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사도 16,9)
북유럽 지구 소개
1. “마케도니아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사도행전 16,9) - 2. 북유럽 지구의 초창기 살레시오 사업 2.1 영국, 아일랜드-말타, 네덜란드, 북부 벨기에 2.2 오스트리아와 독일 2.3 폴란드 2.4 리투아니아와 구소련 국가들 2.5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체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2.6 초창기 발전에 도움이 되는 두 요소들 2.6.1 “살레시오 가족지” 2.6.2 살레시오 협력자들 -3. 우리 사명의 현재 배경 3.1 새 유럽 3.2 청소년 상황 3.3 북유럽 지구의 살레시오 현황 3.4 여러 지역의 상황 3.5 관구 간 협력 - 4. 살레시오 생활과 사명 분야들 4.1 초기 양성 4.2 살레시오 평신도 양성 4.3 청소년 사목 4.4 성소 사목 4.5 사회 홍보 4.6 사명들 4.7 살레시오 가족 - 5. 앞으로의 전망 5.1 지구의 모든 관구들에 대한 전망 5.2 지구의 각 지역들에 대한 전망 - 맺는말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 편지를 쓰는 지금 저는 우리가 곧 맞이하게 될 부활절이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깃든 우리 구원의 신비들에 대한 즐겁고 풍성한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믿어야 할 진리는 바로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가 24,34)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계속 그리스도인으로 남고자 한다면 그때 지녀야 할 최후의 진리 역시 똑같습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이미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토대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냅시다”(1고린토 5,7b-8). 이 부활절을 배경으로,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고 계신 제 아버님의 선종에 보내 주신 기도와 애도와 조문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 편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께 흥미로운 가족 소식 두 가지를 간략히 전하고 싶습니다. 먼저 2005년 4월 24일에는 2000년 이후 살레시오 가족의 한 지체인 대천사 성 미카엘 수도회(Michaelites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의 창립자 브로니스포우 마르키에비츠 신부의 시복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수도회의 총장 및 모든 회원들과 함께 그들의 창립자의 성덕에 대한 교회의 공인을 기뻐하며, 나아가 우리는 거기서 성덕에 이르는 길인 돈보스코와 살레시오가족 카리스마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또 하나의 소식은 우리 수도회와 직접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총회 이후 6년기의 중반에 이르렀으며, 수도회의 여러 부분에서의 총평의회의 현존의 한 형태이자 현재와 같은 분권화 속의 일치 및 일치 속에서의 분권화 맥락에서 수도회측의 의무가 된 팀방문을 시작했습니다. 이 방문들 덕분에 지구들은 수도회에 대해 더욱 보편적인 견해를 갖게 되며, 총장과 총평의회는 여러 지구들의 살레시오 생활과 활동을 직접 살필 수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두 가지 주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25차 총회에 대한 커뮤니케이션과 소화와 실천, 그리고 관련 관구들과 각 지구의 더욱 중요한 활동과 극적인 도전, 활용 가능한 자원과 미래의 전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편지가 씌어지기 전 우리는 이미 남아시아 지구와 동아시아-오세아니아 지구에 대한 팀방문을 했습니다. 모든 지구들에 대한 방문이 마쳐졌을 때 우리가 다음 총회의 목표들을 명확히 알고 그 준비에 들어가게 되는 입장에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지구들에 대한 연구는 물론 다른 포럼에서도 이뤄지고 있지만 총평의회는 지구들을 차례로 한 곳씩 살피는 프로그램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편지를 통해 여러분께 계속 지구들을 소개할 작정입니다. 이번에는 북유럽 지구 차례이며, 이로써 유럽 살레시오에 대한 제 소개가 끝날 것입니다.
1.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사도 16,9)
제가 이 편지의 제목으로 사용한 이 구절은 성 바오로께서 두 번째 선교 여행 중 트로아스에서 꾸었던 중요하고도 유명한 꿈(사도 15,41-18,22)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통상적인 복음 전파, 세례, 성체성사와 직무를 통해 공동체들을 강화시키는 사도적 활동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다음(사도 15,41;16.5 참조), 교회의 진정한 주인공인 성령에 관해 지적합니다.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지, 어느 영역을 개척해야 하는지, 어느 문을 열어 젖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분. 그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경본문은 성령께서 바오로와 그의 동행들에게 그들의 선교 계획대로 밀고 나가지 말고 대신 그리스와 유럽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어떻게 개입하셨던가를 두 차례 상기시킵니다: “어느 날 밤 바오로가 환시를 보았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던 것이다”(사도 16,9).
이 본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우선 이것은 이미 제가 말씀드렸듯이 교회를 인도하시고 세상을 복음서에 개방시키는 분은 성령이심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 본문은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유럽의 개방을 보여 주며, 이러한 개방은 2000년 뒤인 오늘날 유럽의 문화적 모습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유럽인을 상징하는 이 마케도니아 사람이 도움을 청했다는 것, 복음 전파를 요청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이런 내용을 읽게 됩니다.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사도 16,10).
기억해 둘 만한 동시에 예언적인 이 성경 구절은 과거와 미래의 윤곽을 상기시킵니다. 유럽의 과거와 미래는 복음입니다. 100여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우리 살레시오 회원들은, 돈보스코께서 그러셨듯 가난하고 버림받고 얼떨떨한 젊은이들의 상황을 응시하면서도 밝은 꿈을 꿀 수 있다면,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각 사업장에서의 교육을 통해 그들을 인간, 시민, 전문가로 양성하려 애쓰는 가운데 그 외침에 대한 응답으로 (바오로께서 그러셨듯) 그들의 가장 깊은 갈망을 채워 줄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욕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유럽에서 미래를 갖게 될 것입니다.
2. 북유럽 지구의 초창기 살레시오 사업
북유럽 지구는 특이한 역사적·문화적·종교적·경제적·언어적 다양성으로 두드러지며, 이는 새 유럽의 풍요로움과 복잡성을 다소 보여 줍니다. 이 편지에서는 이 지구 곳곳에서 우리의 초창기 초석들과 활동의 중요한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1 영국, 아일랜드-말타, 네덜란드와 북부 벨기에
살레시오 회원들이 영국에 건너간 것은 1887년이었습니다. 영국은 프로테스탄트 문화와 첫 산업 강국으로서의 긍지를 지닌 나라로 가톨릭 신자는 소수였으며 그 대부분이 아일랜드 농촌 출신의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이 아일랜드에 도착한 1919년, 아일랜드는 고통스런 내전을 통해 막 독립을 쟁취했으며 영국의 오랜 고객들을 잃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벨기에의 상황은 전혀 달랐으며, 이곳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은 1890년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이 접한 것은 산업화된 지 얼마 안 된 나라, 사회적 불균형이 심한 나라, 매우 자유주의적인 (그리고 때로는 반성직주의적인) 지배층을 지닌 나라였지만, 플레미시 지역은 가톨릭 문화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에는 1928년에 도착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인 이 나라는 이때 해외 제국과 광대한 농업 회사들을 가진 고도로 발달된 상업 중심지였으며, 가톨릭 신자들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난 고립된 소수였습니다.
그런 다양한 배경에서 초창기 살레시오 사업이 뿌리 내린 곳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으로 발전하여 다양한 결과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2.1.1 영국
1855년 도미니코 사비오가 다음과 같은 진지한 말로 영국을 살레시오 역사에 등장시켰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의 수많은 영혼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게 힘이 있다면 당장 그곳에 가서 사람들을 하느님께 데려갈 텐데.” 토비아스 키르비 대주교의 영향을 통해 아일랜드 중등학교 학생들이 그들의 기숙사 근처 오라토리오를 드나들곤 했으며, 바로 이들로부터 돈보스코는 런던뿐만 아니라 포클랜드 섬, 말타, 아일랜드와 심지어는 멀리 샌프란시스코의 살레시오 사업 개척자들이 될 초창기 젊은 아일랜드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분의 가톨릭 지인이신 Georgiana Stacpoole 백작 부인이 1874년에 설립된 런던 Battersea의 구제 시설 및 초등학교를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제공하여 1887년에 McKiernan 신부와 그의 첫 동료들이 안개 속에 도착했습니다.
영국과 케이프타운(1897)과 말타(1903)의 집들을 포함한 살레시오 사업이 탄탄히 발전하여 1902년에 영국 관구가 공식적으로 설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쟁(1914-1918) 직후, 프란치스코 스칼로니 신부는 관구를 새롭게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아 1920년에 옥스퍼드 Cowley에 새 수련소와 연구소를 열었습니다.
애초부터 영국 살레시오 사업은 극빈 지역 본당에 직접 관여하는 한편 사제 성소자 발굴을 목표로 초중등학교를 발전시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2.1.2 아일랜드
같은 시기에 아일랜드에도 알로이시우스 서덜랜드 신부의 착상과 이미 1874년 돈보스코의 첫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리메릭의 토마스 홀리난 주교의 초청 덕분에 살레시오 회원들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팔라스켄리의 버려진 땅을 넘겨받아 지원소 겸 농업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몇 년 뒤(1922) County Meath의 Warrenstown에 있는 또 다른 넓은 땅이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유증되어 얼마 후 유망한 농업 및 원예 학교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압력으로 별도의 아일랜드 수련소가 개원되었고, 1941년에는 Ballinakill에 지원소도 세워졌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 1968년에 별도의 아일랜드/남아프리카 관구를 설립하고 수도자들과 일반 대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Maynooth 국립 신학교를 세우자는 결정에 따라 아일랜드 살레시오회에 새로운 지평들이 열렸습니다.
2.1.3 네덜란드
1928년까지는 살레시오 회원이 되고 싶은 젊은 네덜란드인은 벨기에나 독일 또는 이탈리아로 가야했습니다. 광부들을 담당하고 있던 몬시뇰 Poels의 책임하에 벨기에 살레시오 회원들이 네덜란드로 가서 남부 Lauradorp시에 본당 겸 오라토리오를 시작했습니다. 1937년에는 Amersfoort 근처 Leusden에 있는 독일 관구가 지원소를 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네덜란드는 독립 관구가 되었으며, Hannibal Bortoluzzi 신부가 초대 관구장으로 뽑혔습니다. 이 유쾌한 살레시오 회원은 16년 간 관구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기숙학교와 주간학교가 개설되었고 Lauradorp에 다른 청소년 사업들도 설립되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여러 본당에서 헌신했고 상당히 많은 수가 수도회 각지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2.1.4 북부 벨기에
북부 벨기에 관구가 설립된 것은 겨우 1959년부터이지만, 유명한 사회 개혁자인 몬시뇰 Doutreloux는 이미 1890년에 리지외의 살레시오 회원들을 프랑스어 지역인 남부 벨기에에 초청하여 북부 벨기에 플레미시 지역의 풍부한 성소 가능성을 탐사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플랑드르의 Hechtel에 수련소가 세워졌고, 이어 1902년에 Francis Scaloni 신부를 고무자요 지도자로 삼은 첫 벨기에 관구가 된 Groot Bijgaarde에는 이탈리아 외부의 첫 신학 연구소 가운데 하나가 1904년에 개원되었습니다. 플레미시 형제들은 벨기에 자체 노동계층 젊은이들에 대한 중등 및 기술 훈련을 제공하는 고유의 임무 외에도, 당시 벨기에 콩고로 알려져 있던(현재의 콩고, 부룬디, 르완다) 중앙아프리카에 살레시오 선교구를 출범시키는 개척자로 헌신했습니다. 이 관구 역시 선교사 파견에 매우 관대했습니다. 지금도 75명의 벨기에 형제들이 전세계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줍니다.
1959년에 벨기에 관구가 분할되어 나간 뒤, 플레미시 관구는 성소자 감소에도 불구하고 임대 시설을 활용하고 마약 중독 경험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전문적인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젊은이들에 대한 활동을 확대시켰습니다.
2.2 오스트리아와 독일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포함한 독일어 지역은 의미심장한 살레시오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2.1 오스트리아
1886년 8월, 언론인 요제프 M. 슈미딩거를 위시한 한 무리의 오스트리아 시민들이 산 베니뇨 카나베세에 있던 돈보스코를 만나 오스트리아 땅에 젊은이들을 위한 살레시오 사업을 설립해달라고 청했습니다. 돈보스코는 독일어를 구사할 줄 아는 준비된 사람이 없다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조만간에 그런 프로젝트가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1887년부터 살레시오 회원들이 있었지만(트렌토에), 오스트리아 민족 영토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다뉴브 제국의 수도에 진출하기를 몹시 갈망했던 돈 루아의 결정에 의해 1903년에야 비로소 들어갔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루이지 테로네 신부(1875-1968)가 조직인 겸 수도 장상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와 “Kinderschutzstationen Charitativer Verein fur arme Kinder"회 간의 합의 결과 생겨난 도움이신 마리아께 봉헌된 비엔나 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교육에서의 확실한 성공 보증서인 예방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는 강력한 살레시오적 확신이 갈등의 뿌리에 있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오스트리아 수도의 가장 밀집 지역이지만 이미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깊이 빠진 노동 계층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시받는 지역 중 한 곳인 Erdberg에서 자율적인 활동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1909년 여름, 독일어와 독일 문화를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아우구스티노 론드 신부가 비인의 이 새 시설 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년 뒤 정부로부터 개관 허락을 받았습니다. 1910년 10월에 문을 연 ”Knabenheim-Salesianum" 오라토리오 제1부와 함께 살레시오회는 그 지역 주민들과 일반적으로 수도 전체가 깊이 느낀 비상 사태를 만났습니다. 방과후에 적절한 오락 수단이 없는 보다 많은 아이들을 위한 건전한 교육 프로젝트를 제공해야 했습니다.
비록 1916년부터 1918년까지만 지속된 것이기는 하나 또 다른 사업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여러 나라 즉, 이탈리아·폴란드·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유대인·루마니아 “난민” 출신의 어린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시 당국자들에 의해 수도에 와 호스텔에 합숙소로 적합한 어떤 집에 수용되어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처음에 수용된 젊은이들은 171명이었으며 시의 공립학교에 다녔습니다.
2.2.2 독일
살레시오 회원들은 세계 대전 이전에 몇 차례 독일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리고 당시엔 그런 교육 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락을 얻지 못했습니다.
1916년 11월 29일, F. Niedermayer 신부가 이끄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뷔르츠베르크에 도착하여 독일 최초의 살레시오 집을 시작했으며, 이 사실은 지역 신문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견습공 75명과 중등학생 열 명을 맡았습니다. 나중에는 그 수가 늘어 약 160명의 견습생이 그룹별로 조직되었습니다. 사회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일에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첫 장상이 총장 바오로 알베라 신부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살레시오 사업이며, 돈보스코의 초창기를 생각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바바리아와 독일 전체의 현재 조건들 때문에 노동 계층 젊은이들을 위한 이 사업은 가장 필요한 것이며, 주교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축일 오라토리오 역시 우리 사업 분야의 아주 중요한 부문을 형성할 것입니다. 한편, 개인이 초등학교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른바 중등학교를 여는 것을 새 법이 금하고 있고 기존 학교들도 사라질 처지에 있기 때문에 수도회가 그런 학교를 여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살레시오 회원들과 돈보스코의 사업이 바바리아에서는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노동 계층 젊은이들의 구원에 아주 큰 역할을 맡아 주리라고 기대받고 있습니다.”
이 시기 새 살레시오 기관들 가운데 베네딕트보이어렌(Benediktbeuern) 집도 언급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전엔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서 바바리아 수도에서 약 60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1930년에 취득한 것입니다. 그 사업은 독일 살레시오 역사에서 중요해졌습니다. 그곳이 오스트리아와 독일 사람들의 중요한 양성 센터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곳은 지역 교회의 요구에도 응하는 기관이며, 철학과 신학 과정 외에도 교육학과 사회과학 연구를 위한 편의도 제공합니다. 그곳은 또 살레시오 영성 확산을 위한 중심지이자 성공적인 청소년 센터, 본당과 청소년 호스텔을 갖춘 생태학 및 문화 센터이기도 합니다.
1935년에 살레시오회는 1930년에 설립된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시설을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독일에 17개의 시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이룬 놀라운 발전이었습니다! 이리하여 1935년에 살레시오 장상들은 문니히에 본부를 둔 성 보니파체 독일 관구를 설립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대가 살레시오 집들을 몇 군데 폐쇄시키거나 몰수했습니다. 하지만 더 큰 타격은 젊은 살레시오 회원들이 소집된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 약 140명이 여러 전선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카우에서 사망한 테오도르 하르츠(1887-1942)와 칼 슈미트(1904-1968)처럼 수용소에 보내진 이들도 있었습니다.
70년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살레시오 사도직에 대한 요구가 절실했으며, 베네닉트보이어렌, 엔스도르프, 윤케라트, 칼혼(올덴부르크)에 젊은이들을 위한 영적 양성 센터들이 문을 열었습니다. 특별한 가치를 지닌 사업인 본의 선교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습니다. 바로 이 사무소를 통해 유럽과 선교지의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기금을 조달받았고 지금 역시도 그렇습니다.
1990년 10월, 동서독이 통일은 살레시오회에도 도전이었습니다. 독일 살레시오 회원수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동독 지역에 새로운 시설들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하이리겐슈타트(투린지아)의 매일 오라토리오(Offene Tur), 사목 사회복지 센터, 소외된 젊은이들을 위한 또 하나의 사목 사회복지 센터와 청소년 센터, Saxony의 켐니츠에 오라토리오와 청소년 지도 센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마지막 사업의 운영에는 협력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아프리카의 맥락에서 콜로뉴 관구가 가나의 선교 책임을 받아들인 해(1992)에 출범된 또 하나의 독창적 사업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독일 관구들의 요청으로, 더욱 의미 깊은 사도직을 위해 관구들을 재통합하려는 계획이 진행 중입니다.
2.3 폴란드
이미 1889년경에 첫 살레시오 원정대를 폴란드에 파견하려는 프로젝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돈 루아 총장은 아우구스트 차르토리스키를 대장으로 삼고 Bronislaw Markiewicz 신부와 다른 폴란드 형제들과 이탈리아 형제들을 동행시키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차리토리스키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892년 3월 말경에 장상들은 Markiewicz 신부를 폴란드 Galizia로 보내 Prezemysl 주교도시에서 멀지 않은 Miejsce라는 곳의 한 작은 본당의 사목을 맡게 했습니다. Markiewicz 신부는 가난한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집을 열어 “돈보스코 집”이라 불렀습니다. 이리하여 폴란드의 첫 살레시오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897년에 Markiewicz 신부는 토리노 살레시오 회원들과 결별하기로 결정했는데, 수도회에 남은 폴란드 살레시오 회원들은, 크라코우의 주교 Jan Puzyna 추기경의 제안을 즉시 받아들여, Oswiecim이라는 작은 마을에 주교의 생각으로는 노동 계층 젊은이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지는 사회주의적 이념에 저항할 수 있는 종교 센터를 세웠습니다. 1898년 8월에 돈 루아는 그곳에 갓 서품받은 Franciszek Trawinski 신부를 파견했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두 신학생들을 보내 그를 돕게 했습니다.
1899년 12월에 장상들은 Emanuele Manassero 신부를 그곳에 원장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는 Oswiecim 살레시오 집의 진정한 개척자요 조직자였으며, 그 결과 그곳은 폴란드 살레시오 회원들의 “모원”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곧 지원을 얻어냈으며 살레시오회 내 사람들의 흔들리는 신뢰를 굳건히 다져 놓았습니다.
1904년에는 남부 폴란드 Lviv 관구의 Stryj 지구의 Daszawa라는 작은 마을에 두 번째 살레시오 시설이 설립되었는데, 이곳은 지금 우크라이나 영토에 속합니다. 이 집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박한 양성의 집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설되었습니다. 그 원장 겸 수련장으로는 나중에 수도회의 총성무감이 된 Peter Tirone 신부가 지명되었습니다.
20세기 초, 사회 문제가 더욱 강력하게 느껴졌으며, 몇몇 주교들은 교육기관 설립을 통해 구제책을 제공하려 애썼습니다. 이 가운데 한 분이 2003년 5월 18일에 시성된 Przemysl의 라틴 예식 주교 몬시뇰 Josef Sebastian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독하는 도시의 인구 밀집 지역에 살레시오 회원들을 갖고 싶어했으며, 1907년에 살레시오 회원들은 실제로 그곳에서 사도직을 시작했습니다. 원장으로는 나중에 폴란드 수석 추기경이 된 August Hlond 신부가 뽑혔습니다. 폴란드 주교들은 음악학교를 몹시 갖고 싶어했는데, 적절한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살레시오 회원들은 자신들의 시설을 제공했습니다. 젊은 작곡가 Antoni Hlond 신부의 지도하에 1916년 11월 1일에 창설된 오르간 연주자 양성을 위한 특별 강습소는 살레시오회의 역사상 유일무이한 것이었습니다. Antoni Hlond 신부는 47년 동안 활동하면서 570명의 수준 높은 연주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폴란드 교회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에 제공한 특별한 봉사이자 공헌이었습니다.
양차 대전 사이 살레시오 사업은 더욱 번창했습니다. 1933년에는 이미 32개의 집들이 운영 중이었으며 형제회원 수는 50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 결과 Peter Ricaldone 신부는 성 Stanislaus Kostka 관구의 집들 절반으로 Kracow에 본부를 둔 성 Hyacinth 관구를 신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폴란드 살레시오 회원들에게는 비참한 타격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집들은 물론이고 학교를 전부 폐교당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과 형제회원들의 목숨이 남의 손에 달려 있던 상황은 전쟁 직후 방랑 및 이민으로 이어져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수용소에서는 67명의 살레시오 회원들이 나치스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그 중에는 Poznan 오라토리오의 순교 청소년 다섯 명과 함께 1999년 6월 13일에 시복된 Jozef Kowalski 신부도 있었습니다. 1945년 말까지 살레시오 회원들은 모든 교육 센터와 훈련 센터를 재가동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1948년에는 6개 고등학교 및 네 개 소신학교와 함께 전문학교 여덟 곳과 기술학원 네 곳이 운영되었습니다.
1947-48학년도에 공산주의 정부는 비정부 학교들에 대한 태도를 바꿨습니다. 수도회가 운영하는 모든 학교들을 여지없이 가혹하게 폐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1963년 이후로는 Oswiecim 전문학교가 정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살레시오 사립학교이자 소비에트 지배 지역 전체의 유일한 살레시오 전문학교였습니다.
불가피하게 본당 사목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살레시오 사목의 본질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살레시오 회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사명을 위한 공간과 출구를 찾아냄으로써 그들만의 특징을 보존하려 애썼습니다.
1979년 공산정권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새 관구들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폴란드 살레시오회의 발전을 웅변적으로 말해 줍니다. 바르사뱌의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챠 관구의 북서부 집들로 구성된 필라의 성 Adalbert 관구와 남서부 성 Hyacinth 관구에서 분리된 집들로 구성된 Wroclaw의 성 요한 보스코 관구가 그것입니다.
2.4 리투아니아와 구 소련 국가들
현재는 특별 동유럽권이라 불리는 곳에는 리투아니아를 비롯하여 이전에 소련에 속했던 여러 나라들이 포함되는데, 리투아니아는 따로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들 살레시오 기관들의 이야기를 알아두는 것이 유용할 것입니다.
2.4.1 구 소련 국가들
공산 정권 동안에는 실은 공식적으로는 어떤 수도회의 활동도 존재할 수 없었던 까닭에 전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40년 이후, 모든 것을 무릅쓰고, 몇몇 살레시오 회원들이 소련에 속하는 지역에 남을 수밖에 없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사제직을 계속하기 위해 그곳에 남기로 했습니다.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남은 여러 폴란드 살레시오 회원들의 용기를 특별히 상기해야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최소한 11명이 여러 소련 국가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잔혹한 박해를 견디고 살아남은 몇몇은 폴란드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자리에 남아 선종할 때까지 아주 조심스런 상황에서 사제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상징적인 인물은 폴란드 살레시오 회원 Tadeusz Hoppe(1913-2003)으로, 그는 1943년부터 2003년 선종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의 오데싸를 비롯한 소련의 각지에서 사목 활동을 벌였습니다.
소련의 최종 붕괴 이전에 살레시오 회원들은 구 소련 국가들에 들어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이전의 활동을 재개했으며, 여지껏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던 국가들 즉 러시아, 조지아, 야쿠티아 공화국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덕분에 에지디오 비가노 신부는 1993년에 구소련 여러 나라에 산재한 살레시오 사업을 포함하며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원죄없으신 마리아 성심” 동유럽 특별 구역을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시설들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에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별히 언급해야겠습니다. 현재의 그곳 국경 내 살레시오 사업은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Daszawa에서), 당시 그것은 폴란드 살레시오 사업이었습니다. 양차 대전 사이에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에 만들어진 시설들 역시 당시에는 폴란드 통합 지역에 있는 폴란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이 1944년에 시작되어 1945년에 마침내 종결된 국경 변화에 의해 단절되었습니다. 폴란드 동부가 우크라이나 지역이 되었고, 이것이 다시 1944년에 USSR에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합병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살레시오 사업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1930년 특수교회업무성성이 필립보 리날디 총장신부께 편지를 보내, 가난한 계층 한가운데서 가톨릭의 가르침과 교육을 펼치고 수도신분으로 부름받은 젊은이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희랍 가톨릭 예식을 보존하면서 이탈리아에서 그들을 훈련시켜 동방 예식 관구 설립을 준비시키기 위한 일을 맡아달라고 성하의 이름으로 권고했던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 제안은 1932년 리칼도네 신부에게도 반복되었습니다.
그해 첫 젊은 우크라이나인 그룹이 양성을 위해 이탈리아로 보내졌으며, 이후 다른 이들이 그들에게 합류했습니다. 1951년에는 서유럽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사도적 방문자가 세계 도처에서 온 우크라이나 소년들을 위한 소신학교를 우크라이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맡겼습니다.
1991년 우크라이나의 독립 및 종교 자유 선언 덕분에 그 나라 살레시오 회원들은 오랜 희망의 기다림 끝에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Lviv(Leopoli)에서 본당 겸 오라토리오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94년에는 지원소와 청원소가, 2001년에는 Lviv에 에큐메니컬 살레시오 청소년 센터가 개원되었습니다. 이듬해 직업학교가 출범했고 정부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런 발전에 힘입어 현재 총장과 총평의회는 이 나라에 돈보스코의 카리스마를 풍성히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 첫 우크라이나 비잔틴 예식 대리구를 설립했습니다. 비잔틱 예식 살레시오회원들과 나란히 라틴 예식 살레시오회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라틴 예식에 속하는가톨릭인들(주로 폴란드계) 가운데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2.4.2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에서 살레시오 사업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34년 Skirsnemune에서였는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폴란드 관구보다 오히려 토리노 “성심” 본부 관구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리투아니아 수도 Kaunas에는 이 나라 두 번째 살레시오 사업인 본당 겸 오라토리오가 설립되었으며, 공립학교에서는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1년 후 Saldutiskis에 본당이 또 하나 세워졌으며 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1940년에 리투아니아 살레시오 사업을 위해 Anthony Sleltys 신부가 대리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1944년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합병되었고, 이리하여 모든 수도회를 포함하여 교회에 대한 모진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재산에 대한 몰수는 물론 성직자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있었으며, 그 결과 몇몇 살레시오 회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제들이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비로소 이 나라의 살레시오 카리스마 재건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비교적 급속한 소련의 쇠퇴로 여전히 몇 가지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더 많은 공식적인 살레시오 활동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빌뉴스(리투아니아의 수도)와 Kaunas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5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체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지구 조정시에 몇몇 나라의 살레시오 관구들이 문화적 유사성이나 지리적 이유들 때문에 성 시릴과 메쏘디우스(약자로는 CIMEC)를 주보로 모시는 그룹으로 한데 엮였습니다. 이제 이 나라들의 살레시오 역사를 간단히 살펴봅시다.
2.5.1 헝가리
1880년 5월 23일, 당시 헝가리 대중 매체의 명사이며 일간지 Magyar Allam의 이사이자 소유주였던 Antal Lonkay가 살레시오 협력자회 회원으로 등록했습니다. 하지만 마자르 지역에 첫 살레시오 기관이 생긴 것은 그후 40년도 더 지난 뒤였습니다.
1913년에 헝가리 수석 대주교 몬시뇰 John Czernocjh가 참사회원 Francis Robitsek을 통해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Pelifold에 있는 성십자 사원(헝가리 Szentkereszt)를 맡아달라고 제안했습니다. 토리노 장상들은 티로네 신부를 파견하여 대주교를 만나 그 제안을 검토하게 했습니다. 티로네 신부는 그곳에 갔고 몇 가지 난점에도 불구하고 장차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수락을 권했습니다. 1913년 10월 26일자 교서에 의하면 대주교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에 Pelifold의 성십자 사원을 주었습니다. 같은 해 가을 헝가리 출신의 마리아의 아들들 몇이 그곳에 파견되었습니다. 슬로베니아 인 Francis Walland 신부가 그 집을 지도하고 영혼들을 사목적으로 돌보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1919년 가을에 Nyergesuifalu에서 칼리지, 호스텔, 문법 학교, 사목적 관리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24년에 설립된 Rakospalota 집에서도 이와 같은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1925-1926학년도에는 철학원에 신학생 23명, 수련소에 후보자 여덟 명이 있었습니다-밝은 미래를 내다보며 더 많은 기관을 개관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1925년에는 Esztergom-Tabor집을 개원했으며, 얼마 안 있어 이곳은 철학신학원이 되어 다른 형태의 교육 활동을 벌였습니다. 헝가리 집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1927년에는 Ujpest와 Visegrad에 1929년에는 Szombathely에 시설들이 만들어졌습니다- 1929년에 Plywaczyk 신부를 관구장으로 삼아 “성 스테판 왕” 관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헝가리에서 살레시오 사업이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회원 수가 늘었습니다. 1940년 1월 1일, 관구는 189명의 형제들을 갖게 되었고, 그 가운데 125명이 양성 중이었으며(수련자들과 철학 및 신학과 학생들) 수사는 32명이었습니다.
헝가리 살레시오 회원들 앞에는 전도양양한 미래가 펼쳐지고 있던 중이었는데, 불행히 전쟁 발발로 가로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48년 간에 살레시오 회원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시설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Miskolc, Sajolad, Tanakajd 등지에)만, 이것을 끝으로 악전고투의 시기가 닥쳤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된 1956년 10월 혁명 뒤 소련의 개입으로 교회에게, 그리고 마찬가지로 살레시오회에게 정말로 힘든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비극의 시기로부터 1989년까지 헝가리 살레시오 회원들은 더 이상 그들 카리스마 고유의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과거로부터 비롯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관구가 재건 중입니다.
2.5.2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 지역에 돈보스코와 그의 사업이 알려진 것은 18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이 그곳에 가기 전에 이미 살레시오 협력자들이 꾸준히 있었습니다. 돈 루아는 이 협력자들의 끈질긴 요청에, 특히 당시 슬로베니아 교회에서 가장 열성적이었던 사목자들 중 한 분으로 이 협력자들에게 슬로베니아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Rakovnik의 한 작은 성을 제공했던 Ljubljana의 대주교 몬시뇰 Anton B. Jeglic(1850-1937)의 요청에 응했습니다. 초대 원장으로 선출된 Simon Visintainer 신부가 이끄는 첫 살레시오 회원들이 1901년 11월 23일에 Rakovnik에 도착했습니다.
1907년 Radna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슬로베니아의 두 번째 살레시오 사업이 문을 열었습니다. 대다수 후보자가 폴란드 출신이기는 했지만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수련소였습니다. 훗날 이곳은 철학원 기능도 했습니다. 1912년 Verzej 마을에 문을 연 세 번째 살레시오 사업 Marijanisee는 원래 슬로베니아 인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Penango(이탈리아 피에몬테)에서 고향과 더 가까운 어딘가로 옮기고 싶었던 독일의 마리아의 아들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919년 정치적 자유 덕분에 살레시오 회원들은 Rakovnik의 첫 집에서 사도직을 전면적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며, 슬로베니아 전체에서 새로운 시설들의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지속적인 발전이 전망되어 1922년에는 Ljubljana에 본부를 둔 Sts Cyril 및 Methodius 관구를 설립했습니다. 여기에 크로아티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살레시오 집들이 편입되었습니다. 첫 장상은 Visitor(감찰원)의 역할을 지닌 이탈리아인 피에트로 티로네 신부였으며, 1926년에는 폴란드 인 Stanislaw Plywaczyk 신부가, 1929년부터는 슬로베니아 인 Franc Walland 신부가 뒤를 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이 전쟁발발로, 특히 1941년 유고슬라비아의 침공으로 급변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결국 살레시오 회원 몇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의해 숙청되었던 것입니다.
데탕트(긴장 완화) 시기인 1955년경, 살레시오 회원들은 지역 교회를 위해 신선한 새 활동 영역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선교에 투신했으며, 심지어 이런 종류의 사도직에 알맞는 안내서(전단지 형태나 SejaIec<전도자들을 위한 개설서>로 인쇄된)를 준비했습니다. 1955년 이후 Walter Dermota 신부는 교리 보조자료 준비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으며, 1963년에는 매우 성공적인 살레시오 교리교육 센터를 설립해 냈습니다.
1989년은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이 Verzej, Celje, Rakovnik-Ljubljana 기숙학교들을 되돌려 받았으며, 얼마 뒤인 1991년에는 슬로베니아(Zelimlje)에 첫 가톨릭 고등학교를 열 수 있었습니다. 한편 다른 슬로베니아 살레시오 회원들은 이탈리아의 오피치나,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에서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동포들과 캐나다 해밀턴의 이민자들 가운데서 사도직을 수행했습니다. 슬로베니아 살레시오 회원들은 알바니아에 살레시오 사업이 시작될 때부터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5.3 슬로바키아와 체코 공화국
이 경우에도 역시 첫 살레시오 회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살레시오 협력자회 핵심이 생겨났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보히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출신의 첫 젊은이들이 피에몬테 집들에 갔으며, 거기서 그 가운데 몇이 살레시오 수도생활을 선택했습니다. 토리노 장상들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였던 곳에서 후보자들이 계속 유입되는 것을 보고 1921년에 그들을 위해 페로사 아르헨티나 살레시오 집을 제쳐 놓았습니다.
1924년 Sastin 근처에 슬로바키아의 첫 살레시오 집이 문을 열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이 나라의 대표적 성전인 비탄의 성모성전과 더불어 고대의 수도원 하나를 제공받았습니다. 이곳은 장래의 회원들을 위한 양성센터로 바뀌었으며, 같은 해 페로사 아르헨티나 출신의 슬로바키아 인들이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1927년에는 두 개의 살레시오 집이 Frystak(보히미아 최초의 집)와 Vrable(슬로바키아)에 설립되었습니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Bratislava에 매일 오라토리오를 열어 자리를 잡게 된 1933년, 살레시오 회원들은 본당 사목을 맡아 다양한 형태의 사도직을 출범시켰습니다. Moravska Ostrava에도 집 한 곳을 개관했는데, 이곳은 처음에는 철학원이었다가 나중에는 보히미아와 모라비아 후보자들을 위한 수련소와 신학원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시설들이 놀라울 정도로 증가한 결과 1935년, 슬로베니아 관구에 속하던 집들을 Moravska Ostrava에 본부를 둔 신설 성 요한 보스코 관구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보히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는 1936년에 매일 오라토리오와 기숙학교를 개설했고 사목을 맡았습니다. 같은 해 살레시오 회원들은 Trnava(슬로바키아)에도 가서 그곳에서 학생들을 위한 호스텔, 중학교, 오라토리오 등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또 마리아의 아들들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듬해(1937)에는 Zilina에서 축일 오라토리오, 호스텔, 공립 학교에서 교리교육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발전이 놀라웠습니다. 1939년, 첫 살레시오 사업이 시작된 지 겨우 15년 만에 성 요한 보스코 관구는 227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양성 중인 형제회원들의 수 역시 엄청났습니다. 180명이 양성을 받고 있었고, 그 가운데 48명이 수사였습니다!
나치스의 보히미아와 모라비아 점령으로 인한 고통스런 정치 상황과 결부된 체코슬로바키아의 이 같은 보기 드문 시설 번창과 그 후 슬로바키아 내 자치 정부 구성은 1939년 슬로바키아 집들을 Bratislava에 본부를 둔 도움이신 마리아 신설 관구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계 전쟁은 살레시오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특히 이른바 독일 보호령에서는 더욱 그랬지만, 살레시오 생활이 완전히 마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용소에 보내진 살레시오 회원들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미래의 추기경 Stefan Trochta 신부도 있었습니다. 전쟁 뒤 살레시오 회원들은 다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활동을 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인민 민주주의 국가가 되자 급변이 일어났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모든 수도회를 억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교회를 철저히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봄, 수도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강제수용소가 세워졌으며, 260명의 살레시오 회원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그것은 카타콤 시기의 시작이었으며, 이는 1989년 12월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두 관구의 살레시오 회원들은 망명에서 돌아온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큰 열정을 가지고 다시 한번 그들의 사도직에 임했습니다. 활동 재개 시기는 선교를 위해 형제들을 제공했던 여러 나라들에서 선교를 시작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현재 슬로바키아 형제들이 구소련 국가들(바쿠-아제르바이잔)에서 일하고 있으며, 체코 공화국의 살레시오 회원들은 여러 곳들 가운데 불가리아로 가서 어려움에 처한 젊은이들을 위한 사업을 시작했음을 상기해 볼 수 있습니다.
2.5.4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에서 돈보스코의 사업이 인접 국가들에서보다 늦게 시작된 것은 한편으로는 살레시오 교육 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더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첫 살레시오 집이 개원한 것은 1922년 수도 자그레브에서였습니다. 그곳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은 대교구가 제공한 기숙학교를 받아들여 축일 오라토리오를 시작했습니다-실은 크로아티아 땅에서 첫 살레시오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18년 Rijeka(Fiume) 읍에서였습니다.
두 번째 살레시오 사업은 1929년에 역시 크로아티아의 수도 Zagreb-Knezija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이어 1936년에 고대 도시 Split에 한 시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고아원과 기숙학교 운영과 함께 기존의 오라토리오, 그리고 공립 학교들에서의 가르침까지를 포함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지만 살레시오 활동에 많은 장애물이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이 신생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여섯 자치 공화국 가운데 하나가 된 후에도 살레시오 회원들은 자연히 한계가 있긴 했지만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48년에 그들은 Zagreb-Rudes에 사업체를 개설할 수 있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Zadar-Arbanasi에 또 하나를 개설했습니다. 사업이 점차 발전하자 장상들은 1972년에 자그레브에 본부를 둔 성 요한 보스코 크로아티아 관구를 설립했습니다. 슬로베니아와 유사한 방식으로 크로아티아 살레시오 회원들은 교리 분야에서 강해졌으며, 최근 자그레브에 “살레시오 교리 센터”와 함께 “Katehetski salezijanski centar” 출판사를 개설했습니다.
2.6 초창기 발전에 도움이 된 두 가지 요소들
초창기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에 앞서 중앙 및 동유럽, 특히 다뉴브 제국 국가들 가운데 몇 군데에서 살레시오 사업을 창설하기 위한 준비에서 효과를 발휘한 두 요소들을 잠시 언급하고 싶습니다. 두 요소들 모두 살레시오 회원들의 도착 이전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2.6.1 “살레시오 가족지”
1895년에 장상들이 독일어판 가족지 출판을 허락했는데, 그 명칭이 “Salesianische Nachrichten”(살레시오 뉴스)였습니다. 첫 호로 2000부가 인쇄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폴란드어판 출판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며, 폴란드어판 “Wiadomosci Salezjaskie”(살레시오 뉴스)가 1만 4000부씩 정기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어판과 폴란드어판의 성공 후, 1903년부터 살레시오 회원들은 “Szalezi ertesito”(살레시오 가족지)라는 이름으로 헝가리어판을 매달 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헝가리에는 살레시오 집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슬로베니아 어로는 1907년 1월부터 “Salezijanska Porocila. Glasilo salezijanskih sotrudnikov”(살레시오 소식. 살레시오 협력자들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기 전에 출판된 중앙 및 동유럽 언어 가족지 가운데 마지막 것이었습니다.
가족지의 확실한 성공을 보장한 비결 가운데 하나는 돈보스코가 강조했던 가족지의 국제적 차원이었으며, 이는 가족지를 지역주의로부터 구해 주었고, 국가주의적 연원을 지닌 계속된 갈등에 의해 이미 너무도 깊이 상처받은 중앙 및 동유럽 국가들에서 놀라운 환영을 받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가족지는 사회적 국가적 출신에 상관하지 않고 교육과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젊은이들의 선익을 일차적으로 목표 삼고 있는 잡지처럼 보였습니다. 가족지 안에서 선교에 할애된 공간은 살레시오회를 전세계적인 수도회로 소개하는 동시에 호의를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게 했습니다. 게다가 매달 출판되어 이탈리아와 해외에 점점 더 많은 집들이 개설되는 것에 관해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여 역동적인 발전을 보여 주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선종 후 갖가지 기사들을 통해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교육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한 국가에 머물지 않고 유럽과 다른 대륙에도 똑같이 타당한 사업을 계획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아주 매력적이고 영감을 주는 인물로 소개되었습니다.
2.6.2 살레시오 협력자들
협력자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살레시오 정신을 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슬로베니아, 독일(오스트리아와 스위스와 함께), 폴란드, 헝가리에서 가장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이 모든 나라에서는 협력자회가 살레시오회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가족지 뒤에 적힌 협력자들과 은인들의 부고를 잘 분석해 보면 그들이 모든 사회 계층에 걸쳐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슬로베니아에서는 돈보스코 생전에 협력자회가 활발히 출범했습니다. 회원 중 몇 사람은 돈보스코를 직접 뵙기까지 했습니다. 1896년에는 슬로베니아 협력자들의 큰 모임이 두 차례 있었는데, 첫 번째는 1월 29일에, 두 번째는 5월 26일에, 두 차례 모두 Ljubljana에서 있었습니다. 이를 뒤에서 추진한 이는 잘 기억되고 있는 교구 사제 J. Smrekar 신부였으며, 다른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그를 도왔습니다. 1900년경, 등록된 슬로베니아 협력자는 1600여 명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살레시오 회원들을 슬로베니아에, 특히 Ljubjana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도 돈보스코 생전에 협력자회가 생겨났습니다. 돈보스코는 점령된 폴란드에 있던 사람들과 또한 해외에 살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협력자를 모집하곤 했습니다. 첫 폴란드 기록을 보면 1884년에 회원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나 그보다 훨씬 전에도 회원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폴란드 가족지에 따르면 1897년 7월에 1만 6000명의 협력자들이 있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그 수가 2민 5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2년 뒤에는 5만 5000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해외 거주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도 협력자 회원이 상당수에 이르렀습니다.
헝가리에서 협력자 회원 가운데 가장 열성적인 이는 일간지 “Magyar Allam”의 지도자 겸 소유주인 Antal Lonkay였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직접 그를 1880년 5월 23일 발도코 오라토리오에서 첫 헝가리 협력자로 등록했습니다. 헝가리에서 협력자회를 알리고 싶어 Lonkay는 특별히 협력자회 규칙서를 번역해서 1882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출판했습니다. 이 덕분에 돈보스코가 아직 생존해 계실 때 헝가리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헝가리 가족지에 따르면 1902년에 6000명이나 되는 헝가리 협력자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협력자회는 독일어 국가들,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활발히 성장했습니다. 협력자들의 다양한 활동과 협력이 없었더라면 이들 나라에서의 돈보스코의 사업이 그런 영향력과 기초와 발전을 결코 누리지 못했으리라는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3. 우리 사명의 현재 배경
다소 길고도 복잡한 북유럽 지구 살레시오 사업 이야기는 돈보스코의 카리스마를 어느 곳에든 이식시킬 수 있는 방법, 돈보스코의 카리스마가 무럭무럭 성장하고 또 우리가 바라는 것과 반대되는 상황을 만났을 때에도 의연히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지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확신하건대 이젠 더 이상 전쟁과 박해가 아니라 은밀한 세속주의, 세계화, 탈그리스도교화되어 가는 문화가 특징인 오늘의 도전들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깨달음과 영감을 그들 스스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구는, 수세기 동안 민족들이 서로 싸우고 국가들(리투아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독일,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러시아 등) 사이의 국경선이 끊임없이 변하는 유럽, 러시아 내 전체 민족들의 “강제 이주”와 실레지아 폴란드인들과 독일인들의 의무적 “이송”, 체코 공화국 내 슈데텐 인들의 사건들, 통일을 꿈꾸며 역사의 새 장을 열어 평화로, 모든 시민들과 국가들의 자유로, 모든 국가들의 연대 발전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한 유럽,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유지시켜줄 헌법을 채택한 유럽의 깊고도 급속한 변화 과정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3.1 새로운 유럽
바로 이것이 새로운 유럽입니다. 유럽은 지난날에는 풍부한 문화적 표현들을 창조할 수 있었고 지금은 사회 안전과 모든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제도에 전념하면서도 모든 유럽인들 사이에 모두 하나라는 소속감을 발전시키려 과감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경계를 넓힌 뒤 유럽은 한편의 극단적 부(스위스의 GDP는 32,000 US$이며 실업률은 1.9%입니다)와 다른 한편의 극단적 가난(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GDP는 1.90US$이며 실업률은 60%입니다) 사이의 격차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유럽입니다. 유럽은 현재 ‘영혼’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즉 유럽을 한 대륙으로 만든 2000년 간의 그리스도교 역사의 열매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의 유럽은 사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렘브란트,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세익스피어, 몽테뉴, 스피노자, 바흐, 갈릴레오, 뉴튼, 칸트, 괴테, 아인슈타인 등의 값진 공헌 덕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유럽입니다. 유럽은 세상에 가장 큰 인물들, 성 베네딕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도미니크 구즈만, 성 이냐시오 로욜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보니파체, 성 윌리브로드, 켄터베리의 성 토마스, 성 패트릭, 성 아달베르트, 성녀 히야친타, 성 시릴료와 메토디우스, 헝가리의 성 스테판 왕,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성 다미안 드 베스터, 성녀 에디트 슈타인 등을 비롯한 수많은 성인을 배출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유럽입니다. 유럽은 이제 더 이상 그 영혼에 만족지 않고 역사를 지우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럽은 현재 아테네와 로마와 빠리의 영향에, 그리고 교회와 복음 메시지가 이 “모두의 가정”에서 자리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유럽은 최소한 그 서쪽 부분에 관한 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을 빌자면,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듯 살고 있는 사람들 측에서 ‘침묵의 배교’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유럽에 첫 복음 선포가 분명히 필요한 곳들이 몇 군데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른 종교에 속하는 이민자 수가 상당하고,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녔지만 과거의 공산주의 지배나 만연된 종교적 무관심으로 인해 세례를 받지 않은 자녀들을 둔 가정들이 있어 비세례자 수가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찾아내고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유럽, 첫 복음 전파의 순수 선교지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도움을 청하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부르짖음에 응답했던 바오로의 열정으로, 그리고 또 하느님께서 십자가 위의 예수님 안에서 계시하신 복음의 핵심이 위기에 처해있음을 알아차리는 지성을 가지고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난한 이들, 미약한 이들, 과부, 낯선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셨던 하느님-너무도 인간적이셔서 고통받는 인간이 몸소 되시어 자신의 수난으로 우리에게 우리가 잃어버렸던 존엄성을 되돌려 주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가득 채워주신 하느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유럽의 이 새로운 복음 선포에는 새로운 복음 전파자들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살레시오 회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개인 및 공동체 생활의 중심에 둠으로써, 우리 자신의 카리스마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강화시킴으로써, 교회와 수도회의 동쪽 “허파”에 대해 더욱더 많은 지식과 존경을 갖추고,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위기에 처한 이들을 이롭게 해줄 사랑에 집중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다문화적이고 다종교적으로 바뀌어가는 전체 분위기 속에서 대화하고 인내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유럽의 혼을 되살리는 데 기여하는 이 멋진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3.2 청소년 상황
서유럽 지구와 이탈리아 중동 지구에 관한 저의 이전 편지들에서는 서유럽 청소년 상황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 설명은 북유럽 지구 서부의 청소년 상황에도 대충 들어맞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중유럽 및 동유럽 청소년 상황을 더 자세히 다룰까 합니다.
중유럽과 동유럽의 27개 국가들의 “과도기 세대들”의 경험을 분석한, 유니세프 피렌체 이노센티 연구센터의 보고서 “급변하는 사회의 젊은이들”에 따르면, 이들 국가들에는 15-24세 사이의 젊은이들이 6500만 명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2600만 명(41%)은 학생들이고, 2100만 명(32%)은 일을 하고 있으며, 1800만명(27%)는 전자도 후자도 아닙니다. 이 숫자들은 그 자체만으로 웅변적이나 우리의 선교 관점에서 볼 때는 훨씬 더 그렇습니다.
보고서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이 시대에 “과도기 세대”에게서 이 지구(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막대한 자원을 보았습니다. 보고서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를 지원하는 청소년 정책들을 개발하기를 권합니다.
보고서는 또 사춘기와 청년기의 성패는 종종 유아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그러기에 유아기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의의가 있는 결론이 이어집니다. 행복하고 건전한 젊은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기로서 삶을 시작했고 교육을 통해 잠재력을 발전시킨 이들입니다. 저는 여기서 유럽 관구장 회의 중에 라찡거 추기경께서 유럽 살레시오 회원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시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호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교육의 예언”이라 선포하셨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인 1989년까지는 이 지국 국가들 대부분에 실제적으로 실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젊은이들의 40% 이상이 실직 상태여서 큰 문제입니다. 많은 이들이 1년 이상 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1989년부터 1998년까지 대부분의 나라에서 출생률이 1/3이상 떨어졌으며, 아르메니아와 에스토니아에서는 절반으로 떨어졌습니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다음 20년 동안에는 중유럽의 15-24세 젊은이들이 1/3 정도 줄 것입니다.
보고서는 또 건강을 위협받는 세대를 보여 줍니다. 1989년에 5-14세였던 집단 가운데 약 50만 명이 현재 생존해 있지 않습니다. 1998년 이 지역 전체 15-24세 사이의 사망자가 8만 5000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많은 경우가 사고, 폭력, 살인, 자살 그리고 전염병과 임신 합병증과 같은 자연적 원인들 때문이었습니다.
과도기 국가들 가운데 몇 군데서는 15-24세 사이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감소했지만, 16개국에서는 증가했고,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러시아,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카자키스탄에서는 그 비율이 특히 높고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시골 출신의 빈곤 가정, 소수 민족, 장애 젊은이들이 이른 나이에 학교를 포기하거나 아예 가지 못하는 비율이 현저히 높다고 주장합니다.
중유럽과 동유럽의 청소년 상황을 보여 주는 이 모든 지표들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명을 이행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매우 값진 것임이 분명합니다.
3.3 북유럽 지구 살레시오회 현황
북유럽 지구는 제24차 총회에 의해 설정되었습니다. 현재 이 지구는 16개 관구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특별 구역, 그리고 관구 대리구(말타) 한 곳을 포함합니다. 또한 최근 본회의에서 총평의회는 우크라이나에 우크라이나 비잔틴 예식 대리구 설정을 승인했습니다.
북유럽 지구는 3개 대륙 25개국을 포함하며, 총 21개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관구들이 타국에서의 살레시오 사명에 대한 책임을 아주 관대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른 관구들은 현재 자치 지역이 된 시설들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북부 벨기에 관구는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방구이와 콩코 민주공화국, 독일어 사용 3개 관구는 가나, 영국은 리베리아와 유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3.3.1 조정
지구는 단일 관구 협의회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입니다. 관구간 협력을 촉진시키기 위해 네 개 지역이 만들어졌습니다.
- 4개 폴란드 관구들(필라-크라코우-바르샤바-브로츠와프)과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동구 특별 구역의 관구협의회
- 3개 독일어 사용 관구들(콜로뉴-뮌니히-비엔나)의 관구협의회
- 5개 관구들(체코 공화국,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헝가리)을 묶는 성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군(CIMEC)
- 영어 및 네덜란드 어권 4개 관구들(북부 벨기에, 영국, 아일랜드-말타, 네덜란드)를 포함하는 “대서양 지역”군
3.3.2 살레시오 회원들
2004년 9월, 이 지구의 서원자는 2751명, 수련자는 52명이었습니다. 유럽의 다른 지구에서처럼 이 역시 감소를 나타냅니다. 실제로 1996년부터 형제회원들 수가 472명 감소했습니다.
이 지구의 평균 연령은 55세이지만, 관구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평균 연령이 가장 낮은 관구는 폴란드 크라코우(42세)이고, 가장 높은 관구는 네덜란드(72세)입니다.
수련자의 태반이 폴란드에 있습니다(30명); 90년대 초 후보자 수가 상당수에 이르렀던 CIMEC 관구들(슬로바키아를 제외한)에 수련자 수가 감소해 왔습니다. 가장 개선되지 않는 곳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이며, 동방 예식인 우크라이나 형제들의 발전은 희망을 줍니다.
더 문제인 것은 대서양 지역과 독일어 사용 관구들의 전망입니다. 이곳들에서는 (올해 수련자가 세 명인 영국을 제하면) 후보자가 거의 없습니다.
1996년에는 이 지구의 유기서원자가 498명이었습니다. 현재는 240명입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점에 있어서 지구 내의 큰 차이점을 알 수 있습니다:
- 유기서원자의 수를 보면, 폴란드의 4개 관구와 동방예식 지역에 153명, CIMEC 지역에 71명, 그 가운데 슬로바키아에만 51명이 있습니다. 대서양 지역엔 16명, 독일어 사용 지역엔 아홉 명이 있습니다.
- 2002년부터 크로아티아, 폴란드-필라, 폴란드 브로클라우, 폴란드 크라코우, 슬로베니아, 동방예식 지역 성소자 수가 일정해지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서히 쇠퇴하고 있는 관구는 슬로바키아뿐입니다.
- 아일랜드 관구 대리구인 말타는 다소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대리구에는 34명의 회원이 있습니다(그 가운데 9명이 초기양성자입니다). 평균 연령이 48세여서 성장의 조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말타가 종교적 교회적으로 서유럽과는 매우 다른 환경을 지녔음을 암시합니다. 주교들의 요청에 따라, 그곳 회원들은 최근 그 섬의 청소년 사목 활동가들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3.3.3 수사들
현재 이 지구에는 249명의 수사들이 있으며, 이 가운데 유기서원자가 23명, 전체의 9%입니다. 1996년에는 전체 수사가 237명, 유기서원자가 42명이었습니다. 유기서원자들 가운데 8명이 슬로바키아에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3.4 독특한 지역 상황
3.4.1 대서양 지역과 독일어 사용 지역(오스트리아, 북부 벨기에, 독일-콜로뉴, 독일-뮌니히, 영국, 아일랜드-말타, 네덜란드)
이 관구들은 엄청난 헌신, 돈보스코에 대한 애정, 수도회에 대한 사랑으로 씌어진 감탄스런 살레시오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단한 “외방” 선교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전후 1975년까지 많은 성소자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성소자 격감을 경험하고 있으며, 급속한 노화 과정에 있습니다. 이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현존하는 일이 드물어짐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시 이 때문에 젊은이들이 살레시오 생활을 지켜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평균 연령은 62세이지만, 우리 카리스마에 대한 열정이 준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성소자 부족과 젊은 회원들의 성소적 연약성 때문에 미래가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습니다.
이들 관구들은 매우 의미 깊고 교육적으로 수준 높은 사업들을 운영 고무하고 있습니다. 18개 중학교, 15개 고등학교, 11개 직업학교, 11개 사회복지 센터, 38개 청소년 센터, 34개 오라토리오, 19개 기숙사, 11개 유스호스텔, 97개 본당,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한 7개 집, 12개 소수 민족 사업장, 적절한 고무팀을 갖춘 7개 영성의 집, 5개 축제의 오라토리오, 4개 환경센터(이 가운데 베네딕트보이에른의 환경센터는 유럽 차원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지도자 학교 자유시간에 대한 매우 의미 깊은 참여, 특히 독일·영국·네덜란드에 잘 발달된 자원봉사 운동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많은 활동들이 평신도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평신도들은 살레시오 관점에서 잘 훈련된 이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오랜 전통의 덕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북부 벨기에의 평신도 양성소와 베네딕트보이에른의 유겐트파스토랄 인스티투드(청소년 사목 연구소)의 활동을 꼽고 싶습니다. 우리 동역자들 중에 비신자들의 수가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돈보스코와 그의 교육 방식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희망의 징표인 동시에 미래의 살레시오 사업들의 의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형제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의미 깊은 사업 몇 가지를 선정하여 우리 사업들을 새롭게 가다듬거나 의미가 덜하다고 여겨지는 사업들은 과감히 평신도들에게 맡기고, 새로운 사업들을 채택하고, 조직을 간소화하며, 젊은이들을 위하고 젊은이들과 함께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더욱 자신 있게 증거해야 한다는 확신이 점점 자라나고 있습니다.
3.4.2 폴란드 지역과 동방예식 지역(폴란드-바르샤바, 폴란드-크라코우, 폴란드-필라, 폴란드-브로클라우, 동방예식 지역)
이 지역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회원수는 1200명이며, 평균 연령은 44세입니다.
이들 나라의 가톨릭 교회 이야기, 2차 세계 대전 후 유럽의 폴란드 망각,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교회 이야기,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 80년 간의 공산주의 지배하의 정교회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서는 이 지역의 현황과 감수성과 독특한 특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특히 본당(155개)과 경당(160개)에서 수행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본당이 오라토리오(100개)나 청소년 센터(81)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관구들은 9개의 보호소를 돌보고 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학교들이 크게 발전하여, 지난 9년 동안 관구들이 다시 맡거나 새롭게 시작한 학교가 중등학교 24개, 고등학교 23개, 기술학교 10개에 이릅니다. 어려움에 처한 젊은이들을 위한 집들이 Trzciniec, 루미아, Kielcow에 개관되었습니다. 새 사업들은 젊은이들, 부모들, 그리고 우리가 종종 협력하는 시 당국자들로부터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의 참여가 점점 늘고 있어 이 학교들과 사업들을 살레시오적 관점에서 의미 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 큰 도전입니다. 그것은 관련 평신도들에 대한 살레시오적 양성, 예방교육 실천, 사업을 고무하는 핵으로서의 SDB 공동체의 역할을 더욱 긴요하게 만듭니다. 특히 폴란드에서는 수많은 형제들이 정부의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데 참여한 것이 카리스마를 발전시킨 결정적 요소입니다. 본당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형제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3년 이래, 러시아 연방,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조지아의 동방예식 지역이 생겨나고 담대히 성장했습니다. 이곳은 여러 가지 밝은 전망을 가지고 있긴 하나 현재 성소자 부족,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간의 교회일치적 대화의 어려움, 아직 공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가톨릭에 대한 정부의 태도, 살레시오 사명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는 회원의 부족 등이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역은 매우 의미 깊은 사업 몇 가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의 거리 아이들을 위한 집, 가치나의 그래픽 미술 학교를 비롯하여, 시베리아의 알란과 야쿠츠크의 ‘개척사업’, 벨라루스 스마론과 민스크의 본당들, 우크라이나 르비브의 동방예식 회원들의 증가가 그것입니다.
이 지역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전쟁, 강제수용소, 러시아 극지에서 어려움을 겪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형제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증거에 감사하고, 기도 중에 그들을 잊지 않습니다.
3.4.3 CIMEC 지역(체코공화국,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헝가리)
이 지역에는 649명의 형제들이 있으며, 그들의 평균연령은 53.6세입니다.
공산 통치 기간 동안 쓰라린 박해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연로한 형제들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형제들과 친구들의 죽음, 1950년의 모든 사업 폐쇄, 공장에서의 노동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참으로 특히 체코 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의 가타콤 시기였습니다. 살레시오 성덕의 역사가 계속 드러나고 씌어지고 있습니다! 수도회 본부와의 접촉 부족과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가 계속 이어지고 아주 생생히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체코 공화국의 ‘Chalupki’의 놀라운 이야기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비밀시기 살레시오 정신의 진정한 산실이었고, 살레시오 사명에 평신도 협력자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결국 수많은 수도회와 살레시오 가족 성소자들을 낳았습니다.
사명은 주로 본당(119)과 간이 경당(120), 오라토리오(45)와 청소년 센터(41)에서의 여가활동, 2개 중학교와 6개 고등학교에서 이뤄졌습니다. 세르비아, 이슬람, 크로아트 문화의 경계지인 Zepce(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의 학교, kazincbarcika(헝가리)의 집시 학교, Zilinz의 기술학교와 Bardejov(슬로바키아)의 집시들을 위한 활동; 프라하 사회교육 및 신학 고등연구소(JABOK)와 Ceske Budejovice 신학부, Zelimlje(슬로베니아)의 기숙사를 갖춘 고등학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슬로베니아, 헝가리, 체코 공화국의 소수 민족을 위한 사업 등만 생각해 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관구들은 수도회는 재건하는 데 지금도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공산 통치 동안 몰수당한 집들을 되찾는 과정이 끝나지 않았으며, “법적 소유권”이 부족하고 법이 자주 바뀌고 있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여전히 불안함을 느낍니다.
우리는 자유가 없던 시기 이후 현재 우리 자신의 신원을 재규정하는 일에 착수했으며, 이는 자연히 특수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탁월한 민감성을 설명해 줍니다.
이 지역은 우리가 특히 카리스마를 잘 정착시키고, 그리스도가 중심이며 젊은이들에게 가꺼이 있는 공동체를 형성시키고, 가난한 젊은이들의 교육과 복음화를 목표로 한 새 시설들을 선택하는 용기를 가진다면 희망이 넘치는 곳입니다.
3.5 관구간 협력
강조되어야 할 한 측면은 최근에 이뤄진 관구간 협력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양성 분야에서는 남독일 베네딕트보이에른의 고등연구소가 두드러집니다; 이곳은 세 독일어 관구들과 중유럽 관구들에서 온 학생들에 대한 양성 센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소는 이 지구의 형제회원들과 평신도들의 초기 및 평생 양성과 유럽의 두 영적 허파 사이의 대화에서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되어 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네 관구들의 형제들을 위한 종신서원 준비가 공동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몇몇 관구들(오스트리아, 남북 독일, 동방예식 지역,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이탈리아 관구들의 양성의 집들인 피네로로 수련소, 나베의 수련 후 집, 토리노-크로체타의 신학 연구소에 후보자들을 보냅니다. 이 관구들은 젊은 형제들에게 이런 값진 봉사를 제공해 주는 이탈리아의 관구들을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초기양성 중인 형제들의 교류(90년대 초에 많았으며, 특히 폴란드에서 이탈리아, 독일, 영국, 아일랜드로 많이 보냈다)는 현재 실질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후보자 수 감소와 특히 공동체 생활 방식 및 청소년 사목 방식과 관련된 문제들로 인해 학생들이 자기 관구로 복귀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평생 즉, 지속적 양성 분야에서는 슬로바키아와 체코 공화국 관구들의 관구평의원들과 원장들을 위한 양성 주간이 해마다 있습니다.
폴란드에는 사제직 8년차 형제들을 위한 국제적 차원의 쇄신 과정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5년마다 하는 모임과 수사들의 연례 모임, 새 원장들을 위한 강좌, 살레시오 학교 연합도 있으며, 교수들의 지도를 받고 있는 학술지 ‘세미나레’도 있습니다.
세 독일어 관구들을 위한 평생 및 지속 양성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언급해야겠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베네딕트보이에른의 파스토랄 유겐트젠트룸에 의해 마련된 것으로서, 이 지구의 유일한 상위 청소년 사목 “워크숍”입니다.
청소년 사목 분야에서는 여러 가지 관구간 활동이 있습니다; 비엔나(오스트리아), 베네딕트보이에른(남독일), 그루트-비지가르덴(북벨기에; 유리존), 프라하에서 지구의 젊은 고무자들을 위해 매년 혹은 2년마다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자원봉사 활동 영역에서는 대서양 지역 관구들 및 독일어 사용 관구들과 폴란드, CIMEC, 그리고 동방예식 지역이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200년부터 “돈보스코 청소년네트”가 가동 중입니다. 이는 청소년 사목과 고무를 위한 유럽 관구의 12개 살레시오 연합체를 한데 묶은 것입니다.
끝으로, 독일어 관구들과 폴란드 청소년 사목 센터 책임자들의 연례 모임도 언급해야겠습니다.
문화적 측면과 관련하여, 아일랜드의 영어 사용 학교들은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형제회원들에게 훌륭한 봉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출판 분야에서는 남독일의 돈보스코 페르락의 지도하에 지구의 12개 출판사들 사이의 협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북부 벨기에와 네덜란드, 독일-콜로뉴의 독일-뮌니히간의 통합에 과정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습니다. 이 과정이 마무리되면 2005년 8월 15일에 새 독일관구(GER)와 네덜란드 관구 대리구가 생길 것입니다.
4. 살레시오 생활과 사명 분야들
4.1 초기양성
이 지구에는 지원소 18개, 수련소 10개, 수련 후 집 12개, 신학원 11개, 수사 양성소 3개가 있습니다.
대서양 지역에는 신입회원이 드물어 아일랜드 메이누트 연구소, 북부 벨기에의 Oud-Heverlee를 비롯한 거의 모든 수련소 등 여러 양성 기관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느 관구에서는 학생과 양성 지도자들이 없어 교수들과 양성 담당자들을 더 이상 뽑지 않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관구들은 이 분야에서 늘 관구간 협력을 추구해야함이 분명합니다.
독일어 사용 관구들은 수련자들을 국제 수련소 경험을 지닌 피네롤로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후속 단계에는 계속해서 형제들을 베네틱트보이에른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곳은 살레시오 경험이 풍부한 잘 조직화된 환경으로서 철학·사회학·신학에서 훌륭한 양성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폴란드는 수련소 3개(Czerwinsk, Swobnicam Kopiec), 수련 후 집 3개, 신학원 3(Lad, Lodz, Krakow)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준 높은 양성 팀과 수많은 초기 양성자들이 이곳의 양성을 보장합니다. 하지만 양성의 집을 재건하는 데에 자원을 집중시켜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하느냐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동방예식 지역은 초기 양성소인 Oktiabrskij 수련소와 성 페테르스부르크 연구소를 폐쇄했으며, 이 양성 단계 전체 조직을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동방예식 형제들의 증가로 인해 우리는 ‘현지’ 양성 조직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는 두 개의 지원소가 있는데, 하나는 동방예식을, 하나는 서방예식을 위한 곳입니다. 후속 단계들을 위해서는 형제들을 다른 곳으로 파견하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수련자들을 피네롤로에 파견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후속 학업을 지속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지원소 한 곳을 세웠습니다. 헝가리는 수련자들을 피네롤로로 보낼 것이지만 후속 단계들은 헝가리 내에서 지속하게 할 것입니다.
슬로바키아는 자체 내에 지원기, 수련기, 수련 이후, 신학 공부를 위한 조직을 갖추고 있습니다. 체코 공화국 역시 자체 내 조직들을 가지고 있지만, 올해는 수련자가 단 한 명이어서 슬로바키아로 보낼 것입니다. 세브라니체에는 잘 조직된 지원소가 있습니다.
이 지구는 관구간 협력을 바라고 있지만, 언어상의 어려움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협력을 위해서는 후보자들이 다른 언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언어를 아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만 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기양성과 관련해서는 베네딕트보이에른이 수준높은 교사진으로 이뤄진 강력한 팀을 갖춘 견실한 조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 지구에서 더욱 폭넓은 국제양성센터가 될 것입니다.
4.2 평신도들의 살레시오 양성
이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뤄지는 별개의 것입니다. 대서양 지역과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는 평신도들에 대한 살레시오 양성이 잘 조직되어 있습니다. 아일랜드에서는 에토스 단체를 통해 살레시오수녀회와 협력하여 평신도 양성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Governors"를 통해 이뤄지고 있고, 북부 벨기에에서는 학교와 청소년 쉼터 관련 평신도 모두를 위한 조직화된 2개년 프로그램에 의해 ”양성센터“(Vormingscentrum)을 통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독일에는 살레시오 회원들과 함께 평신도들을 위한 광범위한 양성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베네딕트보이에른에서 생긴 청소년사목연구소에서 마련한 것입니다.
폴란드에서는 학교 평신도 교원의 양성이 대개는 교장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는 범관구 차원에서 프로젝트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CIMEC에서도 관구마다 상황이 다릅니다. 헝가리는 관구 차원에서 모임을 마련했습니다. 슬로바키아는 평신도 고무자 양성에 주력합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주로 본당 관련 평신도 양성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장들에게 양성을 맡기고 있습니다.
몇몇 관구들은 많은 공력을 들여 살레시오 회원들과 평신도들이 질을 높을 수 있는 고등 연구소들을 설립했습니다. 베네딕트보이에른(오스트리아, 남북 독일), Ceske Budejovice 신학부(체코 공화국), 바르사뱌 살레시오 그리스도교 교육 고등 연구소(폴란드), JABOK 사회학 신학 특별학교(체코 공화국), 살레시오 고등 경제 상업 연구소(폴란드-바르샤바), 살레시오 양성 강좌(북벨기에)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지구는 대학 학위뿐만 아니라 교육 자격증을 갖춘 수준 높은 형제회원들의 수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4.3 청소년 사목
유럽 청소년 사목에는 두 가지 큰 도전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유럽의 비그리스도교화가 그 하나입니다. 이로 인해 유럽은 그리스도교 유산의 끈을 잃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커다란 종교적 허기 속에서 가끔은 막연하고도 혼란스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특히 젊은이들을 괴롭히고 점점 사회적 배타성을 점증시키는 이민과 새로운 종류의 물질적 영적 가난입니다.
이들 도전에 직면하여 청소년 사목은 젊은이들의 강렬한 의미 추구에 대한 응답이자 인간 존엄성의 가치들과 삶에 대한 열정을 길러 주는 수단이요 주 예수와 신앙 여정과의 뚜렷한 접촉 방법인 복음 전파 임무를 더욱 철저히 실천하도록 요구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또한 동시에 청소년 사목은 다양한 형태의 청소년 소외를 극복하고 통합과 종교간 대화 및 문화간 경험을 추구하며 가정에 도움을 주는 등 모든 것을 망라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지구에서의 청소년 사목은 이런 도전들에 잘 응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만남과 교육의 전통적인 조직들(학교, 본당 등)은 운영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으며, 이 지구의 서쪽에서 특히 그들의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반면, 젊은이들을 만나고 그들을 적극적인 목표들을 추구하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은 높아가고 있습니다. 청소년 단체와 운동, 영성의 집, 극빈자들과 특히 청소년 이주자를 위한 숙박 시설 및 교육 프로젝트, 반겨 맞아 주는 환경, 젊은이들이 주도권을 지닐 수 있는 기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우리 카리스마의 발상지에 대한 청소년 순례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Oasecentrum of Groot-Bijgaarden 팀이 조직한 청소년을 위한 주말 피정과 영성 주간들이 있습니다. 말타에는 SPYS 활동이 있고, 딩리에는 ‘Live-inns'가 있습니다.
폴란드에서 두드러진 것은 새롭고 유망한 청소년 운동입니다. 'Savonalis'(크라코우)와 ‘Pielgrzymka ministrantow'(브로츠와프), 스카우트, 성소 캠프 등과 같은 정기 청소년 모임과 다양한 순례와 함께 'Pustynia Miast' 'Saruel' 'Oasi' 'Ministranti', Silos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CIMEC에도 흥미로운 경험이 있습니다. 슬로베니아에는 'Mladinski Ceh'회와 ‘Skala' 프로젝트가, 크로아티아에는 청소년 단체 ’Don Boscofest'와 ‘캠퍼스 사목’이, 슬로바키아에는 복사단, 영적 교육적 프로젝트, 청소년 축제 Lumen, 그리고 ‘Domka' 활동이 있습니다. 체코 공화국에는 살레시오 청소년 운동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한 살레시오 클럽들이 있습니다. 헝가리에서는 Pelifoldszenkereszt에서 열리는 청소년 사목 활동가들과 고무자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자들이 많습니다.
독일어 지역에서는 ‘Eurotreff'와 ’Jupa-Tagung'과 함께 비엔나에 ‘돈보스코 집’이 있습니다. 독일에는 베네딕트보이에른의 ‘Aktionszentrum'이 의미 깊은 활동을 펼치고 있고 칼호른과 융케라트에 영성의 집이 있습니다.
지구 차원에서는 모든 관구를 포함하는 협력 프로젝트는 아직 없지만, 지구나 관구간 차원에서 조직된 청소년 활동들이 여럿 있습니다. 최근에 ‘돈보스코 청소년 네트’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유럽 관구들의 다양한 청소년 기구들을 통합시키는 조직입니다.
다양한 사목 프로젝트가 많은 평신도들, 교사들, 고무자들, 살레시오 가족 구성원들을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방법을 뜻깊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지구에서 우리가 매우 활기차고 창조적이며 매력적인 청소년 운동의 이런 발전을 더욱 격려하고 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끼 신부님께서 북유럽 지구 서부 지역의 관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는 모든 사업에서 모두를 향한 복음 전파 계획을 가지고 청소년 사목 발전을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 성소를 찾고 추구하는 임무를 자발적이고도 더욱 결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질이 엿보이는 이들에 대한 분명한 그리스도교 영성 계획과 양성 과정들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SYM이 진정한 살레시오 사업이라는 신념을 갖는 것, 가정 사목 계획을 작성하는 것, 종종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역 교회의 활동에 더욱 긴밀히 협력하는 것, 대학생 사목에 더욱 중요성을 부여하고 관구간 차원 및 지구 차원에서 점점 더 긴밀히 협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4.4 성소 사목
청소년 사목에서는 성소 사목에 특별한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북유럽 지구에 대한 총장과 총평의회의 2002-2008년기 6개년 고무 및 통치 계획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성소 문화” 창조를 예견했습니다. 이 호소를 각 관구에서 메아리쳤고, 지구 평의회들이 그 이행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몇 가지 점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대서양 및 독일어 지역에서는, 우리의 사업과 조직이 가장 수준 높은 교육적 질을 갖추고 있고 형제회원들과 평신도들이 큰 헌신과 능력을 기울여왔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봉헌 생활 성소를 격려하기에는 점점 더 적합지 않게 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얼마 안 되는 후보자들마저도 강력한 신원과 영적 차원(기도 단체, 순례 등)을 지닌 “운동들” 출신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 환경 바깥 출신입니다.
반면, 동부 지역, 폴란드, CIMEC에서는 단체와 운동에서 살레시오 영성 측면에 훨씬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해야겠지만, 학교와 본당이 여전히 젊은이들이 성소를 발견하는 일차적 환경입니다.
현재 많은 관구들이 기도 단체들을 가지고 있거나 성소 주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정신을 조성하고, 회심으로 이어지며, 청하고 유지시키는 용기를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도는 우리 삶 안에서의 하느님의 은총과 우위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실 바로 이것이 적절한 준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미심장한 활동들을 상기해 보고 싶습니다.
폴란드 살레시오회는 많은 성소자를 배출한 'Saruel', Pustynia Miast', SPE와 같은, 청소년 사명과 강력한 영성이 특징인 “살레시오 청소년 운동”의 큰 발전을 목격했습니다. 청소년 피정의 날이나 “성소 주간” 동안 본당에서의 우리의 젊은 형제회원들의 고무활동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바르샤바 관구는 젊은이들이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기 위한 열두 단계 과정을 올해 시작했습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성소 사목이 어떻게 해서 청소년 센터와 운동에서의 사목 활동의 중요 부분이 되었나를 살피는 것 역시 좋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가장 세속화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체코 공화국과 특히 보헤미아는 몇 년에 걸쳐 세브라니체에 적합하고 수준 높은 청원소 겸 지원소의 본보기를 마련했습니다.
크로아티아는 2년 전에 자그레브 근처 포드수세드에 청원소를 다시 여는 데 성공했습니다. 슬로베니아 역시 지원소를 다시 열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성소 사목의 첫 조치로 라틴 예식과 비잔틴 예식의 후보자들을 위한 청원소들을 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베네딕트보이에른, 밤베르크, 레겐스부르크, 쳄니츠에 입회 공동체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저는 진정한 성소 사목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살레시오 공동체들의 현존과 증거:
* 공동체의 일상사, 환경, 특히 회원들 사이의 형제적 관계와 관련하여 공동체를 보여 줍니다.
* 가난, 정결, 순명 속에서 “그리스도 따르기”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 공동체는 그들을 젊은이들로부터 떼어 놓고 봉헌된 사람들로서의 우리 삶의 의의를 불문명하게 만드는 다른 임무들로부터 벗어나 젊은이들 한가운데에서 예방교육을 실천합니다.
- 결정적이며 질 높은 봉사 및 영성 프로그램
* 자발성을 보이는 젊은이들에게 분명한 영적 길들을 제시하고, 그들 사이에 옛 신심회 방식을 본뜬 창의적인 단체를 구성하여, “젊은이들의 으뜸가는 복음 전파자는 젊은이들 자신”이라는 원칙에 맞게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 젊은이들이 개별적으로 동반을 받을 수 있도록 살핍니다.
- 대학 분야에서의 활동을 강화하고 지역 교회 활동에 더욱 긴밀히 협력함
4.5 사회 홍보
이 지구의 이 분야는 성장 중입니다. 대부분의 관구가 소식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관구에서는 관구장의 편지가 정보 제공 역할을 합니다.
이 지구는 2004년 1월에 시작된 러시아어판을 포함하여 모두 15개판의 가족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14개 출판사와 17개 서점, 7개 인쇄 시설이 있습니다. 남독일에 있는 “돈보스코 Verlag"와 체코 공화국의 ”Portal"과 같은 대형 출판사는 교육 심리 분야 전문 출판사입니다. 다른 출판사들은 젊은이들 사이에서와 가정에서의 우리 사명을 지원하는 책들을 공급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바바리아의 뮌니히 관구 출판사를 필두로 이들 출판사들 몇 곳 사이에는 협력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조심스런 첫 협력 결과 아동용 소책자 <교회에 간 로지>가 7개 언어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인쇄는 체코 공화국에서 이뤄졌습니다. 더 최근에는 아동용 성인전이 출판되었고, <어린이 여러분과 함께 전례주년을>이란 제목으로 세 번째 책이 준비 중입니다.
특히 뜻 깊은 일은 러시아 가치나(Gatchina) 출판사의 활동입니다. 이 출판사는 러시아 사회와 지역 교회 안에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에 민감한 젊은 형제회원들을 특별히 격려하기 위해 본당, 청소년 센터, 학교, 관구의 웹사이트가 개발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보 기술을 통해 이런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조화롭게 사용하게 하는 교육을 필요로 합니다.
저는 이 분야의 우리 활동이 증가되어 사회 홍보가 우리 사명의 중요한 차원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특히 동유럽 국가들에서 우리 살레시오 문학과 카리스마의 기본서들을 가능한 한 빨리 여러 언어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양성과 살레시오 가족의 고무와 우리 카리스마의 발전에 일차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50여 년 간의 우리 살레시오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50년 간의 우리 역사는 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맞는 사목 모델을 개발하고 찾아낸 방법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역사,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역사입니다!
4.6 사명들
사명에 대한 이 지구의 투신은 유구하고도 놀라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는 지금 현재도 독일에서 “가톨릭 선교” 사목을 하고 있는 70명을 포함하여 340명의 선교사들이 다른 대륙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 동부에서는 폴란드의 고귀한 헌신을, 동부 구역을 설정할 시기 특히 아프리카에서의 헌신을, 시베리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의 슬로바키아의 용기 있는 투신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의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초고비아에서의 크로아티아, 불가리아에서의 체코 공화국의 관대한 헌신을 특별히 언급해야 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성소자 감소와 유럽 자체-특히 서부 유럽-가 선교 지역이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대륙으로 가는 선교사 수가 급감했습니다. 하지만 관구들은 여전히 우리 카리스마의 이 교회적 차원에 열려 있으며, 선교지로 떠나기를 청하는 형제들에게 아주 관대하게 출발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지구의 모든 관구들과 선교사 형제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출신 관구로 영구 귀향하는 선교사 형제들을 관구들이 잘 돌봐 주고 있다는 점도 강조해야겠습니다. 지구 선교 사무국들은 선교를 고무하고 선교지에서 돌아오는 형제들을 환영하며, 전세계 살레시오 선교를 지원하고 확대시키기 위한 기금을 모금함으로써 이 방면에서 매우 값진 봉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에는 “Jugend Eine Welt", 북부 벨기에에는 ”DMOS-COMIDE", 독일-콜로뉴에는 본에 “Jugend Dritte Welt"와 ”Missionsprokur", 독일-뮌니히에는 스위스 베로뮨스터에 ”Missionsprokur", 영국에는 “선교 사무국”, 아일랜드-말타에도 “선교 사무국”이 있고, 폴란드에는 바르샤바에 선교 사무국이, 네덜란드에도 선교 사무국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레시오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계시는 데 대해 전체 수도회와 특히 선교사들의 이름으로 이 모든 사무국들에게 감사드리며, 모든 사무국들이 관구 자체를 더욱더 발전시키고 살레시오 선교에 더욱 더 효과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관구 프로젝트와 조화를 이루어 더 큰 시너지를 추구해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바로 이것이 선교 발전을 관구 사명의 본질적 부분으로 여기게 하는 정신을 형제들에게 심어 주고, 우리의 형제들과 평신도 동역자들에게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나라들 특히 서구 세계에서 선교사가 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며, 또 젊은이들에게 살레시오적 방식을 포함하여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을 성숙시키려 애씀으로써 분명한 복음 전파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길입니다.
4.7 살레시오 가족
이 지구에서는 살레시오 가족이 잘 자리잡혀 있으며, 몇몇 관구들에서는 실질적인 부흥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도 미래를 위해서는, 돈보스코께서 젊은이들과 살레시오 가족에게 봉사하는 커다란 영적 사도적 운동 즉, 총장을 통일의 중심으로 삼아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분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그분의 사명을 계속하는 운동을 원하셨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가족 단체들이 더욱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어디서든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으려면 각 가족 단체의 신원을 존중하면서도 더 큰 시너지를 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관구들에는 살레시오 가족을 위한 “고문단”이 있는데, 이는 전체 살레시오 가족을 고무시키는 데 적합한 기구임이 드러났습니다.
살레시오수녀회는 이 지구에서 일관되고 중요한 현존을 보여 주었으며 166개 공동체들을 두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매우 적극적인 협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살레시오 수녀님이 살레시오 학교 담당 공무원이고, 아일랜드에서는 살레시오 수녀님이 “Ethos group"을 통해 양 수도회의 사업에 참여하는 평신도 직원들의 양성을 맡고 있으며, 북부 벨기에서는 살레시오수녀회가 살레시오 학교들에 대한 통치와 고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청소년 사목과 여가 활용에서도 훌륭한 협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협력자회는 이 지역에 211개 센터와 5500여 회원들을 거느리고 의미 깊은 현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구의 여러 관구들에 우리 수도회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 돈보스코와 그분의 후계자들과 함께 한 협력자들의 열정과 참여 덕분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감사의 표시로 CIMEC 지역과 폴란드 협력자들의 공산 정권 동안의 의의에 대해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적극적인 현존이 없었다면, 아마 수도회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협력자들은 살레시오회 및 살레시오 사업과 아주 큰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사명 안에서 가족 정신과 협력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협력자회의 성소 자원으로 계속 계발되어야 할 텃밭은 살레시오 청소년 운동에 참여하는 수많은 지도자들, 성인들, 젊은이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을 포함합니다.
졸업생들의 삶은 관구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훌륭한 조직을 갖춘 동창회가 잘 자리잡고 있는 곳들(북부 벨기에, 영국, 독일-뮌니히, 말타)이 있는가 하면, 재출범 과정에 있는 곳들(폴란드,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도 있고, 활성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나 연합체와 거의 연계성이 없는 곳들(오스트리아, 독일-콜로뉴, 아일랜드, 체코 공화국)도 있습니다.
이 지구에는 ADMA 단체도 몇 군데 있습니다(영국, 폴란드-필라,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체코 공화국).
돈보스코재속회(VDB) 회원수는 274명입니다; 대부분이 체코(5개 그룹 44명), 폴란드(50명, 특히 슬로바키아(15그룹 150명)에 있습니다.
말타에는 CDB 회원이 5명 있습니다.
폴란드 살레시안 활동에 관해 얘기할 때는 2005년 4월 24일에 시복될 브로니스라우 마르키에비츠 신부가 창립한 “대천사 성 미카엘 수도회”(CSMA)에 관해서도 한마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수도회는 320명의 회원들이 있는데, 217명은 폴란드에, 103명은 다른 나라에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수사 17명, 초기양성 중인 형제 36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 앞으로의 전망
5.1 지구의 모든 관구들에 대한 전망
북유럽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관구들--맥락, 사업의 종류, 이용 가능한 인적 자원이 매우 다양한--의 역사를 다룬 뒤, 저는 한편으로는 모범적인 헌신, 열정, 능력으로 성소를 살고, 젊은이들을 믿고 현재 유럽에서의 교육의 예언자적 가치를 믿으며 복음전파에 있어서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이 지닌 독특한 가치를 믿는 형제회원들의 큰 투신을 염두에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소자 수의 격감과 몇몇 지역에서의 최소한 성소적 취약성, 젊은이들과 직접 일하는 회원들의 수 감소와 그 결과로 인한 청소년계와 우리와의 점차적인 분리를 기억하면서, 미래의 전망에 관해 뭔가를 말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낍니다.
제25차 총회로써 우리는 “새로운 삶의 모델과 의미의 모델을 추구하지만 가난과 억압의 극적인 상황들을 특징으로 지닌 다원적인 세상의 한가운데서, 오늘날 봉헌생활은 ‘마치 반석 위의 집’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무한한 투신을 기초로 성덕에로의 복음적 부르심에 닻을 내리고, 교회의 사명의 최전선에 서 있는다면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GC25 2)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구에서의 수도회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지금껏 수도회에 그토록 많은 공헌을 해온 이 “유럽 살레시오 구성요소”가 계속 존속되기 위해서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관구장들과 관구평의원들, 그리고 모든 형제회원들에게 이 지구의 미래를 위해 마련된 선물의 요강이 될 몇 가지 실천적 지침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5.1.1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의 열정을 생활화하십시오.
돈보스코의 교육적이며 복음 전파적인 열정에 의해 고무된 삶을 사는 불붙은 사람들에게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 카리스마의 뿌리인 초창기 시절의 기쁨과 신뢰를 우리 자신의 관구에서도 재발견하고; 젊은이들에게 신앙의 길과 개별적인 추후 관리 및 기도의 학교를 제공함으로써 오라토리오적 의미에서의 복음 전파를 최우선 사항으로 삼으며; 성소사목 차원의 현존을 보장함으로써 지역적이고 관구적인 차원에서 통일된 조직적인 청소년 사목을 촉진시키고; 살레시오 청소년 운동에 고유의 지위를 부여하며; 우리의 환경과 제안들의 참다운 신원을 확보하기 위해 제23차 총회의 내용과 청소년 사목 지침을 다시금 숙고하고; 분명한 성소적 목적과 과정을 가진 다양한 기획들을 활성화시키며; 형제회원들과 자원봉사자들 사이에 “외방” 선교를 자극하고, 우리의 사목 활동과 과정을 선교적으로 고무시키며; 분명한 살레시오적 기풍을 지닌 본당 모델을 확립하고 ‘개인주의적인’ 본당들은 점차 폐지하며; 새로운 사업들을 출범시키고 축소된 차원들에 대한 융통성 있는 활동들을 계속 수용하며; 새로운 빈곤 영역--위험에 처한 젊은이들, 소수 민족, 교회로부터 멀어진 이들--에 용기를 가지고 접근하고; 사회홍보 수단의 도움을 받아 지역 사회 안에서 살레시오 카리스마를 증진시키며; 우리의 신원과 살레시오 수사 성소 장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다듬습니다.
5.1.2 “가족적 삶”을 촉진시키는 공동체 조성
젊은이들에게는 증거자들이 필요합니다. 즉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 주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보람 있다는 것을 일상의 평범한 환경 속에서 분명하게 보여 주는 개인과 단체들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지역 공동체가 평생양성의 으뜸 공헌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헌이 예견한 가족적 순간들, 예를 들어, 지역공동체 평의회, 전체 모임, 공동체의 날, 월피정과 연피정, 저녁말씀, 원장이 하는 훈화의 진가를 인식하고; 공동체 원장들을 따르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관구 조직화 계획에 맞추어 살레시오적 관점에서 볼 때 특별히 의미 깊은 사업들에 집중하고,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을 형제들을 한데 분류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사업에서 살레시오적 접근법을 발전시키는 추진력으로 작용하는 강력한 가시적 공동체들을 조성하고; 우리의 다른 사업들을 평신도들이나 공식 법인체에 넘겨 주거나 폐쇄시킬 수 있게 해줄 전략을 개발하며; 평신도들에 대한 살레시오적 양성이 아직 부족한 곳에 그것을 적절히 조직화시키고; 우리는 살레시오 가족과 살레시오 사명에 동참하는 모든 동역자들에 기초한 광범위한 운동의 “고무의 핵”이라는 확신을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5.1.3 우리의 영적 생활을 쇄신하고 심화시킵시다
현재의 유럽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복음 전파는 열심한 영적 생활을 특징으로 지닌 살레시오 회원들,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에 관해 얘기할 수 있고 하느님을 모셔갈 수 있는 살레시오 회원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기도 생활 및 성사 생활을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이런 근본적 측면이 중심을 이루는 공동체 생활을 조직화하며; 순명과 정결과 청빈 속에서 조용히 살고, 각 공동체에서 성소자들을 위한 기도의 순간을 강화시킴으로써, 회헌이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했던 제안들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베네딕트보이에른(Benediktbeuern)을 양성과 살레시오 영성의 중심으로, 또 그리스도교 유럽의 두 허파들 간의 대화의 “장”으로 삼는다면, 이 지구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5.2 지구의 각 지역들에 대한 전망
5.2.1 대서양 지역, 독일어 지역, CIMEC 지역
이 관구군은 살레시오 성소자들을 잘 길러내야 하고, 초기 및 평생양성, 청소년 사목, 사회홍보 분야에서, 그리고 학교들과 관련하여 관구간 협력을 더욱 촉진시켜야 할 도전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5.2.2 폴란드 관구협의회 지역
이 관구군은 다음과 같은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살레시오 양성의 고유한 측면들을 보장하기 위해 수도회의 <양성지침서>를 양성 교과 과정에 편성시키고; 양성소들의 재조직화를 위한 연구에 착수하며; 폴란드 관구협의회의 고무 및 통치 조직들에 대한 강화 작업들을 지속시키고; 전국 청소년사목센터를 건립하며; 지역 공동체들 안에 살레시오 청소년 운동의 한 부분을 이루는 다양한 단체들을 장려하고; 베끼 신부님께서 1999년에 “교육 및 문화 활동도 수용하는 국립중앙출판센터와 범관구교리교육센터를 건립합시다. 이는 문화와의 대화를 가능케 해줄 것이며, 젊은이들과 함께 일하는 평신도들과 회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청소년계에 간여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제안하셨던 사업을 재출범시키고; 우리 학교들에게 적합한 수단을 갖추어 주어 살레시오 정신의 모판이 되게 하며; 사목팀을 만들고 학교의 통치에 공동체의 원장이 참여하며 학생들 사이에 살레시오 회원들이 활력을 주며 현존함으로써 “사업의 고무적 핵”이 될 살레시오 공동체와 일치를 이루는 학교를 확립시키고; 가장 곤경에 처한 가난한 이들에게 열려 있고 교리교육을 철저히 실시하며; “살레시오학교센터”를 개발하여 고무와 통치를 위한 사무실을 갖추어야 합니다.
5.2.3 동방 구역
이 지역 여러 나라들에의 사업 착수를 촉진시키기 위해, 지난 회기에 총평의회는 이곳의 관구장과 관구평의회가 최근의 관구 총회 후 총평의회에 내놓은 제안들과 그에 따른 동기들을 연구하고 승인했습니다.
그 결과 리투아니아의 사업과 형제들을 특별 구역에서 분리하여 밀라노 관구에 맡기기로 결정되었습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는, 비잔틴-우크라이나 예식 대리구가 중심 구역 안에 설립됩니다; 그것은 동방 예식 형제들로 구성됩니다.
맺는말
북유럽 지구에 대한 이 소개를 마치면서 이 지구의 특징인 살레시오 성덕에 관해 기쁘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유럽 지구는 전쟁과 박해의 시대에 실제로 희망을 증거할 수 있었던 증거자들이 특히 풍부한 지구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돈보스코의 카리스마를 전하였으며, 그들의 피로써 그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시복된 이들로는 요셉 코왈스키 신부와 포츠난의 오라토리오 젊은이 다섯 즉, 에드아도르 크리니크, 프란시스젝 케시, 야로니예브 보즈씨에초우스키, 체슬로우 요츠비약, 에드아도르 카츠미에르스키가 있는데, 이들은 1999년 6월 13일 바르샤바에서 시복되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4월 25일 로마에서 시복된 아우구스트 차르토리스키 신부도 있습니다.
가경자로 선포된 이로는 폴란드 출신 브라질 선교사였으며 59세에 그곳에서 선종한 로돌프 코모렉 신부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으로는 1921년부터 선종 때까지 30년간 폴란드에서 일한 라우라 메오치 수녀(FMA); 그리스도왕 수도회 창립자 아우구스티노 론드 추기경; 체코 공화국의 이냐시오 스투칠리 신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순교(1941--42)한 크라코우 관구 소속 Jan Swierc 신부, Ignacy Antoniowicz 신부, Ignacy Dobiasz 신부, Karol Golda 신부, Franciszec Harazim 신부, Ludwik Mroczec 신부, Wlodzimierz Szembec 신부, Kazimierz Wojciechowski 신부; 다카우 강제수용소에서 1942년 5월 30일에 순교한 Franciszek Miska(폴란드-필라) 신부; 1936년 선교사로 쿠바에 파견되어 선종 때까지 그곳에 머문 요셉 반도르(헝가리) 신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비록 교회법적 절차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기억해둘 만한 순교자 명단이 있습니다 : 성직자 Ernest Anzel, Anton Kovac 수사, 성직자 Janez Krainc, Anton Lavrih 수사, don Melhior Lilija, Franc Lindic 수사, 성직자 Stefan Lopert, Janez Lotric 수사, 성직자 Franc Miklic, 성직자 Joze Pasic, 성직자 Stanko Pungersec, Alojzij Rakar 수사, Marja Rom 수사, France Stopar 수사, 성직자 Anton Segula, 성직자 Joze Serjak, 성직자 Bernard Stuhec, 성직자 Dominik Tiselj, 성직자 Mirko Tratnik, 성직자 Stanko Tratnik. 이들은 모두 슬로베니아 관구 회원들로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점령 후 실습기와 신학 연구 및 수사와 젊은 사제로서의 상황을 강제로 그만두고 군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영미인들과 함께 피난해 있던 그들 모두가 티토와의 domobranci 조약이 체결된 뒤 유고슬라비아로 되돌려보내졌는데, 거기서 거의 모두가 살해되어 Kocevje 참호나 Hrastnik과 Lasko 탄광에 묻혔습니다.
비슷한 운명을 맞은 이들로는 1945년 5월 19일 중국 얀 파 근처에서 피살된 헝가리 출신 Giovanni Matkowics 신부, 1945년 소련군에게 피살된 폴란드 출신 Jan Dolata 신부, 1945년 5월 30일에 피살된 폴란드 출신 Ludwik Cienciala 신부, 1955년 12월 12일 사망한 체코 공화국 출신 Vojtich Basovnik 신부, 1958년 Krasnojarsk(시베리아)에서 암살당한 리투아니아 출신 Juozapas Gustas 신부가 있습니다.
그 밖의 영웅적 인물들 중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Mauthausen과 다카우로 추방되었던 체코 공화국의 Stepan Trochta 추기경이 있습니다. 그는 1947년에 비오 12세에 의해 Litomerice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948년부터 1968년까지 공산 정권에 의해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1969년에 그는 “비밀리에” 추기경으로 지명되었으며, 그의 선종 1년 전인 1973년에 가서야 비로소 그가 임명되었음이 알려졌습니다.
폴란드 평신도인 하느님의 종 Jan Leopold는 특히 1941년 5월 23일 살레시오 회원들이 체포된 뒤 크라코우-데브니키 살레시오 본당 젊은이들의 종교 생활의 고무자요 조직가였습니다. 그의 활동은 “살아 있는 묵주기도” 모임에서 미래의 살레시오 회원들이 나왔기에 성소적인 의미도 지니며, 그의 어머니 Apolonia Hrobak은 살레시오 협력자였습니다. 그는 Solvay의 노동자 카롤 보이티야 즉,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최초의 영적 지도자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복자 Wladyslaw Badzinski와 복자 Wojciech Nierychlewski는 둘 다 성 미카엘 대천사 수도회 회원들로 제2차 세계 대전의 폴란드 순교자들이며 1999년 6월 13일에 바르샤바에서 시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했던 이 모든 분들의 중재에 살레시오 성덕이 매우 풍부한 이 지구와 우리 수도회 전체를 맡깁니다. 청하오니 이분들께서,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오로 사도께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고 있는 오늘의 유럽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믿음 직하고 설득력 있고 효과적인 증거자들이 될 수 있을 은총을 구해 주시길 빕니다.
이 편지로써 살레시오 유럽 지구들 세 곳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작년 12월 1일부터 5일까지의 회합 말미에서 제가 유럽 관구장들께 소개했던 큰 확신들을 다시 되새김으로써 이 글을 맺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 유럽은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적합한 곳입니다. 이곳의 젊은이들 특히 가장 곤경에 처한 젊은이들이 돈보스코의 카리스마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 젊은이들은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의 성소이자 사명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우리가 필요하듯 우리에게도 그들이 매우 필요합니다.
- 교육은 하느님 안에서의 충만함에 이를 정도로 그들을 전인적으로 발달시키기 위해 우리가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며, 교육을 통해 우리는 오늘의 유럽 문화에서 누룩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임무는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며, 복음 전파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인간 신비의 최고 현현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계시되신 그분을 모셔가는 것입니다.
- 오라토리오는 살레시오 카리스마의 고향입니다; 오라토리오는 조직이라기보다는 교육과 젊은이들 사이의 관계의 일종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이 기나긴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이미 이뤄진 것 안에서 미래의 씨앗을 볼 수 있기에, 앞으로 유럽 살레시오 사업에 새로운 면모를 부여하는 데에 투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열성으로 실천되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열정을 쇄신시킴으로써, 그리고 돈보스코와 그분의 마음, 그분의 카리스마, 그리고 그분의 사도적 창조성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우리의 두려움과 저항을 극복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와 우리 신앙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신앙 안에서 우리를 교육하시어 열성적이며 확신에 찬 증거자들이 되게 해 주시길 빕니다.
기쁜 부활을 맞이하시길 빌며
파스칼 차베스 총장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