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400|ko|382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시편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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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i 382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시편 16,2)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습관적으로 우리 수도회 전체에 분기마다 보내는 회람서한을 보낼 시간이 되어 총평의회 여름 모임을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있었던 다락방에 성령이 내려오심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축일에 인사드립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에 따르면(2,1-11참조), 성령강림은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처럼 제자들 각자의 마음을 깊게 변화시킨 사건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권능이신 성령은 제자들을 휘감아 마치 불꽃처럼 그들의 심연까지 뚫고 들어갔습니다. 두려움은 용기가 넘치는 발걸음으로 물러가고 굴복되었고, 무관심은 동정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외부와의 단절은 열정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기심은 사랑으로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역사 안에서 그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에 대해서 보다 확신에 차고 용기 있고 믿음이 있는 증거자가 있도록, 바람 같고 같은 성령이 교회와 사랑하는 우리 수도회 안에서 오순절의 체험을 쇄신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회람서한에서 수도회 전체에 행한 저의 총장으로서의 첫해 활동에 대한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저에 대해서 아시고 총장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일련의 정보를 얻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삶은 멈추지 않습니다. 마지막 달간 저는 빽빽한 일정을 보냈습니다: 로마의 보르고 라가찌의 행사, 파티마의 영성 수련(연피정), 포르투갈 관구 방문, 영국방문, 트레빌리오와 끼아리에서의 며칠, 시칠리아, 바비에라의 빌바오와 모나코 방문, 본과 콜로니아(독일) , 베로나 관구 방문, 총장신부들의 모임에 참석, 아드리아티카 관구 방문.

저는 항상 수도회의 현실, 수도회가 가지고 있는 자원들, 문제들, 도전들과 잠재적인 능력을 알아 가고 있다고 말할 있습니다. 게다가 총장으로서 행해야 많은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 사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필요한 것입니다. 사명 앞에서 저는 필요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열망인 부성애가 풍부하고,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고 충실하고 역동적인 보스코의 후계자가 있도록 여러분의 이해와 특히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1. «나는 여러분 모두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로마 1,8)


수도생활에 대한 가지 성찰을 여러분들과 나누기 전에 여러분들께 영적이며 사도적이고 성소적인 유익한 자극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보스코의 여정 위에서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선물로 드린 여러분 각자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여러분께 감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관구나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여러분을 만날 개인적으로 인사를 하듯이 편지로 기꺼이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편으로 보면 모든 형제는 수도회를 위해서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말을 반복하는 것을 피곤해하지 않을 것이며 형제가 수도회의 보물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해줄 방도를 찾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살레시오 성소, 그것이 수사지망이든 사제지망이든지 여러분 각자를 위해서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체험이며 또한 여러분의 체험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빛으로 몇몇 시편의 구절들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시편 16(15) «야훼께 아뢰옵나이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 야훼여! 당신은 내가 받을 분깃, 내게 기쁨을 주는 잔이십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떼어 주신 기름진 흡족하게 마음에 듭니다»(2.6). 현재 행해야 직무인 총장이 것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위에 집중된 삶의 계획으로서 무엇과도 견줄 없는 성소의 선물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름을 불러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자신이 되고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열정을 나누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마르 3,13-15 참조). 성소를 얻는다는 것은 삶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현해야 (하느님에 대한 ) 이루어야 사명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도달해야 목표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인) 있습니다. 이것은 돈보스코의 삶과 하나가 전체를 힘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줍니다(회헌 21 참조). 이것이 살레시오 성소입니다.

살레시오 성소는 조심스럽게 길러지고 젊은이들이 우리처럼 행복하게 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제안되는 값진 주님의 선물입니다. 젊은이들 사이에 보다 크고 널리 퍼져있는 문제는 불행히도 많은 젊은이들이 마약이나 알코올, 성적인 문제에 대한 혼란 등에 빠져 있지만 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모르는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삶에 대한 방향이 없다는 , 삶의 지평과 의미와 계획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젊은이들이 삶을 하나로 통합시키거나 역동적이게 하는 요소 없이 물질이나 체험을 소모하면서 피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의 전기(傳記) 더욱더 풍요롭게 하는 여러분 성소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삶의 마지막 순간에 권의 또는 유언서 안에 기쁨과 슬픔, 꿈과 낙담, 희망과 실패, 땀과 눈물과 미소로 이루어진 젊은이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충실했던 이야기를 수집할 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 드리기 위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말로 삼고자 합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젊은이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축성되었고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유일무이한 분이시며 최고의 선이십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저도 인사하고 싶습니다: 나는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의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을 기억하며 여러분을 찾아 기회를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애타게 만나 보려는 것은 여러분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피차의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로마 1,8-12).


2. «저는 하느님께 저의 마지막 숨까지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MB XVIII, 258)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있듯이 이미 번째 편지에서 저는 삶의 계획, 수도회 통치에 대한 선택, 교육적 제안에서 성덕을 이루려는 열망을 여러분들에게 표현했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부터 저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저의 번째 편지가 다른 편지들처럼 그냥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6년간의 계획을 담은 편지가 되기를 바랬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성덕에 대해서 말할 저는 그것이 일반적인 어떤 것이거나 모든 사람에게 아무런 구분 없이 제안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성덕에 대해서 말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성덕의 ,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 보스코의 모범을 따라서 사는 살레시오 성덕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살레시오 사명을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축성된 사람들의 질적인 안에서만 도달할 있고 있는 성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축성하시고 젊은이들의 사도로 우리를 파견하시는 성부의 은총 의한 것이다(회헌 3).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젊은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파견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인 축성된 성덕이 바로 우리의 성덕입니다. 저는 전략적인 모든 것에 대해서 고려하는 살레시오 성덕에 대한 측면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돈보스코의 살레시오 회원들은 수도생활의 독특한 형태 안에서 창립자의 사도적 계획을 실현하고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우리 성화의 발견(회헌 2)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수도회를 방문하면서 저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놀라운 일을 하고 있지만 하느님을 위한 열정으로 고무되거나 활기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는 형제회원들을 종종 만났습니다. 그들은 에너지가 넘치고 사도적 용기로 가득 있지만 하느님을 위한 열정이나 그분으로부터 고무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헌신이 가치를 인정 받을 없다면 다른 한편 그렇게 엄청난 활동의 참된 동기가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없습니다. 자신의 봉사를 원천으로 삼는 살레시오 사명과 수도회는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났고,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레시오 회원은 «하느님께로부터 젊은이들에게 파견된 사람»(회헌 16)입니다; 살레시오 회원은 «단순히 인간적인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하심에 의해서 생겨난»(회헌 1)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성소에 가장 특징적이며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청소년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이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 (회헌 14)이라는 것입니다. 애당초 하느님은 우리 살레시오 사명의 원천이시며 근거이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객관적 현실은 회원 각자가 살아온 것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보스코의 개인적인 체험은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소를 위한 청소년들의 사도요 사제인 그는 그들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 고무적인 교육자가 됩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교육자요 사목자는 수도회의 창립자가 됩니다: « 보스코 자신이 수도자였고, 살레시오 회원들의 양성지도자였고 후에 살레시오 수녀들의 양서지도자였다 그는 청소년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유동적인 동역자들의 불규칙적이고 자원봉사적인 참여 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한 것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1. «그러나 젊은이들의 세계가 보다 복잡하고 버림받고, 보다 만연되고 조직적인 가난의 상황이 드러나고 있을 , 개인적인 차원의 자원봉사는 안정적이거나 지속성, 활동의 일관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일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영적이며 법적인 상태 그리고 그들 조직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숙고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결과 보스코는 다른 어떤 조직체보다도 정제된 수도회의 형태를 선택했던 것이다»2.

그러므로 소년들, 특히 보다 가난하고, 버림받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사명은 «청소년들을 위한 구원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광활한 운동» 요구했다는 것을 알만합니다. 보스코는 자신의 젊은이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협조자들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보스코와 함께 영적이며 사도적인 동일한 체험인 발도코의 체험을 나누는 사람들이었고 보스코로부터 그와 함께 머물도록 초대 받은 사람들이었고, 후에 번째 살레시안이라 불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어떤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던 청소년들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보스코의 집에 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을 점차로 공동체 안에서 보스코와 함께 살고 일하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참되고 고유한 봉헌생활 수도회의 성원이 되면서 그의 동일한 사명을 나누고 수도 서원을 통해서 매이려는 결정을 하도록 인도했다»3.

적어도 우리 살레시안들에게 봉헌생활 그룹의 탄생을 요구하는 사명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청소년들은 오락이나 시간 보내기로써가 아니라 목표와 동기로서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했습니다. 보스코는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사업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느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스코는 그의 젊은이들에게 완전히 봉헌된 협력자들을 얻기 위해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상의 협조자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일주일 내내 사도적인 일에 한결같이 참여하는 노력을 보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의 계획적인 선택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 대해 가지고 계시며, 특별한 사명을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축성된 특별한 성소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는 아홉 꿈으로부터 각인된 체험의 논리적인 귀결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적이며 사목적인 고유한 체험으로부터 시작해서 보스코는 살레시오 사명의 봉사로부터 태어난 수도생활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3. 봉헌생활에 대한 오늘의 불안


오늘날 수도생활 앞에서, 최근에 우리 수도회 안에서도 명백한 불안이 확실히 존재합니다. 적어도 몇몇 관구군에서 겪는 형제 회원의 수적 감소와 평균연령의 증가는 모든 형태의 수도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성소의 나약함 이상의 표징이 됩니다. 같은 불안은 수도회가 교회의 요청, 세상과 문화의 요구, 청소년들의 항상 새로운 요구에 충실했고 수도회가 충실하고 창조적으로 그와 같은 요구에 대한 응답을 찾았다고 생각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분명한 불안은 현대의 봉헌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며, 그의 첫 번째 과제로서 «하느님의 우월성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하느님 현존의 표징들이 인간의 시야에서 멀어진 듯한 현대 세계에서»(봉헌생활 85)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게다가 예견할 없고 형언할 없는 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항상 어려운 과제입니다; 결과 그분을 체험한다는 것이 비록 가능하다 해도 하느님의 현존이 이상 느껴지지 않거나 침묵 속에 계신 곳에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은 영웅적인 것이 있고 그와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도생활이 고통스러워하는 불안은 외적인 부분, 세상과의 자연적인 호완 가능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4, 자신의 내부로부터도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수도생활에 안전과 사회적 중요성을 부여해온 사회적인 역할들을 다른 것들에 갑자기 빼앗겨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5

오늘날 쇄신, 재창조, 재창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수도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방식은 확실히 편안하거나 만족감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2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시작된 쇄신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깊이 이르지 못하고 단순히 형식적인 어떤 것으로 남아있지 않는가를 점검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2 바티칸 공의회 이전 시대에는 수도자들, 그들의 삶의 형태와 교회 안에서의 위치를 구분하기 쉬웠다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었습니다. 수도생활은 교회 권위로부터 승인된 수도회의 회헌에 따라서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의 서원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의 형태였습니다. 수도자들은 수도원에서 살았고 그들의 습관과 관습을 통해서 수도회의 안팎에서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 생활 스타일과 구성원들의 명백한 가시성은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실제로 분리시켰고 교회 자신 내부에서 그들을 평신도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의회는 모든 수도회가 관련되었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작했고 모든 수도회는 세상 안에서 교회 내적인 (GS) 재배열하기 위해서 친교의 새로운 교회론(LG)으로 변화되었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성소, 서로 다른 역할과 카리스마로 유일한 하느님 백성을 이룸으로써 친교의 교회론을 형성한다.

모든 쇄신과정이 이루어진 후에 오늘날 자주 수도생활의 신원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고 평신도들과 사목자(주교, 사제, 부제)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이 교회 안에서 그의 위치를 정의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수도생활이 변형되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려움은 외부로부터, 예를 들면 수도복을 포기하는 행위나 일반 시민처럼 옷을 입는 형태를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성덕에로의 보편적인 부르심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나오며, 수도생활의 참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제거해버렸던 일련의 .외적인 요소들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덕을 드러내는 객관적인 우월성(VC 32), 그의 현존을 눈에 보이게 하는 (VC 25) 수도생활의 의미성, 그의 신뢰와 열성에 대한 오늘날의 요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도생활이 외적으로는 세속화에 의해서, 내적으로는 신원의식을 잃어버림으로써 위기에 처했다고 말할 있습니다.



  • 외적인 위기


우리 시대의 보다 심각한 현상은 이상 무신론(GS 19)6 아니라, 심각한 세속화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믿음이 없는 문화, 비종교적인 문화, 실제로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사회의 세속화입니다. 우리는 무관심과 상대주의의 분위기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분이 살아계실 공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합리성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은 신앙 없이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현존은 이상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7 종교적 실천은 눈에 안보이게 됩니다; 복음은 새로운 메시지들로 지쳐버린 사회 안에서는 이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 못합니다. 하느님과 거룩함이 아직도 우리 안에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면 내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속됨이 세상을 정복하고 있고, 사회의 주인이 되어버렸고 개인적인 영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의식과 프라이버시는 이상 하느님이 들어오실 없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석은 과장된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1991 말에 유사한 언어로 수도생활이 계속해서 유효하고 칭송받을 만하다고 쓰신 비가노 신부님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많은 표현들은 종교적인 차원으로부터 허용된 것들이었습니다. 반면 종교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증가하게 되었고 종교적인 내용에 대한 지식이나 생활로 실천하는 것으로서의 신앙 성숙의 리듬이 더욱더 어렵고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업에 있는 젊은이들과 양성 중에 있는 젊은 살레시안 다에게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혹은 세례성사의 선택을 산다는 것이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시민의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 선택할 있는 사회적인 양식 하나가 됩니다. 그리하여 상대주의, 전통적 이상들이 흐려지고, 삶의 의미의 상실이 일어나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나침반 없이 배를 타고 표류하고 있는 보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목표인 초월적인 분에 대한 전망을 상실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인간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엄청난 불안을 채워주기에 턱없이 부족한 미소한 응답에 자신을 가두고 있습니다. 과학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답변들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의미에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추구하는 시선 안에서는 부족할 뿐입니다»8.


세속화는 봉헌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지 모습을 가질 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날 있습니다.

  • 삶과 성소의 지평으로서의 신앙이 약화되거나 잃어버렸을 분명하게 드러나며 성소의 삶은 순전히 인간적인 계획이 되어버리고 마는 초월성의 상실; 하느님께 축성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모든 것을 집중시킨 삶을 살아가는 동기가 점점 어렵게 되거나 심지어 사라질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 이상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지 못하고 최종적인 기준으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을 중심에 두는 인간중심주의(antropocentrismo). 그와 같은 방식 안에서 삶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어떤 공간도 할애하지 않으면서 개인적인 요구와 본성이 추구하는 역동을 계발하는 것으로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 인간은 창조적인 , 세상에 대한 지배, 개인적인 성숙과 사회적인 성공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동반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계발하는 일을 열정으로 느끼는 사회경제적인 실천. 그러나 사도적 사명이 사회사업으로 축소되거나 변화를 위한 일로 동일시된다.


생각으로는 quod non assumptum”(그리스도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은)이라는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이 강생을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쇄신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2차적인 것으로 놓아두려는 강생의 원리에 대한 축소된 신학적 견해 또한 수도생활의 세속화된 전망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결정으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인간(神人) 하느님이 되기를 멈춘 적이 없었고, 결과 하느님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고 그것도 참된 인간이 되셨으며 하느님으로 남아계신 하느님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종종 잊고 있습니다.



  • 내적인 위기


외적인 요인들이 위기의 조건을 강하게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대개 수도생활의 위기는 배타적으로나 지배적인 외적 요인으로부터 기원을 가지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수도생활의 위기는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가지 증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 수도생활에 대한 교회적 신원의 약화. 우리는 수도생활을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삶으로 정의하는데 익숙해있습니다; 2 바티칸 공의회는 성덕을 향한 성소는 세례받은 모든 사람의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성덕을 향한 보편성소 안에서 수도생활의 의미와 역할을 정의할 있겠습니까?

더욱 극단적인 것은 사명에 대해서 의기소침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선포와 애덕의 봉사라는 이중적 임무가 사제들과 봉헌된 사람들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생각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사명은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성소에 따른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맡겨진 책임이라는 것을2 바티칸 공의회는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전체적인 차원에서 평신도의 성장은 그것을 확증하는 표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도생활의 현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성과 사명을 포함하고 있는 카리스마는 수도회의 재산으로서 배타적으로 소유될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카리스마는 접촉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수취인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들 안에서 삶으로 살아갈 비로서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카리스마 앞에서 축성된 사람들이 어떤 의무를 가지고 있을까요?

항상 이런 질문들이 명백하게 제시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것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신원과 기능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지 못하고 약화되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 기능에 집중된, 봉헌생활의 존재론적인 전망보다는 기능적인 전망에 집중된 수도생활에 대한 전망. 1800년대의 수도생활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의됩니다. 아니 사명을 살았다고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시대는 그것을 요청하였고 제공된 봉사는 복음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진화는 정부 혹은 사회사업 그룹들이 수도생활에 의해서 창출되고 실현된 많은 봉사들을 대신해서 하고 있는 데서 드러납니다. 오늘날 수도공동체들이 가지고 있던 동일한 사업들 안에 평신도들의 운영과 관리 책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의 사업은 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공공 사업보다 훨씬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혼란스런 어떤 점도 있습니다. , 성소자들이 꾸준히 들어오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우리에게 봉사를 받으러 오지만 살기 위한 이유를 우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현존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강화시키는 의문이 조용히 확산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 과거 구조의 극복. 봉헌생활은 그의 구성원들을 항상 성숙시키고 하느님의 아들이 가진 자유에 따라서 살도록 도와주지 못하는 계명과 규칙의 그물 안에 가두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게다가 수도생활의 형태들, 쇄신된 수도생활의 형태들도 항상 새로운 상황에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날 같이 새로운 상황 안에서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명을 실현해야 합니다. 공동체 생활에 대한 계획과 기도 형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반면, 전통적인 형태와 구조들은 개인의 자율권, 대화와 참여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가치들을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방향을 알고 있다는 느낌은 있지만, 아직도 현실 안에서 여정을 용이하게 하고 지지해줄 생활과 활동 모델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불편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낡고 부적합한 구조들을 버렸지만 아직도 새로운 구조들을 찾지도 결정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9 최고 장상들은(USG) 약간 강하지만 진실한 확신을 가지고 같은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 그들은 수도생활의 모델은 이제 진부한 것이 되었고 이상 수도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동기를 부여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Maccise 신부는 오늘날 우리는 내일의 수도생활의 모델이 어떤 것일지 없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사도적 축성의 의미, 일치의 은총, 살레시오 영성의 특성을 발전시킴으로써 우리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했었던 비가노 신부10 베끼 신부11로부터 인지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는 보다 심각한 원인들을 진단하고 결과 해결책을 찾는데 좀더 나아진 조건들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4. 봉헌생활의 객관적 우월성


봉헌생활은 바야흐로 “민감하고 고통스런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위에서 제가 말했던 것을 요한 바오로 2세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확인시켜주고 계십니다: « 시기는 복음 권고의 선서에 신선한 활력을 불러일으키려는 새로운 시도와 제안 그리고 희망에 가득 시기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시기는 또한 선의의 노력들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들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던 긴장과 갈등의 시기였습니다»(VC 13). 이러한 어려움들이 교회 안에서 봉헌생활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가치를 어둡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어려움은 다른 형태의 삶과 봉헌생활을 비교하면서 신학적 신원을 명백하게 하도록 긴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VC 31-32 참조).

같은 노선에 따라서 지난 5 이탈리아 주교회의의 마지막 회의에서는 Mutuae Relationes 반포 25주년을 즈음하여 주교들 분이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아래서 제시된 빛에 비추어 봉헌생활의 카리스마는 교회 안에서 다양한 성소 표현에 관련해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사명과 관련해서 신학적이며 사목적인 명료함으로 재이해되고 생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보다 확산된 해석 봉헌생활의 존재론적인 전망보다는 기능적인 전망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축성은 사업 안에서 봉사의 기능성을 보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봉헌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명의 근본적인 내용입니다. , 하느님을 망각한 세상 안에서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 너무나 왜곡되어 있는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는 , 궁극적인 현실에 대한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12.

Tillard 다음과 같이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참된 모든 수도생활의 근거로서 우리는 일차적이며 모든 것이 이해되는 동기화가 위해서 아니라 때문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때문에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것을 위해서 수도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 ,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보여주신 매력 때문에 수도자가 되는 것입니다».13 이와 같은 시점에서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봉헌생활에 대한 현재의 진짜 도전은 이미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확신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수도생활의 중심에 놓고 수도생활이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교회헌장 대한 불완전한 이해가 수도생활이 표방하는 그리스도를 따름 대한 객관적 우월성 없애버렸거나 어느 정도 감소시키는 가운데 수도생활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원을 없애버리는 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생활에 대한 신학적인 상태 재고한다는 것은 «오늘날 남녀 수도자들이 직면해야 하는 가장 도전들 중에 하나입니다»14.

우리는 많은 평신도들과 사제들의 주관적인 성덕에 어떤 편견도 가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름”과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수도생활 안에서 가장 유익한 분야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봉헌생활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관계에서 그리고 형제자매들에 대한 관계 안에서 참으로 강생하신 말씀이신 예수님의 존재양식과 행동방식에 대한 살아있는 기념입니다»(VC 22). «복음 권고는 정결, 청빈, 순명의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에 동참하도록 일부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것으로, 권고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께 완전히 동화되고자 하는 명백한 열망 요구하고 열망을 드러내 줍니다…. 정결, 청빈, 순명으로 요약되는 예수님의 생활 방식은 땅에서 복음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하는 길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이신 길이므로, 길은 외아들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과 이루는 관계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길이라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통은 언제나 봉헌생활의 객관적 우월성 이야기해 왔습니다»(VC 18).

교회를 이루는 선물의 총체적인 조화 안에서 «기본적인 생활 신분은 각기 나름대로 하나인 그리스도 신비의 여러 면모들을 드러내는 구실을 합니다. 평신도생활의 특별한 사명이 세속에서 복음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라면, 성품을 받은 자들, 특히 주교들은 교회의 친교에서 필수적인 직무를 수행합니다. 교회의 성덕을 드러내는 길로서 그리스도 자신의 생활방식을 반영하는 봉헌생활은 객관적 탁월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봉헌생활은 복음적 가치의 풍성한 표현이며, 동시에 교회의 목적 인류 성화에 대한 더욱 완전한 표현입니다»(VC 32).

수도생활의 사명은 다음과 같은 표징,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 살아계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표징, 자신의 안에 주님 수난의 거룩한 상흔(갈라 6,17) 지니고 있는 수도자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현존을 연장시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화되는 «자신의 전실존을 그리스도께 일치시킴으로써»(VC 16) 공적으로 생활하고 표현하여 수도생활에 일치시킨다. «이것은 삶의 중심과 모든 독창적인 일의 지속적인 원천이 되는 그분과의 특별한 사랑의 친교를 형성한다»(RdC 22).

사실, 봉헌생활은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감각들을 점진적으로 동화시키는 과정입니다»(RdC 15; cf. VC 65). «그러므로 봉헌생활의 중심이신 그리스도께 항상 더욱더 일치시킬 필요가 있고 그의 부활과 전후에 사도들의 원초적인 체험 안에서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회개와 쇄신의 여정을 활기차게 다시 시작해야 필요가 있습니다»(RdC 21).

  • 세상 안에서 하느님 현존과 우선권을 두는 징표,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나약함 안에서 드러나고(1고린 1,22-31 참조) 죄를 고발하고 부활 안에서 성령의 생명을 주는 활동으로 시작된 생명과 인간의 원천이신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이며 내적이며 수도회적인 우리 삶의 절대적인 가치로서 하느님께 상응하는 우선권을 드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뭄에 나듯 일어나는 일이거나 부차적인 과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우리의 존재 이유이며 우리의 째가는 사명입니다: «단순한 일상 안에서 봉헌 생활은 세상의 방식이나 지배적인 문화에 대한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점진적인 성숙을 경험합니다. 삶의 방식과 절대자에 대한 추구로 우리시대에 만연한 악에 대한 영적 치료를 불러일으킵니다» (RdC 6).

  •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요한 18,36 참조), 인간적 가치를 띠고 있지만, 인간적 가치 안에 참되고 절대적인 새로움을 도입시키면서 가치를 초월하고 이들을 구원하는 하느님 나라의 새로움의 징표. «성령의 활동 아래 봉헌생활 자체는 사명이 됩니다. 대부분의 축성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일치하도록 자신을 맡기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역사 안에서 그분이 현존하시고 일하시도록 합니다» (RdC 9).

이것은 삶의 계획으로서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있는 누룩으로서 기쁨과 근본적인 삶의 태도로써 참된 행복을 살도록 합니다. 봉헌생활의 특별한 사명은 사실 « 행복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형시킬 수도 없고 하느님께 봉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신분으로써 탁월하게 증명함으로써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근본 가치를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VC 33).

  • «형제적 친교가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수단이 되기 이전에, 어떤 형식으로든 부활하신 주님의 감추어진 현존을 체험하는(마태 18,22 참조) 하느님 계시의 장소가 되어야 하는»(VC 42) 공동체 생활 안에서 예수님의 계명을 근본적으로 살기 위해 서원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교회적 친교의 표징. 그러므로 복음화에 대한 남녀 봉헌생활자들의 기여는 «무엇보다도 구세주를 본받아 하느님과 형제자매들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삶의 증거에 있습니다»(VC 76; RdC 34 참조).

이것은 인간적 계획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가 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상호간의 사랑 덕택에 이루어집니다(VFC 7 참조). «친교의 삶은 봉헌생활의 번째 복음선포를 표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는 효과적인 표징이며 설득력 있는 됩니다. 그래서 친교는 자체로 사명이 되며, 친교는 친교를 잉태하게 됩니다. 친교는 본질적으로 선교적 친교 변화됩니다»(RdC 33; ChL 31-32 참조): «참되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자신 안에 그분을 가둘 없습니다. 그분을 선포해야 합니다»(NMI 40).


«오늘날 봉헌생활은 무엇보다도 세례적인 봉헌과 새롭고 영적인 봉헌의 복음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구체적인 안에서 숙고하도록 도와주는 영적 도약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영성생활은 봉헌생활 가족들의 계획 안에서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런 방식 안에서 모든 수도회와 공동체는 참된 복음적 영성의 학교로서 드러나야 합니다»(RdC 20; VC 93).

복음의 예언적 새로움,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을 비춰주고 기준이 되어야 하는 새로움의 표징이 되도록 불린 우리는 교회 안에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덕에로 부름을 받았다면 우리는 신자들 사이에 살아있는 부르심이 되기 위해서 성덕을 삶의 양식이자 우리의 참된 서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봉헌된다는 것은 우리의 번째 사도적 사명입니다.

이것이 청소년들의 교육자인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청소년들은 그들을 자극하고 인생의 길을 제시해줄 어떤 사람, 자신의 삶의 형태로 그들에게 삶과 희망의 이유를 주며 그들의 인간적 그리스도인적 발전을 동반할 어떤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5. 위기의 모델


이와 같은 신원으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성소자의 부족, 적게 드러나는 증거와 약한 의미는 이제 이상 하나의 증상이 아니라는 현재 수도생활 가지고 있는 위기의 뿌리를 개별화시킬 있습니다.

쇄신이라는 것은 계몽주의, 해방과 인권 안에서 가장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현대성에 수도생활이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수도생활의 자유적이고 축소된 개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개념은 인간, 그의 양심, 그의 권리를 중심에 놓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풍요롭고 존경스런 인간적 성숙을 이루는 건전한 해방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했지만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표징을 나타내는 요소들로 가져왔습니다:

  • 봉헌생활에 대한 어떤 유형이든지 특별한 구분 대한 거부; 수도복, 구조, 수도자들의 습관, 언어, 사람들 앞에서 소개되는 특징적인 방식과 같은 사회적인 소속의 특징을 거부하면서 나아갑니다; 다르게 인식되고 드러나는 것을 거부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보물이 밭에 묻혀 가려진 상태로 있는(마태 13,44 참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봉헌생활 자체가 어떤 것에 대한 징표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떤 징표를 보여줄 있단 말입니까? 바로 이것 때문에 오늘날 눈에 보이는 통해서 세상과 교회 안에서 위치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특징적인 모습»(VC 1) 드러납니다.

  •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구분할 있는 어떤 것도 없이,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고 그분에 대한 사랑에 빠진 , «그리스도가 지녔던 삶의 형태를 열정적인 사랑으로 살아가기 위해 투신하는»(RdC 8) 우리의 수도자로서의 특징적인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세상처럼 보통사람 되려는 간절한 열망.

그러나 봉헌생활이 어떤 것도 드러내지 못한다면, 보다 심오한 느낌들과 특별한 자원들을 흔들어 깨우지 못한다면 수도자가 되어야 합니까? 만일 수도서원이 특별하거나 독특하지 않으며 약간은 미친듯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것은 아마 우리들의 고상한 삶의 양식을 축소시키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만일 봉헌생활이 일반적인 방식의 안에서 시작된다면, 이것은 봉헌생활이 가지고 있는 예언적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5; 모든 것을 하지만 특별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나은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면 어떤 것을 선포하지도 드러내지도 못하게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쓰겠습니까?

  • 여기서는 전문화 과정 대한 언급이 추가됩니다. 먼저 성소의 은총이 우리의 전문가적 무능으로 바뀌지는 않았는지 모릅니다. 순명은 기적을 이룹니다 종종 말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요구되는 수도자의 전문적 준비가 종종 사명을 위해서 기꺼이 사용되지 않는 구실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단순한 교육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복음적 신선함, 사도적인 자발성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만일 모든 살레시오 회원이 수도회에 봉사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문직을 버린다면 어떨까? 자문해 봅니다. 체험으로는 기꺼이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봉헌생활이 단순히 건강, 교육과 소외의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에 대한 것으로 여긴다면 불행히도 목표가 수단으로 바뀌었다는 실수를 인정해야 것입니다. 행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보다 우리가 하는 일이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요?

  • 그리하여 순명이 거의 불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개인주의 들어가게 됩니다. 일은 엄청나게 많이 하지만 의식적이지 못합니다. 만일 이것이 널리 알려진 것이라면 생각해보아야 것입니다. 회원 자신의 권리, 고유한 계획, 개별적인 성소의 실현 앞에서 해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 이와 같은 것들이 문제시되거나 평가된 적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봉헌생활이 자아실현 전망으로부터 회원자신의 삶을 해석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정적인 말씀을 기억합시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마르코 8,35; 요한 12,25 참조). 자아실현은 자기자신과 자신에 대한 관심을 중심에 둡니다. 반대로, 복음은 하느님과 이웃을 중심에 둡니다. 자아실현의 문화는 공동체 식별 왜곡합니다. 공동체 식별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해 개인의 의지가 초연과 정화의 과정으로 취해지지 않고, 개인적인 결정을 취하게 하는 전략적인 과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그리스도를 따름을 있으며 예수님처럼 양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요한 4,34)이라는 것을 어디서 찾아볼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공동체 사명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에게 우선권을 두는 것이 공동 사명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봉헌생활이 성소와 사명의 개인주의적인 전망을 받아들이거나 자리를 허락한다면, 봉헌생활은 자기 붕괴를 맞이하게 것입니다. 이런 위험은 상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같은 것이 양성과 통치를 하는데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 기도의 축소 자유스런 봉헌 생활의 모델의 요소가 됩니다. 신심업이 사적인 용도(ad usum privatum) 축소되었고, 기도에 임하는 횟수, 눈에 보이는 증거와 기도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는 기도를 합니다. 왜냐하면 보다 급히 해야 다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이것은 청해야 어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가 우리에게 (전례가 아니라) 하루의 일과이며 형식주의가 있고 자발성이나 진솔함이 결여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행하기 않고 규율과 방법, 생활 규칙과 일상의 충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신자 개인 안에 내적인 공허와 심각한 편린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봉헌생활이 수도자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것은 수도자가 하느님을 만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사실, «은총에 우위를 두고 관대하게 영적인 임무를 통해 응답하도록 하는 설득력 있는 초대는 봉헌생활자들로부터 교회에 확산되고 있습니다»(RdC 8; NIM 38). 살레시오 회원에게 하느님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방식 안에서 이미 라틴어로 표현된 Corruptio optimi pessima(가장 좋은 것이 썩으면 가장 나쁜 것이 된다)라는 말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수도자보다 나쁠 것은 없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겠는가?(마태 5,13).

  • 이런 모델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유형은 평온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개인적인 복지가 이루어지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지내는 공간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비슷한 사람들로부터 형성된 동일한 공동체 가치가 예견됩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도달해야 이상으로서 다원주의와 관용에 의지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충돌, 논쟁 혹은 다양한 소신 있는 의견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지낸다고 느끼도록 하고, 모두가 주려고 하는 이상은 하지 않으며, 복음이 요구하는 것을 청하지도 않으면서 무관심하게 (어떤 것도 개선하려 하지 않고) 흘러가게 내버려 둡니다. 이렇게 해서 자동차의 수가 증가하고, TV 방이 증가하며, 형제들의 경제적 독립과 여행과 휴가를 독자적으로 하려는 자율권, 이성과의 관계에 개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난은 버려지고, 장상은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었을 이상 고무자나 아버지가 아닙니다. 집은 개인이 머무는 곳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봉헌생활이 강한 개성과 «나의 일부인 사람»(NMI 43)으로서 형제를 바라보는 친교의 사람들을 만들지 않는다면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으로써 증거 되는 친교는 그것을 의미 있고, 빛을 발하며 복음적인 것이 되게 하는 요소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봉헌생활 공동체들에게 특히 인종간의 증오와 무분별한 폭력으로 찢겨진 오늘의 세계에서 마음을 터놓고 사랑의 대화를 계속함으로써 먼저 그들의 내적 생활 안에서, 나아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마침내 교회 밖으로까지 친교의 영성을 전파하라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합니다»(VC 51).

  • 아마 모델의 가장 약하고 괴로운 요소는 성소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운동들과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세워진 최근의 수도회들이 있다는 것은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같은 모델에 부족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일 여기 저기에서 시작되었고 명백히 반성소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봉헌생활의 자유주의적 모델이 같은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성소에 있어서 가장 성공하고 있는 단체들은 다음과 같은 가지 근본적인 요소들을 성공의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강하고, 가시적으로 증거할 있으며 공감할 있는 영성; 강하고 기쁨이 넘치고 매력적인 공동체 생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처럼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확실하고 분명하며 강한 투신이 성공하는 성소의 이유입니다.


자유주의적 모델의 가장 문제는 복음적 선택과 가치를 손상시키면서 현대 문화를 복음화시키려고 시도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 우리는 문화를 복음화시키는 사람들이 되기 보다는 세상의 논리에 의해서 형태가 변화되어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녹일 때까지 깊이 잠길 있으면서도 자신의 신원과 효과는 결코 잃지 않으면서 본래 상태로 다시금 돌아갈 있는 덕을 가지고 있는 소금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위기 상태에 놓여 있는 봉헌생활의 모델입니다. 만일 우리의 성소와 사명을 충실히 지켜나간다면 우리 살레시오 회원들은 존재이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표징이며 그분 사랑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을 창립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 하느님께 절대적인 우선권을 두는 , 복음의 가치, 참된 행복과 복음적 권고, 공동체의 , 1884 5 로마에서 보낸 편지에서 보스코께서 우리에게 권고했듯이 청소년들 가운데 현존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 이런 노선을 따르라고 초대한 25차 총회


25 총회를 읽을 수도회는 우리의 모든 봉헌생활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살레시오 공동체가 처한 오늘 현실을 다루었을 같은 도전들에 응답하려고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총회의 주제는 공동체이지만 내용은 하느님 체험과 증거, 형제적인 공동체와 젊은이들 가운데 현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에서 안에서 수도회는 보다 깊은 내적 쇄신을 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느끼는 공동체의 전망 안에서 사명과 형제애 그리고 복음적인 생활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실, 공동체는 친구들이 모인 클럽이나 비록 일이 살레시오 정신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해도 일을 하기 위한 단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은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애정이 담기고 매력적이며 교육사목적 관점에서 보면 전문적 효과가 거기에 있습니다.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봉헌된 사람들과 사도들의 공동체이며, 명백한 카리스마적 신원과 새로운 도전들에 능력 있게 응답할 있는 영적 유산의 상속자로서 소개될 있습니다.

복음적 증거라는 제목이 붙여진 번째 주제는 진정한 살레시안의 모델이 설명된 개의 다이아몬드 에서 영감을 받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비가노 신부의 해설을 음미하면서, 우리는 « 보스코 자신이 상징적인 인물의 생생한 육화를 자신의 생애에 걸쳐서 항상 실현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있습니다»16. 얼굴을 사람은 «그의 활동 안에서» (만또 앞쪽의 다이아몬드들) 살레시안의 삶을 보게 됩니다. 어깨를 사람은 «내면적 영성 안에서» (뒤쪽에 달린 다이아몬드) 살레시안 생활을 보게 해줍니다. 쪽이 사회적인 모습이라면 얼굴은 나에게 영혼을 달라(Da mihi animas)입니다. 쪽은 항구함과 고행의 비밀과 신경계와 기초에 해당하는 나머지는 가져가라(cetera tolle)입니다.17

살레시오 공동체에 대한 같은 근본적인 특성을 적용하면서 25 총회는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는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가져가라(da mihi animas cetera tolle) 복음적 열성, 신앙에 대한 낙관주의와 역동성과 희망의 창조성 그리고 양선과 애덕의 전적인 봉헌을 표현하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된다» (CG 25 20).

세속주의, 개인주의와 쾌락주의로 표현되는 오늘날 문화적 환경은 봉헌생활을 자극하고, 개인적인 책임과 성숙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면해야 도전들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따라서 인본주의의 새로운 길을 드러내는 대안적 삶의 형태로서 충만하게 사는 수도생활이 가지고 있는 예언적 힘을 이해할 있습니다.

«복음 권고를 () 내재된 가치, 자기 자신의 유익을 도모한다든지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정당한 욕구에 내재된 가치들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의향들이 인간 본성에 토대를 것이라면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로 약해졌기 때문에 윤리규범을 어길 있습니다. 정결, 청빈, 순명의 서원은 원죄의 상처를 과소 평가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는 또한 창조물의 가치를 긍정하는 동시에, 하느님을 절대선으로 가리킴으로써 창조물을 상대화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권고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성덕을 추구하는 동시에, 인류를 위하여는 말하자면 “영성적 치료법”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눈에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려운 시대의 봉헌생활은 인간생활을 위한 그리고 교회생활을 위한 하나의 축복입니다»(VC 87; CG 25, 33 참조).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고 당신 사랑의 표지이며 전달자로서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도록 하는» (CG 25, 22) 하느님의 우선권 대해 말하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권력과 소유와 쾌락 우상숭배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간적이며 예언자적인 가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하느님과의 일치와 이웃에 대한 투신 사이에, 복음적 내면성과 사도적 활동 사이에, 기도하는 마음과 일하는 사이에, 개인적인 요구와 공동체적 임무 사이에 성령의 선물과 생생한 종합이 되는»(CG 25, 24) 일치의 은총 대해서 말하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생활 안에서, 성체성사의 거행 중에, 공동체가 기도의 학교 되기까지 기도생활의 질적인 안에서, 개인계획과 공동체 계획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중심이 되게 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역 공동체와 젊은이들의 안에서 현존하는 공동체의 형제적 생활입니다.



마치면서


봉헌과 그리스도를 따름의 모범이신 동정 마리아를 기억하지 않고 서한을 끝낼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얼굴에 눈을 고정시킨다면, 성부 오른 편에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신적인 광채를 받아들이기까지 당신 인성의 일상적이며 고통스런 여정 안에서 신비를 인식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의 과제라면(RMV 9), 우리 살레시안들은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함에 있어 어느 누구도 마리아와 똑같이 성실하게 봉헌하지 못하므로 그녀는 최고의 모범이십니다»(RMV 10). «어느 누구도 그녀보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마리아처럼 심오한 신비에 대한 앎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못합니다»(RMV 14).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어머니시며 스승이신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번째로 축성되신 그녀는 충만한 애덕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녀는 열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희망 안에서 기쁨에 찼으며, 환난 당하셨지만 강하셨고, 기도 중에 인내하셨습니다. 형제들이 필요한 것을 배려할 아셨습니다(로마 12,11-13). 그녀 안에서 복음의 모든 측면들, 봉헌생활의 모든 카리스마들이 드러나고 쇄신됩니다»(RdC 46). 그녀의 아름다움, 그녀의 매력, 그녀의 새로움과 그녀의 찬란함이 여기에 없다는 것에 놀랍니다!

저는 교황님의 수도생활에 대한 권고인 봉헌생활 본문을 인용하고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출발합시다18라는 문헌의 심오한 가르침 또한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그것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자료도 우리에게 중요한 문헌을 알도록 고무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현존은 봉헌된 사람들 각자의 영성생활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연대와 일치와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완전히 속하여 그분께 온전히 헌신하였기에 완전한 봉헌의 숭고한 모범입니다. 마리아를 통하여 강생의 신비를 성취하기를 원하신 주님의 선택을 받은 마리아는 봉헌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주도권의 탁월성 상기시켜 줍니다. 동시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시도록 함으로써 은총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모범 됩니다…. 봉헌생활은 성령께 마음을 열고 성자와 일치하여 성부께 자신을 봉헌하는 이의 탁월한 모범을 마리아에게서 찾습니다. 그리스도의 “동정과 청빈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리아의 삶을 본받는 것을 의미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VC 28).
성령의 변화시키시고 성화시키시는 활동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도록 가르쳐 달라고 마리아께 청합시다. 마리아께 젊은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징표요 전달자 되도록 우리의 살레시오 성소를 맡겨드립시다.


파스칼 차베스 총장신부



1 P. Bradio, Don Bosco prete dei giovani nel secolo delle libertà. Vol. I. Roma, LAS, 2003, p. 14.

2 같은 , p. 360.

3 같은 , p. 56.

4 Cf. C. J. B. Metz – T. R. Peters, Gottespassion. Zur Ordensexistenz heute (Friburgo-Basilea-Vienna: Herder, 1991) p. 29.

5 Cf. D. O’ Murchu, Rehacer la vida religiosa. Una mirada abierta al futuro (Madrid: Ediciones Claretianas, 2001) p. 14-15.

6 Paul VI, “Ecclesiam Suam”: AAS (1964), p. 650-651.

7 J. Gómez Caffarena, Raíces culturales de la increencia (Santander: Sal Terrae, 1988).

8 E. Viganò, “There is still good ground where the seed can fall”: AGC (1991) 339, p. 12-13.

9 Cf. Angelo Arrighini, “Carisma e Istituzione. Intervista a Rino Cozza”: Testimoni 10 (2003) p. 9-11.

10 E. VIGANO’, An invitation to bear greater witness to our “consecration”, AGC 342; USG Congress “Consecrated life at the present day”, AGC 347; The Synod of Consecrated Life, AGC 351; Reading the Founder’s charism again at the present day, AGC 352.

11 J. VECCHI, The Father consecrates us and sends us, AGC 365.

12 A 25 anni dalla Promulgazione del Documento Mutuae Relationes”, p. 4 (cyclostiled, with author’s emphasis).

13 J.M.R. Tillard, Carisma e sequela [Bologna: EDB 1987] p. 54

14 0’ Murchu, Rehacer la vida religiosa... p. 67.

15 F. J. Moloney, Disciples and Prophets: A Biblical Model for Religious Life (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80) p. 155-170.

16 E. Viganò, The Salesian according to Don Bosco’s dream of the ten diamonds, ACS 300 (1981) p 13.

17 Ib, pag. 14.

18 CIVCSVA(Congregazione per gli istituti di vita consacrata e le società di vita apostolica), Ripartire da cristo: un rinnovato impegno della vita consacrata nel terzo millennio, Rome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