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추 천 의 말 ......................................................................................................... 1
제1부 포도가지를 전지하라.................................................................................. 3
I. "반(半)“을 가져라 ........................................................................................ 5
II. "야, 이 꼬맹아 ! 넌 가서 시원한 냉수나
마시는 게 좋겠어“ ........................................................................... 21
III. 사제가 되기까지.............................................................................................. 38
IV. 충실한 제자..................................................................................................... 59
V. 철저한 그의 생활 ..............................................................................................83
VI. 돈보스코의 뒤를 이어 ......................................................................................101
제2부 포도주를 묵히다 ........................................................................................ 115
VII. 돈보스코 가신 뒤 .......................................................................................... 119
VIII. 동분서주 ......................................................................................................... 132
IX. 희비(喜悲)의 사건들 ................................................................................ 150
X. 성지를 찾아서 ...................................................................................................... 162
XI. 4대 과제 .......................................................................................... 169
선교지 ................................................................................................................... 169
성 소 .................................................................................................................... 173
축제 오라토리오 ..................................................................................................... 176
협력자들 ............................................................................................................ 179
XII. 인생의 황혼길에서 .................................................................................................. 187
추천의 말
이 책은 성 요한 보스코의 영향을 받은 첫 번째 사람, ‘미카엘 루아’의 전기이다. 그리고 젊은이들,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돌보기 위하여 헌신한 젊은이들의 집단인 살레시안들이 새 수도회를 위해서 고투하는 극적인 이야기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적이며 동시에 신적인 이야기이다.
살레시오회의 창설자인 성 요한 보스코는 그 모습이 급속히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루아 신부는 일정한 범위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점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돈보스코에 판단 광대한 문헌과 루아 신부에 관한 얼마 안 되는 자료를 비교해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루아 신부는 돈보스코의 뒤를 이어서, 수도회가 장애를 타파하려고 맹렬히 노력하던 초창기의 수도회를 지도할 책임과 장차 수도회가 크게 성장할 토대를 놓을 책임을 그 누구보다도 지고 있었다.
돈보스코와 비교해 볼 때, 루아 신부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루아 신부의 운명이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루아 신부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라던 한 가지 소망은 - 우리는 그것을 거의 강박관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어두운 그늘에서 생활하고 활동하는 것이었다. 그가 바라던 한 가지 소망은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처럼, 돈보스코는 능력과 명성이 날로 커져야 하고 자신은 날로 작아져야 하는 것이었다.
현대 세계에서는, 자신을 극기하고 고행하며, 규칙에 집착하고, 청빈과 정결과 순종의 서원을 영웅적으로 실행한 그의 생활이 심금을 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고 또 찬탄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과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만 엄격했고 검소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그들을 사랑했으며 이해하였다. 그의 외적 생활은 자기 동료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는 생활이었다.
루아 신부는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 즉 가난하고 버림받은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환기시켰다.
돈 루아가 살아 있지 않았더라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이 친구를 잃어버렀을 것이고, 교회는 또 하나의 영광을 잃어버렸을 것이며, 큰 고통을 통해서 위대한 이상을 따라감으로써만이, 인간은 성성(聖性)과 진리에 대한 위대한 불후의 공적을 세울 수 있다는 증거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저자는 - 나는 그의 노고를 감탄하고 마음으로부터 감사하며 칭찬한다 - 이 책에서 우선 영어를 사용하는 살레시오가족, 즉 살레시오 수도자들과 살레시오 수녀들 및 협력자들에게,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이 찬란한 모습을 가져다 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돈보스코의 후계자인 미카엘 루아의 전기를 다른 작가들이 전개시키는데 이 책이 격려가 되고 고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저자와 나의 소망이다.
돈보스코의 살레시오회
총장 알로이시오 릿체리
포도가지를 전지하라
I. "반 ( 半 )을 “ 가져라
“잠깐 ! 이건 무슨 타이냐 ! 너 그거 어디서 났니?”
“오라토리오에서 얻었어.”“어디서?”
“오라토리오에서.”
“우리 형 알로이시오가 다니는 곳이구나!
어떠니. 거기?”
“글세···. 네가 와서 한번 봐!”
“내가 가면 나도 타이를 얻을 수 있니?”
“글세 잘만 되면!”
1845년 새 학년이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에 교실 앞에서 두 소년은 이렇게 말을 주고 받았다. 그 학교는 토리노의 비아 카세르타( Via Caserta, Turir )에 있는 왕립 무기공장의 종업원이 될 어린이들을 위해서 정부에서 경영하는 학교였다. 타이에 관해서 물어본 소년은 ‘미카엘 루아’였다.
미카엘은 요한 밥티스타 루아의 아홉 자녀 중 막내였다. 미카엘의 아버지는 첫째 부인에게서 다섯 자녀를 얻었고, 부인이 죽자 재혼했다. 그는 둘째 부인에게서는 네 자녀를 얻었는데, 그 부인의 이름은 요안나 마리아 페레로였고, 건강한 크리스찬 부인이요 훌륭한 주부였다. 불행하게도 루아의 여생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미카엘이 태어났을 때는 여덟 자녀 중에 넷만 살아 있었다.
미카엘은 아버지로부터 보잘것없는 건강과 가냘픈 체격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개인의 외관을 주시하는 특징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는 타이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버지의 지위는 십장이었지만 “-노동자가 승진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임-” 루아의 가정은 생활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집 아이들은 그들의 신분을 약간 지나칠 정도로 항상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을 이웃사람들은 알았다.
나중에 태어난 네 자녀들과 같이 미카엘 역시, 공장 고용인들에게 할당된 지역에서 1837년 6월 9일에 태어났고 이틀 후 그 지역에 소속되어 있던 작은 경당에서 주임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 경당에서 첫 교리공부를 했다.
미카엘의 고집으로, 그보다 세 살 위인 알로이시오는 다음 일요일에 그를 오라토리오로 데리고 갔다. 알로이시오는 마을 북쪽에 있는 가까운 길을 지나 높은 담으로 둘려있는 황갈색의 큰 건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들은 아취형의 문을 지나갔다. 미카엘은 자기 또래의 몇몇 어린이들이 섞여 있지만, 대부분 자기보다 나이가 위인 소년들의 무리가 붐비는 가운데 자기가 있다는 것을 곧 알았다. 그 소년들은 자기나 자기 형보다 못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그처럼 많은 소년들을 보고 놀랐다. 왜냐하면 부유한 후작 미망인 ‘바롤로’ 가 경영하는 고아원은 소녀들의 집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롤로는 자선사업으로 해서 피에몬테에서는 유명한 부인이었다.”
미카엘은 공을 피하고, 미친듯이 돌격하는 소년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운동장으로 쓰는, 잔디 없는 마당에 도착했을 때, 형을 쳐다봤다.
“오라토리오는 어디 있어?” 하고 말했다.
알로이시오는 손을 쳐들면서 “저거야” 하고 가리켰다.
“저거야?” 미카엘은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각락을 이탈리아 사람 식으로 알로이시오 앞에 모아서 비볐다. “저거야?” 하고 미카엘은 반복했다. “그래도 난 생각하기를···”
“뭘 생각하고 있니?”
아직도 입을 다물지 않은 미카엘은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그들 뒤로 가까이 다가오는 한 사제를 알아채지 못한 채 그 사제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사제는 손에 쥔 종려나무 가지를 위로 치켜올렸다.
“나는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너와 같은 생각을 한다.” 그는 소리없이 웃었다. “자, 이제 알고 지내자. 이름이 뭐지?”
“미카엘 루아예요. 신부님! 알로이시오는 제 형이예요···.” 소년은 알로이시오를 가리키려고 몸을 돌렸으나, 알로이시오는 벌써 소년들 틈에서 놀이에 어울리고 있었다.
사제와 소년은 운동장을 왔다갔다하며 걷기 시작했다.
“네가 알로이시오 루아의 동생이야? 나는 네가 알로이시오 반만큼만이라도 훌륭했으면 좋겠다. 너의 부모님은 알로이시오를 자랑하실 수 있다. 그러나 너에 대해서는?”
자주 미소짓는 이 사제와의 첫 번째 대화에서 미카엘은, 그 사제와 이야기하기가 퍽 수월하다는 것을 알아채었고, 또 인자한 갈색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미카엘은 사제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지만, 사제는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그들은 미카엘의 가정과 학교, 그리고 미카엘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한 달 전에 미카엘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사제는 크게 동정했다. 미카엘은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지만, 사제는 갑자기 이야기를 중단했다. ==============================
“미카엘, 교리공부 시간이구나”하고 사제는 말했다. “다음 일요일에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제는 쫑을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마지 못해서 놀이가 중단되고, 소년들은 건물 안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서 줄지어 들어갔다. 미카엘은 알로이시오의 어떤 표시를 보았지만 그는 벌써 사라졌다. 미카엘은 혼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텅 빈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벌써 집을 향해서 반쯤 왔을 때였다. 그는 무엇인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사제와 이야기하는 바람에, 그가 오라또리오를 찾아간 중대한 이유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타이에 관해서 물어본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었다.
그는 성급하게 자기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앗차!” 그는 삐에몬떼사람들 식으로 소리쳤다.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는 그 후 오랫동안 타이에 관해서 생각했다.
돈 보스꼬는 나이 30의 혈기 왕성한 사제였고, 벌써 사람들은 그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성직자 세계의 뒷공론이 있었다. 지성적이고 또 높은 은혜를 받은 사제가 세 가지 훌륭한 기회를 거절하고 소수의 부랑아들과 시간을 허비했다. 그 부랑아들은 대부분 타지방 아이들이었고 또 그들 중 몇 명은 분명히 교도소에 들어갈 만한 아이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야유와 욕설을 받지 않고는 사제가 또리노 시가를 걸어갈 수 없었던 어려운 시대에 사제 한 사람이 도시의 죄악 지구인 발독꼬( Valdocco ) 와 뽀르따 빨랏쏘( Porta Palazzo )와 같은 지역에 있는 어린이들의 뒤를 허둥지둥하며 뛰어간다해도 성직자의 이미지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돈 보스꼬의 과감한 행동에 대혹된 고위 성직자들 간에도 이야기가 있었다. 수용소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장소였다.
정치인들은 그들대로 돈 보스꼬를 이상하게 보았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대중을 움직일 능력이 있는 자라서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이들 소년들과 젊은이들과 함께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전체적인 일에 의혹을 풀었던 것은, 이 사제가 정부에서 추방한 또리노의 대주교와 긴밀한 접촉을 갖는다는 사실과, 교황의 신분을 옹호하기 때문에 정치인의 입장에서 볼 때, 삐에몬뗴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교황과 긴밀한 접촉을 갖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그들의 위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운동은 어떤 것이든 진압하려고 계속 경계하고 있었다.
돈 보스꼬와 그의 “소년들”에 관해서는 정치인들보다도 성직자들이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즉 그들은 돈 보스꼬와 그 소년들을 끊임없이 감독해야 하였다.
당국의 고위층에서도 돈 보스꼬의 활동을 주시했다. 마르귀스 드까부르 시장은 돈 보스꼬에게 주의를 경고했다. 자칫했으면 그는 대주교와 같은 운명을 치루어야 했었을 것이다. 삐에문떼의 까롤로 알베르또 왕의 -열심한 사람 - 개인적인 개입으로 인해서 그는 구제되었다.
왕은 돈 보스꼬와 그 소년들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인식시켰다.
돈 보스꼬가 어떻게 사업을 시작했는가 하는 이야기가 어디서나 화제가 되어있었다. 모든 것은 그가 9살 때 본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 그 예언적인 꿈 중의 하나로 그는 후에 유명하게 되었다. 이 꿈에서 그는 자기의 장래가 젊은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보았고, 또 그 꿈은 그의 여생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년들을, 보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소년들을 자기 주위에 모으려고 했다. 그것은 그의 사업이 어떻게 출발했는가를 말해준다.-
1845년 12월 8일 이른 아침에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소년과 함께 추운 길가를 지나 성 프란치스꼬 아씨시 성당의 따뜻한 제의실로 들어갔다. 그 손년은 자기처럼 가난하고 외로운 다른 소년들을 데리고 왔다. 그로부터 소년들의 수가 늘어났다. 돈 보스꼬는 자기가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길 모퉁이에서, 카드 놀이에서, 술집과 여인숙에서 소년들을 모았다. 그는 소년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찾으러 나갔다. 그들을 위해서 그는 집을 포기하고, 교회 안에서 약속되는 출세와 영예와 부귀를 포기했으며, 한번 밖에 없는 생애도 포기했다.
미카엘은 돈 보스꼬를 한번 만나 본 후 또 다시 만나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 오라또리오에 자주가는 것을 허락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거친 소년들 틈에서 지내기에는 미카엘이 너무나 어렸다. 그리고 그 밖에 마카엘이 그 곳에 가야 할 필요가 있는가? 미카엘은 매 주일과 축일에는 공장에 부속된 작은 경당에 나가 미사에 참여했고 또 주임신부는 미카엘이 교리반에 다니도록 이비 돌보고 있었다. 사실 주임신부는 미카엘에게 미사 복사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또 교리에 잘 대답하도록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미카엘은 이미 대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고, 이들 해에는 주임 신부가 첫영성체를 준비하도록 일러주었다. - 미카엘의 나이는 겨우 9살이었다! 얼마나 많은 소년들이 그것을 부러워했을까?-
미카엘은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엄마! 알로이시오와 함께 가면, 날 돌보아 줄 수 있어요.”
“참, 넌 고집도 세구나! 나는 네가 전혀 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니예요. 특별한 기회에 가도록 할꺼예요. 그러나-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가 옷을 엉망으로 해 가지고 집에 온다면- 오라또리오를 잊어버려요! 오라또리오는 너와 같은 어린이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리고 오라또리오의 책임 신부에 관해서 말이 많아요.”
“무슨 말인데, 엄마?”
미카엘의 어머니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아들의 눈에서 슬퍼하는 빛을 보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주임신부님에게 물어봐라! 그 분은 나보다 더 잘 설명해 주실거다”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다음 일요일, 미카엘은 오라또리오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주임신부의 미사 복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복사옷을 급히 벗고 있었다. 주임신부는 그가 서두는 것을 눈치챘다.
“왜 그러니, 미카엘? 어디 잘거니?”
“어머니가 오늘 오라또리오에 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 오라또리오가 돈 보스꼬가 경영하는 오라또리오는 아니겠지?”
“바로 그 오라또리오예요, 그런데 왜요, 신부님?”
“이 녀석아! 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니? 어머니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던?”
“아뇨. 하지만 어머니는 신부님께서 돈 보스꼬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고 하셨어요.”
“나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는 않ㄴ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어.”
순간 미카엘은 숨을 죽였다. “그게 뭐예요? 신부님!”하고 미카엘은 낮은 목소리고 물었다.
주임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손을 들어서 몇 번인가 자기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실제로.“ 신부는 천천히 말했다.” 절대적으로! 사실 돈 보스꼬의 가장 친근한 몇몇 친구들이 그를 신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 요양 소로 가야할 것이라고.“
그는 소년의 반응을 보려고 기다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이 둘레에 있는 애들은 어중이 떠중이 어리석은 놈들이야.”
갑자기 미카엘은 맥이 빠졌다. 그는 복사 옷을 천천히 접어서 서랍에 넣고 소백의는 옷걸이에 걸었다.
“신부님, 안녕히 계세요.” 그는 경당을 떠날 때 그렇게 말했다. 그는 눈물이 고인 눈을 주임신부님이 볼까봐 두려워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처럼 훌륭한 신부님을, 그처럼 놀랍고 인정이 넘치는 신부님을 .......... “실제로! 절대적으로!” 그는 방금 주임신부님이 말한 것을 생각하고 잇었다.
그 날 아침, 미카엘은 오라또리오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무슨 이상한 일을 하나하고 돈 보스꼬를 관찰했다. 그러나 미카엘이 본 신부는, 마당 한 구석에서 어린이들에게 고백의성사를 주거나 혹은 어린이와 잠시 무슨 이야기를 하고는 그를 놀이터로 보내는 젊은 신부였다, 미카엘은 아침 반나절 동안이나 그가 다른 신부님한테서는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을, 이 신부님이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신부님은 소년들과 어울려서 놀고,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과 함께 웃고 때로는 소년들에게 붙잡히는 것을 마카엘은 보았다. 끝으로 미카엘은, 신부님이 소년들과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 한 줄로 서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 저런 !............. 신부님은 정강이를 보이면서 수단을 걷어올려가지고 마당 골짜기 뛰어나갔다가 소년들을 모두 앞질러 뛰어왔다. “어머나! ” 미카엘은 혼자 중얼거렸다. “저걸 보고”
“실제로, 절대적으로 ” 하고 말했다 하더라도 미카엘은 전혀 주의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함께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날에 한 가지 서글픈 일은, 가까이에 있는 성당에서 성체강복이 끝난 후 신부님이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을 때였다.
“ 오늘이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는 소년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고아원의 마당과 이 성당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후작 미망인 이 성당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후작 미망인 바를로는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해서 여기에 사는 이들에게 고통을 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굴었다고 생각해요?”
“아뇨!” 소년들은 소리쳤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부님은 말했다. “어쨌든 다음 주일 우리가 할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9시정각에 뽀르따 빨라쪼에거 만납시다. 쇼티야, 9시 정각이란 무슨 뜻이 있을까요?” “그것은 목을 벨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하고 쇼티가 말했다. - 쇼티는 이웃 마을에서 온 소년이었다. -
“ 그것은 제시간에 어김없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때 또 다른 운동장과 성당을 발견하기를 나는 희망합니다. 그 때 또 다른 운동장과 성당을 발견하기를 나는 희망합니다. 만일 발견치 못하면,” 그는 상쾌한 마음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시골로 걸어가서 성지를 방문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많은 즐거움을 가질 것입니다. 이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성당을 나가세요” 소년들은 성덩 문으로 급히 뛰어갔다.
“조용히 나가라고 했는데.”
소년들은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미카엘은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오라또리오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미카엘은 그가 본 것을 모두 어머니께 말하고, 주임신부님이 돈 보스꼬에게 대해서 얼마나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완전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사제와 그 소년들과 함께 놀고 기도할 장소를 찾으면서 매주일 떠돌아 다니도록 미카엘을 허용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공장 근처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을까요?” 미카엘은 물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보게 될텐데.” 불행하게도 사제는 안정된 장소를 얻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따금 사제와 그 소년들은 루아의 집 가까이로 와서 미카엘은 오라또리오에 갈 수 있는 허락을 받곤 하였다. 그러나 사제를 만날 때마다 미카엘은 사제에게 대한 사랑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돈 보스꼬가 필립보의 마당 사용 허가를 받은 정지주일에, 미카엘은 돈 보스꼬를 보러갔었다. “-필립보의 바당은 정처없는 오라또리오의 최근의 휴식처였다-”
미카엘은 알로이시오로부터 이번이 사제가 소년들을 모으는 마지막이라는 소식도 들었다. 소년들은 자기네들의 장소를 구하기 위하여 또리노 시내 전부를 뛰어다닐만큼 충분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라또리오의 모임을 옛 공동묘지에서 가진 일도 있었다.
그는 교리반에서 자기를 도와준 몇몇 큰 아이들에게, 이 모든 소용돌이를 하느님께서는 그의 사업이 존속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표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았다면 그도 이 사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미카엘은 첫영성체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이미 교리시험에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 주임신부는 다른 소년들처럼 한번만 영성체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관습이 허용하는 한 자주 영성체하라고 선언 할 만큼 성공적으로 통과했던 것이다. -”
1846년 4월 12일, 부활축일은 미카엘에게 있어서는 기쁨이 넘치는 날이었다. 그는 소년의 생애에 놀라운 순간을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의식( 儀式 )에 둘러싸여 처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셨다. 집에서는 미카엘이 가족 축제의 중심이었다. 이런 기쁨에 덧붙여서, 그는 돈 보스꼬가 바로 그날 오라또리오를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운동장과 창고의 대금을 지불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창고는 처음으로 오라또리오의 영구적 집이 될 것이었다. 그날은 돈 보스꼬와 미카엘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아었다.
이제 오라또리오의 자리가 고정되었다. 미카엘은 보다 자주 오라또리오에 잘 허락을 주시도록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어머니는 미카엘이 가입한 성알로이시오 신심회 모임에 참석하도록 허락할만큼 마음이 누그러졌다. 당시의 신심회는 대단한 인기여서 상류계급과 세력가들 사이에도 유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알로이시오가 데리고 가는 경우에 한해서만 갈 수 있다고 했다. 미카엘에게는 그것으로써 충분했다. 적어도 그는 규칙적으로 돈 보스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제와 함꼐 이야기하고 사제로부터 충고나 격려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그를 더 즐겁게하는 것은 없었다.
성 알로이시오 신심회 모임에서 돈 보스꼬는,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은 15일 이내에 상급을 받기 위해여 부르심을 받을 것이다.”고 말했다고 형이 마카엘에게 이야기했다.
그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신심회의 모든 멤버들에게 겁을 주는데 넉넉했다. 그 말씀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알로이시오와 미카엘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족이 이미 많이 사망했고 그들도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아 가족이 또 사망한다해도 그리 큰 놀라움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미카엘은 돈 보스꼬를 보통사제 이상으로 보기 시작했고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보다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돈 보스꼬를 충분히 볼 수 없었고, 그를 힐끗보거나 재 빠른 말을 들을 뿐이었다. 그는 비아 싼 마씨모나 비아 델라 쟈르디니에라를 걸었다. - 그 길은 새 오라또리오로 가는 길가였다.
돈 보스꼬에게 대한 황홀한 상태에서 미카엘은 돈 보스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미카엘이 다닌 뽀르따 빨라띠나에 있는 크리스찬 형제회원들의 학교 어린이들 역시 돈 보스꼬에게 대해서 그런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돈보스꼬가 고백의 성사를 주거나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나타나면 소년들은 돈 보스꼬의 둘레에 모여들어서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수단자락을 잡아당겼다. - 사제를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다. 돈 보스꼬가 병이 나서 휴양차 사씨 ( Sassi ) 로 떠나갔는데, 어느날 아침 아이들은 모두 돈 보스꼬를 찾아가 고백의 성사를 받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랬다. 미카엘은 돈 보스꼬를 고해신부로 택하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 돈 보스꼬는 몇몇 소년들에게 이야기를 마치면 주머니에서 성모 마리아의 메달을 꺼내 소년들에게 준다는 것을 미카엘은 알아차렸다. 그는 다른 소년들처럼 자기도 메달을 얻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미카엘은 긴장한 얼굴로 사제에게 가까이갔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그는 말을 걸었다.
“잘 있었니, 미카엘, 왜 그러니?”
“다른 애들에게 주시는 메달을 제게도 하나 주세요”
“그래, 메달이 갖고 싶으냐?” 돈 보스꼬는 턱을 손으로 고이고 자기 앞에 있는 소년을 유심히 보았다.
“내가 무엇을 할지 말해봐, 미카엘 나는 메달보다도 더한 것을 네게 줄테니 손을 내밀어”
미타엘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걸 가져라.”하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그는 왼손을 내밀고 바른 손으로는 그것을 반으로 짜르는 시늉을 하였다.
“뭘 가져요, 신부님?” 미카엘은 완전히 어리둥절하였다.
“반을 가져라.”
“뭘 반을 가져요, 신부님?!”
“걱정말어라.” 사제는 말했다. “때가 오면 네가 그것을 알아 들을 것이다.”
돈 보스꼬는 미카엘에게 메달을 주었다. 소년은 돈 보스꼬가 자기에게 한 농담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돌아갔다.
1850년이 저물어갈 무렵, 미카엘은 크리스찬 형제회원들이 경영하는 국민학교 교육을 마쳤다. 다음 단계는 그의 생애에 중대한 단계가 될 것이다. 수사물은 소년 미카엘이 크리스찬 형제회에 들어오기를 희망했다. 미카엘의 스승이고 또 미카엘이 아주 좋아했던 미카엘 수사는 수도회에 들어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은 미카엘 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수사님이 오또리노에 께신다면, 나는 크리스찬 형제회에 들어가겠습니다.”
한편 그의 가정에서는 미카엘이 공장에 머물러 있기를 바랬다.
공장에는 그 가정의 전통상 그의 출세 길이 트여있었다. 그래서 미카엘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오라또리오에 나갈 마음을 먹었다.
마침내 돈 보스꼬와 접촉했다. 미카엘이 이 모든 것을 돈 보스꼬에게 터놓고 얘기했을 때, 돈 보스꼬는 미카엘에 대한 계획이 잘 되려면, 신속히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미카엘은 보통 소년이 아니라는 신념을 돈 보스꼬는 갖게 되었다. 돈 보스꼬는 미카엘에 대해서 큰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이 희망은 소년의 뛰어난 정신의 자질과 마음에 전적으로 그 바탕을 둔 것은 아니었다. 1847년 초에 돈 보스꼬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장미꽃으로 뒤엎인 정자를 가리키시면서 장미꽃으로 덮인 마당 위를 걷자고 하셨다. 그러나 돈 보스꼬가 장미꽃 위를 걸으려고 하자 그는 당황했다. 장미꽃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지켜보고 장미꽃에 매력을 느낀 몇몇 사람들이 그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시를 보자 곧 물러서 버리고 말았다. 돈 보스꼬는 눈물을 머금고 성모님께 도움을 청했다. 그 때 성모님은 자세와 신학생과 수사들의 집단을 그에게 보여주셨다. 그들은 돈보스꼬에게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신부님의 것입니다. 돈 보스꼬!” 하고 그들은 소리쳤다. “우리는 신부님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이 집단 선두에 미카엘 루아가 있는 것을 돈 보스꼬는 소년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하기로 결심했니?”하고 돈 보스꼬는 소년에게 물었다.
“나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길입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지 않니?”
“전 공부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신부님, 그러나 집안 일이 어떻다는 것을 신부님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돈 보스꼬는 소년을 응시했다. “가령 라틴어를 배울 기회가 생긴다면? 또 가령 주께서 너를 사제직에로 부르신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신부님, 전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한가지 확실한 방법은 어머니께 물어 보는 것이다.”
미카엘은 잘 가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나와서 단숨에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돈 보스꼬를 만난 것을 이야기하고, 돈 보스꼬의 제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머니께 물어봤다.
어머니는 잠시 동안 허드렛일을 해치우고 손을 앞치마에 닦은 다음 자리에 앉았다.
“이리 온” 어머니는 말했다.
미카엘은 어머니 곁에서 갔다.
“ 얘야” 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어머니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고, 아들의 손을 잡았다. “네가 사제가 된 것을 보면 내가 얼마나 좋겠니! 하느님께서 그런 특은을 내게 내려주신다면, 나는 이루다 감사드릴 수 없다는 것을 하느님만이 아실 거다. 네가 1년 더 공부하도록 내가 허락했다는 것을 신부님께 말씀드려라. 그리고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자”
그러나 크리스찬 형제회 수사에게 한 미카엘의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느님의 섭리는 그러한 장애물을 제거하셨다. 그 해에 미카엘이 약속한 그 수사가 또리노 밖에 있는 다른 학교로 전임되었던 것이다.
II. "야, 이 꼬맹아! 넌 가서
시원한 냉수나 마시는게 좋겠어”
돈 보스꼬는 몇가지 가혹한 실망의 고통을 치루어야 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수도 가족의 멤버로 부름을 받은 이들로부터 오는것이었다. 그의 협조자들이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그와 함께 일을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열정이 시들어버리거나 혹은 책임을 벗어던지고 떠나가 버리는 것을 돈 보스꼬는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소년들의 영신적 요구를 돌보기 위하여 그가 초청한 사제들과, 함께 렵력하도록 초청한 사람들도 그러했다. 또 그의 은인들도 그러했다. 또 그것은 그가 특별히 돌보고 사제직에 오르도록 훈련한 젊은이들도 그러했다. - 이것은 돈 보스꼬에게 치명적인 아픔을 주었다. -
그와같은 계속적인 탈퇴를 보고 그는 자기에게 헌신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자기가 생각한 노선을 따라서 훈련할 수 있는 아주 젊고 특수한 남아들로 구성되는 토대로 시작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와 같은 많은 이탈이 있은 후, 그는 여러 가지 도전에 부딪쳐서 끈질기게 인내할 수 있었다.
미카엘이 사제직을 위해서 공부할 의향이 있다는 것이 어째서 그처럼 돈 보스꼬에서 큰 의미가 있느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돈 보스꼬는 이미 그 소년 안에서, 자기에게 성실하고, 자기 사업에 헌신하며, 한 마디로 자기에게 혜속할 특별한 집단의 멤버를 보았던 것이다.
미카엘에 대해서 그처럼 큰 기대를 걸었는데 미카엘이 낙제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돈 보스꼬는 얼마나 놀라고 원통하였겠는가, 당시 소년들을 가르치던 사람을 펠릭스 레빌리오 라는 젊은이였다. 돈 보스꼬는 그를 선생으로 채용했다. 그는 당시에 유용하다고 하는 방법을 언제나 사용했지만, 그 방법은 적절한 것이 못됐다. 학교가 시작된지 몇 주간 지나서 돈 보스꼬는 레빌리오에게 “항색들의 성적이 어떤가”하고 물어보았다.
“모두 공부를 잘 합니다” 하고 레빌리오는 말했다. “한 학생을 제외하고는 몰두 잘 합니다.” “누군데?”
“미카엘 루아입니다.”
“루아? 그럴 수가 있나?”
“그렇습니다 여기 성적표가 있습니다. 라틴어 점수가 좋지 않다는 것을 보싯 수 있습니다.”
단 한번 돈 보스꼬는 완전히 당황하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루아도 방향을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확실히 영리한 소년이다. 적어도 학급의 다른 아이들을 따라갈 정도는 된다.”
“그가 주제넘게 굴지만 않는다면.” 직접 부딪쳐 보려고 결심하면서 돈 보스꼬는 다른 그룹의 요셉 부제띠의 도움을 요청했고 어떻게 할 것인지 그에게 말했다.
“나 좀 보자, 미카엘” 하고 부제띠는 말했다. “돈 보스꼬는 학생들의 성적이 어떠한지 레빌리오에게 물어보셨다. 그런데 레빌리오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적이 좋다고 말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너다. 너는 가르치는 과목에 특히 라틴어에 힘을 쓰눈 것 같지 않다고 레벨리오는 말했다. 돈 보스꼬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매우 당황하셨다.”
돈 보스꼬라는 이름이 나오고 또 성적표가 그에게 미친 결과를 부제띠가 상기시키자, 미카엘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변하고 몸을 떨기까지 했다. 그 때부터 미카엘은 결코 뒤를 돌아다 보지 않았다. 학과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경우에는 노련한 스승들의 도움을 청하곤 하였다. 그는 레빌리오와 같은 사람들처럼 다른 수단 방법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미카엘이 낙제한 것은 그 때 뿐이었다.
9월 첫 주간에, 백명이 넘는 소년들을 데리고, 또리노에서 서방으로 25킬로 떨어진 작은 마을 쟈베노에 있는 소신학교에서 돈보스꼬가 피정을 개최했을 때, 생활이 한층 더 밝아왔다. 미카엘은 요구되는 나이 16살이 되지 않았지만 돈 보스꼬의 주장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미카엘은 이렇게 기록했다. “피정이 끝날 때 돈 보스꼬는 세가지 교훈을 주겠다고 말했다. - 첫째, 행복한 죽음에 대한 묵상을 매달 하라. - 둘째, 행복한 죽음에 대한 묵상을 매달 잘하라 - 그리고 셋째, 행복한 죽음에 대한 묵상을 매달 빼놓지 말고 잘하라.”
9월에, 돈 보스꼬의 출생지인 가스뗄루오보 근처 베키에 있는 그의 형의 농장에서 함께 며칠 동안 보내기 위하여 여러 명의 소년들을 돈 보스꼬가 청했을 때, 틀어 박힌 생활 속에서 두 번째로 기쁜 일이 생겼다. 그는 방 하나를 로사리오의 성모께 봉헌된 경당으로 만들었고, 매년 그 지역에 있는 여러 성당을 방문하면서 함께 축일을 지내기 위하여 몇몇 소년들을 데리고 갔다. 돈 보스꼬가 미카엘을 초청했을 때, 미카엘은 몹시 기뻐했다. 시골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는 도시 소년의 자연적인 흥분외에 돈 보스꼬와 함께 휴일을 보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돈 보스꼬는 다른 모든 사무를 벗어나서 소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소년들의 교회 의식에 참여하는 관례 중의 하나는 합창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제단에서 봉사하는 것 이었다. 본당신부는 소년들을 식사에 초대함으로 보답했다. 음시은 흔히 전통적인 삐에몬떼식 뽈랜다( 옥수수로 만든 죽 ) 였다.
가스뗄누오 본당의 주임인 안또니오 친쟈노 신부는 보스꼬의 친한 벗이었다. 그래서 돈 보스꼬의 소년들이 그 본당을 방문하면, 주임신부는 소년들을 모두 식사에 초대하였다.
그 때 주임신부를 도와 드리던 요한 깔리에로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독창적인 성격과 지성과 충만한 정신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도 역시 사제직을 위해서 공부하고 있었고, 친쟈노 신부가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었다, 깔리에로는, 그와 루아는 성격상의 차이 때문에 서로 팽팽히 맞설 것이라고 말했다. 글들의 첫 번 상봉은 깔리에로의 말대로 전혀 매력이 없었다.
요한은 보통 음식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요한이 이 집안에서는 어디나 자유로 듣다는 것을 깨달은 큰 소년 하나가 웃으면서 요한에게 닥아갔다.
“요한” 그는 말했다. “네가 여기 두목인 것 같은데, 너는 포도주 저장실 열쇠를 갖고 있을 거야. 왜 우리 큰 놈들에게 포도주 한 방울도 안 주니?” 요한은 서글서글하고, 또 포도주는 이 고장에서는 보통 물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조금도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약간의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마침내 요한은 승낙하고 큰 아이들을 데리고 포도주 저장실로 갔다. 요한은 작은 술잔에다가 큰 포도주 병에서 술을 가득 따루어서 돌려 가면서 소년들에게 주었다. 그것은 아주 재미있었다. 그들은 깔깔 거리며 웃었고, 깔리에로 역시 그 누구보다도 즐거웠다.
그러나 요한이 처음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생겼다. 처음에 포도주 저장실로 그가 초대한 소년들의 수는 5,6명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포도주 저장실에 소년들이 꽉 차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같은 사람이 포도주 잔을 두 세 번씩 받았다.
포도주가 없어진다는 것보다도, 그들이 자기를 이용한다는 생각에 더욱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당장 중단하려고 결심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겼던가? 그 순간에 가냘프게 보이는 소년이 자기 앞에 서서 양순하게 잔을 내밀며 포도주를 청했다. 이 소년을 보자 만만한 생각이 들어서 갈리에로는 묘한 생각을 했다.
“ 네 이름이 뭐지?” 하고 그는 물었다.
“ 루아, 미카엘 루아, 내 친구들은 나를 꼬마 미카엘이라고 불러.”
“ 좋아, 꼬마 미카엘,” 요한은 그에게서 술잔을 받아들고, 신사답게 그러나 힘있게 그를 포도주 저장실 밖으로 밀어 버렸다.
“야, 이 꼬맹아! 넌 가서 시원한 냉수나 마시는게 좋겠어”하고 그는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곧 눈치를 채고 포도주 저장실에서 급히 나왔다. 요한은 저장실 문을 잠그고, 영리한 도시 아이들에게 다시는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몇 달이나 지난 1851년 추에 미카엘은 다른 6명의 학생들과 함께, 이번에는 베드로 에르까 신부라고 하는 다재다능한 선생의 지도 하에 학업을 계속했다. 돈 보스꼬는 학과를 가르칠 시간도 없고 또 재능고 없기 때문에 소년들을 도와줄 사람들ㅇ르 계속 밖에서 찾아내야 했다. 그는 소년들을 공립학교로 보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1837년에 - 미카엘이 타어나던 해 - 빈챈시오트로야의 새 교수법이 도입된 이래, 학교는 자유주의자들과 반성직자 사상을 가진 자들에게 넘어갔고, 교회를 반대하는 공격과 유물론적 교수의 중심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2월 2일, 예수봉헌 축일에, 미카엘은 다른 소년들과 함께 오라또이오에서 의식 ( 儀式 )에 참여했는데, 그 의식에서 그의 동료 7명 중 4명이 착복식을 했다.
2월 19일, 돈 보스꼬는 그의 친구 안또니오 로스미니 수도원장으로부터 대부를 받아 삐나르디(Pinardi)의 별채와 마당을 구입하여 처음으로 항구적인 축일의 오라또리오( Festive Oratory)로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보고 미카엘은 몹시 기뻐했으나 그 기쁨은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며칠 후, 즉 2월 25일에 그가 그처럼 좋아하던 형 알로이시오가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알로이시오의 죽음은 미카엘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어머니의 애정과 그를 도와 주려는 돈 보스꼬의 격려로 그의 마음은 좀 위안을 얻었다.
그때부터 미카엘은 대부분의 시간을 오라또리오에서 보내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자기 위해서만 집으로 갔다. 돈 보스꼬는 미카엘과 함께 커피를 나누었다. 이것은 그들이 아주 가까워지는 기회를 제공했고, 또 돈 보스꼬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는 기회를 미카엘에게 제공했다. 돈 보스꼬를 지켜보는 것이 어느 묵상책을 읽는 것보다도 더 좋다고 미카엘은 고백했다. 또 돈 보스꼬는 어린 미카엘을 깊이 관찰 할 수 있었다.
돈 보스꼬는 미카엘이 사도직을 이행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돈 보스꼬는 작은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주일에 오라또리오에서 전반적으로 일을 거들어 달라고 미카엘에거 청했다. 미카엘은 관대히 협력했다. 어린이들이 미사에 참례하러 올 때, 미카엘은 펌프 앞에 서서 영성체할 어린이들이 물을 마심으로 공복재를 깨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다. 미사 동아에는 어린이들이 기도하고 성당에서 몸을 단정히 하도록 일깨워주었다. 미카엘은 극히 단정하였기 때문에, 미케엘의 존재만으로 어린이들이 쑤군덕 거리지 못하게 할만큼 어린이들에게 비상한 영향을 미쳤다. 돈 보스꼬는 시내학교에 가는 어린이들에게 대한 책임을 미카엘에게 맡겼다.
그의 엄격함과 그룹을 보살피는 책임의식은, 오라또리오에 나오게 된 깔리에로와의 충돌을 야기시켰다. 깔리에로는 친쟈노 신부님 댁에서 처음으로 돈 보스꼬를 만났고, 처음 볼 때부터 돈 보스꼬의 매력에 이끌렸다. 돈 보스꼬는 깔리에로를 오라또리오에 받아 들였다. 왜냐하면 돈 보스꼬는 소년에게서 큰 능력을 보았고, 그가 본래 성격이 명랑하고 외향적 ( ( 外向的 ) 이며, 힘이 좋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은 이렇게 발생했다. 학교로 가는 길에 그룹의 한 사람인 깔리에로는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을 보았다 -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하는 줄타기 곡예사들과 요술쟁이들, 그리고 길가와 광장에다가 지나는 사람들이 즐기도록 칸막이 좌석을 차려놓고 마술쟁이들이다.- 깔리에로가 연예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가 숭배하는 돈보스꼬를 가능한 한 본받으려는 욕망에 있었다. 돈 보스꼬는 어려서 모든 종류의 장난 - 요술과 곡예를 포함해서 -을 하고, 소년들을 이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깔리에로도 꼭같은 것을 하려고 했다. 이런 장난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익숙한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서 깔리에로는 그것을 지켜볼 수 있고 또 오라또리오에 늦지 않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는 학교가 끝난 다음 곧 칸막이 의자를 뛰어가서 잠깐 동안 지켜보고, 다시 뛰어서 다른 소년들이 오라또리오로 들어갈 때 늦지 않도록 시간을 맞추었다.
깔리에로에게는 이것으로써 괜찮았다. 그러나 루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기율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루아는 깔리에로를 모함한 그룹의 모든 멤버들에게 대한 책임을 통렬히 느꼈다. 그는 깔리에로가 규칙과 기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다. 그리고 루아는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루아에게 있어서 규칙이란 바로 돈 보스꼬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또 그것은 돈 보스꼬가 따라가기를 소망하는 지침이었기 때문이다. 돈 보스꼬가 원한 것을 정확히 이행하는 것이, 루아에게는 인생의 전부였다.
루아는 깔리에로가 한번 뿐 아니라, 여러 번 규칙을 어긴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 깔리에로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학교에 늦은 일도 없고 또 오라또리오에 늦은 일도 없지 않은가? 루아는 도대체 무엇을 더 바라는가? 루아는 깔리에로의 마음에 변화가 있기를 바라면서 참고 기다렸다. 그러나 마음에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것을 보고, 루아는 이 문제를 돈보스꼬에게 알리려고 결심했다. 상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깔리에로가 오라또리오의 규칙에 대해서 계속 순종치 않고 등한시한다는 것은 다른 소년들에게 나쁜 본을 주는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오라또리오를 위해서 돈 보스꼬는 깔리에로를 집으로 보내야 할 것 인가!
만일 루아가 그처럼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면, 깔리에로를 참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을 돈 보스꼬는 알고 있었다. 한편 돈 보스꼬는 깔리에로와 같은 능력있는 소년을 읽어버리면 싶지 않았다. 돈 보스꼬는 웃으면서 미카엘에게 좀 더 부드럽고 덜 찡그리는 태도를 취하라고 한 다음, 곧 깔리에로를 보내라고 했다.
깔리에로는 돈 보스꼬께서 보자고 하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조이기 시작했다. 루아는 오랫 동안 깔리에로 뒤에 있었고, 오라또리오에 새로 들어온 소년도 루아가 뭐라고 해서 돈 보스꼬께서 만나자고 하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깔리에로는 2층으로 올라가, 돈 보스꼬의 방이 있는 작은 발코니로 가서 문을 노크했다. 깔리에로가 방에 들어섰을 때 돈 보스꼬는 큰 서재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요한이니?” 돈 보스꼬는 계속 글을 쓰고 있었다.
“예, 저예요, 신부님”
돈 보스꼬는 한 장, 또 한 장 계속해서 글을 썼다. 그 동안 깔리에로는 양심을 반성했다. 그는 그곳에 오랫동안 서있었기 때문에 돈 보스꼬가 자기에게 관해서 모든 것을 잊어버렸나 하고 생각했다. 마침내 돈 보스꼬는 펜을 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요즈음엔 어떻게 지냈니, 요한?”
깔리에로는 얼굴을 들고 한 발 앞으로 걸었다.
“루아가 네게 관해서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그가 말한 것이 좀 과장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깔리에로는 돈 보스꼬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깨닫고 흥분해서 변명하려고 했다. 그는 늘 그렇게 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 요한, ” 돈 보스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렇게 계속했다.“
내가 오라또리오에서 너를 내보내게 하겠니? 가스뗄누오보로부터 마차를 타고 올 때, 우리는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장래를 설계하지 않았니?“
그것으로써 깔리에로에게는 충분했다. 그는 주저앉아 돈 보스꼬의 무릎 앞에서 흐느끼면서, 그가 요술쟁이와 곡에사들과 마술쟁이들을 보러갔던 마음에 품은 뜻을 설명하려고 했다.
돈 보스꼬는 깔리에로에게 흉금을 털어놓게 하였다. 한편 돈 보스꼬는 머리가 터지면서도 줄타기를 하고 모든 종류의 장난을 태우던 옛날을 회상했다. 꼬마시절을 그리면서 돈 보스꼬는 다시 소년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래, 그래!” 그는 소년을 달랬다. “너는 나이먹은 보잘것 없는 돈 보그꼬의 마음을 상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나를 도와주려면 오라또리오의 규칙을 따르고, 책임 있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루아는 내가 말하는 것만을 이행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제 너도 그의 본을 따라야 한다. 보속으로 성당에 내려가서 성모님께 은총을 구해라..........완전히 마음을 돌려야지!”
소년은 일어나서 신부님의 손에 입맞추고, 돈 보스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다.
돈 보스꼬의 눈이 빚난 것은 이때였다. “요한 깔리에로, 가쓰뗄누오보의 자랑, 너는 돈 보스꼬의 마음을 아프에 하겠니? 언젠가는 내 생애에 가장 큰 위안을 내게 주지 않겠니!:
루아는 점점 더 사도직에 참여하였지만 학교에서 톱을 차지했다. 메르따 신부가 더 이상 도와줄 수 없게 되자 그의 뒤를 가롤로 요셉 본쟈니노 선생이었다. 그는 훌륭한 선생이었고 돈 보스꼬를 경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돈 보스꼬와 협력하려는 소망외에 또 다른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학급에는 그의 영성 때문에, 또리노의 부유한 집안 소년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소년들은 공부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본쟈니노는 돈 보스꼬의 소년들이, 보다 잘 공부하도록 다른 소년들에게 어떤 자극을 주기를 희망했다.
루아의 동료 중의 하나인 세례사 - 요한 프란체시아에 의하면, 학급생들 중에 루아가 여러차례의 시험을 거쳐서 영예의 자리를 차지했고 또 그 학급에 있는 동안 줄곧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돈 보스꼬가 자기 소년들의 성적이 어떠한지 물어봤을 때, 본쟈니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학급의 수석이 누군지 아십니까?”
“마르키시오 입니까?” 마르키시오는 머리가 좋은 소년이었다.
“그도 공부를 잘 합니다. 그러나 학급의 수석은 루아입니다.”
루아의 학교성적과 오라또리오를 위한 그의 열성, 그리고 돈 보스꼬에게 대한 그의 정성은 차차로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그들 중의 한 사람, 약간 경솔한 안젤로 사비오는 휴식시간에 루아를 불렀다.
“미카엘, 돈 보스꼬께서 내게 대하여 우리에게 뭐라고 하셨는지 아니?”하고 그는 물어봤다.
미카엘은 머리를 흔들었다.
“ 돈 보스꼬께서는 오라또리오 관리자로 너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셨어.”
사실 돈 보스꼬는 루아를 칭찬하는 표시를 여러번 주었었다.
오라또리오는, 돈 보스꼬가 삐나르디 별채 서쪽 벽을 따라서 성프란치스꼬 살레시오에게 봉헌된 새 성당 건축을 착공할 정도로 성공했다. 그 후 별채는 주택으로 개조되었다. 그 일이 성취되자 돈 보스꼬는 그의 꿈이 언제가는 실현되리라는 것을 전보다도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보스꼬가 미카엘에게 이야기한 꿈 중의 하나는 지금 건축한 것과 비슷한 큰 성당이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이 성당 정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이것은 나의 집이니라. 여기서 나의 영광이 드러나리라.” 수많은 소년들과 성직자들이 이 성당 안팎을 지나갔다.
1852년 6월 5일, 토요일 저녁에 미카엘이 모임에 참석했을때 아마 그는 돈 보스꼬가 그날 아침에 계획한 일의 중욧어을 깨닫지 못하고 참석했을 것이다. 외관상 그것은 간단한 사무였다. 미카엘이 기록한 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돈 보스꼬와 14명이 기록한 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돈 보스꼬와 14명의 소년이 - 그 들 중에는 루아가 깔리에로, 그리고 프란체시아가 있음 -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에서 각자는 매 주일마다 성포의 칠고칠락을 외우기로 합의했다. 다음해, 1853년 5월 1일까지 누가 이것을 빼놓지 않고 실천했나 볼 것이다“ 그 모임에서 돈 보스꼬는 각자는 애덕으로 결점을 충고해 줄 비밀 충고자를 그들 중에서 선택하라고 권했다. 미카엘은 비밀 충고자로 레빌리오를 택했다.
돈 보스꼬는 자신이 형성하는 성직자 집단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했던가? - 그리고 교회의 장상들에게 대해서는? - 또 교회 당국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이것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가 살던 때의 역사적인 특수한 상황에 대한 몇가지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는 교회와 국가라는 두 개의 불꽃 사이에 영구히 잡혀있는 불우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조국 이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그것이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교황께 대한 그의 충성은 끝없는 것이었다.
삐에문떼는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반항자들이 상징이요 지도자로서 요구한 왕들, 사보이 왕가의 근원이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통합-자유 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때까지 이탈리아는 세력으로 지리적 표시를 분명히 하였었다. 노바라 ( Novara, 1848 )이후 이탈리아 사람들은 두 차례에 걸친 패배의 아픔을 당했지만 침략자들을 쫓아버리고 이탈리아를 통일하며 로마를 그 수도로 하기까지는 결코 만족치 않았다.
성청에서는 이 운ㄴ동이 교황영토 ( Papal States )와 로마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반대하였다. 또 성청은 로마에서의 민주정치 이념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것은 보편교회에 어느 정도 해로운 법률을 백성이 투표하여 결정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황 선거에도 간섭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라를 사랑할 그들의 의무에 충실하면서도 교회에 충성을 다하고저 했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힘들고 혼란한 시대였다. 이처럼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이득을 얻은 사람들은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교황직위를 가혹하게 반대했고 가톨릭 정신과 기타의 모든 종교 형태를 반대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고, 교회멤버들의 언행을 발전과 자유과 통합에로 향하기 위하여 혈안이 돼 있었다. 물론 그들은 그와 같은 기회를 많이 제공받았다. 그처럼 팽팽히 맨 밧줄 위에서 균형을 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와 국가의 문제는 새로운 문제로 등장했고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어떤 해결책을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종교를 적대시하는 자들은 시까르디법을 강제로 통과시켜, 수도단체에 속했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 공동체를 해산시키고 대주료를 추방하기까지 하였다. 탁발 ( 托鉢 ) 수사라는 낱말이 악용되었고 상류계급의 가정은 이제 가족 중에 사제나 수도자가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고, 당국에서는 성직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시민권을 거부했고, 주민들의 편의상 그 존재를 아직 허용한 수도원 학교에 사는 이들에게도 기본적인 시민권을 거부했다.
돈 보스꼬가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하려고 계획한 것이 바로 그런 시대였고 또 그런 상황 속에서 였다. 대주교도 돈 보스꼬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대주교는 돈 보스꼬가 대교구를 위해서 장래의 성직자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돈 보스꼬는 일생을 통하여 약 2천명의 사제를 이달리아 교구에 바쳤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모든 점을 생각해 볼 때, 본 보스꼬가 어째서 교회당국 및 정부당국과의 교섭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이유를 쉽게 알 것이다. - 그리고 장래 자기 수도회의 멤버들과의 교섭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쟈베노에서 있었던 피정 때 돈 보스꼬는 미카엘을 가까이 부른 일이 있었다.
“ 미카엘, ” 그는 말했다. “때가 오면 너는 가저을 아주 떠나서 오라또리오에 영구히 머물러있을 결심을 해야한다는 것을 네게 말해야겠구나. 물론 그것은 네게 있어서는 아주 새로운 인생길이 될 것이다. 너는 네 앞에 있는 홍해와 사막을 지나야 약속 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미카엘, 네가 나와 함께 머물러 있고 나를 도와준다면, 우리는 함께 성공적으로 홍해와 사막을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나는 보증한다.”
미카엘은 돈 보스꼬가 무엇을 가르쳐 홍해와 약속의 땅이라고 했는지 분명히는 몰랐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돈 보스꼬 곁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의 마음에는 이미 결심이 서있었다. 한가지 분명치 않은 것은 집안 사람들을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가 자기 의향을 집안 사람들에게 알리자, 그들은 떠들썩했다. “ 너 정신 나갔니?” 그 형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이러했다. “ 그 사제를 위해서 너는 자신을 속박할 수는 없다. 그 사제가 어떻게 끝장이 날지 누가 아느냐? 그리고 또 너는 어떻게 될지 아느냐! 아마 한 두가지 이유로 너는 사제가 되지 못 할 것이다. 어떤 유익한 직업 훈련도 없이 넌 어디로 갈 것이냐?
또 직업도 없이? 넌 왜 집안 사람들의 말을 따를 수 없고 공장에서 일할 수 없단 말이냐? 우리는 아버지를 쫓아서 충분히 성공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공부를 해서 네 우두머리와 함께 멀리 떠나려고 하지.“
형들은 어머니가 미카엘의 의향을 반대하기를 바랬고, 어머니가 나이가 많은데 미카엘이 떠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면서 은근히 협력을 청했다. 첫 번째 어머니의 아들들인 그들은 이미 어머니를 떠나서 그들의 가정을 꾸미고 있었다. 어머니의 대답은 미카엘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카엘 자신의 대답은 특징적 이었다. 그는 조용히 귀담아듣고 자신의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돈 보스꼬 앞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경정했고, 돈 보스꼬는 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기숙사의 지도 신부인 요셉 까팟소와 의논하기 위하여 미카엘을 보냈다. 먹구름이 지나간 9월 24일, 미카엘 루아는 돈 보스꼬와 함께 오라도 리오에서 영구히 생활하는 37번째 소년이 되었다.
1853년 10월 3일, 돈 보스꼬는 미카엘과, 요셉 로키에띠라고 하는 18세된 소년에게 수단을 입혀주기를 결정했다. 돈 보스꼬는 이 두 소년과 다른 소년들을 격려하고, 또 급속히 발전하는 오라또리오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두 신학생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결정했던 것이다. 물론 이에 앞서서 쟈베노의 소신학교에서 피정을 했다. 또리노의 프란조니 대주교는, 먼저 대교구의 시험을 거쳐야한다는 조건하에 두 소년에게 수단을 입할 것을 돈 보스꼬에게 승낙했다.
그 해 로사리오 축일을 위해서 베키로 연례 여행을 가는 중 루아와 로케이띠는 수단을 받았다. 친쟈노 신부는 로키에띠에게 수단을 주었고, 서례자 요한 베르따냐 신부는 루아에게 수단을 주었다. 미카엘은 마지막으로 세속의 옷을 벗고 성직자의 검은 수단을 입었다.
의식이 끝난 다음 친쟈노 신부는 돈 보스꼬를 바라봤다.
친쟈노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신학생이었을 때의 일이 생각나십니까? 당신은 많은 사제들과 신학생들, 학생들과 지원자들, 막대들과 큰 성당을 갖겠다고 내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 “ 그 때 당신은 미쳤느냐고 말하곤 했지요.” 그는 지난 일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제 당신의 말이 옳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친쟈노 신부가 회상에 잠겨있는 동안 돈 보스꼬는 루아를 응시하고 장미꽃과 가시의 꿈을 생각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 루아는 수단을 입는다는 신기함 속에서 오라또니오 생활에 마음이 잡혀있었다. 그는 돈 보스꼬를 보면 만족한 미소를 보냈고, 돈 보스꼬도 미소로 답했다. 어느 날 미카엘은 오랫동안 자기에게 근심을 주었고 또 돈 보스꼬에게 물어본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못 물어본 것이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미카엘은 날로 성장하는 돈 보스꼬와의 친밀감에 용기를 얻어 그에게 가까이 갔다.
“신부님, 오랫동안 제가 여쭈어보고 싶던 것이 있습니다.” 하고 미카엘은 말했다.
“그게 뭔데, 미카엘?”
“뽀르따 빨라쪼에서 무엇인가를 반 ( 半 ) 잘라서 제게 주시는 시늉을 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신 거죠?”
“미카엘” 돈 보스꼬는 그렇게 말하고 웃음을 걷우었다. “그 때 나는 - 네가 지금 알아듣지 못하면, 나중에 알아듣게 될 것을 의미했다.”
소년들이 매우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돈 보스꼬는 곧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은 아니지. 이미 너는 내 옷과- 내 만또의 반을 나누어갖고 있다.”
III. 사제가 되기까지
“나는 그가 그처럼 비참해 보이는 것을 본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프란체시아는 이렇게 기록했다. “때는 한 봄,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 대체로 구질구질한 날이었다. ”우리는 함께 학교로 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미카엘, 넌 참 우울해 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니?!”
미카엘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우리 형 요한이 죽었어.”
이 죽음은 그 어느 죽음보다도 미카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세례자-요한 루아는 23살이었고, 미카엘을 제외한 3자녀 중 끝이었다.-남자 셋, 여자 한명, 그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늘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미카엘의 어머니를 공장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갔다. 첫째 부인의 자녀들은 이제 따로 살기 때문이다. 후에도 돈 보스꼬의 제안으로 어머니는 오라또리오 근처에 있는 집에서 지냈다. 그 집은 장래에 확장할 목적으로 돈 보스꼬가 구입한 집이었다.
“이젠 내 차례야!” 미카엘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죽음이 가까웠다구 느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침울한 생각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돈 보스꼬는 교리반 어린이들을 모으도록 발둑꼬( Valdocco )로 그를 보냈다. 이제 성 프란치스꼬의 새 성당이 완성된 그 곳에서 미카엘은 주일과 축일보다도 더 많은 어린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루아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인기를 끌 약간의 선물을 모았고, 어린이들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발독꼬를 온통 휩쓰면서 종을 흔들었다.
돈 보스꼬는 이 밖에 시간을 보내는 과업을 그에게 주었다.-
돈 보스꼬의 새로운 모험적 사업에 관한 출판물을 교정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 Catholic Readings " 라고 칭하는 소책자로 된 연속물이었다. 돈 보스꼬가 쓴 원고를 해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 보스꼬는 일생을 통해서 글씨를 한 번도 잘 쓴 일이 없었고, 또 그 나이에 그의 필적을 고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보잘것 없는 필적에다가 돈 보스꼬는 끌씨는 고치고 또 고쳤고, 주를 달고, 지우고, 삽입하고, 각주( 脚註 )를 덧붙였다. ... 한 당대인은 돈 보스꼬가 쓴 글씨장을 보고 ”혼비백산 하는 싸움터처럼 보인다“고 묘사했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돈 보스꼬는 원고를 루아에게 주었다. ”여기에 너를 위한 아름다운 작은 구슬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 “그러나 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슬을 꿰어나아가야 한다.”
이 [ Catholic readings ] 는 삐에몬떼 전역과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 곧 보급되었다. 그것은 성공적이어서 돈 보스꼬에게 반성직자 주의자들의 노여움을 초래했다. 그들은 그 성공에 격분하여 그 출판물을 중지하지 않으면 돈 보스꼬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고 돈 보스꼬에게 협박했다. 이것은 공갈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돈 보스꼬를 죽이려고 시도했고, 한번은 그가 소년들에게 설교할 때, 그에게 총을 쐈다.
그 무렵에 그리지오라는 개가 나타났었다.
돈 보스꼬가 여러 가지 일과 책임을 루아에게 지워주었지만 미카엘은 1853년 여름 동안에도 자기 공부를 계속해야 하였다. 때로는 돈 보스꼬가 정책상 과중한 업무를 루아에게 맡기는 것 같았다. 이 해에 루아는 아직 몇몇 교수들이 남아있던 또리노 대교구 소속 신학교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시대가 안정돼 있지 않아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곤 둘 밖에 없었다. - 루아와 로키에 띠였다“! 신학교는 1848년 이후 문을 닫았는데, 그 때 맹렬한 혁명정신에 사로잡힌 200명의 신학생들이 프란조니 대주교의 뜻을 어기고 가리발디를 편들어 시위를 벌렸다. 대주교는 신학생들을 곧 집으로 놀려 보내고 신학교를 닫아버렸다.
루아는 회랍어를 몇 시간씩 공부하고 옛 삐나르디 건물 곁에 새 건물의 기숙사 즉 연구실, 성당, 운동장에 관한 전반적 기율을 보살피고 도 [ catholic readings ]와 최후의 작품인 이탈리아 역사 책을 돈 보스꼬가 준비하는 것을 도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미카엘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일은, 꼬르소 비또리오 엠마누엘에 새로 시작한 성 알로이시오 공사가 오라또리오를 돌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 이것은 돈 보스꼬의 사업이 처음으로 오라또리오 밖에서 자리잡힌 것이다. 그는 또리노 시가를 20분 동안 걸어서, 주일과 축일마다 네 차례 이 오라또리오에 나갔다. 이것은 그에게 좀 무리였다. 그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지금은 신학생이 되었고 또 미카엘의 다정한 벗이 된 깔리에로는 돈 보스꼬에게 이것을 알렸다. 깔리에로에 의하면 루아가 그처럼 계속 무리한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일 것이다. 돈 보스꼬는 루아의 짐을 덜어 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점심은 가까운 식당에서 먹도록 조처하였다. 그래서 루아는 점심때 오라또리오로 돌아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새 학년이 시작할 때 돈 보스꼬는 루아의 어깨에 또 하나의 짐을 얹어 주었다.
삐에문떼 정부에서는 도량형 ( 度量衡 )의 십진법 ( 十進法 )을 단계적으로 도입했다. 가롤로 알베르또 왕은 1845년 9월 11일자로 훈령에 서명했었다. 복잡한 방법을 이용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은 새로운 방법을 잘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학교에서 새로운 방법을 가르치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새 방법을 잘 알고 가르칠만한 선생들이 아주 드물었다. 본쟈니노 선생은 유능한 선생을 한 사람 구하도록 돈 보스꼬에게 간청했다. 돈 보스꼬는 애중을 위해서 쓴 소책자를 통하여 루아가 돈 보스꼬에게 그것을 배웠다고 제외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는 학생이었습니다!” 하고 본쟈니노는 반대했다. “루아가 자기 동급생들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루아에게 맡기십시오”하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본쟈니노가 예측한 그대로였다. “지난 해까지도 그는 우리와 함께 이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뭐 우리를 가르쳐?”
본샤니노는 루아를 교실로 안내하고 곧 물러나왔다. 그는 루아가 첫 시간에 크게 실수하는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루아는 교실로 들어가서, 전에 자기 학급생들 이었고 생도들을 바라보면서 특징적인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지금까지는 우리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는 너희들에게 십진법을 가르칠 책임을 받았다. 나는 너희들이 모두 주의를 기울여 배우기를 바래.”
그는 엄격하게 규율을 지킬 뿐 아니라 자기의 문제를 잘 아는 훌륭한 선생이었기 때문에, 그 해에 그 학급에는 아무런 잡음도 생기지 않았다.
1854년 초에, 돈 보스꼬는 또 다른 회합을 가졌는데, 그것은 1852년 6월 5일의 회합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루아는 이 회합에 관해서 상세하게 적었는데, 외관상으로 보면 그 회합은 첫 번회합과 같이 단순한 일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54년 1월 26일 저녁, 우리는 돈 보스꼬의 방에 모였다- 돈 보스꼬, 로키에띠, 아르딸리아, 깔리에로와 루아 - 우리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도움으로 우리 이웃에 대한 어떤 자선사업을 형성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만일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보면, 주님께 서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날 저녁 살레시안이란 이름을 채택하였다. 그 이름은 이것을 실천하려고 뜻하는 이들과, 또 장래에 이것을 택하는 이들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돈 보스꼬는, 각자가 매일 간단한 묵상을 하도록 제의했다. - 그것은 이미 루아가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화합에서 취한 결정의 직접적인 결과로써, 1855년 3월 25일 성모영보 축일에. 대교구에서 제 1차 바띠칸공의회의 결실인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대에 관한 교의선언 축제를 지낼 때, 철학 2학년인 미카엘은 돈 보스꼬의 발 아래 끓어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을 1년 기한부로 약속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아직 법적 승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돈 보스꼬는 교회의 이름으로 서원을 받아들일 법적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루아의 서원은 장엄한 약속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 행위로 말미암아 루아는 돈 보스꼬의 첫 번째 살레시안으로 인정된다.
무서운 콜레라 병이 또리노에 엄습한 것은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25년 동안에 벌써 두 차례에 걸쳐 많은 희생자들을 내었었다.
그 병은 유럽의 항구를 통해서 인도로부터 이탈리아에 들어왔는데, 제노아는 가장 번화한 항구 중의 하나였다. 그 병의 증세와 결과는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다. 설사, 구토, 경련, 움푹한 눈구멍 몸에서 액체가 흐르고, 코뼈와 볼의 뼈가 보이고, 혀가 차고 희어지며, 음성은 쇠퇴해지고, 맥박과 피가 말라버리고, 몸이 축 느러져서 어떤 사람들은 길가에 쓰러지고, 어떤 사람들은 졸도해 버린다. 이 병에 걸리면 대개 24시간 만에 사망하고 극소수의 사람들이 몇 시간 더 연명한다.
당시에는 그 치료법을 몰랐고, 또 무지( 無知 )는 공포를 가져왔다. 사례금을 받기 위하여 송장을 처리한 사람들이 병균을 옮긴다고 해서 무서워했다. “취득”이라고 규정하는 의사들도 무서워했다. 환자들의 재산을 물려받을 생각으로 환자들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취득이라고 했다. 아주 홀딱 반한 애인도 버릴만큼 사람들은, 이 병을 무서워 했다. 송장이 썩고 이웃 사람에게 병을 옮기도록 송장을 방치한 집대문을 가끔 부수어야 했다.
1845년 여름, 콜레라가 들어오자, 가능한 한 사람들은 도시로 피했다. 돈 보스꼬의 친한 벗이며 후에 수도회의 멤버가 된 가롤로 케이스 백작은 그 고장에서는 왕족의 주인이었다.
시장은 위로자이신 성모 성당에서 공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1835년에 병마로부터 도시를 구해주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도록 명령했다.
또리노는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피해가 적었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고, 가장 큰 피해지역은 발독꼬였다. 그 병으로 2500명이 고통을 당하고, 1400명이 사망했는데, 발독꼬에서만 240명이 사망했다.
이미 5월에 돈 보스꼬는 오라또리오 소년들에게 경고하기를, 또리노에 질병이 찾아오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으리라고 했다. “그럼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합니까?하고 소년들은 물어봤다.
“마음에 하느님의 은총을 간직하라. 그리고 성모님의 메달을 목에 걸고, 매일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과 성 알로시오 공사가계 드리는 기도를 바치고 또 주여,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하소서 하는 화살기도를 바쳐라.” 돈 보스꼬는 이렇게 소년들에게 말했다.
7월 말에, 콜레라가 퍼지자 시장국에서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거대한 수용소나 야전 병원을 개설하여 적어도 길가에 있는 희생자들을 수용케 하였다. 격리 수용소를 돌봐줄 사람들을 요청하자, 돈 보스꼬는 즉각 조처를 취하고 오라또리오의 큰 소년들 가운데서 지망자들을 물색했다. 루아는 관대하게 응답한 그룹의 한 사람 이었다. 루아와 그 동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가정과 아파트로 병자들을 찾아가 보호했다. 루아는 소년들의 돌팔매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소년들의 부모는 그들의 집 근처에 격리 수용소를 설치한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순찰 중이던 경찰 두명이 나타나서 루아는 위기를 모면했다. 한 소년이 병자를 덮어주기 위하여 이불보를 청했는데, 어머니 마르가리따는 오라또리오에서 이불보를 찾지 못하자 - 이미 붕대를 만들기 위하여 남아있던 걸을 다 찢었음 - 제대보를 주면서 “이걸 가지고 빨리 가라!”고 하였다.
프란체시아의 어머니도 병에 걸렸었다. 돈 보스꼬는 또리노를 걷다가 1836년에 위로자이신 성모님의 전달을 기념하는 유명한 기둥 앞에 왔을 때, 만일 그의 어머니가 성모께 대한 신심을 증진할 것을 약속하면, 성모께서 병을 고쳐주신다고 보증했다. 프란체시아의 어머니는 약속했다. 그리고 21년을 더 살았다.
병의 위험이 사라지자 신문과 시 당국자들은, 오라또리오에서 병자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기여한 것을 공식적으로 감사했다.
콜레라가 휩쓰는 동안, 오라또리오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 병에 걸리지 않았다.
돈 보스꼬의 주요 은인들을 방문할 때 루아를 데리고 가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돈 보스꼬는 드 메스를 백작 집에서 미사를 드리게 됐는데, 그 때 루아를 복사로 데리고 갔다.
미사 후에 돈 보스꼬는 가족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젊은 에우제니오 백작은 미카엘과 상대하게 되었다. 젊은이는 미카엘을 다른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 식당은 왕이 오면 아침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야! 멋진 음식이구나! 자 어서 듭시다!”하고 젊은이는 소리쳤다.
그는 음식을 먹으려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미카엘은 식탁에서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어찌된 일이십니까?” 하고 주인이 물었다. “오랫동안 걸어 오셔서 시장하실 텐데요”
“예, 물론 배가 고픕니다.” 루아는 발했다.
“그럼 왜 식사를 안 하십니까?”
“돈 보스꼬께서 1개월 동안 아침을 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뭐라구요? 돈 보스꼬께서 아침을 먹지 말라고 하셨다구요? 그 분은 지금 내 부모님과 푸짐한 식사를 하실텐데요. 내가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젊은 백작은 일어나서 다른 식당으로 갔다. 루아는 그러지 말라고 그를 뒤따라갔다.
젊은이는 대담하게 돈 보스꼬 앞으로 갔다.
“신부님!” 젊은이는 말했다. “정말 루아 학사님에게 1개월 동안 아침 식사를 금지시키셨습니까?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보스꼬는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런 말을 한 일이 없습니다.”
돈 보스꼬는 루아를 쳐다봤다. “미카엘, 언제 내가 아침 식사를 금지시켰나?” 미카엘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주간에 생긴 일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마침내 루아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난 기억이 없는데, 지난 주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신부님, 시계입니다.”
“시계?” 돈 보스꼬는 루아를 쳐다봤다. “미카엘, 언제 내가 아침 식사를 금지시켰나?”
미카엘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주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신부님, 시계입니다.”
“시계?” 돈 보스꼬는 아주 어리둥절 하면서 머리를 탁 쳤다.
“시계?” 그는 반복했다. “그래, 그래, 이제 생각이 난다. 아침 식사 때 네가 떨어뜨린 시계 말이지.” 하고 루아에게 말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이 잊어버려요. 그리고 아침식사를 해요.”
루아와 젊은 백작이 돌아가자, 식탁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 했다. 돈 보스꼬는 그들에게 시계 이야기를 했다.
“좀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오라또리오에서 생긴 일입니다. 나는 가능한한 많은 신학생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 좋아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에게 충고와 격려의 말을 주기 위해서지요. 약 한 주간 전에 루아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었을 때입니다. 우연히 나는 시계를 식탁위에 놓아두었습니다. - 그것은 오라또리오에 있는 유일한 시계였습니다. - 그리고 내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루아는 호기심에서 시계를 만져 보았습니다. 그는 시계를 요리조리 보다가 그만 떨어뜨려서 유리를 깨뜨렸습니다. 그는 무안해하고 당황해했습니다. 나는 그를 감싸주느라고 농담으로, 시계를 떨어뜨렸으니 1개월 동안 아침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마치고 아주 진지한 표정을 했다.
“ 나는 이제야 루아와 농담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순종은 너무나 정확합니다.”
사제직을 준비하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미카엘도 철학과정을 마치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 신학 과정은 보통 4년 걸린다. 미카엘은 프란치스꼬 마렌고 신부과 요셉 몰리나리 신부의 지도하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두 신부는 다 뛰어난 스승이었다. 동시에 그는 대신학교 교수들의 과정에도 자주 나아가 강의를 들었다.
몰론 오전 오후 2시간씩 강의도 루아의 건강에는 힘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후 2시간씩 강의도 루아의 건강에는 힘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서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히브리어는 과외 과목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오라또리오에서 잠을 자는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였다. 그러나, 돈 보스꼬는 저녁 식사와 그후 휴식을 취한 다음에는 어떤 공부도 하지 못하게 했다. 휴식이 끝나면 대개 저녁 9시였다. 그렇지만 자기 공부를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 일어나서 공부를 하든가 아니면 그만 두어야 했다.
깔리에로는 아침 일찍 일어났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추운 겨울날 아침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루아는 내 옆방 마루 위에서 잤습니다. 우리는 아침 4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대야에 있던 물이 꽁꽁 얼어붙어서 세수할 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묘안을 생각해냈습니다. 우리는 창문을 열고 지붕에서 눈을 집어, 뺨이 훈훈해 질 때까지 얼굴을 문질렀습니다. 그리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나는 음악 공부를 하고, 루아는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루아는 또 덧붙여 말했다. “ 그 때가 얼마나 멋있었던가! 깔리에로는 음악을 작곡하고, 프란체시아는 시를 쓰고, 나는 히브리어를 공부했지”
“깔리에로가 말하는 ”밤“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라또리오의 마당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 달린 다락방이었다. 프란체시아는, 어느 방문자가 루아의 다락방을 시찰하고 받은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작은 침대와, 책상에 구멍을 파고 끼워 넣은 잉크병 밖에 없는 책상 ; 사각 ( 四角 ) 으로 의지한 널판, 그 속에 책과 종이가 있었다. ” 방문자는 가지런히 잘 정돈돼 있다는 인상과 청빈의 정신이 철저하다는 인상을 깊이 받고 물러갔다.
책임의식이 선명한 루아는 이 시기에 성 빈체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장이라는 주목할 만한 직책을 차지했다. 돈 보스꼬는 삐에몬예 최고 평의회의 의장이며 자기 친구인 자롤로 케이스 백작의 알선으로 이 회와 제휴하게 되었다. 돈 보스꼬는 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에 분배할 기금을 이 회로부터 받을 자격을, 자기 집회 ( Conference )에서 얻을 뿐 아니라, 회의 활동을 통해서 소년들이 자선사업과 남에게 대한 봉사를 훈련하기 위하여 공식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루아는 회장직 하나로는 충분치 않은 듯이 또 하나의 회장직을 받게 되었다. 루아는 그런 책임을 받아들이자 명목상의 우두머리로서는 만족치 않았다. 이 나중 직책은 흥미있는 기원을 지니고 있었다.
1856년 5월 어느날 아침, 소년 도미니꼬 사비오는 ( 1954년 6월 12일에 시성됨 ), 돈 보스꼬가 영성체를 해주려고 몸을 돌렸을 때 미사에 참례하러 왔었다. 제단 앞에는 영성체를 하려는 소년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루아도 영성체를 하지 않았다. 성모성월인 5월이었는데! 도미니꼬와 다른 어린이들은, 돈 보스꼬가 제단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자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당시에도 돈 보스꼬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됐다. 왜냐하면 돈 보스꼬는 일찍 첫 영성체를 하고, 또 자주 영성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니꼬와 몇몇 친구들은, 그와 같은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 궁리했다. 토의한 결과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 신심회 ”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규칙을 작성했고 돈 보스꼬는 그 규칙을 승인했다. ( 1856년 6월 8일에 약 12명의 멤버가 등록했다. 그 화합에서 그들은 초대 회장으로 미카엘 루아를 선출했다. )
이 신심회에서 이행한 재미있는 일중의 하나는, 소년들이 오라또리오 주위에 조심없이 던져버린 빵 조각을 모으는 일이었다. 루아도 다른 어린이들처럼 발견하는대로 빵 조각을 주웠다가 다음 식사 때 그것을 먹었다. 이것을 실행한 사람들을 “똑”( tocc ) 신심 회원들이라고 했는데, 삐에몬떼에서는 그 낱말이 조각, 혹은 한 조각을 의미했다.
그해 11월 25일,
돈 보스꼬는 어머니 마르가리따가 세상을 떠나자, 미카엘의 어머니가 와서 대신 오라또리오에서 지내도록 간청했다. 미카엘의 어머니는 돈 보스꼬가 구입한, 낡은 벨레짜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물론 미카엘은 어머니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오라또리오에서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는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한 가지 미카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미카엘을 우대하려는 어머니의 완고한 시도였다. - 결코 성공하지 못했지만 - 미카엘은 그것을 반대했다 할지라도, 그가 없을 때 빵에 들어와서 침대를 돌봐주는 등등의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거기에 책망할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이 불쌍한 여인은 많은 자식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것을 이미 보았다. 어머니는 미카엘이 밤에 매트라스를 사용치 않고 그것을 말아서 방 한 구석에 놓아두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는 것을 버려두면서도 매트라스를 사용치 않고 잠자는 이유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날 저녁, 돈 보스꼬는 루아가 로마를 다녀와야 한다고 오라또리오에서 공시했다. 그래서 루아는 신학 공부를 일시 중단해야 하였다. 이 여행에는 여러 가지 중대한 사유가 있었다. 돈 보스꼬는 성 베드로의 후계자에 관한 기사를 ( Catholic Readings )에 게재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에 가본 일이 없고 또 교황 비오 9세를 본 일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집필하는데 도와줄 비서가 필요했기 때문에, 루아를 대동하려고 했다.
그는 이 여행에 관해서 자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그가 오라또리오를 떠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가 없는 동안 일이 어떻게 될까하고 크게 걱정했고, 가능한 한 오라또리오와 접촉을 가지려고 했다. 그는 여행에 관해서 74페이지가 넘는 글을 썼는데, 문체와 그 내용으로 봐서 소년들에게 적합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드 메스뜰 가정에 있었다. 루아는 로스미니안 신부들과 함께 지냈다. 교황성하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우래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도시의 어제와 오늘의 영광을 찾아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번은, 성 세바스띠아노의 까따콤바를 아침 8시에 들어가서 오후 6시에 나온 일이 있었다.
마침내 3월 9일에 교황을 알현하게 된다는 전달이 왔다. -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행복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돈 보스꼬의 거룩한 생도였던 도미니꼬 사비오의 일 주기가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돈 보스꼬와 루아에게는 그것이 첫 번째 알현이었다. 돈 보스꼬는 오라또리오에 보낸 편지에서, 약간 신경이 긴장했었다고 고백했다. 루아는 교황성하께 드리려고 특별히 제본한 Catholic Readings전권 ( 全券 )을 가지고 갔다.
보통 인사가 오고간 다음, 교황성하께서는 무슨 일들을 하느냐고 물어보셨다.
“무엇을 하고 있나?”하고 성하께서는 돈 보스꼬에게 물으셨다.
“저는 소년들과 함께 일하고, Catholic Readings를 맡아보고 있습니다.”
“당신 이름이 보써요? 왜 또리노에는 소년들을 돌보고 있는, 당신 이름과 비슷한 사람이 있지 않아요?”
돈 보스꼬는 자기 이름을 보스꼬 대신 보써라고 성하께 말쓰드렸다는 것을 알았다. 돈 보스꼬가 그것을 설명해 드리자 교황께서는 온화하게 웃으셨다. 이것은 알현자들의 마음을 놓게 하였다.
“신품성사를 받았나?”하고 성하께서 루아에게 물어보셨다.
“아직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학 3학년입니다.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나?”
“세례와 견진성사 편입니다.”
“그 대목은 좀 쉬운 편이지!” 하고 성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분위기가 퍽 부드러워졌다. 교황께서는 가예따의 나뿔레온에 의해서 감옥에 갇혀계셨을 때, 소년들이 보낸 작은 선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돈 보스꼬에게 말씀하셨다.
돈 보스꼬는 기품있게 제본한 [ Catholic Readings ]를 소년들의 이름으로 교황성하께 바쳤다.
“지금 애들이 몇 명이나 되지?”하고 성하께서 물으셨다.
“전부 200명입니다. 그리고 제본하는 소년들은 15명입니다.”
“당신이 나를 방문한 기념으로 제본하는 소년들에게 작은 기념품을 보내야겟군.” 성하께서는 일어나 다른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잠시 후에 메달을 한 좀 들고 나오셨다. 그 메달은 최근에 선포된 “원죄 없으신 성모의 잉태” 교의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본하는 소년들에게 주고, 또 이것은 자네 것일세” 하고 말씀하셨다.
교황께서는 다른 것보다도 큰 메달을 미카엘에게 주셨고, 또 돈 보스꼬에게는 상자에 들은 아름다운 견본을 주셨다.
성하께서는 그들이 방문을 마치고 이제 돌아가리라고 생각하시면서 작별 인사를 하시려고 했다. 그 때 돈 보스꼬는, “성하, 제가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하고 여쭈었다.
“좋아요.
돈 보스꼬는, 성하께 작별인사를 한 루아를 힐끗쳐다 보았다.
돈 보스꼬는 3월 21일에 개인 알현을 신청하였고, 비오 9세께 아주 좋은 인상을 드렸다. 교황께서도 돈 보스꼬에게 성지주일 의식에 참여하라고 부탁하시고 외교단 자리에 그를 배치하고 정성드려 꾸민 종려가지를 그에게 주셨다. 마침내 4월 6일, 돈 보스꼬는 세 번째로 개인 알현을 했다. 돈 보스꼬가 이 알현에서 개인적 사무를 끝내자, 루아와 돈 보스꼬의 친구인 사제 두 사람도 알현이 허용되었다. 이들은 교황성하께서 돈 보스꼬에게 보여주신 따뜻한 성의에 깜짝 놀랐다.
돈 보스꼬와 루아는 4월 14일에 로마을 떠나 이틀 후에는 오라또리오에 도착했다. 그런데 오라또리오에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돈 보스꼬는 자기가 없는 동안 빅또리오 알라소나띠 신부에게 오라또리오의 책임을 위임했다. 빅또리오 알라소나띠 신부는 돈 보스꼬를 뒷받침하는 오래되고 가장 성실한 지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돈 보스꼬보다 몇 살 위인 알라소나띠는 안일한 것을 포기하고 오라또리오의 궁핍과 엄격한 생활을 존중했다. - 사제로서는 처음으로 그렇게 했다. - 그는 돈 보스꼬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아버지다운 특질이 결여돼 있었다. 그 결과는 이러했다. 돈 보스꼬가 없는 동안, 그는 자기 생각에 따라서 오라또리오에 필요하다는 몇가지 기율을 확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돈 보스꼬가 기율보다도 더 아끼고 소중히 간직하던 가족정신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돈 보스꼬와 루아는 그것을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오라또리오에서 그 가족정신을 재건하기 위하여 돈 보스꼬는 루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다. 지난 2개월 동안 서로 가까이 지내면서 루아는 그 누구보다도 그의 모범 정신과 마음을 꿰뚫어보는 귀중한 통찰력을 얻었던 것이다.
“루아는 아직 신학생인데, 돈 보스꼬와 함께 오라또리오를 감독한다.” 고 비난을 하였다. 돈 보스꼬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확인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피정을 지도하고 있던 산 이냐시오에서 미카엘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의 벗 돈 보스꼬”라고 서명했다.
더구나 오라또리오는 급속히 발전했기 때문에 지금은 소년들이 두 부류로, 즉 학생들과 직공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루아는 여러 해 동안 알라소나띠 신부와 교대로 “ Buona notte"
(취침하기 전에 장상이 소년들에게 하는 말씀, 그 말씀 끝에 “Buona notte" 하며 인사했다.)를 하면서 직공들의 장상으로서 활동했고, 돈 보스꼬는 학생들을 돌보았다.
1859년 12월 8일, 원죄 없으신 성모의 잉태 축일에 - 돈 보스꼬가 사업을 시작한 기념일이고, 또 언제나 그와 각벽한 관련이 있는 날 - 돈 보스꼬는 저녁에 중대한 발표가 있다고 공동체에 통고했다. 그날 모임에서 돈 보스꼬가 사업을 시작한 기념일이고, 또 언제나 그와 각별한 관련이 있는 날 - 돈 보스꼬는 저녁에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처음으로, 그가 로마를 방문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수도회 창설의 가능성을 교황성하와 의논하기 위해서 였다고 공개했다. 이것은 지나치게 비범한 일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공동체의 멤버들이 규칙이 요구하는 바를 이미 따르고 있고 또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필요한 서원과 약속을 서약했다는 점을 그들에게 지적하려고 힘썼다.
각자는 이미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수도회라는 명칭을 보유하고 있는 이 새 수도회에 속하고저 원하는지 결정할 시기가 왔다고 그는 이회에 가입하고저 하는 사람은 다음 12월 18일에 있을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는 동안 미카엘은 12월 11일에 소품 ( 小品 )을 받고, 12월 17일에는 차부제품을 받았다.
12월 18일 모임에 나오지 않은 회원은 두 사람 뿐이었다. 돈 보스꼬와 알라소나띠 신부, 부제 1명, 차부제 1명 13명의 신학생과 수사 1명 - 모두 19명 - 이 참석했다. 그들은, “버림받고 영신적으로 중대한 위험에 놓여있는 소년들을 위한 오라또리오에서 필요로 하는 참다운 사랑의 정신을 증진하고 보존하기 위해여” 수도회를 확립해야 한다는데 정식으로 합의했다.
새 수도회의 여러 가지 직책에 대한 책임자 선출이 있었다. 돈 보스꼬는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총 감독( Perfect general )을 자신이 지명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동의하자 그는 즉석에서 알라소나띠 신부를 지명했다. 비밀 투표에서 루아는 만장일치로 수도회의 초대 영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이 새로운 직책이 많은 책임을 가져오지 않는다해도 루아에게는 특별 활동이었다. 이제 루아는 수도회에 새로 가입하려는 사람들을 맞이해야 하였다. 돈 보스꼬는 루아에게 시험을 일임할 뿐 아니라, 지원자들의 적성에 관한 최종판단을 자주 루아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돈 보스꼬는 특별한 자질이 있는 소년을 보면, 그는 소년을 불렀다.
“나는 너와 계약을 맺고 싶다”하고 그는 말을 걸었다.
“무슨 계약인데요, 신부님?”
“돈 보스꼬와 함께 오라또리오에 머물겠다는 계약이다.”
“예, 좋습니다!”
“그럼 돈 루아에게 가서, 내가 너와 계약을 맺고 싶어한다고 해라. 그분은 알아들으실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에도 루아는 신학 공부를 끝마쳐야 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즉 언제 시간이 있어서 공부를 한단 말인가? 루아는 전에 깔리에로와 프란체시아와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공부하던 대로 해였다.
알렉산데르 파프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59·1860 학기의 어느 순간. 나는 많은 신학생들과 학생들이 다가오는 시험을 통과하기 위하여 아침 3시에 루아가 그들을 깨우는 것을 발견했다. 나도 그들 중에 끼워달라고 루아에게 청했으나, 먼저 돈 보스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돈 보스꼬의 허락을 얻었다. ............ 루아는 3시에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나도 그들 중에 끼워달라고 루아에게 청했으나, 먼저 돈 보스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돈 보스꼬의 허락을 얻었다. ........... 루아는 3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2시 혹은 2시 반에 일어나서 공부방에 있는 의자 곁에서 차디찬 마루 바닥에 꿇어 앉아 3시까지 기도하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시계가 3시를 치면, 루아는 일어나 침실로 가서 학생들을 깨웠다. 그리고 루아는 우리를 공부방으로 집합시켰다. 거기서 우리는 등잔불 아래 공부했다. ............ 그 동안 루아는 30분이나 혹은 1시간 동안 묵상했다. 묵상을 마친 다음 루아는 5시 30분에 다른 학생들이 공부방으로 내려올 때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성당으로 갈 시간까지 평상의 일을 했다”
이러한 노력은 마지막 시험에 좋은 성과를 가져왔다. 그는 “최우수”라는 영예를 획득했다.
그는 신품을 잘 준비하기 위하여 피정을 시작했고, 3월 24일에 부제품을 받았다. 그는 자기 친구 안젤로 사비오와 함께 성보승천 축일에 신품성사를 받기를 원했다. 돈 보스꼬는 루아를 위해서 특별관면을 신청했으나 - 교회법상 만 24세 이상이라야 신품을 받는데 그는 23세였음 - 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루아의 서품일자는 1860년 7월 29일로 옮겨졌다.
그의 서품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시대의 어지러운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미카엘은 주교좌 성당에서 소속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지 못했다. 그는 또리노시 밖에 있는 개인 경당에서 보좌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미카엘의 교구장인 프란죠니 대주교는 추방되어 프랑스 리옹에 있었고, 그곳에서 2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요한 발아보좌주교에게 루아에게 신품을 수여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보좌주교 역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서 또리노시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비앙꼬 더 바르바니아 남작의 소유인 별장에 있는 성 안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미카엘은 또리노시로부터 별장까지 걸어갔고, 남작의 관대한 마음씨게 감사하면서 별장에서 밤새워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침실을 보살피는 종들이 남작에게 보고하기를 그의 침대가 고스란히 있는 것으로 보아 루아는 밤새 서서 기도했다고 하였다. 또 종들은 방에 있는 거울이 벽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돈 보스꼬의 참 제자다. 그래서 너희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고 남작은 결론을 내렸다.
IV. 충 실 한 제 자
이제 루아는 사제가 되었다. 그러나 대교구의 요구에 따라 고백의 성사를 주기 전에 먼저 2년간 사목신학을 연구해야 하였다. 루아는 영신생활을 극히 사랑하면서도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은 돈 보스꼬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는 2년 동안 사목 연스원에 다녔다.
돈 보스꼬는 루아에 대해서 또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루아의 도움이 없이는 오라또리오에서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돈 보스꼬는 전보다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 3명의 사제와 12명의 신학생들이 협조했다. 한편 이에 비해서 오라또리오에서 사는 소년들의 수가 격증했다. 직공들과 학생들의 수는 500을 해아렸다. 그리고 각 부류에서는 특수한 연구계획을 필요로 하였다. 루아는 이 계획에 대한 전반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돈 보스꼬는 루아가 신학 훈련을 마치기 위하여 까논 요셉 쟈빠따에게 보냈는데, 그는 유명한 신학자였다. 거기서 루아가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는 것은, 대개 라틴어로 기록되고 주해 ( 註解 )로 가득찬 그의 노트가 입증했다.
돈 보스꼬는 루아를 좀 더 분주하게 만들기 위하여, 오라또리오 밖에서 설교하고 묵상과 피정을 지도하도록 파견했다. 루아가 사제로서 처음 설교할 때부터 그는 위대한 웅변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계속 자신을 제어하고 자질을 균형 잡히게 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웅변술이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음성이 드물게 올라가는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설교의 주제는 성서와 교부들의 글에 그 바탕을 둔 것이었다. 돈 보스꼬처럼 그는 견실하고 실천적인 제목을 선택했으나,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야기 할 경우에는 무거운 느낌을 주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빝 이라고 묘사되었고, 재미 있는 면이 있었고 또 반드시 격려와 낙관적인 사항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요소는 그가 말하는 것 보다도 그의 인품에 있었다. 그가 말할 때는, 무엇인가를 말할 뿐 아니라 그가 말하는 것을 굳게 확신하는 사람, 그가 말하는 진리를 실제로 생활화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모든 크리스찬들은 한 분의 완전한 모델을 모시고 있다. 즉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생활한 본 보기를 매일 볼 수는 없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생활양식으로 나타나신다. 루아는 돈 보스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았고,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것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번 그것을 고백했다.
루아는, 돈 보스꼬의 “꿈”과 예언, 크고 작은 기적, 그리고 병치료에 어떤 비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루아는 이 모든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자료를 모아 자료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또 장래의 수도회 멤버들을 위해서도 그 자료를 모으고 보존해야 하였다. 그는 활동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곧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루아는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몇몇 살레시안들을 초청했다. 그 위원회의 과업은 가능한 모든 출처를 통해서, 돈 보스꼬가 오라또리오 안팎에서 행하고 말한 것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 으레 틀레 박힌 듯이 그들은 루아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루아는 적어도 한 주간에 한번 만나서 그들이 돈 보스꼬에 관해서 보고 들은 것을 모으고 서로 교환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특히 돈 보스꼬가 “ Buona notte "에서 가끔 소년들에게 자세히 말하는 ”꿈“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프란체시아는 유감스러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자기가 관련되는 한 당시에 그런 것을 누군가가 기록해 두어야 하고 기억한다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위원회의 각 멤버들에게 부과된 많은 일 때문에 그들은 규칙적으로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루아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회합을 갖든 안 갖든 간에 그들이 돈 보스꼬의 생애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계속 기록하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지금이 오라또라오의 황금시대이기 때문이다 ”고 루아는 그들에게 말했다.
알라소나띠 신부는 일의 구체적 면을 돌보았다. 교정 ( 嬌正 )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을 돌보고,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속에 있는 외부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그의 과업이었다. 관리 전반에 걸쳐서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안젤로 사비오 신부와 12명의 신학생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수도회 창립 위원인 깔리에로와 프란체시아 두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돈 보스꼬의 부성적 ( 父性的 ) 정신이 이 모든 것을 지배했고, 또 그는 인자한 인격과 격력의 말로 지도했으며, 무엇 보다도 그들이 쉽게 감탄하지만 본받을 수 없는 모범적 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지도했다.
이 시기에 한 생도였던 도미니꼬 사비오의 거룩한 생활이 두드러졌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돈 보스꼬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도미니꼬 사비오 뿐이 아니고 오라또리오 소년들 가운데는 도미니꼬 보다도 성덕이 더 뛰어난 소년들이 있었다.
루아는 어디서 두각을 들어냈던가?
처음부터 루아는 새로 상설된 수도회의 영신 지도자로 있었다.
그러나 수도회의 나이로 보나 또는 수도회 멤버들의 수가 적었다는 것을 볼 때 이 명칭은 대단한 책임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또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을 내세울 생각을 추호도 갖지 않았었다. 어느 점으로 보나 공동체 선두에는 두 사람의 장상 즉 돈 보스꼬와 알라소나띠 신부만이 있었다. 연구의 책임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또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을 내세울 생각을 추호도 갖지 않았었다. 어느 점으로 보나 공동체 선두에는 두 사람의 장상 즉 돈 보스꼬와 알라소나띠 신부만이 있었다. 연구의 책임을 지고 있던 루아는 전체적인 학구적 프로그램 조직에 조용히 노력했다. 소년들, 특히 학생들의 수는 해마다 늘어서 1862년에는 오라또리오에서 341명의 소년들을 새로 받아들였다.
그 소년들 모두가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어느 날 “Buona notte"때, 돈 보스꼬는 지적하기를 그들의 몇몇 소년들이 떠나야만 9일 기도를 바쳤다고 했다. 그는 루아를 이용하면서 9일 기도가 오라또리오를 훌륭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소년들에게 이해시켰다. 성모님은, 장상들 측에서 소년들을 교정하려는 노력을 되풀이 하면, 소년들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마음을 고치도록 도와주셨다.
1862년 5월 14일, 돈 보스꼬는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규칙에 따라서 지원기간이나 수련기를 마친 사람들은 수도회 안에서 정식으로 서원하라고 권유했다. 21명의 회원들이 서원했다. 돈 보스꼬는 비오 9세 교황으로부터 개인적으로 특별히 관면을 얻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다. 새 수도회가 성청의 인가를 얻는다는 것을 길고도 힘든 과정이다. 돈 보스꼬가 수도회의 승인을 얻는데 11년의 세월이 걸렸다. 1864년 7월 23일에, 세가지 불가피한 승인중의 첫째 것이 승인을 받았다. - Decretum Laudis이다. 이것은 현재로서 성청에서는 수도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정신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루아가 책임진 것 중의 하나는 카로디안 안젤의 오라또리오를 맡아보는 무리알도 신부- 돈 보스꼬의 협력자 -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 오라또리오는 도시에서 이름난 지역인 반킬리아 구역에 있었다. 실제로 그 오라또리오를 지도하는 사람은 루아 였으나, 지도자란 명칭은, 존경하는 뜻에서 나이 많은 사람에게 언제나 주어졌다. 이 오라또리오에서 루아는 성 알로이오 신심회와 성 빈체시오 아 바오르 회합을 조직했는데 그것은 축제의 행렬에 책임을 졌다.
돈 보스꼬가 루아를 오라뜨리오에 붙잡아 두었다면 아주 편리하고 그곳의 생활이 루아에게도 훨씬 즐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돈 보스꼬는 오라또리오와 루아를 위해서 다른 생각을갖고 있었다. 돈 보스꼬는 때가 오면, 오라또리오 밖에, 발독꼬에서 멀리 떨어지고 또 또리노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 새 수도회의 첫 번째 지부( 枝部 )를 세우리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이 역사적인 토대로 선택된 곳은, 또리노에서 동방으로 약 270km 떨어진, 그림과 같은 작은 마을인 미바엘로 였다.
돈 보스꼬는 누구에게 그 책임을 맡기고 또 살레시안들 중에 누구를 그곳으로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오라또리오에서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유명한 비엘과의 오로빠 성모 ( our Lady of Orope ) 성지로 가서 피정을 할 만큼 그것은 주요한 조처였다. 따라서 그는 자동적으로 자기의 심복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비엘라에 3일간 설교하고 고해신부들을 도와주고, 루아를 불러서, 오라또리오에서 떨어져 있는 수도회의 첫 지부 지부장으로 루아를 결정했다고 이야기 했다.
루아가 이 말을 듣고 놀랐는지 어쨌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놀라운 것은, 공동체 전체가 신학생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그 멤버들의 나이가 모두 27세 이상이었고 루아만이 겨우 26세라는 사실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처럼 이 경우에도 돈 보스꼬는 똑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 즉 모든 조건이 완전해 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행하고 완전을 향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일을 한다는 비난을 가끔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돈 보스꼬와 돈 루아는 둘이 다 완전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수영하는 지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 속에 밀어 넣는 것 이라고 믿었다.
돈 보스꼬는 루아가 오라또리오를 떠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 인가를 알고, 또 다른 회원들이 새 지부를 건설하기 위하여 얼마나 곤란을 겪어야 하는 가를 알았기 때문에 루아의 어머니를 모시고 가도록 제의했다.
그러면 돈 보스꼬는 오라또리오의 범위를 넘어서 첫 지부를 개설하는 장소로 왜 미라켈로를 택했던가?
그 계획은 프란치스꼬 쁘로베라 - 루아를 대동한 신학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음 - 의 성소 이야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자기 성소에 관해서 고해신부와 의논한 끝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고해신부는 프란치스꼬의 기질과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꼬똘렝고 교육기관에 가입하기를 권했다. 프란치스꼬는 고해신부의 소개장을 받아들고 또리노로 떠났다.
며칠 수에 프란치스꼬는 미라벨로로 돌아왔다.
“그래, 잘 다녀왔나 꼬똘렝고에 가입했나?”하고 고해신부가 말했다.
“아뇨”
“아니라니? 왜?”
“거기엔 초만원이에요”
“그래 자네는 모든 것을 지불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나제 아버지가 미라벨로에서는 이름난 실업가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것은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또 내가 말하지도 않았어요”
“그럼 내가 또 소개장을 써주지 이 번엔 일이 잘 될 걸세”
“걱정하실 필요없어요”
“어째서?”
“나는 벌써 가입했어요.”
“어디에? 누구의 소개로?”
“꼬똘렝고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소년들과 놀고 있는 신부님을 보았어요. 내가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자니까, 신부님이 내게 오셔서, 우리는 같이 이야기를 했어요. 서로 이야기를 한 결과, 신부님은 와서 소년들을 위하여 함께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어요. 나는 좋다고 그랬어요. 신부님은 부모님과 의논해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여기 온거예요
이것은 프란치스꼬가 어떻게 해서 살레시안이 되었느냐는 이야기이다. 그는 살레시오회에 가입한 날부터 언젠가는 살레시안들이 자기 고장에로 가게 되기 위해서 하루도 기도를 빠뜨린 일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도 같은 의견을 지녔고 또 그는 세력가였기 때문에 돈 보스꼬에게 토지와 견물을 바쳤는데, 그것이 수도원이 되었다. 돈 보스꼬는 이 모든 것에서 섭리의 손길을 보았다. 그래서 돈 보스꼬는 수도회 지부를 창설할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돈 보스꼬는 미라벨로로 여행하는 중에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그는 차에서 한 사람의 사제와 수사와 어울리게 되었다. 이 두 동행자는 삐에몬떼의 교회 전반에 걸쳐서 이야기를 주고 받기 시작했고, 특히 그 지역에 잘 알려진 여러 가지 자선사업에 관해서 토의했다. 그러다가 사제는, 돈 보스꼬와 그의 오라또리오 이야기를 꺼냈다. 그를 두 사람은 돈 보스꼬를 몰라 봤다.
돈 보스꼬의 이야기가 나오자 수사는 열을 올렸다. “그 사람에게 관해서 들은 말을 믿지 않으십니까? ”하고 수사는 말했다. “자선사업은? 그 사람은 자선사업이란 말의 뜻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착취자요 피를 빨아먹는 사람이요 거짓말의 애비입니다! 그는 어게 하면 자신과 친척들이 부자가 되도록 돈을 긁어 모으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로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들이 지금 어떻게 해 놓고 살고 있는가를! 그는 오라또리오 근처에 멋진 집을 샀습니다.”
돈 보스꼬는 수사가 말을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돈 보스꼬를 알고 있거나 혹은 오라또리오를 찾아가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뇨, 하지만 나는 가장 신빙할만한데서 이것을 들었습니다.”하고 수사는 대답했다.
“그러세요, 제가 좀 말하겠습니다. 저는 오라또리오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것을 하나도 모지 못했다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하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그때 미라벨로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기차가 도착해서 이야기가 끝나고 말았다. 역에서 그들은 돈 보스꼬를 마중나온 여러명의 사제들을 보았다. 그리고 수사가 그 사람이 누군지를 알 수 있을만큼 그들은 큰 소리로 여러번 돈 보스꼬의 이름을 불렀다.
즉시 수사는 용서를 청하러 왔다.
“당신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합니다”하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당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조심해서 이야기하십시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의 이웃을 다시는 헐뜯지 마십시오.”
미라벨로와 관련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돈 보스꼬는 미라벨로를 성 가롤로 소신학교라고 부르고저 했다.
그 첫째 이유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법에 의거해서 어떤 교육기관이든 사제직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을 훈련할 목적으로 주교의 감독하에 세운 기관은 정부에서 자격증을 주지 않았다. 예를 들면 모든 선생은 자격증이나 학위를 갖고 있지 못했다. 돈 보스꼬는 자격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미라벨로로 가기로 돼있는 루아와 다른 신학생들이 자격증을 얻는 과정을 밟도록 무더웠던 지난 여름을 보냈던 것이다.
둘째 이유는, 사실 돈 보스꼬는 미라벨로가 교구에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성소를 추진하는 센타가 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1863년 10월 3일, 루아와 그의 어머니는 마치 전위 ( 前衛 ) 로서 미라벨로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루아는 이 모든 것이 1846년 11월 3일, 돈 보스꼬와 그의 어머니가 벡키에서 발독꼬로 떠나던 장면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할 뿐 이었다.
작별 인사 전에 돈 보스꼬는 충고와 지도의 내용이 있는 편지를 보내겠다고 루아에게 약속했다. 그후 곧 이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에 돈 보스꼬는 다음과 같은 따뜻하고 아버지같은 구절을 썼다.! “ 나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기 마음을 터놓는 아버지의 음성으로 자네에게 대한 나의 애정의 표시로 이 편지를 받아주게..........” 그리고 djEJgrp 하면 자기 자신과 소년들, 그리고 밖에 사람들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지 루아에게 충고했다. 루아는 이 편지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유리컵에 넣어서 자기 방에 매달았다.
루아는 오라또리오와 돈 보스꼬의 곁을 떠나 미라벨로로 가야했을 때 무엇을 느꼈을까? 여러 해 동안 루아에게는 돈 보스꼬가,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아버지였고 오라또리오는 유일한 집이 있었다.
그에게는 오라또리오가 전 세계요, 또 그는 다른 곳에서 살기를 원치 않았었다. 그에게는 미라벨로로 가는 것이 가혹한 고통이었다. 루아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또 이런 심정을 잘 알고 있는 돈 보스꼬가 루아의 어머니를 모시고 가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편 루아와 그의 어머니는 매혹적이며 사랑스러운 지방을 떠나야했다. 루아는 도시 소년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친척을 따라서 며칠 동안 나들이를 가고, 또 돈 보스꼬를 따라서 시골로 간 적 외에는 또리노시를 떠나서 지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 시골에 대해서 갖는 자연적인 반응을 가졌을 것이고, 특히 그는 여러 해 동안 발도꼬의 광경과 음향과 향기를 누리며 지내왔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돈 보스꼬는 와 하느님의 섭리는 고상한 주위나 주민들의 예의 때문에 그곳을 루아의 활동무대로 골라 잡은 것은 아니었다.
루아와 그의 어머니는 포도주 고장의 심장부를 조사했다. 그들은 완만하게 굽이 쳐 있는 언덕들, 얕은 제곡들, 그림과 같은 마을, 언덕 위에 혹은 언덕에 매달린 듯이 붙어 있는 동네를 보았다. 그들은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 북꼬으로 향한 평탄한 마찻길을 보았다. 그 길은 옛 교회와 성, 그리고 요새가 있는 높은 언덕에 가리워 여기 저기 끊긴 듯이 보였다. 그들은 추수기에 그곳에 도착했다. 꾸불꾸불한 길가에는 한참 일손이 바쁜 남녀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노고로 가꾸어지고, 수천년의 역사와 아름다운 지방의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피곤한 여행자들에게 예의바른 점잖은 주민들이었다.
“밀고 떠들썩하고 시끄럽고 소란한 또리노와는 정말 대조적이구나!” 그들의 새로운 집이 될, 햇살이 내려 쪼이는 작은 마들의 길을 걸어가면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오라또리오의 범위를 벗어난 새 수도회의 첫 번 지부였고, 루아는 초대 지부장이었기 때문에 루아가 진행하는 것을 오라또리오와 미라벨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단한 흥미를 갖고 지켜보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루아는 책임의식이 강하고 기율과 질서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가 소년들의 아버지보다는 장상으로서 행세하지 않을까하고 염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가 또리노에 있는 두 개의 오라또리오의 소년들과 크게 성공한 것을 지적했다. 소년들은 오라또리오의 문들 닫고 집으로 돌아올 때 루아와 동행했고 또 다정하게 “체레야!”하고 그와 헤어졌다. - 체례야는 삐에몬떼의 다정한 작별인사다. - 그들은 루아가 자기 밑에 있는 소년들에게 아버지의 친절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부드러움도 보여주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끝으로 손각락을 깍지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루아는 분주한 날들을 보냈다. 처음 그는 사제로서 지부에 있었다. 즉 그는 다른 사제의 도움을 청하면서 고백의 성사를 주고 소년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그는 주일과 축일에 설교했다. 그는 소년들의 레크레이션을 도와주고 때로는 그들과 어울려서 놀았다. 또 그는 소년들과 함께 운동장을 걷고 서년들은 그의 손을 잡으며 따라다녔다. 그는 학교 운영에 관한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기숙사와 부엌이 깨끗한가, 그리고 교정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주의를 기울렸다.
이 모든 점에 있어서, 돈 보스꼬는 자주 루아와 편지 왕래를 하였고, 또 개개 살레시안들의 복지를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선생들의 식사와 휴식이 부족하지 않은가 살피게”하고 루아에게 권고했다. “그들과 자주 이야기하게........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일하지 않도록 하게. 그들이 옷이나 책을 필요로 하는지 보세. 그들이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발견하면 자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제공하게. ............”
돈 보스고가 루아를 돕기 위하여 자주 온 아주 생소한 방법이 또 하나 있다.
돈 보스꼬는 오라또리오를 비워야 할 경우에는, 자기는 이러 저러한 소년의 품행이 단정치 못한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무질서를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지 충고하는 글을 장상들에게 보내곤 하였다. 이제 돈 보스꼬는 자기가 미라벨로에서 “본” 어떤 무질서를 경고하면서 그것을 방지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글을 보냈다.
오라또리오나 미라벨로에 돈 루아를 흠잡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돈 보스꼬에게로 날아오는 빛나는 보고서로 인해서 침묵을 지켰어야 했을 것이다. 루아와 그의 일을 판단하는 그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미라벨로에 있는 돈 루아는 오라또리오에 있는 돈 보스꼬와 똑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갔고 루아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돈 보스꼬에게 편지로서 쓰거나 또 이야기 하였다. 돈 보스꼬는 루아에게 “성 베르나르도의 치료법”을 사용하도록 충고하면서 그를 일깨워주었다. 즉 유명한 세가지 질문을 자주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이다. Unde Venis? Quid agis? Quo Vadis? - 너는 어디서 왔는냐?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돈 보스꼬는 1863년 12월 30일자로 루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나는 정신적으로 자네를 방문하기 위하여 여러 번 갔었는데 미라벨로에는 여러 가지 무질서가 있었네.”라고 루아에게 말했다. 아마 그것은 루아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루아가 미라벨로에서 성공한 것은 한 두가지 방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한 가지 방법은 극기였다. 돈 보스꼬는 “음식에 극기하지 말고 매일 밤, 적어도 6시간은 휴식을 취하라”고 루아에게 분명히 지시했지만, 루아는 돈 보스꼬에게 순종하면서도 동시에 극기할 수 있는 수단 방법을 찾아냈다.
돈 보스꼬는 살레시안들에게 무리한 노력을 하지 말고 정확하게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남용하지 말라고 언제나 주장 하면서도 자신은 항상 정반대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유머가 있다. 예컨대 “쉬시오!” 하지만, 돈 보스꼬의 바엥는 밤새 불어 켜져 있었고, 특히 [Catholic Readings ]의 새 책을 준비할 때는 밤새 불이 켜져있는 것을 회원들이 보았다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다. 그는 자시 생애의 한 기간 동안 그 책자를 위해서 한 주간에 하루는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나 그의 건강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루아도 그러했다. 한편으로는 회원들에게 건강을 돌보고 지나치게 극기하지 말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항상 재촉하면서........그의 방에는 밤새 불이 켜져있는 것을 회원들은 보았다.
“나는 조사하기 위해서 다른 2명과 함께 미라벨로에 가야했었다.” 첼레스띠노 두란도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 곳에는 우리가 쉴만한 방이 부족했기 때문에, 돈 루아는 내게 자기 방을 쓰게 했다. 내가 막 쉬려고 할 때 문을 노크했다. 돈 루아였다.”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불잇 밑에서 침대만큼이나 긴 나무 조각을 꺼냈다.
“돈 보스고께서 이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 ‘ 이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그는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나는 늘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 돈 보스꼬께서 오라또리오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예, 좋습니다.”
돈 루아는 조심스레 펜을 놓고, 회계장부를 덮었다. 그는 새 학년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 루아는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은 다음, 오래된 경본책을 손에 들고 또리노로 향해 떠났다.
루아에게 소식을 전달한 쁘로베라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당시 쁘로베라는 이 사람이 아무 느낌도 없나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공동체와 소년들 뿐 아니라, 밖엔 사람들로부터도 사랑과 존경을 받는 곳에서 아무 미련도 없이 즉시 일어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루아의 생애에는 그런 순간이 많이 있었다. 즉 루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간에 대하여 어떤 외적인 반응을 기다리고 관찰하던 사람들에게 그런 인상을 준 순간이 많이있다. 가끔 그는 아주 오해를 받았다. 다만 그를 깊이 아는 사람들만이 - 이런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 루아가 자기의 생애를 토앻서 자신을 경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용모는 잔잔한 표정을 거의 잃어버리지 않았고, 그의 입술은 자제하면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밖에 뜻하지 않은 변화는 없었다. 돈 보스꼬는 경솔하게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루이에게 지난 2년 동안 정든 그 곳을 떠나라고 하기 전에 문제를 신중히 숙고했다.
때는 1865년 여름이었다. - 그것은 수도회를 위해서는 슬픈 해였다. 4명의 사제가 중병으로 누웠다. 그중 한 사람이 7월에 사망했고, 오라또리오에서는 돈 보스꼬의 바른 팔이었던, 알라소나띠 신부는 몸이 쇠약해서 휴양차 오라또리오를 떠나야했다. 돈 보스꼬는 그의 친절한 벗이며, 어려웠던 오라또리오 초창기에 그를 도와준 협조자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알라소나띠 신부는 10월 7일, 롸리오 축일에 세상을 떠났다. 돈 보스꼬가 루아에게 사람을 보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루아를 대신해서 요한 보네띠 신부가 미라벨로로 갔다. 보네띠 신부는 루아가 2년 동안 학교에서 이루어 놓은 일들을 직접 보고 이렇게 말했다. “돈 루아가 2년 동안 해놓은 것을 내가 하려면, 10년이 걸린다.”
루아는 오라또리오에 도착해서 알라소나띠 신부의 책상에 앉아 일을 시작함으로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몇몇 살레시안들의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오라또리오의 많은 일들이 그 방향을 잃게 된 것은, 돈 보스꼬가 자리를 비우고 알라소나띠 신부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이라고 보는 회원들이 있었다. 지금은 소년들의 수를 700명이나 헤아리는 대규모의 공동체가 되었다. - 오라또리오는 복잡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 루아가 미라벨로에서 훌륭한 질서와 기율을 세움으로 평판이 좋았기 때문에, 그가 혁신에 가까운 어떤 것을 도입하리라고 이들 회원들은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아는 아무것도 서두르는 것이 없었고, 계속 사무를 이행하였고, 또 누군가가 논평했듯이, 그는 오라또리오를 한번도 떠나지 않은 듯이 여러 가지 직무를 시작했다. 그는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습니다. 만일 어떤 변화가필요하다면, 돈 보스꼬께서 배려하실 것입니다. 지금 돈 보스꼬께서 필요로 하는 것은 유순하고 순종하는 살레시안들입니다. 루아가 무질서를 보고, ”우리는 미라벨로에서는 이렇지 않았다“고 하기를 바랬으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1865년 10월 29일 회합에서 돈 보스꼬는 알라소나띠 신부외 사망으로 미카엘 루아를 수도회의 총무로 지명했다. 11월 25일 루아와 8명의 살레시안들은 돈 보스꼬 앞에서 종신서원을 했다. 돈 보스꼬는 이 자리에서 그들이 수도회에 가입한 이유는 오로지 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그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새로 지명을 받음으로 루아는 수도회의 총무요, 오라또리오의 총무가 되었다. 돈 보스꼬가 그후 13년에 걸쳐 얻은 명성을 이해하려면, 수도회에 있어서 총무의 특수한 기능을 알아듣는 것이 중요하다.
돈 보스꼬의 생각에 따르면, 총무는 총장 다음의 자리를 차지 한다. 즉 루아는 수도회 전체와 오라또리오에 걸쳐서 재정과 기율 및 규칙 준수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특히 규칙 준수라는 것은 수도회 안팎을 통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는 자기의 임무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소년들과 살레시안들에게 질서를 명령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슬픈 순간을 가져왔지만, 그는 성격상 한번도 자기 책임을 회피한 일이 없었다. 그는 할 수 있는데로 사랑을 가져 이 일을 실행하려고 노력했지만, 때때로 그가 받은 고통은 깊었고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감정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돈 보스꼬가 결정한 규칙에 순종하는 것을 보는것만이 문제였다.
한편 수도회 역사상 특후한 순간이었던 이 시기에 돈 보스꼬가 절대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을 가졌다는 것은 큰 위안이요 힘의 원천이었다. 오라또리오 운영에 판단한 돈 보스꼬가 스스로 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숙고해야 할 것이 있었다. 돈 보스꼬가 살레시안들과 소년들의 사랑을 촉진한 것은, 그가 수도회의 특지응로서 확립하고저 원했던 정신을 위해서는 절대 필요한 조건이었다. 돈 보스꼬는 기율을 확립하고 틀린 것을 바로 잡으며, 은공을 모르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방침과, 그에게는 아주 귀중한 마음에로 가는 길을 철저하게 하려고 모험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자기의 생의 과업이 오라또리오의 담을 넘고 삐에몬떼의 범위를 넘어 멀리 뻗쳐야 한다는 신념을 전보다도 더 굳혔다. 이제부터는 그의 사업과 기초, 그의 구걸 여행이 오라또리오의 범위를 넘고 오랜 시기를 걸쳐서 발전해야 한다는 신념을 더욱 더 갖게 되었다. 돈 보스꼬가 자기의 계획에 완전히 적합한 루아와 같은 사람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 아니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 루아는 여러 해 동안 돈 보스꼬의 그늘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잘 알아듣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지금 루아가 가장 중대시하고 전념하는 것은 오라또리오를 원활하게 운영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듯이, 살레시안들 가운데도 기율을 충분히 지키지 않고 편의를 도모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이런 풍토가 지키지 않고 편의를 도모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이런 풍토가 오라또리오에도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 초기 단계에 있어서도 루아가 중요시 한 것은 나이 어린 수도회가 장래의 세대를 지도할 규범과 기준을 확립해 두는 것이었다.
루아는 보통으로 먼저 본을 보임으로 시작했다.
그의 사무실은 단순함의 모델이었다. 책상 하나, 책장 하나, 널따란 의자 2개, 십자가 하나, 작은 그림 2개 , - 그 하나는 성체의 그림이고, 또 하나는 성모님의 그림이었다.-
방에는 몇 개의 작은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기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소년들의 수가 700이나 되는 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작업장과 교실을 돌봐줄 협조가 필요했다. 그는 비상한 재정적 방침으로 사무를 처리해 나갔다. 이를테면, 아무도 개인 서신을 위해서 공적 편지를 사무실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 루아 자신이 그렇게 사용했듯이 - 받은 편지를 짤라서 깨끗한 부분, 즉 반절이나 4분의 1절을 사용해야 하였다.
사무실의 일은 기도를 시작해서, 정오에 준수성범의 한 두 구절을 읽거나,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전기를 읽거나 혹은 삼종기도로 끝났다.
사무실은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응접실 구실도 했다. - 고기장수, 빵장수, 부모들과 기타 면담을 하려오는 사람들이다. - 가능한 경우에는, 면담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글을 썼다. 서기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사제들이나 유능한 젊은이들로부터 시작해서 어느곳에도 적합지 않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또 사무실은 수도회에 새로 오는 사람들을 면접하는 곳이었다. 루아는 새로 오는 사람들의 능력과 성향 ( 性向 ) 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면, 그들에게 더욱 적합한 곳에로 다시 위탁했다. 이러면서도 그는 때때로 종이 조각에다 무엇인가를 기록했다. - 그것은 레크레이션 동안에 관찰하려는 것이었다. - 그는 관찰을 하거나 무엇을 물어볼 경우 언제나 남에게 청하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청이 받아지면 곧 기쁨을 표시했고, 만일 그 청이 받아지지 않으면, 좀 더 특별하게 청하면서 허락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제 오라또리오의 운영이 원활하게 되자 돈 보스꼬는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래 오라또리오를 비우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이 널리 전파되었다. 그래서 오라또리오와 기타의 사업도 널리 알려졌다. 그가 1863년에 착공한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이 거의 완공되어 갔고 청구서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런 청구서는 개인보다도 은인들에게 간청한 기부금으로 지불되어야했다. 이제 돈 보스꼬는 루아가 더욱 빈번하게 서신 왕래를 해야하였다. 루아 역시 오라또리오 안팎의 직무를 더욱 번번하게 이행하기 시작했다. 예를들면, 루아는 돈 보스꼬를 대신해서 쁘로베라 신부와 체루띠 신부의 종신서원과 신학생들의 3년간 유기선원을 거행하고, 지부장 회의의 의장을 맡았다. 돈 보스꼬가 자기의 채무를 루아에게 지불하라고 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루아를 최종 보증인으로 했을 것이다.
“나는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루아에게 가 보시오!”하고 돈 보스꼬는 가끔 말했다.
그리고 루아는 약간 미소지으면서 대답했다. “돈 보스꼬께서 돈을 주셔야 루아는 돈이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일이 가능했다면 - 사실 그러했다. - 돈 보스꼬는 루아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증대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금고에는 돈이 한 푼도 없고 채권자들은 돈을 지불하라고 아우성을 치면 루아는 투덜댔다. 그러나 돈 보스꼬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 신앙이 적은 자여! 걱정하지 마시오! 주께서 보살펴 주십니다!”하고 소리쳤다.
한번은 루아가 3백 리라의 부채를 지불해야 하였다. - 당시에는 상당히 큰 액수였다. 채권자는 채무를 갚지 않으면 그날 영장을 신청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루아에게는 돈이 없었다. 돈 소르꼬에게도 돈이 없었다. 그것은 긴박한 상황이었다.
“신부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루아가 물었다.
“자네 사무실로 가게. 그리고 돈 받으러 온 사람을 불러서 간 기다리도록하게 주께서 마련해 주실 걸세”하고 돈 보스꼬는 말할 뿐이었다.
루아는 순종하고 사무실로 돌아가 심부름 온 사람을 불러 기다리고 있었다.
9시에 오첼레띠 기사 ( 驥士 )가 나타났다. 그는 사과하듯이 자기가 기대하던 법정 수수료 중에 그 반액을 이제야 받았다고 돈 보스꼬에게 말했다. 그것은 많은 돈은 아니었다. 그는 더 많은 돈을 돈 보스꼬에게 드리려고 했었다.
“얼마나 됩니까?” 돈 보스꼬가 물었다.
“3백 리라입니다.”
“돈 루아에게 갖다 드리십시오”하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그는 지금 자기 사무실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겁니다.”
루아는 돈을 받아들고 눈을 크게 뜨고 오래 오래 바라보았다.
“돈 루아는 엄격하고, 또 그 성격상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일을 맡았지만 그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았다.”고 프란치스꼬 빨리아 신부를 기록했다.
루아는 필요한 기회가 오면 사람들에게 최고의 친절을 보여주었다.
요셉 리네띠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9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사제직 지망자로 오라또리오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아버지는 다음 날 또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또 그처럼 침울한 마음에 사로잡혀서 식당으로 갈 때는 더욱 더 했습니다. 나는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날 데리러 오시기만을 기다렸스빈다. 돈 루아는 나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 듣고 곧 자기 사무실로 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위로하고 마침내 내가 오라또리오의 생활을 좋아하게끔 만들었스빈다. 그는 나의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프란체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돈 보스꼬는 사랑하는 자기 제자가 성질상 무엇인가 엄격한 것을 지니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사랑하는 제자를 거슬려 지니기를 원치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돈 보스꼬는 돈 루아를 앞에 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지난 밤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내가 고백의 성사를 주러 가야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제의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돈 루아의 모습이 너무나 엄격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웃으면서, 돈 보스꼬도 꼼짝 못하게 위협했다고 돈 루아에게 말했다.
프란체시아는 루아를 배놓으면 그렇게 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평했다. 돈 루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무엇이길래 돈 보스꼬를 무섭게 하느냐?”
수도회를 위한 루아의 훌륭한 사무와 노력이 올바르게 인정되었든 안 되었든 그는 오라또리오를 정리하면서 자기 일을 해 나갔다.
한 예를 들면, 이제까지 돈 보스꼬는 소년들이 이곳으로 움직일 경우 줄을 서서 가지 않고 자율롭게 이야기를 하면서 교실이나 성당에로 가도록 허락했다. 그는 소년들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의무 이행하는 습성을 기르기를 바랬다. 또 같은 정신에서 소년들이 성당 빡에 마당 한 구석에서 저녁 기도를 바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것 역시 소년들이 성당 안에서맘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기도하는 습성을 길러 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오라또리오의 상황은 아주 달라졌다. 지금의 오라또리오는 소년들을 마듬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돈 보스꼬, 즉 소년들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인 소년들의 집안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ㅎ다. 오라또리오는 대규모의 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물론 지금도 가족정신이 있다. - 돈 보스꼬는 오라또리오를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폐쇄하기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 - 그러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질서정연한 절차가 도입되어야 했다. 이제는 소년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경우 묵묵히 걸어갔고, 성강과 교실에서 적절한 예의를 지켰다. 각 집단에 급장이 있었고 또 급장들에 유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새로 사제가 된 바오로 알베라 신부였다. 침실은 정돈되어 있었고, 교실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문을 잠그고 또 교실을 깨끗이 하고, 교실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문을 잠그고 또 교실을 깨끗이 하고, 한 주간에 한번 소년들은 예의범절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루아의 주의는 기율에만 국한돼 있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소년들이라도 주일과 축일에는 적절한 옷을 입었나 보았다. 루아의 훈시로 오라또리오의 경리 ( 經理 )와 지원자인 재봉사와 구두 만드는 사람은 수선할 옷이나 구두가 없는가를 보기 위하여 규칙적으로 옷장과 신발장을 살펴보아야 하였다. 그는 소년들 뿐 아니라 실업 선생들도 훈련을 받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자주 작업장을 찾아갔다. 이 초기에는 실업선생들 중에 많은 이들이 바로 전문가들이었고 또 다른 사람이 맡아서 볼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작업장의 책임을 맡았었다.
“내가 돈 보스꼬의 모든 근심 걱정을 없앨 수만 있다면!” 하고 루아는 몇 번이고 되풀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오라또리오를 발전시키겠다는 마음에서 돈 보스꼬가 승인하지 않은 변화를 도입한 일은 한번도 없다. 그는 전에 돈 보스꼬가 도입했으나 한 두가지 이유로 폐지 되었던 것을 다시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루아가 걸머진 이 모든 어려운 과제를 보고 돈 보스꼬는 1867년에 아주 주요한 꿈을 꾸었다. 그는 몇몇 살레시안들에게 그 꿈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꿈 속에서 그는 옛 삐나르디 별채 근처에 커다란 포도나무가 자라나는 것을 보았는데, 그 포도나무는 높고 넓게 자라서 운동장 전체를 뒤엎었다. 그리고 곧 포도송이가 소년들을 향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 그 소년들은 오라또리오와 다른 지부에 다녔거나 혹은 다니는 소년들이었다. - 그리고 또 다른 큰 포도송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깔리에로가 포도송이 하나를 맛보았으나 너무 써서 먹지 못했다. 돈 보스꼬를 데리고 온 안내자는 몇 명의 살레시안들에게 맛이 쓴 포도송이를 생기에 하는 특수한 가지를 꺾어버리라고 장대를 주었다. 그러나 모두가 거절했다. 안내자는 루아를 보았다. 루아는 돈 보스꼬를 힐끗 쳐다보았다. 돈 보스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루아는 튼튼한 장대를 들고 가지와 맛이 쓴 포도송이 - 수도회에 해로울 수 있는 사람들과 사물의 상징 -를 때려부수었다.
V. 철 저 한 그 의 생 활
“돈 보스꼬 빨리 오세요. 루아는 곧 임종할 것 같습니다.” 요아킴 베르또 신부는 거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돈 보스꼬는 말했다. “하지만 내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루아는 내가 말할 때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보세요. 나는 지금 행복한 죽음에 대한 묵상기도에 참여한 소년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어야 해야”
“돈 보스꼬, 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세요?” 베르또신부는 돈 보스꼬의 손목을 꽉 쥐면서 말했다. “아마 그는 지금 임종할지도 모릅니다.”
돈 보스꼬는 머리를 흔들면서 점잖게 그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소년들에게 고백 성사를 주러갔다. 돈 보스꼬가 고백 성사를 마치자 베르또 신부는 또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와서 보십사요. 루아는 얼마 살지 못해요”
“저녁 식사를 한 후에 가겠어요”하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베르또신부는 실망한 듯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 갔다.
돈 보스꼬는 약속한 대로 변변치 않은 저녁 식사를 한 다음 병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신부님!”하고 병자는 말했다. “신부님을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지금이 저의 마지막인지 말씀해 주세요. 저는 다 준비되어 있어요”
이 놀라운 장면은, 도음이신 마리아의 성당 축성 의식이 끝난 1868년 7월 29일에 일어났었다. 성당축성 의식은 8일간이나 건축완성, 축성준비, 저명인사들의 접대, 손님들, 살레시안들과 소년들.........이 모든 특별한 짐이 이미 과중한 짐을 지고는 루아의 어깨에 지워졌었다. 마침내 루아는 복막염과 고열로 몸져 눕게 되었다. 곧 의사들을 불러왔으나, 그들의 의견은 백의 한 사람도 살까 말까 하는 중병이라고 말했다. 의사들이 이제 죽을 것이라고 체념하자, 루아는 붕성체를 청해서 모셨다. 그것은 보스꼬가 오라또리오로 돌아갔을 때였다.
돈 보스꼬는 병실로 들어가서 병자의 질문을 받자, “루아 신부! 난 자네가 죽는 걸 원치 않네. 내 여러 가지 계획에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루아에게 강복하고 몇마디 위로의 말을 한 다음 방을 나갔다.
다음 날 아침, 돈 보스꼬는 미사 후에 병실로 들어와서 그곳에 있는 의사와 몇몇 사제들을 보았다. 의사는 돈 보스꼬를 한 쪽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생각으로는 환자가 회복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는 중병이라”고 덧붙였다.
“루아가 아무리 중환자라도 해도 난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곧 회목할 겁니다.” 하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돈 보스꼬는 성유를 보았다. “도대체 이 성유는 여기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루아에게 병자의 성사를 주기 위해 가지고 온 것이라고들 했다.
“누가 이 성유를 가져왔습니까?”
“제가 가져왔습니다. 신부님께서 어제 루아를 보셨다면..............그는 참혹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들도.......”하고 사비오 신부가 말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 하고 돈 보스꼬는 외쳤다. 그리고 비로소 환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기운을 내게, 루아 신부”하고 말했다. “내 말을 좀 들어보게 자네의 몸을 저 창 밖으로 내 던진다고 해도 자네는 죽지 않을걸세”
돈 보스꼬는 환자에게 강복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부터 루아는 점점 회복되어가고 며칠 후에는 완전히 위기를 벗어났다.
루아는 몸이 점점 나아가는 동안, 돈 보스꼬가 “루아는 곧 죽지 않으리라”고 보증했을 때, 또 다른 이유를 상기했어야 하였다. 그 때는 유명한 성체의 기적이 있은지 4백주년이 되는 때였고, 그 기적은 1453년에 또리노 시가에서 일어났었다. 루아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친구인 마태오 삐꼬 교수와 함께 서있는 돈 보스꼬 한테로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돈 보스꼬는 성체의 기적을 기념하는 소책자를 다 썼다고 했다.
돈 보스꼬는 루아에게 말했다. “1903년이 오면, 나는 450주년을 지내지 못하겠지만 자네는 그때 살아있을 걸세. 난 지금 이 순간에 이 작은 책자를 그때 재판( 再版 ) 할 것을 자네에게 위임하네.”
“그렇다면야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날이 오기 전에 저게 죽음이 닥쳐올지 누가 압니까?” 하구 루아는 대답했다.
“자네에게는 죽음이 닥쳐오지 않네” 돈 보스꼬는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ㅎ나 일을 할 수 있을 걸세.”
돈 루아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1903년을 기다리는 책자를 잘 보관했다.
루아가 앓고있다는 소문은, 소년들이 루아를 얼마나 존경하는가를 보여주는 기회를 오라또리오에 제공했다. 보통으로 루아는 돈 보스꼬가 살아있는 동안, 소년들이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의 병은 루아나 돈 보스꼬의 죽음으로 오라또리오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할 것인가를 소년들이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학업을 중단하고 살레시안들과 소년들은 그리스찬의 도움이신 마리아 성전 제단에 모여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영성체를 했다. 루아가 충분히 회복되어 공석에 나타났을 때, 그는 오라또리오 악대의 인사를 받고, 소년들은 그를 자기 한 가운데 모시고 그를 위해서 작곡한 곡을 들려주었다.
“나는 중대한 일로 로마로 떠나려고 합니다. ......... 3월 7일까지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나의 의향대로 바치기를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이것은 돈 보스꼬가 세 번째로 로마를 방문하는 것이었고, 여느 때처럼 수도회의 결정적인 승인을 얻기 위해서였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돈 보스꼬 그는 반대와 어려움에 부닥쳐 있었기 때문에, 사실 불가능한 것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돈 보스꼬는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보다도 더 자기를 뒷받침해 주는 분을 모시고 있었다. 성모님은 돈 보스꼬를 위하여 수도회 승인 문제와 직접 관련된 세 사람에게 각별한 은총을 얻어주셨다. 그첫째는 베라르디 추기경의 조카요, 다음은 안또넬리 추기경이며, 끝으로 주교 수도자 성성 사무장 스벨리아띠 본시욜이었다. - 이들 세 사람은 수도회 승인 문제에 있어서 열쇠가 되는 인물들이었다. - 1869년 3월 1일, 그들이 영향을 미쳐서, 승인 문제를 취급하는 주교 수도자 성성에서는, 결정적 승은은 훗 날로 보류하고 임시로 승인하는 훈령을 반포했다. 아마 그들은, 22명의 종신서원자들과 33명의 3년부 유기서원자들, 그리고 31명의 지원자들로 구성된 수도회는 아직 보잘것 없는 집단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오라또리오 소년들의 수는 8백명이었다.
수도회의 회헌이 아직 결정적 승인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수도회로서는 회헌을 갖지 있었다. 이것은 이제 그들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한 조직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재의 회원들은 새 수도회의 창립자들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1969년 4월 6일, 돈 보스꼬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써보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수도회의 훌륭한 창립자들이 되도록 자신들을 경계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읽을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참다운 모범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불평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창립자들이란 어떤 사람들 입니까?”
수도회에 결정적인 형식을 제공하는 문제와, 수도회 창립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성청에서 제시한 것을 채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제부터 수도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형성기간을 거치고 수도회의 정신과 규칙에 대한 훈련을 정식으로 받아야 한다. 수련기를 확정하고, 잘 숙달된 사람이 수련장으로서 활동해야 한다. 이 세심한 과업, 이 주요한 책임을 돈 보스꼬는 누구에게 맡겼을까? - 돈 루아였다.
그러나 “수련기”라는 낱말도 사용치 않고 “수련장”이란 낱말도 사용치 않았다. 이 두가지 낱말은 공적으로나 살레시안들에게나 금지돼 있었다. 그러한 낱말은 탁발수도회에나 어울리고 봉쇄 수도회에서나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제까지는 돈 보스꼬 자신이 형성에 대한 책임을 졌고, 또 정식 수련기가 없이도 수도회가 존속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돈 보스꼬가 비오 9세 교황으로부터 특별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깔리에로는 보통 때처럼 솔직하게 돈 보스꼬에게 말했다. “신부님께서 세상을 떠나신다면, 신부님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은 돈 루아일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 이것이 요점이다. - 신부님께서 신임을 받으시듯 루아도 그렇게 신임을 받을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만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 감시원으로서 지도하고, 수도회의 오라또리오의 기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기타 구질구질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좀 짐을 벗겨 주십시오. - 그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은 아닙니다!”
돈 보스꼬는 이 말을 듣고 숙고한 끝에 깔리에로의 말을 옳다고 결론을 내렸다. 1872년 새학년에 돈 보스꼬는 쁘로베라 신부를 부원장으로 임명하고 돈 루아는 오라또리오 지도자로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돈 루아의 겸손이 드러났다. 그는 그 자리는 받아들이겠지만 그 명칭은 사양하겠다고 돈 보스꼬에게 말했다. 돈 보스꼬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 아무도 오라또리오 지도자라고 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루아는 지적했다. 그래서 루아를 부지도자로 부르기로 합의했다. 깔리에로가 암시했듯이 이것은 거치장스럽고 신경을 써야하는 임무에서 루아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루아는 수도회의 총무였기 때문에 그 회원 전체의 규칙준수를 보살필 직접 책임을 지고 있었다. - 그것은 수도회의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돈 보스꼬의 눈에는 가장 주요한 과제로 보였다.
돈 루아가 오라또리오의 다른 지부에서 어떻게 권위를 행사했는지 이야기해 보자. 밤 기도를 마친 다음, 모든 활동이 중지되고 모든 사람이 방 안에 있을 때, 루아는 묵주를 손에 들고 기둥사이를 조용히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침실을 떠난 사람을 보면,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함께 기도하자고 춴했다. 로사리오를 마치면 그들에게 잘 자라고 인사했다.
오라또리오의 음악가인 돌리아니 선생은 잘 알려진 사람이다. 어느 날 그는 밤 늦게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돈 루아였다.
“아아 돌리아니 씨!” 하고 루아는 말을 건냈다. “나는 밖에서 소리를 듣고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사람이 한명이 아닐거라고 생각했어요.” 돌리아니는 두 개의 현을 갖고 동시에 바이올린을 연습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요 조금 들어볼 수 있을까요?”
돌아아니는 두 개의 현으로 바이올린을 연습했다.
“글너데 나는 피리 소리도 들은 것 같은데요”
돌리아니는 그와 같은 소리를 내는 복잡한 화음을 설명했다.
“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밤에는 쉬어야죠 필요하시다면 연습할 수 있는 더 좋은 시간을 찾아보겠습니다.”
돌리아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나를 보고 잘 자라고 할 때, 그는 조금도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없을만큼 친절하게 인사했다. 사실 나는 그가 방문함으로 용기를 얻었다.”
돈 보스꼬는 1873년 로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살레시안들에게 세 통의 회서를 보냈다. 6월 4일자로 된 첫 회서에는 실천에 옮겨야 할 필요한 검소한 생활, 특히 회헌에 영시된 절제를 논했다. 그는 살레시안들에게 “수도생활의 토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과장된 검소한 생활을” 도입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절제할 수 있는 곳에서는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권유할 뿐 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돈 루아가 받은 정신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고 잃지 않으려고 갈망했다. 그는 독 ( Tocc ) 신심회 회원들을 지도할 때, 주위에 내버린 빵 조각을 집어다 먹은 일이 있다. 그의 신발과 옷은 언제나 깨끗하고 말쑥했지만 보통으로 조각을 대고 꿰맨 것이었고, 그의 수단은 빚이 바랜 것이었다. 그는 새수단을 사기 보다는 오래된 것을 물들여 입기를 더 좋아했다. 루아의 서기 중의 한 사람이었던 요셉 베스삐냐니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루아는 그의 낡은 수단에서 먼지가 떨어질까봐 두려워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만지고 - 또 여러 가지 거대한 계획의 재정을 말아봤다 할지라도 - 그는 동전 한푼에 대해서도 보고서를 냈다.
어느 날 루아는 안드레아 또르키오라는 소년을 시내로 보내서 등기 소포를 부치게 한 일이 있었다. 소년은 돌아와서 영수증을 드렸다.
루아는 영수증을 자세히 본 다음 소년을 쳐다봤다.
“이 영수증을 보면 내가 준 40원으로는 모자랐을 텐데, 20원은 어디서 났니?”하고 물었다.
“내게 있던 거예요” 소년은 즉시 대답했다.
“하지만 돈을 갖고 있는 것은 오라또리오 규칙에 어긋나는 것인지 모르니? 또 돈이 있니?”
“없어요. 그것 뿐예요.”
“좋아!” 루아는 메머를 썼다. “이것을 부원장 신부님께 갖다 드려라! 그리고 네 앞으로 20원을 적어두시라고 해라! - 정말 수고했다”하고 루아는 말했다.
베르나르도 바키노 - 후에 남 아메리카 선교사가 됨 - 가 오라또리오 소년이었을 때, 그도 작은 돈으로 해서 돈 루아와 말썽이 있었다. 루아는 그를 시내로 심부름을 자주 보냈다. 그가 돌아오면 보고 들은 것을 물어봤다. - 루아는 습관대로 글을 쓰면서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루아는 어떤 집에 소포를 갖다 주라고 베르나르도를 보냈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심푸름 하는 소년에게 보통으로 사례금을 주었다. 베르나르도가 돌아오자 루아는 물어 봤다. “얼마나 돈을 주디?”
베르나르도는 대답 대신 40원을 책상위에 내놓았다.
“이게 전부냐?”하고 루아는 물었다.
베르나르도는 얼굴을 붉혔다. “신부님, 사실은 60원을 주었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몹시 배가 고파서 빵을 사먹었어요.“
돈 루아는 잠시 그 소년을 바라보다가, 진담 반 농담 반 섞어 가면서 “잘 한다!” 하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재정에 관한 돈 루아의 관심이 돈 보스꼬와 마주친 일이 한 번 있었다.
1879년 4월 29일 저녁에 그 일이 일어났다. 고백 성사를 마친 다음 돈 보스꼬와 돈 루아, 그리고 오라또리오의 몇몇 사제들이 자리를 함께 했었다. 돈 보스꼬는 루아의 결정에 도전하기를 주저치 않았고 또 공석에서도 그를 고쳐주려고 했다. 그들간에는 입밖에 내지 않은 양해가 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들간의 대화는 언제나 겸손이나 기타의 덕행에 관한 좋은 교훈이 되었는데, 그것은 루아에게는 거의 해당 되지 않고 듣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돈 보스꼬는 이렇게 말했다. “루아 신부님, 모두가 내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신부님께 청하면 한 푼도 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인가요?”
“ 줄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나를 귀찮게 합니까?” 루아는 통속적인 말을 인용하면서 말했다. 달리 말하면, 금고가 비어있다는 것이다.
“왜 갖고있는 주 ( 侏 )를 팔아서 가장 시급한 채무를 변제하지 않습니까?”
“벌써 주를 몇 개 팔았습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주를 판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게는 곧 중대한 일이 닥쳐올 겁니다. 그때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으면 어찌합니까!”
“그래요?” 돈 보스꼬는 힘주어 말했다. “주께서 보살펴주시지 않으실까요? 꼭 보살펴주십니다! 그 동안에 가장 급한 빚을 갚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했습니다. 15일 내에 1만 8천 리라의 채무가 생깁니다. 내가 모아둔 돈은 그 빚을 갚을 정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돈 보스꼬는 날카롭게 말했다. “우리가 당장 지불할 수 있는 빚을 갚지 않는다고 해서 두주간 후의 빚을 갚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작은 빚은 언제나 뒤로 미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지불해야 하라 큰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습니까?”
“주께서 보살펴 주실 겁니다.” 돈 보스꼬는 반복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돈을 모두 이용해서 오늘부터 빚을 갚읍시다. 장래의 빚을 갚기 위해서 돈을 따로 둔다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돈 루아는 또 주장했다. “그러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천번 빚을 전부 갚아버리면 다음 빚으로 인해서 혼란을 빠진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파산 ( 破産 )으로 직행하는 길입니다. ”
“돈 루아, 내 말을 들으시오” 돈 보스꼬가 말했다.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를 돌봐주시기를 원한다면, 내일 당신 방으로 가서 갚을 수 있는 모든 빚을 다 갚으시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 - 그것은 하느님의 손에 맡기시오.” 그리고 누구를 특별히 쳐다보지도 않고 돈 보스꼬는 말을 계속했다. “하느님의 섭리에 한없이 신뢰할 줄 알고, 장래를 위해서 조그만한 비상금이라도 모아두려고 하지 않는 경리를 내가 발견하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금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많은 예산을 세우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간의 지혜가 문으로 해서 들어갈 때, 하느님께서는 창 밖으로 날아가 버리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것입니다.”
11월 15일자로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돈 보스꼬는 모든 살레시오 지부에 보급되어야 할 특수한 규율에 관해서 언급했다. 돈 보스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내가 말하는 규율은 교정과 처벌, 또 채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 이런 것은 우리 지부에 언급되지 말아야 합니다. - 내가 말하는 규율은 규칙과 수도회의 관례에 알맞은 생활양식입니다.” 그리고 그는 규칙준수의 중대성을 강조하고, 공동체의 한 회원이 규칙에 순종치 않음으로 기타의 모든 회원들이 고통을 당한다고 지적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하면서 그는 끝을 맺었다.
돈 보스꼬와 돈 루아는 한번도 규칙을 어긴 일이 없다. 돈 루아는 “살아있는 규칙”이라는 명칭을 얻었다는 것을 말함으로 충분할 것이다.
1874년 2월 5일자로 보낸 세 번째 편지는 소년들의 도회문제를 다루었다. “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그리고 소년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과 다른이들을 항상 경계하고 방관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루아는 예의범절에 있어서 항상 공동체 전체의 훌륭한 모범인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생활했다고 한 당대인들의 말을 인용함으로 그가 어떠 하였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몸짓, 말로 표현하는 방법, 그리고 유머에 있어서도 그는 예의범절을 조금이라도 손상치 않으려고 극히 조심했다. 또 그는 자기 아래에 있는 소년들을 모든 위험한 기회로부터 보호하려고 늘 돌보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심부름하던 소년 베르나르도 바키오가 어느 날 아침 오라또리오로 돌아와서 돈 루아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이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해도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베르나르도,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루아가 물어봤다.
“신부님, 이제 다시는 시내로 심부름 보내지 마세요” 베르나르도는 애원하듯 말했다.
“왜 그러니?” 돈 루아는 소년에게로 관심을 기우렸다.
“내가 어떤 건물 앞을 지나갈 때면 전 눈을 두리번거리게 돼요 그러고.........”하고 소년은 말을 더듬었다.
돈 루아는 펜을 내려놨다. “자, 마음놓고 얘기해 봐. 여기 앉아서 자세히 말해봐요” 바키노가 이야기를 마치자, 돈 루아는 소년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즉 소년은 광고 게시판과 포스타를 보면 마음이 혼란해 진다는 것이었다.
돈 루아는 그런 경우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충고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다른 소년이 베르나르도를 대신해서 시내로 심부름을 다녔다.
돈 보스꼬는 1874년 3월 16일에 로마에서 네 번째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은 오라또리오에 보낸 것이었다. 그는 오라또리오 전체가 - 살레시오 회원들과 소년들이 - 3일간 단식하기를 요망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우리 자신의 영신적 이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이행되도록 하느님께서 청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돈 보스꼬는 4월 13일자로 또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주교 수도자 성성은 마침내 회헌을 승인하는 훈령을 반포했다고 하였다. 나이 어리고 성장하는 수도회에 있어서는 이것이 가장 주요한 사건이었다. 이제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수도회는 완전히 승인을 받은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돈 보스꼬는 회헌이 승인되자 회헌 준수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돈 보스꼬는 회헌 준수에 관해서 돈 루아에게 크게 기대했다. 돈 보스꼬는 1865년부터 1877년까지 회헌에 관한 토의를 갖기 위해서 연속적인 연차 회합을 가졌는데, 자신이 그 회합을 지휘할 수 없는 경우에는 돈 루아가 자신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1876년 2월 3일에 개최된 회합에서, 루아가 소년들과 사제들, 신학생들과 성소의 수가 날로 증가함으로 오라또리오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보고를 하자 돈 보스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돈 보스꼬가 깊이 감동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돈 보스꼬는 이렇게 말했다. “30년전, 지금 우리가 모인 이 자리에 무엇이 서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궁지에 빠지고 들뜬 소수의 소년들을 쫓아서 이리 저리 뛰었습니다. 그 소년들은 규율이나 질서 따위는 아랑곳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독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장소와, 또 이 부근은 아무것도 없던 들판이었습니다. 한 가운데는 선술집이 있었습니다. 그 선술집 밖은 비참했고 더욱이 그 안은 더 비참했습니다. 그것은 부도덕한 집이었습니다. 외롭고 버림받은 한 불쌍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경멸을 받고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외로운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 사제는 그와 같은 장소에서 조그만한 좋은 일을 하고 가난한 소년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는 막연한 이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를 지배하던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나를 떠난 일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 생각은 나의 모든 발걸음과 나의 모든 활동을 지배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었고 또 여기서 그 좋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는 모든 사람들이 보잘 것 없는 사제의 이런 생각을 꿈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관대히 돌봐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실현시키셨습니다.”
돈 보스꼬는 돈 루아를 지부 시찰자로 임명했지만, 자신이 계속해서 여러지부를 자주 시찰했다. 이처럼 시찰이 중복된 이유는 시찰하는 사람의 방법에 있었던 것이다.
돈 보스꼬는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언제나 격려하고 위로했다. 그런 식으로만 시찰을 계속했다면, 아마 중대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한편 루아는 공식으로 방문하고 일정한 목적을 마음에 두고 했다. 즉 각 지부에서 수도회의 서신과 정신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루아는 처음에 성당과 제의실을 돌아보고 깨끗한가를 본다. 그리고 전례의식을 어떻게 이행하는지 본다. 다음 그는 장상들의 방을 지나서 침실과 부엌에 간다. 그 다음에 청빈과 정결과 순종의 정신이 지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지 도외상태를 살펴보고, 행정에 관한 책과 학교체제를 검토한다. ............그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끝으로 그는 사제직과 수도생활의 성소가 있는지 지대한 관심을 갖고 조사한다.
그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작은 노트에 적어 둔다. 그가 떠나기 전에 충분히 관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오라또리오로 돌아가 글을 써서 지부장들에게 토의하도록 보낸다. 이러한 시찰은 보기에 너무나 시답지 않다고 생각되는 제대보 위에 흘러내려져 있는 밀초에서부터 구석에 있는 먼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아주 넓다. 그 관찰은 사물에 한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지부장으로부터 말단 살레시안에 이르기까지 모든 회원들에게 적용된다. 예를 들면, 돈 루아는 한 지부장에게 충고하기를, 방에 있는 양탄자를 치워서 방의 품위를 부드럽게 하고 지나치게 권위의 풍채를 지니지 말라고 했다. 또 루아는 다른 회원들에게 건강을 돌보고, 너무 어려운 설교 계획에 있어서 다른 회원들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만일 루아가 돈 보스꼬 곁에 있지 않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이며, 또 루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 루아를 대신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잘 보여준 한 가지 실례가 있었다. 그것은 1876-1877년 학년 초에 오라또리오에서 발생했다. 돈 보스꼬는 오라또리오 부 - 책임자라는 직책에서 돈 루아를 해고하고 그 직책을 요셉 라제로 신부에게 맡겼다. 돈 보스꼬는 루아가 급속히 많아지는 부총장의 일을 수행케 하려고 했었다. 루아는 오라또리오를 자주 떠나 부총장의 임무를 수행케 되었다. 돈 보스꼬 역시 두 번째로 남 아메리카로 떠나는 선교사들을 데리고 교황성하의 강복을 받기 위하여 오라또라리오를 떠나야했다.
그로부터 며칠 안 되는 11월 8일, 오라또리오 장상들은 다음 해의 계획을 토의하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다. 돈 루아는 이제는 오라또리오에 관계된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장상들은 돈 보스꼬가 승인하지 않은 여러 가지 계획을 가결했다. 율리우스 바르베리스 신부가 이 사실을 알리자 돈 보스꼬는 지급 회신으로 대답했다. 우선 돈 보스꼬는 오라또리에서 “마리아의 아들들”이라는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반대하고 다음에 성소 운동을 폐지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계속했다. “여러분이 야간반을 내가 없는 동안 저녁식사 전에 하기로 했다고 하지만 내가 있다면 나는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고양이가 없으니까 쥐들이 판을 치는 격입니다. ”돈 보스꼬는 돌아와서 그들을 크게 꾸짖었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일에 있어서 아주 작은 일에 있어서도 우두머리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다음 해에 돈 보스꼬는 돈 루아와 함께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위원회는 오라또리오의 기율과 정신이 쇠퇴되는 원인을 연구했다.
그 해 ( 1876 ) 6월 21일에 돈 루아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루아의 어머니는 그 소박한 생애에 어울리는 조촐한 장례식을 거쳐 또리노의 보르고도라 성당 묘지에 안치되었다. 돈 루아는 장의 마차를 뒤따르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살레시오 회원들도 돈 루아 모친의 죽음을 슬퍼했다. 왜냐하면 루아의 어머니는 여러 해 동안, 살레시안들이 사랑하는 어머니 마르가리따를 여러 가지로 대신 하였기 때문이다. 루아는 얼마 안 되는 어머니의 재산을 남아있는 유일한 형인 안띠니오에게 정확히 보고하고 분배했다.
돈 루아는 오라또리오의 사무를 돌보는 일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수도회 지도에 더욱 더 힘을 기울였다. 돈 루아는 돈 보스꼬를 대신해서 회원들의 모임을 자주 가졌고, 그 중에 가장 기억할만한 것은 돈 보스꼬가 비오 9세 교황을 방문하리라고 말한 1월 6일의 모임이었다.
1877년 1월 21일 오후, 교황성하께서 돈 보스꼬를 당신 방으로 데리고 가셨다. 교황성하의 방이 이럴 수 있는가! 그 방에는 수수한 쇠 침대가 놓여있고 융단도 깔려있지 않았으며, 몇 개 있는 가구 마저도 오래되어 낡은 것이었고, 바닥은 진흙으로 구워 만든 타일이었고 그나마도 깨어져서 울퉁불퉁했다. 어느 작가는 “누추하다”는 낱말로 그 방을 묘사했다.
돈 보스꼬는 교회의 일과 그 장래에 관해서 이야기한 다음 협력자 문제를 꺼냈다. 순간 교황성하의 눈이 빚났다.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에게 크나큰 신비를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시대에 당신의 수도회를 일으켜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기 동안 알려지지 않고 또 과거의 많은 수도회에도 알려지지 않은 중대한 비밀을 이 순간까지 감추어 두셨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당신 수도회의 교회 안에 있어서 첫 번째로 새로운 종류의 수도회입니다. 그 회원들은 수도자이면서 동시에 세속인이고, 청빈의 허원을 지키면서도 재산을 소유하며, 세계와 수도회에 참여하며, 수도자요 세속인이며 자유로운 시민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 시대에 일어난 수도회가 당신의 수도회입니다. 주께서는 최근에 이 사실을 임명하셨고, 나는 당신에게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수도회는 성서의 말씀대로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속에 세워짐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칠 수 있도록 수도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VI. 돈 보스꼬의 뒤를 이어
급속히 발전하는 어린 수도회에 여러 가지 새로운 요소와 사건이 주어졌다. 돈 보스꼬의 명성은 날로 높아 갔고, 그가 국내외에서 이룩한 기적으로 뒷받침 되었다. 그래서 그의 명성은 - 그의 “꿈”은 말할 것도 없고 - 이탈리아의 국경을 넘어서 멀리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칼과 기타 여러 국가에까지 전파되었다. 돈 보스꼬가 빠다고니아와 띠에라 델 푸에고에 세운 선교지는 주민들의 이해를 받고 널리 알려졌다. 그 결과 주교들과, 조직체들 그리고 정부에서도 선교지 설립을 요청해왔다. 각 신청서를 검토하는 것은 돈 루아의 책임이었다. 루아는 조사결과를 돈 보스꼬에게 알렸다.
지부의 수가 57개가 되었다. 지부의 대부분이 이탈리아 밖에 있었기 때문에 지부장들이 연례회합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3년에 한번 총회를 갖기로 하였다. 총회 사이의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루아는 돈 보스꼬의 충고를 받아 매달 지부에 회서를 써보냈다. 이 회서의 내용은 주로 수도회의 발전에 관한 제안이었다. 이와 동시에 같은 지구 ( 地區 )에 있는 지부들은 관구를 형성하였다. 수도회의 첫 번 관구는, 삐에문떼, 리구리아, 남 아메리카 등 세 개였다.
1883년 1월 31일, 돈 보스꼬는 엄청난 채무를 갚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프랑스로 떠나갔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열렬한 환영과 가장 관대한 영접을 언제나 받았다. 이 특별한 여행에서 돈 보스꼬의 호소에 응답한 서신이 너무나 많아서, 이 여행중에 돈 보스꼬의 비서직을 맡아본 드 바루엘이란 프랑스 출신인 살레시오 신부는 혼자서 그것을 처리 못하고 다른 수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그 일이 불가항력적임을 발견하고 마침내 해결책을 기다리면서 가방 속에다 편지를 챙겼다.
돈 보스꼬는 그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다. 그 편지 속에는 즉시 알아야할 사항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기도를 시급히 청하는 일, 특별한 뒷받침, 중요한 기부나 초청이 있을 것이다. 돈 보스꼬는 숙고한 끝에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 루아에게 곧 파리로 오라는 소식을 보냈다.
이틀 후, 루아는 파리에 도착하여 편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루아는 파리에 도착하자 간단한 서신을 오라또리오로 보냈고, 또 시간이 있는대로 긴 편지를 써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돈 루아는 편지를 쓰지 못했다. 그는 바쁜 나날을 보냈고, 밤에는 우편물을 분류하고 돈 보스꼬의 회답을 썼다. 그리고 때로는 돈 보스꼬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그를 대동하고 방문에 나섰다. 그 보답으로 돈 루아는 세련된 파리 사람들에게도 돈 보스꼬의 존재가 미친 영향을 증거하게 되었다. 루아는 돈 보스꼬 시복 조사가 진행하는 동안 당시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 보스꼬가 회합을 갖기 위하여 교회로 갈 때 너무나 많은 군중이 모여서 힘센 서너 사람들이 돈 보스꼬를 모시고 강단을 향해서 군중 속을 헤쳐나아가야 했다. ............. 돈 보스꼬가 길에 나타나면 곧 군중이 몰려왔다. 돈 보스꼬가 있는 곳에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성인을 보기만해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행 전체에 걸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프랑스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들 셋, 즉 돈 보스꼬, 돈 루아, 드 바루엘 신부가 오라또리오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생겼다. 이들 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돈 보스꼬가 침묵을 깨뜨렸다.
그는 루아에게 물었다. “부띨리에라에서 무리알도로 가는 길이 생각나요? 그 바른 쪽에는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언덕 위에는 작은 집 한 채가 있죠. 또 그 언덕 밑에는 들판이 있고 그 초라한 집이 우리 집이었지. 나는 그 들판에로 암소 두 마리를 몰고 가서 풀을 뜯겼지. 만일 그 사람들이 벡키의 가난한 이 농부를 그처럼 야단스럽게 추어준다는 것을 알았다면.....”
돈 보스꼬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졌다. 몽빼이에 대학의 유명한 의사인 꽁발은 돈 보스꼬를 진찰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지나치게 많은 일에 당신의 생명을 써버렸습니다. 당신은 마치 평일과 휴일에 입는 낡은 옷과 같습니다. 이제는 회복할 수 없고, 만일 좀 더 살으시려면 그 옷을 벽장에 걸어두셔야 합니다.”
여러 신문에서 - 그 중에는 지방신문인 [트리브날 신문] 1885년 3월 14일자에도 - 돈 보스꼬가 이미 사망했고 장례식을 치루었다고 한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무도 돈 보스꼬의 건강한 모습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요한 알베르도띠 의사는 살레시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돈 보스꼬와 돈 루아는 너무나 몸이 쇠약해져 “정원에다가 아담한 작은 집을 지어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야 한다”고 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돈 보스꼬가 시급히 해야 할 것은 대리자를 지명하는 일이었다. 깔리에로는 교황을 알현했을 때 이 점을 말씀드렸고, 교황께서는 진심으로 이에 동의하셨다. 로마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돈 보스꼬의 여러 친구들도 돈 보스꼬와 교황께 그들의 생각을 말씀드렸다.
교황께서는 또리노의 대주교인 추기경에게 서신을 보내어 돈 보스꼬가 자의로 대리자를 임명케 하였다. 돈 보스꼬는 교황의 뜻에 순종하여 제승권을 갖는 자기 대리자로 돈 루아를 임명했다. 이 것은 1884년 11월 27일자 훈령에서 레오 13세 교황의 정식승인을 받았다.
돈 보스꼬는 이 결정을 모든 사람들에게 곧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고 평의회 의원들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돈 보스꼬는 그처럼 중대한 문제를 경솔하게 결정하지 않았다. 또 교황성하께서도 즉각 순종하라고 명령하시지도 않았다. 그 동안 돈 보스꼬는 돈 루아가, 활동의 범위를 넓히고, 돈 보스꼬가 몸이 약하기 때문에 그를 대신한다고 선언하면서 경험을 통하여 돈 루아를 준비시키고저 했다. 돈 보스꼬는 이렇게 해서 수도회의 다른 회우너들도 자기 대리자를 점차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다. 이를 테면 돈 보스꼬가 과거 16년 동안 이행하던 고백 성사를 돈 루아가 대신 맡아 집행하는 것을 다른 회원들은 보았다. 돈 루아는 가끔 최고 평의회의 의장이 되었다. 돈 보스꼬는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돈 루아에게 보냈다. 마지막 행동으로써 돈 보스꼬는 시칠리아 섬과 중부 이탈리아에 있는 지부에 돈 루아를 특별 시찰자로 보냈다.
1885년 9월 24일, 돈 보스꼬는 그 이상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최고 평의회 의원들을 소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돈 보스꼬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이제 지쳐서 내 대리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돈 보스꼬가 이행하던 일을 점차로 물려받고 수도회의 복지를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위임 받을 총대리에 관한 것입니다. 총대리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돈 보스꼬와 회원들의 충고를 항상 받을 것이고 또 책임을 받아들이에 있어서 수도회를 위하서 일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기 때문에, 내가 죽은 후에 아주 작은 질서도 변경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대리자는 우리의 전통이 지지를 받으리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 전통은 규칙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전통은 내가 죽은 다음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우리를 따라오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스란히 보존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총대리는 돈 루아가 될 것입니다. 돈 루아는 총장의 역량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 지원자들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서기 선택문제며 또 상임위원으로서의 능력 등등을 지니고 있습니다.” -
12월 8일, 돈 보스꼬는 모든 지부에 서신을 발송하여, 대리를 임명하는 이유를 거듭 말했다. 자기에게 늘 하던 대로 대리자에게도 신뢰하고 기꺼이 순종하기를 모든 아들들에게 호소하면서 끝을 맺었다.
나이 48세의 돈 루아가 모든 권위 계승권을 가지고 돈 보스꼬의 대리자가 되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은 몇해 전, 루아가 돈 보스꼬의 대리자로 공식으로 제의되었을 때 이미 관련을 가졌었다. 돈 보스꼬는 성장하는 수도회에 대한 그의 생각과 희망과 두려움을 돈 루아가 이해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들 두 사람을 더욱 가깝게 하는데 이바지했다. 돈 루아 측에서 볼 때, 그는 수도회를 이끌어가야 할 책임을 지고 있고 또 돈 보스꼬의 인격을 성공시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돈 보스꼬의 친근한 뒷받침을 더욱 갈망했다. 돈 보스꼬가 남의 도음이 없이는 걸어다닐 수 없을때, 돈 루아의 팔에 의지하면서 운동장을 지나가는 것을 사람들은 보았다. 여기서 사람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권위를 넘겨주는 문제보다도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돈 루아에게는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 그가 부총장이었을 때는 아주 엄격했다. 이것은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20년 간 그는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며,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고 바로 잡으며, 질서를 요구하고 남용을 삭제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러한 과업으로 해서 루아는, 돈 보스꼬나 다른 장상들이 그들의 과업으로 해서 루아는, 돈 보스꼬나 다른 장상들이 그들의 과업을 이행하듯 돈 보스꼬의 뒤를 이어받는 그 순간부터 방법 전체에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고 두란도 신부는 말했다. 그는 보다 아버지 답고 인자했으며, 접근하기가 쉬워졌다. 그의 여러 가지 특성 때문에 그를 높에 평가하던 이들은 이제 애정이 넘치는 아버지로 그를 보기 시작했다.
수도회의 옛 회원들은 새로운 돈 루아로 보기 보다는, 돈, 루아는 돈 루아이지만 그 동안 감추어져 있던 돈 루아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돈 루아는 이제 빛을 나타내기 시작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미라벨로의 지부장이었던 돈 루아, 공동체와 소년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나, 그가 맡은 직책으로 인해서 20년 간 숨겨있던 돈 루아가 빛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해 돈 보스꼬는 또 여행을 떠나야 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이유는 채무를 갚기 위해 돈을 얻으려는데 있었다. 이번엔 스페인으로 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자기의 계승자를 동반하여 그로 하여금 은인들 및 협력자들과 안면을 가짐으로 자기가 즉은 다음 그들과 접촉하기를 바랬다.
돈 보스꼬와 돈 루아가 스페인 세관에 도착했을 때 흥미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돈 보스꼬는 세관원의 질문에 이탈리아어로 대답했으나 돈 루아는 한 걸음 나서서 스페인어로 대답했다. 돈 보스꼬는 깜짝 놀라서 바라 볼 뿐이었다. 수속이 끝난 다음 돈 보스꼬는 돈 루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돈 루아, 나는 당신이 스페인어를 하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언제 그 말을 배웠습니까?”
“저는 사실 스페인어를 모릅니다” 하고 돈 루아는 공손히 말했다. “신부님께서 나를 스페인으로 데리고 가신다고 하셨을 때 몇 마디를 배우려고 결심했다.
한 살레시안은, 돈 루아가 돈 보스꼬의 의견을 듣지 않고 처음으로 한 행위라고 해석을 달았다! 돈 루아는 떠나기 며칠 전에 값이 싼 스페인어 문법책과 스페인어 책을 들고 - 밀로의 주교가 쓴 “돈 보스꼬와 그 업적” ( Don Bosco y sun obra )과 “준주성법” -을 혼자서 공부한 것 같다. 돈 루아가 스페인어로 설교한 것을 들은 스페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그 짦은 기간에 그가 말하는 몇 마디 이상의 스페인어를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를 여행하는 동안 돈 루아는 돈 보스꼬를 크게 도왔다. 돈 보스꼬는 비록 몸이 쇠약했지만 그를 보려고 밀고 밀치는 군중과, 설교하는 성당으로 몰려오는 군중을 참고 인내해야했다. 수 많은 군중은 돈 보스꼬를 보고 그의 말을 들음으고 만족하지 않고 자기들 손으로 돈 보스꼬를 만지거나 로사리오나 메달, 또는 기타의 성물을 그의 몸에 대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돈 루아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전에 군중들이 돈 보스꼬의 수단 자락을 잘랐듯이 이번에는 자르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돈 보스꼬는 들뜬 군중들의 심리 상태와 자기에 대한 그들의 너그러운 마움씨를 보고, 웃으면서 이 모든 것을 참았다. 돈 루아 만이 돈 보스꼬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그 해에 돈 루아는 돈 보스꼬 참석하에 발살리체에서 총회를 개최했는데, 돈 보스꼬와 돈 루아를 제외한 모든 회원들이 다시 선출되어야 했다. 돈 루아는 총장의 희망대로 자기의 직무를 수행했다. 뜻밖에도 총회에서는, 선출된 회원들을 마음대로 바꾸거나 혹은 원하는 직책에 다시 배치할 권한을 돈 보스꼬에게 드리기로 만장일치고 가결했다. 4월 20일 돈 보스꼬가 마지막으로 로마로 여행할 때 돈 루아도 따라갔다. 돈 보스꼬는 한번 더 프랑스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돈 보스꼬는 예수성심께 봉헌된 새 성당 축성에 참석하기 위하여 로마로 떠나야 했었다.
돈 보스꼬의 건강도 좋지 않았지만 돈 루아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루아는 온 종일, 그리고 대부분의 밤을 돈 보스꼬 곁에서 지냈다. 방문자들이 너무 많아 돈 보스꼬는 주요한 방문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추기경들, 왕손들과 귀족들이 돈 보스꼬를 만나러 무리지어 왔다. 여러 신학교, 단체, 학교에서는 돈 보스꼬가 와서 축복해 주기를 희망했다. 모든 일이 원만하게 되어 갔으며 될 수 있는 한 돈 보스꼬가 덜 시달리도록 돌보는 것은 돈 루아의 임무였다. 돈 루아는 너무나 시달려서 어느 날 아침 미사를 준비하던 중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침 제의방 책임자가 돈 루아를 붙잡아 쓸어지지는 않았다. 돈 루아는 자기 바응로 옮겨지자 곧 의식을 잃었다. 돈 루아의 창백한 모습을 보자 제의방 책임자는 겁에 질려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돈 루아의 이마와 손에 강한 초를 사용하여 의식을 회복시켰다. 돈 루아는 정신이 들자 일어나 자기를 도와준 분들에게 감사드렸다.
“어제 저녁에 마신 커피 때문입니다.” 하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미사를 봉헌하러 내려갔다.
루아는 돈 보스꼬의 비서 일을 하고 있는데, 초라한 옷차림에 목발을 한 사람이 옆 방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어딜 가세요?” 하고 루아가 물었다.
“돈 보스꼬를 뵈러 갑니다” 그 사람은 공손히 대답했다.
“약속이라도 있었나요?”
“아닙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닙니다. 나는 돈 보스꼬를 뵙고 싶습니다.”
돈 보스꼬를 만나기 위해 급한 일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우선권을 주었지만, 돈 루아는 그 사람의 난처한 입장과 겸손하고 성실한 마음에 감동되어 잠시 동안만이라도 만나보시라고 돈 보스꼬에게 청했다.
그 사람은 돈 보스꼬를 만나보고 갔다. 그 사람이 돈 보스꼬를 만나고 간다음 돈 보스꼬는 돈 루아를 보러왔다.
“그 가난한 양반은 내가 로마 왕손들 한테서 받은 것 보다도 훨씬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라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성당 축성식이 있던 날 저녁, 그들은 레오 13세 교황을 알현했다. “당신이 수도회의 대리자인 돈 루아요?”하고 교황성하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일을 하고 창립자의 정신에 성실하시길 하라오” “성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어려서부터 저희들 자신을 바친 사도직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자 합니다.”하고 루아가 말씀드렸다.
그리고 살레시안들이 성취해 놓은 많은 사업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돈 보스꼬는 살레시안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 하기보다는 절제잇게 이행하라고 충고해야한다고 했다.
“사실입니다. 절제는 모든 것입니다. 단체는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하고 성하께서는 말씀하셨다.
돈 루아는 이렇게 말했다. “성하, 우리는 성하께 순종하기로 준비돼 있습니다. 하지만 창립자 자신은 쉬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보고는 많이 쉬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돈 보스꼬입니다. 그는 아주 나쁜 모범을 저희들에게 보여 줍니다!”
1887년 3월 16일, 예수성심 새 성당이 축성된지 이틀 후, 돈 보스꼬가 도움이신 마리아 제단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여러 번 어떤 큰 감격에 사로 잡히는 듯 한 것을 루아는 알아챘다. 돈 루아가 미사 때의 일을 물어보자, 돈 보스꼬는 미사를 드리는 동안 자기가 9살 때 꾼 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동물로 변한 소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가르쳐 주신 성모님의 꿈을 꾸었다. 성모님의 가르쳐 주신 부드러운 방법을 취함으로 돈 보스꼬는 소년들을 순진한 어린 양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것이다. 동시에 돈 보스꼬는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성모님은, “때가 오면 모든 것을 알아 듣게 된다”고 하셨다.
“6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모든 것을 알아들었다”고 돈 보스꼬는 말했다.
영원한 도시 중심에 자리잠은 예수성심 성당을 축성함으로 정상에 이른 지금 돈 보스꼬의 일생의 과업은 완성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이 오라또리오로 돌아온 다음, 돈 루아는 그들을 대신하여 협력자들의 재 일치를 위한 회합을 가졌다. 루아는 예수성심 새 서당에 대해 숨은 이야기를 그들에게 했다. 로마의 인구가 격증함에 따라, 교황성하계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신앙심 없는 세력의 희생이 될 위험속에 있는 가스또로 쁘레또리오 지역에 성당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셨다. 본래의 계획을 약간 늦추고 바꾼 다음 교황은, 학교와 기타의 부대시설을 갖는 새 성당 건축의 짐을 돈 보스꼬에게 지으라고 했다. 그리고 교황은 그 성당을 예수성심께 국가의 이름으로 봉헌 성전이라고 선언했다. 이제 성당은 봉헌 되었으나 아직도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돈 루아가 말하는 동안 사람들은 제단 가까이 의자에 앉은 돈 보스꼬를 바라봤다. 회합이 끝나고, 돈 보스꼬가 어떻게 몸을 가누는지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돈 보스꼬는 제의실로 걸어가질 못했다. 돈 보스꼬가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성전에 계신 것도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돈 루아는 모든 노력을 다해 돈 보스꼬의 건강을 오래 지속하려고 심혈을 기울렸고, 모든 기회에 돈 보스꼬를 대신했다. 위대한 가톨릭 저널리스트이며 번호자인 레옹 하르멜이 인솔한 9백병의 프랑스 순례자들이 로마로 가는 길에 또리노에 머물러 돈 보스꼬의 축복을 청했다. 돈 루아는 그들 순례자들이 식사하는 식당에로 돈 보스꼬를 데리고 갔다. 돈 보스꼬는 그들에게 인사했다. 또 그해에 돈 보스꼬가 풀리쪼에서 24명의 수련자들에게 수도복을 입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는 내가 이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 루아가 나를 대신할 것입니다.”
돈 루아가 다른 사람들이 돈 보스꼬를 극진히 돌보았지만 그는 급속히 쉬약해 갔다. 예수성탄 전날 깔리에로 주교는 마지막으로 빠다고니아에서 돈 보스꼬에게 봉성체를 모셔다 드렸다.
정월 초에 돈 보스꼬는 돈 루아를 자기 방으로 불러 오랫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골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라또리오와 수도회의 선익을 논했을 것이다.
1월 25일, 돈 보스꼬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29일부터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죽음이 가까워 옴을 확신했다. 자기의 건강이 회복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내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고 되풀이 말했다. “아무 소용도 없어요. 나는 영원한 나랄를 향해 갑니다. 나는 천국에서 내 아들들을 더욱 잘 도와 줄 수 있기 때문에 난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하느님께서 그에게 건강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돈 보스꼬에게 청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아니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하십시오”했다.
그믐 날, 새해에 소년들에게 줄 표어를 돈 루아가 묻자, “영성체를 자주하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두텁게 한다”라고 돈 보스꼬는 대답했다.
그러나 살레시안들에게는 좀 다른 표어를 주었다. - 격려와 희망과 사랑에 대한 휼륭한 메시지.
1월 31일, 돈 보스꼬는 단말마의 고통으로 들어갔다.
돈 루아는 중백의와 영대를 가져다 입혔고, 다른 장상들과 소년들을 불렀다. 살레시안들과 평신도들로 방이 꽉 찼다.
4시 30분, 대성당에서 [ 삼종 ] 소리가 울려왔다.
4시 45분, 마지막 숨결이 멎었고, 돈 보스꼬는 이 세상을 떠났다.
VII. 돈 보스꼬 가신 뒤
돈 보스꼬가 세상을 떠난 지금, 수도회를 위해서나 수도회의 새 총장을 위해서나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척되어야 했다. 그러나 장상들이 예기치 못한 뜻 밖의 일로 아주 진기하고 위험한 성격을 띤 어려움이 생겼고, 이들 어려움은 돈 루아의 위치 뿐 아니라, 수도회의 존재도 위협했다.
첫째 어려움은 돈 루아의 계승과 관련해서 생겼다. 돈 루아를 돈 보스꼬의 대리자로 한, 1884년 11월 27일자 훈령은, 문제에 대한 성청의 유권적 선언에 불과했다. 그러나 장례식을 치룬 다음 장상들이 그 훈령을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돈 루아를 돈 보스꼬의 대리자로 확인한다는 것은 구두 ( 口頭 ) 에 불과했고, 그 훈령에 관해서는 서면으로나 구두로나 언급된 바가 없었다. 돈 보스꼬를 계승할 자신의 자격에 관해서 이미 신중한 의혹을 품고, 돈 루아는 양심이 무거워졌고, 돈 보스꼬를 계승할 권리에 큰 의심을 품게 되었다.
돈 루아는 성청에서 분명하게 승인하지 않는 한, 그리고, 승인할 때까지는 돈 보스꼬의 계승자로서 주제 넘게 나서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 관계되는 한 그 자리에 자기보다도 더 자격이 있는 회원을 주선하기를 더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히 말했다. 알리몬다 추기경은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로마에 의뢰하라고 충고했다. 그는 2월 8일자 서신으로 로마에 의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교황성하, 저 자신의 약함과 필요한 능력이 결핍되어 있음을 고려하여 저 대신 이 책임을 맡기에 보다 적합한 사람을 생각해 주시고, 총장이라는 힘든 직책에서 저를 면제해 주시기를 성하께 청합니다. 그리고 저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제게 맡겨진 직책 내에서 수도회를 위해 힘껏 일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 서신의 어조가 돈 루아에게는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과 그의 지지자인 깔리에로에게는 결코 훌륭한 것이 못됐다. 정력적이고 솔직하며, 충실하고 또 지금은 루마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마치고 있는 깔리에로는 문제를 강력한 방법으로 자신이 취급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장상들의 뒷받침을 청하고 또 그 뒷받침을 받은 후 깔리에로는 성성 후원자인 추기경에게, 자기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었다고 서신을 보냈다.
깔리에로는 이렇게 썼다. “ 이 서신에 서명한 우리는 이미 돈 보스꼬 자신이 대리자로 제의하고 지명한 돈 마카엘루아를 총장으로 성하께서 확인 해 주신다면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우리는 선거자들의 생각 뿐 아니라 수도회 전체의 생각도 잘 알고 있으므로, 성하께서 돈 미카엘 루아를 총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소식을 정중하고도 진실한 기쁨을 지니고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성하께 보증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규칙에 따라서 총장을 또 선출한다해도 돈 루아가 만장일치로 선출되리라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라는 것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돈 보스꼬의 의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돈 보스꼬는 돈 루아를 특별히 심임했고 자신의 오른팔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돈 루아의 뛰어난 자질과 보기 드문 통솔력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고 잊을 수 없는 창설자요 아버지인 돈 보스꼬 밑에서 돈 루아가 아미 보여준 바 수도회 문제를 다루는 비범한 능력을 존중합니다.”
첫째 어려움과 관련된 둘째 어려움은 로마 교황청 내에서 대부분 토의된 것들이었다. 대단히 좋기는 하나 살레시안들은 혈기왕성하여 수도회의 급속한 성장과 두드러진 생명력을 열정적오로 보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오랜 경험을 통하여 그와 같은 젊은이들과 그와 같은 혈기 왕성한 수도회가 급속히 성장했고 또 교회 역사에 아무런 방향도 증가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것을 보았다. 적어도 그들은 이 모든 성공을 천재적이며 성스러운 한 인간, 비범한 돈 보스꼬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돈 보스꼬가 세상을 떠난 지금에 와서 누가 그를 대신할 것인가? 누가 그를 대신하려고 희망하는가? 살레시오 회우너들 중에는 그만한 책임을 맡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바띠깐황은 그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교황은 그를 잠깐 만났고 또 그런 사람이 돈 보스꼬를 대신할 수 있을까하고 의심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돈 루아를 몰랐다. 그것은 돈 루아는 자신의 진출 문제만은 뻔뻔스럽게 내세우는 일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루마에서는 살레시안들이라고 불리우는 이 새로운 집단을 다소 비슷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기성 수도회와 통합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신중히 토의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로마에는 살레시안들을 위해서 그들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돈 보스꼬와 가까운 친구인 포싸노의 에밀리안 마나꼬르다 주교였다. 그는 교황청에서 일한게 오래되었으므로 그곳 일에는 정통하였다. 그는 살레시안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돈 루아와 수도회에 관한 사실을 회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성청 안에서 여기 저기 뛰어다닐 책임을 과감하게 떠맡았다.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 주요한 인물 중의 하나인 유력한 추기경에게 접근했다. 그 추기경은 교황성하의 대리자이며, 주교 수도자 성성 장관이었다. 그는 살레시안들을 다른 수도회와 통합할 것을 찬성한 사람이다.
살레시안들을 웅변적으로 변론하는 그의 말을 듣고 추기경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살레시오회가 장구한 세월을 지속할 수 있다고 정말 믿고 있습니까? 파산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려운 시대라는 것을 당신이나 나나 잘 알고 있습니다.”-
“각하, 나는 그 수도회가 여러 세기동안 지속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돈 보스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살레시안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나는 그들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숨기지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보증합니다.” 하고 주교는 대답했다.
“당신이 그들의 장래를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들을 보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들의 일치, 그들의 능력, 그들의 인간성, 그들의 장래 전체를 보증합니다.” -
“사실이 그러하다면, 나는 그들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을 따라서 행하겠습니다.” 하고 추기경은 결론을 내렸다.
살레시안들의 후원자인 추기경이 교황성하께 돈 루아과 깔리에로의 서신을 보여드리자, 교황은 그 편지에서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를 보여주었다. 1884년 11월 27일자 훈령을 확인한 살레시오 회의 총장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돈 루아의 계승권 문제와 살레시오 회의 존속 문제가 해결되었다.
장상들 외의 살레시안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1888년 3월 7일자 회에서 최고 평의회는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것을 살레시안들에게 알려주고 관계문서의 사본을 동봉했다.
돈 루아가 교황청 직원들을 방문하고 교황성하를 알현함으로 모든 일이 끝을 맺었고 온 세계에서 축하의 편지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관구장들, 지부장들, 회원들을 비롯하여 모든 살레시안들로부터 편지가 쏟아져 왔다. 교계 ( 敎階 ) 로 부터, 성직자, 수도자들로부터 편지가 왔다. 협력자들과 지체 높은 은인들과 겸양한 은인들로부터도 그러나 루아에게 가장 큰 기쁨을 안겨준 편지는 살레시안 수녀회 총장인 가타리나 다게로가 보낸 편지였을 것이다. “큰 슬픔 중에도 나는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친애하는 신부님께 말씀드립니다. 신부님을 총장으로 모시는 것은 나와 우리의 평의회 및 모든 수녀들에게는,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안과 기쁨이 됩니다.”라고 편지에 적혀 있었다.
“총장의 과업은 적지 않은 희생을 신부님께 요구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적절히 갚아주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지부장들과 수녀들에게 신부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경하며 신부님께 대해서 자녀다운 자세를 갖도록 강조함으로써 우리를 지도하시는 신부님의 짐을 힘껏 덜어들이기로 약속합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신부님을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후원자, 우리의 충고자로 생각하겠습니다. ............. 이 서신을 통하여 나와 우리 수녀회는 신부님이 총장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신부님께 자녀답게 온전히 순종할 것을 약속드리며, 신부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생각하시기를 청합니다.”
돈 루아는 이제 교회의 승인을 받고 살레시안들과 수녀들 및 협력자들, 즉 살레시안 가족 전체의 뒷받침을 확신하고 총장으로서 직무를 착수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수도회의 장래 운명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더구나 이제는 그를 위압하는 권위나 세력도 없었다. 따라서 수도회 전체가 그리고 특히 오라또리오에서, 말하자면 그가 자신의 새로운 출세를 어떻게 추진시키느냐를 보기 위하여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돈 루아가 이행한 방법은 그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특징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것은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돈 보스꼬가 죽은지 거의 1년 동안 각광을 피했다. 그는 총장으로서 첫 해를 보내면서 어떤 과감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돈 보스꼬의 그늘 속에서 그처럼 오랫동안 생활한 그가 수도회에 독자적인 특징을 부과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첫 해는 숙고와 정적( 靜寂 )의 해가 될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돈 보스꼬의 죽음을 슬퍼하는 느낌이 있었다. 격렬하면서도 인자하고, 아버지답고 이해심이 많은 돈 보스꼬의 인격은 쉽사리 교체되지도 않고 또 잊혀지지도 않았다. 그 밖에 돈 보스꼬와 교황성하께서는 2년 동안 중대한 새로운 기획을 시작하지 말고, 새로운 학교를 개설하거나 설립물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나이 어린 수도회는 정리와, 인적자원에 보다 훌륭한 준비, 그리고 이미 활약하고 있는 지부의 보다 완전한 간부 육성에 주의를 기울였다. 돈 루아 역시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관찰하고 숙고할 기간을 갖기를 원했다. 지난 40년 동안 그는 돈 보스꼬가 결정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만 했다. 끝으로 지난 몇 해 동안에 누적된 막대한 부채를 어떻게 지불하느냐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 채무는 주로 로마에 있는 예수성심 대성당 건축에서 오는 것이었다. 예수성심 성당 건축 채무만해도 6십만 리라나 되었다. - 당신 나이 어린 수도회로서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 채무는 돈 보스꼬에게도 알리지 않은 액수였다. 그들은 돈 보스꼬에게 고통을 더해주기를 원치 않았다. 돈 루아와 기타 장상들은 이 채무와 기타의 책임 - 예를 들면 선교 개척 여행 - 에 크게 마음을 쏟았다. 돈 보스꼬가 살아있을 때는 어떻게든 일이 잘 되어 가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돈 보스꼬가 세상을 떠났으니....... 뜻 밖에도 반 성직자 신문에 의해서 주목할 만한 소문이 이 냉혹한 상황 속에 끼어들게 되었다. 돈 보스꼬가 죽을 때, 그 후제자인 돈 루아에게 큰 돈을 남겼다고 신문에서 떠들어댔다. 이러한 채무를 어떻게 갚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미 돈 루아의 어깨에 무거은 짐으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허튼 소문으로 기부금이 끊어 지지나 않을까 몹시 근심했다. 그는 “살레시오 회보” ( 수도회의 공식 출판물 )에 그 사실에 관한 기사를 게재했다. 사실 돈 보스꼬가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 오라또리오에는 빵 제조업자에게 지불할 만한 돈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수도회의 일이 돈 보스꼬가 세상을 떠나기 전과 같이 잘 될 것인가 하고 의심했다. 돈 보스꼬의 대해서 돌아가신 한달만에 추도미사 설교를 한 알리몬다 추기경은 살레오 회원들과 함께 저녁을 들기로 했다. 식사 때 그는 돈 루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돈 루아, 이제 돈 보스꼬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전처럼 계속 당신을 도와주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추기경이 묻는 취지를 잘 알아들은 돈 루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각하, 돈 보스꼬는 천국에서도 가만히 지내시지는 않으시리라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돈 보스꼬께서 돌아가시던 그날, 우리는 메닐몽땅에 있는 새 지부를 구입하기 위해 파리에서 3만 프랑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한 은인이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돈을 기부했다는 전보가 프랑스로부터 왔습니다. 우리는 그 돈을 파리에 있는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돈 뭉치들 펴보니까 꼭 3만 프랑이었습니다.”
돈 루아에게는 돈 보스꼬처럼 미소지으면서 돈을 끌어내는 재능은 없었지만 아주 필요한 기금을 늘리기 위한 성공적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그 해 여름 지부장 피정이 있었을 때, 돈 루아는 지부장들에게 “돈 보스꼬가 사망한 후 기부금이 줄어들다가 요즘 몇 개월 사이에 다시 늘기 시작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는 돈 보스꼬처럼 재정에 관한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고 겸손되이 말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 돈 보스꼬가 지녔던 신뢰만큼 자기도 갖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남 아메리카에 있는 깔리에로에서 “우리의 궁핍은 엄청난 것입니다. 프랑스에 있는 지부들은 큰 곤경중에 빠져있고 나는 그들에게 매우 시급한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 써보냈지만, 한편 로마에 있는 살레시오 재무책임자에게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심뢰를 설명하는 말을 써보냈다. 재무책임자는 기금이 부족해서 예수성심 대성당에 딸린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소 일을 이미 중지했다. 재무책임자는 이제는 활동을 다시 계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돈 루아에게 허락을 청하자, 돈 루아는 50명의 가난한 지원자를 받아들이는 조건하에 승낙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끝을 맺었다.
하지만 그 해에도 두 차례에 겇쳐 선교 개척대를 해외로 파견했다. 그것은 작은 규모의 것이었다 - 첫 번째는 6명의 선교사를, 두 번째는 10명의 회원들과 6명의 수녀들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초에 ( 1889년 1월 7일, 돈 루아는 30명의 회원들과 20명의 수녀의 대규모의 개척선교사들을 해외로 파견할 수 있었다. )
세 차례에 걸친 개척 선교사들에게 든 비용은 전부 2십만 리라였다. - 아주 큰 액수였다. 돈 루아는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할 수 있었던가? 첫째, 그는 1887년 11월 4일자로 돈 보스꼬가 선교 지원을 호소하면서 보낸 회서를 여러 나라말로 번역하여 널리 뿌렸었다. 그리고 돈 루아는 이탈리아의 협력자들에게 호소하기를 그들의 기부금이 해외에 있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를 지적했다. 이 두가지 호소는 선교 개척단에 맞는 훌륭한 선전으로 크게 힘을 입었고 아주 성공적이었다.
돈 보스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그를 잘 아는 사람은 그의 시성 ( 諡聖 )을 벌써 생각했다. 물론 돈 루아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교황청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돈 보스꼬의 시성 준비를 시작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교황성하께서 친히 돈 보스꼬의 시성을 돈 루아에게 촉구했다.
장례식이 있던 날, 장례식이 끝난 다음 돈 루아는 총회 회원들을 소집하여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훈령을 낭독해 주었다. 이 훈령에 시성 조사 절차를 위해서 무엇을 이행하고 무엇을 이행하지 말아야 하는지 규정돼 있었다. 그래서 그 이튿날, 돈 루아는 고인의 교구에서 시작하여 로마와 접촉하기 위해서 또리노의 대주교에서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수도회의 후원자 추기경에게 충언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서 돈 루아는 로마로 가서 몬시놀 까쁘라라 검사를 만나 살레시안들이 어떻게 시성 준비를 진전시킬 것인지 그 방법을 논의했다. 물론 몬시놀은, 돈 보스꼬에게 유리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또 돈 보스꼬가 죽은 다음 그의 전달로 얻은 기적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라고 충고했다. 돈 루아는 이 모든 것을 총회에서 언급했다. 총회는 즉시 시성조사 첫 단계의 책임자로서 요한 보네띠 신부를 지명했다.
돈 루아는 총장으로서 보내는 첫 번째 회서에 교황성하를 알현한 이야기를 포함시켰다. 그는 돈 보스꼬의 시성 조사를 위한 자료 수집 문제를 꺼냈고 회원들이 협조할 것을 당부했다. “대리자 추기경은 나와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돈 보스꼬의 시성절차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했다는 것을 돈 루아는 회서에 기록했다.
돈 루아는 자기의 새로운 직책을 떠 맡는 첫 단계로 자신이 오라또리오의 총장으로서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앞으로 몇 해 동안 오라또리오는 그가 활동하는 바탕이 될 것이고 그것이 센타가 되어 거기서부터 그의 영향이 발전될 것이며, 거기서부터 그는 수도회 전체를 지도할 것이다. 돈 루아가 1888년에는 오라또리오를 거의 떠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런데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돈 보스꼬가 보다 주요한 축일을 보낸 보르고 산 마르띠노와 같이 가까이에 있는 곳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가 자주 간 곳은 발살리체였다. 그는 돈 보스꼬의 무덤 앞에서 오랫 동안 기도했다. 그 해는 돈 루아에게도 슬픈 해였다.
돈 보스꼬가 맡아 일해오던 직무를 떠맡은 후 돈 루아는 아주 작은 일로부터 시작해서 차차로 완성했다. 예를 들면, 부총장으로 있을 때는 손을 수단 소매에 넣고 오라또리오 운동장을 가로지르면서 빈번하지 않은 길을 따라서 이곳에서 저것으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그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총장으로 임명되던 날부터는 그 행동을 바꾸었다. 이제 그는 오라또리오의 기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지 않고, 또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던 돈 보스꼬가 없기 때문에, 그는 소년들 및 회원들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며 농담을 교환하면서 휴식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미라벨로를 한번 찾아가 보았다. 그는 그 곳에서 소년들과 함께 운동장을 걸을 때 소년들은 그의 긴 손가락을 잡고 따라 다녔다.
하지만 그에게 변화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었다. 휴식 시작이 끝난 것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그는 곧 대화를 중단하고 조용히 옆을 따르던 자들을 떠나 자기 사무실로 갔다.
그는 아침에 누구보다도 먼저 묵상을 시작한다. 묵상이 끝나면 2시간 동안 소년들에게 고백의 성사를 준다. 돈 보스꼬가 여러 해 동안 앉아서 성사를 주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성사를 준다. 오전 중의 나머지 시간은 사무실에서 찾아오는 사람을 마지하면서 보낸다. 오후 시간도 대개 비슷하게 보낸다. 저녁 때 밤 기도가 끝나면 침실로 간다.
돈 보스꼬가 죽은 후 돈 루아는 아무것도 변경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돈 보스꼬 방 옆에 있는 작은 방을 계속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 신임 부총장한테 자기방을 내주어야 하기 때문에 돈 보스꼬의 방으로 옮기게 됐다. 그러나 돈 루아는 돈 보스꼬가 임종한 방에서 잠자지 않고 전에 돈 보스꼬가 잠자던 방을 사용했다. 그러나 돈 보스꼬가 사용하던 침대에서 잠자지 않고, 침대로 변경시킨 소파에서 잠잤다. 그렇지만 그 소파도 별로 사용치 않았다. 돈 루아의 방을 돌보던 발레스또라 수사는 소파가 전 잘 정돈해놓은 대로 있는 것을 자주 발견했다.
그리스도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축일 축제가 시작되면 보통으로 협력자들에게 강론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해에는 깔리에로 주교가 예절을 주재했다. 깔리에로 주교는 그가 나가있는 빠다고니아 선교지방의 기금과 인원을 얻기 위하여 유럽에 와 있었다. 이런 의식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성직자 석에는 사랑스러운 돈 보스꼬의 모습이 보였었다. 그러나 이 해에는 그 자리에 누가 앉을까 하고 협력자들은 잔득 호기심을 가졌다. 협력자들은 호리호리하고 금욕적이면서도 평온하고 자애가 넘치는 돈 루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돈 루아가 자리에 앉기 전에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그날 저녁 협력자들은 늘 돈 보스꼬 둘레에 모였듯이 돈 루아 둘레에 모였다. 다음 날 아침 미사 후에는 돈 루아의 축복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제 기반은 잡혔다. 돈 루아는 총장으로서 보내는 첫 번째 회서에서 온 세계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분명히 알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친애하는 나의 아들들, 이것은 내가 재직 중에 따라 갈 계획의 전망입니다.
- 돈 보스꼬께서 시작하신 사업을 유지하고 발전시킵니다.
- 돈 보스꼬께서 가르쳐 주시고 실천하신 방법을 힘써 따라갑니다.
- 언행에 있어서 돈 보스꼬께서 주신 모범을 연구하고 본받습니다.
VIII. 동 분 서 주
시사 만평가는 1889년부터 1909년 사이의 돈 루아의 생활을 묘사한 간단한 그림으로 잘 요약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화가는 갈색 머리칼에 가냘픈 몸매를 하고, 뒤꿈치까지 내려오는 닳아빠진 코트를 입고, 윗 부분에 조각을 댄 구두를 신고, 약간 푸르스름한 색이 도는 로마식 모자를 쓴 루아를 그린 것이다. 루아는 왼손에는 검은 색 가죽 가방을 들고 오른 손에는 3등석 기차표를 쥐고 있다.
돈 루아는 매년 여행했다. 대체로 말하면, 그는 한 봄에 여행을 시작해서 3,4개월 후에 돌아왔다.
이 여행 중에 그는 18개 국을 순방했다. 프랑스를 일곱차례, 벨기에와 영국을 네차례, 스페인을 세차례, 홀랜드, 스위스, 독일, 폴란드, 오지리, 포르투칼, 터키, 팔레스띠나 이집트를 두차례, 그리고 희랍, 시리아, 튀니지, 알제리아를 한번씩 방문했다.
그가 이탈리아 국내를 여행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위에서 언급한 만화는 유머의 특색을 지니고 있으나, 돈 루아가 여행 중에 지낸 생활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3등 객차로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 것은 즐거운 여행은 못된다. 온 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여행하고, 때로는 24시간 잠도 자기 못하고 여행한다는 것은 호화로운 여행이 아니다. - 그는 다음 날 일할 수 있도록 밤에 여행을 했다. - 그는 다음 날 아침 미사에 대고 회원들의 아침 묵상을 지도하기 위하여 곧잘 밤에 여행했다. 수도회의 선익이 요구할 경우에는 언제나 이에 응하였다. 새로운 지부의 개설이나 오라또리오의 개설, 정초식, 병든 은인 방문, 회합과 피정 지도등에 응하였다.
연륜이 많아짐에 따라 그와 같은 여행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잠 자리, 음식, 기후의 갑작스런 변화 .... 이 모든 것은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에게 희새응ㄹ 요구했다. 그 밖에 그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하였기 때문에 한층 곤란과 불편을 느꼈다. 그의 나이 60세가 되었을 때, 다리는 정맥노장 ( 靜脈怒張 )으로 부러오르고 상처 투성이 였으며, 시력이 좋지 않고 심장은 쇠약해졌다. 그러나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주저치 않고 여행을 떠났다. 돈 보스꼬는 돈 루아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훌륭한 장상은 언제나 여행 가방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돈 루아는 월등히 뛰어났다. 그가 여행 가방을 한 옆으로 밀어 놓은 것은, 다만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부터 였다.
이 여행 동안 그는 언제나 개방적이었다. 그를 만나고저 하는 사람이 젊은 이든 노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병자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을 다 환영했다.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업이 창설되고, 얼마나 많은 빈자들이 도움을 받았던가?
돈 루아가 여행한 가장 주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협력자들을 만나보고 그 지역에 있어서 살레시오 사업의 발전을 그들에게 알려주는데 있었다. 그는 자선사업과 선교사업에 대한 보다 큰 노력을 그들에게 촉구하고, 협력자들의 수를 증대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것에 힘썼다. 돈 보스꼬는 돈 루아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었다; “협력자들에게 대해서 아주 솔직히 하십시오. 그들이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시오. 그들이 바치는 헌금은 자선행위이며. 언젠가 그들은 그들의 해우이로 당신한테 감사할 것입니다.” 돈 루아는 대화와 충고, 이야기와 회합을 통해서 “영신의 우월성”을 돈독하게 하였다.
돈 루아가 지부를 방문한 목적은, 돈 보스꼬의 정신이 지부에 살아있게 하고, 살레시오 회원들을 방문하여 격려하며, 지역협력자들과 은인을 만나보고, 또 그의 지도와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수도회의 사무를 최후로 단안을 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돈 루아 역시 돈 보스꼬처럼 이런 방문과 모임을 가장 주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돈 보스꼬가 사망한 후, 돈 루아가 또리노시 밖을 처음 방문한 곳은 시에서 가까움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 낫싸 몸빼라또 ( 살레시오 수녀회의 본부 평의회 소재지 ), -삼삐에르다레나-알바쏘- 보르고 산 마르띠노-루-빼난고-펜자-플로렌즈였다.
9월 2일부터 7일까지 오라또리오에서 계속된 제 5차 수도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여행이 일시 중단되었다. 대부분 논의대상은 신학생들의 학구 ( 學究 )문제, 양성소, 군에서 복무하는 회원들, 신심 실천, 규칙 생활 등을 토의하고 숙고했다. 이 총회는 수도회의 복지와 발전에 관련된 모두 일에 있어서, 회원 전체가 총장에게 보다 광범위한 활동의 권한과 자유를 승낙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새 총장에 대한 신뢰심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돈 루아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또 다른 선교 개척단의 출발 의식에 참석했다. 이들은 아르헨띠나, 우르과이, 에콰돌, 콜롬비아로 떠나는 선교사들이었다.
그 해 마지막에, 보르고 산 마르띠노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사건이 생겼다. 돈 루아의 비서 중 프란치스꼬 토마세띠 신학생이 중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의 병은 점점 악화되었고 고열로 인해서 깜빡 깜빡하는 혼미 상태에 빠졌다. 돈 루아는 병자를 찾아가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축복을 내렸다. 다음 날 아침 토마세띠는 일어나, 먼저 성당으로 가고 다음에 돈 루아 사무실로 나와서 평상시처럼 일을 보았다.
돈 루아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몸이 튼튼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조심하면 오래 살 수 있을걸세. 돈 보스꼬와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지신 마리아께 감사드리게.”
후에 토마세띠는 로마성청주재 수도회 총대리가 되었고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 해 1월, 돈 루아는 여행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여행 초에 로마를 방문하고 교황성하를 방문했다. 그 때 교황께서는 살레시오회원들에게 여러 선교지를 위탁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돈 루아는 계속해서 북쪽 지역에 있는 지부를 방문하면서 협력자들의 모임을 갖고, 선교활동이 확장되고 선교지의 수가 늘어남으로 인해서, 살레시안들은 더욱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 계속 협조하고 그들을 격려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지부들을 방문하는 동안에, 즉 1890년 2월부터 5월 사이에, 프랑스, 스페인, 영국, 벨기에를 순회하였다. 물론 이것은 관광여행이 아니었다. 돈 루아는 한번도 시간을 낭비한 일이 없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그의 존재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돈 보스꼬를 도와 준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루아에게는 무엇보다도 주요한 일이었다. 그가 프랑스에서 처음 방문한 곳은 돈 보스꼬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창설한 첫 지부 - 니스에 있음 - 였다. 그는 여기서 살레시오 후원회를 찾아봤는데, 그 하나는 소년들을 후원회를 찾아봤는데, 그 하나는 소년들을 위한 후원회고 또 하나는 소녀들을 위한 후원회였다. 돈 루아는 후원회에 9일간 머물러 있었다. 그가 후원회를 방문하는 동안 보여준 인상을, 한 까뿌친수사가 요약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의 느낌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았다. “돈 보스꼬의 부활이다. 그는 제2의 돈 보스꼬다.! 그는 돈 보스꼬와 똑같이 점잖고, 견손하며, 단순하며, 위대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 그는 똑같은 기쁨의 정신을 전파한다.” 돈 루아는 그 곳을 떠나 라 나바르, 깐느, 마르세이유, 쌩 마르게릿 오베르그, 로게포르트, 쌩 시르, ........로 갔다.
쌩 시르에는 유명한 프랑스 육군사관학교가 있고 동시에 살레시오 회원들과 살레시오 수녀들의 오라또리오가 있다. 또 그 곳은 돈 루아의 축복을 통하여 특별할 은총을 얻은 곳이다.
요한 로뎅은, 1885년 돈 보스꼬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 그의 복을 통하여 특별한 은총을 얻었었다. 그 후 그는 위염 ( 胃炎 )과 축 심계향진 및 수종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귀가 먹었다. 돈 루아가 쌩 시르에 왔다는 것을 알고 그는 돈 루아를 만나러 갔다. 돈 루아는 돈 보스꼬가 아니라고 하자 “돈 보스꼬는 그의 후계자 안에 살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돈 루아가 본당에서 개최한 모임에 참석했으나 다른 때처럼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군중이 돈 루아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루아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돈 루아가 머물러있던 오라또리오로 찾아갔다.
그는 돈 루아에게 말했다. “나는 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내게 축복해 주시면 나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
돈 루아는 무릎을 꿇게 한 다음, 그를 축복했다. “당신은 병에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살레시오 협력자가 되셔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성모송과 성모찬송 ( Salve Regina )을 포함해서 몇 가지 기도를 바치라고 했다.
요한은 무려 3일간 기도했다. 3일 째 되는 날, 그의 병이 완전히 나았다. 그는 오라또리오로 가서 병이 나은 것을 이야기하고 협력자회에 가입했다.
돈 루아가 스페인으로 들어갈 때,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돈 루아는 프랑스국경을 지나 첫 번으로 바르첼로나를 방문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르첼로나의 부유한 은인 몇 사람이 바르첼로나 전 정거장인 몬까다로 돈 루아를 마중 나왔다. 깔리에로는 우뜨레라에서 개척 사업을 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살레시오 회원들을 무척 좋아했다. 그들은 몬까다에 도착해서, 돈 루아가 타고 온 기차가 멈추자 루아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1등 객차로 들어가 찾아보았지만, 돈 루아는 그곳에 없었다. 그들은 2등 객차로 가서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돈 루아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행히 그들 중에는 그곳에서 가까이 있는 사리아의 지부장인 필립고 리날디 신부가 있었다.
“아마 저기 계실 겁니다. 날 따라오십시오”하고 리날디 신부는 말했다. 리날디 신부는 그들을 3등 객차로 안내했다. 그 곳에서 영광의 손님을 그들은 찾아냈다. 그들은 기차가 움직이기 전에 1등 객차고 자리를 옮기시게 했다.
그들은 도시에 도착하자 마차에 옮겨타고 도로티 코피테아 데세라 여사의 호화로운 주택으로 향했다. 도로티 여사는 “빈자들의 어머니”로 스페인에서는 알려졌고, 1884년 사리아 실업고등학교를 돈 보스꼬와 함께 책임지고 세웠다. 도로티 여사는 바르첼로나의 빈민 지역에 살레시오 지부를 또 하나 세웠고, 이제 그 낙성식에 돈 루아를 초청했던 것이다. 도로티 여사는 그 다음 달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영원한 상급을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도로티 여사의 시복 조사준비가 시작되었다.
돈 루아는 그 곳을 EJ나 마드리드로 가서 교황사절이며 세빌레의 대주교인 스레이 추기경을 만났다. 그리고 세빌레를 떠나서 우뜨레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의 환영은 좀 특이한 것이었다.
2백명의 학생들이 돈 루아를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 돈 루아가 입고 있는 수단의 단추를 떼고 옷 가장자리 조각도 기념품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짤랐다. - 루아의 말을 듣기 위하여 밖에서 몇 시간씩 기다린 사람들도 있고,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식사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돈 루아가 에워쌌다. 지부원장은 돈 루아와 함께 있던 바르베리스 신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이 떠날 때, 돈 루아는 전에 없었던 것을 보여주었다. 즉 돈 루아는 눈믈을 흘리고 있었다.
성주간 ( 聖週間 ) 전례를 위해서 오라또리오에 잠깐 머문 다음 돈 루아는 또 다시 여행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프랑스 북부로 떠났다. 돈 루아는 도중에 리옹을 방문했다. 리옹은 포교 총회 본부였기 때문에 그들이 살레시오 선교지에 베푼 협조를 인식하고 사무총장에게 감사를 표할 의무를 돈 루아는 깨달았던 것이다. 사무총장은 돈 루아를 선교 박물관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박물관의 특수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다. 돈 루아는 살레시오회원들이 빠다고니아와 띠에라 델 푸고에서 보낸 여러 가지 물건을 보고 아주 기뻐했다.
4월 17일 아침, 돈 루아는 파리에 있는 성 베드로와 바오르 후원회에 도착했다. 돈 루아는 그 곳에 오래 머무는 동안 성모승천 성당에서 협력자들에게 강론을 가졌다. 그리고 전보다는 더욱 관대하게 살레시오회원들을 협조할 것을 촉구했다. 협력자들은 이에 관대히 응하고 후원회의 장래 발전을 위하여 토지를 구입했다. 파리에서도 교황사절은, 살레시안들이 도시의 빈민지역에서 활동하도록 하느님의 섭리가 보살펴 주심을 교황께서 하느님께 감사하셨다고 전해왔다.
그 다음 돈 루아는 런던에 머물었다. 그는 수단을 입고 로마식 성직자 모자를 쓰고 런던에 도착했기 때문에 몇 몇 사람들이 놀라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살레시오 회원들이 영국에 온 것은 3년 전의 일이었고, 아직도 어려움이 많았다. 회원들의 교회건물은 아주 보잘것 없었고, 살레시안들이 사는 지역은 더 가난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장래의 전망은 아주 희망적이었다. 그들은 주교의 호의를 받고 있었고, 본당에서 2천명의 신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 대 개가 아일랜드 사람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 그들이 경영하는 본당 학교도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경영하는 오라또리오 역시 그 특수성이 인정되고, 그 지역의 프로테스탄 어린이들도 오라또리오에 나왔다.
돈 루아는 사업 전체에 매우 호감을 가졌다. 그는 장엄한 의식을 거행하기에 알맞은 성당을 가능한한 속히 건축할 것을 계획했다. 오라또리오를 확장하고, 소녀들을 위해서 또 하나의 오라또리오를 개설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기숙학교를 개설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기숙학교를 개설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돈 루아는 1902년에 런던에 있는 살레시안들을 협조함으로 그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세운 계획을 그들이 이행할 수 있게 렵력자들에게 호소하는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돈 루아는 벨기에의 리에즈에 있는 실업고등학교 개교식을 거행했다. 벨기에는 고도의 공업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업은 일반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지역 주민들은 열정적으로 식에 참여했다. 교황사절, 주교 및 루뱅대학 부학장이 참석하여 축하를 했다. 처음부터 이 사업이 장차 벨기에 있는 살레시안들에게 영광을 안겨주리 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돈 루아는 벨기에가 사회발전에 아주 민감한 국가라는 것을 알고, 주요한 중심지를 모두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 아들들이 있는 사업이 교회와 국가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듣고 아주 만족했다. 그는 벨기에 사람들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꾸르뜨레에서 연설할 때 이렇게 선언했다. “벨기에는 국민이 전능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유쾌해서 그 분께로 돌아가는 모든 것을 맞갖은 방법으로 사랑하는 국가입니다.”
돈 루아는 파리로 와서 당시 파리 교외에 있던 리챠드 추기경을 만나려고 서둘렀다. 살레시오 농우회는 돈 루아를 환영하는 연회석에서 돈 루아 안에서 돈 보스꼬를 보고 애정을 표했으며, 또 앞으로도 계속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돈 루아는 계속해서 주요한 중심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는 빠레 러 모니알을 방문하여 예수성심께서 발현하신 제단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또 루아는 수도생활의 중심지인 유명한 끌루니를 방문해서 새로운 기초를 마련했다. 돈 루아는 밤새 기차를 타고 5월 30일, 도움이신 마리아 축일 축제에 늦지 않게 아침 일찍 오라또리오에 도착했다.
이런 여행의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그는 어떠한 인상을 받고, 어떠한 인상을 받고, 어떠한 인상을 남겼던가? 그는 첫 번 경험을 통해서 장래를 위하여 어떤 계획을 세웠던가?
돈 루아는 오라또리오 협력자들 회합에서, 그가 방문한 여러 나라에서 전반적으로 본 살레시오 사업의 발전상을 언급한 다음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어디서나 가난을 보았습니다. 또한 나는 뛰어난 정신과, 위로가 될만한 성과를 가져온 많은 사업을 목격했습니다. 수많은 가난한 어린이들이 매년 우리에게 오고, 거리의 위험을 멀리하며, 정직한 생활을 배우고, 착한 시민과 착한 크리스찬이 되었습니다. 매년 수많은 살레시안들이 영혼의 선익을 위하여 그들의 시간과 재능과 정력을 아낌없이 교회에 바칩니다. 2개월 내에 새로운 지부를 6개 설치한 선교지방과, 또 각처에서 새로운 기초 설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사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포도원 주인께서 더 많은 일꾼과 더 많은 수단방법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도록 여러분의 기도를 우리는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 루아의 여행에서, 그리고 한번도 돈 루아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돈 루아가 방문함으로 생긴 무엇인가가 또 있다. 돈 루아와 동행하던 사람들을 돈 루아가 방문함으로 생긴 무엇인가가 또 있다. 돈 루아와 동행하던 사람들이 그것을 증언했다. 그들이 친히 보고 판단한 다음, 그들은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돈 루아는 돈 보스꼬의 합당한 후계자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이 여행 중에 돈 루아는 기도와 축복을 통하여 이미 언급한 바와 비슷한 많은 은총과 특은을 얻었고 병을 고쳐 주었다. 그 중의 어떤 것은 기적이라고 할만큼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가장 두드러진 예만을 제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어느 날 알로이시오 베르실리아 신부 - 후에 중국에서 순교함 - 와 이야기하는 도중, 돈 루아는 최근에 돈 보스꼬의 전구로 큰 은총을 얻었다는 것을 말했다. 돈 루아 자신의 전구의 능력과 그의 겸손을 잘 아는 베르실리아 신부는, 돈 루아 자신의 기도와 축복으로는 큰 은총을 얻지 못하느냐고 터놓고 물어봤다.
“사실은 그런 은총을 받습니다.”하고 돈 루아는 대답했다.
베르실리아 신부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돈 루아는 말했다. “사람들이 와서 여러 해 동안 병으로 고생하는 불쌍한 여인을 축북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하여 나는 그 여인에게 축복했습니다.” “그 여인은 곧 병이 나았나요?”
돈 루아는 잠시 베르실리아 신부를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아뇨. 그 여인은 15분 후에 죽었습니다.”하고 말했다.
그 주인공은 미사자의 에바시나 질라르디 부인이었다. 그 여인은 1898년에 결혼했고, 그 이듬 해부터 중병을 앓았는데, 그 병으로 인해서 그 여인은 얼굴이 상하고 말을 못하게 되었다. 또 그 여인은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1903년 그 여인의 부모는 돈 루아에게 그 여인을 방문해 달라고 청했다. 돈 루아는 그 여인의 상황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고, 또 그 여인의 나이를 60세로 생각했는데, 사실은 31세라는 것을 알자 깜짝 놀랐다.
“부인, 당신은 하늘 나라에서 훌륭한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하고 돈 루아는 그 여인을 위로했다.
돈 루아는 고백 성사를 받겠는지 그 여인에게 물어보았다. 그 여인은 누가 그 곳에 있는지 물어보고, 거기 돈 루아가 와있다고 하자 “성인이 오셨다!”고 했다.
돈 루아는 그 여인의 죄를 사하고 그리스도 신자들 도움이신 마리아의 축복을 주었다. 돈 루아는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한 다음, 그 곳을 물러갔다. 그로부터 몇 분 후 그 불쌍한 여인은 고통의 침대를 떠나 다시는 고통을 받지 않게 되었다.
닛싸 몬페라또의 마리에따 소르보네 수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위궤양 ( 胃潰瘍 )으로 몹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40일 동안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며 조금만 먹어도 토해버렸다. 나는 마지막 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1890년 12월 14일 아침에, 돈 루아가 병실에 온다는 것을 듣고, 죽음의 천사가 방문하기를 기다렸다. 돈 루아는 내게 고백의 성사를 주었다.
“목에 걸고 있는 돈 보스꼬의 유해에 입맞추십시오. 그리고 돈 보스꼬에게 병을 고쳐주시도록 청하십시오”하고 돈 루아는 말했다. 그 다음 돈 루아는 내게 축복하고 내가 종신서원을 하게 하였다.
나는 거의 단말마의 고통에 들어갔다. 내 침대 둘레에는 원장 수녀님과 다른 수녀들이 서서, 나를 대신해서 종신서원 경문을 읽고 있었다. 돈 루아는 내 머리에 종신서원 꽃판을 씌워 주었다.
돈 루아는 내게 말했다. “힘을 내시오. 나는 꽃관에 있는 많은 장미꽃처럼 그 만큼 오랫 동안 수녀가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당신에게는 마지막 시간이겠지만, 돈 보스꼬는 시복을 위해서 기적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그런 기적 중의 하나입니다. 수녀는 살 것입니다. 수녀의 병은 나을 것입니다. 병이 완전히 낫지는 않고, 수녀에게는 항상 가벼운 병이 있겠지만 그러나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돈 루아는 내게 축복하고 돈 보스꼬의 유해에 입맞추게 했다.
돈 루아는 떠나기 전에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 “ 이 기적을 손수 기록하십시오. 그것은 수녀가 돈 보스꼬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길입니다.”
돈 루아는 층계를 다 내려가기 전에 나는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는 한 수녀에게 몸을 돌렸다. “안지올리나 수녀님, 배가 고파요!”하고 나는 말했다. 음식을 먹은지 40일이 지났다.
“불쌍한 마리에따 수녀!” 하고 그들은 말했다. 수녀들은 눈물을 머금고 “이제 임종하나보다”고 속삭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먹을 것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30분 후에 나는 또 수녀들에게 “배고파요!”라고 했다.
그 날 저녁 때까지 나는 일곱 차례나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생기가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일어나게 수도복을 갖다 달라고 했지만 수녀들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수녀들이 “이젠 마지막이다”고 속삭이는 동안, 나는 온 몸에 힘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수녀들을 침대 곁에서 물러가라고 하고 내가 스스로 일어났다. 그 때 그들은 알아들었다.
“기적이다! 기적!” 이 말이 온 집안에 쫙 퍼졌다.
나는 아무리 도음도 받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 돈 루아와 영신 지도자 브레또 신부를 모시고 총회를 하고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감격에 넘쳐서 돈 루아의 발 앞에 쓰러졌다.
“저는 병이 나았습니다”하고 외쳤다.
“제게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이러지 마십시오!”하고 돈 루아는 말했다. “일어나 성당으로 가서 마돈나와 돈 보스꼬에게 감사드리십시오. 그리고 옷을 잘 입고 침대로 가서 쉬시오. 그러면 내가 수녀를 보러가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의사가 왔다. 그 의사는 원장수년에게 내가 밤을 못 넘길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내가 죽었으리라고 생각하고 문지기 수녀에게 내가 아직 살아있느냐고 말었다.
“살아있어요. 그리고 병도 나았어요. 온 집안을 뛰어다니는 걸요”하고 수녀는 말했다.
의사는 문지기 수녀가 나를 부를 때까지 믿지 않으려고 했다.
“의사 선생님, 전 병이 다 나았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의사는 자기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건강상태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서명했다.
다음 날, 나는 보르디게라에 있는 학교선생으로 일하러 떠났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돈 루아는 그 수녀에게 두가지 주요한 것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그 수녀가 항상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이다. 사실 수녀는 늘 고통을 당했다. 또 하나는 화관에 있는 장미꽃 수만큼 오래 살리라는 것이다. 자연히 수녀는 장미꽃의 수를 계산했고 또 죽음이 가까워오자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 그 수녀는 돈 루아를 찾아갔다.
“나는 수녀가 두려워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고 돈 루아는 말했다. “그 날짜가 가까워오니까 수녀는 무서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과 수녀에게 맡겨진 어린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나는 착하신 주님께 곱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수녀가 살도록 청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수녀의 생명은 수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수녀의 생명은 하느님과 영혼들의 것입니다.” 그 후 돈 루아는 수녀를 만날 때마다 수녀를 “기적의 수녀”라고 불렀다.
살레시오 수녀들의 경영하는 쟈베르노에 있는 요양소의 안지올리나 놀리 원장 수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06년 7월 12일부터 15일까지 돈 루아는 여행 중에 밀린 서신연락을 위해서 쟈베르노에 머문 일이 있었다. 돈 루아는 협조자가 파씨오와 발레 신부를 대동했다.
수녀들은 요양소 수리를 막 끝내고 돈 루아에게 와서 축성해 달라고 청했다. 돈 루아는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축일을 지낸 성 알로이시오 곤사가의 새 성화도 축성했다. 그리고 돈 루아는 훈화를 했는데, 그 때 수녀들이 경영하는 학교의 소년들이 많아지는 것과 비교해서 빵이 많아진 기적 이야기를 했다.
안지올리나 놀리 수녀는 말했다. “영성체하는 사람들의 수는 아주 많았는데 제의실 책임자는 보통 때처럼 작은 성합 하나만을 준비했다. 우리가 너무 늦게 영성체하러 나아간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조바심을 쳤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영성체할 만큼 충분한 제병이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 루아는 성합에 마련된 제병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그리고 파쏘 신부와 발레 신부도 놀랐다.”
그 말이 돈 루아에게 전해지자, 그는 “그 성합이 좀 적었어요, 그렇죠?” 하고만 말했다.
후에 또 다른 이야기가 알려졌는데, 증인들은 그 이야기를 성체를 많게할 것이라고 했다. 돈 루아는 미사 후에 몇 해 전에 그 요양소에서 생긴 일을 이야기 했다.
줄리아 까레나가 그 요양소에서 살았는데, 중풍환처럼 꼼짝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성 요한 병원의 빼스까롤로 의사와 빼쉬 의사는 살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봉성체를 모셨다.
그 때 그녀의 사촌이 와서 아무런 의망이 없으니 자기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사촌은 그 곳을 떠나 죽어가는 여인을 방문해 달라고 돈 루아에게 청했다. 돈 루아는 그 청을 받아들였다. 돈 루아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 사촌이 문을 노크했다.
줄리아는 말했다. “돈 루아가 내 침대에 왔을 때 나는 그에게 고백 성사를 청했다. 그리고 고백 성사가 끝난 다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신부님, 신부님께서 내 방에 들어오신 이상 내 병을 다 고쳐주시기 전에는 이곳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처음 그는 그에게 대한 나의 믿음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손을 들어 그리스도신자 도움이신 마리아의 축복을 내게 주었다. 그는 말했다. 이제 나는 당신 남편 방으로 갑니다. 당신은 일어나서 걸을 것입니다. 내일 당신은 성당에 와서 감사의 영성체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로였다. 영성체 후에 나는 제의실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내게 아침 식사를 제공했다.
다음 날, 내가 아직 살아있는지 빼쉬 의사가 보러왔다. 내가 완전히 나은 것을 보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유럽에 있는 모든 의사를 다 불러 온다해도 당신을 고치지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성인이신 유명한 루아 의사 께서 순식간의 당신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내 남편은 의사에게 청했다. 의사 선생님, 내 부인의 병이 기적적으로 나았다는 것을 진단서에 서명해주시겠습니까?
뭐라구요? 의사는 대답했다. 병자가 죽으면, 의사인 내가 왜 죽었는가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병자가 나으면 병자를 고쳐주신 분은 마돈나 아니십니까?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1903년 11월, 돈 루아가 마지막으로 까세르따에 왔을 때, 돈 루아를 존경과 애정을 다해 환영했다고 당시 학교 교리교사였던 베드로 스과르존 신부는 기록했다. 돈 루아는 성스러운 퐁채와 웃음을 띤 아버지의 자애를 지니고 있었고, 또 이것은 공동체 뿐 아니라 외부의 어린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를 위해서 미사를 드려달라는 우리의 청을 돈 루아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미사를 준비하고 소년들을 돌보면서도 교리교사는 2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영성체할 만큼 충분한 성체가 감실 안에 있다고만 생각했다. 영성체 때 교리교사는 중백의와 영대를 하고 돈 루아를 도우려고 제단으로 갔다. 그러나 성합에는 성체가 열둘 밖에 없는 것을 보고 그는 알찔했다. 신부는 두 사람에게 횃불을 들려서 성당으로 급히 가보았으나 그 곳 역시 수도원 사람들이 영성체 하기에도 충분치 않았다. 그가 돈 루아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돈 루아는 성체를 나누지도 않고 2백명이 넘는 살레시안 회원들과 소년들 및 친구들에게 성체를 영해주었다. 성체를 영해준 다음, 교리교사가 성합을 들여다 보니까 열둘 정도의 성체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고는 참지 못해서 제의실로 들어가 울음을 터뜨렸다. 소년들이 무슨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했다.
나중에, 일어난 사건을 식당에서 이야기하려고 하자, 돈 루아는 조용히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고 즉시 화제를 바꾸었다.
IX. 희 비 ( 喜 悲 )의 사건들
1895년은 돈 루아에게 있어서 특별히 벅찬 해였다.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 중 어떤 것은 기쁘고 어떤 것은 슬픈 일이었으며, 또 비참한 일도 있었다. 그처럼 많은 사건이 짧은 기간에 밀려들었고, 또 그의 건강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따로 따로 이야기해야 할 거 같다.
아마 가장 주요한 사건 중에 하나인 첫 번 사건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주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이리라. 그것은 볼로냐에서 개최된 협력자 대회였다.
그 해 살레시안들에게 있어서 또 한 가지 경사스러운 일은 야고보꼬스따마냐 신부가 에과돌의 멘데즈와 팔라귀자의 감목 ( Vicar Apostolic )된 일이었다. 꼬스따마냐 신부는 20년 이상 아르헨띠나에서 일했다. 꼬스따마냐 신부는 성청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세 번째 살레시안이었다. 당시에는 그가 감목이 된 것은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처럼 젊은 집단에서 크고 주요한 선교지역을 위임했고, 또 그 집단 중의 한 사람에게 주교좌를 밭김으로써 그들의 신분이 다른 수도회들 간에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줄잡아 말해도 그것은 성청에서 그들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이다. 꼬스따마냐 주교는 1895년 5월 23일에 그리스도 신자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에서 주교품을 받았다. 돈 루아를 보고 감탄하여 “그 사람의 완전한 성심 ( 聖心 ) 은 나를 위협한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 주교였다.
그 해에 돈 루아는 모든 속력을 다해서 돈 보스꼬의 시성조사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것은 교구의 단계를 곧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시성조사에 관련된 사람들의 협력이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돈 보스꼬가 활동생활을 하고,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여러권의 책을 저술하고, 또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그 중 어떤 것은 기적이라고 부른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에 원인을 돌려야한다. 용기를 위축 시킬만큼 방대한 이 모든 소재를 세밀히 검토해야 하고, 선서하고 증언해야 하고, 기록하고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 누구나 다 이 문제에 있어서 시성조사 교구수속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처음부터 알았다. 그러나 돈 루아가 만족한 것은, 이 일에 책임을 진 사람들이 일을 착수하는 방법과 그들을 고무한 돈 보스꼬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이 돈 루아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지만, 한편 그에게 슬픔을 가져다 준 사건도 있었다. 이런 사건 중의 하나가 브라질에서 발생했다. 11월 5일, 알로이시오 라사냐 주교는 브라질에서 포교 설교를 막 끝내고, 신축한 농업학교와 두 개의 여학교 개교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기차를 타고 길을 떠났다. 주교는 비서와 5명의 살레시안들, 8명의 수녀들과 여자 은인 1명을 애동했다. 그들은 정부에서 배당한 특별 객차 편으로 여행했다. 기차는 주이즈 데 플로라 역에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반ㄴ대 편에서 대형 수송화물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기관사는 차를 멈추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화물차가 와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두 기관차는 조각이 나고 말았다. 앞에 있던 객차는 살레시안들이 타고 있던 객차와 맞부딪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칸막이 객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깔아 뭉기고 세 번째 칸막이 객실에서 멈추었는데 그 곳에는 또 다른 살레시안들이 앉아있었다. 주교와 비서 및 수녀 4명이 시체를 끌어내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
참사를 알리는 전보가 돈 루아에게 도착했을 때, 그는 140명의 수련자들에게 의식을 집행하면서 폴리쪼에 있었다. 의식이 끝난 수 수련자들은 돈 루아를 에워쌌고, 그는 수도회에 들어온 젊은이들을 보면서 기쁨에 넘쳐 미소짓고 있었다. 사제가 돈 루아에게 전보를 전해주자 그는 조용히 전보를 읽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특징적인 몸가짐으로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다.
“Dominus dedit, Dominus abstulit, sit nomen Domini benedictum."
"주께서 주시고 주께서 걷어가시니 주께 찬미가 있어지이다.”하고 말했다.
콜롬비아의 선교사 미카엘 우니아 신부는 아구아 데 디오스에 있는 나환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했다. 당국에서도 그들을 무시하고 친척과 친구들도 그들을 소홀히 했다. 당시에는 그 병에 대한 학식이 거의 없었고, 최선의 치료법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891년, 우니아 신부는 사도적 열성과 사랑으로, 영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불행한 여생동안 보살필 허락을 신청했다. 사실 그가 처음 생각한 것은 나환자들의 물질적 안녕이었다. 왜냐하면 먼저 그들에게 종교의 이익이나 하느님의 착하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명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그런 것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료들과 그의 직속 장상까지 그를 단념시키려고 애썼다.
어떤 이들은 그가 제 정신인가 하고 의심도 했다. 돈 루아는 그에게 멕시코로 가라고 명령했다. 그는 명령에 순종하면서도 슬픔을 참을 수가 없어서 돈 루아에게 회신을 보내면서, 자기는 순종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으나, 나환자들과 함께 일하도록 허락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살레시안들이 선교지방에서 협조하며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들 나환자들은 문제 밖의 사람딜이 되어 있으나 사실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돈 루아는 그처럼 영웅적인 헌신 정신에 감동되어 우니아 신부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나환자들 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허락할 뿐 아니라, 자신의 동정과 기도를 약속하면서 나환자들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우니아 신부는 아구아 데 디오스에서 겨우 4년 간 생활했다.
왜냐하면 4년 후에 그의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니아 신부는 그 4년동안 불쌍한 나환자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줄 수 있었다. 나환자들을 위해서 성당과 병원을 세웠고, 운하를 개설하여 그들에게 주요한 신선한 물을 공급했다. 그 보다도 더 주요한 것은, 국가로 하여금 나환자들의 곤경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 것이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오늘날, 국민이 나병과 나환자들에게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은 미카엘 우니아 신부의 노력에 그 원인을 대부분 돌려야 할 것이다.
1893년, 그의 건강이 쇠약해지자 본국인 이탈리아로 돌아와야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자기의 친애하는 친구 형제 자매들”이라고 항상 부르던 나환자들에게 돌아갔다. 나환자들은 우니아 신부를 “그들의 사랑하는 아버지”, “그들의 천사와 같은 수호자”라고 불렀다. 우니아 신부는 아구아 데 디오스로 돌아 갔지만 전과같은 힘을 회복하지 못했고, 1895년에는 여러 가지 병으로 인해서 아주 쇠약해 지고 말았다. 의사들은 요양하도록 보고따로 가라고 했다. 보고따에서 그의 건강이 어느 정도 좋아졌지만, 그가 아구아 데 디오스로 돌아가는 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사들은 분명히 알았다. 돈 루아는 완전히 휴양하고 병을 고치기 위하여 우니아 신부를 이탈리아로 소환했다. 그는 라사냐 주교와 그 동행자들의 장례식이 있었던 12월 3일에 오라또리오에 도착했다. 12월 7일, 우니아 신부는 미사를 봉헌하기도 어려웠다. 12월 9일, 돈 루아가 다녀간 후, 우니아 신부는 세상을 떠났다.
이 겸손한 돈 보스꼬의 아들에게 대한 기억은 잊혀지지 않았다.
우니아 신부가 그처럼 많은 일을 행하고 그처럼 많은 것을 준 아구아 데 디오스의 나병환자들은 우니아 무덤 위에 대리석비를 세웠다. 그 비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콜롬비아의 아구아 데 디오스에 있는 나환자들이 잊을 수 없는 미카엘 우니아, 살레시안 신부께 드림.”
또 콜롬비아 정부에서는 우니아 신부를 기리며 그의 초상화와 대리석상을 만들라고 1896년 12월 11일에 훈령을 내렸다. 초상화는 기둥머리에 달고, 대리석상을 아구아 데 디오스 입구에 세우기로 했다. 끝으로 교황성하께서는 우니아 신부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표하고 그 기회에 모든 살레시안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내렸다.
달라쪼 신부의 오랜 살레시안 생활은, 돈 보스꼬가 그의 고백을 듣고 있었을 때의 작은 사건으로써 시작되었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는 이것이 오라또리오에 소년으로서는 마지막 날이라고 결심했다.
고백성사 중, 그는 누군가가 돈 보스꼬에게 빵 제조업자가 이제는 더 빵을 배달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속삭이는 말을 무심코 들었다.
돈 보스꼬는 빵 제조업자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소년은 돈 보스꼬가 빵을 많게 함으로 이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았다. 돈 보스꼬는 빵을 들고 소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즉시 부모에게 그 날 오라또리오를 떠나지 않고 또 평생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달라쪼 신부의 이름은 성 요한 보스꼬의 전기에 자주 나온다. 그는 발살리체 기숙사의 지도신부가 되었고, 런던의 살레시안 지부 창설자가 되었으며, 또리노의 성 요한 복음사가 본당 주임이 되었고 로마 주재 살레시오 총대리가 되었으며, 끝으로 주교의 요청으로 깔라브리아의 까딴자로 대신학교 교장이 되었다.
주교는 기율이 문란해져가는 신학교를 새롭고 보다 훌륭하게 지도하기 위하여 강력한 사람을 요구했다.
달라쪼 신부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를 주저치 않았고, 그의 의무가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조처를 취하기를 주저치 않았다.
따라서 그는 주교가 바라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1895년 삼위일체 주일, 사제서품 날짜가 오자, 그가 합당하고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생각되는 아들에게 찬성의 표시를 해야 하였다. 그런데 한 학생에 대해서는 다른 장상들과 오랫동안 수고하고 의논한 후, 노골적으로 거절하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결정했다. 따라서 그 학생의 서품은 다음으로 연기한다고 학생에게 통고했다.
이 사실을 알고, 그 신학생은 그의 요청을 승낙한 주교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 학생은 주교의 방에 들어서자 광포해지고, 주교와 달라쪼 신부, 그리고 자기를 부당하게 처리하고 중상했다는 모든 사람을 비난하면서 야만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야만인처럼 행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라쪼 신부는, 학생이 주교를 해치거나 스캔들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사무실로 급히 들어갔다.
학생은 달라쪼 신부가 나타나자 자기의 이성을 잃고 말았다.
“ 저 놈이다!”하고 그는 소리쳤다. “ 저 놈이 내 고통의 원인이다!”
그는 권총을 꺼내들고 달라쪼 신부를 향하여 몇 발을 쏘았다.
달마쪼 신부는 마루 바닥에 피를 쏟았다.
달라쪼 신부를 황급히 방으로 옮기고 의사들이 와서 진찰했다. 상처로 인해서 생명이 위독했다. - 총알이 턱을 뚫고 목구멍으로 들어가 성대를 파괴했다. - 그는 말을 못했다. 갑자기 출혈을 하더니 달라쪼 신부는 숨을 거두었다.
한 달 후에, 돈 루아는 소중한 보조자 한 사람을 또 잃었다.
그는 안또니오 스깔라 신부로서, 13년 간 본부 경리직을 맡아보았다. 그는 성 요한 복음사가 성당과, 로마의 예수성심 성당건축과 그리스도신자들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전복구에 각별히 힘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1898년 1월 5일, 돈 루아는 여러 지부에 연두 회서를 보내면서, 금년 여름에 수도회 제8차 총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알렸다.
돈 루아는 총회의 주요한 과업은 최고 평의회 임원을 선출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뜻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총회에서는 총장 선출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1888년 2월 11일자 성청 답서의 의하면 돈 루아는 12년 임기로 총장으로서 선출되었고 이제 임기가 10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 루아는 설명을 계속했다. 차기 총회는 정규적인 회합이고, 최고 평의회 회원들과 고나구장들 및 지부장들이 그 때 또리노에을 것이므로, 2년 후에 새 총장을 천출하기 n위하여 또리노로 다시 오는 경비와 수고를 그들에게 끼친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돈 루아는 그 기회에 총장 선출을 허락하도록 성청에 신청했다.
돈 루아가 모든 점에 있어서 성청의 훈령에 순종하고저 했다는 것은 로마주제 살레시오 총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났다. 돈 루아는 총대리에게 먼저 총장 선출 문제에 대하여 교황성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아보라고 청했다. 그러나 총대리는 도대체 그 문제를 문의한다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고 또 불리한 상태를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자유재량으로 그일을 없는 것으로 처리했다.
깔리에로 주교의 사촌이며 로마주재 총대리인 체사로 깔리에로 신부는 성청에서 총잦ㅇ 선출을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문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총회 회원들의 피정이 끝나고, 8월 29일 오후, 발살리체에 있는 돈 보스꼬의 무덤에서 총회 개회가 선언되었다. 돈 루아는 두 사람의 살레시안 주교, 즉 깔리에로와 꼬스따마냐의 참석하에 개회를 주재했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모든 관구장과 지부장들이 참석했다.
돈 루아는 성청의 허락을 받아 최고 평의회의 모든 회원들과 총장을 새로 선출할 것이고, 또 교황성하께서 총회에 축복을 보내셨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시작했다.
8월 30일 아침에 최고 평의회의 여러 가지 부서의 선출이 있었다. 개회 기도가 끝난 다음 돈 루아는 일어나서 자기보다 더 젊고, 오늘날 크게 확장된 수도회를 보살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총장으로 선출해 달라고 회원들에게 청하는 고시 ( 告示 )를 낭독했다.
자기로서는 장상들이 자기에게 맡기는 일을 힘껏 다하겠다고 하였다. 이 고시를 낭독한 후 그는 자리에 앉았다. - 그러나 외장석에 앉은 것이 아니라 다른 회원들과 한 자리에 앉았다. -
선거가 시작되었다. 투표자수는 217명이었다. 2표가 모범적인 살레시안이며 후에 최고 평의회 멤버로 선출된 요셉 베르딸로 신부에게로 갔다. 돈 루아는 후에 중앙 아메리카의 교황대사가된 요한 마렌꼬에게 투표했다. 한표가 돈 보스꼬에게 갔다 [ ! ]. 그리고 213표가 돈 루아에게 갔다!
돈 루아가 한 세기가 끝나고 다음 세기가 시작하는 그 때에 예수성심께 수도회 전체를 봉헌하려는 생각을 품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성스러운 사제, 안드레아 벨뜨라미 신부는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곡의 전기를 막 끝냈고, 예수성심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여 돈 루아에게 봉헌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1899년 6월에 교황성하께서는 성년 ( 聖年 )을 선포했고, 성년을 가치 있게 개시하기 위하여 신자와 비신자를 포함한 온 인류를 예수성심께 봉헌할 것을 명했다. 이 명령의 한 가지 결과는 남 아메리카의 대주교와 주교들 ( 전부 53명 )이, 예수성심께 봉헌한 살레시안 성당에서 남 아메리카 교회를 봉헌한 것이었다. 같은 날, 모든 주교들이 자기 교구 내에서, 또 모든 본당 신부들이 자기 본당 내에서 비슷한 의식을 거행했다.
돈 루아는 한 세기 ( 世紀 ) 의 글을 두드러지게 하는 뜻 깊은 신심행위를 오랫 동안 숙고했다. 그는 그믐 날에 예수성심께 수도회를 봉헌하기로 결정했다. 이 봉헌을 적절히 준비하기 위하여 돈 루아는 3일 간의 기도와 설교를 명했다. 봉헌행위는 살레시안들과 성도들 및 올 수 있는 모든 협력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 되었다. 예절은 두 세기가 경계선을 이루는 그 순간에 정확히 거행되었고 미사 봉헌과 “찬미가”( 떼데움 )을 부름으로 끝났다.
이 놀라운 사건은 지속적인 효과를 가졌왔다. 돈 루아는 예수 성심 축일을 연중 중요한 축일로 지낼 것과, 매월 첫 금요일에는 보상 영성체와 함께 특별한 예절을 거행할 것, 그리고 살레시안들과 살레시안 소년들은 첫 금요일 성무일도를 바칠 것과, 각 지부는 예수성심 호위 신심회 ( Sodality of the guard of Honor )를 구성할 것을 규정했다. 끝으로 가능한 곳에서는 수련자들과 학생들이 성시 ( 聖時 )를 행하여야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성년 기간 전체를 통해서 예수성심 성당은, 성년 은사를 얻으러 로마로 오는 순례자들로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신세기( 新世紀 ) 첫 해는, 남 아메리카에 살레시안 선교지를 창설한지 25주년이 되는 해였다. 1875년에 돈 보스꼬가 제 1진으로 10명의 살레시안들을 파견한 이래 37명의 선교 개척단이 파견되었다.
이제까지 남 아메리카에 있어서 살레시오의 선교활동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앞으로 더욱 효과적인 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이 입증 되었다. 따라서 남 아메리카에 있는 살레시오 회원들은 25주년을 두드러지게 하는 무엇인가를 이행하고저 했다. 총장 자신이 이 축제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특별하게 회원들과 은인들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있겠는가?
1898년 총회 때 남 아메리카의 살레시안들은 돈 루아에게 25주년 축제에 참석하기를 청했다. 돈 루아는 모든 것이 가능하면 참석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남 아메리카의 살레시안들은 회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남 아메리카의 살레시안들은 회답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관구장들을 통하여 돈 루아에게 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관구장들은 교황청 국무장관인 람뽈라 추기경을 통하여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침내 추기경이 교황성하께 직접 문제를 언급하도록 추기경을 설득 시킬 만큼 성공했다.
그러나 돈 루아는 성청의 아주 사소한 원의 ( 願意 )에도 민감하다는 것을 유의하고, 교황성하는 그런 지령을 내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대신 교황은 사도적 축복을 내렸다.
돈 루아는 이 모두 일을 보고 받고 조금도 불쾌한 빚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그에게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시였다. 그는 회원들의 자기를 남 아메리카로 초청하기 위하여 보여준 그들의 관심에 대하여 깔리에로 주교를 통하여 감사했다. 그리고 수도회의 영신지도자인 알베라 신부를 대신 파견했고 또 정신적으로 그 곳에 참석하겠다고 덧붙였다.
돈 루아가 남 아메리카를 방문하도록 강요한 이 모든 것을 왜 반대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른다. 돈 보스꼬가 살아있을 때 남 아메리카를 방문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돈 루아도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단하는 이들도 있었다. 돈 루아는 남 아메리카를 방문하도록 제의하는 수녀에게 그렇게 말한 바도 있다. 그러나 돈 보스꼬가 방문하지 않은 곳을 돈 루아가 방문한 곳이 많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 이유는 약한 것 같다. 아마 돈 루아는 자기의 건강이 장기간의 바다 여행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남 아메리카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알맞은 설명일 것이다.
X. 성지를 찾아서
돈 루아는 총장으로 있는 동안 성지 ( 聖地 )를 두 번 방문했다.
1894년에 처음으로 성지를 방문했는데, 이 때는 살레시안들을 경애하는 안또니오 벨로니 신부의 수하에 걸친 간청에 응답하는 뜻에서 취해진 조처였다. 벨로니 신부는 빨레스띠나에 많은 자선사업을 설립하고 그 사업을 돌볼 수도회 창설했다. 그는 이 사업을 돈 루아에게 바쳤고 바르베리스 신부 앞에 서원함으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살레시안들의 도착을 준비하기 위하여 빨레스띠나로 돌아갔다.
돈 루아는 2월 29일에 자파에 도착해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베틀레헴에 있는 살레시오 지부로 곧바로 갔기 때문에 회원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는 나중에야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동굴을 찾아가 미사를 봉헌했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의 무덤 위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가 성지를 방문한 것은 사무적인 것이었다. 그가 두 지부에서 만족할 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관구장에게 권고장을 써보낸 사실을 보더라도 이것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공적 사무를 끝낸 다음 귀로에 올랐다.
한편 그가 두 번째로 성지를 방문했을 때는, 가는 도중에 여러 지부를 방문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성격상 순례였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바라께의 무서운 사건이 생겼을 때 그가 약속한 것을 이행했다고 생각했다. 살레시안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첫째 그는 이미 성지에 있는 지부를 방문했기 때문에 그처럼 짧은 기간에 또 다시 성지를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또 그의 건강으로 봐서 그처럼 어려운 여행을 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아주 경솔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가장 길고 가장 피로한 여행이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를 돌아서 갔다. 어느 지부에서는 그가 아무 음식도 먹지 않은 것을 알아챘다. 그의 치아가 좋지 않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는 공동체에 나오는 음식 외에 다른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여행 중에 그는 치아를 6,7개 상실 했고 한 두 가가 남아있었다.
그는 스미르나의 에페소를 걸어서 방문하려고 했다. 그 곳은 요한 사도에 의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제 3차 공의회기간 중, 교회의 교부들이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시라고 지지하던 마리아 성전의 옛터를 보고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마침내 그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도착하여 배에 오르자 자기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이 물위를 지나가시고, 풍랑을 명하여 잔잔하게 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이 약한 것을 굳게해 주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밤 새도록 수고해도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들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를 잡게 해 주신 것을 마음속에 그렸다.
그는 3월 14일에 나자렛에 도착했다. 그는 예수께서 변용하신 산으로 올라가고저 했다. 다른 사람들은 관례를 따라서 말을 타고 올라갔지만 그는 걸어서 올라갔다. 그는 길가에서 생긴 사건들을 더 잘 묵상할 수 있다고 하면서 걸어 올라가자고 했다. 2시간 동안 걸어 올라 간 다음 힘이 없어서 말을 타고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들은 안장이 잘 장치되지 않은 말을 제공했으나, 그는 작은 당나귀를 타고 올라갔다. 그 때 발이 부어올라 큰 고생을 했다. 그들은 안장이 잘 장치되지 않은 말을 제공했으나, 그는 작은 당나귀를 타고 올라갔다. 그 때 발이 부어 올라 큰 고생을 했다.
나자렛에 있는 살레시오 지부를 방문했을 때, 회원들은 4년 후 다시 방문하여 소년 그리스도의 성당을 축성하여 줄 것을 약속받으려 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미소만 지었다. 이미 자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약속이 성취되리라고 희망하지 않았다.
3월 23일에는 베들레헴에 도착했는데 그 곳에서 열광적인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의 무덤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동안 그는 눈에 띄게 감격해 있었다. 성지를 순례하기 위하여 이 곳에 왔다면, 이 순간이 그 정점이었을 것이다.
그 때 무엇을 느끼고 미사 중에 무엇을 기도했는지 돈 루아가 기록한 여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우리 수도회가 원수들의 중상을 쳐이기도록 허락해 주시고 그 중상모략에서 우리 사업에 큰 이익을 얻게 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그가 순례한 주요지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동굴이었다.
그는 4월 5일에 그 동굴에 도착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그 거룩한 곳에서 기도하는 동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이 꽉 찼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겸손과 청빈을 본받고자 하는 아주 강한 충격을 느꼈다고 여러분에게 확언할 수 있습니다.”
순례가 끝나고, 약속을 성취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 말따, 시칠리아, 시라꾸사를 거쳐 긴 여행에ㅓ 돌아왔을 때 시칠리아 관구의 지부장들과 관구장들이 까따니아 역에서 그를 마중했다.
지친 돈 루아는 보고 나이 든 한 회원이 동정심에서 이렇게 말했다 : “불쌍한 돈 루아, 아주 챙백해졌습니다!”
돈 루아는 그 회원을 붙잡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돈 보스꼬는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누가 당신을 보고 창백하다고 말하면 당신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라고요!”
3개우러 18일이 걸린 장기간의 여행이 끝난, 5월 20일 오후 돈 루아는 오라또리오로 다시 돌아왔다. 보통 때 보다는 훨씬 피로하고 힘이 없어보였고, 그의 치아가 하나도 없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치아가 없다고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하면서 그는 웃었다. “나는 치아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치아를 상자에 넣어두었습니다. 심판 날 나는 잃어버린 치아를 찾으러 가고 싶지 않습니다.” 안또니오 도네스 신부는 이렇게 기록했다. “돈 루아는 성지에서 돌아온 후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밀라노에 도착했기 때문에, 살루쪼 신부와 나는 정거장에서 그를 마중하려고 곤사와 왕자와 여려 명의 백작, 후작, 그리고 우리 학교 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당황했다. 그가 쓰고 있는 모자는 헤어져서 실밥이 보이고 입고 있는 만또와 수단은 색이 바랬고,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그의 유물을 갖고자 했기 때문에 옷 가장자리는 찢겨져 있었다. 우리는 학교에 도착하자 추기경을 방문하러 갈 때 적어도 흉하지는 않도록 새 모자와 수단과 만또를 제공했다. 낡은 옷을 채워버리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었다.! 우리는 그 옷을 세탁소에 보내서 수선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그는 또리노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옷을 돌려달라고 청했다. 우리는 옷을 돌려드리지 않을 구시릉ㄹ 생각해 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한 일을 아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기색을 분명히 보였다.”
그해 말에 돈 루아가 신기하고 묘하게 관여된 비극이 일어났다.
프란치스꼬 삐꼴로 신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06년 5월 어느 날 저녁 9시. 우리 4명의 살레시안들은 다 낡아빠진 등불을 밝히며 달리는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바르베리스 신부는 한 쪽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야고보 알라베나 신부는 다른 구석에서 졸고 있었다. 나는 돈 루아와 이야기 할 기회를 가졌다.
신부님, 나는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곧 죽으리라는 육감이 듭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죽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약 50명이 죽습니다. 나는 모두 52명이 죽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돈 루아는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그는 내가 말한 것을 가볍게 넘게 버리지 않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하라고 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 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아간 것이 모두 52명이었따는 것 뿐이었다.
돈 루아는 말을 중단했고 나는 돈 루아가 내 어깨에 손을 얹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프란치스꼬 신부”하고 돈 루아는 말했다. “나는 방금 당신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말한 것이 당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리라고 믿어요”
삐꼴로 신부는 전에도 자주 갔듯이 이번 크리스마스 방학 때는 메씨나로 가서 정초까지 지낼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관구의 관구장으로 입명되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의 임무를 다할 수 없다고 돈 루아에게 말했다.
그러나 돈 루아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1908년 12월 28일 그는 띠르헤니안 바다가 건너다 보이는 이탈리아 리비에라 지방을 따라서 있는 말라씨오로 갔다. 그는 다음과 같은 소식이 왔을 때 잃어버린 휴가를 유감으로 생각했다.
그 소식은 간단했다. “메씨나에 지진, 10만명 이상이 사망!”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좀 정신이 든 다음 메씨나의 살레시안 지부의 소식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사제 6명, 신학생 2명, 수사 1명, 일꾼 4명, 소년 38명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 그는 몸을 떨었다. 꼭 51명이었다. 그가 전에 본 52명 중에 한 명이 빠진 것이다.
사실 지진으로 인해서 그 지역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20만이 넘었다. 그들 대부분이 매장되었다. 삽시간에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돈 루아는 이 비참한 재앙의 소식을 듣고 여러 가지 형태의 구조를 곧 조직화 했다. 대성전을 애도의 표실로 장식하고 회원들과 소년들, 그리고 사망한 협력자들을 위하여 추도미사를 봉헌했다.
돈 루아는 미사를 봉헌하려고 했으나, 그의 건강을 고려하여 관대 ( 棺臺 ) 옆에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살레시오 지부는 집 잃은 어린이들을 받아들이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지부들은 모든 할당을 관대히 받아들였다. 돈 루아는 보르지아의 새 교육기관을 밑레또 주교의 재량에 맡겼다. 또 그는 나머지 살레시오 관구를 메씨나와 까따니아 주교의 재량에 맡기라고 시칠리아의 관구장 바르톨로메오 파시에 신부에게 명령했다.
레오 13세 교황은 로마에 예수성심 성당을 세우라고 돈 보스꼬에게 위탁했고, 그의 후계자인 비오 10세 교황은 돈 보스꼬의 후계자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로마시 떼스따치오 지구에 또 성당을 세우라고 요청했다. 성당이 이제 완성되었다.
돈 루아는 1908년 11월 29일에 성당 축성식에 참석했다. 며칠 후 돈 루아는 회원들의 이름으로 교황의 사제서품 은경축에 선물로 새 성당을 교황께 정식으로 드리기 위하여 바띠칸으로 갔다.
교황의 처소로 가는 계단을 올라갈 때 돈 루아는 교황성하께 대한 자녀다운 마지막 순종의 몸가짐으로 이 계단을 올라가던 노령의 돈 보스꼬를 도와주었던 그 날을 회상했다. 이제는 돈 루아의 차례였다.
XI. 4대 과제 ( 四大課題 )
돈 루아는 수도회의 정상 사무를 지도하는 외에 독립적이면서도 상호관련된 네가지 분야에 노력을 기울였다. 선교지 - 성소 - 축일 오라또리오 - 협력자 들이다. 이 네가지 분야에서 그는 두드러진 창조자는 아니지만 뛰어난 조직가요 관리자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선 교 지
1886년 4월 10일 아침, 돈 보스꼬가 모금을 하기 위하여 스페인을 여행할 때, 전 날 밤의 꿈을 돈 루아에게 이야기했다.
꿈에 나타나시는 부인께서 그 날 밤 꿈에도 나타시어 이 지구의 여러 지역을 보여주셨는데, 그 곳에는 돈 보스꼬의 아들들이 선교지를 확립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산띠아고 칠레로 갔고, 남 아메리카의 주요도시로 그리고 아프리카, 미국, 근동과 극동, 그리고 중국의 수도 북경에로 갔다.
돈 보스꼬가 이 방대한 선교지를 보았을 때는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그 꿈에 어떤 예언적인 것이 있음을 처음에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께서는 그러한 손교지가 있다는 것을 돈 보스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선교지가 돈 보스꼬가 살아있던 그 당시의 아들들에게 위탁되지는 않았지만 다음 세대의 살레시안들에게 위탁 되었다.
이 꿈의 배후에는 1854년에 젊은 깔리에로가 “성무일도를 손에 들고 멀리 멀리 떠나가는 것”을 돈 보스꼬가 본 그 현시 ( 顯示 )가 있다는 것을 돈 루아는 알았다. 돈 보스꼬는 죽음이 임박하자 깔리에로에게 큰 믿음을 가지라고 했다. “전진하시오.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 당신은 아프리카로 갈 것이며, 아시아와 몽고, 또 그것은 돈 보스꼬의 "꿈”이 초자연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했다.
돈 루아는 돈 보스꼬의 꿈을 실현했다. 돈 루아가 총장 재임 기간 중에 인적 물적으로 선교지에서 받은 고통을 해아릴 수는 없다. 또 그는 선교지를 위해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선교 활동을 지도하고 격려하고 추진했다. 그는 두가지 동기에서 선교지방을 위하여 일했다. 첫째는, 선교지방을 위해서는 인적 물적인 것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 돈 보스꼬의 뜻이었다.
둘째로, 돈 루아는 하느님의 섭리에 신뢰하여 선교지방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택배의 상급을 받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 그것은 또 하나의 성소 ( 聖召 )다.
1892년, 돈 루아는 꼬스따마냐 신부에게 편지를 쓰면서 성소가 놀라우리만치 증대되어서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살레시안 그 회원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기 때문에 그들을 선교지방에로 보냈다고 하였다.
돈 루아는 총장 재임기간 중에 30차례 정도의 선교 개척단을 파견했다. 이 여행을 떠난 선교사들의 수는 5명에서 295명으로 분류된다. 거기에는 사제, 신학생, 수사, 수녀들이 포함돼 있다.
선교지로 떠난 선교사들의 수는 총 1천 4백명에 달한다.
- 당신의 수도회의 크기나 연륜으로 볼 때는 놀라운 숫자다. - 개척 선교에 소요되는 막대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돈 루아는 서신을 통해서 협력자들의 협조를 끊임없이 호소했다.
그리고 돈 루아가 총장으로 있을 때, 젊은 선교사들이 임명된 선교지에서 직접 훈련을 받도록 시험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처음 돈 루아는 돈 보스꼬 시대에 시작한 빠따고니아와 띠에라델 푸에 선교지방,을 개발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선교지였던 지역, 즉 마또 그로쏘와 브라질에 있는 미개한 보로로스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과, 사람의 목을 사냥하는 야만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에콰들의 지바로스로 살레시안들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레시안들은 그곳에서 다시 자마이카와 콜롬비아, 베네주엘라로 침투했다. 다음 단계는 동양으로 침투하는 것이었다. 돈 루아는 로렌소, 마르궤스, 모잠비크, 그리고 멜리아뽀르를 거쳐서 인도로 살레시오 선교사들을 파견했고, 1905년에는 딴요레로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그 곳을 기점으로 해서 부근 육지로 지출했다.
돈 루아는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도록 지도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옛 포프투칼의 식민지인 마카오를 통해서 1906년에 극동에 첫 발을 들여 놓았다. 회원들이 먼저 중국인 사도단을 구성해서 그들로 하여금 본국인들을 회개 시키는데 협조하도록 하는 것이 돈 루아의 의도였다. 중국의 선교로 알려졌다. 그리고 수도회의 첫 순교자로서 알로이시오 베르실리아 주교와 깔리스뚜스 까라바리오 신부가 중국에서 순교했다.
한편, 돈 루아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선교지역이 아니라해도 살레시오 회원들의 재능과 녕력 및 자원이 허락하는 한 기타의 지역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곳 주민들과 특히 젊은이들의 영신적 현세적 요구를 고려했다. 이런 국가로서는 남 아메리카, 아르헨띠나, 우르과이, 칠레, 브라질, 에콰돌, 콜롬비아, 멕시코, 베네주엘라, 페루, 볼리비아, 꼬스따리까, 혼두라스, 파나마 등이 있고, 근동에는 알제리아, 투니스, 이집트가 있으며, 남 아프리카의 까뻬와 소 아시아, 빨레스디나와 터키가 있다. 돈 루아는 1896년에 처음으로 살레시오 회원들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돈 루아는 미카엘 우니아 신부에게 콜롬비아의 아구아 데 디오스에 있는 나환자들을 돌보라고 격려했을 때, 아주 새로운 형태의 선교활동에 푸른 신호를 울렸다.
훌륭한 이 선교활동은 역전 ( 逆轉 )과 실망, 모든 형태의 학대, 그리고 개인과 정부측의 공공연한 박해를 받지 않고는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고통을 당할 때, 돈 루아는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했다.
돈 루아 시대에 살레시오회의 선교활동이 급속히 확대된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당시의 교회와 정부에서는 살레시안들과 같이 사회 분야에서 활동하는, 잘 훈련된 일꾼들을 열망하고 있었다. 살레시안들에게는 유리한 두 가지 주요한 것이 있었다. 그들은 젊은이들과 함께 일했고 농업, 상업 및 기술학교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즉시 인정되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 사도적 열정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성소의 수가 많았다.
살레시오 회원들이 경영하는 학교는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의 요구에 응했다. 회원들의 개인이나 정부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부유한 개인과 정부에서 관대히 허용했기 때문에 학교를 시작했다. 사실 정부에서는 살레시안들이 자기 나라에와서 학교를 세우게 압력을 가하도록 성청의 중개를 요청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살레시오 학교와 학생들의 성공은 살레시오 선교 활동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예를들면 남 아메리카의 도시와 마을에는 살레시안들을 기념하는 기념비나 도로 또는 시가가 거의 다 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남 아메리카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특히 루아의 친구인 요한 깔리에로 추기경의 이름이 눈에 띤다.
율리우스 아르젠띠노 로까 대통령은 처음에는 깔리에로를 반대했으나 마침내 그를 수르의 개화자요 빠따고니아의 개화자라고 불렀다.
성 소
통합.기간에도 돈 루아가 주의를 기울인 것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성소의 수가 증가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지부의 인원을 채우고, 돈 보스꼬가 사망한 후 본국과 해외 및 선교지에 지부 창설을 요청하는 수 백통의 서신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많은 성소를 필로로 했다. 그는 이 중대한 요구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도록 회원들을 재촉하였고, 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관구장들과 지부장들을 설득시키고 때로는 꾸짖었다.
돈 보스꼬 시대에는 모든 지부가 첫째가는 크리스찬 양성 학교였다. 따라서 지부원장들과 회원들은 사제직과 수도생활의 성소를 찾는데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돈 루아는 모든 것을 지부에만 맡기지 않았다. 그는 선교지방에서 그 지방 젊은이들의 성소를 촉진하기를 원했다.
돈 루아는 수하 사람들에게서 “성소를 개발하고저 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 “라틴어 공부를 강소하시오, 지부에 건전하고 심오한 신심의 분위기를 만드시오, 소년들의 윤리생활을 지도하시오, 신심회를 장려하시오, 소년들에게 자주 영성체하도록 가르치시오, 당신을 열심하고 희생적이며 기쁨이 넘치는 생활의 본보기로 소년들의 바라보도록 행동하시오. 고결한 생활에서 흘러나오는 행복한 면을 소년들에게 보이시오.”
1888년 7월 29일자 회서에서 돈 루아는 관구장들에게, 성소의 표시가 보이는 소년들을 각별히 다루고,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도우며, 가능하다면 그들이 성소를 따라가기 전에 피정을 하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주선하도록 충고했다. 돈 루아는 이 때를 추수기라고 불렀고, 사제직이나 수도생활에 대한 뜻을 보인 소년들이 최후의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10월 23일자로 관구장들과 지부원장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돈 루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권하는 것은 성소 계발입니다. 각 지부원장은 주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이 성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교회와 우리 수도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일으켜주신 성소를 우리의 게으름으로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힘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돈 루아는 성소를 촉진해야 할 필요성을 별로 언급하지 않은 장상이 있으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냇다. “당신은 교회에 얼마나 많은 성소를 바쳤습니까? 수도회에는 얼마나 많은 송소를 바쳤습니까? 지난 해에는 얼마나 바쳤습니까?” 또 자기를 찾아오는 장상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돈 루아는 겸양한 수사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당신은 많은 살레시안들을 만들어내도록 학교를 성화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런 것을 별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가장 주요한 임무입니다.”
또 우라과이에 있는 신학생에게는 이렇게 써 보냈다. “당신이 맡고 있는 생도들 중에서 살레시오 회원들, 훌륭한 살레시안들이 가능한한 많이 배출되도록 힘쓰십시오”
선교지방에 있는 회원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성소자를 개발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가능한 대로 속히 사제들을 배출하는 학교를 시작하십시오.” “훌륭한 살레시안들을 준비하는 것 - 사제와 수사들 - 이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하고 가장 성스러운 일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장상인 요셉 베스삐냐니 신부에게는 이렇게 써 보냈다.” 당신 지부에서 성소를 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지부에서 성취할 수 있는 기타의 좋은 일은 별 문제로 하고 성소자를 제공하지 않는 지부는 지부 자체의 성소자가 없기 때문에 염려가 됩니다.”
성소문제에 대하여 돈 루아는 “수도자들의 귀가 따갑도록 이야기했다.”고 어느 작가는 불평한 일이 있다. 그러나 1897년 1월 31일자 서한에서 돈 루아는 왜 이렇게 귀가 따갑도록 성소 이야기를 하고, 그처럼 성소를 강조하는지 설명했다. “수도회를 이끌어가는 나로서 수도회의 발전과 향상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성소문제에 온 힘과 정성을 다합니다. 성소자가 없다면 돈 보스꼬가 수도회를 창설하던 당시에 제시한 목적에 부합할 수 없고 우리 수도회는 쇠약해질 것입니다.”
돈 보스꼬의 11주기를 기념하는 1899년 1월 31일자 서한에서, 돈 루아는 자기가 총장직을 맡을 때 스스로 계획한 프로그램을 언급했다. “어느 때보다도 지금 성소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과 근심을 표명하도록 나를 재촉하는 동기가 이것입니다. - 나는 돈 보스꼬의 학교에서 형성받앗기 때문에 - 지부의 소년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제나 수도자가 아니라 성소의 표시를 보면서도 소년들을 지성소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제나 수도자의 열심을 참다운 열심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성소자를 발견하라고 강조한다고 해서 나는 새로운 것이나 어떤 비범한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는 돈 보스꼬의 모범을 따르라고 청할 뿐입니다.”
더욱 더 많은 성소에 대해 강조하던 이런 열성의 결과는 어떠했던가? 돈 보스꼬가 사망하던 때 수도회는 768명의 살레시오회원들을 헤아렸다. 다음 돈 루아가 사망하던 때는 4천명을 헤아렸다. 여기에다가 그간에 사망한 살레시안들과 다른 이유로 수도회를 떠난 사람들을 첨가해야 한다.
축제 오라또리오
돈 보스꼬의 사업은 “축제 오라또리오”로 시작되었고 이 오라또리오 위에 창설되었으며, 우선적으로 이 오라또리오를 위해서 존재했다.
“축제 오라또리오”란 무엇인가? 그 낱말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라또리오는 축제를 지내는 장소다. 즉 젊은이들이 건전한 레크리레이션으로 즐기는 장소다. 그 곳은 기도하는 장소다. 물론 기도하는 장소는 많다. 그러나 이 오라또리오는 젊음과 기쁨의 정신으로 특징 지워진 곳이요, 그 곳에서 젊은이들은 기도하고 신심을 실천함으로 그들은 성당 안에서나 넓은 들판에서나 집 안에 있는 듯이 느낀다.
돈 보스꼬의 다른 계획을 심히 반대하던 사람들까지도 축제 오라또리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졌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로아또리오를 좋아했다. 돈 보스꼬와 그의 사업을 자주 구제한 곳이 이 축제 오라또리오였다. 돈 보스꼬를 따르던 살레시오 회원들의 사업을 축제 오라또리오가 구제한 극적 사건이 수 없이 많다. 축제 오라또리오는 여러 살레시오 지부를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오라또리오는 훌륭한 성소자와 유명한 인물을 배출했다. 오라또리오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탈리아의 안꼬나, 스페인의 바르첼로나, 미국의 샌 프란치스꼬와 같은 이웃 전체를 퇴폐와 범죄에서 구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 돈 보스꼬의 금언 “이웃을 구제하려면 축제 오라또리오를 개선하라.”)
축제 오라또리오를 사랑하는 마음은 돈 보스꼬에게 직접 돈 루아에게로 넘어갔다. 돈 보스꼬처럼 돈 루아도 축제 오라또리오는 살레시오의 사업 뿐 아니라 살레시오회 자체도 향상시키는 사도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돈 루아는 생전에 축제 오라또리오의 증가와 발전에 우선권을 주었다는 것은 그의 큰 공적 중의 하나다. 오랜 경험을 통해서 그는 살레시오 사업에 있어서 오라또리오가 주요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세 통의 회서에서, 돈 보스꼬가 오라또리오에 쏟은 똑같은 열성을 지니고 오라또리오를 촉진해야 한다고 장상들과 회원들에게 힘주어 말하면서 축제 오라또리오 문제를 거듭 언급했다. 축제 오라또리오는 돈 보스꼬 시대는 좋았지만 그 후로는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고 하는 말에는 이단적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돈 루아는 성당과 회관, 넒은 운동장과 극장, 여러 가지 물건 등은 축제 오라또리오에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저 했다.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좋고 훌륭한 것이다. 이런 것이 없는 곳에서는 축제 오라또리오에 대한 책임을 맡은 사람들의 열성이, 적어도 초기에는 이런 것이 없다 해도 보충할 수는 있다.
축제 오라또리오를 시작하려는 젊은 사제에게 돈 루아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있을 곳도 없고 소년들을 모을 마당도 없습니다. 그러나 축제 오라또리오는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진정한 살레시안이라면 나무를 심을 장소를 곧 발견할 것이고 그 나무는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돈 루아는 난관에 봉착한 축제 오또리오 책임자들을 격려하려고 언제나 힘썼다. 그는 축제 오라또리오를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과, 소년들과 지원자들, 나이 많은 회원들에게도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수단을 암시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오라또리오에 오게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수도적 요소를 지닌 오라도리오 생활을 좋아하게 하는가. 만일 이런 생활이 없다면 그런 오라또리오는 돈 보스꼬의 정신에 입각한 오라또리오가 아니다.
그는 오라또리오에 대한 이야기로 통상 서신을 채웠다. 한 편지에서 그는 음악과 연극을 너무 주요시하고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이들을 나무랬다. 그가 지적하는 목적은 종교교육이다. 기타의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종교교육으로 할당된 시간제는 기타의 모든 것을 피해야 한다. 그는 축제 오라또리오를 위해서 관구에서 이행한 사업 보고서를 낸 관구장들에서 그렇게 써보냈다. 또 그는 모든 지부에서 축제 오라또리오에 애착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돈 루아 성지를 순례한 다음에 쓴 “교훈적 서신” 마지막에서 나이 어린 소년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하는 큰 소년들을 유치하는 수단으로 서클과 클럽을 형성하도록 권장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총장 임기 중에 협력자들에게 22차례 새해 인사 편지를 썼다. 그때마다 새로 축제 오라또리오를 개설한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표시했다. 돈 루아는 그처럼 오라또리오를 추진하엿기 때문에 총장으로서의 그의 재임기간은 축제 오라또리오의 발전에 관한 가장 풍부한 한 페이지를 수도회 역사에 남겼다.
협력자들
1885년 6월 1일, 그리스도신다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전에서 한 강화에서 돈 보스꼬는 살레시오 협력자를 이렇게 정의했다. “살레시오 협력자가 된다는 것은,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회의 후원 하에 창설된 사업에 다른 이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수도회의 목적은 교회의 가장 시급한 요구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협력자들의 운동은, 젊은 살레시오 회원들을 가르치고 또 오라또리오에서 교리를 가르치며, 소년들의 직업을 찾는 일을 도우면서 돈 보스꼬의 여러 가지 사업을 돕는 선의의 남녀들이 돈 보스꼬 들레에 모여들음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운동은 방법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실패를 거듭하면서 서서히 발전되었고, 오늘의 교회에서 크게 유행하는 평신도 수도단체에 아주 유사한 것으로 되었다. 교회 역사상 특수한 시기에, 지나치게 위험한 시험이요 시대를 앞선 것으로 단죄되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1876년 5월 9일에 교황 비오 9세는 협력자들을 일종의 제 3회로 생각하도록 허용했고 보통으로 내리는 은사를 모두 허락했다.
돈 보스꼬는 죽기 전에 교회 안에서 교황성하를 위시해서 높은 지위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이름과 정부와 왕족 다수인들을 협회에 등록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평민들이었다. 그들은 젊은이들과 선교지방을 위한 돈 보스꼬의 사업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기타의 계획을 돕고자 갈망하는 이들이었다.
돈 보스꼬가 협력자들에게 대해서 심혈을 기울였듯이 돈 루아도 그러했다. 협력자들은 살레시오 회원들과 수녀들 및 협력자들로 구성되는 살레시오 대 가족의 셋째 요소였다. 돈 루아는 돈 보스꼬가 사망했다는데도 협력자들이 수도회와의 위대를 계속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고 또 안심했다.
돈 보스꼬는 죽기 전에, 자기가 죽은 다음 협력자들에게 보내라고 한 서신에서, 이 유대를 흩어지게 하는 것을 막으려고 고심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과거에 여러분이 친절과 인내로 나를 도와주셨다면 내가 즉은 다음 나의 후계자에게도 똑같이 도와 주시기를 청합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내가 시작한 사업은 이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업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고 여러분과 같이 이 세상에서 훌륭한 사업을 추진하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돈 루아는 이탈리에서는든 혹은 다른 나라에서든 지부를 방문하고 돌아오면 그 여행의 결과와 여러 가지 경험을 협력자들에게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는 자기가 방문한 도시에서 협력자들이 얼마나 따뜻이 자기를 환영했으며, 또 그들의 노력과 영향으로 그의 사업이 얼마나 성공했는가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구도회가 여러 국가로 확대되자 그는 이제 “살레시오 회보”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회보를 발간할 뿐 아니라 영어, 독어, 폴란드어로 발간하라고 명했다. 후에 포르투칼어와 헝가리어로도 회보를 발간했다.
돈 루아는 1893년에는 협력자들의 지침서를 발간했고, 1898년까지 그 지침서를 계속 수정했다.
1895년 총회 중에, 돈 루아는 협력자들과 살레시안들 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수도회 규칙에 삽입된 결과를 연구할 특별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1898년에 이탈리아 협력자 전국대회를 조직했다. 이 대회는 3일간 지속됐고 40개의 교구에서 150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1901년에 개최한 제 9차, 총회에서 돈 루아는 이렇게 말했다.
“협력자들의 협회는 돈 보스꼬가 항상 원하던 것입니다. 돈 보스꼬는 협력자들의 일치를 확장하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도 돈 보스꼬를 본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협력자가 되겠는지 먼저 물어볼 필요는 없습니다.그들에게 규칙서를 보내주십시오. 좋은 뜻을 갖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으면 그에게 증서를 보내주십시오.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회보”를 받아 보고 있는지 물어보시고 어떤 의무를 언급하지 마십시오. 다만 양심에 아무런 책임도 없이 조그만한 좋은 일을 하는 문제라고만 이야기하십시오.“
돈 루아의 임기 중에 협력자 운동에 강렬한 추진력과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세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 중 첫째는 1895년에 개최된 볼로냐 대회였다.
이 대회는 돈 루아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볼로냐의 대주교 스밤빠 추기경이 생각한 것이다. 그는 살레시오 사업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운동을 가장 활동적으로 추진하는 사람이었다. 추거경은 높은 지위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지원을 얻은 다음 자기의 생각을 돈 루아에게 서신으로 전하면서 회장직을 루아에게 드리겠다고 하였다. 돈 루아는 그러한 계획을 기뻐하고 또 추기경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자신은 원치 않지만 외장직을 받아들이고 위원회의 협력과 그 대회에 참석하는 협력자들의 친절을 믿겠다고 회신을 보냈다.
대회는 4월 23일부터 4월 25일까지 계속했고,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한 종교의식이 거행되었다. 고관과 평민이 모두 대회에 참석했다. 4명의 추기경, 29명의 대주교 및 주교들이 참서했고, 저명인사들과 아탈리아와 해외에서 온 대표들이 참석했다. 교회와 과학, 학교와 신문, 사도직과 오늘의 사회문제 같은 여러 가지 주제가 강연과 회합, 토의의 대상이 되었다. 신문은 대서특필하고 교황성하는 대회의 개막과 폐회의 각각 다른 서한을 보낼만큼 그 대회를 중대시하였다. 대회 전체가 돈 보스꼬의 이념과 살레시오회 사업을 크게 두드러지게 하였다.
돈 루아는 단순한 외양과 조용한 신뢰와 품위를 지니고 이 모든 것을 통활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대중의 호감을 샀다. 그가 개회사를 끝내고 추기경에게 인사하러 갔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따뜻한 형제적 포옹으로 그를 맞았다.
대회가 알려지기 전에 고위성직자들은 대회에 관한 광범위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돈 루아는 대회의 의장으로서 그 자신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교황성하의 비서 따로찌 몬시늘은 교황성하께서 보내는 서한을 준비하기 위하여 이 보고서를 베꼈다.
“교황성하께서는 새로운 위안을 받으셨고 살레시오회의 총장과 함께 기뻐하십니다. 성하께서는 살레시오 살레시오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더욱 더 힘을 살레시오회의 사업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물론 돈 루아는 오라또리오로 돌아온 후 제일 먼저 대회에서 일어난 모든 내용을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알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회의 훌륭한 결과는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우리를 부르신 우리 수도회에 영광을 가져다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속해있는 수도회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가 알고 있다면, 이 대회는 전보다도 한층 더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하늘의 은총을 받을 만큼 행동하도록 우리를 채촉 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는 사문 ( 死文 ) 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돈 루아가 말했듯이 “대회의 메아리”는 9월 11일에 발살리체에서 협력자들의 모임을 갖게 했다. 주교 4명, 2백명의 책임자들과 기타의 사무원들이 참석했다. 회합의 목적은 돈 보스꼬의 정신에 따라서 살레시오 협력자들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볼로냐에서 채택한 결의를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것이었다.
제 2차 국제대회는 1900년 11월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개최되었다. 그 해는 첫 살레시오 선교사들이 그 도시에 도착한지 25주년이 되는 해였다. 돈 루아를 대신해서 바오로 말베라 신부가 대회에 참석했고, 특별 시찰자로서 남 아메리카의 살레시오 지부를 방문했다.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에서 협력자들이 참석했다.
대회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수도회의 사업을 보다 잘 인식하고, 그 지역의 협력자들에게 그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돈 보스꼬의 사업이 일어나 효과적으로 추진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볼로냐 대회 때처럼 이 대회에서도 여성협력자들이 비범한 원조를 고려했다.
1903년 5월 제 3차 국제대회를 오라또리오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에 앞서서 대성전에서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대관식이 성대히 베풀어졌기 때문에, 1차, 2차 대회 때 보다도 더 많은 대표들이 참석했다. 추기경 3명, 주교 29명이 참석했다. 스밤빠 추기경은 협력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아아론이 모세를 위하여 일하였듯이 살레시오 회원들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살레시오 회원들의 팔을 부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이 대회는 분명히 성공할 것이고 대중의 성화와 하느님의 영광, 그리고 사회의 쇄신이 성취될 것입니다.”
교황성하는 대회의 성공을 빌며 대회가 풍성히 열매 맺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 대회의 한가지 결과는 시대의 요구에 더욱 일치하여 협력자들이 활동하도록 계획한 것이었다.
우연히도 교황의 서한은, 레오 13세 교황이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보여준 마지막 호의였다.
레오 13세 교황은 서거로 인해서 돈 루아는 협력자들의 훌륭한 것을 잃었다고 하지만, 전임자처럼 협력자 운동에 대해서 아무 열정적인 비오 10세 교황을 모시게 되었다.
리오 10세 교황은 뜨레비소 신학교 교장 재임시 이미 협력자로 등록했었다. 돈 루아가 이제까지의 활동을 보고하자 교황성하는 1904년 8월 14일에, 장문의 아름다운 서신을 돈 루아에게 보냈다. 그 서신에서 교황은 수도회의 급속한 발전에 감탄하시고, 살레시오 회원들과 함께 협력자들의 활동을 권장하셨다. “우리는 모든 교구와 도시, 모든 본당에서 협력자 운동을 전개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살레시오회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중대할 것을 권장합니다. 수도회는 젊은이들의 크리스찬 교육에 온전히 헌신하고 사회에 크나 큰 도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 신자들은 협력자 연합회에 등록함으로 가장 적절하고 공로가 되는 부담감도 느끼지 않고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크게 협력하는 것으로 그들은 살레시오 가족을 증대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협력자 연합회가 계속 성장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어느 곳에나 협력자들이 존재하고, 창설자의 정신이 살아있고 창설자를 사랑하는 도시와 마을에 협력자들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협력자들의 수가 날로 증가하기를 바라고, 여러 주교들의 호의와 열성에 감사하는 바입니다.”
돈 루아는 1909년 11월 22일부터 24일까지 칠레의 산띠아고에서 개최된 제 6차 국제대회가 끝난 후 겨우 몇 개월을 더 살았다. 교황대사는 중미에 교황사절로 새로 부임한 깔리에로 대주교와 전칠레의 교계 ( 敎界 )가 참석한 가운데 이 대회를 통활했다.
1909년 8월 30일에 돈 루아는 교구 책임자들의 모임을 소집했다. 그들은 발살리체에 있는 돈 보스꼬의 무덤에서 돈 루아의 주재로 모임을 가졌고, 그 모임에 또리노의 대주교 리켈미 추기경이 참석했다. 아주 뜻밖에도 교황성하가 “사랑하는 아들” 돈 루아에게 보내는 서한이 도착했다.
이 특수한 대회는 축제 오라또리오의 발전에 관심을 모았다. 그들은 오라또리오를 살레시오 사도직의 가장 주요한 요소요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도착했다.
이 특수한 대회는 축제 오라또리오의 발전에 관심을 모았다. 그들은 오라또리오를 살레시오 사도직의 가장 주요한 요소요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돈 루아가 협력자 증가 운동에 얼마나 성공했는 가는, 1880년에 산베니뇨 까나베세에서 협력자들에게 돈 보스꼬가 이야기할 때는 그 들의 수가 3천명이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돈 루아는 8개 국어로 인쇄되는 “살레시안 회보”를 받아보는 협력자들의 수는 30만이라고 했다.
협력자들에게 대한 돈 루아의 태도는, 돈 보스꼬가 사망한 후 막대한 채무를 눈 앞에 놓고 그가 흔히 하던 말에 가장 잘 요약 되어있다. 돈 루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있고 협력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XII. 인생의 황혼길에서
돈 루아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은, 그가 그런 인물, 그런 생활에서 인생 70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극기, 보속, 자아포기 꽉 짜여진 시간표 밤샘, 음식과 기후의 변화, 해마다 수 개월 간의 여행, 급속히 발전하는 수도회를 운영하는 무거운 짐,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근심과 번민, 타고난 신체적 약질 ....... 또 하나 놀라운 일은 그의 가족 중에 유일한 생존자인 안또니오가 1889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루아 아버지의 첫 번째 결혼에서나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 중에서 훌륭한 건강의 받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돈 루아의 건강이 두드러지게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메씨나 지진 소식을 들은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곳 살레시오 학교에서 5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할 때, 그의 둘레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상당히 노쇠해 보이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정신적인 고민 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그를 괴롭혀 온 육체적 고통을 당해야했다. 눈이 점점 더 나빠졌고 다리는 꼶아 있었다. 오른쪽 다리는 1908년 8월 20일에 란조에서 일어난 사고 이래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 때 한 회원이 중심을 잃고 돈 루아의 발목을 밟았었다.
1909년 5월 24일, 돈 루아는 다음 달에 돈 보스꼬 시성 조사 수속이 교황청에서 시작된다고 지부에 알렸다. 조사가 계속 되는 동안 그는 돈 보스꼬의 영웅적 덕행을 증언하면서 6월과 10월 사이에 30 차례나 로마로 왕래했다. 이 같은 노력은 돈 보스꼬의 시성 조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돈 루아는 7월 말에 스페인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회원들과 함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박해는 1936년의 무서운 날들의 전조를 보이는 것이었다. 마따로에서는 학교 문을 태워버리고, 탈출하는 회원들에게 총을 쏘아댔다. 사리아에서는 이탈리아 총영사관이 적시에 개입함으로 살레시안들이 구제되었으나, 바르첼로나에서는 교회와 학교, 고아원과 수도원을 전면적으로 습격하여 성요셉 살레시오 교육기관을 불지르고 수녀들의 지부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은 이 습격에서 살레시안이나 수녀나 고아 중 한 사람의 인명 피해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바라께의 사건이 일고 있을 때,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는 반성직자 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살레시안들이 불신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용두사미격으로 실패했을 뿐 아니라 선동자들에게 도리어 화가 미치기까지 했다.
그 밖에 마음을 뒤흔들어 놓지는 않아도 괴롭히는 근심거리가 수 없이 많았다. 예를 들면, 아구아 데 디오스의 나병원으로 인해서 당한 반대, 여러 건물을 파괴한 멕스코의 지진, 차기 총회준비, 돈 루아가 주장한 피정....... 이 모든 것을 한 인간이 더구나 돈 루아과 같은 인간이 감당해 내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돈 루아가 죽음에 가까웠을 때, 정부에 있는 그의 친구 몇몇이 그에게 훈장이나 칭호를 얻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돈 루아는 그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마침내 그는 이런 말로써 그들을 진정시켰다. 나는 십자훈장을 받으라면 동의하겠다고 했다. “어떤 십자훈장이냐?”고 그들은 물었다. “십자훈장”의 종류도 많았다. “노동의 십자훈장”이라고 루아는 대답했다.
돈 루아는 몇몇 회원들에게 자기에게는 죽음이 임박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고, 그가 잘 되기를 비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없이 자기의 금경축을 지내게 되리라고 되풀이 말했다.
1901년에 돈 루아는 남 아메리카의 선교사 파씨오 신부에게 자기 비서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파씨오 신부가 이에 동의하자 돈 루아는 9년 동안만 비서직에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2년 후에, 파씨오 신부가 남 아메리카의 친구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느냐고 묻자, “신부는 남 아메리카로 돌아가지 못하오”라는 돈 루아는 대답했다. “아직 7년 동안을 더 내 비서로 머물러 있어야 되겠오”
1886년에 란다쬬에 있는 살레시오 지부를 방문했을 때, 돈 루아는 30년 동안의 장기 계약서에 서명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그 이유를 여러 회원들에게 말했다. 즉 그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고 또 후임자에게 그런 짐을 남겨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러한 질문을 한 후에 아주 지성적이며 진지한 사람으로 평판이 자자하던 브루나 신부는 다음과 같은 계산을 해냈다. 돈 루아가 그 해에 총장으로 선출되어 12년 임기를 두 번 마친다면, 그는 1910년에 사망할 것이다.
돈 루아는 2년 후에 돈 보스꼬를 계승했고 두 번의 임기를 보냈는데, 한번은 10년이고 또 한번은 12년이었다.
하지만 1909년은 돈 루아의 친구들에게는 기쁨에 넘치는 해였다.
7월 29일에 돈 루아의 사제서품 금경축을 시작한다고 공포되었다.
1860년 7월 29일에 사제품을 받았었다. 금경축제 해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전에서 장엄하게 시작되었고 돈 루아는 소년들과 학생들, 회원들과 협력자들이 모인 가운데서 미사를 봉헌했다.
10월 21일, 돈 루아는 다음 해에 있을 총회의 기초작업을 준비하기 위하여 평의원들과 함께 산 베니뇨로 갔다.
그는 오라또리오로 돌아와서는 침대에 누웠으나 잔일을 전혀 놓지는 않았다.
회원들 앞에 다시 모습을 보이던 1월 중순경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 눕게 되었고, 이번에는 그를 돌보던 의사들이 미사를 드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의사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아침에 미사를 봉헌했으나 간신히 미사를 끝냈다.
15일 아침, 돈 루아는 편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우편물을 분류해서 비서들에게 주는 일도 힘이 들었다. 그는 전보다도 시력이 더 나빠져서 거의 읽지 못했다.
“이것을 갖다가 리날디 신부에게 드리고 처리하라고 하십시오.
나는 더 이상 일할 수 없습니다.“ 하고 발레스뜨라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그는 할 일ㅇ르 다했다. 그는 나이 어린 수도회를 강화했고 발전시켰으며 수도회의 시야를 확대시켰다. 살레시안들의 수를 768명에서 4천명으로 증가시켰고 64개의 지부를 345개로 늘렸다.
1888년, 그가 총장으로 부임했을 때 살레시오 회원들은 6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30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 살레시안들에게 세계적으로 빛나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는 살레시안들에게 아무런 채무도 넘겨주지 않았다.
살레시오회 부총장인 필립고 리날디 신부는 돈 루아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자 곧 살레시오 모든 지부와 그가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전 세계에서 돈 루아의 회복을 비는 기도가 전개되었다. 가까이 있는 친구들은 돈 루아를 방문하여 기도를 약속하고 회복되기를 바랬다. 이들 중에는 지방의 저명 인사들, 왕족과 정치인들, 추기경과 대주교들, 정부 지도자들이 있었다.
메르시에 추기경은 로마로부터 비오 10세의 강복을 전해왔다.
추기경은 교황강복을 전한 다음, 돈 루아의 손을 잡고 존경을 표시하면서 돈 루아에게 키쓰했다. 그로부터 2주간 후에는 돈 루아의 친근한 벗인 마피 추기경이 찾아왔다. 추기경은 축제 오라뜨리오를 주교관 근처에 세웠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추기경은 돈 루아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보여주었다. 그는 돈 루아 옆에 무릎을 꿇고 강복을 청했다.
로마에서는 그의 병으로 고위층에 얼마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지 로마 주재 살레시오 총대리를 통해서 전해왔다. 국무성 장관 메리 델 발 추기경, 람뿔라 추기경...... 이들과 기타 여러 사람이 오라또리오로 메시지를 보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어떠했던가 - 한 수사가 돈 루아의 병환 소식을 듣고 곧 돈 루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였고 이 사실을 돈 루아에게 써 보냈다.
돈 루아는 “우리의 목숨은 하느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약속을 풀어줍니다”는 회신을 보냈다.
대성전에서 거행되는 신심행사나 아름다운 전례에 돈 루아가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알자 오라또리오 전체는 슬픔에 잠겼다. 공동체와 개개인들이 돈 루아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다.
2월 24일 아침에, 돈 루아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던 형 알로이시오를 꿈에 봤다고 했다. - 그는 돈 보스꼬의 방랑하는 오라또리오로 돈 루아를 데리고 갔고, 돈 보스꼬는 그의 성덕이 성 알로이시오 곤사가의 성덕과 같다고 한 일이 있었다. - “오늘 내가 죽어가고 있었는데, 알로이시오가 와서 나를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가는 꿈을 꾸었오”하고 돈 루아는 말했다.
2월 25일은 알로이시오의 57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돈 루아는 한번도 그를 잊어버린 일이 없었다.
이 특수한 날에, 돈 루아는 그 옛날 함께 지내던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크리스찬 형제수사회의 원장이 모든 형제회원들과 학생들의 기도를 돈 루아에게 바치려는 학생 대표들을 데리고 왔다. 그 옛날, 루아도 크리스찬 형제 수사회에서 경영하는 학교 학생이었다. 그들이 방문함으로써 루아는 그 얼마나 애틋하고도 서글픈 추억을 더듬엇을까!
돈 루아를 위해서 바친 기도와 희생은 고무적인 효과를 가져온 것 같았다. 3월 중순 경에 돈 루아의 상태는 두드러지게 좋아졌다. 그는 다시 신심행위를 시작했다. 그는 맑은 정신으로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의 목록과 모든 서랍속에 있는 내용을 받아쓰게 했다.
“종이를 갖다가 다음과 같은 임시 시간표를 적으시오”하고 충실한 시종인 발레스뜨라에게 말했다.
5:00 기상
5:20 미사 - 영성체와 감사기도
6:15 묵상
6:45 휴식
8:00~09:00 의사들의 방문과 조반
9:00 치료, 가능하면 외부 손님 접대
12:00 점심과 약간의 대화
2:00 휴식
3:30 기도, 영적 독서, 기분전환
4:00 치료
6:00 휴식과 기분전환
8:00 저녁식사, 기도, 취침준비
주의사항. 발레스뜨라 수사는 이 프로그램이 이행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돈 루아가 언급한 “치료”란 다리에 붕대를 감는 것을 의미했고, 이 무렵에 다리는 온통 꼶아 있었다. 다리의 아픔은 오랫 동안 누워있어서 한층 더 했다. 발레스뜨라는 옷을 입힐 때 아프냐고 물었다.
돈 루아는 번합없이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았지”하고 대답했다.
단지 몇 번 “조금, 글쎄 조금 아픈데”하고 대답한 일이 없었다.
발레스뜨라는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루아 신부님을 부축해서 안아 다가 베개에 눕히지 못할라치면 신부님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돈 보스꼬를 안아들어다가 베게에 눕히려고 했지만 못했지요. 그 일이 내게 왔군요. 하였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하늘 나라로 끌어올리겠다’고 돈 보스꼬가 말했다고 내게 두 번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발레스뜨라는 밤새워 지키고 있던 다른 회원들과 고대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에 돈 루아의 방에 들어왔다. 기숙사 책임자는 아침에 소년들을 깨울 때 손뼉을 치면서 “주를 찬송합시다!”하고 소리친다. 그러면 소년들을 “천주께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래서 돈 루아가 잠을 깨고 약간 움직이면, 발레스뜨라는 손뼉을 치면서 “주를 찬송합시다!”하고 소리치면 돈 루아도 “천주께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돈 루아는 미사에 참여할 준비를 한다. 그는 세수를 하고 수단을 입고 나서 침구 위에 커다란 흰 보를 편다. 후에 돈 루아는 수단을 입을 수 없게 되자, 쇼올을 뒤집어썼고,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자 검은 스카아프로 대신했다. 그는 미사경본을 읽으며 미사에 참여했고 성체를 모셨다.
건강 상태는 점차로 악화되었다. 얼굴이 부어오르고 손과 발도 부어올랐다. 이런 현상은 의사들이 노쇠성 심장염이라고 진단한 그의 병으로부터 오는 자연적인 결과였다. 미사가 끝나면 미끄러지듯 침대에 쓸어졌고 왼쪽에 아픔을 느꼈다.
돈 루아는 자기의 몸이 악화되어가는 것을 알고 병자 성체를 청했다. 리날디 신부는 촛불을 든 회원들을 앞세우고 돈 루아에게 병자성체를 모시고 왔다.
돈 루아는 병자성체를 하기 전에 자기 침대 둘레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자 했다. 베개에 몸을 의지하고 맑은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런 형편 속에서도 여러분에게 몇 마디 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나는 여러분이 나를 위해서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여럿이 앞으로 할 일들을 고맙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내가 또 다시 여러분에게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른 회원들에게 전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이 집에 지금 살고 있는 또 장래에 이 집에서 생활할 모든 이들을 위해서 내가 청한 것을 주께서 들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돈 보스꼬의 합당한 아들들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랍니다. 돈 보스꼬는 임종 때에,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만날 것이다“고 우리 모두와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돈 보스꼬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선물입니다. 돈 보스꼬는 모든 아들이 자기 주위에 모이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세 가지를 권장합니다. -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대한 큰 사랑, - 그리스도신자들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 - 교회의 목자들, 특히 교황성하께 대한 존경과 순종입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남겨주는 선물입니다. 돈 보스꼬의 합당한 아들이 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하십시오. 나는 끊임없이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바라는대로 주께서 나를 하늘 나라로 데려가시고 돈 보스꼬에게로 데려가신다면, 나는 모든 지부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 지부를 위해서는 각별히 기도하겠습니다.”
부활주일에는 한 충 더 상태가 악화되었다. 색전증점상 ( 塞栓症占床 )으로 언어와 의식을 점차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사들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하면서 장상들의 근심을 진정시켰다. 돈 루아가 언어와 의식을 회복하자 리날디 신부는 병자 성사를 받으라고 했다. 돈 루아는 주저치 않고 동의했다.
알베라 신부는 최고 평의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병자 성사를 비밀리에 집행했다. ( 다른 사람들이 마음 조아리지 않기 위하여 ) 병자 성사를 받은 후 돈 루아는 마음이 한 충 가벼워 졌고, 병자 성사를 부탁한 리날디 신부에게 감사했다.
그 즈음에 돈 루아가 골똘히 생각한 것은 성소와, 영혼들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들의 증가와, 나날이 늘어가는 선교사들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을 통해서 그 문제를 가끔 제시했지만, 죽음이 임박한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문제를 한층 더 중대시켰다.
“성소! 성소!”그는 거듭 거듭 말했다. “하느님께서 물론 우리에게 성소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소를 일깨워야하고 무엇보다도 보존해야 합니다.”
프란치스꼬 체루띠 신부가 성소를 위한 특별 기도를 만들 것을 제의하자, 돈 루아는 즉각 동의했다. 그 기도는 다음과 같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겸손 되어 비 오니 우리 살레시오회에 착하고 합당한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그들을 지켜주소서!
돈 루아 에게 그 기도문을 읽어주자 그는 그 기도문을 승인하고, 한 마디 한 마디 음미한 다음 그 사본을 베개 밑에 두었다.
이 때부터 돈 루아의 진료 보고서는 점차로 쇠퇴해가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죽음이 가까웠다. 리날디 신부는 모든 지부에 그렇게 보고했고, 대성전에 모여 성체 앞에서 3일기도를 시작했다.
4월 4일 저녁 돈 루아는 모여 성체 앞에서 3일 기도를 시작했다. 몇몇 수녀들이 다녀 간 다음 프란체시아 신부를 급히 불렀다. “예절 책을 갖다가 임종 기도를 외워주십시오!
“하지만 돈 루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말햇다.
“예, 예 나를 위해서 임종 기도를 비쳐주십시오.”
장상들은 돈 루아 곁에서 임종도문을 바치면서 어쩔 줄 몰랐다. 돈 루아는 다시 안정을 되찾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바쳤다.
그 기도가 끝나자 또 다시 놀라움을 가져다주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밀어닥치는 죽음의 공포였다. 돈 루아에게도 죽음이 가까워오자 이 큰 영혼에게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였다.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이 죽음을 걷어주시든지 혹은 두려움을 감해주시든지 해달라고 아주 약한 음성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돈 루아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다. 돈 루아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말마의 고통을 참아 견딜 힘이 없을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기 위해서 더 한 층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내가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알베라, 신부는 위기가 지나갈 때까지 위로의 말을 속삭였다. “약한 힘을 반드시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신뢰하십히오.”하고 알베라 신부는 말했다.
돈 루아는 “나를 어디에 뭉어주겠느냐? 고 알베라 신부에게 물었다.
“돈 루아,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건강을 회복하고 보다 많이 좋은 일을 하실 것을 생각 하십시오”하고 알베라 신부는 괴로워했다.
돈 루아는 알베라 신부의 괴로움을 덜어주듯이 이렇게 말을 계속했다. “나는 마지막 날에 나의 보잘 것 없는 시체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어딘가에 묻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4월 5일 아침, 돈 루아는 성체를 영한 다음 리날디 신부에게 말했다.
“저의 병세가 어떻습니까?”
“아주 좋지 않습니다. 신부님”
“제 상태가 아주 심각한가요?”
“예 희망이 없는 듯 싶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셨나요?”
“예,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기도도, 치료도, 의사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 이젠 더 생각할 것이 없나요?”
“기적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청하기를 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잠시 기도한 다음, 돈 루아는 또 물었다. “이제 또 할 것이 남아있나요?”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잠시 후 . “언제 제가 죽을까요?”
“어쩌면 오늘 저녁에, 어쩌면 몇 시간 안에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 걱정하십시오. 때가 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습니다. 이제 나를 조용히 내버려 두십시오. 나를 만나러 오는 모르깐띠 대주교 외에는 내 방에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십시오. 나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내 영혼을 준비하고 싶습니다.”
라벤나의 모르간디 대주교가 오자 돈 루아는 팔을 벌리고 그를 맞았다.
“나는 행복합니다”하고 돈 루아는 말했다. “나는 정말 행복합니다.”
대주교가 강복을 청하자 돈 루아는 서슴치 않고 그에게 강복했다.
돈 루아는 말했다. “이젠 제가 강복을 받을 차례입니다.”
프란체시아 신부가 이제는 돈 루아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돈 루아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회복되기 위하여 기도하지만 나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 며칠 동안, 돈 루아는 자기 침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와 화살 기도를 하도록 자기에게 일러달라고 했다. 돈 루아의 고해 신부이며 늘 그의 곁에 있던 프란체시아 신부는 그에게 화살기도를 하라고 했다. 마지막 날, 프란체시아 신부는 돈 루아에게 속삭였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시돌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돈 보스꼬에게 우리 인사를 꼭 전해주십시오.”
돈 보스꼬의 이름을 듣고 그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프란체시아 신부가 돈 루아의 귀에 대고 “주여, 빨리 임하사, 나를 도와주소사,”하고 기도하자, 돈 루아는 “주여, 빨리, 빨리!” 하며 되풀이했다.
돈 루아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모든 살레시안 지부에서 바치는 기도문이었다. “지극히 인자하신 동정마리아여 내 영혼을 구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렇습니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그것이 전부입니다.”하고 그는 나직히 말했다.
밤 10시에, 돈 루아는 단말마의 고통에 들어갔고 의식을 잃었다 가는 이따금 조금씩 회복했다.
4월 6일 아침 8시 15분에, 진료보고서는 임종이 임박했다고 알렸다. 생도들도 살레시오 회원들, 수녀들과 친구들, 은인들과 평민들이 임종하는 돈 루아의 곁을 지나갔다.
9시 37분, 아주 작은 표시와 함게, 돈 루아의 영혼은 돈 보스꼬와 하느님 곁으로 떠나갔다.
돈 루아를 보살피던 바디스띠니 의사는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하여 몸을 굽혔다. 그는 둘러있던 사람들을 쳐다보고 돈 루아의 영혼이 떠났음을 손짓했다.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깊은 구렁속에서” ( De Profundie )를 외우기 시작하자, 의사는 몸을 굽혀 죽은 사람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그것은 세상을 떠난 성인을 존경하는 첫 번째 표시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돈 루아가 항상 입었던 낡은 수단을 입히고,
사제가 죽으면 하는 관례대로 그에게 중백의 ( 中白衣 )를 입히고 영대를 둘러 주었다. 그의 손에는 여러 해 동안 오라또리오 주위를 돌아다니며 바쳤던 로사리오가 감겨 있었다. 그의 시체는 오라또리오 마당에 있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당에 안치 되었다.
그곳은 돈 루아가 첫 미사를 봉헌하던 곳이고, 돈 보스꼬를 대신해서 매 주일 짤막한 훈화를 하던 곳이다. 돈 루아의 차가운 입술에 아직도 남아있는 엷은 미소를 보면, 그가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보였다.
군중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돈 루아의 시체 앞을 지나갔고 살레시안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전했다. 각계 각측의 남녀 노소들이 모여왔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눈으로 그들을 본 돈 루아 앞에서도 평등하다는 것을 느꼈다. 3일 동안,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줄을 지어 사람들이 시체 앞을 지나갔다.
평민과 왕실, 바띠칸과 교황성하로부터 조위문과 조전이 오라또리오로 쏟아져 왔다. 돈 루아의 생애를 존경하고, 한 인가, 위대한 영혼의 손실을 슬퍼하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신문은 언급을 극히 삼갔다. 정치적 색체를 띤 신문도 돈 루아의 성덕과, 동료들을 위해서 바친 희생적 모범과, 정의와 사랑을 위해서 자신을 바친 그의 헌신에 경의를 표했다.
돈 루아를 존경하여 시민의식 ( 市民意識 )을 거행했다. 그 중에도 가장 뜻 깊은 의식은 또리노 시의회 ( 市議會 )에서 주최한 것이었다. 그 의식은 자유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자유롭다”는 말을, 교회와 종교에 대해서 쉽지 않았던 당대의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그것은 인간화의 영향과 인간의 보편적 호소를 높이 찬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연설자 - 살레시안 학생 - 에게 매번 박수를 보냈고, 연설자는 고인을 찬양했다. 그런 움직임은 시 (市 )를 대표하여 살레시오 장상에서 조의 메시지를 보내도록 하였다. 3일 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약 10만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 장례식에는 가까운 지역의 주민들 분 아니라 외국 사람들도 참석했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당에서 대 성전으로 유해를 옮겨 반구 ( 半球 ) 모양의 큰 기관 ( 器官 )에 안치했다. 전 로마 주재 살레시오회 총대리였던 마렌고 주교가 미사를 드렸다. 돈 루아는 로마와의 관계로 한 때 이 주교와 많은 일을 했었다.
그 미사엔 최고 평의원들과 교회 당국자들, 지방과 전국에서 모인 수녀들, 살레시안 학교와 오라또리오의 소년 소녀들, 그리고 수많은 신도들이 참여했다.
구경꾼들이 장사진을 친 가운데 3킬로나 계속된 장례 행렬이 끝난 후, 저녁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오늘 오후 돈 루아 장례식에서 본 그런 시위는 일찍이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 날 발살리체에 있는 돈 보스꼬 무덤 곁에 안치하기 위하여, 유해를 다시 대성전으로 모셔왔다.
유해를 무덤에 모신 후, 오라또리오 책임자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아름답고 감명적인 고별 인사를 했다.
“땅 위에 있는 젊은이들의 이름으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지막 다정한 표시를 관 위에 남깁니다. 지금 이 차가운 대리석 앞에서 우리는 돈 보스꼬와 당신이 우리에게 남기고 가신 가르침에 성실할 것을 엄숙히 약속합니다. 그 가르침은, ”노동“과 ”기도“라는 두 마디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것 만이 우리가 당신의 무덤 위에 바치고 싶은 꽃다발입니다”
“나는 돈 루아를 볼 때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복자로 모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교황비오 10세가 돈 루아에게서 받은 인상을 기술 할 때 사용하던 말씀이다.
교황 비오 10세만이 그런 말씀을 한 것은 아니다. 돈 루아 이야기를 꺼내면 그를 성인으로 생각하고 이야기 한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또리노 대학 역시 교수인 베드로 피델레는 알베라 신부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만일 돈 루아가 중세기에 살았더라면, 사람들은 연미사를 드리지 않고 그 대신 성 미카엘 루아를 찬미하며 창미사를 봉헌했을 것이다.”
교회 측에서는 그처럼 자발적인 방법을 승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 루아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일을 했다. 즉 그들은 장래를 위해서 돈 루아의 시복 조사를 시작했다.
1922년 5월 2일, 또리노의 대주교 리켈미 추기경은 시복을 위한 교구 조사를 시작했다. 이 조사는 고인의 생애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검사하는 것이다. 그 조사는 1929년 8월 31일까지 계속되었다. 1936년에는 고인의 저술을 모두 검토하였고, 고인이 성인으로서 영광을 받기에 공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이 없다는 “denon cultu" 결정이 내려졌다. 이 조사의 결과를 로마로 보냈고, 로마에서는 1936년 1월에 시복 조사 수속이 시작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1939년 5월 8일에 로마에서의 시복조사가 끝났다.
다음 단계에는 교회법에 따라서 유해를 발굴하고 승인하는 것이었다. 또리노의 포싸띠 추기경과, 교회 및 사회의 권위자들의 임회 하에 관을 먼저 또리노로 옮겼다., 관은 폐쇠왼채 대성전에 있는 유해 소성당에 안치되었다. 그 곳에서 하느님의 때, 영광의 날을 기다렸다.
그 영광의 날은 1970년 6월 16일에 왔다. 그 날 예부성성에서는 돈 루아의 시복을 위해서 제시한 두 가지 기적을 인정했다.
한 가지 기적은 습성 늑막염을 앓던 알드레아 빨리아리 살레시안 신부의 병이 나은 것이었다.
또 한 가지 기적은 간질병을 앓던 베데딕따 바까리나 소녀의 병이 나온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질병의 나음은 돈 루아의 전구로 이루어졌음 선언 했고, 또 순간적이로 오나전히,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고 선언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1년 6월 10일에 성심의 결정에 날인 하였다.
이듬해 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교계 ( 敎界 )의 멤버들과 살레시오 회원들, 살레시오 수녀들과 협력자들, 소년들과 친구들이 모인 앞에서 돈 루아는 신도들과 온 세계의 존경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공식으로 선언했다.
<돈 루아는 1972년 10월 29일 오후 6시(한국시간) 로마 베드로 대 성전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