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남 아메리카(south cone) 관구군 소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 모두가 항상 이 편지를 받아보시길 희망하면서 애정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의 선교 계획을 살고 실현시키는 곳과는 매우 다른 맥락과 매우 다양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지역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 자신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려는 열망과 그 나라가 현존하고 있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일들을 통해서 그 나라를 건설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 내어라”(마태 10,8).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 돈 보스코는 첫 번째 선교사를 파견할 때부터 “목자 없는 군중들”로 서술하고 있는 군중 앞에서 계셨던 예수님의 동정심에 응답하시길 원했습니다. 콘비토 사제학교 시절부터 그 자신은 선교사가 되려는 꿈을 키워왔고 마침내 그는 선교적인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었습니다. 회헌 인가를 받은 지 1년이 지난 후 돈 보스코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기쁨과 희망과 생명의 살레시오 복음을 가져가는 첫 번째 살레시오 선교사들을 남미에 파견하면서 아메리카 대서사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살레시오 관구군들에 대한 보고를 드리면서 저는 이 편지에서 남 아메리카 관구군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24차 총회 때 만들어진 이 관구군은 5개 나라(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와 파라과이)가 한 그룹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 각 나라는 역사적으로 서로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 오늘날의 문화적·사회적·종교적 상황
남미에서 살레시오 현존의 개관을 살펴보기 위해서 각 나라들의 상황의 일반적인 모습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을 좋을 듯합니다. 초창기 살레시외 회원들이 처하게 된 상황을 다루려는 것이 아님을 즉시 밝히고 싶습니다. 오늘날 상황은 매우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지역의 아메리카 대륙에는 현재 2억 4천 8백만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3800만, 브라질에 1억 8400만, 칠레에 1600만, 파라과이에 600만, 우루과이에 350만.
물적 자원의 차원에서 보면 그들이 가진 모든 자원은 부자 나라들의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경제 정책은 멀리 떨어지지 않고 동일한 대륙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소위 말해서 엄청나게 부유한 나라들이 있는 제 1세계와 소외된 지역에서 가족과 일단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빈민가로 특징지어지는 제 3세계가 공존할 수 있게 합니다.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 크나큰 진전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정책이 인권에 대한 장엄한 선언과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정당한 소득분배 없이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 사이에 사회적인 양극화 현상을 가속화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소수의 사회 계층에게 소득이 집중되게 했으며, 다른 한편 그 결과로 점점 증가하는 노동자들의 소외와 가난, 실직의 증가, 도시 안에서 빈민가의 증가, 시골에서의 기근과 불행을 불러일으키면서 사회적인 소비를 감소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길거리에서 동냥을 청하는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수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소규모의 상업활동을 하거나 비행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사회 경제계획이나 기반시설(infrastructure)에 투자하기에 유효한 어떤 것도 남겨 놓지 못하는 국내외의 엄청난 부채 부담이 여기에 더해져야 합니다.
농업정책의 부재는 엄청난 도시집중화 현상의 원인을 제공하면서 농민들의 대단위 이주를 촉진시켰습니다. 도시집중화의 첫 번째 결과는 도시 외곽지역에 빈곤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교육제도는 매년 의무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은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의 배제는 실업과 청소년 비행을 증가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하게 됩니다. 청소년들에 대한 착취는 직업의 세계에서 청소년들의 참여와 강도, 마약과 매춘과 같은 불법적이고 범죄적인 행위 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나라들은 아직도 대중 종교의 특성이 강하게 표현되고 있는 가톨릭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 상황 안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신뢰를 둘만한 여론을 형성시키는 기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백성들의 상황을 살고 그들과 함께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런 전망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드러내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우루과이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종교의 자유는 원칙을 선언하는 것 이상이며, 게다가 정부는 명백히 반종교적이며 은밀하게 반성직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최근 마지막 몇 년 동안에 아메리카 전 대륙은 강력한 세속화 운동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야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사제들의 수가 항상 충분하지 않았던 반면 평신도들은 복음화를 위한 영역과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소중한 힘을 쏟아 부었고 아직도 그 여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2. 살레시오 사업의 시작
돈 보스코는 우연히 이 지역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살레시오 수도회의 첫 번째 선교 체험을 위해 이 지역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이 생각하기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돈 보스코에게 “약속의 땅”으로 파타고니아를 주셨다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돈 보스코 자신은 1871년과 1872년의 꿈에서 그들에게 맡겨진 젊은이들을 통해서 파타고니아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살레시오 선교사들을 보게 되었다고 회상하였습니다.1
수도회 회헌인가가 있은 1년 후인 1875년에 돈 보스코는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들 중 하나 인 요한 갈리에로2의 인도하게 아르헨티나에 살레시오 회원들을 파견하였습니다. 돈 보스코는 “제 2의 조국”이라는 말을 쓸 만큼 그 땅을 사랑했습니다.
1876년에는 우루과이로 가게 되었습니다. 루이지 라사냐 신부의 인도하에 파견된 선교사는 빌라 콜론(Villa Colón)이라는 집을 설립했습니다. 우루과이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은 1883년에 브라질로 1896년에 파라과이로 가게 됩니다.
동시에 살레시오 회원들은 Concepción의 집을 세웠던 1887년에 칠레에 도착했습니다. 이듬해에 Talca에 집을 세웠습니다. 1891년에 산티아고에 “La Gratitud Nacional”라는 사업을 인수함으로써 칠레에서 살레시오회의 현존이 보다 든든해졌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나라들 안에서 매우 널리 읽히던 프랑스 신문이 돈 보스코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빨리 사업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대주교인 페데리코 아네이로스(Federico Aneyros), 하느님의 종인 몬테비데오의 주교인 하친토 베라(Jacinto Vera), 리오 데 자네이로의 주교인 페드로 마리에 데 라세르다(Pedro Maria de Lacerda)와 같은 많은 주교님들의 후원도 주목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의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지원도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살레시오 가족지와 가톨릭 문고 이외에도 살레시오 회원들이 편집한 다른 잡지들이 돈 보스코를 알리고, 예방교육과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관심을 알리기 위해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2.1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와 산 니콜라스 데 로스 아로이오스(St. Nicolás de los Arroyos)에 도착한 살레시외 회원들은 돈 보스코의 권고를 따르면서 이태리 이민자 그룹들을 따르면서 사목을 시작하였습니다.
가난한 이주민들을 위해서 참된 축복이었던 살레시오 회원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성직자와 사회로부터 항상 이해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알마그로(Al magro)의 땅과 집을 취득하면서 살레시오 회원들은 그들 명의의 부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들은 매우 발 빠르게 대규모로 교리교육 운동을 시작하고 교리경시대회를 열었고 80만부의 교구 교리서를 출판했습니다. 1882년에 협력자들의 신심 깊은 일치를 조직했습니다. 돈 보스코께서 돌아가신 1888년에 성소를 위해서 도움이신 마리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관구장이던 야고보 코스타마냐 신부의 지도 아래 살레시오 사업은 나라의 내륙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벨라레아의 농업 학교를 시작하면서 살레시오 회원들을 농부들의 자녀들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동시에 1879년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하게 되고 후에 빠른 속도록 여러 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의 현존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1900년 11월에 살레시오 협력자들의 2차 국제회의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 때 바오로 알베라 신부가 돈 루아의 이름으로 이 회의를 주관하였습니다. 이 회의에는 6명의 주교들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관구장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회의를 통한 열매는 알마그로의 성 카를로스 성당을 구세주 예수님과 도움이신 마리아께 봉헌하였고 말도나도(Maldonado)에서 돈 보스코의 고아들을 위한 구세주 예수 학교의 설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도회의 차원에서 본다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남부와 마토 그로소(Mato Grosso) 관구장들이 참여한 첫 번째 아메리카 살레시오 회원 총회가 개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총회는 바오로 알베라 신부가 의장을 맡아 주관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다룬 주제들은 수도 서원 준수, 양성,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 경제적인 문제, FMA들과의 관계, 축일의 오라토리오, 전례 거행, 음악과 수도자들 사이의 우정이었습니다. 요셉 베스피냐니 신부는 “그 해에 우리 모두 안에 살레시오 정신과 애정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대주교는 돈 보스코 탄생 100주년(1915)을 기념하기 위해서 사목서한을 썼는데, 그 서한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일하고 있는 살레시오 회원들과 FMA의 활동에 대해서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창립자가 그의 섭리적인 사업 안에 새겨 넣을 줄 알았던 적극적이고 인내하는 애덕의 정신과 방법”으로 교육받은 남녀 젊은이들의 전체적인 숫자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살레시오 회원들은 “사회를 구하기 위하여 도움이신 마리아의 권능과 선하심을 새롭게 드러낸 사람들 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해에 베스피냐니 신부의 혜안으로 태어난 청소년 운동의 한 형태인 바덴 포웰(Baden Powell)의 보이 스카우트와 비슷하지만 명백히 그리스도적이고 살레시오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돈 보스코 스카우트”가 창설되었습니다. 1940년에 돈 보스코 스카우트는 45개 대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980년에는 살레시오 회원들 가운데 65개 대대에 9000여명의 청소년들이 있었고 FMA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15개 단체에 대원이 2000여명에 달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전파하기 위한 살레시오 회원들이 기울인 노력 중에 특별히 아퀼레스 페드롤리니 신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로데오 델 메디오(Rodeo del Medio)에서 마리아께 대한 공경하는 마음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중요한성지를 만들었습니다. 1916년 10월 8일에 꾸이요(Cuyo)의 주교는 그 도시의 공원에 도움이신 마리아 상에 화관을 씌웠습니다. 거기에는 다른 두 주교와 교회의 몇몇 고위 성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8000명이나 되었습니다.
파타고니아에서
(다른 수도회가) 첫 번째 선교 시도에 실패한 후, 1879년에 살레시오 회원들이 파타고니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1880년에 그들은 공식적으로 선교사명을 맡게 됩니다. 로마에서 돈 보스코는 대목구을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였고 1883년 요한 갈리에로 주교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모든 법적인 어려움을 예방하기 위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대주인 페데리코 아네이로스는 몬시뇰 갈리에로를 주교의 모든 권한을 가진 파타고니아를 위한 총대리로 임명했고 대교구의 예산에 선교를 위한 예산을 포함시켰습니다.
이 땅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복음화 활동과 도시문명화 활동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과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은 선교 활동에 그들이 양성활동을 통해서 체득한 전형적인 요소들을 대상자들에게 전해줍니다. 그래서 악기들, 노래, 공연, 연극 상연, 작은 복권 발행은 사막과 같은 지역에서 사람들의 기쁨이 넘치게 했고 다양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공권이 도달할 수 없었던 지역에 선교사들이 도착한 것입니다.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선교활동을 중심으로 일치되고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고립되거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남녀 종교인 연합회를 만들게 됩니다.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조건이 이들의 도움을 요청할 때면 언제나 사회에 대해서 상호 원조를 베풀어 왔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예수성심과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확산되었고 창립자인 돈 보스코가 돌아가신 뒤 그분에 대한 신심이 확산되었습니다.
학교교육 분야에서 선교사명은 그와 같은 원조가 없었을 때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술과 기술학교가 시작되었고 선교사명에 의해서 얻게 된 땅을 이용하면서 농업기술의 실제적인 가르침도 주기 시작했습니다. 비에드마에서는 그 지역에선 처음이자 유일한 병원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은 환자들의 병상에서 밤을 세웠고 환자들을 방문하기 위해서 그들의 집을 찾아 갔고 인디오들의 천막까지 방문했습니다. 수녀님들은 학교와 인디오의 딸들을 위한 고아원도 운영했습니다.
살레시오 선교 50주년(1925)을 기념하기 위해서 코모도로 리바다비아(Comodoro Rivadavia)에 살레시오 기숙학교를 시작하였고 그 부속건물로 산타 루치아 교회를 축성하였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전문기술박람회를 개최하였고 필립보 리날디 신부를 대신하여 요셉 베스피냐니 신부의 주관으로 아홉 번째 살레시오 협력자 국제 회의와 제 2회 동문들의 국제 회의가 열렸습니다. 살레시오 회원과 FMA의 남녀 학생들 만이천명의 퍼레이드는 이 장엄한 기념을 더욱 영예롭게 했습니다. 회의 열매로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위한 새로운 집을 열 것을 제안받게 됩니다.
돈 보스코의 시복식을 계기로 장엄한 축제가 벌어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정부 관료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든 살레시오 가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방의 라 플라타(La Plata)에서 위대한 교육자를 위한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지방 정부의 주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영예롭게도 돈 보스코 흉상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국가교육자문회의 회의실에 배치되었습니다.
2.2 우루과이
우루과이에 살레시안이 도착한 것은 행운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우루과이는 로렌조 라토레 정권하에서 근대화가 추진되고 있었고 해외 자본, 특별히 영국의 도움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몬테비데오와 인접한 빌라 콜론에 새로운 지역이 건설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동방의 공화국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기숙학교 하나를 갖기를 열망해왔습니다. 학교 건물을 세우는 동안 처음네 개신교 신자들이었던 후원자들은 그들 학교에 적용할 수업계획을 “국민 교육 친우회”에 요청하였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교육학의 고전 중 하나인 호세 페드로 바렐라(José Pedro Varala)의 푸에블로 교육(La Educación del Pueblo)이라는 책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교육학적 직관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살레시안 들이 이 같은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 갈리에로 신부는 1875년부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몬테비데오를 여행하게 되었고 1876년 5월 24일 돈 보스코께 새로운 기숙학교를 인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 해 12월 26일 루이지 라사냐(Luigi Lasagna)신부는 다른 살레시오 회원들과 함께 몬테비데오 항에 도착해서 새로운 집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들은 학업과 교육 계획에 상응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능력이 요구되는 문화적으로 세련된 사회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몬테비데오에서 학교환경을 지배하고 있는 반성직주의적 서클은 살레시오 회원들이 발레라가 제안하는 학사 계획을 운영하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라사냐 신부의 끊임없는 경계와 확고한 의지를 통해서 이 위기가 멋지게 극복되었습니다. 그는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 대부분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숙학교를 보호하기 위해서 학생들 자신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1880년에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관구장이었던 라사냐 신부는 프란치스코 보드라토 (Francesco Bodrato) 신부와 루아 신부의 지침을 따랐습니다. 빈첸시오 드 폴 회에 속해있던 성 프란치스코 드 폴의 학교들, 부속건물로 양성 공동체를 가지고 있는 라스 피에드라스(Las Piedras) 본당과 기숙학교를 가지고 있던 파이산두-로사리오(Paysandú–Rosario) 본당이 살레시안들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이어서Mercedes, Paysandú–San Ramón, Montevideo–Sacro cuore 와Talleres Don Bosco가 살레시안들에게 속하게 됩니다. 몬테비데오의 외곽지역을 위해서 축일의 오라토리오회(la società degli oratori festivi)라는 독창적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라사냐 신부 자신이 몬테비데오 외곽지역에 연 열 개의 오라토리오가 운영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선구자이며 선교사께서 돌아가신 후에 우루과이와 브라질 관구는 두 개로 분리되었습니다. 우루과이와 파라과이가 하나의 관구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몬시뇰 라사냐는 가톨릭 노동자 서클의 설립을 강력하게 지원했습니다. 동시에 첫 번째 서클을 지도하고 살레시오 회원이 되어 그에게 순명하고자 했던 안드레아 토리엘리(Andrea Torrielli) 신부는 노동자 서클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을 첫 번째 임무로 받았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젊은이들의 일거리가 있는 도시 안에서 노동자들의 서클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05년에 라스 피에드라스(Las Piedras)에 있던 양성 공동체는 1898년에 몬시뇰 솔레르(Soler)가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주준 “Juan Jackson” 농업학교로 이전했습니다. 1910년에 졸업생들을 돌보고 그들에 대한 고무를 위해 “크리스토퍼 콜롬보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1915년에 마침내 Villa Colón에 몬시뇰 루이지 라사냐의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비오 기숙학교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헥토르 살레베리(Héctor Sallaberry)신부는 영성수련에 대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희년을 기념하기 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업이 졸업생들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몇 달 후에 빌라 콜론에 수도회에서 첫 번째 영성수련의 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영성수련에 대한 제안이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고 그 같은 창의적인 생각은 크나큰 영적 사도적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에 대해서는 1898년에 몬테비데오의 대주교가Villa Colón에 비오 기숙학교가 있는 교회에 도움이신 마리리아께 봉헌된 범 국가적 성전을 세우도록 요구했습니다. 1901년 12월 14일 대주교가 도움이신 마리아 성전을 축성하였고 1904년 10월에 그곳에서 공경하던 마리아 상에 장엄한 화관식이 행했졌습니다.
2.3 브라질
1877년 리오 데 자네이로의 주교인 페드로 마리아 데 라세르다 (Pedro Maria de Lacerda)주교는 자신의 교구3를 위해서 살레시오 회원의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돈 보스코에게 썼습니다. 그 뒤 그가 토리노에 갔을 때 그는 어느 날인가 브라질에 오게 될 선교사들을 위해 여행비를 미리 주고 돌아갔씁니다. 남부 리오 그란데 주에는 카푸친 회원들이 우루과이에서 알고 있던 살레시오 회원들에 대한 많은 선전을 했었고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의 주교는 자신의 교구에 살레시오 회원들을 파견해달라는 부탁을 루이지 라사냐 관구장에게 했었습니다.
돈 보스코에서 이 일에 대한 위임을 받은 라사냐 신부는 1882년에 브라질에 갔습니다. 그는 벨렘 도 파라(Belém do Pará)에까지 해안을 따르는 긴 여행을 하였고 니테로이에 산타 로사 기숙학를 하면서 살레시오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883년 7월 14일 그는 첫 살레시오 회원들과 함께 리오 데 자네이로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산 파울로(1885)와 로레나(1890)의 집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1891년에 레시페(Recife)에 있는 집을 인수하게 되었지만 1894년에 가서야 그 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Oea-Tripoli의 주교가 된 라사냐 주교는 퀴아바(Cuiabá)와인디오 바로로스 사람들(Indios Bororos)(1894)을 위한 첫 번째 선교인 la Colonia Teresa Cristina를 창립했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집들은 우루과이-브라질 관구에 속해 있었고 이 같은 상황은 라사냐 주교가 선종할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브라질의 집들이 분리되어 새로운 관구가 되었고, 브라질의 첫 번째 관구가 탄생한지 오래지 않아 마토 그로소(Mato Grosso)관구가 탄생했습니다.
라사냐 주교가 인수했던 두 개의 집, 즉 산 파울로의 캄피나스(Campinas)와 미나스 제라이스 (Minas Gerais)의 카쵸에이라 도 캄포 (Cachoeira do Campo)가 즉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마토 그로소에 코룸바 (Corumbá), 바히아 (Bahia)에 살바도르, 페르남부코 (Pernambuco)에 Jaboatão 농업 학교, 세르지페 (Sergipe)에 테바이다 (Tebaida) 농업학교 순으로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같은 발전은 이미 1901년에 브라질 남부 관구, 마토 그로소 관구와와 바히아에서 아마존 지역까지 담당하는 북부 관구에 이르는 세 개의 관구가 만들어질 정도로 매우 빠른 것이었습니다.4 1년 뒤에 마토 그로소 정부의 새로운 정치적인 선택 때문에 테레사 크리스타 학교 운영을 포기한 살레시오 회원들은 동부 바로로스 사람들과 함께 주(州)의 동부 지역에 고유한 선교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머지 않아 살레시오 회원들은 그들의 교육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충분한 경제조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회의 압력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술학교에 대한 계획을 뒤로 미루면서 그들의 학교 운영을 인문계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했습니다.수도회는 그 때부터 브라질에서 학교와 오라토리오라는 양쪽의 폐로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처럼 브라질에서도 처음부터 살레시오 회원들은 돈 보스코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확산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루이지 잔케타 (Luigi Zanchetta)신부는 가톨릭 잡지의 원장으로서 잡지와 다른 많은 홍보를 통해서 브라질 전역에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확산시켰습니다. 그래서 아직 코르코바도 (Corcovado)의 거대한 그리스도 상이 건립되지 않았을 때 순례의 메카가 되었고 과나바라 (Guanabara) 만의 파노라마에 갖게 된 최초의 종교적 상징물이 된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기념비가 니테로이 (Niterói)에서 산타 로사 기숙학교의 전망 좋은 언덕에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감금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비오 7세 교황에 의해서 세워진 도움이신 마리아 축일 전례 100 주년과 돈보스코의 탄생 100주년을 대축일로 장엄하게 기념하기 위하여 1915년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산 파올로에서 (해당 문헌에 따르면) 일과 교육을 통해서 실현되어야 할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 재건”이라는 주제로 살레시오 협력자회의 제 7차 국제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 열매로서 살레시오 본당이 인접해있는 봄 레티로(Bom Retiro) 지역에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직업교육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살레시오 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2.4 칠레
칠레에서 돈 보스코와 살레시오 회원들은 산티아고, 발파라이소, 탈카와 콘셉시온에서 그 명성을 날렸습니다. 밀로의 명의 주교인 스페인 출신의 마르셀로 스피놀라 주교의 돈 보스코와 그의 사업(Don Bosco y su Obra)이란 책은 칠레에서 널리 읽혔습니다. 1869년과 1887년 사이에 이태리를 방문했던 칠레의 지도적 인사들은 청소년들의 성인의 특별한 위대함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블라스 카냐스(Blas Cañas) 신부는 돈 루아의 지도아래 1872년에 산티아고에 “성 요셉의 보호”( Patrocinio di San José)라는 집을 설립했습니다.
돈 보스코는 1876년에야 칠레의 선교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장래의 사업을 위한 정보를 청하면서 콘셉시옹의 주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동시에 그는 주교에게 산티아고(Santiago), 발파라이소(Valparaíso)와 콘셉시옹(Concepción)에 세 곳에 새로운 집의 설립을 제안했습니다. 칠레 땅에 도착한 첫 번째 살레시오 회원은 도미니코 밀라네시오 신부로 그는 1886년 3월 살레시오 가족지에 콘셉시옹으로 가는 선교여행 중에 글을 썼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기술학교와 축일의 오라토리오, 보다 가난한 지역에 대한 사목적인 배려와 마젤란 해협의 인디안들에 대한 선교를 그들의 사도적인 사업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돈 보스코께서 돌아가셨을 때 칠레에는 콘셉시옹,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와 탈카 (Talca) 세 곳에 살레시오 회원들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매우 잘 준비된 일단의 살레시오 협력자들이 콘셉시옹과 탈카에 살레시오 회원들의 도착을 준비하고 있었고 산티아고와 발파라이소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면 푼타 아레나스에서는 어느 누구도 살레시오 회원들의 도착을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돈 루아가 돌아가셨을 때 칠레에 살레시오 집은 14개였습니다. 이들 중 네 개(세레나, 산티아고, 탈카와 콘셉시옹)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예술과 직업학교였고 내부의 부속 건물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맞이하기 위한 집도 제공하였습니다. 푼타 아레나스의 성 요셉 기숙학교에는 구두제조, 목공소, 인쇄소와 제본소에 기술자로 양성을 받고 있는 일단의 청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상업 학교는이뀌께(Iquique), 발파라이소와 발디비아(Valdivia)에 세 개가 있었습니다. 리나레스(Linares)와 푼타 아레나스에는 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성 요셉의 보호”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가지고 있는 기숙학교였습니다. 지원소와 수련소는 마쿠엘, 산티아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푼타 아레나스와 포르베니르에서만 본당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산티아고에 있는 국립 유치원과 예수 성심에 봉헌된 국가적인 감사의 표시로 만들어진 성전인 “La Gratitud Nacional”의 집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젤란에서 펼쳐진 선교사업과 돈 보스코와 살레시오 정신의 전형적인 낙관주의와 역동주의라는 특성으로 드러나는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보여준 관심은 사회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과 대개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인쇄 또한 살레시오 세계를 알리고 좋은 평가를 받게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1907년에 전단지로서 “도움이신 마리아의 메시지”( El Mensajero de María Auxiliadora)와 “가톨릭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칠레에 두 개의 관구를 두려고 생각했었습니다. 마젤란에 대한 지목구 사업은 1887년부터 돌아가시기까지 요셉 파냐노 몬시뇰이 관구장으로 계셨습니다.
1892년에는 산티아고에 본부를 둔 성 가브리엘 관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1902년부터 이 관구로부터 페루와 볼리비아 사업들이 속하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도 칠레의 남부와 중부지역과 북부지역에 들어오게 됩니다. 1910년에 10개의 집이 있었습니다. 1896년에 카타리나 다게로 총장수녀님이 도슨 (Dawson) 섬의 선교지를 방문하셨습니다.
푼타 아레나스의 지목구
1882년에 콘차(Concha) 신부는 불의 땅(아르헨티나)의 인디오들에게 선교사로서 도착했을 때 푼타 아레나스에 집 하나를 세울 것을 돈 보스코에게 건의했습니다. 돈 보스코와의 다양한 접촉을 가진 후 1883년 신앙포교성성은 푼타 아레나스에 본부를 둔 파타고니아 남부에 지목구를 설정했습니다. 이것은 불의 땅, 포크랜드 섬과 그 지역에 있는 다른 섬들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목구장으로 요셉 파냐노 신부가 임명되었습니다. 1886년 10월에 그는 불의 땅을 탐험하기 위해서 일단의 과학자들과 군인들의 파견과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출발했습니다. 인디오들을 복음화시키고 세례를 주면서 그는 지목구의 본부가 푼타 아레나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인디오들을 위한 선교를 위해서 몬시뇰 파냐노는 브라질과 볼리비아에서 예수회 회원들이 만들어 낸 Riduction 제도(역주, 인디오의 교육을 위해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미에 설립·통제한 촌락, 개척지)보다는 파타고니아에서 행한 관습적 체계인 여정의 선교사 제도를 선호했습니다. 1889년에 도슨 섬에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몬시뇰 파냐노는 1880년에 스페인에 가면서 20년간 섬의 이용권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살레시안들은 알라칼루프 (Alakaluf) 인디오들과 나중에 오나스 (Onas) 인디오들을 그들의 선교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은 여성들과 소녀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교리교육과 함께 읽고 쓰고 요리하고 옷을 수선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청소와 위생에 대한 기본적인 규칙들을 알려주었고, 노래하고 바느질하는 법과 신발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책임과 고무는 지칠 줄 모르는 회원인 몬시뇰 파냐노였습니다. 그는 유능한 사회지도자들의 도움으로 특수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더욱 단순하게 선교사업에 필요한 도움을 얻기 위하여 자주 선교지를 방문했고 그들이 행한 일을 정부에 알리기 위해서 산티아고나 유럽을 방문하였습니다. 나중에 푼타 아레나스의 교회행정에 대한 문제 때문에 앙쿠드(Ancud) 교구와 대립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는 로마로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1916년에 앙쿠드 교구에 의존하는 마젤란 대목구(Vicariato Apostolico)가 만들어졌고 살레시오 회원인 아브라함 아괼레라 브라보 신부가 대목구 (Abraham Aguilera Bravo)의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탈카와 푼타 아레나스에서는 오월 달에 거행되었고 산티아고에서는 장엄한 삼일 기도로 거행된 돈 보스코의 시복식(1929)을 위한 축제행사가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출판 사업은 청소년들의 사도의 모습과 그의 사업에 대한 칭송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습니다. 새로운 복자에게 사랑 가득한 열정으로 졸업생들은 그들의 세 번째 동문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그들은 동문회에서 돈 보스코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였습니다.
다른 라틴 아메리카에서처럼 칠레에서도 살레시오 현존을 가장 현저하게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었습니다. 도처에서 도움이신 마리아께 봉헌된 많은 경당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오늘날 네 개의 본당과 도움이신 마리아께 봉헌된 교회 4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2.5 파라과이
돈 보스코가 수도회의 보호자였던 니나 추기경의 요청에 응답했던 1879년에 교구 신학생 양성을 도와주기 위하여 아순시옹 (Asunción)에 몇 명의 살레시오 회원을 파견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요한 알라베나 신부는 성주간동안 자신의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러 거기에 갔고 파라과이에서 두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약속했던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라자로회 회원들은 1880년에 파라과이에 왔고 살레시오 회원들은 파타고니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2년 후 안젤로 사비오라는 다른 살레시오 선교사가 아순시온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브라질과의 국경지역인 바히아 네그라 (Bahía Negra)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는 차코 (Chaco)의 인디오들과 첫 번째 만남을 갖게 되었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오면서 파라과이를 위한 선교사들의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살레시오 최고 장상들과 신앙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1892년 11월에 몬테비데오에 있는 파라과이의 영사인 마티아스 알론소 크리아도 (Matías Alonso Criado)는 파라과이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서 살레시오 회원들이 필요하다는 것과 차코 파라과이 사람들 중 인디오들의 비참한 상태를 강조하면서 성청에 편지를 썼습니다. 람폴라 (Rampolla) 추기경은 차코에 선교를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과 아순시온에 예술학교와 기술학교 설립 가능성을 연구하기 위하여 살레시오 최고 장상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는 교황님의 의중을 돈 루아에게 전달했습니다. 총회에 참석차 이태리에 온 라사냐 (Lasagna) 신부는 로마에 체류하던 중 후에 오에아-트리폴리 (Oea-Tripoli)의 명의 주교로 임명된 후 아메리카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해에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 돌아온 그는 즉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라사냐 주교가 돌아가신 뒤 아순시온의 새로운 기숙학교의 원장으로 암브로지오 투리치아(Ambrogio Turriccia)가 임명되었습니다. 새로운 선교사들이 1896년 7월 14일 몬테비데오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차코의 선교사업을 위한 교두보으로써 건설된 도시인 콘셉시옹에1900년에 두 번째 집이 설립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비스타 알레그레(Vista Alegre)의 교외에 오늘날 “Salesianito”로 알려진 예수성심께 봉헌된 성당과 작은 집 하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02년에 그 집의 원장과 정부 사이에 마찰이 있었는데 이것은 아순시온의 기숙학교의 문을 닫도록 명령하게 만들었습니다. 국회의 법률에 건물들은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기증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입법기관과 행정권 사이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많은 중재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해결책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투리치아 신부를 칠레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오늘날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새로운 자리로 옮겨갔습니다. 기숙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고 병원은 정부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1919년부터 차코의 여러 마을에 선교사들이 거주하기 시작하했습니다. 1924년에 이파카라이(Ypacaraí)의 농업학교가 개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파라과이에 살레시오 현존의 성장은 1954년에 그들의 관구를 갖게 하였습니다.
도미니코 궤이롤로(Dominic Queirolo) 신부는 과라니족의 나라(파라과이)에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대중적 차원으로 확산시켰습니다. 그는 돈 보스코의 성모님께 이름이 붙여진 성당과 경당들의 건축에 탁월한 인물이었으며 “도움이신 마리아의 메시지”( El Mensajero de María Auxiliadora)라는 주간지 출판으로 도움이신 마리아 축일에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차코의 살레시오 선교사들의 장상은 선교사들의 명칭을 도움이신 동정녀라 붙였습니다.
1932-1935은 쉽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차코 전쟁은 파라과이의 남성 인구의 십 분의 일을 죽게 했습니다. 살레시오 기숙학교들은 병원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퀘이롤로 신부, 에르네스토 페레즈 신부와 살레시오 성무감들은 보호자요 파라과이 병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도움이신 마리아의 보호에 온전한 신뢰를 두도록 병사들과 파라과이 백성들 안에 믿음을 불어넣었습니다. 도움이신 동정녀께 대한 신심은 파라과이 사람들의 영혼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기억해야 할 다른 이름이 있는데 그분은 코로넬 오비에도(Coronel Oviedo)와 도움이신 마리아께 영예를 드린 알토 파라나(Alto Paraná)의 대성전들을 건축한 구이도 코로넬 신부입니다. 그는 알토 파라나 평야의 수호자로 도움이신 마리아를 선포라도 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동일한 임무와 열정으로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은 집들과 그 나라의 여성들의 세계에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3. 살레시오 현존
남미지역에서 살레시오 현존은 돈 보스코의 꿈과 그분의 선교 열정으로부터 유래합니다. 카리스마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 문화의 일부가 되기까지 그렇게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대륙의 가장 큰 종교적인 힘이 살레시오 수도회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성장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130년이 지난 후 캐나다에서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이르기까지 북 아메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살레시오 현존은 23개국에 26개의 관구와 2개의 준관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남미지역은 14개의 관구가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5개 관구, 브라질에 6개 관구, 우루과이에 하나의 관구, 칠레에 하나 그리고 파라과이에 하나의 관구가 있습니다. 가장 적합한 조정을 위해서 그 지역은 두 개의 관구 협의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CISUR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관구들로써 부에노스 아이레스, 바히아 블랑카, 코르도바, 라 플라타,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와 칠레, 파라과이와 우루과이 관구들입니다. CISBRASIL은 벨로 오리존테, 캄포 그란데. 마나오스, 포르토 알레그레, 레시페와 상파올로로 포르투갈어를 쓰는 관구들입니다.
오늘날 관구군에는 1788명의 SDB와 312명의 수련 전 양성자들이 있고 이들 중 96명이 수련자입니다. 이 지역 나라들의 젊은이들의 높은 비율, 종교적이며 가톨릭 신앙의 배경, 성소자들과 초기양성 중에 있는 형제들의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관구군 안에 살레시오 회원들의 수가 어렵게 유지되고 있으며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의 수가 감소하는 현상을 받아들이면서 양성의 질적인 면이 향상되도록 노력하면서 관구들은 관구 상호간의 협력을 촉진하고 쇄신과정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업체들은 더 이상 수도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평신도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반면 어떤 관구에서는 사업체의 수가 약간의 감소를 보였지만 사목 활동은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3.1 수도생활
기쁨과 나눔과 진지함으로 형제들의 수도성소와 사목적이며 교육적인 봉사 안에서의 임무 그리고 형제적인 생활, 서원에 대한 충실성, 기도 생활과 계속 양성의 삶을 사는 대부분의 형제회원들의 수도생활의 본질에 충실한 행위가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편으로 비록 평균 연령이 올라가긴 했지만 많은 형제 회원들이 기숙학교와 본당에서 관대하게 직무를 맡아 수행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원장들과 경리와 본당신부의 역할을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형제들의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업에서 원장은 행정의 책임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이것은 형제회원들에 대한 영적 지도의 임무와 사명에 대한 카리스마적인 고무에 대한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업에 대해서 살레시오 회원들의 수적인 불균형과 형제회원들의 감소는 종종 사목적인 개인주의의 유형에 떨어지게 하는 사업과 질적인 봉사를 제공한다는 측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 책임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게 합니다.
성소와 성소들
이 지역에서 성소적 자원이 부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 관구군에 포함된 나라의 인구의 평균 연령, 종교적인 배경, 가톨릭적이며 문화적인 토대와 많은 지역이 가지고 있는 가난도 봉헌 생활이나 사제 성소가 아직까지 풍요롭다는 것에 기여하는 모든 요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소에 대한 유사한 제안이 대다수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찾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종종 거부를 당하는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 대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는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한편으로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와 파라과이에서 젊은이가 아직 많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가치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렇게 매년 많은 젊은이들이 돈 보스코와 살레시오 사명을 위해서 관대함과 열정을 가지고 그들의 양성 여정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비판적인 요소를 본다면 이들 후보자들이 종종 불행히도 나약한 성소동기, 불안정한 인간적 토대와 동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적 양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업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이 많고 살레시오 청소년 운동 연합의 여러 형태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분명하게 자신이 살레시오 성소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해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지속적으로 성소가 감소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성소의 감소로 가장 고통을 당하고 있는 관구들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관구입니다. 반면 브라질에서는 성소 부활이 일어나는 시기를 현재 살고 있습니다. 성소부활의 원인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칠레는 이 분야에서 특별하고 열매가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파라과이는 현재 청소년 사목과 성소 사목에서 그들의 열매를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개인 안에서 성소의 감소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염려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원인들과 가능성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삶의 계획이 성숙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청소년 사목과 사회자원봉사와 선교 자원봉사의 체험을 포함해서 잘 준비된 동반, 성사적인 삶의 임무와 진지한 식별여정을 계획하는 성소사목을 위한 계획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2 공동체의 형제적 생활
1년 전에 개최했던 관구총회와 이 지역의 두 관구 협의회와 함께 한 관구합동평의회는 “오늘의 살레시오 공동체”라는 제 25차 총회의 주제가 공동체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보다 적합한 기준과 성찰의 틀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었습니다. 이것을 적용하는 정도의 차이와 성취의 차이가 있음에도 공동체들은 총회가 제시한 5가지 주안점을 취했습니다. 이것을 돈 보스코가 원하셨고 “한 곳에서 하나의 정신으로 그리고 하나이며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Vivere in unum locum, in unum spiritum, in unum agendi finem)이라는 말로 표현된 공동체 모델을 실현할 방도를 찾았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형제적인 공동 생활”이라는 근본적인 직관의 회복으로 “공동 생활(Vita commune)”과 “형제적 생활(Vita fraternal)” 사이에 존재하는 잘못된 문제를 극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방식 안에서 비록 깊은 인간 상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공동체에서 “그저 별 문제없이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해도 그리고 함께 살기 위한 조건들이 구체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해도 최고의 가치로서 제시되는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을 접어버리는 것은 삼가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공동체의 날”, 사업에 대한 평의회의 기능, 공동체 아셈블레아, 핵심고무자로서CEP의 역할을 개선시켜왔습니다. 마지막 요소에 대해서 비록 이것이 역동성을 주고 모든 사업을 변화시킬 수 있는 누룩이 되기 전에 아직도 긴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고 해도 CEP의 가치는 항상 더욱더 크게 드러나게 됩니다.
2002-2008 회기를 위한 계획에 총장과 그 평의회에 의해서 선택된 목표들은 대부분의 관구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고 사실 그들의 년간 계획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동일한 목표들의 실현을 드러내는 활동들이 있습니다. 형제들의 수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공동체를 보다 의미 있게 하자는 호소는 한 공동체 안에서 형제회원들의 수를 강화시키고 평생양성과 사목적 의미성을 길러주는 삶의 리듬을 촉진하면서 많은 관구로부터 행해진 노력에서 그 응답을 찾았습니다. 어떤 경우에 사업의 수가 감소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중 어떤 것은 평신도들에게 맡겨졌고 그럼으로써 얻게 된 이점은 형제회원들이 그들의 특별한 사명에 좀더 직접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도적인 임무, 사업의 분야들, 복잡한 사업과 형제들의 수 사이의 거대한 불균형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현존의 신원, 교육사목적 제안의 질(質), 가벼운 증거, 영적이며 성소적인 풍요로움이 위험에 처해지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 특히 보다 가난한 젊은이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만나러 나가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우리의 사목적 감수성과 우리가 사회적이고 사목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불리지 않았으며 또 그화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는 확신 사이의 균형을 잡고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3.3 살레시오 사명
우리가 알고 있는 살레시오 사명은 사업이나 활동과 동일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것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사명은 무엇보다도 ‘영혼들, 특히 젊은이들의 영혼의 선익을 위해서!’라는 돈 보스코의 열정입니다. 그러므로 청소년 사목의 과제는 이 같은 선교적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고 그것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실천적인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남아메리카 관구군 차원에서 1985년에 칠레 괸구의 통합으로 SEPSUR로 바뀐 ““Secretariado de Pastoral Juvenil de Plata” (SECPLA)이 만들어졌고 그것은 활력과 조직력 그리고 효과적인 활동을 드러냈습니다. 자문 그룹들, 쇄신 과정들, 사목적인 자료들을 준비하기 위한 세미나, “청소년 사목 자료집(cuaderno de PJ), 사업과 지역의 고무자들과의 특별한 만남, 젊은이들과의 만남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브라질 관구군 협의회 안에서 이 같은 과제가 청소년들의 모든 활동을 조정하는 “청소년사목 조정 위원회”(Artioclazione della Gioventú)(AJS)에게 맡겨졌습니다. 이 브라질 국내 자문기관은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였고 지역 고무자들을 위해서 매우 유용한 결과를 제공했던 “Cadernos Salesianos”와 같은 흥미있는 자료들도 만들어냈습니다. 현재 이 팀에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효한 이 같은 통합은 두 수도회가 걸어가는 여정의 다양성과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일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고, 안정된 그룹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협력을 신뢰하고 서로 협조하려는 원의에 큰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젊은이들의 환경을 조정하고 협조자들, 고무자들과 사목 기구들이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서 CISBRASIL이라는 연구 팀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팀은 해마다 각 관구의 청소년 사목 대리와 만남을 가집니다. 거기서 나오는 자료들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에 대한 것으로 선교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젊은 자원봉사자들의 증가에 주목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형제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청소년들 특히 신앙 여정을 위해서 젊은이들을 동반하는데 준비된 살레시오 회원의 수가 감소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학교 분야
관구군에는 학교 분야가 가장 강하고 의미 있는 봉사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살레시오 회원들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정규교육사업의 성장이 있었고 특히 고등교육수준의 학교(IUS)들이 증가하였습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모든 관구들은 다양한 종류의 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조금 뒤에 언급할 것입니다.
CISBRASIL에서 정규교육 분야에서 가장 강조할 만한 것은 아마도 다양한 학교들 사이의 연결 네트워크를 만든 것입니다.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 관구들과도 협력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학교들의 살레시오 신원을 보장하고, 살레시오 교육학 안에서 교수들을 양성하며, 특히 국가의 관례를 따르는 학교들을 위해서 살레시오 교육학의 노선을 따라서 교재들을 만드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연구 서적을 만들어내는 것을 본다면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몇 년 전부터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의 EDEBE 살레시오 출판사와 함께 제도적인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재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학교의 상황은 각양각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칠레의 살레시오 학교는 정부로부터 전적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반면 아르헨티나의 학교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낼 수 있는 분담액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주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와 우루과이의 학교는 어떤 형태의 보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경제적인 가능성이 없는 가족들은 명확한 교육 정책을 가지고 있는 명문 학교를 선택하여 자신의 자녀를 보낼 수 없으며 이러한 선택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농업학교와 전문기술양성센터
남미 관구군의 나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살레시오 현존 중 하나가 농업학교였습니다. 과거보다는 그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해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와 파라과이 관구는 높은 수준을 인정받고 있는 농업학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브라질과 같은 농업 강국에서 농업학교는 청소년들과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그다지 호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약간 역설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숙학교에 대한 운영 중단과 함께 브라질에서의 농업학교는 모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반면 전문기술양성센터는 다양한 체계들 특히 유럽의 체계들은 강력한 경제적이며 물질적인 지지를 그들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증가되었습니다. 돈 보스코 시대처럼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 또는 젊은이들은 경제적으로 그들의 가족을 도와주기 위해서 일해야 하고 기술학교에서 그들은 직업세계에 적극적이고 전문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양성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분야에서 우리의 현존은 강하게 추진되고 지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보다 가난한 젊은이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고 직업세계와 우리를 연결시켜줍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모델이 확실한 이미지와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제공하는 고등교육과 대학교육보다 탁월함을 분명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외계층을 위한 사업분야
소외분야는 남미 관구군이 보다 큰 용기와 효과적으로 움직여야 할 분야 중 하나입니다. 어려움 중에 있는 소년들 가까이에서 일하는 살레시오 현존은 오늘날 가장 의미 있는 일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다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우리를 투신하도록 하는 사업이기 때문만 아니라 사회 정책을 만드는 정부와 행정 기관들과의 항구한 접촉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정부 관료들의 사고방식의 변화에 영향을 주기 위한 중요한 전략을 다루기도 합니다. 그들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으로 중대한 위험의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많은 가난한 청소년들의 사회문화적인 상황을 부분적으로 바꿀 수 있거나 나아지게 하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운이 좋게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사회 정책을 논의하는 기구들에 참여하는 여러 형제회원들과 살레시오 가족의 구성원들을 만나게 됩니다.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센터인 보스코니아 (Bosconia)의 설립자인 하비에르 데 니콜로 (COB) 신부의 체험과, “미성년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살레시오 센터”의 창립자인 레이몬도 메스퀴타 (BBH)의 체험에 영감은 받은 이와 같은 유형의 사업이 거의 모든 관구 안에서 발전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업은 가난한 청소년들을 고무하는 정신 안에서 발도코 오라토리오의 원초적인 체험에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데려가는 참으로 탁월한 새로운 교육적 현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범적인 사업의 이름을 든다면 로살비노 모란 신부가 보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참된 살레시오 보이스 타운을 만든 이타퀘라(Itaquera)의 사업(BSP)입니다. 그 사업은 환대, 음식을 나눠줌, 가장 작은 어린 아이들을 위한 작은 형태의 숙련직 제공, 젊은이들을 위한 속성 혹은 중장기 직업준비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좀더 큰 젊은이들을 위한 직업소개를 들 수 있습니다. 소외분야에서 의미 있는 현존은 어려움에 처해있는 소년들을 위한 집과 가정을 지켜주는 일입니다. 이 일에 약 3000명의 주민들과 함께 하는 청소년이 91명이 있습니다. 신세대 살레시오 회원들은 이 같은 대상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하며 이런 유의 일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점입니다. 그러나 더욱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좋은 뜻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 같은 일에는 견고한 신앙의 동기화, 특별한 준비와 전문적인 접근이 요구됩니다.
본당사목 분야
본당에서 일하는 살레시오 회원들의 현존은 숫자뿐만 아니라 사목적인 배려, 교리교육과 성사 준비와 거행에 임무를 다하고 있는 살레시오 신부들의 관대함도 대단한 것입니다. 공적인 교회와 성지와 더불어 본당은 약 300개 이상이 있고 거기에서 일하는 살레시오회원의 수는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회원들의 수보다 더 많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도전들은 살레시오 본당의 신원을 보장해야 할 필요성과 복음화 사업, 인간적 차원을 증진시키고 그리스도인적 양성에 일치를 주는 사목 계획을 통해 사도직에 힘을 주는 것들에 대한 조정(운동, 단체, 연합)을 보장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모든 것을 위해서 평신도의 협력,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위한 부서들을 만들어 촉진하고 거기에 사목평의회의 기능을 살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적인 봉사
지역 교회의 생활과 활동에 대한 우리의 참여는 우리에게 맡겨진 본당운영과 살레시오 사명의 실현을 축소시키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존을 실현하는 궁극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가장 직접적으로 교구 교회의 봉사에 참여하는 살레시오 역량의 종합하여 살레시오 사명을 실현할 것입니다. 이 순간에 저는 우리 수도회에 110명의 주교가 있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들 중 43명은 남아메리카 관구군에 있습니다. 브라질에 25명, 아르헨티나에 9명, 우루과이에 4명, 파라과이에 두 명, 칠레에 3명의 주교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감각(Sensus Ecclesiae)”과 교황님께 대한 우리의 열정을 감소시키려는 의도가 추호도 없지만 주교들의 임명은 몇몇 관구에서 고무영역과 공동체와 사업의 지도 면에서 매우 유력한 사람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을 빼앗아 가버린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은 때때로 지금 행하고 있는 몇몇 프로젝트의 지속성을 빼앗아버리거나 양성과 같은 어느 특정한 분야에서 약화를 초래했습니다. 어쨌든 잘 준비되고 특히 청소년들의 문제에 민감한 사목자들을 교회에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지역교회와의 협력은 나라 차원에서 교육적이며 교회적인 구조 안에서 임무를 맡고 있는 살레시오 회원을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그룹으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도회의 다양한 협의회, 가톨릭 교육자 연합, 청소년 사목과 교리교육에 대한 업무로서 주교회의를 위한 다양한 봉사, 사회 커뮤니케이션 센터와 교구의 다양한 창의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의 참여와 양성
제 24차 총회는 우리 사업에서 일하고 있는 평신도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이해에 온 수도회를 끌고갔습니다. 그들은 이미 전부터 현존해왔지만, 제 24차 총회부터 동역자로서 뿐만 아니라 돈 보스코의 정신과 사명을 충만하게 나누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이런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형제회원들 측에서뿐만 아니라 평신도들 측에서도 의식구조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형제회원들 측에서는 모든 관구에서 분명한 진보가 일어났다고 해도 가끔 SDB-평신도 사이의 새로운 관계 모델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 어떤 때는 적합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성급히 책임을 맡기는 부정적인 체험을 경험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어려움들이 남아있습니다. 다른 어려움들은 살레시오 회원 개인과 공동체가 이 새로운 모델에서 가져야 할 새로운 역할에 대한 명료한 이해 부족으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살레시오 정신보다는 전문적 능력에 더 근거하여 평신도들을 선택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봉사의 질을 더 낫게 할 수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적인 (살레시오) 교육의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의 제약과 가족으로서의 임무와 다른 사회적 활동들은 객관적으로 대상자들 사이에서 우리 평신도들의 지속적인 현존을 객관적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끝으로 가끔 형제 회원들과 평신들 사이의 관계에서 경제적인 문제가 동역자간의 대화에서 단순한 관계로, 더 나쁘게 되면 노사간의 긴장관계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에 민감한 사안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을 해결하면서 관구군의 관구들은 학교와 다른 사업에 대한 “평신도들을 위한 양성 계획”을 작성하였습니다. 게다가 브라질의 캄포 그란데의 돈 보스코 대학은 형제 회원들과 평신도들을 위한 살레시오 영성 분야에서 대학 졸업 후 과정(post-graduate)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구군의 IUS는 대학 교수들을 위한 살레시오 양성에 대한 온라인 강좌를 실시해왔습니다.
3.4 초기 양성과 평생 양성
초기 양성
관구군 안에서 초기 양성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초기 양성으로부터 카리스마적 신원, 영적 강인함, 사도적 진취성과 우리 형제회원들의 사목적인 질이 여기에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모든 관구 안에서 예비수련기를 위한 집들이 있습니다. 이 집들은 확실한 양성 담당자 팀을 보장하기 위해서 관구 상호간의 협력, 피양성자들의 충분한 수, 질적으로 보장된 양성 계획과 무엇보다도 살레시오 신원을 가진 연구센터들에 대한 계획을 향해서 보다 분명하게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살레시오 생활을 지향하는 후보 측으로부터 돈 보스코의 영적 체험과 사도적 계획의 개별적인 동화가 유용하게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이 같은 전망에 따라서 더 잘 조직된 단계가 바로 여러 관구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수련기입니다. Curatorium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곳에서 양성의 책임이 더 잘 나눠지고 있습니다.
수련직후의 구조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떤 관구(BPA, ABB)에서 수련직후기의 시기는 첫 번째 단계로서 1년간의 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순간에 예비수련기와 함께 한 공동체에서 양성을 받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구와 라 플라타 관구간에 아벨리아네다(Avellaneda)에서 하나의 수련직후기를 운영하면서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다른 관구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루과이는 한 공동체 안에 한 원장이 있고 수련기와 수련직후 단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에 대해서는 브라질-상 파울로 관구와 아르헨티나–코르도바와 아르헨티나-로사리오 관구는 교구의 대학에서 신학 양성 여정을 하고 있는 학생들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관구들은 신학생들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으며, 신학생들은 교구나 다른 수도회의 신학교에서 공부를 합니다. 파라과이의 학생들은 칠레 관구 신학생들의 계획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코르도바와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관구는 교구신학교에서 신학 양성을 받고 있는 신학생들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히아 블랑카와 라 플라타의 관구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함께 양성을 받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5개 관구는 상 파울로의 우리 신학원에 신학생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벨로 오리존테 관구는 살레시오 학생들을 위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센터와 다른 수도회들의 종교연구소들과 책임을 나누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고유수사들의 양성을 위해서는 특별한 배려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관구군의 두 관구 협의회와 함께 한 합동평의회(Visita d’insieme)에서 만족할만한 응답을 찾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Interamerica 관구군과의 협력 안에서 해결을 찾도록 초대했습니다.
평생양성
이미 위에서 말씀 드린 공동체 강화와 사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위한 노력 외에 영적 쇄신, 전문적 분야의 향상과 교육적인 능력을 기르게 하는 형제적 공동생활을 보장하려는 목적으로 관구군의 두 관구 협의회의 환경 안에서 형제들의 평생양성의 질적 제안을 위한 임무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수도생활 또는 사제생활의 다양한 시기에 있는 원장들과 형제 회원들을 위한 고유한 과정들이 유익하게 작용했습니다. 5년차 미만의 젊은 사제들과 고유수사들을 위한 고유한 과정들, 고백신부들을 위한 과정과 본당신부들을 위한 다양한 과정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습니다. EFOSUR 안에 이 일만을 위해서 일하는 조정자의 현존은 이 같은 양성모임의 중요성에 대한 지속성과 통일성을 보장하였습니다.
1997년부터 살레시오 교육을 위한 전문화 과정인 CISBRASIL의 창의적인 활동과 브라질양성위원회의 조정에 의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은 SDB와 평신도들을 위한 양성 과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3.5 살레시오 가족
이 관구군 안에서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준비된 막대한 자원들 가운데 살레시오 가족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의 중요성은 다양한 단체들이 마치 우리의 요구에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기라도 하듯이 우리에게 봉사한다는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동일한 지역에서 사도적 영성운동으로써 함께 일하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인식에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다양한 단체들과 다른 수도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데 있습니다. 이 같은 입장으로부터 나오는 염려는 먼저 관구차원에서나 지역차원에나 살레시오 가족 자문단체를 만들어 그들이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 아메리카 관구군은 많은 살레시오 가족 단체들의 현존으로 축복받은 곳입니다. 살레시오 회원들 외에 FMA, 살레시오 협력자들, 졸업생들과 FMA 졸업생들, VDB, CDB, 살레시오 시녀회(le Damas Salesiane), 성가정 사도수녀회(Le Apostole della Sacra Famiglia), 미야자키 까리따스, 성 미카엘 대천사의 사제 수도회가 있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살레시오 가족으로 속하지 않은 다른 단체들도 있지만 그들은 우리 정신과 매우 가까운 단체들입니다. 이 단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parents of professed Salesians, the Pious Union of Mary Mazzarello, the Josephine Sisters, the Missionary Sisters of Jesus, the Missionaries of the Risen Christ, the Contemplative Community of Nazareth, the Family of the Domus Mariae, the Sociedade Joseleitos de Cristo, the Congregação das Irmãs de S. Teresinha, the Congregação das Irmãs do Divino Mestre, the Comunidade Canção Nova.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서 SDB와 FMA사이의 협력이 특히 정규교육 분야와 청소년사목 분야에서 매우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협력자들과 남녀 졸업생들에 대한 조정과 고무에서도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사도생활 규칙서를 수정하고 있는 협력자들은 사명 안에서 좋은 여정을 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관구들은 항상 그들에게 살레시오 담당 신부의 현존을 보장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남녀 졸업생들은 모든 관구 내에 현존하고 있으며 지역 센터에서 많은 졸업생들이 우리의 교육사업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관구군 전체에는 비록 모든 지회가 같은 정도로 운영되고 있지는 않지만 115개의 지회가 있습니다. 살레시오 세계의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가장 젊은 졸업생들을 최대로 참여시키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일반적으로 ADMA 단체는 앞에서 본 것처럼 이 지역에서 많이 확산되어 있는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생생하게 유지하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VDB회원들은 모든 관구 안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다른 대륙의 관구군들과는 달리 살레시오 시녀회(Damas Salesianas)는 많지 않으며 그들은 느린 성장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단체들은 사회복지분야와 특히 보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의 건강문제를 다루는 분야에서 탁월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살레시오 가족에 대한 것은 우리가 훨씬 더 성장시켜야 할 분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고무와 조정의 역할을 떠나서 때때로 보다 폭넓은 살레시오 가족에 소속하고 있다는 참된 인식을 하지 못하는 살레시오 회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참된 영성과 사도적인 운동으로서의 살레시오 가족을 좀더 이해하고 살레시오 사명의 맥락 안에서 그들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6 사회 커뮤니케이션
사회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남 아메리카 관구군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던 분야였습니다. 오늘날 모든 관구는 비록 사회 커뮤니케이션 관구 대리를 맡고 있는 형제회원들이 모두 전담으로는 일하지 않지만 그래서 다른 임무를 맡아야 하지만 사회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관구 대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관구들에서 사회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다양한 상태의 전문화 과정을 가지고 있는 자격 있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있습니다. 관구군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바히아 블랑카에 두 개의 높은 수준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소가 있습니다. 두 곳은 그들이 양성한 최고의 기술자들로부터 특별히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또 캄포 그란데와 브라질리아의 대학과 상 파울로의 대학 센터는 수준 높은 과정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정보의 가장 보편적인 도구는 온 라인과 출판의 형태로 제공되는 관구소식입니다. 많은 기숙사들과 본당들도 웹 페이지와 정기적인 소식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충분한 조정의 부재로 인해 정보에 대한 공통 노선과 정책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너지와 자원의 소실을 막고 사명과 관구와 세계의 고무 계획에 봉사하기 위하여 정보를 보다 효과적인 요소로 만들면서 커뮤니케이션의 대등한 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인식을 성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살레시오 가족지 출판은 다섯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브라질에서는 6만3천부, 아르헨티나에서는 5만 천부, 칠레에서는 1만부, 파라과이에서는 7,500부와 우루과이에서는 3,500부가 출판되고 있습니다.
교육적이며 사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출판 분야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은 많은 계획들과 다양한 형태의 창의적인 것들을 발전시켰습니다. 주된 사업들 중에는 3개의 커뮤니케이션 센터(ABA, ACG), 7개의 출판사(ALP, ARO, BSP, CIL, CISBRASIL, PAR), 12개의 인쇄소와 그래픽 학교(ABA, ABB, ARO, BPA, BRE ,BSP, CIL, PAR, URU), 4개의 시청각 교재 생산 센터(ABB, BBH, BCG, PAR), 15개의 서점(ABB, ACO, ALP, BCG, BRE, CIL, PAR, URU), 13개의 라디오 송신소(ABB, ALP, ARO, BCG, BRE, PAR). 게다가 살레시오 회원들은 그 지역에 있는 다른 라디오 송신소를 위해 상당한 수의 프로그램을 실현시키고 있으며 11개의 TV 교육방송 (BBH)과 하나의 TV 대학(BCG) 방송에 대한 책임을 직접적으로 맡고 있습니다.
이 사업의 운영은 개인적인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전문인력 양성에 달려 있다는 것은 관구에게는 커다란 도전이 됩니다. 게다가 유기적인 관구계획의 일부로서 이 같은 사업이 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개인적인 창의력은 행정적이며 전문적인 올바른 운영으로 처리될 위험을 가지고 이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 사업들 간의 시너지는 보다 전문적인 접근을 가지고 수행하고 완전에 이르게 할 정책적인 노선이 남아 있습니다.
3.7 선교사업의 고무
살레시오 회원들은 당시의 필요성에 응답하는 계획을 가지고 아르헨티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이 지역의 여러 나라들이 더 나은 발전과 그들의 고유한 민족성을 견고케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산업화 과정의 시작과 긴박한 교육의 필요는 우리 형제들을 예술과 수공업 작업장, 농업학교를 시작하게 하고 참되고 고유한 기술 박람회를 실현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에 알맞게 나타나는 정신에 호응하는 프로파간다 언어를 다음과 같이 선택하였습니다. 즉, 노동 예찬, 다양한 교육적 제안의 젊은이적인 스타일, 무용, 밴드, 대표적인 드라마 등. 동시에 몇 년 안에 우루과이에서 카포 호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상 관측소 체인이 준비되었습니다. 1885년에 여러 수도회들이 우루과이에서 떠나갔을 때 살레시오 회원들은 그들의 기상관측소 덕분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의미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 아메리카 관구군은 선교사업 안에 자신의 교육적이고 사도적인 임무를 시작했다는 것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지역에서 서구 시민화에 통합된 원주민들이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그들 나라의 사회적인 현실과의 어떤 접촉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에서, 파라과이의 차코 지역에서, 브라질은 아마존과 카토 그로소에서 살레시오 선교사업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2000년도 말에 행해진 인구 센서스 결과에 따르면 브라질에만 734,131명의 인디오들이 있고, 이들은 180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225개의 종족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4개의 관구가 전형적인 선교관구로 다음과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마나오스 (Rio Negro의 다양한 민족들을 위해서), 캄포 그란데 (Bororos와 Xavantes를 위해서), 바히아 블랑카 (Mapuches를 위해서), 파라과이(Chaco Terenas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서).
파타고니아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은 살레시오 선교 현존이 있었던 130년 동안에 엄청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살레시오 회원들은 아직까지 마푸케(Mapuche) 원주민들의 권리와 그들의 문화와 사회 조직에 대한 용기있는 보호자로 남아있습니다. 복음화는 복음의 토착화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면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후닌 데 로스 안데스(Junín de los Andes)와 자팔라(Zapala)에서 성소 촉진과 성소지도 센터로서 마푸케 원주민들의 젊은이들을 위한 기숙사를 언급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푸케 원주민들은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곳에 살고 있으며 종종 겨울 동안에는 눈 때문에 고립되기도 합니다. 충실한 선교사들인 살레시오 회원들은 이 민족들의 가난과 풍요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 나라들에서 살레시오 선교의 시작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최초의 살레시오 공동체는 파라과이 차코(Chaco)에서 1920년에 도착했고 1948년에 성청은 차코의 대목구를 만들어서 그것을 살레시오 주교들에게 맡겼습니다. 오늘날 인구의 대다수는 아직도 리오 파라과이(Río Paraguay) 만을 따라서 살고 있으며 살레시오 회원들은 종교적인 도움을 주는 사업을 그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캄포 그란데 관구의 선교적 차원은 보로로족 사람들과Xavantes 사이의 현존과 활동으로 마토 그로소(Mato Grosso)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Kaiowá 와 Terenas 에서도 선교 활동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돈 보스코 가톨릭 대학교는 종족과 문화적인 값진 증거서류들을 보존하면서 이 백성들의 관습과 풍습에 대한 연구에 특별한 방식으로 공헌하였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의 현존이 보로로족의 멸종을 막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1만 오천명 이상의 Xavantes 원주민의 인구와 2천명의 보로로족과 함께 마토 그로소의 보존된 8개 종족은 이제까지 건강, 교육, 생활양식과 복음화의 영역에서 살레시오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백 년 이상이 되는Xavantes 사이의 살레시오 역사는 피로 얼룩진 시기를 보냈습니다. Fuchs신부와 Scarlatti 신부는 1934년에 원주민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20년 후인 1956년에Xavantes사람들은 선교사들을 찾아서 Meruri에 도착하고 한 그룹이São Marcos에 정착했고 다른 한 그룹은Sangradouro에 정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Xavante 사람들 사이에서 두 개의 선교 정착지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 원주민들은 천 여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1만 5천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과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의 잘 조직된 현존으로 유아 사망률이 감소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알파벳을 알게 되었고 복음화는 적절한 토착화와 더불어 그들에게 제안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가르치는 일은 원주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두 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족의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지속적인 과정과 함께 원주민 문화에 충실하도록 해줍니다. 비록 사회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예지력 덕분에 원주민들은 그들의 문화, 관습과 전통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살레시오 회원들은 이 민족들의 문화적인 유산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보호하며 돌보았습니다. 사실 캄포 그란데 관구의 “선교 자료정보센터”는 책, 영상제작물, 사진, 문서와 역사, 선교사업 실천의 내용과 방법론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원주민들에 대한 모든 출판의 원본들을 수집 보관하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의 전형적인 사물들과 그 지역의 동물들과 새들, 값진 돌을 가지고 만든 돈 보스코 박물관은 캄포 그란데 가톨릭 대학교가 관리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일년에 평균 1만 2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 박물관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해서 주로 관광객으로 모든 나라에서 오며 캄포 그란데 학교의 학생들과 남부 마토 그로소 주(州)의 학생들입니다.
복음화 영역에서 오늘날 원주민들의 신앙생활 입문 여정과 일반적으로 일치하는 다양한 여정으로부터 흘러나오고 내용과 방법에서 토착화가 이루어진 예비신자교육의 진지한 여정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보로로족과Xavantes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전례, 평신도 사목자들, 교리교사들과 사목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준비를 토착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강조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평신도의 임무를 가진 삶에 대한 원주민의 성소와 수도생활과 살레시오 생활에 대한 성소를 식별하고 동반하는 것에는 감수성이 있습니다. 최근에 한Xavante 사람이 사제서품을 받았고 다른 몇몇 사람들은 초기 양성과정에 있습니다. 두 명의 보로로족 사람이 현재 예비수련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보로로족과 Xavante족 사람들 간에 행해진 선교사업의 많은 창의적인 일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을 구체적으로 들고 싶습니다. 1970년에 Franz와Luis Würstles 선교사 형제는 원주민 공동체의 사회적 발전에 봉사하고 선교사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동선교지원계획(AMA)을 시작하였습니다. Franz 신부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살레시오 고유수사인 그의 동생 Luis는 이 값진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그의 동역자들과 함께 생산과 전기의 사용, 수로 건설, 길을 개척하고 보존하는 일, 다리 건설, 아르투아식 우물을 만드는 일을 발전시키면서 원주민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아마존 지역에서의 살레시오 선교사업의 현실은 이제까지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마나오스 관구 현존의 3분의 1에 해당하고 살레시오 회원들의 3분의 1이 그 지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선교적 현존은 7군데이지만 리오 네그로 강변을 따라서 펼쳐지는 관대하고 세심한 배려가 행해지는 이동선교사업을 강조할만합니다. 인권을 신장하고 이제까지 해왔던 복음화의 진취적인 일들은 많이 있지만Jauareté 원주민들이 사는 곳 근처에 성소지도 센터가 있고 이미 첫 번째 원주민 교구 사제들과 원주민 살레시오 사제들의 서품식이라는 중요한 열매를 거두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미 4명의 원주민 사제가 있지만 Maturacá의 Yanomami 사람들 사이에 교회의 선교적 현존은 아직도 초기설립단계에 있습니다.
지원 체계 차원을 본다면 브라질은 브라질리아에 본부를 두고 있는 “União pela vida”라는 선교 사무국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바히아 블랑카 관구는 선교사업을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선교사무국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선교적 차원은 다양한 활동 유형을 증진시키는 선교사 그룹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행해지는 사업 안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양성, 다양한 창의력을 가진 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위한 캠페인, 자원봉사활동.
상 파울로 관구(BSP)는 콤보니오 회원들과 함께 “선교(Missões)”라는 잡지의 공동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운영 위원회와 재정적인 문제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캄포 그란데 관구는 “Noticias Missionarias(선교 소식)” (BAKARU)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4. 아메리카와 세계에서 살레시오 사업을 위한 남 아메리카 관구군의 중요성
주님께서 큰 요구 없이 라틴 아메리카 남부에서 살레시오 현존을 통해서 우리에서 주신 것을 인식하면서 저는 살레시오 세계에서 이 관구군의 중요성을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이곳에 수도회의 위대한 선교 사업이 처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것을 매우 의미 있게 하는 다른 동기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관구군으로부터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와 중앙 아메리카에서 살레시오 사업의 창립자들이 나왔습니다. 아메리카를 위해서 돈보스코를 대신할 사람을 세우려고 생각했을 때 돈 보스코는 파타고니아에 대목구장이며 첫 번째 살레시오 주교인 요한 갈리에로를 선택했습니다. 돈 루아가 이 직무를 분할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때 그는 남 대서양 지구를 갈리에로 신부에게 남겨놓고 태평양 지구를 위해서는 총장의 대리로서 칠레에 거주를 하고 있던 야고보 코스타마냐 신부를 선택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요셉 베스피냐니 신부의 창의력 덕분에 후에 온 세상에 존재하게 될 청소년들을 위한 지원자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공의회까지 스페인 어를 사용하는 아메리카 전체에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서 펼쳐진 복음화 사업을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살레시오 출판사를 가졌던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잊어버리지 맙시다.
그리고 1900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대해서 첫 번째 지역 총회가 열였습니다. 우루과이에서는 매월 24일에 도움이신 마리아를 기념하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칠레로부터 위대한 살레시오 가족에 대한 아이디어가 특별총회에 제시되었고 후에 커다란 지지를 얻고 살레시오 가족5이란 이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브라질 체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칠레에서 살레시오 청소년 운동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남 아메리카 관구군의 성덕
이 관구군의 살레시오 성덕의 분야도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고 복녀 라우라 비꾸나, 복자 아르테미데 자티, 가경자 루돌포 코모렉 신부, 가경자 제페리노 나문꾸라와 하느님의 종인 안토니오 데 알메이다 루스토사 주교와 같은 의미 있는 모습들이 성덕의 모자이크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관구군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의 사회사업
이주민들 특히 이탈리아 이주민들에 대한 도움. 이것은 첫 번째 선교사들에게 돈 보스코가 권고했던 사업의 분야 중 하나였습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 새로운 이주민들을 맞이하고 동반하기 위한 효율적인 사무국이 조직되었습니다.
브라질에서는 관구장 베드로 로타 신부가 돈 루아가 부탁한 이탈리아 사람들(Italica gens)의 회장직을 맡았었습니다. 그와 같은 도움은 후에 폴랜드, 독일과 그 밖의 다른 나라 이주민들에게도 확대되었습니다.
칠레에서 1915년 11월에 살레시오 회원들은 칠레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이주민들을 동반하기 위한 소수민족들을 위한 3개의 본당(Talca, Valparaíso와 산티아고의 “Gratitud Nacional”)에 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에 대한 도움. 살레시오 회원들이 농부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일은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우루과이에서 가난한 농부들을 위해서 일한 호라씨오 메리지(Horacio Meriggi) 신부의 업적을 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살토(Salto)교구에서 신자들의 농업협동조합의 일을 시작하면서 주교님은 살레시안들에게 그 일을 계속하도록 맡기고 싶었습니다. 관구장의 승인과 함께 호라씨로 메리지 신부가 이 일을 계속해서 발전시키도록 임무를 맡았습니다. 3개의 협동조합 연맹과 하나의 총연맹 안에 속한 7개의 그리스도인 농업협동조합이 있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된 가족들이 6천명이나 되었고, 농업집단 거주지도 10개, 27개의 신협이 있었습니다. 이 일을 한 지 25년이 지난 뒤 호라씨오 메리지 신부는 “저는 살레시오 회원이 되었고 수도회에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한 것에 만족하며 죽습니다”고 말하면서 선종하였습니다.
노동자들에 대해서. 노동자 계층을 위해서 관구군에서 일했던 회원의 모범을 든다면 우리는 아르헨티나에서 일한 살레시오 형제인 카를로 콘치를 들 수 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비오 9세 기숙사에서 원장의 지도하에 그는 졸업생들을 도와주기 시작했고 사회학 분야에서 이 모임에 특별히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일에 30년 이상 완전히 투신했습니다.
그는 대교구의 몇몇 성직자들과 함께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의 사회 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싸웠습니다. 1911년에 그는 “아르헨티나 사회 연합”의 확산에 협력하였습니다. 1920년에 교황대사님과 주교님들의 요청과 장상들의 허락으로 아르헨티나 카톨릭 활동을 위한 단초들을 제공했던 “아르헨티나 카톨릭 민중 연맹”의 총 비서의 직을 맡았습니다. 1925년에 그는 Rerum Novarum의 원리들을 앞을 다투어 확산시켰던 제네바에서의 제 7차 노동에 대한 국제회의에 노동자 대표로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받았습니다. 그는 1931년에 로마에서 개최된Rerum Novarum 기념식에 아르헨티나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카를로 콘치는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인쇄물을 통해서 알렸습니다. 그는 많은 잡지, 정기 간행물, 전단지 등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민중(El Pueblo)”이라는 가톨릭 신문의 편집장이었습니다. 또 그는 사회재건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운영하였고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가톨릭 교의를 알리는 다양한 매뉴얼을 출판하였습니다.
과학에 대한 살레시오 회원들의 기여
남 아메리카 대륙에서 첫 번째 사업과 사명의 지리적이고 인종학적인 기여에 대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무엇보다도 선교사로 파견된 땅에서 그 지역의 탐험에 대한 과학적인 기여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기상학에 대해서 1880년에 베네치아에서 실현된 지리학회는 아메리카 남부지역의 날씨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는 봉사를 돈 보스코에게 맡겼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살레시오 기상 관측 네트워크가 우루과이에 있는 빌라 콜론의 관측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은 플라타 강의 항해를 용이하게 해주는 멋진 봉사를 제공했습니다. 그 후 이 일은 선교 지역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대륙의 가장 남반구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런 확산은 푼타 아레나스와 마토 그로소, 아마존 지역과 브라질의 다른 지역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같은 기상 봉사는 그 지역의 날씨에 대한 올바른 과학적인 지식을 얻는데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리학에 대해서는 살레시오 회원 알베르토 에 아고스티니 신부가 이 곳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던 시대에 안데스 산 남부와 아르헨티나의 산들을 탐험하였습니다. 그의 일은 이 살레시오 “탐험가”가 이룩한 업적 덕분에 그 당시 그 지역 나라 간에 국경선을 올바로 정할 수 있었던 아르헨티나와 칠레 사이의 평화를 맺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생물학 분야에서 한 살레시오 회원이Myrmicophilus Badariotti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이것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마토 그로소 선교에서 브라질의 고산지역에 곡물재배에 매우 적합한 살레시오 곡물(grano Sales)이라는 다양한 곡식들이 개발되었습니다.
농업에 대한 기여도 대단합니다. 파타고니아가 아직 불모지였을 때 살레시오 회원인 알렉산드로 스테페넬리 신부는 농업학교 안에 리오 네그로 강의 제방으로부터 직접 땅에 관개용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그는 정부의 승인을 얻어 파타고니아의 불모지를 거대한 농업생산지역으로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면서 그 일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특히 인종학, 인류학과 언어학 분야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의 기여는 주목할만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현재 파타고니아와 불의 땅(아르헨티나)의 원주민들에게 행한 리노 D. 카르바할(Lino D. Carbajal) 신부의 일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브라질에서 레비 스트라우스의 다음과 같은 찬사를 들었던 학문적 업적의 모범을 보인 체사레 알비네티 신부와 안젤로 야고보 벤투렐리 신부의 기념비적인 보로로인 백과사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로로인 백과사전은 열대 아베리카 어디에서도 견줄만한 것이 없는 탁월한 기념비입니다”. 프란치스코 칼렌디노 신부의 마푸게 기초 사전(Dizionario Basico Mapuche)뿐만 아니라 곤잘로 오코아 카마로 신부의 보로로인에 대한 연구와 아마존 리오 네그로의 원주민에 대한 알시닐리오 므루찌 일베스 다 실바의 연구도 더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해서 이제까지 행한 일은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살레시오 역사뿐만 아니라 문서화를 위한 살레시오 센터와 바르바세나, 미나스 제라이스 연구소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부 파타고니아의 살레시오 역사 고문서고와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바히아 블랑카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관구군이 가지고 있는 여러 박물관에는 지리학적, 인종학적이며 역사적인 관점에서 소중한 유산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다른 많은 박물관 중에서 저는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의Maggiorino Borgatello 살레시오 박물관과 브라질 캄포 그란데에 있는 마토그로소의 살레시오 선교에 대한 돈 보스코 박물관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대학 기관들
사업과 살레시오 현존이 견고해지면서 살레시오 회원들은 여러 가지 동기 때문에 관구군의 대학 기관들 안에서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청소년들을 위해서 학교와 다른 사업에 현존하는 가운데 일하기 위해서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합법적인 학교졸업장 취득이 필요했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같은 기관을 확장시키는데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의 평균 연령이 매우 낮아졌다는 사실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Licei에서 청소년기를 갓 넘긴 학생들을 만나기 쉽상입니다. 대학에서 젊은이들을 만나기보다는 주로 청소년들을 만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학교, 오라토리오와 다른 사회사업에서 일하는 사람을 위해서 오늘날에 적합한 제안과 해결책들을 제공하는 방법을 찾으면서 청소년과 교육의 문제들을 연구하고 심화시켜야 할 전문가들의 기술과 이론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관구군의 보다 의미 있는 대학 센터들 중에 칠레의 산티아고에 있는“Cardinal Raúl Silva Henríquez” 가톨릭 대학, 브라질 상 파울로 주(州)의 여러 도시에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 캄포 그란데와 남부 마토 그로소의 돈 보스코 가톨릭 대학과 UNISAL 대학 센터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브라질에서 포르토 알레그레, 마나오스, 레치페와 비토리아 시(市)에 단과대학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는 하나의 국립대학에 여러 개의 고등교육기관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방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5. 도전들과 미래에 대한 전망
관구군의 여러 나라들의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 살레시오 회원들이 어떻게 이제까지 현실의 긴박한 문제와 젊은이들의 필요와 기대에 응답해 왔는가를 보면서 제가 보기에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도전들과 전망들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관구군에 대해서 봉헌생활에 대해서 “그것은 이야기할 아름다운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써야 할 많은 아름다운 페이지들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이 특히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5.1도전들
위에서 설명한 파노라마로부터 다음과 같은 주요 도전들이 흘러나옵니다:
먼저 공동체 생활입니다. 공동체 생활은 일의 질과 사업의 차원들과 각각의 공동체에 현존하는 형제 회원들의 수 사이에 명백한 불균형이 초래하는 자연스런 결과로서 지역 공동체의 약화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개인주의를 길러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참된 공동체 계획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단면만을 고려하는 영역주의를 길러내고 있습니다.
똑같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 복음화입니다. 복음화는 우리의 대상자들과, 젊은이들과 어른들의 삶 안에 깊이 들어온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세속주의에 의한 점진적인 침식과 신흥종교들의 확산 현상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면서 대중 종교성의 현실을 심화시키고 정화시킴으로써 항상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세 번째로 교육은 우리의 카리스마적 임무와 예언적 공헌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남아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삶의 양식을 촉진시키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항상 증가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와 문화 앞에서 정신을 변화시키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분야에서 연대 문화와 활발한 시민정신을 계발하도록 인도하는 교육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끝으로 저는 성소에 대한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측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소의 결핍과 성소에 대한 취약한 인내. 돈 보스코와 살레시오 사명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고 배양하고 있는 마음이 관대하고 활동적인 젊은이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소자들의 수가 감소하고 있으며 특히 성소의 인내가 약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5.2 미래에 대한 전망
저의 제안은 우리의 에너지와 이용 가능한 에너지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위에서 강조한 내적·외적인 도전들을 긍정적으로 직면하기를 희망하면서2005년 4월 초에 브라질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관구군의 두 관구 협의회와 함께 한 합동 평의회의 결론으로 채택된 노선으로 미래에 대한 몇 가지 전망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중요성을 두면서 제시하고 싶은 것은 복음화와 교육을 통해서 봉헌생활자, 젊은이들의 사도요 선교사로서의 카리스마적인 신원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현 시대의 복잡성은 지속적으로 원천으로 돌아가라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젊은이들 특히 보다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징표와 전달자가 된다”(회헌 2조)는 우리 사명을 위한 위대한 열정으로 고무된 삶의 계획으로서 자신의 성소를 재발견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 25차 총회는 우리에게 카리스마적 신원이 갖는 근본적인 요소들을 제시했습니다. 이 요소들은 명백히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러내고, 가족 정신에 따라서 형제적인 생활을 통하여 친교의 예언을 살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교육적 현존으로서 그리고 의미 있는 복음전달자로서 우리를 파견하는 수도생활입니다.
이것을 살기 위해서 아래와 같은 점들을 따라서 제 25차 총회의 활동노선의 심화와 적용을 계속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살레시오 성소의 참된 의미를 숙고하고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삶에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Da mihi animas”라는 사도적인 힘, 무상으로 내어줌과 대상자들에게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제공하면서 복음적 권고의 증거를 가시적인 것이 되게 합니다.
형제적인 생활에서 새로운 관계의 원천으로서 예방교육의 영성을 알고 생활하는 것. 한편 젊은이들 사이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의 현존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 평신도들과 삶과 사명을 나누는 순간들을 제공하는 것이 모든 것이 되게 합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가능성을 보장하면서 인간적이며 성소적 성장과정을 유익하게 도모합니다.
젊은이들 가운데서 삶의 증거와 사도적 열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공동체라는 요람 안에서 시간, 양식과 기준들을 정합니다.
두 번째 지침은 “Da mihi animas”라는 선교적 열성으로 고무된 청소년 사목을 보장하고 젊은이들이 신자 생활의 성소적 선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청소년 사목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실은 다양한 관구와 단일 국가들 안에서 살레시오 현존이 의미 있기 위해서 통합적인 계획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교육의 가능성과 요구에, 사업에 대한 살레시오 회원의 적절한 수에 새로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인구, 청소년들의 요구, 도시의 새로운 형태와 신세대들의 변화된 정신세계를 고려하는 것 모두를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살레시오 청소년 사목의 기준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으며 식별의 분위기 안에서 긴박한 청소년들의 상황에 응답해야 할 복음화와 신앙 교육을 위한 명확한 전략적인 우선권을 정립한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정규 교육 분야
학교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의 교육적 현존은 계속해서 중요한 것으로 고려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현존은 쿰바야(Cumbayá 1995, 2001)에서 열린 모임의 노선에 따라서 학교는 문화적인 제안으로 질적인 모습과 예언적인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는 조건에서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살레시오 회원들이 쇄신된 열정을 가지고 이 계획을 밀고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진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동역자들의 선택, 특히 조정자들의 선택을 돌보아야 하며 그들의 자격취득에 대한 노력 안에서 그 지속성을 돌봐줘야 합니다. 교육적- 살레시안적으로 적합한 능력을 가지고 몇몇 사업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 이것들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과 학교 사업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모든 형태의 양성 사업 안에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는 분야
가난하고, 버림받고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을 위한 선택은 항상 돈 보스코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레시오 가족의 마음과 삶 안에 항상 있어왔습니다. 사회의 변화된 상황은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우리에게 오늘날 새로운 응답을 주도록 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모든 사업과 현존 안에 새로운 형태의 현존과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임을 통해서; 인간을 중심에 두는 전인적인 교육 봉사를 제공하면서; 연대성의 문화, 정의에 대한 임무와 사회의 변화를 촉진하면서. 결과적으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다른 사업의 분야로 축소시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학교, 본당, 가난한 사람들을 환대하는 창의적인 사업과 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하는 문화의 형태를 심화시키면서 모든 살레시오 현존을 감싸들여 포괄하는 노선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전인적인 성장여정 안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젊은이들에게 구체적이며 협조적인 제안을 제공하면서, 비행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응답이 되고 싶은 특별한 사업 안에 우리가 현존하고 능동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봉사는 전문적인 능력, 특별한 계획, 다른 사회 기관들과의 협력과 개인적인 형태로 활동하려는 것을 극복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때문에 관구 계획 안에서 노력하고 있는 형제들과 그 같은 창의력을 최대한 통합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성소 제안의 영역
이 제안은 식별여정에서 그들을 도와주는 명확한 성소제안과 보다 개인적인 동반을 통하여 이미 우리의 사명과 살레시오 정신을 나누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도록 요구합니다.
더구나 특별한 성소 고무를 촉진하는 것은 공동체 생활과 사명을 풍성하게 열매맺게 하는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커다란 중요성으로서 세 번째 지침은 새로운 도전을 직면할 수 있는 살레시오 회원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도전을 떠 맡기 위하여 살레시오 회원을 양성한다는 것과 우선적인 대상자들 가운데서 새롭고 의미 있는 현존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살레시오 회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들의 삶을 위험에 내맡길 줄 알고 성소적 열성과 사명의 요구에 전문적인 준비로 응답할 수 있는 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양성의 모든 여정 안에서 근본적인 동기, 삶의 조건과 종교적인 삶과 사목적인 일의 새로운 상황들을 자율적이고 진지하게 살수 있는 태도와 삶의 개념을 개별화시키고 내면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양성 담당자들을 준비시키고 무엇보다도 수적으로 충분한 양성 담당자들의 그룹을 만들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격이 갖추어져야 하며 양성경험과 학문적 능력이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최적의 시간을 그들의 사무실에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식별을 지도하는 기준을 통일시키고, 개인적인 동반을 보장하며 모든 양성 단계에서 최적의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관구들 간에 협력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살레시오 생활에 대한 책임있는 선택을 하게 하는 인간적 성숙과 그리스도인적 양성을 목표로 하도록 후보자들을 도와줍니다. 또한 성소 동기들을 식별하고 정화하도록 도와주며 그들이 열망하는 삶의 유형과 일치하는 태도와 습관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줍니다.
마지막 지침은 관구 차원에서와 관구군 차원에서 구조조정의 과정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여정은 전략적인 장소, 의미 있는 시작과 청소년들을 위한 사명에 봉사하는 자원들의 매우 다양한 형태에 대한 용기 있는 연구를 수행하면서 무엇보다도 위에서 제시한 지침들을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안에서 예비적인 활동은 모든 관구의 구조조정에 대한 제안, 전통적인 사업에 쇄신된 전망을 제시하고 관구 계획 안에 새로운 현존을 도입할 수 있는 능력을 소개하면서 유기적인 관구 계획(POI)을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사업이 가지고 있는 무질서한 성장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관구를 센터로 만들면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선택은 관구 봉사를 고무하기 위해서 견고한 그룹의 인적자원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즉 관구장, 부관구장, 관구경리와 청소년 사목 위원장은 그들의 현존과 준비성으로 관구의 중심이 되는 고무의 핵을 보장해야 합니다.
사전에 동의된 계획에 따라서 일치하는 가운데 일하는 결속된 그룹에 생명을 주면서 성장시켜야 할 다른 측면들은 사명에 대한 봉사와 결합된 다른 분야에서 관구간의 연대와 협력일 것입니다.
원장들과 공동체와 관구를 고무하고 통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람들의 양성과 동반은 항구하고 유기적인 방식 안에서 쇄신 과정을 보증하게 될 것입니다.
보다 특수한 다른 사안들은 두 관구군의 합동 평의회의 결론에서 정의되고 요약되었습니다.
결론
저는 아메리카에서의 살레시오 현존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 돈 보스코의 꿈으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그의 꿈을 실현한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기대 이상으로 그들의 사명을 완성했습니다.
올 해 우리는 첫 번째 선교사 파견 13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돈보스코의 꿈을 쇄신하기 위한 의미 있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살레시오 회원들이 계속해서 이 꿈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강렬한 내적 열정을 가진 사람을 더욱더 필요로 한다는 확신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그들은 젊은이들을 지지하고, 우리 카리스마의 전형적인 표현인 교육을 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열정은 우리와 함께 살레시오 정신과 사명을 나누고 싶어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이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바라보셨을 때 동정심을 느꼈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았고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말과 동일한 계획을 가지고 그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은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은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7-8).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이 관구군에서 젊은이들, 가족과 도시와 마을의 서민계층의 사람들이 복음 선포로부터 보다 충만하고 조명된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어준 많은 선교사들의 마음 안에 있는 말입니다. 오늘날 선교사 파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오늘날에도 항상 목자 없는 양들이 많이 있고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충만한 봉헌과 더욱 관대해지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기도하고 사명을 이루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영혼인 성령께서는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가져라가”는 돈 보스코 자신의 말로 성부께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도회의 진정한 인도자이신 도움이신 마리아님께 역사적인 이 순간을 맡겨 드리고 우리 성소에 충실한 여정을 걸어가고 우리의 삶을 봉헌하면서 그분의 인도에 우리를 맡겨드립시다.
파스칼 챠베스 총장 신부
1 Cf. Critical edition of the dream in RSS 28 (1996) pp. 109-117.
2 Cf. Mgr. Luigi LASAGNA, Epistolario (ISS), vol. II, p. 302.
3 Fondo Don Bosco, 175 C 3을 볼 것.
4 브라질 남부 관구로부터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의 벨로 오리존테(Bello Horizonte)에 관구관을 가지고 있는 성 요한 보스코 관구가 탄생하게 되었고, 남부 리오 그란데의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에 관구관이 있는 비오 10세 관구가 생겨났다. 북부 관구로부터 아마존 지역의 마나오스(Manaus)에 관구관이 있는 성 도미니코 사비오 관구가 탄생했다.
5 특별총회의 편집되기 이전의 문서에서 살레시오 가족에 대해서 말할 때 SDB들의 살레시오 수도회를 지칭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