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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지혜 11, 24. 12, 1)


200711

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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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들,


오늘 우리는 풍성한 희망을 우리 앞에 열어주는 새해를 시작합니다. 이 새해 첫날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새해의 새로움은 ‘시간이 은총임을 우리에게 기억시켜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은 인간적· 영적 성장의 기회이고, 우리의 삶을 선물로 여기며 살아가도록 더욱 노력하는 기회이며, 생명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젊은이들을 도와주어 생명을 완성에 이르기까지 성장시키고 수호하도록 도와주는 기회입니다. 저는 시편작가와 함께 이렇게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90, 12).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나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으로 축소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폭력으로 인해 시련을 겪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그것 만이라도 이미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더라도 말입니다.

평화는 인간이 자신· 타인·자연· 하느님과 완전히 화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 정의, 발전, 개인· 사회 단체· 국가들 사이의 용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시편작가와 함께 저는 이렇게 고백하기를 좋아합니다. “자비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85, 11). 하느님의 이 모든 놀라운 구원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 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2007년 한 해 동안 우리를 동반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전례를 통하여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고 하시며 우리에게 예수님을 맞아들이라고 초대하시면서 그분께로 우리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요한 10, 10 참조) 오셨습니다. 그분은 부활이고 생명(요한 11, 25 참조)이시며, 인간 실존의 충만함을 발견하신 분이시며 죽음에서 생명에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를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제로 하는 올해의 영적· 사목적 계획인 이 생활지표를 여러분에게 선사하면서 모두들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생명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생활지표를 설명하기 전에 마지막 서한 이후의 최근 3개월 동안의 체험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2007년도 생활지표


생활지표를 해설하기 전에 한 가지 작은 지적을 하겠습니다. 생활지표가 살레시오 가족 안에서 점점 더 영적· 사목적 프로그램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점에 관해서입니다. 생활지표를 영적· 사목적 프로그램으로 삼을 때에 단기 프로그램을 따라 가는 것을 피하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 관구와 분원의 교육-사목계획을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생활지표는 살레시오사족 전체를 위한 것이지 살레시오회원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적어도 (관구와 분원의) 교육-사목계획의 노선과 생활지표를 연결시키도록 노력함으로써 체계적인 교육-사목계획 실현에 도움이 되는 자극으로 이용되도록 해야 합니다.



  1. 들어가며


지난 해의 생활지표는 살레시오가족 안에 커다란 열정을 불어넣어 주어 수많은 창안들을 내게 하였습니다. 올해의 생활지표를 통해 작년에 시작한 여정을 계속하게 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정 사목에 헌신했던 2006년에는 ‘제5차 세계 가정대회’ 라는 중대한 교회 행사가 개최되어 인간 생명과 사랑의 가치를 재천명하였습니다. 가정은 바로 그 사랑과 생명의 특혜적인 자리입니다. 다수의 살레시오가족들을 포함한 수많은 참석자들에게 하신 교황님의 말씀은 희망을 불러 일으켰으며, 생명과 사랑의 요람인 가정의 쇄신을 위한 여정, 생명 수호의 여정을 계속 걸어가도록 우리에게 촉구하였습니다.

그 반면에 이라크와 중동에서의 전쟁, 테러, 통제할 수 없는 이주민의 증가, 어린이와 여성들에 대한 착취와 학대, 배아 세포 실험을 허용하는 법률 등 인간 생명을 또 다시 경멸하는 비극적인 사건들도 겪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이라는 중대한 선물이 오늘날 위협받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제8차 세계 청년대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생명에 대한 위협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되고 있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이나 자연의 힘처럼 외부에서 오는 위협만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조직적으로 계획된 위협을 말하는 것입니다. 20세기는 생명을 향한 대 공격과 끝없이 계속되는 전쟁의 시대 그리고 무죄한 인간 생명의 지속적인 파괴의 시대로 기억될 것입니다.” 1

돈보스코께서 실천하시고 우리에게 소중한 교육적 유산으로 전해주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인본주의 정신으로 고취된 살레시오가족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현실 앞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이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생명과 사물과 역사 속에 있는 모든 긍정적인 점을 가치롭게 여기고 수호하며 발전시키게 합니다. 그리고 선의 힘을 믿고 악에 대해 불평하기 보다 선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하며 생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인간적 가치들을 사랑합니다. 2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숨, 하느님의 성령에서 비롯되었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면 우리 실존 위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사랑이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십니다.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을 미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에게 위협적이고 억압적인 존재이므로 보다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배제해야 하는 존재라는 모호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거슬러, 우리는 인간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며 인간 생명의 가장 확실한 수호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렇게 드러났고 이를 지혜서의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존속할 수 있었으며 당신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당신께서는 탈선하는 자들을 조금씩 꾸짖으시고 그들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는지 상기시키며 훈계하시어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십니다.”(지혜 11, 24-12,2)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통해 생명을 주시고 사랑으로 이를 지켜주시며 사랑하는 운명을 주셨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도록, 책임 있는 봉사로 생명을 성장시키도록, 희망을 가지고 생명을 수호하도록,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선포하도록, 특히 가장 연약하고 방어할 힘이 없는 젊은이들, 공허와 불안 사이를 표류하는 이들에게 그 가치와 의미를 알려주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살레시오가족 모두에게 당부합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또 생명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내어 맡기십시오. 생명 증진과 수호를 위해 단호하게 투신하십시오.


생명이 현저하게 위협받고 있는 이 때에 살레시오가족으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생명을 침범할 수 없는 선물로 여기고 이를 기쁘게 감사하며 받아들인다.

  • 책임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봉사하며 살아간다.

  • 모든 생명, 특히 가장 약하고 가난하며 방어능력이 없는 이들의 존엄성과 품위를 수호한다.

이 생활지표를 통해 우리는 인간 생명의 가치와 그 불가침성을 명백하고 확고하게 재천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또 각자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호소하고자 합니다. 모든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수호하고 사랑하며 생명을 위해 봉사하십시오! 이 길로 가야만 정의, 발전, 참된 자유, 평화, 행복을 찾을 것입니다! 3


  1. 현대 생명 문화의 모호함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로마 교구 사제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사목의 핵심은 참으로 생명을 선택하도록 도와 주는 것,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시는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쇄신하도록 도와주는 것,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합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우리 시대 문화의 심각한 모순점들에 대하여 숙고하도록 노력한다.

- 현대인들의 생활 방식이 던지는 질문을 포착한다.

- 현대의 삶 속에서 긍정적인 점을 가치화하고 이를 강화한다.

- 인간 실존과 인간 세계를 위협하는 ‘죽음의 문화’를 고발한다.


존엄성이 선포되고 수호되기도 하지만 침범과 위협을 당하는 인간생명

현대인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불가침성에 대하여 훨씬 더 생생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사형, 고문, 학대 그밖에 인간의 품위를 훼손하는 어떠한 모독이든지 강력한 반대를 받고 있습니다. 현대의 법률과 사회적 방책들은 인격 존중과 인간 생명 수호의 필요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외치고 있는 것, 법령에 성문화된 것들을 거슬러 범죄를 계속 저지르는 억압들을 모른 척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낙태로 인하여 인간 생명이 태어나기도 전에 제거되고 있으며, 병자에 대한 그릇된 ‘동정심’이나 ‘품위 있는 죽음’ 혹은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이와 거의 비슷한 일이 임종자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어린이가 학대 받고 성폭력을 당하고 있으며, 성산업 조직에 의해 강제로 성매매에 내몰리어 노예가 되고 착취 당하는 여성들이 있다고 하늘을 향해 외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욱 슬픈 일은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마약과 알코올 중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고, 무분별하고 무질서하며 책임 지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사회와 세상 안에서 품위 있는 삶의 가능성이 더욱 더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최저 생활비로 생계를 이어가는 소외된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마치 열등한 것처럼 간주하여 착취 당하고 잊혀진 나라들과 대륙들이 있습니다.


삶의 질 : 모호한 목표점

오랫동안 사람들은 생존에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을 확보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자원이 없을 때 바라보는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삶의 질은 사회와 개인이 추구하는 새로운 목표가 되었습니다.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은 그것을 추구하는 동기에 따라 여러 다양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품위 있는 삶을 발전시키고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건을 제공하는 인도주의적 동기를 따르는가 아니면, 실용주의와 쾌락주의적 착상으로 삶의 질 자체가 절대적인 요구가 되는가에 따라서 생명은 측정되고 평가 받게 됩니다. 그래서 소정의 수준에 미달되는 사람들의 생명을 제거하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돌봄을 받는 환자와 방치하여 형편 없는 수준의 삶을 사는 환자들(일부 장애인, 무의탁 어르신, 만성 병자 등) 사이에 격차가 생깁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더 효과적인 치료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덜 중요하고 덜 유용하고 너무 길다고 간주되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제거되기 까지 하는 생명도 있습니다.

쾌락주의와 소비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소수인들이 누리는 고급 생활을 위하여 지구 생태계의 훼손과 파괴(다양한 형태의 오염, 기후 변화, 자원과 물의 위기, 생물 다양성의 감소 등)를 부추기고 지속 불가능한 발전 모델을 조장함으로써 전인류의 미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파괴적 침략의 증가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 모든 생명체에 대한 관심, 자연 환경 존중 등의 의식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표지들과 함께, 안타깝게도 점점 더 심각하고 파괴적인 폭력 현상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계속 무죄한 희생자들을 내고 있는 전쟁과 또 이를 도와주는 무기 산업을 생각해 봅시다. 민족과 부족들 사이의 잔혹한 전투들도 마찬가지여서 온 백성이 고향을 버리고 타국으로 피난처를 찾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이주민들을 향한 외국인 혐오성 폭력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들을 위협과 위험 요소로 생각하고 가장 기초적인 기본권을 부정하면서 착취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의 좌절 체험으로 인한 반생명적 자세에서 비롯되는 다른 형태의 폭력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안에는 생명과 타인에 대한 적대감, 거부, 증오가 자라고 있습니다. 물건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학대하며 이유 없이 손해를 끼칩니다. 이러한 폭력은 많은 경우에 길거리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비행 청소년 집단에 의해 자행됩니다.


반 생명 문화


더욱 걱정스러운 점은 생명을 수호하고 증진시키기 보다 이를 훼손하고 무시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소멸에로 이끄는 생각과 판단과 행동 양식이 확산되고 있으며 그것이 겉으로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자유 수호라는 이름까지 내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죽음의 문화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보다 훨씬 실재, 진정한 죄의 구조라고 표현할 있는 실재에 직면해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실재는 연대성을 거부하고 많은 경우 참으로 죽음의 문화라는 형태를 취하는 그러한 문화의 출현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일종의 생명을 거스르는 음모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음모는 개인적 관계, 가족관계 또는 집단 관계 안의 개인들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휠씬 넘어서 국제적인 차원에서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타격을 입히고 왜곡하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5


이러한 상황 앞에서 우리는, 젊은이들이 모든 생명, 특히 인간 생명의 절대 가치를 발견하고 증진시키도록 도와주기를 원하는 교육자로서 강한 도전을 느낍니다. 이러한 도전 중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인간 생명의 절대 가치의 궁극적인 토대

모든 인간 생명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있든지 왜 항상 존중 되고 옹호 받을 가치가 있습니까? 다른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생명이 있습니까? 인간에게 참으로 합당한 품위의 삶이 되는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모든 이, 특히 가장 약하고 방어능력이 없는 이들의 생명을 증진시키기 위한 도전

보다 충만하고 나은 삶에 대한 현대인의 민감성이 많은 경우에 가장 약하고 방어능력이 없는 이들의 생명을 더욱 더 위협하는 것으로 변한다면 과연 그것이 인간적일까요?

이러한 환경과 문화에서 복음화가 직면하는 도전

생명을 거스르는 이런 문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안에서 모두의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힘인 ‘생명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할까요?

돈보스코가 제안한 생활 양식 즉, 모든 사람이 생명을 선물과 봉사의 부르심으로 여기고, 이를 사랑하고 소중히 다루며 수호하고 증진시키는 생활 양식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살레시오가족 안에서 어떻게 증진시킬까요?


  1. 생명 수호에 참여하는 살레시오가족


전세계 살레시오가족에 속한 여러 단체들이 하고 있는 수많은 노력과 투신과 업적들을 부각시키지 않는다면 이러한 현실 분석은 실제적인 것이 못 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 안에서 실행되는 가장 일반적이면서 의미 깊은 창안들 몇 가지를 사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음과 같은 실례를 보면서 각 나라와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자원, 창안, 가능성을 알아내고 가치화하며 발전시키도록 권고합니다. 제시하는 목록이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생명을 위한 살레시오가족의 헌신을 증언하는 창안들을 열거해보겠습니다.

  • 근년에 대재난(쯔나미, 지진, 해일, 화제, 침략, 전쟁...)이 발생했을 때에 시작된 연대 운동들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성에 관대하게 응답하기 위해, 또 가장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수호하고 그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이 연민을 가지고 기꺼이 내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 수많은 교육자들이 위험 중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 길거리 청소년들, 청년 실업자 등을 날마다 환대하는 것. 그들은 젊은이들이 소외되고 위험한 상황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관대한 마음과 살레시오 양식으로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습니다.

  • 여러 나라에서 살레시오가족이 피난민과 이주민들을 환대하고 교육하며 새로운 문화에 잘 적응하도록 그들을 도와 주기 위해 실시하고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

  •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로 내몰고 무수한 고아들을 남겨놓음으로써 시련의 대륙을 괴롭히고 있는 에이즈의 비극에 대처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실시되고 있는 창안들인 “Stop AIDS!” “Love matters”. 이 전염병은 콘돔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교육으로 정복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살레시오가족은 이 주제에 대하여 젊은이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고 양심교육을 시키는 예방적 전략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 살레시오의 다양한 사업과 활동에서 수많은 교육자들은 젊은이들이 직업 세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면서 젊은이들 교육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 선교지에서 하고 있는 수많은 인도주의적, 교육적, 복음화 활동은 대부분 수많은 사람들과 민족들 전체를 위한 전인적 복지와 생명 수호의 적은 가능성 중의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 선교지에서 엄청난 활동을 통해 노력하는 것은 원주민들의 생존만을 보호하는 것 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들의 언어, 문화, 우주관, 사회 조직, 정치적 대표성 등에 관한 그들의 권리와 함께 그들의 발전을 도모하며 공식적, 사회적 차원의 인정을 받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 생명 수호와 교육을 위해 어렵지만 관대하게 헌신적으로 일상 안에서 노력하는 수많은 가정들의 활동

  • 사회적, 선교적, 성소적 성격의 다양한 형태의 자원봉사

위협을 받고 위험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을 지원하는 연대망을 날마다 구축해가는 그 밖의 다른 많은 창안들이 있습니다. 또 관대한 마음으로 단호하게, 인간답고 연대하는 복음적 생활양식을 이룩하면서 ‘생명 문화’를 건설해가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현대의 생명 수호에서 우리 앞에 있는 커다란 도전들을 직면할 수 있고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활지표는 생명에 대한 자기 성소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자극이 되고, 힘을 모아서 거대한 도전들에 창의적, 역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위하여 힘으로 모으고 계속 헌신하라는 초대가 됩니다.



  1.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성경은 창세기 첫 장부터 묵시록의 마지막 장까지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서 살아야 하고 이를 옹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하느님 백성의 신앙과 깊은 확신을 보여줍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축복이고 그분은 생명 안에서 당신의 사랑과 너그러우심이 빛나게 하십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첫 명령은 사는 것입니다. 이는 석판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새겨진 명령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첫 순명 행위는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명을 받아들이며 세심하게 보살피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과 생명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강조하신 것처럼 생명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선물” 6 입니다.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인간은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생명과 죽음은 하느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분의 손에 모든 생물의 목숨과 모든 인간 육체의 숨결이 달려 있습니다.” (12, 10). 모든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그분은 그것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죽게 내버려 두려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려고 창조하였습니다(지혜 2, 23 참조).

바로 이런 이유로 생명의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권력자들과 강한 자들의 불의와 횡포로 위협 받고 있는 이들을 수호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탈출 21, 1-23, 9 계약의 책 참조). 생명을 충실히 지키시는 하느님만이 역사 안에서 가난한 이, 약자, 과부, 외국인, 방어 능력이 없는 이들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불의를 거슬러 투쟁하고 생명을 주는 정의를 실천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고통 당하고 버림 받아 죽어가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촉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경청한다는 것은 “네 형제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창세 4, 9-10 참조)라는 말씀에 끊임없이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생명의 친구’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은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1요한 1, 1 참조). 애초부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그를 치유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간직하고 있던 예수님에 관한 기억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사도 10, 38).

예수님에게 있어서 생명은 “음식보다” (마태 6, 25) 소중한 선물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마르 3, 4 참조).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 27)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명 보호는 하느님 나라의 중심 사상입니다. 복음서의 일화들에 늘 나타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 선포와 인간 생명을 돌보는 것, 이 두 가지는 예수님의 구원 활동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마태 4, 23. 9, 35. 루카 6, 18). 사실 메시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치유 활동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의 활동임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치유였습니다. “눈 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 5).

요한 복음에서도 생명은 중심이 되는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궁극적인 생명을 주시고 이를 보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전해주시는 생명이며 최종적으로 저 세상에서 완성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그리스도를 “생명의 빵”(요한 6, 35. 48), “생명의 빛”(요한 8, 12),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 6), “부활과 생명”(요한 11, 25)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 47)라는 말대로 이 영원한 생명은 신자가 된 그 순간부터 이미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에로 넘어갔다”(요한 5, 2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 54). 그러나 현재의 우리 생명이 영원한 구원을 향해 열려있고 그리로 나아가도록 보장해주는 근본적인 체험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 14).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호하실 뿐 아니라, 인류가 결국 죽음과 파멸로 끝나지 않도록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사랑의 최고 봉사를 하신 것입니다. “나의 생명을 준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 17-18).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은 물론 생명을 멸시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생명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 가장 불행하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까지도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 충만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생활 양식에 따르면 이렇게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은 ‘불명예이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이기주의, 불의, 연대의식 부족으로 인해 일그러지거나 왜곡되지 않은, 온전히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생명의 최종 기준이 됩니다. 사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은 인간에 대한, 인간 생명 존중과 수호를 위한 하느님 사랑 계시의 극치, ‘생명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부활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은 사람들이 죽음을 가져오는 곳에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2, 23-24). ‘산이 들의 하느님’, 부활시키시는 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과 완전한 사랑으로 생명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부활 신앙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생명이 손상되고 침범 당하거나 파괴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생명 편에 서게 합니다. 죽음에 대항하는 신앙인의 투쟁은 윤리적 명령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영원히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부활시키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교 진리는 절정에 이릅니다. “생명의 존엄성은 그 출발, 즉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그 사실에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 목적, 즉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친교를 맺기 위한 목표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빛 안에서, 성 이레네오는 인간에 대한 자신의 예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예찬을 완성합니다. ‘인간, 살아있는 인간’ 진정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7


  1. 생명을 위하여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증거하고 선포하고 사랑하는 노력을 하도록 우리를 자극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증거하고 선포하고 사랑하는 노력을 하도록 우리를 자극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복음을 모든 남녀의 마음속으로 가져가야 하며, 사회의 모든 부분 속으로 파고들어 가게 하여야 합니다.8 이러한 선포는 생명의 신성불가침성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제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선포는 생명의 신성불가침성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제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 생명은 연약하고 불확실하고 덧없이 지나가버리지만 신성불가침의 실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창세 1, 27)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 안에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이든 타인의 생명이든 아무도 자기 마음대로 변덕스러이 처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이 생명은 각 사람의 근본이며 파괴할 수 없는 존엄성의 기초가 됩니다. 즉 다른 모든 가치와 권리가 파생되어 나오는 바탕이 되는 제1의 가치인 것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 13)는 하느님의 계명은 모호하지 않고 명백합니다. 이 계명은 부정형으로 표현되었지만 생명의 근본 가치를 말해 주고 있으며 오늘날도 계속 이를 재천명하라고 우리를 재촉합니다.

오늘날 생명을 향한 수많은 폭력 앞에서, 생명의 가치, 존중, 수호에 더욱 민감한 교육, 생명과 건강에 대한 총체적인 비전을 제공할 수 있는 교육, 사람들에게 도덕적 감각을 심어주는 교육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세대들은 참으로 ‘생명의 스승’이 되는 부모와 교육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도록, 건전하고 절도있게 살아가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수용하도록, 실패, 어려움, 포기, 고통 등을 통합하면서 삶을 건설하도록,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과 생명을 경축하도록, 사랑과 헌신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가정의 성소와 사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의 교육적 책임은 그 고유한 사명과 본질에서 비롯됩니다. 즉 가정은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사랑을 수호하고 보여주고 전달하도록” 9 되어있습니다. 가정은 무엇보다도 자녀들에게 생명 존중의식을 길러주고 하느님의 선물에 감사하도록 교육함으로써 생명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도덕적 양심 교육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말과 증거, 관계, 일상적으로 하는 결정 등을 통하여 자유, 타인 존중, 환대, 대화, 정의감, 연대의식, 헌신 등의 중요한 가치들을 살아가도록 교육하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들은 신뢰하며 용기를 가지고 인간 생명의 근본 가치들을 자녀들에게 교육해야 할 것입니다.



  1. 돈보스코: 젊은이들, 특히 가장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 생명을 사랑하고 증진시킨 분


살레시오가족인 우리에게 돈보스코는 생명을 사랑하고 이를 위해 헌신하는 모범과 스승이십니다.

돈보스코는 소년시절부터 매우 활기가 넘쳤습니다. 요한은 어머니, 맘마 말가리다에게서 자연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배웠으며 베키를 둘러싸고 있는 시골 풍경과 나즈막한 산들, 꽃이 만발한 들판의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알았습니다. 또한 별이 수 놓인 밤하늘에 이끌려 관상하였으며 작은 새 한 마리를 귀여워하며 사랑으로 보살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자녀들을 돌보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업적과 그분의 지혜와 무한한 권능을 발견하도록, 특히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요한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긍정적이며 섭리를 신뢰하는 생명관에 개방되고 농촌 생활의 단순한 순간들을 즐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을 실망하지 않고 직면할 줄 알았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요한은 축일에 여러 다양한 놀이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그들에게 기쁨을 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그들을 더 착하게 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실천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교육적인 지향으로 하였습니다. 키에리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명랑회’를 조직하였고 규칙의 첫 조항은 언제나 명랑하게 지내고 결코 주님을 모독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규정하였습니다.

사제가 되어 토리노의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감옥을 방문하면서 돈보스코는 젊은이들이 행복을 찾고 있고 삶을 즐기고 싶어하며 환대 받고 존중 받고 싶어함을 깨달았습니다. 때로 젊은이들은 그들을 감옥에까지 가게 하는 그릇된 길을 따라 가며 이러한 갈망을 채우지만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을 믿어주고 그들의 에너지와 자질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젊은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며 그들과 함께 긍정적인 생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젊은이들은 놀고 즐기고 자기를 양성하고 일을 찾고 가족적인 분위기 안에서 사랑, 환대, 존중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가짐으로써 삶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놀이, 음악, 연극, 소풍, 산책 등은 돈보스코에게 있어서 교육의 중요한 수단들이었고 마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젊은이들이 자질을 최대한 발달시키도록 도와주고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느끼며 타인과 사회에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느끼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우정을 맺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돈보스코는 발도코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참된 생명의 교육학, 기쁨과 축제의 교육학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젊은이들 스스로 친구들 가운데서 그러한 환경을 증진시키는데 노력하도록 그들을 격려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베수코의 전기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이 세 가지만 실천하여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 세 가지는 명랑, 공부, 신앙심이란다. 이건 굉장한 프로그램이지. 이것들을 실천하면 너는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네 영혼에 매우 유익한 것들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은 가족정인 환경의 본질적인 특성이고 감응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은총의 삶과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에 궁극적 원천을 둔 자발적인 내적 종교심과 이성에 기초를 둔 방법의 당연한 결과입니다.10 그러므로 돈보스코에게 있어서 기쁨은 진지한 교육점을 수용하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소년의 현실과 삶에 대한 그의 갈망을 고려한 하나의 생활 형태입니다. 돈보스코는 소년들이 지닌 삶의 갈망을 이해하였고 그것을 충만하게 실현시키고자 했으며 젊은이가 지닌 가장 깊은 내면의 욕구가 삶의 기쁨, 자유, 놀이, 우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돈보스코는 무엇보다 사제로서 그리스도교는 금지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 행복, 사랑의 종교라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축제와 기쁨의 교육학을 통하여 젊은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열게 하고 그분과 인격적인 우정의 관계를 맺도록 인도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별로 맞지 않는 포기와 금지 투성이인 어두운 삶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현실 앞에서 돈보스코는 행복하고 기쁜 그리스도인 삶의 형태를 그들에게 제시하였습니다.

돈보스코는 일과 기쁨을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교 기쁨의 성인, 활동적이고 기쁨에 찬 그리스도인 생활의 성인이었습니다... 여기에 돈보스코의 참된 고유성이 있습니다. “인간적 연민으로 가득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탁월한 직관력으로, 또 젊은이들의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요구와 건전한 삶에 대한 확신으로 돈보스코는 일과 함께 삶의 기쁨, 일하는 기쁨, 기도하는 기쁨을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11

돈보스코는 긍정적이고 완전한 생명관을 가지고 살았으며 이를 당신의 협조자이며 친구인 당신 아들들에게 전할 줄 아셨습니다. 각 사람, 특히 젊은이, 가장 가난하고 위험에 처한 젊은이의 선성과 존엄성을 믿었습니다. “교육자는 모든 사람 혹은 이 사랑스런 젊은이들 거의 모두가 그들에게 유익한 선을 알 수 있는 지성을 지녔으며 감사에 민감한 마음을 지녔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돈보스코는 이성과 감응하는 사랑의 방법을 따르고 관대하게 헌신하는 삶을 살았을 때에 교육 활동은 효과가 있을 것이고 각 젊은이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버림받고 탈선한 젊은이들은 생명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마에 땀 흘려 일함으로써 자신과 가족들이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들을 얻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욕을 가지도록 그들을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애정 결핍 가운데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돈보스코는 친밀하고 우정 깊은 관계를 맺게 하고 그들이 정서적 욕구를 표현하고 충족시켜 애정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돈보스코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교육적 노력을 지탱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에너지라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교육의 최고 목적을 성화에 두고 이를 명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몇 가지 특별한 목적 중에 하나가 아니라 모두에게 제시하는 이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도메니코 사비오로 하여금 성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밤인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성인이 되는 것은 매우 쉽다. 성인이 되는 사람에게는 하늘에 큰 상이 마련되어 있다.” 13

사제이며 교육자인 돈보스코 안에서 각 사람의 삶과 마음에 있는 긍정적인 점을 가치화하고 발전시키려는 의지, 매일의 삶 속에 있는 또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비참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있는) 인간적인 것, 긍정적인 것, 고상한 것을 향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생활을 장려하려는 의지는 늘 변함없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돈보스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히 구원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교육과 문화가 그분에게 개방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살레시오가족으로서 돈보스코를 따라, 인간 생명은 신성하고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제거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호하고 지켜야 합니다. 생명의 가치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생명을 뿌리에서부터 위협하고 있는 문화와 문명 속에서 돈보스코의 살레시오가족은 모든 생명과 모든 이의 생명15을 돌보고 환대하는 교육적 봉사, 태어나는 생명 외에도 가난, 소외, 고통, 이상의 부재와 무의미 속에서 몸부림치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위협받는 생명을 각별히 동반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교육적 봉사에 특별히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는 특히 이러한 젊은이들의 생명을 위하여 “하느님 사랑의 표지와 전달자”16가 되라는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1. 생명을 위한 살레시오가족의 임무


교회는 생명의 복음을 받았으며 이를 선포하고 실현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소와 사명은 살레시오가족을 포함한 모든 교회 구성원의 관대한 활동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는 생명의 복음 받았으며 이를 선포하고 실현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소와 사명은 살레시오가족을 포함한 모든 교회 구성원의 관대한 활동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고, 전례와 우리의 존재 전체 안에서 그것을 거행하며, 생명을 지원하고 증진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조직으로 그것을 위해 봉사하여야 의무감을 느낍니다. 17

뿌리 깊은 반 생명의 자세에 맞서 생명을 옹호하는 수많은 거창한 선언들 앞에서 우리의 교육-사목적 봉사는 생명의 가치를 증거하고 선포하며 생명을 수호하고 참된 생명문화를 증진시키는데 전념해야 합니다.


7.1 모든 인간 생명의 가치를 수호한다


인간 생명은 폭력과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언제나 위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오늘날 생명에 대한 위협은 줄어들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체계적, 과학적으로 계획하기까지 하여 그 수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때로는 폭력적인 죽음을 진보와 문명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시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무관심과 연대의식 부족으로 악화되고 증오와 폭력 혹은 이해관계에 얽힌 분쟁(살인, 전쟁, 학살) 등의 결과인 오래된 위협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생존해 가거나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자행되는 폭력이 있습니다. 수많은 고발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수치스런 무기 매매, 생태계의 혼란, 마약 유포, 교통 사고, 테러 등, 이 모든 것은 참으로 인류 대학살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 생명은 그 시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자신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을 받아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런 암울함 앞에서 모든 인간 생명의 신성불가침적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고 시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그리고 젊은이들 가운에 생명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증진시켜야 합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생명을 선물로 여긴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기보다 인간의 능력과 권능의 결과로 간주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순전히 생산성에 기초한 이런 사고방식은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 노인들, 정신적, 육체적 장애자들, 지진아 등, 원하지 않는 생명, 불편을 주거나 비생산적인 생명에 대한 눈에 띄지 않는 차별에 빠지기 쉽게 만듭니다. 생명을 선물로 여기면 감사와 찬미, 깊은 내적 기쁨의 자세로 살아가게 되고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을 발전시키도록 노력하면서 생명을 돌보고 사랑하게 됩니다.

완전한 생명관을 증진시킨다

모든 인간에게 생명은 단순한 물질적 번영이나 경제적 발전보다 훨씬 더 값진 것입니다. 생명은 인격적 실현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 실현은 물질적, 경제적, 사회적 활동뿐 아니라 영적 생활에서의 진보도 내포합니다. 생명을 수호한다는 것은 인간을 진정한 품위에로, 충만함에로 인도하기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돌보아 주고, 생명과 자연의 모든 가능성들을 사랑하고 발전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완전한 생명관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지나친 활동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격적 만남과 우정, 침묵과 관상, 기쁨과 아름다움, 무상의 봉사 등과 같이 삶에서 중요한 다른 측면들에 마음을 쓰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1.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수호한다


모든 인간 생명은 소중하고 존중 받을 만 합니다. 건강하고 유용하고 행복한 생명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화된 생명, 고통과 질병 속에 있는 생명, 태어나지 않은 어린이의 생명, 병약한 노인의 생명도 가치롭습니다. 힘 있는 자들의 생명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돈보스코의 자녀로서 우리는 특별히 가난 속에서, 사회와 부의 변두리에서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생명을 수호하고 돌보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소외시키고 배척하는 세상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선교적 현존을 구상하고 창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을 보살피기

모든 살레시오 사목터는 소외되거나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 점점 더 많아지는 이 도전에 응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은 길거리 청소년들, 가족이 없거나 집에서 멀리 떠나 있는 젊은이들, 교육도 받지 못하고 직업도 없는 젊은이들, 이주민, 특히 무연고 이주민 젊은이들, 범죄나 성착취 그밖에 인간 생명이 위협받고 침해 받는 다른 많은 상황에 처한 젊은이들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을 맞아들여 생명과 참된 가치에 대한 사랑을 되찾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 그들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 직업 세계로의 진출을 동반해 주는 것, 인간화의 핵심 요소인 하느님께 마음을 열게 하는 것,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 그들에게 맞는 단순하고 기쁨에 찬, 긍정적인 그리스도인 생활 양식으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어려움 중에 있는 가정을 동반해 주고 돕기

심각한 긴장이나 이미 해체된 가정들, 자녀들 교육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들, 그밖에 다른 곤란을 당하고 있는 가정들을 특별한 관심으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지난 해 생활지표의 제안에 따라 부모들의 자녀 교육 임무 지원을 위한 많은 창안들, 어려움 중에 있는 부부들의 후원과 지도, 가정 관련 단체와 가정공동체 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여정들을 계속해 나가기를 권고합니다. 2006년 생활지표 해설에서 당부했던 자세와 활동들을 다져가기 바랍니다. 가정은 생명 수호와 증진을 위한 첫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우리 사목의 우선적인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7.3 생명의 가치를 교육한다


생명을 수호하고 돌보기 위해서 생명의 가치를 교육해야 합니다. 생명을 수호하고 돌보기 위해서 생명의 가치를 교육해야 합니다. 참으로 생명을 위하여 봉사하는 백성이 되려면, 우리는 처음 복음을 선포하는 그때부터, 그리고 그 뒤로 교리교육과 다양한 형태의 설교와 개인적인 대화와 모든 교육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용기 있게 이 진리들을 주장하여야 합니다.18

이는 부모, 교육자, 교사, 교리교사, 신학자 등, 모두가 노력해야 할 임무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세대들은 부모, 교육자, 교리교사들 안에서 ‘삶의 스승’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지식, 정보, 교의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여정을 보여주는 사람, 그들의 자질과 가능성을 최대한 발전시키도록 자극하고 동반해주는 사람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과 말로써 생명의 절대 가치를 강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품위를 주도록 노력함으로써, 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의 자세를 증진시킴으로써, 개인과 그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희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존엄성을 유지하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거슬러 투쟁함으로써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와 매일의 행위는 단순하고 작은 것이라도 젊은이들에게 참된 생명의 배움터가 되어야 합니다.

교육자로서 우리는 젊은이들 안에 삶의 기쁨, 가장 심오한 인간적 가치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 타인과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자연을 위한 무상 봉사의 기쁨 등을 일깨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들 안에 생명이 성소이며 봉사라는 의식을 길러주고 보다 인간답고 자유롭고 연대하는 책임감 있고 능동적인 시민이 되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생명의 가치 교육의 임무에서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젊은이들이 성과 사랑과 삶 전체를 그 참된 의미와 밀접한 상호 연관성 안에서 받아들이고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만이 생명을 보호할 힘이 있습니다.” 19 그러므로 돈보스코의 특징적인 체험과 예방교육의 기준에 따라 참된 사랑의 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지난 해 생활지표의 사목적 제안에서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몇 가지 단계를 제시하였습니다. 전체 교육 과정 안에서 그것들을 실제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 생명이 가정 안에서 존중 받지 못한다면, 폭력이 가정을 지배하고 있다면, 불편하거나 원하지 않은 생명을 차단하는 것을 발전의 표지로 소개한다면, 경쟁과 성취, 권력을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거기서는 인간 생명이 올바르게 평가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자세는 일상적인 가정 생활을 통하여 전달됩니다. 가정은 말과 모범, 선택과 결정들, 관계, 행위와 구체적인 표지 등을 통해서 좋은 면으로 혹은 나쁜 면으로 교육합니다.

생명의 가치 교육에 대한 이 임무와 관련하여 몇 가지 교육 환경과 활동에 대하여 언급하겠습니다. 참된 가족적인 분위기를 제공한다면 이들이 특별한 가능성을 열어 주리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오라토리오-청소년 센터와 자원봉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 오라토리오-청소년 센터는 전형적인 살레시오적 환경으로서 활기 넘치고 환대하는 곳, 모든 젊은이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 젊은이들이 주역이 되어 삶에 맛들이고 투신하는 것을 배우는 곳, 교육자와 젊은이 사이에 자발적이고 사심 없는 관계를 맺는 곳, 교육자와 젊은이가 함께 인간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과 교육 여정에 참여하면서 상호 동반해 주는 곳입니다.

살레시오 오라토리오와 청소년 센터는 젊은이들에게 ‘생명과 그리스도인 삶의 진정한 작업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이 거기서 그들의 세계를 펼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가치와 지도력과 대인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자리, 긍정적이며 의미 깊은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그들을 환대하고 동반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살레시오 오라토리오가 생명을 위한 이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 함께 지내고 자유롭게 말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 대인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개방된 자리가 되어야 한다.

- 젊은이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합하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다양한 창안들을 내도록 도와준다.

- 그들이 주역이 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 젊은이들에게 모델과 자극이 되는 성인과 청년들, 지도자들이 활동적으로 현존한다.

- 젊은이의 삶에 근거한 복음화와 신앙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이렇게 되면 오라토리오는 젊은이들이 다른 환경(가정, 학교, 본당, 친구 등...)에서 듣고 체험한 것과 가치들을 통합하고 재조직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 자원봉사 젊은이들에게, 특히 그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숙고할 때에 중요한 체험입니다. 자원봉사는 가난과 곤궁이 있는 곳에서 무상으로, 실질적인 봉사를 하는 삶을 배우는 참된 학교가 되므로 일회성의 일시적인 체험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체계적인 준비과정을 거쳐 젊은이가 자신의 동기를 성숙시키도록 도와주고 개인적, 단체적으로 동반해 주었을 때 자원봉사는 개인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이를 발전시키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자원봉사에서 청년들은 책임 있는 시민과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됨을 배웁니다.


7. 4 삶의 의미와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생명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젊은이들이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관계를 맺게 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모범, , 힘을 그분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삶에 의미를 주지도 못하고 줄 수도 없는 유혹적인 거짓 모델을 찬양하는 오늘의 세상에서는 아마 그 어느 때보다 복음화가 시급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젊은이들은 커다란 내적 공허에 시달리고 있으며 쾌락과 오락, 성이나 마약 혹은 범죄와 폭력의 그릇된 길을 걸으면서까지 그 자리를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쾌락도, 소비도, 순간을 채우려 여러 가지 방법에 매달리는 것도 모두 그들의 갈망과 욕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점점 더 힘들어지는 세상 안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되거나 인격적으로 매우 허약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삶의 친구이신 하느님의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울려 퍼지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그분의 행복 선언이 그 자리에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소개하는 최상의 길은 복음화입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있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성실하게 헌신적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환경은 다양하므로 복음화는 우리가 만나는 젊은이들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중요한 세 가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 젊은이들이 공허하고 유물론적인 생활양식으로 무관심 속에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곳에서 우리는 그들이 삶 속에서 종교적 차원을 발전시키면서 보다 긍정적이고 보다 깊은 가치를 발견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내면적인 삶과 침묵의 기쁨을 발견하도록, 의미 있는 것을 탐색하고자 하는 갈망을 일깨우도록, 하느님께 마음을 열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점진적인 여정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 신앙생활을 습관적으로 혹은 피상적으로 하거나 단지 흥미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만 하는 젊은이들이 신앙교육에 충실히 참여하여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단호하게 그분을 따를 결심을 할 정도로 그분에 대해 열렬한 마음을 가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 한편 그리스도인 양성을 위한 단체나 운동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신앙을 더욱 더 인격화하고 거행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소를 선택하기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체계적인 여정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교육 여정을 활성화하는 것은 우리가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값지고 의미 있는 공헌이 됩니다.



    1. 생명에 대해 감사하고 경축한다


생명 복음 선포의 결실은 생명의 선물에 대해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기쁨, 경탄, 찬미, 감사입니다. 생명 복음 선포는 생명의 복음을 경축하는 깊은 내면의 자세가 우러나오게 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이행해야 할 책임과 임무의 차원만이 아니라 예배의 차원도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서 이미 찬미입니다. 각 사람의 생명은 사랑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경축하는 것은 관상적인 시선을 기르도록 인도하고 자극합니다. 자연, 세상, 창조계, 생명 등에 대해 많은 경우에 우리는 실용주의나 소비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피상적이거나 기능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의 관심에 따라 그것들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 역사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포착하고 감탄하는 깊은 시선을 지니는 관상적인 자세를 가지려면 우리의 이기적인 태도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물, 사람, 모든 형태의 생명을 수용, 존중,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침묵을 즐길 줄 알고 인내로운 경청, 기대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것을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신뢰 깊고 친밀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으려면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상적 자세로부터 찬미와 기도가 우러나오게 됩니다. 생명을 경축한다는 것은 우리를 어머니의 태중에서 엮어내신 생명의 하느님을 찬미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오묘하게 지어졌으니 당신을 찬송합니다. 당신의 조물들은 경이롭습니다.”(139, 14). 인간 생명은 창조의 가장 놀라운 업적 중의 하나입니다.



7.6 사랑으로 창조계를 돌본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biófilo: philópsychos는 지혜서 11, 26에서 사용한 단어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생명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삼라만상은 그분 사랑의 업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첫 장부터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과 함께 자연의 선성을 인정하는 명백한 표현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 31). 동물, 식물, 창공, , 바다... 모든 것은 선하고 그 모두는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은 다만 인간이 땅(지구)의 품위를 인정하고 자연을 존중하며 창조물의 고유한 부를 환영하고 수용할 때에 사실이 됩니다. 이런 실제적인 인정만이 자연의 가치와 권리를 확인하게 하여 그에 대한 약탈과 악용을 거부하고 환경을 존중하는 자세로 발전시키며 자연과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도록 인도합니다.

산업 문명은 생산과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단순히 생산자와 소비자로 만듦으로써 비인간화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생명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된 생태존중의 자세를 가지게 합니다. 인간, 동물, 식물을 사랑하고 삼라만상에 대한 사랑, 파괴와 죽음의 메커니즘을 거슬러 모든 생명의 표지를 수호하고 돌보는 노력을 하게 해줍니다. 자연에 대한 무질서한 착취, 억압, 지속 불가능한 발전 등의 위협 앞에서 우리는 “땅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땅의 아들, 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라는 시에틀 대추장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2002년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세계 정상회의 준비를 위해 작성한 문헌에서 성청이 확언한 것처럼, 생태계는 지구 자원의 보존과 사용을 의미하는 인간적 연대의 참된 표지입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견실한 도덕적 가치를 기초로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발전도 지속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발전은 인간답고 총체적인 발전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생태계’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며 이는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필요한 도덕적 여건을 보장하고 수호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가정을 돌봄, 직업의 증진과 보호, 빈곤퇴치 투쟁, 교육과 위생 봉사의 발달, 전인적 발달에 봉사하기 위한 국가들의 연대... 등은 인간에게 부합한 생태계에 대하여 성청이 제시한 몇 가지 요소들입니다. 20

창조계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 생태계에 대하여 염려하고 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실행되어야 합니다. 늘 모두의 선익을 목표로 삼으면서 자연을 존중하고 돌보고 자연이 제공하는 것들(, 식물, 동물, 사물...)을 절도있게 사용하도록, 땅과 자연 자원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수호를 위해 노력하도록 우리 자신과 젊은이들을 교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태 존중의 자세와 사고방식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오늘날 전인교육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에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분이 지은 피조물의 찬가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님!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님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님, 누나요, 우리 어미이신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님!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꼰벨뚜알 프란치스코회 번역)


  1. 나가며:


앞에서 말한 것의 종합으로 2004년 바르쎌로나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종교회의에 모인 전통 종교인들이 작성한 본문을 소개합니다.


온 세상에 드리는 글


,세상의 시민인 우리들은

여정을 걷는 사람들이며 탐색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대 전통의 유산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 인간 생명은 그 자체가 하나의 놀라움입니다.

자연은 우리 어머니이며 집입니다.

그리고 사랑 받아야 하고 보존되어야 합니다.

- 정의와 용서와 관대함으로

평화를 건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문화의 다양성은

거대한 재산이며 하나의 장애물입니다.

- 만일 우리가 세상을 깊은 차원에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보화가 됩니다.

종교들은

그 깊은 곳을 향해 가는 길이 되고자 합니다.

- 탐색의 길에서 종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개방됨으로써 힘과 의미를 발견합니다.

-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이 체험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 종교는

내적 평화에로, 자신과 세상과의 조화에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경탄과 기쁨과 감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각기 다른 종교에 속한 우리들은

서로 대화하고 싶습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에

기아와 빈곤

전쟁과 폭력

자연환경의 파괴

생명에 대한 깊은 체험에 대한 개방성 부족

자유와 다름에 대한 존중 부족 등...

인류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

모두 함께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 인간의 가장 숭고한 갈망에 대한 우리 탐색의 결실을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각자 안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존중하면서

모두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결론으로서 예년처럼, 생명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우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그러한 자세는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죽음의 문화와 우리와 타인의 삶을 기쁨과 색깔, 관대함으로 가득 차게 하는 생명 문화 사이의 다른 점입니다.

비엘로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민스크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연극으로 보여준 이야기에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연극을 나는 매우 좋아했고 나에게 큰 빛을 준 것 같아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살레시오가족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거야. 내가 돈보스코에게서 받은 그 노랑 우산을 주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살레시오가족 각 사람에게 하고 싶은 것이다.”


노랑 우산


옛날에 어두 침침하고 슬픔이 가득한 어떤 마을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마을 사람들은 검정 우산을 들고 다녔습니다. 언제나 검정색이었습니다.

우산 속에서 모두들 화나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검정 우산 아래에서는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나기가 더욱 더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노랑 우산을 들고 다녔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검정 우산을 받쳐들고 지나가던 몇 사람이 그 사람을 바라보고 투덜대며 중얼거렸습니다.

아이구 창피해! 노랑 우산을 쓰다니 참으로 우스꽝스럽군. 점잖지 못해! 비는 아주 진지한 것이니까 검정색 우산을 써야 되는데!”

또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노랑 우산을 받쳐들고 돌아 다니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자기 과시형 사람만이 그렇게 하지. 하나도 재미 없어!”

사실 늘 비가 오고 검정 우산만 쓰고 다니는 그 마을에는 재미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린 나타샤만은 그러한 비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타샤의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비가 올 때 우산은 우산일 뿐이야. 노랑이든 검정이든 상관없잖아. 그저 비를 막아주는 우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거지.”

나타샤는 노랑 우산을 쓰고 있는 그 사람이 아주 평온하고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 문을 나서다가 나타샤는 자기 검정우산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비를 맞으며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노랑 우산을 쓴 그 사람이 마주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우산을 씌워줄까?”

나타샤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모두들 자기를 놀릴 것이까요. 그러나 즉시 또 다른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비가 올 때에 우산은 우산이야. 노랑이든 검정이든 무슨 상관이야? 비를 맞는 것보다 우산을 쓰는 편이 낫지!”

나타샤는 노랑 우산 속으로 들어가 그 친절한 사람 곁에서 비를 피했습니다.

그러자 나탸샤는 그 사람이 왜 행복한가를 알았습니다. 노랑 우산 아래에서는 더 이상 날씨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푸른 하늘과 따스한 태양이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나타샤는 놀라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도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니? 너에게 모두 설명해 줄게.

언제나 비가 오는 이 마을에서 나도 그전에는 슬펐단다. 나도 검정 우산을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 우산을 잊고 사무실을 나섰는데 되돌아 가지 않고 그냥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단다.

비를 맞고 가다가 노랑 우산을 쓴 사람을 만났지.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자기 우산 속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겠니? 너처럼 나도 망설였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되는 것이 두렵고 또 그들이 나를 비웃을 것 같았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나는 감기에 걸리는 게 더 두려워서 비를 피해 우산 속으로 들어갔단다.

지금 너처럼 나도 노랑 우산 속에서는 나쁜 날씨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검정 우산 속에서는 왜 사람들이 슬픈지를 그 사람이 나에게 가르쳐주었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검정 우산은 우울하게 만들어서 서로 이야기할 마음이 없어지게 한다는 거야.

그리고는 갑자기 그 사람이 가버리는 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는 노랑 우산이 들려 있지 않겠니? 얼른 그 사람을 뒤쫓아 갔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 사라져 버린거야. 그래서 이 노랑 우산을 내가 가지게 되었고 나에게는 늘 좋은 날씨가 따라다니게 되었지.”

나타샤는 외쳤습니다.

무슨 말이예요! 아저씨는 다른 사람의 우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끄럽지 않으세요?”

그 사람은 대답했습니다.

부끄럽지 않아. 이 우산은 모두의 것이니까. 나에게 우산을 준 그 사람도 틀림없이 다른 사람한테서 받았을 거야.”

나타샤가 집에 당도했을 때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 사람이 점점 멀어지고 사라졌을 때 소녀는 자기 손에 노랑 우산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탸샤는 노랑 우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타샤는 그 노랑 우산의 주인이 머지 않아 바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 다시 한 번2007년 새해를 축하하며 생명 문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일하면서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합당한 쇄신된 노력을 하도록 초대하면서 끝맺겠습니다.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올해 중에 시복될 스페인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영웅적인 증거가 바로 생명 문화 건설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시어 여러분의 삶과 성소가 풍성한 결실을 내게 되도록 여러분을 그분께 맡깁니다.

돈보스코의 사랑으로


총장 파스칼 차베스 신부

1 요한 바오로 2, 8 세계 청년대회 전야 기도 중의 담화 (1993 8 14, Denver), 1993 817/18일자 L’Osservatore Romano.

2 살레시오가족의 사명헌장, 9. 10. 16 참조.

3 요한 바오로 2, 회칙 생명의 복음, 5 참조

4 20006 사순절에 로마 교구의 사제들에게 하신 말씀, 2006 3 4일자 L’Osservatore Romano, 4면이하

5 생명의 복음 12

6 생명의 복음 34

7 생명의 복음 38

8 생명의 복음 80

9 요한 바오로 2, 사도적 권고 가정공동체, 17

10 P. 브라이도, Prevenire non reprimere(강압하지 않고 예방하기), LAS, Roma 1999, pp. 324-325 참조

11 F. 오레스타노, P. 브라이도, 앞의 p. 236에서 인용

12 A. 실바 페레이라, Il dialogo tra don Bosco e il maestro Francesco Bodrat) – 1864(돈보스코와 프란체스코 보드라토 선생과의 대화 -1864), RSS 3 (1984) 385.

13 요한 보스코, Vita del giovanetto Savio Domenico(소년 도메니코 사비오의 일생) p. 50, OE XI p. 200.

14 P. 브라이도, 앞의 . p. 233 참조

15 생명의 복음, 87 참조

16 SDB 회헌 2

17 생명의 복음 79

18 생명의 복음 82

19 생명의 복음 97

20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요하네스버어그 세계정상회의(2002 8 26-9 4) 기하여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문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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