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mma Margherita|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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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들이 우글거리는 시대에 태어난 여자 아이



단호하고도 강한 번째 외침


178841일 카프릴리오의 오키에나 가족들은 정에 겨운 농담을 했었다. 살고 싶은 의지를 단호하고 강한 울음소리에 터트리며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은 어머니 도미니카는 안면에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그녀가 남편 멜키오레에게 선물로 준 여섯 번째 아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많은 형제자매들(마리아, 쥴리아, 테레사, 요한)은 오래 살지 못하고 천사들에게로 갔다. (왕정시대의 농부들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생후 1년 안에 25%의 아이들이 생명을 잃었고 나머지 25%4살 안에 생명을 잃었다).

그녀는 당시에 매우 아름답고 대중적인 이름인 말가리타라는 이름으로 같은 날 세례를 받았다. 말가리타라는 이름은 “보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농부들에게 이 작은 꽃은 가운데 노란색 광채를 두른 화관을 가진 이슬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운 흰색 잎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사제가 그녀의 이마에 물을 부으면서 세례를 주고 있는 동안 생존한 유일한 자매인 세 살 위의 마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생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들은 온 생애를 통해서 기쁘고 전적인 우정으로 일치하게 될 것이다.


농장에 들어온 러시아 기병대


말가리타는 그녀의 탄생 1년 후에 자유, 평등, 박애라는 세 단어의 매력과 단두대의 유혈이 낭자한 그늘로 온 세상을 바꿔 놓았던 사건인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깨닫게 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평화롭고 작은 마을에도 들이닥치게 되었으며 시장은 프란치스코 보스코와 그녀의 혼인 문서를 프랑스어로 기록하는 것을 의무규정으로 내세웠다.

말가리타가 9살 되던 해 카프릴리오에 속해있던 아스티 지역에서도 전쟁과 파괴를 일삼았던 프랑스의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피에몬테 땅을 침략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전쟁과 게릴라 활동이 판을 치던 시대는 1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햇빛으로 말라버린 옥수수 이삭을 바라보던 열 한 살의 어린 말가리타는 한 무리의 러시아 기병대원들이 농장에 들어온 것을 보았다. “전쟁은 전쟁을 낳는다”라는 말처럼 모든 군인들에게 내린 명령에 따라서 나폴레옹과 싸운 그들은 집과 들판의 곡식을 강탈했다. 말들은 말가리타가 지켜야 했던 옥수수 이삭이 나온 밭에 들어가 튼튼한 이빨로 옥수수를 따먹기 시작했다. 말가리타는 먼저 소리를 지르고 나서 말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몰려서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웃고 있던 그들의 상관에게 매우 화가나서 말하였고 용기를 내어 삼지창을 움켜쥐고 말의 배를 힘 있게 찔렀다. 이번에 말들은 놀라서 달아났고 그 말 뒤로 군인들이 말을 잃어버릴까봐 뛰어가기 시작했다.


강도들의 시대


전쟁과 게릴라들이 판치던 때에 피에몬테는 “강도들의 땅”이 되었다. 말가리타는 10살이 채 안되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삼촌들로부터 그 사람들이 얼마나 무법천지로 행동하는지 공포에 떨면서 들었다. “왕의 복수자” 혹은 “프랑스 사람들의 복수자” 아니면 “교황님의 복수자”라고 자신들을 부르면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워버렸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에서 그녀는 강도들이 아스티를 공격했고 프랑스 군인들을 죽이고 교회와 숙소들과 신학교를 약탈했다는 것을 알았다(어린이는 가능성이 적은 것을 들으려고 그들의 귀를 쫑긋이 세운다). 그 때가 17995월이었다. 지금 프랑스 군인들과 기병들이 (나쁜 짓을 한 직후 도망쳤던) 강도들을 뒤쫓고 있었다. 강도들은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고 패잔병은 누구든지 총으로 쏴 죽였으며 농장을 불태웠으며 여인들과 아이들까지도 서슴지 않고 죽였다.

강도들은 한 브란다 데 루치오니(Branda de Lucioni)의 명령을 받은 대대에 속해있었다. 그들은 “크리스천 갱”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기습공격과 강도짓과 잔인한 복수를 일삼고 있었다. 그들은 (전투용과 사냥용) 총보다 더 나은 무기, 퇴비용 갈퀴(삼지창), 낫과 괭이 등으로 프랑스 군인들을 만나는 대로 공격하였고 프랑스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질러 이에 응수하였다. 사람들은 숲으로 도망쳤다. 그래서 “크리스천 갱”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토리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든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누구도 피에 굶주린 강도들을 동맹자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 브란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의 무리들은 피에몬테와 리구리아 사이의 경계 지역에서 난폭한 행동을 계속하였다.


피에몬테가 프랑스 영토가 되다.


1801년 나폴레옹은 피에몬테를 6개의 지역으로 나누면서‘프랑스의 27번째 군속령’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프랑스어과 프랑스 법을 강요하였고 피에몬테 군대는 프랑스 군대로 편입되었다. 말가리타는 프랑스 군대에 “징집영장”을 받은 첫 번째 젊은 사람들이 카프릴리오에서 출발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24새 되던 해인 1812년에 대경실색한 가족들과 함께 더 많이 이 같은 광경을 보았다. 그들은 러시아와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 나폴레옹으로부터 징집되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튼 군대의 선두에서 멀고도 신비스런 나라를 침략했다. 모스크바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엄청난 몰락을 경험하게 되었고 비참한 후퇴를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은 60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았고 그들 중 25천명이 이태리 사람이었다.



3

카프릴리오에서 보낸 젊은 시절


성이 없어진 최근 마을 .


카프릴리오는 몬페라토의 기복이 심한 녹색 언덕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고원 위에 위치한 4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 당시에 집들은 라디카디 파쎄라노(Radicati Passerano) 백작 소유의 성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금 그 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농촌이 그렇듯이 카프릴리오를 나눈 구역들이 아직도 있다.

말가리타 오키에나는 포도나무를 기르는 볕이 드는 지역과 푸른 나무로 둘러싸여 질식할 것 같은 라 체까(La Cecca)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말가리타는 창문을 통해서 트라베르사 강으로 흘러드는 개천이 흐르는 깊은 계곡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모리알도의 집들의 지붕 너머 베키 지역과 변호사 빌리오네 씨의 넓은 농장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신부의 차림을 한 그녀가 그 계곡을 넘어 베키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번째로 배운 : 성모송


군인들과 강도들을 언덕 위로 데려간 슬픈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가리타는 소박하고 견고한 집의 마당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온유한 시선 아래서 그녀는 언니 마리안나와 주님께서 연년생으로 보내주신 남동생들(프란치스코, 미카엘)과    여동생(루치아)과 함께 놀고 웃으며 지냈다. 다른 모든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말가리타도 병아리와 거위를 만지려고 하였고 고양이의 꼬리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날아가려는 비둘기 뒤를 쫓아가곤 하였다.

말가리타 학교에 간적이 없었다. 그 당시 밭에서 일하는 여자 아이에게 어느 누구도 읽거나 쓰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녀는 유치원에 가 본적이 없었다. 그 당시 유치원이 아직 생기기 않았고 두 세 가정의 아이들로 붐비는 마당은 이미 아이들로 넘치는 유치원이었다. 어느 누구도 “사회화”라는 말의 의미도 몰랐지만 매일 사회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제들은 가정을 축복하러 다녀갔고 노인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었고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첫 번째 말들은 바로 성모송이었다.


등잔 밑에서 들려준 가지 이야기


말가리타가 생의 마지막 시기를 지내기 위해 자신의 아들이 세운 오라토리오의 아이들에게 조리사, 재봉사, 엄마의 일을 하러 토리노에 갔을 때 그녀에게 소식, 옛날 이야기와 호기심에 가득 찬 것들을 물어보던 초창기 어린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돈 보스코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고,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요한 보네띠, 도미니코 루피노, 요한 바티스타 프란체시아는 그녀의 아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를 사랑했던 명랑하고, 지적인 아이들이었다.

기나긴 겨울밤에 그들과 함께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는 동안 맘마 말가리타는 몬페라토 사람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요한의 어린 시절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고 그녀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곁들여 몇 가지 들려주었다. 네 명의 나이어린 살레시오 회원들은 글을 잘 쓸 줄 알았는데 그들은 돈 보스코와 그의 어머니를 알고 싶어 할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은 네 개의 이야기들을 전해주기 위해서 그것을 적어두었다.

그 첫 번째 이야기가 바로 그녀의 옥수수 이삭을 먹고 싶어 했던 러시아 기병대 말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에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마을의 주도로를 따라 산책함


카프릴리오 마을은 한 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 밤나무, 아카시아와 뽕나무들이 경계를 이루며 만들어진 주도로를 가지고 있다. 열네 살 먹은 소녀들에게 가장 흥미 있는 놀이 중 하나인 축일에 웃고 재잘거리며 서로 팔짱을 끼고 이 길을 걸어가는 것 이었다(이것은 오늘날도 아직 그 작은 마을에 남아 있다). 쳐다보고 쳐다보게 하는 것, 아니 그들은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나무 옆에서 모여서 젊은이들에 대한 느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되도록 많은 수가 모여서 움직였고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곤 했다.

말가리타 역시 “자, 너도 오렴. 우리 웃고 재미있는 이야기하러 가자”하고 큰 소리로 초대를 받았다.

말가리타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진지한 얼굴에서 엄마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아침 미사에서 강론을 하던 본당신부는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엄마들에게 아이들의 “보호받지 못한 마음에 악마가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눈 아래에서” 자녀들이 자라도록 해야 한다고 충고하곤 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오늘 난 이미 산책을 했단다. 그래서 벌써 피곤한걸. 난 엄마와 함께 미사에 갔었어. 너희도 알다시피 교회에 갔다 오는 것이 꽤 먼 거리잖아”.


동산 위에서의 벌어진 무도회


여름철에 모든 마을은 자신들의 주보성인 축일을 지냈다. 그날에는 미사와 행렬이 있었다. 새벽이 될 무렵에 트럼펫을 불고 공놀이가 시작된다.

언덕마다 음악이 울려 퍼졌는데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초대가 되었다.

그 당시의 모든 사제들은 춤추는 것을 반대하였다. (지금은 디스코텍에서 벌어지는 추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오라토리오에서 춤추는 것을 조직하고 있다). 카프릴리오의 마죠라(Maggiora)라는 본당 신부는 특별히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춤을 추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겁을 주기까지 했다.

말가리타도 여러 번 초대를 받았었지만 그녀는 정중하게 거절하곤 했다. 한 번은 매우 강요된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몇 시간 전에 본당 신부로부터 들었던 그녀에게 매우 강력한 충격을 주었던 다음과 같은 위협적인 말로 대답했다.

악마와 함께 즐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없을 거야!”


무섭게 구는 할머니와의 동행


열 여살이 된 말가리타는 꽃다운 젊은 여인이 되었다. 그녀를 동반하기 위해서 혹은 그녀에게 구애하기 위해서 기회를 찾았던 많은 구애자들이 있었다. (젊은이들이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행하는 것처럼) 그들은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의 그늘 아래” 앉아서 보낼 한 두 시간을 찾고 있었다.

그녀를 동반 할 수 있는 기회 중 하나는 매주 주일 말가리타가 잊지 않고 미사에 가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같은 친절함에 미소를 지었으나 소리를 지르거나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그들이 피곤해질 때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었는가 하면 미사가 시작되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서곤 했다.

마침내 그녀는 최고의 구원책을 찾아냈다. 착하지만 화를 잘 내는 노파가 있었는데 그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서 힘들게 걸어 성당에 가는 길에 동행할 누군가를 항상 찾고 있었다.    말가리타는 매주일 미사에 가고 올 때 그녀와 함께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구애자들은 두 사람을 만날려고 했지만 노파는 그녀의 이를 드러내 보이고는 지팡이를 휘둘렀고 그들은 포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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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이면서 결혼 첫날부터 엄마인 말가리따



말가리따는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보임


20살이 되면서 말가리따의 친한 친구 모두는 결혼했거나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가리따는 결혼을 주저하고 있었다. 말가리따는 엄마 아빠가 노인이 되었을 때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들 옆에서 살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의 어머니와 나는 하느님 덕분에 건강하게 살고 있다. 너는 좋은 신부와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잖아”라고 하면서 아버지 멜키오레는 그녀를 설득했다.

바로 인접한 모리알도 베키에서는 소작농 프란치스코 보스코가 1811226일에 엄청난 불행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 말가리따와 어린 딸 데레사가 그 당시에 불치의 병이었던 무시무시한 "산욕열"(febbri da parto)로 며칠을 사이에 두고 죽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27세의 나이에 혼자가 되었다. 세 살 된 아들 안토니오가 있었다. 그는 두 개의 지팡이로 겨우 걸을 수 있는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오키에나 가족은 프란치스코 보스코가 오래 전부터 과부로 남게 된 자매 막달레나를 찾아와 도움을 주기 위해서 카프릴리오에 자주 왔었기 때문에 그를 알고 지냈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 멜키오레와 파종과 추수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여러 번 머물렀었고 그렇게 해서 말가리따를 알게 되었고 그녀와도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네가 괜찮으면 우리도 괜찮다"


아내의 탈상기간이 지나자 프란치스코는 멜키오레에게 그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카프릴리오에 가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이 지나 아버지는 아내 도미니카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말가리타를 불러서 프란치스코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는 것을 전해주었다. "만일 너만 괜찮다면 우리도 괜찮다. 네가 우리보다 더 가난한 가정으로 가서 살게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좋은 신앙인이고 건강한 일꾼이란다. 너희는 그 집안에 이미 고통이 들어왔기 때문에 크게 잔치를 할 수 없을 거야. 너는 바로 나이 어린 아이를 돌보아야 할 거란다. 너는 첫 날부터 신부이며 엄마가 되는 거란다.“

말가리따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혼식은 181266일에 카프릴리오에서 거행되었다.    나폴레옹의 법에 따라서 먼저    시장이 프랑스어로 혼인문서를 작성하는 시청으로 가야했다. 이렇게 하고 나서 즉시 혼인예식을 교회에서 거행했다.

말가리따는 24살이었고 결혼식 날에만 결혼 예복과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녀에게 선물로 준 단순한 장신구들로 치장했다. 그녀는 이것들을 트렁크에 넣어두고 베키의 새로운 가족으로 그리고 농장 주인인 빌리오네 씨 집 가까이에서 소작농으로 지내던 프란치스코의 소박한 집으로 살러갔다.



안토니오가 그녀의 품안에서 자라도록 맡겨지다.


그렇게 말가리따에게 가난하고 행복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녀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할머니는 그녀를 주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양 볼에 입을 맞추었다. 갓 네 살이 된 안토니오는 어린 마음 가지고 있던 변덕스러움으로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고는 해도 새 엄마가 그를 안고 쓰다듬는 것을 허용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온 생애를 소작인으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꿈은 (그 시대의 많은 농부들의 꿈이 그러했듯이) 자기 소유의 땅과 집을 가지고 있는 작은 농장주가 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절약의 삶을 살면서 1900 제곱미터의 밭과 포도밭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장모인 멜키오레 오키에나의 외양간에서 살고 있던 동물들을 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는 작고 소박한 집 한 채를 외상으로 샀고 농기구들을 보관할 창고를 만들었고 두 마리의 소와 멜키오레 할머니 방에 두었던 젖소를 위한 외양간과 건초 저장소를 만들었다.

그는 빚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로 조금씩 빚을 갚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가리따와 프란치스코는 그들의 삶을 온전히 일에 파묻고 살지는 않았다. 토리노에서 4년간 맘마 말가리따 옆에서 지냈고 후에 첫 번째 살레시오 회원 중 하나가 되었던 미카엘 루아는 맹세를 한 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돈 보스코의 부모님들은 최고의 그리스도 신자들이셨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이 본당 종교교육에 참여하도록 돌보았던 종교교육에 대해서 좋은 의미를 제공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돈 보스코의 어머니와 돈 보스코로부터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돈 보스코의 어머니께 시선을 돌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녀와 4년을 함께 살았는데 저는 참으로 그리스도 신앙인이었고 경건하고 관대한 마음과 용기 있고 검소한 한 여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4년 동안 웃음꽃이 가득한 생활


181848일 말가리따와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는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815816일 둘 째 아들 요한이 태어났다.

돈 보스코는 그의 회상에서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게 될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노동과 극도의 절약으로 정직하게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농부들이었습니다. 저의 선한 아버지는 혼자서 열심히 땀흘려가며 노환으로 잘 움직일 수 없는 칠순의 할머니를 부양했습니다. 그는 슬하에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전처에서 태어난 안토니오였고, 둘째는 요셉이고 막내는 저 요한이었습니다”.

4년 동안 이 가족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말가리따는 그녀가 낳은 두 아들과 함께 행복한 시절을 보낸 여인이었다. 프란치스코는 기쁘고 풍부한 에너지를 가진 농부였다. 들판에서 석양 무렵에 돌아와서 땀을 닦고 아이들을 안아주곤 했다.


어린 요한을 바스티오니의 성모님께 데려가다.


그 당시에 베키의 언덕과 같은 구릉에서 건강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동정 성모님께 봉헌했단다.”고 맘마 말가리따는 시간이 지나서 요한에게 말하였다. 그 당시에 신생아 사망률은 거의 50%에 육박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이 같은 봉헌은 종교적인 행위였고 걱정으로 가득 찼기에 행한 행위였고 성모님의 권능을 가두어 넣으려는 시도로서 거의 미신에 가까운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만일 말가리따의 행위가 미신적인 공포에서 나온 행위거나 아니면 (온전한 신뢰의 마음으로 성모님의 손에 자신과 아들을 봉헌하는 것이) 참된 신앙에서 나온 행위였는가는 그녀의 삶 안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다. 개방되고 공개된 맘마 말가리따의 삶과 그녀의 아들의 삶이 그 행위 안에서 모든 어머니들의 걱정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만 이것은 특별히 우리에게 진실하고 위대한 신앙이었다는 찬사를 보내게 한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아이들이 두세 살이 되었을 때 수두, 홍역, 유행성이하선염들의 발진성 질병에 걸리곤 했다. 지금은 이 같은 질병을 쉽게 고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 병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곤 하였다. 어떤 아이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 그들의 어머니들은 그를 아스키의 빌라노바에 있는 바스티오니의 성모님 성지에 데리고 갔다. 맘마 말가리따도 어린 요한이 높은 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를 성지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 성지의 기둥 밑에는 요한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른들 가운데서도 생명을 위협하는 중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을 대경실색케 하는 새로운 전염병인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했다. 페스트가 가난한 이들의 양식인 옥수수 죽으로 겨우 연명하던 사람들을 덮친 것이었다.

1817년 봄에 방치된 우물가에 오랜 시간 고여 있어 오염된 물을 마신 사람들을 덮친 장티푸스가 창궐하였다. 오염된 전염병은 토리노 주변의 마을과 시민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1817년 인생의 전성기에 있던 프란치스코 보스코는 고전적인 병인 폐렴에 걸렸다.


5

너는 이제 아빠가 안 계신단다



음습한 포도주 저장창고


돈 보스코는 그의 오라토리오의 회상에서 1817년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불행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두 살도 채 못 되었을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큰 불행으로 우리를 치셨다. 사랑하는 아버지는 한창 나이에 기력이 왕성했고 자식들에게 훌륭한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다가 집에 돌아와 생각없이 서늘한 포도주 저장 창고로 내려갔는데, 그날 저녁 열이 심하게 오르고 위험한 폐렴증상이 나타났다. 백약이 무효였다. 며칠 안 되어 아버지는 사경을 헤맸다. 아버지는 모든 성사를 받은 후 어머니에게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당부를 남긴 채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때는 1817512일이었다.

그날들에 대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가 숨을 거둔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따라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거듭 타일렀다.

요한아, 어서 이리 온. 엄마랑 나가자.

아빠가 안 가면 나도 안 갈테야.”

가엾은 것, 이제 너는 아빠가 안 계신단다.”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울었다.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우리 가족을 비탄에 빠지게 했다(오라토리오의 회상, 10-11).

돈 보스코는 아이들에게 이 일을 두고 말할 때는 “‘이제 너는 아빠가 안 계신단다.’라는 말을 나는 항상 기억하고 있었단다.”라고 했다. 도미니코 루피노는 그 자리에 있었고 이것을 글로 썼는데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고통으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진 형과 함께 그 당시 집에서 일어났던 일도 기억하고 있다.” 9살 된 가련한 안토니오는 먼저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고 이제 아버지의 죽음을 본 본 그는 거의 돌처럼 굳어있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큰 공포의 소용돌이가 일어났겠는가? 그의 마지막 안전책마저 위협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 그 안에서 얼마나 세찬 폭풍우가 몰아쳤겠는가?



법정에 출두한 맘마 말가리따

요한 보스코의 어머니 말가리따는 29살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되었다. (세 명의 아들들, 반신불수의시어머니, 먹고 살기에 빠듯한 땅과 포도밭, 외양간을 거주할 집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 집) 이 모든 부담을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동정하는데 그다지 많은 날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5월부터 11월까지 말가리따는 두 명의 일꾼의 도움을 받으면서 소작의 의무를 지불할 수 있었고 풍작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18171111일부터 농장주 빌리오네씨와 보스코 집안 사이의 소작인 관계가 종료되었다. 그러나 빌리오네 집안은 땅의 관리가 소홀했고 추수량이 기대이하로 나왔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비열하게 “프란치스코 보스코의 법정 상속인”인 말가리따를 법정에 출두시킨다. 법조인 가문이 이제 막 남편과 사별한 과부를 대상으로 싸웠다. 그녀는 읽거나 쓸 줄도 몰랐고 법정의 여러 방청객들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법정은 22.5리라를 벌금을 지불하라고 말가리따에게 판결을 내렸다. 그녀는 알고 있던 유일한 방법인 십자가를 그어 서명을 하면서 이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무렵 미카엘 삼촌은 창고와 외양간으로 쓰던 오두막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111일 맘마 말가리따와 세 아들과 할머니가 그 집으로 이사했다. 미카엘 삼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은 집은 그 지역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 되었다.

남편을 잃었던 이 때가 말가리따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녀는 외양간과 창고로 만든 오두막집에 세 아들과 반신불수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서 집 한 채를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법정에 섰고 법정으로부터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서 남편이 그녀에게 남겨준 작은 땅에서 서둘러서 일해야 했다. 남편을 잃은 지 10개월 만에 사랑하는 어머니 도미니카(1818 3)도 여의었다. 한 가정의 생활을 아는 사람은 친정어머니가 젊은 신부이며 엄마에게 얼마나 가까운 사람이며 자신의 어려움을 떨어놓을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안다.

이 같은 일은 29 살 밖에 안 된 여인이 절망과 슬픔에 잠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말가리따는 하느님께 커다란 믿음과 아들들에 대한 위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파종, 추수, 포도나무 주변을 괭이로 파는 일 등) 가장 힘든 일들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했다. 그러나 일로 거칠어진 손은 아이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줄 알았다. 그녀는 강하고 일 잘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어머니로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