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계획

vaclav-C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 회원들의

생활 계획



살레시오 회헌에 대한

지침서




3


=3=





6 장 순명하시고 가난하시고 정결하신 그리스도를 따름



60 조 그리스도를 따름

61 조 형제적이며 사도적인 사랑

62 조 하느님 현존의 특별한 표지

63 조 미래 세상에 대한 증거



1 편 우리의 순명



64 조 우리 순명의 복음적 의의

65 조 순명과 권위의 살레시오적 양식

66 조 순명에 있어서의 공동책임

67 조 개인의 순명과 자유

68 조 순명 서원의 요구

70 조 장상과의 면담

71 조 순명과 십자가의 신비



2 편 우리의 청빈



72 조 우리 청빈의 복음적 의의

73 조 청빈과 살레시오회의 사명

74 조 청빈 서원의 요구

75 조 청빈에 대한 개인적 의무

76 조 재화의 공동소유

77 조 공동체와 사업에 있어서의 청빈의 증거

78 조 일

79 조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성



3 편 우리의 정결


80 조 우리 정결의 복음적 의의

81 조 정결과 살레시오회의 사명

82 조 정결과 인간 성숙

83 조 정결과 공동생활

84 조 정결을 성숙시키기 위한 자세와 수단




7 장 주님과의 대화



85 조 기도의 선물

86 조 살레시오회의 기도

87 조 말씀을 경청하는 공동체

88 조 성체성사로 일치된 공동체

89 조 시간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신비

90 조 끊임없이 회개하는 공동체

91 조 쇄신의 기회

92 조 살레시오 회원의 삶과 기도 안에서의 마리아

93 조 개인기도

94 조 죽은 형제회원들에 대한 추모

95 조 삶의 기도



6

순명하시고 가난하시고 정결하신

그리스도를 따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정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필립비 3,8. 12).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증여에 관한 바오로의 열정적인 선포는 이미 수도서원과 관련지어 살려본 바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근본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되었었다(마르코 1,17-18). 여기서는 그 결과들이 논의된다(회헌 60조 참조). 그것은 예수의 "생활형태"(복음적 권고들은 이것의 고전적 표현이다)를 택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문제이다.


신약에서 바오로는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들을 언뜻 언뜻 보여주곤 한다(1고린토 4: 2고린토 10-13: 갈라디아 1-2). 그는 필립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다시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논쟁적인 의도는 전혀 없었다. 율법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완벽한 크리스챤의 모범으로 내세우면서 바오로더러 유대적인 혈통을 무시한다고 비난하자 바오로는 먼저 자신이 영광스러웠던 자신의 유대적 과거(3,4-6)를 끊어버린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붙잡으셨기 때문이며(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위에서의 회심, 사도행전 9,5-6), 그 결과 지금은 그가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길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그를 계속 붙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응수한다. 그러나 그는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자기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하듯 완벽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베들레헴에서 시작되어 빠스카로 끝을 맺은 하나의 여정이었으며, 사도는 다음과 같이 겸손되이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대한 자기 증여를 성실히 재다짐한다: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3,13-14).


바오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의미했던 바를 잊을 수는 없다: 예수께서 먼저 그를 붙드셨다는 인식, 훌륭하나 그리스도보다 더 높이 위치한 가치들을 단호히 끊어버리는 용기, 그 결과들을 인내롭게 수용함(그것은 곧 박해를 의미했다), 목표를 향해 계속 걸어 나가는 겸손된 수락, 희망을 낳는 종말론적 차원.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회헌이 복음적 권고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덕행을 실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주님을 철저히 따르는 것. "구세주 그리스도 안에서 생의 완전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은총을 통해 바오로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적 사명에서 비롯된 의무들을 제시하고 사명의 공동체적 성격과 살레시오 회원의 생활 전체를 분석한 후, 회헌은 제6장에서 위의 두 요소들과 더불어 우리의 사도적 봉헌의 완벽한 모습을 형성하고 있는 세 번째 요소를 묘사하고 있다: 순명 하시고 가난하시고 정결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서원은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 이래 봉헌생활의 특징이 되어왔다. 가장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살펴 보면 하늘나라를 위한 정결 또는 동정에 특별한 명예가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교부들은 그것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특별한 방법이라 격찬했고, 처음에는 은수자들이 다음에는 공주 수도사들이 나타나는 등 점점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이 출현하였으며 하느님을 섬기는데 자신을 바치기를 원하는 이러한 남녀들의 생활의 특징이 되는 다른 책무들도 첨가되었다. 교부들의 저작에서는 '청빈-정결-순명'이 짝지어지기 시작했으나 언제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라틴-수도생활에서는 순명은 서약했으나 정결과 청빈은 서약하지 않았다. 고전적인 세 가지 의무들은 7세기에 요한 클라이매커스에 의해 명백히 지적된다(그는 물건과 사람들과 자신의 의지를 버리는 것에 대해 말하였다). 수사 신부들 중에서만 사제 공동체들의 전통에 따라 정결이 재물을 공유하며 순명을 서약하는 것과 결부되었다. 나중에 성 토마스는 세 가지 복음적 권고들인 청빈, 영구한 정결, 순명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수도자의 지위에 대해 명백하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동정이며 가난하고 순명적인 예수님의 생활을 그대로 선택할 정도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자기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정도로 예수를 철저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의, 하느님의 고마우신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이러한 실존은 교회에 의해 교회의 생활과 성성에 속한 것으로 공적으로 인정받는다. 교회 44 참조.

사실, 교회는 각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길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바램을 고백할 때 발하는 서약들과 그 밖의 다른 성스런 끈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양한 수도회들의 창립자들에게 불러 일으키셨던 복음적 생활의 신빙성을 확인해 주는 보증인이 된다: 수도 2 참조: 교회법 573, 576.

각 수도회는 복음을 생활하면서 자기네 고유의 카리스마가 지니는 모든 부를 실현한다.

돈 보스코는 가난하고 무시받는 젊은이들을 위한 사명을 교회 안에서 수행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으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립하라는 영감을 받았다. 살레시오 수도회 안에서는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께 대한 완벽한 헌신 속에서 사도적 봉사가 생활된다. 특별총회는 돈 보스코가 그의 가장 친밀한 동역자들이 순명, 청빈, 정결의 복음적 생활에 서약으로써 투신하기를 바랬었다는 사실을(18591218일의 첫 서원의 엄숙한 순간을 상기해보라)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6181 참조.

떠올리며 창립자가 청소년에 대한 봉사와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실천을 결부 시켰던 이유들을 설명한다.

양자 간의 관계가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는 것을 인정(살레시오적인 양식을 택하되 수도자가 되지 않고서도 젊은이들에게 헌신할 수 있다)했던 특별총회는 성소적 사실 속에서 우리들에게는 본질적인, 사도적 봉사와 복음적 권고에 대한 서약 간의 관계에 대한 근거를 발견했다. 돈 보스코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순응을 통해 활동생활에 투신할 수 있는 힘을 얻고 또한 수도 서약을 통해 활동생활에 투신하는 "복음적" 교육자들의 회를 창립하도록 한 것은 되갚기를 원치 않으시는 성령의 활동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돈 보스코는 높은 곳으로부터 표징을 부여받았었다(그의 동역자들의 이마에 둘러 매어진 띠에 대한 꿈들과, 장미꽃밭길에 대한 꿈, 특별히 마차에 대한 꿈과 10개의 다이아몬드에 대한 꿈을 상기해 보면 이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깨달은 사람들(돈 가파쏘)과 나아가 교황 비오 9세께도 충고를 구하기도 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2233 참조: 325: 5297: 6531-544: 7199: (이태리어판) 15183-186.

...? 돈 카파쏘의 충고에 관하여,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5452 참조: 비오 9세의 견해에 관하여,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9345 참조, 돈 보스코가 쓴 회헌, 서문도.



우리는 살레시오 생활 안에서 복음적 권고들의 의의를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참 사랑의 열매이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아들들이 착실하고 참을성 있게 일하는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모든 시간과 실존 전체를 기꺼이 다바쳐 봉사하기를 원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성령께서는 순명하시고 가난하시며 정결하신 그리스도를 완벽히 본받는 생활에서 비롯된 사도적 사명에 대한 객관적 재능과 효과적인 견해를 적쟎은 경험으로써 이해하도록 돈 보스코를 인도했다. 복음적 권고들의 내적 역동성은 그것들에 대한 충실하고 편벽되지 않은 실천이 사람들을 하느님께 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도적 활동과 또한 그것을 특징지우는 정신의 질과 효과를 강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총회 117-120 참조.


우리 성소의 토대가 되는 이러한 고찰들에서 출발하여 회헌 제6장은 우리의 생활과 젊은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도적 사명에 있어서의 복음적 권고들에 대해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본 장의 계획은 매우 간단하다: 복음적 권고들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대해 대강 고찰하고 있는 짤막한 서문 뒤에 순명, 청빈, 정결에 대한 각 서약들이 세 편으로 나뉘어 서로 관련지어 잇따라 제시된다.


기본 설계는 다음과 같다:



60-63: 서문격의 조항들


-우리의 생활 안에서의 복음적 권고들의 전면적 의의(60)


-형제적 친교 생활과 사도적 봉사에 대한 이러한 복음적 방식의 효과

(61)


-독특한 증언적 가치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의(6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덕분에 주어진 희망(63)



1: 64-71: 우리의 순명


-우리 순명의 복음적 의의(64)


-순명과 살레시오적 사명: 순명과 권위의 살레시오적 양식(65)


-살레시오 공동체 안에서의 순명: 일치하여 하느님의 원의를 찾음

(66)


-개인적 순명

신앙과 책임의 태도(67)

순명 서원의 요구(68)

개인적 자질과 순명(69)

장상과의 면담(70)


-순명과 십자가의 신비(71)



2: 72-79: 우리의 청빈


-우리 청빈의 복음적 토대(72)


-청빈과 살레시오회의 사명: 돈 보스코의 모범을 따르는 증거와 봉사

(73)


-청빈에 대한 개인적 임무

청빈 서원의 요구(74)

청빈 생활의 태도(75)


-공동체적 청빈:

재화의 공동소유(76)

공동체 생활과 우리의 사업에 있어서의 청빈의 증거(77)


-우리의 청빈 정신의 특징

(78)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79)



3: 80-84: 우리의정결


-우리의 정결의 복음적 토대(80)


-정결과 살레시오회의 사명(81-82)


-공동체 생활 안에서의 봉헌된 정결(83)


-정결을 성숙시키기 위한 자세와 수단(84)



우리는 위의 것에다 본 장의 내용을 배열함에 있어서 기준이 된 것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견을 덧붙일 수 있다.




1)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 가지 복음적 권고들이 비록 세편으로 나뉘어서 다뤄지고 있긴 하나 단일한 한 장 안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렇게 한 것은 복음적 권고들에 따라 복음적 생활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각 권고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의의와 내용을 지니고 있지만(그들 각각은 성부에 의해 축성되어 파견된 그리스도의 신비의 한 측면과의 관계를 지적해준다), 그것들은 한데 합해져 봉헌 생활의 근본적 모습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복음의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것 안에서 봉헌 생활을 정의한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느님의 원의에 대한 순명의 신비("죽기까지의 순명")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이 취하신 가난(그리스도는 스스로를 낮추셨다)과 갈라짐 없는 마음으로 생명을 바쳐서까지 모든 이를 사랑(그리스도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할 수 있었던 동정과 결부된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순명과 청빈과 정결은 예수가 살았던대로 살기 위한 투신의 세 가지 측면들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서약들은 상호 융합적이고 서로에게 빛을 던져준다.



2) 둘째로 회헌은 순명과 청빈과 정결의 생활을 추상적이게가 아니라 살레시오 사도적 계획의 고유 특징들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교회법전의 지적과도 어울리는 것이다: "각 회는 고유한 특성과 목적에 유의하면서 그 생활양식을 통하여 정결과 청빈과 순명의 복음적 권고를 준수할 방법을 회헌에 규정한다." 교회법 598.




이러한 원칙에 따라 본문은 복음적 권고들 각각에 대한 복음적 근거를 제시한 후 그것들을 돈 보스코의 경험과 살레시오 생활 및 활동에 비추어 고찰한다: 그리하여 본문은 어느 곳에서나 복음적 권고들과 사도적 사명 및 형제적 공동체 간의 연계성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서약들에 대한 살레시오적 실천을 위해 성령께서 암시하신 특징적 방법 즉 돈 보스코의 가르침과 모범에 의거한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세 편 모두에 적용되는 도식이다.



3) 마지막으로 언급할 수 있는 점은 세 가지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고찰 순서이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 안에서 적용된 순서(정결, 청빈, 순명, 특별총회도 이러한 순서를 택했다)와도 다르고 또한 1917년의 교회법 반포 이후 우리의 회헌 안에 개재된 전통적 순서(청빈, 정결, 순명)와도 다르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22차 총회는 돈 보스코가 직접 작성한 회헌에서 사용된 순서에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순명, 청빈, 정결. 이 순서는 성좌로부터 인가를 받아 우리의 특징적 모습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2차 총회가 순명을 제일 우선적으로 내세우게 된 것은 방금 언급한 역사적이며 전통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돈 보스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F. MOTTO, Constitutiones Soc. S. Francisci Salesii, Fonti letterarie, RSS 1983. 7-12, p.348-356.

전통적인 서약 순서(청빈, 정결, 순명)을 사용한 자료들을 참조했지만, 자신의 수도회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그에게 영감을 주셨던 영적이며 사도적인 경험 안에서 순명이 차지하는 핵심적 위치를 강조하는 순서를 택했다. 한편, 우리는 돈 보스코가 수도회의 사명 안에서 순명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도 큰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10개의 다이아몬드에 관한 꿈에서 순명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라. 에지디오 비가노, 돈 보스코의 10개의 다이아몬드 꿈에 따르는 살레시오 회원들, 의사록 300(1981).

우리는 순명과 살레시오 사명간의 긴밀한 연관성에 대해 회헌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는지 곧 보게 될 것이다(회헌 제64, 65, 66조 참조).


60 조 그리스도를 따름





우리는 수도서원으로써 성세의 은총을 보다 충만하고 철저하게 살고자 한다.


우리는 "정결하시고 가난하신, 그리고 순명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속하시고 성화하신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주님의 빠스카 신비와 자기를 비우심과 성령을 따라 사신 그분의 삶에 보다 긴밀히 참여한다.


우리는 모든 것 위에 사랑 받으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귀의하여 온전히 복음의 가치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기로 한다.



1. 수도 1.






수도자 사도들인 우리의 생활 안에서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서원이 지니는 본질적 의의를 제시하면서 회헌은 그리스도의 무수한 제자들과 증거자들이 생활한 영적 경험을 생생히 묘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연속적인 세 단락 안에서 제60조는 수도서원을 세례받은 모든 사람들의 성성에 대한 보편적 성소와 관련시킨 후, 복음적 권고들을 따르는 생활의 그리스도론적 신학적 차원들을 지적한다.




복음적 권고들의 복음적 방식: 세례의 은총을 발전시킴



회헌 제6장의 첫 언명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생활을 성령을 통해 우리를 축성하시는 성부의 자유로운 선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그분과 함께 일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우리의 자유롭고 사랑스런 응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회헌 제3조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적인 사랑의 움직임-하느님의 주도하심과 우리의 겸손한 응답-은 세례의 은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성부께서는 세례를 통해 우리를 당신 아드님 안에서 자녀가 되게 부르셨고, 우리에게 성령의 인장으로 날인하심으로써 새로운 백성 즉 교회가 되게 하셨으며 교회의 구원사명에 참여하게 하셨다. 우리는 특별총회의 문헌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접한다: "(교회의 모든 성원은) 참된 행복의 정신으로 고무되어 복음적 사랑으로 세례의 소명을 실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은 계명에 대한 충실과 성부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 및 이웃에 대한 형제적 사랑은 세례받은 모든 이가 똑같은 성성에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특별총회 109.



수도서원의 선물과 세례받은 모든 사람의 성성에의 성소를 연관짓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 하다. 23조에 대한 해설에서도 얘기된 바대로 그것은 공의회의 의도와도 명백히 일치된다.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서 수도자들을 그리스도교적인 성화의 길을 따르도록 불리운 하느님의 한 백성들 중 특별한 성소를 가진 사람들로 규정했다.


60조의 본문은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 5항을 명백히 상기시킨다. 증거 7: 구원의 은총 7도 참조.

특별총회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공의회는 수도봉헌의 특징을 가리켜 내적으로 '보다 깊이 봉헌'(intimins consecratur)되고 '깊이 뿌리박히게 되며"(intime radicatur) 또 외적으로는 세례 봉헌을 '더욱 풍성히 표현(plenius exprimit)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도자는 성령의 충동을 받아 사랑으로 '복음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최대한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다." 특별총회 110.



우리는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서약을 통해 자신의 세례의 은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살레시오 회원의 투신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강력한 두 표현들 즉 "충만하고 철저하게"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의 훌륭한 종합적 공식 안에서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고집하는 깊고 쇄신된 의지를 통해 "완전한 사랑을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추구하는 것" 수도 1.

에 해당한다: 사랑을 통해 그리고 더욱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복음을 철저히 생활하고, 가능한 한 친밀히 그리스도를 따름. 요한 바오로 2세는 그것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수도서원이 뿌리박고 있는 세례의 성사적 토대 위에서, 수도 서원은 새롭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묻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깨달음과 더불어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새롭고, 사랑과 부르심 때문에 새롭고, 끊임없는 '회개'인 까닭에 새롭습니다. 이렇게 '죽어서 묻히는 것''그리스도와 함께 묻힌'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처럼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합니다." 구원의 은총 7. 수도생활과 관련지어 공의회가 사용하고 살레시오 회헌도 채택한 비교급("더욱 충만히", "더욱 철저히" )에 관한 어떤 사람들의 이의에 대한 답변의 본질적 핵심이 여기서 발견된다. 세례적 봉헌에 기반을 둔, 그러기에 성화에로의 보편적 성소를 그 토대로 삼고 있는 봉헌된 생활은 철저하게 복음적인 "sequela christi(그리스도를 따름)"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기에 탁월하다: 수도적 봉헌은 세례의 은총과 다른 새로운 특징을 부여한다기 보다는 성화의 길을 추구하려는 보다 굳은 의지를 유발시키는 사랑의 신선한 충동을 부여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사용한 "특별한 봉헌"(수도 5)이란 표현의 구실이 되는 성령의 진정한 선물이다.





복음적 권고에 대한 서약의 그리스도론적 차원



수도서원의 세례적 기초를 깊이 고찰한 다음 둘째 단락은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에 속하는, 복음적 권고들의 실천의 가장 특징적 요소인 "sequela Christi" 즉 하늘나라에 대한 봉사에 자신을 전적으로 봉헌하기 위해 같은 생활형태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것을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이것이 본 조항의 핵심요소라는 점은 제목(그리스도를 따름)과 본 장의 첫머리에 인용된 성서 구절에 의해서도 지적된다.



회헌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의 본문과 관련된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각자의 개인적 성소를 따라 자원으로 수락한 복음적 권유는 마음의 정화와 영신적 자유를 얻는데에 큰 도움이 되고 끊임없이 사랑의 열정을 자극하며 …신자로 하여금 특히 주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하시고 그 모친 동정 마리아께서 택하신 동정과 청빈 생활을 보다 충실히 본받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46.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깊은 목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예수의 실존에 따라 자신의 실존을 주조하고 자기 자신 안에(비록 불완전하고 한정된 방법 안에서 이긴 하나) 성부께 봉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취한 생활 방식과 근본적 태도를 가끔으로써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활과 말씀 없이는 순명과 청빈과 정결은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그것을 실현시킬 구체적인 방법과 생활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분은 하늘 나라의 가치들을 가장 완전하게 증거하는 근원적인 생활 양식을 출범시켰다. 순명과 청빈과 정결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교훈적인 모범일 뿐만 아니라 성부와 인류에게 자신을 내어준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의 세 가지 근본적 차원들이기도 했다.


수도생활은 그리스도의 생활방식과 그의 근본 태도들을 교회 안에서 늘 새로운 형태로 다시 생활하고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여 "성부의 사도"(회헌 11)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그분과 함께 일하기 위하여"(회헌 3) 자신을 봉헌한 살레시오 회원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사도이신 그리스도처럼 살레시오 회원도 동료 인간들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기 위해 동정과 청빈과 순명 안에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자세로 살고자 한다.


"sequela Christi"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은 빠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때이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세례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것(로마서 6,4-5)이라면,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것은 사도로서의 그의 삶의 변함없는 최고 규범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의 총체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신 성부의 사랑을 계시하는 동시에 성자의 사랑의 응답을 계시한다. 십자가 위의 성자는 성부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했기에 이제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성부의 참 수도자"이다.


회헌 본문은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서약시에 이뤄지는,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의 깊은 참여를 잘 설명하고 있다. 십자가 안에서 살레시오 회원은 자신의 삶의 가장 깊은 근거를 발견한다: 낡은 인간을 버림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사랑의 총체성에 도달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 은총과 구원의 열매들을 지닌 성령을 따르는 삶은 십자가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와 성령 안에서의 삶에의 참여는 '수도 5'에 의해 명백히 지적된다: 구원의 은총 7.



이러한 고찰들을 마무리함에 있어서 복음적 권고들에 따르는 우리 생활의 최고 모범이신 구세주께 대한 우리 창립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각 서약들을 다룰 때 이것을 상세히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1867년의 한 서한의 내용 중 수도회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성향들에 관한 돈 보스코의 표현 몇 가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편안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 혹은 교육을 마치기 위해서… 혹은 부모나 그 밖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수도회에) 들어가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선익보다 현세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사도들이 세상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만난을 무릅쓰고 자신을 따르기 위해 세상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칭찬하고 그들에게 영원한 하늘나라를 약속하셨던 것이다: 참으로 그들은 일과 고난과 희생을 무릅쓰고, 심지어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랐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8354-356.





복음적 권고에 대한 서약의 신학적 차원



본 조항의 셋째 단락은 복음적 권고에 대한 서약의 신학적 차원을 명백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자 하는 성부께 이른다. 이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의 언명과 명백히 관계된다: "서원이나 혹은 본질적으로 서원과 비슷한 다른 성스러운 인연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것이므로, 이로써 수도자는 새롭고 특수한 이유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교회 44.

복음적 권고들을 받아들인 이들의 생활은 하느님의 실존과 그분의 구원적 현존 및 그분의 풍부한 사랑과 자비에 대한 특별한 "고백"이 된다.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에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늘 완벽히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개업인"이라고 불리워 왔다: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그들의 삶은 인간의 궁극적 진리의 구성요소인 하느님과의 친교의 본질적 요소를 드러낸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은 "절대자의 사람들"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명상하는 데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숭고한 선물을 성령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애덕활동과 사도직에 보다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수도자들에게도 적용된다. 바오로 6세께서 말씀하셨듯이 "수도성소가 인간 봉사를 위한 다른 직무를 맡겨주더라도-사목 생활, 선교 활동, 교육, 자선 사업 등-주님과의 깊은 일치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증거 10: 수도 5 참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우리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하느님을 신봉하는 회헌의 권유로부터 입수한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소년들에게 성화의 길을 깨우쳐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 돈 보스코의 단순한 말씀들의 반향을 듣는 듯 하다. "청소년의 벗"지에 나오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에 관한 돈 보스코의 표현들(오라토리오 회고록 185 이하): 돈 보스코가 도미니코 사비오의 전기 서문에 쓴 내용도 참조: "하느님께서 이 책의 모든 독자들에게 건강과 또한 내가 쓴 내용으로부터 유익을 얻는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도미니코가 그토록 사랑했던 복되신 동정녀께서 우리로 하여금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의 창조주를 사랑하고 섬기도록 해주시기를 빕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만유 위에 사랑 받으실 수 있고 우리의 일생 동안 섬김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오라토리오 회고록 11160).

살레시오 회원은 봉헌 생활의 증거로써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즉 제62조에서 보다 깊이 다루어질 개념을 교육할 것이다.


본 조항은 선행하는 교의를 요약하고 있는 종합적인 표현으로써 결론을 내린다: 복음적 권유에 따르는 생활은 "온전히 복음의 가치에 기반을"둔 삶이다. 즉 회헌을 인가하고 창립자를 성인으로 선포함으로써 교회가 인정해 준 복음적인 성화의 길이다(회헌 1, 192조 참조). 살레시오 계획에 대한 묘사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복음서는 우리의 최고 규칙서"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회헌 196).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세례 때부터

당신의 아들들이 되도록

그리고 당신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도록

우리를 불러주셔서 감사하나이다.


우리의 수도서원을 통해

당신은

우리가 복음적 권고의 입장에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심으로써

우리 안에 세례적 은총을 증가시키셨나이다.


아버지, 당신께 비오니,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풍성히 내려주시어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순수한 봉헌인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 끊임없이 참여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완전히 닮게 하소서.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섬기는

당신께 온전히 결합하여

인간들 가운데서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서

당신의 구원적 현존을 증거하는

산 예언자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 비나이다.







61 조 형제적이며 사도적인 사랑




돈 보스코는 서원의 성실한 실천이 얼마나 형제적 사랑과 사도적 활동에 있어서 형제들의 결합을 굳게 하는지를 자주 강조한다.


복음적 권고의 서원은 주님의 현존을 누리며 사는 가정에서처럼¹ 우리로 하여금 수도 공동체의 형제들과 함께 친교를 이루며 살도록 돕는다.


복음적 권고는 마음의 정화와 영신적 자유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되며² 우리의 사목적 사랑을 활발하게 하고 풍요롭게 한다. 순명하고 가난하며 정결한 살레시오 회원은 주께서 그를 파견 하시는 모든 이들, 특히 가난한 젊은이들을 사랑하고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1. 수도 15 참조.

2. 교회 46 참조.



제목이 보여주고 있듯이, 본 조항의 목적은 우리 생활 속에 존재하는,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실천과 형제적 친교 안에서 생활되는 사도적 사명 간의 결합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순명하시고 가난하시며 정결하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살레시오 회원은 참 가정 안에서처럼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며 언제나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그의 사명에 스스로를 봉헌한다.




돈 보스코로부터 비롯된 분명한 지적



본 조항은 하느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은 젊은이들의 구원을 위한 복음적 생활에 대한 충실을 보증해 주는 돈 보스코의 가르침을 상기함으로써 시작된다.

살레시오 수도회의 사도적 계획 안에서의 수도서약의 의의는 이미 제6장 서문에서 언급되었었다.: 수도서약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형제적 애정 안에서 회원들을 굳게 결합시키는 끈이요, 그들로 하여금 사명 성취를 위해 완전한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끈이다.


돈 보스코는 수도서약의 실천에 의해 다져지는 친교의 가치에 특별히 민감했다.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을 이루어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길" 정도로 형제적 사랑을 성숙시키는 서약의 근본 역할을 지적하고 있는 현 회헌 제50조에 채택된 1875년 회헌 제2장 제1조의 내용을 상기한다. 돈 보스코는 그가 작성한 회헌 서문에서 그와 같은 것을 보다 상세히 얘기 했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집에 사는 형제들이 '하나되어'(in unum) 즉 마음과 뜻이 일치되어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돕는 것을 보실 때 큰 기쁨을 얻으십니다. 이것은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서로 사랑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성 루가의 칭찬입니다." 돈 보스코, 회헌 서문, 형제애: 1984년 회헌 부록 216 .



복음적 권고와 사도적 사명 간의 연관성에 관한한, 우리는 돈 보스코가 하느님의 영광을 도모하고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역설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 아버지가 쓰신 회헌 서문에로 다시 돌아가 또 다른 구절을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의 서약들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우리의 뜻과 우리의 재화와 우리의 영적 정신적 능력들을 장상의 손에 맡기는 영적 끈들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가 다음과 같은 기도에서 우리를 초대한 것처럼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우리의 회헌에 따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속의 신앙과 행위로 드러나는 신심이 하나되게 하소서." 돈 보스코, 회헌 서문, 서원: 1984년 회헌 부록 208.



복음적 권고는 형제적 친교를 강화시킨다.


수도서원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 언제나 사랑의 탁월한 표징- 인간 자신을 위해 인간을 예비하시며 사명을 위해 그 인간을 준비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이자 하느님의 부르심에 관대히 응답하는 제자의 사랑의 표징-이 되어왔다.


이 사랑의 표징은 교회 위에 빗물처럼 풍부히 내려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건설하는 데에 누룩처럼 기여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음과 같은 표현도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복음적 권유는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교회와 그 신비에 특별한 모양으로 결합" 교회 44 참조.

시킨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 안에서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 생겨났으며 교회가 사랑과 사명 속에서 성장하도록 교회를 돕는다.


그러나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을 인용하고 있는 본 조항은 서원의 실천이 "주님의 현존을 누리며 사는 가정에서와 같은" 수도 15.

평화로운 공동 생활과 형제적 친교의 튼튼한 기반이 되어줌으로써 수도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성실한 준수는 그리스도교적인 공존 방법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기심, 세상의 재화에 대한 지나친 집착, 피조물에 대한 독점적인 사랑)을 제거해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보다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다 풍부하고 완전한 친교생활을 위해 힘을 발휘한다: 봉헌된 정결은 우리가 보다 큰 자유와 관심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우리의 형제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줄 수 있게 해준다: 청빈은 우리로 하여금 가족 정신 안에서 물질적인 재화나 영적인 재화 모두를 공유하게 해준다: 성부의 원의에 대한 모두의 순명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복종 하십시오"(에페소 5,21)라고 한 사도의 충고에 따라 형제적 관심과 복종의 태도를 취하게 한다.


살레시오 공동체에 대해 특별히 말하는 가운데 특별총회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의 과업은 활동 방법에 있어서 서로 잘 결합되어 있는 '팀들'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또한 특별히 진심에서 우러난 가족정신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은 수도생활의 복음적 덕행들에 의해 유지된다." 특별총회 123.




복음적 권고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사도적 활동에서의 많은 고통을 감내하게 해준다.


본 조항의 마지막 단락은 복음적 권고의 실천이 사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종합적인 언명이다: 사랑의 정신 속에서 생활되는 복음적 권고들은 회원들을 서로 일치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사도적 봉사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여기서도 복음적 권고들에 따르는 복음적 생활의 해방효과를 기억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본 조항은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의 다음과 같은 본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각자의 개인적 성소를 따라 자원으로 수락한 복음적 권유는 마음의 정화와 영신적 자유를 얻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끊임없이 사랑의 열정을 자극" 교회 46.

한다. 복음적 권고가 촉진시켜주는 외적 자유는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재능을 다하여 젊은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보다 충분한 시간을 준다: 내적 자유는 돈 보스코가 바라신 애정과 헌신의 자세로 그리고 진정으로 완벽한 교육에 필요한 요건들을 갖추고 젊은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모든 애정적 수용력을 젊은이들의 지도에 집중시킨다.


특별총회의 문헌은 우리의 서약이 지닌 이러한 사도적 차원을 권위있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복음적 가치에 힘입어 'da mihi animas'를 성취시키는데 조건이 되는 'cetera tolle'(다른 것은 다 가져가라)를 실현할 수 있다: 사실, 복음적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외적 생활에서나 보다 깊은 정서적 응답에 있어서 항상 준비자세를 취하게 한다. 살레시오 회원은 함께 생활하고 일하는 청소년들을 사랑하기 위해 결혼을 통해 자신의 자녀를 갖는 것을 포기한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받은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바치기 위해 재물의 소유를 포기한다: 그는 봉사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는 것을 포기하다." 특별총회 123.



우리 수도회의 역사는 돈 보스코의 학교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의 검소하고 고행적인 생활과 정결하고 관대한 헌신 및 확고한 가족적 유대감이 처음에는 지극히 불가능하게 보였던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활동과 사업을 시작하게 하고 임무들을 수행하게 했는가를 명백히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복음적 권고에서 비롯된 무조건적 헌신이 높은 사도적 수익의 비결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주 예수여,

당신은 한 가족 안에 우리를 한데 모아

사랑의 끈으로 일치시키시고

당신 자신의 모범과

우리의 창립자 돈 보스코의 모범을 따르는

순명과 청빈과 정결의

복음적 생활로써 지지해 주시나이다.


매일 자신을 내어주는 우리의 관대함을 증대시켜 주시고

우리의 성실한 서약들을

우리 수도가족의 형제애 안에서

순수한 사랑의 길로 생활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로 하여금

기쁨이 넘치는 열정을 가지고

복음적 권고의 길을 걷게 하시어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하시며

우리의 대상자들,

특히 가난한 젊은이들을

기꺼이 사랑하게 하소서.





62 조 하느님 현존의 특별한 표지




진복의 정신으로 사는 복음적 권고의 실천은 우리의 복음선포를 보다 설득력있게 해준다.


우리의 생활방식은 무신론, 권력, 소유욕과 쾌락 숭배로 얼룩진 세계 안에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존재하시며 그분의 사랑이 삶을 충만시킬 수 있음을 증거한다. 또한 사랑하려고 하는 욕구, 소유하려는 충동 및 자신의 전존재를 결정할 자유가 구세주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 의미를 갖게 됨을 증거한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와 봉사의 외적인 표지를¹ 위하여 우리의 생활양식에 따라 복장에 대해서도 유의한다. 성직자 회원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지역교회의 규정에 부합한 복장을 착용하며, 수사회원들은 돈 보스코가 권고한 대로 간소한 복장을 착용한다



1. 교회법 669 참조.

2. 1875년 회헌 15,1-3 참조.



회헌은 복음적 권고들을 그리스도께 대한 그것들의 근본적 관계들 속에서 제시(회헌 제60)하고, 이어 형제적 사도적 사랑과 관련된 그것들의 가치를 지적한 뒤, 계속해서 이러한 성화의 길을 추구하는 이들의 증거에 두 조항을 더 할애한다. 본 조항의 제목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구원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았다. 14, 16.


살레시오 사명 안에서의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증언


모든 사도적 사명, 특히 말씀의 선포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에 수반되는 표징들에 의해 확인"(마르코 16,17-20) 될 필요가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표징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의 생활의 증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예언자를, 예수 자신을, 그리고 그의 사도들을 대신했었다.


그런데 복음적 권고들의 실천(우리는 이로써 그리스도의 생에 일치된다)은 이러한 증거에 특별한 힘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복음적 가치들을 생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제62조에서 전개되는 주제이다: 자신의 생활양식에 의해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보다 자신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진복의 정신을 철저히 살게하는 수도서약은 우리의 실존을 복음화의 임무와 요구들에 일치시킨다.


이것은 젊은이들이 교육자의 생활과 교육자의 말이 일관되지 않은 것에 극도로 민감해하는 역사적 시기에 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바오로 6세에 의해 지적된 점이다: "현대인은 교사들보다 증거자들에게 더 귀를 기울인다. 그가 교사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것은 교사들이 증거자들이기 때문이다." 특별총회 125 참조.

...? 바오로 6, 평신도의 집회에서 행한 연설, 복음 41에 인용됨.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특별히 수도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이렇게 썼다: "수도자들은… 복음선교의 근본적 요소인 증거를 위해서 각별한 중요성을 띠고 있습니다. 청빈, 정결, 순명의 무언의 증거는 현사회와 교회에 숙고의 기회를 주게 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지만 가치를 추구하고 선의를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웅변적 설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 69.



이것도 돈 보스코의 확신이었다. 그는 종종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데려가는 효과적인 수단인 "훌륭한 모범"을 권장했다. "훌륭한 모범보다 더 강력한 설교는 없습니다"라고 그는 오라토리오의 최초의 규칙서에 써넣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4557.

또한 그는 살레시오 교육자들에게 이렇게 일깨웠다: "여러분이 먼저 모범을 보이지 못하거든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덕행을 실천하라든지 혹은 의무를 다하라든지 하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0443.



무신론과 유물론에 미혹된 세계 안에서의 젊은이들을 위한 증언

규칙서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현재 빠져있는, 또한 살레시오 회원들의 증거를 요구하는 두 가지 주요 상황들을 지적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무신론- 종교적 가치들을 무시하는, 즉 하느님을 외적으로 명백히 부정한다기 보다는 하느님을 그저 무시하는 실천적인 무신론에 미혹된 세상 안에 살고 있는 결과 고통을 당한다. 복음에 의거한 우리의 생활은 하느님과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사랑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가장 곤궁한 젊은이들과 함께 살고 머무는 우리의 방식은 우리가 최고의 사랑으로 자유롭게 택한 지고의 선이시자 완벽한 스승이신 그분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유물론을 찬양하는 세상 안에서, 젊은이들은 그들의 성장 과정에서 부딪히는 세 가지 근본 문제들에 대해, 즉 사랑과 성적인 행동에 대한 욕구, 그들의 실존에 필요한 것을 얻고 소유하려는 충동, 끝으로 개인의 자율성과 자기-주장을 가지고 사회적 공존의 한계 내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운영하는 자유에 대해, 하느님을 떠나서(때로는 하느님 대신에) 그 해답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고 있다. 위의 문제들은 어려운 것들이며 그것들의 해결책에 따라 개인의 성취나 타락이 좌우된다.


살레시오 교육가는 정결하고 청빈하며 순명적인 생활로써 위에 언급된 가치들의 크리스챤적 의미를 증거한다: (àõ)은 진정한 사랑에 의해 고무되는 개인적 관계들을 지향한다: 돈은 봉사를 위한 것이다: 자유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건설하기 위해 주어졌다. 특별총회는 이렇게 선포했다: "수도자로서의 사도는 이 가치를 보다 높게 유지하고 그의 봉헌된 생활로 말마암아 그 가치로부터의 모든 이탈(쾌락주의, 불의 부당한 축적, 압력)에 도전하고, 그런 것들의 한계를 보여주며 또 그런 것이 해방적 그리스도의 빠스카에서 몰락함을 선언한다." 특별총회 125.

그러므로 교육사업과 복음적 권고에 따르는 생활 간에는 깊은 관계가 있으며, 우리는 그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복장에 의한 증거



마지막 문단은 수도자 사도들로서의 우리 생활의 독특한 외적 표징, 즉 우리의 복장 양식에 대해 논하고 있다.


본문은 특히 수도복의 공적 의미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 그것은 외적 표지이며, 한 인간과 그를 선택하여 자기 곁에 있게 하신 하느님의 계획들을 결부시키는 표징이다. 본문은 22총회가 일반회칙에 삽입시키고자 했던 조항의 본질을 표현한다. 수도자 및 재속회 성성은 새 교회법전에 의거하여 그 주제가 회헌에서 다루어지도록 요구했다. 그 회헌 조항에 대한 주석에서 언급된 교회법 669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상을 토대로 한 것이다: "수도복은 축성과 봉헌의 표시이니 단순하고 정숙하며 검소하고 단정하여야 하며 더우기 건강의 요청에 적응한 것이어야 하며 시대와 장소의 사정과 직무의 필요에 적합한 것이라야 한다."(수도 17).

복장 습관이나 태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까지는 주장하지 않더라도 외적인 표시로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그분이 세상 안에서 하고 계신 일을 알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표징들이 어느 때보다도 감춰져 있는 세상에서 더욱 중요하다.


살레시오 회원에 관한 한 본문은 우리의 끊임없는 전통이 되어 온 것을 반영하고 있다: 돈 보스코는 당신 아들들이 유별난 복장, 수도회 전체에 걸쳐 통일된 복장을 착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젊은이들 가운데서의 교육사업에 봉헌된 수도자에게 알맞는 단순하면서도 품위 있는 복장에 대해 얘기했다. 1875년 회헌에서 돈 보스코는 세 개의 조항으로 구성된 짧은 장(15)에서 복장을 다루었다: 우선 그는 수도회는 통일된 복장을 갖지는 않으나 회원들의 복장은 각 나라의 관습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두 조항은 특히 성직자들과 수사들의 복장에 관한 것이다. 결론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세상 사람들의 새로운 유행은 극력 피해야 한다"(F. MOTTO 199).

분명히 우리는 복장에서도 교육자로서의 우리의 책임이 요구하는 바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본문은 계속해서 돈 보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성직자 회원은 세속 사제의 규정에 부합할 것이라고 상술한다. 관련 규정들(복장의 종류나 그것을 착용하는 환경에 관한)은 나라에 따라 다르며, 지역교회가 결정한다: 살레시오 성직자 회원들은 이러한 규정들에 충실할 것이며, 이렇게 하여 교회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더욱 더 드러낼 것이다. 여기서의 "성직자"란 말은 우리 수도회 내에서의 회헌 제4조의 일반적 의미로 사용된다.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당신 아드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이시며 살아 계시고 선하신 하느님 당신 보다도

피조물을 더 숭모하는 세상 안에서

우리를 자신의 표징으로 삼으로셨나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성소를 지극히 충실하게 생활함으로써

젊은이들 가운데서

복음의 참된 행복을 증거하는

살아 있는 증거자들이 되게 하시며,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사랑과

세세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존의 최고 의미를

그들에게 드러내게 하소서.




63 조 미래 세상에 대한 증거




순명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자유의 봉헌, 복음적 가난의 정신, 그리고 정결을 통해서 바쳐지는 사랑은 살레시오 회원으로 하여금 부활의 힘의 표지가 되게 한다.


복음적 권고는 살레시오 회원이 하늘 나라를 위해 온 마음을 바치면서, 역사(ÕöÞÈ)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æµÞÀ) 하심을 식별하고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그리고 소박하며 근면한 일상 생활 속에서 살레시오 회원으로 하여금 젊은이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는 교육자가 되게 하며 젊은이들 안에 헌신하려는 마음과 희망의 기쁨을² 불러 일으킨다.



1. 묵시 21,1 참조.

2. 로마 12,12 참조.



살레시오 회원이 복음적 권고들을 실천하는 가운데 참된 행복의 정신을 생활함으로써 보여주는 증거의 주제가 여기서는 그것의 빠스카적 종말론적 차원에서 고찰된다: 살레시오 회원은 그리스도의 빠스카를 통해 이미 작용하고 있으며 천상 예루살렘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될 때까지 성장을 거듭할 하느님 나라에 대해 증거한다.


63조는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서약에 담긴 하늘나라의 표징과 하늘나라에 대한 기다림의 측면들을 한데 모아 지적한다.


본 조항은 수도서약 표징 고유의 특성에 대해 얘기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에서 비롯되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지상에 영원한 나라를 가지지 못하고 미래의 나라를 찾고 있을진대, 수도 신분은 수도자들을 현세 걱정에서 더 잘 해방시켜 주는 그만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는 천상 보화를 더 잘 보여 주고,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얻게 된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더 잘 증거하며,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다." 교회 44.


우리들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있어서 본 조항은 돈 보스코가 형제회원들과 소년들에게 천국에 대해 얘기할 때 보여준 주장을 반영한다: 그는 '청소년의 벗'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소년들이여, 여러분은 모두 천국을 위해 창조되었음을 늘 기억하십시오." 돈 보스코, 청소년의 벗, 1(오라토리오 회고록 2190).

살레시오 회원들에게는 "빵과 일과 천국"을 약속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443: (이태리어판) 17251: (이태리어판) 18419.

그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천국 한귀퉁이만으로도 모든 것이 보상될 것이다"고 말하곤 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8200.

다이아몬드에 관한 꿈에서는 "보상"(수도회의 특징을 드러내는 외투의 뒷면에 붙은)이 세 가지 서약들의 다이아몬드 및 "단식"의 다이아몬드와 연관된다. 그 빛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큰 보상을 받으려거든 관련된 일의 양 때문에 단념하지 말라. 나와 함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나와 함께 기쁨을 누릴 것이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잠시이나 우리 친구들이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은 영원하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5184.

하늘나라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은 돈 보스코의 독특한 영성과 교육학에 추진력을 가하는 핵심 원칙들 가운데 하나이다. 에지디오 비가노, 10개의 다이아몬드의 꿈에서의 살레시오 회원, 의사록 300(1981), 25.



이러한 사전 언급은 우리가 본 조항에 드러나 있는 사상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살레시오 회원은 젊은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의 표지이다.



본문은 복음적 권고들에 대한 서원에서 이루어지는 봉헌 생활의 빠스카적 가치를 재천명함으로써 시작된다. 성부께 자신의 자유와 모든 사랑을 바치는 살레시오 회원의 봉헌은 그리스도의 봉헌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와 결합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이 지금도 인간들 가운데서 생생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증거한다. 이렇게 하여 살레시오 회원은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의 구원적 힘에 대한 증거자가 되며, 인간의 마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부활의 힘("역동성")의 표지가 된다. 바오로 6세께서 수도자들에게 말했듯이 "이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에 와서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남녀 수도자들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증거하기 위하여 현세 생활을 온전히 희생으로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복음 53.


살레시오 회원은 자신의 생활로써 젊은이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한다. 둘째 단락은 이러한 진리들을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한다. 수도자에게서 더욱 밝은 빛으로 빛나야할 그리스도 신자의 두 가지 특징적 태도들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스도 신자는 한편으로는 이미 일어난 사실을 증거한다: 주님이 오셨다! 주님이 계시다! 그리스도의 빠스카는 최종적인 신기원을 출범시켰으며, 인간에게는 이미 메시아적 은총들이 주어졌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은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희망 즉 하느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 준비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결정적으로 실현되리라는 희망의 행위이다. 이것은 성령과 신부의 끊임없는 기도에 표현되어 있다: "Maranatha!(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요한계시록 22,20).


회헌의 본문에 잘 표현되어 있듯이 살레시오 회원은 이러한 이중적 실상을 증거한다. 그는 우선 주께서 살아 계시며 역사 안에 현존해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하며, 또한 공의회의 말대로 불완전하나 참된 방법으로 "하늘 나라의 보화가 이미 이 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한다. 수도자들의 증거에 관하여, 교회 44 참조: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에 관하여 교회 48 참조.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천국에서 저는 확실하게 하느님을 뵈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상에서도 그분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미 그분을 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성부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택했던 생활과 일치된 복음적 권고들을 따르는 생활은 살레시오 회원으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위해서만 박동하는 그리스도의 심장(마음)을 점점 닮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살레시오 회원은 "역사(ÕöÞÈ)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æµÞÀ) 하심을 식별"하는 법을 배우고 젊은이들에게 그것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이 임무와 결부된 또 하나의 임무가 있으니, 주님의 재림, 완성될 하늘나라, 인간성의 결정적 조건이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해야할 예언자적 임무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는 복음적 권고들이 명백한 기능을 지닌다. 동정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이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마르코 12,25). 청빈 역시 마찬가지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코 10,21). 순명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오 6,10).


규칙서의 본문은 살레시오 회원이 예언자의 태도를 따라 자신의 생활로써 선포해야할 희망의 메시지를 강조한다. 그것은 청소년 교육자로서의 살레시오 회원의 사명과 결부될 때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며, 젊은 세대들의 미래가 확실한 희망의 지평 속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희망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임무를 수행하며 진정한 행복의 항구한 원천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돈 보스코의 축일 전례에서 사용되는 사도의 말씀을 지표로 삼고 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빌립비 4,4-5).



하느님, 나의 아버지,

당신께서는 서원날에

저의 자유와 사랑의 겸손한 봉헌을 받아들이시어

그것을 당신 아드님의 구원적 희생과 일치시키셨나이다:

당신 성령의 권능으로 저의 가난을 변화시키시어

저의 삶이 부활의 살아 있는 표지가 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 아드님의 마음을 닮게 하시어

오직 하늘나라를 위해서만 박동하게 하소서.


사람들 가운데서 당신의 현존과 활동의 표지들을

식별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 주시어,

돈 보스코처럼 기쁨이 넘치는

적극적인 희망의 전달자가 되어

매 순간마다

이 현세 생활의 고통 뒤에는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우리의 순명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순명과 관련된 성서 원문들이 회헌에서는 더 발견되는데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순명적 태도와 관계된 것이다: 필립보서 2, 8, 마태오 26, 42, 요한 12, 24(회헌 71). 그리스도는 성부께 대한 복종의 동기 및 양식과 더불어 이 모든 것의 중심을 이룬다. 히브리서 5,8-9는 중요한 동기를 첨가시킴으로써 수도적 순명의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차원을 강하게 보강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겪음(Christus patiens)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다(Christus obediens).


히브리서 4,14-5, 10 전체(위의 인용문이 담긴 본문)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결속된 자비로운 대사제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일련의 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이렇게 되었다: 그는 성부의 구원 계획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성부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충실하여 주저없이 그 결과들을 최대한 받아들였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그의 순명의 길을 뒤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 주는 사람으로 다시 살리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단순한 모범만이 아니다. '경험이 가르친다'(epathen-emathen)는 격언대로 그분은 아버지께 순명하여 우리를 위해 고난을 겪음으로써 우리 순명의 혹독한 대가를 몸소 배우셨다. 그분은 순명에 수반되는 고통을 용감히 겪음으로써 순명의 의미를 체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순명의 복된 결과 때문에 그리고 또한 그분이 우리와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복종한다. 그분은 목표지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 걷고 계시기도 하다. 그분은 우리의 모범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순명 하기를 배우게 된 우리의 사제요 중재자 이시다. 그리스도의 순명과의 이러한 통교 및 그분이 거기에 부여하신 구원적 의미는 회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살레시오적 순명의 주요 근거들이다(회헌 64-71).



* * *













64 조 우리 순명의 복음적 의의




우리 구세주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당신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지상에 오셨음을 우리에게 확실히 하셨다


우리는 순명 서원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께 바치며,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면서 교회와 수도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순명을 다시 살아간다.


우리는 성령께 순응하고 사건을 통해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표지에 주의하면서, 복음을 생활의 최고 규범²으로, 회헌을 확실한 길로, 장상과 공동체를 하느님 뜻에 대한 매일의 해석자로 삼는다.



1. 1875년 회헌 3,1 참조.

2. 수도 2 참조.



살레시오 순명에 관한 편의 도입조항인 본 조항의 목적은 순명의 복음적 근거를 지적하여 그것의 가장 심오한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본문은 전적으로 우리 창립자의 사상과 특별총회가 깊이 분석한 공의회의 교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본 조항에서 전개되는 세 가지 사상 노선들에 대해 특별히 고찰해 볼 수 있다.



성부께 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



수도자의 순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명 안에서 그 근거를 가지며, 예수를 따르는 것과 관련된 측면들 가운데 하나이다. 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복음적 권고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비하를 충실히 따르고 명백히 보여 주며… 순명하시는 그리스도를 보다 완전히 닮으려" 오늘의 살레시오 회원의 순명, 특별총회 624 이하 참조.

...? 교회 42.

하는 남녀들로 정의한다.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도 수도자의 순명은 "성부의 뜻을 준행하기 위하여 오시고(요한 4,34: 5,30: 헤브 10,7: 39,9 참조) '종의 형체를 취하사(필립 2,7) 수난을 통하여 순명을 배우신(헤브 5,8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 수도 14.

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명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자각하지 못한다면 결코 살레시오 회원의 순명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특별총회의 문헌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한다: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순종은 그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종합한다. 그것은 그분이 아들이요 종이라는 신분을 동시에 드러내고 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유일한 방법으로 아버지와 일치해 계시고, 따라서 전적으로 아버지께 순응하는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특별총회 627.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는 쉽다: "우리의 순종은, 성세성사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또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과 사랑으로 일치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데 그 참다운 기원을 두고 있다." 위와 동.

이러한 기본 개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순명하신 예수는 우리 자신의 순명의 살아있는 원천이요 모범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수도자의 순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본 편의 첫머리에 나오는 성서 원문(히브리 5,8-9)에 덧붙여 본 조항은 돈 보스코가 순명 서약에 관한 회헌 조항들 가운데 맨 첫 번째 조항에서 언급했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살레시오 순명의 이러한 근본적 특징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자신이 지상에 내려오신 것은 자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1875년 회헌, 31 (F. MOTTO, p.93).

우리 창립자의 이러한 표현은 예수께서 성부의 아들이자 완전한 종으로서의 자신의 태도를 선포하신 복음 구절을 상기시켜 준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34).


순명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본 편의 맨 마지막 조항에서 다시 등장할 것이다. 거기서는 순명이 그것의 궁극적 순간에 즉 주님의 빠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것 속에서 고찰되고 있다.




우리는 사명을 수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순명을 다시 살아간다



둘째 단락도 계속해서 우리 순명의 의의를 보다 깊이 탐구한다.: "우리는 순명 서원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께 바친다." 본문은 순명을 일러 자유를 철저히 복음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선포한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을 명백히 상기시킨다. 신앙 때문에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통제하기를 포기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자녀답게 복종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의 순명이라면 수도자인 우리의 순명은 이 신비를 공동체의 계획 안에서("우리는 교회와 수도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순명을 다시 살아간다") 포괄적으로("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께 바친다) 사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 순명의 교회적 공동체적 성격을 주장한다: 언제나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세례받은 이들을 통해 늘 성부께 순명하신다: 이 때문에 "교회의 아들은 순명하는 아들" 수도 14 참조.

...? H. De Lubac 추기경.

이라 일컬어져 왔다. 교회 내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순명은 우리 수도회가 구원 계획 안에서 수행하는 겸손한 봉사 안에서 되살아난다.


교회가 우리에게 맡긴 사명과 순명 간의 밀접한 관계가 특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규칙서의 본문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순명을 다시 살아간다고 애써 말하고 있다. 예수가, "죽기까지,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명한 것은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근본 이유인 구원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우리는 신경에서 "¡¦¿¹¼ö ±×¸®½ºµµ,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도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순명서약은 우리를 그분의 구원 계획 속에 위치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독특한 사도적 계획 안에서 효과적으로 일하게 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명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형제들에게 완전하게 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순명이 어떻게 하여 사도들로서의 우리의 사명의 핵심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 사명이 어떻게 하여 젊은이들의 구원을 지향하게 되었는지를 명백히 밝혀준다.


돈 보스코는 수도회의 사명을 추구하는 각 회원들의 순명에 대해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다. 우리는 이마에 동여맨 끈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2232-233.

에 관한 돈 보스코의 꿈과 또한 다이아몬드에 관한 꿈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5183: 다이아몬드에 관한 꿈, 의사록 300 (1981) 참조.

을 기억한다.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의 창립자는 순명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결같은 순명이 곧 수도회의 생명이요 일치의 끈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332.

수도회가 사도좌로부터 인가받은 직후인 1869311일에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행한 그의 연설은 특별히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시까지 수도회가 교회의 인가를 받지 못하여 다소 공중에 붕 떠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킨 뒤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사정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 수도회가 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얽매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여러분은 저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낱낱의 개인이 아니고 수도회요 가시적인 몸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수도생활에 있어서 순명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사도 바오로의 몸의 이미지를 전개 시킨다: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 수도회 전체가 매달려 있는 돌쩌귀입니다. 순명이 없으면 혼란이 옵니다. 반면, 순명이 지배하면 우리는 한 몸 한 영혼을 이루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될 것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9267-269.



성부의 원의를 알리는 수단



64조의 마지막 단락은 "교회 안에서 수도회 안에서" 순명하는 방법을 보다 충분히 설명한다. 사실 성부의 뜻에 마음으로부터 순명하는 것이 항상 어려운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성부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표징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지, 어떤 도구로 그것을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어렵다. 돈 보스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순명 서약을 합니다." 1875년 회헌 31 (F. MOTTO, p.93).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파악하기 위한 표징들과 도구들에게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본 조항은 성부의 뜻을 드러내 주는 수단들을 가리킴으로써 그에 답하고 있다.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별총회에 관심을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은 특별총회의 연구나 의견을 그 토대로 삼고 있다. 특별총회 630 참조.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표징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시대의 표징"과 같은 포괄적인 것이든 혹은 젊은이나 각 순간, 장소, 공동체, 개인 등의 요구들, 긴급사태, 문제들과 같은 특수한 것이든 간에 이 순간의 사건들과 구체적 상황이다("하느님은 역사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표징들이 언제나 쉽고 분명하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예수의 완전한 순명이 드러나 있는 복음서를 들여다 본다. 복음서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분명히 타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복음서가 특히 모든 수도자들에게는 "최고 회칙"임을 상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수도 2 참조.



특히 우리 회헌은 또 하나의 도구이다: 회헌은 현실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복음적 관점이다. 회헌이 사도좌로부터 인가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것이 우리가 따라야할 실제적이고 안전한 성화의 길(회헌 192 참조)이며, 동시에 그것들이 교회에 대한 순명의 정신 안에 우리를 일치시킨다는 것을 보증한다.


복음서와 회헌은 수도회의 정신과 사명에 대한 충실성을 보장하는 객관적으로 확실한 도구들이다. 그것들을 특특한 역사적 배경 안에 삽입시키고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 장상과 공동체는 "하느님 뜻에 대한 매일의 해석자"로서의 특별한 역할을 지닌다. 하느님을 대변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은 육화와 구원 사명 안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종속시키신 그리스도의 철저한 순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장상에 대한 순명의 이러한 측면은 뒤에 나오는 조항들 안에서 더 상세히 다뤄질 것이다. "수도적" 순명을 일반 신자들의 순명의 덕으로부터 구별시키는 것은 합법적인 장상에게 의지를 맡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것은 우리가 서원 양식을 통해 받아들인 임무이다(회헌 24 참조).


공동체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 언급에 대해 특별히 해설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공동체"는 아버지이며 지도자인 장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지역 공동체이든 관구 공동체이든 혹은 세계 공동체이든 여하튼 어느 공동체 안에서든 모든 회원은 성부의 원의에 대한 섭리적 표지를 지닌다. 공동체적 순명이 다루어질 때 이 측면도 다시 거론될 것이다(회헌 66).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순종하는 종이 되신

당신 아드님의 신비를

교회와 살레시오 수도회 안에서

되살리도록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돈 보스코의 정신과 헌신으로써

당신 자녀로서의 우리의 자유를 당신께 드리오니

그것을 당신의 사랑의 계획에 완전히 일치시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우리에게 맡기신

구원 사명을 완수하게 하소서.


아버지,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의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의 회헌 안에서,

우리 장상들의 의향 안에서,

그리고 우리 생활의 모든 여건 속에서,

당신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여주시는

당신 원의의 표징들을 읽을 수 있게 하소서.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관대하고 충실히

당신께 응답할 자세를 갖추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65 조 순명과 권위의 살레시오적 양식




살레시오 전통에 있어서 순명과 권위는 상호존중과 신뢰관계를 고취시키는 애덕 및 가족정신으로 실시된다.


장상은 자신의 권위를 분별있게 행사함으로써 지도하고 인도하고 용기를 북돋운다. 모든 형제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겸손하게"¹, 진지하고도 신속한 순명으로 협력한다.


권위에 대한 봉사와 자발적인 순명은 본 수도회를 단결시키는 원칙이요, 그 지속성을 보장해주며, 살레시오 회원에게는 성화의 길이요, 일에 있어서 활력의 원천이요,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다.



1. 1875년 회헌 3,2.




회헌은 순명을 그것의 복음적 원천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내려 오신 거룩한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서술한 후 계속해서 살레시오 회원 특유의 순명 방법을 제시한다: 65조는 사실 "순명과 권위의 살레시오적 양식"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본 편의 다른 조항들에서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여기서 순명과 권위가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할 것이다. 이것은 순명하는 태도가 명령하는 태도와 연관된다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과 자신의 의지를 그 권위에 종속시키기로 자유롭게 선택한 형제는 공히 동일한 규칙서에 의해 결합되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하나이며 동일한 사도적 계획을 지닌 종들이다는 점을 더욱 특별히 강조한다. 장상과 규칙서의 연계성에 관해 돈 보스코가 187623일에 하신 훈화 말씀 참조(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62). 이것은 공동체적 순명을 다루는 다음 조항에서 더 상세히 거론될 것이다.


본 조항에 제시된 지도노선은 돈 보스코의 아들들에게 전해져 우리 가족의 일부가 되었으며 우리 전통의 근본 요소가 된 돈 보스코의 가르침과 모범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다(이것과 관련지어 본 조항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들 중 전통에 대한 언급에 유의하라).


이미 제64조에 대한 해설에서, 돈 보스코가 자신의 수도회의 사도적 계획 안에서 순명에 대해 중요성을 부여했었다는 것에 주목한 바 있다: 살레시오 회원의 순명은 사명 완수를 지향하므로 자신의 대상자들을 섬기기 위해 자기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바치는 데에서 자기 실현을 발견하는 사도의 순명이다. 살레시오적 권위의 평행적 임무는 공동체를 활성화 시키고 지도하여 이러한 봉사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조항은 살레시오적 순명과 권위의 근본적인 사도적 성격에 대해 언급한 뒤, 계속해서 이것들이 이행되는 방법을 묘사한다.


돈 보스코는 이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돈 보스코가 순명 안에서 실현되기를 원했던 온전한 준비자세의 원칙을 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장상의 원의 속에서 하느님의 원의를 보게"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9269 참조.

되기를 원했다: "장상은 하느님의 대변인이며, 장상에게 순명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임을 언제나 명심합시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9270 참조.

그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장상의 손아귀에 든 "손수건" 같기를 원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3385 참조: 돈 보스코 전기 4294 참조: 68: 13150도 참조.

즉 그는 그들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행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완전한 준비자세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돈 보스코가 자신의 공동체의 토대로 삼은 또 하나의 원칙 즉 그리스도교적 형제애의 가치와 관련된다: 돈 보스코는 마음 속으로 위계적으로 짜여진 이러한 조직체에 생명을 불어 넣는 영혼은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9269 참조.

이것은 서로 구속된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의무 이지만, 특히 수하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어야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1875년 회헌 32 (F. MOTTO p.93).

사랑이 그의 명령어가 되어야 한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3554 참조.

그는 두려움 보다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7317 참조.


이렇듯이 돈 보스코는 순명이 충분하고 완전한 준비 자세 속에서 표현되어지기를 원하면서도 권위의 행사에 대해서는 매우 인간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순명이 강요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써 이행되어지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62 참조.

그는 각 개인의 특별한 재능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았고, "각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힘에 따라 일하기를" 원하였다: 책임 있는 성인의 순명이 곧 그가 추구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돈 보스코는 권위나 순명이 가족 안에서처럼 행사되고 지켜지기를 요구하였다.


돈 보스코의 관례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세 단락에서 살레시오 회원의 명령 및 복종 양식의 몇가지 모습들을 그 긍정적 결과들과 더불어 제시하고 있는 본 조항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사랑과 가족 정신 안에서 생활되는 순명과 권위



가족 정신과 사랑은 우리들에게 순명과 권위의 분위기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미 살레시오 정신(회헌 14 참조)과 형제적 공동체(회헌 49, 51 참조)를 다루면서 가족 정신이 돈 보스코의 활동 방법의 중심 이상임을 애기한 바 있다. 돈 보스코는 말과 글에서 그것을 종종 언급했으며, 그의 사업에 생기를 주고 사업을 조절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공동체가 건전하고 질서 정연하며 조화로운 가족이 되기를 원하였다: 사랑이 공동체를 지배해야 하고 공동체의 생활과 활동과 상호관계를 고무시켜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장상은 친구로서, 형제로서, 아버지로서 현존해야 한다(회헌 55 참조).


이미 말했듯이 회헌 인준 50주년을 맞이하여 행한 돈 리날디의 연설은 매우 의미심장 하였다: "돈 보스코는 수도회 보다는 장상의 상냥하고 친절하고 주의깊은 부성애와 아랫 사람의 자녀답고 형제다운 애정을 토대로 한 가족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9269.

...? 돈 리날디, 회헌 인가 50주년에 부쳐, 의사록 23, 1924. 1.24, 179.

우리는 돈 보스코가 집의 지도를 맡게 된 한 살레시오 회원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이해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가시오. 장상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형제로서, 아버지로서 가시오. 모두에게 이익을 주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사랑이 그대의 명령을 지배하도록 하시오." 피에트로 페롤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서한집 3360: 도미니코 토마티스에게 보낸 서한, 서한집 4337쪽도 참조.

미라벨로의 원장 돈 루아에게는 다음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사람들이 자네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랑하도록 힘쓰게. 명령을 하거나 잘못을 시정해 줄 때에는 언제나 당사자들에게 자네가 그들을 이롭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자네의 변덕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게."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7317.



본 조항은 이러한 가족적인 사랑 양식을 살레시오 정신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그것은 "상호 존경과 신뢰를 고무시킨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가족 안에서처럼 최대한의 상호 신뢰와 믿음과 동료에, 평화롭고 건설적인 토의의 분위기 속에서 형제들을 서로 일치시키며 형제들과 장상들을 일치시키는 정신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상호 관계의 본질-장상에 대한 살레시오 회원의 신뢰와 형제회원에 대한 장상의 신뢰-에 대한 명백한 언급에 주목한다: 16조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서로 신뢰"한다. 한편에 대한 존경과 신뢰 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공적인 결과는 양편 모두의 긍정적인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서로 최대한의 신뢰를 보이고 형제들의 신뢰를 얻으려 노력한다.


권위에 순명에 관한 많은 문제들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인 우리 가족의 특징인 이러한 분위기를 육성 시키려는 마음가짐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살레시오적인 명령과 순명 양식



우리는 규칙서에서 장상은 "자신의 권위를 분별있게 행사"한다는 표현을 접하고서 처음에는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그 의도는 진정한 통치력을 가지고 공동체와 형제 회원들을 지도해야할 장상의 이무의 비중을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들 가운데서 공식적인 명령들이 최소한도로 사용되고 있고 통치는 관례적으로 활성화를 통해 행사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55조는 장상을 "아버지요, 스승이요, 영적 지도자"로 행동하는, "형제들 중의 형제"로 묘사했다. 본 조항은 그가 이러한 행동노선을 따른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영적 교의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지도"한다: 그는 열정과 사목적 신중함을 충분히 갖춘, 일차적 책임을 지닌 사람으로서 "인도"한다: 그는 애정이 넘치는 아버지요 형제로서 "용기를 북돋운다." 그런 조건에서는 자주 권위에 호소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 분명하다: 형제회원들은 깨우침을 받고 지도를 받을 때 책임감과 창의력을 지니고 공동계획을 실현시키게 된다.


분명히 본 조항이 살레시오 권위의 특징들을 전부 다 제시한 것은 아니다: 본 조항은 회헌과 회칙의 다른 곳에서 얘기된 것에 의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특히 회헌 55, 회칙 121-124, 173-176 참조.



순명의 살레시오적 특징들은 우리의 아버지께서 몸소 쓰신 회헌 조항들 가운데 하나에서 일부 인용된, 돈 보스코께 소중한 표현들에 의해 묘사된다: "모두 자신의 장상에게 순명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자신의 장상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생각하고 무조건 즉시 기쁘고 겸손하게 그에게 복종하십시오." 1875년 회헌 32(F. MOTTO, p.93).



살레시오적 순명의 세 가지 특질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진지한 순명: "진지한"이란 말은 "기탄없이"란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은 관대하고 무조건적인 준비태세를 요구하는 동시에 장상의 중재를 통해 자신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대한 살레시오 회원의 응답이 성실하고 깊이 있는 것이기를 요구한다.



-신속한 순명: "신속한"이란 단어가 응답의 신속성 뿐만 아니라 까빌리아 신부가 살레시오 정신에 관한 연설에서 잘 표현한 창의력이 넘치는 협동 정신을 암시한다는 것은 상상을 별릴 필요조차 없다: "우리는 '제가 그것을 하겠습니다'라는 살레시오 좌우명으로 요약될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한 은혜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희생을 토대로하여 자라온 우리 수도회의 가장 큰 승리는 '제가 그것을 하겠습니다'와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까빌리아, conferenze sullo spirito salesiano, Turin, 1985, p.57.




-즐거운 순명: "즐거운 마음으로"라는 표현은 언제나 크게 미소지으며 순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은 "기꺼이"라는 말과 같으며 돈 보스코가 회헌 서문에서 사용했던 성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즉시 기꺼이 순명 하십시오… 진정한 순명은… 무엇을 명령받든지 기쁘게 행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께서 언명하셨듯이 '하느님은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 1872년의 생활지표(strenna)에 관해 바라쩨의 형제회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돈 보스코는 "진정한 순명"에 관해 얘기했다: "진정한 순명이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명령들을 주님이 명하신 좋은 것으로 여겨 그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0443.






이러한 순명의 결과들



본 조항의 마지막 단락은 수도회 전체와 각 형제회원들에게 관련된 결과들 때문에 권위의 봉사와 순명에 임함에 있어서 살레시오 정신을 유지하라고 격려한다.



-수도회의 단결과 지속성 보장: 살레시오 순명의 이 두 성과들은 위에 언급한 1869311일의 연설에서 돈 보스코가 강조한 것들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돈 보스코는 수도회에 하나의 머리와 보완적인 기능들을 가진 서원들로 구성된 몸의 개념을 적용시켰다: "이 몸이 즉 우리 수도회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순명에 의해 지도된다면 우리 수도회는 그 가치를 증명할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 이웃의 선익 및 성원들의 복지를 위해 큰 일들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9270.




-수도회의 회원들에게는 순명은 "성화의 길"이다: 그것은 회원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원의를 고수하게 하며, 돈 보스코의 가족 안에서 주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실현시키게 하기 위해 적절한 위치에 그를 배치한다: 이에 대해 제2조는 "우리는 이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성화의 길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순명은 "일에 있어서 활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레시오 회원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유로이 역사 하도록 하며, 또한 그에게 하느님이 그가 있기를 원하는 곳에 있다는 확신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것은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다. 돈 보스코는 엄숙한 선언으로 이렇게 약속했다: "만일 이상과 같이 순명한다면 여러분은 수도회 안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내리라는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단언할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 호헌 서문, 순명: 1984 회헌 부록, 210.



우리 주 하느님,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가족 안에서

돈 보스코가 바랐던

상호 존중과 신뢰와 평온의 분위기 속에서

당신을 섬기고

젊은이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우리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상들과 형제들로 하여금

당신의 성령에 의해 고무된

사랑의 봉사 안에서

함께 살게 하소서.


우리의 장상들에 의한

지도와 활성화의 봉사와

우리의 신속하고 진지하며 기쁜 순명이,

수도회에게는 지속성을 보장하며

각 회원에게는 성화의 길,

일에 있어서 활력의 원천,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66 조 순명에 있어서의 공동책임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비록 다른 임무를 지녔다하더라도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 모두 순명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신적 원의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헌신을 표명하고 새롭게 한다.


우리는 중대한 일에 있어서 공동책임을 깊이 느껴 형제적이며 인내로운 대화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함께 찾는다.


장상은 형제회원들의 의견을 듣고,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도록 권장하며, 믿음과 사랑 안에서 뜻을 하나로 모으도록 고취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한다. 일반적으로 여러 의견들을 수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적절한 결정으로 공동모색 단계에 결론을 짓는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기 의견이 비록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실히 협력함으로써 이 결정들이 이루어지도록 힘을 다한다.



복음서를 기초로 하여 살레시오적 양식으로 사는 순명은 각 형제회원들과 공동체 모두에게 요청된다. 본 조항 제66조는 순명의 공동체적 차원을 특별히 다루며, 그것을 특징짓는 보다 중요한 측면들 가운데 몇 가지를 밝힌다. 이점은 특별총회와 제21차 총회의 특별한 연구 목적이기도 했었다.




순명하는 공동체



첫 단락에서 최초의 근본 언급이 이루어진다. 즉 순명의 주체인 공동체 다시말해서 순명하는 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공동체에 대한 계획들을 가지고 계신다: 공동체에는 사명이 우선적으로 맡겨져 있다(회헌 44 참조). 그러므로 공동체는 하느님의 원의를 찾고 그것을 실현시켜야 할 의무를 지니며, 전체 수도회는 총체적 사명에 대해, 관구 및 지역 공동체들은 각각의 차원에서 이에 관계한다.


본문은 특별한 측면에 대해 지적한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비록 다른 임무를 지녔다 하더라도 모두 순명하기 때문에 공동체는 순명적이다. 권위의 위치에 있지 않은 형제회원들 뿐만 아니라 장상들도(진실로 더 신중하고 절박한 형태로) 끊임없는 순명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각자 자신의 역할에 따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정하셨고 또한 청소년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맡기신 계획을 실행해야할 공동책임을 지닌다. 장상편의 순명과 관련지어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서는 장상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합시다"고 선포한 뒤 즉시 이렇게 덧붙였던 돈 보스코의 말씀을 회상해 볼 수 있다: "총장은 규칙서를 그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결코 규칙서에서 벗어 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단일한 초점 대신 규칙서와 총장 자신의 뜻이라는 두 개의 초점이 있게 될 것이다: 대신, 규칙서가 총장 안에 완전히 구현되어야 한다: 규칙서와 총장이 하나가 되고 동일해야 한다." 특별총회 632-637: 21총회 391-392.

...?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62: "친교 정신 안에서"의 순명에 관한 주석은 특별총회 632에서도 발견된다.





공동책임의 초자연적 원천들



첫 단락의 이런 근본주장에 이어, 본 조항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공동책임을 수행하는 공동체의 전형적인 종교적 배경을 제시한다.


본 조항은 하느님의 계획을 수행하는 방법을 함께 찾아내는 우리의 방법이(세째 단락에서 설명되겠지만) 인간적인 회합들이 사용되는 지역적 과정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주님의 식탁에 함께 참여하는 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지적 한다.


공동체가 가시적으로 드러내며 또한 자신의 일상 현실을 "순명하는 공동체"로 발전시키는 방식을 지적하기 위해, 기도에 관한 장의 두 조항들(회헌 87, 88 참조)에서 더 충분히 전개될 내용이 명백히 언급되고 있다.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함께 귀기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데 몸바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정보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게 하는 빛이며 우리의 성소를 충실히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회헌 87).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공동체는 마리아의 순명을 본받아 그 자신의 생활과 활동 안에서 그 순명을 실행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 지소서."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탁월한 복종의 행위는, 하느님의 원의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헌신을 가장 역동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성체성사의 거행이다. "우리는… 성체 성사 안에서 빠스카의 신비를 거행"(회헌 88)한다: 공동체는 사제적 봉헌의 정신 속에서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명과 일치시킨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의 상황들 속에서 우리의 순명을 되살리고 그러한 상황들이 우리에게 짐지운 힘겨운 요구들을 매일 혹은 때때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우리의 지극히 중요한 지주이다.




공동체적 순명의 세 가지 단계들



본 조항은 셋째, 넷째, 다섯째 단락에서 하느님의 원의를 함께 찾아 그것을 책임있게 완료하는 공동체적 과정의 단계들을 묘사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중대한 일에 있어서"라는 시작 구절에 주목할 수 있다. 이는 공동체의 일상 생활에서 회원들이 각자의 맡은 바 임무를 완벽하게, 사랑을 가지고, 자신이 성부의 바램에 따른 일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서 수행할 것을 전제로 한다. 공동체가 공동계획을 수행하면서 따를 주요 노선을 정할 때,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나 혹은 그 성원에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거나 행해지고 있는 활동과 관계된 새로운 상황들이 발생했을 때, 그리하여 그 결과 하느님의 원의가 당장 분명하지 않아 명백히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주님의 원의를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그런 때에 회원들은 "성령께 순응하고 사건을 통해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표지에 주의"(회헌 64)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공동체적 친교는 서로 밀접히 연관된 세 단계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첫번째 단계는 회원들이 공동체에 말씀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원의의 표징들을 함께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탐구 단계다. 그러한 탐구를 위한 특별한 도구는 건설적 정신에 의해 강화된 모든 회원들이 형제적 분위기 안에서 공동체와 공동체의 성원들을 위해 솔직하고 인내롭게 적절히 기여하는 공동체적 대화이다. 각 성원이 자신의 생각들을 고집하지 않고 정말로 사심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 단계에서의 장상의 특별한 책임은 활성화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장상은 형제회원들의 의견을 듣고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도록 권장하며, 믿음과 사랑 안에서 뜻을 하나로 모으도록 고취"한다. 그는 공동체가 의미깊은 대화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돕는 동시에 탐구과정에서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인 친교와 일치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공동체를 지도함으로써 공동체에 봉사해야 한다.


-두번째 단계는 결정 단계다. 결정은 "일반적으로 여러 의견들을 수렴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회헌은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라는 말마디에 주목하라: 사실, 형제적 친교의 요소들이 모두 효과적으로 제시될 경우(같은 정신, 공동선에 대한 같은 관심, 사도적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같은 사목적 열성), 처음에 드러났던 의견의 차이가 점차 해소되는 것이 그것의 일반적인 결과일 것이다. 일치를 향한 이러한 움직임에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장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형제회원들을 지도하고 그들 가운데에 신앙적 견해를 촉구시켜야 하고, 반대되는 의견들을 조정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이 경우 그의 마지막 말이 의견 수렴을 자연스럽게 결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의 권위로써 간여할 것이며,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할 의무는 없으나 모든 사람들의 견해를 최대한 고려하여 공동체의 선익과 그 사명을 위해 결정을 내릴 것이다. 이 점에 관해 본문은 분명히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장상은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명할 확고한 권한을 소유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회원의 의견을 기꺼이 들을 것이며 회와 교회의 선을 위해 그들의 협력을 촉진하도록 하여야 한다."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복음의 증거"에 이렇게 썼다: "각 수도자는, 특히 장상들과 남녀 수도자들 가운데서 일정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 신앙의 확실성을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이다."(증거 25).

... 특별총회 635 참조.

...? 수도 14: 증거 25도 참조.



-끝으로 세 번째 단계가 있으니, 실행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순명 안에서의 성실한 공동책임의 개념이 등장한다. 특별총회의 문헌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한다: "실행은 순종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풍부한 개인적 창의와 관대한 희생에 빛을 가져다 준다. 관련된 공동체 전체와 개개인은 행동으로써, 즉 결정된 것을 수행함으로써 아버지와 자유롭게, 책임있게, 능동적으로 일치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신앙의 행위로 이행해야 하며, 특히 그 결정이 그들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러하다. 그들은 결정을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실하고 책임있게 이행해야 한다. 그들은 명령에 의하여 부과된 제한 내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또 일이 아주 다양한 경우라 할지라도 가족의 사랑스러운 멤버로서 정성어린 마음으로 온전히 협력할 것이다. 공동체의 결정이 어느 경우에 한한 것이면, 그 경우마다 그 결정 이행은 순종의 덕을 내포한다." 특별총회 637.



공동체의 생활과 활동을 지도해야할 원칙들과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는 회헌 제123조는 계획하고 조직하고 검증하는 입장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회원들의 "책임있고 효과적인 참여"를 특별히 포함한다. 이것이 바로 순명하는 공동체가 사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주님의 원의를 주의깊게 실행하는 방법이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성체성사의 빵을 서로 나눌 때,

우리에게 서로 단결할 수 있는 진정한 원천들을 주시어,

당신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시는 것을

함께 찾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장상들의 결정을 신앙으로 받아들여

사랑으로 그것을 수행하도록

우리를 도와 주시어

우리의 순명 생활이

우리 자신의 구원과

당신이 우리에게 맡기신 이들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67 조 개인의 순명과 자유




살레시오 회원은 자기 "지성과 의지의 힘, 또 본성과 은총의 은혜를 바쳐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정신으로 순명할 부르심을 받았다.


믿음으로 순명하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장상 안에서 베푸시는 표지와 도움을 인정한다.


이 순명은 "하느님의 아들들의 자유를 넓혀 원숙케 하는 것이다."²



1. 수도 14.

2. 수도 14.






본 조항과 다음 두 조항들은 개인적 순명의 임무들과 특징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것들은 순명의 복음적 의의와 살레시오적 양식을 다룰 때 이미 지적된 지도 노선들에 비추어 읽혀지고 고찰되어야 한다.


본 조항은 순명에 대해 살레시오 회원에게 바람직한 준비자세와 신속성을 부여하는 몇 가지 근본 태도들을 제시한다: 살레시오 회원은 원숙한 책임감과 확신에 찬 신자의 믿음으로 순명한다.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의 순명



본 조항의 첫 단락은 수도자들과 그들의 장상에게 다음과 같이 권하고 있는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신앙과 사랑의 정신으로 회칙과 회헌의 정한 바에 따라 자기 장상들에게 겸손되이 순명할 것이며, 명령을 실행하고 부과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지성과 의지의 힘과 또 자연과 은총의 은혜를 바칠 것이며…, 장상은… 아랫 사람들을 하느님의 아들들로서 다스리고 그 인격을 존중하며 그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처사할 것이다…. 회원이 임무를 수행하고 또 새로운 일을 받음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책임있는 순명으로써 협력하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수도 14.



공의회 문헌의 원문은 위대한 자질들과 인간적 가치들이 순명과 관계되며 순명에 의해 발전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첫 번째 자질은 자유다. 순명을 어린이들의 덕목으로 여기는 통념과 반대로, 수도적 순명은 청소년 심리와 상반되는 참으로 원숙한 가치이다고 얘기되어져야 한다. 순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삶을 실현시키기 위해 받아들인 결정에 내적으로 동의하는 개인의 자율적 행위이다. 특별총회 문헌은 이렇게 언급한다: "순종은 어린애 같은 행위가 아니고 어른다운 자세이다. 즉 순종은 의지와 인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려는 단호한 의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참으로 자연스러워 지는 길이다."(특별총회 639)

그러므로 살레시오 회원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즉 자신의 순명의 이유들을 아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순명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서약한 그 순명은 내적 자유의 특별한 표현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 그분의 자유를 결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 바친다. 그러나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7-18)." 구원의 은총 13.



두 번째 인간적 자질은 창의력이 풍부한 책임감이다. 실제로 그것은 더 활발히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즉 받아들인 명을 수용하며, 형제들과 더불어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온 힘을 다하여 그것에 헌신하고 수동적 혹은 기계적 태도를 모두 배격함으로써 그것을 개인적 임무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창의력이 순명을 요구한다면, 순명은 창의력에 의해 강화된다는 것 역시 옳은 말이다. 이것은 제19조에 표현된 것에 따른, 살레시오 정신의 한 측면이다. 돈 알베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상에 대한 당연한 순명에는 개인적 창의정신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 수도회는 우리로 하여금 시대와 장소의 필요에 의해 요구되는 선을 행할 수 있게 해주는 현대적 측면을 바로 이러한 정신으로부터 얻는다." 돈 알베라, 성소자들에 관한 회람장, 1921. 5.15, 의사록 4 201(회람서한 499)

까빌리아 신부 역시 돈 보스코가 자신의 아들들에게 교육시키고자 했던 순명 양식에 관해 얘기하면서 예리한 식별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했다: "돈 보스코는 세 가지 단순 서약을 지닌 수도회를 정말로 염두에 두었었지만 그는 그것이 현실에 눈을 뜨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기를, 말하자면 '구현되기를' 원했다. 그의 수도회 안에서 행해져 왔고 또한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일은 개인에게 일정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감히 생각해 볼 수도 없고, 다른 조건에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갸륵한 것일지 모르나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 일에 방해와 장애물이 될 생활 형태와는 도저히 조화될 수 없는 일이다." 가빌리아, Don Bosco- Profilo storico, SEI Turin 1934 (2) 168-169.



신앙에 뿌리를 둔 순명



다른 것들을 포함하고 그것들을 더욱 역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인간적인 자질들을 강화시키는 순명의 초자연적 특징은 분명히 신앙이다. 본 편의 모든 조항들은 이것을 말하고 있거나 은연 중에 그렇게 간주하고 있다. 오직 인간적인 논거만을 자신의 순명의 토대로 삼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오랫 동안 자유롭고 자신있게 순명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원의를 열심히 찾고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며 실행하도록 하는 사랑은 성령의 현존과 자신을 성부께 온전히 바치는 기쁨을 발견하고 맛보게 하는 신앙에서 나온다.


실제로 규칙서는,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장상의 한계와 인간적 결점들을 문제삼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장상 안에서 베푸시는 표지와 도움을 인정한다."

순명의 활성적 요소인 이러한 신앙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순종하는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의 비천한 여종인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지극히 겸손하다. 겸손과 순명은 항상 공존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한다: "저의 성화의 건물의 초석은 겸손이고 벽은 순명이며, 지붕은 기도이어야 합니다"(101286).









살레시오 회원은 이렇게 성화된다.



본 조항의 마지막 단락은 서두에서 이미 인용한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 원문을 다시 인용하고 있으며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인간을 성숙시키는데 있어서 순명이 차지하는 역할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수도 생활에 있어서의 순명은 인격의 존엄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들의 자유를 넓혀 원숙케 하는 것이다." 수도 14.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역시 "순종을 통하여 강화된 자유" 교회 43: 증거 27 참조.

에 관해 얘기한다.


순명은 보다 완벽한 자유에로의 문을 열어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자유이신 성령의 길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살레시오 회원은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겸손과 능력을 성숙시키며,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더욱 일치하게된다. 우리는 순명의 다이아몬드에서 발산되는 빛에 관해 쓰여진 말들을 상기할 수 있다: "건물 전체의 지반이요 성성의 윤곽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5184.

이라는 순명은 우리를 성성에로 인도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격을 가장 완벽히 실현시키도록 하며 또한 진정하고 영속적인 행복에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 주 하느님,

언제나 우리의 순명이

지성과 자유와 책임을 갖춘 행위인 동시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표지와 도움을

장상 안에서 발견케 하는

생생한 신앙의 행위가 되게 하소서.


순명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겸손한 존경을 통해

당신의 길을 따름으로써

세세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완전한 인간이요 우리의 구세주이신

당신 아드님의 모습에 적합한

자녀로서의 완벽한 자유에 이르게 하소서.



68 조 순명서원의 요구




살레시오 회원은 순명서원에 의해 회헌 준수에 관한 사항에 있어서 합법적인 장상들에게 순명할 의무를 진다


순명서원의 구속력에 의해서 명백하게 명령이 내려질 때에 순명의 의무는 더욱 가증된다. 상급 장상들과 원장들만 이러한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서면이나 두 증인 앞에서, 중대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드물게 이를 행사한다



1. 교회법 601 참조.

2. 교회법 49 이하 참조.






본 조항은 살레시오 회원이 서원 날에 하느님 앞에서 서약으로써 떠맡은 순명의 의무들을 표현하며, 법적 측면들을 포함한다. 본 조항의 내용은 우리의 초기 회헌들의 전통적 표현과 교회법전의 지시사항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 창립자가 쓴 회헌 판본에서는 순명의 교훈에 관한 교회법적 내용이 1858년 첫 원고에서부터 1873년 제2판까지에서 발견된다. 1874년의 인가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F. MOTTO, 92-95). 그러다가 다시 그 뒤 판들에 등장한다. 특히 1966년 회헌 제41조와 42조 참조. 이들의 골자가 현 회헌의 본 조항에 다시 제시되어 있다.



본 조항은 순명하도록 부름받은 수도자의 의무들과 또한 명령을 내려야할 임무를 지닌(그리고 그 역시 상급 장상들과 규칙서에 복종해야하는) 장상들의 의무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순명의 표징인 살레시오 회원의 생활



첫 번째 단락은 살레시오 회원이 서원에 의해 맡게 된 것에 대한 진술이다. 사도로서 봉헌된 그의 생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 따 순명의 표징아래 영위된다는 것은 사실(회헌 64 참조)이나, 그가 하느님께 한 서원은 분명히 "회헌 준수에 관한 사항에 있어서 합리적인 장상들에게" 교회법 601은 순명 서약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신앙과 사랑의 정신으로 받아들인 순명의 복음적 권고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합법적인 장상들이 고유한 회헌에 따라 명령할 때, 마음으로부터 복종할 의무를 지운다."

자신의 뜻을 맡기는 것과 관련된다.


하느님께 대한 수도자의 순명은 앞 조항에서 얘기된 바대로 그 공동체 내에서 권위를 행사하도록 뽑힌 형제의 중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또한 교회에 의해 성령께서 바라신 사명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과 수단으로 인정받은 회헌 안에 표현된 수도회의 사도적 계획과 밀접히 관련되기도 한다. 순명 서원에 의해 살레시오 회원은 하느님의 대변자로 인정하는 장상의 지도에 자신을 자유로이 맡김으로써(회헌 67) 수도회의 사도적 계획 안에서 하느님의 원의를 찾는다. 수도 14 참조.



순명 서원이 널리 적용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았으며 규칙서에 서술되어 있고 사명을 실현시키기 위한 살레시오 회원의 봉헌된 생활 전체에 적용된다. 바로 이것이 각 회원이 서원 안에서 하느님께 약속했던 것이다: "살레시오회의 회헌에 명시된 복음적 길을 따라 평생토록 순명, 청빈, 정결을 살도록 서원하나이다"(회헌 24).







살레시오 회원이 그리스도의 순명을 보다 명백히 떠맡도록 불리우는 경우들



서원 때 이루어진 투신을 전체적 관점에서 표현한 뒤, 본 조항은 계속해서 두 번째 단락에서 순명 서원이 하느님과 교회와 수도회 앞에서 구속력을 강하게 띠게 되는 경우들을 상세히 설명한다. 회헌은 "순명 서원의 구속력에 의해서 명백하게 명령이 내려질 때에" 순명의 의무가 더욱 가증된다고 말한다. 지적된 외적 조건들("서면이나 두 증인 앞에서")은 명령을 내리는 장상의 의향을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양심의 평정을 도모하기 위해 이 문제를 법적으로 명확히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교회법전과 돈 보스코가 초기의 회헌 판본들 가운데 하나에서 쓴 다음과 같은 말에서 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순명 서약의 준수는 하느님과 성스런 어머니이신 교회의 명령이나 장상이 명백한 순명의무와 더불어 내린 처분들을 거스르지 않을 경우 죄의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교회법 49 이하 참조. 어떤 여건들은 한사람에게 주어진 "법령"이나 "명령"에 타당하게 표현된다.

...? 1860년 회헌 33 (F. MOTTO, 94).


본문은 장상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순명 서원의 구속력에 의해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합법적인 장상들"을 지적한다. 그들은 "상급 장상들"(즉 총장과 부총장, 관구장과 부관구장)과 각 공동체의 원장들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미묘한 문제를(이미 제65조에서 언급된)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장상은 공식적인 순명 명령을 내릴 때 신중함과 분별력을 지녀야 한다: "중대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드물게 이를 행사한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순명을 되살리기 위해 하느님께 자신의 의지를 바친 살레시오 회원은 보통 때에는 공식적인 명령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살레시오 회원은 자신의 내적 열정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찾는다.


돈 리날디에 따르면 살레시오 회원의 순명은 "장상이 굳이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을" 돈 리날디, 회헌 인가 50주년에 부쳐, 의사록 23, 1924. 1.24, 179.

정도로 완벽하다. 그러나 회원들은 모두 공동체와 젊은이들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


무엇보다도, 본 조항에 나오는 교회법적 내용들에는 앞 조항들 안에 매우 잘 표현되어 있는 근본적 사실이 담겨 있다: 살레시오 회원은 순명을 서약함으로써 자유롭고 기쁘게 자신을 내놓으며(회헌 65, 67 참조), 젊은이들의 구원을 위해 에수를 본받아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원의를 기꺼이 찾아 실행한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당신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거룩한 순명 서약으로써

우리의 자유를 봉헌하도록

당신의 성령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셨나이다.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와 젊은이들의 선익을 위해

우리들 가운데서 당신을 대변하는

우리 형제들에게 겸손되이 복종하고

우리 회헌을 충실히 준수하면서

그것을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희생으로 삼아 생활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합니다.




69 조 개인적 자질과 순명




각자는 공동사명의 봉사에 자질과 능력을 바친다.


장상은 공동체의 도움을 얻어 이 자질을 식별하고 발전시키며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는데 특별한 책임을 진다.


만일 애덕과 사도직의 구체적 필요성 때문에 개인의 합법적인 계획이나 원의의 희생이 요청된다면 회헌은 언제나 그보다 상급권위에 호소할 수 있으나 순명의 요구에 따라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공동체 내에서 부여받은 것 이외의 임무나 직책을 맡을 때는 합법적인 장상의 승인을 요한다



1. 교회법 671 참조.






순명하는 개인과 관계된 이 세 번째 조항은 개인의 재능 발휘와 순명 고유의 임무들을 조화시키는 문제를 다룬다.


이 주제의 전개 과정에는 신앙 안에서 명백히 식별되는 이중적 고찰노선이 있다: 개인적 능력과 재능들은 사명에 대한 봉사의 질을 크게 높여 준다. 그러나 공동체나 젊은이들의 선익을 위해 그것들이 희생되어야 할 특별한 요구나 여건이 있을 수도 있다.




개인의 재능 발휘와 순명



처음 두 단락은 그리스도의 구원적 순명에 참여하는 살레시오 회원의 순명은 효과적인 포기를 암시하기는 하나 개인의 재능의 희생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각자는 공동사명의 봉사에 자질과 능력을 바친다"고 규칙서는 말한다. 정상적인 성소 발전 과정상, 순명은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재능에 반대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발휘하며, "공동사명에 봉사하기 위해" 그것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제22조에서 얘기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각자 자기 성소에 응답하기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개인적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실 이러한 재능들(자연적 재능과 은총의 선물들)은 살레시오 수도회 안에서 당신을 섬기라는 주님의 부르심의 표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돈 보스코가 통일된 조직체를 형성하여,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거대하게 보이는 규모의 사업들에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 각 형제회원들의 재능을 어떻게 선용했는가를 볼 수 있다. 그는 회헌 서문에서 장상들이 형제회원들에게 보여 주어야할 관심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는 가운데 *rendiconto(면담)에 대해 얘기한다: "수하 사람들은 장상에게 마음을 열고… 장상들은 회원들의 육체적 정신적 역량을 알게 되고 따라서 적당한 일을 맡길 수 있게" 돈 보스코, 회헌 서문, 면담과 그 중요성: 1984년 회헌 부록 221쪽 참조.

된다.


본문은 "공동체의 도움을 얻어" 회원들의 자질을 식별하고 발전시키며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해야할 장상들의 책임에 대해 강조한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자질들"은 태도나 자연적인 능력 뿐만 아니라 공동선과 보다 풍부하고 충실한 사도적 봉사를 위해 내어 놓는 성령의 "특별한 선물들"도 포함한다는 것을 명백히 해두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그것은 사도 바오로가 얘기한,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주어진 참으로 개인적인 "카리스마"이다.


장상의 책임과 공동체의 책임은 교회적 본질의 원칙 뿐만 아니라 심리적 고찰들에도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살레시오 회원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편안함을 느끼고 전반적인 사도적 사업에 적절히 공헌해야할 교육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의 영향력과 노력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의 가장 훌륭한 재능들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카리스마들에 빛을 비춰주고 그것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의 발전을 도모하며 그것들의 적절한 사용을 조정하는 장상의 의무는 특별히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이해된다: 본문은 참된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본문은 이러한 카리스마들이 공동선을 위해 통제되고 공동체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봉사 안에서 개발되어야 한다는 염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 문맥 속에서 원장의 의무들에 대해 얘기하는 가운데 회헌의 원칙들을 실제적인 지침들로 환원시키는 일반 회칙 제173조가 삽입되어 있다: "원장은 돈 보스코가 원하신 가족 정신대로 형제회원들의 공동책임과 공동협력을 구체화할 것이다. 공통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건전한 자유의 분위기 안에서 개인의 소질과 재능을 발휘하도록 조장할 것이며 각자의 책임분야를 존중할 것이다."


마지막 의견: 이미 얘기했듯이, 규칙서는 이러한 카리스마들을 식별하고 개발함에 있어서의 전체 공동체의 책임에 대해 지적한다: 공동체는 장상이 자신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도록 장상을 도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원의를 공동으로 찾는 과정상의 임무요, 각 개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재능들을 통해 드러나는 임무이다. 우리는 사명 완수가 일차적으로 맡겨진 사도적 공동체의 특징인 형제적 나눔과 책임있는 참여의 요건들을 순명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회헌 44, 51, 66, 123 참조).




순명은 개인적 계획의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조건들 속에서 수도자의 순명에 대해 고찰한 뒤 본문은 그리스도교 순명 교의를 이번에는 마음을 동요시키는 측면에서 제시한다. 개인적 재능 개발(, 공동체에 의해 수행되는 사도적 봉사)을 정당화 시키는 성서의 말씀들(그리고 우리에게는 돈 보스코의 말씀들과 모범들)이 때로는 개인의 재능 희생을 정당화 시킬 수도 있다. 개인의 재능과 계획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있어서 더구나 수도자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오직 하느님의 계획과 원의 뿐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원의는 "애덕과 사도직의 구체적 필요성"을 통해 드러난다고 규칙서는 말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명을 위해 포기를 명해야 할 때의 장상의 미묘한 마음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특별총회의 문헌은 "개방적이고 인내로운 대화"에 대해 그것은 반드시 장상의 식별을 수반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의 선물들 내지 은사들에 관하여, 특히 로마서 12, 6 이하와 1고린토 12 참조.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 중에서는 교회 4, 7, 12, 30: 증거 28도 참조: 관계 12.

...? 특별총회 640-641 참조: 증거 28에서 "양심과 순명"에 관한 바오로 6세의 고찰도 참조.



회원 역시 자신에 관한 하느님의 원의를 발견해 내려는 식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만일 장상의 명령이 주님의 원의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경우, 규칙서는 교회의 뜻에 의거하여 그에게 "상급 권위에 호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본문이 실제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순명(참된 순명일 경우) 아래 수도자에게는 언제나 기꺼이 포기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도자 곧 살레시오 회원은 어떤 상황에서 순명이 고통스럽더라도 결코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명을 되살려 자신의 원의를 하느님께 맡긴다. 그러므로 그의 좌표점은 성부의 원의에 자신을 온전히 일치시키기 위해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할 영광 즉 자기 실현의 길을 포기한 예수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이시다"(요한 4,34: 8,54). 그분은 당신 제자들에게 바로 이것이 그들이 걸어야할 길이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오 16,24).


하느님의 계획에 순명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바램과 상충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합법적인 어떤 열망이나 개인적 계획의 실현을 방해할 수도 있다: 어떤 여건에서는 그것은 우리가 인간의 "권리"라고 부르는 것과 모순될 수도 있다.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시킴에 있어서 순명은 때로 십자가의 패배처럼 패배로 여겨질 수도 있다! 포기의 순간(외견상의 패배의 순간)이야말로 순명하는 사람에게는 진리의 순간이다. 우리의 아버지 돈 보스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모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 자신의 원의를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735.



본 조항은 마지막 단락에서 제시된 원칙들의 응용과 관계된 실제 규범에 대해 교회법전을 직접 참조한다: 공동체의 계획과 관계 없는 일에서 비롯된 우발적인 임무나 직책을 맡는 경우에는 합법적인 장상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장상은(공동체의 도움을 얻어) 그러한 임무들에 의한 봉사를 공동체의 교육적 사목적 사명에 비추어 평가한다.


순명은 공동체의 계획의 일부이며, 주께서 우리의 성소실현을 위해 우리에게 부여하신 모든 재능들은 공동사명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회헌 44 참조)는 점은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한다.

교회법전 671조는 이렇게 말한다: "수도자는 합법적 장상의 허가 없이는 소속회 밖의 직무와 직책을 맡지 말아야 한다."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장상들과 그들의 명령에서

당신의 사랑의 계획의 표지들을 보게 해 줄

분명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소서.

당신의 뜻을 따라

우리의 바램과 개인적 관심을

기꺼이 희생하며 성장하여

동료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어

당신의 아드님을 더욱 닮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70 조 장상과의 면담




돈 보스코의 당부에 충실히 따라 각 형제회원은 형제적인 면담을 통해 자기 장상과 자주 만난다.


이는 당사자의 선익과 공동체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특혜적인 순간이다.


회원은 면담시 자신의 삶과 활동에 대해 말하며, 원한다면 자신의 양심 상태에 대해서도 말한다.






본 조항은 형제회원과 그의 장상 간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임과 동시에 공동체의 성장에도 큰 도움을 주는, 살레시오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을 다루고 있다. 친근한 대화란 주제가 최근의 모든 총회들의 분석과 고찰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특별총회는 전체 수도회로부터 의견을 수렴한 뒤 그 회헌 조항에 대한 첫 개정 원고를 제출했다는 것을 특히 명심해야 한다. 21총회는 그 주제를 더 분석하여 일반회칙에다 돈 보스코의 회헌 서문의 근본 내용을 표현하는 새 조항을 도입했다(21총회 435-436 참조). 22총회는 면담의 목적과 내용을 더욱 더 완벽하게 정의함으로써 회헌 회칙 개정을 마무리 지었다.

: 특히 살레시오적 순명의 문맥 속에 그것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담겨 있다. 그것은 공동체 생활을 육성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나, 돈 보스코에게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그 뒤 회헌 판본에는 언제나 순명에 관한 장에 장상과의 면담에 관한 조항이 삽입되었다: F. MOTTO, p.96.

전통을 고려해 보거나 친근한 대화는 하느님의 원의를 식별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쓰이는 도구라는 점을 생각해 보거나 여하튼 그것을 본 편에서 다루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되었다.


본 조항은 짧다. 그러나 본 조항은 1972년 이전에 존재했던 회헌의 훨씬 더 긴 두 조항들을 요약한 것 1966년 회헌, 47- 48조 참조.

이라서 그 내용은 풍부하다. 우리는 본 조항의 두드러진 특징들을 부각시키려 노력할 것이다.

전형적인 살레시오적 영적 도움



본 조항은 친근한 개인적 대화의 실천 근거를 창립자의 가르침과 실천에서 찾는 중요한 언명- "돈 보스코의 당부에 충실히 따라"-으로써 시작된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일러 살레시오 정신의 특징적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창립자께서 누누히 강조하셨던 실천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그것은 "살레시오 집들의 근본 규정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0458.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훌륭한 질서와 도덕성의 열쇠"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1331.

였고, 그러기에 장상이 가장 큰 열성을 쏟아야할 의무였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1323, 331: 10454: (이태리어판) 101118: (영문판) 1244-45.



이미 최초의 회헌 초안에서 돈 보스코는 형제회원이 아무 것도 숨김없이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야할 장상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다룰 조항을 계획했었다 1858년 회헌 제3장 제7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장상을 크게 신뢰하고 장상에게는 아무런 마음의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그가 요구하거나 필요하다고 느끼는 때는 언제나 그에게 양심을 열어 보여야 합니다." 1875년 회헌에서는 그 조항(34)이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장상에게 신뢰를 두십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도회의 주요 장상들에게 자신들의 외적 생활에 대해 때때로 얘기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 때에 장상들 앞에 공공연히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규칙서를 거스른 잘못과 덕행에 있어서의 발전을 솔직하게 털어 놓으십시오. 그러면 그는 충고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적절한 훈계도 받을 것입니다"(F. MOTTO, p.96-97).

: 그것은 특히 "외적 생활"에 관한 내용이 몇군데 집중적으로 변경되었던, 1874년 사도좌로부터 인가받았던 본문에서 다시 한번 발견된다. 그러나 살레시오 생활의 이 점에 관한 돈 보스코의 진짜 생각을 알아내려거든 1877년에 회헌 제2판 서문 중 " 'rendiconto'(면담)와 그것의 중요성"이란 제목을 붙인 부분에서 돈 보스코가 직접 쓴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내용은 실제적인 세부 묘사를 넘어서서 장상에 대한 일정한 신뢰에 대한 찬가로서 개인적인 대화의 본질과 그러한 대화시에 형성되어야 할 분위기를 서술하고 있다.


본 조항의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신뢰"라는 단어는 대화에 필수적인 살레시오적 분위기를 잘 묘사한다: 그것은 사실 형제회원들과 그의 장상 간의 이러한 만남에 대해 특별총회가 부여한 명칭 - "형제적 면담" -에 의해서도 강조되었다. 이것은 확실히 친구들 간의 단순한 대화와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동체의 생활과 사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형제와 그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신뢰하고 있는, 돈 보스코를 대변하는 형제와의 만남이다. 한편 형제회원의 신뢰를 받고 있는 장상은 이미 말한 바대로(회헌 55, 65 참조) "친구요 형제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는 회헌 본문의 멋진 정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특혜적인 순간" -를 이해할 수 있다.




형제적 대화의 목적과 잇점



돈 보스코는 당시에는 'rendiconto'라 불리웠던 대화에 대해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대화에서 얻어지는 두 가지 주요 잇점들을 언급하면서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부여했다. 회헌은 짧게, 그러나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우리 아버지의 사상을 요약하고 있다: 살레시오 회원은 "당사자의 선익과 공동체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자기 장상과 만나기를 좋아한다.


첫 번째 목적은 형제회원 개인의 "사적인 이익"이다. 돈 보스코는 자신이 직접 쓴 회헌의 서문에서 면담은 "각 회원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한다고 일반적으로 말한 다음, 계속해서 그것의 수많은 잇점들을 나열한다: "수하 사람들은… 내적 고통을 덜며 자기 의무 수행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시킬 수 있고, 장상들은 그 모든 불쾌한 일이나 불만이 없도록 필요한 것을 미리 살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적당한 일을 맡길 수 있게 되며… 또한 솔직하고 겸손하게 면담을 잘 한다면 마음에 큰 위로를 얻고 덕의 진보에 큰 도움이(된다는) 것을 모든 형제들은 잘 알아 두십시오…" 돈 보스코 회헌 서문, 221.



두 번째 목적과 거기에서 얻어지는 잇점은 "공동체의 원활한 운영"이다. 돈 보스코는 다시 이렇게 쓰고 있다: "장상들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수도회 전체에 유익한 쪽으로 보살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그들에겐 수도회 전체와 회원 각자의 선익과 명예에 대하여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 보스코 회헌 서문, 223.



장상들이 형제회원들을 더 잘 알게 되면 일차적 책임을 완수하는 데에 큰 도움을 얻는다. 형제회원 역시 자신의 면담이 왜 장상과 전체 공동체에 대해 실제적인 봉사가 되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면담 내용



이것은 본 조항의 셋째 단락에 표현되어 있다: "회원은 면담시 자신의 삶과 활동에 대해 말하며, 원한다면 자신의 양심 상태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렇게 규칙서에 의해 면담 내용의 일부가 진술되고 있으며, 우리의 전통에 따라 그것은 형제회원의 생활과 활동에 관한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일반회칙의 한 조항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그것은 돈 보스코가 직접 작성한 회헌 서문의 논거를 요약한 것이다: "신뢰의 분위기 안에 각 형제는 자주 원장과 만나 그에게 자신의 건강상태, 사도적 일의 경과, 수도생활과 형제적 애덕 안에서 만나는 어려움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알릴 것이다."(일반회칙 49) 이것은 면담이 형제회원의 구체적 생활과 관계된 모든 것 즉 개인 생활, 공동체 생활, 사도적 생활을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대화를 풍부하게 하고 그것을 실제적인 성장 도구로 쓰기 위해서는 책임감과 개인적인 창의성이 요구된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런 다음 규칙서는 형제회원의 자유에 맡겨진 또 다른 항목을 지적한다: "양심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성령 안에서의 내적 생활과 관계된 것으로서, 1966년 회헌 제46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덕행에 있어서의 진보와 양심상의 의심과 걱정 근심" : 장상은 각 형제회원들이 "개인적 성소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헌은 특히 이 방면에서의 각 개인의 자유가 보호받기를 원한다.




면담의 빈도



장상과의 면담의 빈도에 대해 특별총회 이전의 회헌들은 살레시오 회원은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 장상과 만나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는 이미 돈 보스코가 그의 회헌 서문에서 권장했던 규정이다. 회헌에는 나중에 "매달 한번"이라는 어구가 첨가되나(1923년판), 그것은 회헌 서문의 돈 보스코의 암시를 토대로 이미 받아들여져 활용되었다.

특별총회와 제21차 총회와 제22차 총회는 그 문제를 형제회원의 내적 자유에 맡겼다. 위 총회들은 어떤 정확한 빈도를 규정하지 안고 회헌에서나 회헌과 상응되는 이미 인용된 회칙 조항에서나 "자주"라는 간단한 부사만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본문이 형제회원과 그의 장상 간의 정기적인 만남의 중요성을 조금도 경감시키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기적인 만남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적절한 리듬을 맞추는 것은 회원 당사자와 그의 장상의 책임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총회들이 초기 양성 단계의 젊은 회원들에게 있어서 면담이 지닌 특별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에 주목할 수도 있다: 사실 그들에 대해서는 일반회칙 제79조에 더 정확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일반회칙 제79조는 "1" 면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간단하게 더 고찰해 봄으로써 끝을 맺고자 한다.


우선 면담은 "대화"이기 때문에, 그 성공 여부는 형제회원에게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장상에게, 장상의 인간적 영적 책임에, 장상의 준비자세와 친절에, 장상의 능력에 의해 더 좌우된다: 이미 인용한 바 있는 일반회칙 제49조는, 면담은 원장의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임을 상기시킨다.


둘째로 면담은 형제회원의 생활에 매우 유익한 친밀한 대화들이 존재하는 형제적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장상과의 면담이 다른 형태의 대화와 통합된다는 사실이 면담의 중요성을 감소시켜서는 안된다. 이것의 큰 의미는, 살레시오 사명의 효과적 수행에 매우 필요한 개인의 발전과 형제적이며 사도적인 공동체의 창조를 위해 그것의 가장 진정한 측면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우리에게 자녀다운 신뢰의 정신을 불어 넣으시고

돈 보스코가 바랐던 대로

우리로 하여금

장상과의 잦은 면담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도록 하시어

젊은이들 가운데서

당신 구원의 효과적 표지가 되기 위해

당신의 성 가족의 모범에 따라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늘 공헌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71 조 순명과 십자가의 신비




"고행을 하는 대신 순명을 하시오라고 돈 보스코는 우리에게 말한다.


순명이 때로는 우리의 독단적이며 이기주의적인 경향에 상반되거나 어려운 사랑의 시련을 요구할 수 있다. 이 때야말로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²를 바라보는 순간이다.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³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는 우리에게 순명하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ù



1. 전기 1389.

2. 필립 2,8. 전기 4233 참조.

3. 마태 26,42.

4. 요한 12,24 참조.






본 편의 마지막 조항인 본 조항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본 편의 첫 조항으로 되돌아가 순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다시 한번 더 바라보게 한다. 이렇듯 살레시오적 순명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당신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지상에 오신"(회헌 64) 하느님의 아들의 신비로 시작되어 우리 안에서 연장되는 빠스카 신비의 효과적 결과들에 대한 관상으로 끝을 맺는 식으로 제시된다.


이렇게 하여 회헌은 살레시오 회원에게 순명이 "사랑의 시련"을 요구할 지도 모를 순간에도 그의 순명의 궁극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순명과 고행



본문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순명의 고행적 측면에 대해 진술한 구절로써 시작된다: "고행을 하는 대신 순명을 하시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368.

우리의 창립자는 우리로 하여금 사도로서의 우리의 조건에 가장 적합한 "고행"의 참 형태를 순명 안에서 보라고 권한다. 이미 제18조도 우리 정신의 특징적 모습들 가운데에 "특별한 보속행위"를 찾기에 앞서 "일상의 요구와 사도적 생활에 따른 포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시켰다: 이것이 여기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순응하는 태도를 전제로 하며 참된 행복의 정신에 따른 마음의 정화와 내적 초연 및 극기를 요구하는 순명을 실천하는 데에서 특별하게 구체화된다. 특별총회 642 참조.



이것은 하느님을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우리 모두가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독단과 이기심, 우리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아 버리는 독단과 이기심을 버리고 신비로운 싸움에서 그분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참으로 철저한 고행 과정이다. 우리의 모든 계획과 활동이 더 이상 우리 자신만의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분의 것이기도 하다는 견지에서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고행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도 예수처럼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꺼이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성부의 진정한 ""이 된다.


돈 보스코는 어려운 상황들에서 그가 보여준 교회적 순명의 모범을 통해,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십자가의 순명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회헌 서문에서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순명을 극히 어려운 일에서도 순명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명하신, 우리 구세주의 모범을 따라야 하며, 우리도 이처럼 목숨까지 바쳐 순명해야 할 것입니다." 돈 보스코, 회헌 서문, 1984년 회헌 부록, 209.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제71조의 중심 부분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사실 그리스도의 순명의 신비를 극명하게 계시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 8,28).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신 순종하는 성자를 완벽하게 계시한다: 동시에 그것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요한 3,16) 성부의 한없는 사랑을 계시한다.


우리의 순명은,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신 예수의 이러한 순명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바오로 6세께서는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신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수도자들에게 있어서도 십자가는 가장 높은 사랑의 증거가 되어야 하겠다." 증거 29.



본문은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선포한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다: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오 26,42). 복음서는 예수께서 자신이 겪게 될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주저없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기도에서 자신을 성부의 뜻에 온전히 맡겼다. 구세주의 모범은 우리가 어떤 시련에 처해 느끼게 될 난감함과 회피하고픈 심정에 맞선 열렬한 기도는 하느님의 원의의 신비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해주며 그럼으로써 우리 사랑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승리의 순명


그러나 규칙서는 순명의 열매들이 때로는 드러나 있지 않은채 숨겨져 있을지라도 이러한 순명의 신비가 아주 풍요롭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을 새싹이 되고, 언뜻 보기에는 패배처럼 보이는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을 가져온다. 바오로 6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극기와 즐거움, 희생과 관대한 마음, 규율과 영신적 자유 사이에 신비로운 일치점이 있지 않는가?" 위와 동.

예수의 순명과 일치된 순명은 우리를 인간을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도구로 만듦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악의 세력을 이겨내는 신앙의 승리를 체험케 하며 우리를 구원 사업에 결합시킨다. 우리의 구원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의 순명이 지닌 구원적 가치를 더 다루기 위해서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 구원의 은총, 13.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증거이다. 신적인 것은 무엇이나 거부하는 성향을 지닌 세상, 권력욕에 사로잡힌 세상, 손에 잡히는 확실한 결과에만 관심을 쏟는 세상 안에서(회헌 64 참조), 순명하는 살레시오 회원의 관대한 자기-증여는 특별한 중요성을 띤다: 젊은이들에게 그것은 신앙 안에서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사랑을 통해 자신을 내어 주는 것보다 더 큰 자아-실현은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초대이다.


끝으로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마리아를 생각해 보자. 성모님은 침묵 속에서 자신을 당신 아드님의 희생에 일치 시킴으로써, 당신이 수태고지 순간부터 드러낸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철저한 순응의 신비를 완성시킨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돈 보스코에게서와 꼭 마찬가지로 살레시오 회원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성부로부터 받은 사명에 순응하게 하는 지도자요 모범이시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살레시오적 순명이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참여임을

살아 있는 신앙으로써

언제나 믿게 하소서.


어려울 때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로 하여금

순명하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게 하시고,

또한 깜깜한 땅속에 죽어있는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젊은이들에게 증거하는

우리를 도와 주게 하소서.




















우리의 청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 19,21).






회헌 본문에는 예컨대 예수의 선택 모범(2고린토 8,9: 회헌 72), 물질적인 것들이 아닌 하느님께 대한 신뢰(마태오 6,25 이하: 회헌 72), 청빈의 참 행복(마태오 5,3: 회헌 75)과 같은 성서 인용문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특히 소위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이는 그것을 언제나 청빈에 대한 복음적 권고와 결부시켜 온 2000년 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의 표시로서 본 편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주제가 되고 있다.


위의 본문은 청빈의 진정한 복음적 의의에 대해 본질적인 모든 요소들을 궤적하는 종합문이다: 삶의 완전한 실현("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철저한 포기("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사랑으로 재화를 사용함(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한 포기의 지극히 행복한 종말론적 결말(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고 그와 운명을 같이 하는 일에 그러한 포기를 철저히 종속시킴(그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 끝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젊은이라는 점을 성 마태오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19,20). 다시 한번 청빈에 대한 선택이 그리스도의 대의 즉 메시아적 나라와 관련지어 해석되고 생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이 "sequela Christi"(그리스도를 따름)의 진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복음 이야기(마태오 19,16-29)에서, 우리는 의혹과 난처함과 나아가 거부(부자 청년의 반응: 19,22)에 주목한다: 바꿔 말하자면 청빈을 선택하는 것은 분명하거나 강제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제자들의 질문에 주목하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9,25). 예수께서는 그분의 복음의 근본 성격을 누그러 뜨리기 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지탱될 수 있는가를, "무슨 일이든 하실 수"(19,26) 있는 은총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은총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베드로 등의 결정에 이미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고 축복한다(19,27-29). 이렇게 함으로써 에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려운 원칙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실천적으로 표현하도록 하기 위한 용기있고 적절한 모범을 제공한다.


한눈은 그리스도께 한눈은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고정시키고서 청빈을 생활해야 한다는 돈 보스코의 간절한 권고(회헌 72, 73, 79)는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성서적 유산을 확실히 보증한다.



























72 조 우리 청빈의 복음적 의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관대하신 지를 알고 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고 그분이 가난해짐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


철저한 복음적 삶에로 불리운 우리는 "가난하게 태어나서 온갖 궁핍 가운데 사시고 십자가에 헐벗은 채로 죽으신 구세주를 따르기로 선택한다.


우리는 주님의 권고를 받은 사도들처럼 세상 재물의 걱정과 고뇌에서 해방되고³성부의 섭리하심에 신뢰를 두며 복음의 봉사에 헌신한다.



1. 2고린 8,9 참조.

2. 1875년 회헌 24 참조.

3. 마태 6,25 이하 참조.






순명하는 살레시오 회원에 대해 얘기할 때, 살레시오 회원은 "복종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속하시고 성화하신" 수도 1.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한다는 점이 가장 먼저 제시되었듯이 살레시오 회원의 자발적인 청빈 역시 그것의 복음적 원천 즉 우리의 구세주 이시며 스승이신 분의 모범 및 가르침과 즉각 결부된다.


실상 "왜 살레시오 회원은 청빈 생활을 선택 하는가?" 라는 질문은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난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에, 왜냐하면 예수께서 청빈을 그분의 실존의 동반자로 택하셨기 때문에,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보잘 것 없는 수단을 사용하셨기 때문에라는 대답만을 첫째가는 근본 대답으로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가난, 특히 베들레헴과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가난에 대한 묵상은 그리스도교적 청빈 속에 숨겨져 있는 구원의 신비를 설명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실제적인 유일한 동력이다. 하늘나라를 위한 청빈은 예수께서 그것을 실천하셨고 그것을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로 만드셨기에 가능하다.


회헌 제72조는 이러한 생각을 전개시키며 사도들의 모범을 그리스도의 모범에 결부시킨다.




더할나위 없이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름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지키는 청빈"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표현으로써 수도자의 청빈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위 교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로이 바치는 신앙의 응답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일부러 선택한 것이 아닌 견뎌내야할 어떤 것이다. 반면 수도적 청빈은 인간적 동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방하기 위해 택한 자발적인 선택이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는 성 베드로의 말씀을 해설하는 가운데 성 예레미야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외 많은 사람들이 부를 경멸해 왔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기 위해'라는 이유이며, 사도들과 신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살레시오 회원의 삶과 사명에 있어서 청빈이 지니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의의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 회헌은(우리가 지금 검토하고 있는 조항의 첫 단락과 둘째 단락에서) 성 바오로와 우리의 창립자 돈 보스코의 말씀을 인용한다.


회헌이 인용하고 있는 성 바오로의 말씀은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이 인용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토 8,9). 바오로는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이 지닌 가난의 조건을 완전히 떠맡으신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의 신비를 강조한다(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얘기된 겸손의 깊이를 여기서는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깊이로부터,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같은 완전한 가난으로부터 인간의 구원 가능성, 즉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으며 하느님의 신성으로써 풍요로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이러한 신비에 비추어 우리는 예수의 벗이 택한 가난은 그의 소유물을 없애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에 의해 풍요로와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들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그것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일지라도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넘치는 사랑으로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된다.


복음적 청빈의 근간이 되는 "sequela Christi"는 돈 보스코가 그의 회헌 서문에서 사용한 단순한 표현에 의해 더욱 보증받는다: 우리는 "가난하게 태어나서 온갖 궁핍 가운데 사시고 십자가에 헐벗은 채로 죽으신 구세주"를 따르기로 선택한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그분의 구원의 신비들, 특히 십자가의 신비가 모든 것을 버리는 표시로 제시된다: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그러한 선택이 맡겨져 있다. 위에서 말한 회헌 서문에서 돈 보스코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33).


규칙서에 서술되어 있는, 청빈에 대한 우리의 선택의 복음적 모습은 돈 보스코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특히 맘마 말가리다께서 요한에게 들려주셨으며 나중에 그의 지속적인 계획이 되었던 말씀의 메아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아무도 걱정하지 말고 너의 성소를 따라라… 하느님이 첫 째 시단다. 나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가난하게 태어나서 여지껏 가난하게 살아 왔고 또 가난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수도 13.

...?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21.



복음에 봉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도들을 본받아



수도자들이 하늘 나라를 섬기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복음적 청빈의 구체적인 모범이 되는 이들은,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 안에서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들이 가진 재산과 가족까지도 버리라는 초대를 그분의 입술에서 직접 들은 사도들이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마태오 4,19-20).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마태오 19,27 참조) 열두 제자의 대답에 대한 언급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도적 사명과 직접 관계되며 그러기에 또한 자발적인 청빈이 효과적인 사도직 안에서 차지하는 역할과도 직접 관계되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증거에서 출발하여, 본 조항은 스승의 발자국을 따라 그분이 선포하신 가난의 참된 행복 정신 속에서 살고자 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공통된 세 가지 태도들을 강조한다. 그러한 태도들은 성인들에 의해 다양한 색조로 구현되어 왔다: 또한 그것들은(우리가 다음 조항에서 언급하겠지만) 우리 창립자의 영적 경험을 형성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적 청빈을 사는 사람의 특징인 세상의 재물에 대한 내적 자유의 태도를 들 수 있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선물들을 멸시하기 보다는 세상 재물에 관해 걱정하지 말며(마태오 6,25 참조), 그것에서 초연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의 탁월함을 입증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인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 6,33).


-이러한 자유와 초연함의 태도는 전적으로 성부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한 것이다: 수도적 청빈은 명백한 신앙 행위요, 하느님은 우리의 최고이자 유일한 선이요, 무한한 사랑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는 창조주요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가장 큰 보물이라는 생생한 선포이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본유적인 가난의 조건과 자신이 하느님께 완전히 매어있음을 인식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사랑에 완전히 내맡기며, 이렇게 하여 복음적 청빈은 사랑의 표현이 된다. 돈 보스코 안에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었는지를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성을 지녔던 그는 "하느님의 원조는 기적에 의해서라도 부족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5502.

라고 하느님의 섭리를 한없이 신뢰했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유했다.


-초연한 태도와 성부의 섭리에 대한 신뢰의 태도는 결국 예수와 사도들의 선교 생활의 핵심이었으며 또한 우리들의 특징이 되어야할 복음서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 이어진다. 가난한 이들과 운명을 같이 하셨으며 그들에게 자유의 기쁜 소식을 가르치셨던 예수(루가 17-21 참조)를 따르는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된다. 우리가 본받고자 하는 예수의 청빈에 관하여, 특별총회 586-588.



마리아도 우리의 모범이시다: 성모님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청빈에 대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온 힘을 다하여 구원 계획에 협력하고 사랑의 종들과 도구들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주 예수여,

당신은 부요하셨지만

무한한 아량으로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을 택하셨나이다.

당신의 청빈을 따르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사도들과 우리의 창립자처럼

우리의 선택을 즐겁게 생활함으로써

무슨 일에서나 당신의 섭리에 우리 자신을 맡기어

자유로이 복음에 봉사하는 데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도록

성부께 전구해 주소서.





































73 조 청빈과 살레시오회의 사명




돈 보스코는 엄격하고 근면하며 창의력이 풍부한 삶의 모습으로 형제들을 위하여 관대하게 봉사하고 초연한 마음으로 가난을 살았다.


돈 보스코의 표양을 따라 우리도 지상의 모든 재물로부터 초연하게 살며¹ 교회의 사명과 정의와 평화를 위한 교회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특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교육을 통하여 그렇게 한다.


우리는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여 가난을 증거함으로써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기적인 소유욕을 극복하도록 돕고, 그리스도교적 나눔의 의식을 일깨워 준다.



1. 1875년 회헌 4,7 참조.






회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우리의 수도적 청빈의 튼튼한 기초로 삼은 다음 살레시오 회원에게 그의 삶을 청빈 정신으로 얽어짜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주는 또 다른 원천을 제시한다. 하느님께서 청빈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독창적 방법을 구현시켜 그의 아들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일으켜 세우신 창립자의 모범과 가르침이 바로 이러한 원천이다. 젊은이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해 스스로 정말 가난한 생활을 받아들인 돈 보스코의 경험은, 주님께 충실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얻은 은혜들의 최고 가치를 선포하는 동시에 인간 공동체의 진보의 길에 그 직무로써 동참하는 교회의 증거의 한 부분이다.


75조는 앞 조항에서 간단히 얘기된 바를 전개한다: 복음적 청빈 생활과 교회 안에서 수행되는 젊은이들을 위한 살레시오회의 사명 간의 연계성을 보다 완벽하게 서술하고 있다: 본 조항의 제목("청빈과 살레시오회의 사명")은 이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계성을 설명하기 위해 본문은 돈 보스코의 특징이자 살레시오 회원의 특징이 되어야할 "청빈의 두 가지 구현 형태" 즉 청빈생활의 증거와 동료 인간에 대한 봉사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증거와 봉사는 규칙서의 다음 조항들에 다시 등장하여 보다 철저히 분석될 것이며, 거기서는 그것들의 여러 측면들이 밝혀질 것이다.




돈 보스코: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복음적 청빈 의 증거자



73조는 돈 보스코의 청빈 생활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살레시오 회원의 모범(회헌 21 참조)이신 돈 보스코를 바라본다. 본 조항은 돈 보스코의 두드러진 두 태도들을 종합적이면서도 정확하게 밝힌다: 그는 한편으로는 지상의 모든 재물로부터 초연한 채 섭리에 큰 신뢰를 두고 진정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에 대해 실제적인 사랑을 지녔던 그는 물질적인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그들을 향상 시킴으로써 그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규칙서는 청빈을 창립자의 개인적인 청빈 실천과 관련지어 "고행"의 특징을 띤 초연함에 대한 증거라고 서술한다. 요한이 돈 칼로쏘의 상속인에게 했던 "저는 가난한 편이 더 좋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재화와 돈을 얻기 보다 하늘나라를 차지하겠습니다" 특별총회 600 참조.

...?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162.

란 말로 미루어 보거나 그가 임종 때에 돈 빌레띠에게 "내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좀 살펴 주시오. 돈 보스코는 주머니에 동전 한닢도 없이 죽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끔 죽고 싶소"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8493.

라고 말한대로 돈 보스코의 생애는 그가 하느님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도우심을 얻어 이룩한 바를 바라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탄하게 되는 실제적인 참 청빈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우리는 특별총회의 문헌에서 이러한 내용을 접한다: "우리는 이 청빈의 특징적 표현을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뢰와 검소한 단순성, 모범적 절제, 그리고 금전을 선물이요 선을 행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도록 그를 인도한 절약과 경제에 대한 거의 성스러운 관심에서 발견한다." 특별총회 596.



돈 보스코의 생활 양식(돈 보스코는 이것을 젊은이들을 위해 일하시는 놀라우신 하느님의 도구로 수도회에 물려주었다)"일과 절제"라는 좌우명 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돈 보스코는 수도회의 복된 미래는 청빈의 실천에 달려 있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청빈을 사랑하시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 수도회를 위해 복된 미래를 준비해 왔습니다… 안락함과 편안함에 대한 욕망이 우리 가운데에 자라나면 우리 수도회는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7271-272.


"우리가 가난한 한 섭리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5443: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60 참조.

고도 말하곤 했다.


그러나 청빈 생활에 대한 돈 보스코의 증거는 젊은이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봉사와 밀접히 결부된다: 회헌은 "근면하며 창의력이 풍부한 삶의 모습"에 의해 이러한 봉사가 수행 된다고 말하고 있다. 성인의 생애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젊은이들을 위해 매우 다양하고 인상 깊은 일들을 착수한 돈 보스코의 풍부한 창의력을 쉽게 간파해 낼 수 있다. 돈 보스코는 하느님의 사람이었고 돈으로부터 초연했지만 가난한 소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재화를 얻고 사용하는 법을 알았던, 하늘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군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그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자신의 재능과 힘, 시간, 심지어는 건강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바칠 줄 알았다. 이런 맥락에서도 우리는 그에게 조금 쉬기를 권고했던 사람들에게 들려준 그의 대답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하여 나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자신을 바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8258: 회헌 1 참조.





살레시오 회원: 증거와 봉사라는 교회의 사명에 참여하는 가 난한 사람

창립자의 모범은 그의 아들들에게는 생활 규칙이 된다: 돈 보스코처럼 모든 살레시오 회원은 젊은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잘 봉사하기 위해 세상의 재물로부터 초연해서 살도록 요구받는다. 회헌은 창립자가 직접 쓴 규칙서의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말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마음을 가집시다" 1875년 회헌, 47(F. MOTTO, p.105).

: 그러나 본문은 이러한 종류의 영적 태도로부터 출발하여, 계속해서 살레시오적인 청빈 생활양식이 교회의 사명과 일치된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사명에 자연스럽게 참여하여 공헌하게 해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는 교회의 사명 안에서 이미 언급한 증거와 봉사라는 두 가지 측면들을 발견한다. 한편으로는 교회는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부활의 우위성과 미래의 삶을 선포하며 세상의 가치들이 절대적인 의미를 띠지 못하도록 예방하고 있다.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한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충실하며 현세 활동에 있어서 바른 질서를 보존하고 개인적 내지 사회적 생활 전체가 진복팔단의 정신, 특히 청빈의 정신으로 충만해야 하겠다." 사목 72.



다른 한편 교회는 세상 안에 있으며 세상과 굳게 결합되어 있다. 인류 전체를 구원하러 오신 분의 전언자로서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는 선의를 지닌 사람들의 정의와 평화를 발전시키고 진보시키기 위한 노력에 동참한다: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기쁨이 넘치는 선포는 더 형제적이며 그 결과 하느님의 계획에 더욱 일치되는 인간성을 일으켜야할 의무와 밀접히 결부된다.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에서 우리는 복음선포와 인간 발전 간의 연관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견식있는 표현들을 접한다: "복음선교와 인류발전(개발 또는 해방)이 두 가지 사이에는 밀접한 인연이 있습니다. 인간학적 측면에서 볼 때, 복음화 되어야 할 인간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고 사회적 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존재입니다.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창조계획을 부정과 싸우고 정의를 구체적으로 수립해야 하는 구원의 계획과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복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은 애덕의 관계라고 하겠습니다만 만일 정의와 평화로써 참된 인간발전을 증진 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살레시오 회원들은 우리의 초연한 정신으로 부활의 가치들을 증거하면서 이러한 교회적 사명에 "창의 정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특히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들의 교육자로서의 우리의 능력을 통해 그렇게 한다. 이것은 회헌 제4(특히 회헌 제26-30조와 제31-33조 참조)에 서술된 사명에 대한 봉사와 직접 연관된 우리의 청빈의 "사회적 차원"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을 명백히 밝혀준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가난해진 우리는 우리가 받은 재능으로써, 즉 그리스도 자신의 무한한 구원적 사랑으로써 동료 인간들을 부요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교육사업 안에서의 복음적 청빈의 증거 가치



마지막 단락은 계속해서 청빈정신과 살레시오 사명 간의 연관성을 연구하며 더 나아가 복음서를 따르는 가난한 사람들로서의 우리의 조건과 교육자들로서의 우리의 임무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관계를 탐구한다. 이것은 "물신 숭배"에 미혹된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제62조에서 이미 언급된 시각이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존재"보다 "소유"를 격찬하고 정신을 희생시키는 대신 육체를 내세우며 영적인 것을 배제하고 물질적인 재화를 우선시하는 세상 안에서 살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 우리의 규칙서는 참된 행복의 정신 안에서 청빈을 증거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며 젊은이들이 인생의 가치들을 이해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 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의 규칙서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 성장 수단으로서의 세상의 재물의 참 가치를 인식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이기적인 소유욕을 극복" 하도록 그들을 인도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정의와 사랑을 토대로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재화들이 지닌 형제애적 숙명을 평가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노예상태로부터 물질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소유"를 능가하는 "존재"의 탁월성과 영적인 것들의 가치를 인식시키며, 그들에게 나눔의 능력을 형성시켜 주기 위해 우리의 모범으로써 젊은이들을 교육시켜야할 커다란 책임을 지니고 있다. 본 조항에서 사용된 "그리스도교적 나눔의 의식"이라는 표현은 사도행전에 보도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행전 20,25).






우리 주 하느님,

세상의 재물로부터 초연하며

젊은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함에 있어서

관대하고 창의력이 풍부한

복음적 청빈의 모범을

돈 보스코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의 초연한 마음과 봉사를 본받아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당신 교회의 사명에 참여하게 하소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붙드시어

우리로 하여금

친교 안에서 생활하는 청빈 생활로써

젊은이들에게

소유의 그리스도교적인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게 하소서.










74 조 청빈 서원의 요구




우리는 청빈 서원으로 합법적 장상의 동의없이 물적 재화를 사용하거나 처분하지 않는다.


각 회원은 자기 재산의 소유권 및 다른 재산을 취득할 권리를 보전한다. 그러나 서원을 하기 전에 그 재산에 대한 사용권 및 수익권을 자유로이 처분하고 재산 관리권을 타인에게 양도한다.


회원은 종신서원 전에 민법상으로 유효한 유언서를 작성한다. 심사숙고한 후 하느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는 표시로, 교회법과 수도회 법규에 준해서 소유권을 유보하고 있던 재화를 영구적으로 포기할 수도 있다.






규칙서는 우리의 청빈에 대한 복음적 살레시오적 동기들을 지적한 후 계속해서 각자가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서원할 때 자유로이 떠맡은 개인적 의무들로부터 시작해서 청빈의 실천적 구현을 다룬다.


74조는 주께서 우리더러 관대히 응답하도록 초대하셨던 복음서의 근본적 요구들에서 나온 몇 가지 구체적인 규정들을 제시한다: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오 19,21).




우리는 물적 재화를 자율적으로 사용하거나 처분하지 않는다



첫 단락은 우리의 청빈 서약 문제를 간단한 문구로 요약한다. 그것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교회법전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청빈의 복음적 권고는… 재산의 사용과 처리에 있어서 각 회의 고유한 법규정에 따른 종속과 제한을 수반한다." 교회법 600.

우리들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규정은 우리 전통의 일부이며 창립자가 쓴 본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우리는 1875년의 회헌 제4장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한다: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청빈서약은 어떤 재산이 되었건 재산 소유권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재산 관리권에만 관계된다. 그러므로 본 회에서 서약한 이들은 재산 소유권은 보전하나 관리권과 분배권 및 수익권은 전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1875년 회헌, 41 (F. MOTTO, p.101).



서원 문제에 관한 본문의 진술 방식에 대해 두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다:


1) "우리는 …않는다" : 능동태 동사를 사용한 것은 복음적 청빈이 부과한 한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개인적 희생으로 자발적으로 떠맡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청빈 서약을 실천하기를 원한다는 이유에 의해서만 청빈을 실천해야할 의무가 있다(회헌 72도 참조).


2) "¡¦ÇÕ¹ýÀû Àå»óÀÇ µ¿ÀǾøÀÌ ¹°Àû ÀçÈ­¸¦ »ç¿ëÇϰųª óºÐÇÏÁö ¾Ê´Â´Ù": 이 문구는 이미 말했듯이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들의 근본적 성격을 떠올려 준다. 만일 실제로 우리가 어떤 물적 재화를 처분한다면 그것은 다음 조항에서 더 정확하게 얘기되듯이 공동체 생활의 테두리 내에서 사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장상의 동의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완전한 종속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장상)의 중재를 받아들이며, 우리 삶의 모든 측면 안에서 하느님은 절대적인 주님이시오 선견을 가지신 아버지이시다고 선포한다. 75조에서 알게 되겠지만 하느님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중재를 교묘히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재화의 관리와 사용



본 조항의 둘째 단락은 교회법적인 점들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상술함으로써 청빈 서원의 요구들에 대한 서술을 끝맺는다.


19세기에 수도단체들 안에서 확립되었으며 우리의 창립자도 채택한 관례에 따라(이미 인용된 1875년 회헌 조항 참조), 규칙서는 청빈 서원이 민법과 사회 앞에서 우리의 세습 재산의 소유권 재산에 대한 철저한 지배와 관련하여 "단순서약들" 중 수도자의 청빈서약 문제가 등장한 것은 18세기부터 였다. 로스미니가 창설한 애덕 수도회 규칙서를 인가한 성좌의 1839년의 "사도적 서한"들에서 해결책이 발견된다. 전년도의 "super statum regularium" 훈령에 이어 1858년의 교황의 포고문은 청빈서약이 재산권을 완전히 금하는 것은 아니다는 원칙을 실제적으로 규범화 시켰다. 돈 보스코는 첫 회헌 원고에서부터 이러한 노선을 따르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사용하고자 했다: "본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민법상의 권리를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1858년 회헌 22). 그러나 이것은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성좌로부터 인가받지 못했다. 이점에 관해 F. MOTTO, Constitutiones Societatis S. Francisci Salesii, Fonti Letterarie, RSS 3, 1983, 367-369.

및 다른 재산을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금지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재산 관리권과 사용권에 대한 실제적인 포기를 확실히 보증하기 위해 수도자가 따라야할 조건들을 지적한다. 재화에 대한 철저한 소유(재산 소유권과 취득권)와 재산 사용권 및 처분권 간의 구분이 도입된다: 서원은 특별히 후자에 직접 관계된다.


본 조항에서 지적된 교회법적 규정들(특히 서원 전의 재산 관리권 처분 뿐만 아니라 사용권 및 수익권 처분 의무와 유언서 작성 의무)은 일반 회칙 제51-52조에 더 상세히 서술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재산권을 포기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에 대한 가장 큰 혁신은 우리의 재산에 대한 근본 소유권을 일정 조건하에서 포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셋째 단락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규정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제안되었다.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에서 공의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도회는 그 회헌에 의해 회원들이 벌써 취득하고 있거나 혹은 취득할 가능성이 있는 유산을 포기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다." 수도 13.

이는 모든 것을 버리라 하신 그리스도의 초대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응답이며, 특별총회는 그것을 받아들여 우리의 생활 규칙서에 삽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경우 위의 일반적인 인명에는 우리의 특별법에 속하는 세 가지 조건들이 뒤따른다. 첫째, 재산권에 대한 영구적인 포기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이며, 서원한 회원에게 은총의 영감 뿐만 아니라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을 전제로 한다(이 때문에 일반 회칙 제53조는 종신 서원 후 적어도 10년이 경과한 후에라야 확정적인 포기가 가능하다고 상세히 밝히고 있다). 둘째로 수도회 편에서는 총장의 승인이 요구된다(회칙 53 참조). 그러나 특히 그 의미가 명백해야 한다: 재산권에 대한 영구적인 포기는 하느님께 대한 의탁과 그분의 부성애에의 완전한 의존을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해 복음적인 이탈 정신 안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일종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것이며, 이미 그것의 모든 측면들을 생활한 청빈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부어주시고

사랑으로 불타는 초연한 마음을 주시어

우리의 청빈 실천이

유일한 참 선이신 당신을

그저 외적으로만 찾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성애를 신뢰하며

모든 구속으로부터 우리를 해방 시키는 것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동료 인간들에게 봉사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75 조 청빈에 대한 개인적 의무




우리 각자는 자신의 청빈에 대해 첫째가는 책임자이기에 매일같이 가난한 생활수준으로, 자신이 약속한 초연한 삶을 산다.


물적 재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장상과 공동체에 종속되어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허락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난해야 함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님을 인식한다


사도적 충실과 관대함을 직접 위협하는 안락과 편리라는 욕구에 점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한다.


자신의 가난한 신분이 불편과 고통의 원인이 될 때주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약속하신 행복³에 참여할 수 있게 됨을 위안으로 삼는다.



1. 수도 13 참조.

2. 1875년 회헌(서언) 26쪽 참조.

3. 마태 5,3 참조.






본 조항은 앞 조항의 내용에 보다 깊이 파고들어 그것을 완성시킨다: 서원에 관한 교회법적 내역은 사실상 보다 넓은 범위의 덕행과 복음적 청빈 정신 속에서 살펴져야 한다.


짧은 네 단락들은 그리스도의 청빈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의 네 요소들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두 가지로 분류하여 탐구할 것이다.




청빈에 대한 개인적 수락


첫째와 둘째 단락은 가난한 생활을 받아들여 효과적으로 생활하는 것과 관련된 개인적 책임을 강조한다. 복음적 청빈은 제72조에서 얘기된 바대로 가난을 택하셔서 그것의 극단적 결과들을 받아들이신 그리스도("스스로를 낮추셔서 종의 신분을 취하신")께 대한 점진적인 동화과정이다. 이것은 단순히 서원을 했다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구체적으로 그 결과들 내지(돈 보스코의 표현대로라면) 청빈의 "벗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회헌 서문에서 돈 보스코는 성 베르나르도의 말씀을 인용한다: "가난한 자로 일컫어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도 가난의 결과들을 싫어하는 이들이 있다"(1984년 회헌 부록 212).



살레시오 회원은 수도회 안에서 서원할 때(그리고 그 문제에 있어서는 모든 수도자들도) 그에게 침식과 옷과 일정한 경제적 안정을 보증 하는 조직 속에 들어간다. 그는 수도회의 보호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지극히 자율적인 방식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청빈을 생활한다. 살레시오 회원은 청빈 상태를 살아가는 근본 수단인 공동 생활에 위배됨 없이(이것은 다음 조항들에서 다뤄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청빈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한다면 청빈이(그 밖의 다른 덕들과 꼭 마찬가지로) 참된 것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우침 받는다. 살레시오 집이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생활 조건들은 고무적이나 불행히도 그것들은 간혹 편리하고 안이한 생활 추세를 예방하지 못한다. 여하튼 살레시오 회원은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비추어 개인적으로 자신의 청빈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신이 보다 충만하고 관대한 자기-증여를 위해 시대와 장소로부터 도전받을 수 있을 상황들과 긴박한 요구들과 호소들의 한가운데서 참으로 "자신이 약속한 초연한 삶"을 살고 있는지 검토하도록 요구받는다. 복음적 청빈은 습관이 아니고 각자의 실존 속에 구현된 생생한 사랑이다.


돈 보스코가 그의 회헌 본문에서 지적했던 근본태도가 명백히 떠오른다: "우리 수도회 안에서의 청빈 서원의 준수는 본질적으로 세상의 모든 재화로부터의 초연에 있다." 1867년 회헌, 51: 1875년 회헌 47 (F. MOTTO, 100 & 105).



이러한 사상 노선에 따라 회헌은 "수락"에 대한 법적 접근으로부터 살레시오 회원을 보호한다. 74조는 살레시오 회원은 장상의 동의를 얻어 어떤 재화를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으며 사고 팔고 관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75조는 살레시오 회원은 장상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종속되어 있음을 받아들인다고 말함으로써 보다 더 중요한 요소를 받아들인다: 가족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는 공동체적 규범들에 종속되어 있으며 자신의 생활 양식을 공동체의 생활 양식과 기꺼이 비교한다. 재화 사용에 있어서 장상과 공동체에 종속되어 있다(비록 방법 면에서는 다르나)는 것은 우리의 가족적 전통의 일부이며 "온갖 청빈의 예속성" 증거 21.

을 지적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규칙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런 물질적 종속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본 조항에 인용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에게 "실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난" 수도 13.

하라고 권유함으로써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바오로 6세는 이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도자들은 진정한 복음적 청빈에 대해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로이 받아들인 청빈을 사랑해야 합니다. 재화의 사용에 있어서 장상들에게 종속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들은 생활 필수품에 만족해야 하며 안일과 평안을 멀리해야 합니다." 바오로 6, 총장들에게 하신 연설, 1964. 5.23. 관보 56(1964). 567.



돈 보스코가 수도자에게 어려울 때마다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장상을 찾아가라고 권유한 것도 사실이나 1875년 회헌 33조에서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접한다: "어떤 특정한 것을 요구하거나 거절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어떤 것이 자신에게 해롭거나 필요하다고 인식되었을 때에는 즉시 그 사실을 장상에게 상냥하게 얘기할 것이며, 그러면 장상은 큰 관심을 가지고 그가 필요한 바를 마련해 주십시오"(F. MOTTO, p.97). 청빈에서도 순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장상께 대한 신뢰가 돈 보스코 집의 특징이었다.

수도자는 결정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장상에게 맡겨서는 안된다는 말 역시 옳은 말이다: 수도자는 자신이 요청받고 있는 어떤 요구나 편의에 관해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단순한 이름만의 청빈이 아닌 실제적인 청빈에는 신뢰와 충실이 모두 필요하다! 우리의 창립자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청빈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5422.




가난의 고초에 대한 용기있는 수용



복음서에 따른 청빈을 서약한다는 것은 포기와 희생이 끊이지 않을 어려운 생활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고 하신 예수께도 마찬가지였고 그분의 제자들의 생활에서도 빈번했던 일이다.


이 점에 대해 돈 보스코는 예수께서 그러하셨듯 분명하고 강한 태도를 취했다('철저했다'고 까지 말할 수도 있다). 돈 보스코가 회헌 서문에 썼던 말들만을 상기해 보더라도 이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먹고 입을 것 그 이상은 사치이며 수도성소에 어긋납니다. 우리가 여행할 때나 일할 때, 건강할 때나 아플 때, 어떤 불편을 견뎌야 할 때도 있고, 우리 구미에 맞지 않는 음식이나 옷들을 대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청빈서원을 기억해야 하며, 그 공로나 상급을 얻기 위해서는 그 서원에서 오는 결과도 견뎌내야 할 것입니다." 돈 보스코, 회헌 서문, 1984년 회헌 부록, 212.



본 조항은 이와 관련된 경계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항상 우리를 옭아매려고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이기심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소유욕에 지배되어(성 요한께서는 "눈의 탐욕"에 관해 말씀하신다: 1요한 2,16)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진정한 보물이 있는 곳을 보지 못하게 하여 우리를 점점 안락과 편리에로 몰고간다. 하느님께 대한 약속에 충실하려는 동기에 덧붙여 본문은 수도자이며 사도로서의 우리에게 직접 관계되는 이유를 강조한다: 청빈의 요구들 앞에서 주저앉아 버리는 것은 "사도적 충실과 관대함을 직접 위협"하는 것이다. 사실 살레시오 회원이 안이한 생활을 추구하고 물질적인 것들에 애착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더 이상 젊은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젊은이들을 위해 "더위와 추위, 목마름과 배고픔, 피로와 멸시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회헌 18 참조)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의 삶이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증거의 삶이 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다루었던 주제를 다시 채택한다. 18조는 살레시오 정신의 특징인 사도적 생활과 관계된 포기에 관해 얘기했었다: "편리와 안일을 찾으면 수도회가 파멸될 것이다": 61조는 복음적 권고들에 따르는 생활과 사도적 사명 간의 연관성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순명하고 가난하며 정결한 살레시오 회원은 주께서 그를 파견하시는 모든 이들 특히 가난한 젊은이들을 사랑하고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본 조항은 살레시오 회원의 청빈 생활 속에서 때로는 그것이 "어떤 불편과 고통"의 원인이 될지라도 그의 태도를 특징지어 주어야할 또 다른 요소를 지적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예수의 벗이 되기로 그분의 복음서의 종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 청빈을 하느님께서 우선적 사랑을 가지고 바라보시는 상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체험하는 기쁨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한번 본문은 돈 보스코의 회헌 서문에 나오는 분명한 말들에로 되돌아 간다: "우리의 가난한 상태가 어떤 불편이나 고통을 가져올 때, 모든 역경 중에 충만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고 하신 성 바오로와 함께 우리도 기뻐 합시다. 또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멸시당했다고 기쁨에 넘쳐 의회에서 돌아오던 사도들처럼 삽시다. 거룩하신 우리 구세주께서는 이런 종류의 가난에 대하여, '마음이 가난한 이는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늘 나라를 약속하시고 보장하셨습니다." 위와 동.

이것은 청빈의 참 행복에 대한 돈 보스코의 훌륭한 조언이며, 수도회는 그것을 자신의 조언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고난과 고통 중에 돈 보스코가 보여준 기쁨에 대한 설명이 깃들어 있으며, 이것 역시 진정한 살레시오 회원들에게는 기쁨의 영원한 원천이 되어야 한다. 돈 보스코의 전기작가는 어려움과 시련에 처했을 때의 우리 창립자의 신앙에 대해 얘기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신뢰로부터 그는 자발적인 청빈에 대한 영웅적 사랑과 필수품이 부족했을 때에도 느끼는 기쁨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이끌어냈다('이성과 종교'). A. CAVIGLIA, Don Bosco - Profilo storico, SEI

Turin, 1934, 23.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가지고 기도합시다.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거룩한 청빈을 서약했으며,

수도자들이며 살레시오 회원들인 우리들에게

청빈 실천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영적 애착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시라고 청합시다.


우리들 각자가 진정으로 가난한 생활 방식 안에서

모든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매일 관대하게 초연해 살므로써

청빈 생활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느낄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힘입어

장상과 공동체에 대한 충실한 종속 속에서

하나이시며 유일한 선이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자녀다운 종속을 완전하게 생활하는

수단과 표현을 발견할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청빈과 그것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포기와 희생을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위해 가난의 참 행복을 고수할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76 조 재화의 공동소유




초대교회 신자들의 표양에 따라 우리는 물적 재화¹와 우리 노동의 결실, 그리고 우리가 받는 선물과 연금, 보조금, 보험금을 공동으로 내놓는다. 또한 우리의 재능이나 힘이나 경험까지도 내어준다.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선익은 모든 이의 선익이 된다.


우리가 가진 바를 관구 내의 공동체들과 형제답게 함께 나누며, 수도회 전체 및 교회와 세계의 필요성에 대하여 연대감을 갖는다.



1. 사도 4,32 참조.






이 조항으로써 회원은 청빈의 공동체적 측면 즉 형제적 친교 수단으로 이해되는 청빈의 차원에 대해 서술하게 된다.


이것은 돈 보스코가 매우 민감했던 측면이다. 회헌 초안에서 그는 청빈에 관한 장의 서두에 이러한 정의를 실었다: "우리 수도회 안에서의 청빈 서약 준수는 본질적으로 모든 지상 재물로부터 초연하는 데 있으며, 우리는 음식과 의복에 관한 공동생활과 장상의 허락없이는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실천한다." 1864년 회헌, 61(F. MOTTO, p.100).

사도좌로부터 인가 받은 1875년 회헌 본문에서 이 조항은 교회법의 요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그 장의 마지막으로 옮겨졌으나 여전히 살레시오 청빈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효과적인 청빈 안에서 그분을 모방하기 위해 그리고 공동체를 이루고 우리 형제들에 대해 보다 큰 사랑을 갖기 위해 개인적인 청빈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우리의 수호성인 이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사상이기도 하다: "가난하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Oeuvres de St. Francois de Sales, Annecy, 9229: 특별총회 606도 참조.


76조는 대체로 두 가지 사상노선들 즉 공동체 안에서의 재화의 공동소유, 공동체를 초월한 형제적 나눔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차례 차례 살필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의 재화의 공동소유



앞 두 단락은 관구 공동체와 세계 공동체에 관계된 원칙 적용을 배제하지는 않으나 지역 공동체 내에서의 재화의 공동소유에 직접 관계된다.


우리의 고찰은 주님의 빠스카로부터 생겨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을 토대로 한 것이다. 형제적이며 사도적인 공동체에 관한 장에는 돈 보스코가 좋아하는 표현을 사용하여 사도들의 공동체를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개요가 인용되어 있다: "우리는 한 마음 한 뜻"(회헌 50 참조)을 이룬다. 현재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이 다음과 같은 말로써 서술한 이러한 "cor unum et anima una"(모두 하나되어 한 마음으로)의 구체적 표현들 가운데 하나를 상기한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사도행전 4,32). 소유물을 나누어 갖는 것은 예수의 모범을 따라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시키는 수단과 표징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보다 깊은 인격적 친교의 한 측면임을 보여주는 형제적 나눔의 복음적 기반이 강조된다. 바오로 6세는 "복음의 증거"에서 그리스도교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러한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 '12사도들의 가르침'이란 책에 기록되기를 '불멸의 영적 재화를 서로 나눌 수 있다면 하물며 멸해 버릴 현세 물질을 어찌 서로 나눌 수 없으랴?' 하였다. 생활로 실천되는 청빈은 보수까지를 포함한 모든 현세 재물을 공동으로 나누어 사용함으로써 수도자들을 묶어주는 영신적 일치를 증거할" 증거 21.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근거로 회헌은 우리도 "물적 재화를 공동으로 내놓는다"고 단언하며, 그러한 언급은 실제적인 나눔에 관한 것이기에 계속해서 본문은 우리가 공동체에 가져오는 이러한 재화들 가운데 몇 가지를 열거한다: "우리 노동의 결실"(분명히 여러 활동들 간의 수업을 비교하고 있지는 않다. 힘든 노동이 반드시 큰 보상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받는 선물"(우리는 선물들이 우리 형제들의 선익과 즐거움을 위해서도 주어진다고 느낀다): "연금, 보조금, 보험금"(이것들은 우리의 가족 생활에 도움이 된다).




각자의 선익은 모든 이의 선익이 된다.



그러나 재화에 대한 공동 소유는 순전히 현세적인 재물에 대한 소유의 범위 이상을 포함한다. 가족 정신에 관해 말하고 있는 제16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서로 신뢰하며 매일 용서하는 분위기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눌 필요성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 51조는 "형제적 우애"에 관해 "우리는… 기쁨과 슬픔을 서로 전하며… 사도적 경험과 계획을 함께 나눈다"고 구체적으로 말했다. 보다 깊은 차원의 교환과 나눔에 관한 이러한 넓은 시각에서, 본 조항은 이렇게 덧붙인다: "또한 우리의 재능이나 힘이나 경험까지도 내어준다." 21차 총회는 다음과 같은 적절한 표현으로써 이러한 태도를 해석한다: "청빈이란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 자신, 우리가 하는 일 모두를 나눈다는 뜻이다." 21총회 40.

재화를 나누는 것이 결국 공유된 실존의 한 표현이 된다. 이 문구는 돈 보스코의 표현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각자의 선익이 모든 이의 선익이 되도록 하십시오"(돈 보스코 전기, 이태리어판, 12630).

, 특별총회 606.

...?


그러므로 규칙서는 복음의 정신을 따라 우리를 물질적 소유물을 나누는 것으로부터 보다 깊은 개인적 선익들에 함께 참여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애덕의 고귀함에로 인도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복음적 청빈은 사랑에 이르는 길이 된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단락의 짧지만 압축적인 어구가 의미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선익은 모든 이의 선익이 된다." 이 안에서 청빈의 인간적 동기인 친교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서로를 부요하게 한다: 각자 자신의 선익과 개인적 재능과 노동으로써 공동체에 봉사하고 그럼으로써 공동체를 풍요롭게 한다: 한편 그들은 공동체로부터 필요에 따라 받으며 공동체에 의해 부유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빠스카 신비에 비춰볼 때 "각자의 선익은 모든 이의 선익이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았고 하느님 가족의 한 성원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부들을 형제들과 충분히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살레시오 전통에서는 이렇게 생활되는 청빈이 "가족 정신 안에서" 생활되는 청빈으로, 특별총회가 요약한 대로라면 "가족의 청빈"으로 묘사된다. 살레시오 전통에서는 내핍적인 공동생활(돈 보스코가 요구한 의미의)이 젊은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기쁘게 사는 형제애 안에서 꽃핀다. 그것은 각자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장상의 부성애와 자신의 요구들을 알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형제회원의 완전한 신뢰에 의해 촉진된다.


까빌리아 신부는 돈 보스코의 집에서의 기쁨 넘치는 내핍 생활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내핍은 생활 방침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관습 속에서, 그리고 기꺼이 희생하고 초연하려는 마음가짐 속에서 발견된다: 모든 사람이 일하고 관대하며 가난의 고통을 매우 행복하게 느낀다. 모든 것에 마음이 깃들어 있었고, 영혼이 높은 이상에로 향해 있으며 필요치 않는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정신과 활동에 있어서 아주 편안하고 냉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CAVIGLIA, Don Bosco - Profilo storico, SEI Turin 1934, p.93.





다른 공동체들과의 형제적 연대



지역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관구 공동체와 세계 공동체 안에서 재화를 서로 나누는 것이 돈 보스코가 우리에게 물려준 가족정신의 모습이다. 이는 본 조항의 셋째 단락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서 공의회가 말한 것을 분명하게 되살려 준다: "회의 관구 및 수도원은 재산을 서로 같이 나눌 것이니 더 많이 소유하고 있는 곳은 곤궁에 시달리는 곳을 도와 주어야 한다." 수도 13.

그러나 본문의 표현은 더 널리 적용되는 것인 것 같다: "우리가 가진 바를 관구 내의 공동체들과 형제답게 함께 나누며, 수도회 전체 및 교회와 세계의 필요성에 대하여 연대감을 갖는다": 이것은 물질적 재화(일반회칙 제197에 명백하게 언급된) 뿐만 아니라 영적 선익과 각 형제 회원들의 사도적 능력까지를 포함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수도회가 그 아버지요 지도자인 총장을 중심으로 한 몸, 한 가족을 이룬다는 사실에 대한 돈 보스코의 고집을 잊지 말아야 한다: 59조는 이미 이러한 이상을 예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76조가 관구 내의 친교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58조와의 연장선상에서 본 조항은 우리 청빈의 친교적 측면이 진정한 관구 공동체를 육성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본 조항은 보다 넓은 차원의 연대 즉 교회와 세계의 필요성에 대한 연대감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침들을 돌이켜 보게 된다.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회 자체도… 교회의 다른 필요를 위해서와… 빈곤자의 생활보호를 위하여 자진 그 재산의 일부를 제공하여야 한다." 수도 13.



공의회 문헌의 본문은 지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증거와 봉사에 직접 관계되나, 회헌이 이러한 호소를 형제적 나눔이라는 맥락 속에 삽입시킨 것은 우리가 더 큰 가족의 일부임을 상기시키고 우리의 재화를 공동으로 내놓는 것의 중요한 목표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바오로 6세는 수도회 장상들에게 바로 이것을 상기시켰다: "하느님의 섭리가 여러분에게 부여하신 현세적 재화로써 여러분의 가까이 있는 사람이든 세상의 다른 부분에 흩어져 있는 사람이든 곤경에 처한 여러분의 형제들의 요구들을 채워 주십시오." 바오로 6, 장상들에게, 1964. 5.23.


요약하자면, 본 조항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재화는 쌓아 두어서는 안되며 또한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는 보증물도 아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한다: 그것들은 우리 형제들의 뜻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청빈은 사랑의 봉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회헌 73, 79 참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당신의 종들인 우리가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교회와 더불어

그리고 가장 가난한 형제들과 더불어

당신의 섭리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자연적 재능들과 은총의 선물들과

그리고 모든 영적 물질적 재화들을

나눌 수 있도록 하소서.


복음적 청빈에 대한 우리의 실천이

우리를 진정한 가족으로 만들고

세상 안에서

당신 나라의 도래를 예시하는 표징이 되게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77 조 공동체와 사업에 있어서의 청빈의 증거




각 공동체는 지역사회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며 검소한 주택에서 소박하고 간소한 생활을 하며 가난을 증거한다.


창립자의 모범과 정신에 따라 우리의 활동에서 요구되는 수단의 소유을 인정하되 그 사용되는 목적이 모두에게 명백하도록 이를 관리 운영한다.


활동의 선택과 사업의 부지 선정은 궁핍한 이들의 필요에 부응해야 한다. 건물은 간소함과 실용성의 기준에 따른다.






본 조항은 공동체적 친교를 계속 주제로 다루면서 특히 젊은이들과 세계에 대한 그것의 증거가치를 밝힌다. 앞 조에 관한 주석에서도 말했듯이 공의회는 수도자들에게 청빈에 대한 "-집단적 증거"를 요구한다. 수도 13.

그러한 증거는 그 자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사도적 사명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62에서 얘기된 바에 따르면) 복음의 선포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말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에게 연설하는 가운데 바오로 6세는 그들에게 이것을 일러 그들의 임무라고 말했다: "소유와 지식과 권력만 있으면 안전하리란 생각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만당할 위험이 날로 증대되는 오늘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수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인적 양심의 최고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하신다. 즉 수도자들은 진정하고 완전한 진보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밝혀 주어야 하겠다. 진정한 진보는(물질, 지식,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그 성소에 순응하는 데에 있음을" 깨우쳐 주어야 하겠다." 증거 19.

우리의 특별총회는 청빈에 대한 이러한 증거는 특히 공동체 안에서 생활될 때 의미깊은 것이다고 덧붙인다. 특별총회 606 참조.


공의회의 교의 및 살레시오 전통과 관련지어 제77조는 청빈에 대한 집단적 증거의 세 가지 주요 영역들을 다룬다: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방식, 사도직 활동에 필요한 수단을 사용하는 태도, 활동과 건물에서의 청빈.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차례대로 살피게 될 것이다.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방식에 의한 증거



76조에서는 돈 보스코의 아들들의 청빈의 특징은 그들이 물질적 영적 재화를 완전히 나누며 사는데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수도자가 자신의 재화를 공동으로 내어놓음으로써 개인적 초연과 관대한 자기 증여를 탁월하게 실현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것이 실제적인 집단적 청빈 증거에는 충분치 못할 수도 있다. 불행히도 역사는 회원 각자의 충실한 초탈이 공동체 자체를 부유하게 만든 부의 측적을 초래한 수도회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돈 보스코는 그의 수도회더러 안일과 편리를 추구하는 위험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7271-272 참조.



여기에 비춰볼 때 첫째 단락은 하느님 나라와 그것의 초월성에 대한 증거는 개인의 의무만이 아님을 강조한다. 청빈 서원은 해당 공동체에게도 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믿을만한 증거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부자 공동체의 회원인 수도자는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요구한다!


어떻게 이러한 공동체적 증거를 보여줄 것인가? "검소한 주택에서 소박하고 간소한 생활을 하며 가난을 증거한다"고 규칙서는 답한다. 특별총회의 문헌은 이러한 의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한다: "검소한 공동생활 양식에서: 우리는 음식을 간소화하고 불필요한 모든 것을 피하며, 건물에 있어서는 기능적인 단순성을 그 목적으로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보다 긴밀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특별총회 606.

그보다 조금 앞에서 동 총회는 "단순하고 검소하며 일반적으로 중류 계급과 관련된 안락과 편의를 거부하는 생활양식" 특별총회 605.

에 관해 얘기했었다. 이러한 표현들은 돈 보스코가 첫 선교사들을 위해 얘기했던 내용을 상기시킨다: "여러분의 옷이나 음식이나 거처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이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선교사들에게(12), 1984년 회헌 부록 245. 돈 보스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일깨운다: "불편한 방에서 허술한 가구를 놓고 사는 것, 검소한 의복을 사용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것들은 청빈을 서원한 사람에게 오히려 큰 영예가 되는 것이니, 이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닮게 하기 때문입니다"(회헌 서문, 1984년 회헌 부록 233).

또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을 때 검소의 모범이 되어 있을 수도회를 보는 것이 나의 이상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4134.

본문은 실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띤 말을 덧붙인다: "각 공동체는 지역 사회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러한 사상과 구절은 이미 앞 조에서 인용된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들은 특별총회의 문헌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된다: "경제적 청빈의 구체적 모습과 표징으로서의 실제는 개개 수도 가족의 여러 가지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이외에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여러 가지 환경과 국가, 여러 가지 문화와 문명 및 특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청빈의 이행이 다양성의 원리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 수도 13.

...? 특별총회 609.

한다. 실제로 모든 공동체는 특별한 지역 사회 안에서의 그 사명에 맞는 나름대로의 소박함과 검소함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최우선인 규범은 동일하다: 우리의 대상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소생 시키고 그분을 "가시적"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명에 필요한 수단을 사용하는 태도로써 보여주는 증거



본 조항의 둘째 단락은 우리의 사명 수행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 즉 공동체의 활동에 필요한 수단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별총회는 이 문제를 질문 형식으로 표현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전적인 연대책임을 지는 청빈의 증거와 교육의 기능적 구조적 요구가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가? 어떤 때에 웅장한 외관을 갖춘 단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특별총회 610).


돈 보스코가 창립한 수도회는 젊은이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복음전파 및 서민층의 발전을 그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교육적 발전도모적 목표들은 때로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도 하는 적절한 수단을 필요로 한다.


돈 보스코는 젊은이들에게 일용할 양식 이외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수단을 찾아 사용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청빈을 그토록 깊이 사랑했던 돈 보스코의 입에서 "수도회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돈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한 번창할 것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7486.

는 말이 나온 것을 알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는 매우 초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돈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고를 치뤄야 하는지를 알았고, 또한 돈이 소년들을 돕고 그들에게 덜 참담한 미래를 보증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돈은 그들의 훈련을 가능케 했다. 그러므로 돈 보스코는 돈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소년들에게 봉사하려고 했다. 교육과 발전 수단의 사용에 관해 돈 보스코가 말해야 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출판에 대해 언급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들에서 돈 보스코는 진보의 선두에서고 싶습니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6323.



다음의 회헌 본문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읽혀져야 한다: "창립자의 모범과 정신에 따라 우리의 활동에서 요구되는 수단의 소유를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이 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기에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욕이 없고 가시적인 봉사 정신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한다: "그 사용되는 목적이 모두에게 명백하도록 이를 관리 운영한다." 우리의 수혜자들과 관찰자들에게 우리의 공동재화가 사명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과 또한 살레시오 회원들이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이러한 재화들의 단순한 관리자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활동과 건축에서의 증거



사명에 필요한 수단에 관한 얘기는 자연히 사명이 수행되는 사업과 활동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복음적 청빈에 대한 증거의 맥락에서는 이것도 고려되어야 하며 이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사업과 활동의 선정 면에서 공동체를 좌우해야할 일반 기준은 사도적 활동을 위한 도구들과 수단에 관해 얘기된 것과 유사하다: 그것들은 우선 무엇보다도 가장 궁핍한 젊은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그러기에 그들의 요구들을 충족시키는데 알맞도록 계획되어야 한다. 이런 기준은 이미 우리 사명의 사도적 우선 사항이란 맥락에서 제7조와 제41조에 의해 지적되었었다. 우리의 활동의 첫째요 가장 중요한 대상자들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제26조 역시 우리의 활동 분야에 대한 명백한 선택으로써 끝을 맺는다: 우리는 "특히 보다 가난한 지역에서 일한다." 사명이 요구하는 봉사를 복음적 청빈에 대한 실제적 증거를 제공하는 길로 충실히 지적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여기서 다시 거론된다.


특히 건물에 관해, 본문은 이미 언급된 일반적 지적에다 보다 상세한 세부사항을 덧붙인다: "건물은 간소함과 실용성의 기준을 따른다." 참으로 효과적인 봉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건물들이 실용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긴 하나, 본 조항은 증거에 어긋날 무익하거나 과도한 장식들은 피할 필요가 있다는 유의점을 지적한다. 회칙 제59조는 이러한 측면을 보다 명백하게 얘기하고 있다: "극히 간소한 시설 그리고 우리의 소유가 아닌 사업에서도 자주 효과적인 봉사가 실현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청빈의 증거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피할 것이다."


여기서 얘기되고 있는 바의 깊은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건물들은 젊은이들에 대한 우리의 봉사를 실현시키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일 뿐이라는 건물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건물들에다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우리 수혜자들의 현실적인 요구들에 알맞게 개수하려는 자세를 언제나 가져야 한다. 간소한 시설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상황에 쉽게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은 우리를 파견하시고 유일하게 구원사업을 행하시는 분께 대한 우리의 완전한 순응과 신뢰의 표징이다. 돈 보스코의 생애와 우리 수도회의 초창기 모습은 결코 없어서는 안될 우리의 본보기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반회칙은 지역 공동체와 관구 공동체에게 정기적인 점검을 권유하게 되기도 한다(일반회칙 65 참조).






주여,

당신은 우리의 모든 공동체들이

젊은이들 가운데서 청빈의 참 행복을 증거하는

실제적인 증거자들이 되기를 원하시오니,

우리의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과

우리 가족들의 간소함으로써

믿을만한 표징을 제공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소서.


주여, 당신은 당신의 친절과

많은 은인들의 관대한 도움으로써

우리에게 집들과

우리 사업에 필요한 수단들을 주시었으니,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이 당신의 이러한 선물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일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하시고

그것들을 젊은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도구들로 사용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가 추진하는 활동들과 사업들은

우리와 젊은이들에 대한

당신 사랑의 표징들이오니,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들을 언제나

우리의 대상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게 하소서.


































78 조 일




끊임없는 희생적 일은 돈 보스코가 우리에게 남긴 특징이며, 우리 청빈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매일 근면하게 일하는 가운데 자신의 수고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참여하며, 노동의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증거한다



1. 증거 20 참조.






본 편의 마지막 두 조항들은 살레시오적인 청빈 실천 태도의 두 특징들 즉 노동생활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 관해 논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들은 증거와 봉사에 관계되며 또한 개인과 공동체에 관계된다.




우리 청빈의 한 표현인 사도적 활동



18조는 이미 돈 보스코의 아들들의 생활에 있어서, 절제와 더불어 살레시오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일에 관해 얘기했었다: "일과 절제는 수도회를 번영시킬 것이다." 끊임없는 일은 사목적 사랑의 한 표현이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 신비의 열매이다.


78조는 일이란 주제를 다시 채택하여 그것을 수도자이며 사도들로서의 우리들의 청빈과의 관계선상에서 제시한다: 복음의 집행자인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우리 동료 인간들에 대한 봉사에 온 힘을 기울여 헌신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그분의 끊임없는 노력을 본받는다.


살레시오 회원의 활동과 청빈에 대한 그의 선택 간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본 조항은 세 가지 주요 사상노선들을 전개한다: 본 조항은 노동자인 돈 보스코의 모범을 상기시키며 우리의 일은 우리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우리의 형제들과 결합시킨다고 선포하며, 우리가 오늘날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효과적인 증거에 관해 얘기한다.


돈 보스코는 일에다 자신의 생활을 어느 정도나 할애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전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돈 보스코 전기는 성인께서 가난한 소년들을 위해 행하신 "끊임없는 희생적"(이 두 단어들은 신중하게 선택된 것들이다) 일에 대한 증거를 계속 제공한다. 또리노 대학 교수 피쏘레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분은 너무 많은 일로 자신을 소모 시켰습니다! 그분은 병 때문에 죽었다기 보다는 기름이 떨어져 꺼져버린 등잔이었습니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8500.

체리아 신부도 이렇게 쓰고 있다: "돈 보스코 만큼 일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일을 시킨 성인을 찾아내기는 힘들 것입니다." E. CERIA, Don Bosco con Dio, p.262-263.



돈 보스코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활동 양식을 "값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특별총회의 문헌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한다: "돈 보스코는 일에 대한 의욕을 중요시하던 당시의 사조에 민감하고 내적 열성으로 촉구되어 수도회가 지칠 줄 모르고 어려운 노동을 해내기를 원했다." 특별총회 597.

그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기쁘고 청빈하고 검소하기를 원했으나 무엇보다도 근면하기를 원했다: 그는 "일하시오, 일하시오, 일하시오!"라고 되풀이하곤 했다. "그것이 사제의 목적과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일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구원되어야 하는지!"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7383.

또 어떤 때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저는 여러분에게 단식을 요구하거나 여러분 자신을 처벌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권고하노니, 일하시오, 일하시오, 일하시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4151.


그러므로 사도적 활동(다른 활동이 아니라)은 우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있어서는 값진 가보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원이 되며,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봉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이 청빈의 표현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관대히 내어주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행한 일은 우리를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되게 하며 증거가 된다.



살레시오적인 동기에 사회학적 성격을 띤 다른 동기가 덧붙여질 수 있다. 일은 자신의 수고로 생계를 이어가는 무수히 많은 동료 인간들과 우리를 하나되게 한다고 규칙서는 말한다. 비천한 일에 참여하도록 해주는 이러한 동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수도자는 각자 맡은 바 임무 안에서 노동의 공통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자각" 수도 13.

해야 한다. 일은 복음에 따른 청빈을 실천하는 구체적 길이다라고도 얘기될 수 있다.


끝으로 비록 일이 고되더라도 기쁘고 관대하게 매일 일에 임하는 살레시오 회원의 헌신을 설명해주는 세 번째 동기가 있다. 이것은 본 조항의 마지막 구절에 표현되어 있으며 우리 시대의 수도자들에 대한 사도적 권고 "복음의 증거"의 본문에서 나온 것이다: "보수만을 위한 노동, 향락을 위한 벌이, 소비성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런 목적 때문에 비인간적인 중노동을 강요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평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도자들의 청빈 생활이 보여 주여야 할 중요한 증거 중의 한가지는 노동 고유의 인간적 가치를 증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자유로운 정신 자세로 노동에 임함으로써 노동은 생계 유지와 봉사의 원천이라는 노동의 본질을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증거 20.


사랑 때문에 사랑으로 행해지는 우리의 일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그것은 청빈생활의 교육적 측면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젊은이들의 교육자들인 우리의 경우 특별한 중요성을 띤다: 우리는 새 세대들에게 그들 자신의 삶을 건설하면서 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도록 교육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까빌리아 신부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돈 보스코의 가장 큰 사회적 장점은 실제로 일하면서 노동에 대해 교육시키는 법을 발견한데 있다." A. CAVIGLIA, Vita di San Domenico Savio, SEI 1943, p.75.

그것은 우리들의 임무이기도 하다!






주 예수여,

시간은 당신의 사랑에서 나온 큰 선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젊은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사도이셨던

돈 보스코의 모범을 따라

끊임없는 희생적인 일에서

복음의 집행자로서

그것을 언제나 잘 사용하도록 도와주소서.


이렇게 하여 우리가

매일의 노동으로써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사람들과

많은 것을 함께 나누며

오늘날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노동의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증거하게 하소서.


주는 세세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나이다.







79 조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성




청빈의 정신은 우리를 가난한 이들과 연대감을 갖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사랑케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그들의 정당한 염원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며, 그들 곁에서 그들의 빈곤상태를 향상시키는 데에 주력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돈 보스코의 열성과 감사의 마음을 본받고, 그처럼 복음적 자유인의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²



1. 수도 13 참조.

2. 전기 5682.






복음서의 가르침과 돈 보스코의 모범을 따르는 우리의 청빈에 대한 서술을 끝맺는 본 조항은 매우 의미심장하며, 어떤 의미로는 본 편 첫 조항의 복음적 원천과 결부된다. 본 조항은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회헌 72 참조)으로부터 그리스도 자신도 함께 계셨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이끌어내는 살레시오 회원의 또 하나의 뚜렷한 특징을 제시한다.


본 조항의 본문은 분명히 우리 창립자의 경험과 가르침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초기의 사도적 공동체(사도행전 참조) 이래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주님의 현존의 표지로 매우 명예스럽게 포함시켜 온 그리스도교 전통 전체를 토대로 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무는 수도자들을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뒤의 교도권의 문헌들에 의해 확인되어 왔다.


가난한 이들과의 단결



73조에서 언급된 대로 돈 보스코의 모범은 분명히 그의 모든 생활과 활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랑 때문에 가난했던 그는 자신의 여건을 존중했을 뿐만 아니라(그는 자신을 "보잘 것 없는 농부아이"라고 부르곤 했다). 수도 13 참조: 증거 17 이하: 수도자와 인간발전도 참조(수도자 및 재속회 성성),1980.

...?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0141.

,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의 모든 활동은 가난한 젊은이들의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발전에 바쳐졌다: 1875년 회헌 11, 3, 4(F. MOTTO, p. 73, 75).

그는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서민들(1864년 회헌 원고에서 그는 '최하층민들'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에 관해 걱정했다. 다음과 같은 그의 표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주님은 가장 비천하고 가장 곤궁한 거지 안에 계십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384.

그가 영적 유언에서 그의 아들들에게 남긴 조언을 회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우리의 관심이 미개발 민족들과 보다 가난한 젊은이들, 그리고 사회에서 가장 위험 중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쏠려 있는 한, 세계는 언제나 우리를 환영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할 참된 제안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7272.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하기로 선택한 살레시오 회원은 돈 보스코께 충실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에 자신을 내어 놓는다. 회헌은 "가난하고 버림받고 위험 중에 있는 젊은이들"(회헌 26 참조)에 대한 수도회의 우선적 선택과 "서민층"(회헌 29 참조)에 대한 수도회의 관심이 지적된 사명에 관한 장에서 이미 많은 것을 얘기했다. 73조에서도 청빈에 대한 같은 맥락에서(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가장 곤궁한 이들에 대한 봉사 임무가 강조되고 있다. 이 임무로써 살레시오 회원은 교회의 사명에 참여한다. 그런데 본 조항은 가난한 이들의 좁은 의미의 개인적 측면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살레시오 회원들이 자신의 성소 때문에 그들을 위해 연마하는 근본 태도의 전체적 모습을 대략 설명한다.


본 조항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성"(이는 사실 본 조항의 제목이다)에 관해 얘기한다. 이미 제19차 총회도 이 중요한 임무에 대해 대략 설명한 바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돈 보스코와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실제적으로 연대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으로써 우리를 파견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들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그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 더 잘 봉사하며, 그들을 구세주의 풍요에로 더 쉽게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총회 81-82.

회헌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성에 대한 이런 호소를 받아들인다. 이제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가 그들의 생활과 운명은 물론 그들의 깊은 감정들과 관심과 문제들에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투신과 충분한 덕행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규칙서는 가난한 이들과 우리의 연대를 드러내는 몇 가지 표시들을 명백하게 지적한다(우리는 그것들을 계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사랑": 연대를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이며, 사랑 안에서는 연대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결속되어 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분의 연대감이 우리를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깊은 갈망"으로 혹은 "그리스도의 온유로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을 명백히 인용하고 있으며, 곤궁한 형제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는 신앙의 설득력을 토대로 삼고 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 35, 40).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 안에서 머무시길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 야고보의 유명한 표현대로 이웃에 대한 사랑 속에서 구체화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야고보서 2,15-16 참조).


-"그들 곁에서": 생각과 느낌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봉사로써 그들과 가까이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미 여러차례 얘기했듯이, 이는 규칙서가 지적하는 우리의 우선적인 사명이다.


-"그들의 빈곤상태를 향상 시키는 데에 주력한다": 이는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본문 중 감동적인 부분에서 인용된 것이다: "교회도 인간의 약성으로 고민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속에서 교회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의 결핍을 덜어 주기로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 봉사하기로 마음을 쓴다." 교회 8.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를 얼른 알아채게 하며,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하게 하고, 그들의 고통 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슬퍼하며, 그들의 성패에 더욱 쉽게 참여하게 한다. 그는 가난한 형제들 곁에 있음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의 사랑의 말씀을 말해 주고 구세주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다: "pauperes evangelizantur(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루가 7,22).


- "그들의 정당한 염원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며": 여기서 우리는 제7조와 제33조에서 이미 얘기한 관점에로 되돌아 간다: 가난한 이들을 해방시키는 거대한 임무에 느낌과 행동으로써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돈 보스코의 제6대 후계자인 루이지 리께리 신부는 이와 관련된 글에서 발전 임무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수도회의 본질에 속한다" 의사록 261(1970) 16-17.

고 말했다. 우리의 회헌은 우리의 활동과 증거의 이러한 사회적 함축 의미를 밝혀준다.




복음적 자유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움



셋째 단락은 제77조에서 언급된 것과 다소 관계된 문제 즉 우리의 활동들을 유지하고 가난한 이들을 거들어 줄 수 있는 도움과 수단을 찾아내는 것을 다룬다.


여기서도 우리는 창립자의 모범에 주목한다. 섭리에 대한 한없는 신뢰로("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한 우리 수도회는 번창할 것입니다"고 그는 말하곤 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077.

, 그는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만드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 편의 최대한의 노력을 원하신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143.

고 확신했다. 그는 그의 가난한 소년들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느라 얼마나 많은 창피와 피로를 감수해야 했던가(프랑스와 스페인에로의 힘겨운 여행들을 생각해 보라)!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2201-202.



돈 보스코는 부자들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나쁘게 말한적이 없었다: 그는 이기적인 생활을 하거나 소유물에 집착하거나 간혹 가난한 이들을 희생으로 사는 부자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강력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곤궁한 사람들을 돕는 관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진실한 감사의 마음을 가졌었다: 그의 서한집을 쭉 훑어보면, 각계각층의 무수히 많은 은인들에 대한 우리 아버지의 잦은 감사 말씀에 놀라게 될 것이다!


회헌은 우리에게 "우리는 돈 보스코의 열성과 감사의 마음을 본받고"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난한 젊은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은인들의 도움에 호소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은인들(그들은 이 세상의 걸출한 인물들이라기 보다는 겸손한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다)은 사랑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느끼며, 그러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진정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나 규칙서의 본문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복음적 자유인의 태도를 견지한다." 즉 우리는 복음서의 종들(우리에게 기부금을 내는 대신 우리를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할지도 모를 사람들 앞에서 "자유인의 태도를 견지하는")이며, 가난한 이들의 벗이다는 점을 지극히 적절하게 지적한다.




결론



본 조항과 청빈 편 전체를 끝맺는 말로서 본문은 돈 보스코의 인상깊은 말씀을 상기시킨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5450.



여기서 우리는 증거와 봉사로서 생활되는 우리의 청빈에 관해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을 조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 이 때문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우리 공동체의 재화)은 우리의 곤궁한 형제들의 뜻대로 사용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초연을 증거하기 위해 불리웠으나 가장 곤궁한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을 "선용"하도록 불리우기도 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바오로 6세께서 모든 수도자들에게 하신 감동적인 호소에서 자극을 받는다: "오늘날 빈자들의 호소는 가난한 개인과 곤궁에 빠진 집단으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들려온다. 빈자들이야말로 하느님의 특권적 자녀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호소에 응답하시기 위하여, 그들과 같은 처지에 계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닌가?" 증거 17.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과 결속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으며,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왕도를

우리에게 열어 주셨나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 것이라는 확신으로써 실천하는

우리의 청빈 실천을 북돋아 주시고

그들 가운데서

당신 사랑의 섭리의 표징이 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우리의 정결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8-39).






명백하게 인용(회헌 80)된 공의회의 지침들에 의거하여, 복음적 의미로 이해된 정결이 지극히 그리스도인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정결은 긍정적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마음의 신조에 관계된 측면이다(회헌 80). 이러한 기본 시각은 당연히 로마서 8,38-39 본문에서 신약에서 가장 고결한 착상들 가운데 하나를 찾아내는데 돈 보스코는 거기에다 인간적 구체성과 실천적 지혜를 부여했다(회헌 81).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제8장은 구세사에 대한 일종의 "Te Deum"이다. 이기적인 욕정에 거침없이 빠져드는(로마서 1-3) 것으로 종종 표현되는 죄의 비극적 영향을 극복한 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어" 원죄로부터(5), 개인적인 죄로부터(6), 법률을 지킬 능력이 없던 상태로부터(7) 해방된다. 그는 자신이 우선은 예수의 성령과 다음으로 성부이신 하느님과 그리고 그러기에 불가분적인 형제애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랑과 봉사로 촘촘히 짜여진 이야기에 몰두해 있음을 발견한다(8, 1-18):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불리우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피조물과 결속되어 있음을 발견한다(8, 19-25). 간단히 말해서,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영원하고 거역할 수 없는 구원 계획에 파묻혀 있음을 발견한다(8, 28-30).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8,31). 여기서 바오로는 일련의 주요 질문들을 시작하는데 그것들에 대한 대답은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 그 사랑은 완전히 통일적인 것이요, 먼저 하느님께서 바오로에 대해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피조물들이 절멸되었다거나 인간의 사랑 능력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결은 고독이 아니며 증오와 공격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 자체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에만 기쁘고 자유롭게, 더 나아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인간적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특징인 관심과 아량과 온유와 섬세함으로써 사랑할 수 있다.


실제적인 희생을 가능케 했던 동시에 소년들의 마음에 기쁨을 안겨 주었던 정결하고 미소 띤 돈 보스코에 대한 성스런 추억은 우리에게는 복음 정신 안에서 생활된 정결에 대한 복된 증거가 된다.





























80 조 우리 정결의 복음적 의의




하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정결은 "천상 은총의 고귀한 선물로서 성부께서 어떤 이들에게 주시는 것이다."¹ 우리는 믿음에 찬 응답을 통해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독신으로 완전한 정절을 살아갈 것을 서원으로 약속한다


우리는 마음의 갈라짐 없이 하느님과 형제들을 깊이 사랑하는 복음적인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에서 따른다


이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 완전히 일치된 교회의 신비 안에 특유한 소명으로 참여하며, 교회의 풍요로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의 사명에 자신을 바친다.©ù



1. 교회 42.

2. 교회법 599 참조.

3. 교회 42 참조.

4. 증거 13-14, 구원 11 참조.






봉헌된 정결편을 시작하는 본 조항은 매우 많은 교의를 포함한다. 본 조항은 하늘 나라를 위한 정결의 "신비"의 주요 측면들과 더불어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서약으로써 떠맡은 의무들을 제시한다. 본 조항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이 측면을 맨 처음부터 가장 궁극적인 형태로 밝혀주는 제시문이다. 정결이 어떤 포기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과거에는 이 측면이 너무 많이 강조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을 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도 고지식한 일일 것 같다). 포기가 보다 큰 선물의 불가결한 결과로서 생활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적극적인 현실 속에서이다. 정결은 "깊은 복음적 사랑 방식"이다. 즉 그것은 수도자를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과의 깊고 생생한 사랑 관계 속에 위치시킨다. 복음적 정결 양식은 오직 복음적 사랑 양식 안에서 자신이 자리할 곳을 발견한다: 정결은 사랑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큰 사랑을 위해 받아들여진다.


여기에서 회헌 본문 개정시에 대두된 용어 문제를 언급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정결 서약 문제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늘 나라를 섬기기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것과 봉헌된 정결에 부합한 정결의 구체적 실천을 포함한다. 두 측면 모두를 마음에 간직해야 하는 게 분명하나, 전자를 더 강조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늘 "봉헌된 정결"(또는 "하늘 나라를 위한 정결")이란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한다. 특별총회와 보다 최근의 제22차 총회는 교도권의 문헌들 특별총회 562 참조.

...? 공의회는 정결에 대해 얘기할 때 여러 가지 용어들을 사용한다: "동정", "완전한 정절"(교회 43), "하느님께 봉헌된 정결"(교회 43), "하늘나라를 위한 정결"(수도 12),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수도 15와 사제 10도 참조. 교회법 599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택한 정결의 복음적 권고는 내세의 표지이고, 갈리지 않은 마음에 더욱 풍성하게 솟는 샘이며, 독신생활의 완전한 정절의 의무를 수반한다."

에 의거하여 일반적인 용어인 "정결"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며, 여러 가지 어귀들로써 그 내용을 표현했다: "봉헌된 정결"(회헌 80, 83),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생활"(회헌 83), "완전한 정절"(회헌 80), "완전한 정결"(회헌 82). 서약과 덕행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본 조항의 세 단락들은 봉헌된 정결의 신비가 지닌 세 측면들을 차례로 제시한다: 카리스마적 측면, 그리스도론적 측면, 교회론적 측면.




성부의 선물인 정결



본 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과 같은 방법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수도적 정결의 신적 기원과 그 절대적인 상급을 동시에 선포하며, 그것을 탁월한 선물로 인정한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이 말한대로 그것은 "천상 은총의 고귀한 선물로서 성부께서 어떤 이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교회 42.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 역시 그것을 "은총의 탁월한 은혜" 수도 12.

라고 말한다.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에서는 "영광스러운 선물"이란 어귀가,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에서는 "값진 선물"이라는 어귀가 발견된다. 사직 16: 사제 10.



이 점에 대한 교회의 교의는 매우 분명하다: 동정은 인간적 태도가 아니며 인간이 자발적으로 떠맡을 수 있는 금욕 실천도 아니다: 그것은 성부의 발의에서 비롯된 성소이며 부르심이고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그분께 응답한다.



그리스도교 전통 전체의 "복음의 증거"에서는 이 영원한 교회적 전통이 언급된다: "우리의 확신은 굳고 명백한 것이어야 하겠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수도자들이 독신 생활로 지켜오는 정결의 가치와 풍요성은 다른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 모친 동정녀의 생활, 사도적 전통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라고 교회는 변함없이 가르치고 있다."(증거 15)

이러한 확신은 복음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공의회는 실제로 교회 42 참조.

성서의 두 언급들 즉 마태오 19, 11-121고린토 7,1을 근거로 삼고 있다: "사람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이 각각 다르므로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삽니다." 봉헌된 정결은 하느님께서 그것이 잘 맞으리라고 생각한 이들에게 자유로이 부여하신 특별한 선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마태오 복음의 본문은 그러한 선물에 감사드리고, 받아들이고, 충분하게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 주신 자신 있는 소견이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 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 들여라."


하느님의 발의에는 우리의 응답이 뒤따른다. 규칙서는 그것은 "믿음에 찬 응답"(그것은 참으로 신앙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응답이라고 강조한다. 기쁨과 감사로써 행하는 그러한 응답은 우리의 사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게는 믿을만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응답과 관련지어 본문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서원으로써 떠맡는 임무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일부러 교회법전의 문구를 사용한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택한 정결은 독신생활의 완전한 정절의 의무를 수반한다.


우리는 회헌에 의해 살레시오 정결 생활의 기초로 제공된 이 첫 번째 반성을 마지막 발언으로써 끝맺을 수 있다. 정결은 특별한 은총과 부르심의 결과이며 은총의 분위기와 그것을 일으킨 인내로운 대화를 벗어나서는 생활될 수 없다. 84조에 명백히 얘기된 것이지만 그것은 겸손하며 신앙과 은총에 의해 길러진다: "주여, 저를 당신의 은총으로 보호하소서." 공의회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요 또 그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신뢰하여 자기 힘을 과신하지 말 것이다." 교회법 599 참조.

...? 수도 12.





그리스도가 선택하셨으며 우리가 이어받은 봉헌된 정결



본 조항은 정결의 카리스마적 차원을 제시한 뒤 계속해서 그리스도론적 차원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에서 따른다."


여기서 다시 본문은 "나를 따르라"시며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이 등장하는 복음서와 또한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하시고 그 모친 동정 마리아께서 택하신 동정과 청빈 생활을 보다 충실히 본받는" 교회 46: 교회 42: 수도 1,5.

여러 가지 방법들로써 세 가지 복음적 권고들을 제시하고 있는 공의회 문헌을 그 토대로 삼는다. 공의회는 하늘 나라를 위한 정결을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동정성의 성사적 표현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로 실제로 일치하는 것으로, 하늘 나라에서의 인간성의 결정적 조건을 미리 예시함으로써 영광스런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제시한다. 사도적 권고 "복음적 증거"에 바오로 6세는 이렇게 썼다: "정결은 마침내 인간 본질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인간을 변화시켜 가장 신비롭게 그리스도를 닮게 만들어준다." 왜 정결하게 살기로 선택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께서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신 일이며, 그분이 자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불렀기 때문에!


규칙서는 우리에게 정결의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우리는 사랑의 충만함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갈라짐 없이"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인간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에서 다시 한번 인용한 표현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나오는 바오로의 주제와 연결된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딴 생각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라"(1고린토 7,34-35)고 권유하는 중에 결혼한 사람은 생활상의 여러 가지 임무들 때문에 방해받아 "마음이 갈라진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하여"(마태오 22, 27 참조)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정결하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서원한" 사람은 그분께 자신의 온 마음을 "보다 쉽게" 증거 13.

...? 교회 42 참조. 공의회 문헌이 정확히 facilius indiviso corde를 얘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수 있다: 교회 46도 참조.

바칠 수 있으며, 하늘 나라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다.


부부애에 속하는 피조물의 중재를 극복한 봉헌된 정결은 "복음의 증거"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적 사랑과 혼인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사랑으로 결합된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를 표상하는 모상인 만큼 절대로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사목 48항 참조) 하느님께 봉헌된 정결은 더 한층 그 일치를 상기시킬뿐더러 모든 인간적 사랑이 도달해야 할 자아극복을 완성하는 것이다."(증거 13).

성령의 권능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직접적인 일치를 실현시키며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신 그분의 온전한 자헌을 선포한다. "모든 것을 초월한" 하느님께 대한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부터 하느님의 빛 안에서 동료 인간을 위하는 사랑이 나오며 그러기에 그들에게 봉사하려는 헌신도 나온다. 규칙서는 나중에 이를 더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공의회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정결은 "사람의 마음을 각각 독특한 모양으로 자유롭게 하여 더욱 더 하느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타게(한다)¡¦ ±×·¯¹Ç·Î Á¤°áÀº¡¦ ¼öµµÀÚ¸¦ ÇÏ´À´Ô²² ´ëÇÑ ºÀ»ç¿Í »çµµÀû È°µ¿¿¡ ÀÚÁø Çå½ÅÄÉ ÇÏ´Â °¡Àå ÁÁÀº ¼ö´ÜÀÎ °ÍÀÌ´Ù." 수도 12.



봉헌된 정결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신비에 깊이 참여한다.



마지막 단락은 정결을 통해 생활되는 충만한 사랑의 두 결과들 즉 교회의 신비에의 깊은 참여와 교회의 풍요로움을 함께 나누는 사명에의 헌신을 나타낸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완전히 일치된 교회의 신비 안에 특유한 소명으로 참여"한다. 이 짧은 문구에 봉헌된 정결(독특한 카리스마에 의거한) 안에서 피조물과 주님과의 사랑의 정점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정배인 교회와의 일치의 가장 고귀한 표징을 발견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의 교의가 압축되어 있다. 이것은 "복음의 증거"에 나오는 멋진 구절에서 확인된다: "정결은 본질적으로 적극적 덕행이며, 하느님 사랑의 초월성을 증명하며, 그리스도 신비체와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 영원한 신랑(그리스도) 신부(교회)의 일치를 가장 뚜렷하게 구체적으로 신비롭게 표현하는 것이다." 증거 13.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부부애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와의 신비로운 일치의 성사를 보았음(에페소서 5,32)을 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혼인은 그리스도께서 빠스카에 의해 구원된 인성으로써 열어 놓으신 삶과 사랑의 친교를 비춰주는 희미한 거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시켰다. 결혼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사랑이 표징에 의해 암시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이 사라질 때"(1고린토 7, 31참조)에는 표징들에 의한 중재는 없어지고 부활의 하늘나라가 마침내 나타날 것이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가 완성될 것이며 교회는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 살 것이다. 정결 성소에 응답하는 수도자는 신앙과 사랑 안에서 이미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그들 간의 오롯한 사랑을 생활함으로써 부활의 하늘 나라의 이러한 실상을 증거한다. 이 모든 것이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에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수도자는 하느님께로부터 제정되었고 내세에 있어서 명백히 나타날 혼인 즉 교회가 그 유일한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차지하는 저 경탄스러운 혼인을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수도 12. 이 주제에 관하여 사도적 권고 "구원의 은총"에서의 요한 바오로 2세의 분 석도 참조. 11.


이 신비에 대해 회헌이 강조하는 측면이 또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께 전하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일치는 놀라운 영적 풍요의 원천이다: "동정 어머니"인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들을 낳는다.


그리스도인의 혼인도 교회의 이러한 풍요로움에 참여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은 여기서 봉헌된 정결은 우리를 교회의 사랑의 신비에 완전히 참여시킴으로써 우리를 독자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영적 충만성에 참여시킨다고 말한다. 증거 14 참조.

이러한 진리에서 사도적 사명의 초석이 발견된다. 4세기의 저자는 이점에 관해 이렇게 썼다: "봉헌된 동정은 영적 모성애로 승화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도적인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사도직의 본질은 인간을 그리스도에 따라 새 사람으로 만드는 것,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형성시키는 것(갈라디아 4, 19)이기 때문이다." S. MEtodio, El Banquete.

하늘 나라를 위한 정결은 애덕의 자극제이며 보다 깊고 넓은 이웃 사랑의 힘을 제공한다. Taiz 의 원장은 수도적 애덕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누구에게도 예외없이 팔을 크게 벌리게 한다." J. AUBRY, Teologia della vita religiosa, LDC Turin 1980, p.113.



요약하자면, 본 조항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호혜적인 "선물" "성부의 값진 선물"과 우리 자신의 온전한 봉헌의 표징 아래 정결을 재시한다. 살레시오 회원은 정결의 가치와 또한 돈 보스코께서 그의 사명을 위해 정결에 부여했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열성에 참여하게 해주는 이러한 위대한 신앙적 시각을 지닐 때에만 정결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갈라짐 없는 마음으로

당신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깊은 복음적 방법에 대한 선택을 통해,

하늘 나라를 위한 정결의 길에서

당신 아드님 예수를 보다 가까이에서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에게 값진 선물을 주셨으니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우리로 하여금

신앙과 기쁨으로써

당신의 사랑에 응답케 하시어

주님과 완전히 결합된

당신 교회의 신비에 깊이 참여하게 하시며

교회의 사명의 충만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81 조 정결과 살레시오회의 사명




돈 보스코는 하느님과 젊은이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정결을 살았다. 그는 정결이 살레시오회를 구별짓는 표가 되기를 원했다.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이는 온갖 덕행으로 풍요로와지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 중에 특별히 가꾸어야 할 덕은 …정결의 덕이다."¹


우리의 전통은 정결이 청소년 교육에 있어 특별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빛나는 덕으로 늘 생각해왔다. 정결은 우리로 하여금 젊은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각별한 사랑의 증인이 되게 하고,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순수하게 사랑하도록 하며, 사랑과 순결에로 그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준다.



1. 1875년 회헌 5, 1참조.

2. 돈 보스코, 1884년 로마에서의 편지, 전기 17110.






우리의 사랑의 응답의 근거를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은 우리는 이제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정결에 대한 자신의 성소를 살았던 돈 보스코께 눈길을 돌린다.


81조는 돈 보스코의 경험과 가르침에 비추어 봉헌된 정결과 살레시오 회원의 사명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우리 수도회를 구별짓는 표지인 정결



돈 보스코가 정결의 선물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았던가를 종합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회헌은 "하느님과 젊은이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라는 간단한 표현을 사용한다. 본문은 특별총회가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봉헌된 정결의 깊은 의의와 정결이 그가 받은 사명 안에서 그를 어떻게 자극했는가를 지적하기 위해 말했던 바를 요약한다: "돈 보스코는 하느님께 대한 그의 위대한 사랑을 표시하고, 또 그의 사제 성소를 따라서 아버지요 목자로서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대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복음적 독신생활을 택했다. 교회와 특히 청소년들에게 대한 그의 완전한 헌신은 상냥하고 새로운 활동을 창조하고 산출할 자질을 돈 보스코 안에 육성하였고, 그는 사도적 활동에서 낙관과 기쁨을 보여주었고 그의 열성은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을 보여 주었다." 특별총회 572.



우리는 돈 보스코가 애정을 담뿍 담은 태도로 정결에 관해 얘기하곤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건설하는데 기초가 되는 덕들 가운데 하나인 정결을 매우 중시 했다는 것을 안다: 그는 그것을 "우리를 천사들과 같게 해줄 티없이 맑은 순결한 백합… 천국의 가장 사랑스런 꽃"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4331.

으로 묘사했다. "정결은 얼마나 아름다운 덕인지! 여러분에게 이 주제에 관해 여러 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가장 사랑스러우며 가장 빛나는 동시에 모든 덕들 가운데 가장 섬세한 덕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413.

분명히 돈 보스코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에 있어서 정결의 탁월성을 확신했으나, 정결이 애덕을 수반하며 애덕의 한 표현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애덕과 겸손과 정결은 항상 함께 움직이는 충실한 세 덕들이다: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다른 것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9706.

정결한 사람은 언제나 생생한 신앙과 굳은 희망과 불타는 애덕을 지닐 것이다." 위와 동.



돈 보스코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그들의 성소에 완전히 일치되기 위한 근본 덕으로 정결을 권했다. "이 덕은 수도자로 하여금 그의 목표인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봉헌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617.

"사제가 순결하고 정결한 생활을 할 때, 그는 모든 이의 마음의 주인이 된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9180.



그러나 우리의 창립자는 정결을 말로 격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음적 정결을 완전하게 산 사제의 모범이었다. 그의 가장 진실된 증거는 하느님과 젊은이들에 대한 봉사에 온전히 바쳐진 그의 삶에 있다. 그는 젊은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 그리도 자주 그리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복된 "사랑하는 소년들이여,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여러분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그가 마음속 깊이 느꼈던 사랑,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징표다.


분명코 이것은 "영적 부성애"의 선물 속에서 드러난 돈 보스코의 정결의 가장 깊은 측면이다. 그러나 우리는 돈 보스코가 순수한 사랑의 이러한 목표들에 도달하기 위해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완전히 형성시키는 그리스도교적 고행 수단들을 이용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우리는 시복 조사과정 때의 체루띠 신부의 증언을 이해할 수 있다: "드물었다기 보다 아예 독자적이었던 헌신으로써 돈 보스코가 실천했던 정신과 마음과 육체의 지극한 순수성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의 위대함의 비결이 숨어 있다. 그의 품행과 시선, 걸음걸이, 말씨, 성격적 특징들 안에는 아름다운 덕(그는 정결을 이렇게 불렀다)에 반대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체루티, 시복과정에서의 증언, "Summarium super virtibus" 870.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돈 보스코가 정결의 덕을 수도회의 생활과 사명을 특징지어야할 것으로 지적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를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구별시켜 주어야 하는 것, 우리 수도회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정결의 덕이다… 정결이 우리의 모든 행동의 회전축이 되어야 한다… 요즘에는 진짜 겸손과 정결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수도회의 승리가 될 것이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 163. 돈 보스코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청빈과 순명이 각기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의 특징이듯 정결은 우리 수도회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돈 보스코 전기, 영문판, 10, 29).


우리가 지금 검토하고 있는 회헌 본문은 정결을 "살레시오회를 구별짓는 표"로 제시함으로써, 살레시오 교육자는 사목적 사랑의 충만함에 도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정결을 계발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창립자의 사상을 요약한다. 이 때문에 1875년 회헌에 돈 보스코 자신이 쓴 본문이 인용된다: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이는 온갖 덕행으로 풍요로와 지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 중에 특별히 가꾸어야 할 덕은… 정결의 덕이다." 1875년 회헌 51 (F. MOTTO, p.109).





정결과 살레시오 회원의 교육적 사명



둘째 단락은 봉헌된 정결이 어떻게 살레시오 사명에 관여하고 그것을 특징짓는가를 더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본 조항의 첫 부분의 언급들을 보다 충분히 설명한다.


우선 시작 어귀는 우리가 돈 보스코로부터 직접 들은 바를 요약한다: 우리들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있어서의 정결에 대해 돈 보스코가 부여한 특별한 중요성은 정결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징표라는 사실에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우리의 임무와 정결의 밀접한 연관성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정결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이며 살레시오 교육자들로서 행동할 수 있다. 사실 정결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해준다. 에지디오 비가노 총장 신부의 말에 의하면 "돈 보스코의 정신 안에는 순결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살레시오 전통과 우리의 기원들에 대한 증언은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밝혀준다. 우리는 '순결에 대한 지극한 사랑(총애)'라고도 부를 수 있는 특별한 메시지 즉 젊은이들에 대한 전형적인 메시지에 관심을 가진다." 에지디오 비가노, Un progetto evangelico di vita attiva, LDC Turin 1982, p.178.



이런 의미에서 살레시오 회원의 정결은 "눈부시다"고 일컬어진다. 이 단어(이태리어로는 'irradiante')는 자기 주변에 순결에 대한 복음적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는 즉 성령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순결한 사랑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젊은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정결한 살레시오 회원의 능력을 가리키기 위해 특별총회에 의해 신중히 선택된 것이다. 이것은 돈 보스코가 그의 꿈 속에서 본 정결의 다이아몬드가 발하는 지극히 특별한 "광채"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다. 10개의 다이아몬드에 관한 꿈에서 돈 보스코는 정결의 다이아몬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자석이 쇠를 끌어 당기듯이 관심을 끄는 그것만의 눈부신 광채를 가지고 있다"(돈 보스코의 꿈들-비평판, 또리노, 1978), 의사록 300(1981), 38.

많은 사람들이 돈 보스코가 젊은이들에 대해 지녔던 매력과 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의 기술의 원인을 그의 정결의 광채에서 찾았을 정도로 정결은 돈 보스코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살레시오 회원도 정결한 생활의 광채로써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본 조항의 남은 부분은 어떻게 봉헌된 정결이 우리로 하여금 청소년 교육을 위해 실제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해주는가를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한다.


-우선 "정결은 우리로 하여금 젊은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각별한 사랑의 증인이 되게 한다"고 한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살레시오회의 사도적 계획이 지니는 심오한 특징을 제시하고 있는 제2조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예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당신의 구원적 사랑을 전하고 하느님의 부성적 모습을 보여주라고 요구하시며 우리를 젊은이들 가운데에 파견하신다. 우리의 연약한 인간적 사랑으로는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가난하고 불완전한 우리지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가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복음적 독신 생활 속에서 완전하게 생활되는 정결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일치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젖게함으로써 우리에게 이러한 임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움을 준다.


우리는 돈 알베라의 증언으로부터 돈 보스코에게서는 이것이 훌륭하게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수집할 수 있다: "그분의 모든 언행은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거룩한 일치를 보여 주었다. 그분은 마음 속에 타오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의해 우리 마음 속에 붙여진 같은 사랑의 조그만 불씨들을 그 불꽃으로 흡수하여 하나로 만드는 충만한 초월적 사랑으로써 우리를 매료시켰다. 우리는 그분의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분이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람(homo Dei)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독특한 매력 덕분이었다." 돈 알베라, 회람서한 374.



-"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순수하게 사랑하도록 하며": 돈 보스코가 1884년 로마에서 보낸 편지에서 사용한 표현을 인용함으로써 본문은 돈 보스코가 "친절한 사랑"이라 불렀으며 교육자의 "마음"이 드러나는 예방교육의 특징인 교육자와 학생 간의 인격적 관계 건설에 정결의 증거가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설명한다.


살레시오 정신을 다루는 제15조는 이미 친절한 사랑과 정결을 한결같은 생활태도의 두 측면들로 연관지었다. 그것은 상호 유도적인("우정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사랑과 깊은 애정("아버지요 형제요 친구")의 역설을 실현시킨 경우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현혹적인 혹은 소유적인 사랑으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 들이려는 모든 유혹, 어떤 개인을 다른 사람보다 더 선호하는 모든 편애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젊은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어떤 젊은이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것은 하느님의 부성애적 특징을 인간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며, 이러한 봉헌된 정결에서는 친절한 사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참되고 온전한 사랑이다!


-"사랑과 순결에로 그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규칙서는 우리의 정결 메시지를 교육적 임무 자체와 관련지어 얘기한다.


교육자인 살레시오 회원은 젊은이들을 자유의 진정한 의미에로 개방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참되고 관대한 사랑을 형성시키기 위해, 결혼한 사람들로서 부모로서 혹은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로서의 미래의 사명을 준비 시키기 위해 예를 들어 여성에 관해서는 섬세함의 의미를 깨우쳐 줌으로써 그들의 삶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불리웠다. 정결 안에서 생활되는 사랑의 증거는 이런 과정을 통해 젊은이들과 동행하는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젊은이들은 그에게서 충실하며 희생적인 그리스도교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주 예수여,

우리의 창립자 돈 보스코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당신의 은총과

우리의 인내로운 노력에 의해 유지되는

열정적이고 찬란한 정결을 주소서.

우리를 당신께 긴밀히 결속 시키시어

우리로 하여금 당신 사랑의 전달자가 되게 하소서.

순결의 힘든 길목에서 젊은이들을 인도하게 하소서.

성부의 자녀들로서의 성소에 대해

젊은이들의 눈을 뜨게해 줄 진정하고 성실한 애정으로써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을 신뢰와 겸손으로써 당신께 간구하나이다.














82 조 정결과 인간 성숙




우리 사명의 교육적이며 사목적인 요구 때문에, 그리고 완전한 정결의 준수가 인간 본성의 가장 심오한 성향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 때문에¹ 살레시오 회원은 심리적 균형과 애정적 성숙을 이루어야 한다.


돈 보스코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말과 행위와 생각으로 정결의 덕을 준수할 수 있는 뚜렷한 희망이 없는 사람은 자주 위험을 만나게 될 것이므로 우리 수도회 안에서 서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1. 수도 12 참조.

2. 1875년 회헌 5,2 참조.






본 조항은 앞 조와 연관되며, 앞 조항의 주제를 계속 다루어 일정한 결론들을 이끌어낸다: 교육자로서의 우리의 사명에 아주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매우 미묘하기도 한 정결이 발전되기 위해서는 성숙한 인격이 필요하다.


본문의 전기들은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본문은 돈 보스코가 1875년 회헌에 포함시켰던 조항 1875년 회헌, 52 (F. MOTTO, p.109).

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의 내용에서 나온 것이다.


돈 보스코의 어귀는 살레시오 회원에게 있어서의 강하고 분명한 정결, "가난하고 버림받고 위험 중에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명에 비추어 볼 때 은총의 분위기에서 뿐만 아니라 적절한 인간적 양성을 통해서도 성숙되어야할 정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어귀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완전하고 빛나는 정결을 생활할 수 있게 해주는 충분한 인간적 수도자적 성숙이 결여되지 않도록 하려고 노심초사한 돈 보스코의 일차적 관심사를 반영한다: 애정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는 젊은이들, 혹은 때때로 부정적 경험을 지니고 있거나 가장 미묘한 성장 단계들 가운데 한 시기에 지도를 받아야 하는 젊은이들을 다룰 때에는 그러한 정결이 더욱 더 필요하다. 돈 보스코가 얘기하는 "위험"1875년의 다음과 같은 회헌 조항에 의해 설명된다: "이미 인간적 격정의 희생자가 된 젊은이들은 말과 외관에 대해 대수롭지 않은 경우에조차도 나쁜 해석을 내린다." 1875년 회헌 53 (위와 동).

신중한 침착성은 교육자들의 미덕이다!


돈 보스코가 얘기하는 정결을 보존하려는 "확고한 희망"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즉 과연 어떤 것들이 살레시오 사명의 충분한 성숙 표지들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다. 살레시오 전통에 따르면 그러한 희망을 주는 표징들은 흠잡을데 없는 이런 생활의 경험 속에서 특히 살레시오 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시험의 성공적 결과에서, 강한 신심생활에 대한 양성에서, 경험 많은 평의원들의 판단에서 "살레시오 성소 식별을 위한 기준 및 규범"(로마, 1985)에서는 정서적인 평정에 관한 식별요소들이 지적된다. 긍정적 측면을 나열하자면, 함께 사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여성에 대한 평온한 태도, 심리적 정서적 균형, 정결 선택을 가능케 하는 극기에 대한 능력을 들 수 있다(44항 참조). 부정적 측면에서는 염두에 두어야할 심리적 도덕적 질서상의 몇 가지 반대성향이 지적된다(47-49항 참조).

간파될 수 있다.


"우리 사명의 교육적이며 사목적인 요구"를 토대로 한 첫 번째 동기에 인간 발달에 있어서 성(àõ)의 역할에서 비롯된 두 번째 동기가 첨가될 수 있다. 본문의 말은 정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하는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으로부터 거의 그대로 인용된 것이다: "완전한 금욕을 지키는 것은 인간성의 깊은 데 있는 경향에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니 정결의 서원을 지망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충분한 시험을 거친 후가 아니면, 또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합당한 발육을 한 경우가 아니면 이 서원을 할 것이 아니며 또 그것이 허락되어서도 안된다." 수도 12.



특별총회가 설명하고 있듯이, 인간 성장에 있어서 성의 기능을 인정하는 공의회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으로서 완전히 의식적으로 생활되는 복음적 정결에 대한 성숙한 선택을 가능케 해 줄- 인격을 도야하기 위한 심리적 과정에 병행되는- 완만하고 점진적인 성숙 과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특별총회 562-563 참조.

분명하고 그리스도교적인 성교육의 필요성에 관한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에 나오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들도 우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특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현대의 어린이는 인간의 성을 일상적인 것으로 끌어내리는 문화 안에 살고 있고, 이 문화는 인간의 성을 단지 육체와 이기적 쾌락에만 연관 시키면서 축소되고 빈약한 양식으로 성을 해석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부모의 교육 활동은 성 문제에 있어서 진정으로 완전한 인격적 훈련을 끗끗하게 지향해야 한다. 성은 전체 인간을, 즉 육체와 감성과 영혼을 풍요하게 하며, 인간을 사랑의 선물로 만드는 데에서 그 가장 심오한 의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결 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정결을 인간의 성숙을 개발시키고 육체의 "결혼 의미"를 존중하고 육성하게 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부모(와 교육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의 징표를 식별하면서, 인간의 성이 의미하는 최상 형태의 자기 봉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동정 혹은 독신에 대한 교육에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쏟을 것이다." 가정 37: 정결교육에 관하여 사제 10"사제적 정결 양성 지침서" 로마, 1974, 18항 이하도 참조.



그러므로,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에페소서 4,13)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로 통합시킨 자신의 성을 동요없이 살며 또한 인간적 사랑과 그리스도교적 혼인의 가치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정결을 진정한 생활 계획으로 그리고 자신의 인격 발달을 위한 값진 은혜로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내적인 견실성을 가져다 줄 양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내적 작업은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얻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한편으로는 아무런 금지나 내적 방어 없이 자유롭게 인지된 애정적 욕구나 반응들이 자신의 살레시오적 수도 생활 계획과 의식적으로 관계지어 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진정한 인격적 사랑의 능력을 계발시켜 주는, 살레시오 교육 사명의 특징인 온건한 정신 상태에 이르게 된다. 살레시오 양성 지침서(1985). 92-93.

균형이 잘 잡힌 이런 종류의 정신 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불가피한 시련들을 성공적으로 극복(84에서 얘기될 것이다)하게 해주며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사는 삶의 숭고함을 기쁘게 증거할 수 있게 해준다.






빛이신 아버지,

당신은 우리가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지 아십니다.

우리 안에 당신 성령의 불과 힘을 밝혀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유일한 든든한 기반이신 당신께

우리를 결합시키는 사랑을 가지고

당신이 우리에게 맡기신 젊은이들의 선익을 위해

우리의 삶을 순수하고 온전히 증여하게 하소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83 조 정결과 공동생활




"사랑의 표지요 자극제인 봉헌된 정결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우리의 능력을 강화한다. 또 대인관계의 그리스도교적 의의를 우리 안에 성장시키고 참된 우정을 키우며 공동체를 가정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한편 공동체의 형제적 분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생활을 기쁘게 살도록 돕고, 이해와 애정에 힘입어 어려운 순간을 극복해 나가도록 돕는다.



1. 교회 42.






61조에서는 "복음적 권고의 서원은… 우리로 하여금 수도 공동체의 형제들과 함께 친교를 이루며 살도록 돕는다"고 얘기되었었다. 이 진리가 여기서는 특별히 봉헌된 정결과 관련되며, 공동체와 정결 간의 상호 관계를 밝혀주기도 한다: 정결은 참된 수도 공동체의 건설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수도적 친교생활은 복음적 정결을 기쁘게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1972년 이전의 회헌 본문에 관한한 이것은 새로운 주제이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이 주제를 도입하게 된 것은 수도적 정결이 공의회에 의해 분석되었기 때문이며, 적쟎은 위기와 포기들이 공동체 안에 정결의 구체적 분위기가 결여된 데에서 기인한 고독감에 의해 생겨남을 보여주는 경험의 결과다.




정결은 공동체의 건설에 기여한다.


본 조항은 봉헌된 정결에 관해 얘기하는 가운데 그것을 "사랑의 표지요 자극제" 교회 42.

로 일컫는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의 인용문으로써 시작된다. 이 표현은 하늘 나라를 위한 정결에 대한 선택이 "마음의 갈라짐 없이 하느님과 형제들을 깊이 사랑하는 복음적 방법"으로 정의되어 있는 제80조의 표현과 결부된다. 특별총회는 정결을 그리스도의 빠스카와의 관계에 비추어 다루는 가운데 수도적 정결은 빠스카 신비에 대한 관계로부터 이끌어낸 힘으로써 우리를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완전한 사랑에로 이끈다고 설명한다. 정결은 고립되어 보존될 수 없고 또한 그 자체 안에 폐쇄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와 사랑과 활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해져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성사요 형제애와 봉사의 표지이다. 특별총회 569 참조.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말대로 정결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한다.


특별총회는 "이 생기찬 힘은 수도적 정결의 공동체적 차원을 명백히 보여준다" 특별총회, 위와 동.

고 덧붙인다. 사실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일치시키고 그분의 사랑을 꿰뚫을 정도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 감화되어 그분이 사랑하시듯 온전히 희생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자유로와지고 권능을 부여받은 이 사랑은 형제적 공동체를 낳고 육성시키며 건설한다. 그것은 각 개인이 서로를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되는 친교를 강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본문은 계속해서 정결한 사랑 고유의 생생한 애덕이 지닌 몇 가지 측면들을 열거한다.


-정결은 "대인관계의 그리스도교적 의의를 우리 안에 성숙시킨다. 즉 형제들과의 대인관계를 형성시키고 그들에게 세심하고 성실한 형제애를 불어넣으며(친교적 사랑) 상호 봉사 정신을 키우도록 한다(자기 증여적 사랑): 이와 관련지어 우리는 제51장에 인용된 사도 바오로께서 권장한 태도들을 상기해 볼 수 있다.


-봉헌된 정결 안에서 생활되는 사랑도 "참된 우정" 즉 위압적이거나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증여 능력을 발전시키고 주 안에서 완전한 자기 성숙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값진 상호 부조인 우정을 키운다. 그러나 우정은 폐쇄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고 각자가 성실한 애정으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공동선에로 개방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돈 보스코가 깊은 우정을 어떻게 맺었는지를(우리는 특히 루이지 고몰로 및 돈 카파쏘와의 우정들을 상기한다) 알고 있으며, 그러한 우정이 덕행 연마에 도움을 주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종종 소년들에게 "돈 보스코의 친구"가 되어주라고 청했다. 공동체의 특징이 되어야할 바로 이러한 형제적 우애의 분위기는 제51조와 관계된 것으로서 주께서는 이러한 분위기를 통해 당신의 현존을 생생히 느끼게 하신다. 벗들이 되어 달라는 돈 보스코의 초대에 관하여,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3111, 140: 6210-212: 7386: 1017: 11215,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친구가 되자는 초자연적 동기도 참조(돈 보스코 전기, 영문판, 5354). 형제적 공동체 안에서의 우정에 관하여 "사제적 정결에 대한 양성 지침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발적 정결은 타인을 소유하지 않고 대할 수 있는 형제적 공동체 내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선상에서 바라볼 때, 즉 비소유적으로 실천될 때 이해된다. 그것은 친구들이 없을 때에도 그들의 현존을 체험하고 친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며 그들의 요구가 무한함을 보여주면서도 상호 인격적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시킬 때 드러내게 되는 정결의 표징이다"(49).



-이 모든 것의 귀착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봉헌된 정결은 "공동체를 가정으로 만드는데 기여한다." 즉 그것은 모든 회원이 현재 모습 그대로 환영받고 존경받으며 사랑받고 또한 독특하게 기여할 수 있는 가족적 분위기(이미 살레시오 정신과 형제적 공동체를 다룰 때 언급된)를 조성한다.




공동체는 정결을 기쁘게 생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둘째 단락은 위에서 얘기된 것에 대한 보완적 측면을 진술함으로써 정결과 공동체 간의 관계를 계속 다룬다: 정결이 형제적 애덕을 낳는다면, 형제적 애덕은 정결을 유지시키고 효과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진리는 정결의 보호물로서의 형제애의 중요성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다: "모든 수도자 특히 장상은, 회원들 사이에 공동 생활에 있어서의 참된 형제애가 충만할 때 정결은 더 확실하게 지켜진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다." 수도 12.



본문은 또 "공동체의 형제적 분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생활을 기쁘게 살도록" 돕는다고 말한다. 수도자는 서원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쳤으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산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그의 곁에 배치하신 형제들의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체험들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이 사랑이 느껴질 때 그는 정결과 관련된 포기와 어려움에 감연히 맞서 그것들을 극복하기 쉽다. 형제들 덕택에 그는 공동체 안에서 행복하고 자신의 정결을 "기쁨 안에서" 보다 쉽게 생활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하여 젊은이들에게 포기보다는 선물의 의미가 강한 진정한 정결을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다.


끝으로 본 조항은 "어려운 순간"에 형제적 공동체가 제공할 수 있는 특별한 기여에 관해 논한다. "어려운 순간"이란 결코 끊이지 않으나(다음 조항에서 알게 되겠지만) 간혹 더 지독한 유혹과 의심과 시련의 순간들을 말한다. 바로 이런 때에는 공동체 내의 다른 회원들의 이해와 애정이 참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런 시기에 각 회원은 마음을 약화시키는 갈등에 휩싸인 형제회원들을 어떻게든 도와 주어야할 의무가 있다.


돈 보스코가 매우 좋아했던 성서 말씀 "O quam bonum et quam incundum habitare fratres in unum"(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이 형제적 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때 참으로 그것은 정결 안에서 봉헌된 사랑의 기쁨을 맛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 주 하느님,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우리 형제들에게

완전하고 사심없이 자신을 개방하는

우리의 봉헌된 정결을

온전히 살게 하소서.


우리의 봉헌된 정결이

우리 공동체들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지고선이신 당신을 향해

기쁨 안에서 함께 걷게 해주고

시련기 때에 우리에게 힘을 줄

진실되고 성실한 우정과 가족정신을

꽃피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84 조 정결을 성숙시키기 위한 자세와 수단




우리의 정결은 단 한 번의 노력으로 영구히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평온한 때와 시련의 때가 있다. 정결은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매일 충실하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살레시오 회원은 회헌에 충실하여 일과 절제 가운데 살고 극기를 실천하며, 오관을 절제하며, 사회홍보 수단을 분별있고 조심성 있게 사용하며, 심신의 건강에 이로운 자연적인 수단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특히 무엇보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 현존 안에 산다.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키우며, 화해의 성사에서 겸손되이 이 사랑을 정화하고, 영적 지도자에게 단순하게 자신을 맡긴다.


원죄 없으시며 도움이신 마리아는 살레시오 회원이 돈 보스코 처럼 사랑하도록 도와주시고, 살레시오 회원은 그분께 자녀다운 신뢰로써 의탁한다.






돈 보스코는 정결의 덕을 제시함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영감을 받은 듯 그것을 찬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영성생활에 의해 고무되는 균형잡힌 고행 수단을 제시함으로써 정결의 보존에 대해 많은 권고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제시는 그가 쓴 회헌의 본문과 또한 그것에 대한 권위적이며 부성애적인 해설인 회헌 서문에서도 발견된다.


우리의 본문에서도 "정결을 성숙시키기 위한 자세와 수단"에 의미심장한 공간이 할애되어 왔다: 이 주제는 우리의 전통 뿐만 아니라 봉헌된 정결의 신비에 관한 풍부한 공의회의 교의와 현재의 살레시오회의 의견에 비추어서 다루어진다.




정결은 지속적인 발전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다.



84조의 첫 단락은 앞 조항들의 여러 가지 언명들을 토대로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어떤 면으로는 과거의 꽤 널리 퍼진 정신을 뒤엎은 중요한 사상을 포함한다.


살레시오 회원에게 "심리적 균형과 애정적 성숙"을 요구하는 규칙서는 이제 우리에게 "정결은 단 한 번의 노력으로 영구히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고 얘기한다: 즉 정결은 서원날 단 한번으로 영원히 얻은 보물이 아니라 그후로도 본래대로 "보존"될 것을 필요로 한다. 특별총회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특별한 독신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과업을 받아들이기로 자신을 개방하는 것" 특별총회 564.

이다. 진실로 정결은 하느님의 은총과 동시에 선택의 자유에 의해 산 사람 안에 새겨넣어진 특징이며, 그러기에 그 사람의 이력 및 완전한 성숙 과정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재활성화 되어야할 가치다. 바로 이것이 "결코 끝나지 않는 임무", 결코 완성되지 않는 기나긴 성숙과정이란 표현의 의미이다.


이 과정에서 정결은 "평온한 때와 시련의 때"를 갖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때때로 어려움을 겪으며 봉헌된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 덕분에 이겨낸 자신의 유혹과 연약함을 형제들에게 고백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던 사도 바오로를 생각해 볼 수 있다(2고린토 4,7-12:12, 7-10): 우리는 돈 보스코가 절친한 몇몇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던 대로 육체의 유혹과 성향을 면제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돈 보스코가 겪은 어려움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돈 루아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 덕행을 거스르려는 유혹들에 관해, 저는 돈 보스코가 음주상의 절제를 권고할 때 얘기했던 여러 가지 것들로 미루어보건대 돈 보스코가 그런 유혹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증언은 돈 레뮈엔의 증언과 일치한다: "언젠가 돈 보스코는 저도 참석했던 모임의 참석자들에게 육식보다 채식을 더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순결을 거스르려는 유혹을 느꼈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P. BROCARDO, Don Bosco profonda-

mente uomo, profondamente santo, LAS Rome 985, pp.111-112).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의 이유들을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선물들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복음의 증거"에서 정결에 관해 그것을 "인간의 약함 때문에 깨지기 쉽고 상하기 쉬운 것" 증거 15.

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수도자도 역시 성적인 존재이며 그가 살도록 불리운 시대와 장소의 구체적 상황들 속에서 인간 실존의 정상적 노선들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도자에게 결혼이나 혈육적 부성애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는 순간들도 있을 수 있다: 그가 외로움을 느끼거나 유혹이 점점 심해지는 때도 있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정결은 "매일 충실하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살레시오 회원은 주님의 부르심에 매일 새롭게 응답하며, 여러 가지 상황들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에 자신의 힘을 적용시키기 때문이다.




자연적 초자연적 수단



정결을 보존하는 수단에 관해 애기하는 가운데 돈 보스코는 우선 신중함을 젊은이들 및 세상과 관련지어 지적한다 1875년 회헌, 54,5.

: 다음으로 그는 기도나 성사와 같은 직접적으로 초자연적인 수단에 대해 지적한다. 1875년 회헌, 56.

이러한 순서는 지혜와 경험에서 나왔다: 가장 열렬한 기도들도 개인 생활 속에서 동시에 일정한 금욕과 고행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본 조항의 본문은 수도생활의 정결에 관한 공의회의 지침들에 명백히 관련지어 비슷한 순서를 따른다. 수도 12.

뒤의 세 단락들은 정결의 은총을 생생히 보존하고 그 성숙을 보장하는 여러 가지 수단들을 제시한다.


정결한 사랑을 보존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실천들을 표현하기 위해 회헌은 -돈 보스코의 본문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을 끌어들인다: "수도자는… 고행을 하고 감관을 삼갈 것이다. 또 정신과 건강에 유익한 자연적 수단도 사용하여야 한다." 위와 동.



고행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창립자의 권고들을 알고 있다: "육체의 감관을 잘 다스리십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특별히 절제할 것을 부탁합니다." 돈 보스코, 회헌 서문, 정결, 1984년 회헌 부록, 214.



훌륭한 육체적 균형이 정서적인 온건함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반면 끊임없이 억압받는, 과중한 부담을 짊어지는 생활에서 기인되는 신경과로는 조만간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될 기반이 되는 정신적 내지 육체적 우울상태를 야기시킨다. 돈 보스코는 첫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일을 하되 자신의 힘이 닿는데까지만 하십시오." 돈 보스코, 첫 선교사들에게, 1984년 회헌 부록, 245.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게으름을 피하십시오." 돈 보스코, 첫 선교사들에게, 1984년 회헌 부록, 244.

건강에 적당한 관심을 쏟는 때에도 일은 자기-증여의 실천적 표출을 위한 그리고 성적 본능들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이 때문에 회헌은 우리에게 "일과 절제의 생활"을 사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본 조항은 "사회홍보 수단을 분별있고 조심성 있게 사용"하는 것에 관해 특별히 언급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포기한 세상(죄악적 측면들)이 들어올 수 있는 창문들이다. 일반회칙 제44조는 이점을 공동체 생활의 관점에서 다시 거론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전술한 모든 것을 종합하는 수단은 회헌에 대한 충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돈 보스코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악덕을 이기고 정결을 충실히 보존하는 길은 거룩한 회칙을 정확히 준수하는데 있습니다." 돈 보스코, 회헌 서문, 1. ).



다음 단락은 "특히 무엇보다"는 어구로 시작된다. 이것은 그것의 긴요성을 명백히 지적하는 것으로서 제80조에서 이미 얘기된 것 즉 성부의 선물인 정결은 오직 은총의 분위기에서만 성숙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개인적 노력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들은 소용 없으리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정결은 그 원천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요 그러기에 우리가 이러한 무한한 사랑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유지되거나 발전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러므로 규칙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생명을 맡긴 최고 선이신 그분과의 긴밀한 일치를 촉진 시키기 위한 일련의 수단들을 제안하며, 우리는 이런 수단들이 곧 우리의 창립자께서 권장한 것들임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첫번째로 언급된 것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생활하는 삶 안에 연장된 기도이다: 동정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은 삶의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생생한 대화 속에서 생활한다.


-주님과의 이러한 대화에서는 화해성사와 성체성사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의 사랑은 용서의 성사 안에서 끊임없이 정화되고, 날마다 주님의 몸과 피의 식탁에서 육성되며, 주님의 식탁으로부터 힘과 위풍을 이끌어 낸다.


-우리는 하느님의 원의를 식별하도록 우리를 도와 주고 하느님의 사랑에 더 잘 응답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는, 우리의 인생의 행로에서 우리와 동행하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의 중요성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끝으로 본 조항은 우리의 시선을 원죄 없으시며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로, 돈 보스코의 지도자였으며 우리의 성소에 충실하도록 우리도 이끌어 주실 마리아께로 우리의 시선을 끌어 올린다.


맨 초기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부터 마리아는 "동정녀",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 "동정녀 중의 동정녀"로 불리웠다. 마리아의 동정은 그분의 성소와 육화의 구원적 신비의 핵심을 차지한다. 예수 다음으로 마리아는 가장 완벽하게 그리스도교적 수도적 동정이 실현된 이들 중 한분이시다. 마리아는 교회의 동정성의 모범이요 전형이요 본보기인 동시에 교회의 적극적 후원자 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계획에 완전히 동의했기에 우선 정신적으로 동정이며 정결한 새 인간성의 표징이요 첫 열매인 당신 아드님과 결합되어 있기에 육적으로도 동정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뢰를 가지고 마리아께 의지하며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와 젊은이들을 위해 우리의 사랑을 강화시키고 관대하게 만드실 수 있도록 마리아께 우리의 사랑을 맡긴다. 규칙서는 마리아께서 돈 보스코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사랑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확언하다.


우리는 복음적 권고들에 관한 제5장 전체를 끝맺는 조항에 나오는 마리아께 대한 이러한 언급이 마리아를 복음적 권고들의 정신 속에서 우리의 전체 삶을 기울인 기쁘고 관대한 응답의 모범으로 간주하라는 초대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한 모범("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이요, 정신적인 청빈의 모범("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이며, 정결한 사랑의 모범("이 몸은 처녀입니다")이다. 마리아를 모방함으로써 우리도 하느님께서 당신 종들에게 이루신 큰 일들("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주셨습니다")을 경험할 수 있다.






주께서는 완벽한 정결의 유대 안에서

강하고 충실하며 기쁨 넘치는 신뢰로써

완전한 자기 증여를 생활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인내의 선물을 청하고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라고 간구합시다.


우리의 나약함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두려움과 실망을 주기보다

성령의 도우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에로

우리를 인도하도록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형제들을 위한 기도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교육 사명에의 헌신 속에서

충실성에 대한 우리의 임무를

매일 새롭힐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정결의 보존과 성숙을 위해

돈 보스코께서 제안하신 수단인

기도와 고행,

일과 절제를

충실하고 열심히 사용하도록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식탁에서

끊임없이 육성되고

화해 성사에서

끊임없이 정화되도록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당신은 하늘 나라를 위한 정결에로 우리를 부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사랑에 봉헌시키셨나이다.

우리에게서 당신 계획을 모두 이루시고,

동정 마리아와 돈 보스코 및 우리의 영광받은 형제들의

모범과 전구로써,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하시고

세세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당신이 보시기에 언제나 기쁘고 정결하게 하소서.





































7 장 주님과의 대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모든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십시오. 그리고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골로 3,16-17).






본 장에 충분한 영감을 주는 성서 본문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본 장에는 동기를 부여할 목적으로 오직 두 성서 본문만이 명시적으로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묵상(루가 2,19. 51)이 제87조에,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하느님께 대한 감사(에페소서 5,20)가 제95조에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상징적인 구절은 최후에 선택된 것으로서 함축적 의미와 실제적 명성을 지닌 구절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목적은 세상과 인간의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중심 위치 내지 수위권을 가능한 한 강력히 강조하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거짓 신들에 대한 두려움과 봉사를 없애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지도 밑에서 모든 피조물을 화해시키는 수위권이다(1,15-2,23).


이것은 이 "신비"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공동체 생활로 이어진다. 전통적인 전례 규정과 교리교육 규정 및 활동 규정이 여기서 다시 거론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은" 생명(3,3)에 대한 행복한 자각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전부로서 모든 사람 위에 군림"(3,11)하시기 때문에 광의의 교회 일치적 의미에서 강조되고, "이방인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영광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희망"(1,27)에 의해 확인된다. 새 인간(3,5-11)과 새 공동체(3,12-17)가 거론된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의해 유지되는 새로운 공동체(3,12-13, 51조에서 형제적 공동체와 관련지어 인용된 본문)는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의 말씀에 열심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는 긍지를 지니며 당연히 공동체에 잘 맞는다. 그것은 전체 수도회에 생명력과 일치와 추진력을 부여한다. 그것은 교정과 훈도의 말로 회원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산 지혜가 되며, 성령의 감화를 받은 합창 예식 즉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기도로 사용되는 구약 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작품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드리는 감사(eucaristia)에 의해 특징 지어지는 의식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런 예식의 분위기는 바오로 자신이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장엄한 송가로 시작하고 있는 방식에 의해 지적된다(1,13-20). 그러나 말씀의 효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효과를 발휘하여 생활이 곧 전례가 되는 곳인 실존 전체(말과 행동)를 꿰뚫는다.


말씀에 대한 경청, 예식(성체성사), 공동체적 교화 및 세상 안에서의 사명은 살레시오 회원들 편의 "주님과의 대화" 내용과 분위기와 리듬이 되는 경험들의 역동적인 효과이며, 그것에 대한 회헌 조항들은 돈 보스코의 훌륭한 가르침에서 모범적인 표현이 된다.






* * *




1. 본장의 위치



2부 서문에서 이미 언급된 것이지만, 맨 먼저 지적될 점은 제2"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에 의해 만들어진 커다란 구획 안에서 현재 그 결론으로 자리잡혀진 살레시오 회원의 기도에 관한 본 장의 새로운 위치이다. 기도에 관한 장이 사명(4), 공동체(5), 복음적 권고들(6)과 같은 주제들 다음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이유로 기도가 지닌 중요성을 경감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다! 기도를 여기 마지막 부분에 배치시킴으로써, 22차 총회는 젊은이들 가운데서의 여러 가지 임무들과 공동체 안에서 생활되는 형제애 및 순명과 청빈과 정결의 요구들을 비롯하여 살레시오 회원의 봉헌된 사도적 생활이 성령이 아니시면, 기도와 성사들 안에서 끊임없이 제공되고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 없다면 실천될 수도 가능하지도 않을, 우리의 선의에서 우러난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지극히 초자연적인 특징을 띤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두고자 했다. 살레시오 회원이나 공동체가 기도하고 은총의 성사적 원천들에 가까이 다가갈 때, 살레시오 회원은 그를 축성하셔서 파견하신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가시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는 "하느님과의 친밀하고 본질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85조가 진술한대로)을 회복시키고, 하느님에 의해 정화되고 생기를 얻어 하느님 나라에 더 잘 봉사하도록 다시 파견되기 위하여 주님과 직접적인 만남을 갖는다.


살레시오 회원의 생활과 활동상의 모든 구체적인 임무는 기도 안에서 꽃피도록 되어 있으며, 2부 본 장의 마지막 조항에서 잘 얘기되겠지만 그 자체가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가 된다고 암시되기도 한다.


이렇듯 본 장의 위치를 참작할 때 "주님과의 대화"가 분명히 필요하다.




2. 본 장의 제목



본 장의 제목은 본질적으로 뚜렷한 기도에 대한 정의이자 또한 제12조에서 이미 지적된 서원한 살레시오 회원의 생활의 지반을 이루는 근본적인 영적 태도에 대한 진술이다: 살레시오 회원은 "가까이 계시는 성부와 단순하고도 친근한 대화를 통하여 항상 기도할 필요를 인식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발전시켜 나간다." "주께서 우리와 맺으신 특별한 계약"(회헌 195)은 우리에게 "주님과의 대화 속에서" 살기를 요구한다.




3. 본 장의 전반적 시각



본 장 전체는 회헌 제2부 전체의 시각에 의해 구체화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로서 젊은이들에게 파견된 이들."


우리의 기도는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그분의 말씀에 의해 깨우쳐지며, 그분의 살과 피로 양육되고, 그분의 신비에 의해 생기를 얻으며, 그분의 용서에 의해 정화되고 그분의 어머니의 모범과 간여에 의해 자극받아 함께 일하는 "젊은이들의 선교사들" 22총회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메시지: 22총회 13.

에게 알맞는 기도이다. "사목적 사랑" 내지 "착한 목자의 사랑"은 두 곳에서(회헌 92,95) 구체적으로 사용된 용어이나, 그것에 대한 언급들은 다른 조항들에도 많이 나와 있다: 85조는 공동체의 기도를 "da mihi animas"에 비추어 생각한다: 86조는 "사목적 기도"에 관해 얘기한다: 87조는 말씀에 대한 매일 묵상의 결실들 가운데 "열성으로 이를(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본다(회헌 93도 참조): 88조는 성체성사에 의해 인도된 우리는 "사도적 임무를 새롭게" 하며 성체성사로부터 "청소년을 위한 활동에 필요한 활력과 끈기"를 얻는다고 말한다: 90조는 화해의 성사에 관해 얘기하는 가운데 그것은 "사도적 지향을 정화한다"(회헌 92)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모든 기도는 우리의 "지칠 줄 모르는 근면"(회헌 95)과 결부된다.


그러므로 살레시오 회원의 기도 생활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은 동일한 목적에 수렴된다: 그의 생활의 불가분한 두 지주들 즉 그를 구원사업의 도구로 선택해주신 주님과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젊은이들에게 집중된다.




4. 두 가지 주요 특징들



위에 언급된 근본 측면들 속에서 제22차 총회는 관구 총회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었던 이중적 중대 관심사를 접한다: 우리의 기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이루어진 전례 쇄신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여 매우 교회적이면서도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독특한 사명에 어울리게 특징적으로 살레시오적이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관심사를 접한다.


1) 확실히 교회적인 기도 형태에 대한 관심은 "기도"라는 표현이 쓰이는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것을 보다 잘 이해하게 해주는 세 가지 점들에서 특별히 드러난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활동을 환영하며 하느님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선 하느님 말씀이 지닌 확고한 선도적 역할에 관심이 쏠린다: 기도는 참으로 대화이다. 하지만 이 대화에서 주도권을 가진 쪽은 주참여자인 하느님이시다. 기도생활은 무엇보다도 듣고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 자체는 듣고 이해할 말씀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다. 7장은 매우 시의적절하게 경청하고 응답하는 것의 역동성에 관해 주장한다: 이에 대한 명백한 언급들은 첫머리의 성서 구절과 제85(초대와 응답), 87(말씀은 경청되고, 받아들여지고, 묵상되며, 결실을 맺고, 전파된다), 88(말씀의 전례), 90(회개에로 부르시는 말씀), 91(경청과 식별)에서 발견된다.


본 장도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형제적 친교 및 사도적 임무의 절정이요 완벽한 원천으로 여겨지는 빠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성체성사의 구심성을 강조한다. 성체성사는 말씀에 대한 경청으로써 준비되고 성무일도에서 연장된다(회헌 88,89).


끝으로 본문은 세 가지 리듬 즉 매일(시간경) 매주(주일 예식) 매년(전례력)의 성시간의 전례적 차원에 관심을 기울인다. 전례 전체를 통해 제시되며 또한 전례에 가장 특징적인 모습을 부여하는 감사와 찬미의 움직임이 지적되기도 한다: 성서 인용문, 89(성부께 대한 찬미), 92(성모 찬미가 manificat의 기쁨), 93(성부께 드리는 감사), 95(모든 일에서의 감사)가 지적된다.



2) 회헌 본문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또 하나의 관심사는 우리 기도의 살레시오적 양식에 대한 강조이다. 다시 여기서는 세 가지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우리 기도의 특징과 돈 보스코 자신의 기도 중심의 토대를 지적하기 위해 한 조항 전체가 할애되어 있다(회헌 86).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를 서술한 것은 아니며, 사실 우리의 기도 양식의 특징들 가운데 몇 가지는 회헌의 다른 조항들 즉 우리기도 양식의 성사적 마리아적 요소들에 관해 지적하고 있는 조항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특별히 주목할만한 두 가지 점들이 더 있다. 본문에 드러나 있듯이 살레시오 회원의 기도에는 "da mihi animas"(이미 본 장의 전체적 시작과 관련지어 주목한 바 있는)라는 사도적 개념이 침투되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살레시오 기도는 "삶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삶 속에서 계속 되는 기도"(회헌 86)이며, "삶의 전례"(회헌 95)가 된다. 실제로 돈 보스코는 기도와 생활 사이에서 불일치를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우리에게 "일치의 은총"을 살며 열성적인 활동과 깊은 내적 생활을 결합시킬 수 있고 젊은이들에 대한 근심이 가득 찬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하느님의 불타는 마음으로 젊은이들 가운데서 일하는 사도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다.




5. 본 장의 구조



우리의 이제 본 장의 구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본 조항은 모두 1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네 개 부분으로 쉽게 나뉘어질 수 있다:


1. 우리 기도의 전반적 의의와 특징들


-기도는 하느님의 주도하심에 대한 응답이다: 85

-기도는 살레시오적 양식을 지닌다: 86


2. 우리 전례 생활의 결정적인 요소들


-말씀에 대한 경청과 적극적 수용: 87

-성체성사 거행과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 88

-시간의 전례적 성화: 89


3. 끊임없는 회개와 그 표현들


-매일의 회개와 화해성사: 90

-특별한 "쇄신의 때"의 회심: 91


4. 세 가지 주요 요소들


-마리아: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경모하는가: 92

-살레시오 회원의 개인기도: 93

-죽은 형제회원들에 대한 추모: 95


5. 결론: "삶의 기도" : 95




6. 공동기도와 개인기도



각 조항은 검토하기 전에 지적해야할 측면이 또 있다.

우리는 개인기도 뿐만 아니라 공동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의 이유는 단순하나 근본적이다: 교회 안에 그리고 수도회 안에 있는 우리들 각자는 하느님 앞에서 서로 다른 독자적인 개인이며 서로 구별되는 모습을 지닌 자녀이나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이요 살레시오 공동체의 일원이기도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두 종류의 기도에 관해 얘기하고 있으며, 사실 그분은 그 두 가지 모두에 전념했다. 실제로 그 두 종류의 기도들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


때때로 질문을 받게 되는 문제가 있다: "두 형태의 기도 중 어떤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 원칙 차원의 해답은 분명하다: 공동체적 전례기도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다." 전례 10.

한편 개인기도 없이는 공동기도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애덕의 최고 법칙은 하느님의 원의에 완전히 일치하는 데에서 실현되므로, 살레시오 회원은 공동체와 더불어 혹은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규칙서를 통해 혹은 생활 환경이나 사도직을 통해 그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응답할 것이다.


7장을 살펴 보면서 우리는 본문이 기도를 항상 공동체와 관련지어 얘기하면서도 자주 각 개인의 개인적 투신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할 수 있다. 여러 조항들이 이 두 측면들에 적용될 수 있는 점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어떤 조항들은 개인기도에 대해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감실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회헌 88), 살레시오 회원에게 있어서 풍요로운 경험인 일요일(회헌 89), "각 개인이 지닌" 속죄 의무(회헌 90), "회원 각자"를 위한 피정과 영성 수련(회헌 91), 보다 확실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마리아를 잘 본 받기" 위한 마리아 신심(회헌 92), 그리고 끝으로 제95조 전체는 살레시오 개인의 관점에서 쓰여진다.


그러므로 회헌은 공동기도와 개인기도를 밀접히 결합시킨다. 거기에서 우리는 총장이 표현한 관심에 대한 반응을 발견할 수 있다: "내적 생활의 부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이 '개인기도'에 대한 다시 말해서 모든 수도자들의 마음의 뿌리인 묵상적 차원에 대한 열성 부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개인기도는 이처럼 불가분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 조성된 확신에 찬 참 공동기도의 토대입니다." 에지디오 비가노, 22총회, RRM, 284.




























85 조 기도의 선물




공동체는 인간적 원의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빠스카의 열매인 교회의 신비를 가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같은 모양으로 하느님은 우리의 공동체를 모으시고 당신의 초대와 사랑으로 일치시키신다.


살레시오 공동체는 기도할 때 이 초대에 응하며, "Da mihi animas, cetera tolle"라는 돈 보스코의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서 하느님과의 친밀하고 본질적인 관계와 구원 사명에 대한 인식을 굳세게 한다.






본 장은 공동기도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목적으로 공동체의 관점에서 얘기하는 조항에 의해 시작된다. 공동체는 왜 기도하는가, 기도할 때 공동체는 무엇을 기도하는가? 경건한 체하는 정신상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기도에 그것의 기본적이고 생생한 특징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처음부터 상술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진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섬기도록 축성하시고 파견하신 수도자 사도들의 집단으로서의 살레시오 공동체의 초자연적 토대이다(회헌 3 참조). 첫 단락은 이러한 신적 주도권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하여 신적 주도권은 회헌의 첫 선언과 결부된다: "우리는(우리) 회가 단순히 인간적 계획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생겨났음을 믿는다"(회헌 1). 둘째 단락은 이것으로부터 논리적 결과들을 이끌어낸다: 기도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원천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주님과의 대화"에 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공동체를 일치시키시고 그 일치를 유지시키신다.



공동체의 초자연적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 본문은 그것의 교회론적 의의를 상기시키며 이렇게 하여 그것을 공동체에 관한 제5장에 결부시킨다.


교회는 "친교""신비"(15조에서 말했듯이)이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에 바탕을 두고" 교회 4.

신자들을 형제적으로 일치시키며, 그러므로 이러한 일치는 그 근원이 신적인 것이기에 신적이며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는 화해를 가져오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약을 이행하셨으며 구원된 교회를 일으키시어 교회에 성화의 성령을 보내신다.


이러한 신비를 띤 공동체는 예루살렘의 첫 공동체의 모범을 따라 동일한 특별초대를 느끼는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게 하기 때문에 가시적인 표현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수도생활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 교회 43-44 참조: 수도 1,2 특히 15 참조. J. AUBRY, La vita religiosa nella sua dimensione ecclesiale, in Teologia della vita religiosa LDC Turin, 1980, p.47-59.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야할 근본 진리는 우리 공동체들의 분명한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일치시키거나 또는 최소한 우리의 보다 깊은 일치를 가져오는 것은 무의식적인 동류-의식이나 함께 일하려는 갈망이 아니며, 우리가 사도적 활동에 투신하는 것도 우리 자신의 창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를 일치시키시고 그 일치를 유지시켜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성부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한데 모으는(회헌 87) 당신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으로 곧 성령으로 "공동체에서 살도록 우리를 부르신다"(50).


다시 말하지만,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우리를 파견하신 분은 성부이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오순절의 성령을 보내신 분은 부활하신 성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서 제자들을 일으킬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의 원장에 관해 얘기했던 제55조는 "원장은 성부를 섬기도록 당신의 제자들을 한데 일치시키는 그리스도를 대리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기도생활은 전적으로 이러한 신앙의 확신들을 토대로 삼고 있다. 우리는 특별총회의 문헌에서 이러한 내용을 접한다: "우리의 '작은 교회'가 기도 안에서 재일치되는 순간들은 보편 교회인 '기도하는 큰 공동체'의 한 표현이다." 특별총회 538.



기도는 오라토리오의 토대였다고 한 우리의 아버지 돈 보스코의 의미심장한 말을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궁극적으로 기도이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 나는 이곳을 오라토리오라고 불렀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373.





공동체는 하느님의 주도하심을 인정한다.



분명히 공동체는 공동체적 관계들과 사도적 임무들 안에서 그 "신비"를 항구히 사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이 신비를 직접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고, 가시적으로 드러내야 하며, 어떤 시각에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이 신비의 힘을 재가동 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적 기도의 근본적 의미이다.


살레시오 공동체는 기도할 때 분명히 그리스도교 기도의 목적들을 모두 달성하며 그 이상의 것까지 달성한다: 살레시오 공동체는 자신을 교회의 마음 안에 있는 특별한 공동체로 거듭 주장하며, 자신의 깊은 신원을 재발견하고, 형제적 친교와 사도적 봉사를 참으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쇄신시킨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하느님과의 친밀하고 생생한 관계" 특별총회 538-539 참조.

를 망각해 버림으로써 점차 그 자신의 신원의 의미를 잃을 것이고 그 뿌리를 파괴할 것이다. 명백히 그것은 주로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와 질의 문제다.


이렇듯 우리의 기도가 전체적인 의미로 정의된 "주님과의 대화"에서는 우리 쪽이 명백히 구체화된다: 현존과 활동으로써 늘 주도권을 장악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언제나 응답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선물(본 조항의 제목을 빌자면 "기도의 선물")이면서 아들들의 사랑의 응답이기도 하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호소하는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우리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실까에 대해 의심하는 있을 법한 유혹에 대해 우리의 신앙은 즉각 반응한다: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당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파견하신 분께서 어찌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인가?"


본 조항은 기도의 사도적 측면을 상기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기도하는 공동체는 "구원 사명에 대한 인식을 굳세게 한다." 살레시오 공동체는 기도하는 공동체이지만 가장 깊은 묵상의 순간에도 구원 되어야할 젊은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우리의 지표를 인용한 것은 훌륭한 생각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 열성의 신적 원천을 인식하는 것은 사실 기도와 탄원에 의해서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Tu, Domine, da mihi animas(오 주여, 제게 영혼을 주소서. 그러면 저는 그들을 당신께 다시 데려갈 수 있으리다!)" 살레시오 회원에게 있어서 기도는 언제나 주님에 의해 젊은이들에게 파견 된다는 새로운 자각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조항은 이 진리를 밝힐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당신은 우리 공동체를 한데 모으시어

당신의 말씀과 사랑으로 일치시키셨나이다.

당신과의 유대에 대한 자각이

우리 안에서 활발히 효과를 발휘하게 하시며

돈 보스코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당신께 매일 이렇게 간구하게 하소서:

"저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 것은 모두 가져 가십시오."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86 조 살레시오회의 기도




성령께 순응한 후 돈 보스코는 자연스럽게 기도를 삶에 통합시키는 겸허하고 신뢰에 찬 사도적 기도를 체험하며 살았다.


우리는 돈 보스코로부터 젊은이들의 삶 안에 은총이 역사하심을 깨닫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그들 각자 안에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고 구원의 동일한 희망을 나누기 위해 그들과 함께 기도한다.


살레시오 기도는 기쁨에 차 있으며 창의적이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또한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회원들을 인도하고, 삶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삶 속에서 계속되는 기도이다.






우리의 기도는 젊은이들의 선익에 봉헌된 사도들의 기도라는 사실로부터 그 전형적인 살레시오적 특징들을 이끌어낸다.


이미 "살레시오 정신"에 관한 제2장은 살레시오 신심의 중요 요소 즉 우리가 본 장의 끝에서 돌이켜 볼 활동 중에서까지의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일치 내지 기도정신에 대해 서술했었다. 본 조항 제86조는 우리의 외적 기도의 전반적 양식을 세 단계로 요약한다:


-돈 보스코는 우리의 모범이시다.


-우리의 기도에서는 젊은이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위의 두 사실로부터 우리 기도의 전형적 특징이 나온다.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모범이신 돈 보스코



"우리는 돈 보스코로부터 …배운다": 돈 보스코는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으로보다는 활동의 모범으로 더 자주 제시된다: 그러므로 회헌이 우리에게 외적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기도한 거룩한 사제요 교육자로서의 그의 경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것은 돈 체리아의 책 "Don Bosco con Dio(하느님과 함께 산 돈 보스코)"에 영감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돈 보스코의 기도 정신에 대해 증언했다. 시복과정 중에 돈 바르베리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한다: "돈 보스코는 언제나 기도하셨다: 나는 그분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기도하시는 것을 무수히 보았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기도하셨다. 여행 때 그분은 교정쇄를 고치지 않을 때는 언제나 기도하셨다." D. BARBERIS, Summarium super virtutibus, Unione con Dio.

돈 루아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분이 짧은 휴식 동안 기도에 몰입해 계신 것을 여러번 목격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4318.



돈 보스코는 기도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발적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나눠 가지시려는 것으로 여겼으며, 기도에 절대적인 우선권을 부여했다: "기도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늘에서부터 출발된 것이 아니라면 잘 시작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탁월한 활동이었다. 왜냐하면 기도는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을 이겨내기 때문이다. 기도는 "고기에 대한 물, 새에 대한 공기, 사슴에 대한 시냇물, 몸에 대한 온기"와도 같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뒤흔든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3250: (이태리어판) 12626: (이태리어판) 15492: 돈 보스코가 기도에 부여한 중요성에 관해서는 P. BROCARDO, Don Bosco, profonda- mente uomo-profondamente santo, Las Rome 1985, p.99.

"기도를 소홀히 하는 이들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998.

고 그는 되풀이하곤 했다. "궁극적으로 기도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373.



진실로 돈 체리아는 이렇게 쓸 수 있었다: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기도 정신은 훌륭한 군인의 순국 정신 내지 훌륭한 예술가와 과학자의 보존 정신이었다: 일관성과 큰 기쁨을 가지고 기꺼이 활동하는 영혼의 습관적 성향이었다." 체리아, 하느님과 함께 한 돈 보스코, 105-106.



나중에 우리는 둘째와 셋째 문단에서 돈 보스코에게서 볼 수 있는 기도의 특징들을 분석하게 될 것이다. 우선은 그 사실만을 기억해 두기로 하자. 창립자를 오래 응시하면 우리 기도의 올바른 양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의 양식은 우리가 값진 유산으로 받아 들인 카리스마의 일부이다. 우리도 성령에 순응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앞 조항의 끝에서 얘기했듯이 "da mihi animas"라는 사도적 색조를 띨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우리의 청소년 직무에 알맞는 형태로 표현될 것이다.




우리 기도에서는 젊은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돈 보스코는 어떻게 기도했을까? 돈 보스코의 기도 방식을 종합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기도가 젊은이의 구원 외에는 아무런 목적을 지니지 않았던 하느님의 사람의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도에서마저도 그는 제20조와 21조에서 얘기된 예방교육의 "영적이며 교육적인 경험"을 살았다.


회헌은 이 사실로부터 살레시오 기도는 청소년 구원에 투신하면서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도와 교육자의 기도라는 점을 연역해낸다. 돈 보스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살레시오 회원에게 있어서도 기도는 활동에 선행되고 활동을 수반하며 활동에 뒤따르는 불가분한 요소이다. 기도는 활동에 선행한다. 사도는 하느님 안에서의 하느님께 따른 활동을 기도 중에 생각하고 기도 중에 자신의 활동이 하느님의 원의와 영혼을 지향토록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활동을 수반한다. 특히 피로와 어려움의 순간에 은총과 도움을 간구하며 주님께 끊임없이 활동을 문의하기 때문이다. 돈 보스코는 우리에게 "위험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절대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합시다"고 권고한다: "우리가 신뢰를 가지고 하느님께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감사의 행위로써 활동을 뒤따른다: "주님은 얼마나 좋으신가!" "하느님의 일들은 놀랍다." P. BROCARDO, 3)과 동.



그리하여 교육적 사도적 경험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이 기도에는 젊은이들이 현존한다. 규칙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지적한다.


우선 그들은 영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젊은이들은 자동적으로 우리의 기도와 의향 안에 들어온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은총의 신비로운 활동에 마음을 열어 우리의 노력들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그들의 현세적 행복과 항구한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들 각자 안에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젊은이"나 우리의 특수한 단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참으로 젊은이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기도할 것을 일깨워준다. 시시때때로 살레시오 회원은 자기 반이나 오라토리오의 모든 소년들의 명단을 가지고 경당에 들어가 우리 주님이나 우리의 복되신 동정녀께 그들을 한사람씩 데려가 각 사람의 이름과 모습을 떠올려 볼 것이다. 그는 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이런 기도 동안에는 절대 지루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실제적 현존도 배제되지 않는다: 우리는 가족적인 방식에 따라 함께 사는 교육원칙을 적용시켜 "그들과 함께 기도한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에는 얼마나 많은 결과들이 뒤따르는지! 당장 두 가지가 떠오른다. 우리는 너무 야심적이고 너무 지적이고 엄격한 기도 양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 기도는 젊은이들의 수준에 맞아야 한다. 젊은이들이 우리의 기도에 가담하기 힘들어 하거나 우리의 기도를 계시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고 여긴다면 이는 그것이 살레시오적이지 못하며 "다시 젊게" 고쳐질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와 젊은이들은 "구원의 동일한 희망"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두 번째 결과: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기)¡¦À§ÇØ ±×µé°ú ÇÔ²² ±âµµÇÑ´Ù." 우리의 임무들 가운데 하나는 젊은이들에게 기도를 교육시키는 것이다. 교육자들이 먼저 기도하지 않거나 "정신적으로 진실되이" 기도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한계선 안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언젠가 단체로 피정을 하던 젊은이들 가운데 한명이 설교자에게 물었다: "아버지, 당신은 기도에 관해 많은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신 자신이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간단히 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말로서는 조금, 착수과정에서는 많이 배워지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젊은이들과 함께 걸으며 …교회 전례에 젊은이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인도한다"고 제34조와 36조는 말한다. 우리의 기도는 기도의 실천적 학교가 되어야 하기도 한다.




살레시오적 기도 양식



우리는 기도자로서의 돈 보스코의 모습을 간략히 묘사해왔으며 그가 그의 사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기도에 부여한 중요성에 대해 얘기해왔다. 그러나 회헌도 그의 기도와 살레시오 기도의 원칙적 특징들 가운데 몇 가지를 나열한다: 참되고 형태상 본질적으로 완벽하고 단순하며 내용상 대중적이고 표현상 기쁘고 흥겨운 기도: 모두에게 특히 어린이들과 서민들에게 알맞는 기도: 끝으로 본질적으로 행동을 지향하는 기도.


"돈 보스코의 기도"에 관한 첫단락과 "살레시오 회원의 기도"에 관한 셋째 단락을 결합시킴으로써 우리는 이른바 "살레시오 기도 양식"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의 적쟎은 특징들을 간파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특징들 가운데 세 개만을 살피게 될 것이다: 단순함과 생생함과 진실됨. 이 세 가지 것들은 젊은이들과 서민들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단순함. 살레시오 기도는 "단순하고, 겸허하고, 신뢰에 찬" 기도라고 일컬어진다. 살레시오 기도는 복음적 영감과 길이와 외적 표현 면에서 단순하다. 살레시오 회원은 "하느님의 부성애를 체험"하며, "가까이 계시는 성부와 단순하고도 친근한 대화를 통해 항상 기도"(회헌 12)한다. 그는 너무 길거나 지루하며 싫증날 염려가 있는 기도는 피한다(그러나 더 길게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너무 번지르하거나 감정적인 외적 표현이나 사실상 선택된 몇 사람만을 위한 기도일 수도 있는 것에서 나오는 과장된 형식이나 복잡한 예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생생함.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단순하다"는 것은 "수동적이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본 조항에서 살레시오 기도는 기쁨에 차 있으며 창의적이고 또한 공동체 참여를 유도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살레시오 회원은 "기쁨이 퍼져나가게 하며, 크리스챤 생활의 즐거움과 축제의 의미에로 인도할 줄 안다: '즐거움 안에서 주를 섬깁시다' "(회헌 17). 돈 보스코는 전례가 노래와 음악, 그리고 주의를 집중시키고 내적 기쁨을 새롭히며 참석자들에게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균형잡힌 다양성을 갖추어 매력적으로 잘 진행되기를 언제나 원했다.


-진실성 또는 확실성. 돈 보스코가 생각한 단순하고 기쁨이 넘치는 기도는 피상적인 기도가 결코 아니었다. 살레시오 기도는 깊고 심오해야 하며, 어느 의미로는 기도를 자연스럽게 생활과 결부시킨다: 살레시오 기도는 "삶과 밀접히 관련 되어 있으며 삶 속에서 계속되는 기도이다." 그것은 성실하고 신심깊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며, 순응주의나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참된 신앙형식을 원한다. 생활을 조금씩 "전례"와 영적 예배로 변화시키는,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참된 신앙 형식과 품위있는 동작과 예식을 원한다.


본 조항의 내용을 요약하고 싶으면 본 장의 서두에 인용된 성 바오로의 말씀으로 되돌아가 볼 수 있다: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 하십시오. 여러분은…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골로사이 3,16-17) 하십시오.


특별총회는 살레시오 회원의 "기도 양식"의 윤곽을 그리는 동안 "단순하고 생생한 기도"에 관한 얘기에 덧붙여 그 특징들 가운데 성사적 세계에 대한 개방성과 마리아께 대한 특별한 신뢰를 지적한다. 특별총회 103-105 참조.

다음 조항들은(회헌 80, 90, 92 참조) 특별히 이 요소들을 다룰 것이다.






주 예수여,

당신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나이다.

우리에게도 돈 보스코처럼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신뢰,

젊은이들의 기쁨과 창조성,

사도들의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소서.


우리의 기도를

우리 생활 전체에 연장시키도록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로 하여금

젊은이들을 위한 당신의 은총의 계획들에 협력하여

당신과 하나되어 그들의 구원에 기여하게 하소서.


세세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소서.











87 조 말씀을 경청하는 공동체




하느님의 백성은 우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이게 된다


믿음으로 경청하는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 생활의 샘이며 기도의 양식이요, 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게 하는 빛이며, 우리의 성소를 충실히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우리는 성서를 매일 손에 들고² 말씀을 받아들여 결실을 맺고, 열성으로 이를 전파하기 위하여 마리아처럼 우리 마음 속에서 이를 묵상한다



1. 사제 4 참조.

2. 수도 6 참조.

3. 루가 2,19. 51 참조.






87조와 88조 및 89조는 살레시오 공동체와 회원 개인의 전례생활과 기도의 주요 세 형태들, 즉 말씀에 대한 경청과 성체성사의 거행 및 전례주년 동안 신성한 직무를 통해 시간을 성화 시키는 것에 대해 지적하는 작은 구간이다.


기도하는 공동체의 우선적 태도는 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초기 신자들의 경우처럼, 기도하는 공동체는 침묵하고 경청하는 공동체야 한다. 사실 공동체를 한데 모아 일치 시키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은 결코 말씀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분께 겸손히 귀기울이는 것은 그분의 주도권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가장 의미심장한 방법이다.


한 단락은 신앙 안에서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의 잇점을 설명한다. 다른 한 단락은 이점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들에 관해 얘기한다. 우리는 공동체에 관해 얘기된 모든 것이 살레시오 회원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데에 주목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본 조항의 첫째와 둘째 단락은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성원들이 말씀에 순명하기로 서원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 안에서 말씀을 받아 들이도록 교육하는 사명을 지닌 모든 수도적 사도 공동체 안에서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4317.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근본적 역할을 간단하게 상기시킨다. 본 조항은 그것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기 위해 공의회의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며 ""말도 아니다. 하느님이 화자이며 이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왜 어느 정도로나 효과를 미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결합력이다. 하느님은 우선 사람들을 "한데 모아" 그들 모두에게 같은 응답을 심어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본 조항에 인용된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은 이 사실을 아주 명확히 지적한다: "사제의 첫 직무는 하느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것이다. 이로써 사제는… 하느님의 백성을 만들고 증가시킨다. 실제 구원의 말씀이야말로 미신자의 마음 속에서 신앙을 일으키고… 그리고 이 신앙에 의하여 신자들의 모임이 시작되고 또한 성장한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7410: 돈 보스코의 성체성사 교의에 관하여, J. AUBRY, Leucaristia nella prassi salesiana in Rinnovare la nostra vita salesiana, LDC Turin, 1981, 1, 176쪽 이하.



이러한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말씀은 계시헌장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여러 잇점들을 낳는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마음의 양식, 영신 생활의 깨끗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은 이러한 표현들을 성체성사가 중심인 전례 전체에 적용시킨다: 회헌 36조에서 상기되듯, "전례는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다"(전례 10).

동 문헌에서 좀더 인용해보자: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동반돼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직 6.

"", "양식", "생명의 원천"(robur, cibus, fons)이란 표현들은 모두 우리 회헌의 본문에도 나와 있다.


본 조항에서 강조되고 있는 첫 번째 표현은 전체 내용에 대한 종합이라 할 수 있다: 말씀은 일반적으로 "영성 생활의 원천"이다. 이 측면의 저변에는 세 방향의 영향력이 깔려 있다: 말씀은 기도의 응답을 낳으며, 성부의 원의를 알게 하고 그것의 실제적 실현을 돕는다.


그러므로 진실되이 기도하고,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알며, 하느님 나라에 기여하기 위해 살레시오 공동체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경청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로 하여금 말씀을 마주 대하게 하는 셋째 단락의 내용이다.




말씀과 마주한 공동체



모든 구원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당신의 구원 계획을 들려주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성서 안에서 발견되며 성서 안에 씌여 있다: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토 16-17).

그러므로 공동체는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과 계시헌장에 명백히 언급되어 있듯이 특별한 방법으로 성서에 관심을 쏟는다. 특별총회 543.

문맥 중의 "성서를… 손에 들고"라는 어귀는 성서를 읽고(혹은 성서를 읽는 것을 듣고) 그에 대해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이란 말마디는 분명히 이 언급이 단순히 우연한 성서 독서에 대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성서는 매일의 양식이다. 특히 복음서로부터 지극히 심오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회헌 34 참조)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공의회의 본문은 공동체와 회원 각자가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보여 주어야할 여러 가지 태도들을 암시한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겸손하게 하느님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순응하는 마음으로 최고 기준으로 받아 들여 자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되도록 해야한다: 이것은 신앙의 행위 위와 동.

이며 마리아께서는 이에 대한 완전한 모범이시다.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여 결실을 맺어야 한다.


-사도직 안에서 열성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들은 살레시오 공동체와 회원 각자의 근본 임무들이다. 말씀이 우리 귀로 들어와서(우리는 말씀을 "경청한다"), 우리 마음으로 내려와(우리는 말씀을 "환영한다"), 우리 손으로 전해져서(우리는 말씀을 "실천한다"), 우리 입술로부터 나와야 한다(우리는 말씀을 "선포한다"). 이는 우리에게 네 가지 중대한 임무들 즉 조용히 귀기울이는 법을 익히고, 우리의 철저한 가난을 인식하며, 말씀을 증거하고, 열성을 다하여 말씀을 널리 전파해야할 의무들을 부과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 직접적인 실천적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공동체의 회원들은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경청할 시간과 구체적 방법들에 대해 동의해야 한다.


살레시오 회원 개인에 관한 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명상으로 이해되는 "개인 기도"에 관한 제93조의 내용이 적용될 수 있다.


특별총회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공동체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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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의 p.268까지는 이상 없습니다.

- " p.269-272까지의 본 내용도【p.251, 252, 225, 226번 순으로〔각 p.에 이미〕기록 되었습니 다.¡½¾ø½À´Ï´Ù.

그래서 원본의 내용 p.273(각주 내용도 반복)으로 바로 연결하여 기록합니다.







그의 전기작가는 썼다.


돈 보스코의 성체성사 교의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적 폭을 지니지는 못했다 할지라도(그의 교의는 분명히 그 시대의 신학에 의존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있어서 성체성사는 생생한 현실이었다는 것을, 빵의 표징에 깃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진실되고 생생한 현존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성찬의 식탁과 감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생생히 만날 수 있는 곳들이다. 영성체를 통해 돈 보스코는 그리스도와의 강력하고 감미로운 구체적 관계를 살았으며, 그의 소년들에게도 그와 같은 사랑을 갖길 원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마리아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대한 이 큰 사랑을 불붙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저는 기꺼이 여기서부터 수페르가가까지 땅바닥을 기고 핥겠습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7410: 돈 보스코의 성체성사 교의에 관하여, J. AUBRY, Leucaristia nella prassi salesiana in Rinnovare la nostra vita salesiana,LDC Turin,1981, 1, 176쪽 이하.



우리의 창립자를 이렇게 간단히 되돌아 봄으로써 이제 우리는 본 조항의 본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공동체에 대한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활동



성체성사 거행은 공의회에 의해 "선교 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 ¡¦½ÅÀÚ °øµ¿Ã¼ÀÇ Áß½É" "그리스도교 공동체 생활 전체의 정점"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은 이러한 표현들을 성체성사가 중심인 전례 전체에 적용시킨다: 회헌 36조에서 상기되듯, "전례는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다"(전례 10).

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체성사 거행에 그 원천과 중심을 두지 않으면 결코 건설할 수 없으므로 모든 공동체 정신의 육성은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사직 6.



수도자 사도들의 공동체에는 이런 강력한 표현들이 너무나도 당연히 적용될 수 있다. 성체성사로써 살레시오 공동체는 두 가지 근본적 이익을 얻는다: 살레시오 공동체는 형제적 친교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재건설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도적 임무에 대한 열정을 발견한다. 이 두 구절들은 단순하지만 의미를 지닌 말들이다.


성체성사로써 공동체는 제85조에서 얘기된 바 있는 교회 자체를 탄생시킨 신비, "빠스카의 신비를 거행"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분열을 없앴으며, 성령 안의 그분의 새 생명은 구원된 사람들 간의 깊은 일치의 원칙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살레시오 공동체는 언제나 공동체의 일치의 원천이었고 원천인 구원적 사랑의 행위를 진실로 기념한다.


나아가 공동체는 "희생되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 성체성사적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것은 성 바오로의 위대한 교의에 따르면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토 16-17).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그분 안에 있는 우리들 자신들 간의 친교를 암시한다. 성체성사의 구체적 본질은 제85조의 주장을 빛내준다: "우리의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의 성자의 몸은 형제적 사랑으로 고무된 참여자들의 생생한 신앙 정도에 따라 공동체를 끊임없이 재건설한다.


이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특별총회는 이렇게 해설했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끊임없는 과업에 있어서 성체는 바로 기초적이고 결정적인 도구이며, 일치의 "표시요 근원"이며 동시에 일치에 필요한 누룩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체는 우리 생활의 목적인 일치의 표시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가 생활하고 서로의 일치를 성취하는 과업에 헌신하는 그만큼 성체는 일치의 표시가 된다. 또 그만큼 성체는 일치의 '원인'이 된다." 특별총회 543.



그러나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살레시오 공동체는 사도적 지평에로 힘차게 자신을 개방하며, 형제적 사랑 뿐만 아니라 사목적 사랑도 살찌운다. 특별 총회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성체는 공동체의 모든 사도적 활동의 출발점이요 도착점이다." 위와 동.

공동체는 빠스카 신비를 거행하면서 성부의 영광을 위한 그리스도의 봉헌 안에서 젊은이들과 일반 신자들을 변화 시키기 위해 그들의 구체적 실존을 떠맡는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친교를 나누면서 회원들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착한 목자를 자신들 안에 모시며, 자신들도 이처럼 구원하고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 젊은이들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한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양육됨으로써, 자신을 신자들에게 음식으로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마음으로부터 참여한다,"(사직 13).





성체성사에 대한 공동체의 능동적 참여



그러나 이 놀라운 성과의 정도는 "거행자들"의 산 신앙에 의해 좌우된다. 이 신앙은 성체성사를 살아 있는 전례 속에 매일 축제처럼 거행된다고 한 첫 문단에 이미 간접적으로 언급되었다. 여기에는 술어상의 모순이 있지 않을까? 매일 거행하는 축제가 축제일 수 있을까? 성체성사는 그것의 지극히 특별한 가치에 대한 확신 속에서 매일 축제처럼 거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여기서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것은 철저한 준비와 주의깊고 사랑하는 마음을 요구한다. 외적으로도 그것은 신앙을 자극하는데 도움을 주는 예식을 요구한다. '살아 있는 전례'는 틀에 박힌 것을 거부하며, 교회의 전례에 충실하면서도 창조적 자유를 위한 여지를 날마다 발견하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받는 선물에 깊고 철저히 감사 하는데에 바쳐진 시간은 그날 내내 지속될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만남의 시작이요 사랑의 표징이다.

성체를 중심으로 가족으로 일치된 공동체 안에서는 회헌이 권장하는 공동집전에 특별한 의미가 첨가된다. 이것은 성체성사 신비의 공동체적 측면에 직접 결부된 "살아 있는 전례"의 기회를 제공한다. 공동집전은 실제로 삼중일치를 표현한다: 여러 사제들에 의해 집전되는 미사들은 모두 동일한 그리스도의 희생이기 때문에 "희생의 일치"를 표현한다: 여러 사제들은 자신을 희생하신 한분이신 대사제의 효과적 표징들일 뿐이기에 "사제직의 일치"를 표현한다(증가된 것은 모두 성사적재-실현이다): 각 사람이 자기 고유의 사제적 역할(직분적 혹은 공동의)을 행하게 되는 하나이며 동일한 예식을 위해 같은 제단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의 일치"를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될 수 있다: 모든 성원들이 같은 임무를 다시 떠맡는 살레시오 회원만의 공동체와 나아가 젊은이들과 다른 사람까지를 포함하는 공동체: 이리하여 재단을 중심으로 살레시오 공동체는 보다 넓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일치된 몸으로 나타난다.




성체의 현존과 그것이 일으키는 신심



마지막 단락은 더 이상 명백히 전례적인 것이 아닌 주로 개인적인 측면에 접근한다. 그것은 "공동체에 모셔진 성체"와 그것이 일으키는 신심을 다룬다. "돈 보스코의 자녀인 우리"에게 있어서 감실이 있는 경당은 그 집과 공동체의 산 심장이다. "그리스도와 자주 만나는 것"은 살레시오 전통이 "성체안에 계신 예수 방문"이라 부른 것과 관계된다. 우리는 돈 보스코가 이것의 실천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그리고 살레시오 회원들과 소년들에게 그것을 얼마나 많이 권했는지를 안다. 공의회는 사제들에게 그것을 명백히 권고한다: "(사제는)성체께 대한 개인 신심과 조배로써 주 그리스도와 나날이 담화를 계속" 사직 18.

해야 한다.


"Eucaristicum mysterium" 성체성사 신비, 1967. 5.25, 50.

에 잘 표현된 이 신심의 의의를 상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선 그것은 성체성사의 거행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성체의 현존은 희생으로부터 나오며 성사적 친교와 영적 친교를 지향한다." 즉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언제나 희망이시오 양식이신 그리스도 이시다. 그러나 성체 신심은 다른 목적을 지닌다: 미사는 성부께 드리는 그리스도와 회중의 전례 행위이다: 성체께 대한 신심은 성격상 개인적인 형태로 성사적 그리스도께 바쳐진다. 그것의 본질적 성과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사랑을 자극하는 것이다. 회헌의 본 조항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로부터 우리는 청소년을 위한 활동에 활력과 끈기를 얻는다."


돈 보스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낮이나 밤이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성당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자주 조배합시다. ¡¦ÀÌ ¼¼»óÀÇ Ä£±¸µéÀº ¿Â Á¾ÀÏÀ» ÇÔ²² Áö³¾ Á¤µµ·Î ÀÚ±â Ä£±¸¿¡°Ô¼­ ¸¹Àº Áñ°Å¿òÀ» ¹ß°ßÇÕ´Ï´Ù. 그렇다면 모든 친구들 가운데 가장 좋은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하루 중 어떤 시간을 바치지 말아야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 예수라는 친구는 얼마나 사랑스런지! ¡¦ÃÖÈÄÀÇ ¸¸Âù ¶§, 예수님 곁에 앉아 어머니 팔에 안긴 아기처럼 하느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댈 수 있었던 성 요한이 느꼈던 기쁨을 누가 감히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방문할 때 그런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G. BOSCO, Nove giorni consacrati allaugusta Madre del Salvatore, sotto il titolo di Maria Ausiliatrice, 1870, 오라토리오 회고록 22, 330-331.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당신은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를 모심으로써

그분의 빠스카 신비를 다시 살게 하시나이다.

이 사랑의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로서의 우리의 일치를 굳혀 주시고

사도들로서의 우리의 헌신에 신선한 생명력을 부여하소서.

성체성사를 "매일의 축제"처럼 거행하게 하시어

주 예수와의 잦은 만남으로부터

젊은이들 가운데서의 우리의 사명을 위한 힘과

그 사명을 실현 시킬 수 있는 항구함을 이끌어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89 조 시간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신비




성무일도는 성체성사 신비의 은총을 하루의 여러 순간들 안으로 연장시킨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일치된 공동체는 성부를 찬미하고 그분께 간구하며 그분과의 일치를 도모하고² 신적 원의에 주의를 기울인다. 공동체는 돈 보스코의 권유에 따라 열성과 품위를 가지고 아침기도로써 찬미가(Lodi)와 저녁기도로써 만과(Vespro)를 바친다. 그리고 성직자는 이 외에도 서품으로 받은 의무를 진다


주일은 빠스카의 기쁨을 지내는 날이다. 사도적 활동과 경건한 마음과 즐거움으로 이 날을 보냄으로써 살레시오 회원의 신뢰와 낙천주의를 강화시킨다.


전례주년을 따라서 주님의 신비들을 기념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희망 안에서 구원의 때가⁴되게 한다.



1. 성무일도서에 관한 일반지침서 10,12 참조.

2. 교회 3 참조.

3. 교회법 1174,1 참조.

4. 전례 102 참조.






89조는 살레시오 공동체가 하루, 일주, 일년 간의 리듬에 따른 교회의 전례 생활에 참여하는 방법을 서술한다. 우주의 시간과 역사 전체는 이렇게 성화된다. 즉 성부의 영광에 이렇게 바쳐지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사용된다.





하루의 리듬: 성무일도



첫 구절은 본 조항을 앞 조항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며, 성무일도가 성체성사의 핵심신비와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보여준다. 그 구절은 공의회의 문헌 사직 5.

과 성무일도에 관한 훈령의 표현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무일도는 찬미와 기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 전체의 중심이자 절정인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구원의 신비들에 대한 기념과 천상 영광에 대한 예시를 하루의 여러 시간에로 연장시킨다." Instructio Generalis Liturgiae Horarum (IGLH) 1971, 3.25, 12.

그러나 훈령은 성무일도는 본질적으로 성체성사를 효과적으로 거행하기 위한 탁월한 준비이기도 하다는 점을 명백히 밝힌다.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봉헌의 신비를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회헌 85 참조) 교회의 산 지체로서 교회 안에 깊이 들어가 있는 살레시오 공동체는 성무일도의 전례 기도에 아주 자연스럽게 참여하며 신앙 안에서 성무일도의 신성한 위엄을 이해하려 애쓴다: "이는 참으로 신랑에게 이야기하는 신부의 목소리이며, 또한 자기 몸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이다." 전례 84.

"아버지께 드리는 찬미와 탄원"에서 나오는 영적 이익은 그분과의 사랑의 친교 및 그분의 원의에 대한 적극적인 충실에서 진보하는 것이다.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성무일도는 사제들이나 묵상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 모두의 공식 기도이다. 교회의 어떤 성원들은 그것을 모두의 이름으로 바치라는 명백한 명령을 받는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본 조항 자체는 사실 성직자들에 관한 것이다): 부제들, 사제들, 공법이나 회헌에 의하여 가대의 의무가 있는 수도자들의 수도회 및 남녀 수도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3항을 참조하게 하는 주석이 제안하는대로 그리스도보다도 성부와의 일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3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성체성사의 열매로 제시된다.

...? 전례 95-96 참조: IGLH 28-32.

: 그러나 이는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기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신자들, 심지어 성무일도를 바치라는 제안을 받는다." 바오로 6, 사도적 규범 Laudis canticum 1970, 11.1. 8: 전례 100(평신도와 참여)IGLH 32.

수도자들에 대한 공의회의 말은 명확하다: "어떤 단체의 회원이든지 그들의 회헌의 규정에 따라, 성무일도의 어떤 부분을 바칠 때에는, 성교회의 공식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전례 98.

끝으로 "교회 성원들의 개인적 기도가 늘 필요하기는 하나… 공동체 기도는 특별한 품위를 지닌다(마태오 18,20)"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공동으로 바치는 것은 성무일도의 교회적 성격을 더 분명히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개인적 혹은 반-개별적으로 바치는 것보다 공동으로 바치는 것이 더 좋다." IGLH 9, 33 & IGLH 20-27.



이러한 유의사항들은 회헌의 규정을(일반회칙 제70에서 더욱 상세히 서술된) 완전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공동체는 아침기도로써 찬미가와 저녁기도로써 만과를 바친다. 그리고 성직자는 이 외에도 서품으로 받은 의무를 진다." 왜 찬미가와 만과를 바치는가? "아침기도인 찬미가와 저녁기도인 만과는 온 성교회의 존엄한 전통에 따라 매일 성무일도의 두 개의 돌쩌귀로써 가장 중요한 시간경으로 간주될 것이며, 또한 이런 관점에서 바쳐져야" 전례 89IGLH 37-40은 찬미가와 만과의 정확하고 풍부한 의미를 상세히 설명한다.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와 일반회칙에서 사용된 두 동사에 주목해야 한다. 성무일도는 단순히 "낭독"되는 것이 아니라 "바쳐진다": 좀체로 드문 일이지만 성무일도를 바치는 사람이 한사람 뿐일지라도 "교회의 기도"로서의 성격 때문에 성무일도는 언제나 "바쳐진다."


이 단락의 끝 구절은 특별한 장엄의식이 전혀 없을 때에도 "열성과 품위를 가지고" 예식을 거행하라는 격려의 말이다. 돈 보스코는 기도가 완벽하기를 원했다. 즉 외적인 품위와 내적인 열성이라는 이중의 특징들을 지니기를 원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두 특징들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에 관한 돈 보스코의 권유는 사실 더 정확하다: 최초의 회헌의 한 조항에서 그는 "성무일도의 말씀들을 분명하고 경건하게" 발음하기를 요구했으며, 이것을 살레시오적 특징으로 제시했다. 1875년 회헌 132 (F. MOTTO, p.183).



이런 맥락에서 일반회칙 제70조가 부언하고 있는 바를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다른 기도를 대신 바칠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된 일반 규정과 조금도 모순 되지 않는 이러한 특정 내용은 찬미가와 만과를 바칠 수 없는 특수한 경우에 처한 이들(예를 들어 아픈 이들)에게 있어서의 매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다른 형태의 기도로 나름대로 찬미의 희생을 바침으로써 기도하는 공동체와 일치한다.




주간 및 연간 리듬: 주일과 전례력



셋째 단락은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빠스카의 기쁨을 지내는 날""주일"을 열심히 지내라고 권고한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날이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임날이며 공의회의 말을 빌자면 "고유한 축제일" 전례 106.

이다. 살레시오 회원에게 있어서 주일은 대개 주간 동안의 통상적인 일과와 종종 다른 중대한 임무 즉 젊은이들 및 서민들과 만나는 지극히 "사도적인" 업무를 행하는 날이다. 주일을 지내는 방식에는 전형적으로 살레시오적인 3부작 즉 "일과 신심과 즐거움"을 적용시킬 수 있는 고유 영역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지는 일요일이 우리에게 주님의 빠스카의 신비를 어떻게 맛보여 줄 수 있으며 살레시오 정신에 관한 장에서 서술된 낙천주의와 기쁨을 우리 마음 속에 배양시키는 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회헌 17 참조).


마지막 단락은 전례력 전체에 대한 지평을 넓혀주며 우리로 하여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을 살펴보게 한다: "성교회는… 일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전개한다. 속죄의 구원신비들을 집전함으로써, 자기 주의 업적과 공로의 보고를 열어서 그것을 언제나 현존하게 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그것에 접촉케 하고 또한 구원의 은총으로 풍요해 지도록 한다." 전례 102.



우리는 결론적으로 살레시오 회원은 회헌 제36조가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대로 젊은이들에게 전례생활을 전수해야할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고 있을 정도로 자신의 전례생활을 매일의 것이든 주간의 것이든 혹은 년간의 것이든 열렬하고 효과적으로 생활할 것이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찬미로

우리의 나날을 충만히 채우게 하시고,

시공에 걸쳐 널리 퍼진

당신의 거룩한 교회와 일치된

우리의 실존 전체의 리듬을 특징짓게 하소서.


계절이 바뀌고 해가 갈수록

우리로 하여금 교회와 더불어

우리 구원의 신비들을 되살리게 하시며

성령의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

효과적인 전파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90 조 끊임없이 회개하는 공동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끊임없는 회개에로 부르신다.


우리의 나약함을 인식하고 있는 우리는 경계와 진정한 통회로 형제적 충고, 상호 용서와 매일의 십자가를 평온히 수락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한다.


화해의 성사는 각 개인과 공동체 전체가 지난 속죄의 의무를 이행케 한다.


우리는 매일의 양심 성찰로 이를 준비하고 교회의 지침에 따라 이를 자주 받음으로써 성부께서 주시는 용서의 기쁨을 지니게 되고, 형제적 친교를 회복하며 사도적 지향을 정화한다.






이제 우리는 본 장의 셋째 부분에 이르렀다. 90조와 91조는 말씀에 의해 계발되어 구세주의 인격과 신비와의 생생한 접촉에 의해 성화된 신자 생활과 수도생활의 특징적 측면에 즉 회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항구적인 필요요건으로 제시되고 있으면서도 성사적 행위나 때로는 회개를 위해 마련된 의식들 속에서 특별히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반복된 얘기이나 회개에 대해 제87-89조 세 조항으로 구성된 도식 즉 말씀, 성사, 역사를 발견한다.


"회개(회심)"이란 말마디가 제90조와 91조 두 조항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일반적으로 충직한 수도자는 이미 회개했으며 다만 진척만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와 인간의 경험은 죄가 아직도 인간의 생활 속에 파고들고 있음을 말해준다: 인간은 보다 크고 진실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정화와 회개를 필요로 한다. 본 조항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하는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의 표현은 이 과정을 밝혀줄 수도 있다: "매일의 양심 규명으로 준비되는 고백은, 자비로우신 성부의 사랑을 받기에 필요한 회심을 크게 도와 주기 때문이다." 사직 18.

회심이란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에 대한 사랑에로 돌아서는 것, 부정적 태도로부터 긍정적 태도로 넘어가는 것, 더 나아가 불확실하고 빈약하고 불충분한 사랑으로부터 결코 끝나지 않을 임무인 더 굳건하고 더 관대한 사랑에로 넘어가는 것이다!


회헌은 참회과정에 필요한 노력들의 차례를 대략 밝히고 있으며 그것의 주요 순환점들을 지적한다. 어떤 신심업들은 지속적으로, 어떤 것들은 "주마다", 어떤 것들은 "자주" 또 어떤 것들은(다음 조항에서 얘기되겠지만) "달마다" 또는 "해마다" 필요하다.


90조는 두 개 부분 네 개 조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두 단락은 항구한 "회개 의무"를 정의하는 반면, 셋째 단락과 넷째 단락은 화해성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끊임없이 필요한 경계와 통회



"Ordo Paenitenitiae" 화해성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통해 인간을 참회에로 부르시고 그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회개시키기 때문이다("Ordo paenitentiae" 24: 1항도 참조).

에 잘 설명되어 있듯이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을 끊임없는 회개에로 부르신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평가하며,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책임과 죄를 의식하게 하고 우리를 회심과 속죄에로 초대하며,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화해와 사랑의 길을 걷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우리의 나약함을 인식하고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때로 공동생활의 굉장한 요구들(51조와 52조에 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얘기된 인내, 상호 관용과 용서, 개인주의에 대한 투쟁) 앞에서 공동체로서 "응답한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과 망각에 의해 파괴된 것을 매일 재건설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점들이 끊임없는 회개의 태도를 구성하는 요소로 권장되고 있다: OP는 교회 생활에서의 참회의 태도들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지속적인 회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성하고 완성한다. 그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참아냄으로써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며 자비와 애덕 활동을 수행하고 복음적 메시지의 시각을 보다 충분히 채택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로의 회개의 표징이 된다"(4).



-경계(18와 관련지어 마음과 자아-통제를 위한 보호물로 이미 언급된): 이는 자신의 내적 나약함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하며 신뢰를 가지고 성부의 손에 맡기게 한다.


-진정한 통회: 자신을 고치려는 의지를 내포한다.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수락: 18조의 표현에 의하면 "일과 절제"의 노선에 따른 세밀한 살레시오적 속죄 수단이다: "일상의 요구와 사도적 생활에 따르는 포기를 받아들인다."


-상호 용서와 형제적 충고: 51조와 52조도 이것들을 친교를 지속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적한다.


-일반회칙 제73조에 따른 매 금요일과 사순절 동안의 공동참회


이러한 요소들의 종합적 효과는 살레시오 회원 각 개인과 공동체가 매우 효과적인 회개 과정을 취할 수 있도록 충분히 보장한다.




화해의 성사



본문에 사용된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의 계몽 변화 활동이 말씀에 의해 이행되기 시작하듯이 모든 속죄 의무는 성사에 의해 "이행"된다. 구세주 그리스도는 당신의 신비와 성부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제자를 가시적으로 승화시켜 정화시키며, 제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충분한 자각과 보다 실제적인 사랑에로 회심하려는 열망과 하느님과 형제들과의 화해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 자세를 드러낸다. 전반적인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에서는 성체성사가 "근원"이요 "정점"이듯 회개 노력 차원에서는 화해 성사가 "근원"이요 "정점"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상호보완적인 진리들이 나온다. 우선 "화해의 성사"는 회개하지 않는 생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또 한편 성사를 전혀 혹은 거의 활용치 않는 회개 생활은 재출발에 조금도 힘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두 측면들은 상호 의존적이다.


"각 개인과 공동체가 지닌 속죄의 의무"라는 표현은 속죄 과정의 공동체적 차원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빈도로 행해지는 두 가지 형태 즉 개인적 형태와 공동체적 형태의 화해 성사에 썩 잘 어울린다.


본문은 특별히 성사에서 비롯된 성과들을 지적한다: 성사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에는 세 가지의 주요 성과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살레시오 회원의 삼중 관계 즉 성부이신 하느님과 형제들 및 젊은이들과의 관계와 관련된다.


첫 번째 성과는 화해성사만의 특성인 "성부께서 주시는 용서의 기쁨" 즉 성부의 지극한 인내와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경험이다. 살레시오 회원이 증거하고 자신의 주위에 퍼뜨리는 기쁨(회헌 17 참조)은 성부와의 성사적 만남을 튼튼한 기반으로 삼는다.


두 번째 성과는 형제적 친교의 회복이다. "고백성사를 받는 신도들은…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와 다시 화해하는 것이다"(교회 11). 그리하여 그들은 용서를 받고 형제애 안에서 성장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세 번째 성과는 사도적 지향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성부께로 회심하기 위한 자기 초연으로써 회심하는 살레시오 회원은 젊은이들에게 보다 진실되이 봉사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영광에 더 잘 봉사하려는 자세를 갖추게된다: 화해의 선물은 그로 하여금 보다 생동적이고 사랑스런 사도직의 길을 걷게 한다!


끝으로 규칙서는 우리에게 "교회의 지침에 따라 이를 자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수도자 성성의 훈령은 공의회가 요구한 "적절한 자유"를 염두에 두면서도 이것을 "한달에 두 번"으로 해석한다. 교회 11.

...? Dum canonicarum legum, CRIS 1970, 12.8, 관보 63 (1971), 318.

빈도수를 결정함에 있어서 각 사람은 자신이 관련된 참회 영역의 폭을 염두에 둘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영적 노력과 일상의 고행에 알맞는 계획을 세울 것이며, 영적 지도를 중시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돈 보스코의 가르침과 모범과 또한 그분이 우리에게 남기신 살아 있는 전통에 유념할 것이다.


우리의 창립자에 대해 더 언급하지 않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 창립자의 지속적인 회개 과정 즉 죄를 물리치고 신적 모범에 더 긴밀히 일치하려는 노력은 그 자신의 성성 뿐만 아니라 그가 소년들에게 권한 성성의 특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헌의 여러 조항들에 대해 해설하는 가운데 돈 보스코에 의해 생활되었고 제안된 고행적인 의무를 이미 살펴 보았다: 일과 절제의 고행(회헌 18조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청빈생활을 영위하는 고행(회헌 72조와 75조 참조), 특히 매일의 의무 이행과 순명과 관련된 고행(회헌 18, 71 참조)을 살펴 보았었다.


그러나 속죄 노력은 화해의 성사 즉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만남 안에서 완성된다. 돈 보스코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수단인 진정한 고백성사의 사도로 불릴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이 성사에 관해 얼마나 자주 얘기했던가를 상기한다(돈 보스코가 소년들에게 자주 사용했던 이른바 "귓속말"의 대부분의 주제는 바로 고백성사였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고백성사 집행 직무에 바쳐졌던 그의 사제 생활의 모범을 기억한다.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고백성사는 성체성사와 더불어 그의 예방 교육을 떠받치는 지주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돈 보스코의 전기작가는 고백성사의 집행은 돈 보스코가 오라토리오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강조한다: 돈 보스코 전기, 영문판, 1486. 고백신부로서의 돈 보스코에 관하여, 체리아 "하느님과 함께 한 돈 보스코" 10.

...? 청소년 교육에 있어서의 예방교육(1984년 회헌 부록):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2412, 119 이하 참조.

성화에 이르는 확실한 길이었다. "여러분, 성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라고 언젠가 그는 일단의 소년들에게 질문했다: "여기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고백성사가 바로 자물쇠입니다: 고백성사에 대한 여러분의 신뢰가 바로 그 열쇠이고요. 바로 이것이 여러분이 천국의 문을 여는 방법입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737.

오라토리오의 소년들 중 도미니코 사비오, 프란치스코 베수코, 미카엘 마고네와 같은 소년들에 대해 그가 쓴 전기들은 모두 성화에 이르는 길인 고백에 대한 송가이다. 돈 보스코가 지은 도미니코 사비오 전기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한다: "고백성사를 자주 봄으로써 그를 본받으십시오. 이것은 그의 끊임없는 덕행실천의 대들보였으며, 그를 그런 영광스런 종말에로 확실히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도 자주 그리고 적절한 준비자세를 갖추고서 이 고백성사를 받도록 합시다"(오라토리오 회고록 11286).



고백 성사 안에 계시는 우리 주님과의 만남의 빈도수에 관해, 우리는 언젠가 돈 보스코가 저녁 말씀에서 하신 말씀을 상기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의 영혼을 염려하되 조금만 염려하고 있다면 한달에 한번 고백성사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구하고 싶어하되 그것을 아주 간절히 바라지는 않는다면, 이주에 한번 고백성사를 보십시오: 완전함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매주 고백성사를 보십시오. 양심상 괴로운 일이 없거든 그 이상 자주 고백성사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2415.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나약함과 죄로 얼룩진

질그릇 같은 우리이지만

더 없이 귀중한 보물인 당신의 생명을

담아 나르고 있사오니,


우리를 지속적인 회개에로 부르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도록 도와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경계와 진정한 통회와 관대한 형제적 용서로써

응답하게 하소서.


화해의 성사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당신과 화해한 우리로 하여금

순결하고 거룩하게 성장하게 하시며

우리의 젊은이들과 더불어

당신의 부성애적 포옹을 환영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91 조 쇄신의 기회




월례피정과 연례피정으로 회심하려는 우리의 뜻을 새로이 한다. 이는 돈 보스코가 모든 신심업의 기본이요 종합으로 여겼던 영적 회복의 때이다


이는 공동체와 살레시오 회원 각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원의를 식별하며 마음을 정화하는 특별한 기회가 된다.


이 은총의 순간들은 우리의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일치 하도록 하고 그분의 재림을 열렬히 기다리게 한다.



1. 1875년 회헌(서언) 34쪽 참조.






본 조항은 앞 조항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회개과정의 세 번째 요소를 제시한다: 매달 매년 즉 월례피정과 연례피정은 영적 쇄신에 매우 의미심장한 시간들이다.


회헌이 이것들을 개인과 공동체의 "지속적인 회개" 노력과 관련지어 영적 회복 또는 쇄신의 특별한 기회로, 그리고 특별한 "은총의 순간들"로 다루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살레시오 회원의 생활은 일상적인 활동에 묻혀있는 모든 사도들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피상성의 위험과 시간의 파괴력에 노출되어 있다: 기계적인 활동에 빠져들어 보다 깊은 사유와 명상에 필요한 휴지기를 찾지 않기가 쉽다. 월례피정일과 연례 영성 수련 때 공동체는 영적인 힘을 재충전하고 사도적 봉사를 가다듬도록 하기 위해 영적 휴식에 필요한 시간을 제공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과의 보다 친밀한 친교 속에서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고 초대하신다(마르코 6,31 참조).

규칙서는 우리에게 이런 의의 깊은 영적 시기들을 중시하라고 권한다. 영적 시간들을 연구나 토론날로 변화시키려는 유혹은 모두 배제되어야 한다. 영적 시기들의 목적은 더없이 명백하다: 그 목적은 우선(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로서) 주님의 원의를 당장 식별하고 회개에로의 그분의 부르심을 듣게 해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있으며, 다음으로는 산 신앙으로 특별히 조심스럽게 준비된 고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회개를 받아들이는 것, 즉 마음의 정화에 있다. 앞 조항이 고백성사의 정화 효과를 언급하면서 끝을 맺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돈 보스코는 월례피정과 연례피정을 매우 중시했다. 본 조항은 우리의 창립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회헌 서문의 본문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모든 신심업이 다 들어 있는 기본적인 신심업은 연례피정과 매월의 착한 죽음 연습입니다…. 달마다 성사를 받고, 실제로 영원을 향하여 떠나는 사람처럼 자기 양심의 장부를 정리하는 수도자에게는 구원이 확실한 것입니다." 회헌 서문, 1984년 회헌 부록 220.

돈 보스코는 다른 여건에서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예를 들어, 언젠가 그는 한 신학생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Ouid sit addendum, quid corrigendum, quid tollendum, ut sis bonus miles Christi 그리스도의 훌륭한 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해야 하고, 무엇을 고쳐야 하며, 무엇을 내던져야 하는지) 검토하기 위해 매달 한번의 선종 연습을 빠뜨리지 말게." 신학생 토마스 펜토레에게 보낸 편지, 1878, 8.15, 서한집, 3381.

선교사들의 바쁜 생활에서는 점검과 쇄신을 위해 정기적인 휴식기를 갖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돈 보스코가 선교사들에게 선종연습을 충실히 실시하라고 끈질기게 권유했던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1876년에 돈 갈리에로에게 보낸 편지에 돈 보스코는 이렇게 썼다: "형제회원을 만날 때에는 그들에게 매월의 선종 연습을 빠뜨리지 말라고 권고하십시오. 그것은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돈 갈리에로에게 보낸 편지, 1876, 8.1, 서한집, 381: 첫 선교사들에게 하신 말씀과 돈 레모띠에게 보낸 편지와 신학생 요셉 과란타와 바르톨로메오 판나로에게 보낸 편지도 참조.



연례피정 역시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진보에 매우 중요하다. 돈 보스코는 주저없이 이렇게 말했다: "영성 수련은 수도회의 버팀목이며 그것에 참여하는 이들의 보물이라 일컬어질 수 있습니다." 3차 총회에 의해 인가된 피정 규범서 서문 참조.

영성수련을 규범서 초안에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겸손한 수도회의 큰 발전은 영성수련에 힘입은 것이며, 대다수 회원들은 피정을 보다 나은 삶의 시작으로 인정한다." SCA, ms 23223 (Fondo Don Bosco, n.1942).



본 조항은 이러한 피정들의 가장 훌륭한 성과는 살레시오 회원에게 그의 "근본적 선택"을 확실히 쇄신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고 상기시키고, 살레시오 회원의 생활과 그의 전 존재의 중심에 주 예수와 그분께 대한 봉사가 자리잡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보다 큰 열성을 가지고 예수 안에서 자신의 정신의 깊은 일치를 발견케 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이것에 비추어 보면 돈 보스코의 또 다른 지적 두 가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월례피정과 연례피정의 가장 결정적인 행위는 화해성사와 성체 성사 안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둘째로 살레시오 회원의 열성을 자극하는 시각은 시간의 경과에 대한 시각이다(월례피정은 "선종연습"이라 불리운다: 살레시오의 산 전통에서는 매달의 휴식기가 언제나 "선종연습"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돈 보스코는 매달의 휴식기를 "선종연습"이란 제목으로 진술했으며 회헌 초판에서도 그렇게 일컫어졌다: 그러나 1875년 인가판에서는 그것이 "영적 피정"이란 단순한 명칭하에 등장한다(F. MOTTO, p.187). 22차 총회는 통용되고 있는 현대적 용어(월례피정)를 선택했는데 이는 얼마간 자신과 함께 지내라는 그리스도의 초대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새 명칭이 돈 보스코가 "선종연습"에 포함시켰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죽음은 주님의 재림이 될 것이며 각자가 주님을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만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을 온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에 최대한 활용합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당신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말씀과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시간들과 순간들을 끊임없이 쇄신시키시나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당신과의 만남을 심화시키고

당신의 원의를 더 잘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들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주의깊게 기다리며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순화시키게 하소서.


그리스도는 세세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나이다.



































92 조 살레시오 회원의 삶과 기도 안에서의 마리아




하느님의 모친이신 마리아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유일무이한 자리를 차지하신다.


마리아께서는 기도와 사목적 애덕의 귀감이시오, 지혜의 스승이시며 우리 가족의 인도자이시다.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과 가난한 이를 위한 염려, 십자가의 순간에 충실하심, 그리고 성부께서 이룩하신 놀라우신 업적으로 인한 기쁨을 관상하고 본받는다.


원죄 없으시고 도움이신 마리아는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형제들에게 봉사할 용기를 주신다.


우리는 마리아께 대한 자녀다운 굳은 신심을 기른다. 우리는 보다 확실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마리아를 잘 본받기 위하여 매일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고 그분의 축일들을 지낸다.






회헌은 우리 수도회의 생활과 사명 안에 마리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에 대해 이미 얘기했었다(특히 회헌 1, 8, 9조 참조). 본 조항에서는 마리아가 살레시오 회원의 기도생활에서 제시된다. 그분은 우리 신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과 우리의 사도적 봉헌을 완전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신다.


본 조항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에 비추어 읽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비의 이 주년을 지내는 동안, 성교회는 자기 아들의 구세사업과 끊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하느님의 모친 복되신 마리아를 비범한 애정으로 공경한다. 성교회는 마리아 안에 구원의 숭고한 열매를 경탄하고 찬미하며, 또한 마리아 안에 성교회 자신이 온전히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바라는 하나의 순수한 모습을 즐거이 관상한다." 전례 103.

매우 함축적이고 훌륭한 위의 본문은 우리에게 마리아의 신비가 그리스도의 신비와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가를 이해시켜 준다. 우리 삶안에서의 마리아의 현존은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우리 성소의 일부를 형성하는 사실이며,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신심은 마리아 축일에 최고조에 달하기는 하나 항구한 태도이다.


92조는 우리의 모든 그리스도교적 살레시오적 역사와 결부되어야 한다.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신심은 감성적인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신앙의 광명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들(본 조항의 앞 세 단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에 대한 인정이요, 그 사실들에 대한 우리의 응답(뒤의 두 단락들에서 다루어지는)이다.




마리아의 주도하심과 모범으로서의 의의



앞의 세 단락은 그리스도 신자로서 그리고 살레시오 회원으로서의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인 서술들을 한데 모아 그분께 대한 우리 신심의 초석을 마련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인 우리는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기쁨을 통해 "구원의 역사 안에서", 세기에 걸친 교회의 건설과정에서 "유일무이한 자리",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마지막 장에 종합적으로 완벽히 서술된 자리를 "차지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구원된 첫 사람이자 최초의 신자의 자격으로 마리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른 가장 완벽한 모범으로 제시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성성의 가장 효과적인 모범을 발견한다.


마리아의 생애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을 규명하는 종합적인 표현으로, 회헌은 우리가 마리아에게서 "관상하고 본받아야" 할 태도들을 제시한다:


-마리아의 믿음(회헌 34 참조)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 속으로 곰곰히 생각한(87조에서 이미 지적된) 마리아의 방식: 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수태고지와 "주님의 여종의 fiat(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소서)"를 되돌아보게 한다.


-"성부께서 이룩하신 놀라우신 업적으로 인한 기쁨". 이는 우리로 하여금 magnificat(성모찬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가난한 이를 위한 염려": 우리는 엘리사벳 방문과 가나혼인 잔치에서의 마리아를 생각한다.


-세상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 순간인 "십자가의 순간의 충실하심":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요한 19,25).


살레시오 회원들인 우리들은 마리아에게서 우리의 성소와 더 명백히 관련된 다른 면모들을 인정한다.


-마리아는 지혜로운 스승이며 우리 가족의 지도자이시다: 여기서 우리는 돈 보스코의 아홉 살 때의 꿈("내가 네게 스승을 줄 것이니 너는 그분의 지도를 받아 지혜롭게 되는 법을 배워라)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95.

과 제8조의 내용을 돌이켜 본다.


-마리아는 제95조에서 얘기된 우리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인 "기도와 하느님과의 일치로 성화된 지칠줄 모르는 근면"을 우리 안에 실현시키라고 권고하시는 기도와 사목적 사랑의 모범이시다.


-우리는 제34조에서 얘기된 것도 기억한다: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 젊은이들의 여정에서 "어머니로서 현존하신다": 그분은 "도와주시고 희망을 안겨주신다."


이 모든 것이 돈 보스코의 영적 체험을 이룬다. 8조에 대한 해설에서 이미 얘기했듯이, 돈 보스코는 자신의 생활과 활동에 동정 마리아께서 살아계신 어머니로서 유력한 원조자로 현존하신다고 느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 돈 보스코에게 생생히 현존하셨다는 사실은 돈 보스코의 전기에서 자주 언급된다. 아홉 살 때의 꿈에서부터 그 꿈이 완벽히 실현된 것을 볼 때까지 마리아께서는 돈 보스코 곁에 계셨다. 마리아께서는 돈 보스코에게 사명을 위해 준비하는 방법을 보여주셨고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96.

그의 초기 활동 단계에서 그의 발걸음을 인도했으며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2190-191.

그의 활동이 항구히 자리잡을 지점을 정확히 지적해 주셨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2335.

: 마리아께서는 돈 보스코에게 사업 발전 방법을 보여 주었고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2232-234.

조력자들을 찾는 법과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2190-191.

그들을 곁에 붙잡아 두는 확실한 방법도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2232-234.

보여주셨다: 돈 보스코에게 젊은이들 가운데서의 사명을 위해 조력자들을 준비시키는 양성방법을 가르쳐 준 동시에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325-27.

그의 아들들의 열성이 꽃필 광활한 사업 영역을 보여주신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873-74.

분도 역시 마리아이셨다. 돈 보스코가 니짜 몽페라토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에게 줄기차게 반복한 감동적인 말씀에서 우리는 오라토리오와 살레시오 회원들과 살레시오 수녀들의 모든 집에 마리아께서 생생히 현존하신다는 돈 보스코의 확신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여기, 이곳 여러분 가운데에 성모님이 계십니다! 성모님은 이 집안을 두루 돌아 다니시고, 당신 망토로 이 집을 감싸 주십니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557.



돈 보스코의 집 안에서의 마리아의 이러한 현존은 어머니의 현존으로 인식되었다. 마리아는 오라토리오의 어머니였으며, 그곳 소년들의 어머니였다: 바로 이렇게 마리아는 늘 간원받았다. 몇몇 소년들 특히 도미니코 사비오에 대한 돈 보스코의 전기는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맘마 말가리타가 죽은 뒤 콘솔라타 성당의 복되신 동정녀 발 아래서 흐느꼈을 때의 돈 보스코의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기도 역시 의미심장하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동정녀여, 이제 제 아들들과 저는 어머니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우리의 어머니가 되어 주십시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5374.

임종 시에도 돈 보스코는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마리아께 간구했다: "어머니, 어머니시여…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여, 마리아여, 마리아여…"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18537: P. STELLA, Don Bosco nella storia della religiosa cattolica, LAS Rome 1969, 2175.



끝으로, 마리아가 주님을 향해 순례하고 있는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지극히 강력한 어머니요 원조자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망각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성체성사와 더불어 교회와 세상이 의지하고 있는 두 지주들 가운데 하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제 말을 믿으십시오. 잦은 영성체는 세상의 서까래 하나를 받쳐주는 튼튼한 지주이며,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세상의 또 다른 서까래를 받쳐주는 지주이다고 말할 때 저는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7352: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7354.





우리 신심의 응답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응답은 광범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마리아께서 현존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도 요한이 그러했듯이 "우리 가정으로" 이 어머니를 모셔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내의 살레시오적 모상"의 필수적 부분이며 "우리 카리스마의 본질적 부분"이다. 에지디오 비가노, 마리아는 살레시오 가족을 쇄신시키신다. 의사록 289(1978) 29.



우리의 전통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두 신비들("원죄 없으신 마리아""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속에서 마리아께 대해 묵상하는 것으로부터 두 가지 계열의 잇점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에 의해 축성되었고 하느님께 완전히 순응하신 원죄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특별히 복음적 권고들에 의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신다. 당신 아드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도들의 여왕이시오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는 우리에게도 동료 인간들을 위해 우리의 사도적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자극제 이시다. 그러므로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정서적 보상이 아니며, 감춰진 덕행을 실천케하는 격려도 아니다: 그것은 사도들로서의 우리의 사명 고유의 것이며 그분의 자녀들인 젊은이들에 대한 우리의 열정의 한 요소이다.


우리가 서술한 이런 동기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헌신은 주님께로부터 그분의 어머니를 선물로 받을 때의 기쁨을 드러내는 행위와 태도들 안에서 표현되기도 한다. 회헌은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신심은 "자녀답고" "굳건"하다고 상술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사랑하올 어머니"이신 그분께 대한 우리의 상냥함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에 완전히 몸바치신 그분을 본받으려는 우리의 용기까지를 암시한다.


그러나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차원의 신심의 외적 표현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본문은 외적 표현들 가운데 몇 가지를 상기시킨다.


전례에서 맞이하는 마리아 축일들은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고 "그분을 알리며 사랑하도록 할 수 있는" 탁월한 기회들이다(회헌 34). 회칙 제74조는 살레시오 신심업 몇 가지를 상기시킨다: 매달 24일의 기념일, 묵상을 종결짓는 매일 기도, 도움이신 마리아 강복의 잦은 실시.


개인적 차원에서 각 사람은 자신의 영적 민감성에 따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형태를 활용하여 응답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지니나, 이것은 언제나 마리아의 덕행을 반드시 모방하는 것에로 이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매일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는 것이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로사리오 기도에서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일치하는 방법을 당신 자녀들에게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돈 보스코의 집들에서 언제나 값진 가족적 전통이 되어 내려왔다. 교회 67 참조.

...? 바오로 6세 사도적 권고 마리아 공경 1974, 42-45 참조. 묵주기도의 복음적 영감과 그리스도론적 방향과 관상적 차원을 강조한 뒤 교황은 전례와 묵주기도 간의 관계에 대해 얘기한다. 이 기도의 가족적 측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인은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할 때 가장 즐겨 바치는 기도가 로사리오 기도라고 생각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54).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우리는 당신이 구원의 역사 안에서

유일무이한 자리를 차지하시며,

우리 가족의 스승이요 지도자이심을 믿나이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당신의 믿음과 순응,

성부께서 이루신 놀라우신 업적에 대한 감사,

십자가의 순간의 충실하심을

기쁘게 묵상하고 본받고자 하나이다.


우리는

자녀다운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당신께 맡기오니,

원죄없으신 동정 마리아여

우리에게 자기 증여의 충만함을 가르치소서.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여

우리에게 하느님의 백성을 섬길 수 있는

용기와 신뢰심을 심어 주소서.


오 거룩한 동정녀여,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과

우리 수도회와 우리 살레시오 가족 전체와

당신이 우리에게 맡기신 젊은이들을

계속 보살펴 주소서.






93 조 개인기도




우리 각자가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에만 우리는 기도하는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개인적이고 내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또한 하느님께 감사의 정을 드러내며 자신의 사도적 소망과 염려를 하느님께 토로할 필요가 있다.


묵상기도는 우리에게 필수적인 기도양식이다. 이 기도는 하느님과 친밀감을 두텁게 하고, 타성에서 해방시키며, 자유스런 마음을 간직케 하고, 이웃을 위한 봉사 정신을 길러준다. 돈 보스코에 의하면 이는 우리가 기쁘고 항구하게 성소를 살아가는 보장이다.






회헌 해설서 제7장 서문에서는 기도 내용을 서술하는 중에 공동체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양자 모두가 존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7장 서문, 6: "공동기도와 개인기도"

이미 검토한 조항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개인기도의 여러 형태를 지적했으며 특히 살레시오 회원이 자신의 기도에서 계발해야할 태도들을 지적했다. 그러나 본 조항은 그리고 특히 첫째 단락은 앞 조항들이 이미 대략 주장하고 있는 공동체 기도의 중요성이 곧 개인기도의 필요성을 간과하는 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두 형태들은 사실상 상호 의존적이다. 공동체 기도는 개인 기도의 육성을 촉진시키는 데에 그 가치가 있으며, 공동체 기도의 특징은 개인 기도에 달려있다: 하지만 정말이지 회원들이 죽어있는 집단이 어떻게 산 전례를 거행할 수 있겠는가? 본 조항의 첫 어귀는 의미심장하다: "우리 각자가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에만 우리는 기도하는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개인기도가 꼭 공동체 기도와 연결지어 고찰될 필요는 없다. 개인기도는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지니는데 이것은 둘째 문단에 설명되어 있다. 반면 셋째 문단은 개인기도의 본질적 형태들 가운데 하나인 묵상기도를 다룬다.




개인기도의 의미



개인 기도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신앙의 사람이요 수도자로서의 모든 살레시오 회원이 자기 자신 안에서 깊이 느끼는 욕구,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면서도 아버지께 잘 알려진 곳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려는 욕구에 대한 반응이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의 표현(마태오 6,6 참조)이며 공의회 문헌에도 나와있다.


공동체 기도와 개인기도는 인간이자 하느님의 아들들로서의 우리의 두 측면들(본 장의 서두에서 언급된)에 부합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그분이 설립하셔서 계속 일치시키시며 사명을 주어 파견하신 교회 공동체를 이룬다(회헌 85 참조), 그러나 우리들은 각자 하느님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이며, 어떤 의미로는 유일무이하고, 개별적으로 불리웠고 사랑받는 아들이며(회헌 22 참조), 엄밀한 책임 소지자들이다. "은밀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많은 은총들에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자녀임을 개인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또한 각자가 경험들과 성패를 겪으면서 자신에게서 느끼는 "자신의 사도적 소망과 염려를 하느님께 토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칙서의 본문은 사도에게 알맞는 자극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기도의 기본적 표현들에 대해 언급한다: 흠숭("하느님의 자녀임을 개인적인 방법으로 표현"), 찬미와 감사("감사의 정을 드러내며"), 탄원("자신의 사도적 소망과 염려를 하느님께 토로").


이런 기도는 지극히 자발적이며, 개인기도는 전례 정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마땅하기는 하나 상상력이 풍부한 것이라고도 일컬어질 수 있다. 전례 12 참조.

...? 전례 12, 13, 90 참조.



우리는 돈 보스코와 맘마 말가리타로부터 배운 그의 단순하고 자발적인 기도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지혜를 가졌던 그녀는 창조와 일상적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챘으며, 이것을 그녀의 아들들에게 가르쳤다: "아름답게 별이 총총 빛나는 어느 날 밤 그녀는 하늘을 가리키며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저 모든 별들과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꾸미셨단다: 하늘이 저토록 아름다운데 천국은 어떻겠니?' 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들판이나 꽃이 만발한 목초지나 장미빛 석양을 바라볼 때는 이렇게 외치곤 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아름다운 것들을 얼마나 많이 만드셨는지!' 소출이 많을 때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주님께 감사드리자꾸나. 우리에게 날마다 빵을 주시는 주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겠니!' "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35.

돈 보스코는 이런 기도 양식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이것을 자기 소년들에게 가르쳤다. 한편, 맘마 말가리타는 이제 사제가 된 자기 아들에게 훌륭한 그리스도교 신자의 단순한 기도들을 권했다: "네가 라틴어를 아무리 많이 공부하고 신학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을 망정 네 어미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알고 있다: 네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37.



살레시오 회원이 이런 개인적인 방법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삶 속에 깃든 깊은 신비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주여, 저는 당신이 저를 사랑하시며, 저를 부르고 계시고, 제가 당신께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기도의 깊은 곳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실천이 깃들어 있다.




묵상 기도



셋째 단락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언제나 대단히 존중되어 온 기도형태인 묵상기도에 대해 얘기한다: 신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의 사랑을 관상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그분의 신비에 적용시켜 그분과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는 여러 형태의 묵상 기도가 있다는 것을 알며, 각자 하느님과의 여러 가지 대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88조에서 언급된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잦은 만남"도 하나의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서는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묵상"이라 일컬어져 온 일상적인 묵상 기도 형태를 요구한다. 이는 일반 회칙 제71조에 나오는 명칭이며, 봉쇄 생활의 전형적 표현을 사용하자면 lectio divina의 한 형태에 해당된다.


우리들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있어서 이런 형태의 기도는 진실로 돈 보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을 그 토대로 삼고 있다. 우리의 창립자가 "오라토리오 회고록"에 직접 적은 말들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성숙에 있어서 묵상에 부여한 가치를 연역해 낼 수 있다. 아직 소년이었을적에 그는 돈 갈로쏘 신부에게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얘기한 뒤 그로부터 묵상을 시작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분은 내게 자주 고백성사를 받고 성체를 영하라고 권했으며, 날마다 짧게 묵상하는 법과 나아가 조금씩 영적 독서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오라토리오 회고록 36.

우리는 그의 착복식 때 그가 작성했던 생활규칙에 관한 결심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한다: "통상적인 신심업에 덧붙여 짧은 묵상과 약간의 영적 독서를 빠뜨리지 않으련다." 오라토리오 회고록 88.

다시 서품 때의 결심들 중 하나는 이러했다: "묵상과 영적 독서에 매일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련다." 오라토리오 회고록 115: 돈 보스코 전기 1385.

그 뒤 돈 보스코가 바쁜 사제 생활 중에 이 결심들을 계속 충실히 지켰는지에 대해 그에게 직접 알아볼 길은 없으나 시복시성 과정에서 그의 두 번째 특징이 된 묵상기도 습관에 대해 증언했던 많은 목격자들의 증거로 미뤄볼 때 그는 이 결심들을 계속 지켰음에 분명하다. P. BROCARDO, Don Bosco, profondamente uomo profondamente santo, LAS Rome 1985 중 기도에 관한 장, 96-106.



우리는 "돈 보스코 전기"의 여러 내용들 중에서 돈 보스코가 그의 아들들에게 묵상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다. 1863년에 미라벨로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된 돈 루아에게 그는 일련의 권고문을 보냈는데 그것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매일 아침 잠시 묵상하고 낮동안 성체조배를 하십시오." 서한집 1288.

이런 권고들을 "원장들에 대한 비밀권고"로 펴낼 때 돈 보스코는 더 강력하게 썼다: "아침 묵상을 절대로 빠뜨리지 마십시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10447이하.

1868926일 피정 끝에 그는 신심업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의 일상적인 신심업들은 묵상과 영적 독서와 성체조배와 양심성찰입니다": 그 다음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묵상기도를 권고 합니다…. 성체를 조배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매일 묵상하는 신앙적인 사람은 죄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9166이하.

피정 계획들을 포함한 어떤 원고에서 우리는 묵상의 중요성에 관한 돈 보스코의 몇 가지 고찰들을 접하게 된다: "짧던 길던 언제나 묵상할 것. 가능하다면 책을 가지고. 묵상이(성 닐로의 말씀대로) 우리의 악행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 되도록 할 것… 하지만 결코 빠뜨리지 말 것.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다(성녀 데레사). 영혼에게 있어서 기도는 육체의 온기와 같다. 묵상기도 없는 낭송기도는 영혼 없는 육체와 같다." 돈 보스코 전기(이태리어판) 9007.



젊은이들에게도 돈 보스코는 그들의 나이와 여건에 알맞는 묵상 형태를 권했다.


이 모든 지적으로부터 우리는 왜 묵상이 돈 보스코의 아들들인 우리들에게 불가결한 기도 형태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규칙서가 우리에게 요구한 "반시간"(일반회칙 71 참조)의 의미를 그 내용의 복합성에 비추어 잘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대개 성서 원문이나 그날의 전례로부터 시작되는 진정한 "묵상"이다: 이 경우 본 단락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는 제87조에 대한 자연스런 보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성서를 매일 손에 들고 말씀을 받아들여… 마리아처럼 우리 마음 속에서 이를 묵상한다." 이 점에 관하여, Quaderni di spiritualita salesiana 2"묵상", 살레시오 대학 영성 연구소, 1985. 9, 17쪽 이하.

...? 하느님의 말씀은 성서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와 수도회의 진정한 교도권에서 영적 성장을 촉진시켜주는 책들의 저자들인 교부들과 영성 생활의 대가들의 작품들에서도 발견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씀에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영성생활의 거장들이 서로 밀접히 관련된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 과정을 통해 그것이 내적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lecitio, meditatio or *ruminatio, oratio, contemplatio 즉 필요한 것은 내적 동화과정이 뒤따르는 묵상적인 독서이다: 이는 기도로, 그리고(때로는) 명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묵상이 어떤 그리스도교 진리를 돌이켜 보는 것에만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무신론자도 그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 묵상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응답을 유발시키며 그리하여 묵상기도 즉 아무런 외적인 말이 없으나 마음으로 친밀히 대화를 나누는 기도가 된다.


회헌에서는 "개인 기도"라는 제목을 지닌 조항에서 묵상이 제안되고 있는데 이에 대응되는 회칙 조항(일반회칙 71)은 우리에게 "공동으로" 묵상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에 놀랄 수도 있다. 사실 그것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공동체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기도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과 일치한다: 대다수의 우리 공동체들에서는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회원들이 이 "본질적인" 기도에 필요한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일상 시간표가 짜여진다. 이것은 실제적인 살레시오적 상식에 의해 정해진 규정이다. 또 한편 묵상은 개인적인 묵상 기도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본문은 이 기도의 목적들과 잇점들 가운데 몇 가지를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본문은 그것들 가운데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가장 명백한 것은 그리스도와 성부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이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두텁게" 한다. 개인기도에 관해 일반적으로 얘기했던 모든 것이 여기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진정한 모든 사랑은 친밀한 사귐의 기간들을 필요로 하며, 일정량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세 번째 목적 내지 결과는 다른 사람과 우리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묵상기도는 "이웃을 위한 봉사 정신을 길러준다." 깊은 사랑은 사실 다른 사람에 대한 헌신으로 꽃핀다: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그분께 대한 봉사에 언제나 더욱 순응적이고 전심한다.


이 두 결과들 사이에, 본문은 우리의 정신 상태와 생활 양식과 관련된 두 번째 것을 삽입시킨다: 기도는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본문에 사용된 두 표현들("타성에서 해방시키며", "자유스런 마음을 간직케 하고")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는 커다란 위험을 의식하게 한다. 낮동안 일과 피로에 짓눌린 우리 마음은 열성을 잃어버릴 수 있으며, 사랑은 약해지고, 우리는 기계적인 습관에 빠져들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조금만 지나치면 타성으로 변하게 된다. 개인 기도는 우리에게 숨쉴 여유를 주며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적 자유 속에서 한번 더 전진하게 해준다. 이것을 일단 이해한 사람이라면 개인 기도를 또 제쳐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 위에 우리는 돈 보스코에게서 나온 부성적이고 실제적인 사상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충실하게 실천한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기쁘게 밀고 나갈 수 있게 하며, 그렇게 하여 우리 인내의 보증물이 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우리 창립자의 가장 특징적인 말씀들 가운데 하나는 이전 회헌의 유명한 제155(묵상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에 관한) 역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창립자의 또 다른 확신을 이해하게 해준다: 묵상은,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도록 격려하면서 살레시오 회원의 일상 전체에 침투하여 그의 모든 활동을 고무시켜야할 기도 정신에 살레시오 회원을 개방시킨다. 이것은 세 번째 종류의 살레시오 기도에 대한 시각이다: 낭송기도와 묵상기도와 더불어 화살기도가 있는데, 이 화살기도는 본 장의 마지막 조항(회헌 95)에서 얘기 되겠지만 생활 전체를 기도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화살"기도는 "하느님께 메시지를 즉각 전달한다"고 했다. 돈 보스코도 이와 똑같은 사상을 가졌다: 그는 화살기도를 일종의 농축기도로 여겼다: 화살기도는 낭송기도와 묵상기도를 종합하여…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께 빠르게 전달된다: 그것들은 하느님께 마음의 느낌들을 전달하며 유혹이나 악덕과 같은 영혼의 적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불화살과도 같다"(돈 보스코 전기, 이태리어판 9997).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화살기도는 묵상을 행할 수 없는 경우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행이나 그밖의 긴급한 의무 때문에 규정된 묵상을 실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최소한 사업가들이 행동하듯 행동하십시오: 그들은 어디 있든지 늘 사업을 생각합니다"(돈 보스코 전기, 영문판, 9167).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당신과 개인적으로 얘기하려는 깊은 열망을

제 마음 속에 일으키소서.

당신 자녀로서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 주시고,

당신과의 만남에서

저의 사도적 생활의 지주를 발견케 하시어

당신과 이웃들에 대한 저의 사랑을

늘 생생히 유지하고

젊은이들에 대한 저의 헌신을 강화하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94 조 죽은 형제회원들에 대한 추모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우리 희망의 밑받침이 되고,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쉬는 형제들과의 생생한 친교를 도모하게 한다. 그들은 수도회 안에서 삶을 바쳤고 상당수가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 당하기까지 고통을 감수했다.


영적 통교 안에서 그들과 일치된 우리는 감사의 정으로 그들을 위해 규정된 연도를 바친다.


그들을 추모함은 우리의 사명을 충실히 계속해 나가는 데에 자극이 된다.






8조를 보충해 주는 제92조는 우리에게 우리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천상 어머니가 현존하심을 일깨워 주었다. 회헌 제1부의 제19조는 우리에게 "우리는 순례하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늘나라의 형제들과 통교를 이루며 그들 도움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살레시오 회원의 죽음을 다룬 제54조는 "죽은 형제들에 대한 추모는 그리스도 안에 이미 안식을 누리고 있는 그들과 아직도 지상 여정에 있는 이들을 '가실 줄 모르는 사랑' 안에 일치시킨다"고 언급했다. 그리하여 회헌은 우리에게 우리의 천상 수호자들에게 간구하며 그들의 중재를 빌라고 권고하는 동시에 이제는 고통받는 교회의 일원이 된 우리 형제회원들을 위해 성부께 기도하라고 요구한다. 그들 모두와 더불어 우리는 성인들의 통공의 놀라운 신비를 산다.


본 조항은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읽혀져야 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세례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세워진 희망에 의해 해명되어야 한다. 본 조항은 "추모"(제목 참조)"기념"(세째 문단)에 대해 역설한다: 우리의 추모는 지극히 짧다! 사망자 명단을 매일 낭독함으로써 고무되는(회칙 47 참조), 죽은이들에 대한 명백하고 잦은 기도는 죽은 형제들과의 생생한 친교를 도모하게 하는 가족적 방법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본문 전체는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의의 종합체이다. "죽은 이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형제들을 자신의 부활에 참여시키기 위해 그들을 자신의 죽음에 결합시킨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으며 실제적인 영적 통교 안에서 아직도 우리와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느낀다. 여기서는 돈 보스코가 그의 아들들을 한데 모으고자 했던 천국에 대한 돈 보스코의 신앙이 명백히 언급된다. "돈 보스코는 무수히 많은 당신 아들들을 위해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우리 주님께로부터 천국의 자리를 부탁하여 얻어 주시겠다고 우리에게 보증했다. 끊임없이 그분은 당신 학생들에게 언젠가는 그와 함께 천국에 있겠다는 지극히 굳건한 희망을 불어 넣음으로써 학생들의 마음을 천국에로 고양시켰다" 돈 보스코 전기(영문판) 8200.

고 돈 루아는 선언했다.


우리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의 기도들을 망각하지 않고 강화시킨다: 감사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도 많은 좋은 것들을 발견하는 우리 수도회는 죽은 형제들의 노고를 통해("그들은 수도회 안에서 삶을 바쳤고") 그리고 그들의 "고통"으로써 세워졌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책임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동일한 사명에 충실하여, 그들이 시작했던 사업을 지속시키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때로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 당하기까지" 그들이 지녔던 모범으로부터 자극을 받는다. 본 조항은 우리의 죽은 형제들을 우리의 본보기로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과 사업, 희망 속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뚜렷히 정해진 살레시오 성성의 길을 발견한다: 그들이 그 길을 걸었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하랴?" 이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이다: si isti et illi, cur non ego?(그들이 했는데 나라고 못하랴?)



죽은 형제들에 대한 여러 가지 기도 형태들을 상술하는 일반회칙 제76조는 우리 시선이 살레시오 가족 전체를 포용할 만큼 넓혀져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하여", "사망한 은인이나 살레시오 가족 구성원을 위하여."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당신은 우리에게

우리의 죽은 형제회원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우리의 성소와 사명의 선물을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사업을 충실히 지속시키고

그들의 모범을 따름으로써

그들과 친교를 나누며 살게 하소서.

어서 빨리 그들에게 지복직관의 충만함을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세세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그 충만함을 서로 나누게 하소서.

























95 조 삶의 기도




사목생활의 세계와 염려 속에 몰두해 있는 살레시오 회원은 자신이 파견된 그곳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과의 만남을 익힌다.


인간들, 특히 젊은이들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¹ 발견하고 모든 일에 있어 감사를 드리며² 그들의 문제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들을 위해 신적 현존의 빛과 힘을 간구한다.


살레시오 회원은 자신이 증거하고자 하는 착한 목자의 사랑을 길어내며 공동체가 제공하는 영적 풍요에 참여한다.


살레시오 회원은 사도적 임무를 통하여 하느님을 갈망하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이 갈망이 "성 요한 보스코의 아들들의 특징인 기도와 하느님과의 일치로 성화된, 지칠 줄 모르는 근면으로 삶의 전례를 거행하게 한다.



1. 갈라 5,22 참조.

2. 에페 5,20 참조.

3. 1924년 회칙 291조 참조.






본 조항은 우리의 기도에 관한 본 장과 또한 봉헌된 사도들로서의 우리 생활에 관한 회헌 제2부 전체를 끝맺는 조항이다. 또 본 조항은 공동체적 측면으로부터 개인적 측면으로("살레시오 회원은…") 이행함으로써, 본 장의 처음부터 우리가 지적해 온 것을 말함으로써 결론을 내린다: 살레시오 회원의 "삶의 기도""삶의 전례", "생활되는 기도"로 꽃피어야 한다. 특히 사도적 활동은 하느님과의 성화적 만남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95조는 활동 안에서의 하느님과의 일치에 관한 제12조와 이렇게 연결되며 그 내용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또한 "지칠 줄 모르는 근면"으로 자신의 사명에 헌신하는 살레시오 회원은 자신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조력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는 그로 하여금 그분들과 일치하게 해주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제18조와도 관련된다.




살레시오 회원에 의해 생활되는 기도



본 조항은 네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같은 사상을 전개시키고 있고 또한 살레시오 회원의 생활을 구별지어주고 그의 기도방식을 특징지어주는 사도적 영성의 몇 가지 특징들을 서술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이요 착한 목자에 대해 증거해야함을 의식하고 있는 살레시오 회원은 그리스도의 "사목적 사랑"에 의해 활성화되고 공동체 안에서 생활되는 영적 가치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활동에 종사한다. 사목적 사랑과 영적 가치들은 셋째 단락에 잘 표현되어 있듯이 사도가 끊임없이 길어내는 두 원천들이다. 여기에서는 자신이 이러한 불가분적인 두 좌표들에 여전히 충실한가를 늘 점검해야할 각자의 의무를 상기하는 것이 적절하나 각 회원에게 하느님과의 만남의 가능성을 제공해야할 공동체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때문에 일반회칙은 기도생활을 위해 적절한 계획을 작성해야할 공동체의 책임을 지적한다(일반회칙 69 참조).


사도적 활동에 몰두해 있으나 두 개의 이러한 강력한 버팀목들을 지닌 살레시오 회원은 하느님을 만나는 법을 배우며, 자신의 마음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해야겠다는 것을 끊임없이 느낀다. 그는 자신의 대상자들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성령의 열매들"을 인식하게 되며, "성령 안에서 기뻐했으며 '아버지 감사합니다…!' "(루가 10,21)고 했던 예수처럼, 도미니코 사비오나 미카엘 마고네의 영혼 안에서의 은총의 활동에 경탄했던 돈 보스코처럼 성부께 감사드릴 수 있다. 살레시오 회원은 젊은이들의 문제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빛과 권능이 부여되도록 그들을 위해 간구한다.

살레시오 회원의 생활 속에 반영된 여러 가지 기도 형태들(찬미, 감사, 간구)에 대한 회헌의 열거방법에 주목할 수도 있다. 살레시오 회원의 기도는 따로 떨어진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주 짧은 형식이나 화살기도로 표현되는 즉각적이고 자발적이며 간곡한 기도이다: 일상 업무에서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의식적이며 주의깊게 생활되는 삶의 기도이다: 예수와 함께 살며 예수를 위해 일하는 사도의 기도이다.




살레시오 회원이 거행하는 삶의 전례



이렇게 하여 살레시오 회원은 그의 성소의 "일치의 은총"을 실현시킨다. 살레시오 회원은 "삶의 전례"를 거행한다고 말한다. "삶의 전례"라는 절묘한 표현은 Laudis Canticum헌장이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으로 섬기고 그리스도의 활동을 고수하는 데에 몸바치는" 특별총회 127 참조.

...? 바오로 6세 사도적 헌장 Laudis canticum 로마 1970, 8.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이것은 사제와 수사를 막론한 살레시오 회원이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루가 18,1 참조)고 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골로사이 3,17)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실천하는 실제적 방법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혀로만이 아니라 선행이라는 악기를 손에 들고 하느님께 노래를 불러드려라" Non tantum lingua canta sed etiam assumpto bonorum operum psalterio(성 아우구스티누스).

고 말함으로써 성서 원문을 그대로 되풀이하여 말한다.


돈 보스코는 이러한 사상 및 행동노선을 완벽하게 따랐다. "선행"과 이른바 고유 기도 간의 밀접한 관계를 서술한, 돈 보스코가 작성한 회헌의 한 조항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본 회가 특히 지향하는 활동생활 때문에 회원들은 많은 신심업을 공동으로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훌륭한 모범을 보이고 선량한 그리스도 신자의 일반적 의무들을 완벽히 이행함으로써 이를 대신할 것이다." 1875년 회헌 131 (F. MOTTO, p.183).

사목적 사랑의 표현인 돈 보스코의 사도생활 전체는 살레시오 회원에게는 기도의 진정한 원천이 되며, 또한 세례로 말미암은 사제직을 실천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된다. 살레시오 회원은 종으로서, 아들로서, 사제로서 사도적으로 완전무결하게 행동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활동과 노고와 또한 자신의 활동 대상자들인 젊은이들 하나 하나를 하느님께 봉헌한다.


다름아닌 바로 이 시각에서는 일과 기도 간의 깊은 일치가 이해될 수 있다. 돈 보스코의 전기작가들이 그에게서는 일이 사실 기도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삶에서는 이런 일치가 강했다. 돈 체리아는 이렇게 선포했다: "살레시오 신심에서 명백한 점은 일로부터 기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언명은 비오 11세도 인용하여 확인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었고 무수히 많은 문제들 때문에 늘 바빴으며 끝없는 요청을 받고 조언을 해주느라고 걱정거리들에 에워싸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정신은 언제나 높이 고양되어 언제나 평화로왔고 이 평온이 흔들린 적이 없었으며, 그랬기에 그에게서는 일이 효과적으로 기도로 바뀌었고 그리스도교 생활의 대원칙 즉 qui laborat orat(일하면서 기도하라)가 입증되었던 돈 보스코의 가장 경탄스런 특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P. BROCARDO, Don Bosco, profondamente uomo - profondamente santo, LAS 로마 1985, 105.



일은 기도이나 일이 기도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고(정말, 그리스도의 사도는 기도에 대한 절대적인 욕구를 느낀다) 일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활전체에 통일성과 일관성을 부여하는 삼위일체의 생명의 종합체이며 신적 사랑 안에서 생활되기 때문이다. 일과 기도는 사실 하나이며 동일한 사랑의 두 측면들이며 그러기에 그것들은 서로 동일시 되도록 얘기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돈 리날디가 "돈 보스코의 아들들의 특징"이라 얘기한 "기도와 하느님과의 일치로 성화된, 지칠 줄 모르는 근면"의 의미이다.


살레시오 회원의 명백한 기도의 순간들은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 스스로를 바치는 봉헌의 표현인 동시에 그러한 봉헌을 재활성화 시키는 원천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성체성사 거행의 중심 역할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시각에서는 살레시오 회원의 번제가 흠없는 번제물과 함께 자신을 봉헌하며 봉헌된다: "주 친히 우리를 영원한 제물로 완성하게 하소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온갖 영예와 영광을 세세에 영원히 받으시나이다!"


7장 주님과의 대화는 공동체는 하느님을 그 원천으로 삼고 있다(회헌 85)는 선포로써 시작되며, 공동체는 그 성원 한사람 한사람을 통해 "영혼들을 찾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는" 살레시오 이상에 충실하여 그것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을 위해 산다고 말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성 요한 보스코 기념 미사 축문: 회헌 10 참조.

...?





주 예수여,

당신은 세상에 사시는 동안

성부께 끊임없이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모든 것들과 모든 시간 안에서

그리고 특히 나의 형제들과 젊은이들 안에서

당신과 성부를 만나게 하소서.


저의 사도적 활동이

당신과 더욱 일치되어 살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당신의 완전한 희생에 일치된,

성부를 기쁘게 해드리는 희생이 되게 하소서.


주는 세세에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나이다.



감사합니다.

p.233 ; 3권 끝내고 4권 시작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