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 Mihi Animas

살레시안과 돈 보스코의 열 개의 다이아몬드 꿈

Atti 300, 1981. 2. 2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저의 첫째 임무는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여 216일날 돈 보스코의 사업이 스페인에서 시작한지 100주기를 맞아 기념행사를 시작 하는 스페인에 있는 형제들의 희망과 기쁨을 같이 나누도록 하는 것입니다. 1881년 정월 하순에 4번째 선교단과 더불어 요한 브린다 신부는 4명의 회원과 평신도 한 명을 데리고 토리노를 떠나서 안다루시아로 가서 우뜨레아에 살레시오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요한 갈리에로 신부가 그들과 함께 가서 남아메리카에서 얻은 5년간의 수도회 창설에 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오늘날 스페인에는 3200명 이상의 살레시오 회원과 살레시오 수녀들이 있으며 많은 선교사들과 수천 명의 협력자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출신자들, 활발한 돈 보스코 후원회, 그리고 스페인 전역에 걸쳐서 우리의 벗들이 있습니다. 개척자들은 사업을 확장시키는 비결을 가지고 있었으며 용기를 가지고 미래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발도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들의 모델은 우리의 위대한 창립자 자신이었습니다. 스페인 남쪽의 작은 마을에서 그처럼 보잘 것 없이 시작하였던 “성령의 역사하심”을 아낌없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나눠 갖게 한 스페인의 회원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우리는 금년에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영신적 열성을 본받기를 바라며 초기 개척자들이 그처럼 당당히 보여주었던 참된 살레시안의 모델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이와 똑같은 생각으로서 다음 9월에는 또 다른 중요한 100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도회의 장래에 대한 중요한 돈 보스코 의 꿈입니다. 돈 보스코는 10개의 크고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된” 망토를 걸치고 있는 “존엄한 인물”을 보았습니다. 그 꿈은 1881910일 밤 산 베니뇨 까나베세에서 꾼 것이었습니다.



참된 살레시안의 모형

그 꿈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나오는 존엄한 인물은 이상적인 살레시안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입은 망토의 앞면에는 5개의 다이아몬드가 장식되어 있었는데 가슴 쪽에 있는 세 개는 믿, 희망, 애덕을 나타내는 것이고 어깨 쪽에 붙어 있는 두 개는 일과 절제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외투의 뒷면에는 다른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가 있었는데 그것은 순명, 청빈, 보상, 정결 그리고 단식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리날디 신부님은 10개의 다이아몬드 꿈에 나오는 이 존엄한 인물을 “참된 살레시안의 모델”이라고 하였습니다.(ASC 55 1930)

두 번째 장면에서 나오는 존엄한 인물을 완전히 인품이 타락한 모델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외투는 “색이 바라고 좀이 먹었으며 갈기갈기 찢겨 있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붙어 있던 의복은 누더기가 되었으며 구더기가 파먹어 들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의기를 소침시키는 장면은 참된 살레시안에 대한 대립상인 파멸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ASC 55, 8, 923)

세 번째 장면에서는 당당하면서 매력적인 풍채를 지닌 젊은이가 있었는데 금실과 은실로 정교하게 짠 하얀 의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살레시안에게 주는 그의 메시지는 “말씀을 귀담아듣고 주의를 기울이며 힘을 내고 용기를 가질 것 말과 생활로 증거할 것 현명하게 새로운 세대를 받아들이고 교육시킬 것 수도회가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보살필 것 등입니다.”


꿈에 나타난 세 장면은 현실적이고 도전적입니다. 그 장면들은 살레시오 영성을 능란하게 의인화하여 극적으로 설명해주고 잇습니다. 돈 보스코께서는 그것을 살레시오 성소에 대한 좌표계로써 생각하였습니다. 특별한 특징들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제시한 것은 참된 살레시안에 대한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돈 보스코께서는 우리들이 이러한 특징들을 소중히 키워 나가는 한 교회 내에서의 장래 우리의 성소는 믿어 의심할 여기자 없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소홀히 한다면 수도회는 완전히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돈 보스코께서는 꿈을 기술하시면서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셨습니다. 첫째는 91일이 마리아의 성명축일이며,(마리아의 성명축일은 인노첸시오 115세께서 1683913일 비엔나에서 터키군을 쳐부순 크리스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하셨다. 이 축일은 성모탄일 축일 후 첫 주일에 지켰다. 1881년에는 돈 보스코께서 꿈을 꾸신 해로써 910일에 이 축일이 열렸다. 20세기 초기에 교황 비오 10세께서는 전례상의 이유로 주일을 살리기 위하여 912일로 날짜를 바꿨다.) 둘째는 베니뇨에서 살레시안들이 피정을 하고 있었고 자신은 원장들과 더불어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두 가지는 숙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마리아께 대한 신심과 꿈을 연결시키고 있으며 이 꿈은 특별히 반성과 묵상하는 날(피정과 같은 것)에 적절하며 활력을 불어 넣어주어야 할 책임을 맡은 자들(장상들과 같은 분)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꿈은 모든 살레시안을 위한 것으로 자신이 살레시안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그것은 분명히 전적으로 그들의 선을 위한 것이긴 합니다만) 돈 보스코께서는 자로 우리의 살레시오 집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피정을 하고 있을 때 고무자요 교육가로서의 우리들의 인격 속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의 꿈은 우리에게 밀접히 관계되는 주제이며 “생활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돈 보스코께서는 꿈을 중요시 하신다.


그 꿈은 돈 보스코에게 너무나 큰 인상을 주었기에 말로 설명하실 뿐만 아니라 글로도 남겨 놓으셨습니다.(MB XV 182)


문서 보관소에는 체리아 신부가 돈 보스코 전기 15권에 집어넣지 못했던 돈 보스코께서 친필로 쓴 원본이 있습니다. 이제 한 분의 살레시안 수녀님의 끊임없고 피나는 수고 덕분에 꿈에 대한 평론판까지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체실리아 로메로 수녀: 돈 보스코의 꿈-edizione critica LDC 1978 수녀님은 돈 보스코가 말년(1870-87)에 꾸었던 꿈들을 이 꿈과 함께 모았다. 로메로 수녀는 돈 보스코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꿈의 내용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10페이지에서 언급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황의 세속적 권한이 전패된 후 시기이며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및 종교적인 변화를 가져오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발생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수도자와 사제성소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돈 보스코께서 자신의 교육 사업과 수도회에 대하여 철저히 자기 분석을 하던 때였다. 그의 사업은 교회와 사회의 현재와 미래의 필요성에 대처하기 위하여 공고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래서 끊임없는 확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 더군다나 당시에 팽창하고 있던 위대한 선교 활동 때문에도 그러하였다. 이러한 자기 분석은 19세기 후반기에 그의 많은 저술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예로써 오라토리오의 회상록(1873-75)과 예방교육제도에 대한 팜프렛(1877)이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꿈들은 내용면과 공통적인 특징에 비추어져 볼 때 분명히 중요성을 띄는 것이다 꿈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분석할 수 있다. 즉 심리학적, 교육학적, 신학적, 역사적인 면 등등이다.)


그 원본은 911일 후 몇 주 후에 쓰여 졌으며, 꿈을 이해하고 살아있는 전통에 적용하여야 한다는 돈 보스코의 염려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초벌 원고에는 많은 정정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돈 보스코께서 출판에 대비하여 고심 속에서 편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자신이 하늘로부터의 충고라고 겸허히 믿는 바를 충실하게 기록해 남기려고 하는 굉장한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돈 보스코께서는 신비적이며 장엄하고 예언적인 말투로 꿈의 서문을 쓰셨습니다. 즉 “성령의 은총이 뿌리 모두를 깨우쳐 주실 지어다. 아멘”


돈 보스코의 초고와 애써서 정정한 흔적으로 꽉 찬 원고지에서 베르토 신부는 정서를 해서 돈 보스코 성인에게 검열을 하도록 드렸습니다. 돈 보스코는 거기에 추가사항을 덧붙이셨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이 꿈은 거의 밤새도록 계속 되어 아침에는 기진맥진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잊어 먹지나 않을까하여 후딱 일어나서 몇 가지 요점을 기록하였는데 그 덕분에 기억을 더듬어서 성모 봉헌 축일 날 여기에 쓰게 되었습니다.(1120)


돈 보스코 관심은 특이할 만한 것입니다: 즉 그는 즉 적어두었습니다 나중에 자신이 세부사항을 적는데 전념하셨습니다. 그는 분명히 꿈을 중요한 것으로서 생각하였는데 여기서 그분 자신의 말씀을 첨가하는 거의 옳은 것 같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 없었다.”

또한 돈 보스코께서 하늘의 모후 축일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하심을 다시 주의 하십시오.

우리들의 창립자께서는 이 글을 생생하게 기억하려고 각별한 수고를 기울였기에 체리아 신부는 돈 보스코 자서전에서 그가 꾼 많은 꿈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쳤습니다.(MB XV 182)




레시오 전통에 있어서의 꿈의 중요성


오늘날도 산 베니뇨 까나베세에는 돈 보스코께서 꿈을 꾸셨던 침대와 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그것을 기억 속에 항상 간직하려는 열망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살레시안들이 곧 그 꿈을 묵상과 영성 양성 및 생활을 개혁하는데 사용했었다고 말해서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책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살레시오 수도회의 전망” 이것은 수없이 많은 회합이나 강론 그리고 피정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알베라 신부는 1920년도의 유명한 서한에서 잘 알려진 주제로서 그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알베라 신부께서 우리의 모형이신 돈 보스코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것입니다.


돈 리날디께서는 자주 꿈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며 여러 가지 최고평의회록에서 그것을 언급하셨습니다.(당시에는 “평의회 총회”라고 불렀다.) 그는 1924년과 1930년에 두 차례에 걸쳐 꿈을 책자로 펴냈습니다. 첫째 판에는 위에 언급하였던 원본이 온전히 들어 있으며 둘째 판에는 라틴어 표현들이 번역되어 있고 어떤 날짜들은 생략이 되었는데 그것은 별로 내용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각 회원에게 한 권씩 주었습니다.


리날디 신부님은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작품 특히 Theotimus 살레시안 양성에 있어 매일 써먹고 있는 영성론 속에 열 개 다이아몬드의 광선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하고 실재적인설명이 들어있다고 보았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훨씬 중요한 자신의 회람서한에서 리날디 신부님은 꿈의 가르침과 살레시오 영성의 최고 권위 있는 원천들, 곧 회헌과 회칙 및 우리의 진정한 전통을 결합하였습니다. 그 때는 회헌의 50주기를 맞는 해였으며 최근에 회칙의 개정이 있었습니다.(둘 다 기본적이고 권위 있는 문헌이며 수도회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리날디 신부님은 또 말씀하시길 전통은 우리 수도회와 사명에 색깔과 특징을 주는 것으로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단순히 규칙에 의한 수도자요, 교육자일지는 몰라도 더 이상 돈 보스코의 살레시안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ASC 56 9933)


사실 그 꿈은 리날디 신부님의 강화나 설교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였으며 특히 그의 말년에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꿈을 본질적으로 회칙과 살레시오 전통에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살레시안의 정체를 묘사해주는 좌표계였습니다.


지조띠 신부님께서도 1964년도 모토에서 살레시안들의 관심을 꿈에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는 생활의 개혁과 회개 및 우리들의 카리스마를 발전시키기 위한 권위 있는 수단으로써 꿈을 제시 하였습니다.


열 개의 다이아몬드 꿈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을 실천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쓰셨습니다.

이것은 살레시오 전통 속에서 가장 잘 알려진 꿈 가운데 하나며, 그 중 묵상과 반성을 위해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이라고 바로 인정하여 왔습니다.

이 시점에서 어떤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의 말처럼 돈 보스코의 꿈을 신학적, 심리학적, 및 교육학적으로 분석을 하기 전에 돈 보스코 꿈의 문헌적 전승을 상세히 검토하여야 한다는 것이 지당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원문 비판이라거나 돈 보스코 꿈의 특수한 성격을 과학적으로 평가할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좀 더 중요하고 숭고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살아 있고 권위적인 영성인 것입니다. 결국 삶은 그것을 연구하기 전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삶에 자양분을 대주고 자극을 주는 요소는 권위 있고 시기에 적절한 카리스마에 의하여 표현되어야 합니다.(만일 이러한 요소들을 학자들이 세세하게 논하고 계획을 수립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너무나 늦고 말 것이다.) 돈 보스코와 그 후계자들 특히 리날디 신부님께서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이 카리스마를 이용하였으며 살레시안 양성의 협력자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의 영성은 살아있는 대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다음의 리날디 신부님 말씀은 이 점에 대해서 생각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말씀하시기를 “꿈에 제시될 모델은 매일의 묵상가운데서 탐구되고 밝혀져야 할 것이다.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그 모델에 대해서 이야기 하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 전망의 모든 면을 비춰져야 할 것이다. 관구장과 원장들은 여기에 근거하여 강화를 하도록 요구되며 피정 지도자들은 강의를 할 때에 그 자료를 사용하여 살레시오 영성의 아름다움을 회원들에게 깊이 새겨주어야 합니다.”


가장 계몽적인 해설자 리날디 신부


의심 없이 리날디 신부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 꿈을 깊이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재삼재사 그는 이 꿈에 대해서 전 수도회에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는 돈 보스코께서 꿈을 꾸시고 회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산베니뇨에 계셨으며 여기서 그는 특히 생생하게 꿈에 대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돈 보스코의 셋째 후계자로서의 그는 우리가 이미 지적했던 대로 종종 꿈의 내용에 대해서 회원들에게 쓰셨습니다. 그분께서 이 주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시던 것을 실제로 들었던 살레시안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 예를 들어서 기념카드가 발행되었던 1931년 이른 여름 폴릿죠에서 양성 중에 있는 젊은 회원들에게 한 마지막 강론 때 있었던 회원들 말입니다. (이 강론의 기록은 문서 보관소에 남아 있습니다.)

리날디 신부님의 글을 숙독해 본다면 얼마나 깊이 연구했으며 점진적으로 꿈을 설명해 나가는 가를 알게 됩니다. 또한 마지막 두 개의 발표문에서 독창적이고 뛰어나게 연구되었으며 통찰력 있고 상세하게 다룬 해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장구한 묵상과 끊임없는 탐구로 얻은 완성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는 존엄한 인물의 참된 의미를 정확하게 묘사하였으며 다이아몬드의 특수한 배치를 해석 하셨습니다. 의복의 전면과 후면에 제각기 다른 광채와 적절한 위치에(붙어 있는 이 다이아몬드는 살레시오 영성을 힘이 있으면서도 조직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리날디 신부님께서는 다이아몬드의 배치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식으로 배열되었더라면 우리 생활양식의 뛰어 남을 나타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없이 리날디 신부님께서는 이 꿈이 “참된 살레시안의 모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돈 보스코께서 이를 직시하시고 “단순한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생활의 실재가 되도록 우리에게 건네주셨음을” 강력히 확언하였습니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리날디 신부님에 의하면 망토를 걸친 존엄한 인물과 다이아몬드의 특수한 배치는 중요한 것으로 그 이유인 즉 그러한 것들이 결합되어 우리들의 두드러진 영성 성격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것이며 학자 연구자들이 여러 가지 성소의 특수 성격을 연구함으로써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리날디 신부님은 살레시안 영성의 가장 충실한 증거자 중에 한 분이시며 꿈에 대한 반성은 주로 총장신부로 있을 때에 하셨습니다. 저는 그의 해석이 자신의 살레시오 성소를 전적으로 의식하고 있었으며 완전히 성소에 따랐고 기도하며 묵상하였으며 하늘로부터 어떤 특별한 깨우침을 받으셨을 지도 모르는 분에 의해서 성취된 완전하고 성숙된 생각의 융합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생각들은 꿈에 대한 리날디 신부님의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이해에 의하여 자극을 받은 것이며, 몇 가지 특수한 국면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의 우리들의 성소에 보다 더 충실하도록 하며 그러한 성소의 두드러진 특징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력을 우리 모두가 얻게 되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특수한 우리의 영성


꿈의 첫째 장면에서는 다이아몬드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환시에 의하여 살레시안의 모형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존엄스런 인물


주인공은 “위엄 있는 자세”를 지닌 사람이며, 살레시오 영성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살레시안들의 반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백년이 지난 오늘 돈 보스코 자신이 “그 생애를 통하여 그러한 상징적 인물의 살아있는 확신이었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보다 더 나아가서 리날디 신부님의 상상적인 말씀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즉 “모든 다이아몬드는 제각기 다른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모든 광선은 오직 한 줄기의 빛을 형성하고 있었으니 곧 돈 보스코시다.”


당연히 돈 보스코는 이런 식으로 꿈을 설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 생각조차 머리에 떠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날디 신부님의 예리하고 실제적인 해석은 참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새로운 회헌은 돈 보스코를 모형으로 말하고 있으며 “살레시안이 탐구하고 일심으로 본받아야 할 분이며 그는 하느님과 교회가 우리에게 주신 분이시다.”고 하였습니다.


존엄한 인물 : 전면과 후면


꿈은 존엄한 인물을 정면과 후면에서 그려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들은 보충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저 그렇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눈에 띄는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리날디 신부님의 시사적이며 의미 같은 관찰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는 여러 강의에서 그것을 말하였습니다.(예로써, 이미 언급하였던 1931년 풀릿죠에서 피정 기념설교에서와 같은 것), 또한 같은 해 4월 회람편지에서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즉 살레시안 생활은 “갈등에 있어서는” 전면에 붙어 있는 다이아몬드에 의하여 그리고 “내적 생활에 있어서는” 후면에 붙어 있는 다이아몬드에 의하여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즉 살레시안의 사회적 활동은 나에게 영혼을 달라(주화의 전면)이고 보이지 않는 항구성과 수덕생활, 영성유지 구조는 그 외는 다 가져가라(주화의 뒷면)인 것입니다.


살레시안의 볼 수 있는 모상


정면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신앙, 희망, 사랑, , 절제)는 자기 증여라는 공적 증거를 하고 있는 살레시안을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면에서 볼 때 살레시안은 수도자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열성으로 넘쳐흐르며 친절과 애덕으로 가득 찬 크리스챤으로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는 역동적이며 균형이 잡혀 있고 근면하고 절제할 줄 알며 창의성과 상식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일과 절제가 망토 전체를 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리날디 신부님은 쓰시기를 “여기서 우리는 살레시안 생활을 보는 것입니다. 살레시안 생활을 활동 면에서 볼 때 그것은 끊임없이 커나가는 신앙과 희망의 빛 속에서 깊은 애덕에 의하여 활력을 얻은 일과 절제입니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처음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에 대한 살레시안 묵상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들에게 반성거리가 될 수도 있는 몇 가지 일반적인 언급을 해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시적 특징들


이 다이아몬드는 신학 논문에서처럼 하나하나 다뤄나가야 할 일반적인 덕목들의 단순한 목록표로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덕목들이 고전적인 덕목들 속에 들어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에도 우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 덕목들은 실제적인 태도로서 특히(망토의 전면에 관하여) 외적이며 명백히 자각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다이아몬드들은 살레시안의 특징을 나타내고 돈 보스코께서 불행히도 더 이상 고전적인 종교생활 양식의 진가를 인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보여지기를 원하셨던 그런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살레시안의 초상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살레시오 평수사에 대해서 여러분께 드렸던 편지에서 저는 우리 수도회가 색다른 “재속적인 성격”을 가지고 세워졌다는 것을 썼습니다. 저는 리날디 신부님께서 돈 보스코께서 그의 수도회가 밑받침으로 하도록 영감을 받은 몇 가지 현대적 원칙을 강조하시는 것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우리들의 가장 고귀한 유산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1877121일 비오 9세께서 돈 보스코에게 자기 침실에서 알현을 승낙하시면서 하셨던 잊지 못할 말씀을 인용하는 것일 것입니다. 즉 “나는 여러분의 수도회가 하느님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의 섭리로 세워졌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주께서는 우리들의 시대까지 그처럼 오랜 세기 동안 그리고 과거의 그토록 많은 다른 수도회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중대한 비밀을 감춰 오셨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수도회는 교회 안에서 새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 생겼으며 수도적 이면서도 재속적인 것입니다 청빈 서원을 발하면서도 소유권을 인정합니다. 수도원에 속하면서도 세속에 속하며, 회원들은 수도자이자 재속인이며 은둔자이면서도 자유로운 시민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도회는 수도자들이 어떻게 하느님께 속한 것을 하느님께로 그리고 카이사르에게 속한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려 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처음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가 보여주는 살레시안의 특징들은 앞으로 우리가 설명하겠지만 비록 우리들이 분명히 참되고 빈틈없는 수도자이긴 하지만 우선적으로 수도자로서의 살레시안을 그려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존엄한 인물의 첫째로 우선적인 측면은 심오한 그리스도의 신비에 의하여 독려를 받은 충실하고 근면한 시민의 면도 그것입니다. 살레시안이 100퍼센트 수도자라는 사실이 무엇이 되었건 어떤 문제라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살레시안은 활동적이며 책임성 있는 시민이면서도 또한 전적으로 크리스챤인 것은 단호히 투신한 내적 생활 때문인 것입니다.


동일한 사실이 비수도자 단체들이 살레시오 정신에 따라 활동하기로 투신한 보다 광범한 살레시오 가족에게도 해당합니다. 그들의 활동양식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실제적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특별한 처지와 시기에 놓여 있는 젊은이들의 참된 필요성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기본 요소들


존엄한 인물의 외투는 어깨서부터 늘어뜨려져 있으며 흔히 돈 보스코의 방패라고 일컬어지는 일과 절제라는 큰 다이아몬드에 의하여 제대로 걸려있는 것 같았습니다.

성난 황소의 꿈에서(1876) 장래의 우리 성소에 대한 조건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은 다음의 말씀들을 여러분의 문장이요, 암호요, 독특한 휘장으로서 각자의 마음속에 새겨둬야 할 것입니다. 잘 주목하십시오. - 일과 절제가 살레시오회를 번창 하게 할 것입니다. 이 말들을 잘 설명 하십시오 반복해서 이 말을 되풀이하고 강조하십시오. 해설을 인쇄하여 모두가 일과 절제가 수도회에 대한 유산이요, 영광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시오.”


일의 다이아몬드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Theotimus에서 말한 “일에 완전히 몰두한” 그런 살레시안에 대한 탁월성을 제시해주거나 하는 것처럼 오른쪽 어깨 위에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믿음과 희망 그리고 특히 애덕이 충동에 의하여 활력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광적으로 소란을 피우는 살레시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인류의 선익을 위하여 부단하면서도 현대적인 교육적 노력을 하면서 구원을 위해 일하는 순수한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왼쪽 어깨 위에 붙어 있는 절제의 다이아몬드는 단식의 다이아몬드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무나도 똑같이 보이는 두 덕목의 차이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는 외투의 앞쪽에, 다른 하나는 뒤쪽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단식의 다이아몬드는 감각의 절제를 나타내는 것이고 절제는 합리적인 일의 계획과 자기희생, 중용과 평정 등 자아 극기의 열매로써 성취된 일반적인 스파르타식 자아억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절제는 상식이 풍부하며 세상 일에 영리한 평범한 노동자들에 어울리며 부합되는 일반적인 태도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리날디 신부님의 말씀을 인용해보면 “살레시안은 극기를 실천하여야 합니다. 살레시안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알고 있지만 그 이상 지나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것이 잘못되어 있다면 거기서 멈춥니다. 놀이를 할 때에도 그는 자신을 통제합니다. 골치 아픈 소년을 대할 때 자신을 억제합니다. 그는 평정을 지키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올바른 시기에 말을 하고 영리하게 매사에 대처해 나가는 것입니다.”


원천이신 그리스도


외투의 가슴팍에 붙어있는 세 개의 장려한 다이아몬드는 온전한 살레시안 인격의 생기발랄한 원천을 상징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름에 있어서 하느님의 신비에 항상 개방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특별한 돈 보스코 성소의 근본적 비결이며 따라서 전체적인 면에 있어서 살레시오 영성의 근본적인 비결인 것입니다.

예방교육 제도에 대한 저의 견지에서 저는 살레시오 정신은 그리스도와의 온전하고 열정적인 결합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썼었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인도아래 살레시오 정신은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 확언한 바와 같이 “젊은이를 축복하고 모든 이에게 선을 베푸는”그리스도의 신비를 오늘의 세계에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 편지 안에서 믿음과 희망, 애덕의 다이아몬드가 나타내는 살레시안적 의미를 완전히 개선시켜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다이아몬드는 우리가 파묻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완전히 초자연적인 관점을 나타내며 낙관주의로 꽉 찬 비전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쳐 이기는 것이다.”(1요한 5,4) 신앙은 우리의 활동에 분명한 사목적 동기를 부여해주며 살레시오 사도직을 특징짓는 건전한 인도주의를 충만케 하고 유지해주는 것입니다.

희망의 다이아몬드는 우리가 젊은이를 위하여 창조적이며 헌신적인 매일의 생활을 살아나갈 때 하늘로부터의 도움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증해줍니다. (결국 우리는 마리아를 우리들의 도움으로서 모시고 있습니다.)

애덕의 다이아몬드는 특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그것은 존엄한 분의 심장부위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의 첫 장면은 코스타마냐 신부가 파냐노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애덕은 모든 것을 이해하며 모든 것을 떠받쳐주고 모든 것을 이깁니다. 말과 행위로서 사랑을 설파합니다.”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애덕은 인간에 대한 변함없는 진실한 사랑의 태도로서 각 개인을 하느님 자신으로서 혹은 그의 모상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덕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가 되며 그분 안에서 끊임없는 기도의 성령으로 성부의 자녀로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분과 결합하여 우리의 이웃, 우리의 소년들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젊은이에 대한 오롯한 사랑을 타고 난 넘쳐흐르는 친절 속에서 돈 보스코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알베라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덕은 젊은이에 대한 자연적인 매력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선적 사랑에 대한 참된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선적 사랑은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인 것이며 실제적인 살레시오 성소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지성으로써 그것을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고 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목적 애덕에 대한 것으로 그것은 살레시오 정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며 전체적인 우리의 교육학을 특징지우며 거기에 기쁨의 방향과 속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채워주는 특별한 친절성의 영원한 원천인 것입니다.

이처럼 망토 전면에 붙어있는 다이아몬드는 근본적인 살레시안 상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조 영신 구조


망토의 후면에 있는 순명과 청빈, 보상, 정결, 단식의 다섯 가지 다이아몬드의 광채는 강한 눈에 보이지 않는 살레시오 영적 구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 외의 것은 모두 가져가라는 살레시오 모토의 둘째 부분의 성취가 놓여 있는 것이며 또한 여기에 우리들의 특별한 봉헌생활 양식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는 단순한 덕목표라기보다는 수덕적인 그리스도의 무리가 걸어야 하는 주요한 길인 것입니다.

리날디 신부님의 생각을 따라서 이러한 주요한 길들이 망토의 후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과 살레시오회의 내면생활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살레시안의 기본적인 외부 상에 있어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보이지 않는 보조구조인 것입니다.


돈 보스코께서는 자신의 살레시안들이 수도자나 탁발승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지지 않도록 매우 신경을 쓰셨으며 이 점에 있어서 비오 9세의 지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증거와 사실들이 돈 보스코께서는 살레시안들이 전통적 수도자들의 외관 모습을(복장과 습관, 생활양식에 있어서) 띄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실히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돈 보스코께서는 살레시안들이 어떤 사회 속에서 살던 100퍼센트 “사제”와 “신자”가 되기를 원하셨지만 살레시안들은 공적으로 이목을 끌어서 새로운 세속주의 사회 속에서 반감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 보스코의 생각에는 외부로부터 더 감추어질수록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순수한 고행생활을 추구하려는 살레시안의 의식적인 결단은 더욱 비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 보스코는 내부에서부터 나오는 힘인 지지력이 밖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잘 방어되어 있는 요새로부터(즉 망토의 후면에 붙어있는 사각형을 이룬 다이아몬드들)유래하는 고갈되지 않는 자극에 의해 충당되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한 갈리에로는 이를 잘 이해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탁발승이든 탁발승이 아니든 나는 돈 보스코와 머물겠다.”


망토의 전면은 사회와 소년들 사이에서 가져야 될 살레시안의 외부 상을 그려주고 있으며 그의 영적 에너지와 항구함, 끊임없는 근면의 비결은 자신의 봉헌된 자이며 그래서 수덕생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깊은 자각에서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다섯째 다이아몬드의 상세한 분석보다는 몇 가지 일반적인 생각들을 여기에 적어봅니다.


중심부를 이루는 순명


망토의 뒷면에 있는 다이아몬드가 생각나게 하는 첫째 사항은 순명의 다이아몬드가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리날디 신부님은 “살레시안의 영성은 순명에 의하여 인도된다.”고 해설했습니다.


돈 보스코께서 회헌에서 항상 살레시안의 서원 중 첫째로서 순명을 두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의 영성양성에 대해서 말할 때 수도자들이 첫째로 닦아야 할 원칙으로서 순명을 주장하셨습니다. “수도회에 있어서 순명은 모든 것입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회칙서문에서 그는 성 예로니모와 보나벤투라, 그레고리오를 인용하면서 첨가하시기를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순명은 또한 부정직의 의미에 있어서도 주의할 만한 것이니 수도자가 자기 자신의 의지를 순명보다 앞세울 때 그는 수도자 신분과 소속감을 상실했다고 하십니다. “바로 그날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 상태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돈 보스코께서 기록하셨습니다.


이러한 중심부의 위치는 돈 보스코의 리본에 대한 꿈을 생각할 때 마리아의 생각을 제시해 줄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돈 보스코에게 ‘순명의 리본으로 그것들을 한데 묶으라.’고 말하셨습니다.

살레시안의 생활 가운데서 순명이 우선권을 갖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사명과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인 것입니다.

유용성은 살레시안 수도서원의 근본 바탕의 일부인 것입니다. 돈 보스코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적절한 순명은 교육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도 우선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꿈을 글로 쓰면서 “가장 크고 가장 빛나던 다이아몬드는 사각형을 이룬 다른 다이아몬드들 중앙에 있었는데 거기엔 “순명”이라는 말이 새겨 있었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순명의 다이아몬드가 차지하고 있는 중심부가 망토 전면에 붙어있는 애덕이 위치하는 중심부와 짝을 이룬다는 것 또한 의미 있는 것입니다. 살레시안의 순명은 공동체 생활의 “한 마음과 한 영혼”을 실제적으로 표현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며, 차례로 그것은 우리들의 친교에 바탕과 활력을 주는 형제적인 사랑의 유대에서 나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실천적인 청빈


청빈의 다이아몬드에서 흘러나오는 광선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청빈은 말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행위로서 실천되는 것이다.” 꿈의 제 2장면 속에서 찢겨지고 누더기가 된 망토에 있는 청빈 자리에는 게걸스런 굼벵이에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침대, 의복, , 돈”

청빈의 다이아몬드는 망토의 후면에 있는 모든 다이아몬드에 공통되는 특징에 따라서 이 서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곧 눈에 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로서 봉헌된 자로서의 극기생활인 포기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돈 보스코의 말씀을 인용해 봅시다. “수도자의 품위는 청빈을 실천하는데 있는 것이며, 빈틈없는 개인적인 결백에 의하여 배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잉여물자를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니며 가난한 자들의 것입니다. 그것을 잘 이용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청빈을 사랑하여야 하며 청빈을 지키는 동료들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안락한 생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스파르타인 같이 됩시다. “청빈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마음속에 청빈이 있어야 합니다.”


청빈의 다이아몬드는 마음의 자세와 개인과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로써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처럼 우리 자신을 세속적 재화에서 자유롭게 하고 성부의 섭리에 신뢰를 두며 복음을 위하여 송두리째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청빈의 사도적이며 보다 명백한 면모는 오히려 망토의 전면에 나타납니다. 돈 보스코께서 언급하시기를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물질적인 것들을 끊어버리는데 있어서만 청빈의 정신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청빈은 우리가 봉사를 해주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서 특히 공적인 생활양식과 사도직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일과 절제의 다이아몬드는 청빈의 사회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과 절제로서 우리는 가난한 자와 한 통속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산상설교에서 설파하신 가난의 정신에 의해서 고취된 공동생활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 증거는 세상에 물질주의에 대한 고무적인 대응책을 보여줍니다. 푸에블라를 인용해보면 “오늘의 세계 속에서 복음적 청빈은 물질주의에 대한 도전이며 소비주의에 대한 다른 하나의 해결책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우리의 생활은 자본주의 체계와 사회, 정치적인 획책에 대한 대조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념적 종속이나 계급투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감을 얻기 위하여 복음에 의뢰합니다. 지속적인 자양분과 쇄신을 그리스도의 신비에서 찾으며 균형 있는 상식으로 복음을 생활하며, 모든 이와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이 돈 보스코께서 새로운 구조를 찾아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회 속에서 행동하셨던 것입니다.


정결의 요구


이 정결의 다이아몬드는 아주 독특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이 정결의 다이아몬드가 주의를 끌어 모았다.”

돈 보스코는 종종 살레시안 가운데 있는 정결의 광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분도회 회칙은 “정결을 사랑해야 한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돈 보스코께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정결을 사랑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실천해야 하며 찬란히 빛을 발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부께서 정결의 가치를 얼마나 주장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살레시안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활동하여야 하며 우정을 맺기 위하여 사목적 사랑으로 흘러넘치는 마음을 모든 이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살레시안에게 있어서는 소년들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장미나무에 대한 꿈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살레시안의 영적양성은 본질적으로 이 덕을 지키기 위하여 지혜롭게 예방적 조처를 취하는 나무랄 데 없는 정결의 모범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살레시안의 자애로움은 순결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결은 교육자라는 우리의 사명에 비추어 볼 때에도 "극히 필요한 덕"입니다 특별히 오늘 날 관능주의에 의하여 시달림을 받고 있는 젊은이의 세계 안에서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돈 보스코께서는 회칙 서문에서 쓰신 대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고귀한 이 진주를 영혼의 적이 어디서나 노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을 우리로부터 뺏어버리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든 성화활동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방책과 주의 처방의 필요성이 살레시오 영성의 지성적인 면을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방책이 단식의 다이아몬드의 일부일 것입니다. 이 다이아몬드는 이미 말한 대로 절제의 다이아몬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망토의 후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살레시안 영적 양성에 있어서 단식의 절대 불가결한 위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절제는 살레시안의 외적인 모습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리날디 신부님은 단식의 다이아몬드가 관능의 억제를 포함하는 극기생활의 넓은 영역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정결은 희생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돈 보스코께서는 종종 “아름다운 덕”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항상 희생의 정신과 연관을 시키셨습니다. 즉 매일의 여러 가지 극기의 행동과 결부를 시켰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정결의 아름다움보다는(아주 빈번히 그것을 찬양하셨습니다.) 떻게 그것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서 더 마음을 쓰셨습니다. 이것은 창립자의 교육학이 얼마나 실제적이었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


보상의 다이아몬드는 희망의 다이아본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의 살레시안의 활동과 의욕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레시안의 항구적인 노력과 열성적 헌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통해 오는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실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보상의 다이아몬드는 영신적 인간의 노력을 고취해주는 항구한 정신자세를 강조합니다. “약간의 천국이 모든 것을 올바르게 놓는다.”


돈 보스코의 말씀대로 살레시안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갈증, 피로와 배척을 견뎌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정신적 충동을 내적으로 부지해 주는 것은 밝은 양심이 지닐 수 있는 천국에 대한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우리의 의무, 고된 일, 간난신고 속에서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행한 가장 사소한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때가 될 때 우리에게 풍부한 보상을 해주시리라는 것은 신앙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의 마지막에 사랑의 광채를 띄며 우리가 그분의 심판석 앞에서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했다. 착하고 충직한 종아, 너는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너에게 큰일을 맡기겠다. 네 주인의 즐거움 속에 들어오라.” 피로하고 고통을 당할 때 천국에 커다란 상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시오.” 또한 돈 보스코께서 “과로로 지쳐빠진 살레시안은” 전 수도회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보상의 다이아몬드가 형제적 친교를 -하늘의 상급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 같습니다.


천국에 대한 계속적인 의식은 돈 보스코의 영성과 교육학에 활력을 넣어주는 중추원리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은 올바른 목적을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영혼의 근본적 본능에 빛을 던져주며 깊은 이해심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왜 확신하여야만 하는 가”에 대해 하신 7번의 “저녁 말씀”에 예로 들어져 있습니다.


독특한 살레시안 영성


전면과 후면에 있는 다이아몬드는 상호 보완적이며 살레시안의 특징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리날디 신부님의 말씀을 따라 “살레시안 생활의 독특한 영성”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꿈의 덕택으로 이러한 특별한 영성을 하나하나 묘사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망토를 걸치고 있는 존엄한 인물의 필수적이며 빛나는 통일 연속이 있는 10개 다이아몬드의 합성에 있는 것입니다. 상호 보완적인 전면과 후면의 다이아몬드는 분명히 서로 때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꿈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전적으로 헌신하였으며, 선이 악을 쳐 이기리라는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며, 친절이라는 사랑과 한결같은 실제적 고행생활에 철저히 몰두하는, 사목적 애덕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하느님 왕국 건설에 지칠 줄 모르고 매진하는 사랑(혹은 봉헌된 공동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성령의 걸작품에서 살아있으며 볼 수 있는 이러한 본보기를 주셨으니 곧 돈 보스코이십니다. 리날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인용합시다. “모든 다이아몬드는 각기 독특한 광선을 냈으나 이 광선들은 하나의 유일한 광선을 만듭니다. -곧 돈 보스코입니다.”


살레시안 정신의 독특한 성질은 하나의 유일한 특징이나 덕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자세와 깊은 확신과 훌륭히 검증된 방법론적인 경험들의 합성인 것이며 모든 것이 함께 결합하여 유일하고 특수한 성덕과 사도직의 양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진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정의보다는 꿈을 이론적인 목록보다는 돈 보스코를 바라보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


이러한 독특한 살레시오 특징을 실천함으로써(리날디 신부님의 말씀대로) “존엄한 인물의 살아 있는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생활과 회헌과 우리의 순수한 전통이 완전히 일치하는 양성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회헌과 전통은 성부와 창립자와 일치를 이루던 초창기 때 시작하고 생활을 하였던 성령의 체험을 참되고 확실하게 전달해 주는 도움인 것입니다.


리날디 신부님은 우리들이 모든 사소한 점에 있어서까지 꿈에 나타나는 존엄한 인물을 본받음으로(개인적으로서만 아니고 공동체로서도) 살레시오회가 마땅히 전 세계에 쏟아야 하는 광채를 발휘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돈 보스코께서는 존엄한 인물과 빛나는 광채를 띈 장려한 그의 망토에서 우리 수도회를 보셨습니다. 살레시안 각자는 스스로 다이아몬드를 획득하여 완성시키도록 착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이아몬드가 제 광채를 다 발휘하기를 바란다면 회칙과 진정한 전통에 부합하는 회헌을 준수함으로서 하나의 유일한 문체에(망토가 하나임과 똑같이)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살레시안 정체의 파멸


꿈의 제2장면은 극적입니다. 그 꿈은 “참된 살레시안의 파멸” 즉 “반 살레시안”을 보여 줍니다. “살레시안 반 살레시안”의 무서운 농증은 다모클스의 칼처럼 우리를 위협하기에 항상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외투인 것입니다. 그 장면은 초기 살레시안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지난 20여 년간의 심각한 위기를 보면 오늘 우리에게 끼친 너무나도 많은 손실에 대해 그것은 아주 특별한 좌표계가 되어야 합니다.

저에게 꿈에 대해서 글을 쓰도록 부탁한 이들 가운데는 제2장면 처음에 나오는 1,900이라는 날짜의 본래의 해석에 대해 강력히 주장하던 자가 있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1,900년에 살레시안이 처하는 위험”이라는 제목 속의 날짜는 1,900년대의 어떤 특별한 해라도 해당할 수 있습니다. 아직 그 날짜가 되기에는 2~30년이 남아 있습니다. 최근의 심각한 위기는 갈가리 찢긴 망토에 써 있는 엄중한 경고와 관련하여 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흥미 있는 가설이 없다 하더라도 돈 보스코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에 전념하는 것은 충성스러운 것이며 타당한 것입니다. 수차에 걸쳐 그는 강화와 꿈을 통해 우리 수도회의 장래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하셨습니다.(예로써 마귀를 만나서 수도회를 파괴하는 방법과 수단에 대해 토론을 벌인 꿈이 있었습니다. 다이아몬드 꿈의 절망적이 제 2장면은 너무나 극적인 경고로 가득 차 있어서 날짜 같은 것에는 신경 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려움이 많은 땡 그 경고 말씀들은 극히 중대한 연관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고 말씀들은 어떤 역사적인 순간에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저의 편지「여러분의 형제들을 북돋아 주시오」에서 수도생활에 있어서의 경종을 울리는 위기에 대해 숙고해 보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꿈의 경고 말씀의 중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마치려합니다.


2장면에 나오는 존엄한 인물은 “슬픔에 쌓여 있었으며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의 망토는 색이 바래 버렸으며 갈가리 찢기고 좀이 먹어 들어갔습니다. 다이아몬드가 있던 자리에는 좀먹은 구멍이 나있었습니다. 사실 다이아몬드는 많은 구더기가 되어 그 옷을 갉아 먹어가고 있었습니다.


흉측하게 변한 살레시안 상

믿음과 희망, 애덕의 다이아몬드 자리에는 초자연적인 감각을 완전히 약화 시키며 결과적으로 수반되는 중대한 영적 쇠퇴를 가리키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자연적 사실에 대한 의미의 상실이 보통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분상의 변화가 일고 있음을 정당화시키려는 현대의 사상들로 어떻게 대치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 결국은 마지막으로 포기까지 하게 됩니다. 일과 절제는 나태사도직의 태만 그리고 경박함과 유행성, 소비주의의 피상성을 띈(물론 당시의 유행적인 어떤 이데올로기를 과시하는) 안락한 생활로 대치가 될 것입니다.


영적 구조 부지의 몰락


망토의 후면은 순종의 태만과 더불어 전 영적 구조의 점진적인 붕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 수도회 영성의 실제적인 방탕이 파괴 되었습니다 일치의 유대가 절단되었으며 개인주의가 대접을 받고 그런 상황에서 별로 나아질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타락으로 신속히 이끌어 가는 미숙하고 강압적인 감각적 애정에 대한 요구와 더불어 욕망이 정결을 대신합니다.


이탈과 의존, 공유, 물질적인 재화 사용의 통제성을 뺀 청빈은 현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계속적인 이기적 안락의 추구가 대신 들어앉았으며 돈에 있어서는 자기가 알아서 사용해야 한다는 불건전한 생각이 청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상의 다이아몬드 자리에는 금욕생활에 대한 매일의 노력이 없으며 천국의 기쁨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것들과 현재의 생활 속에서만이 인간의 발전을 추구하는 풍부한 수평주의 경향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단식의 다이아몬드 자리에는 빈 구멍만 나있고 아무런 말도 써있지 않습니다. 감각의 경계가 사라지자 온갖 종류의 유혹과 탈선에 대해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2장면은 분명히 우리가 처하는 위기를 너무나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 망또의 전면: 초자연적 감각의 둔화, 변화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이념의 대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

- 망또의 후면: 금욕생활을 떠받치는 구조 대신에 개인주의, 욕망, , 수평주의, 극기생활의 배척 등이 앉아 있습니다.

여기에 불가피한 생활의 개혁을 위한 완전한 계획이 있습니다.


장래의 양성과 성소에 대한 호소


꿈의 제3장면에서는 살레시안을 훈계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흰옷 입은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우리가 혼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주님의 연장이요, 종이며 그래서 절망적인 도전 앞에서도 우리는 참으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는 우리에게 “강하고 용기 있는 자가”되라고 말합니다. 우리 혼자서는 약하고 변덕스럽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제를 강하게 하시오”에서 쓴 대로 하느님만이 강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우리를 강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끝까지 견고히 붙들어 주실 것이니 그리스도의 견고한 기초 위에 우리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본성 자체가 충실하시며 악에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그분께 속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우리들의 방비와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수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 그것은 최근에 출판되어 나온 Ratio와 특히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제안하는 첫째 수단은 꿈에서 나오는 많은 가르침을 평생 양성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수없이 강조하였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시오. 잘 이해하시오. 주의를 기울이고 널리 가르치시오. 여러분의 활동이 사람들 앞에서 빛을 내기 위하여 여러분이 가르치는 바를 한결같이 실천하시오. 전통을 사랑하고 그것을 후세대들에게 전해주시오.”


젊은이가 권하는 두 번째 수단은 성소에 대한 관심과 세대의 양성입니다. “신중하게 수련자들을 받아들이시오.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교육하시오. 그들이 서원을 발할 때 현명하게 허락하시오. 그들을 잘 단련시키고 경박하고 변덕스러운 자들을 내 보내시오.”

셋째 수단은 회헌에 대한 지식과 사랑과 실천으로서 창립자에게 매일 실천적으로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침과 저녁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묵상의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살레시안들이 그리고 각 지부 공동체가 이러한 권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까? 이것이야 말로 걱정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수도회의 장래를 좌우할 것입니다. 돈 보스코 자신이 먼저 이러한 의심으로 번민하셨습니다. 그는 1881년 즉 자기 생애의 황혼기에 이 꿈을 꾸셨습니다. 교황권의 세속적 권한이 폐지되고, 교회는 새로운 중차대한 어려움에 고민하고 있었기에, 창립자가 죽고 난 후에 이 새로운 수도회가 격동기에 존속할 수 있을까? 이것은 과장된 문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돈 보스코의 사후 레오 13세 치하동안 살레시오회를 스콜로피온회에 병합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19세기 말과 금세기 초까지의 수도회의 장래에 대한 실감나는 예견이었습니다. 당연히 초대 살레시안들은 그 꿈을 하나의 예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꿈속에 들어있던 여러 날짜는 꿈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수도회의 장래에 ·대한 꿈이라는 제목이 붙게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태도는 흥미로운 것으로 오늘날 우리들도 수도회의 장래에 대하여 한가지나 두 가지 진단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성소건 간에 충실성과 독특한 정체, 그리고 미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반성은 여러 측면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측면은 성스러운 초낙관주의일 수 있습니다. - 이것은 종종 있었던 비오 9세와 돈 보스코의 태도를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 대하여 민감한 분이셨던 비오 9세께서는 돈 보스코 카리스마의 초월성과 사목적 관련성을 이야기하면서 예언적인 어조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비오 9세께서는 1877년 돈 보스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언을 하겠으니 당신의 아들들을 위해 기록해 놓도록 하시오. 당신의 수도회는 신심과 종교적 정신과 특히 도덕적 순결을 향상시키는 한 번성할 것이며, 기적적으로 퍼지고, 수세기를 걸쳐 지속할 것입니다.”


돈 보스코도 미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몇 세기의 장래”(비오 9세께서 하셨듯이)만이 아니라 “몇 십 년의 미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영감을 받았으며, 자신이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시대에 아주 필요한 카리스마의 발전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몇 세기의 미래”에 대해 말해 본다면 돈 보스코께서는 몇 가지 초낙관적인 예언을 하시는데 그 안에서 우리의 창립자께서는 자신이 하느님 자신이 이룩하신 사업을 다루고 있다는 확신 이외에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 내가 만일 지금의 50명의 살레시안들을 500년 동안만 살아있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충실히 살아나갈 때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랄만한 앞날을 마련해두었는가를 볼 수 있을 텐데…. 우리가 파멸하는 꿈을 보고 싶어 하는 약간의 정신 나간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혼자만의 생각이지 다른 사람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살레시안들이 안락을 찾는 마음과 나태의 유혹을 싸워 나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수십 년의 미래”에 대해 말한다면 돈 보스코는 신기할 정도로 꼭 들어맞는 구체적인 사실과 세부사항이 들어 있는 여러 가지 꿈과(예로써 바퀴의 꿈이 그것입니다.) 말씀들을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수도회의 미래에 대한 꿈으로서 아끼던 것은 산 베니뇨의 꿈이었으며, 여러 부분은 1881년 둘째 부분은 1909년입니다. 그러고 나서 쓰시기를 “나는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문제가 많이 있지만 또한 커다란 위안도 많다는 것을 밝히 말할 수 있습니다. 1890년에는 굉장히 두려움이 있으며 1895년에는 큰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수도회는 그 10년간을 안전하고 무사히 넘겼습니다. 우리 수도회는 다른 수도회에 병합되지 않았으며 전 세계 곳곳에서 줄기차게 성장하여 바오로 6세께서는 지난 세기의 교회 역사에서 “살레시오 사건”의 출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외치셨습니다.


벌써 말한 대로 50년 후 리날디 신부님께서는 돈 보스코께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미래의 수도회를 보존하기 위하여” 뼈아픈 고통을 느끼면서 이 꿈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1930년 회의록에서 그 꿈을 출판하도록 하였습니다.(이미 지난 일이기에 날짜를 삭제했다. 리날디 신부님은 “여러분은 돈 보스코의 개인적인 의견이 첨부 되 있지 않은 최초의 초안을 아래에서 발견할 것입니다(날짜의 한계는 꿈의 일반적인 중요성을 감소할 뿐이다.)”고 쓰셨습니다.


이와 같이 소개된 꿈은 어느 때나 수도회의 장래를 위하여 극히 중대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꿈은 가르치고 경고하며 반성을 위한 유일한 비전이며 세기를 통하여 살레시안성의 좌표계로서 연구해야 할 풍부한 주제인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이해하라.”는 꿈의 권고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해당되는 것입니다.


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수도회의 미래에 대하여 반성할 수 있는 유일한 실제적인 방법은 ‘여러분의 형제들을 북돋우시오’라는 편지에 따른 방법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위기를 검토하며 긍정적인 징후들을 바라보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령께서 기이하게 활동하시는 의미를 파악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결점에 대해서도 주의를 신중히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 시대의 중대한 상황과 관련하여 꿈을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첫째 장면과 둘째 장면의 대조는 무서울 정도입니다: 가장 좋은 것이 썩으면 가장 나쁜 것이 됩니다. 불행히도 우리 각자는 자신의 눈으로 여러 장소에서 그리고 회원 당사자에게서 일어나는 살레시안 상의 추락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수도회에 대한위험은 상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어떤 기본 원칙들이(수도회의 초창기에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고 실천하였던 일과 절제 같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중요성을 띄는 것인가 하고 사람들은 의심하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분위기와 매일의 활동이 순전히 초자연적 사항과 진정한 사목적인 충동에 의해(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사랑의 선물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고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수도자로서의 순명의 동기가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도 정결하고 가난하며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자가 되도록 매일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건전한 규율의 불가피성을 믿고 있습니까?


한 세기가 지난 이 꿈은 아직도 우리에게 도전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살레시안의 전파 위험”이라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관련성을 갖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경종을 주는 이 꿈을 묵상합시다. 흰 옷을 입은 젊은이가 비통한 마음으로 호소하는 바를 잘 생각해 봅시다. 특별히 우리의 특수한 성소 가치에 대해 열의를 보입시다. 그 가치들을 신중히 키워서 충실히 전달해줍시다. 살레시오 성소 성장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으로 항상 생각합시다. 감사와 성실한 마음으로 함께 노래합시다. “오 주여, 저희에게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저는 이 편지를 반성과 묵상 그리고 실천적 적용을 위한 겸허한 영적 유산으로 여러분께 드립니다. 세 번째 장면의 꿈에서 나오는 경고 말씀에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젊은이의 호소를 들읍시다. 살레시오 성소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생겼습니다. 돈 보스코는 젊은이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돈 보스코는 젊은이들의 친구요, 그리스도의 그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의 표시요, 사자입니다. 젊은이들은 그의 사랑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위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와 성모께서 특별히 그들을 위해 살레시오 성소를 따로 간직해 두셨다는 뜻에서 살레시오 성소는 택할 수 있는 일종의 권리를 주셨습니다. (9살 때 돈 보스코의 꿈이 떠오릅니다) 살레시오 카리스마를 그 모든 순수한 가치와 더불어 현대 젊은이들의 재량에 맡기는 것은 급박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똑같은 가치에 대한 뛰어난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100주년을 맞는 이 꿈은 다시 한번 반성하고, 그 풍부한 뜻을 헤아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꿈의 가르침과 경고 말씀을 소중히 합시다. 마리아께서 우리의 영감과 도움이 되어주시길 빕니다. 그 꿈은 성모 성명축일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다음으로부터 인사드리며 매일 미사와 묵주기도 가운데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총장 에디지오 비가노로부터



열 개의 다이아몬드 꿈의 본문


산 베니뇨 까나베세- 1881910일 밤


아래에 인쇄된 본문은 돈 보스코께서 손수 쓰신 초고에서 (살레시오 중앙 공문서 보관소 132 5) 베르또 신부가 쓴 (돈 보스코께서 개인적으로 정정하신) 청서를 따른 것입니다. 또한 세실리아 로페로 수녀님의 평론판도 사용되었습니다. (돈 보스코의 꿈 -1978LD 평론판 Turin) 아래와 같은 변경사항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된 것은 변경되었습니다. -지조띠 신부님의 책자에서와 같이

-지나가 버린 날짜는 생략되었습니다. -리날디 신부님의 두 번째 책자에서와 같이

-유용하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표제와 부제를 붙였습니다.

성령의 은총이 우리 모두를 깨우쳐 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살레시오 수도회를 가르치기 위하여

1881910, 마리아의 성명축일에 산 베니뇨 까나베세 살레시오 회원들은 피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살레시안의 모험


910일 밤 나는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홀에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지부의 원장들과 더불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한사람이 우리 가운데 나타났는데 그 자태가 너무 위엄스러워 그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물끄러미 우리를 응시하더니 그는 훌륭한 긴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영대와 같은 칼라가 목에 리본으로 매여 있었으며 리본은 아래쪽으로 늘어뜨려져 있었습니다. 영대위에는 빛나는 글자로 살레시오회라고 써    있었으며 리본에는 수도회의 당연한 모습이라 써 있었습니다.


그 존귀한 인물을 열 개의 커다랗고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달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눈길을 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그 중 세 개의 다이아몬드는 망토의 가슴 쪽에 붙어 있었으며 믿음, 희망, 사랑이라 새겨있었습니다. 사랑의 다이아몬드는 심장 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어깨에 일이라고 써 있는 네 번째의 다이아몬드는 왼쪽 어깨 위에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는 망토의 동쪽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사각형의 끝을 하고 있었으며 중앙에는 가장 크고 제일 빛나는 순명의 다이아몬드가 있었습니다. 상부 오른쪽의 다이아몬드는 청빈의 서원이 있었고 그 밑에는 보상의 다이아몬드가 있었습니다. 상부왼쪽에는 정결의 서원이 있었는데 그 특별한 눈부심 정도의 찬란함이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 우리의 눈길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 아래에는 단식의 다이아몬드가 있었습니다. 사각형을 이룬 다이아몬드에서 나오는 밝은 광선들은 순명이라는 복판에 있는 다이아몬드에 향해져 있었습니다.


명백한 훈시들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각 다이아몬드가 작은 불혀 모양의 광선을 내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여러 가지 문구들이 써 있었다는 것을 적어야겠습니다.


믿음은 다음과 같은 훈시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방패를 들고 악마의 유혹에 대항하여 싸워라. 다른 광선에는 활동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다.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지키는 자가 하느님의 왕국을 차지할 것이다.’ 라고 써있었습니다.

희망의 광선에는 인간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 너희의 마음이 항상 참된 기쁨을 얻는데 정진하도록 하라.


사랑에 대해 써있는 구절들은 ‘나의 법을 이행하고자 한다면 서로의 짐을 져주라, 너희의 사랑이 너희의 영혼과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한 사랑이 되게 하라. 사랑하라. 그러면 사랑을 받을 것이다. 경건하게 성무일도를 외우고 신중히 미사성제를 거행하라. 감실에 계신 주님께 애정 어린 방문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의 광선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욕망에 대한 치료제요, 악마의 모든 유혹 맞서는 강력한 무기이다.


절제에는 ‘연료를 치워버리면 불은 꺼질 것 이다. 너희의 눈과 식욕과 잠과 계약을 맺어 이러한 원수들이 너희의 영혼을 파멸하지 못하게 하라. 부절제와 정결은 물과 불의 관계와 같다’ 말이 써 있었습니다.

순명의 광선에는, ‘순명은 성적의 완성이요, 기초이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청빈에는 ‘천국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란 가시다. 청빈은 말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행실로 실천하는 것이다. 청빈은 천국의 문을 열어준다’라고 써있었습니다.

정결의 광선에는 ‘모든 덕이 정결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느님의 비밀을 볼 것이며 하느님을 관상할 것이다.’라고 되어있었습니다.

보상의 광선에는 ‘풍성한 보상에 마음이 이끌린다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겁내지 마라. 나와 더불어 고통을 당하는 자는 나와 더불어 즐거워하리라. 우리가 지상에서 당하는 고통은 순간적이지만 하늘에 있는 내 친구들의 기쁨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단식의 광선에는 ‘악마의 흉계를 쳐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 단식은 모든 덕을 지켜준다. 단식은 온갖 적을 도망가게 한다.’고 써있었습니다.


권위 있는 말씀


의복의 아랫부분에는 넓은 분홍색의 가두리가 있었는데 그 위에 이렇게 써 있었다. ‘여기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가르쳐야할 것이 있다. 사소한 덕행을 소중히 하라, 그러면 견고한 성덕을 쌓을 것이다, 사소한 것들을 소홀히 한다면 너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야금야금 파멸이 너를 덮칠 것이다.’


어떤 원장들은 서 있기도 하고 어떤 원장들은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놀란 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돈 루아가 흥분되어 말했습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이것들을 적어 두어야 합니다.’ 펜을 찾았으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노트를 꺼내서 연필을 찾았습니다. “내가 기억할거야!” 돈 두란노가 말했습니다. “내가 써놔야겠어.” 돈 파냐노가 외치면서 장미 줄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의 필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다 썼을 때 돈 꼬스타마냐가 계속 받아썼습니다. “애덕은 머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떠 받쳐주며, 모든 것을 정복합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참된 살레시안의 몰락


돈 파냐노가 쓰고 있는 동안에 빛이 희미해지면서 깜깜한 어둠 속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해!” 돈 기바렐로가 말했습니다.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빛이 돌아올 것입니다.” 돈 라샤냐는 ‘오소서 성령이여’와 내 영혼이 주께 부르짖으며(시편 129) 기도를 하고 우리 모두가 화살기도인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라고 말할 때 빛이 나타나서 한 종이판을 비취었는데 거기에는 ‘전화의 위험을 겪는 ‘살레시오회’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리고나서 빛이 강해지더니 서로를 알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밝은 빛 속에서 우리는 다시 존귀한 인물을 보았습니다. 그는 슬픔에 잠겨 있었으며 금방 눈물을 흘릴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망토는 색이 바랬고 좀이 먹었으며 갈가리 찢겨져 있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있던 자리에는 크게 절어진 구멍이 있었습니다.

똑바로 잘 보고 알아들으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열 개의 다이아몬드가 수많은 구더기가 되어 옷을 쏠아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의 다이아몬드 자리에는 잠과 게으름이 써 있었으며, 희망은 외설적인 웃음과 경박한 행동이 되었고, 애덕은 하느님께 대한 일을 게을리 함이 써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만 사랑하고 찾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절제는 이제 폭식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은 자기의 배인 것입니다. , , 부정직과 게으름, 순종은 아무런 말도 없이 큰 구멍만 나 있었습니다.

정결은 욕망과 허영이 새겨있었습니다.


청빈의 자리에는 의복, , , 보상이 써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우산은 세상의 재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단식은 아무런 말없이 구멍만 나 있었습니다.

상’ 대신에는 ‘지상 것을 상으로 여김’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겁에 질렸습니다. 돈 라새니는 실신을 했습니다. 돈 갈리에로는 백지장이 되어 의자에 기대어서 외쳤습니다.

그런 일들이 벌써 이처럼 슬픈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돈 라제로와 돈 귀다지오는 정신을 잃어서 부추겨 주어야 했습니다.

돈 프란체시아와 카이스 백작, 돈 바르베리스, 돈 레베라또는 무릎을 꿇고 손에 묵주를 들소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침통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찬란하던 색깔이 어떻게 바랬는지 보라!”


젊은이의 메시지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때 우리는 어둠 속에 한데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칠흑 같은 암흑 속에 싸여 있을 때 갑자기 인간의 형체를 띤 밝은 빛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눈이 부셔 못 볼 지경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당당하면서 매력적인 자태를 지닌 젊은이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금실과 은실로 정교하게 짠 하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구며 종들이여 귀를 기울여 잘 들으라!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너희들이 보고 들은 것은 하늘에서 너희들과 너희 형제들을 위해 보낸 메시지이다.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잘 이해하라. 경계는 경비이다. 너희들이 본 잘못들은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너희가 읽은 모든 구절들은 너희들의 강론 주제가 되어야 한다. 적당하거나 적당한 때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말하라. 너희가 설교하는 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함으로써 너희의 활동이 빛을 내게 하며 지금의 너희 형제들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 굳건하고 건전한 전통을 이룩하라. 조심해서 듣고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이라. 수련자들을 받아들일 때 신중을 기하라. 그들을 교육하며 서원을 발하도록 허락할 때 지혜롭게 하라. 그들을 잘 시험해보고 착한 자들만 남겨둬라. 경박스럽고 변덕이 심한 자는 내보내도록 하라. 조심해서 듣고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이라. 아침저녁으로 회헌의 준수에 대해 묵상하라. 너희가 이처럼 행한다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너희를 도울 것이다. 너희들은 인간과 하느님 앞에서 놀라운 존재가 될 것이며 너희의 영광이 하느님의 영광이 될 것이다. 너희에 대해서 이렇게 일컬을 것이다. 이것은 주의 업적이여,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인다. 그러면 너의 모든 형제들과 아들들이 목소리를 같이하여 노래할 것이다. ‘저희에게가 아니라, 주여, 저희에게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이 마지막 말들이 노래로 불러지자 연사의 목소리에 합세한 큰 무리의 목소리가 너무나 선율이 아름답고 반향이 좋아 우리는 감각을 잃고 멍하니 있다가 실신하지 않기 위해 합창에 끼어들었습니다.


음악이 끝났을 때 어둠이 깔려 있었습니다. 잠을 깨어 보니까 벌써 날이 밝았습니다.


돈 보스코의 주석


이 꿈은 거의 한 밤 동안 계속하였으며 아침에 나는 기진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잊어버릴까 염려하여 재빨리 일어나서 몇 가지 요점을 적어 두었는데 그 덕분에 기억을 더듬어 성모 마리아의 봉헌 축일 날 여기에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기억해 낼 수는 없었습니다.

확실하게 배운 많은 것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회는 하늘로부터 축복을 받았으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맡은 역할을 하도록 기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꿈에 적혀 있던 덕과 악덕을 설파할 때, 그리고 우리가 설파하는 바를 실천하고 과거와 미래에 있어서의 우리의 선업에 대한 진정한 전통을 우리 형제들에게 전해줄 때 우리를 위협하는 악을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스도의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Atti 310 돈보스코 성인




오라또리오적 마음(Oratorian Heart)

   

    뚜렷이 드러났던 단순하고 정감있었던 돈보스코의 겉모습 밑에서는 나에게 영혼을 달라(Da mihi animas!)에 맞추어 조율된 심장이 뛰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독자적이고 강력한 사도적 봉헌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일치의 선물을 베푸셨으며 이것은 그의 묵상 때에 언제나 구원의 신비를 전면에 부각 시켰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사랑은 지칠 줄 모르는 노고에서 배출구를 발견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우리에게 활동생활과 관상생활, 사도들의 생활과 천사들의 생활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돈알베라는, 우리의 창립자에게는 수도적 완성과 사도직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창립자의 성성을 잘 묘사했습니다. 돈보스코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의 사명을 위해 그가 늘 온전히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뿐 이었음을 명백히 보여 주었습니다.


    살레시오 가족에 관한 회람장에서 저는 초자연적 사랑 즉 사목적 사랑 - 그의 강한 일치 정신, 우리의 수도적 봉헌의 독자적 기풍, 우리 성성의 살아있는 샘-은 돈보스코 특유의 것이었음을 분석하려 했습니다.


    우리의 심장이 돈보스코의 심장과 더불어 나에게 영혼을 달라(Da mihi animas!)는 리듬에 따라 박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서 벗어나 현실에 이르러 우리의 성화 방법 전체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실제적 의의와 결정적인 한줄기 빛 -젊은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 안에서 그 출구를 발견하며 또한 친절에 의해 특징 지어지는 사목적 사랑의 생활 -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살레시오 성성의 원천에서 솟아나는 수정처럼 맑은 구원의 샘물을 갖게 되었습니다.



   

Atti 332: 살레시오 정신의 참 증인이요 해석자이신 돈 필립보 리날디

                        우리의 내적 사도생활에 대한 귄위있는 해석자



    돈리날디는 돈보스코와의 직접적인 접촉과 나중에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의 태도가 창립자의 부지런한 생활과 독특한 정신의 비결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가지 돈보스코의 이러한 내적 측면에 관심을 쏟은 사람은 많았으나 돈리날디 만큼의 정력과 확신과 끈기와 권위를 가지고 그렇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우리 가족에게 유언으로 남기고자 했던 원칙적인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온전히 잠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사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살레시안들인 우리는 늘 활동적이고 바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내적 생활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적 생활이야말로 우리를 진정한 수도자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P. RINALDI, 앞에서 인용된 책, 91)

    그는 이러한 태도를 나머지 모든 것의 맑은 원천으로, 으뜸가는 은총으로, 우리 정신의 숨은 원동력으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거의 역설처럼 용기 있게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우리의 성덕은, 우리가 살레시안 서원으로 받아들인 생활양식을 실천하는데 있기 보다는, 우리 아버지의 덕행을 본받는 데에만 있기 보다는, 우리가 받아들인 살레시안 생활과 그분의 부성적 덕행들을 본받는 것이 돈보스코 자신이 사셨고 또한 그런 덕행들을 실천함에 있어서 그분이 지니셨던 정신에 의해 활성화되도록 살피는데 있습니다.” (최고장상회의 의사록 48, 733-4).


    1931년 돈보스코의 내적 생활에 관해 살레시오 수녀들에게 준 특별 생활지표에서, 그는 일찍이 창립자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마르타의 활동과 마리아 관상을 그들 안에 구현시키라고 권고하면서, 그것들은 “단순하고 복음적이며 실천적이고 근면한 내적 생활”을 가리킨다고 말했습니다. 생활지표에 의하면, 돈보스코께서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만큼 정력적이고 열심하며 광범위했던 외적 활동과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의식 (! ‘하느님께서 널 보고 계신다.’ 고 한 맘마 말가리따의 말씀의 힘이여!)에서 비롯된 내적 생활을 완벽히 일치시켰으며, 더 활동적이고 끈질기고 적극적으로 되어갈수록 하느님과 더욱 더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은 관상과 활동이 일치된 완전한 상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마음과 황홀한 평화 속에서 끝까지 자신을 소모시켰던 활동의 무아경을 자신 안에 실현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느님과 근본적인 일치가 바로 우리 정신의 비결입니다;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사도적 투신의 열정은 하느님께 대하 사랑으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이리하여 우리의 사목적 사랑의 유명한 “일치의 은총”이 지속됩니다!

    돈리날디께서 살레시안의 내적 사도생활이 지닌 이 비결을 보다 깊이 분석해냈던 방법을 더 파헤쳐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것의 세 가지 측면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영혼들에 대한 목마름, 지칠 줄 모르는 사도적 활동, 매일 기도에 대한 충실성.


- 첫째, “나에게 영혼을 달라(Da mihi animas)"라는 모토를 실제로 살기 위해 애씀: 돈보스코께서는 그것이 모두를 위한 우리 정신의 특징이 되도록 그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영혼들” 즉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복음화와 구원을 위해 그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가득한 성부의 마음에로 우리를 곧장 이끕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목적 마음”이라 일컬을 수 있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영혼들에 대한 불타는 실제적 사랑으로 표현되는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저는 우리 모토에 나오는 “영혼”이란 용어가 현실적인 생활과 다소 동떨어진 구시대적 표현이라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그 안에 깃든 지극히 인간적인 것과 더불어 개개인의 초월적 가치들과 복음의 요구들을 간파하여 그것들이 사회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실제로 개발시키는 데에 헌신할 수 있는 능력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전통상, “영혼”이란 용어는 인간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의 보다 의미 깊고 타당한 특징들을 강조합니다.


    “영혼들에 대한 목마름”이란 표현은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비롯된 사목적 열성을 가리키는 “리날디”의 표현입니다. 창립자는 그의 소년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왜 너희들을 그토록 사랑하는지 아니? 그것은 너희들이 너무도 소중한 영혼을 지녔기 때문이란다. 나는 이미 너희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데, 우리 주님께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셨단다”(앞에서 인용된 책, 735).


    정말이지 “Da mih animas(나에게 영혼을 달라)”는 젊은이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돈보스코의 사목활동 전체를 요약하는 모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의 우리 아버지의 시복 전날 밤에 씌여진 돈리날디의 회람장 중 한 페이지 전체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돈보스코께서 덕행을 실천하실 때 그분께 힘을 주었던 정신을 밝혀내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비오 11세의 연설을 인용하여 그 내용을 해설했습니다: “성하께서는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할 빛나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합니다. 성하께서는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그 무진장한 힘을 돈보스코께서는 대체 어디서 얻었을까요?’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이면에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분은 살레시오사업과 관련지어 아주 자주 발견되는 모토로 그것을 끊임없이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창립자의 마음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거기서 여러분은 그분의 마음의 비밀과 그분의 사랑의 힘과 열정을 접합니다: 영혼들에 대한 사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만영이요 또한 우리 주님의 생각과 마음과 보혈 속에서 그 영혼들을 바라보았기에 진정한 사랑을 접합니다; 그분은 너무나도 열렬히 사랑했던 영혼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과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이고 숭고한 것인지! - 돈리날디는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도직과 수도생활의 지평을 얼마나 넓혀 주는지! 돈보스코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잊었으며, 그 놀라운 일치로부터 거룩하신 구세주의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영혼들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오직 영혼들을 구하려는 목적에서만 살고 숨쉬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지냈고 그분과 특별히 친밀했던 우리는 그분의 삶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영혼에 대한 이러한 목마름을 아주 뚜렷이 체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회원 여러분, 바로 여기에 돈보스코의 탁월한 성덕과 놀라운 활동의 비결이 들어있습니다; 이곳은 또한 우리의 모든 노력을 집중시켜야할 곳이기도 합니다. 제 말은 우리가 예수께서 당신의 사제적 기도에서 영원하신 아버지께 몸소 구하셨던 복된 일치에 도달할 때까지 날마다 매 분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영혼들과 하나가 되는 이 상태를 이루기 위해,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나가 되도록 우선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삶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 자신이 될 것이며,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영혼들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돈보스코께서 당신 생애의 마지막 날들에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움이신 마리아께서 살레시안들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구해주실 것입니다’(앞에서 인용된 책, 734-5).


    여기서 인용을 끝맺지만, 우리 살레시안의 내적 사도생활에 대해 이보다 매력적이고 통찰력 있는 내용은 없다고 봅니다. 이것은 돈보스코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갖게 해 줄 비결을 알려 줍니다; 우리의 모든 힘은 바로 이 생명의 뿌리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카리스마의 원천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화제로 삼아 그것에 관해 묵상하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성철을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 정신의 진정한 핵심과 원천을 보여주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돈 리날디여!

    알베르토 까빌리아는 우리가 우리의 창립자이신 돈보스코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면 돈보스코는 물론이고 그분의 예방교육과 사도직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돈리날디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의 일치의 측면에서 였습니다; “제게 있어서 돈보스코는 오늘날 사랑을 가장 멋지게 구현한 사람들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의 일생은 젊은이들의 선익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 거룩한 사랑의 불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 그분의 예방교육은 오직 사랑일 뿐입니다!”(최고장상회의 의사록 47, 714)


    돈보스코께서는 73년간의 생애 중 63년 이상을 영혼들 특히 젊은이들을 구원하는데 사용했다고 돈리날디는 말합니다: “거룩한 복음이 우리에게 세상에 들어오신 순간부터 영원하신 아버지의 뜻 즉 영혼들의 구원에만 전념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듯, 돈보스코의 생애는 우리에게 그것과 동일한 목적을 위해 부단히 사도직에 임한 돈보스코를 보여줍니다. 이 금실을 제거하면 그분의 일생이 일관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을 상세히 분석하면 ‘Da mihi animas(나에게 영혼을 달라)’와 ‘Cetera tolle(나머지는 다 가져가라)’가 결합되어 빛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지면에 그것의 본질적인 점들만을 요약한다면 여러분은 살레시안 복음서를 손에 쥐게 될 것입니다(최고장상회의 의사록 50, 798).


    이 “금실”은 그분이 신앙 안에서 늘 경청함으로써 나타났던 결과였습니다. 즉 바꿔 말하자면 날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생생히 언급함으로써 개발된 관상적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 둘째, 돈리날디는 “영혼에 대한 목마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측면으로서 살레시안적 “활동”개념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활동 개념은, 그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미 인용한 바 있는 살레시오 수녀들에게 준 생활지표에서 “활동적 관상의 가장 완벽한 상태”라고 묘사했던 “활동의 무아경”에 대한 일종의 해설이었습니다.


    돈리날디와 동향인으로써 절친한 친구였던 몬시뇰 에비시오 콜리는 리날디의 사후 1개월째의 추도미사 강론 중에 돈리날디의 특별한 사도적 활동은 사실 “무아경”에 가까웠다고 강조했습니다: “피상적이고 광적인 활동이 때때로 수도생활까지도 방해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성덕과 그리스챤적 완성에 관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개념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정신은 살레시안 생활이라는 우람한 나무의 변변찮으나 언제나 생명력이 넘치는 보이지 않는 뿌리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더 멋진 부분이지만 외적인 것에만 감탄할 줄 아는 바깥사람들에게는 종종 그다지 알려지지 않는 건물의 내부와도 같습니다... 돈보스코에게와 마찬가지로 돈리날디에게는 이것이 그를 강하고 자신 있게 만들어 주었고 또한 그것 때문에 그를 상냥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주기도 했었던 그의 특징인 조용한 침착성의 원천이었습니다...; 그것 덕분에 그는 아주 심각한 사건들에 직면하여서도 태연할 수 있었으며, 승리의 순간에도 들뜨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건전한 낙천성을 지니고서 조용히 지켜보는, 온화한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양심상의 문제로부터 재정문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문제들을 동일한 초자연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처리했습니다”(사후 1개월째 추도미사 강론; 토리노 통상절차 공개본, 4, 1173쪽 이하).


    돈리날디는 우리에게 사도적 활동이 중요함을 돈보스코로부터 배웠습니다; 일상 활동 안에서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돈보스코는 사도적 애덕활동을 하신 성인이십니다: 그분은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탁월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복조사과정 중에 제기되었던 모든 난점들과 반대들을 극복하고서 비오 11세께서 돈보스코의 덕행들에 깃든 영웅다움을 선포하셨을 때 돈리날디가 토로한 기쁨-평소의 그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의 표현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하의 의미심장한 유명한 찬사에 깊이 감동되었습니다: 성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매우 훌륭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그분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꺼이 응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분을 온갖 방면으로 몰아세우는 요청들 때문에 끊임없이 수많은 절박한 업무들에 파묻혀 늘 바쁘게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정신은 항상 딴 곳에 있었습니다: 그분의 정신은 늘 평정을 잃지 않는 잔잔한 고요가 지배하는 높은 곳에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분에게서는 활동이 효과적으로 기도와 똑같은 것이 되었으며, ‘Qui laborat, orat'(일하면서 기도한다)는 크리스챤 생활의 대원칙이 그분에게서 증명되었습니다”(최고장상회의 38, 555).


    총장으로써 비오 11세 교황을 처음 만났을 때, 돈리날디는 용기를 내어 축성받은 사업에 대한 대사를 청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생각 없이 이뤄진 요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창립자에게 실현되어 있음을 발견했었고 또한 그 자신의 것으로 삼았던 생활계획의 결과였으며, 그는 교회가 수여한 대사라는 특별히 권위있는 수단을 통해 형제회원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미 나름대로 돈 보스코의 비결을 인식하고 있던 교황께 그것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192266일 돈리날디에게 교황 알현이 허락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들과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살레시오 수녀들), 남녀 학생들과 졸업생들, 우리의 열심한 협력자들을 위해..., 그들이 매일 더욱 활동적인 동시에 주님과 더욱 일치하는데 도움을 줄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그들이 활동이나 가르침이나 아씨스텐스 또는 다른 임무 중에 간절한 기원을 드릴 때마다 특별 대사를 얻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성하께서는 그 요청을 허락하시고 답서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살레시안들의 열심한 활동이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일치가 병행되어야 하며, 먼저 개인성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어떤 외적인 신심업을 행한 신자들에게만 대사가 허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살레시안들은 자신들의 일에 어떤 간절한 기원을 결합시킬 때마다 그들의 일 자체로 대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하느님과의 평소의 일치를 통해 보다 쉽게 개인성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최고장상회의 의사록 15, 16-19. 활동에 따른 대사는 바오로 6세에 의해 하느님과의 일치 정신으로 일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확대되었습니다(사도적회칙, 대사훈령, 1967.1.1). 우리는 오늘날 평신도들의 재출범을 도모할 때 이 확대를 활용해야 합니다. Enchiridion Indulgentiarum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생활의 어려움들을 참으면서 신뢰심을 가지고 겸손하게 어떤 경건한 화살기도로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들어 올리는(정신적으로라도) 신자들에게는 부분대사가 주어진다(Ench. Indul. 3, 바티칸 도서관 편, 1986, 33).


    이것은 우리가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할 돈리날디에 관한 또 하나의 기록입니다. 살레시오 정신의 신원을 살게 하는 자극제로서 성화 사업에 주어지는 대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활동”에 대해 그가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보여줍니다. 그가 생각한 활동은 부지런하면서도 내적인 사도생활 즉 여러 가지 피상적 태도들을 몰아내는 깊은 영성 내지 “개인적 성화”의 표현으로서의 활동이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고결하고 성령이 충만한 태도로 구세주 하느님과 일치를 드러내는 활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레시안의 내적 생활이 참된 것이 되려면 쉼 없이 창조적으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사목활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활동에 개인적이며 크리스챤적인 차원을 부여하며, 그저 내적이며 습관적인 기계적 움직임을 피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이 순간”의 일상 업무를 성화시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오직 현재만을 살 뿐이며 현재의 대부분은 활동입니다.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서거 300주년에 즈음하여, 그는 그분을 “성화와 현순간의 사도”(최고장상회의 의사록 17, 36)로 제시했습니다.

    그런 활동은 본질적으로 우리 정신의 진정한 표현이라는 것을 믿는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비결은 전적으로 활동에 임하는 사람에게 있으며, 그 사람의 활동은 열매요 그의 영적 모습을 닮습니다. 거룩한 사람만이 기도이기도 한 활동을 해낼 수 있습니다. 사목적 친절이 충만한 사람에게서만 하느님과 활동을 긴밀히 종합시키는 “일치의 은총”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살레시오 수녀들)에게 준 생활지표에서, 돈리날디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활동이 기도를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처럼 내적 생활이 마치 축일 때나 예배식 때에만 입었다가 다른 일을 하기 전에는 벗어서 한쪽에 개켜두는 옷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하는 내적 생활이 존재할 때에는 활동이 기도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성화활동의 진정한 “창조적 근거”입니다.


    - 다음에는, 앞의 두 측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살레시오 정신의 비결을 설명해주는 세 번째 측면이 있습니다; 개인기도와 공동체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 날 발도코에서 몇몇 형제회원들의 광적인 활동을 접한 돈리날디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건 지나칩니다! 그들이 어떻게 조용히 기도하고 신심업에서 성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Summarium, 462, 159 7). 또한 제12차 총회에서 기도에 관해 토론한 다음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신이 규범이나 규칙보다 한층 높으며, 활동 지상주의자들은 늘 바쁘게 움직이지만 실상 일을 별로 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굳건한 신심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앞에서 인용한 책, 441, 1524).

    시복조사서에는 언젠가 그가 우리 정신의 특징들을 함께 이해하기 위해 일단의 형제회원들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중 한사람이 증언하기를 “그분은 그것을 ‘기도와 하느님과 일치에 의해 성화된 지칠 줄 모르는 근면’이라는 말로 표현하셨다”(앞에서 인용한 책, 242842)고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저작들 (특히 그분의 유명한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소고」)Chautrad의 「사도직의 핵심」, Macourant의 「예수와 함께 생명의 정을 나누며」-(이 사람의 가르침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근간으로 삼고 있었기에 겸손, 청빈, 순명, 애덕에 관한 그의 다른 저서들과 함께) 리날디는 불어로 된 이 책을 번역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Faber의 몇몇 저서들과 같은 기도서들을 수도회 안에서 읽도록 한 사람은 바로 그였습니다.


    당시의 모든 사람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리칼도네 신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지런했으며, 종교적 실천 문제에서는 그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엄격했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신심서적들을 읽고 그것을 묵상하고 그 내용을 철저히 소화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그분이 하느님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는 보여주었습니다”(앞에서 인용한 책, 286, 1001).


    여기서 “기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 성무일도 낭독, 영적독서, 성체성사, 화해성사에서의 회개수련 등 살레시안 생활의 여러 신심업들을 통해 주님과의 대화에만 바쳐져야할 시간이 상당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매일 아침과 저녁 한나절, 매달 특정 시기(월례피정이나 계간피정)와 매년(연피정) 특정시기가 포함됩니다. 이 밖에도 개인기도, 잦은 성체조배, 잦은 화살기도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하느님과의 친교, 돈리날디가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장려하고자 했던 두 가지 특별신심 즉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과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것들은 돈보스코께서 지으신 두 대성전들 즉 로마 카스트로 프레토리오의 예수성심성당과 발도코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으로 항구히 남게 되었습니다-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살레시안의 내적 사도생활에 대한 이 고찰을 끝맺기 위해 돈리날디의 첫 전기작가에게서 몇 가지 의견들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이미 얘기했듯이, 돈체리아는 돈리날디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한 돈보스코”를 쓰라는 권고를 받고서 우리에게 돈보스코의 참 모습을 해석한 최고의 보증서를 남겼습니다. 그의 전기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리날디에게서 내적 생활을 하는 사람의 모든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실천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돈보스코의 정신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내적 생활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내적 생활이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야하는 영적 감각이며, 우리가 기억하고 간구하고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보스코의 활동들에서 그분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늘 명심하십시오... 수도생활은 내적생활이며, 영의 생활입니다; 영혼들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영을 지녀야 합니다... 오로지 관상생활에만 전념하는 수도가족은 있지만, 사도적 활동에 봉헌되었을지라도 내적 생활을 하지 않는 수도가족은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보스코가 연구되어 그분의 내적 생활이 모방되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사실 그의 권고들, 특히 말년의 그의 권고들에서 자주 강조된 점입니다. 193033, 비공식 담화 중에 그는 돈보스코의 내적 생활이 아직껏 기록되지 않았다고 선포했습니다. 돈보스코께서는 자신의 숨은 생활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내적 생활을 서술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꿈들과 글들과 서신들 그리고 전통으로부터 추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분에 관해 얘기하고 싶거든 Chautard가 사도에 관해 얘기했던 식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돈리날디는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돈보스코께서는 심지어 우리 살레시안들에 의해서조차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됨됨이를 왜곡시키기는 너무도 쉽습니다. 돈보스코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했으며, 하느님과 함께였습니다. 그분이 일을 했다면, 그분이 어떤 활동에 종사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영혼들을 위해서일 뿐 이었습니다; 영혼들만이 그분의 마음을 온통 차지했습니다”(체리아, 앞에서 인용된 책, 437-442).


이렇게 인용하고 보니, 돈리날디가 우리 가족 중에서 돈보스코의 정신에 내재한 내면적 차원들을 가장 확실하고 권위있게 해석해낸 탁월한 인물이라는 것이 결코 과언이 아닌 듯싶습니다. 우리는 돈리날디께서 우리가 고찰한 세 가지 측면들을 깊이 분석함으로써 우리 정신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보장해주는 “일치의 은총”을 훌륭히 설명해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Da mihi animas(나에게 영혼을 달라)”는 신비적 원천, 고행적 임무를 구체화 시킨 일상 “활동”, 활력을 북돋아주는 개인적 공동체적 “기도” 요소.

    그 범위는 분명하고 근본적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그 내용을 발전시키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당면한 문제입니다.


Atti 338 카리스마와 기도



머리말 - 카리스마의 매력 - 대화 기도를 바치는 사람 - 그리스도교 기도의 독창성 -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초석인 “정신기도”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에 의한 기도의 “목표” - 우리의 기도를 쇄신시킵시다 - 우선권을 두어야할 세 가지 점들 - 성령과 마리아여 우리를 도우소서.


로마에서, 1991815

성모승천 대축일에


사랑하는 형제회원 여러분,


    지난 6월과 7월 최고 평의회 본회의에서 우리는 현재의 관구 생활의 여러 측면을 검토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 우리의 쇄신과 어느 정도 관계된 것 중 하나는 “살레시안 영성과 교회 운동”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원을 강화시키고 또 어느 경우에는 일탈을 막아줄 생각해 볼만한 주제입니다.

    현황 조사 결과 어떤 운동에 참여하는 형제회원의 수가 얼마인가를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운동에서 어떤 형제회원들은 교회의 보조자 (특히 본당에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이따금 회합에 나갑니다; , 어떤 이들은 영적 에너지를 충전시키려고 정기적으로 참석합니다; 끝으로 어떤 이들은 - 저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 우리네 고유의 카리스마가 담긴 영성에 관한 불만을 나타내기 위해 운동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운동에 이렇게 끌리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의아스러웠습니다. 어떤 경우 그것은 몇몇 집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어떤 피상적인 것 즉 사도적 봉헌에 수도자적인 것이 부족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나 활동주의보다도 더욱 커다란 내적 확신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복음을 직접 접할 수 있다고, 심오한 합리성과 영적인 큰 물결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 중에는 일말의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가 봅니다. 하지만 그 이유들 중에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있고 현실적이며 매일의 삶 속에서 교육 활동을 발전시키려 하는 극히 현실적인 우리 자신의 영성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원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어떤 영성에도 뒤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인가받은 모든 영성 생활양식은 표현 형태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들 완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영성의 지극히 평범하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에는 대수롭지 않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전체적으로는 강한 영적 인격에 뿌리를 둔 유기체라는 얘기를 종종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 살레시안 영성 계획(수년 동안 우리가 더욱 깊이 연구해온)을 다시 한번 고찰하고 또한 모든 내적 활동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요소 즉 기도에, 전에 우리가 사용하던 말을 빌자면 “신심”(리칼도네, La Pieta, 살레시안 양성. 시리즈 제3, 돈보스코 대학 1955)에 주의를 집중시켜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28일에 있을 돈보스코 오라또리오 카리스마 출범 150주년 기념행사는 그토록 중요한 문제를 고찰하는 데에 박차를 가해줄 것입니다.

   


카리스마의 매력


    성령의 새로운 현존에 참여한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현재 카리스마적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우리 수도회는 다른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이 노선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교회 운동”과 같은 새로운 카리스마가 등장했습니다. 평신도에 관한 시노드(1987)는 명백하게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CL 24).

    교황과 주교들은 그러한 운동들을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무관심을 몰아내고 열정을 불러 일으켰으며, 창의력을 자극하고, 시대의 도전들에 대한 복음적 응답을 수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적 관심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것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어떤 권위나 공동체의 중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를 주장하는, 형식상으로는 매우 친밀한 지극히 감정적인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때로 그것은 사목적 차원에서 위험성이 있습니다: 대리, 혼란, 특정 집단들의 독점화와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바로 이 의사록에서 주안 에드문도 베키 신부는 그런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신원에 끼치는 영향에 비추어 몇 가지 식별기준을 지적했습니다.

    다른 카리스마를 접하는 것은 항상 우리 자신의 카리스마에 대한 사랑을 다지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운동에 대한 형제회원들의 참여를 밑받침하는 동기는 특별히 보다 큰 내적 정신과 진실된 기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레시안 기도”를 잠깐 살펴보도록 합시다. 카리스마와 기도는 불가분적인 것이며 독특한 특색을 지닌 특성을 형성합니다. 모든 카리스마는 기도에 각기 독특한 색조를 부여하며 그와 동시에 열성적인 기도를 요구합니다.


    기도에 관해 숙고해 보기 위해 카리스마를 일단 제쳐두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카리스마의 재출범에 관해 몇 가지 기본적인 것들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을 바짝 긴장시킵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도 신앙과 삶을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말한다면 교육과 복음화 간의 상호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봉헌과 전문 직업 사이에 아무런 일치점이 없습니다; 내적 성향과 외적활동 간의 조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내적인 기도가 없다면, 노동이 성화될 수 없고 인간의 능력이 복음적 증거가 될 수 없으며 교육적 투신은 아무런 사목적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그리고 일상생활도 수도자적이지 못합니다. 이런 말이 지나친 과장으로 들리지도 모르지만 핵심을 지적한 것입니다.


    진실 된 기도가 부족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전선에서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돈보스코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수도회의 신심이 활발할 때에는 수도회가 번창하고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적잖은 수도회가 쇠퇴하고 또 어떤 수도회는 아예 자취를 감춰 버렸다 - 어느 때 그러했는가? 신심이 시들해지고 그 회원들이 성 바오로께서 몇몇 신자들에 관해 지적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아닌 자기들만의 일을 추구(필립비 2, 21)하기 시작했을 때에만 그러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회헌 회칙, 서문, 또리노 1885).


대화 기도를 하는 사람


    그러나 기도에 대한 근본적 공격은 외부로부터 가해집니다. 문화적 변화들의 특징인 현재의 인간학적 전환에 대한 세속주의적 해석으로부터 공격이 가해집니다. 시대의 징표의 진전은 기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에서. 서로 상반되는 양쪽의 결과들을 살펴봅시다.

    먼저, 새로 출현하는 가치들을 오직 인간중심적으로만 이해하는 세속적 해석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불가지론이나 여러 가지 종류의 불신앙으로 이어집니다. 세속에서는 기도를 하찮게 여깁니다; 활동이 본질적인 것을 잊게 합니다.

    또 다른 결과는 인간학적 전환을 받아들여 인간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사리에 맞게 해석합니다; 인간은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인간은 그 자신 안에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신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는 당신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삼라만상을 인간에게 맡기시어, 그 창조하신 만물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게 하시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항상 찬양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총체적인 인간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우수하도 여길 뿐만 아니라(homo sapiens), 인간의 근면성(homo faber) 뿐만 아니라 조직화 및 경영 능력(homo economicus)을 칭찬하며 인간이 이룩한 과학 기술적 발전(homo technicus)을 중지시키기 보다는 그 모상을 따라 창조된 하느님과의 대화 능력에 있어서 인간이 지닌 최고의 존엄성을 간파합니다. 그러한 존엄성을 부여받은 인간은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분에게서 자신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초월적인 분”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세상을 그분께로부터 받은 선물로 여기며 그러기에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감사의 정이 넘칩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을 “우주의 전례자”로 만듭니다. 어떤 학자(B. Haring)가 인간을 “homo orans”라고 정의했던 것은 참으로 옳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지성과 문화를 확실히 평가하고, 과학 기술에 헌신하며, 사회조직과 정치적 모임들을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알려지고 발전되고 개발되어야 할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어떤 분의 “선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독창성


    기도에 대한 많은 정의들 가운데 널리 알려져 있는 것 중 하나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정의 입니다: 기도는 신과의 대화다(PL 22, 411참조). 하지만 어떤 신과의 어떤 대화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교 기도의 독창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의 기초에는 세상과 현실과 역사라는 객관성이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현실을 피하는 것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파고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징 없는 초월성에 불과한 개념을 지닌 종교는 소외를 낳을 수 있으며 기도를 반복(혹은 엘리아가 거짓 예언자들에 대하 말한, 외쳐대는) 되는 형식적인 문구로 격하시켜버릴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런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상-시편에 따르면-은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독특한 “신앙”입니다: 즉 현실을 꿰뚫어보고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신비를 비춰주는 한줄기 빛입니다. 이것을 접하면 인간을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도전해 오시는 창조주이며 구세주이신 “그분”에 대한 응답의 대화인 기도가 인간의 마음 안에 일어납니다.

    이 신앙의 중심을 인간이신 그리스도와 또한 그분 안에서의 세상의 역사와 현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느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세상과 역사가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잃었던 아들의 입장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호적인 계약, 짜릿한 감동의 대화로 살아야할 계약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에 관해 올바로 얘기를 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전시대의 역사적 계약들 즉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의 경험의 성숙한 발전인 그리스도의 기도하는 태도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진실로 기도하는 백성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섭리의 창조주 하느님과 대화하는 법을, 즉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은 삶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한 실제의 백성이었습니다. 이 백성의 기도의 표현들인 축복과 송가와 다양한 예식들과 축제는 하느님의 현존을 시간과 세상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축복과 기쁜, 흠숭과 감사, 찬양과 간구, 비탄과 용서에 대한 간원, 분방한 정서와 불분명한 부담,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한 걱정과 확신어린 강한 신뢰감, 하느님께로 열려있는 모든 인간적 종교적 감정들을 맛보았습니다.


    유대 작가 로버트 아론은 자기 백성의 기도의 열성을 상세히 표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는 남과 주와 달을 별처럼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성전에 하느님과의 대화가 가득 넘치게 했습니다. 이 작가의 연구 덕분에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과 같은 신실한 유대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진실 되고 참으로 뜻 깊은 기도를 바치지 않고 살다가는 역사의 신비와 세상의 참 의미를 깨치지 못하는 슬픈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관계된 운동 현상에서는 한창 유행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에 반대하는,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소명을 파괴하는 강력한 반작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homo orans"를 단순히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분위기에 역행하는 것은 확실히 오늘날 신앙교육의 근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이처럼 복잡다단한 기도관의 배경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대화가 그리스도교 기도란 말인가?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신앙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 중심을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는 그분께 일치시킵니다. 성부와 함께 그분은 우리를 당신께 결합시키는 성령을 보내십니다: “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요한15,1-7).


    신앙과 마찬가지로 참된 기도 역시 선물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은 것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이며 전례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원을 가집니다; 그것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사전례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기도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특징적 단계들을 접합니다.

    - 첫째 그것은 자기 비판적인 참회로 시작되며, 성부의 자비로우심에 대한 믿음이 이를 뒷받침 합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결점과 한계에 대한 진실한 겸손의 태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 다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1요한4,10)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과 주님의 가르침을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는 묵상해설 부분이 있습니다.

- 이 다음에는 잔치를 상징하는 봉헌과 식탁 준비가 뒤따르며, 이어 빵과 포도주의 상징(그 자체는 보잘 것이 없지만 큰 의미를 지닌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음식과 음료가 될 것 입니다)을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노동을 봉헌하는 대화가 나옵니다; 기도가 자기 봉헌의 태도를 구체화 시킵니다.

    - 이 다음에는 성부인 당신(Te igitur)와 함께 나누는 개인적 대화가 시작됩니다: 그분은 전체 예식이 바쳐지고 또한 선포되고 있는 창조적이며 자유롭고 변화를 가져다주는 사랑의 경이로움(흠숭, 찬미, 감사, 신뢰)의 주인공인 다정한 벗입니다.

    - 이리하여 모든 사람과 굳게 맺어진 형제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파스카 사건을 성령의 권능을 빌어 지금 여기에 현존시키는 “추도”에서 예식은 절정에 이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 중 최고의 자기 봉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전례적인 순간입니다; 계약의 정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실존입니다; “성자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충만히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성찬기도 제3양식).

    - 그 다음에는 찬미와 간구라는 두 측면을 띤 “주님의 기도”가 바쳐집니다. 우선 성부의 무한한 사랑에 고나한 내용에 귀를 기울인 다음 희망에 찬 놀라운 선포로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두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 실존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명백한 인식이 현재와 과거의 역사, , 용서, 유혹 등을 기도 안에 실질적으로 삽입시키는 문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좋으신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가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 끝으로, 한 몸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살고 일하기 위해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는 “영성체”를 합니다. 그리고 곧 바로 계약을 완성시키기 위해 우리의 생활과 일을 통해 협력하라는 “사명”을 받아 파견됨으로써 예식이 끝납니다.


    미사예식에 대한 이 간단한 개관이 그리스도교 기도의 특성에 더욱 깊이 파고드는 데에 빛을 던져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미사가 “말씀을 경청”하는 겸손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신비에 생생히 합치되는 것을 거쳐 “사명”을 받아 파견되는 것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자 안에서 아들들이 되며 우리 형제들과 굳게 맺어집니다. 이렇게 하여 homo orans는 그 최초의 기원에 담긴 존엄성을 되살리고 뛰어넘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이 빛을 발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초석


    신자들은 겸손한 참회로 경청하는 자세를 갖추어 계약의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첫 응답의 시작으로서의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서의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리라”(요한묵시록 3,20).


    이러한 주의 깊은 경청의 태도는 16세기 스페인의 위대한 성인들이 완성시킨 “정신기도”에서 특별히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묵상기도는 수도승이나 은수자들만을 위한 것이 사실 아니라 모든 기도의 기초입니다; 사실 신앙은 무엇보다도 듣는 행위입니다.


    각 개인의 양심과 자유가 개입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그것은 마치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강렬한 기도의 순간은 흔히 우리의 내부에 침잠하는 순간, 느낌 이상의 묵상 순간, 말하는 순간보다도 침묵하는 순간, 추론보다도 명상의 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압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히브리서 4,12).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오 6,6).

    이것은 성체성사에서 아주 중요하고 지극히 완전한 교회적 표현인 공동 기도를 손상시키기보다 오히려 공동기도에의 진정한 참여를 위한 선제 조건을 강조합니다.

    정신 기도는 묵상으로부터 관상에로 발전합니다; 이 내적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관계 맺기 시작합니다. 성녀 데레사는 그것을 묘사하기를 주님을 친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오로 6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멋지게 그것을 정의 했습니다: “눈과 마음을 하느님께 고정시키려 노력하는, 우리가 관상이라 부르는 것은 모든 정신 작용 중 가장 고상하고 완전한 것이며, 무한한 인간 활동 피라미드에 오늘날에도 위계질서를 부여할 수 있고 또한 해야만 하는 작용입니다”(바오로 6, 65127).


    묵상이 이르게 되는 “관상”은 몇몇 특별한 영원에게만 허용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운 추상적 정의로 관상을 제시하거나 관상의 여러 가지 종류와 정도를 미묘한 문제점과 더불어 제시하는 것이 여기서의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영성을 사신 성인들의 모범을 살피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돈보스코를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인 상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보스코 안에서 본성과 은총이 훌륭하게 조회된 것을 찬탄하며 그를 연구하고 본받는다.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자기 겨레의 고유한 덕성을 풍부히 갖추었던 그는 지상 현실에 개방되어 있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요, 성령의 은총으로 넘쳤던 그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는 듯’ 살았다”(회헌 21).

    경청에서 생겨난 사랑이 고양되어 하느님의 마음에 직접 침투될 때 묵상은 관상이 됩니다(회헌 12참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말하는 기도의 목표


    이제 우리는 돈보스코의 기도를 반영하는 “da mihi animas"에 담긴 열렬한 기도적 요소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심오하고도 견식있는 증거를 살필 것입니다. 기도는 그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일치“를 지칠 줄 모르는 사도적 활동의 삶으로 전환시키도록 하는 동시에 교리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써 그것의 본질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우리 수도회의 첫 세대들이 좋아했던 작품인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논고” 제6권과 제7권에서 인상적인 독창력을 가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무아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유사 신비 현상의 경우 흔히 그렇듯 거기에 의식 상실이나 실재로부터의 이탈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성덕 놓은 그 주교는 환각이나 거짓 환상이 될 수도 있을 정서적 도피주의에 빠질 겨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하느님께 이르기 위해 자기를 잊고서 아주 놓은 곳에 오른 것처럼 보일만큼 기도에 열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는 무아경 같은 것을 조금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즉 내적 친절과 단순함과 겸손을 통해 그리고 특별히 무한한 애덕을 통해 세속적 바람과 자신의 원의와 본성적 기질들을 절제함으로써 하느님과 결부된 고상한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면, 테오티무스, 단언하건데, 그의 모든 무아경은 지극히 의심스럽고도 위험한 것이라네; 그 무아경들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의 성덕을 높여주기 보다는 경이감을 조성하기 쉽다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하느님의 사랑에 관하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께서는    “무아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정신 기도가 도달해야할 목표를 뚜렷이 지적하셨습니다. 그 목표는 “자신을 벗어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당신께로 들어 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초월하도록 해주는 바로 이것을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무아경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고찰들에서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그분 이후 “살레시안적”이라 불리게 된 영적 본질의 가장 심오한 측면에 다가섭니다.


    기도는 대화를 넘어 내적 태도를 발전시켜 일치적 사랑이 됩니다. 말이나 느낌으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변화시킴으로써 응답합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사랑하는 분께로 다가갑니다; 텅비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 2,20)라는 사도의 말씀을 체험하는 넘치는 기쁨으로 채워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살찌워주는 삶이기에 인간적 동기나 영향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여 기도가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사랑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기도는 많은 사랑을 낳는 어머니, 이를테면 자신이 낳은 것의 생명 즉 “하느님과의 일치”를 완성시키기 위해 자신을 잊는 어머니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께서는 더 나아가 이러한 “일치적 사랑”은 기도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그런 것은 정적주의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어떤 활동(활동주의가 될)과 동일시되어서도 안 되며 사랑의 삶과 활동으로 해석됩니다; 그것은 말보다도 의지를 길러줍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초월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자신을 벗어나거나 초월할 수 없기에(요한 6,44), 기도하는 삶은 지속적인 환희와 행동하고 활동하는 항구한 무아경이어야 합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하느님의 사랑에 관하여>). 그러므로 일치적 사랑을 위해서는 기도에 대한 지속적인 쇄신이 필요하며,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낮은 단계에서 시작하여 무한히 진행됩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기도에 있어서의 세 가지 환희, 즉 세 가지 “무아경”을 나열 하십니다: “첫째는 지성, 둘째는 감성, 셋째는 활동과 관계됩니다.” 세 번째 것(생활과 활동의 무아경)은 다른 두 가지 것의 절정이며 이것이 없다면 다른 두 가지 것은 불완전하게 됩니다: “자신과 자신의 본능적 성향을 극복하여 무아경 즉 삶과 활동의 환희를 체험하지 않은 성인은 여지껏 한사람도 없었습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하느님의 사랑에 관하여>).


    빛을 비워주는 진리와의 만남을 통한 “지성의 무아경”은 특별한 관상을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또 “간성의 무아경”역시 지극한 열성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생활의 증거와 적극적 협력의 발단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세 번째 것과 관련되어 있지만 불행히도 반드시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인께서는 만을 지성의 환희가 본질적인 것이기 보다 하찮은 것에 불과하며, 정서적이기 보다 사변적이고, 경험보다 지식에, 바탕을 이루는 본질보다도 겉모습에 기초한 것이라면 지극히 의심스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감성의 환희가 참여라기보다는 느낌의 문제이며, 자기희생 보다 얼빠진 찬탄을 연상시키고, 부지런한 활동 보다 감수성에서, 실천적 응용보다 멋진 이론에서 기인된 것이라면, 그것은 지독히 피상적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실천하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라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쓰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서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적인 것이다. 첫 번째 것에 의해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한다; 두 번째 것으로는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한다… 첫 번째 것을 통해서 우리는 잉태하고 두 번째 것을 통해서 출산한다; 첫 번째 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마음 안에 모시고… 두 번째 것으로 그분을 팔에 안는다. 갖가지 덕행을 실천하게 해주는 애덕의 칼과도 같은 팔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완성을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정신력 한계 이상으로 높여 주셔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연적 본능과 본성 역시도 초월하게 해주셔야 할 필요가 있는 성스런 열망들이 있다. 그러한 열망들은 사실 인간의 이성에 배치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고 뛰어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 우리는 올바르고 신자적인 시민 생활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초인적이며 영적이고 독실하며 충일한 삶, 다시 말해서 아무튼 우리의 자연적 조건을 벗어나고 뛰어넘은 삶을 산다…


    우리 재산을 모두 버린다는 것, 청빈을 사랑하고 그것을 매력적인 주인으로 여기는 것; 무시, 경멸, 업신여김, 박해, 순교를 기쁨과 지복으로 여긴다는 것; 순일무잡한 정결 안에 머무는 것; 끝으로 세속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격언과 견해를 거슬러, 끊임없는 포기와 절제와 자기 부정으로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이생을 사는 것은 곧 인간의 본성에 따라 살지 않고 그것을 초월해 사는 것이다”(성 프란치스코, <하느님의 사랑과 관하여>).


    그러므로 기도의 참 목적은 하느님과 일치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단계를 지녔으며 끊임없이 커집니다; 여러 가지 단점을 지닌 채 조그맣게 시작되어 점점 확대 됩니다: 그것은 “여명과 같은 빛”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고찰은 우리를 살레시안 기도의 현실주의로 데려갑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연구가인 앙드레 레뷔는 성인의 개인적 경험의 성과인 이러한 심오한 통찰이 당시에는 일종의 정신적 반란을 의미했다고 주장합니다: “‘신심’(즉 영성)이 관상과 활동, 내적 공경과 외적 공경, 신심업과 교회법적 규정, 고행과 신비, 하느님 섬김과 인간 섬김, 그리고 더욱 깊은 차원에서는 수도승과 평신도 간의 대립에 대한 논쟁들을 단숨에 끝내버렸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전기).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증언과 교의의 중요성에 관한 돈보스코와 그의 후계자들의 발언 몇 가지를 상기해 볼 수 있습니다.

    돈보스코는 “살레시안들이 진실로 그들의 믿음을 생활한다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께 그분의 열성과 애덕과 온유로 그것을 이해했듯이 그렇게 산다면, 저는 정말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좋은 일을 굉장히 많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우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BM 12, 630;18 참조).


    2대 후계자 돈알베라는 우리의 주보성인에 관한 말을 자주 했습니다; “신심”에 관한 회람장에서 그는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다루었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종종 언급하셨으며 돈보스코의 성덕의 비결인 “적극적 신심”이 우리 회 안에서 실천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3대 후계자 돈리날디는 시성 사업 대사에 관한 얘기 가운데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거룩한 주보성인이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선종 300주년을 맞이하여 베풀어진 것이며, 그분의 훌륭한 교의에는 이 멋진 생각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에 주목합시다. 분은 지금 이 순간을 성화시킨 사도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ACS 1923, 17, 36).


이렇듯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와의 일치적 사랑에 이르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것입니다; 이는 사목적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사목적 사랑은 전()사도직의 영혼”(AA 3)이라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레시안 사도직의 영혼은 사목적 사랑입니다!(회헌 10 참조).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도를 새롭게 가다듬음에 있어서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워야 할 목표입니다!


    사목적 사랑은 특별한 외적 특징이 없습니다; 사목적 사랑의 태도에는 꾸밈이 없습니다; 고도의 지적 성찰로부터 활력을 이끌어 내기는 해도 그것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지만 독특하거나 유별난 감정적 표현을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사목적 사랑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일체감을 실천적 태도로 바꾸는데 주력합니다. 사목적 사랑의 지적 관성과 열렬한 감정들은 그것에 관계된 모든 것이 구원 사명을 지향하도록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목적 사랑을 지닌 사람은 “출산”을 위해, 즉 사지에 힘을 주기 위해 심장의 피를 순환시키려고 “잉태”합니다.


    여기서 우리 주보의 신조가 하느님과의 일체 관한 위대한 두 스승들인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오는12월이 그분들의 선종 400주년 입니다)의 신조와 실제로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은 수도회 개혁이라는 힘겨운 임무 중에 늘 함께 했던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증거하고 전하였습니다.


    가르멜과 살레시안 카리스마는 매우 다르지만 일치적 사랑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것은 진리- “모든 것”이 되신 동시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는 말처럼 자신을 비워 “무”가 되신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는 우연의 일치입니다:

    그것은 하나이며 동일한 “무아경”에 관한 또 하나의 얘기 방법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쇄신시킵시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고찰에 비추어 우리는 돈보스코의 카리스마와 살레시안 기도가 불가분의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서로 융합하여 영적으로 단일하게 드러나기에 어느 한쪽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생생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최근의 우리 총회들의 목표는 공의회 이후의 새 환경 속에서 창립자의 카리스마를 재출범 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기도에 대한 쇄신으로 섭리적인 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모든 카리스마가 신자들의 교회적 친교를 위한 활발한 역할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의 쇄신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기도의 쇄신에 있어서 질적 도약을 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태리어판 공동체기도 “서문”은 수도회 안에서 “신심업”과 관련하여 행해져 왔던 과정을 면밀히 종합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돈보스코의 본래 생각과 특별총회가 바랐던 본질적 쇄신, 그리고 창립자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교회적으로 새로운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을 살아있는 전통이 강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힘겨운 작업이었지만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26년간의 실제 경험을 거친 이후 제22차 총회에 의해 새 회헌으로 입법화 되었습니다.

    확실히,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교회의 보편적 사명과 또한 신앙의 독특한 성격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적 차이와 건전한 역사적 전통이 전례에 영향을 미쳤듯이 창립자의 카리스마가 지닌 독특한 측면들과 창립자의 카리스마를 세상 안에 확립시켜온 믿음직한 전통 역시 여러 가지 종류의 기도에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현재 유행 중인 세속주의의 도전과 여러 가지 교회 운동이 보여주는 그에 대한 맹렬한 대응 사례들을 접하는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새로운 기도는 어떠해야 하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문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우리 성소를 활성화 시키는 원칙이 되도록 그 핵을 이루는 것을 권장해야 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서문 중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기도는 절대자의 자리, 하느님의 자리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의 말씀”이 진정한 의미를 띄게 되는 자리이며 그와 더불어 우리의 실존 전체와 관계되는 자리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신비가 하느님의 신비와 만나게 되는 주체적이며 진실된 대화의 자리이다…그러므로 기도가 인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면 역사 속에서 결정적인 시대와 장소에 출현하지 않을 리 없다; 실천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과의 대화”를 다루는 그 규칙서의 본문 내용을 여기서 살펴본다면 더욱 특징적이고 생생한 측면들을 더 잘 강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회헌 7장이 끝부분에 놓인 이유는 덜 중요한 부분이어서가 아니라 앞에 나온 모든 것을 종합하는 절정으로서 제2부의 마지막 부분에 나왔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과 “공동체”와 “복음적 권고에 대한 실천”(바꿔 말하자면 우리의 생활과 활동의 무아경)이 그 본질상 교회의 신비에 관계되는 까닭에, 기도에서 얻어지는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목적 사랑의 힘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맨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모범은 분명히 돈보스코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돈보스코로부터 배운다”(회헌 86).


    다함께 회헌 해설서를 다시 읽어 봅시다: “돈보스코는 활동의 모범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기도의 모범으로 자주 제시됩니다…많은 이들이 돈보스코의 기도 정신을 증언했습니다. 돈바르베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기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분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 기도하는 것을 무수히 목격했습니다. 그분은 장소를 옮길 때에도 기도했습니다. 여행 중일 때에는 프린트물을 수정하고 있지 않으면 언제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돈루아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짧은 휴식 중에도 기도에 몰두하신 그분의 모습을 여러 차례 접했습니다’ … 그분은 기도를 절대적으로 우선시 했습니다. ‘기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곤 하셨습니다. ‘천국에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면 어떤 일도 잘 될 수 없다.’ 그분에게 있어서 기도는 아주 훌륭한 활동이었습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얻으며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입니다”(<회헌 해설서>, 돈체리아 <Don Bosco con Dio> 참조).


    갈리에로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보스코는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분이 하신 일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고 하느님 앞에서 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분의 계속적이고 성스러우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일을 내포했습니다; 그분은 관상 생활과 활동 생활을 완벽히 합치시켰습니다.”


    우리 창립자에게서 빛나는 근본적 특징은 그분에게는 “기도와 삶이 자연스럽게 일치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회헌 86). 이것은 회헌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특징입니다(회헌 86, 87, 89, 92). 회헌은 우리가 “‘성 요한 보스코의 아들들의 특징인 기도와 하느님과의 일치로 성화된, 지칠 줄 모르는 근면’으로 삶의 전례를 거행”(회헌 95)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한 특징은 단순한 기쁨과 희망으로 이뤄진 기도 양식을 전제로 합니다; 이상스런 감정적 표현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증여의 희생을 무의식적으로 맛들이게 하는 매력적인 분위기(전례의 장엄함)를 조성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회헌 제12조는 우리 기도의 목표를 명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살레시안은 계약의 산 경험을 얻습니다: 그는 “항상 기도”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행합니다!


    이미 언급한 해설서를 여기서 좀 더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의 이러한 일치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성소와 관련하여 얘기한 ‘일치의 은총’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활동에서도 ‘신심업’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존재 전체에 일치의 은총이 충만해 있는 사람의 내심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 사업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자기 봉헌을 통해 하느님 사랑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인 한 활동이나 기도로 표현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영적인 역동성”입니다. 그것은 사도적 활동을 지향하는 애덕의 내적 태도이며, 사도적 활동에서 구체화 되고, 드러나고 성장하며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관상”과 “활동” 즉 분리되어 있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 있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전통이 우리에게 남겨준 두 용어 간의 유명한 구별보다도 더 높은 차원에 위치합니다. 공의회도 사제직을 다룰 때 이것을 확인했습니다(PO 14).


예수회원 제롤라모 나달이 자기네 창립자인 이냐시오 성인께 적용시킨 simul in actione contemplativus” (MESI, Epistolae et Monumenta P. J. Nadal, V, 162)라는 의미심장한 표현을 우리는 우리의 모범이시며 평생 동안 관상과 활동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열정”자체로 즉 그 자신이 “다른 사람의 선익을 위한 애덕과 희생의 순교"(ASC 308 참조)라고 불렀던 변함없는 태도로 “da mihi animas”를 증거하신 돈보스코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살레시안적 일처리 방식은 살레시오 수녀회의 공동 창립자이신 마리아 마자렐로의 생애에서 특별한 광채로 빛납니다(ASC 301 참조). 그녀는 돈보스코의 처음 조언 즉 “반드시 기도하시오. 그리도 당신이 특히 젊은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시오”, “하느님의 현존을 점점 더 체험하시오; 일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과 기쁨을 보여 주며, 교회 안에서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협조자가 되시오”라는 조언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던 돈보스코의 사도적인 내적 느낌들의 비밀을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았습니다.

    언젠가 돈보스코께서는 살레시오 수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살레시오 수녀에게서는 활동적이며 관상적인 삶이 마르타와 마리아, 사도들의 생활과 천사들의 생활을 상기시키듯 똑같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우리 살레시안들이 마리아 마자렐로에게서 우리의 내적 생활의 특징들이 소중한 여성적 가치들을 풍부히 지닌 마음에 의해 아주 단순하게 탁월이 구현되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리칼도네 신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참으로 마리아 마자렐로에게서는 염경기도나 묵상 때 뿐 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일에서도 하느님 앞에 있음을 늘 의식하는 신심이 아주 분명하게 들어났었다.” 그녀의 딸들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은 하느님을 계시하는 영혼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마치 그녀의 제2의 천성인 듯이 여겨질 정도로 맑고 투명한 단순함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우리의 기도를 쇄신하려 한다면, 먼저 우리는 돈보스코의 사도적 카리스마가 우리에게 하느님과의 일치에 총력을 기울이기를 요구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애덕을 사랑하도록 하는 “단순하고도 진심어린 대화”로 기도를 전부 표현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도 199051일 제23차 총회 참석자들에게 하신 유명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성부, 기꺼이 우리 형제가 되신 성자, 단신 현존으로써 세상을 힘차게 쇄신시키시는 성령의 신비에 대해 고찰하면 할수록, 살레시안은 헤아릴 길 없는 이 신비가 자신에게 젊은이들의 인간적 성숙과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자신을 봉헌하도록 촉구하고 있음을 그만큼 많이 느끼게 됩니다(GC 23 332).”


우선권을 두어야할 세 가지 점들


    우리는 기도의 쇄신이 모든 형제회원들과 각 공동체에게 효과를 미쳐왔는지를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 회 안에 문제와 어려움을 일으키는 역행적인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으로 유익을 얻어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가치를 우리 카리스마의 요구와 조화시키는 대신 공동체는 마지못해서 소극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형식적인 신심업, 강고한 심성, 신심업을 무시하는 사례들의 부정적 영향, 평생 양성에 있어서의 생생한 기도 주제의 부재, 우리의 기도생활에 중요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 고백성사의 위기와 고행의 감소-교회 안에서는 성령의 특별한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바로 이때에-는 어떤 경우에는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유를 쉽게 이해시켜 줄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쇄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차원은 서로 다르지만 상호 보완적인 세 가지 역동적인 점들에 노력을 집중시켜야만 합니다: 정신기도와 고행에 임하는 개인,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께 합치되는 공동체, 우리 사명의 대상자들 가운데서 사도적이며 사랑의 활동을 펼치는 성직자적 모습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점들 사이에는 사목적 사랑을 강화시켜 주는 역동적이며 상호 호혜적인 부분이 생겨납니다.


우선 이 세 가지 점들을 발전시킬 필요성이 있음을 더 잘 인식하는 데에 도움이 될 예비적 관찰을 행하도록 합시다.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폭넓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획득된 관상(여러 단계의)으로부터 이른바 주입된 관상(높은 경지의 신비 차원까지의)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습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거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고찰들은 하느님과 우리의 일치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그 강도를 평가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이미 우리는 그가 의미심장하게 사용했던 “무아경”이라는 용어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가 “삶의 무아경”이라는 개념을 우리의 공동체 생활 방식에, 복음적 권고에 대한 우리의 실천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는 우리의 친교에 적용시킨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개인주의와 독단성, 차가움, 위험스런 보상 등의 요소들을 알아차릴 때 “무아경”의 실제 발전 정도를 가늠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활동의 무아경”이라는 개념을 우리 사업에 적용시킨다면, 객관적 평가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어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들 즉 이기심 단순히 본능적인 의도, 오만과 육욕에 빠지는 것, 증거가 빠진 활동주의 등을 적지 않게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한 양심 성찰은 우리로 하여금 앞에서 지적한 세 가지 점에 계속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그것들이 참으로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우리의 사목적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더 많은 기도, 더 나은 봉헌 생활, 더욱 많은 사목적 자질은 함께 발전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기도 문제가 실제로 모든 형제회원들과 공동체가 관심을 기울여야할 언제나 새롭고도 변함없는 쇄신 임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관심과 점검과 항구한 성장의 교육학을 필요로 하는 아주 중요한 양성적 측면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공동체 생활”과 “사도적 활동”이 기도의 실천과 잘 조화를 이루도록 조정해 줄 실천적 기준을 결정하도록 요구할 것입니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기도하는 공동체의 증거에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봉헌 생활과 사목적 효과에도 해를 끼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적하고 있는 세 가지 점들은 서로를 포함하는 것들입니다; 그들의 생명력은 끊임없는 상호 관계에 의해 측정되며 그것을 기도를 근거로 하고 있고 애덕을 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돈보스코는-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천국에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고서는 어떤 일도 잘 될 수가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 모방>에 나오듯이 “우리만 있으면 쓰러집니다. 당신이 함께 계셔야 우리가 살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연약하고 변덕스럽지만 당신이 우리를 불변하게 합니다. 우리는 차가워지기 쉬우나 당신이 우리에게 새로운 불을 놓습니다.”(그리스도 모방. 3. 2).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점들의 몇몇 측면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1. 인간 내지 개인은 분명히 각 형제회원을 뜻하며 나머지 것들의 토대를 이룹니다. 사람이 없고서는 기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탓함으로써 회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활동 영역과는 구분되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대화에만 바쳐진 특정 영역을 필요로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매일 새롭게 경청해야 합니다(묵상, 독서, 공동기도 참석, 개인적 창안); 내적 쇄신을 위해 특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월피정, 계절 피정, 연피정); 구세사의 사건들을 기념함으로써 전례주년에 활발히 참여해야 합니다;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며 그리스도의 신비들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등등.


    항상 정신 기도를 통해 경청하는 태도를 지녀야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그분을 착한 목자로 묵상합니다(회헌 11 참조). 그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항상 현재의 상황과 관련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거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궁극적 제안-그분의 제사를 구성하는-은 그분의 파스카 증거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니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릴 내 피이니라.” 이것은 최상의 “삶의 무아경”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도전들에 대해 소극적으로 임한다면 하느님의 이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삶은 복잡하게 전개되지만 그리스도의 제사는 아주 분명합니다. 사목적 사랑에 이르게 되는 경청은 희생을 피할 수 없으며 더구나 이데올로기나 덧없는 유행에 빠져들지도 않습니다. 인생의 수많은 질곡 속에서 우리는 시편 저자와 함께 이렇게 되뇌입니다; “주여, 당신을 찾사오니, 당신 얼굴 내게서 돌이키지 마옵소서.”


    정신 기도와 밀접히 결부된 인간적 측면은 모든 형제회원들이 행해야 할 절제와 보속에 관계된 임무입니다. , 자기 수련의 부족, 미지근하고 부절제한 행동, 세속적 정신은 기도의 죽음입니다. 진실한 회개의 태도와 예민한 “죄의식”을 위한 양심 성찰에 내포된 자기비판-오늘날의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과는 궤를 달리 하는-은 성부의 자비의 신비를 반드시 깨닫게 해주며, 용서의 기쁨과 희망을 줍니다. 또 이것은 우리를 사도덕 교육자로 특징지어주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는 특별한 고행을 강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개인적 창의력을 북돋아 줄 것입니다.


    모세, 예언자들, 예수님, 성인들과 특히 위대한 창립자들(베네딕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이냐시오 로욜라, 도미니코 구츠만, 아빌라의 데레사 등)은 열심한 기도와 단식, 금욕, 고행을 병행시켰습니다. 돈보스코를 주의 깊게 살피다 보면, 그분이 보여주신 겸손의 실천, 희생정신, 구체적인 절제 정신, 정신적 육체적 고통 수용, “일과 절제”(회헌 18 참조)라는 그분 모토의 수많은 요구들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께서 영적 지도에서 금욕과 절제를 위한 개인적 노력을 중시했음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정욕의 절제를 기도 시간의 길이보다 더 크게 평가했습니다; 그분은 “고기를 줄이기보다 자기애를 더 절제하고, 기도보다도 정욕을 절제하라”고 충고하곤 했습니다; 또한 덧붙이기를 “정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15분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MI, Fontes narrativi, II 419, 24; I 644, 196)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대화가 기도의 불가결한 본질인 개인적 측면에 의존할 때면 언제나 각 형제회원 앞에 광활한 임무의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2. 공동체와 관련된 점은 중요한 두 번째 차원이 전례쇄신과 결합되기를 요구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합치되는 것이 그 절정을 이룹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공동체는 스스로를 공동체로 건설하고, 진정한 “신앙의 표징”, “신앙의 학교”, “친교와 참여의 중심체”가 되는 데에 필요한 매일의 힘을 성령께로부터 받습니다. 조그마한 기초 교회가 지역사회 안에서 또 우리 사업의 대상자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요구받고 있듯이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활성화 핵이 됩니다.


    개인기도 없이는 기도하는 공동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해야 할 말이 더 있습니다. 문제는 개인기도의 집합이 아니라 함께 하는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공의회는 우리에게 공동체적인 것의 질적 도약을 당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에 알맞는 전례적 활성화를 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3차 총회가 활발하고 실제적인 평생 양성을 위해 마련한 “공동체의 날”은 모든 집에서 모두 함께 뜻 깊게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준비 시간을 갖고 모두가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전례기도는 우리가 함께 모여 조그만 교회를 이룬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우리 봉헌의 카리스마적 원천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의 사도적 사명, 형제적 공동체 그리고 복음적 권고의 실천은 우리 봉헌생활의 분리될 수 없는 요소들이며, 이들은 하느님과 형제들을 향한 동일한 형태의 사랑 안에서 나타납니다”(회헌 3; 24, 50도 참조).


    이러한 “사도적 친교”를 자각함으로써 공동의 “사목계획”에 대한 임무가 생겨납니다.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집에 성체의 현존에서 활기를 얻는 경당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봉헌생활 수도회 총회에 보내는 메세지에서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수도 공동체의 자연스런 중심은 성체성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라또리오 즉 기도 장소에서 가시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곳에는 복되신 성체의 현존이 각 수도가족의 주요 사명이 되어야 할 바를 드러내주고 실현시켜 줍니다”(SCRIS 1989, 1).


    3. 우리 활동의 대상자들 사이에서의 봉사적 현존은 우리 기도의 쇄신에 꼭 필요한 또 하나의 차원입니다. “일치의 은총”을 살고 우리 수혜자들 가운데서의 우리의 현존에서 내적 경향과 외적 활동 간의 유대를 이해한다는 것이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 주요 문제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우리의 수혜자들(이태리어로는 destinatari)는 우리에게 있어서의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둘째, 우리의 현존과 활동은 어떤 현존, 어떤 활동이어야 하는가?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늘 새로운 요구를 띠고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난 10년간 돈보스코의 카리스마 재출범, 새로운 복음전파, 새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여러 가지 개혁들이 있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광활한 새 지평이 열렸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시대의 표징들과 주교들의 가르침과 수도회의 지침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수혜자”는 살레시안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계약을 밝혀주는 일종의 “불타는 가시덤불”입니다; 살레시안은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모상을 봅니다; 그들의 물질적 요구가 살레시안의 영적 관심사가 됩니다.


    23차 총회의 다음과 같은 말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젊은이를 사랑하신다고 믿는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의 성소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있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나눠 가지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젊은이는 새로운 미래의 희망이며, 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들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젊은이들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시며 그들을 통해 보다 참되고 인간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룩하시고자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만날 은총을 주시고 또한 젊은이들 안에 계시는 당신을 섬기며 그들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그들을 충만한 삶에로 이끌도록 젊은이들 안에서 인식하고 그들을 충만한 삶에로 이끌도록 젊은이들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믿는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교육 사업은 하느님을 만날 훌륭한 터전이 된다”(GC23 95).


    이것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의 “수혜자들”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습니다!


    그 다음으로, 살레시안의 현존과 활동은 그를 젊은이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징표이자 전달자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저 단순한 현존도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입에서 “내가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네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다”는 말씀을 듣게 해주는 “봉사적 현존”입니다.


    이 밖에도 그 현존에는 단순한 활동 즉 인간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성질을 쉽게 띨 수 있는 활동이 아니라 (공의회가 말했듯이) “사도적 애덕 활동”(PC 8) 즉 성령께로부터 나왔고 성령께로부터 힘은 얻는 활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런 활동은 “수도생활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활동은 성스러운 직무로서 또 애덕의 고유한 일로서 교회에서 위탁된 것이기 때문이며, 교회의 이름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PC 8). “사도적 애덕 활동”은 그 본질상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어지며 더욱 열심한 기도를 지향합니다. 그것은 방심이 아니고 특별한 만남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사도적인 활동이라면 사목적 사랑의 불로 인해 더욱 활발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진실로 사도직의 영혼이지만 사도적 활동은 다시 사목적 사랑을 촉진시킵니다! 그리고 살레시안의 마음에서는 이 불을 지피는 커다란 비결이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과 기도가 이원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기도가 사도직으로 전환되고 사도적 활동이 기도를 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교황께서는 앞에서 언급한 제23차 총회 성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교육자로서의 우리 사명에 관해 얘기하는 가운데 이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사목적 사랑에서 비롯된 일치의 힘을 근본적인 것으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이웃에 대한 봉사, 내적 복음 묵상의 깊이와 사도적 활동, 기도하는 마음과 바쁜 손 사이의 불가분성을 보장하는 성령의 권능의 성과입니다. 두 위대한 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요한 보스코는 이 놀라운 ‘일치의 은총’을 증거하고 교회 안에 그것을 실현시켰습니다. 여기서의 타락은 어느 것이든 사도 생활 수도회에 대한 심각한 유혹이 될 활동주의와 비밀주의에 빠질 위험한 길을 터놓게 됩니다. 반면 이 ‘일치의 은총’에 감추어진 보화들은 이 두 성인들의 삶이 잘 보여주었듯이 하느님과의 일치가 실천적 이웃 사랑의 진정한 원천임을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GC23 332).


성령과 마리아여 우리를 도우소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지금까지의 고찰들은 돈보스코의 카리스마에 의거하여 우리 수도회 안에서 기도를 쇄신시켜야할 우리의 임무를 강화시키자는 권고입니다. 공의회 이후 우리는 확실히 큰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에게 새로운 분위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신비감, 하느님과의 그리스도의 성령의 현존의 여러 모습, 활발한 교회적 친교, 창조와 복잡다단한 “세상” 자체의 놀라운 의의,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알려 주었습니다. 총회는 이 새로운 영성의 드넓은 궤도 안에서 돈보스코의 카리스마를 새롭게 제시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지만 특별히 기도라고 하는 미묘한 분야에서 우리가 완전히 바뀌기 위해서는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이 아직도 많습니다. 기도의 비결은 무엇보다도 개인에게서, 정신기도를 기본 태도로 지닌 개인에게서 발견됩니다. 정신기도에서 우리 각자는 관상을 위한 자신만의 “암자”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또 우리 생의 어느 시기에 하느님께서 섭리로써 우리를 어느 “수도원”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서의 우리 삶은 아플 때나 늙었을 때처럼 행동적이기 보다 오히려 정열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레시안 정신 기도에서 어떤 실제적인 재주를 익히고자 한다면, 각 관구는 특별히 전례와 공동체의 여러 신심에 관해 유능한 활성자를 둘 필요가 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관구장과 특별히 원장은 모두가 진정한 쇄신을 경험할 수단을 마련해 주어야할 책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돈보스코의 카리스마가 특별한 광채를 띠고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중시하고 그것의 깊은 뿌리를 되살리는 데에 도움이 된 모든 것들은 유익하고 감사로이 환영받을 것입니다. 반면 우리 마음속에서 돈보스코의 카리스마가 차지하는 최고의 위치를 흔들리게 하거나 그 매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피해야 합니다.


    살레시안의 기도는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젊은이들과 서민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덕에로의 부르심이 단지 선택된 몇 사람이나 수도원적 환경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 평범한 사건들과 특별한 사건들에, 활동과 질병에, 모든 직업과 생활 방식에, 모든 연령과 모든 상황에 적용됩니다.


    살레시안 가족을 구성하는 단체들 가운데에는 그 성원들의 기도 봉헌 방식이 서로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태리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방문 수녀회가 우리 협력자회에 들어오고자 했을 때 기꺼이 환영했습니다; 또 우리는 살레시안 가족 안에 강렬한 사목적 사랑을 확립하기 위해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단체들을 이곳저곳에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찬미합니다. 예를 들어 베끼의 돈보스코 대학에서는 젊은이들의 성화를 위한 끊임없는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카리스마가 시작되었고 또한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청소년 지복 동산”이요 “영성의 학교”라고 불렀던 맘마 말가리따의 조그마한 집 곁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순례자들, 특히 청소년 순례자가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 그곳에 갈 때, 그들은 기꺼이 함께 경배하고 경청하며, 기도할 줄 아는 것이 인생에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특히 우리는 살레시안 카리스마 고유의 특징을 지닌 청소년 기도 단체를 관구 안에 육성시키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사실 청소년을 위한 우리의 사목 활동은 수많은 청소년들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에 대한 의식의 상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실제 학교들을 육성해야 합니다. 기도 정신을 함양시키지 않고서는 청소년 영성을 조금도 육성시킬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돈보스코의 카리스마가 성령과 마리아께서 교회에 준 값진 선물임을 압니다. 실제로, 수세기를 거쳐,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역사하심에는 언제나 마리아의 모성적 중재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 카리스마의 경우, 우리는 창립자 자신에 의해 이것을 분명히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마리아께 돈보스코와 마리아 마자렐로에게 심어주셨던 살레시안 방식으로 기도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달라고 빕시다.

    저는 성모 승천 대축일의 분위기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위대한 “파스카”, 역사 속에서 도움이신 분으로서의 그녀의 모성적 역할을 우주적으로 출범시킨 신비의 분위기 속에서.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어머니가 될 능력을 가져다주었을 때, 그녀에게서 우리의 주님이시요 형제이며, 성부께서 진실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하게 될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하는 마음은 “보소서, 아버지. 제가 당신 뜻을 행하려 왔습니다”(히브리 10,5)라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런 태도를 닮은 것은 곳 수태고지 때의 마리아의 태도를 닮는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이것은 “자녀답고”, “선교사다운”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에서 시작되어 실제 일상생활의 현실에로 이어집니다.


우리 모두 끈기를 가지고 우리 카리스마의 첫 창시자인 성령께, 그분의 정배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기도와 갊이 자연스럽게 일치”(회헌 86)되는 상태로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내적 성향이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해달라고 청합시다.

    우리 성소의 신원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사지고 돈보스코에게서 물려받은 “신심”으로 날마다 그것을 키워나갑시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에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주 안에서 존경과 사랑을 보내며

Atti 354호 살레시안 영성상의 성장을 위한 지적들



5. 나에게 영혼을 달라


(AGC 332, 334, 336, 353)

비가노 신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는 돈보스코께서 직접 택하신 이것, ”나에게 영혼을 달라“는 것보다 살레시안 정신을 더 잘 규정할 수 있는 종합적인 표현을 없다고 확신합니다.”

커다란 영성 단체들과 물결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카리스마의 정수를 짧은 요약구로 표현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평화와 선”, 베네딕또회의 “기도와 노동”, 혹은 예수회의 “AD MAIOREM DEIGLORIAM”을 상기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수도회의 초창기 증언들과 그 이후의 고찰들은 돈보스코의 사도적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표현은 바로 DA MIHI ANIMAS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돈보스코께서도 자주 말씀하신 이 표현은 그분의 영적 특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직 젊은 사제(34)돈보스코의 사무실에 들어선 도미니코 사비오에게 감명을 주었던 표어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감동한 사비오는 유명해지게 된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이제 알겠습니다; 이곳에서 신부님은 돈벌이 대신 영혼벌이를 하고 계시는군요”(G. Bosco, Life of St. Dominic Savio, ch. 8) 그는 돈보스코가 자신에게 숙식과 학교교육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알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을 즉각 파악했던 것입니다. “영혼”들에게 부여된 핵심위치는 후임 총장들에 의해서 재확인 되었습니다. 돈 루아, 돈 알베라, 돈 리날디는 모두 그 점에 대해 설명했고, 그 점은 전례에도 흡수되었습니다; “이웃의 구원을 추구하고 하나이시며 유일한 선이신 당신을 섬기도록, 우리에게 동일한 사도적 사랑을 불어넣어 주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현의 의미를 좀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 대한 영적 해석은 핵심내용을 추출해내는 즉 인간과 사물간을 구별하는 토대가 됩니다. 멜키세댁의 존재와 그가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은 해당 구절에다 전통적으로 용인된 특별한 종교적 메시아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렇지만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만을 토대로 돈보스코의 표어와 프로그램을 존속 혹은 폐지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실 역사 안에서 특히 성성의 역사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유일한 모범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돈보스코가 자기 시대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내린 개인적 해석이며, 그런 기반 위에서 그가 자신의 생과 하느님 체험을 설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영혼’은 인간의 자유의 중심이요 존엄성의 뿌리이며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는 즉 성령께서 당신 현존을 느끼게 해주시는 특별한 영역인 영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두 의미들 즉 성서적 의미와 돈보스코가 발전시킨 의미들 간의 어우러짐은 우리 자신의 문화에 비추어 볼 때 몇가지 아주 구체적인 생활 및 활동의 선택을 제안합니다.


첫째, 사랑 즉 사목적 사랑은 일차적으로 인간을 고려하며 일차적으로 인간을 향한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성부의 사랑과 예수님의 구원활동 및 성령의 현존에 비추어 인간의 가치를 알아보는 직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물’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것들은 교육과정에서 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목적 사랑이 추구하고 제공하는 구원은 충만하고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거기에 맞춰집니다; 자선은 교육에 종교적 그리스도인적 입문에, 종교적 입문은 은총과 생활과 하느님과의 친교에 맞춰집니다.

바꿔 말해서, 우리는 인간 실존에서 종교적 차원에 우선권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육과 발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심의 동기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그것이 성장과 향복의 가장 심오한 원천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의 깊이와 올바른 발전 및 올바른 표현을 추구합니다. 세속주의 및 혼돈된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시기에 있어서, 이런 접근노선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실현시키기 쉽지 않습니다.


그 표어는 활동방법에 대한 지침도 포함합니다: 개인의 양성이나 쇄신에서는 그 사람의 영적 능력 즉 그의 도덕적 양심, 하느님께 대한 개방성, 영원한 운명에 대한 생각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돈보스코의 교육한은 영혼, 은총,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교육학입니다. 일단 이런 에너지가 작용해왔기에, 더욱 효과적인 교육사업이 시작됩니다. 그 나머지 것은 그 자체로는 타당할지라도 그것을 초월하는 이것을 준비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da mihi animas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과 사목활동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것이 나오는데, 그것은 금욕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나머지는 놔두시오.”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성향은 물론이고 전적으로 합법적인 것일지라도 시간과 자원을 빼앗을 수 있는 활동분야는 포기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을 하느님께 개방시킬 시간과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여러 활동들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거나 모두 제쳐둘 수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삶을 되짚어보고 그의 정신적 설계를 따르며 그의 사상 노선을 탐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모체를 발견합니다: 구원 수단의 유일한 수탁자인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구원이 바로그것입니다. 가난하고 잡없는 버림받은 젊은이들의 도전이 그에게 온유하고 자애로운방법을 통해 세상과 교회에 편입시키기 위한 교육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이 금방 느껴집니다; 그런데 또한 거기에는 젊은이들의 영원한 구원을 바라는 것에서 비롯된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da mihi animas가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사목적인 ‘마음’을 가리킵니다; 자발성, 추진력, 일하려는 욕구, 사목활동에 대한 재미, 기쁨어린 자기 -증여, 가장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이끌리는 느낌, 모든 활동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느낌, 자잘한 장애들을 무난히 극복해나가며 워험과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 반대는 사목적 임무들에 대한 무관심과 또한 그것들을 가능한 한 빨리 이행해야할 의무인양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측면에 덧붙여, da mihi animas는 사목적 감각을 전제로 합니다. 사목감각은 예술 감각이나 사업감각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재능이요 자발적인 움직임이며 우리의 관심 대상자 입장에 서서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관련자들이 인간적 측면에서 성장하고 그들의 실존에서 성부의 현존을 깨닫도록, 해당자의 구원을 위한 입장에서 문제들을 지도하는 데에, 활동을 생각해내거나 시작하는 데에 타당한 기준들, 핵심사실들, 좌표점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리고 사건들에 대해 사목적 견해를 취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사목적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da mihi animas가 요구하는 특별한 전문적 준비인데, 우리는 그것을 통해 동기를 부여하고 훈육하며 활성화하고 성화시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영혼들을 위한 사업에 늘 존재하는 눈에 띄지 않는 극히 가벼운 요소들까지도 염두에 두고서 어느 상황의 요구들에 응할 계획을 마련하고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춥니다.


끝으로, 우리는 그 목록에 사목적 창조성, 즉 새로운 문제들과 상황들에 대해 독창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게 되는 정신적 실제적 태도를 포함시키기도 해야 합니다 본당들은 통상적인 교리수업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돈보스코는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계획을 생각해냈습니다. 얼마 뒤 젊은이들이 일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또 직장에서 보호받지도 못함을 보고서 간단하고도 수수한 해결책을 생각해냈는데 훗날 이것이 괄목할만하게 성장했습니다; 노동계약, 작업장, 직업학교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집이나 훈육과 관계된 다른 요구들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돈 체리아는 이런 것을 살레시안 정신의 특징으로 여깁니다: “누구에게나 감동적인 첫 번째 모습은 개인과 집단 양자 모두의 엄청난 활동입니다.”

1996년 살레시오 가족 생활지표



"DA MIHI ANIMAS"는 활동에서 그리고 인내 속에서 자신을 내어 줌이며,

자신을 내어 줌은 전 실존에 활기를 준다.



1. 독특한 연두사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연두사의 독특한 성격을 지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연두사는 비가노 신부님이 쓰신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은 연두사나 유언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이 아직도 우리에게 연두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살레시오 수도회 최고 평의회는 후에 최고 평의회 회고록 353항에 수록된 비가노 신부님의 마지막 글에서 이 확언이 가장 숭고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이라고 믿었고, 힘과 시간이 모자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글에서 자신의 영적 체험을 종합하여 전해주려는 신부님의 노력을 감지했습니다.

그래서 이 연두사는 메시지인 동시에 회상입니다. 연두사를 올해 동안 내내 부고와 봉헌된 살레시안의 영성(영적교훈)과 곧 출판될 서간집(카리스마적 지침)과 나란히 두어, 비가노 신부님과 우리가 바라던 대로 그분이 임기 종료일까지 우리를 동반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연두사는 비가노 신부님의 서거 대문만 아니라 살레시오수도회의 총회(2)와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도회의 총회(9)를 목전에 두고 있는 특별한 시기의 마지막 연두사이기에 독특합니다. ‘97년과 그 이후의 연두사들은 틀림없이 두 총회에서 영감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일관성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최종 연두사인 만큼 이전의 여러 연두사에서 반복되었던 주제들

- 젊은이들을 위한 사명에 관한 사목적 사랑, 예방교육, 내적생활 그리고 그와 유사한 다른 주제들 - 을 다시 다룹니다.

주제뿐만 아니라 몇몇 단어까지도 되풀이됩니다. 1993년의 연두사 <<사랑을 토대로 하고 사랑 안에 굳게 뿌리내리며, 임무 수행에 있어서 자신을 내어 줌>>을 보십시오.


*어조에 있어서도 독특합니다. 사실 살레시안적 삶 전체에 관한 숙고로서 활동적 자극제이기보다 영적 묵상입니다. 앞서의 다른 연두사에서는 교의적인 면을 고찰한 후 행동하도록 우리를 밀어 주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가치 교육을 시킵시다. 애덕의 사회적 차원을 증거 합시다. 사회교리를 신앙 교육의 도구로 삼읍시다, 등등.>> 이에 반하여 이번 연두사는 우리의 사도적 봉헌 생활의 원천에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하여 그 실천적 적용에 대하여 해석하려고 고민하지도 않고 그냥 관상 속에 머물게 합니다. 근본의미를 포착하고 심화하고 음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 배경


이 연두사의 특유성은 언어 표현에서 뿐 아니라 그 글이 Tm여진 배경에서 비롯됩니다. 말은 단순히 개념을 담는 그릇이기 이전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표현하기 때문에 배경은 단어의 근본 의미를 바꿀 수 있기도 함을 누구나 압니다. 훗날, 지금하고 있는 연두사의 해설보다 연두사의 배경에 대하여 더 강하게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연두사는 삶을, 혹은 실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에지디오 신부님의 체험입니다. 굳건한 내적 생활에 기반을 둔 그분의 굉장한 생명력과 진취성을 모두가 인정하였고 신부님은 이를 창의성, 제안, 조직화로 표현하였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그분의 교의적 지침에서 모두들 유익함을 얻었고 이를 향유했었는데 이제 그것을 잃었습니다. 분명히 지력을 발휘할 맑은 정신은 있으나 잘 정리된 원고나 웅변적인 연설을 통해서라도 계속 영향을 미치기에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닌 처지에 있는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분은 생애의 그런 순간에 우리 성덕의 장인 젊은이를 위한 사명에 있어서 자신은 이제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성찰합니다.


*삶의 배경은 연두사를 발췌한 글의 문학적 맥락을 반영합니다.


사목적 사랑에 주목하여 사목적 사랑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로, 어떻게 표현하며, 언제, 어디서, 무슨 힘으로 자라는지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고통스러운 순간과 활동할 수 없는 시기에 있던 돈보스코의 모습에서 사목적 사랑을 관상하였습니다. 보통으로 우리가 관찰시기로서 택하지 않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젊은이들을 위하여 바라보고 소개하는 돈보스코는 자신의 격렬한 생명력 안에 고통을 흡수하고 거의 중화시키면서 오라또리오의 활발함 가운데 있으며, 교육적 창안과 사회적 이니셔티브를 내고, 커뮤니케이션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에 돈보스코 안에는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책임감, 열망, 노력, 사명의 본질을 전달하려는 의지, 젊은이들에게 선을 하고자 하는 원의를 가지고 인내롭게 견디어 내는 모습.

-연약한 존재가 되어 사심 없는 말을 하고 타인의 행동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상태에 놓여져 주역 의식을 가질 어떤 인간적인 가능성도 없어져 정화된 상태에서의 하느님과 젊은이를 사랑하는 모습.


3. 주제


우리 가족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문학적 맥락에서 위와 같은 위치에 있음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연두사의 주제들을 찾고 그 주제들 간의 관계를 알아보겠습니다.


3-1. “da mihi animas"


연두사는 먼저 돈보스코와 마드레 마자렐로의 현존과 활동에서 그들 나름대로 이해한 이 성서적 표현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 묵상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성서적 의미는 다르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므로 ‘그들 나름대로 이해한’이라고 말했습니다. 명망 높은 몇몇 학자들이 때때로 이 사실을 기억시켜 줍니다. 아무튼 이 성서적 표현은 돈 보스코의 활동에 대단한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당시의 통속적인 해석을 차치하고 분명한 것은 돈보스코가 그 말씀에서 어떤 영감을 끌어내기보다 자신의 사목적, 카리스마적 모든 체험을 거기에 부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돈보스코에게 이 금언은, 자극하고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전기에 수록된 일화는 da mihi animas의 의미와 중요성을 밝혀 줍니다. 1884912일 살라 신부는 최고 평의회에 살레시안의 문장초안을 제시했습니다. 그 하단에는 펄럭이는 띠 위에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말고 그대로 두어라”라는 모토가 적혀 있어서 이에 대하여 토론을 하는데 누군가는 ‘일과 절제’, 다른 이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로 바꾸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문제를 해결하셨다. “기숙학교의 오라또리오 초기부터, 교도소에 갈 때 da mihi animas라를 모토를 채택했었습니다.” 평의회는 환호하며 역사적인 이 모토를 받아들였다.

글자 그대로는 돈보스코가 아주 빈빈하게 입술에 오르내리던 표현은 아닙니다. 돈 보스코 전기의 내용 색인에서 모토가 문장전체로 나오는 곳은 위에서 언급한 곳과 도메니코 사비오가 돈보스코의 방에서 모토를 읽고 해설하는 장면 이렇게 두 가지 일화뿐입니다.

반면에 돈보스코가 이 모토와 같은 뜻을 가졌다고 여기던 다음과 같은 다른 표현들은 아주 잦습니다. 영혼들을 찾아 나서라, 영혼들을 구원하라, 영혼들을 위하여 일하라, 영혼들을 위하여 자신을 소모하라, 영혼에 관한 것일 때는 불편한 것에 상관치 말라 등등.

이것으로 인용구 선집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비가노 신부님은 da mihi animas 안에 살레시안 영성의 요약된 명령어, 암호가 들어 있음을 다시 강조해야 함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지 여러 만남의 순간에서도 《돈보스코께서 친히 택하신 말씀, da mihi animas 보다 살레시안 정신을 더 잘 묘사하는 종합적인 표현은 없다고 확신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역대 총장 신부님들과 총장 수녀님들은 전통적으로 이 주제를 각자 나름대로 다시 다루었고 모두들 이 말씀의 중심성을 재확인하기에 고심했습니다. 인용문을 열거하느라 여러분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순서대로 정리되어 “Don Bosco, profondamente uomo, profondamente santo"da mihi animas를 제목으로 한 장과 통합 개념을 다룬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현 회헌에 수록된 루아 신부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실 마음에 영혼밖에 없었다.(살레시오 수도회 회헌21) 평등과 상호성에 따라 마드레 마자렐로의 말씀도 인용합니다. 《주님께 한 영혼을 구해 드릴 수 있다면 우리의 모든 희생을 바칠 것입니다.

역사적 연구에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피에트로 스텔라 신부는 기록합니다. 《돈 보스코의 지적 도식을 따르고, 사고의 발자취를 탐색하면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구원 수단의 유일한 보유자인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하나의 기본틀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버림받고, 가난하고, 떠돌아 다니는 젊은이들을 보며 도전을 느꼈고 그 도전은 돈보스코 안에 교육에 대한 절박감을 일깨웠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구원에 대한 열망에서 나오는 긴박감이었다.이 주제는 전례에서도 취하여 미사 본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그 같은 사목적 사랑을 일으켜 주시어, 형제(초기 라틴어 본문에는 ‘영혼들’로 되어 있음)들의 구원을 찾고 유일한 최상의 선이신 당신만을 섬길 수 있게 하소서.

그러나 da mihi animas의 의미에 대한 최상의 해설은 인용구 선집이나 일화집이 아니라, 다음 몇 가지 점들이 두드러지는 돈보스코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부성애와 각 젊은이 안에 아름다운 인생 설계, 부정적인 체험 때문에 가려질 때가 많더라도 그의 실존 안에 새겨진 그 계획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신뢰.

-젊은이들이 이 세상에서는 신앙의 빛을 받아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영원의 세계에서는 구원받은 삶을 누리도록 그들에게 각자가 가진 이 가능성을 알고 맛보게 하려는 열망.

-수고를 아끼지 않음. 이런 목적에서 단 한 명의 젊은이, 단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온 힘을 다하고 모든 수단을 이용함.

간략히 말해서 da mihi animas는 젊은이와 서민 가운데서 수행하는 교육적 사명을 내포합니다.

그 사명은 은총의 삶 혹은 성덕에 관한 제안을 주축으로 하고, 예방교육에서 표현되는 사목적 사랑이라는 고유한 양식으로 전개됩니다.

이는 돈보스코에게 외적인 활동만을 뜻하지 않고, 열망과 내적감동, 지능, 마음, 인간 관계, 전문성, 시련, 우정, 시간 등을 포함하는 전인격의 투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da mihi anmias는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사제직과 봉헌생활을 고무하는 삶의 선택 :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개인적 생활 설계 : 《너의 모든 사언 행위가 네 영혼에 유익이 되기를 바란다.

*심원한 기쁨 : 《한 젊은이가 들어오면 내 마음은 기뻐 용약하고, 나는 구원해야 할 한 영혼을 봅니다.》《영혼들을 돌보는 일은 돈보스코에게 일종의 참 축제였다.

*용의성 : 《영혼들에 관해서 말하러 오면 언제나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는 돈보스코를 만날 것이다.

*고통 : 《영혼에 관한 일에 무관심한 젊은이를 보는 것은 나에게 가시관을 쓰는 것과 같다.


같은 모양으로 기도, 실천적 창안들, 매일의 충실, 형제에는 그리스도의 부를 젊은이들에게 보여주려는 열망과 노력에로 모아집니다.

최상의 표현은 이렇습니다. 오라토리오(살레시오회의 모든 사업을 뜻함)의 유일한 목적을 영혼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회원들을 살펴보건대 이 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회원들끼리 일치하려는 원의를 가지라고 초대하는 것이었다.


3-2. 자신을 내어 줌은 전 실존에 생기를 준다


사명이 그 결실을 얻고, 우리에게는 기쁨의 원천과 성덕에로 나아가는 여정이 되려면, 우리는 그 사명을 ‘자신을 내어 줌’이란 의미로 이해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대체로 젊은이들을 위한 사명은 해야 할 일, 달려가야 할 곳, 응답해야 할 요구들, 준비해야 할 자료들에 대하여 떠올리게 합니다. 자신을 내어 줌은 이런 모든 것과 상반되지 않고 그 모든 것 위에 두드러지고 그것들의 원천이며 근원이 됩니다.

내적 원칙이며 동력인 사목적 사랑을 통하여 사도의 상을 묘사하고 있는 Pastores dabo vobis 3장에 ‘자신을 내어 줌’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사도를 , 원칙과 힘, 내면의 에너지를 통해서 머리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닮아 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장과 구절은 에지디오 신부님이 좋아해서 자주 말씀하시던 것이어서 저도 그 내용을 기꺼이 상기합니다.

《사목적 사랑의 근본 내용은 자신을 내어 줌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선물하는 것이며, 자신의 양들을 위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목적 사랑은 우리의 사고방식, 행동양식,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을 규정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많은 요구가 따르게 돕니다.

그런 점에서 이는 성령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라고 주님이 불러 주신 사제들, 수도자들, 열심한 평신도들 안에 특별히 강렬하게 뿌리내린 은혜입니다. 그들 안에서 예술가와 같은 예술적인 재능, 상인과 같은 사업에 대한 직관력과 흥미, 시인과 같은 시적 감각이 인격을 형성하는 샘과도 같이 성령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은총이나 천부적 재능을 넘어서 자발적인 감각을 기르는 것은 개인적인 임무입니다. 우리가 하는 선택에 따라서 그리고 그것을 심화하는 데 기울이는 관심과 노력에 따라서 이것은 자라거나 위축되고, 완전해지고 성숙합니다.


많은 것 중에 네 가지 해설을 성찰 자료로 택하였습니다.

자신을 내어 줌은, 개인적인 선호로 표현되므로 목자는 그에게 맡겨진 젊은이들과 함께 그들 가운데서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이 더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하려고 서둘러서 끝내야 할 의무의 수행은 아닌 것입니다. 젊은이들과 피정을 하면서 자신의 휴가 기간을 보내는 어떤 주교님이 생각납니다. 그 기간은 그분의 휴식 시간이었습니다. 사목적인 의무에서가 아닌 영혼들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내어 줌은 인격적으로 대하고 인격 자체를 내어 줍니다. 모든 것이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환대, 개별적인 인간관계, 인간적, 영적 성장과, 양심의 성숙에 연관된 목표들에 우선권을 줍니다. 때때로 우리들이 준비하는 물건들과 우리들 자신을 내어 주는 마음 자세사이에는 불균형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객이 잘 이용할 수 있도록 자동응답기를 대기시켜 놓았지만 우리가 수화기에 직접 응답하는 것은 드뭅니다.


자신을 내어 줌은 제한이나 경계선을 두지 않습니다: 《이 우리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요한 10,16). 위로해 주거나 도와주어야 할 일이 생기면 누가 되었든지 몇 명이든지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적절한 때라고 깨달으면 정해진 시간표를 개의치 않습니다. 선행이나 교육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영혼은 달력과 시간표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 줌은 다양한 활동들을 통합시키는 능력으로서 역동적인 내적 원칙이 됩니다. 그 덕분에 복합성, 단편성, 분산성으로 강하게 특징 지워진 사회적, 교회적 상황에서 내적 생활과 수많은 활동 및 칙임을 통합해야 할 영속적인 요구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실존에 생기를 주는 자신을 내어 줌”은:


-전체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맡겨진 일과 자신이 택한 일을 구별하고, 젊은이들과 함께 수행해야 할 의무와 개인적인 선택을, 그리고 공동체 계획과 사적인 계획을 구별하면서 제한된 봉사를 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내면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은 외적인 것에 국한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 활동 - 지성, 감정, 특히 하느님 체험과 우리 실존의 의미 -을 포함합니다.


-통합성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명 수행 시간과 휴식시간 사이에, 사목적 사랑과 기도 사이에, 공부와 사도 활동 사이에, 교육적 전문성과 그리스도를 전파하려는 열망 사이에 경계선을 긋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해 일합니다.》 행위는 여러 가지이지만 사랑은 하나입니다.


3-3. 활동과 인내


활동과 인내, 행하는 것과 고통하는 것은 우리 생애의 양극과도 같습니다. 한편은 진취성, 활발함, 교육적, 사목적 창의성을 발휘하고 다른 편은 표면상으로 외적인 수동성, 활동불가의 상태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활동하는 것과 고통하는 것은 사랑의 두 가지 양식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두 가지 표시로서 일치시켰습니다. 이 두 극단 사이에 다른 모든 유사한 표현들 - 일상과 예외, 성공과 실패, 기쁨과 좌절 - 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살레시안에게 활동의 가치에 대해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연두사는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다른 이들이 했거나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와, 상상력이 풍부하고, 과감하고, 새로운 활동일수록 좋다는 내용은 훈화와 밤 인사의 주제이며, 우리의 강점입니다.

외부에서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로 평가합니다. 살레시안은 만들고, 창조하고 주도권을 잡으며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에 대해서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합니다. 활동 생활의 영성에 따라 활동함을 사랑하는 것을 내포하는 서원을 한 사람에게 그것은 아주 맞는 것입니다. 다만 활동을 활동주의 혹은 마음의 동요와 혼동하지 않고, 지나친 근심 걱정에 빠지지 않으며 활동의 내적 차원을 되찾을 것을 당부할 따름입니다.


인간적 내면성: 우리의 활동으로 전파하려는 선과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최종 목적을 인식하고 교육적 중재들이 그 목적을 중심으로 모아시조 있는 지를 검토하고, 영혼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상징적 의미에 맞는 선택을 하는 지를 철저히 살핍니다.


영성적 내면성: 제일의 동인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다만 그 도구일 뿐이라는 확신으로, 모든 변화에는 은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주님께 신뢰합니다.


쓰여진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번 연두사에서 참으로 색다른 점은 자신을 내어 줌에 있어서 인내를 부차적이 아니라, 총체적인 표현으로서 포함시킨 것입니다.


인내는 연두서를 끝맺고 거의 완성을 시키고 있으므로 이 사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만 비가노 신부님의 글에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된 돈 보스코의 일화로 더욱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바르셀로나로부터의 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레노블의 신학교에 머물게 되었을 때, 학장은 환영사에서 돈보스코에게 ‘고통이 놀라운 성화의 길이 돔을 신부님보다 더 잘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고 말하자 돈보스코는 예리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아닙니다, 학장 신부님, 거룩하게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인내입니다!...” [...] 우리 아버지 돈보스코에게는 육신적인 무력함 가운데서도 영속적이고 전적인 da mihi animas의 자세가 강하고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을 용의가 있습니다.”(에지디오 비가노, 총회 회의록 353, 1995, p.7)


우리는 인내를 무수한 양상을 포함하는 두 가지 형태로 실천합니다.


-하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려움이 있더라도 꾸준히 활동하는 것입니다. 항구성이 그 특징이며, 굳셈을 보완하는 면입니다.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내는 것은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떨어짐으로서 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완고한 고집쟁이와는 다릅니다. 최종 목적과 조건을 재고할 능력이 있어서 식별에 따라 활동을 재조정하기 때문입니다.


-인내의 다른 형태는 관대하게 주님께 봉사하겠다는 숭고한 결심을 가지고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외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활동은 봉헌, 내적 자세, 기도, 활동하시는 하느님과의 일치, 가난, 생기를 주시는 성령께 대한 신뢰 안에서 전적으로 내면화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가난한 이들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그들의 소망을 들어주실 때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수준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인내롭게 받아들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특히 수난과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인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인류를 위하여 기도와 고통, 성부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봉헌하신 것입니다.

이 형태의 인내는 신앙, 희망, 사랑을 요합니다. 대신적(對神的) 자세를 표현하는 것이며, 이 인내에서 사랑은 신앙과 희망 전체를 흡수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들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인간적으로 열악한 순간들의 출산력은 믿고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에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이러한 인내에 대한 살레시안적인 입장에서 본 몇 가지 해설을 살펴봅시다.


-첫째,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체험의 전문가인 성 바오로가 이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평화, 인내, 자비, , 온유, 충실, 절제입니다.”(갈라디아 5,22) 고통하는 형제 자매들을 볼 때 당연히 감탄하고 감화를 받습니다. 평온함, 기쁨, 봉헌의 모습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하느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이러한 자세를 감지했을 때 가까이 다가가서 봉사하고 위로해 주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목격했고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와 유사한 상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둘째, 인내는 기쁨과 연관이 있습니다. 영웅적인 인내만은 아닙니다. “인내로운 사람은 악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 때문에 과도하게 슬픔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다.”(성토마스 Ⅱ-Ⅱ, q.136 a 4 ad 2).

인내는 슬픔으로 짓누르는 감정의 동요를 이기고 평온하고 신뢰깊은 마음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인내롭다는 것은 선을 하다가 받는 상처 때문에 영혼의 평온함과 명석함을 잃어버리지 않음을 뜻합니다.”


-셋째, 돈보스코가 고통 중에 느끼는 기쁨은 da mihi animas 젊은이들을 위하여 자기 삶을 바치고, 그 생명을 주님이 당신의 구원 사업에 일치시켜 주심을 아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모범에서 그리고 하느님 체험에서 신앙으로 인내해야 할 합당한 동기를 발견합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고통하고 멸시받습니다.”라고 십자가의 성요한은 말하곤 했습니다. 그의 관상적 카리스마는 십자가 상에서 성부께 대한 사랑을 표현한 그리스도와의 동일화에로 그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밖에 다른 해설들은 우리들의 최상의 선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을 기록합니다. “필로테아여, 병을 참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병을 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 원하시는 불편과 더불어 참아 견디는 것이 참된 인내이며, 다른 불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이것으로써 불행이 물러갔다면 겸손된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고, 만일 불행이 주님의 뜻이라면 또한 인내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라 [...]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 쾌유를 희망하라.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병고를 거부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지복을 누리기 위해서 죽음이라도 사양치 마라”(신심 생활 입문 제3, 3).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인내가 우리의 존재와 행위의 성숙에 미치는 효과를 벌에 비유하여 기억시켜 줍니다. “꿀벌이 꿀을 만드는 동안은 매우 쓴 것을 먹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슬픔의 바을 먹고 고뇌의 날을 보내는 동안 숭고한 온유와 인내를 하여 훌륭한 덕행의 꿀을 저장하는 것이다. ‘백리향초’라는 작고 쓴 풀의 꽃에서 취한 꿀이 제일 단 것처럼, 가장 비천하고 굴욕적인 고통의 어려움 중에서 행하여진 덕행이 가장 훌륭한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십자가의 성 요한, 기타 다른 성인들의 묵상과 돈 보스코의 묵상, 더 가까이는 비가노 신부님의 묵상을 대조해 보면서 da mihi animas (혹은 사목적 사랑)안에서 자신을 내어 줌의 고유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돈보스코는 활동과 고통, 창의성을 발휘하는 시간과 인내의 순간을, 영혼들을 위한 봉헌 안에 통합하셨고,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파견되었다고 자각하는 사람안에서는 모든 것에 같은 구원의 효과를 부여하였습니다. 노년기에 그리고 무력함 가운데서도 젊은이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가능한 행동 표현을 하였던 수많은 형제, 자매들에게서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4. 연두사를 실천할 몇 가지 적용


네 가지가 생각납니다.

*첫째, 우리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념하는 젊은이들의 구원 계획을 중심으로 삶의 모든 잠재력 -마음, 감정, 능력, 시간, 관계-이 모아지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내어 줌에서 인내롭게 통합성을 이루어 갑시다.

돈보스코의 성격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긴장들이 젊은이를 위한 봉사라는 철저하게 통합된 삶의 계획 속에 용해되었습니다. “젊은이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면 한 걸음도 떼지 않았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어떤 사업에도 손대지 않았다.”

고 회헌에 기록도어 있습니다.(살레시오 수도회 회헌 21). 그러한 통합성은 검정의 소산이나 지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행복한 순간에 나온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식별과 언행일치, 자신의 선택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요합니다. 그래서 돈보스코에 대해 “어려움과 수고 중에서도 확고하고 항구하게 관대한 마음으로 이를 실현하였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영적 성장은 일생 동안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파종된 씨앗을 보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긍정적, 부정적인 생활 체험을 통하여 자신을 꾸준히 양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 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야고보5.7)


이에 대한 로마노 과르디니의 아름다운 사색은 말합니다.

소유해야 하는 것과 소유하고 있는 것 사이, 하고 싶은 것과 조금씩 해 나가는 것 사이, 되고 싶은 것과 실제로 된 것 사이의 긴장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진실로 살아 있는 인내입니다.” 체념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있는 그대로가 풍요롭다는 확신에서 현재의 처지에 대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적용 영역은 교육적 실천입니다. 이것은 살레시안 인내의 특유한 표현입니다. 젊은이의 성장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교육자는 젊은이들이나 좀 나이 든 이들이 내적 동기와 잠재능력을 발달시키도록, 그리고 감추어진 활력이 표출되고 우리가 제시하는 메시지를 내면화하여 더욱 더 심오한 의미들을 점차 발견해 나가도록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교육적 인내는 신뢰와 희망과 연관이 있습니다. 은총, 생명에 대한 매력, 현명함은 각자 안에서 점진적으로 더 좋은 것이 피어나게 하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니 시를 뿌리고 기다립시다.


*우리 수도가족 안의 형제, 자매들에게 뿐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제실 ㄹ 심화 주제는 인내에로 자신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인내에로 자신을 교육하고 그렇게 하도록 할 줄 아는 것은 오늘날 특히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성급함 -즉시, 모두- 때문에 현대인에게는 바람과 그 원의의 충족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두고 기다리지 못하는 무능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심화하고 노력하여야 얻을 수 있는 고상한 것을 추구하기보다 일시적인 욕구 - 그것이 낮은 수준의 것일지라도 - 에 굴복하는 것.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극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너무나 쉽게, 희생을 하지 않고 얻었기에 재화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

-먼저든지 나중에든지 아마 항상, 힘든 면 -연약함- 을 드러내면서 성숙하지 못하는 것.

인내에로의 교육은 지성- 예방교육에서 ‘이성’이라고 하는 -을 성숙시키는 것을 내포합니다. 사물과 사건들의 가치 서열을 깨닫고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여정에 필요한 단계들을 파악하며 여러 가지 자료들과 다른 이들의 체험을 접하고, 발달시켜야 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검토해 보지도 않고 그것을 현실에 옮기기 위한 조건들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인내에로의 교육은 영적, 윤리적 자세 -예방교육에서 ‘종교’라고 일컫는 -를 육성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어쩔 수 없이 부딪치는 좌절의 순간에 꿋꿋이 서 있고, 필요한 은총이나 생활필수품들이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으로 하느님께 신뢰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인내에로의 교육은 사회적 의식을 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갈 줄 알고 성격의 충돌이 있더라도 화를 억제하고 매일 서로 화해하면서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수용할 줄 아는 것입니다.


*연두사의 네 번째 적용 영역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활동과 고통의 순간이 상호 침투되어, 활동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동일한 사명 안에 융합되어 동등하게 평가됩니다. 젊은이들과 노인들, 젊은이를 위한 사명을 위하여 재능을 발휘하는 이들과 단순히 반복되는 일들로 이를 뒷받침하는 이들 모두 개별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선물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활동과 감추어진 일들은 같은 유익함을 주는 것입니다. 비가노 신부님은 성금요일 메시지에 기록하십니다. “육신의 고통에 짓눌릴 때, 그리스도의 사랑의 신비에 잠기는 것이 형제, 젊은이와 함께 있고 자매들을 활성하기 위하여 그리고 살레시오 가족을 증강하기 위한 더 이상 적절한 순간은 없습니다.”(최고 평의 회의록353, p4)

19951231, 로마

부총장 후안 베끼 신부



Atti 371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니라



4.3 성체성사와 'Da mihi animas'


위의 잛은 발언들에서는 성체성사가 돈보스코의 생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따라서 우리가 우리 시대에 충실히 번역해야 할 그의 독특한 영성에서 성체성사가 차지하는 위치 역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체성사가 돈보스코의 삶에서 차지했던 비중과 또 그러기에 살레시오 회원들로서 우리 삶에서 차지해야 할 비중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잘 보여 주는 요소는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고 한 그의 좌우명에 표현된 사목적 애덕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반복해 오고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아온 이 말들은 인류 구원을 위해 성부께 자기 목숨을 바친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델로 삼기 위한 돈보스코의 계획과 과정입니다. 이 말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많은 확신으로 반복하며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효과적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처럼 이 말을 성체성사의 빛으로 묵상해야합니다.


성체성사를 배경 삼아 바라보면 “나에게 영혼을 달라”가 우리에게는 좌우명이기보다는 기도로, 최후만찬 때 예수님이 드린 사제적 기도의 메아리로 보입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제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하여 제 몸을 바치나이다” 이는 하느님과의 대화와 관계에서 최상의 표현이며, 실존적 차원에서 항상 성공적으로 피하지는 못하는 일과 기도 사이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는 우선 사명에서 주인공 내지는 주체가 하느님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부께 드리는 기원을 통해 동료 인간들에게 사도적으로 봉사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고 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주님이 관여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의 열심한 사랑에 맡겨 드리며, 그분이 구원을 주도할 수 있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돈보스코와 각 시대의 위대한 사도들에 대해, 즉 다른 사람들을 향한 애덕의 움직임과 또 움직임이 우리 안에 생성시키는 힘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언제나 인식해 온 사람들에 대해 새롭게 각성하며,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그런 움직임과 힘을 하느님 덕분으로 돌려야 합니다.

더구나 이것은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삶을 성부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으로 이해했으며,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신” 성부의 선물인 성체성사적 봉헌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성부의 주도하심에 대해 이렇게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그분의 겸손하고 담대한 기도의 특성이 ‘Da mihi animas'에 부여됩니다. 우리는 성부께서 실제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기 위한 중심으로 우리를 선택하시어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에 이끌게 해 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청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요청이며, 우리가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 즉 인간들이 당신 사랑의 계획에 적극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일치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기와 신앙을 가지고 “나에게 영혼을 달라” 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겸손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영혼들‘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인내롭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요구합니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라는 기도가 오로지 그분의 입술에서 나올 때만 주제넘은 소리로 들리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들려 올려진 그분만이 모두를 당신께로 끌어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일어난 부활의 드러높임으로 이를 가져가며, 이것이 매력의 신비스런 중심이 되게하는 사랑을 우리와 함께 나누길 원하심을 우린 압니다.


이렇게 성체성사는 “나에게 영혼을 달라”는 좌우명의 또 다른 측면을 조명합니다.

이 좌우명을 “사랑받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십시오.”라는 말을 통해 해석할 때, 돈보스코는    동역자들에게 교육 환경에서 아주 중요한, 공감을 얻는 본성적 재능들을 발전시키기를 단순히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받으려 연구’할 때 거치신 과정, 즉 매일 자신을 내어주는 과정에 동참하기를 더욱 깊이 있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살과 피에 일치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부터 퍼온 복음적 사랑만이 교육자에게 참다운 영적 지배력을, 튀어 보겠다거나 호감을 얻겠다는 태도가 정화된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매력을 청소년들 가운데서 발산할 수 있도록 하는 온전히 자유로운 영적 지배력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나에게 영혼을 달라.”는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에서 완성됩니다. 다른 모든 관심과 갈망을 이 임무에 종속시키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돈보스코의 모토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적 기도를 본받는 것으로서 자신의 영역에서 시간 ․ 우정 ․ 전문성 등 그 어떤 근본적인 여건도 제외하질 않는 봉헌의 기도라고 이해합니다.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는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그것은 성체성사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비약입니다. 돈보스코는 그것을 매우 구체적인 말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마지막 순간가지 젊은이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그렇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에 성사적인 참여는 우리를 그분의 사도적인 감각과 하느님 왕국의 요청에 대한 관대한 봉헌과 일치하도록 합니다.


매일 성체성사 때마다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는 기도를 개인적으로 새롭게 가다듬기를 당부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대화속에서 이 표현은 수많은 의미를 지닐 것이며, 우리 안에서 새로운 실존적 중요성을 확보할 것이고, “성 요한 보스코의 아들들의 특징인 기도와 하느님과의 일치로 성화된, 지칠 줄 모르는 근면”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Don Brocardo: Profondamente Uomo, profondamente santo


2 편 핵심적인 차원들


주의 : 돈 보스코 의 성덕에서 두드러지는 면은 물론 무수하다.

            그의 인격의 다양성 때문이다. 이제 그 중에서 몇 개만을 골라

살펴보자.


1 : Da mihi animas 의 신비 신학


소돔의 왕이 아브라함에게 "da mihi animas, caetera tolle : 나에게 사람들을 주고 너는 물건들을 가져라" 하고 말했다. 돈 보스코가 오랜 전통에서 모든 것을 가져가소."


이러한 번역에서 "관건이 되는 단어는 animas. 이는 수세기 전부터 그리스도교계에서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나타낸 표현이다. 시간 안에서, 구원과 영원한 멸망 사이에서, 죄와 은총 사이에서,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에서, 하느님과 마귀 사이에서 살지만 불멸하는 그것이다."(스텔라)


돈 보스코는 이렇게 썼다 : "영혼을 구한다면 만사가 좋고 항상 즐거우리라. 그러나 영혼에 잘못이 있으면 영혼과 육신, 하느님과 천국을 함께 잃고 영원히 단죄 받으리라."


오늘날에는 인간의 최종 운명과 세상 마지막에 관한 견해가 전보다 더 포괄적이 되었다. 돈 보스코는 그의 시대의 언어로, 사람들이 바라보아야 할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며, 인간은 이 땅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의 희망에 대한 증인임을 누구에게나 되풀이 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말을 믿어도 좋은 것이다. 그의 가장 깊은 열망과 간절한 기도는 영혼들을 구하여 하느님 나라에 확실히 들어가게 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사제, 온전히 사제


"Da mihi animas"는 그의 모토요 집념이었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그의 신비학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구원의 신비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도록 불린 그의 사제직의 당면 과제이기도 했다.

사제로서가 아닌 돈 보스코는 생각 할 수가 없다.

실제로 그의 청소년기에는 사제직을 향한 명백하고 꾸준한 준비 이외에 무엇이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 "어서 사제가 되자. 그리하여 청소년 사이에 끼어 놀면서 그들을 돕자." 그리고 그의 일생은 이러한 소원을 풀어나간 것 외에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그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현재의 중재자이신 사제 그리스도를 가능한 완전하게 본받고 싶었고 성사적으로 가장 잘 중재해 주고 싶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빈틈없는 사제적 책임감이 결코 허물어져 본 일이 없다.

언제나 사제였고, 온전히 사제였고, 사제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제는 언제나 사제이다. 그의 말은 언제나 사제다워야 한다." "사제가 되었으면 성인 사제가 되어야 한다."


사제라는 말은, 186612월에 피렌체에서 있었던 베테노 리카솔리 정관과의 저 역사적인 대화의 첫 머리에 7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장관님, 돈 보스코는 제대에서도 사제요, 고백소 안에서도 사제이며, 그의 아이들 사이에서도 사제, 토리노에서처럼 피렌체에서도 사제, 가난한 사람의 집에서도 사제, 왕과 장관들의 궁전에서도 사제입니다."


그 당시 사제라는 개념에 자기의 성당이나 자기 울타리 안에만 갇혀있는 폐쇄적인 면이 짙었던 때에, 돈 보스코는 선구자적이었으니, 자신의 사명에 온전히 몸을 바친 사제, 성령의 역사적 숨결에 마음을 연 사제, 사회와 이웃에게로 열린 사제, 모든 이에게, 그러나 특히 청소년들과 미소한 자들에게 봉사하려는 사제임을 행동으로 보였다. 그에게는 영적 생활과 사목 생활이 하나였었다.


사제는 그이 사제직 실천 중에서가 아니면 성화될 수도, 구원될 수도 없다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가 자주 말한 다음과 같은 강력한 표현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제가 얻는 것은 영혼들이어야 하고 그와 다른 이득은 없어야 한다." "사제는 지옥에 가거나 천당에 가거나 혼자 가지 않고, 그의 의하여 멸망 당했거나 구원받은 영혼들을 데리고 함께 간다."


"사제의 말은 언제나 영원한 생명의 소금이어야 하고 어느 곳에서, 누구와 이야기 하거나 그래야 한다. 사제에게 접근한 사람은 그 누구나 영혼에 유익한 어떤 진리를 받고 돌아가야 한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사 이외의 어떤 다른 관심사도 있어서는 안 된다."


성부의 계시자요 흠숭자이신,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사는, 요약하면, "하느님의 영광, 인간들의 구원"이다. 그리고 이들은 정확하게 돈 보스코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하던 최상의 관심사들이다. 영혼들을 구원하고 성화시키는 일은 그가 진심에서 바라던 소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44, 22차 살레시오 수도회 총회에서 이점을 상기 시키셨다: "돈 보스코 교육학에는 지극히 ‘종말론적’인 가치와 전망이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인 늘 말씀하셨듯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최종적인 구원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자기 영혼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도록 협력하는 것"은 돈 보스코가 아이들에게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나, 하위층이나 고위층은 불문하고 항상 되풀이 하던 말씀이다. "영혼의 구원을 부탁한다."


18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발간이 되지 않는 "회칙 초안"을 보면 요한 복음의 유명한 구절이 있다. Ut filios Dei qui erant dispersei congre garet in unum 그리고 이를 해설한다. "성 요한 복음의 말씀은 거룩하신 구세주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시어 지상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을 함께 모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나는 이 말씀을 그대로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하느님의 흩어진 자녀들을 모아 구원하고자 오신 착한 목자 예수님을 생각할 때, 돈 보스코는 그 시대의 청소년, 특히 가장 가나하고 버림 받아 방황하는, 그래서 멸망의 위험이 가장 큰 그러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하여 바치고 싶었다.


영혼들, 모든 영혼들, 그러나 특히 하느님께서 맡겨 주시는 그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생각은 진심으로 돈 보스코의 심중을 가득 채웠다. 이는 그의 내적 활동과, 하느님과의 대화와 자신의 수련에서처럼 가난하고 버림 받은 청소년의 구원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할 만큼 몰두한 그의 사도활동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고 가장 뿌리 깊은 것이었다."(스텔라) 도메니코 사비오가 그의 방에서 본 모토가 "Da mihi animas cactera tolle: 오 주여, 내게 영혼을 주시고 그 외에 다른 것은 다 가져 가소서"였으니, 이는 그의 서품 전 피정의 결심인 "영혼을 구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면, 무엇에서나 항상 고통 당하고, 일하고, 나 자신을 금할 것"에서 나온 것이다.

과연 그의 심장은 "Da mihi animas의 열의로 뛰었다."(비가노)


집념


이것이 평생 그의 집념이었으니 이것으로 살고 이것을 위하여 살았다. 교육자, 사목자, 교리교사, 저술자, 창립자로서의 그의 삶이나, 그가 자주 하던 확신에 찬 다음의 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 아이들이 오라또리오에 온다. 그들의 가족과 보호자들은 공부를 시키기 위하여 보낸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그들의 영혼을 보살펴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발견시키라고 여기에 보내신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수단으로 알아야 하며, 우리의 최상 목표는 그들을 선량하게 만들어 영원히 구원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술은 다 중요하다. 그러니 예술 중의 예술,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영혼을 하느님께 얻어 드리는 일에 도움이 되면 아무리 돈이 들고, 수고스럽고, 귀찮고, 힘이 들어도 아깝지 않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오 주여, 영혼들을 구할 수 만 있다면 , 그 가운데 우리들의 영혼도 구할 수 있다면, 십자가도 좋고 온갖 박해도 좋습니다." 발도꼬의 기술공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 대한 나의 정은 너희의 영혼을 구하려는 나의 소원에서 나온 것이다. 너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중한 피로 얻은 영혼이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는데 이는 영원한 구원에 너희들을 데리고 가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임종의 침상에서도, 혼수 상태로 머리를 흔들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뛰어, 빨리 뛰어라. 어서 이 아이들을 구해야지 … 성모님, 저 사람들을 도와 주소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의 선익을 위하여 한 것만큼 네 영혼을 위하여 열성을 쏟았다면, 틀림없이 네 영혼을 구했을 것 같다." 예술가가 느끼는 섬광을 인간적인 표현으로 잘 나타내지지 않을 때 괴로워 하듯이 돈 보스코는 그가 살고 느끼는 대로의 영혼 구원에 대한 절박성을 잘 설득 시킬 수 없을 때 탄식했다. "! 내가 느끼는 것을 너희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다면! 문제가 너무 중요하고 숭고하기 때문에 말이 잘 되지 않는다."


그가 애써 일하고 학교와 작업장들을 세우며, 남녀 설레시오 수도회와 협력자회를 창립하는 이 모두는 오로지 이러한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 였다.


"오라또리오의 유일한 목표는 영혼 구원이다." "우리 수도회의 목적은, 회원들의 차원에서 볼 때, 그들끼리 정신적으로 하나되어 하느님의 보다 더 큰 영광과 영혼들의 건강을 위하여 일하자는 초대라 하겠다. 그 이상 더 고귀한 목적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이는 "모든 살레시오 회원의 끊임없는 호흡"이 되어야 했다. 루아 신부는 시성 조사 과정에서 확인했다. "청소년 구원을 향해서가 아니면 발 걸음을 안했고 말을 안했고 사업 시작을 하지 않았다. 남들이야 재산을 모으고, 쾌락을 찾고 명예를 쫓으라 했다. 돈 보스코는 진실로 심중에 영혼의 일 밖에 없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로 Da mihi animas, caetera tolle를 말했다." 돈 보스코와 오랜 동안을 친숙하게 산 알베라 신부도 이렇게 증언했다: "그의 일생 신념은 자신을 완전히 바쳐 영혼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었다…영혼 구원…그것은 그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 할 수 있었다."


비오 11세의 지극히 소중한 증언도 있다. 193443, 성 베드로    대 성전에서    살레시오 가족과의 장엄 알현 때 하신 말씀으로, 시성의 경사와 구원의 성년의 가치 사이의 연관성을 들어 강조하셨다. "돈 보스코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오고 또 여러분에게 가르친 그대로 그리스도교인다운 삶을 살아라’ 그러나 오늘 돈 보스코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후예가 되는 여러분에게, 더 특별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방의 첫째 비결을 가르치신다! 이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지배적인 생각이요, 감정이었다 고 말 할 수 있으리라. 그는 이를 Da mihi animas 라는 표어로 보여 주었다.


그의 사랑은 그의 긴 묵상의 소신이다. 영혼을 그 자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 하느님께서 생각하시어 일하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신 그러한 영혼을 꾸준히 묵상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거기서 돈 보스코는 영혼의 비할 데 없이 높고 귀한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거기서 그의 열망, 그의 기도, Da mihi animas! 가 나온 것이다. 이는 구세주에 대한 그의 사랑의 표현으로 거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구세주에 대한 사랑이 되고, 구세주에 대한 사랑은 구원된 영혼들, 그의 피로 얻은 그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되었다."


대 수도회들은 각자 그들의 카리스마에 맞는 영적 상황의 모토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Ora et labora(기도하고 일하라)" 라는 베네딕트회의모토가 있고 "contemplari et contemplate aliis tradere(관상하여 그 관상한 것을 남에게 전하라)"라는 도메니꼬회의 모토가 있으며, "Ad majorem Dei gloriam et ad salutem aniutem animarum(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에)"라는 예수회의 모토가 있다.


살레시오회 총장 에지디오 비가노 신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돈 보스코 자신이 선택하신 말씀인 다 미히 아니마스 체떼라 똘레라는 말보다 더 잘 살레시오적 정신을 잘 말해주는 요약된 표현이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는 무한하신 사랑이신 성자와 성령의 사명 안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난 성삼위의 당신 삶의 신비에 들게 하시는 그 하느님과의 뜨거운 일치를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모토에서 벗어나는 것, "친절"이라는 특징을 지닌, 청소년을 향한 총애의 그 사목적 사랑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이면 돈 보스코의 성덕의 진 면모를 다시 살아내지 못한다.

구해야 할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지극했다 하여 , 우리 성인이 인간을 오로지 영혼으로 알았거나, 육체와 무관한 영혼을 생각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자유롭고 불면하는 이 영혼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숨결이라면, 육신도 하나의 은혜인 것이다. 그가 쓴 "성모성월" 책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보는 그 좋은 자질을 갖춘 그러한 육신을 창조하셨다." 돈 보스코는 항상 죄로 상처 입은 이후 육신이 영혼에게 끼치는 위험을 경계하면서도 육신이 지닌 훌륭한 가치들을 칭찬했다. "청소년 지도서"에서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 육신을 너무 엄하게 다루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 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즐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영혼 구원에 관하여 말 할 때에, 그 당시의 이원론적 개념과는 멀리, 구체적인 소년을 두고 말했다. 영혼만이 아닌 소년 전체의 구언, 각 소년 구원, 그리하여 그들을 통하여, 사회 전체의 구언을 희망했다.


돈 보스코는 하늘 나라를 위해 있으나 이 땅에서 마쳐야 하는 사명도    있는 그 구체적인 소년을 생각했다.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으로서, 하늘 나라 고향을 향하여 순례 중인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이지만, 도한 이 지상 도시의 시민으로서 자라나야 하고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학문적으로    성숙하고 사회생활에 점차적으로    참여도 해야 하는 그 모든 요구를 지닌 그런 구체적인 상황이 소년을 생각했다(콜리)."


사제- 교육자- 사목자로서의 돈 보스코의 노고는 구체적으로 세가지를 목표로 했다.

첫째 : 가장 가난하고 헤매는 소년들의 물질적인 우선적    필요를 채워 주기, 그러하여 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 해주기, 어떤 기술이나 직업으로 "정직하게 밥벌이를 할 수 있게" 하기, "내가 이 방황하고 위태로운 아이들에게 빵 한 조각을 거부하면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막대한 위험에 내 놓은 샘이다" 라고 말게릿다의 쏠라로 공작에게 썼다.


둘째 : 인내로운 교육활동으로, 그들을 도와 자기 자신들이 되게 하기. 인간적, 사회적 차원에서 씩씩하게 자라나게 하여 "정직한 시민"이 되게 하기. 교육자로서의 소신을 가진 사람이면 "모든 귀찮은 일과 수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해야 한다. 제자의 사회적, 도덕적, 학문적인 교육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셋째 : 그리스도교적으로 교육하기. 즉 신념 있게 확신에 찬 튼튼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청소년들을 지도하기. "신앙 없이는 청소년 교육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고 말했다. 은총의 생활로, 그리스도와의 우정 안에 살도록 교육하는 일은 청소년을 진정한 성덕의 산정으로 오르게 했다. 이미 회고해 본 바이나, 돈 보스코는 "성덕을 교육의 현장에로 끌어들인" 지대한 공이 있다. "그리스도교적 교육학이 청소년 성덕의 원천이 되도록 성숙시킨 공이다(비가노)." 교회 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그의 교육법의 결과로 도메니꼬 사비오라는 한 소년이 증거자로서 시성이 되었다.


브라이도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돈 보스코의 교육활동에서 이루어졌던 이 세가지 목표는 실제로, "그 자체 안에 다름 아닌 개인적 지상 조건들을 포함한 유일한 종교적, 도덕적, 초성적 목표였다." "Da mihi animas의 신비신학에는 인간적 증진과 초성적 증진이 이렇게 불가분적으로연결 되어 있다. 이러한 불가분성은 오늘날 공의회에서도 말하고 있다: "교회는 인간의 생활 전체에 관여할 의무가 있으니, 하늘 나라 성소와 유관하기에 그 지상 생활에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Gaudium et spes, 서론).   


P. Braido, 돈보스코의 교육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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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교육은 이성, 종교, 친절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성, 종교, 사랑(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친절한 사랑애덕, 온유)은 모든 시대 수많은 교육자들에게도 공통된 돈 보스꼬의 사목적 영적 교육적 메시지의 내용을 가장 잘 규정한다. 확실히 이것들은 돈 보스꼬의 특징적인 정신과 영성의 특색이었다. 그러나 이 세 단어들은 본래 교육방법론에서 두드러진 의미를 뛰며, 어떤 측면에서 더 특징적이다. 예방교육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종합하여 소년의 전인적 발전(윤리적, 지적, 도덕적, 공인적, 종교적)을 도모하는 독창적 노력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년으로 하여금 자신을 교육적으로 계발하는 데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하는 유기적인 관여와 방법과 수단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진지한 도덕적 종교적 활동(의무, “신심”, 은총 속에서의 삶, 죄를 피함)이 온당하고도 활기넘치는 관계들과 과정을 통해 제안되고 도모된다. 한편, 온유와 친절한 사랑은 유약함이나 감상, 애매모호한 느낌이 결코 아니다. 이성과 종교가 그것들을 늘 정화시키고 빛을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대인관계는 활성자로서 함께 있어주는 교육자의 종교적 경건성과 공감적 참여에 의해 자극되고 완성된다.


그러므로 이 세 요소들은 교육목표로서든 양성과정으로서든 늘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어, 예방교육에 든든한 방법론적 통일성을 부여한다. 이런 관점에서 과연 어떤 요소가 중심적인 요소인가를 확인하자면, 의심할 바 없이 내용면에서 종교가 으뜸을 차지하기에 친절한 사랑(amorevolenzza)이 최고 원칙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연유로 사랑의 예방교육이 학생에게 온유와 인내와 친절한 사랑(친절, 온유, 이해, 인내, 우적, 즉각적인 준비자세)으로 보요지고 “느껴지는” 그리스도교적이며 인간적인 사랑의 독특한 색조로 돈 보스꼬 안에서 특색을 갖추게 되었다.



1. 사랑의 방법론적 종합


예방교육의 실천- 돈보스꼬는 고전이 되다시피한 1877년판 소책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은 성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토대로 한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Charitas patiens est(…) Omnia suffert, om-nia sperat, omnia sustinet’ (1rhf1sxh 13,4-7). 이성과 종교는 교육자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행동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늘 사용하고 가르치고 활용해야할 도구들이다. 이것은 돈 보스꼬가 예순살에 달하여 “이들을 네 친구로 만들려면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을 발휘하여라”고 한 아홉 살 때의 꿈 속의 경고의 반향이었다.

예방교육에 관한 그의 소책자는 이 주제의 변주곡이었다. 그는 원장들과 아시스텐트들에게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말하고, 무슨 일에서나 본을 보이고, 조언과 사랑의 교정을 아끼지 말라…”고 얘기했다. 또한 그는 “예방교육은 전적으로 이성과 종교와 친절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자주 강조했다. 심지어 벌을 줄 때에도 생도들이 “언제나 우정어린 예방적 조언에 설득되어 마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즉 예방교육은 생도를 친구로 삼으며 교육자가 훈육 중에나 또는 후에라도 마음이 담긴 말로 학생에게 미리 경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교육자의 마음을 얻은 교육자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줄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매일 저녁 기도 후나 생도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원장이나 그를 대신한 누군가가 사랑이 담긴 몇마디 말을 모두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예상한 결과를 얻게 된다. “생도는 언제나 교육자를 존경하게 될 것이며, 기꺼이 지도를 받아들이고 고사들과 웃어른들을 아버지와형님으로 여길 것이다.”


친절한 사랑은 실제로는 단순하고도 필요한 경험이지만 그것을 분석하는 것을 꽤 까다롭고 복잡하다.


우선, 그것의 기반은 애덕 즉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깊은 사랑이다. 돈 보스꼬에게 있어서 그것은 선물 즉 은총이다. 그의 믿음과 사제적 양심에서 표출된 것이다.

그는 또리노-발도꼬의 견습생들에게 보낸 1874120일자 편지에서 그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견습생들은 내 눈동자와도 같기에(…), 내가 편지로 위로한다면 여러분이 기뻐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분명한 증거를 보여왔으니까요. 여러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늘 그것을 보여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어디에 기반을 두어야 할까요? 지갑에요? 아닙니다. 제 지갑을 우리 사랑의 토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버렸으니까요 여러분의 지갑을 기반으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화내지 마십시오)여러분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쟎아요. 제사랑은 여러분의 영혼을,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영혼을 구하려는 저의 소망을 그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영생에로 인도하고자 하므로 우리 영혼의 선익이 우리 사랑의 기초입니다.”


하지만 이밖에도, 친절한 사랑은 풍부한 지성, 이해력, 감수성, 드맑은 감성과 같은 인간적 속성에 의해 보강된다. 돈 보스꼬는 “열정에 따르지 말고 언제나 이성을 따르라”고 신중히 제안했다. 교육자들은 “Manescdhi”(구타)해서는 안 되며 (돈 보스꼬는 피에몬떼말 Manecesse-큰손과 같은 뜻의 말로 농담을 하곤 했다), 감상에 젖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교육자들은 쓸데없이 지나치게 번잡한 조직을 피하고 소년들에게 권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본질적이고 실질적인 것만을 요구해야 한다.


교육자는 무엇보다도 마음에, 교육적 위기요 “징표”이며 진실로 교육적 증명서인 사랑에 호소해야 한다. “두 가지 기본점에 노력을 집중시키도록 충고하가: 두려운 사람이 되지 말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라.” “Si vis amariesto amabilis.” “젊은이들을 데리고 성공하라. 정성을 다해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어라 두려운 사람이 되기 모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라.” 가장 뚜렷하고 간결한 표어는 1884년의 유명한 편지에 나타난 표어다: “소년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하라…”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의 유치한 기호를 즐김으로써, 본질적으로 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즉 훈련, 학업, 극기와 같은 일에서 사랑을 보도록 하라 그들로 하여금 열성과 사랑을 가지고 이런 일들을 익히도록 하라…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받는 사람은 특히 젊은이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된다.”


2. “함께 하는” 교육


행복의 차원에서 이런 근본적인 생각은 교육자의 실존을 포함하는 직접적인 성과를 얻는다.

돈 보스꼬가 직접 살았고 또한 “체계적”으로 따르게 하고 싶어 했던 경험을 언급하는 것이 보다 의미 있겠지만, 이런 생각을 말해주는 몇가지 구절들이 있다. 1877년판 소책자에 나오는 “예방교육”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그것은 기관의 규약과 규칙을 알려주고 다정한 아버지로서 말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이끌어주며 충고하고 사랑으로 잘못을 고쳐주는 원장이나 아씨스텐트가 늘 생도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도들로 하여금 도무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생도가 교육을 받는 동안 내내 교육자가 함께 하는 것이 아씨스텐트의 원칙이다 경찰관처럼 감시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다정하고 힘을 복 돋아주며 용기를 주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임장교육은 오라또리오에서, 기숙학교에서, 학교에서, 단체에서, 일터에서 아주 다양하게 실시된다.


특히 오락시간에 소년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것. 이러한 친밀함이 없으면 애정을 보여줄 수 없고, 애정을 보여주지 못하면 신뢰가 싹트지 않는다(…). 웃어른(교육자)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생도들의 불평이나 의구심에 언제나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하며, 다정한 아버지로서 그들의 행동을 늘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이들의 영적 현세적 선익을 도모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예방개념이 방어와 예상과 보호, 그리고 (가능하다면)분리의 측면을 내포하듯이 돈 보스꼬의 예방교육 개념과 그 실천에 있어서 아씨스텐트는 확실히 주시(注視)의 측면을 내포한다. 이것은 특히 기숙학교에서 그러했다. 일세기가 경과했건만 그곳에서는 아직도 Regolamento를 읽고 있으며 불량하다기 보다는 “변덕스럽고” 발랄한 소년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미리 주의를 준다.


그러나 임장지도의 적극적 의미는 매우 널리 통용되었었다. 건설적인 일에 참여하여 관여하고 흥미를 불러일으켰을 때, 그것은 더더욱 진실로 “예방적”이다. 기숙학교장에 대한 충고를 살펴보자: “가능한 한 한 모든 시간을 생도들과 함께 보냄으로써 그대는 생도들을, 생도들은 그대를 알도록 하시오.” 이런 의미에서 예방적 아씨스텐트의 교육적 개념을 가장 명백하고도 훌륭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실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늘 수년들과 함께 했던 돈 보스꼬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하건대 바로 이런 점에서 예방교육은 그 교육자의 인격에 달려있었다 균형, 재치, 아버지 같고 형 같은 풍모, 활기, 친구관계를 맺는 능력 등등은 올바르고도 적절하게 행동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특히 교육 공동체(학교, 오라또리오, 주간학교, 기숙학교 등)의 우두머리, 교육자들과 소년들의 아버지이자 형인 원장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또 이론적으로(기숙생들과 주간학생들의 Regolamenti에 조문화 되어있는) 원장은 돈 보스꼬의 실천적 교육의 중추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교육 분위기에 신경을 써야했고 또 교육자들과 생도들 모두를 포함하는 전체 가족이 그 분위기를 좌우했다면, 원장은 이러한 집단활동에 형태와 일치와 조직적 방향, 특히 무엇보다도 정신을 부여하도록 불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원장은 환경교육을 한사람 한사람 각각의 인성교육으로 변화시켰다. 원장은 모든 일을 종결지어야 했지만 행정적이며 지시적인 일보다도 주로 교육적인(거의 전적으로) 일에 전념했다. 바로 이것이 부성애 와 가족애의 개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교육의 특징이었지만 종교, 이성, 친절한 사랑이라는 세가지 단어에 의해 더욱 장려된 또 다른 애정적 조직적 요소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다정한 부성애는 최고 책임자의 현존양태를 뚜렷히 드러내주는 특징이었다. 그런 부성애가 온종일 곳곳에서 발산될 때, 집단에게서나 개인에게서나 부성애는 “귓속말” (마카렌코가 그의 교육학 시에서 비난했던), 친밀한 대화, 생도들의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말씀”으로 표현된다. 저녁말씀은 교육자와 생도들 모두에게 들려주는 말이었으며, 진실한 대화 분위기를 보장해주었다 “귓속말”은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꺼려서라기보다는 형식에 매이지 않는 분명하고도 다정한 현존의 한표현이었다 군중을 벗어나 우연히 부딪혔을 때 나누는 개인적인 대화는 교육적 관계를 개별화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원장 혼자만 교육자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혼자서는 교육자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는 것이 아니라 일들이 잘 진행되어가게 하고 협력하는 것이 “원장의 본질”이었기에, 그의 활동은 “집”의 책임자 모두가 맡은 활동의 맥락 속에서 이뤄졌다.


어떤 임무를 맡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년들을 도울 이들은 그집 소년에게 충고와 상담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특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짓을 방지해야 할 때면 언제나 그렇게 해야할 의무를 지녔다.” 이것은 원장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웃어른들(우리가 지금 교육자들이라 청하는) 모두에게 관계된 일이었다 “아버지요 형이며 친구들인” “장상(웃어른)”이란 용어는 다 특별히 사용되었으며, 특별한 직책을 가진 이들(부원장, 경리, 성무감 혹은 영적 지도자, 교무, 견습공 담당)과 교사들 및 아씨스텐드들을 뜻했다. 통상적으로 “우리”라는 용어는 “나”라는 용어를 대신할 것이었다 “우리는 무서운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여러분이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원한다.”


교육기관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어른들의 연대성은 특히 기숙학교에서 잘 드러났으나 다양한 기관에서 유사한 형태로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모두가 너나없이 교육적으로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지켜보고” 깨우쳐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도록 요청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년들에게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요청받았다.

J. Aubry: 영성생활의 쇄신


. 돈보스꼬의 선교 참여 방법



        역사가 유진 체리아 신부는, 돈보스꼬가 남미에로 첫 살레시안 선교단을 파견키로 했다는 결정을 엄숙하게 발표했었던 1875129일 밤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과 흥분과 열정에 휩싸여 마침내 기쁨의 함성을 질러댔다.    돈보스꼬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그 감격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오라또리오가 아직 국제적인 기구가 아니었고 또한 수도회가 아직 그 창립자를 중심으로 하여 친밀하게 모인 가족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던 때로 되돌아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날 돈보스꼬의 말을 들었던 이들에게는 아주 환상적인 꿈을 꿀 수 있는, 끝없는 지평선을 상상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었다.    돈보스꼬와 그의 사업을 이미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그들은 더욱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살레시오회의 역사에 있어서 신기원이 전개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선교활동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 살레시오회는 참으로 국제적인 수도회가 되었으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놀라지도 열광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여전히 놀라는 게 정상적이지 않을까 하고 자문해 보고 있으며 또한 100년이 지난 뒤이기에 더욱 더 그러리라고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1875년에 뿌려진 조그만 씨앗으로부터 자라난 커다란 나무를 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리노의 부랑아들을 뒤에 끌고 다니던 서른 살의 젊은 사제가 어떻게 해서 예순 살 때에는 남미에 여러 아들들을 파견하여 교회를 건설하는 창립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또한 그의 두 수도회-어려움에 처한 젊은이들을 돕기 위해 하나는 1859년에, 다른 하나는 1872년에 창설되었다-가 어떻게 해서 불과 몇 십년 뒤에는 가톨릭 내에서 가장 중요한 선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우연한 일인가 아니면 겉보기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듯이 보이는 여러 사건들의 내적 논리성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일인가?


        체리아 신부는 그것을 “역사의 새 국면의 시작”이라 부르고 있다.    그것을 “돈보스꼬의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돈보스꼬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창립자로서의 돈보스꼬의 카리스마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와 그가 했던 일을 총제적으로 연구해 보아야 한다.    돈보스꼬는 아주 특별한 창립자다.    발도꼬에서의 젊은이들을 위한 그의 사업이 비록 흥미롭고 전형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돈보스꼬의 사업은 그 시절에만 국한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새로운 사업들을 시작하고자 하는 사도적 상상과 열정으로 가득차 있던 창립자였다; 1875년에 그는 첫 살레시안 선교단을 파견했으며, 같은 시기에 그는 도움이신 마리아의회를 창설했다.    1876년에 그는 살레시안 협력자회를 결정적으로 재조직했다.    1877년에는(살레시안 회보)를 창간했다.


        이 모든 일들 가운데 선교사업의 시작은 얼마나 의미 깊은 일일까?    여러 가지 다양한 살레시안적 카리스마 중 선교요소는 무엇을 제시해 주는가?    돈보스꼬가 일흔 세 살이 아닌 예순 살 때인 18751월에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그의 첫 선교단을 파견할 수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    살레시오 수도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살레시안 가족의 어떤 일부가 태어나 자라 왔겠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듯 넓은 기반을 가진 활발한 가족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살레시안 선교 사업이 어떻게 해서 살레시안적 카리스마와 그 빛나는 업적의 궁극적이고도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되는지를 설명해 보고 싶다.    선교는 창립자의 카리스마의 꽃이라 할 수 있으리만큼 그것은 우리에게 창립자의 카리스마를 완전하게 보여 주며 진정한 살레시안을 인식할 수 있는 근본 원리들을 밝혀준다.


A.    선교의 발전은 살레시안들의 사목적 사랑의 강도를 말해 준다.


1.    선교; 돈보스꼬의 역동적 사랑이 완전하게 발전된 열매


      모든 것의 시작은(하느님의 은총 다음으로)돈보스꼬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돈보스꼬라는 인물에게서 가장 놀라운 점은 아마 그의 일관성일 게다(우리는 이미 이에 대해 언급했다). 즉 그의 전생애를 통해 가장 놀라운 모범은 그의 사랑됨과 그의 사업간의 일치성 일 게다.    아홉 살 때의 꿈에서부터 73세 때의 마지막 병고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소명이 일관되게 발전되어 갔다; 그 소명은 다름 아닌 Da mihi animas(나에게 영혼을 달라)라는 것이었다.    즉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 살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돈보스꼬를 일러 완벽히 계획된 인물, 오직 한가지 생각만을 지녔던 인물, 거룩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랑 때문에 늘 앞으로 전진하는, 거룩하고도 고귀한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살레시안 회헌 제40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살레시안 정신의 정수는 본회의 초기에 우리의 창립자에게서 그토록 강력하게 드러났던 젊은이다운 역동성에 의해 특징 지어지는 사목적 사랑이다.    그것은 곧 영혼들을 구하고(Da mihi animas) 오로지 하느님께만 봉사하도록 해주는 사도적 힘이다.”    그러기에 돈보스꼬의 선교는 그의 사목적 사랑이 지닌 역동성과 추진력이 활발히 표현된 최종 열매일 뿐이다.    사도 성 바오로의 사랑의 송가(1고린도13:4-7)를 돈보스꼬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은 강합니다. 사랑은 역동적입니다. 사랑은 용감합니다. 사랑은 결코 지 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결코 그만 두지 않습니다. 사랑은 결코 “그것은 충분하다.” 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보다 먼 지평 위에서, 보다 무한한 바램위에서 자라납니다. 사랑은 한계를 모르며 희생을 받아들입니다.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온누리를 끌어 안습니다.󰡓


            돈보스꼬의 생애의 주요한 세 단계, 돈보스꼬의 사목적 사랑의 거대한 세 물결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1841년부터 1850년경까지 돈보스꼬는 주님께 이렇게 간구하였다: Da mihi                animas iuvenum. (“제게 젊은이들의 영혼을 맡겨 주십시오.”)    이때 그는 젊은이들을 위한 그의 첫 사업들을 시작했다.    1850년부터 1860년까지 이태리인들의 신앙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그는 이와 같이 간구 했다:Da mihi etiam animas plebium.(“제게 국민들의 영혼을 맡겨 주십시오.”)    이 때 그는 카톨릭 문고를 위시한 크리스챤 출판 및 개종 권유라는 거대한 임무를 시작했다. 그 후 세 그룹의 제자들(살레시오 수도회, 살레시오 수녀회, 살레시오 협력자            회)을 결성시키기까지 15년을 보낸 뒤, 그는 미래를 예견하여 다시 한 번 주님께 간구 하였다:Da mihi etiam animas gentium.(“제게 이교도들의 영혼을 맡겨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20가지의 부탁들을 간곡히 상기시키면서 그의첫 선교단을 파견했다;

        “돈이나 명예나 혹은 위엄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영혼을 구하도록 하십시오.”(BM XI 364).    1888126일 돈보스꼬는 마지막 병상에서 갈리에로 추기경에게 이렇게 말하였다:“선교를 통해 많은 영혼들을 구하게나.”(MB XVIII 530). 선교, 그것은 Da mihi animas라는 열정의 마지막 거대한 물결이었다.    미카엘 루아신부는 18971,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와 같은 글을 썼다;

              우리의 사랑하올 아버지이신 돈보스꼬께서는 타오르는 열정에 휩싸여 이렇게 외치셨습니다;Da mihi animas. 돈보스꼬께서 구대륙을 좁게 느끼시고 멀리 아메리카로 그의 아들들을 파견했던 것은 영혼들을 구하고자 했던 바로 이러한 욕구 때문이었습니다.(살레시안 회보 189714)

        필립 리날디 신부는 1925년 제 50차 선교기념식의 기념사에서 보다 의미 심장한 말을 사용했다;

        돈보스꼬의 마음 안에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꿈들을 통해 미래를 밝혀 주었            던 하느님의 불길로부터 비롯된 프란치스꼬 사비에르의 열정과도 같은 사도적 열정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살레시안 소명에 대한 기나긴 추억들 속에서 그리고 또한 돈보스꼬가 특별히 관심을 쏟았던 바로 그 시기 안에서 가장 사랑받은 아버지이셨던 그를 다시 발견하게 되며 이런 인상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진정한 선교사였으며 영혼들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봉헌된 사도였습니다.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돈보스꼬를 “사랑의 거인”이라 불렀다.


2.    형제들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향한 돈보스꼬의 역동적 사랑


      선교사업은 살레시안들의 사목적 사랑의 확실성과 팽창 욕구 및 보편적, 개방성, 일을 해내는 능력 등을 보여준다.    우리는 선교사업이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의 두 가지 목적들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 사목적 사랑은 구원되어야 할 모든 이들에 대한 착한 목자의 바로 그 사랑이다.    1852년 또리노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 청소년들의 비참함이 돈보스꼬의 마음을 자극했듯이, 파타고니아인들의 비참함이 또 그의 마음을 자극했다.    우리는 사랑의 종적 차원에 대해서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쉽게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돈보스꼬 축일의 기도문은 그것을 늘 잊지 않는다;“주여, 우리로 하여금 영혼들을 구하고, 오직 당신만을 섬기도록 우리에게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회헌 제40).

   

    돈보스꼬의 선교 참여는 하느님께 대한 그의 사랑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그의 거룩한 열정 및 하느님 나라를 세상 끝까지 확장시키고자 하는 그의 목마름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cf.BM XI, 361).    돈보스꼬는 첫 선교단의 한 사람인 토마티스 신부에게 이런 편지를 모냈다;“친애하는 토마티스 신부님, 제 말을 명심해 주십시오.    선교사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Epist.III, 26).    또한 돈보스꼬는 그의 임종시에 여러번:Quarite regnum Dei.("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MB XVIII 537). 선교사업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선교사업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또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행하고자 하는 바램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돈보스꼬가 188521일에 꾼 선교에 관한 꿈속에서 살레시안 사업에 의해 구원된 사람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찬미가를 하느님께 불러 드리고 있음을 들었던 것은 이를 상징한다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의 비천한 종이었던 돈보스꼬가 선교에 대해 간직했던 이러한 마음가짐-비록 명백하진 않았으나 매우 심오했던-에 대해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돈보스꼬가 하느님께 “제게 영혼을 맡겨 주십시오.”라고 간구 했던 말을 우리는 “당신께 영혼들을 데려갈 수 있도록 제게 영혼들을 맡겨 주십시오.”라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으뜸가는 종이신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도록 해준다.    살레시안 회헌 제 41조는 이것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우리의) 사랑(사목적 의욕)은 아버지 집을 위한 열정 때문에 자신을 온통 바치셨던 성부의 사도이셨던 그리스도의 그 마음속에서 모범과 근원을 발견한다.”    선교사업은 우리에게 돈보스꼬의 사랑의 강도를 보여 주며 또한 돈보스꼬의 마음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았던가를 보여준다;“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가12:49).    18751111일 강론에서 돈보스꼬가 그의 선교사들을 위해 간구 한 것도 바로 이런 은총이었다:


        . 그러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가도록 포도원 주인께 추수할 일꾼들, 많은 일꾼들-그러나 당신의 마음에 드는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하나이다.

        간단히 말해서, 선교사업은 우리에게 우선 모든 진정한 살레시안은 아주 열정적인 사람이며, 성령께 자신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 사람이고, 비록 그의 일과가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일에 얽매이게 할지라도 보다 넓은 지평을 관상하기 위해 자신의 눈을 단련시키는 사람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살레시안은 불을 품은 사람이다; 그의 마음은 웅대한 소망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살레시안을 “원자적”사랑(이 사랑의 불길은 매우 단순하게 뵈는 생활 속의 재들 밑에 파묻혀 있긴 하지만)이 넘쳐흐르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살레시안 가족을 이루고 있는 각 가지들이 강한 선교정신으로 무장된 회원들을 갖지 못하는 날에는 그래서 특별한 선고사명을 발견치 못하는 날에는 우리 살레시안 가족은 더 이상 살레시안 가족이 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