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matti


Cim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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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속표지)
Don Clodoveo Tassinari
DON
CIMATTI
visto da vicino
©���� Editrice Elledici - ����� Leumann (Torino)
ISBN ��-��-�����-�
가경자 빈첸시오 치마티의 본 한국어판 전기는
그의 영감과 의지와 주도로 설립된 까리따스 수녀회의
한국관구 역사 50년(1956-2006)을 기념하여 출간되었다.
동경의 치마티 기념관에 소장된 사진들을 본 한국어판에 싣도록 협조해 주시고 격려해 주
신 관장 가예따노 콤프리 신부님(sdb)과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관구 역사자료실에 감사드린
다. (역사자료실 소장 사진이 쓰이지 않는다면 문장의 마지막 부분은 생략.)
저자 돈 끌로도베오 타씨나리는 ...
1912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의 싼 펠리체 술 빠나로에서 태어났다. 근처의 피날
레 에밀리아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브레샤의 키아리의 살레시오회 지원원에 들어가 중학
교를 마치고, 거기서 수련기를 지낸 후, 1930년 초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홍콩에서 신학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1936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미야자키 수도
원 원장이 되었고 1940년에는 동경에서 수련장이 되었다. 전쟁 후 1946년에 동경에 넘쳐나
는 떠돌이 소년들을 모아 교육을 시키기 위한 쎈터를 설립하였다. 1949년 37세의 나이로 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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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뇰 빈첸시오 치마티의 후임자 관구장으로 선출되었고, 잠시 후 ‘일본 까리따스’의 위원장
으로 선출되었다.
임기가 끝나자 수련장과 미야자키의 기숙학교 원장의 직무로 돌아갔다. 동경의 실업학교
교장직 3년 임기를 마친 후 옮겨간 나카쓰에서 건강이 나빠져서 조국으로 돌아갔다가, 건강
을 되찾자 1980년 일본으로 돌아가 베뿌의 원장이자 11개의 선교활동지의 조정자로서 파
견되었다. 현재 베뿌에 살고 있다.
사도직을 하는 동안 그는 특별히 학교에서 일했고, 사회과목을 가르쳤는데, 사회과목에서
1952년 국가에서 주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역사학자로서 많은 글을 발표했고, 일본 선교사
였던 씨도띠 죠반니 바티스타 신부(1668-1715)에 대한 중요한 발견들을 했는데 이에 대해
많은 글을 발표했으며, 동경 소피아 대학의 잡지에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희곡과 여러 주제에 대해서도 영어와 일본어로 글을 썼다. 정부로부터 일본국가에 공훈을
세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로마 살레시오회 총원 회원 신상자료에서 뽑아 정리한 것인데, 혹시 아직도 너무 길면 알
아서 요약하십시오.)
일러두기
1. 각주는 * 표가 붙은 두 개를 제외하고는 원문에는 없으며, 한국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붙인 것이다.
2. 원문에서 가경자로 되어 있는 돈 루아, 하느님의 종으로 되어 있는 돈 필립보 리날디는
현재는 모두 복자이므로 ‘복자’로 고쳐 표시한다.
3. 이탈리아어에서 사제의 이름 앞의 ‘돈’(Don)이라는 말은 ‘신부’를 뜻하며, 교구사제와 살
레시오회 사제에게 붙이는 호칭으로서 이름의 일부로 굳어진 표현이기에 한국어로 번역하
지 않고 그대로 이름에 붙여 쓴다. 예: 돈 보스코, 돈 치마티
4. 고유명사, 특히 인명은 원문의 발음(이탈리아어, 일본어)을 따르되, ‘요셉’, ‘프란치스코’,
‘빈첸시오’, ‘도미니코’ 등 한국어에서 굳어진 발음은 한국어 표기법을 따른다. 문맥의 요구
에 따라 필요한 몇 가지 경우에는 원문의 발음과 한국어에서의 표기법을 혼용한다. 예: ‘베
드로’와 ‘삐에트로’, ‘요한’과 ‘죠반니’. 그 밖의 표기법은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규정 표기
법 통일안을 따른다. (혹시 이와 달리 된 것이 발견되면 알려 주십시오. 특히 일본어 고유
명사 표기에서 나카쓰로 표기하도록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인해 주십시오.)
추천의 말
여러분의 나라와 한국 민족을 무척 사랑하던 위대한 선교사 가경자 돈 빈첸시오 치마티가
한국에도 알려지게 된 것이 참으로 기쁩니다. 이 책의 저자 돈 끌로도베오 타씨나리는 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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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그의 곁에서 살았으며, 전쟁 전과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의 시기에 선교활동과 살레
시오회의 일에 대한 책임을 돈 치마티와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았던
사람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를 쉽고 재미있는 문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돈 치마티는 몇 차례의 음악회를 열기 위해 1934년 9월 말에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만주
에서 오는 길이었는데,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한국 순회를 하기로 받아들였다. 그 주교님들의 소망을 들어 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살레시오회를 알리고 사도직을 위해 쓰일 수도 있는 많은 좋은 것들을 배우기 위해서이기
도 하다.
9월 25-26. 신의주에서는 메리놀 회원들의 집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대단한 일을 본다. 즉
교리교육을 위한 주간과 야간수업이다(일본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 바로 한국 순교
자들의 축일에 수많은 한국인들의 모임. 어른들과 학생들이 서로 다투어 프로그램에 참여
하러 가고 있었다.
9월 27일. 해주에서 젊음의 열정으로 대단히 많은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는 메
리놀회의 몬시뇰 모리스 집에... 성공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한 선교사에게 젊은이들을 돌
보고 자선사업을 해 보라고 조언했다. 대성공인 (음악회)모임.
9월 28일. 서울에서 살레시안들과 돈 보스코의 친구인 라리보 주교의 환대를 받았다. 그는
돈 보스코의 생애를 번역하여 교구주보에 연재하도록 했다. 대단한 건축사업현장들(신학
교, 상업학교, 자선사업 등)을 방문하다. 음악회는 교구의 자선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만원
사례와 대성공.
9월 29일. 대구에서는 끊임없는 비. 경찰이 마지막 순간에 입장권 판매를 금지했기에 약
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가톨릭 인쇄물을 상당히 나누어주게 했고, 따라서 선익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살레시오회 장상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써 보냅니다:
“돈 보스코에 대한 지식과 신심과 사랑은 우리의 거룩하신 아버지의 생애가 조금 있다가 한
국어로 나오게 된다는 사실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우리의 일이 한국에 들어오게 될 날을
앞당기는 데 이것이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자녀들을 앞서가시면서 ··· 준비하시는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이 백성 안에서는 이 영혼들 안에 종교적인 싹이 깊이 접목되어 있고, 그토록 놀라운 방식
으로 신앙으로 불린 이 백성의 영혼에서 그 싹을 뽑아 버리려던, 혹은 말려 버리려던 지극히
잔혹했던 박해들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직접적인 복음화가 없이 오로지 종교적 진리를 열망하는 영혼들 위에 내린 하느님의 은총
의 작용만으로 이루어진 한국 가톨릭교회의 자생적 탄생은, 놀랍고도, 교회와 선교의 역사
에서 유일한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신앙의 전파를 위해, 그리고 이 백성 안에서도 방인사제들의 양성을 위해 파리의 선교사들
이 한 일, 그리고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는 한창 발전하는 그들의 신학교들을 방문할 수 있었는데, 젊은 신학생들의 질서와 신심
과 차분함에 감탄했습니다. 아! 앞으로 이 나라의 이 발전하는 주민들과 가톨릭교회의 미래
에 대한 지극히 즐거운 희망으로 제 가슴이 얼마나 뛰는지요.”
안타깝게도 전쟁이 돈 치마티의 꿈의 실현을 늦추었고, 살레시오 가족은 1954년에야 한국
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그 다음엔 살레시오 수녀들이 들어왔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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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는 이를 무척 기뻐했으며, 그들에게 썼던 수많은 편지들이 보여 주고 있듯이 권고와
기도로 그들을 후원하였습니다.
돈 치마티는 명랑하고 낙관적인 성인입니다. 시련 중에서도 그는 언제나 입술에 미소를 띠
고 있는데,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음악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데, 순수하고, 하느님과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찬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
니다. 그 하느님과 인간들을 위해서 그는 자신을 아끼지 않고 일했으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경애하올 까리따스 수녀님들에게 한국진출 5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동경 치마티 기념관 관장
가예따노 콤프리 신부
머리말
돈 치마티의 “간략히 살펴본 생애”에는 작은 역사가 있다. 그의 제자로서, 협력자로서, 그
리고 마지막에는 돈 치마티가 일본에서 시작한 살레시오 사업의 관리를 맡은 그의 후임자
로서 여러 해 동안 그의 곁에서 살았던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서 쓴 것이다.
1965년 10월 6일, 돈 치마티가 죽었을 때, 저자는 로마에서 열리고 있던 총회에 참석하느
라 이탈리아에 있었다. 그 소식은 돈 치마티를 알고, 공경할 정도로까지 그를 존경하던 수많
은 살레시오 회원들과 제자들과 친구들을 크게 동요시켰다. 파엔자는 주교를 선두로 하여,
교수로서, 음악가로서, 선교사로서의 빛나는 삶으로 그 도시를 크게 영예롭게 한 시민을 위
한 30일제 장엄미사를 준비하기 위해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돈 치마티와 그의
파엔자 시민들 사이에는 존경과 애정의 깊은 유대가 존재해 왔다.
그 때, 주민들로 가득 찬 주교좌 성당 안에서 저자는 추도사를 하도록 초대되었다. 저자는
자신의 애정이 속삭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기억들을 길어 올리며, 그 소중한 인물을 회상하
였다. 많은 호응 속에 받아들여진 그 이야기를 최초의 핵심으로 하여 그 주위로 이 간략한
생애의 요약이 형성되었는데, 이 요약은 세상에서 사라진 위대한 친구의 숭배자들 안에서
이루어진 그 감동적인 미사거행의 여운을 보존해야 했다.
그 소책자는 돈 치마티의 귀천 후 4개월이 지나자마자 나왔다. 따라서 책상에서 이루어진
연구의 결실이 아니고, 그에게 깊은 정이 든 제자의 마음에서 뜨겁게 솟아나온 묵상의 열매
이다.
이탈리아어판은 얼마 안 가서 곧 절판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볼로냐의 “성심”이
라는 잡지에 연재되면서 재판되었는데, 이 잡지는 매달 십만 부를 찍어내고 있었고, 또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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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따로 별책으로 출판하여 (3,000부) 무료로 배포하였다. 일본어로는 번역된 적이 없었다.
이 책자는 그 특정한 상황에서 소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6년에 돈 치마티의 시복소송이 시작되었고, 일본에서 수많은 증인들이 그의 성성(聖
性)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4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토리노에서 이탈리아의 증인들을 청취
하기 위한 시복청원서 제출 소송이 있었다.
그 때 이탈리아에 있던 저자는 토리노 대교구청 법원에서 증언하도록 초대되었다. 시복조
사 위원회는 돈 치마티의 덕에 대해 저자가 받은 인상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고, 모임이 길
어질 기미가 보였다. 그래서 저자는 “간략히 살펴본 생애” 한 부를 꺼내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받은 인상은 모두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달리 새롭게 덧붙일 것이 없
습니다.” 그 소책자는 간단히 검토되었고 그들이 알고자 하던 것에 대해 모자람이 없다고 판
단되었다. 네 명의 재판관들은 그 책을 그대로 받아들여 소송문서에 첨부하였다.
돈 치마티에 대해서 그의 죽음 직후에 최초로 기록된 셈이고, 따라서 돈 치마티가 죽음에
이르러 누린 성덕의 명성에 대해 아직 생생하고 진실한 인상이었던 그 증언의 중요성을 위
원회는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성(聖性)에 대한 판단은 교회에 유보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는 그 판단을 표현했다.
1991년 12월 21일 돈 치마티의 영웅적인 덕에 대한 교령이 반포되었는데, 이 교령은 그에
게 “가경자”(可敬者)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오늘날 “간략히 살펴본 생애”는 그 모든 역사적 가치와 현재성을 드러내고 있다. 제2부 -
삶의 단편들 - 에서 저자는 확실한 문서와 권위있는 증언들에 기초하여 그의 모습을 보여 주
고자 한다.
특별 방문자 요아킴 데 수자 신부는 큐슈의 우리 선교지 방문을 1998년 5월 11일에 마쳤
다. 베뿌의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열린 선교사들의 마지막 회합에서 그는 그들과 함께 미래
의 활동을 위한 지침을 논의하고자 했고, 다음에 그것을 최종 문서에 기록하여 넘겨주었는
데, 그 문서에서 귀중한 조언 및 권고들을 준 후 이렇게 끝맺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일본
어로 된 책과 팜플렛들을 통해서 신자들 안에 가경자 돈 치마티에 대한 신심을 되살리고 전
파할 것을 형제들에게 권고합니다.”
이 책으로 시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I. 간략히 살펴본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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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시뇰 치마티, 탁월한 방식으로 돈 보스코를 바라보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그 존재
의 깊은 매력으로 돈 보스코를 되살아 냈던 살레시오 수도회의 이 뛰어난 아들은 죽음에 의
해 변모되어 계속 우리 가까이 현존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모범과 지혜와 성덕이 주
는 위로를 아직도 느끼게 해 주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돈 보스코의 여섯 번째 후계자 돈 루이지 리체리 총장신부는 그의 사망을 알리면서 위대한
교육자요 선교사인 인물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죽음이 그의 빛나는 날을 마감한 이제, 그에 대한 기억이 축복 속에 남도록, 그리고 그의
양선의 메시지가 여전히 관대한 영혼들을 흔들고 끌어가는 힘을 지닌 호소가 되도록, 특히
젊은이들에게 그를 상기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필자가 그의 생애에 대한 이 간략한 요약을 제공하는 것을 수락한 것은 일본에서 그의 곁
에서 살고 일하는 행운을 가졌던 35년 동안 그가 나에게 보여 준 친밀함에 대한 깊은 감사의
표시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햇살 좋은 로마냐
몬시뇰 치마티는 1879년 7월 15일 파엔자에서, 돈 보스코의 위대한 예찬자요 친구인 몬시
뇰 바오로 타로니라는 그 지혜로운 영적 지도자의 열정으로 많은 성소를 주었던 - 살레시오
회에도 - 로마냐의 그 정열적인 땅에서 태어났다. 로마냐는 아르헨티나의 사도 돈 베스피냐
니, 영국과 미국의 돈 토찌, 콜롬비아와 중앙 아메리카의 돈 라가찌니, 그리고 아직 생존해
있는 다른 많은 훌륭한 선교사들을 배출했다.
파엔자에서 몬시뇰 치마티는 어린 시절을 지냈는데, 평생 동안 자신의 고향, “햇살 좋은 로
마냐, 감미로운 고장”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지니고 있었고 많은 파엔자 사람들과 깊은 우
정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들도 멀리 있는 위대한 고향친구에 대한 생생한 찬탄으로 그
에게 우정을 보여 주었다.
아직 어린아이일 적에 그는 형 루이지의 어깨에 올라타고 당시에는 보르고에 있던 살레시
오 오라토리오에 다니기 시작했다. 1888년에는 기숙학교에 들어가 거기에서 생동하는 지
능과, 착함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프라노 목소리로 튀면서 눈부신 성적으로 공부를 마쳤
다. 돈 몰리나리는 그에게 음악공부를 시작하도록 했고, 파엔자 기숙학교의 설립자요, 첫
원장으로서 영혼의 진정한 도공(陶⼯)이었던 돈 G. B. 리날디는 그에게 그리스도교적 덕을
습득하도록 인도하고 그의 마음 안에 수도생활에 대한 부르심을 가꾸어 갔다.
뛰어난 소년
그 기숙학교시절은, 얻은 성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면, 돈 치마티에게 있어서 집중적으로 공
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살레시오 학교의 교사였던 쎄콘도 과다니니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대단히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성품은 비교적 조용하고 아주 생각이 깊었으며, 좋
은 결심에 항구했고, 개방적이고 항상 친구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겸손하고, 누구
에게나 상냥했다. 음악에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었고, 시(si) 변음(變⾳)과 도(do)음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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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올라가는 놀라운 목소리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열광시키는 표현력을 가지
고 있었다. 싼 마리노에서 구노의 아베 마리아를 불렀던 성당에서 음악회를 마치고 나올 때
는 부인들이 서로 다투어 그를 보려고 했다. 기숙학교에서 다시는 그와 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필자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났던 소년시절의 그의 친구 하나는 1949년 일본에
서 돌아오면서 필자에게 털어놓기를 “그의 예찬자들이 호감을 표시하려고 그를 찾을 때면
꼬마 치마티는 다른 친구를 밀어 앞세우고 자기는 사라져 버리곤 했지요.”
돈 치마티의 기숙학교 동창생이었던 몬시뇰 빈첸시오 리베라니도 역시 그를 이렇게 묘사
한다: “조용하고, 신중하고, 조숙하며, 동시에 자유분방하고, 관대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
절한 소년이었다. 진실한 신앙심과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커다란 신심을 갖고 있었고, 그
의 순수함은 그때 이미 모범이 되고 있었다. 소년시절부터 그는 선교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
보였고, 오라토리오의 더 작은 아이들에게 기쁘게 교리를 가르쳐 주곤 했다. 예외적인 재능
과 아름다운 목소리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지만, 그는 칭찬과 귀여워해
주는 것들 때문에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으며, 반듯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당시에 돈 죠르다의 능숙한 지도 아래 있던 스콜라 깐토룸(학교 합창단)은 파엔자와 그 주
변에서 유명해져 있었으며, 성당에서의 무슨 기념일이나 의식들이 있을 때는 집 밖에서도
공연을 하도록 자주 초대를 받곤 했는데, 어린 치마티는 항상 솔로 부분을 맡아 노래했다.
노래를 하면서 그는 모습이 변하곤 했는데, 그에게는 노래하는 것이 영적 즐거움이었던 것
이다.”
비록 “비교적 작고 튼튼했으며 보통의 체질이었던” 아이였지만,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시
기를 거쳤는데, 내적 노력 때문만이 아니고 아마도 청소년기에 성장하느라고 그랬던 것 같
다. 중학교 4,5학년 때 동급생이었던 바오로 브루노리가 그것을 증언한다: “그는 건강이 약
했으며, 나는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많이 뛰어놀지 못
했으며, 체육을 면제받았었고, 레크레이션 시간에는 마당에서 원장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
들과 즐겨 산책을 하거나 리이드 오르간을 연습하러 가곤 했다.”
강하고 예민한 기질
그와 함께 살았던 이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진지하고 조숙하고 비상
한 재능을 지닌 아이였다. 또한 좋은 가정교육을 받았고 곁에는 대단히 신심 깊은 어머니와
성덕이 풍부한 누나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양선과, 모든 사람에 대한 상냥함이 타고난 것
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노력과 자기성찰로 얻어낸 것이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우리가 확신했던 것은 돈 치마티가 대단히 예민할 뿐만 아니라 강하고 활발한 기
질을 가졌었고, 소년시절부터 지속적인 극기와 포기의 훈련으로 그 기질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자신 안에서 자애심과 예민함의 자극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일본에
막 도착하여 그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한 어떤 신학생에게 그는 말했다. “걱정 말아라. 알았
어. 넌 교만하고 예민한 게 꼭 나 같단 말이야.”
성장한 다음에도 그는 교만이 자신의 주된 결점이라고 여겼고, 어릴 적에 한번은 독창을
하지 않으려고 꼼짝 않고 고집을 피웠으며, 그래서 자기가 음악교사가 되었을 때는 노래하
는 사람들 모두에게 독창자(솔리스트)가 부르는 부분을 가르쳤노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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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있었다. 또 그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한 번은 발살리체에서 신학생들에게 음악을 가
르치면서 감정이 격해져서 건반을 주먹으로 두 번 치고는 노래 부르는 이들을 향해 ‘리베르
우수알리스’를 집어던졌다.
결과는? 오르간이 망가졌고 얼굴을 그 두꺼운 책으로 얻어맞은 신학생 하나가 장님이 될
뻔했다. “나는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더 이상 화를 내는
일이 없었지.” 그는 그렇게 유쾌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일본에서 나는 그가 (아직) 갑작
스럽게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보긴 했으나, 이는 여러 해를 같이 사는 동안 지극히 드물었으
며, 마치 마술처럼 즉시 자신을 지배하곤 했는데, 나는 그런 모습에 감탄했다.
그는 예술적 기질로 인해 특별히 예민했지만, 또한 뛰어나게 양선한 마음으로 인 해 예민
하기도 했다. 자연과 음악에 매혹을 느꼈으며, 아름다움을 음미했다. 또한 자신의 내밀한
곳에서 솟아나는 선율들로 이루어진 작품들도 그에게는 항상 아름다운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가 그에게서 각별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애정을 작
은 일에 대한 관심과 어머니들만이 할 수 있을 희생으로 드러내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즐겨 숨겼고, 자주 거친 방식 안에 감추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난 접착제로 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네. 조심할 필요가 있지.” 그는 그렇게 우리를 지나치게
민감하게 사랑할까봐 거의 두려워할 정도였다.
돈 보스코를 보아라!
노래와 연극과 아카데미아에서 거두었던 어린 시절의 성공에 대해 그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돈 보스코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특히 말년에 이르렀을 때, 감동적으로 회
상하곤 했다. 토리노의 성인이 1882년에 파엔자에 갔을 때 그는 세 살이었다. 마리아의 종
들 수도회의 성당에서 돈 보스코가 열광하는 군중 가운데서 강론을 하는 동안 그의 엄마가
어린 빈첸시오를 팔로 들어올려 성인을 향해 뻗치며 감격에 떠는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
다: “빈첸시오, 돈 보스코를 보아라!” 많은 군중이 어떤 사제를 둘러싸고 있는 이 장면과
엄마의 이 말은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 “돈 보스코를 보아라!”는 그의 삶의 강령
이 되었고, 우리는 몬시뇰 치마티가 평생 동안 돈 보스코를 눈앞에 두고 그를 본받았다고 말
할 수 있다.
중학교를 마치고 1895년에 그는 파엔자를 떠나 토리노로 가서 살레시오 회원이 되었다.
그가 떠나기 전에, 장차 총회계가 되는 사제교사 페델레 지라우디는 농담으로 그에게 이렇
게 말했었다. “토리노에 가면 사람들이 널 큰 잉크통 속에 집어넣을 걸? 그럼 넌 온통 새까
매져서 나오게 된다구.” 신학생 복장을 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에게 수단을 입
히고 수련기가 끝나고 나서 그를 살레시오 수도회 안에서 주님께 자신을 평생토록 봉헌하
는 종신서원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돈 보스코의 후계자인 복자 돈 루아였다.
아빠는 그가 막 두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엄마 로사에 대해 사랑에 찬 공경
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 관대한 여인은 남은 자녀 셋을 고스란히 주님께 바치기에 이르렀
다. 사실, 형 루이지는 살레시오회 수사가 되어 페루에서 선교사로 살았고, 누나 산티나는
병원 수도회의 수녀가 되어 프로시노네에서 1945년에 거룩한 죽음을 맞았다. 그 후 요한 바
오로 2세에 의해 1995년 5월 12일에 시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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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수료증과 두 개의 학위
토리노의 발살리체에서 신학생 치마티는 살레시오회 사범학교에서 철학과정을 하고 있
었는데, 동시에 동료학생들에게 음악교사 임무를 하기도 했다. 1900년에 그는 파르마의 음
악원(콘쎄르바토리오)에서 음악과정을 수료하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시기 동안 토리노대
학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의 학위를 땄다. 1905년 3월 19일, 스물여섯 살에, 장차 살레시오회
최초의 추기경이 될, 파타고니아의 사도 몬시뇰 갈리에로에게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러한 공부를 위한 수고스러움과 가르치는 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체적으로도 더 튼튼
해져서, 발살리체로 그를 만나러 갔던 사람 좋은 바오로 브루노리를 놀라게 했다. 그는 키가
중간쯤 되고 어깨가 벌어졌으며, 힘이 넘치고 선량함으로 가득 찬 외모를 지닌 신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토리노에서, 철학공부 과정을 이수하러 이탈리아 전역에서 발살리체로 모여드는 살
레시오회 신학생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20년을 더 일했다. 그는 일에 있어서 신속했고, 실
제적이었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다. 또한 시계를 사용하지 않았다. 잠에서 깰 때 자리
에서 일어나는 습관을 갖고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네 시 반이었고, 때로는 세 시에 일어나기
도 했으며, 저녁 열 시까지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그는 피로에 저항하도록 자기 몸을 단련
하여 익숙하게 했던 것이다.
자기 학생들을 돕기 위하여 그는 농업과 교육학의 책들, 그리고 “교육자 돈 보스코”라는
훌륭한 책도 출판할 시간을 찾아냈다.
신학생들에게는 신뢰를 보여 주어서 그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의욕을 불어넣어 주었
으며, 실수를 사과할 줄 알았고, 그들을 지원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었을 뿐 아니라 - 일생 동
안 얼마나 많은 신학생들의 성소를 구해 주었던가! - 음악과 연극으로, 그리고 그 변함없는
유쾌함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는 과학, 교육학, 음악과 성악에서 높이 평가받는 교사였으며, 열성적인 간호사요 주의
깊은 조력자였다. 또한 학교 교장이었으며 마침내는 원장이 되었다. 모범적이고 겸손하고
온유한 수도자로서 어느 순간에라도 누구에게라도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격하고 고
집 센 자신의 로마냐 사람 기질을, 비할 데 없이 풍부하고 균형잡혀 있으면서 사람들의 마음
을 사로잡는 그의 특징적인 성품으로 변화시키는 법을 알았다.
(원본 12, 파엔자 주교좌 성당의 사진과 함께 들어가는 삽입쪽)
사진 설명: 어린 치마티가 태어난 날인 1879년 7월 15일에 세례를 받은 파엔자의 주교좌 성당.
아빠 쟈코모와 엄마 로사는 그에게 빈첸시오라는 이름을 골라 주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19223월 돈 치마티는 임종을 맞이하는 늙은 어머니의 침대 곁을 지키
고 있었다.
- 사랑하는 나의 빈첸시오, 네가 어렸을 때 네에게 첫 영성체를 준비시켜 준 것은 나였지.
그런데 이제는 네 차례구나. 내가 마지막 영성체를 잘 준비하도록 네가 도와 다오.
- 걱정 마세요, 엄마. 엄마는 바로 천국으로 가실 거예요.
- 그건 네가 하는 말이지! 그렇게 말씀하셔야 하는 분은 저 위에 계신 분이란다.

1.10 Page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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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돈 치마티는 그 유명한 황금관을 작곡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룩
하고 그 늙은 내 어머니가 관을 받아쓰기 위해 하늘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듯했다.”
돈 보스코의 마음에 따른 살레시안
그는 아주 친밀하게 알고 지냈던 복자 돈 루아와 복자 돈 필립보 리날디로부터, 그리고 돈
보스코를 가까이서 알았던 다른 장상들로부터 자신이 수많은 세대의 젊은 형제들에게 전해
넣어주었던 그 참된 살레시오 정신을 길어냈는데, 그 젊은 형제들은 그의 가르침을 높이 평
가했고 그의 빛나는 모범에 기꺼이 끌렸다. 그들 중 한 사람인 선교사 돈 브라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의 현존은 우리의 의무를 자신이 이행하는 것처럼 이행하라는, 즉 영웅적으
로, 그리고 기쁘게 이행하라는 초대였다.”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에게 그는 깊은 인상과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그 시기에 발
살리체에서 살고 나온 수많은 살레시오 회원들이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전 살레시오 세계
로, “마에스트로” - 그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 의 지혜로운 가르침과 함께, 생기와 자유분
방함이 솟구치는, 그가 작곡한 음악작품들과, 어느덧 유명해져서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
고 공연되는 “어부 마르코”와 “햇살” 같은 오페레타들을 가지고 갔다.
그 시절의 그의 제자 한 사람으로 뒤에 총원장이 된 돈 지죠티는 몬시뇰 치마티를, 자신이
알아 온 바 “살레시안의 가장 완전한 모습”이라고 정의했다. 다른 제자인 돈 에우제니오 발
렌티니는 그를 “의식있는 교육자로서의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영혼과 성격을 형성해 내는,
바다의 모래밭 같은 넓은 마음을 지닌 대장장이”라고 말한다.
오라토리오의 가난한 아이들 사이에서
이 커다란 마음은 토리노에서 살레시오 학교 밖에서까지도 수많은 가까운 친구들의 마음
을 사로잡았다. 성 요셉 오라토리오와 성 루이지 오라토리오의 제자들이 그에게 특별히 충
실했고 깊은 정을 들였었는데, 돈 치마티는 제일차 세계대전 중의 어려운 몇 해 동안, 야간
학교를 개설하고 이러저런 단체들을 조직하는가 하면, 주일마다 연극공연을 하고, 생필품
을 모아서 오라토리오에 오는 아이들의 궁핍한 가족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한 일종의 협동조
합을 조직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자신의 전 존재를 쏟아 부었었다. 토리노의 거리와 시장에
서 모아들인 생필품들을 그는 자신이 직접 수레를 끌면서 집으로 나르곤 했다.
1952년의 총회 중에 모원의 마당에서 그 시절의 제자들 중 하나를 만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이미 다 자라 어른이 된 그는 사랑하는 돈 치마티에게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 돈 치마
티와 헤어져야 했을 때 그는 눈에 눈물이 고이고 말을 하지 못했는데, 돈 치마티는 따뜻하게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용기를 주고 있었다. 발살리체의 제자들과 토리노의 친구들
은 계속해서 그를 “마에스트로”라고 부르거나, 그냥 단순히 “돈 치마티”라고 불렀다. 이 이
름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시(詩)였다. 그 이름은 그들에게 복음에 따른 장상을, 즉 권위를 섬
김으로 받아들여 이해한 장상을,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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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Page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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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도 악을 행하지 않기”라는 돈 보스코의 강령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던, 지극히 민감한 마
음을 가진 참 좋은 친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선교사
1925년에 살레시오 수도회는 돈 보스코 자신이 실행했던 첫 선교사 파견 50주년을 기념하
였다. 그 기회에 교황 비오 11세는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일본에서의 새로운 일터를 제공하
였는데, 이 중요한 사명의 책임자요 안내자로서 발살리체 학교의 원장 돈 치마티가 선정되
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는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고 계속해서 청했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해를
거듭하여 그는 선교에 대한 갈망을 키워 왔기에, 복자 돈 필립보 리날디가 그를 갑작스럽게
선택하긴 했지만 준비가 안 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때 그는 46세였다. 집 안에서나 집 밖에
서나 대단히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제자들과 졸업생들에게서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큼 인
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총원장의 부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고 그 뜻을 경배하
였다. 그는 특별알현으로 그를 맞아주었던 교황 비오 11세의 강복에서 힘을 얻어 입가에 미
소를 띠고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바치게 될 희생을 꿰뚫어보았지만, 겸손하고 영웅적
인 순종은 그의 삶의 뛰어난 특징이었다.
아홉 명의 수염 난 학동들
새로운 선교사들 - 여섯 명의 사제와 세 명의 수사들 - 은 42일간의 바다여행 끝에 1926년
2월 8일 일본에 도착하였고, 일주일 뒤에 선교의 중심지인 미야자키에 도달하였다. 그들은
즉시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돈 치마티가 썼듯이 “아홉 명의 수염 난 학동들”이 되
었다. 그들의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말이 발전할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5월이 되었을 때 도움이신 성모님을 공경하기 위해서 그들은 작은 신자공동체에서 구일기
도 강론을 하기로 정했다. 돈 치마티부터 시작하여 각자가 짧은 강론을 써서 선생의 도움과
많은 노력으로 일본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암기하였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차례로 모두 성
당에서 그렇게 외운 강론을 했다. 신자들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그리고 자기네식의 일상적
인 친절로 그들이 찬사의 말들을 전하면서, 이 새로운 선교사들이 “성당 안에서는 말을 잘
하는데, 밖에서는 한 문장도 말할 줄 모르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의 놀라움이 더 커졌
다.
일본어는 서양사람들에게는 물론 쉬운 언어가 아니었다. 서양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사고
와 방식을 표현하기 때문에도 그랬다. 여러 해 전부터 일본에서 일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40세가 넘으면 일본어를 배우지 못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돈 치마티는 이미 46세
였고, 그럼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똑 같이 수업을 따라갔고, 초등학교 1
학년 책에서 시작하여 힘겹게 점점 위로 올라가서 겨우 1년만에 6년 과정을 다 마쳤다. 그
렇게 그는 이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체험했던 바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서 말을 더듬
거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낮춤을 겪었다. 그의 정규 일본어공부는 초보자격으로 여기서 끝
났다. 그 다음에는 바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2.2 Page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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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치마티가 첫해가 지나자 언어공부를 그만둔 것으로 믿도록 독자들을 내버려두고 싶진
않다. 오히려 바로 이어서 선교활동의 과중한 업무와 장상의 책임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는 틈틈이 시간을 찾아내어 죽기 직전까지 일본어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가 열심히 사전을
찾고, 초등학교 교과서를 복습하는 것을 젊은이들이 감탄하며 바라본 것이 몇 번이었던가!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아주 잘 익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말은 했고 남들
에게 자신을 이해시켰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정확한 말들이 떠오르지 않으면 대단히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그 특징적인 제스츄어로 보충하곤 했다. 그는 말보다는 오히려 마음으로 말했다. 미야자키
의 우리 아이들은 그보다 더 젊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들이 일본말을 더
잘하지만 우리는 몬시뇰 치마티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좋아요.”
돈 보스코라면 어떻게 했을까
일 년간의 준비 후에 살레시오 선교사들은 일을 시작했다. 그들에게 맡겨진 지역은 나가
사키 교구에서 떨어져나와 큐슈 섬의 동쪽 해안에 미야자키 독립 선교구를 형성한 오이타
와 미야자키 두 현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신부들에게서 모두 해서 3백 명을 조금 넘는 신자들과 회심시켜야 할 미신
자 1,745,000 명과 함께 세 개의 주택을 물려받았다. 돈 치마티의 슬로건은 “돈 보스코라면
어떻게 했을까”였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오라토리오로 시작하였다. 아이들을 모으고 아이
들과 함께 놀고, 노래하고, 이야기했으며, 이러한 수단들을 통해 어른들을 끌어들였다. 오
래 된 선교사들은 오로지 살레시오 회원들만이 사용할 줄 아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을 놀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양선함과 인내와 많은 희생정신을 요구했는데, 그 열매가 없지 않
았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선교지역을 알고, 여기 저기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만나기
위해 긴 여행들을 시작했다. 그들은 총원장 돈 리날디가 “애덕활동으로 이교(異敎)를 이기
라”고 하며 당부했던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궁핍한 노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사랑
의 말을 건네고자 했다. 그들은 곧 성 빈첸시오회를 설립했으며 이어서 ‘병자들의 사도직’을
창설했다.
복음화를 위하여 처음부터 사용된 또 다른 수단은 출판이었다. 맨 처음에는 낱장으로 된
전단들을, 그리고 다음에는 한 장의 월간 간행물을, 다음에는 소책자들과 돈 보스코, 도미
니코 사비오 등과 같은 소(⼩) 성인전(聖⼈傳)들을 발행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오이타의
집 옆에 인쇄소를 설차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돈 보스코 출판사가 생겨나게 되었는
데, 이 출판사는 장차 일본의 가톨릭 출판계에 커다란 공적을 남기게 될 것이었다.
하느님의 음유시인
그러면 음악은? 훌륭한 피아니스트요 다재다능한 작곡가인 돈 치마티가 아름다운 바리톤
의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다가가게 만드는 하느님의 음유시인이 되었다는 것을 모든 사
람들이 알고 있다. 미야자키에서의 선교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다른 선교사들과 다른 행정

2.3 Page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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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자들에게서도 초대를 받아 자선과 교육과 즐기기 위한 음악회를, 공공 연주회장, 학교,
성당 등 어디에서나 열었다. 테너부분을 맡았던 돈 안젤로 마르쟈리아와 함께 여러 해 동안
일본 전역을 종횡으로 돌아다녔고, 심지어는 한국과 만주에까지 가서 연주하고 노래했다.
대체로 이탈리아 음악으로서 대중가요와 오페라의 한 대목들이었지만, 일본 노래들도 없
지 않았는데, 공부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덜고 형제들을 즐겁게 해 주고자 초등학교 교과서
에 나오는 동시들에 하나씩 곡을 붙여 자신이 작곡한 노래들이었다. 이러한 노래들은 아이
들이건 어른들이건 일본 청중들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들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즐겁게 하
는 동안 그는 작품들에 대한 설명과 짧은 해설, 그리고 자주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이야기
와 함께 좋은 말들을 연주회 중 사이사이 적절한 순간에 씨 뿌리곤 했다.
프로그램에는 슈베르트, 구노, 마스카니, 베르디, 혹은 로씨니의, 그리고 고전음악의 멜로
디나 그레고리오 성가곡으로 된, 성모님을 부르는 노래가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는데, 종종
자신이 작곡한, 일본어로 된 아름다운 아베 마리아(성모송)나 레지나 첼리(하늘의 모후여)
가 들어 있기도 했다. 그것은 “좋으신 엄마”에 대한 자녀다운 효성이었으며, 청중을 그 어머
니에게 부탁하는 기도였다.
이 독특한 음악회들 - 약 20년 동안에 2,000회 이상 열린 - 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여
운을 남겼다. 오늘날에도 흔히, 어쩌면 2,30년 전에 그의 음악회를 들었던 사실로 인해 친근
감을 가지고 몬시뇰 치마티와 그 멋진 수염을 기억하는 나이 든 사람들을 어디에서나 몇 명
씩은 만나게 된다.
성소를 위하여
선교활동 시초부터 돈 치마티를 떠나지 않는 염려 하나는 일본인 성소자를 기르는 일이었
다. 나카쓰의 집에 한 무리의 젊은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1934년에는 미야자키의 자신
이 사는 집 가까이에 그들을 위한 소신학교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에서 바로 첫 일본
인 수도자들과 사제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주었던 몬
시뇰 치마티에게 가장 근사한 위로였다. 또한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을 위한 여성 성소자
들도 보살폈고, 까리따스라고 하는 일본수녀들의 수도회의 설립을 주선하기도 했는데, 이
수도회는 성 빈첸시오회와 또 다른 로마냐 사람 안토니오 가볼리 신부의 열정에서 태어났
다.
1930년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여덟 명의 아주 젊은 신학생들을 데리고 왔는
데, 그들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환경에 적응하고 일본어를 배워야만 했
다. 이러한 체험도 역시 좋은 결실을 가져왔고 계속 이어졌다. 또 그는 우리의 외국인 신학
생들과 일본인 신학생들이 양성되었고, 또 양성되고 있는 집으로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
는 신학원을 설립했다.
개종하는 사람들은 적었고 토양은 몹시 척박했지만 살레시오회 선교사들의 일은 잘 진척
되고 있었다. 성모님이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고 계셨던 것이다. 처음의 세 군데 근거지에 더
하여 다른 집들이 생겨났고, 거의 해마다 새로운 선교사들이 도착하였다. 그렇게 해서 동경
의 본당 하나도 접수하여 수도(⾸都)에다 직업학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2.4 Page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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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의 몬시뇰
1935년에 미야자키 선교구는 지목구((地牧區)로 승격되었고 돈 치마티는 그 첫 지목구장
이 되었다. 그에게는 몬시뇰이라는 칭호가 주어졌고 붉은 자주색 주교복장을 할 수 있게 되
었고, 주교모자와 주교지팡이를 지니고 장엄주교미사를 할 수도 있었다. 우리로서는 그가
적어도 한 번이라도 그런 복장을 한 모습을 보았다면 무척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
신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남과 구별되어 보이는 것을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몹시 싫어하였다. 칭호나 직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나, 그것들을
부여받은 사람들에게는 진지한 경의를 가지고 기꺼이 공경하였다.
이탈리아의 몇몇 친구들이 그에게 몬시뇰 복장 한 벌을 보내왔으나, 그는 곧바로 반송해보
내면서, 자신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도록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보내라고 했다. 돈 치
마티의 그런 행동은 하도 자연스러워서 그의 친구들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친구
이자 은인인 한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장난삼아 보낸 대리석으로 된 낡은 주교모자 하나는
받았는데, 그는 이것을 신학원의 박물관에 보관하였다.
동시에 교회장상이자 수도회장상 - 처음엔 지구장, 나중엔 관구장 - 이었음에도 그는 형제
들 가운데서 그들 중의 하나로 일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무런 과시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
들에게 자신의 모범으로써 길을 보여 주는 일만을 염려하면서. 몬시뇰이라는 칭호에 대해
서는 결국 그가 단념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우리가 그의 항의를 전혀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의 복장은 여전히 초라하고 자주 꿰맨 예전의 것이었으며, 그의 개인적 복장은
빈궁함 그 자체였다. 그에게 뭔가 새 옷이나 좀 편리한 것을 받아들이게 할 방법이란 도무지
없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을 받아들였고, 영웅적일 정도로 가난을 사랑하였다. 하
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결코 그것을 부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무척 관대했고, 누구
의 필요라도 채워 주려고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초라하고 거의 태만해 보이는 그의 외양에
머물렀던 사람은 그를 별 볼일 없는 사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자신이 바로
그런 판단을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외면적 가난함 속에 얼마나 커다란 내적 부요함이
숨어 있었던가! 가난에 대한 그런 집착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질 필요
성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그러면 섭리에 대한 신뢰는? 어느 날 그는 친한 친구인 후쿠오카의 주교 몬시뇰 브레통을
찾아가서 이렇게 청했다. “주교님, 주교님은 훌륭한 재물관리자이시니 저에게 재물관리에
대해 좋은 규정을 좀 알려 주십시오.” 주교가 말했다. “먼저 신부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말
씀해 보시지요.” “저요? 저는, 뭐, 기부금 같은 게 도착하면 즉시 가장 급한 필요에 씁니다.
그렇게 해서 섭리는 저에게 기부금을 또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지요.” 그러자 그를 잘 알고,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던 브레통 주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계속 그렇게 하시지요.”
가족적 통치
어떤 사람들은 돈 치마티의 방식이 지나치게 양선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달려
가지 않았고, 기다릴 줄 알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에 만족할 줄 알았
다.

2.5 Page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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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초 한 통보다는 꿀 한 숟가락으로 더 많은 파리를 잡는다”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말을 그는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또 그는 “최고는 선(善)의 적이다”라는 돈 보스코의
지침도 소중히 여겼다.
장상은 모름지기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생각을
부과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느 젊은 신부에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렇
게 말했다. “여보게. 그 생각들이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네.”
“하지만, 최후의 심판 때가 되어서야 들어가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자네가 좀 더 나이가 들면 깨닫게 될 걸세.”
그 젊은 신부는 이제 50세가 넘었고 이제야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믿게 되었다. 돈 치
마티가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신학을 공부하는 한 신학생은 신학생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관구장이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개입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다. 돈 치마티는 그에게 긴 편지를 쓰면
서 이렇게 마무리하였다. “자네가 내 자리에 있게 되면 자네도 나처럼 할 것이네.”
그 신학생에게 예언은 이루어졌으나 그처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선의만으로는 충분치 않
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 치마티의 덕이 필요했던 것이다.
1937년에 총원장의 파견을 받아 일본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러 온 돈 베루띠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기록하였다. “살레시오회의 일본에서는 돈 치마티의 가족적 통치 방법에서 나
오는 특징들이 눈에 띈다, 즉 명랑함, 가족정신, 각자가 자신의 적성을 드러내면서 온 마음
을 다 기울이는 노동 등이 그것이다. 순탄하게 나아간다. 즉 명랑하게 지내고자 하며, 애덕
이 지배하도록 하고자 한다. 그리고 돈 치마티의 양선한 마음이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바로잡아 준다.”
전쟁
그러는 동안에 일본의 정치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군부는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을 포함하여 외국인들은 좋은 시선을 받지 못했다. 신도(神道)가
국가종교가 되었고,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도만이 유일하
게 인정받는 종교였다. 교황청은 외국인 주교들과 고위성직자들에게 직위에서 물러나도록
권하고 그들의 자리를 일본인들로 대치하면서 상황을 헤쳐 나가고자 했다. 몬시뇰 치마티
는 가장 먼저 이에 따른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몬시뇰이라는 칭호는 그에게 남겨 두었
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그 칭호를 사용하였다. 우리로서는 그 칭호가 전혀 거창한 허례가 아
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 주며 언제나 격려할 줄을 아
는 사랑하는 우리의 아버지를 가리킬 뿐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전쟁이 터졌다. 힘겨운 세월이 이어졌는데, 경제적 난관과 그를 이해하
지 못하는 사람들의 적대적 태도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던 몬시뇰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그런 재난들 속에서도 그는 모든 권위자들에게 겸손한 경의를 보존할 줄을 알았고, 부적절
한 비판이나 판단 등을 결코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감탄할 정도로 돈 보스코의 “아무
것도 너를 어지럽게 하지 말기를”을 실천하였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도 권고하였다.

2.6 Page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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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都)에서 이루어지는 살레시오회 사업들을, 특히 젊은 형제들의 양성을 더 잘 보살
피기 위해 그는 미야자키에서 동경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더 이상 지목구장(地牧區⻑)은 아
니었으나 1949년까지 계속 관구장이었던 것이다.
전쟁이 막 끝나자 그는 헤아릴 수 없는 불행한 사태들 속에서 살레시오회 형제들과 도움이
신 마리아의 딸 수녀들과 까리따스 수녀들을 다시 찾아보러 큐슈로 내려갔다. 무너진 집들
을 재건하고 선교활동을 다시 시작함에 있어 그들을 격려하고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사업의 번영
수도 동경에서도 새로운 활동들이 개시되었다. 거리에는 전쟁으로 생겨난 많은 가난한 청
소년들이 굶주린 채 방황하고 있었다. 몬시뇰 치마티는 한 무리의 젊은 형제들에게 “돈 보
스코가 했을 법한 방식으로” 그들을 보살피도록 촉구하였다. 거기에서 당국으로부터 상당
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아직도 발전하고 있는 훌륭한 사업이 생겨났는데, 고꾸분지의 ‘소
년들의 도시’가 그것이다.
메구로 지역에서는 그의 주도 아래 커다란 성당을 가진 근사한 오라토리오가 생겨났다. 신
학원은 그에 어울리는 새 자리를 조후에 갖게 되었고, 직업학교는 확장되었으며, 그 옆에 도
움이신 성모님께 한 서원을 이행하기 위한 아름다운 본당 성당이 세워졌다. 돈 보스코 출판
사는 활동을 재개하고 여러 가지 책들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들은 해마다 늘어갔다.
오사카에는 그 대도시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하나를 새로 세울 임무를 지워 돈 마르쟈리아
를 보냈다. 미야자키에서도 전쟁으로 손상되고 이어서 태풍으로 무너져 버린 옛 신학교 자
리에 큰 학교가 하나 솟아났고, 나카쓰에도 전쟁의 희생자인 아이들을 위한 두 번째 고아원
이 생겨났다.
사업들의 이 모든 번영은, 1952년에 몬시뇰이 그와 우리의 이 활동들에 대한 커다란 호감
을 불러일으키면서 이탈리아의 살레시오회 회보에 기고했던 글들로 이루어진 “떠오르는 태
양의 제국에서”라는 제목의 훌륭한 책 안에 기술되어 있다. 그 책 안에서 그는 진심어린 찬
사로 형제들의 활동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루어진 이 모든 일들의 영감을 받은 자요 주도
자였던 그 자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1947년의 총회에서 그는 총 영성지도자로 선출될 뻔한 순간에 처한 적이 있었다. 발살리
체 시절의 많은 제자들이 모여와 있었는데, 그들은 그런 식으로 그에게 자신들의 존경을 보
이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태도로 일부러 이미 너무 늙었다는 인상을 줌으
로써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선거가 끝난 다음에야, 아직 68세였던 그는 다시 활달하고
힘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몇 년 뒤에 그는 나에게 그 때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을 허용했기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몬시뇰, 그때 총 영성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나요?” 그의 답변은 내 숨을
멈추게 했다. “총 영성지도자를 했겠지!”
일본사람들로 일본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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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여러 차례 고집한 끝에 그는 장상의 직무에서 면제되었다. 새 관구장이 선출되
었고 그는 조후의 신학원으로 자연스럽게 물러가서 고백신부, 도서관사서, 정원사가 되었
다. 언제나 바랐던 겸손하고 숨겨진 생활이었다. 총원장은 그를 토리노로 다시 불러 “명예
로운 자리와 약간의 휴식”을 주고 싶어했다. 그것은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크나큰 고통이었
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우리 사이에 그대로 남아 계시도록 많이 우겨
댔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그와 그의 현존이 필요했고, 그 역시 “일본의 흙”이 되기 위해 일
본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치고 싶어했다.
그는 일본을 제2의 조국으로 사랑했다. 제국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는 장엄한 국가 경
축행사를 기해 그는 “신들의 하강”이라는 제목의 연주곡을 작곡하였는데, 라디오를 통해 전
국으로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는 또 봉건시대의 그리스도교 영웅인 그라
찌아 호소가와에 대한 연극을 위해 오페레타 음악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그 가치에
합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심지어는 일본어 미사곡을, 즉 자비송, 영광송, 거룩하시다와 찬미 받으소서, 등을 작곡하
기도 했다. 신자들은 이를 즐겨 불렀는데, ... 마치 모떼또처럼 불렀다. 당시에는 아직 현지
언어로 창미사를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도 역시 진정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사도적
여행 중에 그는 식물과 동물들의 표본을 채집할 시간을 찾아내곤 했는데, 다음에 그것들을
목록으로 정리하거나 주의깊게 방부처리를 했다. 미야자키 현의 동식물군의 목록을 출판하
기도 하였다. 그는 그것을 천황에게 증정하였고, 천황은 그에 대한 답례로 손수 채집한 해조
류 표본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관구대표와 원장
1952년 관구회의는 만장일치로 그를 총회에 참석하는 관구대표로 선출하였다. 그는 숨어
있고자, 무시되고자 모든 노력을 다했었지만 결국 이 임무를 받아들였고, 마지막으로 이탈
리아로 돌아갔는데, 어디에서나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경의와 기쁨으로 환대를 받았다.
총회 후에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조후 신학원의 원장직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또
한 번 그는 숨어 살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포기해야 했고, 1962년까지 83세가 될 때까지 9
년 동안 원장으로 있었다. 여전히 정신이 총총했으며, 책과 잡지들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지
극히 현대적으로 시대에 맞춰나갔다. 여전히 젊은이들을 지도할 수 있었는데, 그 자신이 늘
젊음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원문 23, 사진)
사진 설명: 동경 조후 오라토리오의 오케스트라. 이탈리아에서 보내온 “부드리오의 오카리
나”도 있었다.
장상의 직무를 벗었을 때 그의 신앙정신과 겸손한 복종의 태도는 또 다시 빛났다. “나는 내
기도를 들어 주심에 대해 주님께 감사의 떼 데움을 부르며, 원장신부님께서 저를 인도하시
고 도우시도록 저를 온전히 원장신부님의 손에 맡깁니다 ...” 이는 나이와 경험에서 완숙한
그가 자신의 제자였던 새 원장에게 한 말의 첫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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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상들과 규칙에 대한 순종을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인 일로 여겼으며, 수련자의 단순
함으로 자신을 관구장과 원장 아래 두었고, 자신의 판단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
아들이는 것이 - 특히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경우에는 더욱 - 그에게 아무런 대가도 치르게
하지 않는 것 같았다.
1955년 3월 19일, 그는 사제수품 금경축을 거행하였는데, 그때 일본을 방문 중이던 총원
장 돈 지죠티가 즉석에서 연설을 하기를 원했다. 그 기회에 신학생들은 그의 아름다운 선교
오페레타, “언덕 위의 십자가”를 공연했다.
고통의 사도
마지막 2년 반을 그는 신학원 수도원의 침대에서 지냈는데, 생명의 위험 속에서 모든 이에
게 교훈적인 모습으로 병자성사를 받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늘 다시 회
복함으로써 아들들에게 커다란 놀라움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죽기를 바랐지만 긴 병상생활을 견디어야 했다. 병에서 오는
아픔이 주는 괴로움보다 더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자신이 형제들을 성가시게 하고 있
다고 생각이었다.
어느 날 바로 그 이유로 그가 좀 슬퍼하는 것을 보고 원장은 즉시, 그가 집안에서 전혀 부담
이 되고 있지 않으며, 모두가 항상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고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을 기뻐
하고 있다고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자 그는 안심했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신부님이
참으로 저에게 위로를 주셨군요.” 종종 “내가 죽지 않는 건 자네들 탓이야. 자네들이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잖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그런 마음을 드러냈다.
아무리 작은 봉사에도 그는 “고마워요, 고마워요”를 되풀이했다. 사랑으로 자신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는 원장 돈 크레바코레와 형제들, 그리고 그가 병을 앓는 동안 내내 한 푼도 받
지 않고 아들 같은 정성으로 그를 돌보았던 주치의 모리구찌 박사 에게 대한 그의 감사는 가
히 감동적이었다.
좀 어떠냐고 묻는 사람에게 그는 변함없이, “좋아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고 답했
다.
모든 사람을 기억했고 각자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자네는 어떤가? 일은 잘
돼 가나?” 하고 물으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누구에게나 그는 계속하여 돌리고 있던 묵주를 들어 보이며 말했
다. “보게나, 늘 기도하고 있다네. 자네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기억한다구.”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언제나 기도하면서,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즐겨 환대하고, 모든 사
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도록 격려하면서, 그렇게 그는 감탄할 만한 인내로 병이 주는 괴로움
과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디어 냈다.
중요한 것은 양선하기
그의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사랑’이라는 주제가 피어올랐다. 자신의 삶에서 그가 어떻게
모든 사람을 구별 없이 사랑하고, 어떻게 언제나 모든 사람을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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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남에게 얼마나 잘 해 주었는지를 잘 아는 우리들로서는 그의 권고
를 진지한 감동 없이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양선하다는 것이야!” 하
고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저절로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사랑의 사도 성 요한에 대한 기억이었
다. 또한 그가 착한 교황 요한 23세에 가깝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
이었다. 즉 그야말로 쌍둥이였던 이 위대한 두 영혼이 지닌, 모든 사람에 대한 똑 같은 양선,
똑 같은 건전한 낙관주의, 전 생애에 걸쳐, 그리고 그 교화적인 죽음에서 빛났던 그 잔잔하
고 인내로운 사랑을 우리는 보았던 것이다.
하느님의 사람!
몬시뇰 치마티는 지치지 않는 일꾼이요 열린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언제나 일의 주도를 격
려하고 신뢰를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우리의 모든 신뢰를 독차지하는 지혜롭고 깨
어 있는 인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하느님과의 끊임없
는 대화를 휴가도 없는 여러 형태의 활동과 결합시킬 줄을 알았다. 언젠가 한 번 그는 그 매
혹적인 단순함으로 그 비밀을 설명했다: “난 이층으로 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위층 머리로
는 하느님과 일치해 있고 아래층 머리로는 자유롭게 일할 수가 있단 말이야.”
그의 그 멋진 수염과 맑고 꿰뚫어보는 눈빛, 그의 미소, 따뜻하고 설득력 있는 말은 사람들
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순수함으로 후광을 두른 그의 깊은 내적 삶은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발했다. 그를 대하고 있으면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좀 더 착해져
야 할 필요성을 느끼곤 했다.
그에게 친근한 말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흘러간 물은 더 이상 방아를 찧지 못하고, 앞날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자. ... 조금 더. 우리의
악의에서 오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것들이다.” 그
가 언제나 새로운 어조로 말하고 되풀이하는 법을 알았던 격언들로서 결코 우리를 무관심
하게 내버려두지 않은 것들이었다.
현실이 된 꿈
죽기 전에 그는 선교에 관한 성 요한 보스코의 유명한 꿈 하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위로는 누렸다. 자기 수도회가 서양에서 동양으로 놀랍게 확장되어가는 것을 관상하
면서, 예언자적 시선으로 돈 보스코는 자신의 아들들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태평양) 맞은
편, 커다란 어떤 산(후지 산) 기슭에 위치한 메아코(일본의 수도)에서” 일하는 것을 보았다.
오늘 날 동경의 살레시오 회원들은 백 명 정도에 이르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고,
발전하고 있는 일곱 개의 사업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직업학교는 기술 고등학교가 되었으
며,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은 다섯 개의 사업체를 갖고 있다. 각각 천 명 이상의 학생들을
가진 오사카와 미야자키의 학교들, 그리고 나카쓰의 고아원은 그 발전이 정점에 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아들들이 한국에 들어가는 것도 볼 수 있었는데, 한국에는 현재 45명의
살레시오 회원들과 네 개의 선교활동 사업체가 있는데, 광주에 큰 학교가 하나 있고 서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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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본당과 양성의 집이 있다. 또 미야자키의 옛 선교지는 일본인 주교를 가진 교구가
되었으며, 22개의 선교구역과 5,000 명 이상의 신자들이 있다. 그리고 돈 보스코 출판사는
살레시오 회원 돈 페데리코 바르바로의 수고로 더 무게 있는 책들을 출판하는데, 일본 최초
로 이루어지는 성서 전권의 구어체 일본어 번역이 그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이
마지막까지 끊임없는 기도로 형제들의 활동을 격려하고 지지했었던 몬시뇰 치마티는 기
쁨에 찬 ‘고별찬가’(Nunc dimittis)를 부를 수 있었다. 마지막 몇 해 동안 편지와 대화 안에
서 그는 자주 주님께서 자신에게 선종의 은총을 베푸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그는 완
전한 사랑 안에서 죽기를 바랐다. 마지막 몇 달 동안 청각과 시각을 잃음으로써 악화된 기나
긴 병고는 그의 정신을 오히려 명철하게 했고, 그로 하여금 그가 결코 지치는 일 없이 설파
했던, 그리고 영웅적일 정도로 스스로 실천했던, 그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위탁의 절정에 달
하게 하였음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
60년간의 사제직과 40년간의 선교의 삶을 마치고 10월 6일 아침, 그는 자식들을 거느린
족장처럼 자신의 모범이라는 귀중한 유산을, 그리고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형제들과 제자
들과 친구들과 은인들이 오늘까지 아직도 공경하면서 보존하고 있는, 양선과 지혜가 가득
찬 무수히 많은 편지들을 남기고 광범위한 애도와 함께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처지로 살고 그렇게 죽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일
본의 천황과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들로 꾸며졌고, 많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과 존경을 받아서 동경과 미야자키에서의 그의 장례예절은 “하나의 개선”을 기록했다.
그가 우리를 떠나간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를 가까이 느끼며, 그는 돈 보스코
의 시신 옆을 지키던 최초의 살레시오 회원들을 위로하던 그 확신을 우리에게 강화시켜 준
다: “우리는 지상의 아버지를 잃었지만, 천상의 보호자를 얻었습니다.”
28, 사진 설명: 파엔자의 화가 프란치스코 까누띠의 유화. 1882년 돈 보스코가 파엔자에서
강론할 때의 어린 빈첸시오 치마티(3세, 엄마 팔에 안겨 있다)와 돈 보스코의 만남을 그리고 있다.
II. 삶의 단편들(frammenti della vita)
들어가면서
관구장 돈 프란치스코 미조베와 만났던 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돈 치마티에 대해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써 보라고 권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고, 그 무렵 건강
도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3 Pages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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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Page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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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95년 말경 기대 밖으로 상황이 변하여 건강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고 돈 치마티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개인적인 기억에서 다시 건져내는 것에 한정하지 않고 그에 대해서 출판된 것들을 다
시 보았고, 시복청원담당자 돈 루이지 피오라의 최근 전기와 시복소송 문서들을 다시 보았
다. 그런 다음, 그저 개괄적으로만 묘사된 것이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이 단편적인 기록들을
한 데 모았고, 이제 그것을 수도회 형제들과 가경자 몬시뇰 치마티를 공경하는 모든 이들에
게 바친다.
이 글이 그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시간을 내어 이 글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영적 유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페이지 바뀜)
“일본의 돈 보스코”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돈 치마티에 대한 두 개의 주요한 전기는 “일본의 돈 보스코”라는 같
은 부제를 달고 있다. 돈 치마티는 돈 보스코의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전기들은 두 사람
에 대한 풍부한 비교로써 설득력 있는 형태로 이를 보여 주고 있다. 돈 지죠티는 그를 “성 요
한 보스코의 참된 복사판”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사람은 묻는다, “간교함도요?”라고. 그렇다, 간교함도! 하지만 그가 타고난 기질 안에
이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는 일찌감치 그의 안에 흡수되어 그리스도교적 신중함
의 덕으로 변형되어 평생 동안 특별한 방식으로 빛났다. 모든 사건 안에서 그는 사물들과 사
람들을 보고 숙고할 줄을 알았으며, 평온한 결정으로 가장 적절한 안내의 말과 격려의 말을,
또는 바로잡아 주는 말을 하는 법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빠라
고 여겼다. 비록 장상이긴 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였다.
그에 대해서 필적검사도 요청되었다. 그의 몇몇 친구들의 호기심이었다. 검사 전문가는 우
리의 학교 동창이었다. 그 후에 그는 필적학의 아마츄어로서 공부를 했는데 이 학문에서 그
는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돈 치마티의 필체에 대한 필적검사를 하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의 보고서에서 나온 결과는, 그와 함께 살았던 삶의 체험으로 그를 알았던 모
든 이들이 그에게 인정하는 기질과 모든 특징들 및 인간적 재능들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빼
다 박은 초상화였다. 단 한 가지 점만 공유되지 않았는데, 필적학자에 의하면 돈 치마티는
또한 “외교에 대한 훌륭한 경향”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는 가장 진실하고, 가장 개방적이고, 모든 가식
에서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설명을 요구받은 필적학자는 문제의 그 점의 검사를 주의깊게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런
다음 처음의 판단을 재확인했다. 필적학의 법칙에 따라 외교의 경향을 드러내는 표시들이
그의 글씨에서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3.2 Page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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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그 누구도 돈 치마티가 외교술을 이용하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없었다. 상냥함과 마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분명함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소통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이해했고 양선과 신중함과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지도했다. 영적 지도의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건, 그의 전기작가(돈 피오라)는 돈 치마티의 신중함을 시험하는 어떤 곤란한 일에 다
행스러운 해결방식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더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는 그의 단호함과 외교능력(!)을 모두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교황사절 몬시뇰 마렐라 역시 푸마소니 비온디 추기경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사실을 언급
하고 이렇게 주석을 붙였다: “이렇게 돈 치마티는 세심하게 주의 깊고, 기민하며, 비할 데
없는 책임감을 지닌 장상인 것이 드러났습니다”(피오라, 121쪽).
돈 치마티는 돈 보스코의 성덕을 모두 지니고 있었으나, 기적을 행하는 선물은 갖고 있지
않았다. 돈 보스코의 생애에 있어서 은총과 기적이 일상적인 일이어서 돈 보스코에게 있어
서는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이 되었다는 말이 나오게 될 정도였음은 알려진 사실이
다. 돈 치마티가 생애 중 기적을, 적어도 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은
나와 있지 않은데, 인간의 마음 속은 오직 하느님만이 헤아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움이
있었노라고 털어놓는 한 형제에게 돈 치마티는 이렇게 말했다: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나.
내가 자네를 위해서 기도했을 텐데!”
이 작은 일화는 그가 자신의 기도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가져오는 효과를 체험으로 알
고 있었음을 내비치고 있다. 그의 형제들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특별한 도움과 은총을
얻기 위하여 자주 신뢰를 가지고 그의 전구에 의지하곤 했다. 또한 돈 치마티가 하고자 하기
만 했으면 기적을 행했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확신이기도 했다.
돈 보스코의 생애에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토리노에서 가까운 어느 지방의 주보
성인의 축일에 강론을 하도록 젊은 신부들 중 하나를 보냈다. 그 풋내기 신부는 모든 열심과
정열을 쏟았고, 그 자신에 따르면, 가히 경이로운 일을 행했다. 돈 보스코에게 그 일을 이야
기하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오직 어떤 기적을 행하는 능력만 없었지요. 돈 보스코처럼
요.’ 돈 보스코는 진지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에게 맹세하건대 자네가 만약 그런 능
력을 갖고 있다면 그 능력을 없애 주시라고 나는 당장 주님께 기도하겠네.’” 돈 보스코는 체
험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토리노에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이 도움이신 마리아의 커다란 성전을 지었다. 그리
고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벽돌 하나하나가 ... 성모님의 은총으로 인한 것이다.” 프
랑스에서 일을 시작하도록 부름받고 마르세이유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일을 제대로 해 나갈
수가 없었다. ... 그래서 그는 성모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자, 시작합시다!” 바로 그 날
기적들이 시작되었다. (절름발이 어린 소년이 그의 강복을 받고 벌떡 일어서서 ... 달려갔고
그의 엄마는 돈 보스코에게 미처 감사하지도 못하고 그의 뒤를 쫓아 달려가야 했다.) 다른
도시들을 계속 여행하면서 도움이신 마리아의 축복으로 그가 얻어 낸 특별한 은혜들은 그
런 것들이었고, 사람들에게 커다란 열광을 불러일으켜 돈 보스코 자신이 그에 대해 감동할
정도였다.
그는 성모님과 의논했으며, 그 놀라운 일들은 강복 중에 즉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중
에 ... 사적으로 일어났다.
우리는 돈 치마티가 견디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토록 깊은 겸손을 지녔고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던 그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은총의 선물이 견딜 수 없도록 무거

3.3 Page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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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짐이었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를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지켜 주셨던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음악의 선물을 받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었다. 음악과 연
주회를 통해서 그는 놀라운 일들, 즉 독창적인 사도직을 행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이미 나이가 든 사람들이 돈 치마티의 음악회에 가서 유익한 좋은 느
낌을 가지고 돌아갔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을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증언할 수 있는
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이는 신자가 되기도 했다!
P.S. 필적학자 아브라함 마르케지 교수는 답변을 하면서, “외교술(혹은 외교능력)”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인가를 설명한 후에 이렇게 말을 맺었다: “내가 여전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돈 치마티에게는 하나의 직감이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심리적으로 꿰뚫어보는 어
떤 능력이 있어서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해 주었으며, 심오한 감수성과 사람들을 설득하는
민첩하고 활달한 지성, 그리고 풍부한 기지(교활함)...가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담긴 대화,
인간적 이해에 대한 천부적 성향인 돈 치마티의 외교술이나 외교능력에 대한 나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고 믿는다. 그것은 그에게 다가가는 모든 사람들의 호감과 신뢰를 얻어 주었
다. 그의 외교는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외교, 즉 책략이 없고, 가식이나 위선이 없는 외교였
다.”
(제목마다 페이지 바뀜.)
“성인과 살기”
나는 돈 치마티를 1925년 가을에 피날레 에밀리아의 살레시오 기숙사에서 처음으로 만났
다. 나는 방금 중학교 2학년에 들어갔고 열 세 살이었다. 돈 치마티는 마흔 여섯 살이었고
토리노 발살리체 고등학교의 명성 있는 교사요 원장이었다. 그 해에 그는 일본에서 살레시
오회의 새로운 선교를 시작하라는 지명을 받아 놓고 있었다. 에밀리아에는 동화 같은 떠오
르는 태양의 제국에 대해 우리에게 강연을 하러 왔었다. 강연이 끝나자 나는 혼잣말로 물었
던 기억이 난다: “돈 치마티는 아직 일본에 가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저렇게 많은 근
사한 것들을 알고 있을까?” 그 때는 나도 역시 몇 년 뒤에 그의 뒤를 따르고 그의 곁에서 35
년이나 살게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1929년에는 돈 보스코가 “복자”로 선포되었다. 살레시오 회원들에게는 커다란 기쁨과
열정의 해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 해에 해외선교지로 떠나기를 꿈꾸었다. 끼아리(브레샤)
의 우리 수련원에서도 그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9월에, 우리가 첫 서원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돈 치마티가 우리에게 도착했다. 그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서 이탈리아로 돌
아왔던 것이다. 그로서는 특히 자신의 새로운 선교에 필요한 인력을, 가능하면 젊은이들을
찾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그는 장상들의 동의를 얻었었고 서둘러 네 개의 수련원을 방문하여, 일본 선교를 위해 각
각 두 명씩의 새 서원자를 얻었다. 놀랍게도 나는 끼아리 수련원에서 선택된 그 두 명 중 하
나였다.

3.4 Page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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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2월, 이탈리아를 떠나기 조금 전인 어느 날 저녁 밀라노에서 나이든 한 형제가 나
에게 말했다: “자넨 운이 좋군. 성인과 함께 살러 일본에 가니 말이야.” 이 말은 나의 기쁨을
더 크게 했다. 비록 그때는 이 말을 충분히 평가할 만한 처지가 못 되었지만. 그 때는 나에게
돈 치마티가 나를 사로잡은, 지극히 사람 좋은 호감 가는 인품의 소유자였을 뿐이었다.
12월 14일 우리는 제노바에서 어떤 독일 배에 올랐다. 우리는 평균 연령 18세에 꿈과 열정
이 넘치는 여덟 명의 신학생들이었다.
우리는 일본에 무엇 하러 갔던가? 돈 치마티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담한 꿈을
하나 열렬히 키우고 있었다. 미래의 자기 협조자들을 현지에서 사제직과 선교로 준비시키
는 것이 그것이었다. 우리가 그 첫 그룹이었다. 이어서 해마다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게 될
것이었지만 ..., 그들은 성숙해지기까지 수많은 그릇의 밥을 먹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 계획
의 실현은 험난할 것이고, 많은 희생을 요구할 것이었지만, 바라던 결과를 제공해 줄 것이었
다. 즉 선교사업의 급속한 발전이 그것이었다!
우리의 여행은 43일이 걸렸고 1월 27일에 일본 미야자키에 우리는 도착하였다. 우리는 철
학과정을 이수해야 했고, 동시에 언어와 뒷날 우리가 복음화해야 할 환경을 익히는 공부를
통해 현지에서의 선교사양성을 시작해야 했다. 돈 치마티는 양성강의와 자신이 전공한 과
학분야 가르침을 맡았는데, 거의 매일 시내에 있는 본당에서 걸어서 우리에게 오곤 했다.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좋은 아버지를 만났음을 금방 깨달았고 그를 사랑했다.
그는 우리의 한계와 과도함을 이해하고 공감했으며, 그가 우리를 두고 꿈꾸던 그 수도적 선
교적 양성을 향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이끌어 가면서 강의와 개인 면담을 통해 우
리를 지도해 주었다.
여름방학 때는 첫 해에는 우리를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이 있는 가고시마로 데려갔고, 다음
해에는 베뿌와 오이타 사이 중간쯤에 있는 호또케자키로 데려갔는데, 우리로 하여금 선교
사들과 그들의 일을 직접 접해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홍콩에서 하게 될 신학과정
이전에 행해지는 실습기간 중에도 그 접촉을 계속하면서 완성해 나가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학교는 그 자신이었다. 바로 그의 모범이었던 것이다. 우리
는 그에게서 일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며, 그 역사와 풍습을 공부하는 방법을
배웠다. 내가 고대 선교사들과 그리스도교인들의 변천사를 공부하는 데 맛을 들인 것은 그
에게, 그의 격려에 기인한다.
오늘날 나는 과장할 염려 없이 돈 치마티가 자신 안에 일본의 위대한 첫 선교사특징들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그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도적 열
정을 지녔고, 발리냐노 신부의 방인사제 양성을 위한 집념과 선교활동을 지역의 문화와 풍
습에 맞추는 적응, 오르간티노 신부의 낙관주의와 양선을 지니고 있었다.
미야자키에서 우리는 돈 치마티의 곁에서 사는 것이 행복했다. 그는 우리를 기쁘게 지내도
록 해 주었고 공부를 시켜 주었으며, 교육적인 산책에 동행해 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그의 탁월한 인품을 알아 가게 되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왜냐면 겸손하고 온화
한 모습으로써 자신의 보기 드문 성덕을 효과적으로 감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감추려고 했던 그 비범한 성덕은 오히려 형제들 및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의
경탄을 점점 더 얻었고, - 이미 발살리체에서 그랬던 것처럼 - 교회는 그러한 그의 성덕을
1991년 12월 21일 “영웅적”이라고 정의하게 될 것이다.
(페이지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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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인 성덕”
돈 치마티가 평생 동안 완덕을 갈망했던 뛰어난 영혼의 소유자였음은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인정했던 바이다. 이는 그가 장상들에게 내심을 털어놓는 편지들에
서 나타나는데, 그는 자주 다음과 같이 되풀이하여 말하곤 했다: “저는 성인이 되고 싶습니
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성인이 되기를, 큰 성인이 되기를, 빨리 성인이 되기를 바라도
록 저를 도와 주십시오”(돈 비앙키에게, A. 크레바코레, 117쪽).
발살리체에서는 “사제생활, 수도생활, 살레시오적 삶의 모델로 간주되었으며, 이미 명시
적으로 그의 ‘성덕의 명성’에 대해서 말했다”(피오라, 71쪽).
몇 사람의 말을 들어 보자.
돈 프랑코 아메리오: “발살리체에 도착하여 나는 신학생들이 그에 대해서 마치 성인에 대
해 말하듯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른 형제들도 역시 돈 치마티에 대해서 굉장한 평판을 하
고 있었다. ... 나에게 있어서 그는 이상적인 살레시오 회원이었다. 나는 그가 전적으로 헌신
하는 임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돈 A. 바바: “그의 성덕의 명성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자자했다. ... 그는 또한 커다란 단순
성과 자연스러움으로 그 성덕을 감추는 것이 특징이기도 했다.”
“발살리체에서 돈 치마티는 원장으로 있던 시절에 충만한 인간적 수도적 완숙, 그리고 ...
성덕의 임무의 충만함에 이르렀음은 물론이다”(피오라, 71쪽).
일본에서는, 완덕에 대한 그의 갈망이 더 열렬해졌고 마침내는 병의 고통 안에서 절정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이 보편적 평판이었다(시복자료, 성덕의 상황, 110쪽). 그는 모든 사람들에
게 “완전한 사랑” 안에서 죽도록 도와 달라고 청하곤 했다.
그가 죽고 나서도(1965) 그의 거룩한 삶에 대한 명성이 지속되자, 교황청에 시복소송을 시
작하도록 요청한다는 결정이 속히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 목적으로 필요한 문서
자료들을 모을 생각을 일찍부터 하게 되었다. 장상들로부터 돈 알퐁소 크레바코레가 정식
으로 이 임무를 받았는데, 그는 즉시 가능한 모든 증언들을 수집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사
랑을 다해 일하기 시작했고, 1972년에는 800쪽짜리 책 두꺼운 책으로 출판하였다. 다른 형
제들도 역시 가치있는 공헌들을 하였다.
이 모든 문헌자료는 시복조사담당관인 돈 루이지 피오라에 의해 주의깊게 연구되었는데,
그는 교황청 시성성(諡聖省)을 위해 이른 바 “성덕의 상황”(Positio super virtutibus)을,
즉 1,600쪽으로 인쇄된 두 권의 두꺼운 책에 돈 치마티의 삶과 덕에 관한 자료를 모은 문헌
을 준비하였다.
“목격증인들로부터 보고 들은” 증인들의 증언을 듣기 위한 “소송”이 일본에서는 1976년
11월 26일부터 1978년 1월 24일까지 동경 대교구청에서 진행되었고, 이탈리아에서는
1978년 4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토리노 교구청에서 이루어졌다. 동경에서 53명, 토리노

3.6 Page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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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19명 등 모두 72명의 증인들이 심문되었다(청취되었다). 교회의 인물들도 있었고, 평
신도들도 있었으며, 남자들도 있었고, 여자들도 있었다. 모두가 동경과 토리노의 두 대주교
에 의해 제정된 위원회 앞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맹세 아래 증언을 하였다(?? 쪽[다음
, ‘자문관들의 증언과 판단이 시작되는 쪽 번호 삽입]).
그 동안 또 돈 치마티가 쓴 “글들의 상황”(Positio super scriptis)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
고 있었는데, 무려 22권에 달하는 양이었다! 1981년에 이 검토가 끝났다. 그것들을 검토하
도록 위임받은 두 사람의 신학 검사관들은 호의적인 판단을 내놓았다. “절대적으로 긍정
적”이라고 처음 검사관이 인정했고, 두 번째 검사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하느님의 종 돈 치
마티는 우리 시대의 선교사의 모델로 현양되고 제시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소송은 중요한 첫 단계를 쉽게 잘 통과했다!
덕에 대한 검토는 8명의 신학 자문단과 한 명의 위원장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맡겨졌었다.
“성덕의 상황”에 대한 길고 꼼꼼한 연구 후에 아홉 명의 자문관들은 “판단과 투표지”를 각
각 개인적으로 제출하였다. 이는 1991년에 171쪽의 “보고서”로 출간되었다.
덕에 대한 검토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기본적인” 덕 모두를 포함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것
들이다: 세 가지 향주덕(向主德)인 믿음, 소망, 사랑; 사추덕(四樞德)인 예지, 정의, 절제,
용기; 그에 첨부되는 덕인 청빈, 정결, 순종, 겸손, 성덕의 명성. 시복담당관 돈 피오라는 그
결과를 돈 치마티의 전기 서두에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그의 삶을 검토한 신학 자문관들
은 그의 영웅적 덕행에 대해 만장일치의 긍적적 평가를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돈 치마티에
게서 ‘우리는 이 세기가 우리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거룩한 인물들 중 하나의 존재를 본
다’고 인정하였다. 살레시오 가족의 역사 안에서나 일본 가톨릭 교회의 역사 안에서나 보기
드물고 탁월한 인물을”(시성성, 신학 자문관들의 보고서)(돈 피오라, 5쪽 참조).
1991년 12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승인하고 그를 “가경자”(可敬者,
Venerabile)로 선포하였다. 이제 신자들은 신뢰를 가지고 하느님께 전구해 주도록 그의 이
름을 불러 기도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자문관들의 증언과 판단
이 시점에서 우리는 교회가 제단에 올릴 성인으로 선포하기 위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안
다. 그것은 길고 엄격하고 ... 일이 많은 과정이다. 돈 치마티는 덕행의 검사를 다행스럽게
잘 통과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그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그를 가까이서 보았던 많은 증인들
과 시복소송 문서를 모두 검토한 아홉 명의 자문관 신학자들에게도 덕을 입고 있다. 자문관
들은 “보고서”에서 자기들에게 가장 감명을 주었던 증언들을 제시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개
별적인 판단들을 발표한다. 여기에서는 그 중 몇몇 예들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제한해야겠
다.

3.7 Page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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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인 덕에 대해서: 발살리체에서 돈 치마티의 제자였던 난제로니 교수는 이렇게 말했
다: “하느님의 종의 덕은 그의 항구함과 열성과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음과, 결코 굴곡이
있어 본 적이 없는 한결같음에 있어 영웅적이었다고 생각한다”(보고서, 34쪽).
성덕의 명성. 자문관들의 판단에서: “열심한 신자들의 경우를 초월하는 흔치 않은 덕행의
실천에 기초한 성성(聖性)의 명성이다. 치마티의 덕은 완덕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늘 하
느님을 향해 있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한 증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가 전적인 투신
에서 벗어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보고서, 33쪽).
신앙: 마에스트로 안젤로 로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돈 치마티는 깊은 신앙을 갖고 있었으
며, 아주 많이 기도하였다. 언제나 기도하였다. ... 내가 보기에는 그는 최고수준의 덕을 실
천했다”(보고서, 14쪽). “신앙은 그의 ‘삶의 빛’으로서, 그의 정신을 감싸고 그의 존재 안으
로 침투해 들어갔다 ....” “신앙은 그의 기도에 영감을 주었다. 증인들은 그를 깊은 기도, 신
심적이며 지속적인 ... 기도의 사람으로 말한다.” “그는 커다란 성체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성모님께 대한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신심을 평생 동안 가꾸어 갔다”(보고서, 34쪽, 두 번
째 자문관).
희망: 치마티 안에서는, 증인들이 일치하여 드러내고 있듯이, 그의 삶을 구별지어 주었던
평온함과 낙관주의와 기쁨이 바로 희망의 덕으로부터 솟아났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에 열
렬히 타는 영혼이었다“(보고서, 35쪽).
“사도적 열망으로 가득 차서 언제나 섭리에 대한 신뢰로써 자신의 내적 혼란의 어려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 없이 기쁨과 열정을 퍼뜨렸다”(보고서, 59쪽, 네 번째 자
문관).
가난: “그의 가난은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그는 가난함과, 가난한 자로 살고 가난한 사람
들 사이에 사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새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
다”(141쪽).
절제: “돈 치마티가 절제의 덕을 영웅적으로 실천했던 데 대한 만장일치의 증언은 “가까이
서 본”이라는 글을 쓴 저자 돈 끌로도베오 타씨나리가 이에 대해 기술한 바로 요약될 수 있
을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없애지 않되 여유는 허락지 않으면서 대단한 정
도로 절제를 실천했다. 언제나 모든 것에 만족했으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어떤 것에
나, 특히 일본의 풍습이나 음식에 적응했다. 그의 고행복은 일이었으며, 일로써 극기를 해
야 한다고 가르치곤 했다”(55쪽).
정결: “하느님의 종은 교만을 함께 지닌 관능성이 자신의 지배적 결점이라고 여겼다. 그럼
에도 이 글들에 대한 검토는 치마티의 덕에 그늘을 지우기는커녕 그의 덕에 빛을 비추어 준
다”(22쪽).
“그가 장상들에게 하던 월보고에서 그는 예민함에 대해 자신을 비판해야 한다고 믿었다
(종종 그가 관능성이라고 불렀던)... ‘그의 인성구조에서 극도의 예민함은 그의 덕에 이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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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가 없는 영웅성의 특징을 부여한다. 언제나 자신을 지배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보고
서 147쪽).
“돈 치마티가 애정을 무척 강하게 느끼고 각자에게 따뜻함을 가지고 다가갔던 것은 사실이
다. ...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다. 목격증인들은 그의 삶의 순결함을
인정함에 있어 일치한다. 권위있는 증인 한 사람(돈 제르비노)은 이렇게 증언한다: ‘하느님
의 종의 정결은 그 어떤 의혹도 초월했으며, 그를 알던 사람은 누구라도 그에 대해 일말의
의혹도 가질 수 없을 만큼 명백했다’”(96쪽).
겸손: “겸손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에서 가장 깊고 습관적인 태도였으며, ... 그의 특징적
인 덕이었고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덕 중 하나였다”(164쪽).
시련 중에: “돈 치마티는 반대와 여러 종류의 고통과 대립 등을 체험했으나 언제나 평온하
고 차분했으며, 강인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무에게 대해서도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강
하고 민감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기질을 평생 동안의 투쟁으로 지배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
다. 음악에 있어서까지 그는 자신의 특별한 민감함을 지배하기 위해 제동을 걸곤 했다”(93
쪽).
“하느님의 종은 꽤나 강하고 불같은 로마냐 지방 사람의 성격을 타고 났었으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과다함을 다스리는 데 성공했다”(20쪽).
“모든 증인들이 하나같이 돈 치마티를 부드럽고 균형잡힌 사람, 언제나 평온하고 판단에
신중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53쪽).
“상황”(성덕에 대한 증언들)은 자문관들로부터 대단히 찬사를 받았는데, 하느님의 종의 행
동방식(그의 인간관계, ‘양선의 통치’, 관리행정, 등등)에 대한 어려움과 비판들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비판들은 설득력있는 증거들로써 모두 반박당했다. “논의의 여지가 있
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를 철저히 해명하는, 문서자료들에 근거한 답변들이, 문제를 환히
드러내는 데 충분한 답변들이 주어졌는데, 이것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종이 지닌 원래의 성
덕과 뚜렷한 본모습을 더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보고서, 147쪽, 아홉 번째 자문관). “결
론적으로 아무것도 그늘에 남겨지거나 침묵 속에 묻히지 않았다”(특별히 돈 피오라,
157/197쪽 참조).
마지막으로 자문관들의 두 가지 판단을 더 보기로 하자.
“‘증언록’ 두 권에 모아진 광범위한 증거를 주의깊게 조사하고 났을 때, 하느님의 종 빈첸
시오 치마티가 덕과 성성의 이례적인 모델이라는 데 대한 일말의 의심도 남지 않았다”(143
쪽, 여덟 번째 자문관).
“나의 이 연구를 마치면서 나는 치마티를 두 마디로 제시할 수 있겠다: 영웅적일 정도로까
지 관대하고 선교의 열정에 넘치는 참된 돈 보스코의 아들이자 복음화선교에서 ‘토착화’의
챔피언. 확실한 의식으로써 나는 치마티가 모든 덕을 영웅적인 수준으로 실행했다는 말로
마치고자 한다. 그는 마땅히 들어높여지고 우리 시대의 교육자들과 선교사들의 모델로 제
시될 자격이 있다”(65쪽, 네 번째 자문관).

3.9 Page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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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인간미”
신학생 시절부터 돈 치마티를 알아 온 한 증인은 이렇게 진술한다: “그 풍부한 인간미의 덕
으로 그는 쉽게, 누구를 대하든지, 공동체 형제들이건, 신자들이건 비신자들이건 간에, 이
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곤 했다”(레브리노, 436쪽).
"인간미"(umanità)이라는 말을 가장 포괄적인 완전한 의미로 이해하자. 즉 양선(bontà),
이해심, 이웃에 대한 애정이라는 인간적 자질,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 숭고해진 인간적 자질로 말이다.
그가 아주 특별한 천부적 재능과 아주 강하고 활발하고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완덕에 대한 지속적인 갈망으로 자기 자신을
지배하려는 노력을 해 왔다. 그 결과 그는 균형이 잡히고, 겸손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
랑이 넘치는 성품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조화롭게
이루어 낸 인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가 타인을 “영웅적인” 방식으로 사랑했음을 우리는 그를 알았던 여러 사람들의 무수한
증언들과 교회에 의해 표현된 권위있는 판단들을 통해서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그의 인간미의 풍부함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
의 구별 없는 사랑의 여러 모습들을 상기시키고자 할 뿐이다.
증언들 가운데 자주 나타나는 표현은 “그는 아버지였다. 참 좋은 아버지. 그리고 또 마치
어머니처럼 사랑했다”라는 말이다.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의 한 수녀의 말이 흥미롭
다: “남자이면서도 그분은 아랫사람들에게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을 넘어서는 사랑과 보살
핌을 베풀었다”(이찌노세 야에꼬, 1965년 조후 신학원 주방수녀).
교토의 주교 몬시뇰 후루야 요시유끼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껴안고 싶어
하는 사람의 따뜻함을 지닌 애정을 무척 강하게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커다란 신중
함과 순결함이 있었고, 동시에 대단한 극기를 했다”(보고서, 141쪽).
다른 증인들의 말을 들어 보자: “그는 사람을 사로잡는 인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크
레바코레, 95쪽).
“그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었으며 하느님께 인도하는 사랑이었다”(보고서, 159쪽).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토리노의 발살리체에서 20년이 넘도록 돈 치마티는 수도원의 “병
실담당자”였다. 그 시절에는 병자들은 가능한 한 집에서 치료를 했고, 병원에는 긴급한 경
우에만 갔다.
발살리체의 커다란 학교에는 살레시오 회원들과 학생들이 대단히 많았고 병실에는 손님
이 끊이지 않았다. 돈 치마티는 의학과 간호학 지식을 꽤 갖추고 있었지만, 특별히 그 넓은
마음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데 쏟아 부었다.
그에게 간호를 받은 병자들은 감동적인 증언들을 써서 남겼다. 그 중 한 사람(모란디 삐에
트로 박사, 423쪽)은 이렇게 증언한다: “발살리체에서 내가 병이 들었던 한 달 동안에 돈 치

3.10 Page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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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가 나에게 베풀어 준 간호를 기억하고 싶다. 어떤 엄마라도 그 이상으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돈 치마티는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
정규 수업, 음악 교수, 조력자(아씨스뗀떼) 등 하루를 가득 채우는 여러 가지 임무에도 불
구하고, 그는 필요하다면 병자 옆에서 고스란히 밤을 지내곤 했으며, 아침이면 마치 자기 침
대에서 자고 나온 것처럼 자기 일로 돌아가곤 했다!
첫 번째로 일본에 와서 미야자키에서 공부했던 신학생들은 1931년의 여름방학을 베뿌와
오이타 중간에 위치한 호또케자키 해각(海⾓)에서 보내려고 갔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이
렇게 쓰고 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우리 동료 하나(자나리니)가 열병에 걸렸다. 돈 치마
티는 그를 엄마처럼 보살폈는데, 밤새 깨어 그를 지켜보았고, 더위를 식혀 주고 열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 그의 몸 아래로 팔을 뻗쳐서 다다미에서 들어올린 채로 있곤 했다. ... 병자가
오이타의 병원으로 옮겨질 때까지 그렇게 했다”(신도와 부처 사이의 그리스도, 55쪽).
장상으로서의 임무로 인해 일본에서 이탈리아로 돌아갈 때도 형제들의 가족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자식들의 안부를 전해 주고 자기들의 선교사업의 놀라운 일들을 이야기해 주는
일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이러한 방문들은 시간과 수고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
나 반갑고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기곤 했다.
조후의 신학원에서 4년(1951-55) 동안 돈 치마티와 함께 살았던 요한 시리에다신부는 이
렇게 쓰고 있다: “이웃에 대한 그의 애덕은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특징이었다. ... 그
는 우리에 대한 폭발하는 사랑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난 자네들을 지나치게 사랑하나
봐!’ 하고 말하곤 했다. ... 그는 모든 사람을 똑 같이 사랑했고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했다.”
발살리체에서 그의 제자였고 나중에 그곳의 교사가 된 돈 바바가 확인해 주는 바는 이렇
다: “돈 치마티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우리들 각자가 자신이 그에게서 가장 사랑받는다고
믿는 그런 방식으로 각자를 사랑했다”(45쪽). 조금 뒤에 가서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아주 섬세했고 우정에 예민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출신지와 성격과 의견 등이 서로 꽤나 다
른 각 개인들을 융합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어떤 사람과 말할 때 언제나 각별히 ‘떼네레짜’(부드럽고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와
애정을 드러내는 은사를 받고 있었다.” 돈 페데리꼬 바르바로의 이러한 견해(362쪽)를 나
는 좋아한다. 왜냐면 나도 역시 돈 치마티의 애정은 바로 “떼네레짜”라고 여겨 왔기 때문이
다.
유명한 교육자 쟝 바니에는 최근의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떼네레짜는 대단히
특별한 어떤 것이다. 겸손과 경청과 이해심에 가까우며, 인간 상호관계의 따뜻함이다”(선교
잡지, “세계와 선교” 1997년 1월호, 34쪽과 36쪽, 참조).
돈 치마티의 애정은 그런 것이었다.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던 애정, 그러나 그는 예
수처럼 사랑하고 “싶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4 Pages 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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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Page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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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절제”
돈 치마티의 특징적인 덕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하고 싶은 사람은 선택하는 데 많은 어
려움을 발견할 것이다. 시복소송과정에서 제시된 증언들은 그의 삶 안에서 빛났던 모든 그
리스도교적 덕들은 아낌없이 찬양하고 있으며, 자문관들은 그 덕들을 모두 “영웅적”이라고
인정했고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도 그렇게 확인되었다.
여기서는 돈 치마티를 단지 살레시오적 삶의 정체성을 특징짓는 “모토”인 “일과 절제”에
있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회헌의 문장을 보자.
회헌 18조: “일과 절제는 수도회를 번영시킬 것이다.” 살레시오 회원은, 단순함과 절도로
모든 것을 잘하도록 마음을 쓰면서, 지칠 줄 모르는 근면함으로 자신의 사명수행에 헌신한
다.
회헌 78조: “절제는 살레시오 회원의 마음을 지켜 주고 자신을 규제하도록 힘을 주며, 평
정을 유지하도록 도와 준다. 특별한 보속행위를 찾지 않지만 일상의 요구와 사도적 생활에
따르는 포기를 받아들인다. 하느님이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더위와 추
위, 목마름과 배고픔, 피로와 멸시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탈리아와 일본에서 돈 치마티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가 지칠 줄 모르는, 감탄할 만한 굉
장한 일꾼이었음을 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근육이 튼튼했으며, 일에 있어서 민첩했고, 질
서정연했지만, 무엇보다도 성 바오로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합니다”라는 “모
토”에 부추김받아 모든 것에 있어서 언제나 최대한도를 겨냥했다. 그는 자신의 수많은 일상
의 업무에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요청하는 어떤 일을 추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소가
시”(바쁩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언제나 “차분하고, 평온하고, 침착한” 상태
를 유지했다. 자주 다른 사람들에게 권고하였듯이.
그는 즐겨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살레시오 회원은 세 사람 몫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실제로 그렇게 했지만 결코 이를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일에 분발하면
서도 과장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며, 건강에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권고했고, 휴식과 여
름휴가를 마련하곤 했다.
일본에서는 그가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결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신학생들이
여름에는 신학원 밖에서, 즉 건강에 도움되고 긴장을 풀기에 적절한 장소에서 휴가를 지내
기를 원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발살리체에서 교사로 있었던 긴 세월 동안 여름에는 그 자신이 신학생들
을 알프스의 시원한 곳에 있는 삐오바의 여름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전설
적으로 남아 있는 휴가를 지내곤 했다. 산으로 가는 소풍, 집에서 하는 연극, 노래, 즐겁게
놀기, ... 그리고 돈 치마티는 이러한 레크레이션의 활성자로서 언제나 어디에서나 지칠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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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그들과 함께 했다. 그도 역시 산의 공기와 시원한 물을 즐겼으나, 사실은 그의 하루
는 발살리체의 학교에 있을 때처럼 일로 가득 찬 하루였다.
그는 자신에게는 철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뛰어난 섬세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이해하고, 돕고, 위로할 줄을 알았다. 그의 양선함은 모든 사람에게 도달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받은 주의깊은 관심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만 잊을 수
없는 작은 일화 하나만 기억하고자 한다. 젊은 사제로서 나는 미야자키의 신학교에서 원장
이었던 돈 치마티 옆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내일 후쿠오
카에서 큐슈의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모임이 있습니다. 종교법인에 대한 새로운 법을 설명
하려고 고세이쇼(위생성)에서 사람들이 옵니다. 나는 갈 수가 없으니, 부탁합니다. 신부님
이 가 주세요.” 나로서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하룻밤 기차를 타고 비록 삼등칸이라 해도 잠
을 잘 잘 수 있었을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저녁에 떠났다. 학교 현관에서 나는 돈 치마티를 만났다. 우연히 거기 있었던 것 같았
는데, “말할 것도 없이, 이등칸을 타게나” 하고 나에게 말했다. 역으로 가면서 나는 속으로
되새기며 생각했다: “당신은 이등칸을 타는 것은 꿈도 꾸지 않으시면서. 밤이건 낮이건 우
리보다 훨씬 더 많이 기차로 다니시는데도 말이야. 저 분은 사등칸이 없으니까 삼등칸을 이
용하시는 거야....” 그런데 그는 “이등칸을 타라”는 그 말을 나에게 얼마나 큰 애정으로 했는
지 나는 감히 그의 말을 거스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은 신간선이나 비행기가 보통이 되었으니 돈 치마티는 “발전을 환영하노라!” 하고 말
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것을 지키는 방법이다. 즉 일, 가난정신과 희생정신이 그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적응하는 법을 알 것이다.
“그는 대단히 왕성하고 신경이 예민한 기질이었고, 특별히 열렬한 마음을 가졌었다”(T,
2,98쪽). 즉 그는 자신에게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일이 바로 그의 고행복이었다(크레바
코레, 484쪽).
가장 넓고 완전한 의미로 이해되는 “절제”에 대해서, 두 가지의 권위있는 설명을 언급하기
로 한다. 이 설명들은 그 말의 풍부한 내용을, 즉 절제는 덕과 균형과 사목적 사랑의 복합체
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감각, 본능, 정욕 ...을 억제한다. 그렇게 해서 절제는 극기, 정결, 겸허, 검
소, 균형 ...이 되고, 긍정적인 면에서는 자유, 평온, 내외적 질서...를 의미한다”(신적 친밀,
1,129쪽).
총원장 돈 에지디오 비가노는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절제는 극기와의
연계를 포함하면서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돈 보스코는 숨겨진 극기를 원했다. 그
러나 절제는 분명히 드러나 보이기를 원했다. 왜냐면 절제가 사목적 사랑으로 그것을 실천
하는 사람 안에서 호감을 주고 매력을 갖는 태도를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절제의
열매는 차분하게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중용과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이다.” 모든 인간은
극기해야 할 본능과 경향과 정욕과 개인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과도한 것을, 조절
할 수 없는 자신의 충동, 정욕을 지배하도록 의지를 인도하는 지능을 사용하는 것이다”(돈
에지디오 비가노, 생애의 단편들, 128-129쪽).
돈 비가노 역시 놀라운 일꾼이었는데, 슬로바키아의 소년들과 함께 있었을 때 그들에게 가
장 궁금했던 것들에 대한 질문세례를 받았다. 한 아이가 그에게 물었다: “재능을 몇 가지나
받으셨어요?” 즉각적인 답변은 이랬다: “ 두 가지인지, 어쩌면 다섯 가지인지 모르겠다. 하
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들을 묻어 두지 않았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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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돈 치마티가 그랬던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지배하기
돈 치마티가 1930년에 이탈리아에서 신학생들을 데려왔을 때, 그 최초의 젊은 신학생들은
다카나베에서 목재로 지어진 한 일본식 집에서 살았다. 그는 그때 선교단의 장상이었고 동
시에 신학생들의 원장이자 교사였는데, 저녁식사 후에는 규칙적으로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피아노를 치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분
위기에 뭔가 좀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신학생들 중 두 사람이 알 수 없는 말들
로 다투고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한편 그들 중 몇 사람은 유도와 쓰
모의 만남을 보고 싶은 호기심에 낮은 소리로 그들을 부추기고 있었다.
돈 치마티는 직감으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우리 가서 음악을 좀 듣고 피아노를 칠까?” 하
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와 함께 그의 사무실로 갔는데, “후쭈마”라고 하
는 미닫이문으로 된 칸막이벽이 있는, 현관에 가까운 작은 방이었다(후쭈마는 나무 막대기
로 틀을 짠 것으로서 높이가 2미터가 채 안 되고 인쇄된 무늬나 그림들로 장식된 두꺼운 종
이를 덮씌워 발라서 만든 칸막이였다). 이 약한 벽 뒤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가파른 층계가
있었다.
한 순간 이상한 소리 하나가 들렸다. 그 두 사람은 밖에 남아 있었고 어슴푸레한 시간을 이
용해서 서로 맞붙어서 힘을 대결하고 있었는데, 층계의 맨 아래 계단에 발이 걸려서 층계
위로 넘어졌던 것이다. 결투에서 우열을 가리려 애를 쓰다가 “후쭈마” 벽을 밀어 넘어뜨려
서 그 “후쭈마”벽이 상부의 골로부터 이탈하여 우리 발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그 두
결투꾼이 서로 맞붙어 끌어안은 채로 함께 안으로 넘어졌다.
그야말로 희극과 비극이 엇갈리는 장면이었다. 돈 치마티는 벌떡 일어서서 주먹으로 탁자
를 치며 소리 질렀다. “내가 원치 않는다고 말했잖아!” 일순간 당혹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즉시 악보를 집어들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피아노 치러 가지.” 그리
고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휴게실에 있는 피아노까지 그를 따라갔다. 두 싸움꾼은 창피스러워 쩔쩔매며 일어
나서 반쯤 망가진 “후쭈마”를 다시 제 자리로 끼워넣고 엉거주춤 무리 속으로 끼어들었다.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돈 치마티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고 주위에는 다시 평화와 즐거움
이 돌아왔다. 힘겨루기에서 이긴 사람은 바로 그였던 것이다. 자신을 지배하고 마력에 홀리
기라도 한 듯 주위를 평온하게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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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나는 몬시뇰 치마티가 1952년의 총회에서 일본관구 대의원이었을 때 숨어 있으면
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임무를 받아들였음을
말했다. 돈 치마티라는 인물을 더 폭넓게 조명하기 위해 그 사건을 세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 될 것 같다.
그 해에 몬시뇰은 대단찮은 일들을 하면서 조후의 신학원에 살고 있었다. 관구회를 위한
대의원 선거가 그 공동체에서 있었을 때 그의 이름은 즉시 절대다수의 표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늙었다고, 그러니 더 젊고 유능한 다른 형제가 선출되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말로 이해를 청하면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총회대의원을 선출해야 했던 관구회의에 그는 참석치 않았다. 관구회의는 조후 신
학원에서 열렸다. 그날 아침 대의원들이 회의장에 들어가기 전에 몬시뇰 치마티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관구장 - 자신의 제자요 아주 젊은 사람이었던 - 에게 다가가서 쪽지 하나를
전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 좀 읽어 주세요. 부탁합니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기 일자
리로, 즉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사랑하올 관구장 신부님, 관구회의에서 저를 다음 총회
를 위한 관구대표 대의원으로 선출하고자 하는 것을 제가 예견하기에(여러분은 여러 형태
로 저에게 이를 너무도 잘 이해하게 해 주었으니까요) 관구장님께 청하오니 부디 대의원들
에게 제가 절대로 이 임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유념시켜 주십시오(이미 제가 조
후의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드러냈듯이). 여러분의 배려에는 감사하지만 저는 내키지 않습
니다. 이는 저의 장상들에게 알려져 있는 개인적인 양심문제로서 저로 하여금 이를 받아들
이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저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자신을 스스로 기분 상하게
하지 않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의사록에 저의 이 말을 기록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이 형제에게 베푼 사랑을 주님께서 갚아 주시기를. 사랑으로, 돈 빈첸시오 치마
티.”
관구장은 감격했다. 그러나 회중에게 이를 알려야 한다고 믿지는 않았고 그 쪽지를 숨겼
다. 첫 번째 개표에서 만장일치로 몬시뇰 치마티의 이름이 나왔다. 그래서 그에게 수락할 것
인지를 묻기 위해 나이 많은 두 형제에게 그에게 가서 회의장에 출석하도록 초대하는 일이
맡겨졌다.
잠시 뒤에 두 사람은 몬시뇰과 함께 돌아왔다. 관구장은 그에게 의례적인 질문을 하였다:
“보시다시피, 몬시뇰, 형제들이 몬시뇰을 관구대표 대의원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임무를 받
아들이십니까?” 대답은 기다리게 하지 않고 나왔다: “뭐, 그러지요” 하고 손으로 모호한 제
스츄어를 하며 말했다. 자신을 억제하느라 몸을 떨면서.
달리 예상했던 관구장은 자기가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염려하여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몬시뇰, 받아들이십니까?”
“아, 예, 예” 하고 그는 반복했다. 강당에서는 모든 이의 감격 속에서 박수갈채가 터져나왔
다.
“자, 그럼, 몬시뇰, 여기 앉아 회의에 참여해 주십시오.”
그는 관구장 옆에 앉아서 평상시의 차분함을 되찾고, 의견을 요구받으면 인자하게 말하면
서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관구회의가 끝나자마자 그 날 저녁 관구장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 떠나지요?”
관구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총회 전에
이탈리아의 친구들과 은인들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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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좋아요. 관구장 신부님이 정하세요. 나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까.”
다음 날 우리는 여권수속을 위해 시내에 나갔다. 차에는 다른 형제들도 있었는데, 이런 저
런 것들에 대해, 전날의 관구회의에 대해서도 떠들썩하게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몬시뇰 치마티는 관구장에게 검지손가락을 들이대면서 폭발하듯 외쳤다: “내가
신부님에게 부탁한 대로 하지 않았지요!” 관구장 외에는 아무도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이해
하지 못했다. 관구장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렇게 답했다: “몬시뇰, 지금은 제가 장상입니
다. 제가 더 낫다고 보는 대로 하지요.”
그 말에 몬시뇰 치마티는 말을 잃고 아연해 있다가 잘라 말했다: “좋아요. 화제를 바꿉시
다” 하고는 그에 대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3개월 후에 관구장이 토리노에 도착했을 때 이 대의원이 수염을 다듬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에게 말했다: “몬시뇰, 이리 오세요. 이발관에 가서 제가 수염을 다듬어드릴게요.”
이따금 그의 수염과 머리를 손질해 주는 것은 관구장이 즐겨 해 온 오래된 특권이었다.
“수염은 내버려 두고 총회 전에 피정을 잘 할 궁리나 하세요.”
“하지만 몬시뇰, 일본의 대의원이신데 멋지게 보이셔야죠.”
도리가 없었다. 그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고 관구장은 자기 일로 돌아갔다.
총회가 시작되었다. 총 영성지도자 선거를 할 때가 되자 관구장은 자기 대의원의 귀에 대
고 속삭였다: “몬시뇰, 양심에 따라 저는 몬시뇰에게 표를 주어야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
람들은 그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몬시뇰은 강하게 말했다. “착하게 구세요.”
이번에는 선출되는 위험을 당하지 않았다. “제 기도가 효과가 있었군요” 하고 관구장이 농
담을 하고 나서 몬시뇰이 더 평온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회의장에서 나가자마자 그
가 활기차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말야, 언제 내 수염을 다듬어 줄 거지?”
펜의 사도
돈 치마티는 학식면에서 여러 분야에서 저술가였으며, 기발한 착상과 쉽게 쓰는 재능, 학
교와 인간에 대한 체험, 그리고 가르치고, 양성하고, 특히 인간들의 영혼에게 유익함을 주
려는 제어할 수 없는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수천 통의 편지 외에도 교육학, 농학, 음악에 대
해 높이 평가받는 수많은 저술들을 남겼으며, 잡지들에도 무수한 글들을 썼다. 낮시간과 밤
시간의 일부를 꽉 채웠던 여러 가지 업무 가운데서 어떻게 이런 저술활동을 위한 시간을 찾
아 낼 수 있었는지를 우리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광대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활동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그를 재촉하는 흔치 않은 내적 열정으로 고무되어 질서 있고 기민했었음을 안
다.
돈 피오라는 최근의 돈 치마티 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는 것은 돈 치마티의 하나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선교사로 일본에 있었을 때
는: “그는 선교사들에게 맡겨진 ‘주민들 사이에서 선교사도직을 완수하기 위한 유익한 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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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과 ‘복음화할 사람들과의 접촉과 자신의 사도직 분야에 대한 사랑을 더욱 더 굳건하게’
하기 위한 수단을 바로 학식 안에서 보았다”(24장, 187쪽 이하).
“그의 문체는 친근하고 직접적이고 생기가 있었다. 종종 특히 묘사에서는 거의 시적이었
으며, 일본이라는 세계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결코 논쟁적이지 않으며, 독자들의 감수성과 충돌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손대지 않았다.”
악기를 연주할 때처럼 자신이 쓰는 모든 것을 가치있게 하고 호감을 주는 것으로 만드는 재
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드러내는 데만 몰두하여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했다.” 또한 서신
교환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선(善)으로 독려하고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고 호
감을 갖게 할 줄을 알았다. 얼마나 많은 편지들이 보존되어 있는지 모른다!
친필
돈 치마티의 필체는 특징적이었다. 분명하고 둥글고 날아가는 것 같고 ..., 필적학에서는
“양선함”의 표시이다. 그리고 각이 진 획들은 명령에 재능이 있는 힘찬 기질을 드러낸다.
(아래 칸에 원본 53쪽의 친필 복사를 삽입해 주세요.)
선교사 돈 치마티
발살리체에서 돈 치마티는 교사로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그 덕과 양선함으
로 감탄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그는 “마에스트로”였고, 비할 데 없는 지도자
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 다양한 일들과 음악과 노래, 그리고 제자들과 즐겁게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그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
에게는 충분치 않았다.
그는 자신 안에 채워지지 않은 소망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즉 선교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
다. 여러 번 그는 장상들에게 자신을 선교지에서, 그것도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선교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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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도록 보내 줄 것을 청했었다. 1920년에도 역시 그는 총원장 돈 알베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 바로 이것이 25년 전부터 제가 소망해 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장상
들을 통해 하느님께 제가 간청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철학과 교육학 학위를 받았을 때 형제들과 제자들이 그에게 축하를 해 주었는
데, 그 중 하나가 느닷없이 그에게 물었다. “다음 학위는 뭐가 될까?” 돈 치마티는 즉시 이렇
게 답했다. “선교사가 되는 은총을 얻기 위해서라면 내 모든 학위와 수료증을 다 내어주겠
어.”
마침내 그 은총이 그에게 도달한 것은 1925년, 46세의 나이에, 이미 발살리체 수도원의 원
장이었던 때였다. 10월 15일 한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열을 털
어놓았다. “오늘 밤 - 한 밤중에 - 책임이 끝나네. 생각들, 갈망들 ... 그런 것들의 새로운 시
작이지. ... 떠오르는 태양, 벚꽃, 국화, 밥, 모기, 화산... 난 울고 있네. 기뻐.”
그는 준비된 마음과, 남은 생애를 교회와 장상들이 자신에게 맡긴 사도직에 바치려는 확고
한 결단으로 일본에 도착했다.
첫 번째 과업은 일본어 공부. 그와 여덟 명의 일행은 즉시 그것이 만만치 않은 일임을 알았
다. 그리고 언어공부와 함께, 자기들을 둘러싼 새로운 세계에 처음으로 접근하는 일이었다.
조금씩 그들은 일본사람들과 그들의 방식과 관습을, 즉 예의범절 및 몸을 굽혀 절하는 방
식, 그리고 식사할 때 젓가락을 활용하는 법이며 집 안에서 실내화를 신는 것 등을 알아 가
기 시작했다.
일 년 뒤에 그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었으니, 파리 외방선교회의 프랑스 신부들이 넘겨준
미야자키, 오이타, 나카쓰의 세 본당을 맡아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돈 치마티는 미야자키에 남아 거기서 다른 이들의 일들도 조정하곤 했다. 돈 치마티도 그
의 동료들도 선교지의 체험을 한 적이 없음을, 하물며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의 체험은 더더
구나 없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기작가들이 장광설을 펼치는 선교모험담들이 바로 여
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돈 치마티는 “영혼들을 위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장상으로서의 임무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직접적인 사도직 활동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미야자키의 신자들을 돌보
는 일에 나섰는데, 희생을 마다 않고 모든 수단을 써서 이 도시와 그 주변의 신자들을 방문
하는 데 마음을 썼다. 또한 어느 작은 공동체에서 어떤 선교사를 대신하는 일에 언제나 자신
을 내어놓았다. 그는 또 타노, 미야꼬노조, 다카나베의 세 공소를 동시에 돌보기까지에 이
르렀는데, 주일마다 그 공소들을 방문했다.
그는 그 동안 친구가 된, 가까운 곳에 있는 오래 된 선교사들에게서 배우고자 했는데, 가고
시마의 프란치스코회 회원들, 후쿠오카의 주교인 몬시뇰 브레통, 강론과 고백성사를 도와
주기 위해 나가사키로부터 기꺼이 오곤 했던 와키다 신부가 그들이었다.
그는 새로운 환경을 더 잘 알기 위해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곤 했는데, 그 예리한 관찰력이 그
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짧은 기간 안에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 바를,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갖추었다. 그리고 자신이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모
든 것을 자신의 선교사들에게 자상하게 설명해 주고자 하였다.
처음부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돈 보스코가 했을 방식대로 합시다”, 즉 그의 정신으로,
“그의 사랑과 인내와 그지없는 상냥함으로” 일합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의 태도로, 말로, 글로 보
여 줍시다. 일본을 알고, 할 수 있는 한 우리 자신을 일본화하고, 우리의 서양식 취향과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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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고방식과 우리의 결점들을 벗어 버리도록 노력합시다. 1937년 이탈리아에서 글을 쓰
면서 그는 주저치 않고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필자는 생각과 마음이 일본사람임을
여러분에게 확언합니다”(피오라, 317쪽).
어느 날, 기차에서, 그는 여느 때처럼 맛있게 “벤또”를 먹고 있었다. 옆에 있던 한 남자가
오랫동안 그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그가 다 먹고 나자 그에게 말했다: “신부님이 벤또를 먹
는 그 모습에서 신부님이 일본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피오라, 178쪽).
무종교인 사무국 사무차장인 일본인 살레시오 회원 요한 바티스타 시리에다 신부는 일본
문화에 대한 돈 치마티의 입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지 않고 그는 일본의 혼으로 육화할 줄을 알았다. 지금 많이들 말하는 토착화의 놀
라운 모범이다. 그러므로 그를, 입양된 땅에 두 번째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돈 치마티는 참으로 단연 비할 데 없는 토착화의 스승이요 진정한 선구자였다. 필자는 어
느 해인가 동경에서 주교와 수도자 장상들의 연례모임에 참석했을 때 “적응”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하도록 초청받았는데, 돈 치마티의 모범과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
도 말하지 않았고, 그 발언은 청중에게서 호감을 얻었었다.
이 동의는 돈 치마티가 일본 민족의 문화와 정신 안에 들어가 자리 잡기 위해 올바른 길을
선택했음을 명백히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지역문화에 “적응시키려는” 지속적이고 끈질긴 노력으로 그가 일
본에서 40년간 행한 사도직 활동은 바로 오늘날 시도하는 “토착화”에 다름 아니었다.
시복소송문서를 검토하고 연구했던 자문관들 중 한 사람도 역시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확
인하고 있다: “그의 선교활동은, 여러 관점에서, 특히 대화와 긴급한 토착화라는 방법으로
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앞서 가면서 오늘 날의 시대를 앞당겼다”(보고서, 167쪽).
또 다른 자문관은 돈 치마티를 “영웅적일 정도로까지 관대하고, 선교의 열성이 넘치고, 복
음화를 위한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의 표본인, 돈 보스코의 진정한 아들”(보고서, 65쪽)로 정
의한다.
“토착화”
“토착화”(inculturation)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밝혀 보기로 하자. 돈 치마티는 사도들로
부터 시작해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모든 선교사들이 풀어나가야 했
던 심층적인 문제에 대면했다. 즉 복음의 본질이 손상되는 일이 없이, 또 동시에 새로운 문
화들의 공헌으로 복음을 점점 더 활기차게 하면서 다른 문화들 안에 복음을 육화시키기 위
해, 새로운 백성에게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4.9 Page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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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는 이에 대한 노력을 “적응”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새로운
환경에 접목시키기 위해 그 환경의 문화가 지닌 건전한 가치를 고려하면서 복음을 문화에
적응시킨다는 것이다.
대략 30년쯤 전부터 “토착화”라는 말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이 문제를 현대의 사고방식에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 즉시 모든 것이 매끄럽게 되지는 않았다. 해석에 있어서 다
양한 어감들, 문화동화(acculturation), 문화 간 상호작용 (interculturation)과 같은 다
른 용어들이 제안됨으로써 어느 정도 혼란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그 심층적인 의미는 포착
할 수 있다. 토착화(문화화)는 “어떤 문화의 긍정적인 면, 즉 자연덕, 관습, 경신례의 표현,
기도 등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들을 살리면서 복음의 가치를 그 문화 안으로
침투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프리카 그리스도교, 인도 그리스도교, 일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에 팔레스티나 그리스도교, 그리스-로마 그리스도교가 있었듯이 말이다.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
들의 생활양식과 행동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
톨릭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2항
c). (국제 신학위원회 문헌 “신앙과 토착화”, 172쪽 참조) (편집자님, 이 문헌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면 한국어 번역서의 쪽수로 바꿔 주십시오.)
비오 12세: “여러 민족들의 문명과 제도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것들의 질과 최상의 선물
을 가꾸어나갈 필요가 있다”(같은 문헌, 175쪽).
바오로 6세: “복음이 현존하는 문화들의 혼을 꿰뚫을 수 있도록 문화와 인간적 지식... 들
을 활용해야 ...”(같은 문헌, 176쪽).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인 이브 꽁가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선교학
에 있어서 우리는 ‘적응’(adaptation)이라는 용어에서 ‘문화동화’(acculturation)로, 그러
니까 토착화(inculturation)로 건너왔다(그리고 그 용어들을 설명한다). ‘토착화는 그리스
도교가, 신앙이 어떤 특정한 문화세계에 밀알처럼 뿌려져서 거기에서 그 토양에 동질적인
경신례와 사회생활과 종교사상의 표현을 찾아낼 것을 요구한다. 이는 물론 몇 년 안에 해 낼
수 있는 쉬운 작업이 아니며, 어쩌면 여러 세기가 걸릴 수도 있다.’ 토착화의 임무를 수행하
는 사람들에게는 극도로 어려운 노력이 요구된다”(세상과 선교, 1996년 12월, 11-12쪽 참
조).
누가 토착화를 해야 하는가? 우선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교사이다. 선
교사는 그 메시지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로 선포해야 하고, 새로운 백성이 이
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해 내기 위해서 선교사는
자기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잘 알고, 가능한 한에서 그 메시지를 제시하는 대상자인 문화를
알아야 할 것이다.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서 새로운 지역교회가 태어나게 되면, 토착화의 과정을 계속
해 나가는 책임은 그 지역교회가 지게 될 것이다. 지역교회는 복음의 초월성을 잊지 않으면
서, 자기네 문화의 인간적 가치들을 고양시키도록 노력하면서 그 가치들을 그리스도교의
은사(恩賜)로써 완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생교회는 계시된 신앙의 진리와 지역
문화 안에 내재해 있는 인간적 에너지로 풍요로워지게 될 것이다. 근래에 홍콩에서 열린 강

4.10 Page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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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에서 라찡거 추기경은 “문화 간 상호작용”(interculturation)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
안했는데, 사실 두 문화가 함께 만날 때 서로를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종교간 “대화”라는 말도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만남을 촉진시키는 능력을 지닌 “마술적
인” 말로 소개되었다. 틀림없이 종교간 대화는 토착화 과정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어쨌건
간에, 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특히 상대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대화는 배워야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건설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공부와 시간
과 인내와 선의(善意)”가 필요하다.
“교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대화를 해야 한다”(바오로 6세). 이 분야의 전문가인 저
명한 인도 신학자 미카엘 아말라도스는 어떤 인터뷰에서 “오늘날에도 ‘토착화’라는 말에 혼
란이 있다”고 말했다.
삐에로 젯도 신부는 이렇게 경고한다: “전통문화의 ‘신화화(神話化)’에 주의해야 한다. 즉
모든 문화가 보존해야 할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또한 내버려야 할 반(反)가치들도 있으며,
하느님 말씀과의 만남에 의해 정화되고 인간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세상과 선교, 1997
년 10월, 61쪽).
살레시오회 총원장 후안 E. 베끼 신부는 근래에 어떤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복음을 토
착화(문화화)하는 것은 문화를 복음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신앙은 그것을 선포하는 이의 문
화라는 옷을 통해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떤 문화에서 모든 것이 복음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토착화는 복음이 어떤 인간집단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과정을 나타낼 뿐만이 아니
라,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온전한 회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인간에게서 출발하여 늘 인
간관계로 돌아가면서, 즉 인간들끼리, 그리고 인간들과 하느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면서, 깊
이깊이 자기 문화의 뿌리에까지 도달할 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복음화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표면에 칠을 하듯이 장식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다”(회의록, 362항, 1998년 1월,
19-21쪽).
살레시오회 선교담당 총평의원인 돈 루치아노 오도리꼬는 베뿌에 모인 선교사들에게 “토
착화는 엄청난 도전이자 은총의 신비”(1997년 9월 4일의 모임)라고 말했다.
자신이 받아들인 백성에 대한 깊은 존중과 참된 사랑을 간직하고 있던 돈 치마티는, 새 신
자들이 - 특히 사제들이 - 그 토착화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과 마음
의 재능을 다하여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토착화하려 노력했다. 그것은 “일본인들을 회개시
키는 것은 일본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곤 했다.
일본에서 선교와 살레시오 사업을 시작한 아홉 명
(원본 60쪽의 사진 삽입.)
일본에서 선교와 살레시오 사업을 시작한 아홉 명의 선교사들.
아랫줄 왼쪽부터: 돈 탕귀, 돈 치마티, 돈 피아첸자.
윗줄: 데 마티아 수사, 과스키노 수사, 돈 마르쟈리아, 돈 가볼리, 돈 리비아벨라, 멜리노 수사.
프랑스 국적인 돈 쟝 탕귀는 여러 해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의 살레시오 학교에서 일했다. 일본
에 도착했을 때 이미 45세였다. 즉시 일본어를 끈기있게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일 년 뒤에는 사도

5 Pages 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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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Page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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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의 일을 시작할 정도가 되었다. 수도생활과 살레시오 생활의 체험을 감안하여 돈 치마티는 그
에게 신학생 양성을 맡아 주도록 청했다. 미야자키의 첫 선교사그룹의 원장이었으며, 이어서 동
경의 철학신학원의 원장을 지냈다. 1938년에 총회의 일본관구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돈 치마티
를 동행하여 토리노에 갔다. 뒤이어 병이 들어 일본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1952년에 72세로 프
랑스에서 죽었다.
돈 안젤로 마르쟈리아는 그룹에서 가장 젊었다. 영리하고 활동적이었으며, 출판사도직에 열정
적으로 뛰어들어 돈 보스코 출판사를 설립하였다. 테너 가수로서 그 유명한 음악회들에 돈 치마
티를 동행하여 공연하였다. 새로운 일을 착수하는 데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두 개
의 큰 학교를 세웠는데, 동경의 “이쿠에이”와 오사카의 “세이코”였다. 그의 여러 형태의 활동은
그의 자전적 책인 “미사일 발사대와 벚꽃”에 잘 그려져 있다. 1978년 80세로 로마에서 죽었다.
음악으로 복음화하다
앞의 “간략히 살펴본 생애”에서 “하느님의 음유시인”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는 돈 치마티의
이름과 연관된 유명한 “음악회들”을 소개한 바 있다.
오늘날엔 어쩌면 전설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결과적으로는 복음화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 독특한 발상은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6년에 시작되었다.
그 해는 성 프란치스코 아씨지의 선종 700주년이 되는 해로서 가까운 가고시마 현에서 일하
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이를 합당하게 기념하기로 결정하였다. 미야자키에 도착한 새
로운 선교사들이 거의 모두가 이탈리아인들임을 알고 그들은 돈 치마티에게 선교적 목적으
로 기획되고 있던 축하행사에서 음악부분을 맡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다섯 번의 음악회로써 이 행사에 등장했다. 즉석에서 꾸려진 악단의 주
인공들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지휘를 하며 바리톤으로 노래하는 돈 치마티와 아름답고 우
렁찬 목소리의 테너로 노래하는 돈 마르쟈리아였다. 돈 치마티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
이, 평생 동안 음악과 노래를 가르쳤었고, 파르마의 음악원을 수료했었던 것이다.
가고시마(신자들이 200명밖에 안 되는 곳!)에서 거둔 성공은 그 어떤 예상도 뛰어넘는 것
이었고, 사도직의 새로운 수단을 발견한 기회이기도 했는데, 이 수단은 곧 이어서 열정과 희
생으로써 크게 활용될 것이었다. 돈 치마티 자신이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확인한다: “그 때
부터 이 수단을 선교적 포교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음악은 어디든지 들어가고 아
무도 음악에게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회는 그야말로 어디든지 들어갔다. 공공 회의장, 학교, 성당 등 어디든지! 그는
자선, 교육, 그리고 오락 ... 등을 명목으로 음악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그리
고 오로지 선교음악회였다!

5.2 Page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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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돈 리날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저는 동경에서부터 고베에
이르기까지 한 15일 정도에 걸친 일련의 음악회를 수락했는데, 이는 여러 신부들이 자신들
의 활동을 위해 청해온 것이었습니다.” “이 가장 힘든 시기(1932년)에 저는 30여회의 음악
회를 열었습니다. 만 오천 명의 사람들이 좋은 말을 들었지요.”
“저는 일련의 음악회를 위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 이 기회에도 역시 저희는 복음화활
동에 저희의 보잘 것 없는 공헌이나마 보탰습니다. ... 대략 만 명 정도가 선익을 좀 얻었지
요. 피곤하고, 돈도 없지만 만족스럽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선교단의 장상이자 그 자신
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선교사로서 바빴던 그에게는 이러한 음악회들은 커다란 노고를 치
르게 했으며, 그에게는 수익금이 돌아가지 않았다. 돈이 무척 필요했는데도.
프로그램은 늘 다양했으며, 청중의 필요에 따라 잘 짜이곤 했는데, 오페라의 부분들, 대중
가요들, 돈 치마티 자신이 만든 일본 노래들이었는데 이 노래들은 “청중을 넋을 잃게 만들
었다.” 기도가 빠지는 일이 없었는데, 그레고리오 성가, 유명작곡가들의 아베 마리아(성모
송), 일본어로 자신이 작곡한 아름다운 아베 마리아나 레지나 첼리(하늘의 모후여) ... 등이
었다. 음악을 즐기는 동안, 적절한 순간에 합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제공하는 종교적이거
나 도덕적인 짧은 이야기는 빠질 수 없는 것으로서 좋은 말씀을 씨 뿌리곤 했다.
이러한 음악회들의 두 번째 주역인 돈 마르쟈리아는 유쾌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우리에
게 선사해 주었다.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들 중에는 돈 치마티가 작곡한 일본 노
래들이 들어 있었다. ‘후지’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는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일본
을 대표하는 산을 기리는 노래였다. 그 가사의 마지막 부분은 아주 높은 음으로 올라가서 좀
머물면서 하얀 산꼭대기 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 때 돈 치마티는 일어서서 한
손으로는 계속 연주를 하면서 다른 한 손은 들어올려 산의 높이를 묘사하려는 듯이 검지손
가락을 높은 곳을 향해 빙빙 돌리곤 했다. 그 순간에 이르면 청중들은 벌떡 일어서서 열광적
으로 박수를 치곤 했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따온, ‘아띨라’와 로마의 장군 에찌오 사이의
유명한 이중창의 끝부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돈 치마티는 계속해서 노래하고
왼 손으로 연주하면서 일어서서 오른 손을 경쟁자인 에찌오에게 내밀었다. 이를 너무도 자
유분방하고 자연스럽게 해서 즉시 우레와 같은 박수와 많은 인기를 끌어냈다. 기자들은 항
상 음악가들을 가톨릭 선교사들로 소개할 기회를 포착하곤 했으며, 기사를 쓸 때 모두가 빠
져들었던 열정이 곧잘 그들에게 옮아가곤 했다.”
약 2,000여회에 이르는(정확한 횟수는 아무도 모른다) 이 특이한 음악회들은 모두 일본,
한국, 만주에서 전쟁이 터질 때까지 20년 동안 열렸는데, 긴 여운을 남겼으며, 시간이 지나
면서 무르익은 적지 않은 열매들을 남겼다. 어쩌면 이 창의적인 활동 때문에도 돈 치마티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선교사가 되었다.
오늘날, 그와 같은 음악회 건들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지만 돈 치마티가 적절한 순간을 간
파하고, 자기를 받아들인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관대하
게 내놓았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
그렇지만, 여기에서 치마티적 방식의 활동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로 여겨지는 한 가지 새로
운 활동을 덧붙이고 싶다. 모든 조건을 갖춘 젊은 평신도 여성이 이를 실현하고 있는데, 그

5.3 Page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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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동경의 “무사시노” 대학에서 음악과 성악을 전공하고 유럽에서 실력을 닦은 뒤 히로
시마의 예수회대학 음악과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공부하였다.
그 자매는 6년 전에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던 중에 이탈리아어도 더 배우고 싶어하였다.
교재로서 우리는 일본에서의 돈 치마티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책을 이용하였는
데, 돈 치마티의 음악활동은 그 자매를 매혹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 자매는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였는데, 바로 “돈 치마티처럼 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가 되자마자 그 자매는 그
아름다운 소프라노 목소리로 노래와 음악을 통하여 선교를 위한 일에 봉사하기 시작하였
다. 처음엔 본당의 전례활동에서, 그 다음에는 오이타, 나카쓰 등에서 열린 다양한 음악공
연 등에서 점점 더 자신의 활동반경을 넓혀가면서 봉사하였다.
그 자매는 자신을 도와 주는 친구들과 호의를 가진 사람들을 발견했는데(피아노, 플롯, 첼
로), 그렇게 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러 번의 음악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1997년 성탄절
때는 오이타의 주교좌성당에서, 그리고 이어서 쿠루메와 다른 지역들에서 음악회를 열어
갈채를 받았다. 그 자매의 공연목록은 언제나 단호하게 종교적인 것으로서 그레고리오 성
가가 많이 들어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필자에게 일본 사람들 중에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는데, 오래된 일본노래의 선율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돈 치마티 역시 일본어로 작곡할 때 이 “오래 된 선율”을 풍성하게 활용하였다. 일본제국 설
립 2,6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된 “소나타”가 라디오를 통하여 전국에 방송되어 성공
을 거둔 후에 그는 소박하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음악의 오래된 곡이나 최근의 곡에서 끌
어내어 이탈리아적 감정을 표현한 단순한 음악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 소프라노 자매의 노
래를 듣기 위해 모여드는 것에 놀라는 사람이 있다. 일본의 음악에 대해서 말하자면, 모든
취향의 음악이 다 있고 누구나 들을 수가 있다. 하지만 이 노래들은 신앙에서 솟아나오는 것
이고 듣는 이들의 마음에 직접 가 닿는 것이다!
그 자매와 그러한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필자는 그 자매의 열정이 한낱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알았다. 자신의 삶을 이 사도직에 헌신하는 데에 단호했다. 그 이름 또한 좋은 징표
이니, 바로 마리아 체칠리아이다.
성소를 위한 끈질긴 노력
발리냐노 신부, 만나 신부와의 조화 안에
돈 치마티에게 있어서는 선교활동의 시작부터 현지인 성소를 기르는 것은 그의 관심사 중
가장 끈질기게 마음을 차지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지극히 명료하였으니, “일
본인들을 회심시켜야 하는 것은 바로 일본인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확신은 그에 앞서

5.4 Page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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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의 유명한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신부가 지닌 확신이었는데, 그는 당시의 사고방식을
넘어서서, 그리고 성좌의 지침에 앞서서 천명하기를, “일본인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대해서
는 글과 신심을 교육받고 나면 수도자, 재속사제, 주교가 되기에 적절하게 되리라고 희망할
만하다. 이 일본교회를 외국에서 온 이방인들이 다스린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으며,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다스려야 한다”라고 했었다. 그는 일본의 어린 ‘사무라이’들을 위해
두 개의 신학교를 세우도록 자신의 선교사들에게 명했다.
돈 치마티는 “나는 불가항력적인 일본인 성직자의 필요성에 대해 발리냐노 신부와 같은 입
장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아마도 자신은 몰랐겠지만 그와 동시대사람인 다른 유명한 선교
사, 피메(P.I.M.E)의 당시 총원장 바올로 만나 신부(현재 가경자)와도 같은 입장이었다. 만
나 신부는 1929년 성좌로 보낸 “기밀” 문서에서 선교지에 지역교회를 형성하고 그리스도교
를 자기 나라에 육화하는 목적을 가진 현지인 성직자를 준비시킬 필요성과 그 긴급성을 옹
호했었다.
사실, 발리냐노 신부와 만나 신부는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오는 엄청난 난관과 위험을 모르
지 않았으며, 돈 치마티 역시 자신의 상황에서 “신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난관과 실패 앞에서 결코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 “우리는 교회
가 현지인 성직자들을 통해, 자신들의 신학교를 통해 활기차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일해야 한
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를 위한 어떤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아직 신학교다운 신학교를 세울 수도 없었던 상황에
서 1930년 그러한 목적으로 나카쓰의 선교사들 집에 최초로 여섯 명의 소년들을 받아들이
도록 했다.
선교사들에게 그는 지치지 않고 되풀이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착한 형제들이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써서 좋은 성소자들을 갖기 위해 일합시다. 이들 없이는 우리의 활동은 효과
없는 것이 되고 불구가 됩니다. ... 수고와 희생과 시간과 돈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이는 아
무도 면제되었다고 느낄 수 없는 절박한 필요입니다. ... 성소자들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추수밭 주인에게서 성소를 얻기 위해 기도하면서 성소자를 찾아내고 기르기 위해 노력하
고, 그들이 성숙해질 때까지 사랑으로 동반하도록 합시다.”
1933년 마침내 로마의 ‘현지인 성소를 위한 사도 성 베드로의 사업’으로부터 그가 신청했
던 후원금이 도착했다. 그는 즉시 미야자키 교외에 땅을 사서 신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직접
공사과정을 죽 지켜보았는데, 이는 그가 다른 어떤 일에서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10월 말에 지원자들을 위한 새 집이 완성되었다. 이층으로 된 널찍하고 편리한 아름다운
목조건물이었다. 돈 치마티는 기쁨에 넘쳤다. 이미 30여명이 된 지원자들을 나카쓰에서 데
려와서 11월 4일 신학교의 문을 열었다. 당시 신자수가 1,000명이 넘지 않았던 미야자키의
작은 독립 선교구는 드디어 자기네 신학교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소자들은 어디서 왔던 것일까?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가장 많았던 나가
사키 교구에서 왔다. 돈 치마티는 돈 리칼도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
은 옛 그리스도교인들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돈 보스코와 도미니코 사비오의 생애를 읽
었고, 살레시오 회원들에 대해, 즉 젊은이들을 좋아하고 노래하고 뛰어노는 ... 수도자들에
대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왔고 지금도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정
은 신앙에 있어서만 부요하였다. 신학교에서 지내기 위한 경비는 돈 치마티가 알아서 해결
했다. 그는 특별히 신학생들의 양성에 마음을 썼다.

5.5 Page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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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관심의 핵심”이었던 이 일에 돈 치마티는 여러 해 동안 자기가 가진 최고의 에너지를
바쳤다. 학업과정을 기획하고, 진지함, 가족정신, 명랑함 등 일본 사람들의 심리에 아주 가
까운 살레시오 스타일에 따라 환경을 조성하였다. 전 과정은 5년으로서, 공립학교의 모든
과목과 의무과정을 갖춤으로써, 당시의 중학교 과정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라틴어
와 종교과목이 추가되었다. 과정을 마치고 나면 동경의 대신학교에 들어가서 철학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교사들은 가톨릭 평신도들로서 돈 치마티는 자신의 모범과 조언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학생들과 교사들이 분리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가족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그
의 바람이었다. 학생들이 확신을 가지고 바라고 행동하도록 교육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수
업이 학생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끌어내지 못하면 아무 쓸 모가 없다고 자주 되풀이해서 말
하곤 했다.
학생들은 연 평균 40-45 명으로, 다섯 개 반으로 나뉘었다. 학교는 교과과정의 수준과 교
육적 유효성으로 도시에서 알려져 있었고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돈 치마티는 법적 명의상
책임자였고, 어떤 시기에는 실제로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전공한 자연과학을 가르
쳤고, 양성을 위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학교행사와 오락에 참석하였으며, 마치 신학생들을
자주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기라도 한 듯 그들과의 접촉을 계속적으로 유지하였다. 그의 일
본어에 능하지는 못하였지만, 마음으로부터 일본말을 했다. 학생들은 우리 젊은 신부들에
게, “신부님들이 일본말을 더 잘 하지만 우리는 돈 치마티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좋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 신학교는 선교사들의 마음을 위안과 희망으로 채워 주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신학
생들의 분주하고도 명랑한 생활을 묘사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이 생명의
활기 안에서 교구를 위해서나 우리 수도회를 위해서나 간에 최고로 우수한 성소들이 분명
해져 감을 보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필자는 돈 치마티의 주의 깊고 사랑에 찬 눈길 아래서 신학생들 사이에서 일했던 행운을
누렸던 2년을 마치 축제 분위기의 봄처럼 기억한다. 나는 그들의 임무를, 그리고 학업과 수
도생활과 운동과 미야자키에서 유명해진 악대(樂隊)와 연극, 학교 밖에서의 단체활동과 긴
도보여행 등에 있어서의 열정을 가까이서 함께 체험했다. 신학교 과정의 끝에 도달한 사람
들은 그와 같은 환경 안에서 성숙해져서 자유롭게 자신의 성소를 결정할 수 있었는데, 진지
함과 확신을 가지고 교구성소나 수도회 성소를 선택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1933년에 시작하여 1944년 전쟁으로 인해 폐쇄되고 이어서 파괴되기에 이르기까지 소신
학교는 지역교회에 어떤 열매를 가져다주었는가? 그 해에 17명의 학생들이 동경 대신학교
에 들어갔으며, 18명이 살레시오회 수련원에 들어갔다. 전쟁은 수많은 아름다운 희망의 싹
을 잘라 버렸다. 무기를 들도록 소집된 40명 가운데 열 명이 전쟁터에서 죽었으며, 약 20명
정도가 병이나 다른 이유로 가던 길을 버렸다. 신학교 생활 12년 만에 항구에 도달한 사람
들은 20명의 사제들이었는데, 교구사제단 소속이 9명, 살레시오회 수도사제 9명, 트라피스
트회 1명, 프란치스코회 사제 1명, 그리고 살레시오회 평수사 3명이었다. (이름과 임지를
포함한 이 자료는 1953년 6월 15일자로 로마 포교성성에 보낸 ‘미야자키 소신학교’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에서 따옴).
사제직의 목표에 도달한 최초의 일본인 사제는 베드로 무까이 신부였다. 그는 1939년 미
야자키 성당에서 서품되었는데, 돈 치마티는 그 날을 “선교단의 역사적인 날”이라고 불렀
다. 수많은 희생을 바친 후에 마침내 그는 자기 지목구의 첫 일본인 사제를 눈앞에 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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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것이다. 서품식 중에 그가 감동에 겨워 우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띄었으며, 예식의
마지막에는 새 사제 앞에서 흐느꼈고, 그의 축성된 손에 입을 맞추고는 그의 강복을 청하였
다.
마지막으로, 50년 전에는 성소문제에 대한 상황이 물론 오늘날보다는 더 유리했음을 주목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미야자키 신학교가 성공적이었다면, 그것은 무엇보
다도 탁월한 교육자로 인정받던 돈 치마티의 열성과 인품에 기인한 것이었다.
돈 보스코가 원했던 명랑한 선교사들
(원본 69쪽의 사진)
왼쪽부터: 루이지 과스키노 수사. 일본에서의 선교를 시작하는 데 공헌한 최초의 수사들 세 명
중 하나.
리비아 전쟁과 1914년의 전쟁에서 했던 7년간의 군대생활이 그의 수도성소를 확고하게 해 주
었고 헌신의 정신을 단련시켜 주었다.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책을 가지고 일본어를 공부해야 했
을 때 금방 피로를 느껴 돈 치마티에게 학교를 면제해 주도록 청했는데, “학교에 가나 안 가나 어
차피 일본어를 배우는 건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자유롭게 기회 있을 때마다 시장
사람들과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일 년 뒤에 그는 “미야자키 일본어”를 알
아들었고 말하게 되었다. 일을 시작할 때 책으로 공부를 했던 신부들은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통역으로 그에게 의지하곤 했다!
그는 또한 사진사 역할을 했고 타고난 주방관리자였다. 언제나 어떤 일을 위해 자신을 내놓았으
며 익살스럽고 유쾌했던 그를 모두가 좋아했다. 미야자키에서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선교단에 소중한 봉사를 제공했으며, 정겨운 추억을 남겼다.
오른 쪽에서 첫 번째는 돈 레오네 리비아벨라. 단순하고 열정에 찬 정신의 소유자이며, 지칠 줄
모르고 훌륭한 선교사로서 일했다. 또한 그는 “오라토리오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건 일
하도록 부름받은 곳에서 다른 일에 앞서 즐겨 신자, 비신자 소년들을 돌보았다.
그의 이름은 베뿌의 도움이신 마리아 성당 건축과 관련되어 있다. 돈 가볼리가 (구호원) 사업과
미야자키 까리따스 수녀회 일을 시작하는 것을 도왔다. 이에 필요한 헌금을 모으기 위해 이탈리
아를 돌았고, 편지들을 썼으며, 수많은 은인들을 찾아내어 그들과 평생 동안 우정 어린 관계를 보
존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돈 치마티 다음으로 가장 알려지고 가장 사랑받는 선교사였다.
86세까지 어린이의 마음과 정감어린 선교열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이탈리아로
부터 한 친구가 추도사를 보내면서 “한 전설이 죽었노라!”라고 썼다.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돈 리
비아벨라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 안에 살아 있다.
돈 가볼리와 돈 치마티에 대해서는 다음 장으로 넘긴다.

5.7 Page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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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로마냐인의 비교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 본당의 주임신부로 미야자키에 남아 있었던 돈 치마티는 자신의
일에 돈 가볼리를 관여시켰는데, 그는 어쩌면 선교단의 가장 힘든 요소였다.
둘 다 백 퍼센트 로마냐 사람이었지만 서로가 상대를 즉시 이해하지는 못했다. 돈 가볼리
는 강하고, 불같고, 폭발하기 쉬운 기질이었지만, 개방적이었고 진지했다. 또한 열성적이었
고 정신이 훌륭한 관리자였다. 돈 치마티는 이미 배에서부터 그를 고백사제로 선택했었다.
그들은 같은 기질을 공통으로 갖고 있었는데, 차이라면 돈 치마티는 그 기질을 제어하고
자신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던 반면, 돈 가볼리는 그 기질을 여전히 자연상태로 유지하고 있
었고 그 기질을 즐겨 만족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거쳐 온 양성 또한 소년시절부터 순
수하게 살레시오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돈 치마티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돈 가볼리는 리미니 교구 출신이었다. 성직자로서 군인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종사제였다. 그 다음에 살레시오 회원이 되었으며, 일본에 선교사로 가라는 초대를 받았
을 때 그는 페루지아의 수도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말하기를 “우리 원장은 돈 치
마티를 과학자요 음악가이며 뛰어난 교육자로, 게다가 로마냐인이기까지 하다고 추켜세우
며 크게 그를 칭송하였다. 나에게는 이 마지막 자질이 다른 모든 자질을 합한 것에 맞먹었
다. 나는 그를 키가 훤칠하고 홀쭉하고 힘차며 열렬한 성격으로 상상했었다. 그리고 그를 알
기 전부터 이미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첫 만남은 토리노에서 이루어졌다. 대단한 실망이었다. “사람 좋은 인상에 미소 짓는 작은
남자의 모습이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에게서 내가 상상했던 그 신체적 정신적 특징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받은 첫 인상은 아무리 해도 호의적인 편은 아니었다. 내가 그
저 단순한 ... 말하자면 별 볼일 없는 사람 하나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받은 그런 인상을 확인시켜 준 것은 배 위에서의 돈 치마티의 행동방식이었다. 그가
자기와 함께 선교지에 가고 있는 신부들 사이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았을 때 돈 가볼
리는 “얼어붙은 듯 경악”하였으며, 그 떠들썩한 오락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여행기간 내
내 따로 떨어져 지냈다.
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은 그들이 미야자키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한 때였다. 돈 치마
티가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모든 사람의 필요에 자기를 내어놓고 가장 비
천한 봉사를 했고, 음악으로 신자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들은 대부분이 나
가사키로부터 이주해 온, 단순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서 그토록 명랑하고 자기를 내어놓
는 선교사를 발견하고 아주 좋아하였다.
돈 가볼리는 토리노의 장상들에게 편지를 써서 불평하였는데, 돈 치마티가 너무나 사람이
좋기만 해서 위압할 줄도 모르고 명령을 내릴 줄도 모른다고, 또 오로지 양선하고 인내롭기
만 한 그의 통치방식에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내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충동적이고 완고한 기질에 붙들려 있었으며, 수도회 장상에 대해 권
위주의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어서 돈 치마티의 ‘양선의 통치’에 대해 아주 엄격하게 자기 의
견을 내세우곤 했으며, 그의 인내와 사랑의 덕을 힘들게 시험하곤 했다”(보고서, 112쪽).

5.8 Page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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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몰이해로 인해 돈 가볼리 자신이 괴로워했는데, 마음 깊은 데서는 자기 장상을 “존경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 치마티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늘 모든 사람에게 하는 것과 같
았다. 즉 다른 사람의 장점들을 들어높이고 불편한 관계의 탓을 자기가 둘러쓰는 것이다.
토리노의 장상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편지들 중에서 몇 줄을 따다가 보기로 한다. “돈
안토니오는 특히 젊은이들을 돌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 맞서 투쟁해야 할 일들이 있지
만 젊은이들이 그에게 보답합니다. 그는 신경질로 좀 힘들어하며 가끔 폭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 안토니오는 희생적인 사람이고, 때로는 약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성격이라는
껍질 속에는 사도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한 가지 제가 대단히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즉, 본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제가 가끔
참으로 거룩한 사람인 돈 가볼리의 폭발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돈 가볼리는 가끔 폭발하
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정합니다. 그 탓은 제가 명령함에 있어 확실하지 못하고,
제때에 바로잡아 주지 못한 데 있으며, 결국 미리 앞을 내다보고 대비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는 것을 말입니다... 그와 여러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서 저는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사랑하는 안토니오 신부님, 문제점은 맨 위 책임자에게 있지요, 즉 저에게 있어요. 저에게
애덕을 베풀어서 무슨 일에나 저를 좀 도와 주세요...’.
때로는 돈 안토니오의 지적이 옳습니다만, 제가 항상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
다... 그는 활동적이고, 열성적이며 많은 것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실현하고 싶어합
니다. 그것들을 실현하고자 하는 방식에 있어 물론 그는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협력해야
할 사람들에게 너무 신경쓰지 않고 그냥 밀고 나갑니다. 바로 이 점에서 종종 폭발하고 그
폭발로 인해 결국에 가서는 일을 처리해 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형제들과의 어려움
도 생겨났다.
가까이에서 돈 가볼리를 알았던 우리로서는 돈 치마티가 그에 대해 진단하는 바가 정직하
고 의심할 바 없이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돈 가볼리가 가진 특별한 어려움들과 선의를 고려해야 한다. 돈 리날
디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행으로 시작된 몸 상태의 불균형
이 불면증과 신경의 흥분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과적으로 언어공부에서는 진보가 미미했고
돈 치마티께는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되풀이 말하건대 저는 이곳에서 돈 치마티의 지도와
모범 아래서 좋은 일을 많이 이루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습니다.”
2년 뒤, 1928년 10월에 그는 평소의 솔직함으로 다시 이렇게 쓰기에 이른다: “총원장 신부
님께서는 제가 돈 치마티와 잘 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의 성격이 저에게 자주 애
덕에도 순종의 덕에도 반대되는 내면의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불편함 속
에 지낸 지가 벌써 3년입니다. 저는 그 동안 단호하게 쓰기를 미루어 왔는데, 돈 치마티의
심성의 양선함에서 오는 유익을 항상 높이 평가해 왔기 때문입니다.”
돈 보비오는 이렇게 말한다: “몬시뇰 치마티는 돈 가볼리를 그 이상이 있을 수 없는 사랑으
로, 영웅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그런 사랑으로 대했다.”
돈 가볼리는 그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토리노에서 쓴 편지들에서 그는 자
신의 성격이 “엄격하고 군대식”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어떤 편지의 말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저는 제 결점들과 저에게 언제나 심각하게 유감스러운 일들을 유발하는 이 성격, 혹
은 기질을 고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고자 합니다”(성덕의 상황, 제2권, 816쪽).
그의 노력과 돈 치마티의 양선함으로 결국은 두 사람의 다른 점들 모두가 해결될 것이었
다. 시복자문관 한 사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엄격함과 타협할 줄 모르는 외고집으로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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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돈 안토니오 가볼리는 하느님의 종(돈 치마티)이 형제들에게 보인 애덕에 대한 감동적인
증언 하나를 남겼다....” 그는 배 위에서의 돈 치마티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후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가 지닌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 형제의 마음을 알
아듣지 못했었다. 자기를 잊고 우리에게서 우울함을 멀리하기 위해서 우리를 즐거운 기분
으로 만들어 주고자 하던 그 마음을”(보고서, 18쪽).
또 다른 기회에 그는 자신의 다루기 힘든 거친 태도를 한탄하면서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
이다: “그 후 나는 그의 심성의 근본 성품을 이루는 요소의 하나를, 즉 끝없는 겸손과 양선을
조금씩 이해해 갔다”(같은 글, 26쪽).
뒤이어 그는 자신이 직접 돈 치마티의 입에서 들은 말의 진실도 또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과제를 맡길 때 나는 그 사람에게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그가 자신의 주도권
에 따라 일하도록 내버려둔다.”
돈 가볼리는 장상에게서 받은 신뢰와 주도권의 자유 덕분에, 일본에서 계속 일하면서, 일
본 수녀들의 수도회를 세우고 튼튼히 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리고 돈 치마
티의 신실한 숭배자가 되었으며, 1955년에 쓴 어느 글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였고,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면서 사랑하는 아버지의 침대 맡에서 우는 모습을 보였다.
미야자키의 작은 제비들
돈 보스코는 “회상”에서 자신의 첫 선교사들에게 특별히 “병자들, 어린아이들, 노인들, 가
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도록 당부했었다. 돈 치마티는 미야자키 본당에서 주임신부로서의
활동을 막 시작했을 때 자신을 둘러싼 가난한 주위환경에 처음 부딪치면서, 자신이 전하는
종교를 믿을 만한 방법으로 증거하기를 원한다면 애덕활동에 착수해야 함을 즉시 확신하게
되었다.
1928년 11월에 이미 그는 수첩에 이렇게 적고 있다: “연구할 일: 버림받은 노인이 몇 명 있
다... 구호원? 어디에? 그들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이를 자신의 보조자 돈 가볼리와
의논하고 그에게 이 애덕활동에 뛰어들도록 초대한다. 돈 가볼리는 본당에서 가장 열성적
인 아가씨들을 모아 도시 안과 주변에서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을 찾아가도록 촉
구한다. 이렇게 해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최초의 여성 빈첸시오회가 태어난다.
동시에 돈 치마티는 가까이 있는 구마모토 현의 히토요시에서 오래 전부터 나환자 요양소
를 열성껏 돌보고 있는 마리아의 프란치스코회 수녀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 수녀들은 마음
아픈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나환자들의 자녀들인 건강한 아이들을 누구에게 맡길
지 몰랐던 것이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나서 그 환경으로부터 그들을 떼어 놓아야 했기 때문
이다. 그는 수녀들의 제안을 자신의 살레시오 성소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초대로
알아듣는다.
1930년에 가장 도움이 필요한 최초의 노인들과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는 가정들에 맡겨졌
다. 그러나 본당의 주임신부가 된 돈 가볼리는 얼마 안 가서 전적으로 이들을 위한 집과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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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사람들을 마련할 필요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헌금을 구하고 시외의 조그만 땅
을 사서 시청에 계획서를 제출한다. 돈 치마티는 불꽃에 숨을 불어 타오르게 하고 “지칠 줄
모르는 돈 가볼리의” 활동을 후원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술술 풀려 간 것은 아니다. 승인을 얻기 위해 계획이 선교단 평의회에 제
출되었을 때 돈 가볼리는 열렬히 이 계획을 옹호하지만, 당연히 필요한 수단들이 부족함을
걱정하는 형제들을 설득시키지 못한다. 때는 1932년이었고 선교단은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돈 가볼리는, 그 자신이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인내심을 잃고, “일어나서 주먹
으로 책상을 세게 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가라앉은 분위기의 다른 사람들을 개의치 않
고 그대로 둔 채 버스를 잡아타고 나가 하루 종일 밖에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그는 전형적으로 로마냐적인 그 행위에 대해 여전히 “수치스럽게”
느꼈다. 하지만 그 주먹은 섭리적이었고 원하던 효과를 얻어 냈다. 평의원들은 그 일에 대해
다시 생각했고 찬성의 투표를 했으며, 돈 치마티는 1932년 10월에 새로운 사업의 건축을 개
시할 수 있었다.
노인들을 위한, 목조로 된 첫 번째 집은 두 달이 지나자 곧 완공되어 연말에 문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집이 그 뒤를 이었고, 사업은 급속히 발전해 갔다. 1934년 11
월에는 벌써 노인들과 아이들, 그리고 그들에게 종사하는 인원 75명을 수용했다. 이 사업체
가 확보한 인력은 빈첸시오회 아가씨들의 단체와 나이든 부인 몇이었는데, 이들은 일종의
평신도회 형태로 모인 사람들로서 감탄할 만한 관대함과 희생으로 일한다.
하지만 여기에 들어가는 경비가 계속해서 불어나고 빚도 늘어나서 돈 가볼리는 도움을 구
하러 이탈리아에 가기로 결정한다. 그 동안 돈 치마티는 그를 대신하여 사업을 지휘하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각별하게 돌본다. 그 아가씨들에게 더 많은 수도적 양성을 시키고
자 노력하며, 피정을 지도하고, 정기적으로 강의를 해 주는가 하면, 그들을 격려하고 열정
을 불어넣어 주는데, 그들 중에서 그는 마음의 눈으로 이미 자신이 오래 전부터 꿈꾸던 “미
래의 수녀들”을 본다.
그는 베뿌에서 시작된 새로운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에게 이 일을
의존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 일이 그들의 힘을 모조리 다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
교지에서 봉헌생활에 대한 현지인 성소를 장려하는 것이 성좌에서 바라는 바임을 알고, 이
러한 방향으로 움직여 가야 한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한다.
일 년 이상 자리를 비웠던 돈 가볼리가 1935년 4월에 돌아오자 돈 치마티는 이에 대해 그
에게 말한다. 수도회라는 것을 실현이 불가능한 계획으로 여겨 이에 대해 전혀 진지하게 생
각해 본 적이 없었던 돈 가볼리는 이 생각을 즉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이 협조자의
폭발적인 열정에 재갈을 물려 이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돈 치마티의 모든 인
내와 기지가 필요했다. 1937년 8월 28일 미야자키 선교단의 성당에서 돈 치마티는 일본 수
녀들의 새 수도회의 모퉁이돌이 될 다섯 명의 수련자들에게 수도복을 입힌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성좌의 승인으로 미야자키 지목구 안에 “미야자키 까리따스 수녀회”라
는 새로운 여자수도회가 세워졌으며, 이 수도회의 목적은 “노인들과 고아들, 버림받은 유아
들을 위한 자선기관에서와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그리고 방문과 재가(在家)환자 보살피기
와 모든 사회사업 안에서도, 육신적, 정신적 애덕사업을 통해 신앙을 전파하는 것”임을 커
다란 기쁨으로 일본의 전체 교구장들과 토리노의 장상들에게 알린다.

6 Pages 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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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Page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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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1938년 1월 31일, 돈 치마티는 돈 보스코 서거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형
제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무엇보다도 새로운 수도회를 암시하여 이렇게 말한다: “교황님은
그런 (수도회)설립을 원하시고 요구하시며, 우리는 교황님의 원의(願意)와 지침을 받아들
이는 데 앞장서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하늘로부터 돈 보스코께서 이를 즐
기시며 축복하실 것입니다.”
돈 보스코의 축복은 눈에 띄게 느껴진다. 그러나 즉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다섯 명의 첫 수
련자들 중 두 명만이 서원을 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들 중 하나는 수련기 중에 죽고 두 사
람은 건강의 부족 때문에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무시무시한 전쟁의 폭풍이 닥쳐와
서 이 새로운 수녀들을 지극히 힘겨운 생활로 몰아갔고 그들 중 여섯 명을 무덤으로 데려갔
다.... 하지만 전쟁의 폭풍이 지나자 “미야자키의 새끼제비들”은 - 제비들처럼 검은 수도복
에 하얀 두건을 썼기 때문에 돈 가볼리는 수녀들을 이렇게 불렀는데 - 점점 더 먼 목적지까
지 도달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문자 그대로 날아올랐다.
“이 수도회는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이탈리아, 브라질, 볼리비아와 페루, 호주, 파푸
아 뉴기니, 필리핀, 독일에서도 활기차게 발전하였다. 확장은 계속되고 있는데, 수도회는
1995년 현재 수녀가 900명 이상, 수련자가 80명에 이른다”(피오라, 197쪽).
돈 가볼리는 1955년에 총원장 돈 지죠티를 위해 작성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힌다: “방인
수도회인 까리따스 수녀회는 미야자키 선교단의 장상 돈 치마티의 의향과 위임으로 살레시
오 회원 돈 안토니오 가볼리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까리따스 수녀들은 돈 가볼리를 수도회설립자로, 즉 자기들을 위해, 수녀들을 양성하고 수
도생활과 선교의 열정으로 인도하기 위해 삶을 바친 사람으로 당연히 인정하고 있고, 돈 치
마티를 자기 수도회의 설립을 원했던, 그리고 첫 순간부터 예언자적 말씀과 끊임없는 기도
로 수도회를 축복하고 도와 주었고, 그 기적적 확장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기뻐하면
서 감탄하였던 좋은 아버지로 보고 공경하고 있다.
돈 치마티와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
돈 보스코는 성모님의 모성적 인도 아래 “젊은이들의 구원에 이바지하기 위해” 하느님께
서 일으키셨는데, 젊은이들이란 남성들만은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청소년들과 젊은이들로
시작하여, 이탈리아와 유럽에 오라토리오와 학교들을 세웠고, 자기 아들들을 선교지로 파
견했으며, 그의 사업은 전 세계로 확장되어 갔다.
하느님의 섭리가 그로 하여금 마리아 도미니카 마자렐로라는 젊은 여성 안에서 예정된 인
물을 만나게 해 주시자 돈 보스코는 곧 그와 함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 수도회를 설립하
였는데, 살레시오 회원들이 소년들 사이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여자들의 세계에서 그 수녀
들이 실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해서 살레시오 회원들과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들은 어디에서나, 일본에서도 역시 같은 카리스마로 나란히 일한다.

6.2 Page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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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치마티는 1929년에 총원장 마리아 루이사 바스케띠 수녀에게 그 수녀들을 청했었는데,
모든 살레시오 선교지에서 전통적으로 그러하듯이 미야자키 선교지에서 자신을 도와 주도
록 하기 위함이었다.
같은 해에 여섯 명이 도착했는데, 젊고 선교열로 가득 찬 수녀들이었다. 그들은 즉시 탁아
소와 젊은 여성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돈 치마티는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영적 원조를
제공하였다.
영리하고 활동적인 여성이었던 원장 레티찌아 벨리아띠 수녀는, 일의 분야가 너무 좁아서
수도회를 대도시로 진출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돈 치마티가 살레시오
회원들을 위해 생각했듯이.
미야자키에서의 체험 후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은 베뿌에 어린 여자아이들을 위한 사회
사업과 중고등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러니까, 작정하고 수도(⾸都)를 향해 갔던 것이다.
동경에서는 여러 개의 건물을 가진 넓은 토지를 아카바네 구역에 있는 근사한 위치에 구입
하였는데, 이는 그들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세이비 가꾸엥”은 사회사업, 탁아소에서
단대(單⼤, 2년제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학교들, 지원자들과 수련자들을 위한 양성의
집과 관구관을 갖추고 그들의 요새가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동경 및 후지 산 기슭의 야마나카 (사회사업, 모임과 피정을 위한 집), 시즈
오카와 오사카 (큰 중고등학교들), 나가사키 (두 개의 사업체)... 등 다른 도시들에서의 확장
은 계속되고, 한국에서도 다섯 곳에 자리 잡는다. 오늘날 일본에서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들은 290명으로 거의 모두가 일본인이고, 번영하고 있는 훌륭한 20여 개의 사업체에서 일
하고 있다.
1988년에 50주년을 기념하여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 수도회의 일본선교 50년의 발자
취”라는 근사한 기념책자를 출간하였다. 그 책을 훑어보노라면 놀라고 감탄하게 된다. 그들
은 돈 보스코와 마리아 도미니카 마자렐로의 카리스마를 본보기로 삼아 헌신적으로 일한
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돈 치마티의 모범을 따라 영적 원조를 제공하였다.
돈 치마티는 미야자키에서만이 아니라 그 후로도 어디에서나 계속하여 도움이신 마리아
의 딸들에게 강의와 피정으로 관대하게 영적 원조를 베풀었다. 그 자신이 쓰기를 “나는 그
들을 영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돕고 있다.”
관구장 마리아 삐에트로벨리 수녀는 이렇게 증언한다: “수녀들에게 그분은 아버지였다,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는 그분의 현존으로 살아 갔다고 말할 수 있다.” 관구장이 더 이상 아
니었을 때도 계속해서 그랬다. 1951년 여름 돈 치마티는 온화하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
카바네에,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들한테 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모두 말 못하는 수녀들
을 위해 (피정)강론을 하는 일을 조금 주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인데, 네 번의 강론이 더
남았지요. 데오 그라씨아스(하느님께 감사)!”(크레바코레 494쪽).
시모이구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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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치마티에게서는 성체성사와 성모님에 대해 깊은 신심이 빛나고 있었다는 것은 흔히들
말하는 바다. 그는 성모님을 “우리의 하늘엄마”라고 부르곤 했다. 동경에서 폭탄이 떨어질
때 그는 자기 신부들에게 “신뢰를 가지고, 걱정하지 마세요. 성모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것
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1944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축일에 돈 치마티는 이렇게 기록한다: “찬미 마리아! 2시
와 12시에 경보. 보잘 것 없는 저는 원죄가 없으시며 도움이신 마리아를 공경하기 위해 성
당을 하나 지을 것을 약속합니다.” 조건은 성모님이 형제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것이었
다(크레바코레, 443쪽).
폭풍은 많은 붕괴와 물질적 파괴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러나 희생자는 없었다. 돈 치마티
는 약속한 성당을 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도록 돈 몬테가짜에게 부탁했다. 동경 대주교 베
드로 도이 몬시뇰은 이 계획을 축복하고 자신이 첫 헌금을 내기를 원했고, 시모이구사 구역
을 본당으로 설정하여 신자들과 성당을 만들어 낼 책임과 함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맡겼
다.
그 힘든 전쟁 후의 시기에 돈 만테가짜는 성당을 짓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온 힘을 쏟
았고, 동시에, 본당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인접해 있는 “이꾸에이” 학교의 형제들의 원조
를 받아 그 지역의 복음화하는 작업에 열성을 다해 투신하였다.
시모이구사의 새 성당은,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성전으로, “아름답고 넓게 철근 콘
크리트로(��.��×��m)” 지어졌다. 신자들도 늘어나서 이미 상당한 집단을 이루었다.
장엄축복을 위해 돈 치마티는 “대단히 경건한 다성음악 미사곡 ‘마뗄 그라씨에(은총의 어
머니)’를 작곡하였는데, 이는 1956년 10월 21일의 장엄미사 중에, 그의 지휘로 조후 신학원
과 시모이구사 본당의 성가대에 의해 연주되었다”(델 꼴, 42쪽).
돈 치마티가 1965년 조후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대단히 장엄한 그의 장례미사는 바로 이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건축한 사람이자 본당의 주임사제였던 돈 만테가짜의 장례식도 마찬
가지로 1년 전에 여기서 거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커 보였던 시모이구사 성당은
신자들과 돈 치마티의 숭배자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은 성당이 되고 말았다.
살아 있는 동안 돈 만테가짜는 계속해서 성당을 보살피고 아름답게 꾸몄다. 이탈리아에 있
는 그의 관대한 은인들은 그에게 예술적인 장식 색유리와 근사한 오르간을 선물하였다. 그
는 성당을 다시 청소하고 외면도 새롭게 색칠을 했다.
영화업자들은 결혼식 촬영을 위해, 혹은 가톨릭교회의 상징으로 즐겨 이 성당을 선택하였
다. 동경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시모이구사는 오늘날 1,800명의
신자들을 가진 번영하는 본당이며, 성모신심이 대단히 깊다.
신자들은 성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성모님과 그 곁의 사
랑하시던 제자를 보고 당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
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서 성모님은 모든 신자들에게 어머니로 주어졌으며, 우리 각자는
요한처럼 그분을 기꺼이 자신의 집에 모셔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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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치마티는 우리가 열심히 일하기를 바랐다. 그는 엄청난 일꾼이었다. “살레시오 회원은
세 사람 몫의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이었고, 다른 이들도 결코 빈둥거리는 일 없이 부
지런히 일에 종사하면서, 손을 더럽히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을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도울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랐다. 그 자신이 그렇게 했듯이.
강도 높은 내적 작업에서 그가 요구하는 바를 우리는 앞에서 이미 보았다. 즉 하루하루를
성화하기,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최대의 열정으로 완전하게 하기 등. 그렇지만 그는 동요하
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기를”이 그가 자주 반복해서 말하던 원
칙이었으며, “흘러간 물은 더 이상 방아를 찧지 못 한다”, “앞일은 하느님의 손에” 등도 그랬
다. 요는, 무질서하거나 과도한 활동의 열병(“바쁘다!”)에 빠지지 않기, 악조건과 어려움과
실수에 방해받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며, 내적 고요를 보존하기, 과거 때문에 번민하지 말
고 할 만하다면 고백성사를 잘 보고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그 밖에 또 있다. “현재를 잘 해 나가도록 노력할 것, 이것만이 우리 손 안에 있다. 앞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 그분이 알아서 하시도록 두자.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도록 하자. 그
분은 좋으신 아버지이시니 모든 것을 우리의 선을 위해 배려하실 것이다. 받아들이고 협력
하는 마음자세를 유지하도록 하자.”
형제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는 또 자주 반복해서 “차분하게, 고요하게, 평온하게”라는 말
을 한꺼번에 말하곤 했다. 필자는 고백성사 중에도 이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그
렇게 해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주변에 성 바오로가 권고했던 그 기쁨(명랑함)을 유지하
였다. 더구나 그는 돈 보스코처럼 이를 모토로 정했고, 그래서 돈 치마티는 “기뻐하라!”고
줄기차게 반복하곤 했다.
그런데, 돈 치마티, 그 자신은 어떻게 행동했던가? 언제나처럼 이 점에 있어서도 자신의 모
범으로 다른 이들을 교화하고 기쁨을 전파시켰다. 그의 전기작가가 모은 수많은 증언들 중
몇 개만 보기로 하자.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기를, 이는 그의 얼굴과 언제나 변함없는 그의 미소에서 늘
투명하게 드러났다”(크레바코레, 135쪽).
“그의 특징적인 모습들: 변치 않는 고요함, 양선과 상냥함”(647쪽).
“그에게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와 함께 고요함과 매혹적인 평온이 있었는데, 좀 어려운 상
황일 때도 그랬다”(135쪽).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침착하고 격려하는 그의 눈길을 기억한다”(135쪽).
“그의 모습은 언제나 명랑했고 평온하고 양선하고 겸손하고 포용력이 있었다.”
“돈 치마티에 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그 변치 않는 평온함, 그리고 기쁨과 내적 평화를 드
러내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 얼굴이 기억난다”(135쪽).
그러니까, “힘든 상황에서도,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했다.
우리 자신들이 언제나 그의 그런 모습을 보아 왔다. 신학원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살던 동
경에서의 폭격 때도 그랬다. “그는 언제나 차분한 모습을 보였고 손에 묵주를 들고 모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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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에게 용기를 전파하였다.” “신뢰를 가지세요. 걱정 마세요. 성모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것
입니다”라고 되풀이하여 말했다.
돈 치마티가 “직책에 대한 고통스러운 과민반응” 때문에 얼마나 번민했는지를 우리는 아
직도 눈앞에 보는 듯하다. 그는 장상들과 포교성성에 여러 번 청원을 하고도 그 직책들에서
해방되지는 못했다. 이는 그의 당혹스러울 정도의 겸손에 기인한 내면의 드라마로서 우리
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언제나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평소의
유쾌한 기분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계속 지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돈 치마티의 전 생애를 따라다녔던 이 “어려움들”을 잘 안다. 그는 장상들에
게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는데, 그 장상들에게 내면사정을 털어놓는 편지에서 바로 그 자신
이 이 어려움들을 설명하고 있다!
장상들에게 규칙적으로 편지를 쓰면서 그는 내적 투쟁과 정신적 시련, 영의 건조함, 그가
그 예민한 감수성으로 나누었던 다른 이들의 고통들, 자신이 부딪치고 있는 경제적 난관으
로 인한 극심한 괴로움들을 드러내곤 했는데, 이 괴로움을 그의 전기작가는 “긴 순교”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와 자신의 곁에 가까이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짐작으로 조금 알았을 뿐인데, 바로 그가 언제나 유쾌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돈 보스코의 유명한 장미화원 꿈에서 돈 보스코는 지극히 충실한 제자들과 함께 화려한 장
미꽃들 가운데를 사뿐사뿐 뛰면서 걸어갔다. 그의 발과 손과 얼굴에서 피를 흘리게 하는 날
카로운 가시들은 보이지 않았고... 밖에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돈 보스
코를 좀 보세요. 언제나 즐겁고 장미꽃 사이로 나아가고 있잖아요. 그에게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니까요!”
돈 치마티에게도 그랬다. 평생 동안 그는 장미화원에서 걸었고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
다: “돈 치마티를 좀 봐. 언제나 즐거운 모습이야!” 우리는 그의 내면의 드라마를 깨닫지 못
하고 그에게 감탄하곤 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항구한 차분함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
지를 알았었다면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를 더욱 더 사랑했을 것이다.
깊은 신앙과 모든 사람들에게 지니고 있던 진실한 애덕이 그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는 노
래하고, 연주하고, 젊은이들의 떠들썩한 즐거움에 참여하기를 좋아했는데, 그들이 마음 속
에 기쁨을 가지고 사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유형의 사람을 안심
시키기 위해 딱 맞는 말들을 알고 있었다. 걱정이 많고 좀 소심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하
곤 했다: “우리의 악함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조처에 달려 있지요.”
“일상의 영성”
돈 치마티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성 요한 보스코에 대한 학자였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천육백년대 유럽에서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성덕(性德)이라는 이상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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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쳤다. 단순한 신자들도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하느님께서 그들
을 위해 조처하시는 상황과 일들 안에서 자신을 성화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자신이 쓴
유명한 책들, “필로테아와 테오티모”에서 그 방식과 수단을 가르쳤는데, 이 책들은 아직도
신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돈 보스코는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사명으로 부름을 받고, 자신의 인도자요 보호자는 성 프
란치스코 살레시오일 수밖에 없음을 직감한다. 인내와 부드러움으로 양념된 그의 뛰어난
양선으로, 지혜롭고 기쁨에 찬 그의 인도로 돈 보스코는 아이들을 개구쟁이들까지도 “정직
한 시민이자 착한 그리스도교 신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일을 그는 자신이 “예방교육”이라고 불렀던 교육방식을 통해, 이성, 종교, 자애(아모레
볼레짜)라는 세 기둥에 기초한 그 방식을 통해 성공적으로 해 냈다.
돈 치마티는 두 성인의 정신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고, 이를 연구했으며, 이를 교육자요 영
적 지도자로서의 삶 안에 육화시켜 살아 갔고 실천하였다.
그는 “일상의 영성”을 강조하였다. 착하게 되고 또한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매일의 자기
의무를 완전함과 열성, 평온함과 기쁨으로 다하기만 하면 되었다. 선의와, 그리스도인으로
서의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
순하고 쉬운 방법이었다.
돈 보스코는 자기 소년들 사이에 열성적인 영적 분위기를 일으키는 데, 그리고 그들 중에
도미니코 사비오 같은 아이들 몇을 성덕의 길로 인도하는 데 성공했다.
돈 치마티는 돈 보스코의 본을 따랐다. 그도 역시 발살리체와 일본에서 자기 주위에 노력
과 열성적인 분위기를 만들 줄을 알았었는데, 그 분위기는 그가 스스로 살고 또 자신의 모범
과 끊임없는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자 애썼던 것이 반사되어 형성된 것이
었다.
그는 정말 훌륭한 방식으로, 또한 단호하게 자극하고 격려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주님
께서는 우리에게서 우리의 모든 의무의 수행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의무들을 평온하
게 해 나갑시다. 선의를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 의무를 매일매일 수행하도록 합시다.” 주목
할 것: 의무, 모든 의무, 작은 의무들, 일상의 의무! (피오라, 206-207쪽).
조후의 신학원에서 신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쳤고 돈 치마티가 원장을 하던 9년 내내 그
곁에서 살았던 까를로 깐또네 교수신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 저녁 돈 치마티는 주일
의 공부 때 살레시오적 수덕의 본질을 다음의 공식으로 결정적으로 표현하였다: ‘커다란 것
들이 아닙니다! 작은 길이에요. 즉 날마다 자신의 의무를 단순하게 실행하는 것, 그리고 그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단지, 오늘 저녁 나는 돈 치마티가 이 단순한 표현으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존재는 ‘명백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에서, 극히 작은 행동에서
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표현되는 충실성, 확고한 의로움’ 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
다.”
그의 곁에서 살았던 권위있는 다른 증인들의 말을 들어 보자.
“몬시뇰 치마티에게서 대단히 인상적인 것은 일상의 의무에 대한 항구한 충실성이었
다”(돈 수칸, 296쪽).
“그의 성덕은 겁을 주지 않는 것이었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모방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성
덕이었다”(돈 크레바코레,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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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워 보이고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성덕이었다”(돈 페드리고
띠, 440쪽).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길을 쉽고 매혹적인 것이 되게 하는 것이 돈 치마티가 겨냥하는 바였
다. 하지만 그가 평범한 선에 만족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는 요구하는 바가
만만치 않았는데,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서 높은 곳을 바라보도록, 그리하여 늘 자기 자신
을 향상시키도록 계속 촉구했다. 그는 “앞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조금 더
하라”고, 자신의 최대치를 행하라고 말하곤 했다.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던 “모든 힘을 다하
는 노력”을 다른 이들에게 제안했다.
열정이 없고 기진맥진한 상태임을 털어놓는 사람에게 그는 힘주어 말했다: “하느님의 손
안에 뛰어들게나. 온전히 그분의 뜻 안에 자네 자신을 내어맡기라구.”
필자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어느 날 저녁 오이타의 오래 된 작은 성당 좁은 제의방에서였
다. 방금 예절이 끝났고 제의방에는 우리 둘만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 성당에서 주님께 대한
어떤 특별한 끌림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그분의 현존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을 체험했노
라고 고백했다. 그는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더니 열정적으로 말했다: “예수님 품 안에 뛰
어들게나....” 나는 용기가 없었다. 하늘로 도약하기보다는 계속해서 땅에 주저앉아 흐트러
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패배의 생생한 기억은 계속해서 나에게 선익을 주었다.
가경자 돈 치마티와 아기예수의 작은 데레사 성녀
두 영성, 즉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에서 출발하여 돈 보스코와 돈
치마티에게 도달한 살레시오 영성과, 리쥬의 작은 가르멜 수녀에 의해 내적으로 동화되기
에 이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멜 영성. 리쥬의 성녀 데레사의
글과 돈 치마티의 글을 읽노라면 이 두 영성이 독창적인 유사성으로 함께 만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가장 흥미롭게 여겨지는 네 가지 점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성녀 데레사는 1873년에 태어났고 돈 치마티는1879년에 태어났다. 그러니, 동시대인인
것이다. 성소가 다르고 삶의 환경이 다르지만, 내적 열망에 있어서는 대단히 비슷했다. 살
레시오 회원이요, 교육자이며, 선교사였던 돈 치마티는 86세까지 살았다. 가르멜 회원인 성
녀 데레사는 9년 동안 가르멜에 갇혀 살고 24세에 죽었다.
1. 겸손이라는 그리스도교적 덕은 돈 치마티에게 있어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자신에 대
해, 아무 것에도 유익할 것이 없는, 쓸모없는 사제, “무”(십자가의 성 요한의 “무”), 전체의
일에서 잘 되어 가지 못하는 모든 것의 원인... 등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필자가 이탈리아의 모데나에 있었을 때 주일미사를 거행하도록 초대를 받고 강론에서 돈
치마티의 겸손에 대한 예를 들었다. 제의방으로 돌아와 제의를 벗고 있을 때 어떤 노부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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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들어와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그 돈 치마티의 겸손에 동의
하지 않아요.” 필자는 즉시 그 부인에게 답했다: “저도 그래요!”
그 부인은 그만 말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성당 안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필
자가 그다지 자상하지는 못했던 것 같지만, 그 말은 진실이었다. 필자는 돈 치마티의 겸손에
감탄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성녀 데레사는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관한 것에 대해 항상 “작은, 지극히 작은”이라
는 형용사를 썼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작은 무(無), 그 이상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
다. 그가 행하고 가르친 “교의” 역시 “작은 길” 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성령의 도움으로 성녀는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1코린 2,10) 잘 알 수 있
게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는 원장수녀에게 “제가 잘 죽도록 준비시켜 주
세요”라고 말했다.
원장은 그에 답하여 말하기를, 그가 늘 겸손을 이해하고 실천했으니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노라고 했다. 성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겸손하게 이렇게 말했다: “예, 저는 진리 외에는 추
구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요, 알았어요. 마음의 겸손... 저는 겸손한 것 같습니
다”(전집, 1121쪽).
그 성녀 덕분에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겸손을 조금 더 이해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실
제로 겸손은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한계가 없는 덕이긴 하지만 말이다.
2.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가르친 작은 길은 단순하고 견고한 영성으로서 모든 사람들
이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성녀 자신이 이를 설명한다: “이는 영적 어린이의 길이요, 신뢰
와 온전한 위탁의 길이다.”
“... 완덕은 쉬운 것 같다. 즉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어리아이처럼 좋으신 하느
님의 품에 내어맡기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완덕은 그분의 뜻을 행하는 데에, 즉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되는 데 있다.”
“커다란 성인들의 길은 놔두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그
분의 손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작은 길’로 예수님을 따르자.”
성녀 데레사가 가르치는 이 인간적 차원의 성덕은 프랑스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얀
센주의의 엄격한 정신에 대한 섭리적 대응이었다.
성녀가 죽은 다음해, “어떤 영혼의 이야기”라는 유명한 책에서 그의 삶과 가르침이 공개되
었을 때, 그것은 하나의 계시였고, 리쥬의 작은 데레사는 자신의 그 작은 길로 교회 안에 아
직까지도 지속되는 새로운 영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급속히 전 세계에서 현대의 가
장 알려지고 사랑받는 성녀가 되었다. “작고” 단순한 영혼들에게 제시된 성녀의 “작은 가르
침은” 교황들과 신학자들, 지성계의 인물들, 모든 문화와 모든 사회의 각계각층의 남녀인간
들을 끌어들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녀에게 “교회박사”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교육자요 젊은이들의 영적 인도자였던 돈 치마티는 “일상의 영성”을 강조하면서, 앞에서
보았듯이, 그도 역시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도달하기 위한 쉬운 길을 제시한다. “착하게 되
고 거룩하게 되려면 매일의 의무를 완전함과 열성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선의와, 그
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하고 쉬운 방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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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것들이 아닙니다! 작은 길이에요. 즉 날마다 자신의 의무를 단순하게 실행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말, ‘해야 하니까 하라’이지요!” (데
레사: “... 가장 작은 모든 것들을 활용하기,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을 위해서 하기!...”).
돈 보스코 역시, 자기 젊은이들에게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밝게 살기 위해서 잘 행해진 고
백성사와 잦은 영성체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면서, 삐에몬테 지방까지 스며들었
던 얀센주의의 엄격주의에 대항했었다. 도미니코 사비오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
다: “우리는 이곳에서 아주 즐겁게 지냄으로써 성덕을 닦도록 하자.”
돈 치마티는 돈 보스코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사람들 안에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
기를”이라는 가르침과 신뢰, 그리고 우리를 도와 주시는 좋으신 하느님의 손에 내어맡기는
위탁의 정신을 불어넣고 있었다.
3. 선교적 특성. “예수님, 저는 커다란 일을 하기에는 너무 작습니다”라고 말했던 성녀 데
레사는 실제로는 자신 안에 “엄청난 소망들”을 가지고 있었다. “저는 전사(戰⼠), 사제, 사
도, 박사, 순교자의 부르심을 느낍니다.” “저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당신의 이름을 선포
하고, 신앙이 없는 나라에 당신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세우고 싶습니다!.”
“땅 위의 모든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연옥의 모든 영혼들을 구하고 싶습니다!.” “선교사이
고 싶습니다....”
성녀는 불안정한 건강 때문에 선교지에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성소를 즉 ‘사랑’을
발견했다! 그렇게 계속적인 기도와, “순수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바쳐진 희생을 통해 온 세
상 영혼들을 구원하는 데 자신의 삶을 봉헌하였으며, 어떤 공덕도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았
다. 교회는 성녀에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처럼 선교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돈 치마티는 이탈리아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았지만, 그의 소원은 선교사로 가는 것, “할 수
만 있다면 가장 가난한 선교지로” 가는 것이었고 그것을 25년 동안 장상들에게 청했던 것이
다! 작은 데레사를 “자신의 교황직의 별로” 간주했던 비오 9세에 의해 그가 “성녀”로 선포되
던 해인 1925년에 마침내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에는 그들의 작은 성녀를 열광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있어서 성녀에 대한 신심을 전
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돈 치마티는 성녀를 가까이서 알게 되었고, 자신과 성녀를 연결하는
내적 유사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돈 치마티에게는 선교사로 갔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일로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려고 생각
하지 마세요. 오히려 기도와 신앙의 정신과 극기의 정신으로 여러분은 더 많이 해 낼 것입니
다.” 그보다 더 뒤에 몇 년간의 선교체험을 한 후에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을 회심시키기
위해서는 무릎이 필요합니다. 즉 많은 기도와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피오라, 128
쪽).
성녀 데레사:“오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일을 필요로 하시지 않고, 다만 저희의 사랑을 필
요로 하십니다”, 즉 일, 사도직 활동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을 들어올렸고 또 들어올리는 지렛대”이다(같은 책, 278쪽).
4. 순교에의 갈망. “순교: 내 젊음의 꿈이여! 가르멜의 뜰 안에서 나와 함께 자라난 꿈.”
“당신을 위해서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흘리고 싶습니다.” “‘한’ 종류의 순교만이 아니
라... 제가 만족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순교가 필요할 것입니다.”

6.10 Page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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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는 인도차이나, 사이공, 하노이, 혹은 통킹의 가르멜 중 하나로 이동되기를 열렬히 원
했는데, 그에 따르면, 거기에서는 순교로 죽을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1930년에 돈 치마티는 최초의 신학생 그룹을 데리고 막 일본으로 돌아왔었다. 2월 말에 중
국에서 우리의 두 형제, 선교지의 주교인 몬시뇰 베르실리아와 젊은 신부 카라바리오가 살
해당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 신학생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돈 치마티
는 잠시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더니, 갑자기 “그들은 복되도다!”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1983년 5월 15일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들이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데 대해 교회의 이름
으로 그들을 “복자(복된 자)”로 선포하였다. 돈 치마티는 그들을 복되다고 말함으로써 본능
적으로 자신의 깊은 갈망을 드러냈던 것이다!
***
돈 치마티가 자주 반복하여 가르치던 표어는 “흘러간 물은 더 이상 방아를 찧지 못한다. 앞
날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고 오로지 현재의 순간만이 너의 것이다. 현재의 순간을 잘 이용하
라!”였다.
이 점에 있어서도 작은 데레사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동의하였다. 살아 있는 동안 성녀
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께 바쳐
진 성녀의 고통은 그가 즐겨 선택하는 기쁨이었다.
병중에 보낸 생애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이 고통은 절정에 달하였다. 온 몸에 느끼는 극심한
통증과 정신의 고통스러운 시련으로 시달렸으며, 종종 이렇게 신음하였다: “힘들다, 무척
힘들구나.”
간호하던 자매수녀들은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 방식을 설명하면
서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바로 데레사였다: “과거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앞날을 고통스
러워하는 사람들처럼 고통받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현재의 순간에만 고통받는 거예요.” 그
렇게 하는 것은 별 대단한 것이 아니지요.
참고: 인용부호 안에 들어 있는 성녀 데레사의 모든 말은 “전집”, 바티칸 출판사, 로마
1997에서 인용하였다. 1992년에 프랑스에서 출판된 “백주년의 평전” 축소판이다.
그는 파산하지 않았다
“선교지에서 잘 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책은 두 권이다. 기도서와 수표책.” 아시아의 어떤
선교사 주교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일견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돈 치마티는 어땠을까?
그가 우선시하는 것은 단연 첫 번째 책이었다. 자기 선교사들에게 자주 이렇게 반복하여 말
하곤 했다: “더 필요한 것, 그것은 기도, 일에서의 끈기, 관대한 인내, 그리고 삶의 성성(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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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Page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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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입니다.” 그는 수표책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은행통장도 갖고 있지 않았는데, 그의 주
머니가 항상 비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돈과 모든 인간적 수단들, 즉 아는 사람들, 특권들, 의지가 되는 것들, 의뢰할 만한 사람들
같은 수단들에 대해서 그는 결코 호감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필요성은
인정했고, 의무로, 원조를 구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였다. 열렬히 바라던 대로 복
음화를 위한 일에 더 전념하지 못함을 크게 애석해하면서 하긴 했지만.
그와 그의 선교사들에게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돈을 벌고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할
일”이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필요한 것들을 갖추는 일을 걱정하고 있어야 한다면 우리
는 선교일선에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예수께서는 “돈주머니 없이
내가 너희를 보냈을 때 부족한 것이 있었더냐?” 하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돈 치마티에게도 구체적 현실은 그와는 꽤나 다른 방식으로 덮쳐왔고
그는 혹독했던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살아 가기 위해, 그리고 필요한 사업을 하기
위해 분주히 애쓸 필요가 있었다. 그는 돈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있는 이들을
기꺼이 칭찬했으며, 또한 돈을 잘 이용하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는 항상 자기 원칙에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필수불가결한 물질적 수단들이 부족하
여 극심한 비굴함을 당해야 했을 때도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결코 잃지 않았다.
1930년에 이미 총원장 돈 리날디에게 “저희는 지금 물이 목에까지 찼습니다(경제적 어려
움이 한계에 달하고 있다는 뜻)”라고 썼다. 2년 뒤에는 부총원장 돈 베루띠에게 이렇게 썼
다: “저희를 가장 낙담케 하는 문제는 제가 장상들에게 되풀이해서 설명해 드린 일련의 상
황으로 인해 저희에게 덮쳐온 재정상태입니다.”
모든 방법을 다해 원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해서 토리노의 장상들에게 간청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그들 역시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휘말려 있었다. 은인들에게 편지를 쓰
고 또 썼으며,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절약했고 형제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청했다... 심지
어는 “나 자신이라도 팔고 싶지만, 난 한 푼어치도 값이 안 되니 아무도 나를 사려고 하지 않
겠지” 하고 말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경제적 위기는 계속되어 60년대에 세계적 위기가 이미 극복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
였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나에게는 사도직의 일이 언제나 편지를 쓰고, 요청을 하고, 빚을
얻고, 빚을 갚고, 이런 처지에서 비하를 겪는 일이다... 다른 일들을 했다고 말할 수가 없
다... 하기사, ... 수업을 하고 음악회에서 우스꽝스런 짓을 하긴 했지... 훌륭해!.”
사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선교사들을 방문했을 뿐 아니라 어려움과 불편이 더 큰 곳에서
는 자신이 그들을 대신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일차적인 일을, 즉 사도직의 일에 소홀하지 않
은 것은 물론이다.
1936년에 선교단 진출 10주년에 유럽에서, “하느님의 선물”로, 상당한 수로 이루어진 한
무리의 새 형제들이 도착했는데, 사제가 4명, 수사가 3명, 서원한 신학생이 3명이었고, 그
외에도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수련기를 시작할 편입생이 6명이었다.
11월 22일 저녁에 고베에 도착했으나, 너무 늦은 시각이어서 즉시 하선할 수가 없었다. 미
야자키에서 그들을 맞으러 갔던 돈 치마티는 배에 올라갈 수가 있었고 늘 하던 대로 모든 이
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였다. 그 날은 음악의 수호자인 성녀 체칠리아 축일이었는
데, 돈 치마티는 피아노 앞에 앉아, 젊은이 같은 활달함으로, 잘 알려진 노래들을, 진지한 노
래들과 명랑한 노래들을 연주했고, 다른 이들은 모두 그를 둘러싸고, 그의 살레시오적인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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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움에 전염되어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마치 새로 도착한 이들이 그에게 새로운 심각
한 경제적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것처럼.
사실, 새로 도착한 인원은 물론 하느님과 장상들의 반가운 선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새로이
지게 된 하나의 무거운 십자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아직 사도직을 하기에 적절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을 부양해야 했던 것이다. 며칠 후 12월 초에 그는 토리노의 장상들에게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적인 면에서 저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장상들이나 다른 사람들
이 저를 도와 주지 않는다면, 이제 이렇게 불어난 식구들을 데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
겠습니다!... 자녀다운 마음으로 즉각적인 도움을 간청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가 “모
든 것의 원인”이라고 스스로를 탓했다.
1937년 새해는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 시작되었다. 1월에 그는 이렇게 쓴다: "오늘 나는 매
월 내는 요금들을 지불했고 금고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앞으로 기나긴 7개월은 필요한 것
들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미칠 지경이지만 신
앙을 가지고 하느님의 도우심에 희망을 둡니다." 그런데 이 모든 궁핍의 상황에 대해 겉으로
는 아무 표시도 내비치지 않았으니! 그의 곁에서 가까이 사는 이에게 그는 전혀 신경쓰이게
하지 않는, 언제나 차분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쯤 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두 가지로 한정해서 생각해 보자. 그의 재정관
리의 미숙함에 대해 그가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는 것은 정말 사실이었는가? 돈이 없을 때
는 재정을 관리할 줄 알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또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돈 치마티는 도움
을 청합니다. 재정적인 처리나 거래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도적 청빈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간략히 살펴본 생애” 안에서 언급했던 이야기(??쪽 편집자님, 앞부분의 검은 옷
의 몬시뇰에서 마지막부분의 에피소드가 들어가는 페이지를 삽입해 주세요.)가 상황을 잘
보여 준다. 후쿠오카에서 몬시뇰 브레통을 만나면서 돈 치마티는 그에게 재물관리에 대해
좋은 규정을 좀 알려 주기를 청했다. “신부님은 어떻게 하시는데요?” “저요? 저는, 뭐, 기부
금 같은 게 도착하면 즉시 가장 급한 필요에 씁니다. 그렇게 해서 섭리는 저에게 또 기부금
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지요.” 그러자 그를 잘 알고, 존경하고 있던 브레통 주교는 웃으면
서 이렇게 말했다. “계속 그렇게 하시지요.”
돈 치마티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커다란 신뢰로 계속 그렇게 하였다. 그의 방식은 불가
능한 줄타기 곡예를 그에게 대가로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파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의
어린 자식들을 먹일 수 있었고, 선교활동에서 자신의 모토가 말하듯이 “언제나 앞으로 나아
가고, 언제나 더 잘” 해 나갈 수 있었으며, 1942년 지목구를 후임자에게 넘겨주었을 때 지목
구는 가난하기는 했지만 빚은 없었다. 더 뒤에 전쟁이 끝난 후 일을 위해 잘 준비된 무리 진
젊은 형제들과 신앙적으로 크게 발전한 사업들과 함께 관구를 첫 후임자에게 인계했을 때
관구도 역시 빚이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음에 틀림없을 혹독했던 전시(戰時)에 그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
길 수 있었다: “재정, 하느님 덕에, 양호한 상태. 부채(負債) 없음”(크레바코레, 427쪽). 더
구나 신학생들을 동경에서 피난시키기 위해 노지리의 호숫가에 넓은 땅을 가진 집을 살 수
도 있었다. 상하이에서 거액의 기부금을 받았던 것인데, 그는 그 출처를 결코 알지 못했다.
예수회 선교사 한 사람은 돈 치마티의 “풍부한 인품” 안에서 특히 “상당히 중요한 사업들
을 부족한 수단으로 시작하고 진척시켜 나가는 능력”에 감탄하였다.

7.3 Page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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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비결은 명백하다. 바로 돈 보스코 자신의 비결로, 섭리에 대한 끝없는 신앙인 것이
다.
(원본 96쪽의 사진 삽입)
돈 삐에트로 피아첸자 - 돈 치마티와 함께 일본에 도착했다. 발살리체에서 그의 제자였으며 그
에 대해 커다란 존경과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의 최초의 회계담당자였고 선교지에서 재정면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돈 치마티는 그를 크게 신뢰했으며, 동경에서 살레시
오 사업들을 시작하도록 그를 보냈다(미카와지마의 본당과 오라토리오). 돈 피아첸자가 과로와
병으로 쇠진해서 겨우 41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돈 치마티에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충격이
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커다란 신앙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 수도회와 특히 우리 일본 선교단은 그와 함께 모범적인 한 수도자, 하느님의 마음에 따른
한 사제, 아직도 많고 많은 선을 할 수 있었을 한 형제를 잃었다. 우리 사이에 그에 대한 기억이 축
복 속에 생생하게 남아, 그를 본받도록 하는 자극이 되고 수많은 선교 성소의 씨앗이 되기를. 주님
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를!”(전기적 기록).
영원히 일본에
선교지에서 거의 20년을 살고 나서 1949년에 나는 가족과 처음으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조국인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나는 이미 13년 전부터 사제였던 것이다! 그간의 수고에서 벗
어나 좀 쉰다는 핑계로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인사하러 돌아다녔다.
6월 말경에 토리노의 발도코에 가게 되었다. 성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 전야였다. 총원장인
돈 삐에트로 리칼도네에게 인사를 하고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의 이름으로 영명축일 축하인
사도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졌다.
총원장은 먼저 찬사의 말을 한 다음에 이렇게 시작했다: “여기 오기를 참 잘했네. 우리는
자네를 찾고 있었거든. 돈 치마티가 오래 전부터 관구장의 임무를 면해 달라고 간청을 해서
우리는 그의 청을 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네. 자네가 그를 대신해 줄 수 있겠지.”
나는 총원장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덧붙이는 설명들은 반론을 용납하지 않
았다. 충격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자마자 나는 그와 같은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
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들을 모두 들이대기 시작했다. 돈 리칼도네는 내가 말하도록 내버
려 두더니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지금까지 자네가 잘못한 것들이 있나?” “물론입니다.”
“마음 편히 갖게나, 앞으로도 자넨 잘못을 할 걸세.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게.”
나오면서 나는 당시 선교지 담당 총평의원이었던 돈 벨리도를 만났는데, 나는 도움을 얻고
자 그에게 매달렸다: “총원장 신부님이 저에게 너무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 “됐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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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말을 잘랐다. “총원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게나. 어떻게든 해 낼 걸세.” 불행히도
그도 역시 이 일의 책임자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나는 당시 부총원장이었던 돈 지죠티에게
도 접근할 수 있었으나 그도 역시 총원장과 한 편이었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했
다: “몬시뇰 치마티를 위해서는 그를 토리노로 오게 해서 여기에서 적당한 일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네....” 새로운 전투였다. “돈 치마티는 일본에 남아야 합니다. 그분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분을 빼 가신다면 어떻게 일본에서의 사업들이 계속될 수 있
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것이 돈 지죠티와의 두 번의 만남을 끝내는 마지막 말이었다.
안마당에서 대성당으로 연결하는 계단에서였다.
돈 리칼도네는 돈 치마티에게 관구장임무 면제의 소식을 자신이 개인적으로 전하고자 유
보하고 있었다. 전 수도회의 이름으로도, 그에게 마땅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편지는
1949년 10월 6일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문서들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제 제가 신부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것은 돈 타
씨나리가 신부님의 능력과 조언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기 위해 신부님이 일본에 남도록 우
리에게 부탁하고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이 이에 만족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청을 들
어 주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돈 벨리도와 이야기하십시오...” 돈 치마티는 이미 장상
들에게 자기는 돌아가거나 남는 데 대해서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썼었다. 돈 벨리노는 그
때 일본을 방문하고 있는 중이었다. 돈 치마티가 우리에게 다행스럽게도 일본에 남은 것은
그의 덕분이라고 믿는다.
얼마 후에 새 관구장이 그에게 말했다: “몬시뇰, 필요해지면 제가 몬시뇰께 가겠으니, 어
려움을 해결하도록 저를 도와 주세요...” 그는 즉시 말을 잘라 버렸다: “아뇨, 아뇨, 신부님
이 혼자서 해야 해요. 신부님은 할 수 있어요!.”
또 한 번의 찬물세례였다!
(원본 98쪽의 사진. 로사리오 기도하는 모습)
한 성인의 기도.
하지만 좋으신 아버지는 우리들 사이에 남아 있었고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마치 가장
어린 신학생처럼 겸손하게 온순하게 행동했으나, 그의 현존과 모범은 모두에게 격려가 되
었다. 사업들은 계속될 수 있었고 형제들은 열정을 가지고 일을 계속했다.
돈 치마티, 그도 역시 온전히 만족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일본의 흙”이 되기까지 영원히
일본에 남고 싶었던 비밀스러운 그의 갈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기를

7.5 Page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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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로 사비니, 파엔자의 어린이집 동창. 80세의 나이에도 아직 뚜렷하게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치마티는 키가 작았지. 착하고 훌륭한 아이였으며, 그 애와 함께 있으면 즐거웠
어.”
돈 페델리 지라우디, 중학교시절의 교사. “돈 치마티가 파엔자의 소년이었을 때 그는 모든
것에서 모델이었다. 학교에서는 항상 가장 우수했고, 품행이 극히 모범적이었으며, 음악에
뛰어났다.”
돈 떼로네, 토리노의 수련원에서 그의 조력자. “모든 분야에서, 모든 상황에서 앞선 이들
중에서도 앞선 존재였다. 모든 것에서 완전했다. (백 명이 넘었던) 그 많은 수의 수련자 그룹
에서 단연 최고의 수련자였다.”
돈 싼떼 가렐리, 철학자, 발살리체에서의 동료교사. “그는 교육학을 단지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실천하였다. 교사인 그와 함께라면, 비록 가장 진보가 느린 학생들이
라도 성공은 확실했다.”
“항상 감미롭고 매력적인 그의 음악적 천성은 결코 다하는 일이 없었다.” “예방교육법을
이용했는데, 권위를 순수한 형제애와 대단히 잘 조화시키면서 그것을 행했기 때문에 꾸지
람 하는 일이 없이 효과를 얻어 냈다.”
“이 모든 것은 돈 치마티가 단지 인격자요, 학식이 있고, 음악가이고, 살레시오 회원이고
사제였기 때문만이 아니었고, 그를 아는 사람들의 판단에 의하면, 그가 또한, 그리고 무엇
보다도, 바로 성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날의 성인, 대화의 성인, 상냥하고 열려 있고 이해심 있는 성인. 세상에 주님의
빛과 힘과 기쁨을 가져다주기 위해 그가 항상 지극히 순수한 호감을 지닌 미소로 바라보았
던 세상과의 대화. 우리 주님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계속적인 자기지배 안에서 실현되
는 희생정신으로 이루어진 성덕.”
돈 가로: “그의 정신적 위대함은 아무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 그 차분한, 거의 천진난만한
겸손에 가려져 있었다.”
돈 레나또 지죠티, 발살리체에서의 그의 제자, 후에 총원장이 됨: “완전한 살레시오인, 우
리의 교육사명을 위한 기본적인 덕들의 ‘마에스트로(스승)’ - 명칭과 사실로써 스승 - 이다.
나에게 있어 몬시뇰 치마티는, 신심에서, 능력에서, 형제적 부성적 정신에서, 영혼들을 사
로잡는 기술에서, 내가 알아 온 가장 완전한 살레시오인이요, 성 요한 보스코의 참된 복사판
이다”(보고서, 125쪽).
몬시뇰 바올로 마렐라, 동경의 교황사절, 후에 추기경이 됨. 1937년에 포교성성 장관 푸마
소니 비온디 추기경에게 이렇게 썼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성인시하는 것은 저의 습관이
아닙니다만, 돈 치마티 - 모두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데 - 에 대해서는 주저치 않고 그가 하느
님의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음악가, 문필가, 과학자의 재능에다, 고귀한 마음, 지칠 줄
모르는 열성, 자신을 완전히 잊어 버리기까지에 이르는 희생정신을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명랑하고, 즐겨 남을 돕고, 굉장히 호감을 주는 성격입니다. 즉 농담을 할 줄 알고 농담을
받아 낼 줄도 알며, 명예를 몹시 싫어하면서, 항상 말과 실제로서 거룩한 단순함과 깊은 겸
손을 보여 줍니다. 일본에 살레시오 회원들을 들어오게 한 것과 그들이 높이 평가받고 사랑
받게 한 공덕은 그에게 있습니다”(보고서, 125쪽).
몬시뇰 M. 쟈르디니, 선교단이 독립되었을 때 부성적 애정을 가지고 살레시오 회원들의
일의 시작을 동반해 주었던 교황사절. 돈 치마티에 대해 이렇게 썼다: “놀라운 활동력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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녔습니다. 창의적 주도력이 풍부하고 신중함과 기지를 가지고 이를 행사하면서, 또 동시에
용기라고 할 만한 어떤 대담성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올바른 신뢰가 부족하지도 않습니
다”(보고서, 19쪽).
동경 대주교, 삐에트로 도이 추기경: “나에게는 그는 고전적인 살레시오 회원이었다. 즉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양선함과 온유함을 지니고 있었다. 돈 보스코를 본받아 명랑하
고 낙관적이었으며, 행동에 있어 단순하고, 열려 있었다. 그에게서 비록 지극히 적은 것이
라도 비호의적인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없다.”
뻬드로 아루뻬 신부. 여러 해 동안 일본에서의 선교사였으며, 후에 예수회 총원장이 됨:
“나는 언제나 그의 커다란 애덕과 사랑스러운 상냥함과 사도적 열성에 감탄하였다. 그의 영
혼의 위대한 고결함은 그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을 커다란 존중과 애정으로 대하게 해 주었
다. 해가 가면서, 그리고 주변의 상황이 바뀌면서 그의 이러한 덕들이 점점 더 증가해 가면
서 모든 사람들에게 뛰어난 표양을 제공하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의 위로였다. 돈 치마티는,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이들과의 형제적 협력 안에서, 사랑하는 일본 백성들과 전적으로 자
신을 동일시했던 그 사랑으로 인해, 모든 선교사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할 수 있는 인물이라
고 생각한다”(크레바코레, 347쪽).
후쿠오카의 주교, 몬시뇰 도미니코 후카호리: “사도적 활동에서 그는 대단히 열성적이었
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싹싹했다. 이러한 그의 방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에
게로 끌어당겼다”(같은 책, 137쪽).
교리교사 나카하마 마쓰케: “커다란 신중함과 참으로 노련한 체험을 지닌, 그야말로 완전
한 사람이었다. 마치 좋은 아버지에게 하듯이 누구나 그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말할 수 있었
고 소중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보고서, 138쪽).
엔지니어 카를로 알라데프, 일본 “올리베티” 지배인: “나에게 있어 우리의 삶에 가치와 의
미를 주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돈 치마티를 나는 항상 기억한다.”
어떤 프란치스코회 신부: “나는 아씨지의 성 프란치스코가 돈 치마티 같았으리라고 항상
생각했다. 명랑하고, 평온하고, 자연과 노래를 사랑하고, 특히 가난하고 모든 것에서 초탈
해 있었다”(크레바코레, 596쪽).
돈 빈첸시오 스쿠데리, 발살리체에서의 그의 제자. 후에 인도에서의 유능한 선교사가 됨:
“돈 치마티는 지난 세대에게만이 아니라, 또한, 그리고 특히 미래의 세대에게 하나의 등대
였다”(크레바코레, 170쪽).
***
마치면서
새 관구장 돈 스테파노 후지가와는 살레시오회의 한 분원을 방문하면서 돈 빈첸시오 치마
티에 대한 이 기록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고 하루빨리 공개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드러냈다.
저녁에 공동체에게 한 “밤인사(보나놋떼)”의 말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마무리하였다:
“우리 형제들, 특히 가장 젊은 형제들은, 몬시뇰 치마티의 인물됨을 알고 묵상할 필요가 있
습니다. 그분의 정신이 우리 관구 안에 계속해서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몬시뇰 치마

7.7 Page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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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를 알았던 연세 많은 형제들(그들 중 하나가 바로 나다!)은 그 기억들과 증언들을 유산으
로 남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이 나의 보잘 것 없는 기여이기를 바란다.
부록
1. 돈 빈첸시오 치마티 연보
2. 돈 치마티의 생애와 영성 - 가예따노 콤프리 신부의 강연 -
3. 승소금 글라라 수녀의 회상
돈 빈첸시오 치마티 연보
1879. 07. 15
이탈리아 라벤나 주 파엔자의 두르베꼬 마을에서 아버지 쟈꼬모
와 어머니 파시 로사 사이에서 출생. 3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돈 보
스코를 처음으로 만남.
1888. 10. 01 살레시오회 학교에 입학.
1895. 10. 02 폴리쪼 카나베제의 수련원에서 수련 시작
1896. 10. 04 종신서원
1905. 03. 18 토리노에서 사제수품(몬시뇰 갈리에로에게)
1905-1912 토리노의 발살리체에서 교사 역임.
1911-1917 관구평의원
1914-1922 성 루이지 오라토리오의 원장, 발살리체 학교 교사
1922-1925 발살리체 수도원 원장
1924-1925 관구평의원
1925. 12 살레시오회 일본선교사 제1진의 단장으로 제노바항에서 출발
1926. 02. 08 일본 모지항에 도착, 나가사키로 주교를 방문하고 17일에
미야자키에 도착. 첫 1년 동안 일본어 공부에 전념.
1927. 02. 01 미야자키, 오이타, 나카쓰의 3개 본당 운영
1926-1928 미야자키 공동체 원장이자 본당 주임, 중국 관구 평의원
1928. 03. 27 살레시오 사업이 독립 선교단이 됨.
1928-1935 미야자키 선교단 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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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38 일본지구 지구장
1929. 03. 25 총회를 위해 이탈리아로 출발.
1930. 01. 29 신학생들 및 살레시오 수녀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옴.
1929-1930 일본 최초의 여성 빈첸시오회 설립.
1932. 12. 18 미야자키 구호원 개원 (원장: 돈 가볼리)
1933. 07. 16 구호원의 애자회원들 피정 지도
1933. 11. 04 미야자키에 소신학교 설립.
12. 01 도쿄에서 미카와지마(Mikawajima) 사업 시작.
1934. 12. 31 도쿄의 네리마(Nerima)에서 직업학교(이쿠에) 시작.
1935. 01. 28 돈 치마티, 미야자키와 오이타의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됨.
(02. 10 지목구장 취임)
11. 21 도쿄에서 살레시오회 최초의 수련원과 신학원 시작.
1936. 06. 19 돈 가볼리에게 수녀회 설립의 협력임무 부여.
1937. 07. 15 미야자키에 ‘일본 까리따스 수녀회’ 설립을 포교성성에 요청.
1937. 08. 15 포교성성의 승인으로 치마티 신부, 일본 까리따스 수녀회 설립.
1937. 08. 22 최초의 수련자 5명의 착복식 주례
1938. 01. 31 일본의 살레시오회 첫 관구장으로 임명됨(1949년까지 재임).
05. 23 총회를 위해 이탈리아로 출발.
1939. 01. 03 일본으로 돌아옴.
1939. 05. 10 교황으로부터 까리따스 수녀회를 위한 특별 안수 받음.
1940. 11. 11 지목구장 사임 (외국인들에게 주어진 일본 정부의 명령에 의해).
1941. 12. 08 제2차 세계대전 시작. 선교사들의 커다란 어려움.
1945. 08. 15 전쟁 끝남. 재건과 새로운 발전 시작. 미야자키의 휴가 가꾸인
학교와 나카쓰와 고꾸분지의 사회사업, 메구로의 성당과 학교, 오
사카의 학교와 다른 학교들이 시작됨.
1947. 04. 19 총회를 위해 이탈리아로 미국을 거쳐 출발.
1948. 07. 06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옴.
1949. 11. 01
관구장 직무 후, 조후 신학원의 고백신부와 도서관 사서로 일함
(1952년까지).
1950. 09. 01 신학원과 수련원이 조후로 이전됨.
1952-1956 일본관구 평의원
1952-1962 조후 신학원장
1952. 05. 17 마지막으로 총회를 위해 이탈리아로 출발.
11. 01 일본으로 돌아와 73세에 조후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됨.
1955. 03. 19 서품 50주년 경축 미사
1957. 03. 23 가벼운 뇌종양 발생. 그러나 회복됨.
1962. 03. 15 82세에 신학원 원장직 마침.
1965. 10. 06 조후 수도원에서 선종(86세)
1976. 03. 05 시복시성 조사 시작(조후 살레시오 신학원 수도원).
1977. 11. 18 시신 검사.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됨.
1978. 01. 28 도쿄 교구의 시복조사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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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12. 2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됨.
돈 치마티의 생애와 영성
가예따노 콤프리 신부, sdb
동경 치마티 기념관 관장
(돈 치마티 시복준비 담당)
이 글은 2004년 11월 살레시오 수도회 한국관구 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돈 치마티에 대한 강
연을 하도록 초대된 가예따노 콤프리 신부가 한국의 살레시오 가족에게 행한 강연 내용으로 본인
의 허락을 얻어 여기 게재한다.
‘Meaco'의 신비
돈 보스코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885년, 돈 보스코는 꿈에서 온 세상의 살레시오 회
원들이 하게 될 사업들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돈 보스코의 전기> 17권의 645~46
페이지에 나옵니다.
돈 보스코는 마치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높은 곳으로 인도되었고 마치 새처럼 날면서 칠
레에서 아프리카, 중국에서 호주까지 여러 나라를 보면서 그곳의 여러 도시의 이름, 사람
들, 바다, 강, 섬, 그리고 장차 자신의 아들들이 일하게 될 모든 장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기 646 페이지에는 실론, 홍콩, 마카오(Macao)를 보았다고 쓰여 있습니다(틀림없이 한
국도 보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점이 있습니다: “중국이 보이는 높은
산 앞, 광대한 바다의 입구에서 Macao를 보았다...” “그러나 꿈에서 본 많은 지역의 이름들
중에서 어떤 이름은 더 이상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마카오(Macao)를 Meaco
라고 불렀다”라고 돈 보스코로부터 직접 이것을 들었다고 말하는 레무완(Lemoyne) 신부
는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레무완 신부의 개인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마치 “가엾은 돈 보스코!
나이가 드시니 점점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돈 보스코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역사를 위해서 레무완 신부가 커다란 실수를 했음을 말할 필요가 있
겠습니다. 왜냐하면 ’Meaco'라는 도시는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는 일본에
있습니다. Macao에는 실제로 중국이 보이는 높은 산 따위는 없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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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Macao)에 도착했을 때 자연스럽게 레무완 신부의 해석에 동의했지만, 1926년 일본
에 들어갔을 때는 의구심이 솟았고, 그래서 일본의 언어와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Meaco”는 일본의 옛 수도였으며, 그 뜻은 바로 말 그대로 ‘수도’(⾸都, Capital)라
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들어갔을 때 일본의 수도는 교토(Kyoto, 京都, 경도)였
는데, 이 도시가 바로 ‘Meaco'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도쿄(Tokyo)와 교토(Kyoto)의
‘kyo’자(字)는 현재는 ‘myako’라고 읽지만, 옛날엔 ’Meaco'라고 읽었습니다. (일본의) 옛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서적들과 그 시대의 모든 지도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돈 보스코는 이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1845년에 씌어진 <교회사>의 초판에
는“Meaco”라는 말이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돈 보스코에게는 지역적 위치보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 무렵에는 유럽 사람들에게 닫
혀져 있었던 일본에 대한 생각들이 아직은 무척 막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862년 교회
는 26명의 일본순교자를 성인으로 선포했고, 3년 후에는 나가사키에서, 돈 보스코가 자기
소년들에게 말했던, 옛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후손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돈 보스코는 1871년의 <교회사> 제4판에서 26명의 순교자들 각자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덧붙인 긴 주(註)를 첨부했습니다. 여기에 ‘Meaco'라는 이름이 일곱 번 나옵니다.
이 성인들의 생애의 요약을 돈 보스코가 어디서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시성
문서나, 1825년 이후부터 토리노의 마리에티 출판사에서 나온 예수회원 <다니엘로 바르톨
리의 작품> 중 <일본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가진 제8권부터 제14권까지에서 가져왔을 것
입니다. 토리노에 있는 살레시오회 모원의 도서관에는 아직도 돈 보스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카드가 있고 모든 책들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돈 보스코가 1885년 일본에
Meaco라는 도시가 있었고, 마카오(Macao)와 혼동될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돈 치마티의 편지에서도 다루어졌고, 저 또한 일본에서 살레시오회의 사업이
돈 보스코에 의해 예견되었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는 하느님과 성모님의 손길이 함
께함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살레시안들
1925년은 돈 보스코가 1875년에 라틴 아메리카에 최초의 자기 아들들을 파견한 지 50주
년이 되는 해였으며, 이를 합당하게 기념하기 위해 새로운 일본선교를 시작하기로 결정되
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당시 토리노 발살리체의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돈 빈첸시오 치
마티를 책임자로 하는 아홉 명의 살레시오 회원들이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학교 축제
와 본당의 오라토리오에서 흥을 돋우던, 자신이 작곡한 음악들로 인해, 특히 오페레따들로
인해 이탈리아와 외국에서도 아주 유명했었습니다. 그때 그는 46세였고, 빠르마의 음악원
을 졸업했으며 토리노의 레지아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철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어
디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자기 앞에 놓인 그 빛나는 경력과 자신을
아버지처럼 사랑하던 많은 친구들을 떠났습니다.
1926년 2월 8일 돈 치마티는 당시 그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했던 미야자키
(Miyazaki)로 가기 위해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처음 1년은 어렵기 그지없는 일본어를 배우

8 Pages 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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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Page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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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해 초등학교의 책들을 사용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결코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자신
의 의사를 표현하고 자신을 이해시킬 줄은 알았습니다. 1929년, 1938년, 1947-48년, 1952
년에 총회를 위해 네 번 이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한국에 온 돈 치마티
1934년 9월, 교회의 권위자들로부터 음악회를 개최하도록 초대받고, 돈 치마티는 돈 마르
쟈리아와 함께 만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북한과 남한으로 건너갔습니다(저는 이름
들을 돈 치마티가 당시에 썼던 대로 씁니다). 푸슌의 라네 주교, 묵덴(호텐)의 블로와 주교,
신쿄의 가스파이스 주교, 그리고 메리놀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그들을 크게 환
영했습니다. 9월 15일에는 다이렌에서, 17일에는 푸슌에서, 19일에는 묵덴에서, 그리고 21
일에는 신쿄에서 음악회를 했습니다.
만주에서는 그들은 “죽는 줄 알았을” 만큼 지독한 감기를 앓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돈 마르쟈리아는 표현이 풍부한 노래를 하지 못했고 마치 사자처럼 으르렁댔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한국으로 갔습니다. 26일에는 신의주에, 27일에는 해주에 머물렀습니다. 여기
서 돈 치마티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역시 한국에서도 일본에서와 같이 유명한 참배문제
로 어려움들이 있었다.” (역주: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강요하던 황제숭배사
상에서 나온 신사참배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함.)
28일에는 서울에서는 “돈 보스코의 생애를 교구주보에 번역하여 연재하도록 한 살레시안
들의 친구” 라리보 주교님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음악회는 교구의 자선사업을 위한 것으로
서 좋은 심성을 가진 젊은이들이 가톨릭 운동의 일환으로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음악회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대성공이었습니다.”
29일에는 대구에 갔습니다. (돈 치마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치지 않는 비. 경찰이 마
지막 순간에 입장권 판매를 금지했기에 약 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가톨릭 인쇄물
을 상당히 나누어주게 했고, 따라서 선익이 없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당시 <돈 보스코의 생애>가 한국어로 막 출판되려던 참이었습니다. “이 사실
은 분명 무한한 기쁨으로 우리의 환영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토록 그리스도
교의 뿌리가 깊은 이 나라 백성에게서 우리 아버지(돈 보스코)께서 누리시는 새로운 영광이
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이 한국에 들어오게 될 날을 앞당기는 데 이 일이 도움이 될지 누
가 알겠습니까. 자녀들을 앞서가시면서 ··· 준비하시는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돈 치마티는 당시의 총장 돈 리칼도네에게 한국교회의 간략한 역사와 선교
사들의 활동을 묘사합니다: “저는 한창 발전하는 그들의 신학교들을 방문할 수 있었는데,
젊은 신학생들의 질서와 신심과 차분함에 감탄했습니다. 아! 앞으로 이 나라의 이 발전하는
주민들과 가톨릭교회의 미래에 대한 지극히 즐거운 희망으로 제 가슴이 얼마나 뛰는지요.”
선교사 돈 치마티
돈 치마티의 선교활동 40년을 간단히 기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몇 가지기본적인
점들만 언급하겠습니다.

8.2 Page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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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언어공부를 한 후, 1927년부터 29년까지, 2년 조금 넘게 돈 치마티는 미야자키의 본
당신부를 역임했고, 돈 가볼리를 보좌신부로 두었습니다. 1929년에는 총회와 돈 보스코의
시복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1930년 여섯 명(16-17살)의 철학과 신학생들, 그리고 여섯 명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
녀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양성과 선교의 발전에 헌신하였습니
다. 미야자키 근처의 다카나베(Takanabe)에 잠시 동안 철학원을 열었습니다. 그 후, 돈 치
마티의 의견과는 반대로 여섯 명의 신학생이 신학공부를 위해 홍콩으로 보내졌습니다. 그
런데 그 중 절반은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돈 치마티는 방인사제(양성)의 문제를
대단히 중대하게 느끼고, 1933년 미야자키 소신학교를 세웠는데, 이곳에서 첫 교구사제들
과 첫 일본 살레시안들이 배출되었습니다. 1935년에는 수련원과 철학원, 신학원을 모두 도
쿄로 옮겼습니다.
1935년 돈 치마티는 자신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마야자키와 오이타(Oita)의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모든 외국인 교회장상들에게 물러나도록 명했던 1940년까지
였습니다. (이 명령에 의해) 돈 치마티는 가장 먼저 물러났습니다.
돈 치마티는 전쟁 동안 아주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치지 않고 일하면서 모
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거의 모든 일본인 형제들
이 군대에 징집되었고 결국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사업도 거의 모두 파괴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 후, 돈 치마티는 1949년까지 사업의 재건하고 신설을 지휘했습니다. 1949년에 관구
장의 임무를 마치고, 신학원의 고해신부와 도서관장의 임무를 받았는데, 그 도서관의 모든
책의 목록을 그는 손으로 써서 작성했습니다.
1950년 신학원과 수련원은 조후의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1952년 세계총회 때 자
신의 의사를 거슬러 관구를 대표하는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때 마지막으로 이탈
리아로 돌아갔는데, 총 양성평의원으로 뽑히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73세 때 조후의 신학원 원장으로 임명되어 1962년까지 역임했습니다.
여기서 돈 치마티는 젊은 살레시안들의 양성을 위해 온전히 투신했는데, 그 후 그들 중 몇
명이 한국에 왔습니다.
1965년 10월 6일, 86세의 나이로 조후의 살레시오 신학원에서 선종하셨습니다. 시신은 현
재 조후의 살레시오 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치돼 있습니다. 돌아가신 지 12년 후에 그 분의
시신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조후의 살레시오 신학원 안에 있는 ‘치마티 박물관’은 그의 유물들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가 작곡한 음악들과 화석과 식물, 곤충, 조개, 광석 등의 채집이 있고, 6,000여
통의 편지와 글, 그리고 사진들과 많은 역사적 기념물들이 있습니다. 인터넷 싸이트(지금으
로서는 거의 모두가 일본어로 되어 있는)에서는 그의 음악과 연주회 목록과 자세한 연대기
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91년 교회는 그 분을 가경자로 선포했고, 지금은 그가 복자로, 그리고 다음에는 성인으
로 선포될 수 있도록 그의 전구로 인한 기적 하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일본 최초의
현대의 성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모든 음악가들의 주보성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많은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한 성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8.3 Page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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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빈첸시오 치마티의 영성
몇 가지 인용을 하면서 몇몇 특징들을 간단히 요약하겠습니다. 돈 치마티는 ‘살레시안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그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글을 쓸
때 늘 인용했던 돈 보스코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영성입니다.
기쁨에 찬 활동성(근면함, 일을 많이 함)
발살리체에서의 제자였던 돈 삐에트로 라홀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돈 빈첸시오 치
마티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근면함 그 자체였고, 기쁨에 차 있었으며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고,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엄한 말들로 주의를 주는 데는 무능했습니다. 규율을
잡기 위해서는 다만 입술에서 미소를 거두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는 평일에도 최고의
열정으로 축일을 준비하는 것처럼 하는 집안의 만능일꾼(팔방미인)이었습니다.”
돈 빠올로 바랄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 빈첸시오 치마티는 교육학, 화학, 농학을 가르
치는 교단에서, 오르간의 건반으로, 부엌에서 감자껍질을 벗기는 일로, 병실에서 환자를 돌
보는 일로 아주 자유분망하고 자연스럽게 옮겨가곤 했습니다”.
예방교육
고(故) 죠반니 페데리꼬는 2003년 여름에 역사 안에 남을 참된 연구인 <빈첸시오 치마티
의 생애와 해석에 나타난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을 출판했습니다. 돈 치마티의 전 생애는
바로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 영성의 실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 리카르도 죠바넷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올 돈 치마티는, 처음에는 학교에서, 그
리고 다음에는 우리와 함께, 교사와 학생들이 사용하는 규칙 안에 널리 설명되어 있는 대로
의 교육방법의 살아 있는 적용이었습니다.” 사실 그분이 염려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을 “착하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희생이나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상냥하고 부드럽게 섬겼습니다.” 교육적 중재는 그 시의적절함(타
이밍이 맞음)에서 효력을 가진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다정하게 인정해 주고 교정해 주었습
니다.” 부성적인 사랑을 섬세한 보살핌으로 표현할 줄 알았던 돈 보스코를 본받아 돈 치마티
는 “작은 배려들의 천사”가 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선교사 돈 카를로 브라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돈 치마티는 참으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실현하였습니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특별히 약한 자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돈 보스코에 대해서 말해지는 것을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서 편애를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동기들 중 몇몇 형제
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나에게 보낸 편지들을 대조해보면서 나는 모든 편지들에 똑같은 사
랑이, 그분이 우리 각자에게 언제나 보여 주었던 배려가 스며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참
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서원식이나 서품식, 영명축일 등 우리 인생의 모든 중요한 날들에
우리를 기억하는 것을 잊는 법이 결코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어떻게 그렇게 우리를

8.4 Page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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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갑니다. 그분의 편지는 늘 정확한 날에 도착했던 것입니
다.
돈 산테 가렐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 “그분은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법이 육
화하여 나타나신 분(체현, 體現)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 치마티는 누군가를 꾸
짖을 필요가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서나 마치 지극히 사랑스러운 형으
로 머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예견했고 모든 것을 예방했으며, 형제적으로 의
논하고, 다정하게 자극했습니다. 모든 이에 앞서 먼저 실천했는데, 특히 이겨내야 할 어려
움이나 거부감이 있을 때 그러했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권위와 순수한 형제애를 너무도 훌
륭히 조화시키면서 했기 때문에 그분에게 유감스러운 느낌을 주고 그에게서 질책을 받을
만한 일을 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했습니다.”
일상의 성덕
영적 지도에 있어서 돈 치마티는 단호하게 현재에 집중하면서(이행해야 할 임무, 예방교육
의 실제적 실천, 기도와 수도생활의 규칙성 등), 아버지의 자비에 맡겨야 할 과거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섭리에 위탁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현재란
덕에 뿌리를 주는 꾸준하고 반복적인 의지의 작은 행위들을 위한 기회입니다. 또한 끈기있
고 희생적이며 하느님을 향한 작업을 위한 자리입니다. 작업이란 물질적인 일을 의미하기
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성화를 위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이라는 영적인 일을 의미
합니다. 그의 편지와 영적 지도에서 그는 자주 이렇게 반복합니다: “돈 보스코께서 말씀하
시기를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도록 하지 말라. 과거는 지나갔다. 흘러간 물은 더 이상 방
아를 찧지 못한다. 앞일은 어떻게 될지 너는 모른다. 그것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 너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현재이니, 네 영혼과 다른 이들의 영혼의 선익을 위해 그 현재를 잘 이용
하라.”
과거는 잊어 버리고 미래는 하느님의 손에 맡기라는, ... 그리고 현재에 보화를 쌓으라는
통상적인 초대 후에 그는 프랑코 아메리오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현재의 ‘순간’은 당
신의 것입니다. 높은 곳도, 낮은 곳도, 오른편도, 왼편도 바라보지 말고, 그 현재의 ‘순간’을
잘 이용하세요. 결과를 ‘바라보지’ 말고(결과는 ‘당연히’ 별 것 없거나 전혀 없습니다), ‘결과
를 확인하려 하지 말고’, ‘그분’을 위해, ‘그분’과 함께 현재의 ‘순간’에 움직이고, 움직이고,
움직이십시오. 그것이 평화롭기 위한, 그리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실천입니다.
이것이 돈 보스코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수덕입니다.”
하느님의 뜻
돈 치마티는 생애의 모든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그 뜻을 받아
들였고 다른 이들에게도 받아들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는 마지막 병 중에 장상에게 이렇
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저를 집어삼키도록 저를 내어드리고 싶습니다.” 그에게 있
어 성덕이란 바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었습니다. 대가를 치르게 될 때라도.
섭리에 대한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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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섭리에 신뢰했습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신뢰가 아니었습니
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의무를 다 하고 그 다음에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
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도움 없이 버려두시지 않으
실 것입니다.
성체신심
돈 치마티는 1936년에 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성체에 대한 신심이란,
1) 그리스도교적, 살레시오적 신심의 중심이다.
2) 우리의 수도적 완덕의 삶의 자양분이다.
3) 우리 교육활동의 기초이며 환경이요 힘이다.
�/XI/�� (����년/11월/6일) 살레시오 회원 D. V. Cimatti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
돈 치마티는 마리아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살레시오 모든 성당 안에는 예수성심 상과
도움이신 마리아 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겸손
1949년까지 관구장으로서 총장에게 매달 쓴 보고서들에서 돈 치마티는 자신의 주된 결점
이 교만과 예민함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을 이기기 위해서 그는 휴식을 취하지 않았고, 어떤
일에건 자신을 맞추었으며, 초라한 옷을 입었습니다. 형제들을 칭찬했고 그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때 살레시오 회원이었던 돈 플로란은 그렇
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를 향한 애덕
장상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그는 항상 “나는 모든 사람들을 좋아합니다”라고 쓰고 있습니
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너무 집착할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을 다 껴안고
싶습니다. 남자들과 여자들, 아이들과 어른들을 모두”. 이렇게 그는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
고자 했다.
자연에 대한 사랑
돈 치마티는 토리노의 레지아 대학 농학과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는 모든 풀과 모든 곤충은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었습니다. “자연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
었고, 그분의 지혜와 사랑을 드러냅니다”라고 그는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과학
과 신앙 사이의 모순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학은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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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행동도 자연스러웠습니다. 대중 앞에서도, 기도 중에도, 주의를 끄는 태도를
원치 않았습니다.
음악
음악은 돈 치마티에게 있어서 사도직의 커다란 수단이었습니다. 그의 연주는 엄청난 찬탄
을 받았으며, 그에 대한 모든 사람의 호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도시들과 학교, 본당
과 공공 음악회장에서 개최한 음악회는 무려 대략 2,000회에 달합니다. 대략 그가 작곡한
950개의 작품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1940년에 도쿄의 히비야 코까이도(Hibiya
Kokaido)에서 오페라로 공연된 “호소카와 그라찌아(Hosokawa Grazia)”가 유명합니다.
그는 이를 1959년에 대작 오페라로 완성했고, 1960년에 그렇게 완성된 오페라로 공연되었
는데, 관현악곡이 원작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관현악곡을 새롭게 만들어 2004년
10월 8일과 9일에 동경의 오페라 시티 홀(Opera City Hall)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인쇄물
돈 보스코가 그러했듯이 그는 사도직 수단으로서 인쇄물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일본에 살기 시작한 지 불과 2년 뒤에 그가 즉시 출판을 시작한 것은 인상적입니다. ‘돈 보스
코’ 출판사는 그의 업적입니다. 이탈리아에서도 그는 많은 책을 출판했습니다. 또한 ‘살레시
오 가족’지와 다른 잡지들에 실린 그의 글은 수 없이 많습니다.
방인사제의 양성
돈 치마티는 선교의 첫 번째 일은 방인사제의 양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은 일본인들
에 의해서 개종되어야(복음화되어야) 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인 방인성소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까리따스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승 글라라 수녀의 회상
승소금 글라라 수녀는 까리따스 수녀회의 설립초기의 회원으로서, 치마티 신부의 초대로 수도생
활을 시작하여 2003년 11월 29일에 86세로 귀천하였다. 승 수녀는 직접 치마티 신부에게 영적
지도와 초기 수도적 양성을 받았으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피아노와 오르간을 개인지도 받기도
한 애제자로서, 수녀회 안에서 치마티 신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후배들에게 즐겨 들려 주곤 하
였다. 스스로 삶을 정리하던 2003년 귀천하기 4개월 전인 7월 22일 오후 한시 경 설립자에 관해
증언하고 싶다고 스스로 역자에게 대화를 요청하였다. 이 글은 역자가 다른 한 수녀와 그 증언을
듣고 기록하여 본인에게 확인받은 기록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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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마티 신부님을 통해 (수도생활로의) 부르심을 받았다. 내가 치마티 신부님을 처음
본 것은 1933년 8월 1일 주일 미사에서였는데, 신부님은 성당에서 왔다 갔다 하시면서 나를
바라보시며 줄곧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그분이 나를 원하시고 내가 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애자회(愛⼦會)에 들어온 것을 아주 좋아하셨다.
치마티 신부님은 사람을 한번 딱 보면 말씀은 안 하셔도 금방 그 사람을 파악하셨다. 무엇
에나 늘 성령의 빛을 받으시는 것 같았다. 나는 “아, 이 신부님은 내가 나쁜 짓을 해도 다 알
겠구나” 하고 생각했고, 사실 고백성사를 보면 내가 말하기도 전에 다 아시는 것 같이 “그
래, 그래, 다 알았다, 다 알겠다”고 하셔서 정말 다 아시는 것 같았다.
그 때 나를 두고 미야자키 수녀원의 전담 의사였던 간베 선생님은 내가 임파선 결핵이어서
50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니 수녀가 될 수 없다고 했는데, 치마티 신부님은 “아니다. 이 사람
은 아주 오래 오래 살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지금 86세까지 살고 있다.
한 번은 아주 건강했던 내가 폐렴으로 크게 앓아누운 일이 있었다. 열이 40도가 넘고, 밥도
사과도 약도 먹을 수가 없을 만큼 일 주일 동안 심하게 아팠다. 약은 가루약이었는데 냄새가
고약해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동경에서 기차로 오신 치마티 신부님은
바로 병실로 나를 찾아오셔서 “왜 내 허락도 없이 아파? 일을 해야지. 허락 없이 아파 누우
면 안 되지. 자, 오늘은 열이 내리고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부터 일어나서 내일은 일할 수 있
을 거야” 하고 말씀하시고 기도해 주신 다음에 가셨다. 그런데 가시다가 다시 돌아오셨다.
성모님 강복을 주는 것을 잊어 버렸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성모님 강복을 주시고 가셨는데,
진짜로 나는 그날 열이 내렸고 밥을 먹고 나서 오후에는 일어나서 다음날부터 일을 할 수 있
었다.
그 후로 나는 아파 누운 적이 없었다. 임파선 결핵을 늘 갖고 있었지만 앓아눕지는 않았던
것이다. 치마티 신부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간베 선생님은 이것을 보고 “기세끼
데쓰네에!(기적이군요)”라고 했고, 지금 여기 의사선생님도 자주 내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것
을 기적이라고 한다.
나는 7년을 애자회에 머물고 수녀가 되었는데, 청원자 착복부터 의지시험, 첫서원, 종신서
원을 모두 치마티 신부님이 주례하셨다. 네 명 중 나 하나만 그렇게 하셨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