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스코의 교육경험
(원제: L'esperienza pedagogica di Don Bosco)
Pietro Braido 지음
머리말
돈보스코의 교육제도-보다 포괄적인 어구를 사용하자면, 돈보스코의 “예방교육” 경험은 그의 동역자들과 제자들이 안출한 여러 가지 기획들과 기관들에서 성장하고 널리 전파되어 다양한 형태를 취해 온 활동이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이 사업이 활발히 이뤄지기 위해서는 쇄신(연구와 적응이 요구됨) 과 일관성의 결합이라는 참된 성장법칙이 지켜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쇄신” 은 교육이론과 실천에 대한 개개인과 공동체들의 지칠 줄 모르는 끈질긴 투신에 달려 있는 임무이다. 한편, “일관성” 은 자신의 기원에로 기꺼이 되돌아감으로써만 보장된다.
이 간단한 개요서는 바로 돈보스코의 기본적인 “예방교육” 경험을 맛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시는 결코 실제적인 활동계획을 제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
본서는 다만 본래의 본질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는가를 간단히 보여줄 것이다. 이런 본질적 요소들에 충실함으로써만 현재와 미래의 계획들이 다양한 배경들 속에서 그 타당성과 신빙성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돈보스코와 더불어, 또한 시대와 더불어 일하려는 갸륵한 열망을 실현-그저 이따금 달뜨는 것이 아니라-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것이 필요하다.
1989년 1월 31일
저자 Pietro Braido
제1장: 돈보스코의 시대
제1장
돈보스코의 시대
돈보스코는 1815. 8. 16에 태어나서 1888. 1. 31까지 살았다. 그가 태어난 날은 유럽이 전제정치로부터 현대로 옮아간 결정적인 변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정(1789-1814)과 같은 대격변들에 의해 가속화된 격동의 시기와 일치한다. 하마터면 이 전환점은 유럽을 정치적인 심산에서 잠정적으로 구획했던 비인회의 (1814-1815) 의 결의들과 신성동맹 (1815. 9. 26)에 의해 지체될 뻔했다.
하지만 다른 역사적 사건들, 세기말까지 유럽의 모습을 나아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 세계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 놓을 만큼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사건들이 서서히 발생했다.
이 사건들 중에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꼽을 수 있다 : 급속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들; 산업혁명; 통일국가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열망들이, 처음에는 바라지 않았으나 후에 독일과 이탈리아 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실현되었음; 유럽의 식민지 팽창과 그와 결합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제국주의.1
처음 나타난 결과들 중 하나는 세 계급 (귀족, 성직자, 평민) 을 토대로 한 세속적인 사회유형으로부터 계층구분 위에 형성된 부르조아 사회로의 점진적 이행이었다. 이 새로운 사회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점점 인식해가는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에 의해 첨예화된 점증하는 긴장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프롤레타리아는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사회주의 세력들 덕분에 실존하는 사회적 불의 뿐만 아니라 노동계층이 총체적으로 느끼는 부담들도 자각했다.
신석기 혁명이래 가장 극적인 변화인 산업혁명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2 그것은 인간 실존의 모든 차원에서 예상치 못했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자본주의에 토대를 둔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일어나 19세기 중반까지 벨기에, 프랑스, 독일, 스위스, 미국에로 다양하게 번져갔다. 산업혁명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은 18 세기의 마지막 20년이 지나서였다. 그 이전 기간 동안에는 기껏해야 국한적인 산업화 이전의 징후들만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토리노가 그 전형적인 예였다.
통일국가에 대한 열망이 점차 더욱 명백해지고 만연되었으며 강렬해졌다. 이 운동은 정치적 보수주의와 지역주의 및 예를 들어 교황령의 특수상황과 같은 다른 특정 관심들에 맞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세력들에 의해 촉진되었다. 정치적으로 통일된 적이 없었던 이탈리아가 비인회의 이후 다음과 같은 정치체제들로 분할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제국에 편입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트렌토,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일부가 제국의 소유지가 되었다), 합스부르그가 출신 프랑스 전황비 마리아 루이사(1815-1847, 그녀의 사후 파르마의 부르봉가에 귀속됨)에게 할당된 파르마와 피아첸싸 공국(公國); 합스부르그-에스테가의 프란체스코 4세(1815-1846)에게 양도된 모데나 레지오 공국; 프란체스코 4세의 어머니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그녀의 사후 1831년에 그녀의 아들에게 귀속됨)에게 할당된 마싸와 카라라 공국; 파르마의 부르봉가에 할당되었다가 나중에 1847년 마리아 루이사가 죽을 때 파르마의 부르봉가가 파르마 피아첸짜 공국에 흡수될 때 토스카나 대공국에 병합된 루카 공국; 프란체스코 1세의 형제이자 오스트리아 황제 (1806-1832)인 합스부르그 로레나(1814-1824) 페르디난도 3세에게 할당된 토스카나 대공국; 부르봉가의 페르디난돈 4세에게 할당된 양시칠리아 왕국(1815-1825); 사보아의 빅토르 엠마누엘 1세 치하의, 사보이, 피에몬테, 니싸, 사르데냐로 구성되었으며 이전의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를 차지한 사르데냐 왕국.3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과 같은 강대국들의 지배권과 더불어 유럽은 19세기 후반에 절정에 달했다. 1870년 경 이후부터 자본주의의 성장과 산업혁명의 강화는 더욱 심한 경제적 경쟁을 초래하였고 군비증강을 가속화 시켰다. 그와 동시에 세계적 차원에서 상업적 정치적 문화적 팽창에 대한 요구가 성장하고 있었다; 팽창욕구는 식민주의와 그로 인한 비유럽 지역들 내에서의 극심한 혼란에서4 이것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시에 새로운 두 강대국들 즉 미국과 일본이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이 보다 복잡해짐에 따라, 그리하여 자유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정치면에서나 도덕적 종교적 이상 영역에서나 보다 명백한 다원주의적 사고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개인생활을 규제함에 있어서든 또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실존을 형성함에 있어서든 대단히 다양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출현했다. 완고한 반동주의자들과 더 나아가 반동적 세력과 더불어 새로운 이념들이 형성되었다 : 프랑스 대혁명의 부르조아 요소를 거의 이어 받은 자유주의, 쟈코뱅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민주적 급진적 사고, 보다 낭만적인 영감을 띤 민족주의적 이상들 및 보다 나중에는 한편에는 사회주의가 다른 한편에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주의가 등장했다.
이탈리아의 영적 상황과 사목적 배경 및 다양한 교리교육적 창안들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나라를 좌우하던 지역 즉 피에몬테의 상황을 특별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지역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사회-경제적 교육적 분야의 변화들을 초래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1. 정치분야의 변화 요소들
주요한 정치적 사건은 이탈리아의 통일과 교황의 세속권의 종결이었다. 여기에도 그 나라의 정치적 종교적 역사가 불가피하게 얽혀 있었다. 이 전개과정이 1870년 로마의 함락과 더불어 종결됨으로써 9개주로 분할되어 있던 그 반도가 하나의 정치적 조직으로 변화되었다. 사보이 왕가의 왕위 계승자들을 상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빅토르 엠마누엘 1세(1802-1821), 카를로스 펠릭스 (1821-1831), 카를로스 알베르토 (1831-1849), 빅토르 엠마누엘 2세 (1849-1878), 홈베르트(1878-1900).
이들 모두는 민족주의적 혁명에서 한 몫을 해낸 이들이다.
1814-1848년에는 “복고” 분위기, 실제로 부분적으로는 “반동” 분위기가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자유주의적 이상들이 제안되는 동시에 그보다 훨씬 급진주의적인 정치적 사회적 목적들을 띤 운동들과 단체들- 종종 비밀단체들- 즉 카르보네리아, 페데라티, 학생연맹, 쥬세빼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 와 “청년 유럽” 이 진척되었다. 1820-1821년과 1830-1831년, 그리고 다시 1843년, 1844년, 1845년 사이에 혁명적인 봉기들이 있었다. 이것은 1848년 2월부터 6월 사이에 파리로부터 유럽의 주요 도시들 즉 비인, 부다페스트, 프라하, 베를린, 피렌체, 팔레르모, 나폴리 등지로 번졌던 민족주의적인 거대한 정치적 사회적 폭동들의 서막에 불과했다. 나중에 가서는 대개 다시 가혹한 독재주의적 억압에 의해 취소되기는 했을망정 자유로이 또는 강압적으로 “헌법” 이 용인되었다. 카를로스 알베르또는 3월 4일에 법령을 윤허했으며, 1848년과 1849년 사이의 제1차 대 오스트리아 독립전쟁을 지휘했다. 그전쟁은 그의 패배와 폐위로 긑을 맺었다.
많은 카톨릭인들이 이전의 “지위” 로부터의 변화들로 인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 그들은 출판의 자유를, 그리고 그 결과 종교적 선전의 자유를 접하였다; 종종 반성서적인 평신도 세력들의 경쟁도 접하였다; 1850년에 시까르디법이 제정되었을 때에는 교회 재판소와 면책과 같은 성직자들의 세속적 특권의 종말을 접하였다. 예수회원들과 성심수녀회 및 토리노의 대주교 몬시뇰 루이지 프랑소니가 그 왕국으로부터 모두 추방되었다; 1855년에는 수도회들이 금지되었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1848년과 1859년의 본콤파니법과 카사띠법은 모두 교육분야에 제한을 가했다.
1852-1861년의 10년간은 1850년 10월부터 장관직에 있었던 까밀로 벤조의 카브로 각료회의 의장에 의해 좌우되었다. 우르바노 라타찌가 이끄는 온건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 연합의 지지를 받은 그는 “자유로운 국가 내의 자유로운 교회” 원칙을 토대로 세속의 자유화를 위한 효과적 정책을 수행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국제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한 강력하고도 성공적인 운동을 개시했다. 이 통일은 주로 1859년부터 1860년 사이에 제2차 독립전쟁(1859) 과 쥬제빼 가르발디가 이끄는 토벌대 (1860) 및 그 뒤의 영토 합병들에 의해 달성되었다.
제3차 독립전쟁에 의한 1866년의 피렌체 합병과 1870년의 로마 함락으로 이 과정이 거의 완전히 일단락 지어졌다.
이미 1861년 3월 17일에 빅토르 엠마누엘 2세가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포되었으며, 실제로는 1865년부터 1871년 사이에 수도였던 피렌체로부터 법원과 정부 청사가 옮겨진 1871년에야 수도가 된 로마가 공식적으로 수도로 선포되었다.
바티칸은 이 “기정사실” 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바티칸은 “leggi delle guarentigie” (보증법률) 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1874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인들에게 바티칸이 찬탈자라고 심판했던 주의회 선거에 참여하지 말라고 명했다 (‘Non expedit’).
1876년에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질적인 단체들의 자원을 받은 좌익이 의회와 정부에서 우익 (온건적 자유주의자들) 을 증가했다. 이로 인해 데프레티스, 카이롤리, 크리스피를 필두로한 장관직 이양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들은 종종 반성직적이며 급진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2. 종교적 상황
종교적 영역에서도 “왕좌”와 “제단” 간의 굳건한 동맹 시대로부터 양자 간의 점증적인 분리 단계로의 이행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것은 어수선한 것으로 판가름난 정치적 방책들에 의해 빚어진 것이었으며, 주로 종교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사이에 필요한 구분을 실천적으로 존중할 수 없었던 무능력의 결과였다. 이 과정은 바티칸의 ‘No-n expedit’ 훈령의 자기-소외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가톨릭 신자 개개인은 특히 종교적 도덕적 문제들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서도 여전히 주목할만한 공헌을 했다. 교황들은 프랑스 대혁명 뒤에 새로워진 그들의 위광에 힘입어 사회의 재그리스도화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가장 많이 관련된 교황들은 프랑스 발레스에서 비오 6세가 선종했을 때 베니스에서 선출된 비오 7세 (1800-1823) 레오 12세 (1823-1829), 비오 8세 (1829-1830), 그레고 리오 16세 (1831-1903), 비오 9세 (1846-1878), 레오 13세 (1878-1903) 였다.
세상 안에서 가톨릭 교회는 쇄신의 분명한 표징을 드러냈다 : 가톨릭 교회조직 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복음화 사업및 사목적 관심에 대한 재평가 및 강화작업이 있었다.
종교협약들에 의해 여러나라들과의 더욱 폭넓은 제휴가 이뤄졌으며, 선교사업에 새로운 정력을 쏟았다. 다양한 신학적 함축내용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결과들을 지닌 교의적 논쟁점들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 자유주의적 가톨릭시즘에 관한 그레고리오 16세의 회칙 “Mirarl Vos” (1832) 와 무염시태 교의 확정, 비오 9세의 “Quan-ta cura” 와 “시대의 잘못들에 대한 요목” 의 공표, 바티칸 공의회 (1869-1870) 와 “De Fide Catholica” 현장 반포 및 교황무류권 교의 확정을 꼽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낭만주의 운동의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1833년에 시작되어 뉴만 (1845) 과 만닝 (1852) 을 가톨릭에로 개종시키기에 이르른 옥스퍼드 운동의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기도 했다.
1824년에 레오 12세는 가톨릭 대학 교육을 부흥시키기 위한 첫 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문화적 소생과 보다 주의깊은 성직자 양성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 과정은 레오 13세 때 절정에 이르렀다. 신자들은 언제나 자선사업에 종사해왔던 터였지만 특별히 독일과 벨기에에서 가톨릭 사회사업들이 한창 발전되기 시작했다 : 이것들은 1891년의 “노동헌장”에서 최초로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앞서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보다 명백하고도 조직적인 운동이 있었다. 끝으로, 19세기의 두드러진 현상은 다양한 애덕사업과 교육사업 및 선교사업에 헌신하는 남녀 수도회들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한창 출현하고 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각 교황에 따라 달라졌다 : 콘살비 추기경의 도움을 받은 비오 12세 때는 적극적이었던 것같다; 레오 12세 때와 그레고리오 16세 때에는 반격과 저지를 받았다; 비오 9세 재임기에는 안토넬리 추기경의 도움으로 긴밀한 협력이 이뤄졌다가 나중에 거불한 시기를 거쳐 결국 정치와 종교간의 갈등으로 막을 내렸다.
비오 9세가 선출된 지 한달만에 내린 대사는 열광적인 열정을 불러 일으켰으며, 잇따른 결정들에 의해 더욱 고조되었다 : 철도건설에 대한 결의 (11월 7일의 훈령), 신문편집 (1947.3.15), 고문단 구성 (4월 19일, 10월 14일), 각료회의 창설 (6월 12일), 근위대 양성 (7월 5일), 로마 시의회 설치 (10월 3일), 각료회의에 약간 명의 평신도를 참여시킴 (12월 29일). 이어 1848.2.10에는 그 유명한 담화문 (“Benedite, Gran Dio, l’Italia) 이, 1848.3.14 에는 타협적인 법령이 발표되었다. 어디서나 민중의 찬동표명을 볼 수 있었으며, “비오 9세 만세” (Viva Pio Nono) 소리가 드높아짐에 따라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세력들의 압력도 가중되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대해 동감을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직접적인 간여의 가능성을 명백히 배제시킨 1848.4.29일자 교황 담화문이 발표되자 무수한 오해와 알력이 생겨났다. 각료의장 펠레그리노 로씨 암살 및 거의 숙명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교황이 가에타로 탈출 (11.12) 한 후 결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로마 공화국이 선포되었다(1849.2.5).
로마가 프랑스 군대에 재정복되어 1850년에 교황이 귀환했다. 안토넬리 추기경의 도움을 받은 비오 9세는 로마와 교황령에서의 교황의 통치에 관하여 이탈리아 정부와 어떠한 협상도 마다하고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열심한 많은 가톨릭인들이 양심의 위기를 실제로 겪었다고 할 수 있다 : 새로운 평신도적 상황 속에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주장과 훌륭한 시민이 되자는 주장을 조화시키기는 커녕, 국가통일에 대항 갈망과 교황-그들의 영적 지도자이지만 그의 군주권의존립은 국가통일에 상반되는-에 대한 충성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피에몬테는 이탈리아 가톨릭인들에게 주어진 복잡한 문제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실 피에몬테의 독특한 정치적 상황과 고도의 경제적 문화적 생활은 피에몬테가 그문제들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했다.
돈보스코의 일생 동안 다섯명의 대주교들이 토리노 대교구의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 까말돌레세 출신의 콜롬바노 키아베로띠 (1818-1831) ; 제노아 귀족인 루이지 데이 콘티 프랑소니 (1832-1862)-1850년 사르데냐 왕국에서 추방당하여 망명 중인 1862년 리용에서 사망; 비엘라 귀족 가문의 후손인 다비드 데이 콘티리까르디 디 네트로 (1867-1870) ; 로렌죠 가스탈디 (1871-1883) ; 가에타노 알리몬다 추기경 (1883-1891) 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키라베로띠, 프랑소니, 가스탈디 세 사람은 그들의 개성과 역사적 상황 덕분에 보다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몬시뇰 키아베로띠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호된 시련기 동안 교구에 헌신적인 사목적 관심을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브나에 신학교를 다시 열었으며, 지아베노의 신학교에는 보다 분명한 교회적 성격을 부여했고, 끼에리에서는 1829년에 성좌가 그에게 맡겼던 “필리피니” 가 저택에 토리노 신학교의 분교를 개설했다. 1832년에 그는 “개연론자” 들과 “Tutiorist” 사이에 격심한 신학적 논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신학자 돈 괄라가 설립한 정주 사제 양성소 (Con-vitto ecclesiastico) 를 토리노에 세우는 것을 승인했다.
몬시뇰 프랑소니의 장기간의 재임기는 토리노와 이탈리아 교회사에 있어서 더욱 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는 우선 성직자들을 돌보는데 관심을 기울렸기에, 1839년의 통계에 따르면 그의 성직자단은 다음과 같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 교구세자 623명, 수도사제 325명, 수녀 213명, 복고 덕분에 사르데냐 왕국의 교회는 사법적 성격을 띤 종교적 법령을 시행하여 “구제도” 하의 권리와 특권을 회복했다. 교회적 징계나 학문적 양성과 같은 문제에서, 예수회 정신이 담긴 1822년 법규를 토대로 극히 교회적 성격을 띠었다. 정부의 경향은 보수적이었으며 나아가 반동적이기까지 했다. 자유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또는 혁명 정신의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되는 제도나 개혁들은 의심을 받았다; 행려자 합숙소와 같은 박애주의적 사업, 아포리티의 유아원, 교육법 강좌들 (1844년 8월부터 10월 사이 아포리티가 지도했던 강좌에 대한 프랑소니와 카를로스 알베르또 사이의 충돌이 대표적이었다), 야학과 주일학교, 철도건설, 과학회의 개최를 예로 들 수 있다. 카를로스 알베르또가 첫 “개혁조치” 를 채택하여 반동적인 솔라로 델라 마르게리다 공작을 내쫓은 1847년부터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정부의 검열과 출판 및 예배의 자유에 관한 새로운 법률들이 제정되었다. 종교적 보호구역, 교회법정의 재판권이 폐지되었다. 이 때부터 피에몬테의 종교사와 그 특징이 된 갈등은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면서 이탈리아 역사와 한부분이 되었다.
새로운 정치적 종교적 상황에 직면하여 공동 행동 계획안을 마련하기 위해 1849.7.25-29일에 빌란노베따에서 개최된 토리노 지구 주교회의가 이 시기의 주요 사건이다.
그 회의는 무엇보다도 출판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몬도비와 이브레아의 주교들 (길라르다와 모레노) 은 “출판협회와 훌륭한 종교서적 보급을 위한 계획안을 마련”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주요한 도덕적 사목적 경향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중에 “콘비또 사제 양성소” 와 그곳에서의 성 알퐁소 드 리궈리의 가르침의 영향력 및 재건도 예수회가 확산시킨 청소년 영성을 다룰 때 이 문제에 관해 뭔가를 얘기하게 될 것이다.
3. 사회-경제적 분야의 변화요소들
이 시기 동안의 이탈리아의 경제 사회적 모습은 극히 다양하다. 이 나라의 기초산업은 농업과 상업이었다; 이 것은 산업혁명의 제1물결이 몰아친 다음인 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지역간 남북간 “남북문제” 라고 일컬어지는 심한 격차가 존재했다.
특별히 피에몬테를 중심으로, 그중에서도 특히 토리노를 중심으로 1850년경에 부분적인 개선의 징표들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인구가 급증했고 많은 건설과 경제적 성장이 이뤄졌다. 그 시의 인구는 1808년 65,000명에서 1891년 320,000명으로 다섯배 증가했다. 1835년부터 1864년 사이 30년간에 117,000명에서 218,000명으로, 특히 1848년부터 1864년 사이에 137,000명에서 218,000명으로 인구가 늘어나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돈보스코의 오라또리오가 한창 창립되던 시기에 80,000명이 그 시에 전입햇으며, 1858년부터 1862년까지의 불과 5년 동안 25,000명이 더 늘어났다.
사회-정치적 요소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요소들도 포함된다 : 산골과 농총에는 기근이 있었다; 도시의 공장들은 옷감, 무기, 직조기, 음식, 마차, 담배를 생산하게 되었다. 사무직 노동자들이 늘어났다; 건축업이 성행했다; 교통시설이 확충되었다 (1858년 철도연장 길이에 있어서 나폴리왕국은 100km, 교황령은 겨우 17km였던 것에 반해 피에몬테는 935km였다) ; 새로운 툭별법이 통과되었고 플라로렌스로 수도를 이전하는 데서 발생할 수도 있을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특별히 염두에 둔, 행정분야의 새로운 기획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돈보스코의 초기 오라또리오 사도직에 큰 영향을 미친 인구이동 현상이 왜 그리 극심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좀더 크게 보면 돈보스코의 사업을 이탈리아와 이후 프랑스 전역에 확산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그 요소였다.
4. 문화적 교육적 변화
세기 초반에 불경기가 몰아친 후, 특히 1830년 이후 문화와 대중교육에 새로운 관심을 쏟게 되었다. 유럽내의 확충된 교육시설체들과 피에몬테와 이탈리아에서 어느 정도 교리교육이 시작되었다. 세기 초에 프뢰벨, 페스탈로찌, 길라드를 비롯하여 헤르바르트의 사실주의파와 영적 성향을 지닌 이들에 의해 낭만주의 운동이 교육에 유입되었다.
그 뒤에는 실증주의가 교육학과 교육방법에 영향을 미쳤다 피에몬테에서는 30년대 초부터, 1828년 11월에 크레모나에서 시작되었던 페르난테 아포르티의 어린이집들이 서로 상반된 반응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18세기 교육에 있어서 새로운 움직임들과 돈보스코가 시작한 청소년 사업 형태들 간의 실제적인 또는 가설적인 접촉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학교 설립에 관해 말하자면, 1822년의 카를로 펠리체의 반동적인 Regolamento 이후, 1848년 본콤파니법에 의해 과거와의 단절이 이뤄졌다; 이는 “현상태” 를 묵살하고 교육을 문교장관 손에 집중시킴으로써 국가학위에 교육 독점권을 부여했다.
1859년 11월 13일 카사티법이 공포됨으로써 공교육이 전체적으로 재정비 되었다. 학교를 운영하면서 돈보스코가 깨닫게 되었던 대로 해가 갈수록 정부가 운영권을 제한했다. 이탈리아의 공교육 특히 초등교육의 발전은 부진했으며 세기가 다하도록 난제로 남아 있었다.
제2장: 어수선한 1800년대 초반에 있어서의
“예방” 개념
제2장
어수선한 1800년대에 있어서 “예방”의 개념
19세기 초반의 정신사조와 다양한 문화 영역 즉 정치, 사회, 법률, 형벌, 교육, 종교, 사목 영역에서 “예방” 이 대단한 위치르 ㄹ점유했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같다. 두려움이 뒤따르는, 그러기에 단호한 억제조치가 뒤따르는 예방은 보다 보수적인 단체들의 충동을 부채질했다. 혁명적이며, (직능별 조합, 출판 등의) 자유를 내세우는 심지어 교육의 자유까지를 내세우는 비밀결사 단체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빈틈없는 경계와 검열, 종교를 통한 철저한 도덕교육, 새로운 이상 (가르침, 개혁 등) 에 대한 불신, 나태와 방종에 대한 예방이 고립주의 및 전권장악 계획과 결합되었다. “시대의 표징들” 에 대한 온건한 조류와 보다 민감한 조류 가운데서, 예방개념은 보다 전통적이고 적극적인 요소들 (종교교육과 신심업, 활동, 확고한 가치교육과 도덕교육) 을 회복했다 ;
보다 광범위하고 대담한 지식공유, 직업교육 및 청소년 교육확대, 일을 성소에 대한 응답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노동관, 일치된 사회에 대한 요구들, 융통성 있는 자선방법 채택, 인간관계들 (법, 형벌을 통한 교정, 애덕활동, 교육기관들) 에서의 이성 사용, 특히 “오락” 과 여가와 같은 인간적 활동들의 가치 발견.
확실히, 그다지 반동적이지 않은 지역에서조차 새로운 이상들에 대한 거부감은 드세었다. 돈보스코가 1845년에 쓴 교회사에는 이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그는 1855년 이탈리아사에서도 다시 그것을 거론했다.
“질의 : 누가 프랑스 박해를 일으켰는가?
응답 : 비밀결사단체들과 ‘계몽주의자’ (I11umnati) 라 불리우는 이들이 세계를 변혁시켜 모두에게 자유와 평등을 주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과 함께. 이들은 1790년부터 박해를 가해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 “거의 50년 동안 이탈리아와 유럽의 나머지 지역은 완전히 평화로왔다. 이 덕분에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유용한 사상들로 학문과 에술을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밀단체들에게 그들의 계획을 실현시키는데 필요한 자유를 허용하기도 했다. 이 단체들은 일반적으로 카르보나리, 프리메이슨, 쟈코뱅, 계몽주의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때에 따라 다른 명칭들을 가지나 목적은 모두 같다. 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현사회를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 사회 기강을 부너뜨리기 위해, 이들은 모든 종교와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든 모든 도덕적 개념을 타파하고 사회와 종교의 모든 권위 즉 교황권과 왕권을 파괴하려 노력해왔다 (…) 혁명을 통해 사회의 정상에 있는 것은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고, 밑바닥에 있는 것은 정상에로 올라갔다 ; 그리하여 혼란스런 부정부주의가 판쳤다. 프랑스에서 혁명을 일으켰던 비밀단체들이 이미 이탈리아에 파고들어 자유와 평등과 개혁이라는 그럴싸한 이상들을 퍼뜨리고 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분명히 할 수 있듯이, 게몽주의 시대의 모든 것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 오히려 반대로 보다 건전하고 의미깊은 측면에서 볼 때, “이 덕분에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유용한 사상들로 학문과 예술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상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예방제도의 긍정적 요소들 중에는 합리성 (더 정확히는 온당함을 뜻하는) 과 자유, 형제애, 인간다움과 같은 온건한 요구들이 즉 그리스도교 진리와 화합할 수 있는 박애주의적 인간주의적 내용들이 함께 들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수히 많은 새로운 공헌을 했다.
1. 정치적 예방
비인회의를 지배한 정치적 방향들로부터 유사한 입장이 나타났다. 비인회의는 전통적인 종교적 도덕적 원칙들을 토대로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재건할 수 있을 조직과 기구들을 만들고자 했다. 이런 것들 가운데에는 모든 차원-교회, 사회, 가족-의 권위가 지닌 종교적이며 엄격한 부권 개념들 ; 개인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복종과 준법 ; 보다 평등하고 잘 조직화된 행정에 의해 보장되는 국가의 “복지”와 “행복” ; 사회적, 영적, 경제적 위신에 따라 달리 부여되는 책임과 권력 ; 그리스도교에서 발표된 사회적 재생력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준비자세와 요구들은 과거에의 향수와 함께 등장했다. 실제로 어떤 나라들에서는 절대주의와 억압의 원칙들이 변화에 대한 강력한 요구들을 주도했으며, 어떤 나라들은 민주주의를, 어떤 나라들은 자유주의를 지향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노르웨이와 베네룩스, 독일의 몇몇 주는 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탈레랑은 얘기하기를 “오늘의 복고는 반동이나 과거로의 순수하고 단순한 복고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정부는 오직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 국가의 행복과 평화를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는 권력만이 합법적이다고 여기고 있으며, 이런 보편적 생각을 약화시키려 애쓰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라고 했다. 가장 과격한 반혁명주의자들도 “혁명이 파괴한 모든 것을 재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시류에 따라 움직여야한다” 고 주장한 La Bourdonnaei에게 동의했다. 얼마 전에 회복했던 교황령의 행정적 재조직화에 관해 비오 11세가 한 말은 대표적이다 : “옛날의 질서로 되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새로운 관습들이 옛 것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행정과 공공경제에 관한 새로운 견해들이 널리 퍼져 거의 보편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선례에서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었으며,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현실정에 더 잘 맞는 새로운 제도를 채택하자는 요구들이 등장하였다.”
1815.9.26일에 조인한 신성동맹조약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의 군주들은 “서로 간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 구세주의 종교가 가르치는 최고의 진리들에 의거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깊은 확신을 얻었다” 고 선언했다. 그리스도교의 도덕 개념들이 개인적 관계 뿐만 아니라 공적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토록 오랫 동안 애써 온 국가들의 행복” 에 가장 중요한 것인 만큼 앞으로 이 진리들은 인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내의 통치 뿐만 아니라 타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가르침을 그들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기로” 했다. “그것들만이 인간의 제도를 강화시키고 그 결점을 고쳐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사회적 예방 : 빈곤과 구걸
그러나 18세기에 몇몇 분야에서 전조를 나타냈던 예방개념은 정치분야에서보다 사회분야에서, 특히 만연된 빈곤과 구걸, 범죄적 행동, 유아양육과 교육 현상과 관련하여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가난한 이들과 거지들의 문제가 사회정치적 교육적 예방의 견지에서 열띠게 논의되었다. C.L.모르치니에 따르면 “예방” 의 범부는 애덕활동의 모든 범위 즉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동조와 교육을 통합 시킨다 : 학대받는 아이들, 고아들, 노인들, 과부들을 위한 구호소와 기관 ; 자선기관과 원조기관 및 학교. 개념적으로 볼 때 “가난한 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가난하게 되어 있으며, 교육을 받지 못하고, 권력을 가질 수 없으며, 일자리를 갖지 못하다 마침내 늙고 병든다. ”지성적이며 자애로운 사람들은 사람들을 괴로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기보다는 가난을 예방하기 위해, 그들의 장점을 살려 주려고 그들에게 선견지명과 절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참 가난과 거짓 가난을 구별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쏟았다” 고 한다.
카를로 일라리오네 페티띠 디 로레토 공작은 그런 사회 정치적 관점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개념들을 가난의 일반적 원인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지적했다 :
“소집단의 초등교육을 장려하고 돕는다 (…). 저축은행 설립을 장려하고 도우며 격려한다 (…). 이러한 은행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앞날은 내다보고 절약을 습관화 시킴으로써 악덕을 피하고 비축금을 확보해두게 하기 때문이다 (…) 상호부조단체들을 장려하고 보호하며 격려한다 (…) 견식과 재간을 갖춘 아버지같은 정부는 이러한 간접적 준비들을 통해, 그 국민을 도덕적이며 조용하고 강하며 부유하게 유지시킬 수 있다.”
그의 추론에서는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서 실시되고 있던 가난에 관한 억압적이고 지배적인 법률들에 대한 검토가 긍정적이며 예방적인 노선에서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악의 원인들이 제거되지 않는 한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법률들은 언제나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어떤 정부가 모든 사람이 부유하고 올바르기를 원한다면 고통을 무릅쓰고 부지런한 보살핌으로 우선 간접적인 수단으로 가난의 원인들을 제거하는 식으로 사회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러면 보다 직접적인 수단을 가지고 적당한 때에 적절한 곳에서 이처럼 고통스런 사회적 상처를 예방하고 방지하는 데에 성공할 것이다.”
이와 함께, 훈령과 교육과 같은 예방적 방식을 통해 곤궁한 이들을 구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모리치니와 드제란도 남작이 동시에 이런 생각을 발전시켰다. 남작은 Della pubblica beneficenza (공공단체들에 관하여) 라는 기념비적인 그의 저작 제2부 전체를 빈곤 예방에 필요한 기관들에 할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일반 원칙을 내세웠다.
“모든 자선중 가자 ㅇ효과적이고 건전한 것은 가난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현재 예방적 애덕실천 방법중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육보다도 더 유익한 것은 없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육에는 애덕의 두드러진 특징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다 ; 현재를 돕고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유아원과 기아 및 고아를 돌보는 기관 외에, 다른 계층의 아동들과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기관들도 강조되었다 ;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학교, 가난한 아동들의 공장 교육, 본질적으로 가난한 계층에 대한 구제가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구제와 동일시 되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그들의 자녀들을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훌륭한 교육은 이 아이들에게 언젠가는 그들의 부모들을 부양하고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할 것이다.”
이것은 7세 미만의 모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곳에서 “그들은 나중에 받게 된 훈육을 받을 준비를 갖출 것이다.” 이것은 자주 수업에 참석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며, 부모들에게 그 가치를 설명하고 확신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초등교육을 못받아 야간학교와 주일학교를 통해 이러한 결손을 메꾸려는 젊은이들을 돌보며, 직업선택과 도제기간 동안의 계약서 작성시 조언과 도덕적 법적 도움을 주고 억압적이고 기만적인 고용주들로부터 보호한다.
끝으로, 온건한 진보주의자인 C. 가따네노의 개념에서 우리는 예견적이며 실질적으로 예방적인 견해 속에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동기들이 종합적으로 얽혀 있음을 발견한다. 빈곤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들을 분석한 다음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런 생각들로부터 몇가지 진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의심의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것들은 유용하게 여겨진다 ; 가난한 이들의 교육 ; 모든 형태의 구걸 금지; 은행과 상호부조 단체 설립 ; 월급 일부를 공제했다 연금으로 지급 ;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명예로운 은퇴를 위해 필요로 한 것을 저축하도록 하는 기관들.
3. 형벌 분야에 있어서의 예방
경제와 법률과 그 인접 영역에로 에방문제가 확대되었다. 그것은 형벌 분야에서 특별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분야에서의 교육과 재교육상의 예방개념이 처벌과 교정개념들과 더욱 긴밀히 결부되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드 제랑드와 페티띠 디 로레토, C. 카따네오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그러나 베까리아와 하워드 이후 광범위한 선전에 의해 유럽을 휩쓴 새로운 사상들에 마음을 열고서 그것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 드 제롱드는 이렇게 썼다 : “마침내 인간은 법적 처벌이 단순히 사회측의 방어와 복수의 무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단순히 점죄자로 하여금 더 많은 해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모방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 이 아니다 ; 그것은 범죄자들을 교정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노동이 중요한 역학을 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노동은 자기 향상을 위한 자연적 수나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이것의 혜택을 받아서는 안되는 가장 간악한 사람들과 정직한 사람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간악한 사람은 아무 것도 잃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으려는 태세를 취한다.” C. 일라리오네 페디띠 디로레토는 “더 나쁜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작업장에, 부도덕한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어른들과 함께 뒤섞여 갇혀 있는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문제의 사람에게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본능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을” 때에는 보호적인 동시에 적극적인 예방 시설에 찬동했다. “때로 어떤 제한적 방법들이 실제 필요보다 더 가혹한 경우, 이러한 기관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더 아버지다와야 하고 질서의 엄격함에다 좋은 충고를 해주는 우정을 더욱 잘 결합시켜야 한다.”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다양한 부류의 범죄자들이 보여준 “범죄성향” 과 중화력 및 회복력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고찰한 C. 까따네오는 이렇게 썼다 :
“반작용의 큰 부분은 형법, 교도관, 그리고 아마도 사형집행인에게 위임된 것이다 ; 그러나 또 다른 큰 부분은 간접 보호자와 여러 분야 특히 행동과 교육과 관계된 정부 당국자들에게 맡겨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부분은 완전히 의학적 치료에 할당된 것이다. 아마도, 예방적 제한, 즉 처벌 배제는 고의적인 사악한 행동들이 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추태로 여겨져야 할 어떤 범죄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로 보여질 것이다.
4. 예방으로서의 교육과 교육에서의 예방
교육은 앞길에 대한 적극적이며 문화적인 자각 영역으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육에서의 에방에 대한 논의보다 먼저 이뤄지는 예방으로서의 교육으로 여겨졌다. 모르치니는 또 이렇게 썼다 :
“로마뇨시가 깊이 고찰한대로 그것은 시민의 권한이며, 일차적인 요소들에 대해 모두가 기초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부의 절대적 권리이다. 이것은 참으로 사회를 평온히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행정당국이 범죄를 예방하기 보다 더 엄격하고 가혹한 체벌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공교육이 예방의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F. 아포르티는 “악이 저질러지도록 방치해 두었다가 그것을 처벌하기 보다는 예방하는 것을 뜻하는 애덕활동” 이요 “부도덕함을 어린시절부터 예방하기 위해 마련된 새로운 기관들” 의 광범위한 그물망인 유아원을 여는 근본이유로 공교육을 내세웠다.
다른 많은 사람들, 특히 Letture di famiglia (가족문고) 및 L'Educatore Primario (초등교육자) 와 관련있는 피에몬테 교육가들도 기초교육 및 초등교육에 관해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으며, “서민들에게 적합하고 조화로운 교육을 실시” 하고자 했다. 즉 “사람들에게 그들이 초대받은 계몽된 새 삶을 준비시키기 위한 효과적 수단” 을 제공하고자 했다. 1837년 페티띠 디 로레토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했다. “미성년자를 위한 교육기관들, 소위 sale d'asilo와 청소년 교육기관들은 고아원과 더불어 영속적이든 일시적이든… 그것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그들을 보살피며, 여러 가지 육제철 도덕적 위험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 그리고 그것들은 그들에게 안정된 미래를 보증해줄 직업을 익힐 수단을 제공한다. 그들에게 훌륭한 원칙들을 심어줌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는 사람들을 구한다.”
5. 예방의 수단으로서의 종교
종교는 가장 보편적으로 모든 영역의 “애덕” 에 있어서 특별히 효과적인 교육적 예방요소로 여겨졌다. 드 제랑드는 종교가 특히 그것이 가장 절묘하게 나타난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탁월하고 타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큰 빛을 잃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고찰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 종교적 도덕성은 일반적으로 인류의 중요한 혜택들 가운데 하나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페티띠는 청소년 죄수들에 관해 얘기하는 중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몇 가지 안건들을 제시했다.
“수인 (囚人) 의 연령과 다양한 상황에 알맞게 종교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 지루하고 따분한 너무 긴 예배로 젊은이들의 심성을 종교적 감성에서 떼어놓는 위험을 피하도록 해야한다 ; 하지만 동시에 종교적 체험이 없는 이들이 예배행위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개화된 성직자 즉 필요한 신념과 더불어 큰 애정을 지닌 믿을만한 사람이 고용되어야 한다.”
“혁명” 이후 교황들과 교회의 활동 역시 일반적인 종교적 재각성을 통해 교회 안의 일치와 권위를 철저히 회복하고 앵심을 일깨우며 사회를 쇄신시키려는 노선 위에서 행해졌다. 구제 및 방어와 예방을 겸한 활동이 계획되었다 ; 소극적으로는 신앙 무차별론과 만연된 “자유주의” 정신과 싸우고, 적극적으로는 각지에서 행해지는 선교활동과 또한 새로운 형태의 사도직과 청소년 교육 및 재교육을 실시했다.
옛 수도회들은 후자의 독특한 방향에서 종교적 정신과 사도적 열정을 새롭게 가다듬고, 때로는 새로운 방법들을 채용하여 활용하기도 했다. 혜택을 덜받은 계층의 청소년들엑 대해 대체로 공통된 관심을 가진 여러 새 남녀 수도회가 이들에게 가담했다 ; 가난한 가정의 아동들 ; 어린 견습공들 ; 하층의 청소년들에게 직업 훈련을 시키고 공부시키며 ; “버림받은” 아이들을 종교와 사회로 복귀시켰다 그들 모두는 진정으로 예방적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비교적 일치된 견해와 행동방식을 가졌다.
그들은 확실히 공통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지고 최근의 혁명적 경험들로 인해 더욱 진지하게 젊은이들의 약체성과 불안정성 및 취약점에 우선 관심을 쏟았다 ; 이리하여, 주의와 관심과 사랑이 어린 염려와 예방과 보호의 수단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보다 자극적이고 희망찬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인간적 크리스챤적 가치들을 다시 융합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가치들은 인문주의적인 pietas literata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와 내세에 대한 희망들을 교육, 노동, 법적 진보, 여가, 직업적 안정, 지상생활의 기쁨, 마음의 행복, 사회의 제관계에 있어서의 평화와 더욱 폭넓게 일치시킴으로써 얻어진다.
더 힘들고 복잡다단하긴 하지만, 트리엔트 공의회가 시작되던 때와 가까운 시기에 속하는 이미지를 통해 전해진 총체적인 모습의 개편에 대한 신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교리학교가 밀라노에서 시작되었을 때 pescione (거인발) 또는 scarpone (큰신) 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가스뗄리노 다 가스텔로 (1476-1566) 의 협력자인 평신도 프란치스꼬 빌라노바에 관한 이런 얘기가 있다 : “1536년 성 안드레아 축일, 포르타 누오바 거리에서 서로 싸우며 쫓고 쫓기는 많은 소년들과 우연히 마주친 그는 그들의 나이에 걸맞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며 성 야고보와 빌립보 성당의 주랑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그들에게 모름지기 신자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간곡히 일러줬다 ; 그런 다음 그들에게 선물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약속하면서 다음 축일에 또 오라고 했다.”
동일한 복음적 뿌리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그분이 나를 보내셨다”) 을 지녔으며 “시대의 요구들에 따라” 인간적 사회적 발전 면에서 더욱 폭넓은 지평을 지닌, 19세기의 많은 체험들 (이 중에는 돈보스코의 체험도 있다)에서 영감과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선구자들
1. 까바니스 형제
19세기 전반에 안톤 안젤로 (1772-1858) 마르칸토니오 (1774-1853) 까바니스라는 두 귀족 형제들이 베니스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주일학교”와 “자선학교” (1804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로 발전된 마리아 수도회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포싸뇨 (트레비소) 와 렌디나라 (로비고) 에 지부를 였었다. 이 활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들은 자선학교 재속 성직 수도회를 창립했다. 이것은 1819년 베니스 대주교, 1836년 그레고리오 17세의 인가를 받았고, 1838.7.16일에 교회법적으로 설립되었다. “자선학교들”은 무료 초등 (과 중등) 교육, 종교교육, 오락활동, 육체적 도덕적 위험들로부터의 “예방” 을 제공했다. 아버지같은 친밀감이 그들의 교육방법의 본질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종교적 인간적 가치들을 교육적으로 생생히 종합시켜내는 주도면밀한 관심 (“지속적이며 사랑어린 감독”, “사랑어린 훈련”) 이 그 특징이었다.
2. 로도비꼬 파보니
브레시아의 귀족 로도비꼬 파보니 (1784-1849) 신부는 더 광범위하고 철저한 활동을 폈다. 그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브레시아가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교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수도회들과 오라또리오들을 성공리에 설립할 수 있었더라면” “한 반의 아이들- 그러한 시혜적 기관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교양있는 일반 시민들의 기존 단체들에는 감히 들어갈 수 없는 누더기를 걸친 비참한 이들만이라도 남았으리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리하여 성알로시우스 수도회-오라또리오가 시작되었다(1812). 1818년 파보니는 성 바르나바 성당의 주임이 되자마자 즉각 그곳에 오라또리오를 설치했으며, 1821년에는 고아들이나 버림받은 도제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했다. 1840년에는 농아반을 개설했다. 자신의 다양한 교육활동을 항구히 지원하기 위해 1843년 그는 거기에다 그의 협력자들과 사제 및 평신도(수사들, 직업훈련교사 등)로 구성된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아들들을 결합시켰다. 이 회는 1843년 Dec-retum Laudis가 발표되어 힘을 얻었고 1847년에는 인가를 받았다. 그 목적은 “최하층의 교육 즉 형편상 학교를 떠나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현명한 교사들로 부터 주의깊은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을 도외시했다가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늘 재난을 몰고 올 쓸모없는 인간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숙소는 “버림받은 어린 것들”을 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훌륭한 행동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숙소는 “버림받은 젊은이들의 복지를 위해 종교적 기술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교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열심히 교육시켜” “교회에는 훌륭한 신자를, 국가에는 훌륭한 기능공 겸 충실하고 고결한 백성을 배출시켰다.” 청소년 “종교교육 및 사회교육”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 통상적인 방법들과 예방교육 방법이 사용되었다; 종교, 이성, 사랑, 자애, 주의깊은 지도, 이 모든 것으로 가족과 같은 조직 속에서 헌신하는 자세로 일했다. 청소년 담당 수도회 장상에 관한 이런 말이 있다;
제3장: 선구자들
“그의 특징적인 미덕이 되어야할 겸손과 자애와 사랑어린 친절을 열성이 해쳐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소년들의 어떤점을 고쳐줄 필요가 있거든 우정어린 사랑의 방법으로 그렇게 해야한다. 감독자의 일차적 의무는 “설득과 사랑어린 친절로 그들의 의무를 정확히 이행하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조정자의 일차적 의무는 오라또리오 안팎의 수하소년들의 부모들과 고용주들과 자주 만나 그들의 참석여부를 알리고 그들의 행동에 관한 얘기를 들음으로써 소년들을 꾸준히 지켜보는 것이다. 그들은 우호적인 방법으로 소년들에게 자주 성사를 보도록 권고해야 한다 (…) 그들은 소년들의 단점을 애정으로 고쳐주고 그들의 마음에 신심이 깃든 말과 모범적인 사랑을 불어넣어 악덕을 피아도록 할 것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신심단체와 직공들을 위한 학교에서 직업훈련교사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소년들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기 직업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갖추도록 하기 위해 과제를 열심히 하도록 보살펴야 하며, 또한 사랑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특히 감독자들과 부원장들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요건들의 궁극 목표는 임장교육이다.
그는 그들을 과신하지 말아야 하며, 아주 주도면밀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 특히 오락에 신경을 쓰고 아이들을 방치해두지 않도록 하되 그들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어 보다 쉽게 자신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그들의 성격과 성향을 파악하고 한층 쉽고 성공적으로 그들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 젊은 혈기나 경솔함, 또는 혼란으로 인한 결점들은 되도록 벌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성과 사랑도 교종방법들을 암시해 준다. “어린이들로 하여금 흔히 확신과 사랑 보다는 두려움과 위선에서 나오는 행위를 하게 하는 엄격한 제도를 활용하기 보다는 칭찬과 명예심을 유도하는 것이 선택되었다. 이것을 오용하지만 않는다면 젊은이들의 민감한 마음을 사로잡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게 된다.” 한편, 영적 지도자는 “설교때 종교적 의무들을, 항시 기꺼이 짊어지고자만 한다면 쉽고도 위안을 주는 달콤한 멍에로, 가벼운 짐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혼들을 성화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훈도하며,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는 참된 신심”은 젊은이들에게 “부지런하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 사회에서 자랑스럽게 살 기회를 획득하려는 열망”을 심어주는 완벽한 교육 목표의 으뜸가는 주안점이기 때문이다.
3. 마르셀린 삼파냐
1816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라 발라 (루르)에서 마리아의 작은 형제 수도회 즉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를 창립한 마르셀린 삼파냐 (1789-1840)는 수많은 교육 수도회들이 프랑스에서 특히 초등학교 부문에서 착수했던 사회복귀 및 적극적 “예방” 활동을 새롭게 펼친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 중 한사람이다. 그들의 공동 목표는 “프랑스 혁명의 주요 피해자들인 젊은 세대에게 명확한 종교교육을 시킴으로써 그들의 장래를 보장하고 18세기의 파괴적인 정신에 맞서 그들을 무장시키는 것이었다.”
시골 지역에서 생겨난 새 수도회의 특유한 목표는 다음과 같은 약속으로 명호가히 규정되었다 : “우리는 본당사제가 우리에게 데려오는 모든 어린이들을 무료로 교육시키고, 그들과 우리에게 맡겨진 다른 모든 어린이들에게 교리교육과 기도, 읽기, 쓰기 및 그들의 필요에 따라 다른 부분의 초등교육을 가르칠 것을 맹세합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교 교육 (과 교리교육)을 가장 중시했다. 이것은 그것의 다양한 요소들 안에서 인간적 교양적 양성과 아주 조화롭게 결합되었다.
처음에 대부분의 가르침은 라살과 전통적인 “소학교”의 방법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착상을 얻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교육 방향이 점차 독특한 특징을 띠게 되었으며, 이러한 특징들은 19세기 예방교육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영혼구원이라는 궁극목표, 악행을 피하고 마음과 양심과 의지를 가꾸는 수단인 종교교육; 마리아 신심(“형제들은 성자 예수를 양육하고 섬긴 동정 마리아의 모범을 따른다”) ; “강제력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도들을 제지하기 보다는 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결점을 고쳐주며 의지를 길러주는 것”을 목표로 한, 교사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사랑의 방법을 사용한 훈육. 두려움이 아닌 존경심과 상호 신뢰를 토대로한 가족 정신- 그러나 말로는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으면서도 행동은 따르지 못하는 혁명 이후의 움츠린 분위기 속에서 불가피하게 권위와 존경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안타깝게도 이 모든 것이 약화되었다.
4. 테레사 유스토키오 베르체리
여성교육 분야의 넓은 경험들은 소피 바라의 성심 수녀회와 도로테아회, 그리고 카피타니오와 제로사의 사랑의 수녀회에 의해 이뤄졌다.
예리한 지성을 지닌 “굳센 여성”이었던 베르가모의 귀족 테레사 유스토키오 베르체리 (1801-1852)는 많은 경험은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주목할 만한 “이론적”인 기여를 했다. 그녀의 활동과 교육사상은 “예방적” 정신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그녀는 그 시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1821년부터 1823년까지 교사로서 폭넓은 경험을 쌓은 뒤, 영적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가난한 소녀들의 교육에 투신했다. 1831년, 그녀는 모든 계층의 소녀들을 교육하는 예수 성심의 딸들을 창립했다. 이 수녀회는 1847년 교회법적으로 인가되었다. 두가지 기본 주장들이 그 수녀회의 교육방법을 설명해준다 :
소녀들이 가능한한 악에 물들지 않도록 그들이 아직 어릴 때에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철저히 가꾸고 보호하라.
자유로이 내버려두었다가 고치기 보다는 충고로써 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더 낫다. 소녀들의 마음과 정신을 조금이라도 더럽히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도덕적 생활을 타락시킬 수도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소녀들을 멀리 떼어 놓으라. 민첩하고 효과적으로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애쓰되, 아주 신중히 행동하라. 그것은 본래 미묘한 문제이며, 악에 대한 지식이 자칫 악을 저지르게 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는 나이의 소녀들을 다룰 때에는 특히 더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극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리하라.”
이런 원칙들을 중심으로 그 “체계”가 지닌 근본 특징들이 전개되었다. 종교적 요소에 가장 주안점을 두었다 : “소녀들을 다루고 훈련시킬 때에는 극히 신중해야 한다. 그들에게 덕행을 가르치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목표의 기질과 성격과 성향과 여건에 순응하라 (…) 어떤 이들은 엄하게, 어떤 이들은 다정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제한을, 어떤 이들은 관대하고 친밀하게 대하는 방법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가 가는 길을 걷도록 요구한다거나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도록” 극히 신중하고 분별있게 행동하라. “소녀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거나 섣불리 성과를 거두려 하지 말라.” 사랑에 중점을 두어라 : “대체로, 자애롭고 온유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신중하고 열성을 다하라.” “그들로 하여금 자기부정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슬프고 쓰라린 것으로 여기지 말고 달콤함과 은총이 깃든 온당한 어떤 것으로 여기도록 하라.” “친절하고 상냥하며 고통을 감내한다면 엄격함이나 두려움을 이용하여 얻는 것보다 수천배나 많은 것들을 얻을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다정하게 보여주라. 그리하여 그들에게서 사랑받으라.” 그들이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늘 애쓰고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지키라 : “소녀들로 하여금 나태를 혐오하고 노고를 사랑하도록 하라 (…) 어린 기숙생들에게 그들의 미래에 관해 신중하고 부드럽게 미리 주의를 주라.” 젊은이들의 특성을 고려하라 : “사소한 일에 너무 비중을 두지 말라; 젊은 혈기, 부족한 경험과 얕은 통찰력, 격렬한 기질, 경솔함에서 비롯된 어느 정도 사소한 단점들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라. 자연적인 성정을 활발히 드러내어 그 기질을 보여주게 하라; 그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임장교육(Assistance-presence)의 본질적인 목표는 소녀들에게 균형있고 지혜로운 자제를 적극적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죄를 만들지 말라;” 이미 너무 많은 죄들이 있다. 소녀들에게 선량한 양심과 곧은 정신과 순수한 마음을 형성시킴으로써 죄의 수효를 줄이도록 하라. 시시한 노래 (칸쏘네)나 쇼, 댄스, 책과 같은 것을 허락하지 말라 (…) 축제 때 허용하는 쇼에서는 소녀들을 즐겁게 해주는 가운데 그들에게 교훈을 주도록 하라. 모든 것이 그들에게 덕행을 함양시키고 하느님을 향해 그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올바른 신체발달과 건전한 영적 자유 : “소녀들은 유희를 통해 정력을 발산시키고 그것을 자유로이 이용할 필요가 있다 (…) 그들 스스로 그들의 유희를 선택하도록 하라 (…) 자유로운 선택은 그들의 신체를 발전시키고 그들의 정신에 주어지는 교훈들과 그들의 마음에 주입된 제안들을 더욱 자발적이고 더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들로 하여금 도약할 수 없게 할 정도로 너무 주도면밀하게 굴지말라 : 이것은 소녀들에게 아주 바람직한 활동이며, 그들의 건강과 신체발달에 좋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늘 훈육과 순종의 한계들 내에서 소녀들이 주님의 멍에는 가볍고 주님의 종들은 자유롭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소녀들에게 거룩한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대의 방식대로 소녀들을 사랑 안에서 거니시는 하느님의 딸들로서가 아니라 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는 노예들로 만들어 버리게 될 것이다.
5. 아돌프 콜핑
아돌프 콜핑 (1813-1865)은 청소년 노동자 운동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며 Kolping-familie라는 국제적인 규모의 조직체를 만들었다. 그는 퀄른 근처의 케르펜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학생이었다가 제화공의 도제를 거쳐 뮨헨과 본 신학부의 학생으로 등록하여, 1845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엘버펠드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1847년부터 그는 소년 기술자 단체를 조직했으며, 1849년에 퀄른으로 전임되자 그 조직을 넓혀 독일과 유럽 및 북미 (1856년부터)에까지 확산시켰다. 그는 상업에 종사하거나 공장에 근무하는 소년 노동자들을 위해 회합과 보조 및 양성 단체들과 센터들, 기숙사 등을 세웠다.
그는 이론가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원칙을 실행하는 활동가였다 : “적극적인 사랑은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 말만으로는 고통을 증가시킬 뿐이다.” 그는 인간과 사회의 근간은 종교와 가족과 직업과 국가라는 근본 확신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들을 토대로 양성과 네가지 차원 즉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범적인 아버지, 능력있는 노동자, 정직한 시민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활동 계획을 수립했다. 이는 그가 계몽주의의 속성이라 지적한 반그리스도교화 과정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그렇다. 이 불행한 계주의는 인간의 본성도 그리스도교 신앙도 하느님의 세상도 모른다 (…) 계몽주의는 인간을 근본부터 망치고 있다.” 도시화, 가족의 위기, 실직, 산업화 체제의 고착화에 따른 정치적 부\\ㄹ안정은 여러 가지 종교적 도덕적 교육적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콜핑은 무엇보다도 직장을 찾아 헤매는, 그리고 감옥처럼 힘겹게 짜인 작업장의 시간표에 갇혀지내는 견습공들의 실상에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 (야케, 괴네스, 될링거, 케틀러, 죄르그)과 함께 그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성직자들이 사회문제의 한복판에 뛰어들도록 분투했다 : “민중의 삶이 교회적 (kirklich)인 것이 되려면, 교회가 민중적 (volkstumlich)인 것이 되어야 한다.” “사제는 천부적인 민중교육자이다 : 사제는 이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된다; 이것은 사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verrin (단체)의 목표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도덕적, 직업적, 사회적이었으며, 그것은 조작수단이요 분열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양성을 배제했다.
콜핑의 신학적 양성과 문화적 분위기의 결정체인 몇가지 개념들이 그의 교육활동의 토대를 이뤘다 : 각 사람이 그 안에서 자신의 성소를 완성시키도록 요청받게 되는 성직이나 국가 사회의 본래 구조; 모든 사회 교육의 모체요 근본 모델이며 좋건 나쁘건 사회를 지탱시키는 기둥인 가족 : 아내요 어머니인 여성은 가정 성소를 지녔다; 타락하고 구원받았으며, 악의 유혹을 받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교육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가능성을 풍부히 지닌 담지자인 인간; 하느님의 본래 모습 (Urbild)을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자신의 직업 안에서 구체적으로 생활되는 전인교육 (Bildung).
품위있는 감성을 지녔으며 우호적인 성향이 강했던 콜핑은 “마음”을 중심으로 삼아 기도와 성사와 희생을 기초로한 단순하지만 깊은 종교심에 뿌리를 둔 그의 교육방법을 전개했다. 그의 교육기관의 특징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의 모습 (가족 성원의 우두머리이며 사제인 단체의 장이 보여주는) ; 가족정신과 가족적 조직; 환경의 힘; 단체활동 자료; 즐거운 분위기 (그는 도제합숙소 가족의 사제-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즐겁고 평온한 태도를, 개방적인 모습과 마음을 지니십시오”) ; 합당한 자유와 명예심.
6. 로도비꼬 다 카쏘리아
훌륭한 철학적 학문적 교양을 지녔으며, 애덕적이며 교육 원조적 활동을 벌인 로도비꼬 다 카쏘리아 (1814-1885)라는 한 프란치스꼬 회원에 의해 중요하고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한 자선활동이 행해졌다. 그는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얻은 젊은 아프리카인들을 모아 1856년 collegio dei mori를 시작했다. 그들은 사제나 선교사가 되거나 또는 수도자로서 혹은 그저 평신도로서 ‘각자의 직업에 따라 아프리카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교 문명을 전파”하고자 했다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를 개종시켜야 한다”). 1859년, 그는 스티그마티네 수녀회에 맡겨진 흑인 소녀들을 위해 이와 비슷한 활동을 개시했다.
그 후 그는 다른 곳 (나폴리, 카쏘리아, 소렌토, 피렌체, 에보리, 로마)에서 고아들과 부랑아들을 위해 국민학교와 직업학교가 딸린 기관들을 창설했다. 살레르노 근처에 집단농장을 세우기도 했다. 그처럼 광범위한 애덕활동을 꾸준히 해나가기 위해 두 수도회를 창립했다 : 남자들을 위한 사랑의 수도회 (프란치스꼬 수도회라 불리기도 했다)와 여자들을 위한 프란치스꼬 엘리사벳 수녀회 (프란치스꼬 수녀회라고 불리기도 했다)가 바로 그것이다.
알퐁소 디 카사노바로부터 그의 교육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 “우리는 세수대야에서 시작합니다. 아이들에게 세수를 하고서 인간다운 모습을 회복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오늘을 위해서는 옷과 빵을, 내일을 위해서는 직업을 줍니다; 그리고 나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들에게 하느님과 가족, 국가, 이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이론이 아닌 하나의 분명한 양식을 지닌 활동으로 드러난 그의 가르침의 실체였다. 그것의 본질적 요소들은 다음과 같아 : 청결, 육체적 도덕적 건강, 노동과 교양, 종교성과 의무; 이 밖에도 주의, 겸손하고 친근한 현존, 사랑, 특별히 허락된 보조물인 음악이 있다.
7. 요셉 시몬-다윗
1846년에 사제가 된 요셉 시몬-다윗 (1823-1893)이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마르세유에서 줄리앙 수도원의 조력자로서 성인을 위한 교리교육 (신자재교육)과 아이들에게 첫영성체를 준비시키기 위한 교리활동과 관계가 깊다. 그는 그들에게 교육과 교양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종교적 실천 즉 “신심업”과 통합시켰다. 그날의 남은 시간에는 게임을 했다. “우리는 직각적으로 자선사업(Oeuvre)개념을, 즉 1847.11.1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그의 전형적인 청소년 자선사업(Oeuvre de Jeunesse)으로 자리잡게 된 것을 따랐다. 그것을 계속하기 위해, 1852년에 그는 예수성심 수도회 (Peres do Timon-David)를 창립했다.
“당시 잘못된 교육이 가난한 나의 소년들을 그들의 가정과 직장에서 공격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유일한 방어력은 자선사업 뿐이라는 것을 아로서, 나는 그들에게 교리와 교회에 대한 사랑과 권위에 대한 존경을 확실히 심어주고자 열성을 다하였다; 하느님 덕분에 건전한 원칙들이 우리 자선사업의 독특한 특징과 그 존재방식과 그것의 가장 아름다운 영광스런 명칭이 되었다… 신앙 정신 즉 가톨릭 정신이 우리 집과 그곳에서 진정한 사회선교를 수행하고 있던 우리 회원들의 독특한 정신이 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노동천년들 가운데서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창조”를 열심히 실현시킴으로써 인간적 시민적 쇄신을 일으키고자 하는 고전적 계획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다. 그 수단은 무엇보다도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 기도생활, 전례, 잦은 영성체, 성체신심; 교리교육과 설교를 통한 종교교육, 잦은 고백성사, 묵상과 영적 지도, 종교적 모임. 이밖에도 잘 조정된 인간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 게임과 오락적 교양적인 특별활동(음악, 노래).
8. 레오나르도 무리알도
레오나르도 무리알도 (1828-1900)는 예방 교육으로 활동과 가르침을 훌륭히 종합시켰다. 그는 토리노의 사제였으며, 역시 사제였던 그의 사촌과 함께 돈보스코의 오라또리오 활동을 도왔고, 1857-1865년에는 주야간 및 주일 학교가 딸린 성 루이지 오라또리오를 담당했다. 그는 아주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높은 교양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린시절부터 그는 정치적 세계와 종교기관 사이에 시작된 갈등과 “민족주의와 진보와 문명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모든 것”을 겪었다. 자연히 그는 종교적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 “조합과 단체의 힘을 통해, 사람들에게 유용한 모범적 행동들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분 나라의 확장을 준비하기 위해 가톨릭 의식을 강화시키고, 선한 사람들을 각성시키며, 반대자들의 무례함에 맞설 때가 되었다.” 1866년, 그는 요한 꼭기가 1849년에 설립했던 기술학교 (Collegio degli Artigianelli)의 교장직을 수락하여, 특전을 허락받았던- 그러나 유일한 것은 아니었던 그것의 활동범위를 재규정했다 : “노동계층의 도덕적 사회적 선익을 증진시킨다.” 방치된, 그리하여 너무도 쉽사리 사회의 수치와 두통거리가 되기 쉬운 수많은 가난한 소년들을 정직하고 고결한 시민으로 만든다.”
이러한 활동을 확대시키기 위해 근로자 합숙소, 직업학교, 집단농장, 노동자의집, 오라또리오, 가족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운영하기 위해, 그는 성 요셉회 (1867)를 창설했다. 이것은 1873년에 성 요셉 수도회 (Giuseppini del Murialdo)로 발전되었으며, 1897년 성좌로부터 최종인가를 받았다.
그것의 “목표는 신심과 교양적 기술적 훈육으로 가난한 청소년들과 고아, 버림받은 이들과 교정이 필요한 이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과 방법은 흔히 있는 예방적인 것이었다 : “거리에서 데려온 수많은 가난한 소년들에게 음식 뿐만 아니라 가르침과 교육과 직업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이롭게 한다.” “지난 30년 간의 우리 조직은 수많은 소년들을 현세에서 훌륭하게 만들었고 그들로 하여금 낙원에 이르는 길을 걷게 했다.”
방법과 양식 모두가 예방적이었다. 그것들은 무리알도의 훌륭한 분별력과 교양 및 시대 사조의결과 일반적인 정확함과 정교함을 넘어서서 아주 뚜렷한 사회성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우리 소년들을 훌륭한 노동자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 애써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들을 숙련 기술자, 훌륭한 시민, 사회의 모범, 급격한 동요와 소란 가운데서 형성되고 있는 우리 노동계의 누룩으로 만드는데 전념해야 합니다.”
9. 루이지 과넬라
루이지 과넬라 (1842-1915)는 다른 여건들 (촌지역과 도회지)과 다른 시대 (19세기 후반)에, 살레시오회에서의 4년 (1875-1878)간의 상주와 활동을 통해, 그리고 유아들과 저능아 및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이며 교육적인 그 자신의 애덕활동을 확대시킴으로써, 자신의 교육적 관심에서 비롯된 예방교육 이념을 이해 발전시켰다. 유아들과 저능아 및 노인들을 위해 그는 천주의 마리아의 딸들 (1908년에 잠정인가, 1917년에 최종인가)과 사랑의 종들(1912년에 Decretum Laudis, 1917년에 잠정인가, 1835년에 최종인가)이라는 수도회들을 창립했다.
사제생활 초년부터, 과넬라는 자유주의 가톨릭인들과 프리메이슨에 대항하여 격력히 싸웠으며, 그의 사목적, 애덕적, 교육적 활동에 매우 종교적이며 의연한 가톨릭적 성격과 더불어 인간 특히 연약하고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비범한 관심을 특징으로 남겼다. “개혁자들인 프리메이슨들은 많은 학교와 많은 공장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종교를 없애려고 한다 (…) 오늘날 우리는 큰 용기를 가지고 가톨릭의 학교와 책과 기관으로 메이슨의 학교와 책과 기관에 대항해야 한다.” 그러나 과넬라는 단순한 논객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의 활동은 그의 영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주의기도와 진복의 실천적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가 펴낸 두권의 소책자가 이것을 잘 말해준다 : “Andiamo al Padre” (성부께 나아가자 : 1880), “Andi-amo al Monte della Felicita” (행복의 동산으로 가자 : 1881). 주의기도와 진복팔단은 그의 영성의 정수였다 : 준법을 통해, 특히 이웃을 섬김으로써 모든 참된 복의 근원인 하느님께로 가고 인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그가 1881년에 피아넬로 라리오에서 신심이 깊은 여성들과 고아소녀들을 위해 본당 사제 돈 콘티니가 창설한 합숙소의 지도를 맡음으로써 구체화 되었다. 다른 기관들이 급속히 뒤를 이었다 : 코모의 남녀 빈민의 집 (1886) ; 밀라노의 고아소년들과 가난한 노파들을 위한 수용소 셋과 가정 하나 (1890), 가난하고 버림받은 소년들과 노인들을 위한 밀라노의 성 카에탄 기관 (1894), 같은 시기에 밀라노 근처 트렌노에 세워진 집단농장; 이밖에 어린이를 위한 수많은 교육기관과 가난한 이들과 비정상인을 위한 보호소와 갱생원.
논의의 여지가 없는 이 “사랑의 나라”에서는 당연히 예방적인 “사랑의 교육”이 가장 지배적이었다 : 카톨렌고와 돈보스코의 정신을 의식적으로 종합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 성인, 노인에 대한 관심. 그것의 전형적인 특징적 방법들은 애덕, 부성애와 형제애, 악의 예방, 많은 결점들이 “무지와 경솔에서 기인한 것들이기에 하느님의 권위를 조금도 혹은 전혀 해치지 않는다”는 인식; 이해와 용서; 자애와 조화를 이루는, 그리고 사랑에 의한 교정과 효심을 지향하는 엄격함 : “죄엥는 엄격함보다 관대함이 더 낫다” : “그들을 사랑하도록 절대로 또는 조금도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지 않도록 늘 노력하라.”
제4장: 돈보스코의 교육적 독창성
제4장
돈보스코의 교육적 특성
1886년, 페르모 교구의 한 사제가 단호하고도 아주 자극적인 글을 썼다 : “돈보스코가 청소년 교육을 위해 몸바쳐온지도 어언 50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신·구대륙을 망라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교육가가 될만큼 아주 복되고 대단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를 그토록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예방교육이다.”
과장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되겠지만, 돈보스코가 많은 동시대인들과 후세에까지 청소년 교육에 있어서 특별한 교육가요, 예방교육의 두드러진 대표자로 여겨졌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사실이다. 이것은 과거와 현대의 다른 교육자들의 독창적인 여러 경험들을 낮게 평가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돈보스코의 경험의 특이성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 사람들이 있었다. 토리노 대학교 “순수문학 연구소”의 교수 C. 단나는 1849년에 이미 오라또리오 (“돈보스코의 주일학교”)에 관한 감동이 배인 두 페이지의 글을 썼는대 거기서 그는 완벽히 교육적이며 기쁨이 넘치는 오라또리오의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특성을 강조했다.
“소년들을 위험과 혼란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적 품행을 가르치기 위해, 축일날 그가 그 외딴 목초지에 400-500명 가량의 여덟살 이상의 소년들을 모아 흥겹고 건전한 오락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고 나면, 그들은 미사와 종교적 신심의식에 참여한다. 그는 그들에게 성서에 기록된 역사와 교회사를 비롯하여 교리교육과 산수의 원리들을 가르치며, 미터법과 십진법을 익히게 하고,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도덕적 사회적 교육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는 신체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고 체조로 그들을 더욱 튼튼히 성장시키며 울타리가 빙둘러쳐진 오라또리오의 운동장에서 죽마놀이와 그네뛰기, 공굴려 기둥 넘어뜨리기 놀이 등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많은 소년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상품으로 주어지는 상본과 복권, 그리고 가끔씩의 약간의 먹을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젊은이들의 영혼에 진리의 빛과 상호 사랑을 불어넣는, 언제나 온화하고 주의깊은 돈보스코의 모습이다. 그가 피하는 악, 그가 예방하는 악습, 그가 뿌리는 미억, 그가 거두는 열매들을 생각한다면, 그의 활동이 방해와 반대를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돈보스코가 시로부터 마땅히 감사받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가난하고 남루한 소년들을 위해 그가 오라또리오에 개설한 합숙소 때문이다. 보통의 비참한 이들보다 더 비참한 누군가를 알거나 만났을 때, 돈보스코는 그 소년을 버려두지 않고 집으로 데려가 원기를 회복시키고 불결한 누더기를 새옷으로 갈아입히며 고용주를 찾아내어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서 장래의 좋은 생계수단을 제공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소년에게 아침 저녁밥을 주고, 그럼으로써 소년의 마음과 정신의 교육을 돌본다.”
돈보스코가 서거한 뒤 한달째인 1888.3.1. 추도미사에서 토리노의 대주교 가에타노 알리몬다 추기경이 하신 강론도 돈보스코의 교육제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가에타노 추기경에 의하면, 돈보스코는 교육분야에서 19세기 예언자로서의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그밖의 분야들로는 “노동자의 문화”, “노동단체”, “친교정신”, “미개인의 문명화”가 있다. “요한 보스코는 유용한 교육학적 발견들을 조금도 무시하지 않고 더욱 발전시켰다 : 방법은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는 원칙들을 응용할 줄 안다. 그는 자연스런 애정과 애덕을 유도하는 종교적 요소를 학문에 도입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교육학을 거룩하게 만든다.” 지극히 종교적인 그의 교육학은 전혀 가혹하지 않다 : “모든 것이 자유롭고 즐겁게 행해졌다.”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선의와 포용적인 진취적 기상을 지니고 평화롭고 존엄하며 신뢰에찬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다. 여러 다양한 활동들의 일반적 양식은 예방교육이며, 돈보스코에게 있어서 그것은 사회생활상 종종 불가피한 “억압적인 방법”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 “절대적 법칙”이다. “돈보스코가 그의 경영의 토대로 삼은 우선적인 최상의 기적적인 힘은 도덕적 힘이다. 그는 자신이 학생들의 애정을 얻지 못한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며 육체는 교육시킬지 모르나 정신은 교육시킬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1. 약력
돈보스코의 생애는 3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 <준비>
(1815-1844) ; 적극적인 교육활동의 근본 모습 추구
(1844-1869) ; 단체 조직과 “이론적” 정립 (1870-1888) 돈보스코의 생애와 교육활동 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들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1815 (8.16) 아스티 카스텔누오보 부락 베끼에서 출생
1817 아버지 사망
1824 사제 돈 쥬세빼 락꽈가 그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침
1826 첫영성체 (부활절)
1827 몰리아씨 농장에서 머슴살이 (1827.2-1828.12)
1829 돈 쥬세빼 칼로쏘 밑에서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를 다시 배움
1830 카스텔누오보 공립 국민학교에 다님 (1830 성탄 1831 여름)
1831 11월부터 끼에리 공립학교에서 문법, 인문학, 수사학 공부
1835 끼에리 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신학 공부
1841 6월 5일 삼위일체 축일 전야에 토리노에서 사제서품 받음
1841 11월에 토리노 사제양성소 (콘비또 에끌레시아스티코)에서 3년과정의 사목양성 받음. 이때에 바르톨로메오 갈레리 (12.8)를 만난 다음부터 소년들과 젊은이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침
1844 (10). 바롤로 공작 부인의기관들 중 하나의 담당사제가 됨
1845 (5)- 1846 (3). 빈코리의 성 베드로 (쇠사슬) 성당에서 몰리니도라, 카사 모레띠, 프라토 빌립비 (빌립비 목초지)로 오라또리오의 애처로운 유랑
1846 (4). 마침내 발도꼬 피나르디씨네 헛간에 오라또리오 정착. 여기서, 11월에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함. 겨울에 야간학교 시작. 읽기, 쓰기, 그리기, 산수 가르침
1847 포르따 누오바에서 성 루이스 오라또리오 시작
1848 (10). 정치적 종교적 격주 잡지인 라미꼬 델라지오벤뚜 (청소년의 벗) 축간. 이 잡지는 1849년에 리스투루또레 델 포폴로 (서민의 스승)에 통합됨
1849 쏘시에타 델리 오페라이 (노동자회), 쏘시에타 디무투오 소꼬르소 (상부상조회)설립
1852 (3.31). 몬시뇰 프랑소니 대주교로부터 그를 교장으로 임명하며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 루이스, 수호천사 오라또리오들을 맡긴다는 특허장 받음
1853 Letture Cattoliche (가톨릭 문고) 출판 시작. 오라또리오 집에 제화공과 재단사들을 위한 작업장 개설
1854 제본소 개설. 두 신학생들 (이 중 한명은 루아과 두 학생들 (이 중 한명은 갈리에로) 에게 시험삼아 수도단체를 이루어 살기를 제안함. 이것이 장차의 살레시오회의 씨앗이었다. <salesiani>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함. 도미니꼬 사비오 (1842-1857)가 발도꼬 학교에 입학
1855 집에서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이 이뤄짐. 이때까지 학생들은 시내의 사립학교에 다녔음.
1856 첫 목공소 개설. 집에 고등학교 1,2학년 반 개설. 원죄없으신 마리아회 출범.
1857 성체회, 복사단 창립; 빈첸시오회 청년부 모임 시작.
1858 돈보스코, 처음으로 로마에 가서 비오 9세께 소년들에게 헌신할 수도회에 대한 계획과 회헌 초안 제출.
1859 고등학교 과정 다섯 학급 모두가 이제 집에서 운영됨. 성 요셉회 설립. 살레시오회가 비공식 수도단체로서 사시상 출범.
1860 첫 평신도 회원들 (수사들)이 그 비공식 수도회에 입회.
1861 집에서 출판소가 운영되기 시작함.
1862 첫 대장간 운영 시작.
1863 토리노 외부 지역의 첫 기관이 미라벨로 몽페라또에서 돈 루아를 원장으로 하여 시작됨. 이 기회에 돈보스코는 그에게 Ricordi confidenziali를 준다. 이 기관은 1870년에 Borgo San Martino로 이전됨.
1864 Lanzo 학교 운영 시작. 살레시오회에 대한 Decre-tum Laudis 발표.
1865 Biblioteca degli Scrittori Latini(라틴작가 문고)기획
1868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전 축성. 1863년에 짓기 시작했었음.
1869 (3. 1) 살레시오회에 대한 성청의 인가. Cherasco에 수도원 개설. Biblioteca della Gioventi Italiana (이탈리아 청소년 문고) 첫권 출간 (1885년, 최종호 제204호 출간)
1870 Alassio시 Collegio-Convitto 개교
1871 Marassi(Genoa)에서 직업학교 시작; 이듬해 Sampi-erdarena로 이전
1872 토리노 (Valsalice) 귀족기숙학교 인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이라 명명된 여자 수도회 (살레시오 수녀회) 창설.
1874 성청으로부터 살레시오회 회헌 최종 인가 받음.
1875-1877 살레시오 활동이 점차 유럽 (프랑스, 스페인, 영국)과 남미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에 확대되어 이민기관, 교육-연구기관, 선교활동에 종사함.
1876 살레시오 협력자회에 대한 성청의 인가
1877 수도회의 첫 총회 개최. 이 총회는 일반지침과 규범들의 면에서 볼 때 극히 중요하다. 이후 3년마다 총회 개최 (1880, 1883, 1886)
1888 (1. 31) 돈보스코 서거.
2.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을 재정립하기 위한 자료들
돈보스코는 많은 글을 남겼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의 교육 개념이나 교육 실천에 관해 특별히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개념들을 충실히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용가능한 모든 문헌들을 활용해야 한다 : 출판 또는 미출간된 그의 글; 그의 동역자들과 동시 대인들의 증언 (책, 연표, 회고록) ; 전기와 실제 경험과 관련된 수도회의 역사 (의식적으로 작성된 것들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적인 어떤 근본 기준이 있어야겠다.
1) 돈보스코의 광범위한 활동 중 특별히 교육적인 요소를 가려뽑아야 한다.
2) 돈보스코의 저작들 가운데 특히 “교육적인” 것들을 더 중시해야겠지만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어느 책에서나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일반적인 교육적 관심사나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3) 돈보스코의 저작들을 유일한 정보자료로 활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돈보스코와 그의 동역자들의 인간됨, 그리고 예방교육이 고안되고 실천된 기관들의 실상을 늘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충분히 보완해야 할 것이다.
4) 끝으로, 돈보스코의 예방적 방법은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러므로 그것을 “절대적”이며 “불가변적”인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긴다든지 또 그것이 시대변천에 성장 확립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모습들을 똑같이 타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반역사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다양한 기관들 (유랑 오라또리오, 정주 오라또리오, 비기숙학교, 합숙소, 기숙학교, 성소기관, 직업학교, 농업학교, 선교관, 청소년 단체들)과 다양한 역사적 환경적 여건들에 알맞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 돈보스코의 활동의 고유한 예방적 차원은 젊은이와 서민을 위한 보다 광범위하고 풍부한 관심범위 가운데 유일한 본질적 부분임을 명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이 차원은 이로 인해 서로 얽혀있지만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삼중적 관심을 기초로 하여 이해되어져야 한다.
1) 의·식·주·노동이라는 근본 요구들을 겨냥한 원조 및 자선활동
2) “영혼 구원”을 위한, “은총 상태에서 살고 죽기 위한” 사목적 관심과 그것이 요구하는 특별한 활동
3) 그가 창설한 교육적이며 수도적인 공동체들의 영적지도 활동-다음과 같은 그의 두 언명에서 이것을 엿볼 수 있다.
“20년간 저는 감옥과 병원에서, 이 도시의 거리와 광장에서 사제직을 수행해왔습니다. 저는 어떠한 보상을 청하거나 받지 않고, 버림받은 소년들을 모아 그들이 도덕적인 길을 걷도록 그리고 각자의 지력과 능력과 성향에 따라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 돈을 털어 집을 짓고 가난한 소년들을 부양해왔습니다-오늘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애덕활동을 통한 자기 성화와 영혼 구원-이것이 우리회의 목표입니다. 이 일에서는 탁월한 덕행과 학덕을 지닌 이들에게만 일을 맡기도록 극히 유의해야 합니다. 나쁜 교사만큼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이에 대한, 그리고 돈보스코의 저작을 이용하는데 대한 분명한 결론이 있다. 돈보스코의 저작들은 그의 총체적 경험의 표현이요 요인들이다. 그것들에는 명시적이거나 또는 잠재적인 교육 내용들이 다른 요소들과 융합되어 있다 : 신학적, 법적, 성인전적, “영적”, 고행적, 조직적 요소들이 뒤섞여있다. 돈보스코의 교육적 신념들을 조화롭고 일관되게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가능한한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방법론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분명코 이 모든 것을 예외없이 활용해야 한다.
꽤 맣은 저작들이 순전히 청소년과 서민들의 발전을 위한 것이지만, 돈보스코의 인성과 그가 창설하고 통치한 기관들의 실생활과 그것을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교육적으로 오해를 받거나 심지어 오도될 수도 있다. 이론을 전개하고 글을 쓴 돈보스코를 가장 잘 해석해주는 것은 교육경험을 창출하고 형성시켜 주요 수혜자들인 소년들과 동역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기관들에다 그것을 구현시킨 돈보스코 자신이다. B. Fascie는 이런 글을 남겼다 :
돈보스코의 교육방법을 엄밀한 도식에 맞춰 낱낱이 분석하고 해부하며 조각조각 분해하는 접근법은 바람직한 방법이 못된다. 그분의 교육방법을 고찰할 때는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은 원칙들과 그것의 살아있는 기관들 및 그 기능들을 연구하여 살아있는 생명체로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끝으로, 돈보스코의 에방교육의역사적 배경적 실질적 측면들에 유의하여 그것을 너무 체게적이며 일률적으로 재구성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돈보스코의 교육경험과 그에 따른 이론적 규범적 가치는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사회적 환경적 제도적 배경 속에서 형송되었기 때문이다. 1848년이전 국가 통일 (1860) 까지, 돈보스코의 기관들이 확산되던 “피에몬테” 시기 (1870년까지)를 서로 또는 그 후의 시기와 동일하게 여겨져서는 안된다. 심리적 분위기, 문화적 자극, 사회적 여거느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전혀 달랐다. 또 같은 시기 내에서도 축일 오라또리오, 견습공 합숙소와 학생기숙사 중산층 자제들을 위한 Collegio-convitto (기숙학교들; 알라시오, 토리노-발사리체, 에스테) ; 남불의 “보육원”,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에 세워진 유사 기관들에서 실현된 경험들을 전적으로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물론, 어느 곳에서나 공통된 본질적 요소들과 기본적인 가르침을 찾아볼 수는 있었지만 그것들을 중심으로 각 경우마다 다른 천차만별의 특징들이 눈에 띄었다. 문헌에서도 이와 유사한 차이점들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의 종류가 다르고 또 글에 언급된 상황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주로 사용하게 될 문헌을 지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생활되고 또한 재고된 경험들과 관계된 책들이 가장 중시될 것이다 : G. B. Lemyne(1-9)과 A. Amadei(10), E. Ceria(11-19)가 편집하여 1898년부터 1939년까지 토리노에서 한정판으로 출판된 MomorieBiografiche 19권 : 돈보스코의 이 전기에는 그의 생애와 활동 중의 사실들이 순서대로 언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헌들과 증언들 (서한, 담화, 회합, “저녁말씀”, 회람장, 여러 가지 지침들)을 담겨 있다; 돈 죠반니 보네띠와 그의 제자가 지은 Cinque lustri di Storia dell'Oratorio Salesiano fondate dal Sacerdote Don Gi-ovanni Bosco(돈보스코 설립 살레시오 오라또리오 25주년) : 이는 1897-1887년에 돈보스코가 썼고 체리아가 1946년 토리노 S.E.I에서 펴낸 Memorie dell'Oratorio di S.Francesco di Sales(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오라또리오 회고록) : 이것은 1815-1855년과 특히 초창기 토리노에서의 축일 오라또리오와 초창기 합숙소에 관계된 교육경험을 담고 있는 특별한 문헌이다; 돈 체리아가 편집한 풍부한 Epistolario, 토리노 SEI 1955-1959.
돈보스코의 다음 글들을 특별한 교육적 가치를 지닌다 : Ricordi confidenziali ai direttori(1863년 초고); Ricordi per un giovanetto che desidera passar bene le vacanze(1874); Il sistema preventino nella educazione della gioventu(1877); Il sistema preventino applicato negli istituti di rieducazi-one(1878); 1884년 5월10일자 로마에서 보낸 편지 두통; 수많은 규칙서들(신심단체, 기숙사, 작업장, 극장 등의) ; Regolamento dell'Oratorio di S. Francesco di Sales per gli esterni(1877); Regolamento per le Case della Societa di S. Francesco di Sales(1877); 마지막 두 문헌은 포괄적이고 결론적인 성격을 지닌 것들이다.
잘 알려진 몇몇 전기들은 소신학교 생활과 관련된 것으로서 점차 성인전적이고 교육적인 이야기체를 띠게 되었다: Vita del giovinetto Savio Domonico(1859), Cenno biografi-co sul giovinetto Magone Michele(1861), Il pastorello delle Alpi, ovvero Vita del giovane Besucco Francesco d'Argentera(1864), 이와 비슷한 것으로서 전기적 배경을 지닌 교휸적 어조를 띤 것들도 몇권 있다 : La forza della buona educa-zione(1855), Valentino o la vocazione impedita(1866), Serve-rino, ossia avventure di un giovane alpigiano(1868).
청소년 교리교육 및 종교교육에 큰 관심을 쏟은 것들도 있다 : La Storia ecclesiastica(1845), La Storia Sacra(1847), Avvisi ai Cattolici와 Fondamenti della Cattolica Religione(1850과 1853), Maniera facile per imparare la Storia Sacra(1855).
학문적 성격을 띤 다른 저서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Il sistema metrico-decimale ridotto a semplicita(1849), La storia d'Italia raccontata alla gioventu(1855). 다음의 것들은 학문적이면서도 오락적인 것이다 : Dialoghi scenici sul sistema metrico-decimale (1849), Una disputa tra un avvo-cato e un ministro protestante(1853), La casa della foetuna, Rappresentazione drammatica(1865), Novella amena di un vecc-hio soldato di Napoleone I (1862), Fatti ameni della vita di pio IX (1871).
제5장: 돈보스코의 “교육적 양성”
제5장
돈보스코의 “교육적 양성”
돈보스코의 활달하고 사려깊은 전인교육에서는 아주 다양한 문화적 경험들을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가 어린시절(엄마와 교회의 가르침), 청소년기(들일과 공부), 서품 후까지의 성숙기(끼에리의 라틴어학교, 신학교, Convitto Ecclesiastico [콘비또 사제 양성소])에서 받은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전반적 양성과 일치한다. 장차의 그의 사제적 인성-청소년의 벗이자 목자요 교육자로서의 몇가지 전형적 특징들이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돈보스코의 교육 성소의 핵심은 그의 그리스도교적 사제적 성소의 탄생, 성장, 성숙과 함께 나타나 성장하였다; 그것이 바로 참된 가톨릭 영성에서 자양분을 얻는 교육적 사랑의 가장 전형적인 열매다.
1. 돈보스코의 어머니
돈보스코의 첫 교육자요 교육학의 스승은 그의 어머니 말가리따 오끼에나였다. 그분의 “가장 큰 관심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가르치고 순종을 가르치어 나이에 걸맞는 의무들로 그들을 분주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인격을 형성시킴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친 요소들은 다음과 같아 : 가정생활(그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 기도습관,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는 습관, 희생 습관; 초등학교 교사들이었던 몇몇 사제들로부터 읽고 쓰는 법을 익힌 것; 그 다음 고백성사(분별력을 지닌 나이에)와 성체성사(나중에 자유재량을 가진 열한살 때)를 받은 것;
집을 떠나 고된 들일을 한 것(어머니에게 순종하여 머슴살이를 함).
그러나 그 소년이나 어머니의 현실적인 정신이나 그들이 살았던 시골 신자들의 여건에도 어긋나지 않는 또 다른 분야 즉 놀이, 오락활동, 곡예사의 공중곡예에 그가 열성을 보인 것도 특징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그는 나중에 끼에리에서 공부할 때 , Societa dell'allegria (명랑회)를 조직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교육제도 속에 늘 많은 ‘놀이시간’을 끼어 넣었다.
2. 첫 학교교육
그 뒤 첫 정규 초등학교 교육(1830년 성탄 때부터 1831년 여름까지 가스텔누오보에서)을 받았으며 문법, 인문학, 수사학(끼에리에서 1831-1835에)을 공부했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중요한 시기였다. 어린 농군에게서 신기하고 또한 황홀한 세계였던 인문주의적 “라틴” 고전문화를 접하였다. 교육자와 성소 개발자로서의 그의 장차의 활동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학교교육 덕분에 이것은 그의 지적 수준과 교양적 열의를 높여 주었다. 그러나 훨씬 더 결정적이며, 그에게 있어서 전체적 양성 질서의 구조적 부분이 되었던 것은 문화와 도덕과 종교였다. 이것은 그가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들을 조직했을 때, 특히 기숙학교들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Regolamento- (Carlo Felice가 1822년 7월 3일자 특허장으로써 허락한 법령을 반영한 끼에리 학교의 조직은 돈보스코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것은 그 후의 접촉과 경험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 본문을 분석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가 Memorie에 기록했던 주로 종교적 측면들에 대한 분명한 기억으로써도 이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의 것들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전적으로 동일했다 : 생활과 학업의 종교적 도덕적 기초; 교육의 가치와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실천; 질서, 훈육, 도덕성(학습 감독관의 임장 지도에 의해 특히 확실히 지켜지는)에 대한 관심; “모임”과 영적지도와 성사집전을 통한 내적 양성;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생들 간의 상호 관계들에서 인간미를 통해 엄격한 의무를 완화시킴; 포상; 체벌 절제.
이 외에도 어린 보스코에게는 강한 “문학적” 관심이 있었기에 그는 거의 심취했다 할정도로 이탈리아 고전과 라틴 고전을 독파했다.
3. 끼에리 신학규
돈보스코의 영적 정신적 구조는 끼에리(1835-1841)에서의 철학 및 신학 공부보다도 그 신학교의 훈계조직에 의해 더 강화되었던 듯싶다. 그것은 그의 교육학의 특징인 사랑과 기쁨의 교육학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자신의 의무를 정확히 준수함; 아침기도나 미사, 묵상, 로사리오, 식탁에서의 독서(그는 특히 Bercastel의 교회사를 좋아했다); 보름마다의 고백성사와 축일마다의 영성체; 철학과 신학 논문들을 연구함. 개인적 학습이 충분히 가능했지만 역사적 호교론적 학습들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었다. 후자 덕분에 그는 그의 역사적이며 교리교육적이요 일반적인 임무를 처음 접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변이나 신학이론적-교의적 논쟁과는 거리가 먼, 실천적인 윤리신학에 뚜렷한 관심을 가진(특히 콘비또에서) 장차 실천주의적 성격을 지닌 그의 교육학으로 꽃피어날 적절한 수준의 교양이었다.
4. 토리노의 사제 양성소
이 Convitto(사제양성소)에 관한 글에서 돈보스코는 수차례 ars animarum으로 이해되는 사제적 사명과 “영적 교육학” 및 그의 관심의 노선 위에서 그것의 실천 사목적 특징을 강조했다. 이 기관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사제들에게 실제의 성직생활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 되었다; “묵상, 독서, 매일 두차례 회합, 설교수업, 격리생활, 학업과 양서를 읽을 수 있는 모든 편의시설; 이것은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 하는 활동들이었다.” 돈보스코의 예순살 때 기억에 이것은 그가 늘 애착을 가졌던 기관, 특히 그곳의 총책임자인 카파쏘와 그의 후계자 Canon Eugene Galletti(1860-1864)에 대한 인상이었다.
콘비또에서 돈보스코는 단순히 윤리신학 뿐만 아니라 영성과 인생의 스승을 발견했다. 그 스승 덕분에 그는 전형적인 교육사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 감옥과 교화소의 소년들 가운데서; 특히 시골과 구릉지에서 온 이주자들에게 사순절 교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종종 가파쏘께 조언과 도움을 청했다. 그로부터 그는 전형적인 영적 특성을 배우고 강화받았다; 그리스도인의 희망;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보다도 신뢰; 일관된 종교생활의 한 양식으로서의 의무; 사목활동에 있어서 성사집전의 중요성; 교회와 교황께 대한 충성;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사도적 지도; 사말(죽음, 심판, 천당, 지옥)에 대한 기억과 선종연습. 돈보스코의 교육적 사목적 실천의 중요부분이 된 도덕적 지도에 관해 말하자면, 콘비또는 성 알퐁소 리궈리의 신학적 영적 개념들의 본질적 측면들을 전달해주는 커다란 매개체였다. 괄라와 가파쏘는 그를 아직도 기세를 떨치고 있는 얀세니즘의 엄격함과 그것에 대한 피상적이고 너무도 온정적인 반작용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인물로 여겼다.
5. 가톨릭 “개혁”의 선도적 인물들
여기서 우리는 뚜렷한 사목적 교육적 방향을 보여주었던, 가톨릭 개혁에 앞장 선 몇사람과 돈보스코의 관계를 상기해야 한다. 돈보스코 자신이 Storia ecclesia에서 그것을 아주 많이 암시하고 있는 것같다. 트리엔트 공의회를 따라 많은 복음적 활동가들이 강한 사도적 열성을 보여주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다음 사람들을 언급할 만하다 : 성 비오 5세, 성녀 데레사, 성 챨스 브로메오, 성 빌립보네리,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 빈첸시오아 바오로.
돈보스코가 이 성인들-특히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와 성 빌립보네리-을 알게 된 것은 물론 신학교 시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이 심화되고 그들에게 반하여 비슷한 사목방식을 취하게 된 것은 나중이었다. 이미 1845년에 Storia ecclesiastica에 그는 자신의 인성의 특징을 내포하는 성 빌립보네리 생애를 간추려 적었다.
“그분은 거지들과 병자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온갖 애덕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특히 가장 버림받은 소년들을 모으기 위해 거리와 본당 구역을 돌아다니셨다. 그분은 그들을 일정한 곳으로 데려가셔서 농담과 유익한 오락으로써 세상의 퇴폐와 영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으며, 신앙의 진리 안에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리하여 무례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는 오라또리오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는 1868년 5월 알바의 강론 중에 자신이 공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요소들을 언급하면서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바쳤다.
“하느님께서는 빌립보 성인을 특히 젊은이들에게 파견하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았습니다… 빌립보 성인은 그들을 친절히 대했으며 그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탕을, 어떤 이들에게는 매달이나 상본, 책 등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숭고한 부성적 사랑에 감사할 줄초자 모르는 더 비참하고 무지한 이들에게는 그들의 요구에 더 잘 맞는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들과 가까이 할 수 있게 되면 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노래부르고 악기를 다루고 연극에 참여하고 깡충깡충 뛰고 갖은 방법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만들라고 권했습니다. 마침내 아주 완고한 사발, 죽마고리던지기, 다과, 아침 식사, 소풍, 음식에로 모여들었습니다. 빌립보 성인은 하느님께 영혼을 얻어드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비용도, 어떤 수고도, 어떤 걱정도, 어떤 희생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시곤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로부터 돈보스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취했으며 얼마나 많이 의존했는가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차치해 두더라도 교육적 관계에 영향을 주는 인간적 관계 양식에 관한 견해와 기질에서 분명한 유사성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은 Storia ecclesiastica 초판에서 이미 발견되는 그 성인에 대한 짧은 글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 “자신에게 큰 일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자극받아 오직 상냥함과 애정으로 무장하고서 Chablais에게 다가갔다… 인내와 강론과 글과 큰 기적으로 모든 소동을 가라앉혔고, 자칠 자객들을 설복시켰으며, 지옥 전체를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하여 가톨릭 신앙이 승리했다.” Memorie dell’Oratorio에서 돈보스코는 자신의 의존관계에 더욱 확고한 동기를 부여했다 : “우리의 직분은 침착함과 온유에 따라 성패가 가름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인이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그분의 특별한 온유와 영혼들을 사로잡는 능력을 닮는 은총을 얻어주실 수 있도록 그분의 보호 아래 우리 자신을 맡긴다.” 이 동기는 1851-1852년에 처음 작성되어 1877년에 출판된 Rego-lamento dell'Oratorio di S. Fracesco di Sales per gli ester-ni에 이미 제시되었었다. “본 오라또리오는 성 프란치스꼬의 보호 아래 있다. 이런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성인을 사랑과 친절의 모범으로, 오라또리오 사업에서 우리가 바라는 성과들의 근원으로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안들은 돈보스코가 첫미사에서 한 기본 결심들 중 하나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사랑과 온유가 모든 일에서 나를 인도하게 하련다.”
6. “오라또리오” 경험
돈보스코가 자신의 교육 정신에 따라 1844년부터 시작한 활동과 교육기관은 그 시대의 지역교회 활동에 더 접근한 것이었다. 그것은 콘비또 시절 근처의 성 프란치스꼬성당에서, 그리고 본당에 소속되지 않은 소년들 가운데서의 그의 가르침과 활동 중에 그가 가르쳤던 교리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청소년의 다양한 삶의 부분 (종교적, 교리교육적, 교육적, 오락적, 사회적)을 보여준 그 오라또리오는 토리노에 돈 요한 코끼라는 열성적인 활성자를 가지고 있었다. 1836년에 사제가 된 그는 안눈찌아짜 성당의 보좌였으며 훗날 여러 가지 활동을 지휘했다. 1840년에 그는 모쉬오라는 가난하고 평판이 나쁜 지역에 수호천사 오라또리오를 세웠다.
토리노에서의 이러한 시험에 뒤이어 돈보스코는 16세기의 가톨릭 개혁 활동들 특히 성 챨스 볼로메오의 활동들의 이상을 계승한 노선을 취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단을 발기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이전에 그는 자신의 교리활동에 문화적 오락적 측면을 가미시켜 교리활동을 점진적으로 확대시켰다. 레뮈엔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우리는 그분의 문서들 가운데서 1842년 밀라노 성 크리스티나 광장에 세워진 성 알로시우스 오라또리오의 규칙서와 성 가정오라또리오 자녀들의 규칙서를 볼 수도 있다.”
기숙사 규칙서들은 더 잘 다듬어져 있고 대인적이다. 그 뒤의 (소극장, 진료소 등의) 일반규칙 또는 특별규칙 초안들이 이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도, 돈보스코와 그의 동역자들이 생각한 기숙학교 생활 전반에 걸쳐서도 마찬가지로 가톨릭 학교들, 특히 전통적인 전문 종교기관들 (예수회, 바라바회, 피아니스트회 등)의 실질적이고 가끔은 법적인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엿보인다.
7. 그리스도교 학교들의 수사들과의 만남
Memorie Biografiche는 돈보스코가 그리스도교 학교들의 수사들과 맺었던 관계에 대해, 특히 그들 가운데서 (MB2, 316, 453-457에 따르면 1851년까지)수행했던 사제직에 관해, 그들의 것들과 비슷한 활동들(예를 들어, 야간학교 1846년에 사용법령이 선포되으며 1850년부터 실시된 십진법 보급을 위한 출판활동)에 관해, 또 개인적인 친분과계들 (1845년에 나온 Storia ecclesiastica는 이태리를 방문한 Herve de la Croix 수사에게 현정되었다)에 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교 학교들을 운영한 수사들의 교육경험에 대한 이론적 이념적 의존도는 다소 낮았지만, 그리스도교 “예방” 제도가 지닌 중요한 점들에 있어서는 많은 것이 서로 일치되었다. 그리스도교 “예방”제도의 중요점들로는 소년들의 기질에 대한 관심, 사랑과 호락호락하지 않는 친밀함, 상냥하고 적극적인 임장지도와 특히 종교, 이상, 친밀한 사랑이 요구하는 모든 것의 근본을 이루는 “예방” 정신이 있다. 돈보스코는 그 수사들의 영적 교육적 유산들 가운데 어떤 부분들을 읽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소책자 Le dodici virtu di un buon maestro, accennate dall'Ab. De la Salle, istitutore dei Fratelli delle scuole cristiane, spiegate dal R.F. Agatone Superiore Generale del sudetto Istituto(그리스챤 형제들의 창립자 de La Salle 수도원장이 강조했고, 총장 R.Agatone 신부가 해설한 훌륭한 교사의 12가지 덕행들)에 담긴 이념들과 말들은 깊은 감명을 준다. 이것은 Lasalle 전통의 고전이며, 그러기에 돈보스코가 1835년에 토리노에서 출판된 Marietti판에서 그것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La-salle의 몇가지 묵상들, 특히 16가지의 Meditations pour Ie temps de la retraite(피정을 위한 16가지의 묵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8. F. Aporti의 교육사상과 돈보스코
우리는 돈보스코가 F. Aporti(1791-1858)의 교육사상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아주 놀랍게도, 1844년 여름-가을(8월말-10월 초)에 토리노에서 Aporti가 강의한 방법론 강좌를 돈보스코가 최소한 일부나마 들었다는 증거가 있다. 또한 아포르티가 토리노에 망명 중(1848-1858)일 때 특히 학문적인 논문 때문에 그를 만났음이 분명하다. 아포르티의 저서들을 더 직접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1844년 아포르티의 토리노 강연의 요약집을 비롯한 저서들, 특히 Elementi di Pedagogia(교육학적 요소들)을 분석해 볼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보스코의 장차의 교육방법과 아포르티의 활동정신을 비교해 볼 때 원칙과 방법상에 있어서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ㅇ든 사실이다. 이것은 교육학의 대중적 성격, 그것의 명백한 그리스도교 정신, 어린이와 소년들에 대한 그것의 종교적 인간적 존중, 자선과 친절한 사랑의 방법(아포리티는 “우선 아이들의 애정과 신뢰를 얻으라” 고 권한다), 책임과 설득, 즉 한마디로 얘기해서 예방적 이상에 있어서도 사실이다. 아포리티는 이렇게 쓰고 있다: “교육자의 능력은 아동의 실수를 빈틈없이 처벌하는데 있다기 보다는 그런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는 법을 아는데 있다.”
9. 돈보스코와 “L’Educatore primario”
특히 초중등 학교 교사를 위한 잡지 L’Educatore prima-rio (초등 교육자) 또는 L’Educatore (교육자) 에 협력했던 교육자들 및 교육학자들과 돈보스코가 심리적, 정신적, 활동적 일치를 보이고 있는 점 역시 놀랍다. 문필 차원에서 돈보스코와 L’Educatore 간의 상호작용을 증거하기는 쉽다. 돈보스코의 처음 두 주요저작들 (Storia Ecc-lisiastica, 1845; Storia Sacra, 1847)은 L’Educatore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평론가 돈 라멜로 교수는 처음의 작품을 “좋은 심성을 기르기 위해 정신을 일깨워 주어야할 중요한 교육 원칙을 확신”하는 “학식있고 훌륭한 사제”의 “새롭고 어주 유용한 책”이라고 정의했다. 둘째 작품에 대해 돈 M.G.는 “사제 보스코가 편찬한, 학교용 Storia Sacra(구세사)에 관한 어떤 학교교사의 편지”에서 보다 상세히 썼다. 그는 경험으로부터 그 기원과 그것의 도덕적 목표들, “서민적이면서도 순수한 이태리어”, “다정하게 다가서며 선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이해심”에 관해 언급했다. 돈보스코는 Educatore primario 첫권에서는 서민적인 학문개념을, V.Garelli의 기고문에서는 (1845년 제24호)구세사를 가르칠 때는 그림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아포리티의 생각을 취해 Storia Sacra 초판 서문에 그것을 실었다. 그는 비평가의 아주 적절한 표현을 거의 그대로 실었다: “각 페이지마다 나는 언제나 다음의 원칙을 염두에 두었다: 좋은 심성을 기르기 위해 정신을 일깨운다.” 그러나 이밖의 이념들, 방법들, 또는 조직상의 관계들을 더 명확히 정의하긴즌 어렵다.
돈보스코가 A.Rosmini, G.A.Rayneri, G.Allievo(뒤의 두 사람은 토리노 대학 교육학과장직을 역임했다. 1847-1867, 1869-1911)와 같은 당대의 몇몇 교육 이론가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확실하나, 공식적인 학문적 과학적 교육학을 깊이 접한 것 같지는 않다.
10. “청소년 교육에 있어서의 예방교육”
이제 반하여, 1877년에 I1 sistema preventivo nell’edu-cazione della gioventu(청소년 교육에 있어서의 예방)에 기본적으로, 하지만 함축적으로 표현된 돈보스코의 교육적 견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제언을 확인할 수 있다. 돈보스코가 자신의 교육방법의 기본 개념들을 밝힌 것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경험을 고무시키는 원칙들을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수차례 받았던 것같다. 같은 해 Marseilles의 그리스도교 학교들의 수사 협회에서도 역시 이런 요청이 있었다. 기숙학교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억압적인 방법만이 시행되고 있는 것에 반해 즉 엄격하고 퉁명스런 어른들만이 있는 것에 반해 그는 “그들에게 우리의 예방교육과 친절한 사랑 등을 약간 설명해 주었다.” 그는 1854년 4월에 이미 법무장관 울바노 라따찌에게도 억압적인 교육과 예방교육 간의 상이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방교육의 주요 요점을 설명했었다. 1882년의 편집자는 1877년에 편집된 그 소책자에 대해 알고 이쑈었던 것같다;
“각하께서는 교육에는 두가지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아실겁니다: 하나는 억압적인 교육이라 불리우고 다른 하나는 예방교육이라 불리웁니다. 앞의 것은 법률을 위반하여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사람을 억압하고 처벌하는 등 물리적으로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나중 것은 친절한 사랑으로 사람을 교육하여 그로 하여금 법률을 준수하도록 도와주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그에게 제공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교리를 가르치고 적절한 도덕적 가르침을 펴 젊은이들의 마음안에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덕을 사랑하고 악덕을 미워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시의적절하고 친절한 조언과 특히 신심업들과 종교로 방향을 제시하고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습니다. 이밖에도, 가능한한 우리는 오락시간에, 학교에서, 일터에서, 사랑어린 임장지도로 그들 주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친절한 말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들이 의무를 잊은 듯 싶으면 즉시 상냥하게 그것을 일러주며 선을 상기시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사랑이 말해주는 모든 정성을 다해 그들로 하여금 종교에 의해 깨우쳐지고 뒷받침되는 양심에 입각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합니다.
그 책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아직 돈보스코의 생전에 거의 동시에 그것의 원천들에 관한 제언들을 담은 훌륭한 도서목록이 작성되었다. 1880년에 살레시오 회보에 Storia dell'Oratorio di S. Francesco di Sales(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오라또리오 역사)를 연재하면서 돈 지오반니 보네띠(1838-1891)는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고찰에 자극받아 그 자신의 경험을 그것의 근거로 재시했다. “모두가 자신의 부성적 교육제도를 이해하고 따르도록 하기 위해 돈보스코는 몇차례 회합을 개최했는데, 고 몬시뇰 에우제니오 갈레띠, Corpus Dorpus Domini(성체회) 참사위원이기도 한 알바주교를 비롯한 토리노 사제들이 거기에 참석했다.” 1883년 또 다른 살레시안 돈 프란체스꼬 체루띠는 돈보스코의 교육학의 종합적인 성격 즉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성격에 관해 언급했다: “「교육에 있어서 예방」이라는 책은 얇은 책이지만, 여러분은 그 주제를 다룬 다른 두터운 책에서보다 훨씬 많은 유익한 교육적 명언들을 거기서 발견할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몇마디 말들 속에서 여러분은 옛 이교적 지혜가 도달했던 최고점과 새로운 그리스도교적-가톨릭적 지혜의 정수를; 퀸틸리안의 이론적 지혜와 Vittorino da Feltre의 실천적 양식을;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정신에 의해 전해지는 모든 합리적인 것들과 복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짧지만 함축적인 돈보스코의 글의 직접적인 전거로 여겨지는 확실한 문헌은 사실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돈보스코의 행동과 말과 글로 드러나곤 했던 그의 풍부한 교육경험 내용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가톨릭적 교육 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들을 분명히 찾아낼 수 있다. 그 전통에는 Fenelon과 Bossuet와 Rollin이 주창한 친절한 사랑가ㅗ 분별과 이해라는 그리스도교적 방법이 확실히 포함된다. 돈보스코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Agathon 수사의 소책자에서 일찍이 그것을 접했을 것이다. Blanchard 대수도원장의 저작도 잊지 말아야 한다. 말도꼬 도서관에는 이 책의 요약집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이 차지하는 중심 위치, 유아의 연약성에 대한 고려, “합당한 선”의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 돈보스코의 측근과 가까웠다는 점에서, Gugliemo Audisio 수사신부의 Educazione morale e fisica del clero con-forme ai bisogni religiosi e civili(사회적종교적 요구에 따른 신학생의 심신교육)도 언급해야 한다. Pensieri eccle-siastici는 “청소년을 위협하는 위험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사랑으로 그들의 변덕을 고쳐주며,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며, 마침내는 덕을 맛들이고 성사를 자주 받게 하는” 그리스도교 청소년 교육에 관심을 가지라고 권고한다. 나자로회 Pier Paolo Monaci의 Riccolta di varii esercini di pieta ed istruzioni는 “사랑의 충고”로 잘못을 꾸짖어 아동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돈보스코의 팜플렛에서는 바나바회의 Alessandro Teppa 총장신부의 소책자의 직접적인 영향이 많이 눈에 띈다. 돈보스코는 교육자들을 양성함에 있어서 테빠 신부의 Avveriti-menti per gli educatori ecclesiastici della gioventu(교회의청소년 교육자들이 유의해야 할 점)을 활용했다. 이 책은 교도에서는 교육적 사랑 즉 친절한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젊은이 각자의 성향을 알아야 하며,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는 공통된 견해들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예방적인 동시에 억압적”이란 어구는 특히 자유주의적 정치적, 사법적, 교도행정적(예방적인 동시에 형벌적인 감옥) 분야들과 임장활동 단체들에서ㅕ 특히 유명해진 것같다. 돈보스코가 토리노 소년원을 접하거나 특히 그 분제에 관심있는 성직자나 공무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런 표현을 들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베제할 수 없다.
“억압적 교육”, “예방적 훈육”, “지시적 훈육”이란 어구들이 등장하는 몬시뇰 Dupanloup의 가장 중요한 교육적 저작 De L'Education을 알게 됨으로써 비슷한 착상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11. 사랑; 교육과정의 핵
두려움 보다 사랑을 교육 공동체의 지도방법 겸 교육과정 자체의 정수로 삼을 것. 이는 토리노 외부의 첫 기관인 미라벨로 몽페라또 (1863년 10월) 집의 원장이 된 돈루아에게 준 돈보스코의 Ricordi confidenziali의 핵심이다. “두려운 사람이 되기 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라”는 그리스도교의 고전적 명언이 곧 이것의 중추다. 수녀원장에게 Et quamvis utrumque sit nicissarium, tamen pl-us a vobis amari apprtat quam timeri라고 명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회 규칙서나 Et studeat plus quam timeri라고 명하는 성 베네딕또회 규칙서에서 그러한 언명 (과 정신)을 쉽사리 찾아 볼 수 있기는 하나, 돈보스코가 어디에서 그것을 직접 인용했는가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Castighi da infliggersi melle casa salesiane(살레시안 집에서 내릴 처벌들)에 관한 1883년의 회람장은 마리아회 A.Monfat의 유명한 소책자 La pratica dell'educazione cri-stiana(그리스도교 교육의 실제)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에는 돈보스코의 것과 유사한 견해와 신조들이 이곳저곳에 나타나 있기는 하나, 다른 사람들이 ㅍ쳔집했음이 분명하다.
1884년 5월 10일 로마에서 보낸 돈보스코의 유명한 편지는 문헌적 자료를 넘어 그의 활동과 저서를 둘러싸고 형성된 일반적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최소한 기본적인 생각들은 돈보스코가 구슬한 것이다. 이것은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는 “amorevolenzza”의 핵심 개념들-“소년들은 사랑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년들이 좋아하는 것들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 안에서 사랑받게 함으로써, 본성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들에서도 사랑을 볼 줄 알게 한다”; “특히 오락시간에 소년들과 함께 어울린다”; “주의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무질서를 방지하는 제도; ”도덕적 종교적 목표 (소년들의 영적 현세적선익을 추구함) ”-을 중심으로 서술된 예방교육에 대한 훗날의 해석이다. 훗날 Journal de Rome지의 기자가 돈보스코께 “당신의 교육제도의 정체를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돈보스코는 이렇게 답했다;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소년들을 전적으로 자유롭게 놔두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좋은 싹을 발견하여 열심히 키우는 것이 중요하지요,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쁘게 하기 때문에, 저는 이 원칙을 따르고 있고, 저의 생도들은 모두 열심히 일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지요, 46년간 저는 벌을 준 적이 한번도 없으며, 아이들이 저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12. 돈보스코가 토리노 젊은이들에게 끼친 영향
결론적인 문헌인 1884년의 편지를 검토하다 보면 일정한 혹은 개연적인 문화적 문헌적 의존성을 넘어 돈보스코를 교육자로 만들어 준 직접적인 사람들과 돈보스코의 정신 및 양식에 관해 깊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양성은 필시 콘비또, 감옥, 토리노 거리의 젊은이들에게 받은 최초의 충격에서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골 세계도, 끼에리의 라틴어 학교도, 신학교의 신학도 그런 것에 대비해 실제적으로 조금치도 그를 준비시켜 주지 못했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새로운 “학교”였다. 이런 첫 경험들로 인해 시작은 되었지만 끝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시대의 변화와 다양한 접촉으로 인해 그로 하여금 현실을 늘 새롭게 인식하고 그에 대처할 방안들을 마련하게 하는 학교였다.
한편 돈보스코는 현실주의적 기질을 지녔었기에 역사적 상황에 개방적이었으며 그의 정신은 매우 “수용적”이었다. 어린시절부터 그는 동시대인들의 시대적 움직임에 극히 민감했다. 그러므로 훗날 천차만별인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 속에서도 오랜 교육활동 기간 동안 이상과 목표와 원칙에 철저하면서도 그의 은인들과 “수해자들” 즉 젊은이들의 요구와 요청과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근거와 표지들은 아주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년들과 일상적인 만남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라 하겠다: 개별적으로, 편지로, 작가로서 조직가로서 웃사람으로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는 늘 소년들을 만났다. 그는 언제나 호소력 있고 자극적인 현존의 모범이었다.
Memorie dell'Oratorio di San Francesco di Sales는 이런 만남에 대한 기록이다. 일반적인 시사부분을 제하고는 이 책의 상당부분이 시고로가 그 다음 도시의 오라또리오 경험에서 비롯된 완벽하고도 참된 “이야기 교육학”으로 간주될 수 있다.
결국 이 책은 다양한 수준의 젊은이들 가운데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영원한 돈보스코의 모습과 중요한 교육수단 즉 의무, 학업, 신심, 즐거움, 성사를 확립하려 한 그의 부단한 노력을 전해주는 전기가 되었다. La for-za della buona educazione 1855(훌륭한 교육의 힘), Vita del giovanetto Savio Domenico 1859(도미니꼬 사비오 전기), Cenno biografio sul giovanetto Magone Michele 1861(미카엘 마고네 전기), I1 pastorello delle Alpi 1864(알프스 목동소년)은 교육학적으로 중요한 교육 경험과 이야기를 생생히 전해주는 초상들이다.
시대를 넘어 돈보스코의 실제적인 일상적 만남과 교육적 열망을 말해주는 잊어서는 안될 또 하나의 문헌이 있다: 정부당국자들과 은인들, 벗들과 동역자들, 특히 교육자드로가 소년들의 단체에 보낸 그분의 무수한 편지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편지들은 늘 마음으로 또 실제적으로 함께 하려한 현존의 표현들이다. 첫 서한부터 마지막 서한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어조를 담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들을 알고 있기에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강건한 기질을 보여준다.
제6장 돈보스코의 사업, 마음, 방식
제6장
돈보스코의 사업, 마음, 방식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종합해보기 위해서는 그의 사람됨과 또한 그가 동역자들과 함께 착수한 전형적인 사업 양식으로부터 그 요소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 장들에서 분석하게 될 그의 예방교육의 주요 특징들은 그의 생애와 기질 및 인성과 결부시켰을 때에만 이해된다. 이 장에서는 그의 사람됨과 방식을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1. 돈보스코의 사업
젊은이들을 위한 돈보스코의 활동이 상징적으로 시작된 것은 1841년 교리교육부터 였다고 볼 수 있으나 이는 곧바로 정직한 생계수단을 익히게 함과 아울러 의식주를 제공하는 다른 형태의 애덕활동으로 바뀌었다.
1835년부터 1847년까지 사르데냐 왕국의 외무장관을 지낸 보수적인 클레멘트 소랄로 델라 말가리따 공작에게 보낸 1854년 서한에 그의 활동의 전모가 잘 요약되어 있다: “다른 비용은 차지하더라도 지난 3개월간의 빵 값만도 1600프랑이 넘는데, 지불할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먹어야겠지요. 위험에 처해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이 소년들에게 딱딱한 한 덩이 빵마저 주지 못한다면, 그들의 육체와 영혼을 위태롭게 하는 셈입니다. 몇몇 특정한 소수 개인들을 돕자는 얘기가 아니라 굶주림 때문에 종교와 도덕을 내팽개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빵을 주자는 말입니다…”
돈보스코의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린 이런 태도는 1831년 끼에리까지 동행했던 그의 벗 지오반니 필리펠로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돈보스코 자신의 사춘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주 유식하게 말하는 지오반니 보스코의 얘기를 귀담아 듣던 “펠리펠로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학교공부를 막 시작했을 뿐이라면서, 어떻게 해서 벌써 그렇게 많이 알고 있니? 넌 당장 본당 신부가 되어도 좋겠는데’라고 말하자, 어린 보스코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넌 본당사제의 의무들을 몰라. 본당신부는 식탁에서 일어설 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거야: 내가 배불리 먹는 동안 내양들은 무얼 먹었을까? 펠리펠로, 난 본당사제가 되지 않을 거야.’ 그들은 끼에리까지 걸어갔다.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 돈보스코는 펠리펠로에게 그 때 일을 상기시키면서 물었다. ‘그래, 내가 본당신부가 된 적이 있었던가?’‘
이 일화는 돈보스코의 창의적 활동과 그것이 서민적 특징을 말해준다: 돈보스코는 서민을 위해 일하고 싶어 했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돕고 힘닿는 대로 그들의 요구를 한껏 채워주고 싶었다.
시간 순서상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오라또리오였다.
오라또리오는 가족이 없거나 부모들이 돌보아 주지 않아 제멋대로 되바라진 소녀들, 이사 와서 어떤 일정한 주견이 서있지 못하는 소년 노동자들, 소년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비행 청소년들, 카를로 펠리체가 Regolamenti를 폐지함으로 인해 전에 있던 기관들에서 쫓겨난 학생들을 위한 만남의 장이었다.
오라또리오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인기 있는 과목들이 있었으며, 돈보스코의 사업발전에 따라 그것들은 모두 나름대로 독특한 특성을 띠게 되었다. 야간반과 주일 반은 물론 성악반과 기악반, 국어반과 교양반이 있었다. 이 모두가 주간학교와 기숙학교의 모체들이었다.
훗날 돈보스코는 “오라또리오 회고록”에서 음악과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하게 된다. : “음악책과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일요일과 축일의 우리 모임들이 영혼 없는 육체와도 같을 것이라는 걸 나는 처음부터 알았다.” “앞서 얘기한대로 우리 수업은 1846년 겨울부터 1847년까지 아주 성공적이었다. 매일 저녁 평균 300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보다 학구적인 수업에 병행시킨 노래와 음악이 우리 수업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맨 처음부터 음악을 권장했던 것이다.” 돈보스코는 1848년 이후 “젊은이들이 노출되어 있는 종교적 도덕적 위험들로부터 그들을 더 잘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주야간 성악시간에 피아노, 오르간, 악기지도를 집어넣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참으로 “맹아기의 필하모니 단체” 였으며, 나중에 이것은 더 전문적인 원조자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지만 최초의 음악교사는 돈보스코 자신이었다.
훗날, 1871, 72년도에 이와 유사한 필요성 때문에 발도꼬에 국민학교 과정의 주간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돈보스코는 토리노 시장에게 보조금을 청하는 편지를 냈다. : “엄청난 수의 소년들이 혹은 부모들의 무관심 때문에, 혹은 옷이 너무 남루하여, 혹은 단순히 규율을 달가와 하지 않아 온종일 거리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 자신을 헤칠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위협합니다… 이 소년들에게 무상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책과 종이와 펜과 같은 학습자료를 제공해야 하며, 어떤 이들에게는 먹을 것과 입을 것까지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특별 보조금 없이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서로 다른 연령 집단의 다양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협회와 단체들은 돈보스코의 청소년 사업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Societa dell'allegria(명랑회)는 돈보스코 자신의 천부적 재능에서 나온 것이었다; 돈보스코가 소년들 가운데에 출범시킨 성 빈첸시오회는 당시의 운동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운동에 동화되려는 그의 본능적인 경향의 산물이었다. ; 한편 상조회는 가톨릭과 거리가 먼 원칙들을 지닌 단체들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기관들과 단체들은 마리아 신심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많은 열성을 쏟은 것은 오라또리오와 더불어 노동 청소년들과 어린 학생들을 위한 수용시설-나중에 학생 및 견습공 기숙학교로 발전된- 이었다. 이것은 금 새 일련의 변천과정을 거쳐 자체 내에 학교와 작업장을 지닌 자급적 시설로 바뀌었다. 물질적 도움, 종교 및 윤리교육, 학교수업과 오락시설을 제공하는 완벽한 센터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완벽한 청소년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돈보스코 자신의 말에서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종교 및 학교교육을 위한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가던 중에 또 다른 아주 중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조치들이 시급히 요망된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 졌다. 토리노와 외곽지역의 소년들이 정직하고 부지런히 일하며 살려는 자세는 지니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라면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임시라도 머물 곳이 없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쏟은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임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기수사 방을 때로는 터무니없는 비용을 들여 하나씩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 경험-돈보스코는 이것을 계속 밀고 나아갔다-은 내게 사회의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불우 아동을 돕는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어쩌면 재소자 수를 더하고 사회의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를 소년들이 선량한 그리스도인으로 정직한 시민으로 바뀌었고, 정직한 노동으로 부지런히 생계를 벌므로써 그들 나라와 가정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1853년부터 1862년 사이에 재단소, 제화소, 목공소, 제본소, 기계공작실, 인쇄소가 세워지는 동안 16세기까지의 생도들을 위한 발도꼬 기숙학교(ginnasio)가 가장 먼저 완성되었다. 그 뒤 기회가 오자 돈보스코는 카사티법에 의해 확립된 전형적인 고전적 “liceo", 즉 문예과목 고 학년 반을 설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토리노에서 시작된 이 기관들이 이태리 전역에로, 유럽으로, 그리고 대륙을 넘어 계속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라벨로 몽페라또, 란조 또리네세, 보르고 산 마르티노, 케라스꼬, 알라씨오, 바라쩨, 마라씨와 삼피에르다레나, 토리노-발사리체, 보르디게라-발레크로시아, 니짜 마리띠마, 마르세이유, 마리아노 사비나, 알바노 라찌알레, 아리끼나, 루까, 산 베니뇨 카나메세, 에스테 라스페찌아, 크레모나, 피렌체, 스페인의 우트레라, 빠리, 로마, 몬테비데오,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
이와 동시에 돈보스코는 아직 뚜렷하지는 않으나 마음에 꼭 드는 또 다른 일에, 즉 그의 사업을 지속시킬 뿐만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교육사업을 떠맡기 위한 일에 열중했다; 사제직과 수도생활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쳐 일할 사람들을 찾아 훈련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돈보스코는 자신이 수많은 요구들에 직면해 있음을 알아갈수록 확대되는 자신의 사업을 늘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 시대의 독특한 조건 덕분에 자신이 필요로 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1849년에 관해 언급하는 가운데 그는 이런 들을 남겼다: “이 해는 가장 기억에 남는 해이다. 전년에 시작되었던 피에몬테와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이태리 전역이 뒤흔들렸다. 공립학교는 휴교상태였고 끼에리의 토리노 신학교를 비롯한 신학교들은 폐교당해 군대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우리 교구 신학생들에게는 교사도 만날 장소도 없었다. 이 공적인 재난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요량으로 피나르디씨 집 전체를 세냈다…그 덕분에 우리는 학급을 늘리고 경당을 확장시켰으며 놀이터를 두 배로 키울 수 있었다. 소년들(기숙생) 수는 30명에 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로 하고자 했던 일은 교구신학생들을 수용하는 것이었기에, 20년간 오라또리오집은 교구신학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성소자 양성을 위해 돈보스코는 이 기관들과 신학교를 창설했으며 장학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원조(그가 창립한 새 수도회의 선교 의욕이 드높았던 1875년에 시작된 청년들을 위한 “도움이신 마리아 성소후원 사업”이 전형적인 것이다.) 사업을 벌었으며. 학생들의 군복무와 재정적 부담을 면제시키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돈보스코의 성미에도 잘 맞고 그의 특별한 관심에도 일치하는 또 하나의 사업은 출판가 및 편집가로서의 사업이었다. 그는 특히 교리교육, 종교, 신앙서적 및 호교론과 성인전 분야의 많은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인쇄소, 서점, 출판센타를 설립함으로써 이 분야의 사업을 급속히 신장시켰다. 이 사업은 단기간에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다.
십진법(이태리에 도입된 지 얼마 안되는) 책을 저술한데서 알 수 있듯이 돈보스코는 학교교육 문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단편과 「행복한 가정」이라는 극본을 썼으며, 단명에 그쳤지만 청소년의 벗이라는 신문도 발간했다.
이 밖에도 일반 정보와 가톨릭 교육 분야에 크게 기여한 정기간행물도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서는 1853년부터 가톨릭 문고, 이태리 청소년 문고(1869-1885,문고판 204권), 1875년 이후 Latini Scriptores in usum scho-larum, 1877년부터의 살레시오 회보, 1885년부터의 가정 및 교육기관용 희곡 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이런 활동은 개신교 및 반가톨릭 선전에 맞서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려는 의도와 관계 깊다; 오라또리오, 합숙소, 성당 건립과 같은 사목적이며 교육적인 여러 사업들에도 바로 이런 목적이 담겨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주요 목표는 청소년의 구원이었다. “불쌍한 아이들을 이단의 아가리에서 구해낸 것” 이었다.
돈보스코는 사목활동 쎈타 뿐만 아니라 교회와 경당과 같은 예배소를 세우는 담대하고도 헌신적인 건설자이기도 했다. 1846년 초라한 피나르디씨 헛간에 세워진 조그만 경당에서 보잘것없이 시작되었던 이 일은 불과 몇 년 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당, 또 그 뒤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전으로 성장했다. 토리노의 성 요한 성당, 로마의 예수 성심성당과 같은 대성당을 짓는데 쏟은 걱정과 수고는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의 동기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건물이 완성되는 대로 우리는 그곳에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에 성인을 위한 교육이 있을 것이고, 종교적 예배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다 있을 것이다. ”
“성당이 완성되는 대로 성당 간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합숙소가 시작될 것이다. 성당은 소년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축일 오라또리오를 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교리교육과 야간수업을 받을 것이며 필요하다면 우리 수도회가 운영하는 집들에 설립되어 있는 것과 같은 주간학교도 갖게 될 것이다.”
성당 건립자로서의 돈보스코의 사업을 생각하노라면 자연히 각양각색의 사람들-때로는 전혀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양심을 형성시키고 종교적 흥미를 길러주려고 그가 벌였던 때로 비밀스런 항구한 사업이 생각난다. 개인적 접촉, 공적인 강론, 피정을 통해 영적지도를 베푼 고백신부 돈보스코에 대한 연구는 아마도 교육자로서의 그의 사업에 관한 비중과 맞먹을 것이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영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사업이 교육자로서의 그의 모든 사업을 알리고 변화시켜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으로부터 들어올려 거기에다 초자연적 그리스도교적 차원을 부여했다.
끝으로, 사도적이며 교육적인 조직들 즉 사제 및 평신도로 구성된 살레시오회, 여성들과 소녀들을 위해 유사활동을 벌인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살레시오 협력지회의 창립자로서의 돈보스코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
이 중에는 예를 들어 정부와 교회 당국자 간의 마음 아픈 충돌을 완화시킨 일을 비롯하여 이태리 내 주교 임명문제에 관련된 바티칸과 정부 당국 간의 협상과 같은 종교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의 요청에 따라 행한 활동과 같이 보편교회를 위한 때로는 숨겨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광범위한 활동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또 해외의 이태리 이민들과 선교사업에 관한 그의 담대한 활동도 잊지 말아야 한다. 1875년 이후 이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 그때까지 이태리 내에만 한정되어 있던 그의 사업에 보다 보편적이며 광범위한 역량을 부여했다.
돈보스코는 이때 이미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청년처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이 모든 사업에 뛰어 들었다. 언제나 한결같은 동기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소년들을 위해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바램입니다. 교리교육, 학교, 강론, 오락시설, 합숙소, 인문학교는 그런 수확을 거두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2. 사람됨과 방식
돈보스코의 활동을 추진시킨 가장 깊고 결정적인 힘은 사랑이었다. 그의 종교적 믿음과 사제로서의 성소에서 직접 솟구치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그의 생애와 끝없는 활동을 살피는데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그의 성격적 특징 세 가지가 있다.
2.1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성격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현대성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정생활의 가치들, 정직, 근면, 희생, 신심과 같은 것의 토대를 이룬 건전한 전통에 대한 애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가톨릭인으로서의 전인적 생활이상에 대한 충실과 불가분적이다.
돈보스코를 그 시대의 다른 사제들 및 신자들과 비교할 때 뚜렷이 나타나는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그의 태도는 그의 천성이었던 듯싶다. 그를 낳은 보수적이며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한 영적 환경에서 받은 영향이 건전한 용기로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요구들을 포용하는 현실주의와 균형을 이루었다.
돈보스코를 일컬어 “개척자”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의 모든 생각과 활동이 가톨릭 전통의 산물임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가톨릭 전통의 유산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 그의 사고방식, 지인들, 양성, 충성심, 지역사회와 가정의 분위기, 끼에리 학교, 신학교, “콘비또 사제 양성소”, 돈 가파쏘와 당시 인정된 교회단체들을 지배하던 영적 분위기, 친밀히 지내는 피에몬테 귀족들과 은인들, 대주교, 추기경, 교황에 의해 보강되었다.
그 당시 사건들에 대한 그의 평가는 그 시대의 신자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자기 시대에 현실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적응했다는 것일 것이며, 이 덕분에 대개는 안전할 수 있었다.
1848년의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 대표적 사례다. 그는 이론적으로 그것에 찬성할 수 없었다. 새 헌법 선포식에 오라또리오를 참석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해명했다: “어떻게 해야 했겠는가? 거절하는 것은 나 자신을 이태리의 적으로 만드는 것이요 동의하는 것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원칙들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셈이었는데.”
필시 돈보스코는 그가 해롭다고 생각했고 또한 실제로도 그러했던 결과들 즉 자유주의, 고삐 풀린 혁명적 열정, 폭력적인 정치적 격정, 인쇄인가 남발, 고귀한 전통에 대한 폭력적 파괴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근본원칙들 (민주주의와 반전제주의)에 관해서도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던 것 같다. 때때로 그의 태도는 소극적이었지만, 그의 항구여일한 바램은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무엇인가를 하는 것 이었다; 그의 바램은 잘 짜여진 법을 통해 무엇이든 최상의 것을 이룩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건전한 종교적 도덕적 기초 위에 사회정치적 질서를 건설하는 데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만족해했다.
Marquis Roberto d'Azeglio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변함없는 방법은 정치와 관계된 모든 것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찬성도 반대도 않는 것입니다… 저의 목표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소년들을 종교와 관계된 면에서는 선량한 그리스도인으로, 사회와 관계된 면에서는 정직한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저의 모든 힘을 기울여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제적 사랑의 실천과 관련하여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제 생명과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도 또한 앞으로도 저는 정치는 멀리 하렵니다.”
실제로 돈보스코의 방침은 본질적으로 젊은이들의 영적유익 뿐만 아니라 이것과 불가분적인 관계를 가진다고 본 물질적 복지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사건과 사상을 판단하고 그에 따른 대응방식을 생각함에 있어서 기준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Fera-ra 대주교께 이렇게 편지했던 것이다; “거룩한 가톨릭 신앙이 위기를 맞고 있는 가련한 우리 피에몬테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친구 Canon Lorenzo Gastaldi 에게는 더 상세하고 명백한 편지를 보냈다: “지금은 최대의 종교적 위기의 시기입니다. 성 막시무스 시대 이래 지금까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것과 같은 혼란의 시기가 일찍이 없었다고 봅니다. 그간 말이 많았던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것입니다. 국왕은 부패하고 음험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고독한 사람입니다.
성직자는 열심히 일하며, 우리를 위협하는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말하고 행합니다; 하느님께서 너무도 무거운 어떤 큰 재난을 설사 허락하신다하더라도, 우리는 최소한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는 위안만이라도 받을 것입니다. “가톨릭 문고”가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태리에 12,000명, 프랑스에 5,000명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
이렇듯 그의 정치적 판단은 그의 종교적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러므로 자유의 남용이나 사도직 옹호, 프로테스탄트 분파, 교회권리에 대한 공격, 악인들에게 유리한 어떤 타협에 관해 말할 때는 종종 극히 부정적이었다. “Don Ambrogio는 현재 행동파에게 고용되어 있으며 Voghera와 Stradella를 노리고 있습니다.”
“최근 2년 동안 이 부문에서 종교적 실천과 직무가 때로는 프로테스탄트의 금품 공세로 인해, 때로는 정부 당국의 위협과 억압적 수단으로 인해, 초중등 학교 아동들에게 반 가톨릭 이론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 시의 공공장소에서 사이비 교회의 대표가 설교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수치와 그로 인한 해악을 생각해 보십시오. 책, 유인물, 질문공세, 설교, 직장 약속, 기부, 뇌물-이것이 바로 그들의 통상적인 전술입니다. 성직자가 굳은 결심으로 쉼 없이 일하고 있기는 하지만, 젊은이들이 큰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제3차 독립전쟁이 일어난 1866년 의 상황과 사건, 그리고 1867년의 사건에 관해 말하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혹독한 재난의 시기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던 은인들이 손을 떼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서 평화를 주시고 우리 국민이 국왕을 중심으로 일치하여 모두가 평화로이 영혼구원 사업에 임할 수 있기를 빕시다.”
“로마에서 온 여러 편지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많은 이들이 그곳에 슬픈 일이 일어날까봐 염려하고 있는 듯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선은 교황령의 안전이나 성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동안 저희 집에서는 조석으로 성하를 위해, 하느님께서 종교 반대를 선동하는 선의 적들에게 허락하신 밀려오는 사나운 폭풍우를 이겨낸 건강과 은총을 주시라고 하느님께 찬미합시다. 가련한 인간의 정신적 상황을 억누르는 모진 고통에서 우리를 들어올려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분 뿐입니다.” “친애하는 백작부인,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고 제 말을 명심 하십시오: 돌풍과 폭풍, 회오리바람과 태풍이 몰아쳐 우리의 지평을 어둡게 만들겠지만, 곧 그칠 것입니다. 그 뒤에는 성 베드로 이래 비오 9세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비췬 적이 없던 그런 태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어 그리스도와 사탄 간의 무시무시한 대결 뒤에는 교회와 성하께서 평화를 누리게 되길 빕니다.”
“플로렌스에서 나의 도착 시간을 알려 주겠네. 제발 내 귀향에 대해 아무런 행사를 하지 않기를 바라네:
‘Non est conveniens luctibus ille color.'"
"사랑하올 Eugenio 백작님, 우린 용기를 잃지 말아야합니다; 지금은 매우 음울한 시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로 이 시기를 단축시켜 주시길 빕시다.”
돈보스코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이면서도 보수적인 그의 독특한 정책을 밀로 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탈리아 주교들의 세속재산에 대한 협상(1871-1874)과 같은 정치적 문제에 실재로 기여했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는 선을 행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선을 행하는 원칙을 따랐다. 그는 한 살레시안 원장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노조와 그 지지자들을 다룰 때는 언제나 어느 쪽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명할 뿐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말에서든 행동에서든 누구도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이것을 설명했다: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정치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실 것이며 그 방법을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는 주교들의 세속재산에 관한 협상 중에 Giovanni Lanza장관에게 보다 분명한 설명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신뢰를 가지고 이 편지를 씁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사제이기에 가톨릭교회의 수장에게 헌신하는 몸이지만 언제나 국가에 최대한의 충성을 바쳐왔고,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해 장관들께 봉사해왔습니다. 각하, 제가 정부와 종교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아시면 가르쳐만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은 6월 12일 내무장광 Luigi Carlo Farini와 문교장관 Terenzio Mamiani에게 선서한 “정치적 신뢰 서약”을 간추린 것일 뿐이다: “…저는 정치에 손을 댄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지난 20년간 제가 말하고 행하고 글로 쓰거나 인쇄한 여하한의 것에서도 이 정부의 법에 저촉되는 것을 일언반구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정치 토론이 금지되어있습니다; 신문조차 구독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사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정부와 법률이 어떤 것이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사랑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습니다. 사제는 정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서도 정부 당국자들을 존중하고 도울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그의 사업은 바로 이처럼 정부에 대한 어떤 편파적인 원칙이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떤 실제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어려운 사건들과 구체적 상황에 직면한 그리스도인이자 사제로서의 그의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시간은 아주 많으나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할 때도 있었다. “대중교육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해 번 적은 돈을 일요일이나 비번 날에 흥청망청 써버리는 것을 몹시 염려했다.”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든 청소년들에게도 역시 그런 문제가 있었다: “죠반니 보스코 신부가 젊은이들의 도덕적 안녕을 염려하여 그 시의 세 요충지에 소년 오라또리오를 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일요일과 축일에 그 시의 불우 청소년 뿐만 아니라 주변 마을에서 그 도시로 올라온 이들을 가능한 한 많이 그곳에 모았다.” 교구에서 모은 헌금을 관대히 보내준 Biella주교께 돈보스코는 이런 편지를 썼다: “몬시뇰 각하, 이 희사금이 토리노 청소년들에게 쓰여진 데에 매우 만족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각하의 교구에서 온 많은 소년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아시면 더욱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들은 이 시에서 한해의 대부분을 직장을 찾는데 보내고 일요일에는 우리 오라또리오로 대거 몰려와 오락, 교육, 예배에 아주 모범적으로 참여한답니다. 저는 오라또리오에 오는 비엘라 출신 소년들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할 것이며 그들이 수업과 종교적 가르침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1854년에서 1855년 사이에, 그리고 그 뒤에도 간헐적으로 그 도시에 콜레라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고아와 집 없는 아이들이 늘어 시설과 음식이 부족하고 은인들의 지원이 딸리는 반면 도덕적 위험성을 높아졌다. “젊은이들에게 비극적 시기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그런 때라는 것을 말해야할 비통한 입장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빵덩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정직과 신앙을 내팽개칠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의 새 사업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동기가 숨어 있었다. 그는 제노아 삼피에르다레나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2만 명이나 되는 영혼들에게 단 하나의 본당과 아주 적은 성직자-그곳에 필요한 수에 비하면 있으나 마나할 정도의-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주민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겠지만 특히 거리에 몰려다니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즉 젊음과 미숙함 때문에 타락할 위험이 있는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합니다.”
La Spezia에서: “이곳은 이태리 도시들 중 버림받은 아이들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입니다. 주민 대다수가 ar-senal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자녀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 아주 짧은 기간에 인구가 5,000에서 27,000으로 불어나 꼭 필요한 교육기관들이 인구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량한 사람들 모두가 청소년 종교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서민자녀들에게, 부모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야 합니다. 도덕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술이나 직업을 갖지 못하면 이 젊은이들은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어 결국 감옥에 들어가게 될 아주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서나 심각한 문제이지만 특히 이곳 라 스페찌아에서는 더욱 심각합니다. 단기간에 인구가 4천명에서 3만 명으로 늘어난 이 시는 현재 학교와 교회와 합숙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로마에서: “이태리의 심장부인 이 도시는 그간 모든 계층의 시민들에게 교육시설을 충분히 제공해왔습니다. 하지만 사망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어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 상황에서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필요합니다. 거리와 광장을 배회하다 감옥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를 수많은 떠돌이 소년들의 비극적 상황을 보면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 아이들이 밉살스럽기보다는 불쌍합니다. 어떤 시설이 제공되기만 한다면 이들은 사회에 아주 유익한 이들이 될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오라또리오, 기관, 교회, 본당, 선교관, “유복하지는 않으나 능력과 착한 품성을 지닌 기특한 소년들에게 인문계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학교들을 포함한 갖가지 종류의 학교들을 나열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돈보스코는 “능력과 착한 품성을 지녔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그 재능을 개방하기 위한 재정적 뒷받침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소년들을 도우려” 애썼다.
2.2 현실적이며 신중하고 단호한 성격
시대 상황을 따라갈 줄 아는 돈보스코의 능력의 대표적 특징은 중용이었으며, 이것은 실제적인 지혜였다. “최상은 선의 적이다”는 그의 말은 원칙 문제를 논한 것이 아니었다; ‘유익’을 얻을 수 있을 때에만 ‘최상’을 견지겠다는 뜻이었다. 한 원조자에게 어떤 특정상황을 지적하여 이렇게 말했다: “최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신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만,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는 때때로 차선으로도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거둔 성과에 만족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여러해 전에 돈보스코는 어떤 건축사업에 함께 손을 대고 있던 자선단체의 Gilardi신부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아시다시피 비둘기의 단순함과 뱀의 지혜를 지녀야합니다. 원수가 밭에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도록 어떤 것들은 교묘히 숨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공적인 문제들은 공적인 합법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법 앞에 불리한 부분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대의 존경하올 장상께 다음과 같은 계획안을 제출하는 바입니다.”
친절과 단호함,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인간적 지혜와 하느님께 대한 신뢰, 인내로운 기다림과 과감한 용단, 외교적 수완과 개방성- 이 모든 자질이 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열심한 활동과 선의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이 그의 원칙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움이 없노라”는 또 다른 원칙과 더불어 지칠 줄 모르고 선을 행하기에 힘쓰는 그의 노고를 설명해준다.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돈보스코도 이 주제를 달리 다뤘다: “사랑하올 에우제니오 공작님. 거룩한 우리 종교가 분명하고 솔직하게 가르쳐진다면 비신자들까지도 그것을 존경하고 잘 받아들이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솔직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지식이나 때로 물질적 정신적 문제들에 요구되는 타협정신을 기초로 한 신중함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양쪽 모두가 받아들일 전문가들에게 맡겨 모든 불일치가 법정의 시비 없이 친구들 사이에서처럼 해결되기를 바라며 권고하는 바입니다.”
“우리 일의 물질적 도덕적 상태와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에 관해 말해 주십시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발전이 불투명합니다.”
자신의 친구들이요 조언자들인 여러 계층의 탁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개인적 호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 언젠가 조언을 구하는 자리에서 돈보스코는 아주 미묘하고도 착잡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는 단순히 어떤 규범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보다 확실히 해주려면 그들의 충고를 따라야 합니까 아니면 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해야 합니까?
이렇듯 그는 어떤 문제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구했다: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게: 그 문제가 해결될 걸세. 올해는 특별한 해이지. 그 동안 우리는 벽돌을 구웠으니, 이제 적절한 곳에 쌓기만 하면 될 걸세. 상황이 아주 좋은 것 같네. 열흘 쯤 뒤 다시 내게 편지를 보내 그대의 어려움을 낱낱이 알려 주게; 어떻게 하면 그 어려움을 가장 잘 극복할 수 있는지에 관한 자네의 의견도 함께 말일세.”
이것은 그의 활동성, 지연과 망설임에 대한 안타까움, 뚜렷하고 정당한 명분이 있으면 목표를 달성하고야 마는 그의 투지를 보여준다. “사정이 아주 복잡합니다. 소문이 자자한 그 통보를 받고 설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더 덧붙이실 말이 있으면, 다시 제게 알려 주십시오. 니나 추기경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 굳이 알려 하지 않는 입장을 취해 주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여기서 벗어날 것입니다.” 이 편지는 로마에 있는 대표자에게 보낸 것으로서, 특히 예수 성심 성당을 지으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관한 편지들 중 하나다. “일이 잘 진척도기를 바랍니다. 돈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일이 이렇게 돼가다가는 언제쯤에나 성당이 완성되는 것을 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시간과 돈을 쏟아 붓고 있으며 걱정거리가 태산 같습니다. 우리는 국외자들입니다. 그러나…!” “참으십시오. 날씨가 풀렸으면 썰매를 타고 다려 보십시오.”
어려움이 쌓여감에 따라 중압감이 심해지면 오히려 느긋하게 반대말을 했다. “당신의 편지 잘 받았습니다. 끝까지 참으십시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우리가 로마에 짓고 있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신자들 중 몇 사람만이라도 마음을 돌려 우리에게 돈을 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로마의 우리 일에 관해 Alii alia dicant; 저는 아무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돈 사비오께서 부지런히 돈을 구해 주셔야 합니다…걱정 마십시오. 로마에는 돈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수여될 성청의 훈장 서훈(특별히 아주 긴!) 작성자를 깨우기 위해 값비싼 스페인산 ‘밀초’를 좀 준비해 두십시오.”
2.3 관대하면서도 정확한 성격
폭넓은 안목으로 계획을 세워 주도면밀하게 하나하나 정확히 실현시켜 나간 돈보스코의 모습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가 일을 계획하고 조직한 방법을 알려주는 진술들을 모아보자. 몬도비의 주교 몬시뇰 Ghilardi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할 수 있다: “교회문집에 대한 계획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매우 방대하고 어려운 기획이더군요; 하지만 함께 일할 사람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가치만큼 그 계획을 널리 알릴 수만 있다면, 저는 거기에 totis viribus할 것입니다.” 토리노 가톨릭 신문 Unita cattolica에 낼 Sun Giovanni Evan-gelista 사업 광고문안을 요청한 Vallauri 교수에게 그는 이렇게 편지했다. “동봉한 것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것은 아주 엄청난 사업입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일이기에 착수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하여 세계 각지 50군데서 집을 개관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들 인간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아주 큰 모험입니다.”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6천명이나 되는 소년들이 우리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일들, 아주 많은 업무들을 처리해야 한다네. 꿈만 같네. 그것에 대해 죄다 들려주겠네.” “한번에 조금씩. Bogianen.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몽상처럼, 미친 사람의 꿈처럼 보일 걸세; 하지만 우리가 일을 시작하자마자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시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착실히 나아갈 이유가 될 걸세.” “ 일 때문에 미칠 것 같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있다네… 돈 모으는 것만 빼고 아주 많은 일을 했다네. 아무래도 그 문제는 자네가 좀 맡아 줘야겠네.” “바로 지금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을 해야 할 순간입니다! 학교와 국민학교 그리고 가능하다면 미개인들과 반미개인들을 위한 합숙소를 세워야 합니다.…그대는 음악가이고 난 시인이니.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일이 아르헨티나의 일과 뒤섞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편지와 관대한 Cassine 사람들의 기부금에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한 나라의 안녕은 젊은이들에 대한 건전한 교육에 달려있다는 확신으로 젊은이들을 돕는 데에 제 삶은 바친 후, 사회의 이 부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그곳을 샅샅히 뒤지고 다녔다고 느낀 후, 일을 계속하게 해주는 이런 귀한 자극제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미쳐 하지 못했었습니다.” “난 San mes ciouc이네만, 걱정말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돕고 계시니, 세상 사람들은 황당무계하다고 하겠지만 우리는 기적적이라고 말할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이 잘 진행 될 걸세.”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에게 유익한 일이나 하느님께 영혼을 구해드리는 일이라면 저는 무모할 정도로 뛰어듭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도와 결국 감옥에로 이어질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내어 선량한 시민 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한 어떤 일을 시작하겠다는 당신의 계획은 곧 제 자신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증기기관차 정도가 아니라 전보처럼 빨리 일이 진척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대한 은인들의 도움 덕분에 일년 동안에 20여 군데에 새로 집을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70여개의 집과 3만 명의 생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얼마나 빨리 성장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돈보스코의 이 모든 활동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기도에 의해 지탱되는 그의 그리스도인적 사제적 소명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내적 생활과 진정한 성성을 더 상세히 논할 수도 있겠지만, 단 몇 줄 만으로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침묵과 기도는 하느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려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게으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일은 잘 될 걸세. 가닥을 잡을 수 없이 엉클어져 있지만, 모두가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네. 공연히 초조해하지 말고 조용히 기도하게. 그대가 아는 일이 있으면 내게 편지로 알려주게.”
“시련은 불순물로부터 금을 가려내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험을 받아왔지만 그 때마다 늘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하느님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치 못한 자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저는 당신이 많은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지만, 특히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일인 경우 하느님께서 죄다 되갚아 주신다는 것도 압니다.”
돈보스코의 계획들은 결코 백일몽이 아니었다. 그의 이상도 위했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적절한 수단을 강구하는데 쏟은 그의 매일의 노고도 엄청난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가난한 삶, 그리하여 끊임없이 진로를 찾는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저희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그저 어떤 개인을 돕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배고픔 때문에 도덕적 종교적 관습을 내팽개칠 위험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자는 뜻입니다.” “기운을 내어 돈을 구해보게. Caval-iere 더러 Don Buzzetti의 도움을 받아 그 일을 하도록 하게. 나도 이를 위해 힘껏 일하고 있다네.” “기부금 모금에 최선을 다해주게(omnibus labora). 아무리해도 안되거든 큰 은행을 털기라도 하게. 아니 그보다도 부유한 은행가에게서 약간만 빼내올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더 좋겠군.”
돈보스코는 대부를 신청하고, 복권을 판매했으며, 자선 음악회도 열었다. 은인을 만드는 기술도 아주 좋았다. 그가 애써 돕고자 하는 이들(이들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는 이는 바로 은인들 자신이었다)에 대한 강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더라면 교활하게 보였을 것이다. 마지막 편지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까지 제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 그리고 여러분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상아서나 죽어서나 기쁘게 하고자 하는 일은 가시가 될 수도 있을 여러분의 재산이 선업으로 바뀌도록, 꽃으로 바뀌도록, 그리하여 천사들이 그 꽃을 재료로 화관을 만들어 영원히 여러분의 머리 위에 씌여주도록 매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멘.”
때때로 그의 사랑은 지극히 인간적인 애정과 깊은 감사와 우정을 드러냈으며, 어린애 같은 지극한 신뢰와 천진함을 띠고 있었고, 상징적인 선물을 교환했으며, 서로 초대를 주고받았고, 은인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그는 기도를 봉헌했고, 안부 인사를 전했고 (때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정확히 제때에 맞추어 잊지 않고 축하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돈보스코가 왕가의 관대한 은인들과 인위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아들과도 같은 관계를 어떻게 맺어 나갔는지를 말해준다.
2. 4 전적으로 헌신적임
돈보스코의 끊임없는 활동은 천성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구원을 위한 그의 사명에 대한 의식적이고도 자발적인 봉헌의 한 형태였다. 그는 젊은이들은 돈보스코를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는-교육자들에게 예방교육을 설명하기 위해 쓴 팜플렛에 나오는 그의 말을 빌자면- “자기 소년들에게 온전히 바쳐진”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헌신은 단순히 신체적인 힘만을 바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육체적인 힘이 쇠약해질수록 오히려 그는 더욱 헌신적인 것 같았다.
우리는 돈보스코가 사제가 된지 얼마 안 되어 지나친 일로 말미암아 병을 앓았고 망가진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름과 가을 몇 달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야 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1845년과 1846년의 일이었다. 엄청난 피로와 나쁜 건강,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감동적인 내용이 그의 편지 곳곳에 나타나 있다. 1853년 친구 Canon De Gaudenzi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사순절 동안 짊어질 수도 없을 엄청난 일에 짓눌려 있다네.”라는 말이 나온다. 1865년 7월 24일 Callori공장 부인께는 이런 글을 올렸다: “얼마나 많은 지출과 혼란과 부담이 돈보스코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하지만 제가 패배했다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저는 다면 지쳐있을 뿐입니다. 그뿐 입니다.” Varazze에서 1871년과 1872년 겨울 사이에 중병에 걸려 앓아누운 뒤 사태가 더욱 고통스럽게 되어갔다. 신설기관 설립 제안과 관련지어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Villalvernia 문제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군요.
그 일에 필요한 돈과 인원이 없고 또 무엇보다도 제 어설픈 두뇌가 몹시 지쳐 있어서 그런 모험을 감행할 힘이 없습니다.” 이듬해 몬시뇰 가스탈디의 질녀에게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 “아직도 Allasio에는 갈 수 없답니다. 병 때문에 작년 한 해 동안은 밤이고 낮이고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답니다.”
만성피로와 시력과 조로(早老)로 인해 늘 고통을 받았다. “난 지금 더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non plus-ul-tra)지쳐있다네.” “난 Allasio에 산다기 보다 쳐박혀 있다네.” “이 새 선교단은 제 맥막과 두 다리를 탈진시켜 버렸습니다.” “몇 달 동안 오후 2시에 책상에 앉아 8시 30분 저녁식사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 그것도 오전 내내 힘들게 일한 뒤에 그랬고, 또 그 뒤에는 밤늦게까지 일했다. “이 모든 활동들 때문에 올 한 해 동안 한 시간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도무지 제가 지금 앞으로 가고 있는지 뒤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보스코의 눈에 대해 살펴보자: “의사들은 오른쪽 눈이 조금도 가망이 없다고 하더군요. ‘현상태’라도 유지하려면 아무 것도 보고 쓰지 말아야 한답니다…” “시력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쓸 수가 없답니다.” “시력이 조금 좋아졌습니다.” “이 편지가 넉달만에 처음 쓰는 편지입니다.”
그의 천체적인 건강상태를 살펴보면: “여기서 이만 줄여야겠네. 위가 아주 나빠졌기 때문이네.” “건강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좋은 것도 아닙니다. 늘 몹시 파로하답니다.” “건강이 절 놀립니다.” “이곳 San Benigno Canavese에서 아주 지쳐 있습니다…” “반-장님이 되어 거의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아주 늙어 반장님이 되었습니다.” “몇 달 전부터 그대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내 늙은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이제야 이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도 한창 때가 지난 것 같으니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역시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의 유언으로 그대에게 몇 마디 말을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거의 눈이 멀었고, 걷지도 쓰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고 거의 듣지도 못한 채 반장님이 되어 이곳 란조에 머물고 있습니다…손으로 글씨를 쓸 수도 없습니다.” “어렵사리 이 글을 씁니다. 살날이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마지막 편지에서도 다음과 같은 글을 접할 수 있다: “더 이상 글씨를 쓸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제 불쌍한 늙은 손의 마지막 노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2.5 온유한 사람
고로에도 불구하고 돈보스코는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의 교육학은 이런 그의 행동방식의 한 부분이었으며,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랑의 포용력, 바로 이것이 돈보스코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의 마음과 포용력은 그지없이 넓고 깊었다. 그는 지성과 신앙과 추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재능들이 강렬하면서도 영성화 되어 잘 조절된 온유한 마음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개방적이었고 또한 그가 교육자로서 규칙을 마련해 가면서 생각했던 대로 가시적인 표현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의 사랑은 모두에게 향한 것이었지만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었고, 젊은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들을 교육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자주 쓰던 표현들 가운데 하나다. 오라또리오의 맨 최초의 원조자일 보렐 신부에게 그는 이런 편지를 썼다: “미리 말씀드릴 충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는 떠납니다만, 당신의 가족이요 또 제 가족이기도 한 오라또리오에 대해 마치 한 가정의 좋은 아버지처럼 행동하려 애쓰겠습니다.”
향수와 애정 어린 추억과 소년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그들과 늘 함께 있고 싶은 열망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쓴 그의 편지에서는 소년들이 그의 가정과 가족의 한 부분이었으며 커다란 한 동아리를 형성했다는 표현을 무수히 접할 수 있다. 그는 오라또리오가 시작된 맨 첫 달에 이렇게 편지했다: “Trivero 신부님이 오라또리오를 돕겠다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분은 제 아이들을 거칠게 다루기 때문에 조심해 주십시오. 그것 때문에 아이들 몇이 오라또리오를 떠났답니다. 오라또리오의 음식에는 기름을 적게 치도록 해주십시오.”
소년들과 그들의 교사들 및 은인들의 소식을 접하고, 또 자신이 그들의 늘 생각하고 있음을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 거의 강박관념이 될 정도로 그는 이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사랑하는 소년들의 소식을 상세히 들려주시오. 내가 방문한 성당들 마다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과 돈보스코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전해주시오.” “몸은 비록 이곳 로마에 있어 오라또리오와 소년들만을 걱정할 수는 없지만 늘 나의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신 보물이 있는 곳으로, 소년들이 있는 오라또리오로 내닫는 답니다. 정신적으로 수차례 그들을 찾아갔답니다.”
“소년들에게 이 말을 전해 주게: 돈보스코는 주 안에서 마음을 다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성 요한 축일미사 때 특별히 여러분 모두를 기억하겠습니다. 그날 여러분과 함께 있지는 못하지만 여러분을 처음 만나 그 때를 잠시 기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바라째에서 아픈 뒤: “다음 주 목요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는 토리노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꼭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몸은 비록 이곳에 있지만 마음과 생각과 심지어 말까지도 늘 여러분과 함께 오라또리오에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약점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사랑하는 우리 소년들에게 이 말을 전할 때 나를 위해 바쳐준 기도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도 함께 전해 주십시오. 내게 편지를 보내준 이들과 특히 내 목 대신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봉헌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으며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을 못 본지가 한 50년쯤 되는 것 같다고 전해주십시오. 어서 그들을 찾아가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한해가 저물어 가는데, 슬프게도 저는 사랑하는 우리 소년들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 모두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우리 소년들 모두에게 나의 사랑의 인사를 전해주시고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도 말해주십시오. 주 안에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해주시고 저의 축복도 전해주십시오.” “사랑하는 우리 소년들과 형제회원들에게 내가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착한 사람이 되고 죄를 멀리하여 영원히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자고 말해 주십시오.”
돈보스코의 생각은 그가 교육에서 주창한 사랑의 뚜렷한 특징이 된 allegria 즉 즐거움에 늘 채색되어 있었다. 때로 먹을 것조차 충분치 않은 가난한 가정 출신의 그의 소년들에게 그는 축일 때마다 식당과 무대와 운동장에 특별한 것을 마련하여 뿌듯한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그의 제자들은 이것을 잊지 못했고, 그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과 그의 시복시성 조사에서 증언한 모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였다. “성인 같은 그분에게서 받은 그 깊은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전에 그분을 뵌 적이 없었는데도 말도 붙여보기 전에 벌써 그분에게 사랑을 느낄 만큼, 그분은 넘치는 친절을 보여주셨으며 아주 유쾌한 태도를 지닌 분이셨습니다.” “돈보스코를 처음 보았을 때 그분이 나를 맞아주시면서 보여준 다정함을 처음 대했을 때 받은 그 깊고 믿음직한 인상은 제 기억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직무를 아주 진지하면서도 아주 다정하게 수행하는 한 사제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에 익숙해있지 않았기에 그 순간부터 그 인상이 오래도록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나와 또 다른 소년들에게 친절히 말을 붙여 오시는 그분을 보고 전 정말 그분께 반해버렸습니다.”
진실로 돈보스코의 교육학은 한갓된 이론이나 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생활된 것, 드맑은 인격적 선의 모범이었다. 그의 교육적 비젼을 제아무리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하더라도, 이 맑고 생생한 그의 영감의 원천을 고려치 않는 것이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제7장 청소년 선택; 사회적 심리적 예표
제7장
청소년 선택 :
사회적 심리적 예표
Convitto Ecclesiastico 시절 돈보스코가 토리노의 격리된 소년 집단을 처음 접하던 무렵 그 도시는 공장과 인구와 건물이 늘어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것이 더욱 가속화되어 훗날 이주자들과 “버림받은 이들”이 몰려오게 된다. G.B. Lemoyne의 증언에 의하면(분명히 과장된 말이기는 하나) 피에몬테의 이 교육가는 처음부터 자신의 이전 경험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그 소년들의 사회적, 사목적 “실태”를 파악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 도시의 거리와 공터를 돌아다녔고, 감옥과 고미다락 작업장과 구호소를 찾아갔다. 40년 후에도 여전히 돈보스코는 이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 그 문제를 알고 처리하는 차원이 이제는 세계적이었다. 이때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사회 경제 문화적 변혁 원인들이 그에게는 보편적인 것으로 비쳐 졌으며 아주 중대한 종교적, 도덕적, 교육적 결과를 야기 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1880년 7월 29일 만찬 후, 그의 제자들인 사제들에게 하신 연설에는 아주 성숙한 그의 사 랑의 전모가 나타나 있다.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꼭 하고픈 얘기가 있습니다 : 여러분의 본당과 도시와 마을과 가정의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최대한 애써 주십시오. 돈보스코와 살레시안들이 어느 곳에나 다 갈수는 없는 일이며, 필요한 곳마다 학교와 오라또리오를 다 지을 수는 없잖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집에서 첫 교육을 받았고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정신을 호흡했으며 규칙과 평생의 본업을 배웠으니 돈보스코가 좀 더 쉽고 크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각자 힘써 주셔야 합니다. 가난한 젊은이들을 잘 길러내어 교회를 이롭게 하고 건전한 사회를 만듭시다. 여러분은 어른들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오늘날 그들이 우리들의 관심에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돌려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고, 교리반으로 끌어들이며, 성사에 초대하고, 덕행을 보존하도록 또 덕행에로 돌아서도록 그들을 이끕시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직무가 성과를 얻게 될 것이며, 선량한 그리스도인, 훌륭한 가정,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데 일조할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위해 둑을 쌓아 반 종교와 악을 막고 몰아냅시다.”
돈보스코의 교육활동의 특징과 그의 교육학의 독특한 면모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주로 대했던 소년들의 유형과 그가 그들에 대해 지녔던 이미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교육학은 학문적이거나 체계적인 것이 아니며, 그가 체험한 소년들에 대한 경험 역시 학문적으로 다듬어진 것이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활동이 계속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관되고 현실적인 것이었으며 뚜렷한 직관과 정형화를 수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가 실현시킨 것과 그가 드러낸 의향(필요한 승낙을 얻기 위해, 자선을 청하기 위해, 그의 동익자들의 노력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을 통해 사회학적 ․ 심리학적 ․ 신학적인 세 가지 관점에서 “청소년의 실태”에 관한 그의 근본 생각들을 알아낼 수 있다.
1. 청소년의 사회학적 요소들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소년들”, “가난하고 방치된 청소년”, 또는 “위험에 처한 가장 궁핍한 소년들”에게로 향한 돈보스코의 관심, 돈보스코의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여론을 떠들썩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30년 뒤, Memorie dell'Oratorio di San Francesco di Sales에서 초기의 “조그만 오라또리오” 생활을 회상하는 가운데 그는 그 목적을 이렇게 말했다; “가장 위태로운 소년들, 그 중에서도 특히 감옥에서 나온 아이들을 모으는 것”이라고. 그러나 점점 “가정을 떠나 토리노에 갓 올라온 소년들”, “석공, 벽돌공, 미장이, 채석공, 먼데서 온 소년들”을 우선시 했다. 여기에는 “감옥행으로 인생을 마감할 풍기 문란한 이들의 수효를 줄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로써 돈보스코는 새로운 행동 노선을 취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열정과 점차 조직화되는 활력을 가지고 당대의 경험들을 시대의 요구에 맞게 되살린 것이다. 이런 시도는 16세기부터 시작되어 17 ․ 8세기에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에서 강력히 제창된, 버림받은 유랑아들에 대한 애덕적 ․ 사회적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귀족들과 사회 지도층이 볼 때 이것은 혼란이었고 수치였고 위험이었다. 그들은 Luis Vives의 De Subventione pauperum(1526)의 노선에 따라 경제적 원조, 교육, 일을 제공하는 구제책을 찾고 있었다 ; 프랑스에는 hopitaux generaux가 영국에는 Workhouse가 있었다. 토리노에서는 1580년에 Albergo di virtu가 계획되어 1587년에 시작되었다. 1771년에는 Opera della mendicita istruita가 설립되어 더욱 광범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이 기관은 가난한 이들에게 일요일에 교리교육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다른 원조활동에도 관계했고 토리노 시의 여러 지역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바로 이런 방향에서, 초창기의 원조활동(축일과 평일 오라또리오 및 합숙소)을 위험에 처한 청소년과 관련지은 돈보스코의 회람장, 호소, 사적 편지에는 다른 유사한 성공적 기획들에도 완벽히 적용시킬 수 있는 일관되고 현실적인 언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1857년 토리노의 소년 오라또리오의 목적은 축일에 “토리노시와 상경한 시골 출신의 위태로운 아이들을 가능한 한 많이” 모으는 것이었다. “아무런 일거리도 갖지 못한 가난하고 버림받은 토리노시와 주변 지역” 소년들에게 기본적인 “의, 식, 주”를 제공했다. “그 후 (1862, 1865, 1866)의 유사한 신청서에도 토리노 출신 소년 일부와 주로 타지에서 일거리를 찾아 올라왔거나 유학 온 소년들을 위한” 견습공 합숙소와 학생합숙소가 언급되어 있다. 좀 더 뒤의 유사한 상황들, 즉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을 위한 니스의 Patronage Saint-Pierre,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훈련원, “가난한 서민층 자녀들을 위한” 라 스페찌아의 “학교들”, “하층민”을 위한 로마의 성심수용소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돈보스코가 “지역사회, 특히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통한 활동생활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는 협력자회를 출범시키고자 했던 것은 주로 이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또 돈보스코의 말에서도 “버림받아” “위태로운”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의 폭이 넓어졌다. 제도와 상황과 시대가 바뀜에 따라 이전의 문구가 훨씬 분화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 엿보인다. 이미 어렵 살이 시작된 오라또리오의 출범에 관해 돈보스코는 이렇게 썼다 ; “가장 위태로운 소년들과 특히 감옥에서 나온 이들만을 모으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지만 품행이 바른 이들과 교육 받은 이들도 약간 초대했다. 규율과 도덕성을 세울 어떤 토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Regolamento(규칙서)는 오라또리오를 활짝 열린 비선발 단체로 만들어준 이미 깊이 다져진 관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 “특히 근로청소년들이 우리 목표(…)이지만, 축일이나 휴일에 오고자 하는 학생들도 배재하지 않는다.”
훗날, 두 가지 새로운 사건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 개신교의 전종권유와 반가톨릭 학교들을 통해 유포된 반종교의 위험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돈보스코의 대담한 선교기획이다. 분명히 두 경우 모두에서 가난하고 버림받고 위태로운 청소년의 이미지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띠었다 ; 사회적 법적 측면에서 보다도 본질적으로 종교적(그리고 시민적인)견지에서 더욱 위험스러웠다. 이것은 사회적 격차문제를 현저히 감퇴시켰다. 법률적 문화적 직업적 “구제”에 앞서 종교적 보호와 전종이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제에 관해 국무장관 니나 추기경에게 제출한 1879년 3월 12일 자의 역사적인 짧은 보고문에는 명료한 종합적 문구가 실려 있다. 1848년 이래의 반 프로테스탄트 싸움을 언급한 뒤, 정관과 그에 따른 법규에 이어, “프로테스탄트의 올가미로부터 가장 곤궁한 계층 즉 가난한 청소년을 해방시키기 위해” 일하는 살레시안 특수 성소를 거듭 강조한다. 그 다음 여러 기관들을 제시 한다 : “토리노의 성 알로시우스 오라또리오, 라 스페찌아의 성 바오로 합숙소, Ventimiglia 근처 Vallecrosia 성당과 국민 학교, Marseilles의 성 레오 합숙소, Toulon 근처 Saint Cyr와 Navarre의 농장, 니스의 성 베드로 합숙소, 삼피에르다네나의 성 빈센트 합숙소, 몬테비데오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합숙소.”
우르과이나 아르헨티나에서는 장차 착수할 여러 선교 사업을 위한 진지로서 이와 유사한 기관들이 구축되었다. 이미 1877년에 Frachi 추기경께 털어 놓은 다소 야심적인 계획을 발전시킨 수많은 문서들에서도 이것이 강조되었다: “(…) 우리는 새로운 시도를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개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선교사를 파견하지 않는 대신 문명화된 나라들의 국경에 선교사를 보내어 두 가지 목적으로 그곳에 성당과 학교와 합숙소를 세우려 합니다 ; 우선은, 이미 신자가 된 이들이 신앙을 지키도록 돕고, 다음으로는 종교나 빈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로 찾아와 의지할지도 모를 인디안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개인들이 미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 자녀들을 통해 부모들을 접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나 돈보스코는 젊은이들에 대해 또 다른 끈질긴 관심을 가졌으며, 이것은 평생토록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가난하거나 그럭저럭 살만 하기는 하나, “위험에 처해있다”거나 “버림받았다”고는 할 수 없는 소년들 즉 “신심이 깊어 교회의 직무에 불리 울 희망이 엿보이는 품성 좋은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도는 1849년에 시작되었고, 과장된 말이기는 하나 돈보스코는 “거의 20년간 오라또리오가 교구의 소신학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을 쓸 수 있었다. 1881년에 그는 기존의 실정과 그것을 확장하려는 자신의 의향을 담은 중요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태리, 스페인, 아메리카에서 착수한 주요 사업들, 즉 버림받은 소년들의 직업훈련을 위한 수많은 훈련원과 작업장의 설립(…), 농업학교 출범(…) ; 머리 좋은 수많은 소년들이 더 쉽게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아 훌륭한 사제나 담대한 선교사, 또는 훌륭한 가장이 되게 해줄, 학비가 적은 기숙학교 개교(…)가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얘기했다.”
1877년의 Regolamento per le case(살레시안 규칙서)는 그 때까지 얻은 경험과 돈보스코가 말년에 프랑스와 스페인을 방문하여 자신의 사업을 홍보하는 수많은 강연과 잦은 회합에서 설명했던 매우 구속력 있는 확실한 규정들에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본회 집들의 주요 목표는 특별히 청소년 교육으로써 가장 위험스런 연령층인 그들을 양육하고 그들에게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며 종교와 덕행을 실천케 하여, 지역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본회는 어떤 계층이든 거절하지 않으나 특별히 중산층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바로 그들이 도움과 원조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보스코가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을 어느 한 범주에만 국한시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넓은 범위의 청소년 집단을 포함한다. 그 집단은 아래로는 “갖가지 범죄” 세계 정의와의 충돌을 이미 경험한 “소년원 아이들” , 예방적 훈육으로 구제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돈보스코가 주로 염두에 두고 있던 “대다수”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까지 할 불투명한 소년들을 포함하며, 위로는(최소한 기숙학교와 합숙소의) 귀족이나 부유한 계층의 자제들을 포함했다. 숙박시설, 가구, 음식, 교양적 활동, 전반적인 생활이 변변치 못했던 기관에서 아무튼 이 상류층 자제들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말년에 자신의 시설과 거기 수용된 소년들 그리고 자신의 시설이 추구하는 목표를 소개할 때마다 돈보스코가 염두에 두고 있던 모습니다. 1880년에 그는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을 위한 시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다 : “이태리, 프랑스, 아메리카에서 다투어 문을 여는 놀이터, 오라또리오, 축일학교, 주야간학교, 합숙소, 기숙학교”. 1882년 4월 루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00여개 집들에서 수 천 명의 소년들이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고 있으며, 정직한 삶을 영위하게 해줄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을 받고 있다(…) 이런 활동은 젊은이 들을 교육시켜 사회에 신자 노동자와 착실한 군인, 모범적인 교사, 사제, 나아가 미개인을 교화시킬 선교사를 배출한다.” 1885년 6월 1일 토리노에서 살레시안 협력자들에게 연설하는 동안 “그는 아주 피로한 듯 했으며 목소리가 희미했다.” 그는 이런 사업들을 계속해야 할 이유들을 누누이 강조했다 : “소년들에게 덕행을 가르치며 성소를 찾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악한 무리들의 표적이 되어버린 청소년을 교육하는 것이 주요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서 기숙학교, 합숙소, 축일 오라또리오 가족에게 종교를 사랑하게 하고, 도덕적 생활과 기도, 잦은 영성체를 권하기 위해서입니다.” 끝으로 1888년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에, 협력자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셨다 : “거의 50년에 걸쳐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셨던 기관들을 사랑해 주십시오. 청소년 신자교육, 교회 안에서의 사명, 해외 선교를 권합니다. 지상에서 제가 가장 소중히 여겼고 또한 천국에서도 주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제 화관과 기쁨이 되어주시기를 바라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돌보아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는 바로 이런 드넓은 안목으로 하층의 소년들에게 끝까지 그토록 깊은 관심을 쏟았음이 분명하다. Memorie dal 1841 al 1884-5-6 per Sac. Gio. Bosco ai suoi figliuoli Salesiani에는 그의 이런 생각이 유언으로 남아있다 ; “우리가 미개인들과 위험한 처지에 놓인 소년들을 돌보는 한 세상은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2. “청소년 심리의 요소들”
돈보스코의 교육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그가 직접 지도(학생 및 견습생을 위한 토리노 발도꼬 합숙소)했거나 또는 특별히 많은 사랑을 기울인(란조 또리네세 기숙학교들, 훗날 보르고 산 마르티노로 옮긴 미라벨로 소신학교) 시설의 소년들의 연령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A.까빌리아의 말대로, 학문적으로 어느 한 연령을 딱 꼬집어 사춘기라고 정의하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 “대부분의 교육학자들과 교육작가들은 6-12세의 아동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발달 문제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아포르티처럼, 유아기까지를 포함시키지는 못할지라도)와 관련된다. 이 점에 있어서 이태리는 매우 뒤떨어졌다. 돈보스코가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가 젊은이(gioventu, giovanetti)라 불렀던 연령층은 유아들이 아니라 일을 시작한 12세 이상의 소년들이다(…) 바로 이 점이 돈보스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으며, 이 덕분에 그는 학업 면에서도 청소년 교육의 지름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실히 돈보스코의 교육학은 유아기나 유년기 또는 결혼이나 취직으로 사회에 편입되는 청년기를 위한 교육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돈보스코가 자주 쓰던 “젊은이”와 “어린나이”가 지닌 광의의 “청소년” 교육학인 것이다. 돈보스코의 교육학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주는 것은 그가 원했고 지도한 기관들이다. 예를 들어 Regolamento dell'Oratorio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한다(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것은 이렇게 사용되었다) : “우리는 8세 가량의 소년들을 원한다. 더 어린아이들은 혼란을 가져오고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숙학교의 규칙서는, 생도는 “국민 학교 과정을 마친 자라야 한다.”는 규정을 둠으로써 확실하게 연령을 제한하고 있다. 이 규정은 “입사생 대부분이 직업교육을 받고” “학업이나 학예에 대해 특별히 적성을 지닌 몇몇 사람”만이 인문계 학교에 진학하는 합숙소와 관련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대로, 돈보스코는 출신이 서로 다른 학생들을 위해 각기 다른 목표들을 지향하는 기숙학교들을 창설하기도 했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국민 학교 과정(최소한 2학년부터) 을 완비한 것들이었다. 미라벨로 몽페라또(훗날의 보르고 산 마르티노), 란조 토리네세, 바라쎄, 알라씨오, 토리노 발사리체 발레크로시아, 라 스페찌아, 에스테, 빌라-콜롱,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그랬다. 대부분의 기관들(오라또리오, 합숙소, 인문학교)이 어린이로부터 사춘기와 청년기까지(대략 8-18세, 주로 12-16세)의 소년들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령 폭이 이처럼 넓었기에, 설사 때로 돈보스코가 지적했던 몇몇 특징들이 어떤 발달단계에 더 잘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여러 발달단계를 명백히 구별시켜줄 학문적 연구를 그에게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이 순전히 임의적이거나 경험적인 것만은 결코 아니었으며 전통적이거나 반복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매우 체계적인 1877년도 판 소책자에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수많은 설명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거기에서 돈보스코는 그가 생각하는 성장기의 주요 특징과 “예방교육”을 택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동기를 서술한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잠시 뒤면 규율과 처벌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젊은이들의 변덕 때문이었다. 그 결과 종종 소년은 잘못을 저질러 처벌-죄를 저지를 때는 관심에도 없었고 기억하지도 못했던-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정말 옳은 말이며 청소년기의 고유 속성이라고까지 할 수 있으며 두 번째의 전형적 특징인 경험부족, 미숙, 즉 생각의 부족과 경솔함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돈보스코에게 있어서, 젊은이가 뜻하는 가장 넓은 의미는 “경험이 없고”, “경솔한” 이들 이었다 :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속임수(악마, 나쁜 친구들, 화려하고 그럴싸한 유혹, 자유, 이단)에 쉽게 넘어 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청소년기는 위험한 시기이고, 누구에게나 도처에 이런 위험들이 잠복해 있다.” 하지만 외적인 변덕의 근원은 내부에 있으며, 어떤 양성을 요하는 무질서한 심리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젊은이에게는 훈련과 사고력이 부족하다 ; 그러므로 분별력이 없는 그들은 친구의 부추킴을 받으면 일시에 무질서해지고 만다.”
이런 특징에 관해 얘기하던 중에, 돈보스코는 젊은이들은 변덕스러우며, 꾸준히 정진하지 못하고, 유약하며, 곧잘 실증을 내고, 낙담하기 쉽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 했다. “종교나 신심, 학업, 노동, 훈련과 같은 진지하고 부담스런 것들에서는 이것이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젊은이들을 기도에 맛들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들 나이의 특성인 변덕으로 인해 그들은 기도를 넌더리나고 주의 집중을 요하는 아주 부담스런 것으로 여긴다.”
이는, Giovane Provveduto가 고금의 청소년 신심서적의 일반노선에 따라 강조했던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된다 : 남자, 특히 젊은 남자들은 본성적으로(본래의 본성이 그런지 죄로 인해 상처받은 본성이 그런지는 분명치 않다. 여기서 돈보스코는 “이런 구분을 두지 않는 것 같다.”) 향락을 추구한다. 남자는 즐거움과 오락과 쾌락을 갈망한다(그러나 이 사실은 어느 의미로는 애매모호하다. 덕행과 종교와 은총의 지배 역시 행복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 자주 성사를 보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기도하라고 권하면, 그 아이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일도 하고 놀기도 해야 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이런 특징은 긍정적 측면을 띠는데, 이는 운동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 신체적 지적 정서적 도덕적 에너지의 올바른 발산이라고 더 자주 강조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근본 “가르침”은 성 빌립보네리와 직접 관련된다 할 수 있지만, 돈 보스고의 언어와 교육적 실천에는 독특한 건설적 가치가 담겨있는 것 같다 : “마음껏 뛰고, 달리고, 떠들 수 있는 폭넓은 자유를 주라. 체육, 음악, 연설 연극, 산보는 훈육과 나아가 도덕성과 건강에 아주 효과적인 수단들이다.”
변덕과 쾌락에로 기우는 성향을 빼면 젊은이들에게는 지극히 긍정적인 자질들이 잇다. 돈보스코는 젊은이들의 모범적인 미카엘 마고네에서 이것들을 보았고, 교육적인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는 도덕적 손상을 입지 않은 기본적인 심리구조의 관점에서도 그것들을 즉 쾌활함, 자발성, 선한 것들(참 행복)에 대한 본래적인 공감을 즐거이 서술했다. “기질 상 쾌활하면서도 신심이 깊고, 선했고, 경건했다. 그는 사소한 신심업까지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자발적으로 주저 없이 그것들을 기쁘게 실천했다 ; 그리하여 모두가 그를 사랑했고, 그의 신심과 면학과 상냥함을 좋아했으며, 오락시간에는 쾌활함과 친절한 태도 덕에 그들의 우상이 되었다.” 돌연한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명랑함과 쾌활함을 잃지 않았다.” 정서적이면서도 지적인 깊은 감수성과 수용력으로도 나타나는 내적 생명력도 살핀다. 돈보스코는 연극이 지닌 교육성과 도덕성에 관해 말하던 중에 이점을 명백히 지적했다. “인생의 단면을 제시하는 연극에 소년들이 깊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어떠한 반대 논법과 사실로도 그것을 잊게 하지 못할 것이다.” 연극은 부정적 측면을 지닐 수 있지만, 돈보스코는 Conversione di una Valdese의 주창자인 쥬세빠의 흥행 위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말했듯이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들에 특히 주목했다 : “악습의 노예가 아닌 이상 젊은이들은 다른 것들에 별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종교적 격언과 특히 영원성에 대한 격언들은 진한 감동을 준다.”
여기에는 전인적 인간성에 관련되며 교육제도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청소년 심리의 두 가지 보편적 차원들이 뒤따른다. 그것들은 성숙한 청년에 가까운 사춘기 말기의 소년들에게 주고 관계되는 것 같다. 어떠한 불의도 용납하지 않는 강한 정의감과 보다 강력한 애정 즉 사랑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두 특징들은 1877년의 유명한 소책자에서도 명백히 강조되었으며, 철저한 “예방교육” 경험과도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 : 이성과 친절한 사랑과도. 전자에 관해 돈보스코는 이렇게 적고 있다 : “벌을 받으면 대부분의 젊은이는 수모를 잊지 못하고 멍에를 벗어던지고자 하며 심지어는 앙심을 품기까지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십시오.”그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훗날 그들을 잘 살펴보면 어릴 때의 기억이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침을 알 수 있다. : 부모들에게서 받은 처벌은 금방 잊으나 교육자들에게서 받은 벌은 잊기가 몹시 어렵다. 나이든 사람들 가운데에는 교육받는 동안에 받았던 벌에 악랄히 복사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런 연유로 교육자는 “늘 마음이 담긴 말을 들려주어야 하며” “피교육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모든 젊은이에게는, 심지어 가장 불행한 이라 할지라도 선에로 향할 수 있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며, 교육자의 첫째 의무는 여린 이곳 즉 마음의 민감한 현을 찾아내어 훌륭히 가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보스코는 유년기(8세 이전) 와 아동기(8-12세)의 심리와 덕육에 관해 약간 설명한다. 그는 도미니꼬 사비오의 유년기에 관해 “별 생각이 없는 그 때에도 그는 무슨 일에서나 어머니께 순종했다”고 쓰고 있다. 돈보스코는 도미니꼬의 부모들로부터 “아무 생각 없이 무엇이나 보고 만지려 들어 엄마들을 귀찮게 만드는 때인 아기 때부터” 그랬다는 말을 들었다. 아다시피 어린애들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가르쳐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오라또리오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아동기(8-12세)에 대한 돈보스코의 태도는 애매했다. 한편으로는 “기도를 싫어”하고 “유치한” 경향을 아동기의 공통 특징으로 꼽는 반면, 한편으로는 돈 보네띠의 편년사 1869년 3월 1일자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아동에게 중대한 도덕적 책임을 면해주지 않았다 : “나는 많은 아동들의 고백이 신학 규정과 일치하지 않음을 안다. 그들은 대부분 고백사제가 요구하지 않으면 8-12세 때 저지른 잘못을 전혀 고백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 부실한 지반을 형성하게 된다.”
3. 청소년 신학과 교육의 원리들
많은 교육자들과 청소년 영성작가들처럼 돈보스코도 젋은이들을 그들 자신 내에 국한시켜 고찰한 것이 아니라 교육적 도덕적 가능성 속에서 살폈다. 본질적으로 신학적인 이 관점은 훗날 경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고, 이것을 토대로 그는 젊은이들에 대한 분류를 받아들였으며 그의 예방교육을 방법론적으로 더욱 확실히 적용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돈보스코에게서 신학적인 동시에 경험의 성과인 한 이상을 발견한다. 이것은 전통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진 것으로서 도덕적 교육적 성숙에 대한 청소년층(넓은 의미의)의 각별히 긍정적인 수용력에 대한 신뢰를 정당화 시켜준다 : 젊은이 자신의 참여를 통해 적절히 개발되기만 한다면, 젊은이들은 도덕적 교육적으로 무한히 성숙할 수 있다.
돈보스코의 영적 교육학 기본 도서인 Il Giovane Provveduto(청소년의 벗)에서는 이 원칙이 자주 언급된다.
“하느님 말씀을 들으라: 어릴 적에 이 길을 가면 늙어서도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가리라. Adolescens iuxta viam suam, etiam cum senuerit non recedet ab ea. 이 말은, 우리가 어렸을 때 선한 생활을 하면 나이 들어서도 선할 것이며, 선종하게 될 것이며, 그 죽음은 영원한 행복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돈보스코는 실존주의 이전의 문학에서, 특히 Gobinet로부터 직접 이런 수용력에 대한 심리적 도덕적 근거를 이끌어 냈으며, 이것을 젊은이들에 대한 하느님이 우선적 사랑의 동기로 제시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단순하고 겸손하며 천진난만한 연령대에 속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아직 마귀의 먹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이런 설득으로 돈보스코는 청소년에 대한 낙관적 신학관 위에 그의 예방교육을 정립했다. 그는 루쏘적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환경 및 사회적 요인과 도한 악의로 인한 실패 가능성(완전한 실패가 아니라)에 대해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는 책임 있는 어른들에게서 열심한 그리스도교적 사회적 노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1854년경에 씌여진 Piano di Regolamento 입문서에는 교육적으로 특히 중요한 이 개념이 들어 있다. Ut filios Dei qui erant dispersi congregaret in unum(Jo, 11, V, 52). 내 생각에(…) 이 말은 오늘이 청소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 같다. 행복한 미래의 희망을 담지한 인간사회의 가장 값지고 미묘한 부분(청소년)은 그저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들의 소홀, 나태, 특히 축일에 생기는 나쁜 친구와의 만남을 막으면,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질서, 선, 도덕, 존경, 존경의 원칙들을 쉽게 불어넣을 수 있다. 때때로 어린 나이에 이미 나쁜 물이 들어있다면, 악의기 있어서라기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경우가 더 흔하다. 이 아이들이야 말로 그들을 돌보아 주고, 개발시키며, 덕행으로 인도하고, 악습으로부터 멀어지게 해 줄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그들을 모아 교화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건전한 이런 토대 위에서만 사회를 치유하고 구할 수 있다. 돈보스코는 1849년에 이미 유포된 Avviso Sacro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 “의심의 여지없이 젊은이는 현재와 미래의 희망이 담긴 인간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가장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젊은이들을 잘 교육하면 질서와 도덕이 확립될 것이다 ; 반대의 경우엔 악습과 무질서가 판칠 것이다.” 그는 1877년 6월에 이 생각을 완성시켰다 : 오늘날 세계는 행동을 요구한다. 성직자들이 자선단체에서, 합숙소에서, 학교에서, 직업훈련소에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이것은 종교 안에서 가난한 젊은이들을 가르쳐 그들을 구원하고 사회를 그리스도교화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
돈보스코가 중시했던 청소년 분류화 역시 서로 다른 교육적 각도와 정도에 따라 다른 의미를 둔다. 끼에리 시절의 그의 라틴어 학업에 관해 돈보스코는 Memorie dell'Oratorio di S. Francesco di Sales에 이렇게 적고 있다: “4학년 때까지 나는 친구들을 다루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나는 친구들을 세 부류로 나눴다 : 좋은 친구, 그저 그런 친구, 나쁜 친구. 나쁜 친구임을 알면 즉시 피했다; 그저 그런 친구들은 좋은 태도를 보일 때만 사귀었다; 좋은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냈다.”
문학적 이념으로 예방교육에 관한 소책자(1877년 판)와 Regolamento per ler casa della societa di S. Fracesco di sales에 속하는 Articoli Gemerali에서는 이런 분류가 더욱 명백히 “이론화”되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성격적 도덕적 기질에 따라 다른 교육심리의 흥미로운 한 모델이다.
4. 청소년은 일반적으로 이런 특성들 중 하나를 보여준다 : 좋다, 그저 그렇다, 까다롭고 나쁘다.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이들을 사귀로 서로에게 해를 주지 않는 태도로 모두에게 유익을 주기에 적합한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 의무다.
5. 본성적으로 좋은 성격과 태도를 지닌 이들에게는 규칙을 설명해주고 그것을 준수하도록 권한 다음 일반적인 감독만으로 충분하다.
6.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다소 변덕스럽고 무심한 보통의 그저 그런 성격과 태도를 지닌다. 이들에게는 짧고 잦은 충고와 권고와 상담이 필요하다. 조그만 상을 약속하거나 그들 능력을 믿어줌으로써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하며 감독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한다.
7. 셋째 부류의 생도들, 즉 까다롭고 품행이 나쁜 소년들에게는 특히 많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그들은 열다섯 명 중 한명 꼴이다. 모든 웃어른들은 그들을 알아두어야 하고, 그들의 이전 행동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있어야 하며, 친근하게 다가가 많은 얘기를 들려주되 자기 얘기를 할 것이 아니라 모범이 되는 짧은 얘기나 격언, 일화를 들려주어야 한다. 늘 지켜보되 신뢰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8. 교사들과 아씨스텐트는 생도들에게 갔을 때, 즉시 누가 없는지 살피고 빠진 사람이 있으면 할 말이 있거나 들려줄 조언이 있다는 핑계로 그들을 찾아내야 한다.
9. 꾸중이나 조언, 교정을 할 경우에는 친구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사실이나 일화를 예를 들어 칭찬하거나 꾸짖으면 우리가 얘기 하고 있는 이들과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제8장
특히 곤란한 청소년들에게 대한 간여
제8장
특히 곤란한 청소년들에 대한 간여
이미 살펴본 대로, 젊은이는 어리다는 사실 때문에 실제로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 더욱이 청소년의 은밀한 비행요소를 생각해 볼 때, 그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과녁”이 된다. 하지만 돈보스코는 도덕적 지적 품성이 타의 모범이 되는 엘리트와 “평범한 성격”의 다수로 구성된 대다수 소년들과 “제3의 범주, 즉 까다롭고 심지어는 못된 생도들”을 명확히 구분했다. 1877년의 Regolamento per le case에서 그는 제3의 범주가 6-7%쯤 된다고 얘기한다. 가장 낮은 이 수준의 청소년들 바로 다음에는 특히 곤란한 소년들이 있다; 비행청소년, 말썽을 일으켜 처벌을 받은 소년들, 소년원들들, 돈보스코가 다수에게 적용되는 교육제도 구조 안에 이 네째 범주를 항상 체계적으로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사제이자 교육자로서의 관심을 가졌기에 그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본 상화에서 이것을 엿볼 수 있다.
1) 범죄자들 및 소년원생들 가운데서의 주변적이지만 직접적인 경험(1841-1855)
2) 그의 시설과 시설 주변의 “다루기 힘든 이들”과의 만남
3) 소년원 운영을 가상한 사변적 고찰
4) 보편적이지만 다소 색다른 예방교육 적용 제안
1. 돈보스코와 감옥 및 Generala 소년원생들
“돈보스코가 이 기간에만 소년들을 위해 그토록 많은 수고를 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돈보스코의 친구 Don Giacomelli가 한 말이다. 이어 그는 “난 그가 교리를 가르치고 고백성사를 주러 감옥에 갈 때 따라 다니기도 했다.”고 말한다. 돈보스코는 이미 콘비또 시절(1841-1844)에 돈 카파쏘의 권유로 이 일을 시작했으며, 몇 가지 종합적인 관련 자료들을 살펴본건대 이후로도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 또는 그 자신의 오라또리오 활동과 관련지어 그 일을 계속했다. 소년원과 토리노 Generala의 작업실에 관한 또 다른 자료가 있다. “정부가 감화원을 개설하여 Vinculis(쇠사슬) 성 베드로회에 지도를 맡긴 후부터, 돈보스코는 때때로 이 불쌍한 소년들을 방문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냈다(…) 소장의 허락으로 그는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강론을 했으며 고백성사를 주었고 여러 차례 그들과 즐겁게 놀았다. 오라또리오 소년들과 함께 그랬듯이.” 1855년 여름 모든 소년수들을 데리고 Stupinigi로 특별야유회를 갔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내무장관 우르바노 라따지의 동의를 얻어 돈보스코 홀로 단행한 것으로, 상호 신뢰와 양심 그리고 그 교육가의 매력이 없었다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Memorie dell'Oratorio di S.Francesco di Sales에는 감옥과 소년원의 소년수들 가운데서의 활동과 오라또리오의 시작 및 발전 간의 직접적 관련성을 보여주는 돈보스코 자신의 개인적 언급들이 있다. 어쩔 수없이 날짜와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고 다소 과장이 섞여 있긴 하나 한동안 오라또리오가 감옥이나 갱생원 출신자들, 특히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은 것은 분명하다.
“당시 나는, 출소자들이 그들을 돌봐주고 축일을 함께 보내며 정직한 고용주를 찾아주고 주간에 때때로 방문해주는 따스한 손길을 발견한다면, 과거를 청산하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며 선량한 그리스도인 겸 올바른 시민이 되리라는 생각을 점점 뚜렷이 갖게 되었다.” 돈보스코가 Societa Reale pel patrocinio dei giovani liberati dallacasa d'educazione correzionale의 “활동적인 회원”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문헌이 최소한 하나는 현존한다. 이 회의 부회장이 돈보스코에게 출옥한 한 젊은이를 부탁하면서 Is-truzione pei Patroni dei Giovani Liberati에 따라 그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도와주며 3년 동안의 견습기 동안 감독할 의무를 지우는 1855년 8월 8일자 서한이 남아있다.
돈 알라쏘나띠가 쓴 1855년 8월 14일자 편지로 돈보스코는 이 위탁과 의무를 받아들인다. 전기작가는 돈보스코가 다른 젊은이들도 받아 들였지만, 그 결과는 괴로운 것이었다고 덧붙인다. 이리하여 돈보스코는 사전에 자기 합숙소에 그 소년들을 있게 해달라고 당국자들에게 청하게 된다.
2. 위험한 처지의 청소년들에 대한 돈보스코의 관심
그러나 큰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에 대한 돈보스코의 직접적인 관심은 독창적인 형태의 오라또리오가 시작되면서 그의 교육기관에로 옮겨갔다. 오라또리오의 기본 목적은, 공포시대인 1848년 직전에 우후죽순처럼 번지는 예측할 수 없는 오라또리오 생활이 공공질서에 끼칠 영향을 심히 걱정하던 Marquis Michael Cavour-Gamillo의 아버지에게 돈보스코가 언제나처럼 단순명료하게 얘기했던 바대로 타락과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저는 잘못을 저질러 감옥에 가게 될 사람들을 줄이고 싶습니다.” 이것이 돈보스코의 모든 활동의 지배적 동기였으며, 이는 그의 말년에 특히 강조되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어려운 처지의 젊은이들에 대한 그의 비젼은 더 이상 지역적인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팽창하는 산업도시들, 대량이민 현상, 심각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 시민의식과 종교적 신앙 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위기를 내포했다. “버림받거나 위험한 처지의 소년들에 대한 시민교육과 도덕교육, 나태 ․ 죄악 ․ 파렴치 ․ 감옥에서 그들을 구하는 것-이것이 우리 활동의 목표다.” 그것은 특히 가장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해 실시되었지만, 위험한 부랑아들의 수를 줄이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미성년 범죄자들과 좀도둑 수를 줄였고, 감옥을 비게 했다.
돈보스코가 그의 시설의 불우 청소년들을 어떻게 대변했는가를 알려주는 정보는 드물다. 몇 가지 정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우 청소년들에게 관계된 것이라기보다 특별한 목적으로 그의 시설에 보내졌던 이들에 관계된 것이다. 그것은 돈보스코가 직접 지도했으며 특별한 관심을 쏟았던 유일한 기관인 토리노-발도꼬 합숙소, 특히 성직 지망자가 점점 늘어나던 학생분과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그들 중 몇을 양성해내지 않고 퇴소시킨 (비교적) 극단적인 결정들에 대한 엄중한 판단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드센 불복종, 타락한 행동이나 “부도덕함”, 추문, 절도, 신심업들에 대한 경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1846-50년 사이, 돈보스코는 범죄에 가까울 정도로 폭력을 사용하며 싸우는 청년들을 몇 번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통상적인 오라또리오 활동이 아니었다. 이 만남들은 폭력집단이나 그들 보스들과의 일종의 대결이었다.
돈보스코는 밖에 나기 그들을 낚아와서 (G.Lemoyne의 말을 빌자면) “온갖 미묘한 사랑의 기술로 그들을 구슬려 도와주고 지긋지긋한 단체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데”성공했다.
1846년, 오라또리오에 어쩌다 들어온 반성직자적 사상을 지닌 열네 살의 만취한 아이도 이 경우에 해당된다. 그는 여러 가지 놀이에는 잘도 끼어들었으나 미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 말대로 “켸켸묵은 곰팡내를 풍기는 백치”가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돈보스코는 인내로써 그를 감화시켰다. 그리하여 “몇 주 뒤 그 녀석은 마음과 행동을 바꾸게 되었다.” 이것은 위에서 인용한 G.Lemoyne이 전하는 이야기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 시절과 그 후 그런 장면들이 얼마나 많이 재현되었는지 모른다. 돈보스코는 반항적이고 심지어는 잔인하기까지 한 수많은 아이들을 인내 롭고 자상한 사랑으로 사로잡았다. 그는 그들을 하느님의 은총에로 데려가 행복하게 해주었다.”
Lemoyne은 돈보스코가 “1860년까지의 초창기에” “성직에 발을 디딘 젊은이들을 제쳐두고” 청소년 사이에서 해냈던 일에 관한 짧은 개요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 학교와 오라또리오, 또는 이 합숙소에서 얻은 결과들을 이해하려면 생도들을 세 부류로 나눠야 한다: 나쁜 이들, 그저 그런 이들, 착한 이들, 착한 이들은 놀라운 발전을 보인다. 그러그런 이들을 얼쩡얼쩡 산만하고 일도 별로 하지 않으나 기술과 도움과 직업을 통해 잘 발전할 수도 있다. 나쁜 이들은 매우 골칫거리이지만, 일에 대한 재미를 조금이라도 붙여주면 대게 나아진다. 방금 얘기한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얻었다:
1) 그들은 더 나빠지지는 않는다.
2) 많은 이들이 분별력을 되찾아 일용할 양식을 정직하게 번다.
3) 감시를 받는 것 같으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좋은 원칙들을 받아들여 그 효과를 발휘한다.
이 덕분에 해마다 우리는 수 백 명의 젊은이들에게 좋은 고용주를 찾아주어 그들로부터 기술을 익히게 했다. 많은 이들이 도망쳐 나왔던 가정으로 되돌아갔으며, 이제는 유순해졌다. 적잖은 이들이 명문가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3. 교육기관과 교정기관 운영을 위한 돈보스코의 교섭
때때로 돈보스코는 재교육 내지 교정기관 운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Memorie
Biografiche 제10권에서
A.Amadei가
우연히 얘기한 1871년
여름 무렵의 한 얘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술한
회견 중 하나에서 (피렌체에서
였는지 로마에서 였는지는 알 수 없다)
lanza가
그분께 발도꼬 오라또리오 소식을 물으면서 버림받은
불량 청소년들을 위한 소년원을 열어달라고,
이곳이나
혹은 저곳의 수도원에 열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보다 몇 년 전(1867-68)
Salviati공작이
돈보스코더러 Vigna
Pia의
로마 감화원 농장의 지도를 맡아달라는 간곡한 제안을
한 바 있었다.
돈보스코는
분명히 호의적이었지만 적극적인 활동이 뒤따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왜냐면
우리는 돈보스코가 로마에 수도회의 기반을 갖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885-86년에 마드리드의 소년원을 맡아달라는 제안과 그것의 저의에 대한 찬반논의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여기에는 두 명의 위원들과 정경계 원고로 구성된 위원회, 돈보스코와 살레시오 수도회 최고장상회, 마드리드의 교황대사( 훗날의 Rompolla 추기경)도 관련되어 있었다. 바르셀로나-사리아의 살레시오 빈민의 집 원장 돈 브란다는 “소년원은 수도회의 목표가 아니기에 그 문제라면 딴데서 찾아보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1886년 3월 17일에, 돈보스코는 알라씨오에서 실베라 의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 그러나 우리가 현재 종사하고 있는 일에도 인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차지하더라도, 이 기관의 성격과 훈육방식 때문에 우리의 바램을 실현시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을 하려는 우리의 모든 원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활동에 있어서 우리는 제가 지난 9월에 보내드렸던 우리 규칙서의 규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르셀로나의 Tallenes Salesianos에 의거하여 그곳에 한 기관을 둘수는 있지만. 여러분의 St. Rita에 입각한 소년원을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몬시뇰 Rompolla가 끈질기게 졸라대어 결국 돈 루아가 합의서를 작성했고 돈보스코가 서명했다. 거기에는 적어도 향후 5년간은 이전에 형을 언도받은 사실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제한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 가지 논거가 이것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1) 그 기관과 그곳을 떠난 이들에게서, 감화원 내지 소년원에 붙어다니는 부끄런 오명을 씻어내기 위해; 대신 빈민의 집이란 명칭을 제안했다.
2) 일과 덕행에로 더 쉽게 향하도록 다른 소년들을 부추키는데 도움을 줄 품행이 바른 소년들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이 합의서를 제시하자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이 합의서가 과단성 있게,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서서히 적용되었더라면 이것은 돈보스코가 표방하는 예방교육의 보편적 가치가 없이는 , 다스리고 복종시키는데 쓰일 유일한 방도는 훈련과 처벌의 공포 즉 억압적 방법뿐이다. 돈보스코는 1878년 Crispi에게 보낸 각서에서 특히 이점을 언급했다: “청소년 도덕교육 및 시민교육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억압적 방법과 예방적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사회와 교육기관에서는 두 가지가 다 적용될 수 있다(…). 법으로 악인들을 감시한다고는 하나 그들의 수를 줄이려면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4. “위험에 처한 젊은이”를 위한 “예방적 구원”
예방교육에 관한 소책자를 펴낸 몇 달 뒤, 돈보스코는 내무장관 프란치스꼬 크리스피에게 “길거리와 교육적 빈민집에서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 예방교육의 기초를 제시”할 목적으로 위의 소책자를 다시 손질한 짧은 개정판본을 보냈다. 신인 내무장관 Joseph Zanar-delli에게 보낸 다음의 7월 23일자 편지에 따르면, 크리스피는 “예방교육에 관하여, 그리고 이태리의 여러 도시들과 특히 로마의 소년들-비뚤어지지는 않았지만 버림받아 위험에 처해있는 소년들에게 그것을 적용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직접 물었다.
1877년 소책자나 1878년 개정판은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것의 기본사상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자에는 종교(구체적으로 가톨릭) 없이는 참교육이 이뤄질 수 없다는 돈보스코의 기본 정신이 체계적으로 나타나 있다. 정치가들이 종교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정부는 더더욱 그랬던 1854년, 그는 평신도인 우르바노라따찌에게 공공연히 이렇게 말한다: “정부가 형법기관에서 예방교육을 실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를 도입하십시오; 종교적 가르침과 신심업을 위한 시간을 만드십시오. 당국자들로 하여금 이것들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하십시오; 하느님의 대리자가 형법기관에 찾아가 불쌍한 이들을 자유로이 접하고 그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말을 들려주게 하십시오; 그러면 이미 예방교육이 채택된 것입니다. 얼마 뒤 경찰은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도덕적이며 쓸모 있는 사람들을 가정과 사회로 복귀시킨 것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듬해 Generala 일화가 있은 뒤, 한 사제가 “젊은이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왜 국가는 발휘하지 못하는가”를 알고자 하는 그 장관에게, 돈보스코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가진 것은 도덕적 힘입니다. 국가는 명령을 내리고 벌을 줄 수 있지만, 우리는 주로 젊은이들의 마음에다 이야기하며 우리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1878년 두 세계(정치와 종교) 간의 분쟁의 골이 더욱 깊어졌으며, 사회변혁과 위기의 징표들이 더 크게 확대되었다. 돈보스코는 이 때 그의 새로운 대담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 주제들에 관해 간단한 글을 썼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는 세속적 용어로 글을 썼다. 교육제도 간의 차이점에 관해 간략히 살핀 뒤, 어떤 소년들을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가(일을 찾아 타지로 떠난 이들, 고아, 부모들이 돌볼 수 없거나 돌보려 하지 않는 이들, 경찰과 충돌하지만 아직 사악하다고 할 수 없는 부랑아들)에 관해 상세히 논술했다. 그런 다음 필요하도고 가능한 시설들을 지적했다; 축일 놀이터, 평일날 작업장 방문, 합숙소, 직업훈련소, 농장. 그는 정부의 직접적인 운영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건물, 장비, 경제적 보조 등의 적절한 후원을 제안했다. 그런 다음 30여 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예측할 수 있는 결과들을 제시했다.
본질적으로 그는 예방교육의 기본요소는 고스란히 담고 있되 종교를 명백히 언급하지는 않는, 예방교육의 “이형”을 제시했다. 유일한 “교회” 용어인 “교리교육” 역시 “이 가련한 서민자녀들에게 균형 잡힌 도덕적 자양분”을 제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되었을 뿐이다. 종교가 언급되지 않았다 해서 명백히 베제된 것은 아니다: 소년의 전인적 발전에 끝까지 투신할 것을 요구하며 애정과 정으로 그에게 접근하려는 마음(과 이성)의 교육학은 결국 있을 수 있는 모든 심리적․사회적 난점 이상의 영역에 깊이 숨어있는 문제들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돈보스코에게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다음의 것이 바로 이것에 해당된다: 부모들과 가족을 비롯한 어른들의 능력과 관심 부족; 나쁜 아이들의 거짓과 부도덕함에 대한 사도들의 고의적인 부정적 행동. 그러므로 전인적 구원은 구체적으로 가능한 중간 단계 목표들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예방교육의 가치 모두를 점점 회복하는 데에 있다.
이런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인생의 의미 재발견, 사랑의 힘에 대한 신뢰, 기쁨 재발견, 노동에 대한 사랑, 결심, 도덕적 존엄성과 사회적 연대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격려하는 능력.
제9장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새로와진”
옛사람의 교육 : 신자와 시민
제9장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새로와진”
옛사람의 교육 : 신자와 시민
돈보스코의 교육제도-사목활동 전체와 영성에도-에는 다른 교육 선각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급진적 성향이 없다. 예를 들어 그의 예방교육은 루소나 미카렌코적 의미의 새 인간 창조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동적 정신을 가지고 구질서(Ancient Regime)하의 그리스도교적 시민적 전통 속의 옛사람으로 되돌아 간 것도 아니다. 돈보스코는 자신과 자신의 교육활동을 보다 복합적인 측면에서 옛 것과 새 것의 종합으로, 개혁과 전통의 종합으로 여겼다. 그의 동시대인들 역시 그에 대해 서로 다르긴 하나 이아 비슷하게 생각했다.
1. 전통과 새 것의 종합
그런 생각을 실제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드러내주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 “선량한 그리스도인 겸 올바른 시민”이란 표어에 가장 명백하고 공통된 점이 표현되어 있다 하겠다. 1875년 선교단 출범시, 이 표어는 보다 넓은 지평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원에 대한 영감을 담은 또 다른 표어로 바뀌었다: “복음화와 문명화” 또는 “인류와 종교의 선익”으로 물론 다른 표어들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돈보스코는 “덕행의 길을 걷는 동시에 일용할 양식을 정직하게 얻을 수 있게 된” 젊은이들에게 관해 얘기했으며, “영혼의 선익과 시민사회를 위한 도덕적 물리적 성과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훗날,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일과 관련하여 보다 분명한 표어가 나타났다: “사의적절하고도 은혜로운 손길이 그들을 위험에서 구해주어 떳떳한 직업을 갖도록 도와주고 종교를 통해 덕행으로 이끌어준다면,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선량한 그리스도인, 현명한 시민이 되어 언젠가는 천국에서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런 이미지는 혁명의 폭풍 뒤 도덕적 사회적 재건에 임했던 가톨릭 세계에서 흔히 접할 수 있었던 “온건한” 정신사조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한편으로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모든 분야에서 파괴와 전복이 발생하기 이전인 “좋았던 옛시절”에 대한 일련의 향수를 숨길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도덕적 종교적 가치들, 즉 신앙, 대중의 신심, 성사생활, 가정과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교리, 애덕활동 실천, 합법적인 사회적 종교적 권위의 “가부장적” 통치에 대한 순종, 기존제도와 “위계질서”에 대한 존중, 자신의 지위에 대한 만족, 일에 대한 사랑, “사말의 것들”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의 입장에서 희생을 받아들이고 보상을 바라는 것에 입각한 완벽한 그리스도인 사회에로의 복귀를 바라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상이 활발하게, 왕성하게, 발전과 문명화의 결과와 더불어 추구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전속력으로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설사 저항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될 것이다. 값진 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무수히 희생될 것이기 때문이다.
돈보스코는 나름대로 전통적인 “신지”와 새로운 질서속의 “시민”이 결합된 모습을 새로운 인간상 내지 그리스도인상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교육학적 차원에서 이것은 그로 하여금 옛 교육의 세 가지 정칙을 재평가 하도록 했다: 신심과 도덕성, 시민적 세속적 가치를 좋다고 인정하는 본성, 이성을 더욱 과감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새로운 구도하에서의 문화(지혜)와 문명화. 이런 시각에서는 고전적인 세 가지 프로그램이 각기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명(새로운 의몰 이해된)은 신심과 도덕성에 종속된다고 주장되었다. 이런 견해는 필요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돈보스코의 삶의 양식이다: 하느님 안에 잠겨 있으며 교회와 교황께 충실한 자신 있는 신자요 어디서나 사제인 동시에 물질적 영적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하게 된 사회의 일원인 시민. 바로 이것이 그의 모습이었다. 1884년 5월 알현 때, 레오 13세는 말하자면 정확한 직관력으로 돈보스코의 온 생애를 요약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동시에 선량하고 정직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 정치적 음모에 가담하지 않고 언제나 선량한 그리스도인이로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사명을 지녔습니다.”
공공연한 정치적-실제로 당파를 의미하는- 중립성의 맥락에서 이런 특성이 종종 나타났다. 돈보스코는 자선활동과 교육활동에 몸 바치되 정치적 파벌을 초연한 사제가 되고자 했다. 대개 그는 자기 입장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신자요 사제로서의 성격이 복종적이며 적극적인 시민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일치를 이루었다. 그는 자신이 창립한 “교육자” 단체를 위해 자신이 행한 일과 자신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주체적인 행동규칙을 이끌어냈다. “이것이 우리의 변함없는 프로그램이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십시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훌륭한 품성과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새로워진 전통적 인간의 모습
이 새로운 인간의 근본 “특징들”을 나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니 그보다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새로워진 이 전통적 인간의 특징들을 상술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왜냐하면 이 “모텔”에 따라 돈보스코 교육학의 기본 요소들이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모습은 참신한 요소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노선에 속한다. 한편에서는 종교적 신앙, 초자연적인 것, 특히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확고히 무게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것들이 솔직하게 인정받고 있다; 그저 수단적으로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정되어 활용되고 있다.
G.Lombardo Radice와 F.Orestano는 상호대립적인 이 두 성향에 대해 증언한다. Lombardo는 평신도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었으나 돈보스코의 경험에서 종교적 영감이 절대적인 중심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돈보스코, 그는 여러분이 알아야할 크나큰 인물이다.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그는 예수회를 보완하고 이냐시오의 고매함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힘찬 교육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교회가 잃어버린 많은 대중을 다시 교회로 이끌어 들였다(…) 여기서 비결이 있다; 하나의 이상 (…). 하나의 이상은 한 영혼을 뜻한다.” F.Orestano는 이와 반대로, 돈보스코의 활동에 담긴 거의 신비적일 정도로 그리스도교적인 영감을 강조한 다음. 특히 “인간적인 활동부분”과 지상의 것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인간주의적인 평가, 간단히 말해서 그의 교육계획의 독특한 특징인 삶의 기쁨과 노동에 대해 증언한다. 돈보스코는 “노동과 기쁨을 성화시켰다. 그는 그리스도교적인 영적 균형과 적극적이며 기쁨에 찬 그리스도인적 생활을 보여준 성인이다. 바로 이것이 종합된 그의 독특한 모습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다.”
돈보스코는 지극히 소박하고 영적이며 교육적이었다. “어디 있든 늘 훌륭한 사제로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시오. 거룩한 우리 종교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실천하십시오-바로 이 종교로 나는 여러분을 폐해로부터 보호해왔습니다-우리의 종교는 현세의 고통 속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죽음의 고뇌 속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며, 우리에게 끝없는 행복의 문을 열어줍니다.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이미 가정을 갖고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오라또리오에서 여러분이 받았던 교육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실시해 보십시오.”
누구 앞에서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돈보스코에 따르면, 그의 의식과 평생의 활동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영혼구원 문제였으며, 나머지 것은 모두 이것에 종속되었다; 그는 은총에 협력하여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확고히 믿고 행동했다. 가장 높은 차원에서 이것은 성덕과 일치되면 돈보스코가 그의 주요 세 전기작품-도미니꼬 사비오. 미카엘 마고네, 프란치스꼬 베수꼬-에서 아주 자신 있게 제시했던 비범한 성덕과도 일치한다. 구원사건에서는, 다시 말해서 영적 생활에서는 구세주의 어머니께서 중요한 역할을 하시며, 매일 그분께 간구하는 것이 상책이다; “사랑하올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여, 제 영혼을 구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둘째, 성공을 거둘 사람은 천지의 창조주이시오 주인이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긴다. 그의 태도와 행동의 근원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이지만, 이 경외는 심판자 하느님의 현존(하느님께서 날 지켜보신다)과 더불어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다정함을 볼 줄 아는 자녀된 사랑에서 불리 될 수 없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성서말씀은 죄를 피하는 이유가 되는 동시에 은총을 간구하고 참된 정화를 바라며 화해를 갈망한다 (고백성사에서 완성되고 성체성사에서 확인된다).
“교회의 직무 안에서 교회를 사랑하고, 지상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인 우리의 이 거룩한 가톨릭 종교를 실천하자.”
“그는 교리교육과 실천신학의 지주들 가운데 하나인 선량한 그리스도인 겸 정직한 시민의 또 하나의 명백한 특징을 지적한다;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로마 가톨릭 교회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 교회다.” “성 베드로의 후계자가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있다 (…). 우리의 목적들과 특히 우리의 주교들은 우리를 교황께 결합시켜주고, 교황은 우리를 하느님께 결합시킨다.
이렇듯 그 성숙한 사람은 가톨릭 교의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신자였으며, 용감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고, 이단과 전혀 타협치 않았으며 정치적인 급진주의도 멀리했고, 교황과 그의 목자들의 곁에 충실히 서있었다. “집에 있을 때,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고, 그대가 신앙을 지녔음을 보여주어라: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으니, 자유를 선용하여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고 하느님과 교회의 법을 정확히 준수하라.”
돈보스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겸 정직한 시민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에 올바로 뛰어 들어 열심히 일하며 (견습공, 노동자, 교사, 군인, 사제로서) 정직과 모범적인 생활로부터 유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제로 사회에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했다. 돈보스코의 교육활동의 주요 목표인 그리스도인 homo faber(공작인)의 윤곽을 나타내주는 듯한, 집들의 규칙서의 몇몇 조항들에는 이 점을 입증해주는 많은 표현들이 나와 있다.
“1. 여러분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담이 지상낙원에 오게 된 것은 지상 을 가꾸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고 하셨습니다(…).
2. 학업에서도 직업에서도 노동은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노동을 통해 여러분은 사회와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여러분의 영혼 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와 교회에서의 각자의 독특한 위치는 우연한 것도 임의적인 것도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성소에 따라 살도록 부름 받았다. 즉 분명한 위치에서, 하느님의 원의와 이웃의 요구, “세속적”교회적 또는 “종교적”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태도와 성향에 따르도록 부름 받았다.
이 밖에도, 방법은 각기 다르지만 누구나 자신의 가능성과 책임에 따라 사랑의 활동과 사도직에 적극 참여해야한다. 자선, 교리교육, “활동과 노동분야 참여”, 호교적인 단체 가입, 하느님이 부르실 경우 사도적 활동과 선교활동에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정직한 사람이다. 사랑과 극기, 순명, 겸손과 같은 전통적 가치들을 실천하는 가운데 여기서 기쁨을 발견하고 천국의 기쁨을 희망하는 사람이다. 이 권고는 어른들에게나 젊은이들에게나 다 행당된다: “시간을 잘 활용하여 죽음의 순간에 큰 위로를 받도록 하라. 사는 동안 항상 저 높은 곳을 생각하되 사회 안에서 명예롭게 처신하라.” “Beatus homo cum pro-taverit iugum ab adolescentia sua(…). 젊었을 때 힘써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제10장 기본적인 교육적 차원들
제10장
기본적인
교육적 차원들
1. “선량한 그리스도인” 겸 “정직한 시민” 상(像) : 전인적 교육에 대한 관심
돈보스코는 자신의 교육 활동이 이런 분명한 목표들에 점진적으로 접근하도록 했으며, 이런 목표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전인교육에 대한 관심은 콘비또 시절 초기 오라또리오 교리 교육에서 이미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체계적이거나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보다 더 확실하게 성장하고 싶었으며 그것을 분명히 의식 하고자 했다. 바르톨로메오 갈레리아와의 만남을 기록한 다음, 이제는 Memorie dell' Oratorio (오라또리오 회고록) 을 쓸 때가 되었다는 것을 어느 때 보다도 더 분명히 안식하고서, 그렇지만 충실히 자신의 원래의 직관에 관해 언급했다. “이 첫 아이에게 다른 애들 몇이 더 합류했고, 그해 겨울 나는 특별 교리가 필요한 몇몇 어른들, 특히 감옥에서 나온 이들만을 돌보았다. 당시 나는 형무소를 떠난 젊은이들이 그들을 돌보아주며 축일 날 함께 있어주고 정직한 고용주를 알선해주려 노력하며 주간에 때때로 찾아와주는 다정한 손길을 발견하고서 과거를 잊고 떳떳한 생활을 하여 선량한 그리스도인 겸 정직한 시민이 되는 것에 만족했다.”
“선량한 그리스도인” 겸 “정직한 시민” 상은 당연히 돈보스코가 돌본 소년들의 유형
(고아, 기아, “사회적 신분”, 신학생)과 그가 일한 기관(축일 오라또리오, 야간학교와 주일학교, 신심단체와 오락단체, 학생기숙사, 견습공 합숙소 등)에 따라 다양하게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내용과 절차 및 수단에 있어서 방법론적 측면은 그 목표인 새로운 인간의 본질적 요소들을 늘 추구 하게 될 것이다.
1851년 11월 17일 카살레 몽페라도에서 돈보스코가 주재한 회의에서 특히 의식적으로 경험에서 얻어진 이 태도가 표명된 것 같다 :
“살레시안 활동에 있어서 자선은 - 돈보스코의 말이다- 육체와 영혼, 사회와 종교, 순간과 영혼에 관계하는 것 이다. 살레시안의 자선은 육체에 관계된 것이다. 우리 애덕의 집에 모인 수많은 가난한 소년들에게 의.식.주 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없거나 또는 있더라도 버림받은 그들은 이런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 극도의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선은 영혼에 관계된 것이다. 이 소년들이 종교적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교육받으며 윤리를 배우고 영원한 구원을 얻어 언젠가는 천국의 행복한 시민이 되도록 여러 가지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살레시안 자선은 가정과 사회에 관계된다. 이 소년들이 작업장에 보내져 세월이 흘러 직업을 배우게 될 것이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떳떳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기술과 활동을 통해 사회에 큰 보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나 인문계 공부를 할 경우 그들은 이러저러한 직장에서 지적인 활동으로 사회에 유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현명히 교육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언제나 윤리와 올바른 질서의 수호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정직한 시만이 될 것이며, 정치적 권위나 정의를 해치는 골칫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살레시안 자선은 종교와 관계된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것은 많은 소년들을 선량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에 활용될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많은 이들이 사제가 되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인격과 재능을 우리나라에서 종교를 고양 시키는 데에 바치고, 보다 용기 있는 이들은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오늘날 많은 살레시안들이 파타고니아에서 활동하고 있듯이 선교로 나가서 아직 종교를 모르는 이들에게 종교를 전할 것 이다. 살레시안 자선은 종교와 관련된다. 의연금의 일부가 거룩한 예배를 위한 성전 건립에 씌여 지기 때문이다. 성전에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가 선포되고 옹호되며 실천될 것이다. 살레시안 자선의 순간과 영원에 관계된다는 것은 그 수혜자에게서 그 제공자에게로 되돌아가는 이 밖의 잇점들로써 분명히 알 수 있다.
새롭혀지고 더욱 보강된 과거의 세 용어가 갖가지 방법론에 산재한 요소들을 올바르게 순서지우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돈보스코는 자신의 특별한 목표와 교육적 방법론을 “프로그램화” 했을 때 바로 그렇게 했다.
“즐거움, 공부, 신심” ; 건강, 지혜, 성덕 ; 일, 종교, 덕행 ; 보다 넓은 사회적 쇄신의 맥락에서는 ; "일, 훈련, 인간성.“ 이것은 돈보스코의 초기 교육기관인 오라또리오가 시작된 때에 이미 등장했다. 이것은 Memorie dell' Oratorie di s. Francesco di Sales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Menkicita Istruita 행정관에게 특별 보조금을 청하는 요청서를 비롯한 초창기 문헌들에 요약되어 있다. : ”구미가 당기는 몇 가지 놀이와 교리교육, 훈시, 노래로 구성된 재미있는 레크레이션을 통해 많은 아이들이 바른 품성을 갖게 되고 일과 종교를 사랑하게 되었다.“
2. 성사의 종교적 차원과 교육학
전통과 돈보스코 자신의 “경험”에서 착안된 신이업의 목표는 종교적 차원을 개발하고, 소년들의 마음속에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며, 은총 속에서 살도록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돈보스코의 모든 집들의 성격을 규정해 주었다. 양적 면에서 볼 때 기숙생(학생들이 견습공보다 더 많았다.), 특수학생(일요일과 축일미사에 반드시 와야 했고, 가능하다면 주간에도 와야 했다.), 오라또리오 소년들 간에는 당연히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기숙사에서도 예방교육이라는 소책자에 서술되어 있으며 “예방교육제도” 전체의 보편적 지침인 성사적 교육학 의 원칙이 곧이곧대로 적용되었다.
“예방교육을 풍전등화의 지경에 몰아넣지 않으려거든 자은 성사, 잦은 영성체, 매일미사가 그 지주가 되어야 한다. 소년들에게 잦은 영성체를 강요하지는 말되, 그들을 격려하고 영성체에서 유익을 얻을 기회를 제공하라. 영성수련, 2일 묵상, 9일기도, 강론, 교리교육은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평화와 영혼구원에 유익하도록 아주 쉬운 방법을 가르쳐주는 이 종교의 아름다음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알게 해 줄 것 이다. - 거룩한 성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면 소년들이 신심업에 자연스럽게 매료된다. ; 그들은 기꺼이 기쁘게 신심업을 받아들여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성사 경험(고백성사 와 성체성사) 뿐만 아니라 기도와 “신심업” (이중에서도 특히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을 특징지어주는 인간적 신적(은총의 역사하심과 교육자 사제와 생도 편의 개별적 협력) 협력이 강조 되었다. 요컨대 그리스도교적 성장의 심도 깊고 효과적인 목표와 수단과 실현이 강조되었다.
3. 가르침과 성창의 체계적 활용
그러나 종교생활에의 직접적 참여와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의 성장은 체계적 가르침과 성찰 없이는 불가능한 견식 있고 자각적인 신앙을 전제로 한다. 이를 위해 돈보스코는 많은 도구들을 활용했다. : 역사적 교의적 교리, 수업을 통한 종교적 교양, (일반적으로 교훈적이며 단순하고 구체적인)설교, 묵상, 영적 독서. 공개적이며 대중적인 증언은 신앙교육에서 상당한 자리를 차지한다. : 엄숙한 종교예식, 특수단체들 (복사단, 성가대, 신심단체)의 전례행사 참가, 성지순례. 돈보스코는 1848년의 떠들썩했던 노정에 대해 Memorie dell' Oratorie에 이렇게 기록했다. : “약대와 더불어 Stabat Mater 와 Miserere를 노래하며 그해 처음으로 줄지어 (성목요일에 성당들을) 참배했던 것은 우리 소년들로 하여금 인간적인 것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4. "Sen년 Eclesiad (교회의식)“ 과 교황께 대한 충성
돈보스코의 가톨릭적 인생관과 교육관을 다룰 때 이미 보았던 대로, 그의 종교적 교육학에서는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여겼던 교황께 대한 충성과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무엇보다 먼저 그가 소년들에게 온전히 투신했던 처음 20년간의 삶에서 이것 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그의 저작과 가르침에 변함없이 등장했던 것이 활성자로서의 그의 활동을 좌우했다. : 교회 역사에 있어서 역사적 - 교의적 중심인 교황 옹호 ; 교황들의 생애를 중심으로 전개된 주일 강론 ; 교황군주권과 관련된 사건들을 신성화 하려는 노력 ; 특히 비오 9세께서 Gaeta에서 지내는 동안 오라또리오 생활에 대한 교황의 관심 강조 ; 1850년 4월 2일 교황께서 portici에서 보내주신 축성된 묵주와 봉헌금 33리라에 대한 감사 ; 훗날 성 알로시우스 축일 과 성 베드로 축일의 1862년 편년사에 따르면, 돈보스코가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여준 열정은 언제나 처럼 가히 감동적이며 교육적이다. 1867년 3월 3일자 소년들에 대한 권고가 그 표본이라 하겠다.:
“그러니 여러분은 교황께서 그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평생 잊지 마십시오. 그분을 모욕하는 것처럼 들릴 말을 한마디로 내뱉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분의 성스런 인격을 모독하고 비방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위엄을 헐뜯는 신문이나 책을 읽지 마십시오.”
5. “사말의 것들” (죽음, 심판, 천당, 지옥) 을 염두에 두고
돈보스코의 종교교육에서는 사말의 것들에 대한 시각이 특별한 비중을 차지한다. 돈보스코는 교육자들에게 이 점에 있어 아주 솔직하기를 당부했다.
“소년들 - 그는 가끔 이렇게 강조했다 - 은 우리가 그들의 영원한 관심사에 관해 얘기를 걸면 다른 누구보다도 그것을 믿고 좋아 할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진정 누가 그들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들의 영원한 구원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새로 들어온 아이를 데려가면 돈보스코는 언제나 맨 먼저 영혼과 영원한 구원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다정한 아버지와도 같은 태도, 평화로운 모습, 몸에 밴 미소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존경과 신뢰를 갖게 했다.”
아무리 숨기려해도 돈보스코의 모든 활동 즉 그이 글 (특히 Giovane Proveduto(1847)와 다른 책들에 게재된 Rico-rdi), 연촌에 각 사람들에게 들려준 짧은 조언과 농담(생활표지:Strenne), 오라또리오 복도 벽의 액자, 저녁 말씀, 편지 등에는 사말의 것들에 대한 사상이 나타났다. 어떤 곳 (예를 들어 전기들) 에서는 천국에 대한 생각이 빈번히 나타났다 ; 또 어느 곳에서는 생생하게 지옥을 상기시켰고, “선종연습”이라 불리 웠던 월피정 과 영적 회복과 계획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목표를 지닌 연피정 에서 이것이 나타났다. 언제나 그것은 시간과 영원에로 가장 깊이 침잠케하는 초대였다. “죽을 때 여러분은 영혼을 유익하게 하지 못하고 너무 많은 시간을 잃어버린 것을 후회 할 것입니다.” 라는 말은 소년들에게 들려준 많은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였다.
6. 의무에 대한 교육
의무교육(공부, 노동, 서원, 사명) 은 기도로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만큼 이나 중요하다. 돈보스코는 짧은 조언이나, 주의, 권고, 모범,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이나 모두에게 유익한 자극으로써 그것을 치밀하게 실천했다. Regolamento에서 그는 소년들에게 이렇게 말 한다 :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봄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어릴 때 일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하면 나이 들어서도 게으름뱅이로 머물러 조국과 친척의 두통거리가 될 것이며 자신의 영혼에도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무 및 노동 교육이 살레시안 집의 생활의 전부는 아니었다 ; 끊임없이 여러 가지 오락과 다양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연이어졌다. 학교와 작업장 생활과 활동이 아주 바르게 진행되었고, 교육자들의 모범과 적극적인 활력에 힘입어 더 나아지려는 노력이 계속 되었다.
“우리는 매일 사방팔방에서 일, 가르침, 인간성을 강조하는 말을 듣지 않았던가? 그렇다(...) 살레시안들은 수많은 도시에 각종 작업장을 개설했고 시골에서는 농장을 운영했다. 젊은이들과 소년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살레시안들은 남녀 청소년 기숙학교와 주야간학교, 축일학교 주일 오라또리오를 세웠다. 청소년들의 정신을 계발 발전시켜 그들에게 유익한 지식을 채워주기 위해서였다. 살레시안들은 수많은 고아들과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합숙소와 고아원을 열었고, 파타고니아 원주민들에게는 복음과 문명의 빛을 가져다
주었으며 말만의 인간애가 아닌 실제적인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7. 그리스도교적 덕목인 자애, 절제, 순명, 정결, 품위를 실천하라.
신심과 근면이 근본이다 고는 하나 돈 본스꼬의 윤리교육이 그런 “덕목”만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돈보스코의 교육학이 종종 고행을 권고하기도 했지만 오랜 전통이 물려준 선량한 그리스도인 겸 정직한 시민의 전형적 특징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애가 가장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 입으로만 자애를 가르쳤던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활동을 통해 자애심을 길러주었다. 오라또리오와 기숙학교에서 상급생들은 어린 학생들을 도와주고 새로 온 아이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돈보스코는 자습실 과 식당의 실장과 부실장 제도도 활용했다. 1854년 약30명가량의 소년들이 지역사회에서 콜레라 환자들을 돌보았다. 전기문들은 돈보스코의 구원의 교육학의 중요한 부분인 사랑과 사도직(가장 영성적으로 드러난 이웃사랑) 의 산 교육학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부름받은”
(성소) 사람들이었기에 그것은 선교의 신기원이 시작된 1875년부터 사도 적이며 선교적인 교육학 이었다. 그것을 여러 분야에서 아주 유용하게 교육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전기문에 나타난 교육에서 알 수 있듯이 소년들에게 적극 권장된 절제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권고된 절제는 특별한 것들이 아니라 생활자체가 요구하는 것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업에 충실하며,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추위와 더위, 바람, 배고픔, 갈증과 같은 생활의 불편을 참아내는 것이었다. 순명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것은 ”젊은이에게 있어서 으뜸가는 덕목이다.”
끝으로 사랑을 꼽을 수 있다. 사랑은 “모든 덕목들 가운데 여왕이며, 다른 덕목들을 유지
시켜주는 것이다.” 사랑의 교육학은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들과 주위환경의 정화를 요구 한다 : 교육자들의 모범, 주의 깊고 본질적인 아씨스텐트 (이런 측면에서 제적을 고려한다) , 전통적인 절제권고 (절제와 극기, 게으름과 욕, 나쁜 친구, 이성교제, 나쁜 생각을 피하라), 활기차고 열성적인 삶의 이상들을 상기시킴 ; 은총에 대한 신뢰, 성사생활과 기도, “겸손”. 보다시피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모두가 전통적 윤리의 노선을 따른 것이었다. 성교육 문제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다.
다소 단순한 이런 틀 속에 돈보스코는 전통적인 가톨릭 교육의 전형적 측면을 구현시켰다 : 에라스무스로부터 Jean Baptiste de la Salle에 이르기까지 품위 즉 “예절”은 건전한 도덕교육의 불가결한 조건으로 여겨져 왔다. 이것은 청결과 질서를 조장하고 거치름을 피하는 것과 관계된다. Regolamento의 8개장은 품행 즉 여러 곳들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보여 질 행동을 다룬다.
“그는 수많은 덕행들이 방정한 품행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제11장: “예방교육은 이성, 종교,
친절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제11장
예방교육은
이성, 종교, 친절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성, 종교, 사랑(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친절한 사랑애덕, 온유)은 모든 시대 수많은 교육자들에게도 공통된 돈보스코의 사목적 영적 교육적 메시지의 내용을 가장 잘 규정한다. 확실히 이것들은 돈보스코의 특징적인 정신과 영성의 특색이었다. 그러나 이 세 단어들은 본래 교육방법론에서 두드러진 의미를 띠며, 어떤 측면에서 더 특징적이다. 예방교육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종합하여 소년의 전인적 발전(윤리적, 지적, 도덕적, 공인적, 종교적)을 도모하는 독창적 노력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년으로 하여금 자신을 교육적으로 계발하는 데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하는 유기적인 관여와 방법과 수단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진지한 도덕적 종교적 활동 (의무, “신심”, 은총 속에서의 삶, 죄를 피함) 이 온당하고도 활기 넘치는 관계들과 과정을 통해 제안하고 도모된다. 한편, 온유와 친절한 사랑은 유약함이나 감상, 애매모호한 느낌이 결코 아니다. 이성과 종교가 그것들을 늘 정화시키고 빛을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대인관계는 활성자로서 함께 있어주는 교육자의 종교적 경건성과 공감적 참여에 의해 자극되고 완성된다.
그러므로 이 세 요소들은 교육목표로서든 양성과정으로서든 늘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어, 예방교육에 든든한 벙법론적 통일성을 부여한다. 이런 관점에서 과연 어떤 요소가 중심적인 요소인가를 확인하자면, 의심할 바 없이 내용면에서 종교가 으뜸을 차지하기에 친절한 사랑(amorevlenzza)최고 원칙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연유로 사랑의 예방교육이 학생에게 온유와 인내와 친절한 사랑 (친절, 온유, 이해, 인내, 우정, 즉각적인 준비자세) 으로 보여 지고 “느껴지는 ” 그리스도교적이며 인간적인 사랑의 독특한 색조로 돈보스코 안에서 특색을 갖추게 되었다.
1. 사랑의 방법론적 종합
예방교육의 실천- 돈보스코는 고전이 되다시피한 1877년판 소책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은 성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토대로 한 것이다 ;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모든 것을 믿고 , 모든 것을 바라고 ,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Charitas patiens est(…) Omnia sperat , omnia sustinet' (1rhflsxh 13,4-7) . 이성과 종교는 교육자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행동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늘 사용하고 가르치고 활용해야할 도구들이다. 이것은 돈보스코가 예순 살에 달하여 “이들을 에 친구로 만들려면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을 발휘하여라” 고 한 아홉 살 때의 꿈속의 경고의 반향이었다. 예방교육에 관한 그의 소책자는 이 주제의 변주곡이었다. 그는 원장들과 아시스텐트들에게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말하고, 무슨 일에서나 본을 보이고, 조언과 사랑의 교정을 아끼지 말라...” 고 얘기했다. 또한 그는 “예방교육은 전적으로 이성과 종교와 친절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 는 것을 자주 강조했다. 심지어 벌을 줄 때에도 생도들이 “언제나 우정어린 예방적 조언에 설득되어 마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즉 예방교육은 생도를 친구로 삼으며 교육자가 훈육 중에나 또는 후에라도 마음이 담긴 말로 학생에게 미리 경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고
강조했다. “피교육자의 마음을 얻은 교육자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그런 다음 “매일 저녁 기도 후나 생도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원장이나 그를 대신한 누군가가 사랑이 담긴 몇 마디 말을 모두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 그러면 예상한 결과를 얻게 된다.
“생도는 언제나 교육자를 존경하게 될 것이며, 기꺼이 지도를 받아들이고 교사들과 웃어른들을 아버지와 형님으로 여길 것이다.”
친절한 사랑은 실제로는 단순하고도 필요한 경험이지만 그것을 분석하는 것은 꽤 까다롭고 복잡하다.
우선 , 그것의 기반은 애덕 즉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깊은 사랑이다. 돈보스코에게 있어서 그것은 선물 즉 은총이다. 그의 믿음과 사제적 양심에서 표출된 것이다. 그는 토리노-발도꼬의 견습생들에게 보낸 1874년 7월 20일자 편지에서 그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견습생들은 내 눈동자와도 같기에 (...), 내가 편지로 위로한다면 여러분이 기뻐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분명한 증거를 보여왔으니까요. 여러분은 늘 그것을 보여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어디에 기반을 두어야 할까요? 지갑에요? 아닙니다. 제 지갑을 우리 사랑의 토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버렸으니까요; 여러분의 지갑을 기반으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제 사랑은 여러분의 영혼을 ,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영혼을 구하려는 저의 소망을 그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영생에로 인도하고자 하므로 우리 영혼의 선익이 우리 사랑의 기초입니다. ”
하지만 이밖에도 , 친절한 사랑은 풍부한 지성, 이해력, 감수성, 드맑은 감성과 같은 인간적 속성에 의해 보강된다. 돈보스코는 “열정에 따르지 말고 언제나 이성을 따르라” 고 신중히 제안했다. 교육자들은 “Manescdhi" (구타) 해서는 안 되면 (돈보스코는 피엠노떼말 Manecesse=큰손과 같은 뜻의 말로 농담을 하곤 했다 ), 감상에 젖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교육자들은 쓸데없이 지나치게 번잡한 조직을 피하고 소년들에게 권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본질적이고 실질적인 것만을 요구해야 한다.
교육자는 무엇보다도 마음에 , 교육적 위기요 “징표” 이며 진실로 교육적 중명서인 사랑에 호소해야 한다. “두려운 사람이 되지 말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라. ” “Si vis amariesto amabilis. " "젊은이들을 데리고 성공하라. 정성을 다해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어라: 두려운 사람이 되기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라. ” 가장 뚜렷하고 간결한 표어는 1884년의 유명한 편지에 나타난 표어다: "소년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하라…“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 그들의 유치한 기호를 즐김으로써 , 본질적으로 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즉 훈련, 학업, 극기와 같은 일에서 사랑을 보도록 하라 ; 그들로 하여금 영성과 사랑을 가지고 이런 일들을 익히도록 하라…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 사랑받는 사람은 특히 젊은이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된다. ”
2. “함께 하는” 교육
행동의
차원에서 이런 근본적인 생각은 교육자의 실존을
포함하는 직접적인 성과를 얻는다.
돈보스코가
직접 살았고 또한 “체계적” 으로 따르게 하고 싶어
했던 경험을 언급하는 것이 보다 의미 있겠지만,
이런
생각을 말해주는 몇 가지 구절들이 있다.
1877년판
소책자에 나오는 “ 예방교육” 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그것은
기관의 규약과 규칙을 알려주고 다정한 아버지로서
말하고 어떤 상활에서든 이끌어주며 충고하고 사랑으로
잘못을 고쳐주는 원장이나 아씨스텐트가 늘 생도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도들로 하여금 도무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 생도가
교육을 받는 동안 내내 교육자가 함께 하는 것이
아씨스텐트의 원칙이다 ;
경찰관처럼
감시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다정하고 힘을 북돋아
주며 용기를 주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임장교육은
오라또리오에서 ,
기숙하교에서,
학교에서
,
단체에서
,
일터에서
아주 다양하게 실시된다.
“특히
오락시간에 소년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것.
이러한
친밀함이 없으면 애정을 보여줄 수 없고,
애정을
보여주지 못하면 신뢰가 싹트지 않는다(…).
웃어른
(교육자)
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
생도들의
불평이나 의구심에 언제나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하며
,
다정한
아버지로서 그들의 행동을 늘 지켜보고 ,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이들의 영적 현세적 선익을 도모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
예방개념이
방어와 예상과 보호 ,
그리고
(가능하다면)
분리의
측면을 내포하듯이 돈보스코의 예방교육 개념과 그
실천에 있어서 아씨스텐트는 확실히 주시 (注視)
의
면을 내포한다.
이것은
특히 기숙학교에서 그러했다.
일세기가
경과했건만 그곳에서는 아직도 Regolamento를
읽고 있으며 불량하다가 보다는 “변덕스럽고”
발랄한 소년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미리 주의를 준다.
그러나 임장지도의 적극적 의미는 매우 널리 통용되었었다. 건설적인 일에 참여하여 관여하고 흥미를 불러일으켰을 때 , 그것은 더더욱 진실로 “예방적” 이다. 기숙학교장에 대한 충고를 살펴보자: “가능한 한 한 모든 시간을 생도들과 함께 보냄으로써 그대는 생도들은, 생도들은 그대로 일도록 하시오. ” 이런 의미에서 예방적 아씨스텐트의 교육적 개념을 가장 명백하고도 훌륭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실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늘 소년들과 함께 했던 돈보스코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하건대 바로 이런 점에서 예방교육은 그 교육자의 인격에 달려있었다 ; 균형, 재치, 아버지 같고 형 같은 풍모, 활기, 친구관계를 맺는 능력 등등은 올바르고도 적절하게 행동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특히 교육 공동체 (학교, 오라또리오, 주간학교, 기숙학교 등) 의 우두머리, 교육자들과 소년들의 아버지이자 형인 원장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또 이론적으로 (기숙생들과 주간학생들의 Regolamenti에 조문화 되어있는) 원장은 돈보스코의 실천적 교육의 중추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교육 분위기에 신경을 써야했고 또 교육자들과 생도들 모두를 포함하는 전체 가족이 그 분위기를 좌우했다면, 원장은 이러한 집단활동에 형태와 일치와 조직적 방향, 특히 무엇보다도 정신을 부여하도록 불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원장은 환경교육을 한사람 한사람 각각의 인성교육으로 변화시켰다. 원장은 모든 일을 종결지어야 했지만 행정적이며 지시적인 일보다도 주로 교육적인 (거의 전적으로) 일에 전념했다. 바로 이것이 부성애와 가족애의 개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교육의 특징이었지만 종교, 이성, 친절한 사랑이라는 세 가지 단어에 의행 더욱 장려된 또 다른 애정적 조직적 요소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다정한 부성애는 최고 책임자의 현존양태를 뚜렷이 드러내주는 특징이었다. 그런 부성애가 온종일 곳곳에서 발산될 때 , 집단에게서나 개인에게서나 부성애는 “귓속말” 은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꺼려서라기보다는 형식에 매이지 않는 분명하고도 다정한 현존의 한 표현이었다 ; 군중을 벗어나 우연히 부딪혔을 때 나누는 개인적인 대화는 교육적 관계를 개별화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원장 혼자만 교육자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혼자서는 교육자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는 것이 아니라 일들이 잘 진행되어가게 하고 협력하는 것이 “원장의 본질” 이었기에, 그의 활동은 “집” 의 책임자 모두가 맡은 활동의 맥락 속에서 이뤄졌다. “어떤 임무를 맡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년들을 도울 이들은 그 집 소년에게 충고와 상담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특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짓을 방지해야 할 때면 언제나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 ” 이것은 원장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웃어른들 (우리가 지금 교육자들이라 칭하는) 모두에게 관계된 일이었다; “아버지요 형이며 친구들인” “장상 (웃어른) ” 이란 용어는 다 특별히 사용되었으며, 특별한 직책을 가진 이들 (부원장, 경리, 성무감 혹은 영적 지도자, 교무, 견습공 담당) 과 교사들 및 아씨스텐드들을 뜻했다. 통상적으로 “우리”라는 용어는 “나‘라는 용어를 대신한 것이었다; ”우리는 무서운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 여러분이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원한다. “ 교육기관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어른들의 연대성은 특히 기숙학교에서 잘 드러났으나 다양한 기관에서 유사한 형태로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모두가 너나없이 교육적으로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 지켜보고” 깨우쳐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도록 요청받았을 뿐만 아이라 “소년들에게 충분한 영향력”을 요청받았다.
제12장
교육 “가족”
제12장
교육 “가족”
목표, 방법, 인물을 역동적으로 종합하면 환경 교육학이 된다. 더 정확히 말해서, 각 기관에 따라 독특한 색조를 지닌, 본질적으로 가족정신과 가족적 구조를 지닌 교육학이 된다. 평화롭고 모범적인 환경, 즉 가족적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추구하지 않으면 친절한 사랑(이성과 종교를 방법론적으로 혼합한)이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생도와 “웃어른” 간의 애정어린 신뢰, 소년들 간의 우정, 모든 이들 간의 긴밀한 유대감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가족적 형태 앞에서 다양하게, 그러면서도 조직적으로 구현되는 경향이 있다. 예방개념(소극적 ․ 적극적)과 밀접히 관련되는 이러한 이중적 이상에 돈보스코가 이끌리게 된 것은 심리적 이유 (그 자신의 가족적 경험), 역사적-전통적 종교적 이유 (모두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대가족을 이룬다는 개념), 사회학적 이유(무수한 소년들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위태롭고 일탈된 사회의 희생자요 고아로 등장하게 되는 도시의 모습) 때문이었다.
1. 가족적으로
돈보스코는 1864년 1월 어느 날 밤의 저녁 말씀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이론적으로 간략히 얘기해 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 저녁말씀에서 그는 벌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소년들에게 벌들의 두 가지 점을 본받으라고 권했다: 벌들은 여왕벌에게 복종하며, 연대감을 지녔다.
“모두가 하나가 되면 즐거움과 신심과 공부의 꿈을 쉽게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이 오라또리오에게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이다. 함께 있으면 오락시간이 더 즐겁고, 마음속에 파고들려고 하는 우울증이라는 맹랑한 마귀를 즉각 쫓아버릴 수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있으면 공부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발전을 지켜보는 것도 자극제가 된다; 각자가 아는 것과 생각을 서로 나누라. 그리하여 서로 배우라.
많은 사람이 함께 좋은 일을 하년 생각지도 못했던 힘이 솟아난다.”
이것은, 1847년의 그 초라한 합숙소가 오래 전에 이미 이제는 800명을 수용하는 대단위 종합지구가 된 1883년에 Pelerin지 기자가 묘사한 발도꼬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 조직이 움직이는 것을 보아왔다. 토리노에는 방침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기숙학교 학생들이 있다. 그들은 가정에서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한명의 교사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각 집단들은 소리를 내거나 초조하게 굴거나 특별난 짓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년들의 침착한 얼굴에 반해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 이곳을 보살피고 있구나!”
토리노-발도코 합숙소의 맨 초창기만을 묘사해야 했던 이 최초의 전기작가는 너무나 칭찬 일변도로 그곳을 묘사했다. 그러나 그 작가는 이미 온건하고 점진적인 조직화를 넌지시 암시했다:
“잊지 못할 그 시절, 소년들은 가정에서처럼 아주 자유로 왔다. 그러나 점차 필요에 의해서 혹은 질서가 문란해지자 돈보스코는 시의적절한 규칙으로 조금씩 자유를 제한했다. 이리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현재의 살레시안 집안들의 규칙으로 자리 잡게 된 규정들이 한씩 하나씩 마련되었다.
돈보스코가 기숙생들에 바른 품행을 지니라고 권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문헌들도 있다. 1865년 3월 19일자 저녁말씀을 살펴보자:
“언젠가부터 특히 식당에서 아씨스텐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침묵을 지키려하지 않고 소란스러워졌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질서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모님을 위해 조그만 희생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즉 1865년 3월 19일 규칙대로 식당에서 정숙해주십시오.”
이튿날 그는 비록 소수(“약50명”) 이기는 하나 소란스러움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면 얘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저는 내일부터 여러분이 질서 있게 식당에 들어오도록 하렵니다. 돈 사비오께서 여러분을 현관에 정렬시킨 뒤 몇 명씩 짝지워 들여보낼 것입니다. 식사가 끝나면 식탁별로 함께 나감으로써 소란을 피하도록 할 것입니다 (…). 돈보스코는 너그럽고 모든 것을 참아주지만, 질서문제에서 만큼은 철저합니다.”
1875년 7월 9일 저녁말씀: “지금껏 천번도 더 강조했던 규칙이 어디서나 정확히 지켜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만 아직 완전히 준수되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더 지켜보다 또 경고할 것입니다-그럼 그 경고는 천한번째 경고가 되겠지요. 그래야만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성당에서 자습실로, 자습실에서 성당으로 이동할 때 제발 조용히 해주십시오. 저녁기도 후에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다음날 미사 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켜주십시오.”
2. 가족조직
그러나 가족적 양식은 방법론적인 조직이 된다. 즉 명확한 관계들이 이루어진다. 그들 모두가 진짜 가정의 아버지(pater-familias)인 원장의 권위 안에서 제도적으로 하나가 되며, 원장은 교육자들의 무조건적 협력과 “충고”는 물론 무수한 “자녀들”의 신뢰에 의지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다정하며, 아버지같고, 때로는 가족주의적인-에서 볼 때 “감사축일”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띤다. 돈보스코가 직접 말하길 그것은 소년들의 마음속에 교육적이며 지당한 보은심과 정중함을 고양시킴은 물론 “웃어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불붙여주며, “가족애”를 심화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돈보스코는 획일적인 가정 내지 수직적 관계에만 기초한 가정을 원치 않았다. 우선, 그것은 원정신 다시 말해서 원형이라할 발도꼬 집에 늘 충실했지만 다양한 측면을 띠었다. 발도꼬 집은 모든 부분에서 완벽했다; 학생 기숙사와 견습생 기숙사; 국민학교 주간반; 축일 오라또리오; 실습중인 젊은 살레시안들을 위한 준신학교와 수련소. 개방적인 단체(오라또리오, 주간학교, 청소년센타)와 두 기숙사(견습공, 학생) 및 신학교와 같은 더 엄격한 공동체의 운영 간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또한 각 단체들은 그 자체가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우선 학급(저학년, 고학년), 각 작업장 소속 견습공; 합창단원(성가, 가요), 연극반원, 합주단원; 체조 및 운동반; “신심회원” (알로시오회, 무염시태회, 성체회, 성 요셉회); Piccolo Clero와 상조회와 노동단체. 이 모든 것과 더불어 종교적-도덕적 관심사나 또는 보다 특수한 교양적 오락적 목적을 지닌 하위단체들이 있었다; 우리는 또한 돈보스코가 그의 삶 속에서 또 그가 쓴 전기들 속에서 강조했던 영적 사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살레시오 집-가정에서는 특히 신심단체들이 중시되었다. 신심단체들은 살레시오 집에 연대감과 참여의 성격을 부여했다. 이상적으로 이 신심회들은 돈보스코가 Memorie de-11'Oratorio에서 직접 밝혔듯이 그가 1832년에 끼에리 학창시절에 창립했던 명랑회로부터 비롯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모임들에 명칭을 붙여 Societa dell'Allegria(명랑회)라 불렀다. 이 명칭은 그 모임에 썩 잘 어울렸다. 회원 각자가 대화와 놀이에서 기분을 북돋아 주는 것이 그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에 배치되는 것은 전부 금지되었다; 우울한 기분을 자아내는 것, 특히 주님의 법을 거스르는 것은 모두 배제되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거나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거나 추잡한 얘기를 하는 사람은 즉시 퇴회시켰다. 내가 친구들간에서 중심이 되었기에 모두가 여기에 동의했다: 1) 명랑회원이면 누구나 선량한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피한다. 2) 학업과 종교적 의무들을 정확히 완수해야 한다.
명랑회의 운영방식과 프로그램은 신심단체들과 아주 흡사하다.
“주중에 명랑회원들은 어느 회원 집에 함께 모여 종교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Gariglian과 Braja가 가장 시간을 잘 지켰다. 우리는 흥겨운 오락과 영적 독서, 기도를 즐기는 동안 서로 좋은 충고를 들려주고 누군가 얘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개인적인 약점을 지적해준다.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우리는 취상의 조언을 따르고 있었다: 조언해주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 우정이 넘치는 이런 즐거움에 더하여 우리는 강론을 들으러 가기도 하고 고백성사를 보고 성체를 받아보시기도 했다.” 전적으로 독창적이었건 아니면 부분적으로 그러했건, 끼에리 학창시절의 “모임”에서 영감을 얻었건 얻지 않았건, Societa dell'Allegria(명랑회)가 원형이었건 아니었건, “신심회”는 돈보스코의 교육조직에서 본질적인 것이었으며 돈보스코의 경험과 더불어 성장했다. 그것은 생도와 교사들 간의 교육적 협력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는 훌륭한 도구였으며, 그것을 말하지 않고 가족적 교육을 논한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다. 사실 신심단체들이 생겨난 것은 다소 우연한 일이었지만, 예방교육과 청소년 심리 특히 자치활동과 단체생활의 욕구를 채워 주었던 만큼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했기에 명성을 누리기를 원햇으며, 자신의 모든 기관들에 신심단체들을 도입하고자 했다. 1873년 11월 15일자 서한에서 그는 “우리집들의 도덕적 기획과 정신”은 신심회에 달려있다고 상기시켰다. 1876년 1월 12일자 서한에서는 신심단체들을 일러 “신심의 열쇠, 도덕성의 보호자, 성직 및 수도성소의 자양분”이라 불렀다.
조직적 요소들은 간단하다; 자유와 자발적 참여; 이미 Ricordi confidenziali에서 권장했고 1875년의 저녁말씀 때 재 강조했던 성무간의 감독 (“지도”라기 보다)을 받기는 하나, 생도들에 의한 자율적 운영.
Picordi Clero, 성 알로시오회, 성체회, 원죄없으신 마리아회를 권장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도자가 아니라 촉진자가 머물러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소년들의 활동으로 여겨야 하며, 성무감 내지 영적 지도자에게는 그에 대한 지도만을 맡긴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모임은 돈보스코에게 있어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 사랑의 교육이었으며 초창기 발도꼬나 토리노 오라또리오를 비롯한 곳들에서 아주 일찍부터 그것을 도입했다. 사실 돈보스코는 로마 오라또리오들에서도 애덕 교육 “연합회” (빠리 모임과 연합한 성 빈첸시오 청소년부)의 주창자였다. 이리하여 Marquis Patrizi는 그를 일러 “우리의 사랑하올 창립자”라 할 정도였다).
돈보스코는 벨르가모 소년단체들에도 이외 유사한 모임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구체적인 크리스챤 연대의식을 지녔던 돈보스코는 성 알로시오회의 나이든 견습공들 사이에 상조회를 창립했다. 1850년에 그 규칙서가 인쇄되었다. 그 규칙서에서 노동청년들은 물질적인 유익 외에 크리스챤 단결에로 나아갈 신자적 방향을 발견했다. “병들었거나 어쩔 수 없이 일을 못하거나 곤란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돕는 것”이 이회의 목적이었다.
제13장 기쁨과 축제의 교육학
제13장
기쁨과 축제의 교육학
예리한 철학자 프란체스꼬 오레스타노는 훌륭한 통찰로 이렇게 단언했다: “성 프란치스꼬께서 본성과 가난을 성화시키셨다고 한다면 성 요한 보스코는 일과 기쁨을 성화시키셨다 (…). 돈보스코가 현대의 놀이와 운동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된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1. 기쁨
행복은 학업(또는 노동)과 신심(종교)에서 떨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적인 “예방교육”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것은 가족의 본질적 특징이며 친절한 사랑의 한 모습이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함으로써 얻는 평화와 은총의 생활에서 비롯된 이성과 내적인 자발적 엄격함을 토대로 한 제도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돈보스코에게 있어서 기쁨은 방법론적 방안이기 이전에, 교육에서 “중대한”것을 얻어 내는 “수단”이기 이전에 삶의 한 형태였으며, 그는 이것을 청소년에 대한 직감적인 교육적 평가에서, 가족정신에서 이끌어 냈다. 일반적으로 가정교육이 엄격하던 시절에 돈보스코는 소년을 소년으로 이해했으며 소년이 소년답기를 허용하고 원하였다. 소년의 가장 깊은 욕구는 기쁨, 자유, 오락, 명랑회(Societa dell'Allegria)임을 알았다. 한편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지속적인 행복의 원천이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쁜 소식(복음)”익 때문이며 사랑과 구원과 은총의 종교에서 낙천성이 흘러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소년과 그리스도교 생활 간에는 특별한 유사성이, 상호 호소력이 있다.
이 두 가지 것은 상호침투하며 서로를 불러일으킨다. 돈보스코가 처음부터 기쁨을 삶의 기본욕구로, 쾌활함과 활발한 발전의 시기인 청소년기의 법칙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미카엘 마고네에 대한 아름다운 글에서 마고네의 “발랄한 기질”과 “오락시간이 끝났을 때의 풀죽은 모습”에 대해 참으로 즐겁게 얘기 했으며, 의무에서 놓여나 오락에 뛰어들었을 때는 마치 “총알처럼 튀어나갔다”고 말했다. 돈보스코는 마고네에게서 대다수 소년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성 빌립보네리의 표어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뛰고 달리고 뭐든지 해라.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다면 죄는 짓지 말라.”
청소년 심리에 대한 이런 이해 덕에 돈보스코는 1848년의 군대에 대한 열기를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으며, “종교와 도덕성과는 도무지 맞지 않게 돌아가는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여” 소년들이 오라또리오와 운동장에서 전쟁놀이를 하도록 주저 없이 허락했다; 심지어는 (막대기 대신) 목총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돈보스코를 아는 사람들은 Bersagliere 이전의 Giuseppe Brosio의 유명한 일들을 기억한다. 놀이, 농담, 진지하고도 교육적으로 건설적인 유쾌한 대화가 오락시간을 가득 메웠다. “오락시간에 그는 어떤 아이가 친구들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그냥 넘기지 않았으며, 벤취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듯이 행복은 대체될 수 없는 교육적 요소이다. 이것은 자주 인용한 바 있는 1884년 서한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소년들이 신뢰심을 가지고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년들이 좋아하는 일에 참여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일 안에서 사랑받음으로써 그들이 본성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안에서 사랑을 보는 법을 배우도록” 할 필요가 있다. 교육이 실로 개탄스럽게 된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소년들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소년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제들과 성직자들이 매우 적으며 소년들의 놀이에 참여하는 이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든 것을 보아왔다.” 전인교육 방법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웃어른들이 오락시간에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돈보스코의 교육실천과 이론에서는 심지어 유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의 태도까지도 깊은 종교적 의미를 띤다. 도미니꼬 사비오와 가비오 까밀로와의 만남에서 알 수 있듯이 생도들은 그것을 알았다: “간단하게 일러주겠는데, 여기서는 아주 즐겁게 지내는 것이 성덕을 쌓는 것임을 알아야 해 (…). 오늘부터 기념으로 이렇게 써봐; Servite Domino in laetitia, 거룩한 즐거움 속에서 주님을 섬기자.” 이것은 돈보스코가 쓴 전기의 대상이 되었거나 그와 함께 살았던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에서 분명하고도 활발하게 드러나는 측면이다. “돈보스코는-까발리아의 글이다-교육과 완덕생활 속에서의 즐거움의 역할을 볼 줄 알았으며, 쾌활함과 명랑함이 주변사람들을 지배하기를 바랐다. Servite Domino in laetitia는 돈보스코 집의 마지막 권장사항이라 할 수 있었다.”
선종연습, 종교예식, 기도, 특별한 음식, 놀이, 그림그리기, 단막극, 음이 어우러진 사육제 마지막 날 (처음에는 마지막 3일간이었다)에는, 소년들이 누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기쁨 속에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 은총과 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이 특징적으로 드러났다.
운동장에서 누리는 기쁨은 교육자들에게는 최상의 교육적 진단도구였으며, 소년들에게는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이었다. “고백성사 다음으로-카빌리아의 기록이다-돈보스코의 예방교육에 있어서 이보다 더 적극적이며 생명력을 지닌 핵심요소를 지적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년의 흥겹고 스스럼없는 자발성에서 영혼에 대한 이해의 원천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소년들의 그러한 자발성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 없이 또 너무 빤히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한명씩 소년들을 만나 그들 각자에게 맞는 말을 솔직히 들려줄 수 있는 기회와 수단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보스코는 만사를 제쳐두고 가능한 한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지내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 한-카빌리아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우리는 교육자 겸 아버지로서의 그의 입장에서 이런 요소가 지닌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돈보스코에 따르면, 오라또리오를 원활히 운영할 수 있었던 일곱 가지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이것 이었다: “즐거움, 노래, 음악, 자유로운 오락.”
2. 축일
기쁨에 흠뻑 젖을 수 있는 때는 축일 때였다. 축일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 중요성은 각기 달랐다: 성탄 8부, 예수 공현, 성주간, 부활절, 예수승천일, 성신강림, 성체축일을 비롯한 대축일과 연중 일요일. 돈보스코가 특히 중시했던 마리아 축일로는 성모 마리아 탄신축일, 원죄없으신 마리아 축일 (오라또리오 사업이 시작된 것을 상기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축일이었다), 도움이신 마리아 축일 (5월 24일; 특별히 성스런 행사가 베풀어지는 대중적인 축일)이 있다. 특별한 마을을 기울였던 성인 기념일로는 성요셉, 성 알로시오 공사가, 세례자 성 요한(돈보스코를 중심으로 재학생과 졸업생의 큰 모임이 있었다), 성 베드로 (와 교황축일); 모든 성인의 날, 각 기관의 주보성인 기념일이었다. 이 축일들 가운데 많은 축일들의 전에 3일기도와 9일기도를 바쳤다. 5월 성모성월, 3월 성 요셉 성월(견습공들 거의 모두의 관심이 쏠림), 10월 로사리오 성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한 달 내내 적극 참여했다.
반성과 기쁨의 시기로는 월피정(선종연습), 연피정(영적 수련), 학기 초 3일기도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포도, 밤, 상을 주는 소풍과 축제가 뒤따랐다. 교육기관이 지겨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연사초정을 비롯한 행사들도 자주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이중의 측면을 띠었다; 종교적 인간적 돈보스코는 이것들의 교육적 가치를 드높이기를 원했다. 일요일 회합이 가능한 한 “새롭고” 즐거우며 교훈적인 색조를 띠도록 하기 위해 오라또리오에서 그 회합들을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축일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었다. “그는 성스런 의식으로 그 축일들을 가능한 한 성대하게 지내도록 했다.” “그는 축일이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소년들에게는 특히 성사를 통해 많은 유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축일을 사랑했다.”
E.체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다소 좋지 못한 것들에 대하 생각을 소년들에게서 몰아내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 다양한 성찬을 제공하려고 애쓰는 것이 그 거룩한 교육자가 끊임없이 골몰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런 목적으로 연극을 지휘했고 성당 안팎에서 축제를 벌였다. 그는 화려함과 기쁨으로 축제를 지내기 위해 늘 신경을 썼을 뿐만 아니라 한 축제에서 받은 감동이 채 사라지기 전에 다음 축제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려 놓곤 했다.”
3. 연극
연극이 처음 상연된 것은 1847년 6월 29일 발도꼬 오라또리오 개관식을 맞이하여 루이지 프랑소니 대주교께서 방문해주신 때였다. 일단의 소년들이 “낭독과 2인극과 test-rino”를 준비했다. 대주교가 도착하자 돈보스코께서 “적절한 환영사”를 낭독했다. 견진성사와 미사 후, 대주교께 “다양한 시와 산문”을 바쳤고, 이어 돈보스코의 동역자의 돈 카르파노가 쓴 대화체 코메디가 상연되었다. 그 제목은 꼬마 하사 나폴레옹이었다. 2년 후 재기와 독창성을 지닌 카를로 토마티스 (1849년부터 1861년까지 합숙소에 있었다)가 토요일 저녁 돈보스코가 고백성사를 집전하는 동안 동료기숙생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는 또 다른 유형의 극장 활동을 담은 1847-1852년의 자료를 갖고 있다: 교훈적인 대화극과 쇼 (구세사, 십진법…)가 야간학교 및 주일학교와 관련하여, 또 F.아포르티와 C. Boncompagni와 같은 특별한 손님들 앞에서 종종 상연되었다.
1851년부터 발도꼬 기숙학교에는 무대를 쉽게 해체할 수 있는 커다란 홀이 있었다. 진정한 연극 전통이 생겨났고, 여러 가지를 뻗게 되었다; 이태리어와 사투리가 사용된 코메디와 민중극, 시 유지들 앞에서 상연된 예를 들어 예수회 P.Palumbo신부의 Minerval과 같은 라틴 코메디, 사극과 성극, 서정시와 소설에서 발췌하여 엮은 명시낭독과 같은 여러 유형의 뮤지컬, 오페레타, 멜로드라마.
당시 연극은 돈보스코의 교육 제도 안에서 여러 가지 표현양식에 힘입어 점차 자리를 잡았다. 그것들은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교육적이며 교훈적인 기능도 발휘했다. 돈보스코는 1871년 1월의 열띤 연설에서 연극의 목적을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이 더 이상 당위의 차원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teatrino가 아니라 진짜 연극입니다. teatrino는 이런 목적을 가졌다고 봅니다; 즐거움과 교훈을 준다. 고로 우리는 소년들의 마음을 경직시키거나 소년들의 미묘한 감성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장면들은 보지 말아양 합니다.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코메디를 보여주되, 가단하고 도덕적 목적을 지닌 것이라야 합니다. 노래를 부르십시오. 노래는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더욱 더 추진시켜야 할 교육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행복과 즐거움은 보다 높은 목표에 이르는 수단이기도 하다; 가르침과 교육.
1871년의 소극장 규칙서는 그 첫 조항에서 이 삼중의 목표를 밝히고 있다. “teatrino의 목적은 소년들에게 도덕적으로 최대한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제6조에 의해 확인된다: “즐겁게 기분을 풀어주되 언제나 교훈적이며 도덕적이고 짧게 하도록 유의하라.”
돈보스코의 동역자들 가운데 가장 신뢰받던 사람 중 한 사람은 소년들의 연극 활동의 교육적 가치에 관한 공통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 잘 선택하기만 한다면 , 연극은 성덕의 학교다.
2. 연극은 지성과 교양과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실제적인 신중성을 길러준다.
3. 배우의 정신적 발전에 기여하며 그들을 각성시킨다.
4. 인간과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5. 여러날 전이나 며칠 후에 볼 연극에 관해 생각하는 소년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6. 소년으로 하여금 그들의 교사들과 집에 애착을 갖게 한다.
7. 소년들의 생각과 대화를 한데로 모아주어 나쁜 생각이나 대화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한다.
8. 오라또리오의 즐거운 분위기와 teatrini에 관한 소문을 들은 많은 소년들을 휴일에 기숙학교로 끌어들인다.
4. 음악과 노래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에 있어서 성악과 기악은 진지하고도 조화로운 분위기와 즐거움을 통해 그의 교육개념과 밀접히 관련된 기능을 지녔다. 이 때문에 축일 오라또리오로부터 학생 기숙사 및 견습공 기숙사 (이곳에서는 밴드부가 특히 중시되었다)에 이르기까지 돈보스코의 모든 기관에서는 이 방면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이것은 축일마다 성스런 동시에 세속적인 발랄한 축제분위기를 북돋아 주었다; 종교예식, 행렬, 소풍, 잔치, 작별인사, 상품수여. 이것은 또한 연극의 주요 요소이기도 했다.
1859년 돈보스코는 성악반 교실문에 성서귀절을 붙여 놓도록 했다: Ne impedias musicam(음악을 방해하지 마시오) 물론 이것은 편의를 위해서였다.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음악이 없는 오라또리오는 영혼이 없는 육체와도 같다.” 그는 특별한 상황에서 이 말을 했었지만, 그의 교육활동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그는 실질적으로 실천되었던 확신이 담긴 이론만을 제시했다.
그의 전기작가들은 그 이유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처음에 음악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호기심 많은 이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오락 반은 강력한 예방수단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하여 종교적 동기 특히 그레고리안 성가 및 일반성가와 관련된 동기가 추가되었다: 돈보스코는 “소년들이 고향에 갔을 때 종교예식에서 노래를 불러 본당신부를 도와주게 하려는 바램과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동기도 있었다:
“소년들은 늘 분주해야 한다.” 그러나 끝으로 우리는 E.체리아가 편년사에서 지적한 특별한 교육적 평가를 명심해야 한다: 그가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던 주된 이유는 그것이 젊은이들의 정신에 건전한 영향을 끼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음악은 젊은이들을 세련되게 하고, 고양시키며, 향상시킨다.
5. 소풍
예방교육 관한 소책자와 교육자 돈보스코의 활동에 있어서, 소풍 역시 우리로 하여금 소년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원칙, 소년들도 교육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다는 원칙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돈보스코가 계획하였고 실시하였던 소풍은 크리스챤 기쁨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소년을 전인적으로 완성시키는 과정의 일부로서 교육적으로 대단한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초창기 발도꼬 축일 오라또리오 시절부터, 소풍과 순례가 자주 실시되었으며, 다소 적은 규모였기는 하나 훗날 까지도 계속되었다. 가을 나들이는 전통이 되었다. 1847년부터 1864년까지 장기간의 대규모 소풍이 있었다. 나들이 기간이 끝나면, 성가단과 입상자들의 베끼 가을 체재가 계속되었다.
이 소풍은 악단과 연극과 종교예식과 성가로 구성된 떠들썩한 큰 행사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담겨 있었다. “백 여 명의 소년들이-첫 사가의 회상이다-몇 명 의 신학생들과 함께 지나치는 마을마다에서 흥겨운 음악과 연극, 신심을 고취시키는 교훈을 들려주었다.”
그러므로 소풍은 참으로 교육적인 기능을 가졌었다; 휴일동안 소년들을 지켜주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 순수한 즐거움이 서로 어울러 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들에게 다양한 오락을 제공했다. 소풍에 참가했던 프란시스 체루티는 이렇게 증언한다: “돈보스코는 소년들을 즐겁게 해주는 동시에 죄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소풍을 실시하셨다. 연6년 (1857-1862) 동안 이런 소풍들에 참가할 행운을 누렸던 나는 돈보스코가 소년들의 영적 세속적 유익을 위해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것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는 기도와 매일 미사를 빠뜨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느 마음에 머무르든지 오라또리오에서 만큼이나 자주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보았다…”
제14장: 요구하는 사랑, “처벌에 관하여”
제14장
요구하는 사랑 :
“처벌에 관한 말씀”
우리는 돈보스코에게서 처벌에 관한 이론(아주 약간의)과 실천(보다 명료한)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권위와 규율, 교정, 상(賞)에 관한 고찰에서와 마찬가지로 총체적인 “사랑의 교육학”의 한 부분으로 여겨져야 한다.
1. 규율과 사랑의 교육학
학년 초 (1863년)의 전형적인 저녁말씀에서 돈보스코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여러분이 저를 웃어른으로 여기기보다 친구로 여겨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의심을 품는 대신 진정한 친구로서 더욱 더 저를 신뢰해 주시기를 당부하며 기대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처벌을 싫어합니다. 실패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거나 윽박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추구하는 예방교육이 아닙니다. 설사 누군가가 실수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좋은 말로 그를 교정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를 고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 가운데 한사람을 벌해야 한다면 그것은 제게 너무도 고통스런 일일 것이기에 오히려 제게 더 가혹한 벌이 될 것입니다 (…) 제 말은 혼란을 묵인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친구들에게 수치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의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 그러나 여러분과 저 양자 모두의 불쾌감을 철저히 예방할 방법이 있습니다. 한마음이 됩시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여러분을 도와주기 위해 제가 여기 있습니다. 좋은 뜻을 품으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그렇듯 솔직하게 마음을 툭 터놓으십시오.“
한편, 이론과 실천은 각각의 교육적 배경에 따라 특이한 비중을 지니며 서로 극히 다르다. 오라또리오의 “규율”은 견습공 기숙사나 학생 기숙사의 규율과 전혀 다르다. 또 그것은 문제아를 위한 합숙소나 명문가 자제들을 위한 합숙소의 규율과도 크게 달랐고, 소신학교 기숙사 규율과도 매우 달랐다. 이런 주제들에 관한 돈보스코의 말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극히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모든 요소들은 발도꼬의 경우에서처럼 성직 및 수도생활 성소자들이 무턱 많았던 학생 기숙사에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돈보스코의 실천적 개념에 있어서, 친절한 사랑 안에서의 규율은 돈보스코의 생각에 교육에 있어서 똑같이 중요한 두 요소였던 권위와 동의 간의 이율배반을 이론적으로 극복하는 것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회헌과 규칙서를 만들어낸 지칠 줄 모르는 교육가인 그에게 있어서, 규율은 객관적 질서 즉 웃사람과 아랫사람 모두에게 관계되며 함께 사는 사람들의 단체생활을 통제하는 규칙, 전통으로 표현되는 객관적 질서에 대한 복종을 뜻했다. 이런 관점에서는 웃사람도 아랫사람도 없다. 이런 이율배반이 객관적으로 극복되었다: 모두가 질서와 진리의 요구에 복종하였다. “그러므로-돈보스코는 즉시 계속 말을 잇는다-규율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두가 모든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년들과 수도회원 모두가 이러한 규칙 준수를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보스코가 최소한의 공동생활 질서-교육 공동체가 “떠돌이 행상꾼 집단보다 더 못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를 확립하기 위해 자주 관여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즉각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저는 위협이나 벌로 어떤 것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권고를 열심히 지키는 문제는 각자의 양심에 맡깁니다.” 왜냐하면 권위와 자유 간의 모순을 효과적으로 해결해 줄 직접적인 교육적 동기는 오로지 사랑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방교육은 생도를 친구로 바꾸어 생도는 자신을 유익하게 하고 불쾌감과 처벌과 불명예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충고를 아끼지 않는 아씨스텐트를 은인으로 여긴다.”
교육적 권위는 생도에게 제시되는 윤리-종교적 원칙들의 객관적 타당성 뿐만 아니라 생도를 사랑하는 교육자의 인격 안에 이러한 원칙들이 구현됨으로써 생겨난다. 이리하여 그 교육자는 생도의 벗이요 은인이 되며, 생도는 그를 그렇게 인식한다. 졸업생 가운데 한사람인 Can. Hya-cinth Ballesio는 소년들에게 있어서 돈보스코는 첫째가는 “권위요, 그리스도교 완덕과 선의 모범이었다”라고 말하였다.
2. 교정
이런 연유로 신뢰와 마음은 교육자가 가장 어려운 교육활동 순간 즉 실패자들을 교정하는 때에 의지할 수 있는 두 지렛대들이다.
“예방교육”에는 지극히 일반적이고 공통된 교정이 꼭 필요하다. 실패를 해본 적이 없는 소년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소년이 아니요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장지도(아씨스텐스) 시에는 소년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되 그리스도인적 품행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나 말, 행동을 바로잡아주고 고쳐주도록 애쓰라.” 이렇게 하여 “교정”이 교육활동 전체에 침투할 것이며 모든 교육활동 순간에 드러난다; 짧은 귓속말, 개인적 공적 권고, 저녁말씀, 메모 등. 그러므로 교정은 일종의 친절한 사랑의 행위이기도 하며, 인내와 사랑으로써 부드럽게 충고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나무라지 않고 개인적으로 잘못을 고쳐주며, 생도에게 자신의 잘못을 이해시키고, 감정이 복받친 순간을 피해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잘못을 고쳐 주며, 그 생도가 친구가 되어 물러나도록 애쓰는 형태로 나타난다.
3. 처벌
이성과 종교와 친절한 사랑의 교육학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처벌을 논한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돈보스코는 예방교육에 관한 소책자에서 “처벌에 관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는 체계적인 논문을 쓴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간략한 설명에 앞서, “가능한 한 절대 처벌을 사용하지 말라”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미 인용한 바 있는 1963년 8월의 저녁말씀 때에 돈보스코가 말한 대로 그는 자신의 교육제도에 벌을 도입하지 않았다.
“저는 정말로 처벌을 싫어합니다.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겠다는 위협으로 훈계하기는 싫습니다. 그것은 결코 저의 교육방법이 아닙니다.” 1884년 편지에서 그는 음울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불쾌감을 자아내는 처벌로 겨우 유지되는 법률을 명하는 이들에게 더 쉽고 덜 부담스러우며 법률 집행을 소홀히 할 경우 웃사람을 무시하고 커다란 무질서를 야기시키는 제도가 정성과 사랑으로 무질서를 방지하는 교육제도를 대신하게 된 까닭이 대체 뭘까?” 그 근본 주제는 간단명료하다: “이 제도는 전적으로 이성과 종교와 친절한 사랑을 기초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폭력적인 처벌을 일체 배제하며 가벼운 처벌가지도 피하고자 한다.”
처벌이 불가피할 때에는 “다른 수단을 전부 동원한 후에만”, 또 소년이 처벌로 인해 유익함을 얻을 수 있을 때에만 실시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잘못이 의도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이해하여 가벼운 벌을 주는 것이 첫째 원칙이었다. 돈보스코는 매우 흥미로운 권고를 주지시키곤 했다: “가벼운 잘못에 대해서는 젊은이들의 부족한 판단력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소년이나 먹을 것이 있을 경우 그것을 훔치지 않는 소년들이 거의 없다.”
그리하여 심한 체벌을 가하지 말라는 권고를 자주 했다. “때리거나 무릎을 꿇리거나 귀를 잡아 댕기는 것과 같은 벌들을 절대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법률이 그런 벌을 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소년들을 매우 화나게 하고 교육자의 품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채직으로 때린다거나 따귀를 때리는 따위의 체벌을 가하지 말 것이며 “반성실”에 가둬두는 일이 없어야 한다.
돈보스코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제하고는 심리적 처벌만을 가했다. “호의를 보이지 않는 것은 경쟁심을 자극하고 용기를 주려는 것이지 결코 기를 꺾어 버리는 벌이 아니다.” “소년들에게는 벌로 사용된 것이 벌이다. 뺨을 때리는 것보다도 차가운 눈길을 보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잘했을 때 칭찬해주고 소홀히 했을 때 꾸짖는 것이 이미 큰 상이요 벌이다.”
더 나아가 벌은 합당한 동시에 우호적인 것이라야 한다. 그의 조언은 일관되고 정확하다: “벌을 줄 때에는 반드시 공개석상을 피하고 은밀하게 주어야 한다." "감정에 북받쳐 행동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한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그 일을 냉철히 검토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정하게 벌을 주라; 화를 내서는 안 된다. 화를 낼 경우 그것이 규칙이 아니고 단지 분풀이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끝으로, 벌에 있어서까지도 합당함과 친절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돈보스코는 젊은 교육가들인 아씨스텐트가 벌을 주는 것을 허락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고수되고 자주 권고된 규칙이다. 온정을 앞세워 부성애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때때로 부원장에게 벌을 주는 일을 맡기기도 했지만 체벌 문제에 있어서 책임자는 원장이었다.
4. 제적
특별한 경우, 특히 학생기숙사에서 성직생활 지망자의 경우 제적이 허용되었다. “예방교육”의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도 도저히 어쩔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제적이 불가피했다. 세 가지 잘못들에 대해서는 특히 여지가 없었다. Regolamento per le case의 결론부에 그것들이 지적되어 있다: 첫째 신성모독, 둘째 부정직(제6계명과 관련된 추문을 뜻한다), 셋째 도둑질. 의도적인 불복종과 배반도 첨가되었다.
도둑질, 규율을 어기는 것, 부도덕함을 성토했던 1865년 2월 13일자 저녁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발도꼬의 특수학생들(소신학교)에게는 더욱 엄격했다. “이 때문에 저는 한가지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런 추문을 일으키는 이들을 엄히 처벌할 것입니다. 돈보스코는 이세상에서 가장 여유자적한 사람입니다; 마음껏 떠들고 부수도 깨뜨려도 참아주지만, 영혼을 망치지는 마십시오. 그 때에는 절대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추문을 일으키는 이들을 제적시키는 것은 다른 이들을 배려해서였다. 다음은 돈보스코가 돈 레오나르도 무리알도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저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제 방으로 따로 불러 들입니다 (…) 그가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지요. 그런 다음 다른 아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부모들에게로 조용히 돌려 보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적극적이며 진지한 회심의 표시를 보여주는 이들에게는 용서를 베푼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제아무리 심각한 경우에도 원장은 그 아이가 진실로 회개하도록 설득하였으며, 그럼으로써 “불가능해 보였던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긍정적인 결과가 전혀 생기지 않으면 교육적 관계가 더 이상 불가능했으며, 영적이며 사랑이 어린 대화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럴 경우에는 소년을 그의 가족에게 돌려보냄으로써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5. 상 (賞)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기는 하나 상에 관한 문제 역시 돈보스코의 이론과 실천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전통적인 학교들에서 성장한 그는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칭찬을 주요한 결정요소로 여긴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역시도 자기 교육의 바탕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초창기 생도들 가운데 한사람은 이렇게 증언한다: “칭찬은 돈보스코의 손에 들린 강력한 선의 도구였다.”
소년들이 가장 선망하는 상은 선행과 관련된 것이라야 하며, 선행 자체에서 얻어지며 소년들을 담당한 교육가의 진심어린 사랑의 동의에 의해 강화되는 깊은 만족감과 관련된 것이라야 한다. 돈보스코는 원장들에게 당부하기를 특별히 품행이 바른 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라고 권고한다: “네게 만족한다. 부모님께 이것을 편지로 알려 드리마.”
여러 해 동안 돈보스코는 매년 통상적으로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축일(1월29일) 전에 가장 훌륭한 아이들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선출하여 선행상을 수여했다. 그는 1865년 1월 19일자 저녁말씀에서 생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직접 이것을 설명했다.
“새로 온 사람들을 위해 이집의 관습 하나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 프란치스꼬 축일에 상을 주게 되는데, 그 상은 생도들 자신이 자기 동료들에게 주는 상입니다. 학생들이 학생들에게, 견습공들이 견습공들에게 그 상을 주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기숙사에서든 학교에서든 학급에서든 자기가 아는 이들 가운데서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열심히 공부하며 가장 신심이 깊다고 생각되는 친구들 열명을 적은 다음 서명합니다. 그 다음에 그 쪽지를 선생님께 갖다 드립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제게 가져오시고요. 저는 쪽지들을 낱낱이 살피며,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성프란치스꼬 축일에 상을 받게 됩니다 (…) 신학생들 역시 그런 쪽지를 냅니다. 장상 사제들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제 쪽지를 작성하며, 그 쪽지는 다른 쪽지와 동일하게 한 쪽지의 가치만을 지닙니다.”
학교에서는 학년말(8월 중순이나 하순)에 적당한 날을 잡아 시상식을 가졌다; 견습공이나 오라또리오 소년들의 경우엔 8월 중순이나 9월 초에 시상했다. 명사들 앞에서 노래와 연주, 시의 적절한 연설이 어우러진 성대한 시상식을 가졌다.
이밖에도 간단히 주마다 혹은 다달이 특별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주일 저녁식사 때 돈보스코와 한 식탁에 앉는 것은 큰 특전이었다. 이것은 각반에서 두드러지게 훌륭한 품행을 보인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특전이었다.
돈보스코는 생도들의 선의와 정성과 협력을 무시하고 그저 신체적 지적 면에 대해서만 상을 주거나 칭찬하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학생들에 대한 규칙서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잘난체하는 학생은 멍청한 무식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늘 교육가들에게 단순히 천부적이거나 외적인 지능에 대한 만족이나 개인적인 정에 따라 평가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한 아이를 특별히 칭찬하지 않도록 하시오. 칭찬은 가장 좋은 특성을 망칩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나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는 사람도 똑같이 칭찬받고 소중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 신체적인 아름다움을 들어 칭찬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학교에서 뛰어난 이들을 칭찬하면, 그들은 자만하게 되고 다소 떨어지는 이들은 낙담하게 되어 오히려 처음보다 못하게 되며 자기 스승에 대해 자신들을 잘 돌봐주지 못한다며 미워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들을 약간 칭찬해주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제15장 교육기관들
제15장
교육기관들
의심의 여지없이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은 수많은 교육기관들(오라또리오, 청소년 단체, 학생 및 견습공 기숙학교, 주간학교와 합숙소, 여러 유형의 학교; 초등, 중등, 직업, 소신학교, 교리학교, 선교 센타 등)을 통해 드러나고 발전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근본정신은 최소한의: “제도적”요소들과 더불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한 소년(바르톨로메오 갈레리)과의 대화, 방 한 두개, 목초지와 근처 성당의 부속 건물로 구성된 임시 오라또리오, 조그만 집, 바로 이러했기에, 아주 뛰어난 학자들 중 한 사람인 A.카밀리아는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은 때로는 모든 시설을 벗어난 바깥의 운동장 생활로 상징적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운동장 생활은 “돈보스코의 전체 교육활동의 주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종교생활(예를 들어 자주 성당에 가는 것)과 학교라고 하는 두 요소들이나 또는 기본 질서에 꼭 필요한 어떤 규율(돈보스코에 있어서는 가족적 규율이 바로 이런 규율이다)과 비교하여 그 가치를 따져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돈보스코 교육사상의 전체체계는 오라또리오 생활에서 비롯되었고, 오라또리오와 학교와 기숙학교의 통상적 지도에는 규율이 없었으며, 꼭 필요한 종교적인 일 외에 나머지 것은 운동장에서 행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분은 만사를 제처 두고라도 가능한 한 아이들과 함께 있으려 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교육자요 아버지로서의 돈보스코의 안목에서 이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시각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삼중 적으로 예방교육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주요기관들을 얼른 살펴봐야 한다.
1) 첫째, 예방교육은 돈보스코가 무에서(ex nove)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반동시대의 전형적인 조직들 안에서 점차로 효과를 발휘했다. 많은 조직들이 가톨릭 반동 개혁 및 구질서(ancient regime) 시대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근본 특징들을 보다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돈 보스고의 예방교육에 의해 새로운 면모를 부여받았다.
2)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예방교육 자체가 여러 기관들 안에 구현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역으로 여러 기관들이 예방교육을 규정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예방교육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 주는 특징들을 띠게 해주었다.
3) 다시, 여러 기관들은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도덕적 수준이 서로 다른 소년들을 염두에 두게 되었으며, 서로 다르거나 달리 표현된(상부 상조적, 학구적, 직업적, 교리 교육적, 양성적) 요구들과 교육내용 및 방법에 영향을 주려는 요구들에 부응하게 되었다. 고로 예방교육이 띠고 있는 다양한 측면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된다.
1. 오라또리오
연대상으로나 중요도의 순서로 보아 첫째가는 기관은 축일 및 평일 오라또리오이다. 오라또리오는 돈보스코의 종교적 사회적 교육적 활동이 가장 대중적이며 융통성 있고, 인격적으로 구현된 것이었다. 오라또리오는 훌륭한 창의정신을 토대로 형성되었지만, 전통적 요소들을 배제하지 않고 자유로이 차용하여 종합하였다. Regolamento 제 1조에 나타난 오라또리오에 대한 정의는 아직 불완전한 것이었다: “축일에 성스런 교회의식에 참여한 젊은이들을 유쾌하고 정직한 오락으로 환대하는 것.” 사목-교리 교육적이며 오락적인 이런 모습은 단체, 학교(주일, 야간, 주간), 음악활동, 연극, 체육, 소풍을 통해 전인적이며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양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여하한의 일방적인 해석이나 자극을 모두 배제하고 중요한 요소들 모두를 활발히 결합시키는 것이 돈보스코의 특징이었다.
무엇보다도 종교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일요일 모임은 종교적 의무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적이며 정직한 삶을 살아가게 해줄 어떤 조언과 가르침과 준비를 제공했다.” Regolamento는 자주 오라또리오에 오고자 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이 오라또리오에 오는 젊은이는 이곳이 선량한 그리스도인 겸 정직한 시민을 양성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라또리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최고 장상”인 원장의 Regolamento에는 오라또리오 교육이 지닌 특별한 그리스도인적 긍국 목적이 요약되어 있다. 원장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성스런 것들에 대한 존중심, 잦은 영성체,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대한 자녀다운 헌신, 그리고 참된 신심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라또리오는 교육과 신심, 그리스도교적 생활 정신의 학교였다. 오라또리오에 받아들이는 조건 중 하나는 “취업중일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없이 빈둥거리다 보면 온갖 악습에 빠져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는 주일 아침이나 저녁 강론 또는 반별 혹은 전체적인 교리학습과 같은 종교적 가르침이 전혀 쓸모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축일 오라또리오는 신심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다. 초기 오라또리오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그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고백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수 있는 시설”과 관련된 것이다. 첫 경당이 축성(1844년 12월 8일)됨으로서, “성당 안에서 종교적 의무”를 이행 할 수 있는 장소를 갖게 되었다. 절망적인 유랑 오라또리오 시절에도 종교적 의무 즉 교리교육, 노래, 미사, 저녁기도와 종교적 가르침을 이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에 가장 신경을 썼다.
둘째, 오라또리오는 시간과 참석 소년들의 면에서 볼 때 지극히 광범위한 교육조직이었다. 그러므로 오라또리오에는 시간표가 없었으며 주기적으로 리듬이 반복되는 학교가 아니었다. 노동자든 학생이든 게으름과 방탕에 빠져들“쉬는 날”과 시간을 가진다. 오라또리오는 젊은이들의 생활 속의 공백을 메워주었으며, 그것도 기쁨과 인간적이며 천상적인 가치, 교육과 오락; 가르침과 덕성함양으로 그 공백을 메워주었던 것이다. 오라또리오의 교육활동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척 애썼다; 주중에도 어떤 양식으로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해 더욱 그러했다. 바로 그것이 돈보스코의 생각이요 실천이었다.
“축일에는 종일 소년들을 돌보았다; 주중에는 그들이 일하는 작업장이나 공장을 방문했다. 소년들에게는 그들을 돌봐주는 친구가 있음을 알게 해주어 큰 위로가 되었고, 고용주들 역시 기뻐했다. 고용주들은 주중이나 위험에 빠지기 쉬운 때인 축일에 보살핌을 받는 소년들을 두고 싶어 했다. 토요일마다 나는 주머니에 담배와 과일과 빵 덩이를 가득 넣고 감옥을 찾아가곤 했다. 그곳에 갇혀있는 불행한 소년들을 찾아보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이 그 형무소를 떠날 행운을 갖게 될 때 오라또리오로 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끝으로 오라또리오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 즉 여가 시간을 건설적으로 보내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었다. 혹시 어떤 특혜가 있었다면 그것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가난하고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 돌보았다; 바로 이런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구원의 길을 계속 걸어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돈보스코는 회고록에서 첫째 목표는 정말이지 “가장 버림받고 가장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는 것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종교교육을 더 필요로 하며 타락의 위험에 더 노출되어 있는 외부 젊은이들을 위한(…)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을 위한 사랑의 직무”는 제4차 총회(1886년)의 Deliberazioni를 반영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오라또리오는 합숙소나 학교와는 달리 참가허락, 분반, 통제, 입회나 퇴회(어쩌다 몇몇 경우의 제명을 제하고는)와 같은 체계적인 절차를 모두 배재했다.
그것은 돈보스코가 착안하여 실현시킨 지극히 역동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청소년 모임이었다. 본질적으로 연대감, 자유와 사랑과 기쁨의 분위기 속에서 얻는 종교적 각성, 도덕적 자제, 자유로운 참여, 교양이 그들을 한데 묶어 주는 끈이었다.
1851년 12월 20일자 서한에서 아주 간단히 얘기된대로 오라또리오는 다른 어떤 기관들보다도, “행복”의 원리를 충만히 드러내는 생명력과 젊은이 특유의 활력이 넘쳐나는 중심체가 되고자 했다: “신체건강을 증진시키고 진실로 정신을 일신하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놀이들을 채택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유익하고도 즐거운 곳에 있도록 해주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놀이와 기쁨이 돈보스코의 기관에 있어서 본질적인 분위기요 환경이었다면, 압박과 통제를 즐거운 환경적 매력과 사랑으로 대체시킨 “자유로운” 교육기관이었던 축일 오라또리오에서는 더욱 더 그러했다. 위에서 언급한 Deliberazioni 제7조와 8조에도 그런 내용이 적혀 있다:
“그 지역의 관습과 연령에 따른 놀이와 여러 가지 오락이 오라또리오에 소년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로 권장되었다. 축일 오라또리오에 직접 참석하고 좋은 품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을 주는 것도 아주 좋다. 정해진 시기에 예를 들어 책이나 성물 또는 옷과 같은 상을 주어야 한다; 소풍이나 간단하고 도덕적인 연극, 음악수업, 자그마한 축제 등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심과 즐거움 외에 사랑도 다른 어느곳에서보다 이곳에서 더 끊을 수 없는 유대감을 남겼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무엇보다도 굳건한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동기에서 비롯된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인간적이며 감지할 수 있는 친절한 사랑으로 드러나는사랑이었다. 다시 말해서 보여 지고 나타나며 그럼으로써 마음을 끄는 인간적 수단이 되는 사랑이었다. 생도들이 좋은 인상을 받아 언제까지나 그 추억을 간직하며 어른이 되어서 까지 오라또리오를 방문할 수 있도록 희생의 참 정신과 인내, 모두를 향한 사랑과 선의를 늘 실천하는데 축일 오라또리오 운영의 관건이 달려 있다.” “원장-Regolamento는 역설한다-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친구로서, 동료로서, 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 “성무감은 늘 즐거워해야 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어야 한다.-실제로 그렇다; 잘못을 고쳐주거나 경고를 할 때는 기를 꺾지 말고 항상 용기를 주는 말을 하라. 칭찬을 해주어야 할 이들은 얼른 칭찬해주고 꾸짖음은 늦추어라…” 끝으로 이런 점들을 상기시키라 : “사랑, 인내, 타인의 결점을 참아줄 것, 오라또리오와 그곳에 있는 이들의 명성을 드높여 줄 것, 모든 이들로 하여금 원장을 신뢰하도록 할 것; 이것을 적극 권하는 바이다. 이것이 없으면 질서 유지가 순조롭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영혼들을 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2. 합숙소와 기숙학교
우선 전반적인 시설 분야에는 돈보스코의 독창성을 찾아 몰 수 있을 조직이 없다. 사실 기숙학교들(“버림받은 청소년을 위한 합숙소, 학생 및 견습공 기숙사, 소신학교)은 “예방”의 원칙과 그것의 주요 모습들을 보다 철저히 적용시켰다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라또리오를 비롯한 개방된 기관들에서 엿볼 수 있는 아주 독창적이고 역동적인 측면들을 제한했다. 자발적인 참여와 소속감, 엄격한 규율이나 분류화 배제 ; 무료(수업료, 식비, 잡부금) ; 가족 및 바깥 세계와의 접촉 ; 배운 것을 매일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것; “공휴일”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이 없다는 점 등이 바로 그런 측면이었다. 반면 돈보스코의 기숙사에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관습이나 확고한 전통과는 다른 양식을 부여하는 몇 가지 독특한 요소들이 있었다.
첫째, 그곳에 모여든 소년들의 인간적 교양적 사회적 자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곳에 모여든 소년들은 순박하고 “가난”했다. 그랬기에 그들의 전반적인 생활은 형식적이기 보다 근본적이었다. 이 결과 소위 가난한 이들의 교육이라 불리운 특징들을 띠게 되었다; 신실한 우정; 교육자들에 대한 생도들의 신뢰; 사랑을 주고받는 가족적인 삶의 체험; 은총의 선물에로 이끌리는 복음적 성향; 학업과 직업적 향상에 대한 감사; 일반 가정에서는 보통 있을 수 없는 운동 및 연극 등의 매력. 대다수 소년들에게 있어서 “기숙생활”은 사실상 그들의 가정이나 사회적 위치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기 보다는 뜻밖의 선물이요 요행수였으며, 현재와 미래의 삶에 있어서 생각지도 못할 대단한 가능성이었다. 즉 새 “삶”의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방교육의 몇 가지 요구들이 그곳에서 더욱 완벽히 실현될 수 있었다. 우선 예방의 근본적 요구는 두 측면을 띈다; 소극적-방어적 측면과 적극적-건설적 측면이 그것이다. 사실 기숙사-합숙소가 생겨나게 된 것은 예방적 관심 때문이었다: “소년들에게 보금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수많은 소년들을 위한 갖가지 노력들이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 나는 더 많은 방을 세내기 위해 무척 애썼다.” 훗날 순전한 교육적“예방”이라는 보다 더 중요한 동기로 인해 견습공과 학생들을 위한 엄격한 “기숙사”형태의 학교를 채택하게 되었다. 다시 Memorie dell'Oratorio로 돌아가 이에 대한 이유들을 살펴보자 :
“아직 우리 기관 안에 작업장들을 갖지 못했었기에 우리 소년들은 토리노 일터와 학교로 나갔다. 이것은 도덕성을 크게 위협하였다 : 그들이 만나는 친구들, 그들이 보고 들은 이야기 때문에 오라또리오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준 것들이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견습공들에게 일어난 일이 안타깝게도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다. 상급생들 중 문법반은 주세뻬 본자니노 교수에게, 수사학반은 돈 피꼬 마떼오께 가야 했다. 학교들은 아주 좋았으나 등하교 길에 위험이 많았다. 큰 모험을 무릅쓰고 1856년에 오라또리오에 학교에 작업장들을 동시에 개설했다.
돈보스코에게는 예방 및 면역의 교육학이 도덕교육 건설의 이상적 조건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그는 먼저 잔해물을 제거해야 할 땅보다도 처녀지에 교육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첫 번째 가설을 거부했다기 보다도 그것을 실현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 특히 그의 말년에 협력자들에 대한 강화에서 이런 견해를 자주 피력했다. 흔한 이유로, 다시 말해서 “한편으로는 교육 및 종교의 부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추문과 타락과 악한 마음 때문에 그들의 영혼을 잃지 않으려거든” “젊은이들을 다시 거두어들이자”는 요구가 그 모든 강화의 주제였다.
소설형식의 짧은 전기 Valenito la vocazione impedia에서 돈보스코는 격리와 철저한 조직과 아씨스텐스, 보호활동 덕에 신속하고도 확신을 주는 교육적 결과들을 얻은 그리스도교 기숙학교의 교육 효과를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원래의 친구들에게서 벗어나 불량서적을 읽지 않으며, 좋은 친구들을 사귀면서 다투어 열심히 공부하고, 음악과 연설과 소극장의 연극에 참여함으로써 그는 약 1년가량 파묻혀 있었던 과거의 방탕한 생활을 곧 잊을 수 있었다. “게으름과 나쁜 친구들을 피하라”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종종 떠올랐다. 그는 옛날 자신이 지냈던 신심습관을 다시 회복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여러 가지 처방이 뒤따랐다 : 바깥세상과의 완전한 차단, 엄격한 입사규정, 주의 깊은 통제와 규율, 원래의 기숙학교 전통에 있어서의 예방개념은 자체의 학교와 작업장을 지니지 못한 합숙소(학생 및 견습공)와 주간학교에 대한 다소 강한 불신-이것은 훗날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이 내포되어 있었다. 돈보스코가 아직 생존에 있을 때인 1877년 2월의 평의회에서는 발사리체 학교 문제가 다루어졌는데, “지도교사를 딸려 학생들을 등하교 시키는 통학제도가 다른 기관들에서는 실시되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그 결과를 두려워했다”고 전기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기숙학교의 적극적 목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바깥세상의 영향을 덜 받을수록 기숙사 교육은 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돈보스코 기숙학교의 초창기 역사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합숙소가 “교육관”이 된 동시에 합숙소 곁에 완전한 양성기관인 학생기숙사(성직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이들을 포함한)가 지어지고 있었다. “비참한 미래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고아들이나 부모들이 돌보지 않거나 돌볼 수 없는 처지의 직업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하는 소년들”을 위한 합숙소들은 그들에게 물질적인 빵과 직업 이상의 것을 제공했다. 소년들은 “그들을 한데 모아 일과 질서와 종교를 가르쳐 줄”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
그들은 기초교육을 받기도 해야했기에, Regolamento는 교육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조건을 입사조건으로 내세웠다. 가능한 한 그 교육자가 이미 아는 이들이어야 하며, 기숙학교를 집으로 생각하는 이들이어야 할 것. 이것이 바로 그 조건이었다.
“우리 애덕의 집에서는 이왕이면 우리 오라또리오에 자주 나온 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 집에 소년들을 확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들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받아들여진 소년들은 모두 동료들을 형제로 웃어른으로 부모로 여겨야 한다.”
기숙학교의 교육 “형식”은 교육만을 요구하는 곳-다시 말해서 합숙소가 아닌 기관들에서 더 중요했다.
형식적인 면에서 보다도 교육적인 면에서 돈보스코는 그의 합숙소와 기숙학교에 대한 외부의 간섭과 강요를 철저히 배재하고 자율적이고자 했다. 바로 이런 뜻에서 그는 San Michele a Ripa합숙소의 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 같다. : “그대의 편지에 중요한 대목에 대해 내가 직접 설명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소: 청소년들에 대한 지도와 그들의 신뢰 정도와 감독에 대해 솔직히 말해주시오 (…) 우리 집들에서는 벌을 주거나 위협을 가하지 않는 예방교육이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훈육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오. 우호적인 방법과 이성, 친절한 사랑, 아주 특별한 아씨스텐스만이 생도들 사이에 규율과 도덕성을 확립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유일한 수단이오.”
돈보스코가 원하였고 실현시킨 기숙학교의 특징적 요소는 가족정신이다. 질서나 처벌, 나아가 제적 문제를 다른 곳에서보다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지만, 이곳의 모든 조직과 규율을 좌우하는 것은 가족정신이었다. 이것은 돈보스코가 소년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이룩했던 경험을 지속 시켰다. “우리와 함께 사시는 그분의 모습 - 초창기 생도들 중 한 사람으로 훗날 추기경이 된 갈리에로의 증언이다-은 우리 합숙소나 기숙학교에 산다기보다 가정에서 오로지 우리의 영적 현세적 선익만을 염려하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기숙학교는 가정이었다. “돈보스코는 이 말을 할 때마다 거기에 함께 사는 가족, 아주 친밀한 가족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가정이란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닌다.”
함께 산다는 것은 다른 기관들에서는 협력 받는 일이 불확실했던 양성 활동의 적극적 요소들을 가능케 했다. 단체 활동, 지속적인 우정, 계속적인 영적지도, 교양과 정서를 풍요롭게 해주는 축일, 운동, 극장, 음악활동, 전통과 방식의 창조 등이 가능했다. 휴가에 대한 다소 엄밀한 이론과 실제 역시 마을과 마을을 돌며 주민들을 접하고 연극을 보여주며 악대의 연주를 들려주고 종교예식을 집전했던, 추억에 길이 남을 가을소풍처럼 열심히 참여했을 때는 공동체 생활이 되었다.
3. 소신학교
1860년 토리노의 반교회적 성향의 Gazzetta del Popolo는 돈보스코에 대한 논박에서 그를 “현대의 P. Loriquet(…) 발도꼬 따르튀프(위선자들) 소굴의 우두머리”라고 정의했다. 그 오라또리오가 무엇보다도 성소자를 키워내고자 하는 기숙학교였음을 명백히 암시해주는 말이다.
돈보스코의 소신학교는 일반 기숙학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기관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 그러나 그 독특한 그 목적이 그 생활방식을 조건지었다. 한편으로는 보호적 요소들을 특히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본질적 특징인 종교적 분위기, 성사생활, 가족정신, 웅대한 이상을 강화시켰다. 보호조처들을 강화함으로써 건전하고 도덕적이며 절제하는 환경을 마련해줄 모든 조건들을 확립했다. : “첫째, 소년들의 입사를 통제함. 둘째, 집을 청결히함. 셋째, 부서, 소년들, 운동장을 구획하고 분류하며 조정함.” 주의 깊은 경계도 덧붙일 수 있다 ; 마음을 심란케하고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환경(본당, 오라또리오, 수녀원, 병원)을 소년들의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줄임; 때로는 “신학교”식으로 학습 프로그램을 대폭 수정함. 그러나 무엇보다도 에방교육의 통상방법들이 보다 철저히 적용되었다 ; 신중한 성소지도 능력을 지닌 유능하고 권위 있는 교육자들; 집의 원장과 소년들의 친밀하고도 거리낌 없는 공적 사적 만남; 열성적인 종교생활과 성사 생활; 성소의식 확립; 허상이 아닌 깊은 사랑과 신학적 동기를 토대로 한 조직적이며 담대한 이상 교육의 매력.
4. 가톨릭 학교
예방교육 원칙들을 적용함에 있어서 돈보스코의 학교가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독창적 특징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업교육 분야와 종교적 가르침에 관한 몇 가지 특색에 있어서는 다소 독특한 요소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유형의 학교에서나 두 가지 근본적인 측면들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 도덕적-종교적 목적과 사회적-직업적 유용성이 바로 그것이다. 학교와 교양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도덕교육과 생활의 준비 수단으로 여겨졌다. (“때가 되면 너는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1 라틴어 학교
라틴어 학교(일반적으로 다섯 상급반)에서는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방법을 찾아볼 수 없다 : Initium sapientiae timor Domini라는 진부한 원칙이 체계적으로 주장될 뿐이었다. 이 원칙에서는 하느님 사랑이 곧 학교교육의 원칙이자 수단이요 목적이었으며, 학습자의 겸손이 불가결한 내적 기질이었다.” 라틴 및 그리이스 고전과목 존속에 관한 쟁론에서, 예전에 필수과목을 이수할 수밖에 없었던 돈보스코는 프랑스의 Abbe Gaume가 Dupanloup에 반대하여 내세웠던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위에서 얘기한 바에 비추어 “이교적”위험을 줄이기 위해 여러 가지 단서들을 붙여 그 과목들을 수용했다. “이 때문에 - 돈보스코는 1885년 4월에 마르세이유에서 라틴 그리이스 고전과목 존속 옹호자인 미쉘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 학교에서 더 널리 사용되는 불경스런 라틴 고전들이 삭제된 판본을 채택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리스도교 라틴 작가들의 작품을 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저는 살레시오 원장들과 교사들과 아씨스텐트들에게도 여러 차례 이것을 주지시켰습니다.”
교훈적인 입장의 전통적으로 친숙한 지침과 최근의 통상적인 지침들 가운데 몇 가지를 약간 언급해보자. 최초의 전기 작가는 철자와 라틴어 문법, 성서역사, 십진법과 지리를 가르쳤던 초창기 교육활동에서 돈보스코가 사용했던 몇 가지 훌륭한 방법들에 관해 얘기한다: 교과서를 존중하여 충실히 설명한다; 질문을 던진다(가능한 한 많은 질문을 했고, 질문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학생들의 평균지능을 염두에 둔다; 문학적 즐거움(아카데미)과 인본주의적 특징을 지닌 극을 이용한다; 교훈적 대화를 활용한다.
4.2 직업학교
교육적-교훈적 관점에서 볼 때는 덜 중요하지만 사회적 원조적 측면에서는 중요한 직업학교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겠다. 직업학교는 세계적 규모로 엄청나게 놀라울 정도로 퍼져나갔다. 돈보스코는 그 도시의 기술자들이 보증인과 정기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고용한 몇몇 소년들에게 침식을 제공하고 도움을 줌으로써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열심한 교육적 관심으로 그들을 보살폈다. 1853년부터 1862년 까지-도덕적 종교적 이유와 교육적 종교적 이유로-집에 점차 작업장이 생겨났다 ; 1853년에는 양복점과 제화점이, 1854년에는 제본소가, 1856년에는 목공소가, 1861년에는 인쇄소가, 1862년에는 대장간이 마련되었다. 1878년 7월에는 프랑스의 라 나바르 농장을 관리하게 되었다.
더구나 능숙한 기술과 아주 실제적인 성격을 띤 학교 사이에 일정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매우 강조했던 종교적 도덕적 목적들과 사회적 기술적 직업적 측면들이 점차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그저 숙련공 양상에만 급급하였으나 점차 기초 훈련 단계를 벗어나 고급 교양에 의해 조금씩 완성되어갔다. E.체리아의 말을 이용해보자: “1875년에는 작업장 운영이 진일보하여, 작업장이 점차 진짜 직업학교가 되었다.” “돈보스코의 이상은 직업학교였다”고 그 전기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제4기에 가서야 가능했으며, 돈보스코는 단지 그 여명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돈보스코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나온 공식 기관지는 살레시안 집의 “노동자들에 대한 지도”와 “소년 기술자들 가운데서 성소자를 길러내기 위한 수단”등을 연구주제로 채택한 문헌으로서 이는 1886년의 제 4차 총회에 의해 인가받았다. 다시 체리아의 글을 인용하자면,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변치 않은 살레시안 직업학교들의 parva charta가 될(돈보스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련되었고, 돈보스코에 의해 각 집에 전달되었으므로) 몇 가지 근본 규범들이 생겨났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발전되고 응용되었지만, 그 프로그램의 근본은 그대로 남아있다.”
살레시안들이 소년 견습공들을 돌본 세 가지 목적에 대해서는 처음에 이미 언급했었다: “소년들이 떳떳이 벌이를 할 수 있을 직업”을 배우게 하고, 종교를 가르치며, “그들의 형편에 맞는 과학적 생각”을 갖게 한다. 프로그램과 방법상의 방향 역시 다음과 같이 3중적이었다; 종교적 도덕적 지도; 그리기와 불어를 포함하여 필수적인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사고”를 내포한 지적자도; 이론적으로 뿐만 아리나 실제적으로 자기 직업의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견습공을 길러내는 직업교육, 이에 이르기 위해 “견습공은 다양한 작업을 해야 하며 게다가 신속히 그것들을 해야 했다.” 이것은 대게 실습기를 5년으로 잡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4.3 종교교육을 위한 학교
종교수업에 관해 얘기하자면, 돈보스코에게 있어서 정확한 종교적 교양은 이 분야의 다른 요소들이 그의 활동을 유명하게 해줄 정도로 교육요체 가운데 하나였다.
돈보스코의 말년에 해당하는 시기에 속하는 문헌들 가운데 현존하는 한 문헌은 그가 종교교육을 사회과 교육 개혁의 기초로 여겨 특별히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돈 달마쪼에게 남긴 그의 친필원고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그가 교황께 말씀드리고자 했으며 어쩌면 1880년 4월 5일 레오 13세를 알현했을 때 설명했을지도 모를 생각과 의견들이 들어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만이 해주실 수 있는 절박한 일들: 아이들에 대하여. 최소한 일요일과 공휴일에 젊은이들이 교리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교리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마을이 적으며 읍내는 더욱 적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들을 초대하여 고백성사를 주는 것에 너무 관심이 없다.
성직자들에 대하여. 트리엔드 공의회에서 펴낸 본당사제를 위한 교리 문답집에 의해 마련된 규범들에 따라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더욱 애써야 한다. 북부 이탈리아를 제하고는 이런 가르침을 펴는 본당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 큰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고백성사를 주라. 대부분의 사제들이 이 성사를 집전하지 않고 있다; 부활절에만 고백성사를 주는 사제들도 있다.
수도회. 수도회들이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다. 두 가지 점들을 장려하라:
흩어진 수도자들을 모아 계속 공동생활을 하며 수련소를 열어라
관상 수도회는 아이들의 교리교육과 성인의 종교교육 및 그들의 고백성사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특별히 혁신적인 요소들은 없지만 이 분야의 교육적 교훈적 지침들이 풍부히 나와있다. 특별히 두드러진 점은 쉽고도 본질적인 것을 이행하려는 의지이다 :
연구보고나 예증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구원의 학습으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리를 제쳐주고 신학을 가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가르침은 단순해야 한다(…) 어느 한 가지를 납득시키느라 여러 사실들을 들먹거리지 말라; 그 구절이나 몇 개의 구절만을 잘 설명하여 이해시켜라. 여러 사건들을 나열하기 보다는 중요한 것 하나만을 택해 그대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상세히 이야기 해주도록 하라. 소년의 미숙한 정신으로는 많은 증명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그의 기억 속에 깊이 간직할 것이며, 깊은 감동을 받으면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그는 종교적 가르침을 담은 책들이 “소박한 언어와 서민적 양식”으로 서술되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종교서적에서 대화체와 시각자료를 즐겨 사용했다.
그리스도교 교리교육에 대한 돈보스코의 역사적 기획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특히 그가 소년들과 직접 부대꼈던 처음 15년(1884-1858)과 성서와 교회사에 관한 책들과 종교적 사도적 소책들의 저자로서 열심히 활동하던 때에 보다 명백히 나타났다. 여러곳에서 확실히 저자는 독자의 관심을 끌고 흥미를 계속 유지시키며 구체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교의적인 진리와 도덕적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사 역시 교리교육의 목적과 내용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인류 역사를 이 땅에 오셔서 사신(신약) 약속된 그리스도-메시아(구약)를 통해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며 가톨릭교회 안에 연장된 구원의 역사로 제시한다. 교회는 신자들의 가장 가까운 사목자와 사제, 본당사제, 주교, 교황, 그리스도, 하느님과 모든 신자들의 끊길 수 없는 유대를 보장한다. 당연히 50년대에 돈보스코는 개신교와 유대교에 대항하여 사도적인 주장으로써 그러한 본질적인 신학적 견해를 소생시켰다.
그 뒤 이런 의식적인 출발은 보다 더 명백히 심화된 특징들을 지닌 지속적이며 뜻깊은 교리교육 전통으로 발전되지는 않는 것 같다. 돈보스코의 훗날의 교리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모든 창조적 요소들은 특정한 방향보다도 예방 교육에 더 기여하게 되었다.
5. 교육자들의 준비
돈보스코는 신학생, 사제, 살레시오회 수사;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도회(살레시오 수녀회); 협력자로서 교육분야에서 함께 일하고자 하는 평신도 남녀 등의 교사 및 교육자 양성기관을 만들지는 않았다.
사제들의 통상적인 신학교 교과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 고등학교, 수련기, 철학 강좌, 4년간의 신학. 수사과정은 직업교육, 수련기, 양성을 마무리 짓는 수도자적 기술적 실습기, 통역자들을 위해서는 영적 사도적 정신을 길러주는 정기회합이 있었다.
그러나 살레시안 교육가들과 수녀들의 독특한 교육적 준비에서는 두 가지 점들이 특히 눈에 띌 것이다. 첫째는, 그들이 사춘기 때부터(어떤 이들은 그 이전부터) 살레시안 교육기관들 가운데 한곳의 교육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 성숙했으며 특히 그곳에 스며있는 “사랑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생활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돈보스코의 생전에 당연히 그들은 그가 풍기는 특별한 인격적 매력에 사로잡혔었다. 돈보스코로서는 그의 젊은 교육자들을 교육적으로 특별히 훈련시키는 것도 중요했다. 최종인가를 받기 위해 1874년에 성청에 제출한 회헌 제 14장 (수련장과 수련자 지도에 관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
“본회의 목적은 젊은이들(특히 위험한 세속의 한복판에 사는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종교와 공부를 가르쳐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에, 이 두 번째 양성 단계에서는 모두가 주간학교와 야간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동시에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더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제8조) 수련소에 대한 이해방법에 있어서 그처럼 깜짝 놀라운 출발의 근거로서 돈보스코는 “수련소를 설립할 때 품었던 목적” 을 내세웠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지원자가 젊은이들을 돕고 가르칠 수 있는 적성을 지녔는가를 밝혀내는 시험들이기 때문이다.”
돈보스코에 의하면 전통적인 수련소는 “회원들의 활동 생활을 토대로 한 살레시안 회헌”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전투에는 패했다 ; 그러나 돈보스코는 영적 교양적 양성의 불가결한 보완책으로서 수련기 뒤에 교육적 실습을 사실상 이미 도입했다.
1 J. Godechot, L’epoca delle rivoluzioni (혁명의 시대). Torino, Utet 1981, 929 p 참조.
2 C.M. Cipolla, La rivoluzione industriale(산업혁명), in: Storia delle idee politiche, economiche e sociali, a cura di L. Firpo. Torino, Utet 1972, vol. V, p. 11 참조.
3 산마리노 공화국은 독립을 지켜나갈 것이다.
4 19세기의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참조할 것. A. Desideri, Storia e Storiografia (역사와 역사기술방법론), vol. II Dall’illuminismo all’età dell’imperialismo (계몽주의에서 제국주의까지). Messina-Firence, G. D’Anna 1997, 1337 p.; R.Marx – R. Pidenvin, Dalla rivoluzione francese all’imperialismo (프랑스 혁명에서 제국주의까지). Milano, CDE 1990, 410 p.; P. Cinanni, Emigrazione e imperialismo (이민과 제국주의). Roma, Editori Riuniti 1975, 258 p.; F. Boiardi, Storia delle dottrine politiche (정치 독트린의 역사), vol V Colonialismo e imperialismo (식민지주의와 제국주의) (1875-1945). Milano, Nuova CEI 1982, 911 p.; G. Balandier et al., Le religioni nell’età del colonialismo e del neocolonialismo (식민지주의 시대와 신식민지주의 시대의 종교들). Bari-Roma, Laterza 1990, XXIV-307 p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