찬란한 빛이 흐려지지는 않는다.”
몽시뇰 벨따냐는 돈 보스꼬의 성덕을 가장 권위 있게 지지하던 분으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의 생애에서 일을 해내기 위한 어떤 끈질긴 면이 보일 때, 그의 인간적인 측면을 다소 볼 수 있다. 애긍을 청함에 있어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강요한다든지, 은혜를 베푸는 이들에게 주님의 보상을 너무 쉽게 약속하고 거절하면 좌충우돌 만사가 잘 안 될 것이라고 겁을 주는 그런 때가 있다. 또는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기를 너무 어려워할 때도 있다.” 그래도 이 증인은 성인의 지향은 온건했으며 목표 달성을 위하여 사용한 수단은 그지없이 정직했음을 인정한다. 실제로 그는 늘 매우 섬세한 양심으로 행동했다.
1879년 2월 알라씨오에서 어느 날 저녁, 돈 보스꼬는 그의 측근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그가 당한 모욕, 거절당한 면회, 도중에 굴욕적인 말 등을 회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말을 끊고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많은 말을 했군.” 그리고 그 날 밤으로 즉시 고백성사를 보고자 했다.
몬시뇰 가스탈디와 돈 보스꼬는 둘 다 책임직에 있던 처음에는 매우 친했다가 근 10 년 동안 갈등 속에 지낸 사람들이다. 길고도 고통스러운 그 갈등이 시작된 것은 돈 보스꼬 편에서 사람을 너무 믿은 계산성의 착오 때문이었다. 그 몬시뇰이 살루쏘 표구에서 토리노 대교구로 이동되도록 비오 9세에게 조언하면서 돈 보스꼬는 그의 도움을 많이 받을 줄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만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는 겸손한 의지와 영웅적인 순명 정신으로 그 결과를 감수해 나갔으나, 인간 본성은 그의 권리를 부르짖었다.
“웃 어른과의 충돌에 괴로워 우는” 그를 보았다고 돈 루이는 증언했다. “좋은 일을 참 많이 할 텐데 못하는 구나! 너무 괴롭다” 라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대주교를 존경하고 사랑했고, 그래서 대 주교보다는 자기 자신을 탓하는 비통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이젠 내 마음에 칼 꽂을 일만 남았어.” “그 이상 더 나를 모욕할 수 없을 정도의 요란한 따귀를 맞았지.” “속상 하는 일이 쌓여서…. 가엾은 위가 망가졌지.”
너무나 인간적인 말들이라 할지 모르나 돈 보스꼬는 섭섭함이나 반감을 느낄 때 그 충동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 없었다. 아주 가까운 측근에게 털어 놓은 하소연 일 뿐이었다.
괴로워하면서, 침묵 중에 여전히 그의 선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왜 그 반대자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당신은 쓰지 않느냐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만사를 이끄신 분은 주님이시다.”
시보나주재 알헨딘 공사 가쏠로씨는 자칭 살레시오 회원들의 은인이었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찾았다. 그는 아메리카의 갈리에로 신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가쏠로씨는 한 주일동안의 계산과 잔소리 끝에 그의 땅 7천평을 6만리라에 내놓았다… 내가 알다시피 1만 9천리라로 산 것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다 하면서 6만 리라를 받아갔다. 아아 지독한 깍쟁이! 깍쟁이!” 피에몬테 사투리로 한 이런 표현이 성인의 나왔으니, 상황은 대단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뜻하지 아니한, 고의적이 아닌, 잘못이 있다. 아무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이는 인간 조건에 속하는 것으로 돈 보스꼬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역자가 배신할 때도 있었고, 전망이 좋게 시작된 어떤 사업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었다. “길고도 복잡하고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결정한 어떤 계획이 나중에 “수포로” 돌아가는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예를 들면, 비오 9세의 직접적인 말씀에 따라, 당시 아주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던 소위 “콘쳇띠니”라 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의료봉사 형제” 수도회를 정비하려고 오랫동안 수고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돈 보스꼬가 이 어려운 임무를 기꺼이 수락한 것은 교황이 바라시기 때문이었고, 어떻게 잘하면, 그 수도회를 자신의 사업에 흡수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더구나 교황에게 가서 그에 대하여 불리한 말을 한 사람까지 있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돈 보스꼬… 귀하께 알려드리기 섭섭한 일이나, 교황성하께서 작년만큼 마음을 쏟아 주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콘쳇띠니 문제이고, 둘째는 귀하께서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때문입니다. 나는 교황님의 마음에서 귀하에 대한 덜 좋은 인상을 지워내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성인은 물론 측 자의 모함의 희생이 되었다. 그러나 쥬세뻬스 키아피니 신부를 그의 대리로 선택한 것은 썩 잘한 일이 아니었음을 지적 해둘 필요는 있다.
이미 말한 바이지만, 돈 보스꼬는 과연 대단한 카리스마적 인물이다. 심중을 읽고, 예언을 했는데, 그는 물론 틀릴 수도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소년 하나가 그의 어느 예언이 들어맞지 않았다고 일러드렸다. 성인은 엄숙해졌다. 그리고 나서 장난끼 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로 되지 않았다 치자, 무슨 상관이 있지?” 그리고 말꼬리를 돌렸다.
시복 시성 선포 문들은 그의 치유의 특은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치유는 항상 있지는 않았다. 돈 보스꼬는 “그의 강복을 청한 이들이 그들이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했던 어떤 일들을 즐겨 이야기 하셨다.”고 했다.
괴넬라 신부는, 후에 “애덕의 종”과 “섭리의 성모 마리아의 딸” 이라는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었으며, 지금은 복자가 된 분으로, 그 당시 이미 사제로서 살레시오 회원이 되었는데, 하느님은 그를 다시 교구로 원하셨다. 돈 보스꼬는 그를 붙들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수도회에 들어 온 사람은 장난이 아닌 이상, 서원과 장상의 뜻에 맞지 않는 그 어떤 계획도 포기해야 한다.” 이 편지와 이런 류의 다른 편지들은 과넬라 신부의 섬세한 마음에 “무거운 가시”가 되어, 마침내는 돈 보스꼬를 떠날 결심을 하게 했다. 두 성인이 부딪쳤다: 그들을 인도하는 성령은 한 사람에게는 천상의 빛을 주시면서 또한 사람에게는 허락 치 않으셨다. 역사는 이런 예로 가득하다.
지나친 선전
해롭지 않는 어떤 이상한 일, 자그마한 요령 부득의 일, 거룩한 꾀부림은 성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일은 성덕으로 하여금 우리 인간 본성에 더욱 가깝고 인간적인 것이 되게 해준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때때로, 마치 어린이들이 하는 것처럼, 나무 조각을 가지고 성가대에 참가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부드럽고도 엄숙하게, 길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에게 입을 맞추어 주고 꽃다발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성 필립보 네리는 털이 붉은 고양이와 “변덕쟁이”라는 별명을 불린 개를 애지중지 사랑하였고, 기쁨에 넘쳐 공중으로 뛰어 오르기도 했다. 돈 보스꼬의 생애 역시 일반적인 틀 안에 넣기가 쉽지 않은 면들을 제공한다.
우리 성인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분 이었나, 그의 계획과 사업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엔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상상력을 자극시키기 위하여 과장도 불사했으니, 그가 하는 일에 더욱 쉽게 따라올 수 있게 하지 위함이었다. “이탈리아와 유럽의 모든 정치계와 종교계가 우리들의 파타고니아 계획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라는 식이 그것이다.
그의 자서전에, 자신의 기적 능력을 묘사하면서 그는 스스로 웃었을 것이니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 때문이다. “작은 요술주머니에서 천 개의 커다란 공이 튀어나오고, 작은 주머니에서 천 개의 달걀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모두 정신이 어리떨떨 했다.”
현대적이었던 우리 성인은 “선전”이 새로운 사회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알아, 신문이나 책자, 잡지, 강연 등을 통하여 폭넓게 이 방법을 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좋은 사업을 알려서 유지 시켜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대 세계는 물질적이 되었다. 그러니 움직여서 우리가 하고 있는 선업을 알려야 한다.” 그는 선전적인 표현과 방법을 썼는데, 그렇다 하여 양심에 어긋나는 타협에로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항상 빚에 억눌리고 실패의 위기에서 허덕이면서도, 은인들이나 어른을 향하여서는, 과장된 언어를 사용했으니 이는 당연할 뿐 아니라 의무적이라고 여겼다.
그의 예언적인 꿈들은 그로 하여금 과장법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할 수 있다. 활동을 크게 하는 그의 스타일이 웅대한 계획을 세계적으로 구상하게 했고, 생각이 떠오르자 마자 벌써 실현에 옮기고 있었다.
돈 보스꼬에게는 또한 그의 사업이나 그의 소년들의 수를 과장하는 경향이 강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지!”라고 하면서 1878년에 20개 지부가 생겨났다고 바르베리 신부에게 지적했다. 실제로 1878년에 20개 지부 신설이라는 말은 그 전해에 비하여 3개 지부가 더 신설된 공식 통계표의 수효를 말함이다. 1880년 성청에 보고할 때 성인은 레오 13세 교황에게 그의 5,000명 소년들이 그를 위하여 기도 한다고 확언하여 보냈다.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숫자는 2십 5만 명 3십만 명으로 폭등했다… 이에 무슨 말을 하랴?
체리아 신부는 언급한다: “돈 보스꼬는 숫자를 꼼꼼히 따지지 않았다. 반의 반 정도라도 알아달라고 하기 위하여 3배까지도 과장들을 하던 그 당시에 유행하던 최신 선전 형태를 그는 아무 주저 없이 본땄다. 스텔라 역시 그런 말을 한다: “과장적인 선전은 발도꼬에서… 그리고 돈 보스꼬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가정적이고 서민적인 농담과 웃음끼 섞인 그런 신나는 분위기에서 번져 나왔다.”
그리고 이것 역시 돈 보스꼬 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무한히 능가하는 그런 인물이라는 점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는 복음을 행동에로 옮긴 성령의 대 걸작품 이며, 우리의 평범한 경험을 훨씬 초월하는 초성적인 법을 따라 움직인 사람이다. 그는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만을 추구한 곧 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