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 윤곽
제 1장 : 성인이 되는 어려움
“어떤 복자 혹은 성인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실어하는가?
“바오로 6세는 레오나르도 무리알도의 시 복식에서 이렇게 묻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만일 우리들의 사고 방식이 외적인 호기심을 즐기고 중세적인 천진한 신심에 기우러 졌다면 우리는 이런 분들에게서 외적인 어떤 굉장한 사건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신자들은 이러한 예외적인 장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신비적 혹은 수덕적인 모습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에 더 관심이 있다. 성인에게서 우리와 공통되는 점을 찾아 내고 실어 한다.
우리와 다른 점 보다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형제, 우리와 비천함을 함께 나누는 형제를 보고 실어 하는 편이다.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가는, 그렇게 때문에 믿음직한 그런 형제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
돈 보스꼬의 생애는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피 조성 안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인 면이 보고 싶다. 우리보다 무한이 큰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같은 면이 보고 실이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유혹을 받았는가 하는 그런 면이 알고 싶다. 그들의 인간적인 약점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그들의 응답과 함께 바라 볼 때 연약한 우리에게 용기가 된다. 돈 보스꼬는 누구나 와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상인이 아니다. 성령의 힘에 자신을 맡겨 성인이 되었다. 자신을 거슬러 싸워 성덕의 산정을 한 발자국씩 올라 간 사람이었다.
그는 원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인간적 자질은 풍부했지만 곤 보스꼬는 천성적으로 인내로 운,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맘마 말가리다의 두 아들 요셉과 요한 중에 더 살레시오 다운 쪽은 오히려 요셉이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은 요한 보다는 사실상 더 온순하고 다정하고 인내로 운 사람으로 일생 동안 기억되었다. 그는 손님이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 그들과 기꺼이 담소했고 금새 친해져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요한은 좀 쌀쌀하고 말수가 적으며 다소 거만한 편으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사리 친근함을 보여 주지 않았고, 남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싫어했고, 말보다는 신중한 관찰 가였다.
그의 주일학교 회고록에서 말한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의 성격을 연구했다. 그들의 얼굴을 잘 쳐다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9세, 10세의 꿈에서 그는 이미 사려가 깊은 어린이임을 나타난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꼬마들이 있으면 주먹을 쥐고 달려드는 불 같은 성격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고백한다.
“남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기가 몹시 싫었다.’ 그는 자기 생각을 끝까지 주장하는 편이었다. ‘내게 명령하고 충고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항상 내 유치한 생각을 고집하려고 했다.”
자신의 타고난 좋은 능력들은 그를 교만하게 할 경향이 있었다. 의지력, 뛰어난 지능, 탁월한 기억력, 건강한 체력 등으로 그의 동년배들을 쉽게 제압했다. 그는 회고했다. “나의 꼬마 친구들, 아니 나보다 나이가 많고 키가 큰 친구들도 나의 용기와 힘 때문에 나를 무서워했다.”
시성 절차에서의 증언들에서 보면 전적으로 긍정적이기만 하지는 않은 몇가지 점이 나타난다. 그의 본당 신부 신학자 친자노는 “그는 기발했고 고집쟁이였다” 라고 말한다. 갈리에로 추기경은 그의 성격이 “불 같고 거만해서 반대를 당하면 이를 못 참았다” 고 말했다. 그의 친구 쟈코멜리 신부는 “덕을 쌓지 않았더라면 그는 분노에 휘말려 버렸을 것 같다” 고 증언했다. “우리 친구들 중에서 아무도 그처럼 그와 같은 결점이 컸던 사람이 없었다” 고 말한다. 유명한 강론 가 이자 돈 보스꼬의 친구인 벨타나 몬시뇰은 “이 하느님의 종은 성을 잘 내며 아주 고집스럽고 굽힐 줄 모르는, 그리하여 자기 계획이나 생각에 맞지 않는 사람들의 충고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고 말했다. 체롯디 신부는 “분노와 사랑에 강한 경향” 이 있었고 거만한 편이었다 고 말한다. 가파쏘 신부는 말한다. “막무가내다. 자기 방식대로 하려 한다. 하지만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 그만 두었으면 좋을 것 같은 계획이라도 돈 보스꼬가 잡으면 해내니까.”
바롤로 공작부인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고집스럽고 강경하고 교만하다” 고 그를 비난했다.
알벨롯티 박사는 1872년부터 서거까지 그의 건강을 돌본 의사로서 성인에 대한 짧은 건기에서 “좀 과격한 활발 성을 타고 났음”을 지적했다. 그의 성격은 “직설적이고 불 같았으며 자기 주장이 강했다” 고 말했다.
필체 감정의 대가인 지롤라모 모렛다는 “필체에서 본 성인들” 이라는 책에서 “돈 보스꼬의 성격은 단정하기가 매우 힘 든다” 고 말했다.
“그는 남들과 평온히 지내기 위하여서 대단히 자기 억제가 필요 했을 성인이다. 그는 두말 할 여지 없는 큰 지도자이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고 마음의 지향과 행동에 있어서 똑 바르기 위하여 최대한 자기 콘트롤, 최대한의 자기 거부를 노력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증언은 돈 보스꼬의 모습을 완전히 보여 주지는 않는다. 풍부한 인격의 너무 많은 다른 면이 빠져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근본 요소 즉 성급함, 독립성, 강한 자기 주장 등은 포착이 된다. 조금만 주의하지 않았더라면 낙오자, 성인 됨에 실패한 자가 될 뻔했다.
“주께서 이 오라또리오에로 나를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잘못된 길에 빠지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강한 성향이 아니었다면 돈 보스꼬는 그 깊은 성덕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적인 성향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악습도 덕행도 아니다. 사실 행위의 윤리성은 개인의 의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을 어떻게 좋게 나쁘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가 타고난 자질을 매우 충분히 살려 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하느님은 그가 얼마나 자신과 싸워 노력했는지를 아신다. 이제 우리는 그 점을 찾아 보기로 하자.
올라가는 길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생애를 훌륭한 예술품에 비교한다. 조각가가 깊이 생각한 후 확신과 기쁨으로 천천히 끝을 들어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완성해 낸 그런 걸작은 드물게 나타나는 법이다.
똑 같은 것을 우리는 돈 보스꼬의 생애에서도 말 할 수 있다. 절도 성, 점진 성, 조화 등은 사실상 성덕을 향한 그의 여정에서도 특징적이다. 그러나 그가 걸어간 힘든 길, 강인하게 맞선 자신과의 험난한 싸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덕으로 나아가는 첫 발자국을 꼬마 요한은 어머니에게서 배웠는데 그는 글을 모르나 하느님을 알고 사랑한 여인이었다. 자녀 교육에 자상했지만 또 매우 엄하기도 했다.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자녀의 본성에 맞추어 가셨다. 나중에도 나오지만 주일학교와 친구들에게 열심히 어머니 역할을 해 주셨다. 그러나 아들의 그릇된 행위 앞에서는 적절한 기회를 찾아 단호하게 말할 줄도 알았다. 물론 이성과 신앙의 동기를 바탕으로 하느님, 예수님, 동정녀 마리아를 사랑하고, 죄를 싫어하고 영 벌을 두려워하며 천국을 희망하는 일을 돈 보스꼬는 어머니의 입술을 통해 배웠다.
벡키의 오두막집에서 종교는 매우 자연적인 것이었고, 본능적으로 악을 싫어하고 선을 사랑했다. 그가 듣는 말씀은 “하느님이 너를 보신다는 것을 기어하여라” 였으니 이는 꼬마 요한의 섬세한 마음에 깊이 스며 들었다. 그리하여 그도 역시 이런 말을 청소년들에게 무수히 되풀이 하게 된다. 주님이 성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용하신 갈롯소 신부 밑에서(1829.11 – 1930.11)소년 요한은 덕에 있어 새로운 진보를 한다.
그 성인 사제는 소년의 나이에 적절하지 않은 보속 들을 금한 일이 있는데 그러나 여기서는 소년이 성덕을 향하여 실제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비롯 짧게 나마 묵상을 시작하고 영적 독서에 맛을 들이고 성사에 자주 나아가도록 격려했다.” 라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그때부터 나는 영적 생활의 맛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맛을 알고 체험한다는 이야기이다. 성령의 은혜 중에서 가장 완전한 슬기와 은혜의 결과이니 모든 덕의 종합인 애덕을 완전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는 지능 특히 사랑을 내포한다. 키에리의 신학생일 때, 요한에게는 친구 루이지 고몰로가 있었다.
그는 청소년이 모델이었고 후에 신학생들 가운데서도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이 친구가 요절하자 돈 보스꼬는 후에 그의 짧은 전기를 쓰게 된다. 고몰로와의 우정은 성인의 영적 생활에 하나의 전환기가 되었다. 사제적 성덕을 향하여 열심한 경쟁이 시작된다. 칼릴 지브란의 말대로 “보든 새벽은 황혼이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난 그 자리에서 그들을 발견하는 일이 없다.” 라는 표현이 진정 그들에게 적중했다. 그들은 서로 보완하고 보충해 주었다. 물론 영적 세계에서 그랬지만 오로지 그 세계에서만이 아니었다.
돈 보스꼬는 기록한다. “우리는 서로 필요로 했다. 나는 영적으로 그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는신체적으로 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즉, 나의 보호가 필요했다. 실제로 깡패 비슷한 학생들이 있었는데, 고몰로가 조용하고 착하니까 그를 함부로 다루려 하기도 했다. 요한은 이를 싫어했다. 어느 날 난폭한 학생들의 고몰로의 창백한 뺨에 요란한 따귀를 올렸고, 그는 아무 반항도 없이 마음 속을 용서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보스꼬는 이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올랐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 들어, 그의 말대로 모두를 반 죽음 시켜 놓았다. “그 순간 나는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되었다. 손 가까이에 의자도 막대기도 없었으므로 한 동급생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 들고 그 친구를 막대기로 삼아 다른 상대들을 후려 팼다. 4명이 기절하여 넘어졌고 그 나머지는 고함을 치며 도망쳤다.” 그때 친구 고몰로는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
“네 힘에 놀랬다. 하느님은 내 친구들을 그렇게 때리라고 그 힘을 주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거야” 라고 말했다. 돈 보스꼬에 대한 고몰로의 영향은 그의 전기에도 지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우상처럼 여기던 그 단짝 친구는 그를 경탄시켰다. 그는 그 친구에게서 그리스도 신자로서 살아가는 길을 배웠다. 즉 성사와 마리아를 통해 큰 힘을 받고 살 줄을 배운 것이다. 애덕을 실천하고, 의무에 충실하고 사제직의 이상을 향하여 살아갈 줄을 배운 것이다. 가파쏘 신부는 가르쳤다. “불행하게도 멸망하는 사제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어느 날 돈 보스꼬는 이렇게 말하리라. “사제는 일에 빠져 아니면 악습에 빠져 죽는다.” 그는 인생의 근본적 전환점으로 삼아 신학교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즐겨 보는 흥행물들을 안 보기로 결심했으니 사제인 품위나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숨은 생활, 절제 생활을 시작했으며 정결의 덕을 멀리서나마 흐리게 할 것에는 온 힘을 다해 피했고 기도에 열중했으며 급우들 사이에서 열심히 사도직을 했다.
한 마디로 하여 그 자체로 보아 지극히 정당한 경향마저도 그는 따르지 않았다. 스텔라 신부의 표현을 빌면, 열심히 고행의 길을 추구하여 금식과 절제에 철저하였다고 한다. 옛날의 재능이 다시 뛰어나오려 할 때 그는 자신에게 매우 심하게 굴었다. 그들의 이러한 수덕적인 훈련은 고몰로에게는 죽음을 초래했고, 돈 보스꼬에게도 육체적으로 허약에 이르게 했다.
신학교 시절의 자기 학대는 후에 그를 사경에 헤매게 했다. 알벨롯티 박사의 증언을 들어 보자. “자신의 강렬한 성격을 한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 얼마나 노력했는지 후에 제자들에게 이야기 한대로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고 사경에 이를 만큼 알아 눕기도 했다.”
돈 보스꼬의 생애에서의 이러한 일화는 그가 그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힘든 싸움을 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온전히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특히 청소년을 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주여 아름답게 피어난 모든 생명이 당신을 증거 하나이다. 그러나 성인의 증거야말로 마치 산 육체를 불 칼로 도려낸 것과 같나이다.” 라는 벨나노스의 말은 그리스도 신자의 성덕을 잘 묘사한다. 돈 보스꼬는 바로 이를 피부로 산 분이었다.
토리노의 아씨시 성 프란치스꼬 사제 기숙사에서 보낸 3년(1841 – 1844)동안 돈 보스꼬는 자신을 다시 만들고 되어 만든다. 자신의 사제직을 되어 만지되 사목적이고, 실천적으로 여기서 그는 사제가 되는 길을 배웠다.
‘신학자 루이지 괄라 신부와 요셉 가팟쏘 신부는 그 당시에 알려진 두 영재였고 이들은 그 기숙사의 펠리체 글지오 신부와 함께 하느님의 섭리가 내게 주신, 그들의 뒤를 따라 지식과 덕을 쌓게 하신 세 모델이었다.”
가파쏘 신부는 그의 고백 신부 겸 영적 지도 신부가 되었다. 그의 전기에 기록하기를 “내가 무엇인가 선한 일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이는 모두 저 거룩한 신부님 덕이다. 나는 그의 손에 나의 모든 결정을 맡겼고 내 모든 공부와 계획을 맡겼다.” 강인하고 고집스러운 그였으나 “항상 돈 가파쏘의 말에 한 마디도 덧봍이지 않고 복종했다” 고 벨타냐 몬시뇰이 전한다. 그는 후에 말했다. 가파쏘 신부에게 복종하느라고 토리노에 남았고, 그의 권유와 지도에 따라 주인마다 광장의 장난꾸러기 등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격려와 도움으로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주일학교을 열어 가장 버림 받은 아이들을 모아 들여 악습에 물들기 전에 선행에로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다.” 새 사제 돈 보스꼬의 덕은 기숙사에 주일학교를 세울 때(1841 – 1844) 다음에 휴양 소에서, 그리고 마침내 1846년 4월 12일, 부활절에 발도꼬에 자리잡을 때 늘 새롭게 빛났다. 여기서 성인은 무수한 난관에 접한다.
가난, 그의 동 역자들의 떠나감, 관에서의 성가심, 각처에서 모여 든 주일학교 아이들의 상이성에서 오는 어려움 등으로 하여 진정 무한한 인내가 필요했다. 그 옛날 발도꼬의 주일학교에 대한 개념을 얻으려면 돈 보스꼬의 다음 말을 들어야 한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려 하면 생각이 막힌다. 삼십 오륙 년 전 여기 발도꼬는 무엇이 있었나?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개구쟁이 말썽꾸러기들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규칙이나, 정일 정돈이라는 말은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종교는 종자도 무르고 있어서 종교라는 말만 해도 웃었다. 마구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해서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정말로 비천한 뒷골목의 아이들로서 걸핏하면 돌을 집어 들고 싸웠다. 싸움이 그칠새 가 없었다.”
“돈 보스꼬와 함께 지내면서” 나중에 그들 중에서 미카엘 루아, 요한 갈리에로, 도미니꼬 사비오 등의 우수한 청소년들이 나왔지만,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사랑과 유화가 매사에서 나를 이끌어가기” 라는 자신의 첫 미사와 결심에 충실하기 위하여 그는 매우 자신에게 엄하게 살아야 했다.
그의 잘하는 말 중에 “살레시안은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온유와 욥의 인내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뼈대 없는 “온유’나 약한 온유가 아니다. 사목적 사랑의 열매로서, 부드럽고, 모든 것을 참아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낸다.” 이는 이른바, 사탕과자의 꿈을 통해 모든 살레시안들에게 준 훈계로서 돈 보스꼬의 산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는 날 친구인 쟈코멜리 신부가 발도꼬에 찾아 왔는데, 그때 돈 보스꼬는 얼굴이 상기된 채 한 때의 소년들을 쫓고 있었다. 기도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요리 저리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번이 두 번째다. 네 화난 모습을 보기는” 이라고 말하자, “야, 녀석들이.”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웅변적인가? 어떤 때는 싸움 중의 아이들을 때리려는 시늉을 하고 있는 그를 만나 기도 했는데, 손은 허공에서 머문 채 때리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체벌을 주기도 했지만, 누구에게나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루아 신부와 갈리에로 추기경은 이를 증언한다.
돈 보스꼬의 손에서 몇 번 뺨치기가 날라 온 일도 있었지만 이는 그가 아직 젊었을 때었고 손가락 끝에서 스치는 정도였으며 그것도 대단히 특별한 경우였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 후에는 매우 우울했었다.
그는 이해심이 많고, 인내롭고 마음이 넓었다. 다음의 이야기는 그의 마음을 깊이 상하게 했던 신성모독에 관한 것인데 그의 전기에 실려 있지 않은 관계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암브로 로다는 도미니꼬 사비오의 옛 친구인데, 그의 영웅적인 덕이 선포될 때 로마에 와서 비오 11세 교황의 알현에 나아가 옛날 일을 회상했다. 이미 90세가 넘은 로다는 교황성하께 여러 가지 말씀 중에 이러한 이야기도 드렸다. “어느 날 오락시간이었어요. 죄송합니다만 교황님, 제 입에서 나쁜 말이 튀어 나온 것입니다. 얼른 입을 틀어 막았지만, 어느 새 밖으로 새어 나오고 말았어요. 친구들이 이미 들었지요. 도미니꼬가 내게 가까이 말했어요. ‘나쁜 말을 안 하기로 결심했잖아? 어서 돈 보스꼬로 가서 이 일을 말씀 드려, 그분은 참 좋은 분이야. 잘 처리해 주실 터니까 두고 봐. 나는 그 동안 너를 위하여 성당에 가서 기도할게.’ 나는 조금도 지체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러나 돈 보스꼬는 어디에 계실까요? 그분은 응접실에서 어떤 신사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계셨어요. 난 철 없는 아이였기에 그대로 그 앞에 뛰어 들었지요. 돈 보스꼬는 놀라서 ‘얘야, 나는 지금 매우 바쁘다. 좀 기다려 줄 수 없니?’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사람들은 내가 급한 심부름이 있는 것이려니 하여 한쪽으로 물러서며, ‘그 아이의 말을 들어 보시지요 돈 보스꼬. 우리는 기다리기로 하겠어요.’ 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나는 발꿈치를 들어서 착하신 아버지의 귀에 대로 말했지요. ‘사비오가 신부님께 가보라고 했어요.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 마디 했거든요.’ 나는 그때 나뭇잎처럼 떨고 있었습니다. 돈 보스꼬는 나를 꾸짖지는 않으셨으나 얼굴에 깊은 슬픔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가 참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았지요. 마음을 꿰 뚫는 시선으로 바라보시면서, ‘이제는 다시 그렇지 말아라. 알았지. 다시는 하면 안되.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는 일이야 알겠니? 주께서 강복을 안 해 주실지도 모른단다. 성당에 가서 천주경을 많이 바치고 혀로 성당 바닥 위에 성호를 세 번 그어라.’ 나는 제대 앞으로 달려가서 천주경을 여러 번 바치고, 바닥을 깨끗이 하고, 사방을 살펴 본 후 재빨리 바닥 위에 혀로 성호를 세 번 그었지요. 그리고 뒤돌아 달려 왔어요. 마치 뱃속에서 납덩이를 빼내어 버린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어요. 천주경을 몇 번 했는지는 지금 생각나지 않지만 그 십자 성호 세 번과 돈 보스꼬의 시선은 잊고 있어요.”(졸업생들의 기억 속의 성요한 돈 보스꼬, 토리노 1953). 고전적인 맛이 듬뿍 든 영적 꽃다발 같은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는 일이 마음을 얼마나 예리하게 아프게 했는지도 볼 수 있다. 죄에 대한 강한 불쾌감과 아울러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의 감정을 심어주려는 그 유별난 보속은 물론 돈 보스꼬의 실천에서도 예외적인 일이다.
내게도 힘이 든다.
노년기에 돈 보스꼬는 실제로 영웅적인 강한 자제력,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한 인내심과 침착성 그리고 비교를 불허하는 부드러운 태도를 소유하게 된다. 걸작품을 정성껏 만지고 다시 만진 예술가이다. 그러나 본성이 안고 있는, 다스려졌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그 성격은 아직도 솟구치려 했다.
“어떤 사람에게 일을 시켰는데, 혹은 어떤 중요한 일을 맡겼거나 델레케이트 하거나 매우 급한 일을 맡겼는데, 그 일을 제 시간에 하지 않았거나 잘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될 때, 침착하기란 내게 쉬운 일일 것이라고 믿지 말아라. 어떤 때는 피가 혈관을 끊는 것 같다. 전신에 쥐가 날 것만 같다. 그러나 화를 내 봤자지. 안 된 일은 안 된 일이지. 화를 낸다고 수하 사람의 잘못이 고쳐지지는 않아.” 이는 1876년 란조에 모인 피정 자들에게 한 말씀이다.
그렇게 하시고 그렇게 가르치셨다. “화가 났을 때에는 꾸짖거나 고쳐 주려고 하지 말아라. 좀 언성을 높여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럴 땐 언성을 좀 높이되 먼저 생각하여라. 이 경우에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어떻게 했을까?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성령께서 말씀하신바 “인내하면 정신을 소유하리라” 하신 대로 되리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그의 첫 전기 작가는 이 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돈 보스꼬는 마음에서 어떤 감정을 강하게 느낄 때면 그의 본능이 신음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어조는 아주 부드럽고 다정해져서 그가 말하고 있는 상대방은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의 자제 능력은 무수한 다양한 호응을 얻었다. 하느님께 일치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이라면 심한 언사나 편지에 그대로 반격하려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해적인 섬세한 태도를 취할 줄 알았다. 그의 방식은 감정이 상해 있을 때에는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지나쳐 가게 했다. 몇 시간 몇 날이라도 그 자신 안에 전적인 평온이 되돌아 오기까지 기다렸다. “가톨릭 독서”라는 그의 간행물에 과한 분쟁에 대하여 신학자 발티놋디 신부에게 이렇게 쓴 일이 있다
“난 어제 대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오. 그러나 화가 나 있었기에 참았오. 오늘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만사를 주님께 맡긴 후, 비로소 간단히 그 진상을 이야기해 드리는 것이오.”
갈리에토 추기경은 시성 절차 과정에서 반대 당할 때의 그의 영웅적인 자제 능력을 잴 수 있는 일화 하나를 회고 했다. 1875년 1월 이었다.
돈 보스꼬 편안한 마음으로 형제들과 점심식사를 들고 계셨다. 그때 돈 루아가 가까이 와서 4만리라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다. 막대한 금액이었다. 보증을 서준 어느 친구가 뜻밖에 죽었는데, 그의 상속자들은 지불하기를 거절한다는 것이다. 그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증인은 말한다. 그는 국을 한 수저 한 수저 들고 계셨는데, 때는 정월이었으며 식당은 난방이 안 되어 있었건만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 접시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초조한 기색이 없이 그의 조촐한 식사를 중단하지 않으셨다. 신학자 사비오 아스카니오 신부의 증언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그는 그의 성깔을 너무나 잘 다스릴 줄 알았으니. 담김 질이 점액질 같아 보일 정도였다.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선 익에 손해가 가지 않는 그의 학생들에게 항상 자애롭고 부드러웠다.” 소리로 외치거나 드러내 보이지 않았어도 성인이 되고자 돈 보스꼬가 들인 노력은 매우 큰 것이었다.
1932년 6월 17일 비오 11세는 로마의 교황 직속 신학교 학생들에게 그의 성덕의 충만성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힘차게 단언했다. “그의 삶의 매 순간은 사랑을 위한 계속적인 봉헌, 계속적인 잠심 이었으니, 이 점들은 그와의 대화에서 항상 생생하게 나타났다. 주변에서 떠드는 이야기가 조금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으니 사실은 그러했다.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는 그를 보자. 만사에 그리고 자신에게 정확한 대답이 늘 준비 되어 있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러한 삶은 그가 밤시간에 지낸 삶이며 계속적인 일거리 속의 낮 시간에 지낸 삶이다.
제 2장 : “심오한 인간인 돈 보스꼬”
보쑤에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합당한 성인을 만드시려 원하시며 그들을 당신 방식으로 온전히 다시 뜯어 맞추실 필요가 생긴다. 무리가 되지 않을 만큼 밖에 그들의 성향을 존중해 주시지 않으신다.”
성덕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영웅적인 응답도 선물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성인의 인격을 끝없이 존중하신다. 그분의 은총은, 즉 우리 안에 임하시는 그분의 활동은 우리의 본성을 통과항여 지나 가시면서 이를 존중하신다. 결코 이를 억압하지 않으신다. 물론 하느님은 부족한 인간에게도 큰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은총의 걸작들은 대체로 돈 보스꼬의 경우처럼 매우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역사상 가장 완전하고 가장 절대적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체르겐 센은 돈 보스꼬를 정의했다. 교황 비오 11세 께서 1883년 발도꼬에서 돈 보스꼬와 함께 3일 동안 지내면서 얻은 강한 인상도 그것이었다. “우리를 가까이에서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가 아무리 겸손하게 숨기려 했어도 그의 높은 인격은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느 길을 갔다 해도 큰 업적을 남겼을 그런 사람 중의 한 분입니다.”
교히사가인 허트럼도 돈 보스꼬의 이름을 인간적 재능이 뛰어난 저명한 성가의 대열에 넣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성 아우구스티노, 프란치스꼬, 시에나의 카타니라, 돈 보스꼬는 인류의 꽃이요, 정상에 드는 분이다.”
돈 보스꼬에게서 두드러지는 것은 먼저 그가 성인이라는 것 보다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의 길은 하느님과의 일치는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었으나, 은총으로 승화된 그의 인간적 눈부신 자질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실로 그의 자질은 대단히 풍부했다. 서로 상반되면서 보완해 주며, 서로 연결되고, 조화롭게 서로 융화되어 있었다.
실제로 돈 보스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명랑하면서 정숙하고, 솔직하면서 존중해 주었고, 정확하면서 정신적 자유를 누렸고, 겸손하면서 관대했고, 강인하면서 유연했고,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이었으며, 낙관적이면서 미리 보살폈고, 외교적이면서 진실했고, 가난하면서 애덕을 베풀었고, 우정을 소중히 키웠으나 편애하지 않았으며, 구상에 신속했으나 수행에는 신중했으며, 잘 되어진 일을 좋아 했으나 완전 주의자는 아니었고, 크게 볼 줄 알았으나 구체성의 천재이며, 무모할 정도로 대범하면서 친밀하게 나아가고, 적을 친구로 만들 줄 알면서 자신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며, 다이나믹 하되 허풍스럽지 않고, 용감하되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며, 만사를 자신의 목표로 향하게 하되 사람들을 속이지 않으며, 미리 보살핌으로써 교육하고, 교육하면서 미리 보살피며, 세상과 더불어 달리되-진보의 기수가 되고자 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이런 류의 상반되는 장점은 돈 보스꼬의 참된 위대성이 척도를 준다.
“독수리의 날개의 폭을 재기 위해서는 그 날개를 펴서 양쪽 끝을 재야한다. 그래야 그 날개의 힘이 어떤지 판단할 수 있다. 성인의 덕도 이와 같되 성인들의 상반되는 덕들을 서로 견주어 보아야 그 위대성을 판가름 할 수 있다.
돈 보스꼬의 인간적 모습을 다듬어 주는 상반되는 장점들은 사목적 사랑에 의해 다시 변화된 본성과 은총의 빛나는 융합이다. 그의 인간적 풍요성은 적절히 지적된 대로 성덕 안에 아주 잘 완성되어 거의 성사기 될 정도이다. 그리고 은총의 선물들이 나타날 때면 그의 인간성의 찬양과 같아 보였다.
본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형태이기에 인간이 이에 응답할 때에는 밖으로도 빛을 발한다. 다니엘또는 말한다.
“모든 것이 돈 보스꼬에게서는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신비스럽게 초 자연적인 빛을 발한다.”
그에게 있는 상반되는 장점들 중에서 3개만 간단히 여기에 들어보자.
굳세고 유연한 의지, 자상하면서도 엄한 부성애, 세심하면서도 강인한 마음.
굳세고도 유연한 의지
돈 보스꼬는 그 시대에 전에 없던 하느님의 일꾼이었다.
성인의 이러한 조직능력, 실천능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의 “불요불굴의 철 같은 의지(비오 11세)”를 역시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어려서 거친 밭 농사일을 하면서 공부하기 위해, 자신의 성소를 따르기 위해 만나는 장애물들을 쓰려 뜰이면서, 다져온 의지이다. 이것을 어른이 되어서는 더욱 크게 활용했다. 활동을 좋아하는 편으로 학교의 추상적인 개념을 싫어했다. 어느 날 게살로의 주교인 페르 몬시뇰이 철학적인 논쟁으로 끌어 들이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몬시뇰, 저는 시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일터는 대업이 아닌 사업의 일터 입니다. 바르게 생각해야 바르게 일한다는 말은 맞지만, 바르게 일하기 위해서는 교황님과 함께 생각하고 느끼면 족합니다.”
- 강하게 원했지만, 결정에는 느렸다. 자신의 계획을 오래 생각했다.
자신의 경험과 견주어 보았고, 의견을 물었다. 열심한 기도로 주님의
뜻을 청했다. 그러나 일단 결정을 하면, 그는 제지할 어느 장애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돈 보스꼬는 일에 일단 손을 대었으면 가다가 멈추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어려움을 만나면 마치 길을 걸어가다가 돌덩이를 만난 사람처럼 한다. 처음에는 치우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안되면 넘어가거나 돌아서 간다. 그리하여, 내가 한가지 일을 시작했을 때, 내 앞에 장애물이 나타나면, 일단 멈추어서 손을 바꾼다. 그러나 눈을 떼지는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모과 타격은 익고 어려움은 평탄해진다.
- “가능성의 기준”에 꾸준하다는 것은 그가 단순한 실용주의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의 활동은 항상 초 자연적이며 깊이 묵상한 튼튼한 원칙에 비추어진 것이었다. 그의 또 하나의 행동 기준인 솔직한 낙관주의는 보다 높은 영역에로 끌어 올린다.
하느님은 그와 함께 계신 것을 알고 느낀다.
- 대단히 의욕적인 돈 보스꼬이긴 하나 유연하고 양보도 잘했다.
예정한 목표를 향해 한발자국씩 전진할 때뿐만 아니라, 자신의 원함, 원하지 않음의 원의 행사에 있어서는 그러했다. 그의 “교육학적 방법은” “이성, 자애, 종교”의 대 걸작이다. 그러니까 강력하게 밀고 나간다든지, 불굴의 법질서 같은 것의 자리는 없다.
딱딱한 규칙보다는 양선이다. 마음이 따르는 동기들이 우선되어야 한다.
- 사실상 돈 보스꼬에게 있어 교육은 “마음의 일”이다.
오랜 경험으로, 그는 청소년의 마음은 “딱딱하고 날카로운 것에는
영원히 닫혀 있을 성곽이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 마음의 주인이 되려면 마음의 길, 자유로운 응답의 길을 통해 가야 한다.
- 그에게는 그의 의욕적인 성격에서 상상되는 거칠고 딱딱한 것이라곤 없다. 오히려 아버지답고 사랑스럽고 이해심이 많고 꼬마들의 비위를 잘 맞출 줄 알아서 마침내는 그들이 삶을 때에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그런 분이었다.
- 그러나 돈 보스꼬는 순명의 넓은 영역에서 종교 지도자들에게나 시정당국의 마당 한 지시에 결코 거역하는 법이 없었다.
누가 정의한 대로, 그는 공격적인 성격인지라, 본능적으로 쉽게 남에게 순종하지는 않았다. 그를 시성 하면서 교회는 그의 순명은 영웅적이었다고 선언했다. 예를 들어 수년 동안 자신과 그의 대주교 사이에 있어 온 갈등을 풀기 위해 성청에서 준비한 유명한 “협정”을 무조건 승락한 그런 데에서도 나타난다.
문서는 까닭 없는 무거운 제 수정을 돈 보스꼬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 문서의 본문을 그의 평의회에게 읽어 주었을 때, 모두가 아연실책을 했다. 갈리에로 만 제외하고는 모든 이가 시간을 더 두고 생각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로마는 발연을 했으니 성인 돈 보스꼬에게 있어서 일은 끝난 것이었다. “협정”은 수락되었으며 완전히 준수되었다.
- 돈 보스꼬는 그 순명은 나에게 매우 힘들었노라고 후에 말했다. 교황은 돈 보스꼬에게 억지를 썼으니, 그의 덕을 계산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돈 보스꼬의 의지의 내부에서는 의지의 힘과 유연성은 상호 보완적이었다.
자상하면서도 엄한 부성애
- 로마노 과르디디는
“인간의 삶에서 어떤 큰 일도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것은 없다.
모두가 마음에, 그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했다. 돈 보스꼬와 그의 사업을 생각할 데 그의 부드러운 부성애, 그의 위대한 “오라또리오적 마음”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그의 교육학의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 카빌리아 신부의 정의를 들어보자.
“ 박애주의자들의 대리 식과 구리로 된 기념비적” 마음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위한, 어른들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부성애와 모성애”의 맥이 뛰는 그런 마음이다. 돈 보스꼬는 말했다.
“이 가난한 아이들이 너무 가엾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내 마음을 여러 조각 내어서라도 주고 싶다.” 이는 니따의 성 그레고리오가 “하느님의 박애”라고 부른 그런 진실한 모습이다.”
- 전례에서는 그를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라고 부른다. 스승인 것은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에게 사랑스런 충효였으니,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인 “집 없이” 집을 이루자는 것이 그의 꾸준한 바램이었기 때문이다.
- 그의 3대 후계자 필립보 리날디 신부는 증언했다.
“돈 보스꼬는 수도회라기 보다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자 하셨다.
웃 어른의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주의 깊은 부성애와 수하 사람들의 효성과 우애만을 기초로 한 가정을 세우고자 하셨다. 권위와 복종의 원칙은 지키면서도, 처벌 대우는 원치 않으시고 만사에 모든 사람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서 평등을 원하셨다.
- 아버지라고 불리우기를 좋아하셨다.
“나를 언제나 아버지라고 불러주면 좋겠다”가 부장적인 것이 그 시대의 특징으로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자녀들이 복종하고 섬기는 것이 아주 훌륭한 일로 인정되었었다.
- 오늘날 권위를 뿌리기 보다는 권위가 있는 아버지, 지시하기 보다는 솔선 수범하는 아버지, 어떤 뛰어난 인사이기 보다는 친구요. 형제인 그런 아버지 상이 대두 되고 있는데, 바로 돈 보스꼬는 그가 살고 있던 사회의 사람답지 않게 우리 동시대인과 닮은 점을 보인다. 그리하여 그의 아버지다움은 매우 현대적이다. 그는 그의 원장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웃 어른이기보다 아버지나 형제나 친구가 되시오.” 물론 그의 아버지 됨은 성 바오로가 자주 말하는 그 신앙 안에서 가부장에 가장 핵심적 동기가 있다.
그런데 해도 인간적인 멋이 부족한 그런 가부장이 아니다.
- 겨우 2살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혈육으로만 아니었지 아버지다운 모든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이들에게 부드럽고도 강한 사랑을 지녔으며, 아버지들이 겪어야 하는 힘든 수고와 고통을 견디어냈고, 가장이 지녀야 하는 큰 책임을 느꼈으며, 모성애에서만 볼 수 있는 무한한 헌신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전 생애가 이를 증거한다.
“어느 날 어느 시에라도 좋아 특히 영혼의 문제에게 내게 맡겨라. 나는 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겠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모든 것을 준다고 했으면 나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남겨 두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 란쪼 기숙학교에서 웃 어른들과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쓰셨다.
“여러분 200명이 사랑스러운 손으로 서명하여 보내준 편지는 내 마음을 모두 사로잡아서 주님 안에 여러분을 사랑하고 실은 열렬한 마음밖에 없다. 여러분에게 좋은 것을 해 주고, 여러분 모두의 영혼을 구하고 실은 그 마음 뿐이다.”
- 자상한 부성애가 잘 나타난 것은 지 유명한 1884년에 그의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보내신 로마에서의 편지이다. 거기에 그의 정신이 요약되어 있다. 그의 교육학적 경험과 그의 영성이 담겨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두 구절만 인용해 보자.
“여러분을 떠나와 여러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여러분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일이 내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사랑 받고 싶은 사람은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떻게? “친숙”, “부드러움”, “사랑”, “신뢰”를 보여주면서 “사랑 받을줄” 알게 하는 그의 재주는 그의 이런 비서 빌리에띠 신학생이 증언한다.
-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는 몰래 몇 개의 편지를 살짝 읽었다.
그 후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돈 보스꼬에게 이를 고백했다.
성인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감격하시면서 나를 가슴에 안아주시고, 책상 위에 있던 비밀편지, 공개편지 모두를 주워 모아, 통째로 다 내게 주셨다.”
- 이렇게 기본 방침적인 “연애”는 청소년 마음에 곧바로 이르러 가장 어린 그들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 성 레오날도 무리알도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돈 보스꼬가 청소년에 대하여 지닌 사랑은 그들 역시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했으니, 비교할 만한 다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 돈 보스꼬와 지낸 시간을 회상하면서, 오리오네 신부는 감히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를 다시 한 번 만나 보고 감사 드릴 수만 있다면 활활 불 붙는 숯불 위라도 걸어 가겠다.”
- 그의 두 번째 후계자인 돈 알베라 신부는 훌륭한 증언을 했다.
‘돈 보스꼬는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억제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나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이 어떤 사랑의 힘에 물들어 있었는데 그 사랑은 내 생각을, 내 말과 행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에 받아 보지 못한 사랑을, 나 개인적으로 어떤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 모두를 온전히 사로 잡아 만족하고 행복한 분위기 안에 살았다. 그분에게 있는 모든 것이 끄는 힘을 지녔고, 우리 어린 마음에 자시처럼 작용하여, 거기서 빠져 나간다는 일이 불가능 했다 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 모든 금을 준다 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니 우리들이 가진 그에 대한 놀라운 매력에 우리는 그 만큼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분에게는 아무 꾸밈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기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 그분의 말씀이나 행동 하나 하나에는 완전한 사랑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오는 성덕이 빛을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마음에서 타오르는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셨다. 그의 이러한 특별한 매력은 우리 마음을 정복해 냈다. 그분 안에서 무수한 자연적 은혜들이 그의 생활중의 성덕으로 인해 자연적인 것이 되어졌다.
- “항상 아버지”이셨던 돈 보스꼬는 무력하게 지고 들어가는 아버지는 결코 아니었다. 그의 책임에서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었으며, 야단은 그의 동력 자 들에게 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매우 무섭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다. 특히 훔쳤다든가, 모독하는 말을 했다든가, 스켄 들이 되었을 때에는 사정 보지 않았다.
-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돈 보스꼬는 이세상에서 둘도 없이 마음 좋은 사람이다. 망가뜨려라, 부수어라, 장난쳐라, 그래도 돈 보스꼬는 너희를 야단치지 않았으며 그러나 제발 영혼만은 망가뜨리지 말라. 그때에는 인정사정 두지 않는 것이다.
- 갈리에로 추기경은 말한다.
“내가 신학생일 때 어느 단순하고 순진한 청년이 어느 어른으로부터 스켄들의 희생자가 되었다. 돈 보스꼬는 이를 알게 되자 몹시 괴로워하셨다. 아부 애통해 하시며 내 앞에서 우셨다.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그 배반당한 순진성을 고쳐 주셨으나 못지 않는 결단력으로 그 과오를 범한 자를 즉시 떠나 보내셨다.”
- 이렇게 심한 경우에도 그는 늘 아버지다웠다. 잘못한 사람으로 벌하지 않고, 글 불러 그의 행위가 엄마나 나쁜 것인지를 이해 시켰다. 잘 타일러 뉘우치게 한 후, 마지못해 그를 부모 은인에게 넘겨 주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었다. 의도적으로 고집스럽게 명을 어길 경우에는 특별히 엄했다. 1859년 오라토리오의 자랑인 악단을 그 당장에 해체 시켰으나, 그가 되풀이 하여 강하게 이른 지시를 어겼기 때문이다. 4명을 제외하고 단원 전체가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
- 아버지다웠으나 엄했던 것은 그의 직접 동력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챌레스티노 두란도 신부는, 교장으로 있을 때 소위 그 “불의 학교(단기 선교사 양성학교)”의 프로그램을 바꾸었다. 그러나 의지가 강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실망하고 포기했다.
돈 보스꼬는 이를 불쾌히 여겨 이에 못마땅함을 나타냈다. “순명을 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요” 그러나 당사자는 변명하려 했다. 그러자 돈 보스꼬는 딱 잘라서 말했다.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본래는 이렇게 하기를 요구 했었다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보다 완전히 요구되는 이에게 돈 보스꼬는 조금 더 요구했다.
- 돈 보스꼬의 아버지다운 사랑의 깊이를 파고 들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두 가지 면, 즉 은유와 강인, 양선과 엄격성이 궁극적으로 보완되어 일치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리가 보는 그런 참된 부성애는 있지 못했을 것이다.
- 세심하면서도 강인한 마음
이것은 3번째로 보고자 하는 그의 궁극적인 상반성이다. 돈 보스꼬는 매우 마음씨가 섬세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감동을 잘하고, 애정에 기울어지기 쉬운 사람이었다.
이웃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줄 알았다. 그는 어머니 말가리다와 그의 생애 동안 항상 생생한 현존으로 함께하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의 학교에서 배운 모성적인 따뜻한 어떤 것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 이러한 감수성은 나이와 더불어 단련될 것이지만, 이미 어려서부터 분명히 나타났다.
- 어린이들은 모두 잘 운다. 그러나 잘 잊어버린다. 그러나 어린 요한
은 새끼 까마귀가 죽었을 때 몇 일을 두고 울었다. 나중에 갈못쏘 신부 그리고 친구 고몰로의 뜻밖의 죽음에 그는 오래오래 깊이 애통해했다. 젊은 사제였을 때에는 도리노 거리에서 헤매는 청소년, 감옥의 창살너머에 있는 청소년을 보고 몹시 애석해 했다. 그의 어머님의 임종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옆방에 들어가 기도 해야 했다. 나중에 레무엥 신부가 쓴 편지를 읽으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도메니꼬 사비오에 대한 단순한 기억만으로도 그는 감격했다.
“이 초고를 수행할 때마다, 나는 눈물 세를 내야만 했다.”
그의 아이들이 아프거나, 가족이 죽어나, 불행한 일이 생기면, 깊이 동참하였다. 사랑의 작은 표현, 오라또리오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의 환영, 은인이나 친구들의 친절한 행위 등도 그를 감격 시키는데 충분했다.
- 노년기에는 더욱 마음이 여려졌다. 멀리 간 선교사들을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감격했다. “여러분은 떠났다. 그리고 내 마음을 찢어 놓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은 기도가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며 말했다.
“나는 많이 필요 해요.” 루아 신부의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강론을 들으며 울었다.
- 다른 성인들의 전기에서 보듯 자연적인 이런 마음에다, 돈 보스꼬는 눈물의 영적 “은혜”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수덕의 측면에는 별로 민감하지 않으니, 인류가 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생각 해보면 눈물의 “은혜”는 그것이 진실한 것 일 때에는 위대한 성덕의 표시가 된다.
하느님으로 가득히 채워진 영혼에게 있어 하느님의 무한한 위대성을 생각하거나, 그의 구원적 사랑, 그의 자비, 그의 인애와 그의 정의를 생각할 때, 눈물이 나온다. 주님의 수난이나 죄의 중함이나, 영벌이나 혹은 일반적으로 우리 신앙의 신비들을 묵상 할 때 운다.
- 갈리에로 추기경은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
“돈 보스꼬께서 하느님 사랑이나 영혼의 멸망, 성 금요일, 예수님의 수난이나 성체나, 선종이나 천국희망에 관해 강론 하실 때에는 나도 여러 번 보고 내 친구들도 보았는데, 때로는 사랑에서, 때로는 고통에서, 때로는 기쁨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그 인애와 그 흠 없이 깨끗하신 순결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는 거룩한 감동에 넘쳐 계셨다.
- 돈 보스꼬의 예민성은 너무 강해서 만일 그가 그 반대되는 덕인 강인한 의지, 그의 감관과 정신에 대한 충분한 지배 능력이 없었더라면, 그의 섬세한 내적 균형은 깨어졌을 것이다.
- 예민한 사람들은 이기심 때문에 지나치게 성을 잘 내거나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내거나 기분이 잘 변하거나 무절제한 방종에 빠지기 쉽다.
- 우리는 돈 보스꼬가 얼마나 영웅적으로 자기자신의 성격에서 삐뚤어지기 쉬운 것이었는데도 좋은 방향으로 다스려 이끌었는지를, 그렇지 않았었다면 불행한 낙오자요 성인이 못될 거라는 것을 이미 앞에서 보았다. 여기서 다시 되풀이 하지 말자. 다만 그의 길은 감수성이 없었다면 살레시오적 “자애” – 보이는 표시를 통해 사랑하고 사랑 받게 하는 능력 핵심적인 살레시오적 자애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만 기억하자. 그런데 이는 그의 흠 없는 순결 없이는, 청소년의 인격에 대한 그의 지극한 존경심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쓰다듬고 입맞추지 않았다.
= 상으로 혹은 어떤 친절의 표시로 잠시 머리 위에 혹은 어깨 위에 손을 얹을 뿐, 혹은 겨우겨우 손가락이 스칠 정도 볼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신학자 페비릴오 신부는 증언한다.
“이러한 그의 행위에는 무엇이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순결하고 깨끗하고 아버지다운 것이 있어서 그의 정결정신에 우리가 서로 잡히게 되었다.
- 여기서도 “감수성”과 “자기제어”,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보완적인 덕들이다. 하나 없이 다른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제 3 장 :
완전 성인
영국 신문기자 더글라스 하이드가 이냐시오 살로네에게 오리오네 신부의 전기를 쓸 결심이라고 말하자 이탈리아 문학을 오늘날 세계에 알리는데 매우 공로가 큰 작자였던 이냐시오 실로네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쓰려면, 어찌 되었건 오리오네 신부를 가톨릭 신자 베버릿지(유명한 경제 학자)의 임종이 되게 하지 마시오. 오히려 망칠 뿐이오. 물론 오리오네 신부가 자선 사업을 했고 사회 정의를 위하여 일한 건 사실이오. 그러나 그에게서 특별했던 것은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완전히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힘으로 해 나갔다는 것이오.”
돈 보스꼬에 대하여서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의 삶은 오로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숨겨 있으면서 동시에 나타나 있는 그의 성덕의 빛에 비추어서만 설명이 가능해진다.
숨은 성덕
돈 보스꼬는 그의 지상 생활 동안 그의 성덕을 내 보이기 보다는 숨겼다 무수한 사람들의 그 옆을 스쳐 지나갔지만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가 “성인” 이라는 소문이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선 유럽에 퍼졌을 때에도, 아직도 그를 역설적이게도 덕이 있는 사람이기 보다는 수단가라고 보는 사람이 항상 있었다. “돈 보스꼬, 돈 보스꼬는 거짓말쟁이요, 사기꾼, 성성보다 위에 서려는 건방진 사람이지. 아니 도대체 돈 보스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학식도 성덕도 없는 사람이, 주교가 하라는 대로 하지 무슨 수도회를 세우겠다고 고집인가?” 라고 훼리에리 추기경은 말했다.
사람들은 그를 너무 “약고”, 너무 “고집스럽고”, 너무 “돈을 밝히고”, 너무 쉽게 자기자신에 관하여 말하고, 말하게 하는” 사람으로 간주 했다.
성인들의 세계에는 중력의 법칙이 있다. 성인들은 서로 끌려 당기고, 즉시 서로 이해한다. 그렇건만 1851년경에 돈 보스꼬를 안 성 레오라르도 무리알도도, 그의 성덕을 믿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그후 훨씬 뒤 “그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 뒤”,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그의 사업에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보고 말하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그러나 그의 성덕은 아주 일찍부터 그의 주일학교 주변에서는 인정되어 있었다. 그에게서 “무언가 초성적인 것”이 돈 보스꼬의 말이나 행적에서 드러나면 그것을 수집하기로 약속한 “위원회” 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그가 40을 조금 넘은 1861년까지 올라 가서의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함께 산 사람들에게도, 갈리에로 추기경의 말을 빌리면 그의 생애는 평범해서 모범적인 어떤 사제의 삶과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한다.
체리아는 이렇게 기술했다. “그렇게 평범한 겉모습 아래 그렇게 비범함을 숨기고 있는 사람을 드물다. 큰 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그는 항상 한결같이 자연스러웠다. 언뜻 보아서 그는 그저 평범한 좋은 사제에 불과 했다.”
“좋은 사제”는 물론이나, 그렇다고 해서 시성을 할만한 그런 큰 성덕을 생각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레시노 신부의 말이다. “돈 보스꼬가 아주 훌륭한 사제라는 것은 나도 보아 알고 있었다. 우리만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 그래서 우리 모두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시성 절차를 밝고 시성을 할만한 성덕을 지니셨다는 생각은 내 머리에 스쳐 지나간 적도 없다.”
필립보 리날드도 그렇게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그의 성덕의 참 면모는 그의 단순한 태도, 말씨 좋고 전혀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에 의하여 가려져 있었다. 하느님의 비밀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의지와 깊은 겸손이 있었기도 하지만, 이는 또한 그의 성품이기도 했다. 피에몬떼 지방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속해 있는 감정을 쉽게 내어 놓지 않았다.
오늘날도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거의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드물다. 단순히 “띠”라고 하는 아스티 방언을 쓰는데, 고지대 랑가의 표현이기도 한 이 말은 “들어봐”하는 뜻으로 참된 관계를 의미한다고 피치넬리는 저술했다.
돈 보스꼬는 항상 그의 계획과 사업에 대하여도 말을 했는데, 그의 아들들과는 그저 털어놓고 이야기 하였다: “여러분에게 나는 비밀이 없다.” 그러나 그의 내면 생활은 아무에게도 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이나 그의 회고록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것과 같이 않았으며,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의 그것과도 같지 않았다. 아주 겨우겨우 돈 보스꼬의 종교적 감정 행동의 동기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스텔라 신부는 기록했다.
문제는 단순히 성격 문제만은 아니었다. 돈 보스꼬를 겉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그의 참된 성덕에서라기 보다, 우선 그의 그칠 새 없는 일에서 놀라게 된다.
그의 겉 모양은 그의 깊은 내면 세계를 잘 숨겨내었으니, 체리아의 말대로: “그의 최고 활동 시대에 돈 보스꼬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극소수이다. 오히려 그의 일을 기록한다는 사람들마저도 그의 깊은 기도 정신을 깊이 파고 들지 못했으니, 그저 장엄한 사건들만을 이야기 하기에 급급했다.”고 해야 한다.
돈 보스꼬의 집에 있던 겉보기의 부질서는, 그의 어려운 시작 때에, 그의 성덕에 관한 자료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발도꼬에 있던 가족적인 생활을, 웃어른과 학생들을 서로 친하게 하고,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복음적인 사랑이 넘쳐나던 그 생활을 모르는 사람은 머리 속에 다른 교육 모델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성인이 택하고 있던 그것이 과연 종교교육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의심했을 것이다. “만일 돈 보스꼬가 진실로 신심이 있다면 저런 무질서는 막아야 했을 텐데.” 라고 미래의 추기경 피토키는 제의 방에서 떠들고 소란을 피우는 소년들이 귀찮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정부에서의 성청 공식 대변인인 몽시뇰 또르또네는 오라또리오의 상황에 관하여 주교성성에 낸 1868년 8월 6일의 보고서에서, 그가 받은 “괴로운 인상”을 숨기지 않았다. 오락 시간에 신학생들과 소년들이 “달리고, 놀고, 뛰고, 서로 따귀도 올려 붙이기를 하는데 어떤 쪽은 예의가 없었고 또 어떤 쪽은 존경이 조금밖에 혹은 전혀 없기도 한” 그런 모습이 보인 것이다. “그 착한 돈 보스꼬는 신학생들이 성당에 조용히 있는 것으로 만족하여, 그들의 마음을 진정한 교회적인 정신으로 다듬어 주는 데에는 다소 소홀히 한다.” 고 했다.
물론 돈 보스꼬도 일이 완벽하게 되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결코 완벽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협력자들의 젊은 혈기를 사랑과 인내로 참아주었다. 그들 안에서 참된 신심, 일에 대한 사랑, 흠 없는 도덕성이 보이기만 하면 만족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부터 완벽하고 성숙하게 나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아무도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인가 시간과 더불어 되어갔다. 그의 구호는 “하느님의 일은 대개 차차로 완성되어간다”는 것이었다. 실제가 그렇게 되었다. 그의 사업은 일반적으로 좀 무질서하게 시작되었으나, 끝내는 질서 있게 되었다.
그는 1875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라또리오 초기에는 외적으로 무질서가 적지 않았다. 나는 그 무질서들을 보고 있었고,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대로 앞으로 가게 놔 두었다.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것만 아니면 되었다. 한꺼번에 여러가지 조지 않은 것을 다 제거하려고 했다면, 아이들을 모두 내어 보내고 오라또리오의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다. 신학생들은 그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모든 잡동사니를 제멋대로 하는 일종의 독립적인 공기가 감돌았다.”
돈 보네띠는 그의 기숙학교에서 만사가 완벽하기를 원하려 했다.
돈 보스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최고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그는 이렇게 덧붙혔다: “불행한 일이겠지만 아주 나쁜 가운데에서는 중간쯤에서 만족해야 한다.” 가파쏘가 “좋은 일은 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어떤 때 좋은 일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하면 적당히 라도 족하다”고 확신 있게 대답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은 “최고의 선은 선의 적이다(수는 우의 적이다)”라는 것으로, 그의 삶의 가장 깊은 확신의 하나를 실제로 해설해 준다.
좋은 일을 잘 하려는 완전벽 때문에 그가 그의 이니셔티브를 죽인 일은 한번도 없다. 적당히 라도 선을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더 유익하다고 보아다. 미래의 가정된 “보다 나은 선”을 바라고 선을 미루는 것보다 낫다고 보았다. 찌끄러기 레몬으로도 괜찮은 레몬 차를 아직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중간치의 인물들로도 성인은 기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
니짜의 블류 부인은, 아트스의 본당 신부를 알고 나서, 성덕이란 어떤 것이다 하는 것을 그 나름대로 확신했었다. 그러다가 돈 보스꼬에게 축하를 드리는 잔치에 참가하여, 돈 보스꼬가 일어나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하여 즐겁게 축배를 드는 모습을 보자 놀랬다. “이것이 성인이가?”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에 그로부터 친절하게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을 대 비로소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먹든지, 마시든지, 만사를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시오.”
첫 인상에 머물지 않고, 그를 주위 깊게 관찰한 사람이라면, 특히 그의 만년에 가서는 그의 얼굴에서 “하느님이 무엇인가를 위하여 창조해 놓으신 사람이라는 것을 읽기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특히 인상 깊은 것은 그의 섬세한 미소, 악은 눈 보통을 넘는 분위기, 그리고 강인한 의지라 할 것이다.”
드러난 성덕
숨어 있으면서도 드러난 성덕, 이것이 돈 보스꼬의 생애에서 나다니는 여러가지 역설중의 하나이다. 성격상 그리고 고의적인 겸손의 정신 때문에 그는 그의 내면 세계를 숨기려 했으며, 자신의 장점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성덕은 그의 눈에서 빛을 발하고 그의 몸 전체를 통해 배어 나왔으며, 그의 행동 전체에서 알게 했다. 예술가가 그의 작품에 자신의 모습을 남기듯 돈 보스꼬는 그가 생각한 것을 쓴 것, 말한 것, 한 것, 하게한 것 등에 자신의 인호를 남겼다.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안다. 성덕은 성덕의 사업을 보고 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교회는 성인의 의중을 뚫고 들어가 그 복음적 영웅성을 판단하게 된다.
시성 과정에 사용된 무수한 기록들은 돈 보스꼬의 덕에 대한 훌륭한 찬미가들이다. 시성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고문관과 판사들은, 겉으로 그의 생활이 만 가지 외부 활동으로 흐트러져 있지만, 실상은 최고 중력의 구심점에 하느님, 오로지 하느님만을 모시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울로 알베라가 돈 보스꼬에 대하여 기록한 바는 옳은 말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항상 일한다는 것이 그(돈 보스꼬)가 뭇으로 보다 모범으로 쓴 살레시오 법의 제 1조라면, 하느님의 품에 자신을 던지고 거기서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완전한 행위였다.”
자명한 것은 다양한 그의 활동의 저변에는 애오라지 초성적인 동기만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과, 교회에 대한 전적인 그의 호응 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자명한 것은 그의 하느님과의 일치의 풍요성은 휴식을 몰라서, 가장 투명하고 절대적인 형태로, 그의 온 존재를 침투할 만큼 철저 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성인은 넓은 의미로 보아, 고딕 시대의 자녀들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을 향한 열망이 무한하여, 그들에게 충분은 결코 충분해 보는 일이 없다. 돈 보스꼬에게 역시 그러했다. 시성 절차의 제기자인 비베스 이 뚜또 추기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돈 보스꼬의 생애를 깊이 연구해야만 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위대한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보옥 같은 덕들을 나는 손으로 만져 보는 듯 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은, 가장 위대한 성인들의 그것과 비길만 했다. 예수 수난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성덕의 놀라운 표시로서, 영범에서 비범하여 일상생활에서 아무 것도 겉으로 들어나지 않았다. 나는 돈 보스꼬의 생애를 많이 연구 했는데 그럴수록 그의 모습은 내게 섭리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다시 말하리라: “나는 시성 절차를 여러 번 접해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초성적인 것으로 가득한 것은 보지 못하였다.” 또한 신앙의 보호자인 미래의 추기경 살롯띠도, 돈 보스꼬의 생애를 깊이 알고 난 후, 그의 “기적적인 사도활동”에서 보다 “그의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지혜롭고 드높은 탑” 때문에 놀랐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성 비오 10세에게 향하여 덧붙혔다: “교황 성하, 모든 이가 돈 보스꼬의 이 다른 면을 깊이 완전히 안다면, 이 사람을 얼마나 더욱 칭송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깊이 그리고 세계적으로 칭찬을 받는 사람이지만 말입니다.” 시편은 말한다: “하느님은 그의 성전에서 경탄스러우시다.” 그러나 더욱 경탄스러우시고 다양하신 것은 하느님 자신이 산 돌로 쌓으신 곧 성인이라는 그 성전에서이시다. 돈 보스꼬는 이러한 돌들의 하나이다. 아니 위대한 영적 후손의 창립자요, 시조라는 그의 역할 때문에 주춧돌이다. 슈스텔 추기경은 단언한다: “돈 보스꼬 만한 인물을 찾아내려면 교회사를 모조리 되 거슬러 올라가 대 수도회의 성인 창립자들에게까지 가야 한다.”
제 4장 겁을 주지 않는 기적가
돈 보스꼬는 특히 그의 말년에 기적가라는 이름을 떨쳤는데 이 평판은 헛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양심의 비밀을 읽고, 예언적인 꿈과 환상을 보며, 숨은 일을 알아 내고, 원거리에서 힘을 미치며, 치유와 기적의 은사가 있고, 마귀의 훼방을 받으며, 만년에는 탈 혼의 현상도 지닌 사제였다.
약간 전설적인 묘사로 하여 어떤 일화는 과장되었을 수도 있으며, 어떤 것은 근거가 불충분한 것도 있다. 그렇지만 돈 보스꼬의 생애는 너무나도 확실한 초자연적 사건들로 충만하여 넘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대인은 중세기의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특별한 듯한 것들에는 지나친 의심을 품는 경향이 있으나, 그렇다 해서 이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순진한 믿음과 체계적인 불신 사이에는 조용히 검토 해 볼 여지가 남아있는 것이다. 바오로 6세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를: “독특한 현상을 보이는 어떤 사람들의 영적인 환상들에 대하여 교회는 대체로 신중한 자세를 보이며 불신해 보는 것은 사실이나, 교회는 하느님께서 자연 현상 가운데에 기적적으로 허락해 주시는 어떤 사람들의 초성적 체험 혹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지극한 존경심으로 대했으며, 또 그렇게 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돈 보스꼬의 생애에서 넘쳐나는 “이상한 일들”에 대하여 미리 불신의 태도를 갖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기적이나 예언, 그 밖의 어떤 비상한 사건들도 성덕 그 자체와 혼동될 수는 없으니, 성덕은 신적인 생명의 영웅적인 역동성이며, 전적으로 내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선익에 근본적으로 유익한 이 은혜들은 성덕을 나타낼 수도 있고 이를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적가는 존경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겁을 주기도 하는 성인이다. 이는 하느님과의 가까움 때문이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신적인 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타입의 성인의 기미가 돈 보스꼬에게는 전혀 없다. 그는 “겁을 주지 않는 기적가”인 것이다.
지극히 온순한 빛을 지닌 비상함
신적인 힘이 조용히, 거의 눈에 안 뜨이게, 그의 생애에서 터져 나왔다. 그래서 모든 이가 다 이를 알아채지는 못할 정도였다. 요한 세자 레뮈엥은 기록한다: “그는 아주 은은하게, 우리의 연약한 본성에 거의 서툴지 않게, 극히 단순하게 자신의 비상함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보면, 축성한 성체가 그의 손 안에서 불어날 때, 이를 아는 사람은 그 본인 뿐이었다. 그리고 아침식사의 빵을 수백 개 증가 시킬 때에도, 이를 알아차린 사람은 프란치스꼬 달마쪼 뿐이었으니, 그는 성인 뒤에 숨어서서 이 기적을 혹시나 하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아들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하여, 밤이나 호도를 불렀을 때, 자루 속에서 계속 새 것을 끄집어 내는 옛날의 기적가들처럼 태연하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비상한 일의 소문이 나거나 혹은 어떤 소년이 아주 단순하게 이 일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물을 때에는 성인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화제를 돌렸다.
보통 정도를 넘게, “치유의 은혜”를 소유했다면, 기적을 진정 해 내신 분은 오로지 마리아 신심을 어렵지 않게 납득 시켰다. 그는 말한다: “천상 힘으로 은혜를 내려 기적을 하시는 분은 마리아시니, 당신의 천주 성자께로부터 이를 얻어 내시는 것이다.” 그는 성모님의 이름으로 얻은 은혜임을 글로 발표하게 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적지 않은 사건들이, 그 성격상, 망각에 싸여 있다. 지은 죄를 알아 말해준다든지, 숨은 생각을 지적해 낸다든지, 어떤 개인에게 해당되는 어떤 예언을 하는 그런 경우들을 생각해 보라, 그래서 돈 보스꼬 곁에서 여러 해를 살면서도 이런 사건들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안젤로 사비오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1860년에 서원을 한 회원으로, 시성 절차에서 이렇게 말했다: “몇몇 수도회 형제들은 돈 보스꼬가 마음을 읽고 예언을 하는 특별한 은혜를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들 확언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벨타냐 몬시뇰도 똑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이런 일들이 정말이라고 할만한 확실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돈 보스꼬는 대단히 예리한 심리적 직감력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래서 카리스마와 자연능력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긋기가 그에게 있어 늘 실이지는 않다. 그가 요셉 알벨또디 박사에게 한 말 중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이 있다: “14세 미만의 소년을 내게 데려오면 나는 내가 원하는 아이로 만듭니다.” 이는 카리스마적인 사람의 말이냐, 아니면 보통 자연인의 말이냐? 아마 양쪽 다 일 것이다.
따로 강조해도 좋은 것이 그의 “꿈”이다. 다 아는 일이지만, 꿈은 통제할 수 없는 환상의 세계요. 무의식의 산물이다. 꿈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다. 꿈을 꾸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 보스꼬는 매일 밤 꿈을 꾸었다. 그러나 어떤 꿈은 보통 꿈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때는 그의 머리로 이야기를 “꾸며내어” 청소년들과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들려 주곤 했다.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내용들이었다. “지금 너희들에게 해 주려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무언가 교훈이 될 것이다.”
어떤 다른 꿈들은 논리가 매우 정연할 뿐 아니라, 미래를 예언하며, 창립자로서의 그의 미래를 명확히 제시해주고, 임박한 죽음을 예고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마귀의 교묘한 모략인 줄로 알고 묵상 했다. 그러나 마침내는 믿게 되었으니, 이 꿈들은 진실을 말했던 것이다.
얼마 후 이 꿈들이 “초성적”임을 주저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꿈이자 환상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의 농촌 생활에서, 그리고 후의 발도꼬 생활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한 꿈으로, 이상한 꿈이었으나, 내용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매우 풍부했다. 이 꿈들을 이용하여 이 성인 교육자는 그의 집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는 일을 멀리 했으며, 은총의 생활과 하느님과의 우정의 생활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사업의 영광스러운 발전에 대한 그의 장담을 믿은 사람들의 열심을 북돋아 주었다.
“작은 꿈”이라 부를 수 있는 꿈들이 있는데 이러한 꿈들은 주로 주일 학교의 생활에 관계된다. “큰 꿈”이라 할 수 있는 꿈들도 있으니, 이는 수도회의 초창기와 그 발전에 관한 것들이다. 수차에 걸친 “아홉 살 때의 꿈”이나, 선교지에 관한 꿈, 살레시오 카리스마와 그 정신에 관한 꿈들이 “큰 꿈”이라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장미밭 길”, “10개의 금강석”, 살레시오 사업을 파괴하기 위하여 가장 적당한 방법을 찾아내려는 “마귀들의 대회”의 꿈등이 있다. 이러한 “큰 꿈”들은 많이 않고 그 중대성도 쉽게 알 수가 없으니, 이는 상징과 환시의 막에 둘러 싸여서, 참되고 깊은 수덕적인 면과 살레시오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살레시오 전통에서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중요한 원천으로 간주해 온다.
그러나 독특한 일이 있다. 돈 보스꼬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꿈에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숨기기 위하여 꿈이라고 변명하려 하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꿈은 자면서 꾼다.”
그저 “꿈”이다. 그러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이런 비슷한 일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관심을 이 꿈에 두지 말도록 하여라.”
“이것은 나의 꿈 이야기 이다: 각자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여라. 그러나 이것이 어디까지나 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전혀 티를 내지 않는 능숙하게 자신을 숨길 줄 아는 기적가라는 것이 여기서 보인다.
타당한 평가
초성적인 것, 자연 이상의 것이 돈 보스꼬의 생애에서 폭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데 우리는 이를 적절하게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카빌리아의 말대로 돈 보스꼬는 “성 요셉 다스카르피노 혹은 프란치스꼬 다 파울라, 섭리에 맡기고 마음이 가는 대로 그때 그때 처리했던 꼬똘렝고와 같은 그런 분들처럼 손에서 기적이 술술 빠져 나가는 그런 성인이 아니다.”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것은 기적, 예언, 환시가 아니라, 그의 영웅적인 덕, 가난한 청소년과 비천한 서민들의 대열을,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보다 나은 상태로 끌어 올리기 위한 매일의 힘든 수고 등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하루도 쉴 줄을 몰랐고, 하느님께 오로지 매달리면서도, 오직 자신에게만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듯이, 부단히 궁리를 했으니, “섭리는 우리의 막대한 노력으로 도움 받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비상함은 돈 보스꼬와 그의 환경의 종교성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일종의 수덕과 사도 활동의 형태에 자극이 되었다”(피에트로 스텔라).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창립자로서의 사업에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살레시오 수도회 회헌의 인준이 로마에서 난관에 부딪치자, 돈 보스꼬는 인간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즉석 치유의 기적 두 개를 했다.
베르바르디 추기경의 조카를 낫게 하고, 위독한 상태로 의자에서 꼼짝도 못하는 안토넬리 추기경을 낫게 했다. 이 두 고위 성직자의 개입은 그의 일이 좋게 풀리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어느 날 그의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 놓았다: “너희들 말해 보아라. 만일 하늘에서 매번 어떤 특별한 도움을 안 보내 주신다면, 이 불쌍한 돈 보스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자신의 사업의 성공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하느님의 손, 성모님의 보호가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그는 하느님의 특별하신 압력아래 살고 있다는 확신이 아주 뚜렷했기에,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어떤 초성적인 사건의 의견을 주지 않은 채, 수도회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가 본 일이 없었고, 주님의 명령이 앞서지 않은 어떤 변경, 완성 혹은 확장도 있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 물어 볼 수 있다: 자신의 일생을 통과하는 초자연적인 일에 대하여 그는 어떤 반응을 했을까? 매우 겸허한, 나무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자신의 기적의 유일한 행위자이신 하느님의 손 안에서 자신은 도구, 다만 도구일 뿐임을 느끼는 충실한 종의 반응이다: “이러한 사업에서 나는 그저 겸허한 보잘것없는 도구일 뿐이다.”라고 했다. “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시다… 도리노 대교구에서 나보다 더 가난하고 나보다 더 자질이 없는 사제를 발견하셨다면, 내게 대하여 말해지는 그 사업들의 도구로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를 선택하셨을 것이고, 이 못난 돈 보스꼬는 한 구석에 제쳐 두셨을 것이다” 라고 동정 마리아의 봉헌자 펠리체죠르다노에게 토로했다.
그의 영적 유서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세세한 부탁이 들어있다.:
“나는 돈 보스꼬가 하느님께로부터 은혜를 얻어냈다든가 어떤 방법으로나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를 절대로 말하거나 쓰는 일이 없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그런 사람은 해로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선하심이 내게 풍성하게 있었다 해도, 나는 전혀 초성적인 일을 알지도 못하고 행해 본 일도 없다.”
그의 개인적 삶에서 있었던 놀라운 일들은 두 가지 운동을 결정지었다.
하나는 그를 감싸는 신적 힘 앞에 놀라와 하는 예언자의 그것이다:
“이러한 일은 하느님 앞에서 돈 보스꼬의 책임을 무서울 만큼 자라나게 하는 것들이다.” “내가 처한 위치에서의 나의 책임을 생각하면 온몸이 떨린다. 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무한한 책임을 내 어깨 위에 지워주고 있다.”
하나는 자신 안에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두고 주님을 찬양하던 마리아의 그것이다. 돈 보스꼬는 교육자로서의, 그리고 처음부터 안내를 받은 창립자로서의 자신의 삶에 심어진 초성적인 사건들을 그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나 은인들에게 겸손하게,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일은 드러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삶이 수도회의 그것과 너무나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돈 보스꼬의 삶은 수도회의 삶과 전적으로 합치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니 내 생애에 대하여 이야기 하자. 이는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과 수도회의 큰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나 많은 일들이 알려지는 일은 필요하다.”
“알려져야” 하는 일들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이다. “기적, 예언적 꿈 기적적인 치유 등은 그의 교육자, 창립자로서의 삶 동안 그로 하여금 하느님에 대한 충만한 신뢰의 표현을 하게 했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게 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제까지 된 일이나 되어지는 일들은 그분의 사업이다.” “하느님은 당신 사업을 놀랍게 행하신다.”
“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인도를 받으며 도움이신 마리아의 보호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