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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Pag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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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SAINT FRANÇOIS DE S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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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라비에 s.j.
성 프랑수아 드 살
SAINT FRANÇOIS DE SALES
편저 Aldo Giraudo
소개 Morand Wirth
후기 Wim Collin

1.4 Pag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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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FRANÇOIS DE SALES
(SAN FRANCESCO DI SALES)
Editrice Elledici, Settembre 2021
Via Maria Ausiliatrice, 32 - 10152 Torino
©한국천주교살레시오회, 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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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Pag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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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차례
소개의 글
선종 400주년을 맞으며
9
옮긴이의 도움말
12
“하느님 아들을 가장 잘 재현한 사람”
14
1장, 행복한 유년 시절
프랑수아 브와지 영주와 부인
17
라 로쉬와 안시에서 공부
22
2장, 완벽한 신사
파리 그리고 1586-1587년의 영적 위기 29
파도바와 '두 종류의 법학' 박사
45
3장, 제노바 수석의전사제
프랑수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
53
사제직의 첫 몇 개월
65
4

1.7 Page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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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수석의전사제의 선택
토농 주민들의 거처
전략 수정: 논쟁
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성공의 단계들
그라니 주교의 후계자
프랑수아의 사도적 마음
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프랑수아의 로마 여행
그라니 주교의 보좌
1602년 파리 체류
토랑스 성당에서 주교 축성
71
80
85
103
111
118
135
138
147
15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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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트렌토공의회의 개혁을 따름
159
프랑수아의 영적 교의
176
주교의 강론 의무
182
사순시기와 교리교육
188
교구 방문
191
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프랑수아 드 살과 그의 사제들
197
대수도원의 개혁
204
영혼의 친구 그리고 「신심생활입문」
208
성 마리아 방문수녀회와 「신애론」
216
6

1.9 Page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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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세 번째 파리 체류
231
은퇴와 홀로있기에 대한 열망
235
아비뇽 여행과 선종
240
저자 소개
앙드레 라비에 신부
249
7

1.10 Page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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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8

2 Pages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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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Page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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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의 글
소개의 글
선종 400주년을 맞으며
성 프랑수아 드 살François de Sales의 선종 4백 주년을 맞이해
(1622~2022),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 가족은 「San Francesco di
Sales」라는 제목의 이 훌륭한 책을 다시 엮어서 주보성인을 기
리고자 했다. 책을 다시 발행하는 기획과 그 작업은 감사하게
도 교황청립살레시오대학교 영성연구소의 알도 지라우도Aldo
giraudo 교수가 맡았다. 또한 2022년은 제네바 주교가 설립한
방문수녀회의 공동창립자 잔 프랑수아즈 드 샹탈Jeanne-Fran-
çoise de Chantal의 탄생 450주년(1572~2022)이기도 하다.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의 저자, 모든이를 성덕으로 이
끄는 사도인 성 프랑수아 드 살은 1665년 성인으로 선포되었
고, 1877년 교회박사, 1923년 언론인의 주보성인 그리고 1967
년 ‘하느님 사랑과 복음적 감미로움의 박사’로 공포되었다. 그
분의 정신과 영성은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 특히 그분
을 따르는 많은 단체와 수도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발전시킨 사목 및 영성과 성 프
랑수아 드 살의 가르침 사이에, 특히 대화의 방식, 사랑의 우
9

2.2 Page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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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선성, 성덕을 향한 보편적 성소 등 여러 지점이 겹쳐지고 있
음이 분명하다.
이 책은 성인의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1962년 프랑스
어로 출판되었고, 1967년 이탈리아어로 번역됐다.
저자 앙드레 라비에André Ravier(1905-1999)는 예수회 신부로,
철학자이고 영성역사의 전문가이며, 리옹 신학교의 원장을
지냈다. 그리스도인 영성에 관한 많은 저술이 있는데, 특히 성
이냐시오 로욜라, 성 피에르 파브르, 성 클로드 드 라 콜롬비
에르, 성 아르스의 비안네, 성 브루노, 루르드의 벨라뎃타 등
많은 성인의 전기를 썼다. 무엇보다도 성 프랑수아 드 살과 잔
프랑수아즈 드 샹탈의 대가로 알려졌다.
이 책은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삶과 활동 및 영성을 연대적
으로 소개하는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사브와의 행복한
유년 시절(1), 파리와 파도바에서의 공부(2), 제노바 수석의
전사제(3), 샤블레의 사도로서 파종과 수확기(4-5), 제네바
의 주교이자 왕자(6),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7), 성직자와
수도자 개혁(8), 순수 사랑을 향해(9).
이 책을 엮기 위해 작가는 광대한 양의 원본들을 탐구했
고, 성인의 주요 저서들을 연구했으며, 다른 저자들이 쓴 성
프랑수아 드 살 성인전을 낱낱이 연구하여 이 책의 자료로 사
용했다. 저자는 매우 고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큰
성인의 삶 안에서 숨 쉬는 하느님의 흔적과 신비를 밝혀주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단순하고도 질박하게 들려주는 탁월한 재
능도 지니고 있다.
10

2.3 Page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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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의 글
이 새 출판 본은 원본의 내용을 정확하게 되살렸다. 단지
삽입된 사진들만 최근 것들로 바꿔 넣었다. 고리타분해지지
않은 양질의 내용이 독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길 기대한다.
앙드레 라비에 신부는 책의 서문으로서 제노바 주교의 제
자이자 친구인 성 빈센트 드 폴의 증언을 실었다. 그는 “드 살
주교님은 ‘지상에 사신 하느님 아들을 가장 잘 재현한 사람’이
될 만큼 ‘하느님 아들의 초상’이 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지
니셨습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돈 보스코로부터 영감을 받아 ‘사랑의 박사’가 되
고자 하는 우리의 사도적 계획을 실천하려 한다. 앙드레 라비
에 신부 역시 자신의 서론을 이렇게 맺고 있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지상 여정 중의 예수님처럼 자신의 온 마음으로 하느
님을 사랑하려 했고, 그 선물의 요구와 감미로움을 경험하면
서 자신이 거창하게 ‘사랑의 영원한 자유’라 칭했던 곳으로 가
능한 한 많은 영혼을 인도하려 노력했다.”
Morand Wirth, sdb
11

2.4 Page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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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옮긴이의 도움말
온유와 친절의 대명사, 근현대 가톨릭 영성에 깊은 영향을
준 위대한 성인 프랑수아 드 살은 그 막중한 비중에도 불구하
고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에 제대로 잘 알려지지 않은듯 하며,
이는 성인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우리말로 많이 소개되지 않
은 것이 그 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선종 400주년을 맞이하
며 살레시안 가족이 자신들의 영적 생활에 영감을 준 성인의
삶과 활동 및 정신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이를 더 가까이
배우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며 반가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
서 앙드레 라비에 신부가 쓰고 알도 지라우도 신부가 각색한
이 책을 우리말로 소개할 수 있어 큰 영광이다.
이 책의 원본은 프랑스어(Saint François de Sales)이지만, 선
종 400주년을 기념하여 이탈리아어(San Francesco di Sales)
새롭게 각색됐고 여기서 영어나 스페인어 등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말 번역도 이탈리아어를 따랐다.
번역에서 인명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는 원어의 발음을 최대한
살리려 노력했고 원어의 단어나 문장을 병기해 독자들의 이해
를 돕고자 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관습적으로 ‘프란치
12

2.5 Page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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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의 글
스코 살레시오’라 부르던 성인의 이름도 원발음에 가깝게 ‘프
랑수아 드 살’로 표기했음을 알린다.
인간 마음을 가장 깊이 관조했던 위대한 성인의 삶에 관해
높은 지식을 지닌 작가가 훌륭한 언어로 아름답게 소개했음
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옮기는 데 있어 부족한 역량으로 인
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며, 하느님
의 사랑을 듬뿍 담으려 노력하는 독자들의 넓고 너그러운 마
음에 역자의 부끄러운 한계를 맡긴다.
서정관, sdb
13

2.6 Page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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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지상에 사신 하느님 아들을
가장 잘 재현한 사람”
이 말은 오로지 한 성인만이 다른 성
인에 대해 할 수 있는 언급으로, 파리에서
있었던 프랑수아 드 살에 대한 시복시성
과정 심사에서 빈센트 드 폴이 한 말이다.
“드 살 주교님은 하느님 아들의 초상이 되
겠다는 강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저는 인
간적인 약점을 지닌 단순한 피조물이 그
리 높은 차원의 경지, 드높은 정상에 어
떻게 도달할 수 있었는지 경이로운 마음
으로 자문하였었는데, 그분께서는 그 모
델에 온전히 도달하였음을 저는 확신했습
니다. … 그분의 열정은 친밀한 대화에서
뿐만 아니라 공개 연설에서도 많이 나타
났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제 마음속에 되
새기면서, 그분이야말로 자신 안에서 지
상 여정의 하느님 아들을 가장 잘 재현한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큰 감탄
을 느꼈습니다.” (파리 시복시성 심사 26,
27) 이런 비유가 매우 과장된 듯해도 틀림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 비유는 성 프랑
수아 드 살의 영적 운명을 특징짓는 사랑
14

2.7 Page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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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의 글
의 놀라운 움직임을 친밀하게 소개한다. 우리에게 이 내밀한
움직임을 드러내 설명하며 동시에 그 특별한 존재의 비밀을
알도록 해준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영적 초상을 스케치하려는 우리의 노
력은 바로 이런 빛으로 조명된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세상에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 했
고, 그 선물이 지닌 요구와 감미로움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거
창하게 ‘사랑의 영원한 자유’라 칭했던 곳으로 가능한 한 많은
1)
영혼을 인도하려 노력했던 사람이다.
1) 우리의 글은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저작 「총서」 (OEuvres de Saint François
de Sales, Visitation d'Annecy, 1892-1932, 26 voll.)에 실린 문헌들에 의지하
면서, 특히 19세기에 발견된 서한들을 인내를 가지고 찾아 이용했다.
그렇지만 이 책을 너무 무겁게 하지 않기 위해 각 참고문헌의 리스
트를 소개하지 않으며, 참조들은 이 큰 「총서OEuvres complètes」를 언급
한다. 성 프랑수아 드 살의 글에 익숙한 독자들은 그 글들의 잘 짜여
진 목록 덕택에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의 시복시성 심
사(1627-1632, 1655-1658)와 성 마리아 방문수녀회 희년(dall'Année
Sainte des Religieuses de la Visitation Sainte-Marie)과 관련된 인용도 같이
사용했다. 매우 드물게 메시 드 롱게테르(Messer de Longueterre, Vie de
très illustre messire François de Sales …, Lyon, 1624), 쟝 드 생 프랑수아(Jean
de Saint-François, La Vie du bienheureux messire François de Sales …, Paris,
1624), 루이스 데 라 리비에르(Louis de la Rivière, La Vie de l'illustrissime
François de Sales …, Lyon, 1624) 등이 쓴 전기에서도 인용하였다. 성인의
조카인 샤를 오귀스트 드 살의 책 「복자 프랑수아 드 살, 제네바의 주
교이자 왕자의 역사」 (Histoire du Bienheureux François de Sales evesque et
prince de Geneve, Lyon, 1634)는 다른 곳에서 확인된 사실들만 취해 가능
한 한 극히 제한적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이어지는 인용들은 이 책
에 속하지 않고 성 프랑수아의 모든 전기에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사안
에 관한 것들이다.
15

2.8 Page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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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16

2.9 Page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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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행복한 유년 시절
1장, 행복한 유년 시절
프랑수아 브와지 영주와 부인
프랑수아 드 살François de Sales이 금수저로 태어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부계, 드 살de Sales 가문이나 모계인 드
시오나de Sionnaz 가문 양쪽 모두 사브와 공국의 최고 가문에 속
하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뼈대 있는 집안들이었다. 드 살 가
의 문장은 청색 바탕에 빨간색 띠를 가운데 둔 두 개의 두꺼운
금색 줄이 가로로 놓여 있고, 중앙 일직선으로 가장 위에 초승
달이 그리고 밑으로 같은 크기의 별 두 개가 각각 금빛으로 배
치되어 있다. 가장 아래서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흰색 띠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Ny plus, ny moins’라는 모토가 새겨져 있다.
이 가문은 8대에 걸쳐 귀족의 지위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브와지Boisy 영주(이 칭호는 프랑수아의 부모로부
터 시작되었다. 보나봉투 드 셰브론Bonaventure de Chevron이 딸
프랑수아즈 드 시오나에게 지참금으로 준 막대한 부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와 부인이 지닌 진짜 품격은 그들이 지닌 독
실한 가톨릭 신앙에 기인했다.
제네바 영토와 매우 가까운 그곳은 1543년부터 개신교 위
기에 빠져들었다. 주교좌가 있는 제네바는 칼빈주의와 칼빈
17

2.10 Page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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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교도들의 수도가 되었고, 주교는 어쩔 수 없이 안시Annecy
머물러야만 할 정도로 매우 잔혹하게 상황이 전개되었다. 드
살 가족은 교황청과 가톨릭교회에 철석같이 붙어서 이단자들
의 여하한 접근과 도발로부터 가족은 물론이고 식솔들을 보호
했다. 이것이야말로 프랑수아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련과 고
통을 당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확고한 분위기 속에서 지낼 수
있었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브와지 영주에게 있어서 그런 용기 있는 믿음은 전통에 충
실함과는 확실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삶과 행동
에 충실했다. 프랑수아 드 브와지는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놓
고 실천했다. 주일과 축일이면 드 살 본당에서 거행되는 미사
와 전례에 봉사했고 “부활절이나 연중 대축일에 그리고 대사
드 살 가문의 문장
18

3 Pages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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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Page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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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행복한 유년 시절
가 허락된 때면 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자신의 영지에
서는 “많은 가난한 이들을 돌봤고 특히 농부들에게 금전으로
든 곡식으로든 아무런 이자 없이 그들을 도왔다.” 완벽한 그
리스도인인 그에게 이단교도의 그림자가 전혀 없었다.
거의 서른 살이나 더 젊은 그의 부인은 신앙심과 가난한 이
들을 향한 사랑에서 한술 더 떴다. “마님께서 비가 오는 겨울
날 꽤 먼 길이었지만, -토랑스Thorens의 농부인 프랑수아 테리
François Terrier가 시복시성 심사에서 증언하였다- 추위와 눈
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느님께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들
을 돕기 위해 드 살 성을 나서서 성당으로 가는 것을 자주 보
았습니다. 극빈자들을 돌보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으셨고, 그
들에게 빵과 포도주 그리고 다른 일용품을 날랐습니다. 그리
토랑스, 프랑수아 드 살이 태어난 장소에 세워진 경당
19

3.2 Page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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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환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료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제네바 공국의 참사위원이었던 프랑수아 드 라 페세Fran-
çois de la Pesse가 칭했듯이 이 ‘덕의 진주’는 열여섯 살 때인 1567
년 8월 21일, 그녀의 첫아들 프랑수아를 낳았다. 이 젊은 엄마
가 훨씬 나이가 많은 남편이 아니라 그렇게 꼬물거리고 조심
스러운 아기에게 온 정신을 다 빼앗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
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어린 아기 시절
에 대한 이야기들은 차고 넘친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을 수
유할 수 없었던 브와지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보모 페
트로망드 피투Pétremande Puthod에게 맡겼었다. 그녀는 첫 번째
시성시복 심사 때까지 아직 살아 있어서, 장차 제네바의 주교
이자 제후요 나아가 교회의 영광을 위한 후보자가 될 갓난아
기에 대한 기억을 증언하도록 요청을 받았는데, 이는 흔한 일
이 아니다. 페트로망드의 시적인 표현을 고려하면서 그녀의
증언을 들어보자. “정말 축복을 많이 받은 아기였죠. 낯을 가
리지 않는 귀여움이 가득하며 아름다운 얼굴이었어요. 돌보
면서 그렇게 순하고 착한 아기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어요.”
브와지의 영주는 그렇게 ‘좋은 성격의 아이’에게 귀족 집
안 맏아들에게 합당한 교육을 매우 엄격하게 했다. 잘못을 저
지를 경우 회초리를 아끼지 않았으나, 그럴 때마다 항상 혼나
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엄격한 아버지에 부드러운 어머니,
적절히 잘 조화를 이뤘던 이 가정교육은 바로 좋은 효과를 발
20

3.3 Page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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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행복한 유년 시절
휘했다. “그분은 어린 시절부터 -샹탈 수녀의 증언이다- 그
나이에 비할 수 없는 감수성과 달콤함 그리고 친절이 빛났다
는 말을 여러 친한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항상 친절했고
부모님에게 순종했답니다.”
1)
샤를 오귀스트 드 살Charles Auguste de Sales 은 이 어린 시절
에 관해 서술하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한다. 양친은 “자주
프랑수아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심어주려 노력
했고, 일상과 자연에서 쉽게 만나는 현상들에 비교하고 비유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 신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습니다.
아들의 하찮은 호기심에도 항상 친절하게 답했어요.” 이런 종
교교육이 프랑수아의 영혼과 정신에 깊은 영향을 심어줬다.
드 살 성은 완만하게 경사진 초지와 큰 과수원 한가운데에
세워진 요새 같은 집이다. 이 지역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다.
우실룡Usillon 계곡 입구에 자리 잡은 성은 완연히 다른 두 지역
이 나뉘는 경계에 있다. 낮은 언덕인 서쪽은 비옥하고 활기가
넘치지만 동쪽은 숲이 드문드문 자라는 높은 산으로, 아래쪽
은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위로는 여름에도 눈이 하얗게 쌓인
봉우리들이 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이 풍경은 어린 프랑수
아의 마음에 아름다운 영상을 가득 채워줬다. 매일 새롭고 친
숙하게 다가오는 자연의 것들을 이해하고, 살아있는 풍부한
감성으로 이를 받아들여 자신의 내면에 그리고 이미 형성되고
1) 샤를 오귀스트 드 살은 성인의 조카로 1634년에 「복자 프랑수아 드
살,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의 역사Histoire du Bienheureux François de Sales
evesque et prince de Geneve」라는 제목의 전기를 썼다.
21

3.4 Page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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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있는 종교적 세계관에 한 부분이 되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유리한 상황의 가정환경에서 태어났을지
라도 하느님께서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역사하지 않으셨다
면, 이것만으로는 프랑수아의 균형 갖춘 삶과 종교적 열정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의 눈과
마음을 신뢰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엄마가 아니라면 -1610년
경 브와지 부인은 샹탈 부인에게 털어놓았다- 그 어린 시절의
수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말할 수 있겠는데…, 아주 어릴 때부
터 하늘의 축복을 기다리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하느님의 사
랑만을 숨 쉬는 듯한 그런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이제 훌륭한 어머니의 학교에서 배운 ‘가난한 사람들에 대
한 사랑’을 덧붙일 것이며, 아이의 가슴에 비밀스럽게 담긴 은
총의 신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라 로쉬와 안시에서 공부
프랑수아가 여섯 살이 되던 1573년 매우 중요한 변화가 왔
다. 브와지 영주의 형인 루이 드 살Louis de Sales이 자신의 세 아
들을 성으로부터 40리 정도 떨어진 고을 라 로시La Roche에 있
는 학교에 보낼 결심을 했다. 그러자 브와지 영주 또한 그동안
생각해 뒀던 계획을 실천할 결심을 세웠다. 프랑수아는 자기
사촌들과 함께 기숙학교에 입학할 것이다.
라 로쉬에서 프랑수아는 학우들의 모범이 될 만큼 완벽한
22

3.5 Page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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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행복한 유년 시절
학생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했다. 그의 겸손함보다 동정심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매료시켰고 감탄케 했다. 2년 뒤인 1575
년, 프랑수아가 라 로쉬를 떠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오며 ‘우리 도시의 복덩어리를 거둬간다.’고 흐느끼는 가
운데 말했습니다.”라고 쇼지Chaugy 수녀가 증언했다.
드 살 저택(1630년에 파괴됨)이 있던 곳에 세워진 십자가
23

3.6 Page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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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야 했던 배경에는 정치적인 이유
가 있다고 한다. 루이 드 살은 브와지 영주, 자신의 가족과 가
솔들이 드 살 성에 살지 않고 브렝 성에 사는 것이 더 신중한
처사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족의 거처를 옮기는
결정은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기숙학교를 옮기도록 했다. 이
런 주장은 일견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보다 단순한
이유를 말할 수 있겠다. 루이의 아들들 대부분이 라 로쉬의 작
은 학교 과정을 다 마쳤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더 큰 학
교로 진학을 해야 했다. 아이들 형제들과 사촌은 이 과정을 따
라야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우리가 말하고 있는 네 명의
학생들은 안시에 있는 학교로 옮겨갔다. 1551년 외슈라시 사
Eustache Chapuys 신부가 세운 이 학교는 명성이 높아 사브와
Savoie의 웬만한 명문가 자제들은 다 이곳의 학생이었다.   
여기서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영적 성장을 이루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우선 그의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로, 1577년 12월 17일 안시의 생 도미니키Saint-Domi-
nique 성당에서 앙즈 주스티니아니Ange Justiniani 주교가 집전했
다. 당시 프랑수아는 열 살의 어린 나이였으나 동료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재능이 많
으며 사랑스러웠다. 모두 그를 칭찬했고 사랑하며 존중했다.
“그의 존재는 -샹탈 수녀의 말이다- 동료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온 생애를 통해 유지한 흡인
력과 겸손 및 사리에 밝은 태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학
생들이 무례한 태도를 보여도 인내를 가지고 상냥하게 대했
24

3.7 Page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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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행복한 유년 시절
습니다. 저녁이 되어 동료들이 놀이를 찾아 뛰어나갈 때 그는
집 안에 남아 기숙사 일을 담당하는 여성들을 초대하여 ‘아주
머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라며 성인전 등
을 읽어주었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사건은 1578년 9월 20일에 있었던 삭발례
이다. 프랑수아는 그때부터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이에 관해 두 개의의 확실한 증언이 있다. 어느 날 그는 포르
로얄 데 샹Port-Royal des Champs 수녀원 안젤리크 아르노Angélique
Arnauld 원장수녀에게 말하길 “제가 열두 살 될 때부터 교회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강한 결심이 생겼습니다. 이 결심은 누가
왕국을 준다 해도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은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기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이 내 영
혼 안으로 들어왔고, 절대 떠나지 않았습니다.”라고 자기에
게 고해성사를 본 어떤 사람에게 말했다.
이 두 고백은 프랑수아의 결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확고하고 결단력 있는 결심으로 곧바로 복음과
구원의 신비의 본질을 향해 내닫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학업적 성취는 브와지 영주의 마음을 흡족하
게 했고 아들의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획을 품게 했다. 프랑수
아는 이런 아버지의 뜻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 자신
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결심을 확인하고자 삭발례를 받
을 수 있도록 아버지에게 허락을 요청했다. 당시에 신학생이
된다는 것은 훗날 꼭 성직자가 될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혜택과 사다리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했다. 그러나 프랑수아
25

3.8 Page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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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프랑수아 드 살이 세례받은 세례대, 토랑스 성당 내
26

3.9 Page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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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행복한 유년 시절
는 그런 것을 보지 않았다. 장차 교회의 사람이 되고자 진심으
로 삭발례에 임했다. “1578년, 바네로아Bagneroy의 주교 갈르
와 르갸Gallois Regard가 9월 클레르몽수 앙 제네브아Clermont en
Genevois에서 예식을 거행한다는 것을 알고 즉시 그곳으로 수
직의뢰서를 품고 달려갔다. 생테티엔Saint-Etienne 성당에서 거
룩한 전례를 통해 삭발례를 받으며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주님을 품에 안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샤를 오귀스트 드 살의 이 표
현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실제로 이 열두 살의 소년은 정말 놀
랄 지경이다. 어쨌든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하는데, 친밀감 뒤
에는 무쇠 같은 힘을 숨겼고 매력 뒤에는 격렬한 투쟁이 있다
는 것을 이 초상화의 나머지 부분이 우리에게 곧 증명해 줄 것
이다. 당연히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그의 길을 닦아주실
것이다. 이 내적 경향에 대해 프랑수아는 ‘결기’로 응답했다.
그는 하느님을 선택했고 이 선택에는 어떤 미련도 없었으며
후회도 없을 것이다.
1578년 가을에 이런 상황을 아주 잘 볼 수 있다. 브와지 영
주가 프랑수아의 학업성취를 두고 크게 자랑스러워하며 공부
를 계속 시키기 위해 파리Paris로 보낼 것을 결심했다. 아들에
게 좋은 스펙을 마련해주기 위해 항상 노심초사하던 브와지
영주는 파리 엘리트 청년들이 다니는 나바르Navarre 기숙학교
에 들어가길 원했다. 하지만 프랑수아의 생각은 달랐다. “예
수회 학교의 학생들에 대한 명성과 덕망을 익히 들어 알고 있
었는데, 그에 비해 아버지가 권하는 학교의 학생들은 경건함
27

3.10 Page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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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에서 많이 뒤처진다고 들었다.” 프랑수아의 마음은 나바르보
다 클레르몽Clermont을 선호하였다. 하지만 아버지 브와지 영
주가 계획을 포기하도록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이미 외교적
재능을 갖춘 프랑수아는 어머니의 중재에 의존했다. 그리하
여 12살 된 우리 학생은 파리에 도착하여 “장 디아쥬Jean Déage
2)
의 채비와 지도 아래” 클레르몽 기숙학교에 등록했다.
2) Déage 신부는 브와지 영주가 프랑수아를 위해 고용한 가정교사이자 후
견인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처지였지만, 이미 사제였던 것으로 추정된
다(역자주).
28

4 Pages 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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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Page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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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2장, 완벽한 신사
파리 그리고 1586~1587년의 영적 위기
리옹-부르즈-오르렝스Lyon-Bourges-Orléans. 이 여정을 따라
1)
그는 9월 말에, 루이 드 라 리비에르Louis de la Rivière 신부가 칭
한 대로 “신화, 진취적 교양 및 모든 과학의 어머니인 왕의 도
도”일뿐 아니라 정치의 중심지, 종교적 논쟁의 도시, 학생들
광란의 도시이기도 한 파리에 도착했다.
클레르몽 기숙학교에서 프랑수아는 문학과에 등록했고,
등한시했던 그리스어도 시작해야 했기에 고등문법 과정에도
등록했었을 것이다. 4년 동안 “인문학 공부를 다시 해야 했
다.” 인문과정을 마친 후 1584년, 4년의 철학 과정 입학이 승
인됐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젊은 철학자의 수기 노트를 통해
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가를 알 수 있고, 특히 그 생
각의 순서, 방식, 깊이 등이 어떠했는가를 쉽게 유추할 수 있
다. 그는 ‘대학의 최우수학생’ 중 하나로 여겨졌고, 4년 과정
을 마칠 때 ‘철학에서 완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 프랑수아가 파리를 향한 출발은 1582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보다 깊
은 연구에서는 프랑수아가 열두 살이었기에 이를 1578년으로 앞당겨
야 한다고 주장한다. Étienne-Marie Lajeunie의 비판적 전기, Saint Fran-
çois de Sales: l’homme, la pensée, l’action, Paris, Guy Victor, 1966, 2 voll 참조.
29

4.2 Page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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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파리에서 지낸 이 8년 동안 프랑수아의 영적 삶은 중요한
발전을 이룬다. 샤를 오귀스트 드 살은 프랑수아의 파리 도착
에 대해 언급할 때 일정들에 대해 약간 임의적인 자유를 취했
다. “예수회 학교에 입학 신청을 하고 바로 묶을 거처에 칼을
내려놓았다.”
확실한 것은 브와지 영주가 열정적으로 시작하길 요구했
던 그의 공부, 그리고 신사가 되기 위해 받은 교육(사교춤, 승
마, 펜싱)으로 얻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는 “클레
르몽에서 성직을 향해 시작했던 것을 상기하며 이 결심을 바
꾸려 하지 않았다.” 그의 첫 생각은 “자신의 양심을 의탁할 수
있고 영원한 생명에 관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영적 지도신부
드 살 가문이 구입한 토랑스 성.
30

4.3 Page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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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를(아마도 학교의 사제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고, 그를 통
해 인문학의 스승을 만났다.”
라 로쉬와 안시에서처럼 그는 학우들 중에서 열정을 발산
했다. “겸손함으로 모든 이의 호감을 샀습니다. -샹탈 수녀의
언급- 그 복자께서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보는 것만으
로도 행복을 느꼈습니다. 이는 점방의 점원들 사이에서도 마
찬가지였습니다.” 자주 영성체를 해서 ‘8일마다’ 또는 적어도
매월 한 번은 성체를 영했다. 이 시기에 “즐겨 카프친 수도자
들과 함께 지냈고, 특히 고명한 앙즈 드 주아유스Ange de Joyeuse
신부를 매우 존경했다. 그는 또 이 모든 경건 행위에 더해 금
식과 굵은 베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극기의 실천을 비
밀리에 수행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열렬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는
데, 특히 생테티엔 디 그레Saint-Etienne des Grès의 검은 성모님을
사랑했다. 매일 그 성당 앞을 여러 차례 지나가야 했기에 몇
분씩 즐겨 그 앞에 머물렀다. 그 시기에 그는 단체에 들었다.
“거룩한 동정녀 단체에 많은 이들이 신심 깊게 그리고 천사처
럼 사는 것을 보며 그리고 영적 지도자의 권고에 따라 그들 중
하나가 되겠다고 지원했고, 그곳의 조수 또는 반장의 역할을
자주 맡았다.”
프랑수아는 파리에서의 자유시간을 할애하여 자신의 종
교에 관해 깊이 연구하고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소망을 채
웠다. 영혼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서 당연히 성경과 신앙의 신
비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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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Page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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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직 멀고도 먼 목표, 사제직을 위한 준비의 공인되지 않는 계획
일 뿐이었다. 트렌토공의회 회칙과 그라니Granier 주교의 강렬
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 불행한 시대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사람들을 교육할 정규 신학교의 개설이 안시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파리
에서 나는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들을 많이 배웠고, 나
자신을 위해서는 신학을 공부했다.”
어쨌든 어느 아름다운 날 프랑수아는 디아쥬로부터 철학
공부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
다는 허락을 받았다. 우리의 약아빠진 외교관이 어떻게 일을
처리했는지 샤를 오귀스트 드 살에 따르면 “같은 시기에 자신
의 후견인 디아쥬가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기에 집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의 글을 훔쳐보며 신학을 공부했다. 영원한 진리
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더 깊이 파고들려는 열망에 불타올
랐다. 신학적 탐구를 하다가 작은 어려움이라도 만나면 그것
을 깨우치기 위해 스승이나 다른 신학자들과 토론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다. 소르본Sorbonne에서 진행하는 토론에도 참석하
였고 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질문, 주장 및 결
정을 따로 기록했다. 인간의 지식보다 더 위대한 사람인 질베
르 지네브라Gilbert Génébrard의 수업을 자주 경청했다. 그리하
여 그는 자신의 생애 내내 찬탄의 대상이 되게 한 그 위대하고
심오한 신학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지네브라? 귀를 쫑긋 세워주는 이름이다. 클루니Cluny
베네딕토회원인 그는 박식한 천재로, 말도낫Maldonnat이 높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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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Page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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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평가한 역사적 비평 방식을 왕립학교의 엄격한 학문적 환경
에 도입했다. 게다가 소르본을 자주 찾았던 프랑수아는 종종
‘혁신가들’의 영토에서 맛있는 먹이를 발견했다. “또한 히브
리어를 배웠고 말도낫의 긍정신학을 배웠다.” 말도낫? 예수
회 신학자로 소르본의 총장들로부터 ‘진기함’이라는 비난을
받아 1577년 파리를 떠났지만, 그의 유명한 가르침들은 비밀
리에 넓게 펴져 있었다.
프랑수아의 신학을 향한 마음의 쏠림은 결단코 단순한 호
기심의 발로나 미학적 차원의 것이 아녔다. 그는 가까운 장래
에 직면하게 될 종교적 상황들을 예견했다. 아니, 그는 참으로
그것들을 내면에 담았고 그것들을 실천하며 살았다.
파리, 클레르몽 학교와 생테티엔 성당(1739, Turgot 지도의 일부).
33

4.6 Page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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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이제 막 이십 대에 접어든 젊은이에게 꼭 통과해야 할 위
기가 닥친다(이렇게 말해도 과하지 않다). 언제 이런 일이 일
어났는지 묻는다면, 역사학자들은 1586년과 1587년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러나 사안의 엄중함은 변하지 않는다. ‘폭
풍우’는 6주 동안 지속하였고 프랑수아의 건강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심각했다.
“한 번은 복자께서 내가 겪는 고통을 위로하시려고 말씀
하셨습니다. -샹탈 수녀의 증언이다- 파리의 학창 시절 큰
유혹에 빠져 마음이 몹시도 고통스럽고, 자기가 생각해도 이
제 구원의 희망이 전혀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었답니다. 이런 고통스런 헤맴 속에서도 그의 마
음속 깊은 곳에는 항상, 평생 온 힘을 다해 그리고 영원히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보다 더 큰 애정과 충실함으로, 하느님
을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결심을 지니고 있었답니다. 이 고통
은 적어도 3개월 넘게, 대략 6개월 정도 지속했는데, 그가 기
억하기로, 먹거나 자고 싶다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합니다. 몸은 비썩 말라가고, 밀랍처럼 노랗게 변
해 후견인을 매우 걱정스럽게 만들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성당 앞을 지나다 기도하러
그곳에 들어갔을 때 하느님의 자비가 그를 고통에서 풀어주
셨답니다. 성모님 제대 앞으로 나가 작은 탁자 위에 붙어있는
기도문을 발견했습니다. ‘영광스런 동정마리아여, 아무도 당
신에게로 얼굴을 돌리지 않았음을 기억하소서.’ 이 기도문을
다 외고 몸을 일으키는 그 순간 갑자기 씻은 듯이 완전하게 나
34

4.7 Page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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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았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의 병이 마치도 나병 환자의 비늘
처럼 발아래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답니다.”
샹탈 수녀의 이 증언은 더 바랄 것이 없이 명료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게 한다. ‘큰 유혹과 마음의 깊은 고통’은 대체
어디서 프랑수아에게 왔는가? 그것들은 분명 영적인 차원의
것들이다.
어찌 됐든 매우 예민한 성정의 일부는 아닐 것이고, 어
머니에게 극히 피곤할 때마다 발현하는 우울증을 유전적으
로 물려받은 다소 세심한 청년의 명확한 ‘우울증’이었을까?
1586~1587년 동안 프랑수아는 충분한 휴식의 시간을 가졌는
가? “철학 수업을 마치면서 신학 토론을 들으러 소르본에 가
기 위해 식사를 매우 자주 건너뛰었습니다.”라고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증언했다.
프랑수아가 이 시련, “깊은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는 한 신
사”에게 고백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선생은 신체적 질
병으로 인한 고통 외에도 폭력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고 합니다. … 하지만 선생님, 이 슬픈 감정이 당신에게 그렇
게 해로운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마
음이 여전히 돌연사나 하느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
혀 있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아아! 괴상한 고통입니다. … 6주
동안 고통을 견딘 내 영혼은 같은 고통을 당하는 분들을 동정
할 자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습니까? 그분
께 희망을 두는 이는 결코 흔들림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선
생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35

4.8 Page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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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예후가 어찌 됐든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위기는 그렇게 폭
력적인 상황으로 프랑수아에게 왔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
을 느낄 수밖에 없는 특성을 보였다. 증거물은 최고의 신비주
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처럼 거의 같은
시기인 1583년,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적 삶의 비범한 방식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했는데, 무엇보다도 항상 독창적인 형태
의 이 단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일치시키고자 하는
영혼을 정화하신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를 ‘어두
운 밤’이라고 불렀다. “영혼의 모든 힘과 감정은 이 어두운 밤
과 낡은 인간의 정화를 통해 거룩한 본성의 기쁨으로 완전히
2)
새로워진다.”
1586~1587년 사이에 프랑수아에게 닥친 위기의 혜택이
바로 이런 것인가? 영적 열병의 정확한 상태에 대해서는 그
냥 넘어가도록 하자. 하지만 매우 확실한 문서들은 그것이 지
닌 폭력성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우리에
게 자세히 알려준다.
이 모든 것이 순전히 사변적인 차원의 어려움, 즉 ‘구원의
예정 신비’에서 시작된 것 같다. 인간의 구원 문제에 대한 예
지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는 성 아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접하며 프랑수아는 구원의 불확실
성에 대한 인식을 키우기 시작했다. 자신의 태도를 묵상하고
또 공부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위험을 가늠
2) 십자가의 성 요한, 어둔 밤, 2권, 4장. 2.
36

4.9 Page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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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하면서, 그토록 예민하고 “그토록 감미롭게 사랑하는” 마음
을 지닌 그가 당혹스러운 처지에 빠진 것이다. 프랑수아는 구
원이 예정된 적은 수의 사람들 가운데 속한 것일까? 사실 위
기는 심리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것이지만, 프랑수아에게 있
어 영혼의 모든 문제는 인지 문제와 얽혀 복잡해졌다.
이 지점에서 샤를 오귀스트 드 살이 프랑수아의 상태를 후
견인인 디아즈와 집사인 프랑수아 파브르François Favre가 알아
차리도록 했듯이 우리도 이 고통에 빠진 영혼의 비탄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럴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듯
이 이 말들이 확실하다면, 그것들은 드 쿼엑스De Quoex 신부가
우리를 위해 보존한 영웅적 포기 행위와 「1591년 선언」에 호
응한다. 이 말들은 프랑수아의 영적 삶에 어떤 사랑의 순수함
이 도달했는지를 멋지게 드러내 준다. 자신의 유일한 목적을
소유했다는 확신이 그의 모든 희망에 반하여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정말 좌절된 사랑의 비탄이다. 하지만 그 고통의 불
은 이상하게도 이 사랑을 정화한다. 그리고 아픔을 주는 방식
으로 그에게 남겨진 행복을 향해 시선을 기울이게 한다. “아
아, 가련한 접니다. 당신의 감미로움을 그토록 부드럽게 맛보
게 하셨고 그리도 사랑스럽게 당신을 드러내셨던 바로 그분
의 은총으로부터 제가 제외되는 것입니까? 오 사랑! 오 자애!
오 내 모든 애정을 바친 아름다움이여! 그러니까 더는 당신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는 것인가요? 오 동정녀시여! 당신 아드
님 왕국에서 결코 뵐 수 없는 건가요? 제가 진정 구원의 무한
한 혜택에 참여할 수 없나요? 저의 좋으신 예수님은 다른 이
37

4.10 Page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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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들을 위해 돌아가셨듯이 저를 위해 돌아가신 것은 아닌가요?
아! 주님, 그것이 무엇이 됐든 지옥에서는 누구라도 당신을 찬
미할 수 없기에 영원 속에서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승의 삶에서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비탄과 애절함이 담긴
기도이지만, 영혼을 평화롭게 하기에는 부족하다.
프랑수아는 더 연구하고 토론할수록 뽑힌 자들에 대한 어
떤 예측보다 영광의 예정론에 더 많이 부딪혔다. 이런 영적인
상황 앞에 어떤 해결책을 찾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어느
날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죽은” 상태로 학교에서 돌아오는 도
중 자주 그랬듯이 생테티엔 데 그레 성당에 들어가고픈 생각
이 들었다. 샹탈 수녀의 말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비가 그를
풀어주려는 날’이었다. 이것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다양한 시
각이 있으나(위기의 해소 기간, 영웅적 포기 행위의 장소, 선
언의 날짜), 우리는 샹탈 수녀의 증언과 흐름을 따라가는 게
좋겠다.
성당에 들어서자 프랑수아는 곧바로 동정 마리아의 제대
로 향했다. 그때 자신의 ‘영웅적 포기 행위’, 드 쿼엑스 신부에
의해 보존된 봉헌을 갱신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님,
어떤 일이 일어나든 모든 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고, 당신께
서 저에 관한 예정 및 징벌의 영원한 결정을 어떻게 내리셨든
당신의 모든 길은 정의롭고 진리입니다. 당신의 심판은 깊은
질곡이며, 당신께서는 항상 바르시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
다. 주님 제가 영원 속에서 당신을 사랑하도록 허락받지 못한
다면 적어도 이승에서라도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나의 하느
38

5 Pages 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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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Page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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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님,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당신을 사랑하겠나이다. 설령 사탄
의 악령이 반대하도록 그리 꼬드겨도 항상 당신의 자비에 희
망을 두겠고 당신 찬미를 반복하겠나이다. 오 주 예수님, 살
아있는 사람들의 땅 위에서 당신은 항상 저의 희망이시고 저
의 구원이십니다. 제 잘못으로 인해 제가 매우 감미로운 당신
의 얼굴을 뵐 수 없는 저주받은 자 중에서도 가장 저주받은 자
가 되어야만 한다면, 적어도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저주하려
는 사람들 편에는 있지 않도록 해주소서.”
하느님의 뜻에 이렇게 가련할 정도로 순응했음을 재확인
하면서 “그는 탁자에 붙어 있는 기도 쪽지를 보았습니다. ‘자
애로우신 동정 마리아여 저를 기억하소서’라는 기도문인데,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이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리고 “기도
를 마치자 영육의 건강을 청했고, 하느님과 동정녀께 자신의
순결서원을 드렸으며, 자기 일생 매일 묵주기도를 드릴 것을
서원했답니다. 이 기도와 서원을 드리는 사이 유혹은 사라졌
고, 머리와 몸에서 나병의 딱지나 비늘이 떨어지듯 그렇게 건
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시련이 끝나갈 즈음 프랑수아는 하느님의 방식에 대해
귀중한 체험을 했고, 가톨릭 신학 정수에 관련된 교의적인 입
장을 세웠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혜택 중 흔히 첫
번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프랑수아는 갓 이십 대에 접어든 젊은 나이이지만, 하느님
께서 당신 사랑의 순수함을 심으려는 영혼에게 더 큰 고통의
시련을 주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시대를 고
39

5.2 Page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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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려한다면, 사제이자 주교였던 프랑수아가 뛰어든 논쟁들, 개
신교 · 각별한 신비주의 · 그리고 그의 생애 말년에 이르러 얀
세니즘의 선구자 · 은총과 관계에서 인간의 자유를 다루는 모
든 논쟁 등을 볼 때 순수한 사랑의 박사요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과 자유”에 관한 참된 박사를 준비하시는 하느님의 지혜
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프랑수아의 위기는 끝났을지라도 예정론의 문제는 오랫
동안 그의 종교적 사상의 중추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쓴 글에서 이 주제와 관련된 많은 주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어조와 분위기 면에서 1586~1587년의 위기에 가장 가까
운 것은 1591년경에 발표됐을 것이라고 유수의 비평가들이 말
하는 그 경이로운 「선언」이다. 우리가 전체를 다 인용할 수는
3)
없지만, 예정론의 사변적 문제에서 프랑수아가 진솔하게 채
택했던 사도적이며 영적인 태도를 잘 표현하는 구절을 여기
로 가져온다.
“복된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이 두 작가의 글들이 그의
위기를 촉발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이를 증폭시켰다.)의 발 아
래 엎드린 저는 하느님 관한 학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
도 그분을 알기 위해 모든 것을 외면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 간단한 문장에서 장차 그의 신비 사상이 어떨 것인가를 보
여준다.) 어쨌든 저는 그들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을 불러일으
킬 수 있는 어떤 중대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그리고 사
3) OEuvres, vol. XXII, pp. 63-68 참조
40

5.3 Page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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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실 제가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을뿐더러 그 심오한 신비가 너
무 밝아서 제 올빼미의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을 고
려할 때, 당신은 제가 쓴 것들(이 선언은 예정론에 관한 신학
노트의 끝부분에 있음)이 사실임을 의심하지 않으시기를 바
랍니다.”(이는 프랑수아가 De Auxiliis 논쟁에서 바오로 5세의
자문을 듣고 취한 입장인 듯하다) “나중에 제발 그러지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반대가 분명하다면, 또는 주 예수님, 결코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 혹시 더 잘 못 돼서 토마스학파들이 주
장하듯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시려는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내
가 단죄를 받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면, 저는 놀라 떨며 최고의
심판자에게 눈을 들고 기꺼이 예언자와 함께 말할 것입니다.
‘내 영혼을 하느님께 두지 않았는가? 아멘, 하느님 아버지, 그
렇게 되는 것이 당신께 좋은 듯하니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리
다.’ 하느님 당신께서 제 삶과 저에 대한 징벌을 되돌리시면서
제게 응답하실 때까지 쓰라린 마음으로 끝없이 이를 되뇌겠습
니다. ‘아들아 믿음을 가져라.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고 오히
려 그의 회개와 생명을 원하노라,’”
(프랑수아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강조
한 성경, 특히 복음 구절들을 모았다.)
“네가, 필요한 경우 고통까지 감내하면서 내 이름을 영광
스럽게 하려 했으니, 진정 그것을 통해 ‘벌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인 내 이름(라틴어로 된 아름다운 문장이다: glorificatio
nominis mei qui non est damnator, sed Jesus)에 영광과 찬송이
아주 미미하게라도 있었다면, 내 이름의 영광이 빛나는 그 영
41

5.4 Page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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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원한 복락에서 계속 나를 찬양하도록 너를 많은 이들 위로 높
이리라. 그럼 저는 예전과 다르게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아멘. 하느님 아버지, 그렇게 되는 것이 당신께 좋을 듯하나
이다. 오 하느님 제 마음은 당신으로 인한 고통을 받아들인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예수님, 제 마음은 당신 이름으로 인
한 영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멘, 예수님, 마
리아님.”
이 고백은 정점, 아마도 영적 삶의 진수를 드러내는 정점
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브르몽Bremond 신부는 이렇게 말한
다. “귀중한 유해, 파스칼의 부적l'amulette de Pascal보다 덜 숨차
고 흥미진진하지만, 훨씬 더 높은 가르침의 풍요를 담고 있
4)
다.” 예정설에 관한 다른 주석들, 특히 프랑수아가 유혹을 나
열했던 1591년의 부분 그리고 “자격 없음으로 예정된 이에게
만 징벌이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예정설은 자격 있음으로 예
정된 이에게도 기초를 둔다.”라는 명제를 그럴듯하게 해주는
글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글이 지닌 ‘가르침의 풍
요로움’이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신학적 입장이다. 그가 앞으로 개신교
도들과 벌인 모든 논쟁, 그의 모든 강론, 모든 영적 지도는 이
런 입장에 기초를 둘 것이다. 1618년, 그는 위기를 겪고 30년
이나 지나서 레시우스Lessius 신부에게 이렇게 언급한다. “리옹
의 예수회 도서관에서 신부님의 예정설에 관한 논고를 봤습
4) Henri Bremond, Histoire littéraire du sentiment religieux en France depuis la fin
des guerres de religion jusqu’à nos jours, Paris, Bloud et Gay, 1916, vol. I, p. 90.
42

5.5 Page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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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니다. 대충 훑어볼 시간밖에 없었는데, 저는 신부님께서 자격
있는 자의 전망 다음의 영광이라는 예정설의 의견을 받아들
이고 지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그렇게 오래되고 그
렇게 위안이 되기 때문에 여러 관점에서 매우 고매한 의견입
니다. 제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제가 「신애론Traité de l’amour
de Dieu」에서 밝혔듯이 이 가르침이 가장 참될 것이고, 가장 사
랑스럽고, 하느님의 자비 그리고 그분의 은총에 가장 잘 맞을
것이라고 저는 항상 생각했습니다.”
1586-1587년 영적 운명과 관련해 프랑수아 드 살이 겪은
위기의 여파들에 대해 고려해볼 만하다. 그의 사상에만 영향
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그의 신학적 이론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 및 모든 사도직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 위
기의 근저에는 자신을 위한 진짜 해방의 투쟁이 있었다. 이것
은 그에게 극단적인 고통과 갑작스러운 해방을 맛보게 하면
서 은혜로운 삶의 가장 본질적인 진리에 대한 그의 믿음을 강
화했고,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덕을 그 안
에서 계발시켰으며, 그에게 그리스도인 삶의 매우 심오한 경
험을 안겨 주었다.
간단하게 말해 이 위기는 그를 바르고 건강하며 참된 ‘하
느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해방’에 도달하게 해줬다. 이는 이제
부터 그가 열심히 노력해야 할 목적, 자신들의 하느님을 추구
하는 길에서 그에게 의지할 고매하고 겸손한 영혼들을 인도하
기 위해 노력해야 할 목적이다.
프랑수아의 첫 번째 파리 거주가 거의 끝나간다. 프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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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Page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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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아는 철학부의 과정을 마치고 1588년 초여름 사브와로 돌아
가는 길에 올랐다.
브와지 영주는 ‘이 큰 희망이 되는 아이’에게 참의원의 ‘붉
은색 긴 옷’을 입히기로 결심했다.
우선 8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 사브와로 돌아온 프랑수아
는 친척과 친구들을 만날 시간을 허락받았으나, 1588년 가을
이 되면 대학 공부를 위해 역시 데아쥬에 이끌려 파도바Padova
로 다시 떠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법학을
공부할 예정이었다. 동생인 갈루아Gallois도 함께 가서 예수회
학교에서 문학과정을 공부할 것이다.
파도바 옛 대학교의 회랑.
44

5.7 Page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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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파도바와 '두 종류의 법학' 박사
그래서 우리는 프랑수아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교회법
과 민법을 의미하는 '두 종류의 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뒤로는 데아쥬의 묵인 아래 일부 시간을 신
학 공부를 종합적으로 다시 하는 데 할애한다. “그는 하루 8
시간을 정해, 4시간은 법학 공부를 나머지 절반은 신학을 공
부했다.” 사실 그는 또한 취미로 식물학과 의학에 더 많은 관
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늘 관심사의 중심은 신앙에 관련된 사항이 차지했
다. “학교 공부뿐 아니라 그가 이미 파리에서 좋은 밑천을 마
련했던 신비주의 분야에서도 큰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좋
은 선생과 지도자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하늘의 영감을 받
아 “다른 이들보다는 월등히 출중한 예수회원인 안토니오 폿
세비노Antonio Possevino 신부를 선택한다.” 폿세비노 신부는 자
기 제자의 영적지도에 있어 큰 영향을 준다. 그는 예수회 학
교 내에 본부가 있던 성모영보회에 들어가도록 프랑수아를 부
추겼고 영신수련Esercizi Spirituali을 하도록 권했다. 1590년, 자
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프랑수아는 그를 불렀다.
하지만 파도바에서의 3년 동안 폿세비노 신부는 프랑수아의
스승이었다. 지네브라 사상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하면서 성
서를 대하는 미각을 발달케 했다. 그뿐만 아니라 경박하고 호
전적인 파도바의 학생문화 속에서 정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도록 도왔다.
45

5.8 Page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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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5)
이 시절에 관한 매우 중요한 문헌이 있다. 프랑수아는 자
기 지도자의 동의하에 삶의 한 규정을 세웠다. 이 페이지들 사
이에서 「신심생활입문」의 축소모형을 볼 수 있을까? 의심의
여지없이 아니다. 프랑수아가 파도바의 위험스러운 상황 속
에서도 하느님의 도움으로 항상 사제직을 향해 비밀스럽게 준
비하고 있었으며, 생테티엔 데 그레 성당에서 충실하게 지킬
요량으로 동정녀께 정결을 서원했음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
만 이 문헌이 1590년경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키겠다는 프랑
수아의 생각이 담긴 매우 값진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함을 부
정할 수 없다.
당시 그가 매우 정성을 기울인 신심업이 있다. “모든 일에
앞서 준비의 기도를 드리겠다. 적어도 매일 한 번씩, 즉 아침
마다 드릴 것이다. 이 기도는 하느님의 대전에서 내가 그날 계
획한 일들에 대해 미리 성찰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다음으로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해 일곱 가지 사항을 정했
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거룩
한 신비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매일 미사성제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등등….”
이제 그 일곱 가지의 사항 중 세 번째는 너무 독창적이어
서 잠시라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 제3장에서
이를 취하고 발전시킬 것이다. “몸에는 그 지체들이 쉬고 피
5) 지금까지 자주 확인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 문서가 1590년 말에서
1591년 초 사이에 프랑수아가 크게 앓았던 이후 기록됐다는 증거를 이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6

5.9 Page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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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곤한 부분들이 회복되기 위해 잠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혼
도 영적 능력의 힘과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하늘 배우자의 순
결한 품에서 졸고 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내 영혼
이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처럼 그분의 사랑스러운 품에
안겨, 감히 매일 사랑하는 구세주의 사랑스러운 가슴에서 이
거룩한 수면의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이 거룩한 ‘수면’에 대해 8가지 항목으로 자세히 설명한 문
서는 참으로 놀랍다. 그리스도인 명상의 중요한 주제들이 모
두 모여 있는 유일하게 활동적인 수면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
은 영혼의 태도이고, 이 태도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영혼을 쉬게 하며 하느님 사랑 안으로 인도하는 진정
한 휴식이고 즐거움이며 맛있는 기쁨이다.
“우선 이 성스러운 수면을 위해 편리한 시간을 정하고(이
렇게 텍스트가 시작됨), 무엇보다도 거룩한 하느님께서 제게
영감을 주시고 그분의 거룩한 신비 · 덕의 아름다움 · 그분 역
사의 높은 품위 · 큰 자유를 통해 나에게 허용하신 많은 혜택
등에 대해 체험하도록 해주신 모든 좋은 충동 · 의욕 · 애정 ·
결심 · 계획 · 감정 및 즐거운 것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할 것입
니다.”
이 감탄과 열정의 긴장은 끝까지 살아 있을 것이다. “둘째
는 아름답게 쉴 것입니다. 셋째는 편안하게 쉴 것입니다. 넷
째는 덕의 탁월함에 대한 인식 안에서 부드럽게 잠을 잘 것입
니다. 다섯째는 합리성의 아름다움 앞에 감탄으로 머물 것입
니다. 여섯째는 이 아름다운 속성(무한한 지혜, 전능, 하느님
47

5.10 Page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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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의 혜량할 수 없는 선하심)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수난의 거룩한 신비 속에서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주
의 깊게 볼 것입니다.”
여덟 번째 문단은 이곳에 인용할만하다. “저는 하느님만
지니신 오롯하고 유일한 선하심의 사랑 안에서 잠들 것입니
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림자가 아니라 그 자체를 맛보겠습니
다. 그 생수를 마시겠습니다. 이 생수를 만들어진 그릇이나
병으로 마시지 않고 직접 그 샘에서 마시리라. 이 사랑스러운
위엄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좋은지, 그 자체가 좋은지, 그 자
체를 위해 좋은지 맛보겠습니다. 오 주님, 오직 당신만이 근
본과 본질에서 선하심을 말하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반드
시 좋으십니다.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모든 조물은 당신
의 사랑스러운 선에 참여하기 때문에 오로지 선합니다.” 이
문서에는 “악덕에 걸려 넘어지거나 굴복하지 않고 동료들 사
이에서 그리고 만남에서 잘 행동하기 위한” 다른 규칙들이 포
함되어 있다.
이미 프랑수아 드 살은 교의적으로 확고하고 마음의 움
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강하고 부드러운 영성, 그의 매력
인 영혼을 끌어들이는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1586~1587년의 위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에 승리
를 거두지 않았다면, 그가 과연 영성적인 절정에 이를 수 있었
고 또 영적 수면에 관한 이 페이지들을 쓸 수 있었을까? 신앙
과 신뢰 안에서 발생하는 영적 고통을 다룰 수 없는 영혼이라
면 사랑의 샘 안으로 그렇게 자유롭게 잠길 수 없을 것이다.
48

6 Pages 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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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Page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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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법학이라는 힘든 공부와 대학가의 문란한 분위기 속에서 프
랑수아에게 이 규칙은 부적과 같은 것이었다. “자주 다시 읽
을 수 있도록(이 규칙과 이 법들) 그는 평소에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기도서의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에 그것들을 써
넣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재개하면서 그는 필연적으로 예정론 문제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다. 프랑수아가 자기 미래
계획을 폿세비노 신부에게 알려주자 그는 프랑수아의 성소를
크게 격려해줬다. “나를 믿으십시오. 당신의 마음은 법률가
가 되는 것으로 쏠리지 않았고, 당신의 눈은 먼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프랑수아가 종교행사에 참여하던 곳의 테아티니
Teatini 신부가 소개한 로렌조 스쿠폴리Lorenzo Scupoli의 책 「영적
전투Il Combattimento Spirituale」를 읽고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겠다
는 결심을 더 굳혔으며 결국 신학을 더 깊게 공부하게 됐다.
그의 사상적 스승은 계속 성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언뜻
보기에 샤를 오귀스트 드 살은 프랑수아가 “책장에서 항상 눈
앞에 두고 다른 책들을 이해하기 위해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
을 펼치는 것”을 상상했다. 프랑수아는 공부의 영역을 넓혔기
에 사실, 거기에는 ‘다른 책들’이 있었다. 그는 교부들에게 친
숙해 아구스티노, 예로니모, 크리소스토모, 특히 그를 매혹시
킨 치프리아노를 선호했다. 여기에 베르나르도와 보나벤투라
도 추가된다. 그러나 예정론의 정확한 입장에 관해서 그는 성
토마스의 사상으로 제시되는 것과 단호하게 거리를 두며, 그
의 예수회 스승들이 1588년 출판된 몰리나 신부의 책에 노골
49

6.2 Page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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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적으로 기대어 가르친 ‘더 진실하고 더 사랑스러운’ 의견을 고
6)
수했다. 즉 은총의 선물, 하느님의 예지, 섭리, 구원예정, 회
개 등과 자유 의지의 일치 등을 다루는 주제였다.
파도바에서 보낸 몇 년을 되돌아보면(아마도 1591년), 우
리가 이미 인용한 메모가 있는데, 그 메모에는 그때부터 장차
프랑수아가 갖게 될 믿음과 신뢰의 매우 순수한 태도가 깔끔
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파도바에서 그의 신학적 관찰의
네 ‘단편’이 모두 은총과 예정설의 문제를 암시한다는 점은 주
목할 만하다. 그중 하나가 특히 감동적이다. “나는 -1590년
12월 15일 프랑수아의 글- 내가 어릴 때 참된 것으로 여겼듯
이 청소년기, 그리고 나이와 학문을 더 해 더 많은 경험을 쌓
았을 때 내가 확신했던 이러한 사고방식이 훗날 교회의 판단
과 결정에 따른 참된 것이라고 계속 여기게 될까 봐, 이를 잊
고 후회하지 않도록 두렵고 주저하는 마음으로 적어 놓는다.
사실 그 이후로 생각이 확고해지면서 그 질문과 밀접하게 관
7)
련되어 있다고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묵상을 해왔다.”
이 신학적 메모에는 성령께 드리는 간청이나 예수 그리스
도께 드리는 찬미 등의 기도로 빼곡히 메워져 있고, 하느님의
뜻 탐구나 영혼을 위한 열정 등이 자유롭게 표현되고 있다.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이 모든 것을 기록한
다.” 프랑수아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사상이
6) Leonardo Lessio (Leys)에게 보낸 편지, OEuvres, vol. XVIII, pp.
271-274.
7) OEuvres, vol. XXII, p. 46 참조.
50

6.3 Page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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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완벽한 신사
교회의 가르침에 온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내가 도달했거나
도달할 결론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인 머리
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자세를 갖고 나는 매우 겸손한 마음으
로 이것들을 적었다. 설령 내 옹졸함이 나를 막아도 나의 어
머니고 진리의 기둥이며 사도적이고 로마에 계승된 가톨릭교
회가 취했고 취할 가르침을 온몸으로 끌어안기 위해 이를 실
천할 것이다.”
프랑수아는 “24세였고 그의 아버지가 박사학위를 취득하
라고 명령하며 제시한 법학 공부에 전념해야 할 시간이 다 끝
났다.” 덕과 학식이 충만하고 인간이기보다는 천사에 가까운
사람이라 불리는 위대한 법학자 귀도 판치롤리Guido Panciroli
프랑수아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의 ‘논문지도교
수’가 되고자 했다.
논문 심사는 1591년 9월 5일에 열렸다. 프랑수아의 논문
발표는 매우 훌륭했고 질의응답에서도 “가르침에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 매우 확고하게” 답했다. “판치롤리 지도교수는
–샤를 아귀스트 드 살이 말한다-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이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반지와 왕관을 씌워주고 대학교의 특전
을 줬다.” 프랑수아는 마침내 교회법 박사요 사회법 박사라는
두 타이틀in utroque iure을 모두 획득했다. “파도바 시민들의 마
음을 사로잡았기에” 모두가 그를 축하했다.
브와지 영주와 그 가족들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전쟁
을 피해 라 튈La Thuile 성에 머물며 프랑수아가 이룬 이 성취의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이 젊은 박사는 프랑스로 돌아가기 앞서
51

6.4 Page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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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이미 오래전에 했던 서약을 이루기 위해 로레토Loreto로 순례
를 갔다. 당신의 전통에 따라 그리고 샹탈 부인조차 그랬다고
주장하듯이, 이때 그의 첫 번째 로마 여행이 있었을까? 이런
전통은 틀림없이 존중해야 하지만, 자료와 문헌들에 대해 깊
게 연구한 것에 따르면 이 추정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고 아마
도 실행되지 않았던 것 같다.
1592년 2월 프랑수아는 “드 살의 영주가 사랑하는 아들을
조바심내며 기다리던” 라 튈에 도착했다.
52

6.5 Page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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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노바의 수석의전사제
3장, 제노바 수석의전사제
프랑수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
가족들의 환영이 얼마나 뜨겁고 열성적이었는지는 상상하
기는 어렵지 않다. 아직 채 스물다섯 살이 되지 않은 프랑수아
는 모두가 보기에 은총과 본성에서 풍성한 선물로 가득 차 있
는 것 같았다. 이 젊은 박사는 또한 완벽한 신사요 아름다운
태도를 지닌 기사이며 필요할 경우 ‘남자다운 용기’로 칼을 뽑
을 수 있음을 여러 번 입증했다. 그는 한 귀족 가문의 맏아들
로 세상에 등장할 자격이 충분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 대
해 거창한 것을 염두에 두면서” 그에게 빌라로제Villaroget의 영
주 격을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 전체’가 가까이서 보듯이 그를 잘 살펴보자.
자신이 쓴 글 영적 수면에서 덕을 갖춘 사람의 초상을 완벽한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넷째 자리, 덕의 탁월함에
대한 인식 안에서 부드럽게 잠을 잘 것이다. 그리 아름답고,
복 받았고, 우아하고, 관대하며, 매력적이고, 힘이 넘치는 게
덕이다. 그것은 사람을 내면은 물론 외적으로도 아름답게 한
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주께 비할 바 없는 기쁨을 드
리게 한다. 그것은 사람에게 합당하도록 극적으로 자신에게
53

6.6 Page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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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잘 어울리게 한다. 그리고 매 순간 그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즐거움, 얼마나 정직한 기쁨을 주는가! 아! 사람을 성
화하고, 천사가 되게 하며, 작은 하느님으로 만들고 지금 이
미 천국을 맛보게 하는 것이 덕이다.”
프랑수아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그가 지닌 내적 아름다
움에 기인한다. 파도바 시절부터 “그에게서는 오로지 사제적
인 특성만 보였다.”고 리비에르 신부가 단언한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은 갈라져 있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담은 존경이 그를 괴롭혔고 주저하게 했다. 그들의 뜻
을 먼저 어느 정도 알아보지도 않고 어린양과 원죄 없는 혼인
을 위한 비가역적인 동의를 구할 것인지, 아니면 이 관문을 통
과할 수 있도록 얼마의 시간을 모든 가능한 재량을 다해 미뤄
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기다렸으나, 마침내 자신의 결심
을 밝혀야 할 시간이 오지 않았는가?
어쨌든 프랑수아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브와지 영주는 이
미 일흔 살에 가까운데, 큰 고통이 될 게 틀림없는 이 충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프랑수아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
해 아버지의 권위를 행사하지는 않을까? 시대의 관습은 그
에게 이런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요컨대, 상황은 지속된
다. 브와지 영주는 이 미뤄지는 상황을 정확히 포착했다. 어
느 날 아들에게 “참의원 변호사가 되기 위해 샹베리Chambéry
로 가거라.”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프랑수아는 11월 24일, 자
신이 법조계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줄 문서를 작성하는 데 동의
했다. 동시에 브와시 영주는 가문이나 자질에서 정말 귀족이
54

6.7 Page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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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노바의 수석의전사제
라 할 수 있는 규수, 프랑수아즈 슈셰 드 미리벨Françoise Suchet
de Miribel과 프랑수아의 결혼을 구상했다. 프랑수아는 그녀와
만나는 것을 “마치도 다른 일로 온 것처럼, 샬롱쉬Sallanches
모든 이들에게 단순히 인사하듯 인사만 하고 말리라.”는 생각
으로 받아들였다.
드 살 가문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영광을 볼 수 있는 다른
감미로운 위기가 따른다. 사브와의 군주인 샤를 엠마누엘 공
작은 빌라로제 영주의 명석함과 학식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사
브와 왕국의 참의원 자격을 부여한다는 편지를 토리노에서
헤르몽스Hermance의 남작인 프랑수아 멜키오르 드 생주아르
François Melchior de Saint-Jeoire를 통해 보냈다. 프랑수아는 공작에
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이를 거절했다.
이 모든 일련의 사안들은 그에게 이 애매한 상태를 벗어나
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제네바 대성당의 의
전사제인 사촌 루이 드 살Louis de Sales(프랑수아보다 세 살이 많
았고 그의 사도직 활동의 동반자가 된다.)에게 가서 자기 마음
을 온전히 드러내 보였다.” 루이는 프랑수아에게 삼촌의 동의
받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이후 모든 것들이 빠르게 진행됐다. 제네바 대성당의
수석의전사제의 자리가 비어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루이는 프
랑수아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자기 사촌을 그 자리에 앉히고
자 했다. 이 계획을 프랑수아 드 로니스François de Ronys 의전사
제에게 맡겼다. 그는 “로마에 많은 지인이 있었고, 이익을 도
출하는 데 매우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로니 신부는
55

6.8 Page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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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안시, 대성당
56

6.9 Page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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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노바의 수석의전사제
즉시 절차를 연구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시도를 너무나
좋아하셔서 짧은 시간에 성하께서 허락하신 것이 확실했다.”
1593년 3월 7일, 로마에서 임명 칙서가 서명되었고, 5월 7일
에 안시의 주교관에 도착했다.
프랑수아는 깜짝 놀라 “꿈을 꾸는 줄 알았습니다.”고 했
다. 그 역시 사촌처럼 이런 방식의 처리가 아버지의 자존심을
너무 상하지 않으면서 브와지 영주로부터 ‘교회에 속하도록’
하는 허락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프랑수아와 아버지의 대면은 5월 9일에 있었다. 브와지
영주가 전통에 의지한 권위를 극적으로 드러낼 것인가? 아들
을 되잡기 위해 시간을 좀 더 벌어보려 할 것인가? 그런 것들
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결국 아들의 뜻에 동의했고 그
를 축복했다.
하루 뒤 1593년 5월 10일, 프랑수아는 수단을 입었다. 예
식은 튈에 있는 마을 성당에서 거행됐다. “정말 온 정성을 다
하시는 당신을 보니 –브바르 신부가 말했다- 카프친회 수도
복을 입으시는 것 같군요.” “아 신부님, 저는 지금 베드로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5월 12일, 프랑수아는 안시로 와서 성
대한 예식 없이 수석의전사제의 역할을 맡았다. 주교의 동의
하에 다가오는 성령강림 축일에 네 가지 소품과 차부제품을
받기로 했다.
그의 고해사제인 에메 브바르 신부와 함께 수품을 준비하
기 위해 드 살 성으로 갔다. 5월 18일에 도착하여 6월 7일까
지 그곳에 머물며, 혼자의 시간, 성찰의 시간, 기도의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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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Page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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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가졌다. 이 피정에 관한 감동적인 메아리가 방문수녀회의 성
Année Sainte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5월 19일 프랑수아는 브
바르 신부에게 15년 전에 르가 주교에게 받은 삭발례를 경신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지금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의 성소에 지장을 줄 정도로 유혹의 물결이 쏟아지는 “아름다
운 갈색머리”를 희생한 것이다. “아, 신부님 –브바르 신부에
게 고백한다- 저는 이틀째 성소를 거스르는 큰 전투를 벌이
고 있습니다. 악마는 저를 유혹하기 위해 제 영혼 곳곳을 들쑤
시며, 심지어는 제 머리털까지 공략의 목표로 삼아 삭발을 혐
오하게까지 합니다. 삼손의 엄청난 힘이 그의 긴 머리에서 나
왔다면, 내 약점의 한 부분은 바로 제 머리털에서 나옵니다.
머리털이 잘려 나간 뒤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더 힘이 생
기는 만큼, 나는 이제부터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분의 은총 속에서 새 삶을 살기 위해, 나 자신을 옛사람으로
부터 온전히 벗어버릴 것을 거룩한 주님에게 약속했습니다.”
사제품을 영적으로 준비하는 동안 프랑수아는 이미 치른
교회법 시험을 마치기 위해 첫 강론을 작성했다. 주제는 교회
가 거행하는 성령강림축일 전례에 맞췄다. 이런 상황에서 프
랑수아는 한 강론을 부탁받았다. “이것이 모든 강론의 시작이
다.” 지금 이 강론의 한 구절이 영혼의 자유 의지와 은총의 행
위를 암시한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1593년 6월 7일, 프랑수아는 안시로 돌아왔다. 이어 8일
에 자신의 법적 장자권과 빌라로제의 영주 칭호를 동생 갈루
아에게 넘겼다. 그리고 다음 날인 9일 그라니 주교로부터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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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Pages 6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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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Page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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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노바의 수석의전사제
가지 소품을 받고 11일에는 차부제품을 받았다. “이어 –샤를
아귀스트 드 살이 덧붙인다- 주교는 그에게 성체성혈 축일
강론을 할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사실 제8일에만 강론을 했
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시는 우리 주님 몸의 실재성”
에 관한 이 강론 내용을 적은 글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애석하다. 샤를 아귀스트 드 살이 남긴 요약으로 판
단할 때, 젊은 강론자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자기
생각을 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지고의 선은 자신에 관해 최
상의 소통을 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세 가지 통교가 있다.
첫째는 성부가 성자와 통교하며 이를 통해 성령과 통교하는
것이다. 둘째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거룩한 인격이 인간의 본
성과 통교하는 것이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몸으
로 자연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통교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통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셋째는 둘째 없이 존재
할 수 없고 둘째 또한 셋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곧
바로 그리스도교 신비의 핵심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아직 차부제에 불과함에도 이 젊은 수석의전사제는 더없
는 활력을 보여줬다. 1593년 6월 24일부터 성탄절까지 적어
도 다섯 번의 큰 강론을 했는데, 어디서든 그의 강론은 “마치
밝은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그는 늘 공부하고, 일하고, 성
가대에 열심히 하며 전례에 열정적임을 보여줬다. 환자들을
방문하고 다투는 이들을 화해로 주선했다. 또 영혼들의 성화
를 위해 ‘거룩한 십자가의 구속회’라는 신심단체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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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Page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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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교회의 사람’ 프랑수아는 6개월도 되지 않았으나 이 초보
자의 놀라운 사도적 투신, 영혼의 경이로운 열성, 타오르는 불
꽃 등은 사람들을 감탄케 했다. 앞으로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
었을 때 과연 어떨 것인가? 이미 그때부터 그는 어깨 위로 수
많은 영혼들을 잔뜩 실었다. 그에게 주어진 은총은 평범한 것
이 아녔다. 그의 첫 강론을 들은 그라니 주교가 외쳤다 한다.
“우리는 새 사도를 얻었습니다.” 참된 예언이다! 사도들의 삶
은 프랑수아가 항상 최대한 닮고자 노력했던 이상이었다.
9월 셋째 주 토요일인 18일, 프랑수아는 부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은 대림절 셋째 토요일인 12월 18일에 받기로 했다. 12
월 15일 사제품을 준비하면서 그가 친구 앙투앙 파브르Antoine
Favre에게 보낸 편지 덕분에 당시 그의 영혼을 지배하던 감정
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성 크리소스토모가 말했듯이
무섭고 두려운 날이 다가올수록 주교님의 뜻, 결국에는 하느
님의 뜻에 따라(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의 뜻을 설명할 수 없기
에) 모든 단계의 성직을 차례로 받으며 사제직의 존귀한 품위
에 도달할 수품일이 다가올수록 저를 기다리고 있는 그 탁월
한 영예와 훌륭한 선에 대해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전
히 주님의 것인 한 사람이 이 전환을 알아채지 못한 채 맞이하
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프랑수아가 두려움 없이 이 ‘전환’, “이 세상에서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움”을 맞이한 것은 아니다. “제가 겪어
온바 중 가장 큰 안절부절의 상황에 놓였습니다. … 제가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성 예로니모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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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Page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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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노바의 수석의전사제
로 알아들을 수 없고, 합당하게 찬미할 수 없는 경지를 지닌
지혜의 천사까지도 감히 끌어안을 생각이나 바른 찬미를 드
릴 수 없는 그분을, 제 손으로 잡고 그 말씀을 통해 그분을 생
산하도록 불리움 받는 것보다 사람에게 더 위험하고 힘든 일
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프랑수아는 친구의 신앙에 의지해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
황이 이해되고 영혼 상태에 대한 동정을 구했다. “존경하는
친구여, 나는 그토록 거룩하고 위엄 있는 것에 두려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당연히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떨어져 있
는 거리가 눈을 속입니다. 가까이서 물체를 측정하는 것과 멀
리서 감상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오로지 내 마음의 혼란을
제대로 알아줄 존경하는 벗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것을 매우
경애하고 흠숭하는 마음으로 대하기에, 미사성제를 주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것인지를, 얼마나 쉽게 죄를 범
하거나 엄한 죄에 빠지는지를, 이 거룩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우정에 기댄 하소연으로 앙투앙 파브르를 기만
해서는 안 된다. “용기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프랑수아
가 덧붙인다- 이제껏 한 번도 용기가 나를 떠난 적이 없습니
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이렇게 고백
한 후 “단지 그대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한 말입니
다. 그게 고통스러운 마음을 달래는 데 유용한 치료제라는 것
을 잘 압니다.”라며 결의에 찬 글을 이어갔다. “거룩한 신비
가 나 자신의 가치보다 훨씬 더 큰 희망과 기쁨의 여지를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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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Page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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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토랑스 성당 내부, 프랑수아 드 살이 세례성사와 주교품을 받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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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노바의 수석의전사제
그의 부모, 그의 영성을 따른 또는 그를 주보로 모신 성인들이 게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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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Page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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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두지 않을 정도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하지 마십시
오. 무엇보다도 가장 숭고한 이 직분, 즉 희생 그리고 가장 위
엄 있는 구속자의 희생에 응할 수 있게 되어 기쁨으로 용약합
니다laetor plurimum et gaudeo.”
유감스럽게도 이 편지의 글은 여기에서 멈췄다. 그러나
이 고백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모두에게 매우 소중하다. 이
편지는 프랑수아의 한없이 섬세하고 신중한 영혼, 그 힘과 추
진력은 믿음의 진리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것임을 잘 표현하
고 있다.
12월 18일, 프랑수아 드 살은 드디어 사제가 됐다. “선한
고위성직자는 –샤를 아귀스트 드 살의 말이다- 그에게 손을
얹고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었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멈추지 못
했다. 그러는 동안 하느님의 종 프랑수아는 그 품격을 생각하
는 데 열중하여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
첫 미사를 드리기에 앞서 이 새 사제는 아직도 삼 일간의
피정으로 이를 준비하고자 했다. “1593년 12월 21일, 성 토마
스 사도 축일 대성당에서 자신의 첫 미사를 드렸다.” “그 첫
희생제에서 –어느 날 샹탈 수녀에게 고백했다- 하느님께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내 영혼을 소유하셨습니다.” “저녁
기도를 마치고 -샤를 아귀스트 드 살이 덧붙인다- 자기희생
을 주제로 매우 열성적인 강론을 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이런 강론은 자기 고백이 확실하고 인생 설계에 대한 선언이
라고 할 수 있기에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것은 애
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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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Page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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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노바의 수석의전사제
이후 5년 동안(1593~1598)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가 프랑
수아 드 살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다. 당대의 개신교도
(적어도 진실한 개신교도)는 물론 오늘날 가장 비판적인 역사
가들까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
제의 영혼에서 은총이 빛나고 있다. 우리는 섭리의 행운에 의
해 프랑수아가 명백히 상반되는 두 가지 상황에서 자신의 사
제직을 수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안시 도시의 매우 평화롭
고 안정된 가톨릭의 상황(1593년 성탄절 – 1594년 9월)과 샤
블레Chiablese 선교지의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황이 그것이다.
사제직의 첫 몇 개월
안시에서의 사도직은 성탄절이 지나고 바로 거행된 수석
의전사제의 장엄한 취임식으로 시작했다. “많은 명사와 박사
로 구성된 의전사제단은 관례와 절차에 따라 그의 품위와 학
식을 검토한 후, 중앙 제단에 입을 맞추게 하고 다른 격식을
통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육체적으로 수석의전사제의 품
격을 갖추게 했다.”
이 기회를 빌려 프랑수아는 놀랄만한 연설을 했다. 감사의
뜻을 표하고 그렇게 젊고 경험도 없는 자기가 “제네바 성 베
드로 성당의 경애로운 의전사제단”을 책임지도록 임명된 것
에 대해 얼마나 놀랐었는지를 말하고, 당연히 안타까운 망명
의 상황에 대한 슬픔을 표하며, 주교와 의전사제들이 가슴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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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Page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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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이 담고 있는 소망인 주교좌 도시로 되돌아가는 날이 하루속
히 오길 빌었다. 수석사제는 의전사제단에 한 가지 제안을 했
다. “매우 중요한 만큼 힘든 것이지만, 불가능하지도 않고 우
리에게 허황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 모임의 제 자리, 제
네바를 되찾는 것입니다.”
십자군을 일으키자는 것인가? 연설을 들은 청중들은 귀를
의심했다. 그 나라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무장충돌과
골육상쟁은 거의 영구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프랑수아는
빠르게 이 수복이 의미하는 바를 정의하여 말했다. “제네바의
성벽을 사랑으로 흔듭시다. 사랑으로 쳐들어갑시다. 사랑으
로 수복합시다. 여러분들에게 쇠뭉치를 들라고 하지 않고 지
옥 불을 연상케 하는 냄새와 맛을 지닌 가루를 권하지도 않습
니다. 반대파가 아니라 우리가 참고 견디는 굶주림과 목마름
으로 적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기도로써 그들을 물리칠 것입
니다. 이런 종류의 악령들은 오로지 기도와 단식으로만 물리
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한 도시를 공략하려
는 데 쉬운 방법을 찾습니까?”
그리고 프랑수아는 성경의 한 장면을 예로 들었다. 홀로페
르네스가 배툴리아를 포위했을 때 도시로 들어가는 물길을 차
단하고 갈증을 해소할 모든 샘을 점령했다(유딧기 7,17). 제
네바에도 같은 일을 해야 한다. “이단자 족속 전체를 먹여 살
리는 수로가 있습니다. 바로 비뚤어진 사제들의 언행, 한마디
로 모든 성직자들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타락이 그것입니다.
우리 탓으로 인해 매일 나라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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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Page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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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노바의 수석의전사제
욕을 당하시고 있으며, 주님은 지극히 타당하게도 당신 예언
자들의 입을 통해 그토록 쓰디쓴 경고를 보내십니다. 이것이
이단자들의 타는 듯한 갈증을 풀어줄 모순의 물이라고 여겨
집니다. 이 악당들은 우리의 악행을 마시고, 기록된 바대로 악
행을 샘물처럼 마십니다. 그러므로, 오 사랑의 동반자들이여,
그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니, 제발 부
탁하건대 이 물길의 흐름을 막아주세요.”
태평인 의전사제들은 그러한 전사의 사명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것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수석의전사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를 소환하며 자신의 진술을 무자비하게 이어갔
다. “우리 모두의 죄로 인해 그 유배 기간이 연장됨에 따라 훨
씬 더 무겁고 덜 명예로운 치욕과 이로 인해 우리가 겪고 있
는 고통을 앞에 두고, 정령 우리는 둔감하게 남아 있을 것입니
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네바의 의전사제들인 우린 뭘 해야 합
니까? 우리는 유배되었고 우리가 밟고 살아가는 이 땅, 이방
인의 나라를 전전하고 있지 않나요? 바빌론 강 언덕, 즉 혼란
과 죄의 자리에 앉읍시다. 그리고 제네바라는 시온을 생각하
며 눈물을 흘립니다. 한때 그리스도의 승리로 그렇게 영광스
럽던 그곳이 오늘날은 어떤가요. 우리 시대와 우리 조상들 시
대의 죄악으로 인해 이단의 가장 수치스러운 노예 상태에 놓
여 있습니다.”
수석사제의 모든 권고를 요약하는 마지막 호소가 이어진
다. “이 말씀을 끝맺으며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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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 Page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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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의 규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린 이름뿐 아니라 행실에서도
명실상부 의전사제들, 즉 고위성직자들이고 하느님의 아들들
이어야 합니다.”
프랑수아 드 살의 말이 너무 ‘화려하다’고 평가하는 사람
들에게 이 문헌 전체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더 서사적인 사람
들도 있다). 이러한 생각, 이러한 가르침, 이 어조 등은 곧 진
정한 프랑수아 드 살, 즉 세상의 죄와 씨름하고 기도와 참회와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그리스도
의 사제를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다.
이 젊은 수석사제는 아름다운 강론에 만족하지 않고 행동
으로 모범을 보였다. 부모님과 친구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귀한 공작 전하께서 임명하신 상원의원의 지위”를 사
양하기로 고집했다. 그는 영예의 상원의원 자리에 앉기를 거
절하면서 다른 편에서 의전사제단 기능에 열심히 임했다. “이
런 격언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라니 주교에게 답하며 말했
다- 개별적인 행동보다 공동체적인 행동을 즐겨라.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수석사제는 자신의 직책에 충실히 임하는 것으로 교회법
이 요구하는 규율 준수를 충족한다고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수아가 자신의 사제직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아
녔다.
그 시절에 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샹탈 수녀는 이렇게 말
했다. “모두 그분께서 매일 거룩한 미사를 드리고 매일 성무
활동에 임했다는 것을 압니다. 고해성사를 주고, 자주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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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Pages 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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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Page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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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노바의 수석의전사제
의 말씀을 멋지게 강론하셨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고백성사에 대한 젊은 사제의 열정에 주목하자. 이는 그
의 지속적인 사도직의 한 특성이다. “자기 주교의 특별 권한
을 받아(그라니 주교는 프랑수아를 교구의 고해사제로 임명
했다.) 그는 고해를 듣기 위해 대성당 안 오른편 출입문 가까
이에 고해소를 세웠다. 그리고 자주 새벽부터 정오까지 그곳
에 머물며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신자의 고해
를 들었다.”
이 주장이 과장됐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프랑수아는 주
교가 된 뒤에도 이 고해성사 사도직을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
로 여긴다고 항상 말했다. “젊은이와 노인, 가난한 이와 부자,
귀족과 농부, 건강한 이와 환자, 건장한 이와 약한 이” 모두
고해성사를 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성사를 보
기 위해 그에게로 달려갔다. 교구 내의 다른 사제들에게 성사
주기를 즐겼고, 수석사제관은 제네바 이단자들에 의해 그 모
든 소유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의 수입은 매우 적었으나, 이 사
도직으로 인한 일체 금전적 보상을 거절했다. 반대로 자선을
행할 기회를 찾았고, “부끄러워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몰래
주는” 방법을 찾았다. 위로하기, 달래주기 그리고 화해를 주
선하기를 즐겼다. 그에게 많은 이들이 법적인 문제나 신학적
인 문제를 가지고 왔다.
이 모든 열정과 성취가 가끔은 질투나 비판을 불러일으키
기도 했다. 수석사제와 주교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경우도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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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Page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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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종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참을성과 겸손으로 자신의 적들을 이
겼고, 자기에게 잘못한 이들에게 오로지 용서로써 응답했다.
반면에 그가 필요한 경우 그를 돕고 지원하는 친구들도 많았
다. 그들 중 상원의원 앙투앙 파브르가 두드러졌는데 그는 편
지에서 수석사제를 더없이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감미로운 형
제라고 칭했다. 프랑수아는 그와 함께 1594년 성령강림 화요
일 진품 십자가 조각이 보존된 엑스Aix 성당에서 ‘안시의 속죄
자회’와 파브르에 의해 창립된 ‘샴베리Chambéry 속죄자회’ 사
이의 합동 순례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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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Page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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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수석의전사제의 선택
이 시기 중 프랑수아의 삶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
제네바 수석의전사제는 열심히 일하는 삶을 서약한 것처럼 보
이고, 아무 위험이나 어려움 없이 멋진 삶을 영위하는 듯했으
나, 앞으로 4년 동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심지어는 성 바
오로와 비견될 가난하고 위협받는 궁핍한 선교사가 될 것이
다. 그가 취임 연설에서 밝힌 것처럼 제네바를 직접 공략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제네바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목사
들을 먼저 공격해야 할 것이다. 위협, 모욕, 갈등, 실패, 포기
등등이 그를 에워쌀 것이다. 프랑수아 드 살의 생애에서 아마
도 그 시기보다 그가 더 위대해 보이는 기간은 없을 것이다.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샤블레의 선교la Mission du Chablais라고
부르는 시기이다.
샤블레는 십여km의 길이에 너비는 5km 정도 되는 작은
고을로 북쪽으로는 레망Léman 호수가 남쪽에는 포시니Faucigny
산맥이 둘러쳐진 곳이다. 1594년 사브와 공국의 샤를 엠마누
Charles Emmanuel 공작이 회복한 영토로, 그라니 제네바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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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Page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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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의 관할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종교적 상황은 주교
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2만5천여 명의 주민 중 겨우 백
여 명 정도만 가톨릭이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또
는 강압에 의해 개신교로 넘어가 있었다.
어떻게 하다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가? 제네바가 개신교
도에게 떨어진 후 이 지역이 겪은 우여곡절을 자세히 설명하
려면 너무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단지 프랑수아가 토농에서
1596년 2월 19일에 토리노 주재 교황대사 줄리오 체사레 릿
카르디Giulio Cesare Riccardi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 ‘알림’의 일부
만 발췌해본다. “제네바 교구의 한 부분(샤블레를 말함)은 60
년 전 베른 사람들에게 침탈을 당해 이단교도의 지역이 되었
습니다. 그 시기가 지나고 이 지방은 공작의 군대에 의해 수복
되어 옛 전통과 재회했습니다. 주교의 명에 의해 그들에게 설
파된 강론보다 조총이 내는 소음에 더 움찔거렸던 많은 주민
은 거룩한 자모이신 성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
은 제네바와 프랑스의 침투에 의해 감염되었고 사람들은 다
시 수렁에 빠졌습니다.”
프랑수아가 이 찢어진 나라를 되돌리기 위해 일한 시기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 사이에 놓여 있다. 1593년 7월 25일, 앙
리 드 나바Henri de Navarre의 철수는 샤를 엠마누엘에게 샤블레
지방을 회복하도록 했으며, 영혼에 대한 개신교의 압박을 제
거하지는 않았으나 약화시켰다(제네바 사람들이 다시 그 땅
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모두 두려워했다). 그리고 1598년의
베르방 조약Traité de Vervins은 프랑스와 스페인을 화해로 이끌
72

8.5 Page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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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고 평화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프랑스와 사브와 사이
의 논쟁을 미완으로 남겼다. 따라서 주민들은 정치적으로 불
안정한 상황 아래에 놓였고 –당시 시대의 불운이었듯이- 종
교적으로도 어쩔 수 없이 갈팡질팡했다. 샤를 엠마누엘 공작
은 공국의 상황이나 종교적인 입장에서도 프랑수아의 샤블레
개종 시도의 성공을 진정 간절히 원지만, 그에게는 군사적인
지출이 너무 큰 시기였기에 프랑수아가 교회를 다시 세우고
다양한 여러 사업, 특히 젊은이들을 위한 학교사업을 펼치는
데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여건은 매우
정치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던 샤블레의 선교활동에 명
백한 복음적 성격을 안겨줬다. 프랑수아는 이 지방의 영적 재
정복을 위해 가난, 고생, 참회 그리고 방해의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일해야 했다.
왜 하필 프랑수아가 이 위험하고 힘든 사도직에 선택되었
는가? 1589년부터 공작은 그라니 주교에게 샤블레 지방의 50
개 옛 성당에서 일할 본당신부들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1
년 뒤인 1591년 2월, 이 50명의 사제들은 칼빈교도들에 의해
다시 추방되었다. 그 노력의 가장 분명한 결과는 그렇게 시도
한 방식이 확실히 좋은 해법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줬다. 적
어도 시작하기 위해서, 지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잘 준비된 사
제 두세 명을 보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평가했다. “그
위대한 성직자(그라니 주교)는 -샤를 아귀스트 드 살이 말했
다- 그 땅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뿌릴만한 능력을 지닌 이
를 찾기 위해 온 사방을 둘러봤다. 거의 전부 두려움으로 가슴
73

8.6 Page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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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을 채우고 있었기에 주교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정직하게
말해, 그는 첫눈에 그의 아들 같은 드 살 수석사제를 보았었
다. 하지만 그 스스로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하고 있었기에 차마
프랑수아에게 이를 제안하지 못했다.”
그라니 주교는 지원자를 찾기 위해 자기 성직자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이런 목적으로 소집된 전
체 회의에 관대한 프랑수아도 당연히 참석했고, 아무도 아무
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담대하
게 말했다. ‘주교님께서 제게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시고, 제
게 요구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순명하여 갈 용의가 있습니다.’
이런 자원이 주교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 말할 수 없었다.
주교는 그가 능력이 넘친다고 평가할 뿐 아니라 안성맞춤이
라고 답했다.”
장면은 아름답고 프랑수아가 타고난 기질과 재능에 꼭 맞
았다. 그러나 아마도 이 이야기가 수석사제의 관대함을 일절
감소시키지 않으며 그 자신이 1596년 2월 19일에 릿카르디 교
황대사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밝힌 뉘앙스를 충분히 강조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귀하신 공작 전하와 다른 한편
으로는 우리의 가장 존경하는 주교께서 이 질병의 치유를 원
하셨기에, 저는 위에서 언급한 저의 지극히 존경하는 주교님
의 명령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저는 많은 악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아니라 오히려 탐험가이자 병참장교로서 지역에 치료
제와 의사를 제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조사하러 왔
습니다.”
74

8.7 Page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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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요컨대, 선교사라기보다 선교 준비를 담당하는 선구자에
가깝다. 샤를 아귀스트 드 살이 말하듯 그라니 주교의 글이 이
런 상황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 “(주교는) 여기에 프랑수아가
그의 노구를 돕고 싶어 한다는 것에 감사하는 말을 보탰다. 왜
냐하면 사실 그가 그것을 짊어질 충분한 힘이 있었다면, 이 모
든 짐은 그의 어깨 위에 얹혀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프랑수아는 주교를 대신하는 자격으로 그곳에 가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그의 공덕을 조금도 깎아내리지 않는다. 이런 상
황에 선구자로 가는 것도 이미 매우 위험한 것이다.
샤블레의 주도인 토농에서 그는 헤르망스Hermance 남작 휘
하의 알랭쥬Allinges 성 수비대의 가톨릭 병사들 보호 아래서 일
해야 했다.
반면에 프랑수아 사도는 조사자나 외교관 역할에 머무는
데 만족할 수 없었다. 2월 19일 자 교황대사의 보고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메신저는 선교사의 임무를 수행했다. “하
느님의 종은 즉시 사도직 파견에 소용되는 모든 것, 즉 몇 권
의 책, 성경과 로베르토 벨라미노 추기경의 책 「논쟁les Contro-
verses」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
의 사촌인 루이 드 살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 역시 의전사제
로 매우 명석하고 마음이 다정한 사람이며 이미 신학적 입장
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을 크게 증명했습
니다. 그는 또한 자기 동료 의전사제들에게 그리고 교구의 훌
륭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에게 희생 의무를 다할 것을 권고
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전기에 흔히 등장하는 미화의 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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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Page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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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샤를 오귀스트의 이 말을 통해 우리는
프랑수아와 루이가 샤블레로 떠나며 지닌 영적 태도가 어떠
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알랭쥬 성채의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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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Page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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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한편 프랑수아가 겪은 한 사고가 그의 속마음을 더욱 선명
히 드러나게 했다. 그는 자신의 기획이 아버지의 가장 심한 반
대에 부딪힐 것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드 살을 지나갈 때 거기
머물며 “(아버지의) 승낙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당연히 브와
지 영주는 가지 말라는 명령만 내렸다.” 노신사의 주장은 인
간적 지혜와 정치적 조심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프랑수아는 끔찍한 폭풍에 직면해야 했다. “오로지 하느
님과 순명에만 의지하며 -샹탈 수녀가 말한다- 그는 버텼습
니다. ‘아버지, -그가 답했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펴주실 것
입니다. 강한 자를 돕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야만인을 상대하
는 것이 아니기에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더욱이 우리를 전혀
모르는 곳도 아니고(프랑수아의 이 고백은 이 사명을 위해 그
가 간택된 점을 이해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 우
리는 몰수나 약탈을 하기 위해 거기에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영적인 무기로 그곳을 공략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를 해코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따라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도록 우리의 말에 큰 가치를 부여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를 인도나 영국으로 보낸
다면 우리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길은 확실히 매우 바
람직한 여정이 될 것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감내
해야 할 죽음은 천 번의 승리보다 나을 것입니다. 결국, 이는
고귀한 공작 전하의 뜻이며, 지극히 존경하는 주교님의 명령
이자 사명이기에 그 무엇으로도 반대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고생스러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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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Page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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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우리가 짐을 지고 싶지 않다면 왜 이 옷을 입었겠습니까?’라
고 답했습니다.”
브와지 영주는 크게 상심하였고 아들의 작별 인사에 참석
하지 않기 위해 라 튈 성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했으나, 그곳에
서 아들과 조카의 생명을 지켜달라는 편지를 샤블레의 친구
들에게 보냈다.
9월 14일 수요일, 성 십자가현양 축일에 프랑수아와 루
이는 자신들의 걸음을 다시 시작해, 얼마 후 생 세르그Saint
Cergues에 도착해서 샤블레의 아름다운 평원을 만났다. 그들은
걸음을 재촉하여 헤르망스 남작을 만나기 위해 둥근 모양으
로 이뤄진 산 위의 알랭쥬 요새로 향했다. 그들은 어둠이 내릴
때 그곳에 도착했다. 남작은 “두 새 사목자들을 요새로 맞아
들였다. … 우뚝 솟은 그곳에서는 그 지역의 비참한 상황을 훤
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알랭쥬 성채에서 보는 전망, 레망호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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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Page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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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사실 그 지방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프
랑수아는 풍광을 관조하면서 그 전망하는 것 이상의 것을 생
각하고 있었다. 그 지역을 지나쳐오면서 두 선교사는 이미 가
톨릭이 무너진 흔적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제가
본 것을 말하고, 제 손으로 만진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어
느 날 프랑수아가 클레멘스 8세 교황에게 쓴 글이다- 제가 진
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저는 가장 미천한 사람이고, 제가 그것
을 깨닫지 못하면 가장 버림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희가
그 구역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눈앞에는 사방으로 슬픈 광경
이 펼쳐졌습니다. 저희 앞에는 64개의 성당이 있었습니다. 지
금은, 다른 종교를 갖고 싶지 않은 공작의 군인들을 제외한다
면, 수만 명의 인구 중 100명도 안 되는 신자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당은 파괴되었거나 약탈당했습니다. 더 이상 어
디에도 십자가도 제대도 없고 여기저기 온 곳에서 옛날 참된
토농 시가 멀리 호수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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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Page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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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신앙의 파괴된 흔적만 발견됩니다. 천박한 이익을 꾀해 가정
들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며, 강단을 점
거하는 이른바 목사들, 즉 이단의 대가라고 불리는 그들은 어
디나 넘쳐납니다. 베른인들, 제네바인들 그리고 유사한 멸망
의 자녀들은 백성들에게 공포감을 불어넣고 있으며, 작당해
서 우리의 강론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휴전은 짧을 것이며, 평화가 확정되지 않았고, 곧 공작과 사
제들을 무력으로 밀어낼 것이다.’라고 말하며 다닙니다. 그리
하여 그들의 파당은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오로지 승리하려
공격할 것입니다.”
토농 주민들의 거처
이것이 현지의 상황이다. 프랑수아는 “헤르망스 남작에
게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도구와 방식에 관해 물어봤다.” 알랭
쥬 요새로부터 8km 정도 떨어져 있는 토농 읍에서는 항상 개
신교도와 마주쳐야 했다. 3천 명의 주민 중 가톨릭 신자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공작에게 충성을
다하는 검사관 클로드 마랑Claude Marin, 재판관 클로드 도를리
Claude d’Orlier, 그리고 샤를 비돔느Charles Vidomne와 샤르모아지
Charmoisy 영주 등 브와지 영주의 친구들이 있었다. 프랑수아
는 벌써 미사를 드리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헤르망 남작은
“요새가 아니라면 밤에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에 토농이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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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Page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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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른 곳에서 미사를 드리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그
래도, 아마 토농에서 강론할 방법은 찾을 수 있지 않겠나 합니
다.”라고 말했다. 프랑수아는 남작의 권고를 받아들였고 요
새에다 거처를 정했다.
1594년 9월 16일 금요일, 작은 그룹의 가톨릭 신자들이 두
선교사와 함께 검사관 클로드 마랑의 집에 모였다. 주일인 18
일, 토농 시장 피에르 포르네Pierre Fornier에게 선교를 승인한다
는 공작의 편지를 정중하게 제시한 후, 프랑수아는 그 새로운
양떼들에게 생 히폴리트Saint Hippolyte 구 성당에서 칼빈교도들
의 예배가 끝난 뒤 모일 것을 약속했다. 모든 일이 조용한 가
운데 착착 진행됐다. 비렛Viret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프랑수
아는 “공작의 관료들과 몇몇 가톨릭 신자들”이 그 뒤를 따르
1)
는 가운데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소박한 청중 앞에
서 성경의 이야기를 들어 교회 목자들의 사명을 주제로 강론
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이 두 선교사은 쉼 없이 자신들의 일을 해나갔
다. 루이는 알랭쥬 인근을, 프랑수아는 훨씬 더 위험한 토농을
담당했다. 프랑수아가 참의원 파브르에게 보낸 한 편지(아마
도 시월 4일이나 5일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 첫 주간
의 상황을 잘 알려준다. 그는 “암흑의 왕을 따르는 구름은 확
실히 어둡게 보인다.”며 “그 구름이 사람들의 마음을 점점 더
가리고 있다.”고 말했다.
1) OEuvres, vol. VII, p. 202. 참조.
81

9.4 Page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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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18일 강론 이후 상황은 좋아지는 것 같았다. “총독은 다른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주변의 농민들과 에비앙Evian 주민들을
은밀히 설득하여 우리 강론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소홀히 하
지 않았고, 뜨겁게 달아오른 열성으로 신앙의 밭을 일궜다.”
그러자 이단교도들도 즉시 반응을 보였다. “토농의 지도자들
은 평의회를 열고(10월 2일) 최상의 배신이라며 그들이나 주
민들이 가톨릭 강론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어제 시
청에서 이렇게 결의했다고 했으며, 자신들의 종교회의라고
부르는 총회에서 채택한 이 결의안을 이미 많은 사람이 따랐
다. 그들은 분명히 우리의 활동이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
프랑수아 드 살이 미사드리던 알랭쥬 요새의 경당
82

9.5 Page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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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물러가도록 압박
을 가하고자 했다.”
그들은 프랑수아를 정말 잘 못 알았다! “그렇게 되지 않
을 것이다. 휴전이 지속되고 교회와 세속의 권위가 허용하는
한, 우리는 이 사업에 끝없이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고, 간청
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모든 인내와 지식을 다해 다
시 시작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이 활동에 대해 논하고자 하
는 사람에게 나는 강론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성찬식을 복구하여, 원수로 하여금 자신의 속임수가 우리에
게서 용기를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북돋아 줌을 보여
주자고 했다.” 그리고 프랑수아는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정치와 종교의 혼합에 대해 몇 마디로 많은 것을 말해주는 이
문장을 추가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이 일시적인 평화
가 지속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1594년에서 159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그 지방의 특별
히 추운 날씨, 사람들에게 효과를 보고 있는 개신교 목사들의
반대,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 안시의 주교 주변에서 꾸미는 음
모 등 프랑수아를 낙담케 하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희
망컨대 –10월 31일, 앙투앙 파브르가 보낸 글- 파발꾼들이 내
편지를 더 이상 신부님이 계시는 사막으로 전달하지 않고 다
시 전에 계시던 도시로 전달하길 바랍니다. 신부님께서는 인
자하신 아버님의 간절한 소망뿐만이 아니라 신부님을 무척 아
끼시는 주교님의 명령에 의해 곧 안시로 돌아오실 것이라 생
각합니다. 사실 두 분은 제 앞에서 신부님을 불러들이는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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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Page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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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대해 그리고 다른 후임자를 보내는 것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
셨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의 말을 빌리면 “천 번의 모욕과
천 개의 조롱”이 여기에 추가됐다. 그들은 그를 “위선자, 우상
숭배자, 거짓 선지자”라 불렀고, 마술사나 요술사라고 비난
했다. 그들은 “덫을 놓았고” 그를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청
부업자들에게 돈을 지불했다.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에만 집
중하자. 1594년 11월 27일의 편지가 이를 명확하게 드러내 준
다. “여기서 하느님은 내게 당신 오른편에 합당한 유일한 자
질의 활동을 엿볼 수 있게 해주신다. 오늘 네다섯 명 앞에서
대림절 강론을 시작했다. 다른 모든 이들은 대림이라는 단어
의 뜻을 악의적으로 무시했다. 교회에서 이토록 위엄 있는 이
시기가 불신자들 사이에서 이렇게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우리의 선교사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기도, 자선, 단식은 원수가 쉽게 끊을 수 없도록 꼬
아놓은 세 가닥의 밧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는 이 밧줄로 적들을 결박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기도,
자선, 단식이 그들의 무기였다. “악천후 속에서도 날씨가 너
무 나빠 말을 타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눈길을 헤치고 걸어
갔습니다. -샹탈 수녀가 말한다- 토농에서 돌아오면 복자는
강론이나 고해성사 또는 영혼의 선익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갔다고 그분에게서 직접 또는 돌아가
신 루이 드 살 신부님에게서 들었습니다. 이런 활동에 온갖 위
험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헤르망스 남작은 프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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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Page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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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아에게 무장한 호위병과 함께 다니라고 제안했으나 그는 질
색하여 거절했고, 결국 불안한 남작은 은밀하게 멀리서 뒤따
르도록 병사들을 독단적으로 붙였다.
전략 수정: 논쟁
겉으로는 실패처럼 보였다. 넉 달 동안 계속된 강론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는 하나도 진전이 없었음을 인정해야 했
다. 그리하여 공략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듣기를 원치 않
으니 그럼 쓰도록 하겠다.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그
의 논증, 주장, 반박 등을 받아 볼 것이다. 그것들을 읽을 것이
고 다시 읽을 것이며, 그에 관해 이야기한다든지 숙고를 할 것
이다. 전투적인 내용이 빼곡히 담긴 단순한 전단지가 일이나
일상 작업에서 벗어난 드문 자유시간 동안에 읽힐 것이다. 이
를 위해 프랑수아는 개략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처음부터 언
젠가는 그것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그 전체를 모은 책을 초판부터 「논쟁les Controverses」이라는
이름으로 정했고, 우리도 그렇게 부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수아 본인이 이 글들에 붙였던 명상de Méditations이나, 아
니면 더 잘 표현된 기념de Mémorial이라는 제목들을 포기한 것
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이렇게 하자는 아이디어는 “진지
하고 신중한 한 신사”가 그에게 제안한 것이다. 자신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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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Page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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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을 밝힌 ‘토농의 신사들에게 드리는 편지’는 1월 25일, 성 바
오로의 회개 축일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 작업
을 그날 시작했다. 1월 말 경 친구 앙투앙 파브르에게 서한이
늦어짐에 대해 사과하는 글을 보냈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
에게 우리의 작품을 보내드리길 희망했었는데, 저는 생각을
바꿔 매번 낱장으로 보내기보다는 한 뭉치가 될 때까지 기다
리기로 했습니다. 다른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만큼, 제가
부지런하지 못해서 모두 시작하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우리
시대 이단자들의 돌연변이에 대한 명상을 짜내고 있습니다.”
약간 뒤인 1595년 2월 중순, 다시 파브르에게 이렇게 쓴
다. “이단자들에게 대항하는 제 작품의 앞 페이지들을 보기
원하십니까. 저도 매우 원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먼저 내 계
획, 전투 계획 및 채택한 전술 등을 승인하지 않는 한 나는 이
대의에 합당한 모든 열정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열
에 맞서 싸우지 않겠습니다. 사안이 벅차고 또한 제게 요긴한
도움을 줄 병사들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기억 속에 매우 작은
양의 지식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 책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나는 내 사업을 좋게 결말짓게
하는 것이 생각보다 다소 더 어렵다고 느낄 만한 그런 방식으
로 시작했습니다. 가능해지면 바로 내 작업의 한 부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중요한 결정을 알렸다. “나는 남은 사순절
을 토농에서 보내려 합니다.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가
장 좋은 것? 물론 그곳에서는 「논쟁」의 편집을 위해 몇몇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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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Page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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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들의 도서관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의 기쁨
과 용기를 위해서도 그랬고, 비밀리에 그와 상의하고자 하는
일부 칼빈교도들을 위해서도 그랬다. 그러나 얼마나 무모한
결정이었나! 인간적으로 그의 시도는 경솔했고, 그는 아직 한
동안 자신이 사는 곳을 숨겨야 했다.
3월 7일, 앙투앙 파브르에게 이렇게 알렸다. “나는 마침내
토농으로 내려왔습니다. 적들은 늦어진 공격으로 인해 괴로
움이 더욱더 쓰라릴 것이라고들 예상합니다. 내가 높은 요새
의 먼 곳에서 공격했었기에 그들은 그런 상황을 조롱했었습니
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 공격을 시작하겠습니다.” 일
은 너무 많았다. “많은 수의 강론들이 이단자들에게 대적하고
자 하는 「논쟁」에 충분한 역량을 기울일 수 없게 합니다.” 마침
그에게 도움의 손길이 답지했다. 유명한 카프친 수도자 세리
반 드 모리엔Chérubin de Maurienne 신부가 왔다. “어서 오세요!”
프랑수아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프랑수아는 토농에서 아직 미사를 드리지는 않았고, 매일
아침 드랑스Dranse 너머의 마랑Marin 마을에 있는 생테티엔 성
당으로 갔다. 그런데 이것이 그를 큰 위험에 빠뜨렸다. 어느
날 프랑수아는 브와지 영주의 시종인 조지 롤랑Georges Rolland
을 포함한 세 동료와 함께 알랭쥬를 향해가는 길에 무장한 두
명의 괴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프랑수아의 침착한 대응
덕분에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았고 심지어 그 괴한들은 용서
를 받았다. 그러나 롤랑은 자신이 겪은 일을 고하기 위해 단
숨에 토랑스Thorens 성으로 달려갔다. 브와지 영주는 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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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Page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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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즉시 안시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1595년 3월 중순에
영주가 받은 편지다. “경애하올 아버님, 만일 롤랑이 아버님
의 아들이었다면 그렇게도 하찮은 충격에 뒷걸음은 치지 않
았을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무슨 큰 전투라도 겪은 것처럼 떠
벌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적들의 사악한 의도를 의심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용기에 대해 의
심을 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은총
에 충실한 이는 구원을 얻을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기에
저의 항구함이 불순명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아버님께 간청드
립니다.”
브와지 영주에게는 이렇게 썼으나,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
게 내보이는 고백의 순간에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1595년 4
월 초, 그는 그라니 주교에게 이렇게 썼다. “만일 주교님께서
그동안 저희가 무엇을 했고 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성 바오로의 편지를 읽으시는 것으로 충분하겠
습니다. 마치도 이제 막 병상을 벗어난 한 환자처럼 다리를 어
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르는 것을 발견하며, 극도로 나약한 육
신으로 건강한 편에 더 가까울지 아니면 환자 편에 더 가까울
지 모르는 상태로 그렇게 걷고 있습니다.”
옛 영적 지도자인 폿세비노 신부에게 한 고백에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펼치고 있다. “여기에는 언급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로 나를 존경하는 친척과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이 일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상황이 나
아지리라는 희망이 없었다면 많이 슬퍼했을 것이고, 게다가
88

10 Pages 9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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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Page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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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토농 시가지 지도(1687, Theatrum Sabaudiae)
89

10.2 Page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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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방아꾼이 절구를 두드릴 때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므로 이 도시에서 저는 지금 벽에 대고 하는 강론
외에 어느 것도 능숙하지 못한데, 다른 곳에서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어떤 이가 저 대신 이곳에서 헛되이
수고하게 된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마침내 프랑수아의 인내를 보상하는 첫 번째 성공이 왔
다. 유명한 변호사이자 법학자인 피에르 퐁세Pierre Poncet가 칼
빈 교회를 버렸다. 가톨릭계는 크게 환호했으며 프랑수아는
이 개종으로 많은 축하를 받았다. 실제로 그는 “큰 존경을 받
았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예수승천 축일이 다가오자 프랑수아는 아마도 조금 쉬기
위해 토랑스으로 돌아와 드 살 성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 다시
안시로 내려갔다.
그해 5월 16일인 성령강림 기간 동안 그는 많은 설교를 했
다. 성체성혈 축일인 5월 25일, 프랑수아는 특별한 은총을 받
았다. “ … 새벽 3시경, 그는 가장 거룩하고 위엄 있는 성체성
사에 대해 묵상하던 중 -샤를 오귀스트 드 살과 리비에르 신
부가 말한다- 성령의 포로가 된 듯한 황홀감을 느꼈습니다.
… 그의 가슴은 너무 큰 기쁨으로 인해 터질 듯하여 마침내 그
는 바닥에 몸을 던지고 외쳤습니다. ‘주님 당신 은총의 파도를
거둬가소서. 저를 바닥에 꿇게 만드는 당신의 감미로움을 제
가 더는 감당할 수 없으니 제게서 물러나시옵소서.’” 샤를 아
귀스트 드 살이 덧붙였다. “이렇게 기쁨의 급류로 가득 찬 그
는 거룩한 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런 다음 강론대에 올라
90

10.3 Page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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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가 심금을 울리는 말과 벅찬 열정으로 강론을 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마치도 천상의 사랑을 담은 거룩한 불꽃이 타오르는
듯 그렇게 빛나 보였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은총으로 그 선교사의 영혼을 지원하셨다.
사실 샤블레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6월 초, 프랑수아는
드 살 성에 들러 변함없는 아버지의 반대를 다시 마주해야 하
는 고통을 겪었다. 수석사제라는 지위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
도 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어떤 경제적 도움도 주지 않았기 때
문에 그는 철저히 가난하게 토농으로 떠났다. 샤를 엠마누엘
공작 역시 어떤 방식으로도 그를 지원하지 않았고 그에게 여
하한 도움도 약속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
이 이 활동에서 그를 지탱케 해줬다. 그는 토농에서 자신의 부
재 동안 칼빈교도들로부터 폭력적인 공격을 당한 작은 양 떼
들을 되찾았다. 루이 드 살이 그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프랑수
아의 부재는 칼빈교도들에게 만용을 갖게 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씩씩하게 일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여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대부분을 「논쟁」에 전념했
다. 예를 들어, ‘교회의 일치, 참된 교회는 머리에서 하나’라
는 주제의 전단지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인 6월 29일에
만들어졌고,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주장에 기인한 성
경 모독’이라는 제목의 전단지는 10월 4일에 기록된 것으로
2)
추정할 수 있다.
2) OEuvres, vol. I, p. 90: Evangile du jour d’huy, e a p. 194, 아시시 성 프
란치스코 축일의 암시 참조.
91

10.4 Page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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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트렌토공의회에 파견했었고 독일
예수회의 첫 번째 관구장으로 임명했던 신학자 피에트로 카
니시오Pietro Canisio 신부에게 보낸 7월 12일 자 편지에서 프랑
수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단자들 가운데 있은 지 이제
아홉 달이 지났는데, 추수할 것이 얼마나 큰지 주님 곡간이 단
여덟 개 이삭만으로 꽉 찼습니다. 이 회심자 중에 매우 박식한
법학자이며 이단에 관한 한 이 지역 칼빈교 목사들보다 훨씬
더 현명한 피에르 퐁세도 있습니다. 그와 나눈 친밀한 대화에
서 옛 성현들의 증언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고, 나는
교부들의 가르침이 담긴 교리문답을 빌려주었습니다. … 이
독서가 그를 오류에서 끌어냈고, 교회로 인도하는 평탄한 길
로 올라서게 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항복했고, 이로 인해 우
리 둘 다 신부님에게 빚을 졌습니다.”
이 편지는 매우 흥미로운 것을 담고 있다. 프랑수아는 자
신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를 칼
빈교도들로부터 종종 받고 “벨라르미네의 책에서 도움을 받
아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제게 적절히 도움을 줄
수 있는 필요한 책들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우리 시대의 논쟁
을 다루는 극소수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레
망 호수에 의해서만” 카니시오 신부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학적 주제와 그들이 제시하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편지로라도 가르침을 받으려고” 질문이 담긴 서한을 호수 건
너편에 살고 있는 그에게 때때로 보내기로 했다. 따라서 우리
는 그가 전단지들을 얼마나 주의 깊게 작성했는지, 그리고 위
92

10.5 Page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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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3)
그노들Huguenots 의 주장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기에 감탄스럽다. 이 전단지들은 인쇄된 것이었나? 이를
부정하는 돔 맥키Dom Mackey보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는 방
문수녀회를 믿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매주 새로운 전단지가
“토농 시내 집들과 시골에 있는 집들에 배포되었다.”
그 7월에 신학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나는 한 달 내내
4)
순례(즉, 선교사목 활동)나 꼭 필요한 짧은 여행을 했다.” 라
고 8월 2일, 안시에서 앙투앙 파브르에게 썼다. 고생? 과로?
항상 용감한 태도에 피로가 파고든다. “토농의 추수는 내 힘
에 부치는 것이지만, 나는 당신의 승인과 당신의 명령이 있을
때만 이를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모든 종류의 해
결책과 계략으로 이 일을 위한 새로운 일꾼들을 계속 준비시
키고 그들을 지원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인류의 적이 지
닌 교활함은 끝이 없고 이를 벗어날 방도가 없다고 봅니다.”
아주 귀한 고백이 있다. “형제여, 저는 우리의 머리를 위
협하는 수많은 재난 중에서 우리에게 시급히 요구되는 믿음
을 기르는 데 필요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고 괴로움
을 겪었는데, 이는 여전히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자비
에 의지하며 더 나은 희망을 향해 우리 마음을 드높여야 합니
다. … 내일 나의 스파르타로 돌아오겠습니다.”
3) 칼빈주의를 따르는 프랑스 개신교파 중 하나다. 16-17세기 주로 프랑
스의 남부와 서부에 두루 퍼져 있었기에 프랑수아가 선교지에서 맞닥
뜨린 이들은 대부분 그들이었다(역자주).
4) 그 중 그라니 주교가 그에게 맡긴 언쟁의 조종을 들 수 있다. 편지 LV
LVI, OEuvres, vol. XI, p. 148 p. 151. 참조.
93

10.6 Page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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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사실, ‘스파르타의’ 상황들이 약간씩 개선되고 있었다. 9
월 18일, 프랑수아가 토농에서 앙투앙 파브르에게 보낸 편지
는 이것만으로도 글쓴이의 선교 열정, 신앙 그리고 마음의 상
태를 잘 알게 해주는 걸작이다. “형제여, 이 그리스도인의 추
수 밭으로 들어갈 더 넓고 더 아름다운 문이 드디어 우리에게
열립니다. 사실, 얼마 전에 다뷸리d’Avully 영주와 이른바 그 도
시의 원로들이 공개적으로 강론을 들으러 왔습니다. 왜냐하
면 그들은 제가 성체성사에 대해 강론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
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믿는 것과 이 신비를 증
명할 만한 설명을 내게서 듣고 싶어 했으나, 자신들이 스스로
토농 생 히폴리트 성당, 강론하는 프랑수아 드 살의 상.
94

10.7 Page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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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부여한 법을 해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
5)
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내 말을 들었습니다. 만일 약한
내 목소리가 장애가 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프랑수아는 “다음 강론에서 성경을 통해 그 교리
를 정오의 햇빛보다 더 분명히 밝히겠다.”고 예고하면서 그들
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온갖 노력을 다해 목사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와” 그와 논쟁을 벌이도록 끌어당겼다. “확
실합니다. 그들이 의회에 동의하기 때문에 속담처럼 곧 항복
하게 될 것입니다. … 토농의 주민들은 그들이 믿는 신앙이 우
리와 다른 점들을 글로써 제시할 것을 동의했기에 우리는 이
에 대해 사적으로 또는 친밀한 대담이나 혹은 서면으로도 논
의할 수 있습니다.”
프랑수아의 사도적 책략이 승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샤
블레의 “유력 인사들”과 이러한 사적인 토론을 항상 그의 활
동 중 가장 중요한 부분, 유일한 복음적 활동으로 여겼다. 믿
음이 확고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굳게 의지하는 그는 대화 상
대가 아니라 이미 승자로서 이 회담에 임했다. “그들이 간부
를 통해 전투를 수락했고, 우리의 약한 세력 앞에 겁을 먹은
채 이리저리 핑계를 대려고 노력하니, 우리는 확실히 거의 다
왔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큰 용기를 주시기에, 좋
은 희망을 주는 이 싸움을 복에 겨워 안달이 난 마음으로 기
다린다.”
5) 이 청중들은 오르간이 있는 곳 뒤편에 숨어 있었던 듯하다.
95

10.8 Page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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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안타깝게도 9월 17일의 강론 내용이 전체가 아니라 요약
만 남아있는데, 프랑수아의 사도적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완전히 남아 있는 서문을 읽으면 된다. 우리는 성
바오로의 코린도 1서(10,16) 구절을 읽은 후 그의 강론을 들어
야 한다. “이 질문은, 복된 사도가 한 것과는 매우 다른 의미
와 방식으로 취해진 질문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비참한 시대
에 보고 있는 큰 바빌론에 대한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할 수는 없었겠으나 꼭 필요한 것
은 했다. “더 독특하고 더 매력적입니다. 서면이나 다른 방법
으로 나에게 의심을 제기하려는 사람은 나를 매우 즐겁게 해
주는 것이며, 나는 그것을 굉장한 호의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
리고 나는 그 대가로 할 수 있는 한 모든 만족을 그에게 안겨주
려고 사랑과 존중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칼빈교도들에게 얼마나 큰 호소를 하고 있
나! “여러분의 구원과 구세주의 피를 두고 간청합니다. 여러
분이 듣지도 않고 단죄되었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가톨릭교
회의 이치를 들으러 오십시오. 이 기회에 여하한 인간적인 경
향도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어느 한 편에 더 친숙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말고, 오직 성경과 이치에 맞는 참된 신앙이 어디에
있는가를 눈여겨 보십시오. 그리고 보이는 것에 따라 모든 것
을 제쳐두고 더 올바른 쪽을 끌어안기 위한 결의를 굳게 다지
십시오.” 그리고 프랑수아는 선포한다. “주님, 당신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표증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제게 지혜를
주소서da mihi intellectum ut sciam testimonia tua.”
96

10.9 Page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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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같은 9월 17일,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마침내 앙리 4세에게
교황사면을 내렸다. 이 소식은 프랑스에 퍼지듯 사브와에도
전해졌다. 프랑수아는 시월 초, 앙투앙 파브르에게 보낸 편지
에서 이에 대해 매우 기뻐하는 내용을 적었다. “나는 교황 성
하께서 최근에 앙리 왕에게 행복한 메시지, ‘프랑스 왕에게 사
도적 인사와 축복’을 보내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상황이 그
렇게 전개되면 주님의 권능을 통한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이
평화가 매우 큰 즐거움을 주는 만큼 제네바의 이단자들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겨주길 기원합니다.”
사실 이 사건은 프랑수아의 샤블레 사도직 활동에 깊은 영
향을 줬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그와 타협하는 데 덜 망설일
것이며, 샤를 엠마누엘 공작도 가까운 미래를 덜 호전적인 관
점에서 보고 프랑수아의 활동을 돕겠다는 자기 뜻을 더욱 확
고하게 드러낼 것이다. 이런 변화들이 그로 하여금 샤블레의
칼빈교도들을 더욱 압박하게 했다. “이제 나는 토농의 양반들
을 더 압박하렵니다. -파브르에게 쓴 편지- 내가 오랫동안
숙고했던 일을 끝내면 그리고 당신이 이 활동을 승인하면 나
는 능력에 맞춰 더 많이 압박할 것입니다.”
1595년 말, 프랑수아의 활약은 대단해 보였다. 명망 높은
칼빈교도들이 그를 찾아와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 중에는 다
뷸리 영주, 변호사 클로드 드 프레 등이 있었다. 그는 앙투앙
파브르가 준비한 법전(Codex Fabrianus라 불릴 것이다)을 위
해 입법자가 경계해야 하는 주요 이단에 대한 설명을 작성하
기 시작했다. 프랑수아가 쓴 아름다운 글 중 가장 활기차고 열
97

10.10 Page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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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렬한 페이지는 파브르의 작품에 지고의 삼위일체와 가톨릭
신앙에 관하여De summa Trinitate et fide catholica라는 제목으로 삽
6)
입되어 있다. 칼빈교도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하기 위해 칼
빈이 쓴 「그리스도교의 창립」이라는 책을, 로마의 허락을 요
청한 후 마치도 그냥 신학생처럼 겸손하게 몰두해 공부했다.
마침내 1595년 말 샤를 엠마누엘은 프랑수아에게 재정지
원에 대해 청구할 것을 명했다. “성스러운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전하가) 베푸실 가장 효과적인 은전은 샤블레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와 재결합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12월 29일,
프랑수아는 간절히 바라던 공작의 초대에 급히 달려가 그의
권위에 의지하는 재정적, 도덕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 편지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각을 장착할 필요가 있다. 안
타깝게도 당시 정치 상황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종교와 뒤범
벅이 되어 있었다. 법률가인 프랑수아는 가톨릭 국가의 전통
적인 원칙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 하나의 왕”을 아직도 눈
에 띄게 고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법관의 직위
와 공적 지위에 있는 자가 이단을 고집할 경우 불이익을 당해,
자리에서 쫓겨나게 할 것”이라는 그의 요청을 듣는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 후 우리는 이 편지에서 선교사의 사도적 마음, 그
의 신학적 낙관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가톨릭 신
앙이 설파되어 이단자들의 귀에 닿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머
지는 섭리가 할 것이다.
6) 특히 미사의 거룩한 희생에 관한 아름다운 페이지가 읽어볼만하다.
OEuvres, vol. XXIII, pp. 99-100.
98

11 Pages 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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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Page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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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그는 무엇보다도 모든 성당에 본당신부들이 돌아오고 “필
요에 따라 이 모든 관할 구역들을”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이동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또한 앞으로 있을 교리교육이
나 논쟁에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 “전
하, 이런 강요가 그들에게는 달콤한 폭력이 될 것입니다.” 그
리고 그의 친구인 파브르 상원의원의 자질을 알고 이 권한들
을 그가 공작의 이름으로 수행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마지막
으로 그는 토농에 예수회 학교를 세우는 데 필요한 자금 지원
을 요청했다.
이 편지와 더불어 1596년 2월 19일에 릿카르디 교황대사
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새로운 대사에게
18개월 동안 자신을 헌신하여 일한 샤블레의 상황을 매우 명
료하게 설명했다. “이웃 이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사업
이 큰 지장을 받고 있으나, 이단에 정통한 두 사람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개종하는 등 항상 약간의 열매를 얻고 있습니다.
이제 평화가 임박했다는 소식에 힘입어 지금까지 뿌린 것을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평화가 정착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
만 씨 뿌리는 때, 영웅적인 선교의 시간은 실제로 끝났고 곡식
을 거두어들이는 추수의 때가 다가온다는 그의 말이 옳았다.
씨 뿌리는 시기가 길게 연장되는 것도 필요했다. 덕분에
프랑수아는 결코 단순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가 아니라 성
바오로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처럼 사도로 인식된다. 설
령 사촌형인 루이 신부가 그의 곁에 있었으나 프랑수아는 혼
99

11.2 Page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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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자 또는 거의 혼자 선교의 무게를 감내했다. 그는 가난하고 재
산이 없어, 어머니가 아버지 모르는 보내주는 약간의 지원으
로 개인적인 생활과 매일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을 충
당했다.
인간적인 도움이 없었다. 물론 헤르망 남작이나 알랭쥬 수
비대는 그가 위험에 처할 때 즉각적으로 개입할 채비가 되어
있었으나, 프랑수아는 창과 방패의 보호 아래 강론하는 것을
거절했다. 공작은 선교 시작의 요청에 대해 침묵했고, 선교사
에게 어떠한 공적 자격도 부여하지 않았으며 보조금도 지급
하지 않은 반면, 샤블레의 개신교도들은 제네바와 베른의 도
움과 지지를 풍족하게 받고 있었다.
프랑수아는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천천히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일을 추진했다. 기도, 단식, 고행 그리고 우리
가 잘 아는 상황에서 드려진 매일의 미사가 그 원기를 북돋웠
다. 자신을 모욕하고 위협하며 때로는 공격하는 개신교도들
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했고 특히 그들을 진심으로 맞이했
다. 그들을 위해 연구하고 글을 쓰고 강론했다. 듣는 이가 다
섯이든 백이든 뭐가 중요한가? 순전히 복음, 성경, 교회를 제
시해야 했고 이를 사랑스럽고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해야 했다. 물론 말로, 그렇지만 그의 모든 삶과 믿음을 다하
여 이를 제시했다. 사제인 그는 또한 길 잃은 형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과 마음을 드러내야 했다.
훗날 샤를 엠마누엘 공작은 프랑수아를 데 메디치de’ Medici
에게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추기경께서는 우리 주님의 십
100

11.3 Page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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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샤블레의 사도: 파종기
자가와 신앙을 이 지방에 심은 사람을 지금 보고 계십니다.”
프랑수아에 대한 진심 어린 찬사다. 그 어려운 시기의 영웅적
인 사도직을 누구보다 잘 상징하는 몸짓으로 보여줬다. 마술
과 요술쟁이로 고발되어 살해의 위협을 받을 때 “그는 웃으며
자기 몸에 큰 십자성호를 긋고 ‘보라, 내 주문과 주술은 이게
다다!’라고 말했다.”
101

11.4 Page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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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102

11.5 Page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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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성공의 단계들
1596년 초 몇 달간 프랑수아의 사도직 활동에 몇 가지 변
환이 있었다. 우리는 그의 다사다난하고 활발한 삶의 세세한
사항을 더 다루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적 면모의 특성들에 대
해서만 살펴보겠다.
첫 번째 시복시성 조사서에 삽입된 두 편지로 알려졌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중요한 한 사실이 당시 프랑수아 드 살의
사도직 활동을 가늠할 수 있게 하고 그 분위기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공작의 궁정과 교황대사관은 당연히 제네바 주
교 본인의 동의하에, 그를 그라니 주교의 보좌로 삼을 생각이
었다. 프랑수아는 당시 관습적 절차가 허용하는 한 확고하게
그것을 사양했다. “모든 가능한 이유와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
추어, 제가 보좌주교라는 직책에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제 장상으로 주시는 한 가장 존경하는 주
교께 의무와 명예와 열정을 다 드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행복을 거둬 가시는 날이라도, 제 무능력은 제게 그 지위를 허
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이미 날개를 달
았고, 이를 통해 프랑수아에게 쏠리는 시선이 높아지지만, 그
103

11.6 Page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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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의 사도직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제도적인 움직임 속에서도 프랑수아는 무엇보다
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1596년부터 1600년까지 4년 동안 프랑수아의 사도직에
서 중요한 단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프랑수
아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비렛Viret 목사와 공개적인 논쟁을 들
수 있다. 비렛 목사나 샤블레 또는 브Vaud 지방의 다른 목사들
이 등 떠밀려 열리기로 한 논쟁은 결국 그들의 회피로 무산됐
다. 이는 틀림없이 1596년 초에 일어난 것으로 “많은 개종의
촉매가 되었다.”
1595년 8월 26일, 다뷸리 남작이 칼빈교를 포기한다고 토
리노 교황대사 앞에서 성대하게 선포했다. 그의 개종은 개신
교인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9월 20일 교황 클
레멘스 8세가 직접 남작에게 편지를 써 보낼 정도였지만, 개
종자와 프랑수아에게는 수많은 모욕의 화살들이 날아들게 했
다. “적들이 그 개종이 담고 있는 광채를 없애기 위해 -1595
년 12월 12일 프랑수아가 릿카르디 주교에게 보낸 글- 이 남
작에게 가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격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향한 수많은 저주가 이단자들로부터는 물론
이고 가톨릭 신자들에게서도 날아들었습니다.”
그 1595년에는 토농이든 샤블레든 “뭔가 움직임이 있다.”
는 것을 느낀다. 11월 14일 프랑수아가 교황대사에게 “추위 때
문에 더 이상할 수 없다면 적어도 서너 곳에서” 가톨릭 전례를
시작할 수 있는 승인을 공작으로부터 받아달라는 편지를 보
104

11.7 Page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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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냈다. “이미 시작할 수 있는 곳이 꽤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성탄절에 우리에게 갓난아기로 오신다면 그분은 차츰차츰 완
전한 성인으로 성장하실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베틀레헴처럼
야반도주를 하셔야 하거나 활동을 포기해야 할 어떠한 위험
도 없습니다. 평화협정이 전쟁으로 변한다면 샤블레뿐 아니
라 교구의 많은 다른 지역에서도 (종교의 측면은) 장애를 만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영적 평화가 그 천둥과 번개의 준비
요 기초가 되길 원치 않으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1596년 여름이 끝나갈 즈음 프랑수아의 가장 대담한 사목
적 시도가 펼쳐졌다. 다뷸리 영주의 개종에 영향을 받은 “야
1)
심이 가득차고 음흉하며 중류계급인 라 페이” 라 불리는 앙투
안 드 라 페이Antoine de la Faye가 개인적으로 토농으로 와서 다
뷸리 영주에게 “그를 로마 가톨릭으로 이끈 교리가 얼마나 형
편없는 것인지를 드 살 수석사제 앞에서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게 보여주겠다.”라고 떠벌렸다. 프랑수아는 기꺼이 도전을
받아들였지만, “다불리 남작이 서너 번 혹은 더 많이 그에게
오라고 요구했으나” 목사를 기다리는 일은 헛수고가 됐다. 라
페이 목사가 오는 것을 거절하기에 프랑수아는 자신이 제네바
로 가서 그를 만나고자 했다. 프랑수아는 남작 외에도 사촌 루
이 신부 그리고 가톨릭과 칼빈교도들로 구성된 토농 시민 그
룹과 함께 제네바를 향했다. “곧바로 -샤를 아귀스트 드 살의
말이다- 라 페이 목사집으로 갔다.”
1) 개신교 역사학자 Paul-Fréderic Geisendorff는 자신의 책에서 그를 이렇
게 평가했다. Théodore de Bèze, Genève, Labor et fides,1949, p. 397. 참조.
105

11.8 Page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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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당시 풍습에 따라 몰라Molard 광장에서 공개적인 논쟁이
열렸고, 프랑수아는 압도적인 승리를 했다. 샤를 엠마누엘 공
작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과 프랑수아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그를 상원에 임명하고자 했다. 이것은 공작이 그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에게 토농에서 가톨릭 신앙을 재건
할 수 있는 공식 승인이나, 절실하게 요구되는 본당신부들의
정착을 위한 혹은 선교사들의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돈의 지
급을 보증하지 않은 것에 비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프랑수
아를 토리노로 불러 샤블레의 상황을 설명할 기회를 주었다
면 더 나았을 것이다.
1596년 프랑수아는 교황대사에게 매우 열정적인 편지를
보냈다. “공작 전하의 뜻이 담긴 공식문서를 받기 위해 제가
토리노에 가기를 점점 더 원합니다. 왜냐하면 명령이 내려지
면 저는 즉시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고, 수천 영혼의 행복한 곡
식이 곧 여무는 것을 보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명령이 내려지지 않으면, 저보다 더 유능한 다른 사람에게 이
사업을 맡길 수 있도록 축복과 허락을 구하겠습니다. 충분한
수의 강론가와 사목자를 보낼 수 있는 여력이 제게 없기 때문
에 거룩한 가톨릭 교리를 맛보고자 하는 본당들 전체를 만족
2)
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찢습니다. 저는 더 이상 여
기에 혼자 남아 있을 수 없으며, 명령이 없는 것을 보고 저의
사목활동을 멸시하는 원수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
2) 이 기간 동안 프랑수아의 서신에 종종 등장하는 고통스러운 표현에 주
목한다.
106

11.9 Page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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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프랑수아 드 살의 고해소, 안시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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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 Page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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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다.저는 모든 면에서 지원을 풍족히 받고 있는 그들을 부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수아는 야심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중상하는 자들
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아시듯이, 내가 모든 야망에서 얼
마나 멀리 있는지를 결국 이해할 것이라 기대한다. 이 몇 가
지 활동으로 나는 내 장상들에게 잘 보이기를 원하지 않고, 단
지 다른 유사한 것들처럼 이 임무를 완수하는 것으로 충분하
다.” 프랑수아가 사도직 활동의 선익을 위해 당시 관습에 따
라 정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보게 되면 항상 이 편지를 참고
하는 것이 좋겠다.
마침내 공작은 프랑수아를 토리노로 불렀다. 이미 가을로
접어든 때이기에 알프스를 넘어야 하는 여행은 매우 위험했
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그가 이길 수 있는 샤블레 건의 방
어를 위해 너무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프랑수아는 언제나
충실한 조지 롤랑과 함께 말을 타고 출발해 별다른 위험 없이
르 그랑 생 베르나르le Grand Saint Bernard를 넘어 토리노에 도착
했다. 공작은 그를 매우 반갑게 맞아 주었고 샤블레의 어려움
을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공개서한의 형태로 프랑
수아에게 공식 지원을 약속했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생 모리
Saint-Maurice 기사단에게서 회수한 자산을 이용해 6명의 본
당 사제 생활비를 약속했으며, 그의 중요 요청들이 담긴 교황
대사에게 보낼 보고서에 서명할 것을 권했다. 프랑수아는 희
망에 부풀어 르 페티 생 베르나르le Petit Saint Bernard를 넘어 안
시에 도착해 토농으로 왔다.
108

12 Pages 1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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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Page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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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그러나 사브와와 프랑스 사이의 평화정착은 더디게 진행
됐고, 오히려 전쟁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희
망을 흔들어 놓는 무슨 전쟁 발표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들었
다.”라고 프랑수아는 기록했다. 실제 공작의 공식 승인 편지
는 도착하지 않았고 생 모리스 기사단의 자금도 오지 않았다.
어쨌든 성탄절은 다가왔고 개종 서약은 넘쳐났다. 열정에 찬
프랑수아는 다른 충격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유력인사들의
반대와 개신교도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생 히폴리트 드 토
농 성당에 아주 소박하게 나무 제대를 만들어 세우고 성탄절
에 그곳에서 미사를 드릴 준비를 했다.
이것은 하나의 소동이었다. 특히 피에르 프티Pierre Petit
사가 로마의 “신앙을 받아들인다.”고 한 선언은 큰 소란을 일
으켰다! 수석사제와 목사는 각기 다르게 공작에게 편지를 썼
다. “소식이 퍼져나갔기에 하느님의 종은 시작했던 일을 마무
리하고 성화, 양탄자, 초 그리고 등불 등으로 성당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치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자정에 기쁨과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그 자녀들 앞에
서 거룩한 희생 제사를 거행하며 그들 모두가 성체를 영했습
니다. 미사를 마치며 제단에서 그들에게 이 큰 사랑의 탄생 이
야기를 들려줘 천상 화관의 생생한 불꽃이 그들의 마음을 불
타오르게 했습니다.” 둘째 미사를 새벽에 드렸고 셋째 미사를
“9시에서 10시 사이”에 드렸다.
공작은 확고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1597년 1월 7
일, 프랑수아가 3년 동안 그렇게 기다렸던 편지가 드디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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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Page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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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착했다. “존경하고 사랑하고 충실한 신부님. 신부님께서 보
내신 편지에 답하면서 생 히폴리트 성당에 제단을 세우신 것
이 잘하신 일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와 같이, 이단자들을
근절하기 위해 하느님을 찬송하며 펼친 선한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님이 겪으신 반대에 대해 유감을 표합
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쓰셨듯이 신부님은 이를 잘 극복하
셨습니다. 잘 아시는 바대로 적절한 인내와 능력으로 그렇게
계속하십시오. 가톨릭 신자가 되고자 하는 목사를 아주 잘 도
와준 랑베르의 영주에게도 편지를 보냅니다. 신부님처럼 그
도 우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공작이 보낸 이 매우 다정한
편지는 장로들의 중상과 공격으로부터 프랑수아를 보호하는
방패역할을 했다. 그러나 생 모리스 기사단이 본당들을 재건
하기 위해 약속했던 자금 지원은 매우 더뎠으며 심지어 어떻
게든 이 의무를 모면하려고 회피하는 가운데, 프랑수아는 자
신의 사도직 활동을 증진하는 노력을 다했다.
1597년, 알랭쥬 본당을 다시 열었고 세르방스Cervens 성당
도 열었다. 2월 4일, 토농의 시의원이자 전임 시장이었던 피
에르 포르니에Pierre Fornier는 엄숙하게 칼빈 교회 포기를 선언
했다. 개신도들이 많이 비웃었던 재의수요일 의식도 빼놓지
않고 토농에서 사순절을 다시 지냈다. 부활절이 다가오면서
프랑수아는 강론과 고해성사로 더욱 분주해졌다. “이 대축일
동안 –1597년 4월 23일 릿카르디 교황대사에게 썼다- 새 신
자들의 총고백은 저를 매우 지치게 했습니다만, 그렇게 열심
인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110

12.3 Page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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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그러는 동안 그는 교황대사와 함께 매우 중대한 문제를 처
리하며, 클레멘스 8세로부터 제네바에서 테오도르 드 베즈
Théodore de Bèze를 만나는 것과 같은 비밀스럽고 극히 중요한 임
무를 받았다. 이렇게 분주한 사목활동은 그의 건강을 흔들어
놓았다. 3월이 되자 그는 “고열의 재발”로 치료를 받아야 했
다. “저는 -1597년 4월 11일 드 살에서 대사에게 보낸 편지-
시노드에 참석하기 위해 몇 가지 일을 정리하고, 오랫동안 나
를 위협해온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휴가는 짧을 것이고 미뤄둔 일
을 재개하기 위해 더 활기차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라니 주교의 후계자
그는 토농으로 돌아왔으나, 4월 말에 안시를 향해 다시 여
행길에 올랐다. “경애하올 주교님의 병환이 심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신의 생명이 위중할 정도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꼭 보고 싶어 하신다고 하여 즉시 출발했다.” 우리는 그 이유
를 짐작할 수 있다. 그라니 주교는 프랑수아를 계승권을 지
닌 자신의 보좌로 임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랑수아는 “가
장 극렬한 방식으로 사양했다.” 그의 마음은 완전히 다른 방
향을 지향했다. 프티 보르낭Petit-Bornand 본당신부가 공석이기
에 “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 타이틀과 그에 딸
린 재산을 받고 싶어 했다. 또 수석사제직을 사임하면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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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Page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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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전사제단에서 장엄하게 드리는 기도가 제게는 큰 위안이 되
기 때문에, 저를 단순한 의전사제로 남겨 둬 언제든 사제단에
왔을 때 그곳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간
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그라니 주교는 자신의 계획을 굽히지 않았고, 먼
저 브와지 영주와 프랑수아의 가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
다. “프랑수아는 감탄할 만한 겸손으로 계속 거절했고, 주교
는 자신의 승리를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했
다. 공작의 동의를 얻었고, 임명장을 보내려고 했다.” 6월 16
일, 교황대사 릿카르디의 편지에 따르면 이미 공작의 승인은
내려졌다. 하지만 프랑수아가 승복할 시간은 이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샤블레로 돌아와 선교지의 책임자로서 일했
다. 사실 그에게 세 명의 보조자들이 도착했다. 두 명의 카푸
친회 에스프리 드 보움Esprit de Beaumes 신부 그리고 세루방 드
모리엔Chérubin de Maurienne 신부와 예수회 장 소니에Jean Saunier
신부가 그들이다. 이들은 이미 와 있던 안느마스Annemasse
당신부인 발타사 마니글리Balthazar Maniglier 신부와 루이 드 살
신부 등과 합류했다.
이 시기에 프랑수아의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세
르방 드 모리엔 신부가 새로운 충격을 가하겠다고 결심했다.
9월 초 토농에서 불과 12km 정도 떨어졌고 제네바와 지척인
안느마스에서 지극히 거룩한 성사를 위한 40시간 기도회를
성대하게 열겠다고 구상했다. 이 3일간의 기도회가 비범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혼신을 다했다. 전쟁이 터질 것을 우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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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Page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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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샤를 엠마누엘 공작은 참석하지 않았고 사브와의 행정관인 다
비니d'Abigny 경이 대신 참여하게 했다. 이 기도회는 성체성사
에 드리는 큰 선물이었다.
이 큰 행사가 있은 지 얼마 뒤 그라니 주교는 프랑수아의
겸손에 맞서 최상의 공격을 가할 것을 결심했다. 수석의전사
제가 드 살에 머물던 어느 날, 주교는 자기 수석비서인 크리
테인Critain 신부를 보냈다. 다음날 도착한 그는 성무일도를 함
께 드리자며 프랑수아를 드 살 성의 회랑으로 이끌었고, 여기
서 정공법을 펼쳤다. 프랑수아는 오래도록 저항했으나, 마침
내 비서에게 마을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함께 드리자고 했다.
“먼저 신부님이 미사 주례를 하시면 제가 복사를 서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두 번째 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는 대로 하겠습니
다.” 프랑수아는 기도를 통해 설복되었다. “주교님께 말씀드
려주세요. -돌아오는 길에 크리테인 신부에게 말했다- 저는
주교가 되겠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교
님께서 원하시고 그렇게 명하시니, 순명하도록 하겠으며 모
든 것을 하느님께 맡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이 여기서 끝날 뻔한 위기가 있었다. 얼마 뒤 프
랑수아가 안시를 지나면서 “극심하게 지속되는 열병으로 자
리에 누웠다.” 1월 초에 거의 그 삶의 불꽃이 꺼지는 듯했다.
“그에게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줘야 할” 사람으로 선택된 그
의 어머니가 안시로 내려왔다. 가여운 환자는 “무엇보다 깜짝
놀라며” 하느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지옥에 떨어질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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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Page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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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으로 큰 고통을 당했다.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자신을 의지
하면서 이 첫 번째의 위기를 넘겼다. “주님 외에는 구원을 바
라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게는 지금처럼 다음에도 그분
의 자비가 필요할 것이며, 그분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도 나에게 호의를 베푸실 것입니다.” 대성당의 의전사제들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그의 강복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
이들의 방문이 끝나자 프랑수아는 “한 시간 정도” 혼절했고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는 성체성사 교의에 대한 의혹에 사로잡혔다. 시
련은 끔찍했고 프랑수아는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
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만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
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위기의 절정에서 자신을 이탈했던 해
결책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이 투쟁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
을 간직하고 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절대 밝히지 않았
다. “(그의) 기억 속에 그는 약한 마음에 걸림돌이 될까 두려
워하며, 항상 십자성호를 그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총애
하시는 영혼을 당신 모상에 충실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방식
으로 정화하시고 항상 당신 수난과 죽음의 신비 깊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다행히 프랑수아는 죽음에서 벗어났다. 회복기는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1598년 1월 14일, 릿카르디 교황대사에게 편
지를 썼다. “의사들은 제가 글을 쓰는 것을 허락지 않았고, 다
른 이가 받아 적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받아쓴 편지가 애련
한 감상을 안겨준다. “지속적인 고열로 하느님의 면전까지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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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Page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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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다 온 저는 최근에 다시 위험한 상황에 빠져 7일 동안 꼬박 죽
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교구의 공동방문ad limina과 주교승품을 위한 마지
막 절차를 위해 로마로 가야 할 것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언제? “하느님의 같은 섭리에 의해 나는 회복기에 들어가 매
우 나약한 처지인데, 특히 다리에 이렇게 힘이 없는 상황에서
부활절 전에나 갈 수 있을까? 적어도 성주간에는 그곳에 갈
수 있기를 절실히 원하기에, 그리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다.” 어쨌든 그의 정신은 온통 세루방 드 모리엔 신부
안시, 르 티우(le Thiou)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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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Page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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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가 그를 대신하고 있는 샤블레로 향했다. 그는 진행 중인 사업
의 완료를 촉구했다. “공작 전하가 토농으로 파브르 상원의원
을 보내 가톨릭 신앙에 대한 샤블레 주민들의 생각을 알아보
도록 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를 원하고 또 이것이 다시 정
착되길 조바심이 날 정도로 원한다고 증언했다.”
주교로 승품해도 프랑수아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결
국, 하느님께서 제게 얼마간의 남은 삶을 더 주셨기에 거룩한
그분의 뜻과 성교회에 헌신해야 할 책무가 있음을 받아들입
니다.” 그리고 그때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길게 그는 그렇
게 할 것이다.
그 1598년, 프랑수아가 드 살에 머물며 쓴 편지는 우리에
게 조금만 전해지고 있다. 4월 교황대사에게 쓴 글이다. “저
는 오늘 토농으로 돌아가 얼마 동안 그곳에 지낼 것입니다.”
사실 세루방 신부는 큰 열성을 갖고 프랑수아에게 안느마스에
서 했던 40시간 기도회를 토농에서도 열 것을 제안했다. 1598
년 5월 2일, 스페인의 필립페 2세와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베
르방Vervins 조약을 맺었다. 사브와에는 평화가 도래하는 듯했
고 샤블레는 제네바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듯했다. 백성들
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가톨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
고, 샤를 엠마누엘은 샤블레의 선교사들을 돕는 데 수반되는
부담감을 훨씬 덜 수 있었다.
수석사제는 새로운 환경이 제공하는 혜택을 빠르게 취할
방도를 찾았다. 7월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사목활동의 전문
가들인” 여러 본당신부들이 중요한 성당들에 상주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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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Page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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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했다. 9월 20일, 마침내 많은 물질적인 또는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토농에서 40시간 기도회가 열렸다. 그라니 주교가
친히 9월 20일 주일과 21일 월요일의 종교예식을 주례했다.
며칠 뒤 시월 첫날과 둘째 날, 두 번째의 40시간 기도회가 열
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샤를 엠마누엘 공
작이 자신의 대신들에 둘러싸여 참석했고, 교황특사인 알렉
산드로 데 메디치Alessandro de’ Medici 추기경이 프랑스에서 이탈
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토농에 들려 이 행사에 참여했다.
모든 것이 화려하게 끝났다. 그중에서도 프랑수아의 마음
을 깊이 파고드는 특별한 한 가지가 있었다. 시월 1일 목요일
오전과 오후, 추기경, 그라니 주교 그리고 프랑수아는 여러 유
력자, 한 개신교 목사, 여러 가정 등 많은 개종자를 맞아들였
다. 다음날 이 물결은 더욱 빨라졌다. 서무를 담당한 이들은
단지 가족 중 가장의 이름만 기록하기에도 바빴다. 아직도 바
티칸 문서고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열하루 동안 2300명의
개종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감탄스러운 축제의 날 동안 얼마나 많은 기억과 감사
의 마음이 프랑수아의 마음속에 떠올랐을까! 가난하고 인간
적인 지원이 끊긴 선교사 홀로 토농을 가로질렀던 것이 불과
4년 전인데, 그날에 개종 또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 참여
하기 위해 밀집한 군중들 앞에서, 1594년 9월 18일 일요일 설
득하고 설득하여 생 히폴리트 성당의 강론대 주위로 모일 수
있었던 십여 명의 잔뜩 겁먹은 가톨릭 신자들의 모습을 어찌
소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시 교회 사목자들의 사명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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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Page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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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해 강론을 했었는데, 그날 이 대축일을 마무리하며 공작과 그
의 대신들 그리고 추기경도 같이 있는 곳에서 미사와 사제직
에 대해 강론했다.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 두 강론 중에
서 어느 것에 프랑수아는 더 마음에 담고 정성을 기울였을까?
공작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데 메디치 추기경이 시청
에 도착하자마자 샤를 엠마누엘은 수석사제의 손을 잡고 추기
경 앞으로 인도했다. “추기경님께 샤블레의 사도를 소개해드
립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았고 하늘이
저희에게 보내신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
한 뜨거운 열정으로 타올라 그의 삶에 큰 위험을 무릅쓰고 용
감하게 가장 먼저 이 지방으로 왔고, 하느님 말씀의 씨를 뿌렸
습니다. 이분은 70년 전에 이단의 지독한 무리에 의해 뿌리째
뽑힌 이 불모지의 땅에 십자가와 우리 주님의 신앙을 다시 심
었습니다.” 추기경은 자기 발아래 꿇어 있는 프랑수아를 일으
켜 세우며 말했다. “신부님, 당신의 열성에 깊이 감사드립니
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계속하십시오. 저는 제 직책의 의
무감에 따라 신부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해 광범위하게 교황
성하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프랑수아의 사도적 마음
‘샤블레의 사도’라는 칭송을 받을 만했다. 그 대단했던 축
일들의 마지막 여운이 잦아들면서 프랑수아가 주교수품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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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Pages 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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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Page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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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해 로마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잠시 멈춰 선교 지방의 사제인
프랑수아 드 살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개
신교가 깊게 스며들어 있었고 지척의 강력한 제네바에 의해
견고하게 방어되고 있던 이 지방을 상대로 이 젊은 사제(1594
년 샤블레에 도착했을 당시 그는 스물일곱 살이었다)가 단 4
년 만에 성공할 수 있었던 사도적 책략은 무엇이었는가?
이 성공을 분석하려면 일어난 사건들과 정치적 상황을 당
연히 고려해야 한다. 앙리 4세도 당시 다른 모든 지존처럼 자
기 왕국 내부적으로는 종교적인 일치를 호소했고, 외부적으
로는 너무 노골적으로 개신교 국가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
른 한편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에
알프스 고개를 통제하는 스위스 칼빈교도의 주들을 조심스럽
게 대해야 했다. 제네바는 독일로 향하는 한 길목의 주요 도
시였다. 이탈리아와 관련하여 프랑스의 외교 정책은 매우 모
호했다. 앙리 4세는 교황과 친밀할 필요가 있었지만, 또한 교
황과 불화를 일으키고 있는 이탈리아 제후들에게 불만을 안
겨서도 안 됐다. 이 혼란 속에서 사브와 공작 샤를 엠마누엘
은 매우 능숙하게 음모를 꾸몄다. 베르방 조약(1598년 5월 2
일)으로도 앙리 4세와 논쟁을 끝맺지 못했다. 실제 1588년 샤
를 엠마누엘이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간 북부 이탈리아의 후
작령 살룻소Saluzzo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1598
년 4월 13일 앙리 4세가 서명한 낭트Nantes 칙령은 왕국의 내
부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왕이 어떤 타협을 택해야 했는지 보
여준다. 그처럼 외부의 경우도 자신의 가톨릭 동맹과 개신교
119

13.2 Page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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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동맹 사이에서 어려운 줄타기를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바로
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제네바와 베른은 앙리 4세 정부 내에
서 큰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건들의 진행 상황에
따라서 어떤 때는 더 심하게 어떤 때는 덜 심하게 샤블레, 테
르니 그리고 젝스Gex 지방에서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을 마
비시켰다.
이 어려움이 다른 것은 몰라도 프랑수아 드 살의 사도적 활
동에 대한 복음적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역할을 했다.
그 힘의 원천은 그의 신앙이다. 하루는 자신의 이름을 갖
매우
의미심장한
3)
어구전철Anagram
만들었다.
“Foi
sans
descaler” 결함이나 나약함이 없는 신앙을 뜻한다. 그 말이 틀
리지 않았다. 프랑수아는 가톨릭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이 있
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의가 거룩하고 양식 있는 사제들에
의해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있다면, 대중들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 옛 신앙으로 돌아오리라
고 확신했다.
신학자이고 법률가인 프랑수아는 이미 그 당시부터 만일
교회가 살아남길 원한다면, 교회가 어떻게 쇄신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확고한 개념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황폐화
하는 악에 대해 깨닫는 바로 그 순간, 그 구제책, 교회를 구원
할 수 있는 유일한 구제책을 생각하게 한다. 사도로서 합당한
사제직분의 회복이다. 과감하고 성스러운 이 전략의 중요 방
3) 어구전철(Anagram): 특정한 단어의 철자나 문장의 단어를 재배열해 다
른 문장이나 단어로 읽히게끔 하는, 일종의 언어유희 퍼즐(역자주).
120

13.3 Page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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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향성을 강조한다. 이 방향성은 우리에게 전해진 그의 글, 회
상, 편지 등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먼저 전통과 신학적 해석의 모든 순수성을 지
니고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프랑수아는 개신교의 지적과 그
의 적들이 당대의 기술을 등에 업고 도발하는 어려움 등을 자
세히 살펴보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이 모든 것들
을 절대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칼빈주의의 현실, 그 원인, 그
잠재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대중과 심지어 일부 목사들
도 무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는 -어느 날 이렇게 썼다- 각자가 칼빈의 가르침을 손에 들고
있다. 그 가르침을 모두 각기 기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
데 내가 있다.” 그것을 더욱더 잘 이해하기 위해 금서목록에
올려진 이 책을 읽어도 된다는 로마의 승인을 요청했다. 「논
쟁」은 프랑수아가 어떤 정신과 방식으로 이 이념적 싸움에 임
했는가를 드러낸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참됨과 권리를 적들이 부정하는 것에 맞서 이를 굳건히 세우
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매일매일 자신의 전투를 가득
기록한 팸플릿과 전단지를 통해 그렇게 큰 성과를 거뒀다. 이
것을 묶은 「논쟁」은 1870년 1차 바티칸공의회의 교부들이 교
황의 무류성을 정의할 때 그 밑받침이 되었고, 프랑수아에게
1878년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1923년에는 가톨릭 작가들의
주보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했다.
복음의 가르침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거룩한 섭리
에 따라 영혼 안에서 일하고 땅의 뿌리처럼 영혼 속을 파고들
121

13.4 Page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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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어 간다는 확신으로 프랑수아는 강론했다. 자신의 가장 중요
한 의무 중 하나라고 여긴 이 말씀의 사도직을 지치지 않고 수
행했다. 때로는 하루에 네다섯 번씩 각기 다른 마을에서 강론
했고, “밤을 지새우며 말씀을 전했고”, 마치도 신자들이 가득
찬 성당에서 하듯이 예닐곱 명 앞에서 강론했고, 광장에서 교
리를 가르쳤으며, 공개적으로 또는 소수의 목사들이나 원로
들에게 둘러싸여 논쟁했다. 그는 동생 베르나르의 도움을 받
아 대화 형식의 강론을 창안했다.
“지난 주일, 즉 사순 제3주일에 –1597년 3월 12일 릿카르
디 교황대사에게 썼다- 아침 일찍 강론을 마친 후 두 번째는
알랭쥬 성당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가본 적이 없는 8km 정도
떨어진 세르방스Cervens 성당으로 가서 강론했습니다. 제가 기
꺼이 가서 강론하겠다고 신자들에게 미리 알렸기에 정말 많
은 착한 신자들이 그곳에 모였고, 강론을 마치자 그들은 이 자
녀의 빵을 모시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표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정된 다음 강론 시간에 맞춰 10km 정도 떨어진 토농
까지 도착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처럼 제가 이곳에 머물며
여러 곳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도적 전략에서 이미 밝혔듯이 그는 교리교육, 교의에 대
한 살아있고 단순한 가르침, 성경의 거룩한 글, 하느님의 말씀
등에 우선적인 중요성을 뒀다. 자신의 허름한 가방에 항상 성
경과 함께 성무일도를 넣어서 다니지 않았을까? 그는 성서를
깊게 알고 있었고, 그의 가장 친밀한 서신이라도 그 골조는 자
주 성서 인용으로 이뤄졌다.
122

13.5 Page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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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우리는 성 프랑수아 드 살이 여느 개신교인들과 얼굴을 맞
대고 또는 마음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 생
생하게 연상되도록 예를 들자면, 개종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던 다뷸리 영주와 “풀밭에서” 나눈 친밀한 대화를 떠올릴
수 있겠다. 이러한 만남 중 세 가지가 유명하지만, 여전히 미
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의 세 만남은 제네바에서 테오도르 드
베즈와 가진 것이다. 프랑수아 또는 클레멘스 8세 중 누가 기
획했는가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프랑수아가 명령처럼
보이는 교황의 공식적인 동의를 받은 후에야 이 개종 시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개신교 측에는 이 만남과 관련된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
4)
다. 가톨릭 측에는 –그의 시성시복 조사의 증언 외에도- 이
만남 직후 프랑수아 드 살이 1597년 4월 21일, 클레멘스 8세
에게 쓴 편지가 남아있다. 이 편지에는 신중함이 가득했으나
희망이 묻어나고 있다. “저는 어렵지 않게 혼자 있는 베즈를
만났습니다. 그의 생각을 고백하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
원한 것이 무의로 끝나고 결국 물러날 때, 저는 그에게서 지금
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충분히 흔들지 않은 돌 같
은 심장을 발견했습니다. 사악한 날들로 가득 찬 완고한 노인
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말들이 제가 그를 평가하도
록 합니다만, 저의 개인적인 의견은 이렇습니다. 그와 더 자
주 평온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아마도 그를 주님의 우
4) P.-F. Geisendorff, Théodore de Bèze, pp. 402-407 참조.
123

13.6 Page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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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리 안으로 이끌 수도 있겠다 입니다. 그러나 어떤 늦춤도 80대
노인에게는 위험합니다.” 그러면, 두 번째 만남을 마친 테오
도르 드 베즈가 자신의 방문객에게 한 작별 인사를 기억하자.
“저에 관해서, 제가 만일 바른길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의 자
5)
비가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시길 매일 기도합니다.” 이런 테
오도르 드 베즈의 태도가 프랑수아 드 살에게 희망을 심어 줬
다. 사실 이런 태도는 그가 이단자들을 다루는 방식에 잘 맞는
대응이었다. 여기서 매우 예민한 문제를 다루자. 프랑수아 드
살이 때때로 위그노들에 대해 매우 가혹한 말을 한 것은 확실
하다. 마찬가지로, 토농의 40시간 기도회 이후 이어진 정치적
협상에서 프랑수아는 샤블레, 특히 토농에서 개신교 목사들
의 거주를 단호하게 반대했고, “위그노의 교리를 종교적이라
기보다 당파적으로 더 따르는” 토농의 마지막 완고한 사람들
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요청했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니까 그는 개종과 종교적인 문제에 세속 세력이 개입
하는 것을 두고 당파적인 입장이었는가? 프랑수아 드 살은 자
기 삶의 여정 이쯤에서 진화를 이루기 때문에 여기서 잘 구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파도바의 법학도 시절 당시의 일부 법적
논제를 따르려는 경향이 너무 강했기에 그는 아마도 정치적
인 제약이나 무기 사용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
석의전사제로 임명된 후, 특히 사제가 된 후에 프랑수아는 자
신은 영적 무기, 성덕과 신학적 지식의 무기, ‘사랑’의 무기로
5) Ibid.
124

13.7 Page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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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만 무장된 게릴라라고 확고하게 선언했다. 제네바 의전사제
들 앞에서 젊은 수석사제가 한 감동적인 강론을 기억하자! 어
쨌든 샤블레 선교를 끝내가면서 프랑수아는 자신이 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려 들었음을 발견했고, 그의 생각 속에 명백히 상
반되는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영혼에 대한 사
랑이 그를 온유함으로 인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사상과 관습에 따라 종교적 일치 없이 정치적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
하나의 왕국.” 그의 내부에서 법학자와 선교사는 꽤 심하게
일치를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수아
드 살에게 내적 충돌은 없었다. 그의 신학적 낙관주의는 그로
하여금 개신교도들의 신앙 행위가 금지된다면 그리고 칼빈교
도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르친다면, 적어도 그들이 충실하
고 성실하다는 전제하에 그들은 개종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
6)
각하게 했다. 한 예가 이 주제에 대한 프랑수아의 생각을 생
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598년 6월 13일, 안시에서 베르
방의 평화paix de Vervins가 선포되었던 같은 날, 프랑수아는 릿
카르디 교황대사에게 이렇게 썼다. “하느님의 종들이 이 복된
평화를 통해 얻게 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적 이점 가운데,
평화의 주인이고 왕이신 주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원하는 평화 속에 자리를 잡도록, 교황청이 인도하
고 프랑스 왕이 Interim을 (Interim은 샤를 5세 시대부터 가톨
6) 개신교도들 입장에서 그들 역시 같은 원칙을 지지했다. J. Leclerc, His-
toire de la tolérance …, vol. II, pp. 126-127. 참조.
125

13.8 Page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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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릭과 프로테스탄트에게 양심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한 조
약) 통해, 제네바시가 가톨릭 신앙 행위를 허용하게끔 효과적
인 노력을 기울인다고 다시 약속하는 것이겠습니다. 이는 칼
빈주의의 뿌리를 끊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두 달 뒤 낭트 칙령이 발표(1598년 4월 13일)되자 프랑수
아는 프랑스의 새로운 입법과 매우 유사한 입법이 제네바에
서 이뤄지길 희망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601년 7월, 프랑수아는 클레멘스 8
세에게 그라니 주교의 이름으로 글을 쓰면서 매우 다른 말을
하는 듯했다. “저희 교구의 론Rhône 건너편에 남아있는 이 부
분(Gex 지역을 말한다)은 프랑스 조약(1601년 1월 17일 리옹
Lyon에서 체결)으로 인해 프랑스 왕에게 넘어갔습니다. 왕은
그곳에서 가톨릭 신앙 행위가 온전히 재개되도록 명했으나,
적어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이단이 존재하는 것을 묵과
해야 하는 조건(Interim에 따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탕에는 각자에게 나쁘게 생각하고 옳지 않은 방식으로 행
동해도 되는 자유를 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의 어
려움을 많이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른 판단의
접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거든 저거든 복음 전파라는 목적
은 같다. 첫 번째의 경우 Interim이 과정 수행을 돕는 것이라
면 두 번째는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이
해하기 위해서라면 당시의 정치적 사상을 고려하는 것만으로
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좋은 믿음을 가
진 이단자들 역시 구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너무 과도
126

13.9 Page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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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하게 축소하는 당시의 편협한 어떤 신학적 개념을 아는 것 또
7)
한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개신교도들을 구별하는 것이 필
요하다. 사람에 대해서라면 프랑수아는 사실 인내, 선의, 환
대의 정신으로 가득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 그를 비난
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수도자들도 있었다. 이런 비난을 알게
되면 프랑수아는 이렇게 반박했다. “다른 어떤 방법보다 단맛
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경
험해 왔는지…. 사람들이 근엄함과 엄격함보다는 사랑과 자
애로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개종하면서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 자원, 재산 등
을 잃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위한 구호
활동을 조직하고, 피난처와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만일 토농에 있었다면 1595년 혹은 1596년부터 예수회
학교가 세워졌을 것이다. 1598년, 개종 요청이 밀려드는 것
을 보자 마음에 또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우리는 프랑수
아가 1599년 1월에 그라니 주교의 이름으로 교황 클레멘스 8
세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그 설계도를 찾을 수 있다. 제네바에
서 온 “그들의 모든 재산을 빼앗긴” 새 개종자들을 위해 세우
는 것으로 “자비의 집 혹은 애덕의 숙소를 말합니다. 그곳에
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약탈당한 피조물들이 특히
남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받아들여지고 음식을 제공받으며
7) Ibid.
127

13.10 Page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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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교황 클레멘스 8세의 환영을 받은 프랑수아 드 살(F. Chauveau의 판화)
128

14 Pages 13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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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Page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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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그리스도인의 교육을 받을 것입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학
문을 닦거나 또는 다음에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직업을 연
마할 것입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조직자로서, 아이디어의 실행자로서,
또 말하자면 가장 좋은 의미의 정치인으로서도 정말 매우 뛰
어난 것이었다. 프랑수아는 이런 재능을 샤블레의 가톨릭 신
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냈다. 그들에게 부성적이나
확고하게, 까다로우나 달콤하게, 엄격하나 관대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한 뜨거운 예인 샤블레 선교활동의 자금지원 문제
에 대해 용기를 갖고 진단해보자. 프랑수아 자신은 철저히 가
난했으나 이 가난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충실한 제자”가 되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혹시 그가 어떤 방패를 갖게 된다면,
그것을 자선에 사용했다. 가난이 하느님께서 그에게 부과하
는 것이 아닌 한, 이것이 사도직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어야 하
며 또 영혼들에게 추문이 될 정도는 아니어야 함을 그는 알고
있었다.
1595년 5월 말부터 친구 앙투앙 파브르에게 속마음을 털
어놓았다. “또한 (나의 사도직에 반하는 큰 문제는) 말하자면
교회 소유의 한가운데서 가톨릭 군주 아래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5월 31일, 그는 본당신부가
없는 쁘띠 보르낭Petit-Bornand 성당의 지원을 간청했다. “수석
사제관은 소득이 1센트도 없고, 수석사제에게 주어지는 급여
도 연봉 60스쿠디밖에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만일 제
129

14.2 Page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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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네바로 돌아갈 희망이 아니라면, 그나마 수입이 있는 본당신
부로 사는 게 그렇지 않은 수석사제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제 양심에 따라 살만큼 지니면서, 제가 헌신할 작은
이들을 통해 주님께 봉사하고 이 교구의 교회들을 위한 봉사
이외는 추구하지 않겠습니다.”
선교는 조금씩 성공을 거두고 발전했으나, 프랑수아는 교
구의 큰 후원자들과 논쟁에 빠져들었다. 생활수단을 제공하
지 않으면서, 또 칼빈교도들에 의해 훼손되고 무너진 성당에
대한 재건을 시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본당 신부들을 성당으
로 보낼 수 있겠나? 그들에 대한 지원을 보장하지 않고 어떻
게 카푸친회원이나 예수회원인 강론자들을 샤블레로 모셔올
수 있겠나? 절대로 필요한 사업들을 돈 없이 어떻게 시작할
수 있나? 돈이 없는 게 아녔다. 생 모리스 에 라자르Saint Mau-
rice et Lazare 기사단이 1579년 베르누아Bernois에서 빼냈던 교회
자산을 그레고리오 13세에게 맡겨두었었다. 1596년 토리노
에서 공작은 프랑수아의 계획을 승인했는데, 기사단이 그 자
산 중 적어도 일부를 샤블레의 선교를 위해 제공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공작의 명령에 입술이 나왔다. 그 시점부
터 프랑수아와 기사단의 충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는 공
작을 통해 또는 교황대사를 통해 기사단을 소유욕으로부터 떼
어놓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1597년 2월 21일, 그는 분명한 어조로 그들의 책임소재를
밝혔다. “이 해법은 –그들에게 다른 것들과 함께 한 말- 그렇
게 원했던 평화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각하는 이 영토에서 누
130

14.3 Page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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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리는 모든 자산과 그 부속물 및 연루된 자산을 양도하는 데 절
대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이것에다 개인들에
게서 답지하는 것을 합치면, 이 지역에서 온 방향으로 빛을 발
산하는 눈부신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군의 주
님 전투에 참전”과 관련될 때면 프랑수아는 “성하든, 전하든
그리고 기사이든 누구든 그들을 귀찮게 만들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개인적 청빈에 대한 깊은 의미와 매우 잘 어울
리는 이러한 법적, 재정적 입장의 확고함은 프랑수아의 사도
적 태도의 진정한 상징이다.
이 모든 현세적인 문제에서 그가 지닌 의도의 올곧음과 순
수성을 의심할 수 없다. 이는 샤블레를 위한 본당신부들을 선
택하고 배치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 선교 본당신부
들이 “성숙하고 사목활동의 전문가들”이며 “개종 활동과 교
회의 성스러운 거행에 적합한 이들”이길 원했다. 동료가 되
고자 하는 이들에게 어려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지 않았다.
1597년 3월 2일, 토농에서 교황대사에게 쓴 글이다. “이곳으
로 와 인내와 희생을 실천하기 위해 이제 곧 자유롭게 될 사제
들이 몇 명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며 적어도
지식이 잘 제공되도록 모든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 그러
나 경험 많은 강론가가 하는 소정의 교리교육을 통해 먼저 길
을 준비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
니다.” 이미 그때부터 이 본당신부들을 위해 “여럿이 함께 사
는 집과 거처” 마련을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이런 계획을
실천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때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
131

14.4 Page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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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이 본당의 책임자로 배치한 이들을 찾아가 “부성적이고 형제
적인 사랑으로” 최대한 그들을 도왔다. 프랑수아는 규정을 준
수하지 않아 “뚱뚱해진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름뿐인)이
자신들이 건설하는 것보다 더 많이 파괴하는” 것을 대하며 얼
마나 고통스러워했는가.
이것이 프랑수아가 이 선교의 시기를 끝마쳐가며 그리고
그라니 주교의 권위 아래서 그와 함께 제네바 주교좌의 직무
를 나누기 직전에 우리에게 드러낸 자기 모습이다. 그 삼십 대
의 사제는 이미 자신의 천재성과 성덕의 정도를 보여줬다. 우
8)
리가 그의 특징을 파악하는 데 “프랑수아 드 살의 완전성” 에
대한 생트 뵈브Sainte-Beuve의 날카로운 판단을 따르면서 여기
에 영적 차원을 가미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겠다. 파스칼
의 이론을 프랑수아에게 적용하면서, “나는 덕의 과장을 칭
송하지 않는다. … 그러지 않으면 올라감이 아니라 떨어짐이
기 때문이다. 한쪽 끝에 있는 것으로 자신의 크기를 드러낼
수 없고, 동시에 양쪽 끝에 존재하며 그 중간 공간을 모두 채
울 때 자신의 크기가 드러난다.”라고 생트 뵈브는 자신의 글
에서 프랑수아 드 살 안에 있는 상반의 종합에 관해 설명했다.
“매우 높은 자질, 일관성, 기질, 수용성 및 확장성, 마침내 파
스칼의 용어를 빌어 중간 공간 등에서 (그)보다 뛰어난 사람
은 없다. … 내가 앞에서 언급한 각각의 특성에다 그의 상반
성을 추가해야 한다. 이 상반성이란 평형을 맞추거나 갈라지
8) Charles-Augustin Sainte-Beuve, Port-Royal, 3a ed., Paris, Hachette, 1867, vol. I,
pp. 249ss.
132

14.5 Page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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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샤블레의 사도: 수확기
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품성 자체 안으로 진입하고 자신을
병합하여 지배적인 품성을 수정하고 강화함으로써 균형과 안
정성을 갖게 하는 것과 같다. 이 땅에 있으면서 이미 그의 영
혼은 하나의 별 아래에 있는 듯 온전한 구면체다.” 그리고 그
는 프랑수아가 “달콤함의 비둘기가 아니라 달콤함의 독수리”
라고 선언함으로써 이러한 상반성의 종합에 대한 빛나는 예
를 제시했다.
그러니까 그에게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용어에 접근할 수
있었다. 프랑수아 드 살은 진정으로 척도가 아니라 충만함의
유형이다. 그에게는 어떤 부족함도 없다. 그에게서 상반은 대
조 또는 불협화음이 아니라 탁월한 조화이다. 그의 글을 너
무 가까이 파고들어 읽는다든지, 「신심생활입문」이나 「신애
론」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심지어 샹탈 수녀나 다른 총애
를 받던 영혼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이 담긴 「서간집」만을 맛
본다면- 그것들은 그의 일부 측면들만 보여줌으로써 그를 곡
해하게 할 것이다. 샤블레 선교사를 곡해함으로써 영적 지도
자를 위조해낼 것이고, 활동과 통치의 사람을 곡해함으로써
작가를 위조해낼 것이다. 특히, 인간적 자산 즉 법률가의 능
력과 정치가의 섬세함을 곡해함으로써 신비가를 위조해낼 것
이다. 하나는 다른 것 안으로 “들어가 융합된다.”
더 나은 용어가 없다면, 균형에 관해 이야기하자. 그러나
이 균형은 지상의, 기복이 있거나 평평한 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높이 날아가는 고차원의 균형이며, 사랑의 자유에 의
해서만 주어지는 균형이다.
133

14.6 Page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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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생트 뵈브는 그 모든 심연을 관통하지 않았음에도 이 은
총의 신비를 예감했다. “대치 상황에서 화해로 넘어가면서,
나는 생 프랑수아 드 살의 특징이자 마침내 오로지 그 척도를
줄 수 있는 마지막 중간 자질에 도달한다. 내 말은 한편에 신
비적이고 관상적인 덕 그리고 그의 모든 솔직한 사랑과 또 다
른 한편에 그의 모든 영민함이 담긴 인간적 판단 사이의 동맹
을 의미한다.” 생트 뵈브는 한 계단 더 내려가거나, 아니면 더
좋게, 프랑수아 영혼의 한계를 뛰어넘었어야 했다. 그는 자기
영웅의 모든 인간적 은총(존재하는 것 중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이 그 충만함에 이르렀음을 보아야 했다. 오로지 왜
냐하면 하느님 사랑의 불이 모든 찌꺼기를 태우고 결점들을
정화했으며, 내부에서 그것들을 비추었고 어떤 식으로든 변
모시켰기 때문이다.
134

14.7 Page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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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프랑수아의 로마 여행
우리는 토농의 대단했던 40시간 기도회를 배경으로 프랑
수아 드 살을 살펴봤는데, 여기서 샤블레의 사도는 보상을 받
았다. 공작의 입장에서는 그 지역이 신속하게 완전히 개종되
기를 희망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1603년 프랑수아가 클레멘
트 8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1598년도의 샤블레의 상황을 이
렇게 묘사했다. “겨울이 떠나는 가운데 봄이 미소를 짓고, 생
명을 주는 십자가의 ‘고귀하고 찬란한 나무’가 솟아오르는 것
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찬미 노래가
산비둘기의 소리처럼 퍼져 나왔고, 새순이 돋아난 포도나무
는 그 향기를 발산했습니다.”
프랑수아는 1598년 11월 초, 그라니 주교의 총대리이자 그
의 조카인 치시Chissé 주교를 동반하여 로마로 출발했다. 모데
나에 도착하여 그의 사촌인 루이와 앙투앙 파브르가 역시 여
행의 동료로 합류했고, 12월 중순에 여행자들은 영원의 도시
에 도착했다. 그라니 주교의 청원들을 교황에게 드리는 일은
프랑수아가 맡았고, 총대리는 프랑수아의 보좌주교 칙령을
위한 청원을 담당했다. 클레멘트 8세의 환대는 부성애를 최상
135

14.8 Page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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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프랑수아를 가까이 불러, 샤블레
의 활동에 대해 긴 시간 기꺼이 경청했다.
얼마 전 교황은 데 메디치 추기경으로부터 토농에서의 열
광적인 40시간 기도회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 프랑수아는
그라니 주교의 청원을 올렸고 1599년 1월 15일에 답신을 받았
다. 이제 교황의 결정을 기다려야 했다. “분위기상 성청의 궁
정보다 책임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곳은 세상 어디에
도 없을 것입니다. -프랑수아는 알현이 있는 날마다 그라니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성하께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성
하의 의향을 살펴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는 추기경들의 조
언을 들으신 후, 사안의 무게를 재고 다시 잰 다음 당신의 치
하를 내리실 것입니다.”
프랑수아는 자유 시간을 이용하여 로마의 저명인사들 “추
기경들과 거룩한 수도자들”을 예방하고 도시의 교회와 수도
원들을 순례했다. 3월 15일, 치시 주교는 두 번째의 알현 기
회를 잡고 교황에게 보좌주교에 대한 요청서를 제출했다. 교
황은 즉시 이 제안에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프랑수아를
불러들였고, 제네바의 주교가 요청한 모든 것을 허락하고 싶
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황은 그에게 다음 주 월요일 자신
의 입회하에 의전사제의 시험을 치를 것이니 이를 준비하라
고 명령했다.
프랑수아는 이런 교황의 언급에 매우 놀랐다. 사브와 사제
들은 프랑스 교회에 내린 특전에 따라 그 시험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브와의 상원과 공작 전하는 이를
136

14.9 Page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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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두고 뭐라 할 것인가? 그러나 교황은 “이는 단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며 존엄한 추기경단 모두에게 (프랑수아를) 추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기에 순명해야 했다.
월요일이 되어 프랑수아는 교황궁으로 향했고 “사람들이
가득 찬 방”으로 안내되었다. 말씀대로 교황이 주재했고 그
주위로 여덟 명의 추기경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에는 피렌체
의 보르게세Borghese 추기경, 바로니오Baronio 추기경, 보르로메
Borromeo 추기경 등이 보였다. 그리고 스무 명의 대주교, 주
교 및 수도회 총장들이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청원자
를 공격할 임무를 지닌 신학자들 틈에 있었다. 참으로 명예의
청문회였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끝나, 이런 성공이 안시에서
너무 과장되어 퍼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1599년 3
월 26일, 프랑수아는 루이 드 살에게 이렇게 썼다. “나에 대해
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내가 시험
받는 동안 혼란에 빠지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도록
하셨습니다. 교황 성하가 내게 보여주신 선한 아버지의 치하
는 나로 하여금 누구보다 좋은 자녀요 거룩한 로마 교회의 착
한 종이 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친구들이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 쓰든 간에 기억하십시오. … 궁극적으로 우리의 실
제 모습은 하느님 앞에 있는 우리의 모습뿐입니다.”
주님탄생예고 축일인 3월 25일, 프랑수아는 교황의 미사
에 참석하여 교황이 손수 건네는 영성체를 받았다. 이때 그는
“우리 주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고, 우리가 여기에 옮기는
글을 메모로 영구히 남겼다. “주님탄생예고 축일에 지엄하신
137

14.10 Page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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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성하의 손으로부터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내 영혼은
매우 큰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하느님은 내게 육화의 신비를
알아볼 큰 통찰력의 은총을 주셨다. 우리와 함께 살고자 하시
는 당신의 뜻에 따라 성부의 권능과 성령의 역사로 말씀이 어
떻게 마리아의 순결한 태에서 우리와 함께할 사람이 되시는
그 순간부터 육신을 취하셨는지에 대해 형언치 못할 방식으
로 알게 하셨다.”
프랑수아는 로레토를 생애 두 번째로 성지순례한 후 1599
1)
년 늦봄에 안시로 돌아왔다. 잠시 머물렀던 토리노에서 생
모리스 기사단은 “그들의 개종한 본당에서 받은 모든 연금을
본당 사제, 사목자, 강론자의 유지를 위해 적용할 수 있는 권
한을 제네바 주교에게 준다는 성하의 교서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내 운영사항에 대한 보고를 제시하게 했다.” 이 기회를
통해 기사단은 이 고위 성직자의 온유함 이면에 법률가의 엄
격함과 사도적인 인물의 정의가 감춰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라니 주교의 보좌
니코폴리스의 명의주교로 임명된 프랑수아는 그라니 주
교의 그늘 아래서 2년을 지냈다. 그가 좋아하고, 어떻게 보면
1) 프랑수아가 1591-1592년에 파도바를 떠날 때 로마에 가지 않았다면,
역사가들이 1591-1592년에 머물렀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부분
을 1599년 이 여행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
138

15 Pages 14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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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Page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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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그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였다. 사실 그는 제네바의 주교가 살
아 있는 한 축성되는 것을 완고하게 거부한다든지 주교의 복
장을 걸치는 것조차 사절했다. 보좌가 진행 중인 모든 문제의
처리는 당연하게도 바로 현직 주교의 이름으로 하며, 그것도
대부분이 샤블레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 일들은 늘 기쁨과
실망이 교차하였다.
어려움 중에도 본당들은 자리를 잡아갔으며, 예수회 학교
는 교황에게서 승인받았고 재정적 지원도 약속받았으나 리옹
관구장이 이곳으로 보낼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 모든 것들에
더해 1600년 8월 사브와에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 1600년 2
프랑수아 드 살이 주교로 축성된 토랑스 성당.
139

15.2 Page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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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월 27일, 왕은 공작과 파리협약을 맺었으나, 공작이 변덕을
부려 음모를 꾸미고 무효로 했다. 그러자 앙리 4세는 속전속
결로 사브와를 공략했다.
베아르네Béarnais가 안시에 들어오는 날 제네바 주교의 입
장은 극도로 난처해졌다. 사브와의 공작이며 모든 제네바 관
할지의 군주인 샤를 엠마누엘은 앙리 4세의 적이지만, 안시가
속해 있고 이 도시에 대한 일종의 특권적 주권을 행사하는 제
네부아 느무르Genevois Nemours의 공작은 아니다. 당시 제네부
아 느무르 공작은 분쟁에 휘말려 들지 않도록 매우 주위를 기
울였다.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특히 제네바와 베른 주
민들은 이미 프랑스가 재정복한 나라들에 잠입해 가톨릭을 다
시 파멸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프랑수아는 다시 한 번 이 지역을 구한
다. 몸소 마을들로 달려가 용기를 북돋우고 선교사들과 본당
신부들을 지원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 앙리 4세를 외교적
으로 설복했다. 왕은 그라니 주교에게 “샤블레 지방에서 신앙
을 위해 지금까지 했던 것에 반하는 일체의 변화도 없을 것”
이라고 약속했다.
마침내 1601년 1월 17일, 리옹에서 공작의 전권대사와 프
랑스 왕 사이에 평화가 조인됐다. 그런데도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정치적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불확실하게 변했다. 만
일 샤를 엠마누엘이 살룻조를 유지한다면 라 부레스la Bresse,
르 뷰제le Bugey, 르 발로메le Valromey 및 젝스Gex 마을을 프랑스
에 양도해야 했다. 프랑스 왕이 주저하지 않고 악명 높은 위
140

15.3 Page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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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그노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하도록 뒀던 것을 볼 때(그는
샤블레를 점령하는 동안 그렇게 했다) 이 지방들이 어떻게 되
었을까?
1600년 8월 26일, 프랑수아는 이미 릿카르디 교황대사에
게 슬프지만, 근본적으로 위안이 되는 색채의 편지를 보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벌주실 때 즐겨 사용하시는 큰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우리의 토농에서 끊이지 않는 개종자
들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이 드러난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 나
약한 제게는 대주님께 이에 관해 편지를 올리는 위안만이 남
아 있습니다. 그들은 호시탐탐 제네바나 베른으로부터 침략
이라는 위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거룩한 교회에
확고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단자들이 현
지에 나타나지는 않았기에 위협으로만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
다. 그러나 왕이 그 불신자들을 고용하기 위해 올 것이라는 두
려움은 개종자들의 약한 용기를 크게 흔들어 놓을 만합니다.”
그라니 주교의 와병이 이런 상황 속에 있는 프랑수아를 극
단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의 가장 경애하올 주교님께
서 아직 많이 아프십니다. 지난달 샤블레에서 감내하셔야 했
던 수고의 여파로, 그리고 우리의 상황이 그렇게 나쁜 길로 들
어가는 것을 보시는 고통 때문에…. 선교지의 사제들은 제네
바와 베른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지만, 여
전히 샤블레에 남아 있습니다. 자리를 피해 상황이 어떻게 전
개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겁 많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본당신부들이 자신들의 성당에 남아 있습니다.”
141

15.4 Page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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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가톨릭 신자들의 상황이 위험해지는 것은 아닌가? 다음
해 파리에서 외교적 협상이 열렸다. 하지만 그 협상은 매우 까
다롭게 진행됐고 그 결론 역시 빈약하고 형편없었다.
1600년 5월, 리옹의 서적상 쟝 필르호트Jean Pillehotte는 「우
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 깃발의 수호」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는 프랑수아가 라 페이 목사의 오래된 팸플
릿에 대해 응답한 것이다. 너무 늦은 응답이긴 맞지만(라 페
이 목사는 1597년 안느마스에서 40시간 기도회가 있었던 직
후 「간락한 논고Brief Traité」를 썼다), 정말 프랑수아 드 살의 탁
월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전쟁의 언어는 평화의
언어와는 사뭇 다르다.”라고 작가는 통찰한다. 이 전쟁의 언
어는 분명하고, 정확하고, 논증의 힘을 지닌다. 탄탄한 변증
법, 진리에 대한 열정, 교의에 대한 확고성, 전통에 대한 충실
성 등 여기서 우리는 「논쟁」의 방식을 다시 본다. 게다가 전투
용 무기일 수도 있었던 이 책은 프랑수아가 받은 은총에서 금
욕주의에 관한 논문으로 탈바꿈한다.
종교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생각은 이미 영성 활동에 활력
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경배의 참되고 순수한 본질은 마음의
내적 지향에 있으며, 이것이 자신을 경배의 대상에게 복종하
게 한다. 그리고 지식, 즉 지성의 작용은 기본처럼 복종에 선
행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것의 효과이자 결과인 외적 행
동은 복종을 뒤따른다.”
이 책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개신교 영역으로 다시 돌아간 샤블레나 사브와의 다른 지역
142

15.5 Page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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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이 난리가 나는 동안 많은 영혼이 충실하게 남아 있도록 매우
효과적으로 도왔다.
1601년 3월 18일, 1599~1600년을 정산하면서 릿카르디
교황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수아는 그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다. “위안: 대주님께 알려드리는 것은 토농이나 테
르니Ternier에서 몽글롯트Montglot와 위그노 교도들의 통치하에
그리고 제네바인들이 파놓은 함정(특히 그들은 테르니에서
제대로 폭정을 행사했고 신성한 것에 대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때문에 정말 많이 고생했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개종자 중에
다시 돌아간 사람은 네 명도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동에
의한) 역 연동운동이 발생해 성탄절을 완전히 특이한 활력을
갖고 거행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변경은 다름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오른손에 의한 섭리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1601년 6월 28일) 프랑수아는 교황대
사에게 심지어 이렇게 알릴 수 있었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성탄절부터 오늘까지 개종자들의 수는 더 늘었습니다.” 몇 달
뒤에는(1601년 12월 21일) 릿카르디 대주교의 후임인 타르타
리니 교황대사에게 이렇게 썼다. “대주교님께 이 교구의 종교
적 상황에 대해 보고드립니다. 토농이나 테르니뿐 아니라, 최
근에 새롭게 드러난 사실인데, 제네바의 성문까지 이어지는
젝스나 가이야르Gaillard 지방에서도 이런 행복을 맛보고 있음
을 말씀드립니다. 젝스와 가이야르에서 지난주 제네바 주교
는 성령강림 축일부터 오늘까지 신앙을 회복한 수천 명의 영
143

15.6 Page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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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혼이 사용하도록 8개의 성당을 회복시켰습니다. 프랑스 왕 치
하에 있는 토농과 테르니는 세 성당이 새롭게 설립되었고 저
희 의전사제들 세 명이 거룩한 성무활동을 위해 그곳으로 파
견되었습니다. 그들은 큰 성과를 거두며 활동하고 있는데, 그
곳에는 자신들의 가톨릭 신앙을 감추고 있던 오래된 신자들이
마치도 위그노의 잿더미에 덮여져서 70년 동안 피어오르기만
기다리던 불씨처럼 마침내 확 불꽃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신심은 거룩한 말씀의 숨결로 인해 불꽃이 살아나 참
된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개종하고 있
고 개종을 원하는 사람들도 줄을 잇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며 프랑수아는 마침내 그의 위대한 사도적
꿈 중 하나를 실현할 계획을 세웠다. 1599년 9월 13일 자로 클
레멘트 8세가 서명한 설립승인 칙서가 있었으나 지금까지는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실행하지 못했던, 거룩한 집을 토
농에 세우는 것이다. 칙서가 “모든 과학과 예술의 거처”라고
칭한 이 집은 연민의 성모님 가호 아래 놓이며 매우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여러 면에서 현대적인 면모를 지닌다. 이것은 교
장과 7명의 사제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신분, 지위, 역할과 조
건에 있든 관계없이 가톨릭 교의, 과학, 예술 및 모든 교양에
대해 교육을 받으며 훈련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
2)
을 포함한다. 반면, 프랑수아는 이 프로젝트의 실현을 가로
막는 장애물에 대한 환상을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2) Mémoires et documents publiés par l’Académie Salésienne, vol. V, 지원문서 번
호 25.
144

15.7 Page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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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도 -그가 선언한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거의 소용이 없기 때
문에 현실적이고 진지하게 빨리 시작해야 할 것을 자문해야
한다. 만일 이 좋은 것이 단숨에 실행될 수 없다면, 학교나 신
학교 등 보다 필요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이뤄나가야
한다.” 사실 이 칙서는 1602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1601년 그라니 주교의 요청에 따라 프랑수아는 안시에서
사순절 강론을 했다. 4월 6일 금요일 아침, 강론대로 올라가
려는 순간 에메 브발르Aimé Bouvard 신부가 다가와 지난밤에 브
와지 영주가 “매우 평온하게 하느님 손에 영혼을 맡겼다.”고
프랑수아 드 살의 동상, 토랑스 성당.
145

15.8 Page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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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전했다. “프랑수아 복자는 손을 모으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
며 세세대대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찬미한 후, 계속 강론대로
향했습니다. 아무도 그분이 조금이라도 고통 속에 있다는 것
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평상심을 유지하며 당신의 강론
을 이어가셨습니다. 결론까지 마치고 나서 화제를 바꿔 이런
말로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셨습니다. ‘이곳으로 오면서
저는 그 무엇보다도 제가 순명해야 할 분의 선종 소식을 들었
습니다. 두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하루나 이틀 제게 말
미를 주시어 그분께 지극히 당연한 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그리고 또 그 영혼의 안식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사순절이 끝나자 그라니 주교와 그의 보좌는 샤블레의 본
당들을 방문하고 재조직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때 매우 예민한 사목적 문제가 그라니 주교에게 주어졌
다. 프랑스 왕은 젝스 지방에서 가톨릭 신앙의 재건에 대해 매
우 긍정적이었다. 이는 그 지역 스물여섯 개 성당의 본당신부
들을 재구성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톨릭에 보탬이 되
게 하려는 의도와 개신교도들을 화나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
사이에서 앙리 4세는 개신교가 점유한 교회 자산을 이 사제들
에게 돌려주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제들이
수입을 되돌려 받지 못하면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 그라니
주교는 왕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로마 교황 성하에게 요청했
다. 로마에서는 파리에 있는 교황대사에게 명령했으나, 그는
젝스 지방의 실제적인 종교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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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Page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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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기에 유능한 자문가가 필요했다. 당시 그라니 주교는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 중대한 문제들을 자신의 보좌에게 위임
하는 것을 3년째 이어오고 있었기에 프랑수아를 파리로 보내
교황대사와 왕과 함께 젝스 문제를 다루게 했다.
1602년 파리 체류
1602년 1월 2일 수요일, 프랑수아는 생애 두 번째로 파리
를 향해 길을 떠났다. 디아쥬 의전사제와 앙투앙 파브르가 그
를 동반해, 이들 그룹은 1월 22일 수요일 파리에 도착했다. 프
랑수아는 자신이 학창 시절을 보낸 생 자키Saint-Jacques에 머물
렀다.
도착하자마자 프랑수아는 프랑스 교황대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인노첸테 델 부팔로Innocente del Bufalo 대주교는 자기
일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는 “만
일 우리가 왕이 프랑스의 외교 문제를 위임한 드 빌레루아de
Villeroy 경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젝스의 가톨릭에 보탬이 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2월 8일 프랑수아는 그라니
주교에게 이렇게 썼다. “내각이 이 도시로 돌아온 후, 교황대
사는 왕이 우리에게 가보라고 한 빌라루아 경에게 갔고, 그곳
에서 저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에 대해 많이 논의했습니다. 어
쨌든 마지막에 저는 기본적인 요청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대
해 그는 내각이 우리를 위해 바르고 정의롭게 판단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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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 Page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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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그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이 “매
우 고무적인 희망”은 매우 천천히 그것도 일부분만 실현될 것
이다. 9월에 이르러서야 프랑수아는 사브와를 향한 발걸음을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다른 면에서 이 어쩔 수 없던 파리 체류는 프랑수아에게 많
은 영적, 사도적 혜택을 가져다줬다. 말하자면, 그를 지역적
특수성으로부터 단번에 완전히 떼어내 세계와 시대의 큰 문
제 앞에 서게 함으로써 그의 인간적 지평을 넓혀줬다. 프랑수
아가 파리를 떠날 때쯤 그는 최고위층뿐만 아니라 음모나 영
향력을 발휘하는 방식 등 프랑스 내각을 자세히 알게 됐다. 그
는 강론했고, 명사들뿐 아니라 종종 산만하거나 또는 예민한
청중들을 자신의 강론대 아래로 끌어모았다. 그것은 당시 파
리의 상류 사회를 뒤흔들었던 경이로운 신앙 쇄신과 혼합되
3)
었다. “어디든 수없이 많은 신자, 참된 신자들!” 의 생각과 마
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 모든 성공과 이 모든 활동 중에서
도 그는 일상생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제가 지닌
성덕과 사랑을 드러냈다.
모든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프랑수아가 파
리에서 때때로 메르쾨르Mercoeur 공작부인인 마리 드 룩섬부
Marie de Luxembourg 공주를 방문했다는 사실에 달려 있었다.
그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이는 “존중과 사랑의 관계로 가문에
계승된 일이기에 당연히 해야 했습니다. 사실 제 아버지, 할
3) H. Bremond, Histoire littéraire du sentiment religieux en France, vol. I, p. 95.
148

16 Pages 15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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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Page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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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그 왕가의 시종이 되는 영광을 누리
셨고, 그들 인생의 상당 부분을 저명한 마티그Martigues 왕자의
저택에서 공작부인의 아버지, 할아버지 및 증조부를 모시며
보내셨습니다.”
그 시기 1602년 사순절이 시작하기 전, “마침 루브르Louvre
전에 있는 왕비의 경당에 강론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수아에게 이를 부탁했고, “자신이 한 청원의 결과를” 기
다리는 것 외 딱히 다른 할 일이 없었기에 그는 이를 받아들
였다. “저는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저에게 내려진 기도와 명령
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1602년 3월 9일 쿠엑스Quoex 경에게
썼다- 여왕의 경당에서 공주들과 신하들 앞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강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물론 -프랑수아는 그의 로
마 수취인에게 세심하게 덧붙인다- 이로 인해 그 사안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 제가 적응해야만 하는 분들의 분위기가 좋
아지도록 천천히 시도하는 간청이 늦어지지 않게 했습니다.”
즉흥적이긴 했지만, 이 사순절 강론은 큰 성공을 거뒀다. 게
다가 강론자는 롱그빌Longueville의 공주가 보상으로 준다고 한
“금방패로 가득 찬 아름다운 가방”을 거부했다. 공주의 신하
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한편, 제네바 측에서는 보좌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말
라는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빌레루아 경에게 달려왔다. 또 젝
스 지방의 문제는 “다루기에 너무 예민하고 절차가 매우 기이
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602년 4월 초, 프랑수아는 심지어
“희망 외에 다른 것 없는 빈 가방으로” 안시로 돌아가야 할 것
149

16.2 Page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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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게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는 더 자주
편지를 보내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협상이 더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한 사건이 발생했다. 앙리 4세는 이 사브와 강론가에 관한 많
은 찬사를 듣고 “강론대에 있는 그를 보고 싶어 했다.” 프랑수
아는 퐁텐블루Fontainebleau에 갔고, 4월 14일 주일 알비스Albis
에서 왕에게 강론을 했다. “주일 알비스에서 왕은 내가 그 앞
에서 강론하게 했고 그는 강론에 대해 만족감을 표했다.” 이
강론 후에 프랑수아는 긴 시간을 왕과 함께 보냈다. 그렇지 않
았으면, 젝스 지방에 대한 협상은 확실히 무의로 끝났을 것이
기에 이 강론의 기회는 큰 행운이었다. 1602년 4월 18일, 쿠엑
스 경에게 이렇게 썼다. “저는 엉뚱한 말을 했다면 제 모든 협
상이 망쳐질 뻔한 퐁텐블루에서 지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좋은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삼일 내로 모든 것이 완전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만족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살릴 수 있
는 것은 불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항상 전문가들의 말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 밖에서 가져오는 일에 대해 매우 까다롭게
구는 이 궁정에서 일 추진은 이토록 힘이 듭니다.”
확실히, 이 학교는 미래의 제네바 주교를 거칠게 다뤘지
만, 외교관의 자질을 완성해줬다. 실망에서 희망으로, 희망에
서 실망으로, 이런 상황이 9월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사실 소
출은 미미했다.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자신의 사명을 보고하
면서 프랑수아는 이 실망스러운 상황도 언급했다. “원했던 성
150

16.3 Page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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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공의 희망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불행이 있었습니다! 이 거룩한 협상을 위
해 그렇게 많은 조처를 한 뒤, 우리는 세 곳에서 거룩한 신비
를 거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간신히 얻었고, 이 결과 우리 사제
들에게 연간 수입이 주어지도록 했습니다. 나머지 부분에 관
해서는 왕이 직접 우리에게 시대의 가혹함을 상기시켜 주었
습니다. ‘짐은 무엇보다도 가톨릭 종교의 완전한 회복을 원하
지만, 짐의 권한이 의지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비슷한 말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홉 달이 지난 지금 저는 거의
아무것도 끝을 맺지 못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의 아무것도 끝을 맺지 못한 채”라는 표현은 협상의 측
면에 보면 아마도 정확했을 것이다. 반면에, 영적인 측면에서
프랑수아는 많은 일을 했고 훨씬 더 많이 배웠다. “백 번 이
상” 강론했고, 고해를 듣고, 개종을 이끌었으며, 수도원과 대
수도원을 방문하여 많은 영혼에게 열정을 되돌려 줬다. 무엇
보다 당시 평범한 사제이자 그보다 8살 어린 피에르 드 베룰
Pierre de Bérulle 신부는 브레몽Bremond이 주저 없이 “새로운 테
레사”라고 불렀던 마담 아카리Acarie의 궁전으로 그를 안내했
4)
다. 그녀의 응접실은 앗슬린Asseline, 마리약Marillac, 카르투시
앙 보쿠상Carthusian Beaucousin 등 파리에서 가장 신앙심 깊은 사
람들이 자주 방문했다. 프랑수아 드 살은 이미 매우 열성인 이
그룹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즉시 줬을 것이다. 그들 중 여럿이
4) H. Bremond, Histoire littéraire du sentiment religieux en France, vol. I, p. 96.
151

16.4 Page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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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그를 고해사제와 영적지도자로 선택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그는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신비 은총을 받은 이들이 드물지 않았고, 심지어는
비범한 현상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가장 총애하던 사람은 프랑수아에게 완전한 신뢰를 보인
아카리 부인인 것 같다. “그녀는 고해성사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에서도 그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프랑수아는 이 고해
자를 대할 때 극도로 신중하게 행동했으며 성령께서 그녀에게
베푸신 비범한 은총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일
종의 후회를 느꼈다. “아 얼마나 큰 실수인가! 그녀와 거룩한
대화를 활용하지 않았다니…. 사실 그녀는 나에게 영혼을 온
전히 자유롭게 열어 놓았을 것인데….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보여준 큰 존경심이 내게 최소한의 것 말고 감히 더 이상을 묻
지 못하게 했다.” 그 자신이 이미 하느님께서 영혼을 민감하
5)
게 만드시는 특권적 상태를 많은 상황에서 경험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은총에서 모든 체험은 독창적이고 모든 영혼
은 다른 영혼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 프랑수아의 후회가 이
런 것을 잘 설명해준다. 프랑수아 드 살과 아카리 부인 그룹의
만남은 프랑스의 종교사에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결과를 가져
5) 여기서 우리는 Antanas Liuima 신부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Aux
sources du Traité de l’Amour de Dieu de Saint François de Sales, Roma, Librairie
Éditrice de l’Université Grégorienne, 1959, vol. I, p. 185, e del P. Sérouet, De
la vie dévote à la vie mystique. Sainte Thérèse d’Avila Saint François de Sales,
Desclée de Brouwer, 1958, cap. X e XI. – 우리의 확인은 애석하게도 이 짧
은 작업을 기초로 더 이상 발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텍스트 분석에
머물러 있다.
152

16.5 Page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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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왔다. “이 회의에서 그의 조언과 아카리 부인의 바람에 따라
성녀 테레사의 카르멜수녀원을 스페인에서 모셔오고(아빌라
의 테레사는 1582년, 따라서 20년 전 사망했다), 또 로마에서
6)
예수님 이름의 오라토리오 사제들을 모셔오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롱그빌의 공주가 왕의 동의와 교황의 지지를 받아 새
로운 수도원을 통해 파리의 종교계를 확장할 정도로 행복하게
이루어졌는데, 프랑수아가 이에 대해 성하께 편지를 쓰고 성
7)
청에 두루 알린 후 진행된 일이다. 이 카르멜회는 1604년 10
월 파리에 첫 진출 했다.
1602년 9월 말, 프랑수아 드 살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사브와로 출발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외교적 임무가 완
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차지하고라도 그
는 앙리 4세의 마음을 얻었다. 왕은 그를 프랑스의 대주교로
임명하기를 원했고, 심지어 그에게 “큰 연금”을 제시하기도
했다. 신중한 프랑수아는 이를 사양하기 위해 아주 큰 어려움
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그는 위로가 되는 많은 고해, 개종, 고
백에 대한 기억들과 특히 머지않아 프랑스 전역과 프랑스 국
경 너머까지 그 놀라운 영적 발전의 결과를 가져온 거룩한 모
임에 여러 달 동안 참여한 기쁨을 마음에 간직하고 떠났다. 프
6) 오라토리오회는 1564년 로마에서 필리포 네리Filippo Neri가 창립했다.
1611년 피에르 드 베룰Pierre de Bérulle이 프랑스에 소개했습니다.
7) 프란치스코가 이 문제에 관해 로마에 보낸 편지 중 적어도 1603년 11월
에 교황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이 편지에 따르면 개혁 카르멜회를 프
랑스에 들이기로 연구하고 결정한 파리 모임은 "며칠"간 지속됐다. 마
지막은 6월 5일 상 조르즈Saint-Georges 지역의 샤르토우스Chartreuse
당에서 열린 것으로 보인다.
153

16.6 Page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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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랑수아 드 살이 파리에서 일종의 인간적 및 영적 성숙을 이루
고 돌아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돌아온 후 쓴 첫 번
째 서신은 이것의 증거가 되며, 자신의 영적 원리를 확고하게
수립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이것은 「신심생활입문」, 「영적 담
les Entretiens」 그리고 「신애론」 등에서 활짝 피어난다. 앙리 브
레몽은 프랑수아 드 살의 이러한 변모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급작스러운, 완전하고 결정적인 자아실현”이라고 대담하게
8)
표현했다.
1602년 9월 29일, 리옹을 지나치면서 프랑수아는 열흘 전
에 그라니 주교가 막 토농의 승리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
을 정도로 정정한 상황인 채 갑자기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었
다. 보좌주교에게 있어서 이는 매우 슬픈 순간으로, 10년 동
안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였던 주교를 생각하며 프랑수아는 오
랫동안 울었다.
토랑스 성당에서 주교 축성
그러므로 프랑수아가 “힘들고 위험한 주교직을 맡아야 하
는” 운명은 되돌릴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섭리
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10월 21일에 한 친구에게 편지
를 썼다- 나는 항상 예전과 같습니다. 나는 이전보다 더 주교
8) H. Bremond, Histoire littéraire du sentiment religieux en France, vol. I, p. 98.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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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안시, 티우Thiou 수로를 따라 늘어선 오래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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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직을 원치 않습니다. 만일 내 차례라면 나는 그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는 훨씬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
나 주교직이 어떻게 그의 차례가 아닐 수 있겠는가? 축성식은
12월 8일로 정해졌다. “저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에 그분의 손에 제 운명을 맡기며 주교
로 축성됐습니다.”라고 1603년 1월 10일 살룻소의 지오베날
안치나Giovenale Ancina 주교에게 썼다.
그의 어머니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프랑수아는 토랑
스에서 “그의 성대한 축성식을 거행하게 했다. 그 이유는 어
머니와 형제들이 그곳에 살고 있고, 주민들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가 있었으며, 이에 더해 그가 태어나고 세례를 받는 것을
본 것처럼 그가 주교로 기름 부음 받는 것을 볼 자격이 있는 고
향에 대한 자연적인 심정 때문이었다.” 그는 긴 피정으로 이
축성의 은총을 준비하길 원했다. “그는 당시 토농에 있던 예
9)
수회의 장 프리에 신부 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 삶 전체를 점
검하는 것을 지도하도록 드 살로 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 20일 동안 거의 혼자 머물며 끊임
없는 기도와 금식, 몸의 극기 등 유사한 수행으로 자신의 총고
백을 준비했다. 그런 후 현명한 피정 지도자와 상의하며 자기
삶의 규칙을 정했다.” 샹탈 수녀는 “직접 그의 손으로 쓴” 이
삶의 규칙서를 봤고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
9) 장 푸리에Jean Fourier 신부는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생애에서 적어도 세
번 등장한다. 주교축성을 준비하기 위한 피정의 지도, 「신심생활입문」
은 그의 조언에 따라 출판되었고, 1622년 12월 28일에 리옹의 죽어가
는 프랑수아의 머리맡에 그가 있었다.
156

16.9 Page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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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제네바의 주교이자 왕자
다. 이 규칙서는 그 자체로 복음이 제안한 이상적인 사제상에
대한 간략한 논문이라 하겠다. 가난, 단식, 자선, 기도, 고해
성사, 자기 “양들”과 접촉, 그리고 이 모든 은총과 사랑의 삶
의 중심에는 “어떤 극도의 상황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한 그
가 매일 거행하는 지극히 거룩한 미사성제가 있다. 그는 특정
한 축일에 신자들이 성당으로 갈 때 그들의 앞에 항상 주교가
있음을 알도록 설계된 해당 성당들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이
와 같이 대축일에도 성당들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게 부적절하
지 않을 것이다.” 프랑수아는 프리에 신부가 이 규칙서에 서
명할 것을 고집했다.
12월 8일,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드 살에서 토랑스로
걷기 시작했다.” 본당은 호화로운 양탄자와 아름다운 장식
으로 화려하게 치장됐다. 축성식에 참여하는 “고위성직자들
은 비엔나의 백작이며 골르Gaules의 관구장인 베스파시안 그
리발디Vespasien Gribaldi 대주교, 생폴의 토마 포벨Thomas Pobel
교, 카르멜회원인 다마스코의 자크메스트레Jacques Maistret
교” 등이었다. 예식은 전례의 규정에 따라 진행됐다. 샹탈 수
녀의 증언에 의하면 “그분 축성식에서, 주교들이 외적으로 그
를 축성하는 동안 그 참 실제가 지극히 경배하올 삼위일체에
의해 당신의 영혼 내부에 각인되는 듯 그분은 순진무구해 보
였습니다. 또한 그분은 자신을 보호해 주시는 지극히 거룩하
신 우리 주님의 어머니와 당신 곁에서 보호해 주시는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여겼듯이 –샹탈 수녀가 말한다- 여기 그분의 말씀입니다.”
157

16.10 Page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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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주교로 축성”된 후에 한 달 동안 그는 “세상에 낯선 사람
처럼” 말을 했고, “걱정이 들끓는 마음을 다소 무디게 했지만,
하느님의 은총 덕으로 그때의 결심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고백은 1619년의 것이었다!
1602년 12월 14일 토요일, 제네바의 새 주교는 엄숙하게
안시에 입성하여 대성당에 착좌했다. 다음날은 대림 제3주
일이었다. 저녁 기도에서 프랑수아는 강론대로 올라가 성탄
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중 갑자기 “황홀경에 사로잡힌 것처럼
자신의 축성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놀라운 일을 자신도 모르
는 사이에 신도들에게 말했다.” 10년 후, 주교 축성 기념일에
그는 샹탈 수녀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강론에서 내가 축성
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
기 위해서 그리고 백성들에게 나를 주시기 위해서 나를 내게
서 떼어놓으셨습니다. 즉 그분께서는 나를 위했던 나에게서
그분들을 위한 나로 변환시키셨습니다.” 주교로서 그의 삶
은 이 이상을 실행에 옮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는 매일 더 “하느님께서 쥐고 백성들에게 나눠주시는” 사람
일 것이다.
158

17 Pages 161-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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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Page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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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트렌토공의회의 개혁을 따름
“그는 즉시 자기 교구의 중대한 일과 긴급한 사안들에 마
음을 쏟았다.” 교회가 원하는 주교, 트렌토공의회가 설정한
개혁이 제시하고 정의한 주교가 되겠다는 오로지 이 한 생각
이 그를 지배했다. 프랑수아 스스로 착좌 첫해 동안 자신이 지
닌 내밀한 성향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준다. 자기 친구 중 한
명인 앙투앙 드 르볼Antoine de Revol이 돌Dol의 주교로 임명되자
프랑수아에게 조언을 구했다. 1603년 6월 3일, 프랑수아는
그에게 훌륭한 내용이 적힌 긴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전체
를 보도록 하자. “주교님께서는 이제 교회의 직분에 임하시며
(앙투앙 드 르볼은 아직 사제가 아녔다), 그 직의 정상에 오르
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간택된 한 목자에게 한 말씀
을 주교님께 들려 드립니다. Mutaberis in virum alterum (딴사
람으로 바뀔 것이오. 1사무엘 10,6). 주교님은 이제 내적으로
나 외적으로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이 성대한 변환을 이루
기 위해 정신을 완전히 돌려야 하고 모든 곳을 흔들어야 합니
다. 이 변환을 위한 도움을 받으려면 주교님께서 산 이는 물론
이고 죽은 이들에게도 의지해야 합니다. 산 이들 중에서 대화
159

17.2 Page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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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한두 명의 높은 경지의 영적 수준
을 지닌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영적 신뢰를 둘 수 있는 사람
이 있다는 것은 큰 자산입니다. 죽은 이들 중에서 주교님께서
안시 시가지 지도, 1682년
160

17.3 Page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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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는 두 가지 유형의 작은 영적 도서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성직자로서, 다른 하나는 주교로서 당부를 드리는데
1)
그라나다 가 쓴 모든 책을 구비하시고, 이것들을 제2의 성무
일도서로 여기십시오. 이것들은 참된 신앙에 대한 사랑과 또
필요한 모든 피정을 통해 마음을 닦는 데에 사용될 것입니다.
… 그러나 효과적으로 그 책을 읽으려면 한입에 덥석 물지 말
고 오히려 무게를 재고 평가하면서 한 장 한 장씩 풀을 뜯듯이
그리고 많은 성찰과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로 영혼에 적용해
야 합니다. … 주교님께 한 가지 말씀드리는 걸 잊을 뻔했습니
다. 신자들에게 강론하겠다는 결심을 절대로 잊지 마세요.”
다른 한편으로, 주교의 이상이 훼손되거나 “많은 불완전
성” 없이도 실현될 수 있다고 믿기에는 프랑수아의 사도적 경
험이 너무 풍부했다. 주교로 축성된 지 며칠 뒤 그는 드 베룰de
Bérulle 주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왕도가 없습니다. 우리
는 먼지 위를 걷기 때문에 항상 발을 씻어야 합니다.”
프랑수아 드 살은 그의 교구에 전적으로 헌신했다. 그는
20년 동안 그의 낮과 밤, 그의 활동과 깨어 있는 시간을 온전
히 교회를 위해 봉헌했다. 교구를 비워야 할 때면 그는 항상
약간의 후회를 안고 그렇게 했다. 자신의 부재가 교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약간의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기에 간절
한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서만 그렇게 했다. 그는 친구 주교
들이 요청하는 수많은 강론 초대 중 겨우 몇몇 개만 받아들였
1) 루이스 데 그라나다Luis de Granada (1504-1588), 16세기 스페인의 영
성가
161

17.4 Page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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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다. 무엇보다도 그는 샤를 엠마누엘 공작이 자신의 관할권에
속하는 제네바 주교를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다른 곳 강
론대에서 승리하는 것을 그다지 기뻐하지 않음을 알았고, 특
히 파리와 프랑스 왕이 주교를 존경하는 것에 대해 거북스러
워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양들을 위해 자신
의 우리에 있는 양들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사브와 교구에서 해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 표면적인 평
화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근접성과 제네바의 탐욕이 특정 ‘지
방’을 계속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무엇보다 모
든 것 특히 영혼들이 진정한 가톨릭 열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
록 회복하고 수정해야 했다. 제네바 주교의 관할권이 행사되
는 영토는 크고 아름답지만, 일부 마을이나 농장 그룹은 특히
겨울철에 접근하기가 어렵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했다. 주
교의 재정 자원은 소박하여 큰 사업을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감춰진 악이 그가 쌓으려하는 모든 것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프랑수아
는 이 악을 알고 있고, 이미 그것을 비난했었다. 그러나 이제
주교가 됐기에 그것을 더 깊고 더 자세한 방식으로 인식하게
됐다. 그것은 전체 교회에 고통을 주는 악이며, 개신교의 부
흥을 도운 악이고, 당연히 트렌토공의회가 가장 강력한 치료
법을 적용하기로 했지만 매우 더디게 치유되는 악이다. “제게
최대한 진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안젤리크 아르노
수녀가 말했다- 그분께서는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그리고
162

17.5 Page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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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몇몇 수도회의 자세에 관한 당신의 더 내밀하고 중요한 생각
을 제게 비밀로 감추지 않았다고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안젤리크 수녀는 또한 자신이 제네바 주교로부터 오랫동안
신뢰를 받았다는 것을 말했다. “사랑하는 딸이여, 여기 울어
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곳으로 하느님의 손길이 닿도록 은밀히 울며 기도
해야 합니다. … 교회 성직자들의 태도 속으로 스며든 오류를
바로잡도록 기도하며, 그들의 열성 및 지식의 불로 교회를 정
화하도록 그리고 신앙과 교리와 관련된 것과 마찬가지로 규
율과 관련하여 흠도 없고 주름이 없게 하도록 성 카를로의 열
성에 고무된 거룩한 사목자들을 파견해 주십사하고 우리는 그
2)
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드 살 주교와 안젤리크 수녀 사이에 이뤄진 이 대화는 1619
년일 가능성이 크지만, 성 카를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에 대
한 암시(또한 베룰르Bérulle 주교의 이름도 언급됐다)가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것이 1603년부터 프랑수아의 생각이었다
고 추론할 수 있다. 파도바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프랑수아
는 거룩한 주교가 선종한 지 7년 된 밀라노 도시를 방문하길
원했었다. 그는 항상 성인에 대한 열렬한 흠모를 유지했으며,
성 카를로의 사촌인 페데리코 보로메오Federico Borromeo 추기경
과 결속된 우정으로 인해 이 흠모의 정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흠모의 마음 안으로 가톨릭 개혁에 대한 열성이 많이 스며들
2) C.-A. Sainte-Beuve, Port-Royal, vol. I, pp. 210-211.
163

17.6 Page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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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었던 것은 확실하다. 1613년 봄 그는 자신의 모델인 성인의 무
덤으로 순례를 떠났고, 크리스털 유해함 앞에서 미사를 드리
면서 황홀경으로 빠져들었다.
20년 동안 프랑수아 드 살은 카를로 보로메오가 밀라노 교
구에서 달성한 것, 즉 트렌토공의회에서 정의한 이상에 따른
개혁을 자신의 제네바 교구에서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주교로서 이 20년의 여정을 요약해 보겠다. 1603년 시월:
안시에서 교구 시노드를 열었다. “교구의 참사원, 대수도원
장, 수도원장, 학장, 의전사제, 본당 주임들”이 소집되었다.
전체 성직자들과 프랑수아의 첫 접촉이었다. 1604 사순절:
디종Dijon에서 첫 사순절 강론을 했고 잔 프레미오 드 샹탈
Jeanne Frémyot de Chantal을 만났다. 1605년에서 1608년까지: 4
단계 교구 방문. 1606년부터 1610년까지: 플로리몬탄 아카데
l’Académie Florimontane에서의 좋았던 시절. 1609년: 「신심생
활입문」. 1610: 삼위일체 축일인 6월 6일에 샹탈 부인, 드 브
레샤르Bréchard 양, 파브르 양이 안시의 갤러리 집으로 들어가
성 마리아의 방문수녀회Visitation Sainte-Marie를 시작했다. 1616
년: 8월 리옹에서 피에르 리구Pierre Rigaud에 의해 「신애론」 출
판. 1618-1619: 세 번째 파리 체류.
프랑수아는 교구의 직무에 전적으로 헌신 된 존재의 단순
한 기준점으로 그는 완전히 그 신자들의 것이었다.
그 수장과 구성원in capite et in membris의 개혁 정신에 충실한
프랑수아 드 살은 자기 자신과 자기 집에서부터 교구의 성화
를 시작했다. 그 삶의 형태는 매우 단순했다. 개인 재산 측면
164

17.7 Page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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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에서 형제들에게 자신의 유산 지분을 모두 넘겼기에 그는 가
난했다. 교구 재산 측면에서도 그의 주교관은 년 수입이 겨우
금화 1,000 에퀴도르écus d’or 정도밖에 없었기에 가난했다. 공
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자선행위를 많이 했기에 그는 늘 가
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도들처럼” 살기를 원했기에 가
플로리몬탄 아카데미가 있었던 건물(오른편)
165

17.8 Page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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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난했다. 주교관저의 직원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였고, 식탁은
검소했으며, 그의 옷은 낡았으나 “깨끗하고 매우 적절하게
수선”되었다. 앙투앙 파브르가 1610년 주교에게 제공한 “안
시 시내에서 가장 큰” 집에서 자신의 방으로는 아주 작은 것
을 사용했다. “저는 제네바 주교로서 온종일 다닐 것이고 밤
에는 프랑수아 드 살로 돌아올 것입니다.”라 했다. 말과 마차
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는 주교의 품위까지 올라갔지만, 다
른 주교들처럼 자신의 생활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
는 금욕과 단식을 엄격히 준수했으며 자주 피를 흘리는 고행
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기도했다. 아침에 가능하면 언제
나 한 시간 동안 묵상했고 -주교 축성 때의 결심에 따라- 두
시간을 서재에서 보내며 한 시간은 공부를 나머지는 항상 어
떤 방식이든 기도에 할애했다. 성무일도에 충실해 때론 무릎
을 꿇고 때로는 서성이며 이를 읊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매일
9시경에 자신의 주교관저 기도실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러나
“특정 축일”에 자기 신자들을 만나고 안시의 성당이나 경당
에서 미사 드리기를 즐겼다. 아름다운 전례를 좋아했고, 성대
하게 집전할 경우 규정 준수에 대해 엄격했다. 미사는 그의 개
인적 신심과 공적 전례의 절정으로 여겨졌다. 거행하고 또 잘
거행하는 것이 사목자인 그의 첫 번째 의무였다. 그런 다음 일
상의 “수고와 고난”이 시작된다.
그에게 행동한다고 함은 여전히 묵상하는 것을 뜻했는데,
이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과 깊이 일치함을 의미하기 때문이
166

17.9 Page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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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다. “그대의 모든 다양한 것들이 -언젠가 샹탈 부인에게 이렇
게 조언했다- 그대를 방해하지 않고 그것들의 어려움이 그대
를 두렵게 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 그리고 수호
천사와 일치 속에 머무르십시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나씩 차례로 하고, 그것의 목적 달성을 위해 성실하게 마음
을 다하되 부드럽고 달콤하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좋은 결
과를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찬미할 것이고, 그렇지 않
더라도 우리는 그분께 똑같이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자 이
렇게 “이 세상의 환난”을 대하는 그의 개인적인 태도가 어떠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피로가 그의 몸을 지배하고 고갈이 그의 영
혼을 침식했다. 그러자 제네바의 주교는 하느님 안에서 자신
의 구원을 갈구했다. 주교로 축성된 지 채 5년이 되지 않아서
그는 디종의 한 친구에게 이런 감미로운 편지를 썼다. “나는
이 사순절 동안 내 대성당에 머물면서 그간 겪었던 모든 수고
로 인해 거의 완전히 풀려버린 내 영혼을 조금 재정비할 것입
니다. … 고장난 시계입니다. 하나씩 분해해서 청소하고 기름
칠한 후 다시 조립하면 째깍째깍 소리가 더 잘 날 것입니다.”
가능할 때마다 이렇게 하여 주교 축성을 준비하던 피정의 때
의 결심을 지켰다. “매년 8일 동안,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더
길게, 피정을 하며 영혼을 정화한다.”
이 신심업을 통해 제네바 주교는 빛을 발했다. 그의 전체
인격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평화와 사랑이 발산됐
다. 길을 걸을 때면 어린이들이 무리를 이뤄 그를 둘러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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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 Page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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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빈자들은 그의 애긍을 좇아 주교관저나 고해소로 몰려들었
다. 그를 거부하는 이가 없었고 그 역시 누구도 뿌리치지 않
았다. 그의 주위로는 이미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엮어지고 있
었다.
1598년 토농에서 40시간 기도회 동안 프랑수아가 죽은 한
아기의 보료 근처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자 아이가 다
시 살아났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또는 토랑스 성당에서
주교 축성식 때 그는 30분 동안 황홀경에 빠졌었다. 이미 사
람들은 그를 거쳐 간 옷 조각, 그가 나눠주는 메달, 그의 소유
물, 그가 사용한 작은 물건들을 마치 성인 유해물처럼 찾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브와의 선량한 사람들이 지닌 주교에 대해
존경과 열정은 커졌다. 거룩한 영웅의 분위기가 그를 감쌌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모든 은총을 비밀로 감출 수는 없었다. 만일 몇몇 내밀한 환시
들이 -“그가 수녀원의 창시자요 지도자가 될 것이며, 이 수도
회의 시작을 위해 필요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환영과 아이디
어”를 보여줬던 드 살 성에서의 황홀경 등- 그를 둘러싼 사람
들의 그물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면, 악령을 쫓아버림, 영
혼에 대한 예언이나 꿰뚫어 봄, 전신마비 또는 환자들의 치유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죽은 자의 부활 같은 그렇게 많고 많은
초월적인 사실들을 숨길 수 있었겠나. 우리는 이런 기적들이
그의 선종 후 그의 무덤에서 또는 좀 떨어진 곳에서 계속 많이
이어졌음을 확인한다. 두 가지 예만 들자면, 1661년 12월 28
일에 프랑수아 드 살을 시복하고 1665년 4월 19일에 그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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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Pages 17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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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안시 매송 롱베르, 프랑수아 드 살 주교가 처음으로 살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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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성한 교황 알렉산드로 7세는 자신이 제네바 주교의 “기적을
받았다”고 확실하게 여겼다. 안시에서 시복 축제가 열리던 당
시 동시대의 설명은 프랑수아 드 살의 유해가 보관된 은으로
만든 유해함 뒤에서 “전신마비 환자들, 부활한 자들이” 걸어
3)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가장 지속해서 행한 기적은 그의 삶 자체였
다. 프랑수아는 이를 1606년부터 잘 알고 있었다. 14년 또는
15년간의 여정과 활동을 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사랑하는
딸이여 -10월 2일에 샹탈 남작부인에게 편지를 쓴다- 더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사업과 일이 있어도 나는 잘 있
습니다. 매일 저녁 처소로 돌아오면 몸도 마음도 움직일 수 없
을 정도로 너무 피곤하기에, 이는 하느님이 하시는 작은 기적
입니다. 그래도 아침이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거뜬합니다.
이 순간 내게는 힘도, 판단력도, 아무 생각도 없지만(그대에
게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으로 나는
완벽하게 강합니다.”
프랑수아 드 살이 성덕으로 명성을 얻은 데에는 충분한 이
유가 있었다. 헌신적인 주교에 대한 “공격”, 비판, 무례함, 중
상 등이 결국 그것을 행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게 했다. 교
회나 사제직의 명예에 관계된 때를 제외하고는 그것을 논박
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친절과 인내로 그들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대부분 모든 것이 그의 편에서 베푸는 폭넓고
3) 안시 방문수녀회 문서고, Recueil de circulaires, vol. I, p.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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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완전한 용서로 끝났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상처를 미소로
숨기는 말들을 멋지게 만들어 냈고 이 말들은 바로 사람들 가
운데 퍼져나갔다.
어느 날 안시에 프랑수아를 비방하는 말들이 퍼졌다. 거룩
한 주교는 이것을 개의치 않았지만, 한 의전사제가 그 글을 읽
고 참사회에서 이를 엄중하게 다뤘다. “만일 착한 주교가 자
신의 참사회로 가서 이미 다 작성된 단죄를 취소하고 파기하
도록 사정하지 않았다면, 이에 대한 단죄는 매우 엄하게 선포
되었을 것이다. 한 발 더 나가, 몇 년 후 바로 그 사람을 당사자
의 부탁도 없이 기꺼이 제후의 궁전에 그 조건이나 신분 등에
비해 매우 영예로운 자리로 천거했다. 그래서 ‘어떤 혜택이든
그것을 받기를 원하면 자비로운 프랑수아를 공격하면 된다.’
라는 속담이 사브와에 널리 퍼져 있을 지경이었다.”
이 인내, 이 용서의 습관이 모든 사람에게 효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많은 사람은 이를 기회 또는 적어도 약점으로 여
겼다. “프랑수아 드 살은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다. -탈루아
Talloires 신부는 프랑수아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수도사들을
용서하자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왜 제네바의 주교로서 처벌
안 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은 그가 모든 덕의 근원에 대해 잘
못 이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모욕이나 중상을 받을 때 프랑수
아는 “불에 얹어진 물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고 고
백했다. 그러나 조롱과 멸시를 받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동정녀 마리아를 닮을 수 있다는 기쁨으로 자신의 감정
을 자제하고 진정시켰다. “원장 수녀님 -12월 13일에 어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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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상모략으로 고통을 겪던 샹탈 수녀에게 썼다- 나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하실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나를 감독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는 내 자격이 안 돼서 그렇고 다른 하나는
그런 대우가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경배를 받으시기
에 지당하신 성모님께서는 상처와 치욕이 당신을 덮칠 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칭송받기를 원한다면 아직도 우
리는 자기애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프랑수아가 감내해야 했던 대부분의 비판과 의혹은
그의 ‘사업’을 위한 행동에서 비롯됐다. 어쨌든 그가 자신의
행동양식에 대해 로마나 공작에게 정확히 알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하느님은 알고 계신다. 한 가지 좋은 예를 위해,
1604년 디종에서 사순절 강론을 할 수 있도록 승인해달라고
공작과 클레멘스 8세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공작은 스스로 너무 교활하고 너무 음흉해서 프랑스, ​
특히 궁정과 파리가 제네바 주교를 오로지 그의 강론이나 거
룩함 때문에 그렇게 집요하게 초청한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음모와 반역의 냄새를 맡으려 사방으로 킁킁댔다. 샤를
엠마누엘은 여러 차례 프랑수아가 받은 이런 초대에 대해 의
심스러운 마음을 품고 허락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강론하는
것을 허락하는 데 9년이 걸렸다. 주교가 프랑스인과 뭘 함께
할 수 있었겠는가?
1609년 9월 12일에 발생한 프랑수아의 제네바 깜짝 횡단
이후 공작의 의심은 극에 달했다. 극적으로 들어갔다 빠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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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온 것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샤를 엠마누엘의 의심을 확실히
더 받았다. 뤽스Lux 남작과 젝스 지방에 있는 3개의 본당 복원
에 대해 논의하기로 한 약속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비로
불어난 론 강을 건널 수 없음을 보고 과감히 제네바를 가로질
러 통과하기로 했다. 물론, 가톨릭 주교가 대낮에 복장을 갖
추고 순찰대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칼빈교도의 도시를
가로지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음 9월 21일, 친구
앙투앙 파브르에게 이 모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프랑수아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내가 수호천사의 보호 아래 제네바를 통
과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초자연적인 상
상을 불러오는 설명은 제네바 사람들이나 공작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프랑수아는 공작의 눈앞에서 반역의 의심을 풀어줘
야 했다! 그는 1609년 12월 4일, 아이Hayes 경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그가 젝스에서 무
슨 짓을 한 걸까? 그리고 그의 명의와 자격으로 봤을 때 그렇
게 원수이며, 그리고 그의 전임자들은 종교개혁 이후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던 도시인데, 안전 보장도 없이 위장하지도 않
고 더욱이 신분조차 감추지 않은 채 대낮에 그 도시를 통과하
도록 누가 용기를 줬을까?’ 그러나 사실 그들이 저를 작은 용
단도 내리지 못할 정도로 너무 사려 깊고 조심스러운 사람으
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제 영혼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
이라 하겠습니다. 시간이, 저의 결백이,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섭리가 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와 관련하여 전하께서 저에 대해 믿지 못하신다는 것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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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난 후에 제가 생각하기에 괜찮겠다고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적
어드렸습니다. … 이게 제 신상에 관한 소식입니다.”
프랑수아의 말을 믿으려면, 공작은 자신의 본성과는 동떨
어진 순수성을 지녀야 했다. 아주 작은 경우에도 그의 의심은
되살아났고, 프랑수아는 사브와 공국에 대한 그의 충성을 여
러 번 강하게 확신시켜야 했다. “제가 외국인들과 함께 정부
에 해를 끼치는 모사를 꾸몄다는 고발이 전하께 접수됐다고
들었습니다. -1611년 6월 12일에 쓴 글- 그에 대해 저는 매우
놀랐으며, 이 중상모략이 어떤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 상상조
차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전하의 이익에 기여하는 데 추호도
방해가 될 만한 일을 절대 하지 않도록 전하를 향한 의무를 제
마음에 매우 깊게 새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국정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으며, 매우 조심하여
그런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프랑수아가 그렇게 확고하게 자신을 변호하는 것은 교구
의 명예와 선익은 물론 친척과 친구들의 운명과 지위가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음모와 중상모략 덕분에 우리에게 공개된
이 투명한 힘은 -상트 뵈브는 비둘기 같은 대담성이라 하였
다- 그의 성격 중 덜 알려진 하나로, 불행이 가져다준 좋은 측
면이다. 이럴 때 대담하고 날카롭고 독한 논쟁가의 기질이 그
의 내면에서 깨어났으며, 자신에게만 해당할 때 그렇게 활성
화되던 겸손과 자애의 기질은 그 활기를 잃고 무뎌진다.
이렇게 같은 “성가심”과 대립은 프랑수아에게 유리하게
돌아섰다. 오로지 한 성인만 그러한 사려 깊음, 지혜, 균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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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갖춘 모호함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성덕에 대한 평판
은 사브와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갔다. 1609년 프랑수아가 바
오로 5세의 명령으로 살린Salines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
슈 콩테Franche Comté를 찾아간 여행은 큰 승리였다. 당시 부도
였던 돌Dôle, 브장송Besançon, 보메레담Baume-les-Dames 등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그를 보길 원했고, 강론을 들으려 했으며, 그
에게 고해성사를 보고자 했고 성체를 영하고자 했다. 모든 이
들은 프랑수아를 “마치도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사목자인 것
처럼 우리 주교님”이라고 불렀다.
1618년 파리에 갔을 때도 또 다른 큰 성공을 거뒀다. 성당
들과 수도원들은 그의 말을 듣고자 서로 다퉈 모시려 해, 9개
월의 체류 기간에 165번의 강론을 했다. 그의 건강이 흔들린
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에게 속했거나 사용한 물건들을 얻
으려고 경쟁이었다. 수도원들은 그가 식사할 때 사용한 숟가
락과 나이프라든지 특히 미사를 드리기 위해 사용한 아마포
나 제의 등을 경건한 마음으로 보물처럼 보관했다. 프랑수아
는 이 모든 난처함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헤쳐 나갔다. 적어
도 그는 자기 친구들이 이 광기에 참가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
다. “부인께서는 -그가 1608년 11월 25일 샹탈 부인에게 쓴
다- 제 어머니에게는 물론이고 사르모아지Charmoisy 부인에게
도 (내 의도대로) 쓰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거룩하고 선하
신 주교님’이라고 적었는데, 사실 그분들은 ‘바보 같은 주교’
라는 글을 읽어야 했습니다. 성 제롬 시대에는 모든 주교를 그
들의 직분 때문에 ‘거룩한 주교’라고 불렀음을 잘 압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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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Page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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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러나 지금은 더 사용하지 않는 칭호입니다.” 1608년 1월 24
일,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사랑하는 딸이여, 나는 성인보
다 몸종에 더 가깝기 때문에 그리고 그대가 나를 성인으로 시
성할 수 없기 때문에 나에 대해 말할 때 성인이라는 단어의 사
용을 금지합니다.”
프랑수아의 영적 교의
프랑수아의 초기 전기 작가들의 어떤 증언은 너무 과하다
고 간주되어 당연히 제외될 수 있고, 그들이 지닌 흠모의 열망
또는 비판 정신의 부재 역시 당연히 참고할 수 있다. 많은 사
건과 문헌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제네바의 주교를 둘러싸
고 있던 경배의 분위기를 의심할 수 없게 한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물론, 그의 영혼으로부터 발
산되는 빛이 원인이다. 그러나 그의 성덕을 하느님께 대한 개
인적인 충성으로 제한해버린다면 그의 영적 초상화는 바르게
그려지지 못한 것이다. 그의 성덕은 사도적이다. 그는 자신에
게 오는 은총을 그의 모든 신자들이 누리길 원했다. 자기 삶의
쇄신이 가능한 한 자신의 모든 신자에게서도 일어나길 원했
다. 성덕은 -이 단어를 말하면서 은총의 모든 무게를 이 단어
에 부여한다- 각각의 “양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사도직 활동의 놀라운 점은 그에게 맡겨진 모든 영혼
을 이끌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 영혼들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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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이다. 그의 신자들, 그의 성직자들, 그의 수도사와 수녀들, 그
의 영적 아들과 딸들을 그가 한때 복음적 이상으로 생각했던
이상적인 삶을 향해서 말이다. 누구도 이 큰 흐름으로부터 멀
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 자
기 능력에 맞게, 상황, 신분, 받은 은총의 경향 등과 관계없이
가까이서 또는 조금 떨어져서 모두가 “거룩한 사랑의 삶”에
도달해야 한다. 그는 1607년 2월부터 비밀리에 이런 제목의
책을 쓸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2년 후 비엔나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용어를 더욱 명확하게 했다. “저는 하느님
의 사랑에 관한 소책자를 구상하는데, 그것은 이론적이지 않
안시 성 프랑수아 드 살 성당, 1614년에 세워진 성당으로
프랑수아 드 살 성인과 성녀 샹탈의 유해가 모셔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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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고 첫 번째 십계명판의 계명들을 지키는 실천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어 두 번째 성찬의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사랑의 실
천에 대해 보여줄 것입니다. 둘 다 하나를 묶여 다룰 만한 적
절한 두께의 책이 될 것입니다.”
주교로서 프랑수아의 힘은 처음부터 신학적 뿐 아니라 영
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교리를 소유하고 있었고, 하느
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뿐 아니라 영혼을 살아나게 하는 탁월
한 은총을 받았다는 데 있다. 강론, 저술, 충고, 지도 등 그 안
에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을 지향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믿음
이란 본질적으로 생명, 마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은 사람들 마음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거룩한 뜻과 우
리 영혼 사이에 위대하지만, 비밀스러운 유대”가 있다. “지금
의 우리 인간 본성은 본래 주어진 건강과 의로움을 누리지 못
하지만, 참으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크게 타락했으나 무엇
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거룩한 성향이 아직 우리에게 남
아 있고, 그분의 지고하신 선은 모든 것보다 사랑스럽다는 것
을 인식하게 해주는 초자연적 빛 역시 그렇게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런 자연적인 경향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좀 더 부드럽
게 취하시고 당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그것을 손잡이처럼 사
용하시기에, 우리 마음속에 불필요한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
다.”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이미 일하시는 분도 그분이시
다. “오 예수님, 덕행의 태양인 천상의 사랑을 보고 느끼는 기
쁨이 얼마나 큰지요! 조금씩 발전하면서 감지할 수 없을 정도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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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Page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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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로 예민하게 영혼 위에 여명의 빛을 비추며 나가고 당신 현존
의 광채로 완전히 덮일 때까지 멈추지 말고 마침내 그 빛의 완
벽한 아름다움을 선사하십니다! 오, 이 새벽이 얼마나 유쾌하
고 아름답고 친절하고 좋아할 만한가!”
우리의 속량을 위해 요청되는 믿음의 행위를 표현하고 나
면, 우리의 욕정과 죄에 대한 집착이 아닌 한 아무것도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피어나는 거룩한 사랑을 가로막을 것이 없
다. 특별한 기도와 비범한 현상 등이 사랑의 삶을 위해 필수
적인 것은 아니다. 대신, 필수적인 것은 기도와 행동으로 성
취되는 “영혼의 하느님과 일치”로,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합치함으로써 도달된다. 유일하고 진정한 “황홀
경”은 “자기 자신과 자연적인 경향을 초월하여 삶과 활동의
황홀경과 탈혼이다. 이에 대해 성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
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랑수아 드 살은 영혼을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
로 인도하기 위해 신앙의 가장 일반적인 진리와 복음의 분명
한 말씀에서 출발한다. “나는 이 대림절에 여기에서 -1619년
12월 13일에 썼다- 그들이 나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계명에 대해 강론합니다. 그들은 나를 훌륭하게 따르고 있고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강론합니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하느
님께서는 무한한 선하심으로 그 마음에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스도 정신의 말씀을 통해 큰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을 이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이는 천국에 계시는 모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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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인이 지니신 아름다움과 사랑에 관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시
는 빛을 따르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들이 그곳에서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찬미한다고 믿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
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느님은 창조, 육
화, 구원을 통해 그의 모든 보물을 가장 겸손한 사람들의 식탁
에 두셨고, 영혼들은 그 지닌 사랑에 따라 차이가 난다. “사랑
은 우리의 경건한 영적 삶의 첫 번째 행위이자 원칙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살고 느끼고 죽습니다. 영적 삶은 우리의 정서적
감정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우리 마음의 생명”이라
면, 성덕이 신분 · 지위 · 역할 · 재물 등에 달렸지 않다면 결혼
한 사람도 수도승처럼, 어린이도 어른처럼, 무식한 사람이나
거친 사람도 신학자처럼, 병든 사람이나 병약한 사람도 건강
한 사람처럼 정확하게 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프랑수아 드 살의 수도자에 대한 생각에
점점 더 많이 얹어질 문제가 발생한다. 그가 영혼들과 사도적
접촉에서 날로 더 중요해지는 문제다. “거룩한 사랑의 삶”은
모든 신분이 참여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은총
에 달렸고, 영혼이 이 하느님의 초대에 답하는 순응에 달린 것
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줄을 만지고 퉁기시길, 우리 하
프의 어떤 줄을 선택하시든 좋은 하모니만 얻게 하소서. 주 예
수여, 뒤로 뺌 없이, ‘만일…’도 없이, ‘하지만…’도 없이, 예외
없이, 제한 없이 당신의 뜻이 모두에게서 모든 곳에서 이루어
지소서.” “내가 아마도 -1607년에 샹탈 부인에게 썼다- 부인
의 사랑하는 마음, 강하게 원하는 활기찬 마음을 본 것 같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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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다. 이에 대해 매우 감사를 드립니다. 반쯤 죽어 있는 마음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더욱 적극
적으로 원하고 사랑하려는 특별한 실천을 해야 합니다. 더 나
아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부드럽고 더 사랑스럽게 되
어야 합니다.”
「신심생활입문」의 “모든 종류의 성소와 서원에 대한 헌신
이 얼마나 적절한가”라고 제목이 붙여진 장에 의해 때때로 모
든 영혼에 대한 신심의 샘을 파는 프랑수아 드 살의 노력은 이
작업으로 제한됐다. 이것은 그가 “신심”이라는 단어가 의미
하는 바를 잊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참되고 살아있는 신심은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입니다. 결국, 사랑과 신심은 마치
불꽃과 불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
은 영적 불이기 때문에 이것이 매우 강렬할 때 신심이라고 합
니다. 준비되고, 활발하며 부지런한 사랑이 단지 하느님의 계
명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천상이 주는 권고나 영감을 실천으
로 옮기도록 하는 불꽃을 제외하고는, 신심이 사랑의 불에 더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의 출판 날짜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필로테아Filotea와 테오티모Teotimo 사이 상황
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신애론」의 구상이 「신심생활
입문」의 구상보다 먼저였다. 두 책 모두 동일한 영적 가르침
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런 사정은 「거행Sermons」이나 다른 책
또는 다른 책의 기획, 그리고 영적 지도의 모든 편지들에서도
동일하다. 프랑수아는 언젠가 안젤리크 아르노 원장수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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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쓴 편지의 내용처럼 모든 영혼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
이다. “내 마음은 수녀님이 순수하고 용기 있게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감미롭게 거룩한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지향 만
들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영혼을 “사랑의 영원한
자유”에로 인도하길 원했다.
주교의 강론 의무
“아, 주교님, 우리와 같은 조건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
하기에, 그들은 항상 그분의 사랑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
습니다.” 프랑수아 드 살이 자신의 주교 축성 얼마 뒤인 1603
년 벨레Belley 대성당에서 강론 요청을 받고 그곳 쟌 제프아 지
Jean Geoffroy Ginod 주교에게 한 말이다. 강론을 마치고 “그 거
대한 청중의 모든 사람이(베르가르드Bellegarde의 공작도 자기
궁정요인들과 함께 강론을 들었다) 하느님의 종에게 성사를
봤고, 월요일에 거행된 미사에서 모든 이들이 그가 손으로 건
네주는 성사를 모시려 했다.” 이 간단한 일화는 제네바의 주
교가 된 프랑수아 드 살의 사목활동의 모든 노력을 요약할 수
있다. 고해성사를 통해 영혼들을 열렬한 성찬 생활 그리고 하
느님과 일치로 이끌도록 강론한다.
강론하기, 늘 강론하기를 좋아했던 프랑수아에게 “강론은
주교의 가장 중요한 의무다.”라 가르치는 트렌토공의회를 자
신의 것으로 만드는 별도의 수고가 필요치 않았다. 1603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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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월 3일, 곧 주교로 축성될 르볼Revol 경에게 그는 이렇게 권고
했다. “당신의 신도들에게 반드시 강론하기로 결심해야 합니
다. 거룩한 트렌토공의회는 앞선 모든 공의회에 이어 ‘주교의
첫 번째 그리고 주 임무는 강론하는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이 결심을 흩어지게 할 수 있는 어떤 고려도 하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위대한 강론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단
지 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니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주교의 부성애가 담긴 강론은 다른 강
신자들에게 강론하는 프랑수아 드 살(토리노 발독코, 성 프란치스
코 드 살레스 성당, Piero Dalle Ceste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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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론가들에 의해 잘 다듬어진 모든 언변보다 더 낫습니다. 주교
가 강론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거의 없습니다. 그의 선포
는 필요한 것이고 유용해야 하며, 호기심을 채우거나 탐구하
는 것이 아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꾸미지 않은 말,
꾸밈이나 가식이 없는 부성애와 자연스러움이 넘치는 행동,
그리고 아무리 짧고 아무리 적게 말하더라도 이미 항상 긴 게
강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글을 쓴 날짜를 주목한다. 1603
년은 프랑수아가 그의 주교직을 시작한 해다.
1년 후, 그는 자신의 구상을 명확히 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얻었다. 프레미요Frémyot 주교가 자신의 도시 부르주Bourges
성대하게 입성하기 전날, 그의 전임자를 그렇게도 영광스럽
게 만든 그 강론대에 올라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며, 프랑수
아에게 강론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드 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프랑수아는 10월 5일, “말이나 솜씨에 전혀 신경 쓰지 말
고 펜이 가는 대로 놔두며” 자신의 고백인 동시에 진정한 걸작
인 긴 편지를 그에게 썼다.
거룩한 웅변술에 관한 기술적인 측면은 제쳐두고 -참으
로 훌륭한 부분이지만- 사도적인 측면만 살펴보자. “좋은 생
활, 바른 교의, 정당한 사명 이 세 가지 조건이 없으면 아무도
강론을 잘할 수 없습니다.” 사명에 관하여, 프랑수아는 주교
들이 사명을 지닐 뿐 아니라, 그 “사목적 원천”을 가지고 있
다고 지적한다. 그는 생활의 성화를 고집하면서 이렇게 권고
했다. “그리고, 미사를 드리지 않았거나 드릴 생각이 없는 상
태에서 강론해서는 안 됩니다. … 우리 주님은 빛이시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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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에 그분이 실제로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를 밝혀 주시는 것
이 확실합니다.”
이 서문 후에 프랑수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
면 강론하는 행위에서 강론자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기
그의 멋진 대답이 있다. “그 목적과 의도는 우리 주님이 이 세
상에서 하려고 오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그러
므로 강론가의 목적은 악행 가운데 죽은 죄인들이 의로움 안
에서 살아나고 의인들은 영적인 생명을 더욱 풍성히 받아 항
상 더 온전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강론가의 모델은 성령강
림 때의 사도들이다. 그들은 가르치고 감동을 줬다. 강론하기
위해 뭐가 필요한가? “하느님의 말씀, 그러니까 교회의 박사
들과 성인들의 책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까? 아니오,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부들의 가르침은 다름 아니라 복음의
설명, 즉 성경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
사이는 마치도 온전한 호두와 으깬 호두 같은 관계입니다. 어
떤 것이든 그 속살은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습니다. … 성경
구절이 사실 첫 자리를 차지하며 건물의 기초를 상징합니다.
결국 우리가 말씀을 선포하고 우리의 가르침은 권위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신다Ipse dixit!”
강론의 표현 및 구성 방법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후, 프랑
수아는 “무엇보다 더 많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점, 즉 “말
하는” 기술을 언급했다. “우리가 강론할 때 어떤 방식으로 말
합니까? 중언부언quamquam과 긴 문장의 잔소리, 과도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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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짓, 찡그린 얼굴, 움직임 등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강론을 재앙으로 만듭니다. 대신 자유롭고, 고상하고, 관대
하고, 순진하고, 강하고, 거룩하고, 진지하고, 조금 느린 어
조 등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
니까? 한마디로 다정하고 신심 있게,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하
고, 신뢰하십시오. 자신이 가르치고 확신하고 싶은 교의에 진
심으로 확신을 지니십시오. 최상의 기교는 기교가 없는 기교
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말이 과도한 외침이나 행동에 의해
서가 아니라 내적 애정에 의해 불타올라야 합니다. 입보다 마
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고 싶은 좋은 말이 있다손 쳐도, 마
음은 마음에다 말을 하고 혀는 귀에 말할 뿐입니다.”
이렇게 그의 펜에서 경험의 조언이 줄줄 흘러나온다. “저
는 분노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강론하길 좋아합니
다. 쓰다듬기보다는 내쳐야 마땅한 위그노에 대해서도 큰 연
민으로 그렇게 합니다. 강론은 이 세상에서 그분의 거룩한 위
엄을 섬기도록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 구원되도록 이끌기 위
해 합당하게 파견된 사람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행해진 하느
님의 뜻을 출판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수아는
약간 수줍음을 타는 젊은 주교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자
주 강론하십시오. … 하느님께서 그걸 원하시고 사람들이 그
걸 기대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며 그분의 구원입니다. 과감
하게, 하느님 사랑으로 용기를 내십시오. … 사랑에는 불가능
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 베드로에게 ‘네가 지혜롭고 말을
잘하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시오Passce oves m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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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아니, ‘나를 사랑하냐Amas me?’고 하셨습니다. 말을 잘하기 위
해서 사랑을 잘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편지를 마치면서 마지막 조언을 했다. “주교님의 신도들
은 주교님 보기를 원하며 주교님이 그들을 봐주고 또 봐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 오, 그들이 제단에 있는 주교님을 자
주 볼 때,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볼 때, 본당
신부들과 함께 교회 건설을 위해 노력할 때, 그리고 강론대에
서 화해의 말씀을 퍼트리고 강론을 할 때 그들이 얼마나 바르
게 서겠는지요!”
이 경탄할만한 편지 속에 프랑수아의 사목적인 마음이 고
스란히 담겨 있다. 편지는 「거행」에 수록되었고 그 책이 오늘
까지 전하는 것을 읽으며 느끼는 놀라움 중에서도 압도적이
다. 이 초안이나 심지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그 정교한
텍스트가 어떻게 군중을 끌어들이고 영혼을 깊게 흔들어 놓
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당시 힘을 떠받치고 있던 감정, 방
금 기도를 마친 영혼의 따뜻함, 사랑의 어조 등을 놓치고 있
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 “다른 강론가들은 -어느 날 몽팡시
Montpensier 공작부인이 말하길- 그냥 허공을 날라 다녔지만,
이 거룩한 사랑의 강론가는 먹이를 낚아채 폐부를 찌르고 마
침내 그것을 차지합니다.”
거룩한 사랑의 강론가, 이 단어는 프랑수아가 받은 달변
의 은총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이는 기도로 갈구한 은총이고
기도를 통해 얻은 선물이다. 한 강론을 마친 후 “저는 감정 없
이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없어요.”라고 어느 사제에게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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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했다. “나는 새처럼 매우 즐겁게 내 강론대로 올라갔고, 거기
서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흥겹게 찬미를 드렸습니다.” 1617년 12월 8일, 샹탈 수녀
에게 쓴 글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강론은 그 스스로 밝혔듯
이 “사랑의 거행”이다. “(그는) 빈약하고 사소한 애정의 굴레
를 느슨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지닌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강론하기를 즐겼다. 1604년 디종에서 사순절
강론이 끝난 후, 시 행정관들이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금박을
입힌 은그릇과 아름다운 사파이어로 장식된 반지를 선물했는
데, 그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팔지 않았습니다. 단 여
러분들의 마음만을 가지고 돌아가길 원합니다.”라고 정중히
말했다. 프랑수아 드 살을 강론가로 정의하는 데 가장 완벽한
답을 발견한 사람은 역시 성 빈센트 드 폴이다. 그는 프랑수아
를 “말하는 복음”이라고 칭했다.
사순시기와 교리교육
그가 자기 신자들에게 강론하든 또는 초청을 받아 다른 교
구에서 강론하든 그에게 가장 유용한 강론은 사순절 강론이
다. “그대도 잘 알고 있듯이 -샹탈 수녀에게 쓴 편지- 사순
절은 영혼의 수확기입니다. … 사순절은 열매를 거둬야 하고
한 해를 위해 그것을 곡간에 쌓아야 하는 영적 삶의 가을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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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그는 사순절에 대해 첫째 전례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사순절은 죄인의 회개와 영혼의 정화를 위한
시간이다. “사순절 전체 동안 강론한다”는 것은 강론대에 “자
주” 올라가 하루에도 대여섯 번 강론하는 것을 의미할 뿐 아
니라, 고해소에 오랜 시간 머물며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맞아들이고, 가르치고, 교리교육을 하고, 화해성사로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수아는 사육제 기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
었다. “이 겨울은 사람들을 육으로 이끌고 영혼을 지치게 한
다. … 마음을 쇠약하게 하고 이 불행의 비, 가당치 않은 쾌락
의 비를 내리게 한다. 아, 이 육의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다
행히 사육제의 시간은 사순절에게 자리를 내준다. “오, 잘 왔
다, 은총의 시간. 어서들 오라 구원의 날들이여!” 그 자신도
기도와 보속으로 이 사순절을 준비했다. 가능한 때면 망설이
지 않고 피정을 했다. 1606년이 그랬다. “내 작별의 날들입니
다. 나는 내일 낮이 되기 전에 예수회 원장 신부(당시 푸르니
에 신부였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샹베리로 가서 사순절 피
정을 합니다. 너무 많은 문제에 휩싸인 내 불쌍한 영혼을 진정
시키기 위해 나는 거기서 5박 6일 동안 칩거할 것입니다. 그
곳에서, 사랑하는 딸이여,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선익에 대
해 열정적인 관심을 지닌 그 훌륭한 신부님의 도움 아래 나 자
신을 완전히 되돌아볼 것이고 내 마음의 조각들은 제자리에
돌려놓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잘 섬기
고 싶은 천 가지 소원”으로 가득 찬 마음을 만들어 자신의 양
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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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여기에서 짧은 괄호를 열어 보겠다. 사순절만큼이나 프랑
수아 드 살의 마음에 차지하고 있던 또 다른 사목이 있다. 이
는 무엇보다도 트렌토공의회가 그것을 강조했기 때문인데,
바로 교리교육이다. 그는 교리교육과 사순절에 똑같이 영혼
의 중요성을 부여했다. 1603년 겨울, 그는, 즉 신임 주교는 주
저 없이 안시 도시에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
치는 과정을 열었다. 먼저 노트르담Notre-Dame 성당에 그리고
바로 이어 생 도미니키Saint-Dominique 성당에서 열었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들은 “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다른 많은 성인들과
함께 아이들의 교리교육에 합류했다. 그래서 “사람을 성별과
나이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프랑수아가 아이들의 영혼이나 대중들의 영혼에 대해 어
떤 지식을 갖고 이러한 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것은 샹탈 부인에게 보낸 편지(1607년 2월 11일)의 단편보다
더 나은 게 없다. “나는 부인이 학교 교사가 되는 것을 정말
로 매우 찬성합니다. 하느님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
인께 고마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아이들의 교리교
육을 돌보도록 우리 부녀들을 격려하며 말했듯이, 어린이의
천사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그들을 양육하고 그들
의 부드러운 영혼 속에 믿음의 불꽃을 심는 이들을 각별히 사
랑합니다.”
그리고 은총과 휴식의 시간이다. “나는 지금 우리 아이들
과 함께 가면과 춤으로 재미있게 즐기며 관객들을 조금 웃게
만들던 교리교육을 마치고 왔습니다. 나는 유쾌한 순간을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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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겼고, 많은 청중이 박수로 저를 아이들 가운데 있는 아이가 되
도록 초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게 나에게 잘 맞는다고 했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순수하고 단순
한 참된 어린이가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 교리교육 사목은 프랑수아의 마음에 항상 소중하게 남
아 있었다. 사순절 동안,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그리고 본당
방문 기간에 그는 어린이들을 모아 간단한 교리 가르치기를
좋아했다. 이런 목적으로 벨라르망Bellarmin의 교리를 사용했
다. 그러나 대상자들이 너무 어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질문과 답변을 작성하여 손으로 쓴 쪽지를
각자에게 나눠줬다. 교구의 본당 사제들을 겨냥한 「교리교육
을 위한 규정」이라는 제목의 매우 귀중한 단편을 낸 것은 1603
년 10월이 확실하다. 프랑수아는 재임 기간 내내 이 분야에 대
한 교구 사제들의 열의를 부추겼다.
교구 방문
트렌토공의회가 주교들에게 권고하고 거의 강제적으로
부여한 임무 중 하나는 자기 교구의 본당들을 하나하나 차례
로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는 프랑수아가 원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던 숙제였다. “이 복된 방문을 위해 떠납니다. -샹
탈 부인에게 쓴다- 어딜 가든 온갖 것들을 만날 것입니다. 내
육체는 떨리지만 마음은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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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프랑수아 드 살이 1612년 출판한 의식서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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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는 크든 작든, 영적인 것이든 현세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
든 내적인 것이든 그곳의 십자가를 향해 인사드립니다. 그분
그림자의 영광에 합당하지 않은 나는 그분의 발에 인사하고
4)
입 맞춥니다.”
이 편지는 1605년 10월 초에 쓰여 진 것이다. 그때까지 프
랑수아는 “많은 뜨거운 문제들”과 건강의 악화로 인해 안시에
‘억류’되어 있었다. 건강의 허약함은 분명히 그의 길에 어렴
풋이 다가오는 십자가 중 하나다. 특히 지형 조건에 의해 자주
말이나 도보로 여행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실 그 지
방의 자연조건은 가혹하다. 1606년 8월의 편지에서 프랑수아
는 “10개 또는 12개의 삽 두께 정도로 얼음이 덮인 무서운 산
(샤모니Chamonix)”에 대해 말했다. “제네바 교구는 매우 넓고
인구가 많으며 -샤를 오귀스트 드 살은 이렇게 묘사했다- 거
의 ​대​ 부분이 높은 산(샤블레, 젝스, 테르니, 제네바 및 사보아
영토의 일부 제외)으로 이뤄진 산악이다. 특히 산간지방에 있
는 본당들의 온도 차가 매우 심하다. 어떤 곳에서는 겨울이 거
의 영원하고 다른 곳에서는 더위가 극도로 심하다. 이것이 바
로 선한 주교가 매우 고통을 받았던 이유다.”
어쨌든 그는 1605년 10월 15일에 출발했다. 필수적인 안
시에서의 체류와 돌아오는 일정 등을 고려하여 이 방문 여정
은 4년간 이어졌다. 많은 곳에서 프랑수아는 개신교들이나 그
들이 버리고 간 폐허들을 만났다. 기쁨과 고통이 뒤섞인 상황
4) OEuvres, vol. XIII, p. 113. 이런 출발이 1606년 6월에도 있었다. cfr. ibid.,
p.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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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이다. 자주 개종자들을 확인하거나 받아들이면서 기뻐했고,
또 자주 영혼의 완고함과 맞닥트리고 더욱이 목사들이 불러
일으키는 천 가지의 성가심에 직면하는 황량한 일도 일어났
다. 그런데도 8월에 있었던 샤블레 방문은 그에게 위안이 됐
다. “(11년 전) 가톨릭 신자들이 백 명도 안 됐는데 지금은 위
그노가 백 명도 안 되네요!” 하지만 1606년 11월 바오로 5세에
게 보낸 교구 상황에 대한 보고서는 매우 덜 낙관적이다. 130
개 본당이 “일부는 베른의 폭정하에, 또 다른 한 부분은 가장
가톨릭적인 왕국의 통치하에 있습니다. … 베른 사람들이 차
지하고 있는 곳은 베른 지역 자체가 정상화될 때까지 아무 희
망도 없습니다.” 다른 지역에 관해서는, 왕은 “저희에게 계속
희망을 품으라고 명합니다. … 그러나 제 눈은 그의 말을 기
다리는 데 지치기 시작했고, ‘언제 나를 위로할 것인가?’라고
말합니다.” 반면, 450개 가톨릭 성당에서 프랑수아는 엄청난
노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위안을 얻었고, 신자들의 사랑이 그
를 기쁘게 했다. “사랑하는 딸이여, -1606년 10월 2일 샹탈
부인에게 보낸 편지다- 나는 이렇게 높은 산들 한가운데서 좋
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주교를 얼마나 영예롭게, 환
영하며, 존경하는지요! 이틀 전 한밤중에 이 작은 도시(본느
Bonneville)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불을 대낮같이
환히 밝히고 큰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오! 그들은 마땅히 다
른 주교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 역시 자기 신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강론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아무리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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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주교
은 경당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다 방문했다. 견진성사를 거행
했고, 고해성사를 들었으며, 자기 손으로 신자들에게 거룩한
영성체를 베풀었다. 그는 큰 인내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의 불
평을 들었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신중하게 명령했다.
그는 교회적인 것 또는 세속적인 것에서 부족한 부분, 공적 죄
와 죄인에 대해 파악했으며, 필요할 때 그의 타고난 감미로움
을 아주 잘 섞어서 매우 엄하게 교정했다.” 임시 행정, 화해,
소송과 분쟁 등등 그가 방문을 마친 후 사람들과 사안들이 평
화를 찾을 수 있도록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마침내, 양
들을 위해 자신의 혼을 다 바친 그 착한 목자이자 주교였습니
다.” 그러나 그가 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휴식과 영적 성찰
의 큰 필요성이 그를 엄습했다. “기껏해야 반나절 정도도 멈
추지 않고 -1605년 11월 30일 썼다- 6주 동안 시골을 돌고 나
서 토요일 저녁에야 이곳에 도착했다. 보통 나는 매일 강론했
고 자주 하루에 두 번씩도 했다. 내게 하느님께서 얼마나 고
마우신가! 내가 이렇게 강해 본 적이 없다. 예견되던 모든 십
자가들이 나와 마주하면서 올리브나 대추야자 나무로 변모했
다. 나에게 쓸개처럼 보였던 모든 것이 꿀로 변하거나 그보다
조금 못한 것으로 변했다. 다만, 진실을 말한다면, 말을 타거
나 밤에 잠에서 깨는 경우가 아니곤 스스로 반성하고 마음의
상태를 챙겨볼 시간이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일들이 줄을 서
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견진성사를 줬다.”
이런 식으로 주교와 그의 신자들 사이에 더욱 친밀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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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대가 엮어진다. 신자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목자에 대한 ‘사랑
으로’ 점점 더 빠져든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보통 때보
다 조금 더 영혼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다. … 이제 그들의
마음은 거의 모두 내 것이다.” 이때 진정 뜻하지 않은 일이 발
생했다. 앙리 4세 왕이 그를 곧 프랑스로 데려와 그에게 새로
운 영예, 칭호, 직위를 수여하길 계속 원한다는 사실이 알려
졌다. “아직도 나를 높이겠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수아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과 교회
에 대한 더 큰 봉사라는 명목으로” 그에게 제안됐다는 사실이
다. 다른 한편, 그는 프랑스에 대한 “특별한 경향”, 즉 “그 공
기를 마셨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교황의 공식적인 명령
이 아니라면, 그는 사랑하는 사브와를 선택했다. “나는 내 나
라에서, 내 가족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풍족함과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내 직책이 허용하는 한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그
리고 안전하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그는 자기 교구에
대해 언급하면서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아내가 나
를 안타깝게 합니다. 천 가지도 넘는 질병에 시달리는 그녀를
버리고 떠날 수 없고, 하느님은 내가 그녀와 결합하기를 원하
시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묶여 있습니다!” 유머 아래에 사랑
이, 깊은 사랑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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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프랑수아 드 살과 그의 사제들
프랑수아의 자기 양들에 대한 관심사 중 가장 큰 부분은 그
의 사제들에 관한 것이다. 보존된 서신 중에 일반 성직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매우 드물고(베룰Bérulle 경이 추기경으로 승격
되기 전에 보낸 편지는 제외), 특히 사브와 출신 사제들에게
보낸 편지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그의 성직자들이 그의 친구,
그의 영적 아들과 딸들, 그리고 그가 교류하던 위대한 인물들
보다 제네바 주교의 관심을 덜 받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의 생각과 행동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 견해와 반
대였다. 프랑수아 드 살은 교구 개혁에 근본적인 사항이 주교
의 회개이며, 성직자들의 진지하고 심오한 회개야말로 시급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농 본당신부’였던 시절 -성당도
없고, 의전사제도 없고, 보좌도 없는 본당신부- 그는 사목 생
활을 위해서 열성이 가득한 성직자가 없다면 적어도 사제들에
게 자질, 열성, 은총이 요구된다는 것을 자신의 마음과 피부로
너무 가까이서 또 자세하게 깨달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점에
서도 그는 트렌토공의회의 지침을 받들었다. 주교가 특히 강
론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사제들은 이 '사목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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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에서 흐르는 '개울물'이다. 주교 축성의 은총은 사제 서품의
은총 속을 흐른다. 우연한 말 한마디가 자기 사제들에 대한 프
랑수아의 생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프레미요 주교에게 이
렇게 썼다. “오, 주교님의 신자들이 주교님을 보면서 얼마나
성장할 것인가! … 그들의 성장에 대해 본당신부님들과 논의
하십시오.” 분명히 말해서 이 구절은 사제, 특히 본당신부가
주교의 사명에 밀접하게 참여하며, 따라서 그의 성소와 은총
에도 가까이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를 고려할 때, 프랑수아는 성직자의 자질을 담
보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사제가 교육받았고
좋은 생활 자세를 보여주길 원했다. 칼빈교도들의 가장 좋은
동맹군은 일부 성직자의 무지와 악행이었음을 그는 경험을 통
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성직자들에 대한 그의
열성은 무엇보다도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가르치려는 노력으
로 표현되었다. 이제 우리가 인용할 텍스트가 당연히 프랑수
아 드 살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진정성에 대한 모
든 비판적 보증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애석하다. “훌륭한 본
당신부들은 좋은 주교들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주교가 자기
에게 속한 성당들에 행실로 모범을 보이고 충분한 교의지식
을 지닌 신심 깊은 본당신부들을 제공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
지 않는다면, 헛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양들을 앞
서가며 천국 가는 길을 인도하고 신자들이 따라야 할 본을 보
여 줘야 합니다. 성직자가 하느님의 말씀과 좋은 모범으로 신
자들에게 악을 피하고 덕을 끌어안도록 격려할 때 그들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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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게 신심을 실천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
다. 반대로 신자들은 사제가 무지하고 영혼 구원에 거의 관심
이 없으며 행실이 좋지 않을 때 그리스도인의 덕행을 매우 쉽
1)
게 포기합니다.” 교구에 ‘매우 추천할 만한’ 사제가 많지 않
았던 것은 아니지만, 프랑수아는 많은 사제가 아니라 모든 사
제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성직자 개혁에서 프랑수아 드 살은 그가 확고하
게 추구하는 몇 가지 불변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매
년 교구에 입회하는 수많은 후보자가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
을 수 있는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교구의 영적 운명은 신
학교의 영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역설이 있
다. 그 당시 제네바 주교의 교구에는 성직 후보자들이 넘쳐났
고 성직자는 전반적으로 평범했다. 1605~1606년, 프랑수아
의 방문 동안 570명이 넘는 젊은이들에게 탁발식을 했다. 문
서고의 자료에 따르면 그는 주교 재임 20년 동안 약 900명의
사제를 서품했는데, 이는 연평균 40명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후보자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성을 받아야 했다. 프랑
수아는 종종 이 우선 사항으로 돌아갔다. 제네바 교구 상태에
관한 1606년 보고서에 그의 생각이 훌륭하게 요약되어 있다.
“가톨릭 세계의 어떤 교구도 제네바보다 성직자를 위한 신학
교가 시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것을 세우는 데
헛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사실, 주교의 식탁은 뭔가를 더 덜
1) OEuvres, vol. XXIII, pp. 400-40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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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쟌 프랑수아스 프레미오 드 샹탈의 초상화(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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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어내기엔 너무 빈약합니다. 의전사제단의 식탁 역시 가난하
고, 의전사제들을 부양하는 것도 교회의 다른 기관들처럼 넉
넉하지 못합니다. 대수도원들이나 수도원들의 경우도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이를 소유한 사람들이 그것을 단단히 유지하
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자산들이 그들에게 부과되는 다양
한 연금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고 권위의 사도좌가 시골의 한 수도원 영
지를 할당하여 신학교 건립을 원한다면, 즉시 좋은 결과를 얻
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든 또는 성직단의 일반적인
기여로든 일을 완료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프랑
수아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삶이 끝날 때까지 치열하
게 싸웠으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들이
그 끈질긴 노력의 열매를 거뒀다.
프랑수아 드 살은 주교 축성 후 자기 성직자들과 접촉하는
데 뜸을 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1603년 8월 11일, “교구의
모든 성직자들”을 10월 2일에 안시에서 열리는 시노드에 소
집했다. 문서고에 프랑수아가 주교재임 동안 성직자들과 함
께했던 시노드의 여러 헌장이나 규례가 보존되어 있다. 이 공
적 문헌은 분명히 엄격하지만, 프랑수아가 그의 모든 사제가
교육을 받고 덕행에 모범을 보이도록 하는 데 얼마나 큰 노력
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준다. 1617년 규례의 한 조항은 이러한
끈질긴 노력을 잘 보여준다. “지금부터 성직으로 진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명령을 실행하고 그들의 나이
와 품행에 관한 본당신부의 서면 증명서를 가져와야 한다. 이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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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문제에 있어서 본당 사제들은 영원한 재판관 편이 되어 매우
세심하고 정직할 것을 권고하고 간청한다.” 그러나 주교 행
정 관련 문서 중에도 (심지어 시노드 문서보다 훨씬 더) 자기
사제들에 대해 사목적으로 배려하는 내용을 보여준다. 무엇
보다 먼저, 우리가 이미 이야기한 교리교육에 관한 규정이 있
다. 그런 다음 프랑수아가 고해소에서 얻은 개인적인 긴 경험
을 모든 사제에게 공개하는 고해사제 지침이 따른다. “가련
한 고해자들이 여러분들을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억하
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그들을 대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그들
의 무지함, 지적으로 낮은 수준, 굼뜸 및 다른 단점들을 참아
내면서, 그리고 그들 안에 일말의 나아질 희망이 있는 한 그
들을 돕고 구출하는 데 절대 지치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을 지
녀야 합니다. 목자들은 강한 영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약
하고 지친 이들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성한 직무
에서 사제의 사도적 자세에 대해 정의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매우 깨끗하고 순수하기를, 영혼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
니길, 의사의 조심성을 본받고, 무엇보다 자비롭고 분별력을
지니길, 엄청난 죄로 인해 양심이 지나치게 두렵고 괴로워하
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여러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
을 일으켜 세우고 위로해야 하며,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그들
을 용서하는 데 있어 그들이 저지른 온 세상의 모든 죄보다 무
한히 더 크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어야 합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하십시오.
… 완벽한 고해신부의 시금석은 -다른 부분에서 말한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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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른 사람의 악행은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악행에 대해선 무자
비한 태도를 취하는 데 있습니다.”
그는 또한 바로 사제들을 위한 다른 중요한 문서인 “공부
에 매진하라는 권고”를 작성했다. “학문은 -프랑수아가 감
히 말하길- 교회의 여덟 번째 성사입니다. … 무지는 악의보
다 더 나쁩니다. … 우리의 비참한 제네바가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고 경계하지 않
는 것을 보며 그리고 우리가 더 현명해지겠다는 생각 없이 단
순히 성무일도서를 읽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을 보며 그
들은 우리 조상들 및 그들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단순함
을 속여 그때까지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믿게 했습
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네바 주교는 자신의 개혁을 사제들의
정신과 마음에 “미끄러져” 들어가게 하였고, 그들을 통해 전
체 교구의 개혁이 완성될 수 있게 했다.
그의 마음을 매우 사로잡은 또 다른 기획이 있었는데, 그
는 이것이 사제들의 삶과 선교적 열정의 원천이 되기를 희망
했다. 토농의 거룩한 집을 말하는 것으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집의 ‘평의회’, 즉 원장의 권위 아래에서 거룩한 집의 업무
를 지휘하고 고무하는 7명의 사제로 구성된 그룹이다. 프랑수
아의 선종 후 이 사업 중 일부가 진정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거룩한 집이 그에게 숱한 문제와 환
난만 안겨주었다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재정 자원이 거의
없어서 기관을 꽃피우지 못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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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는” 수준이었다. 프랑수아는 마지막까지 이것을 위해 도움을
간청하거나 요청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는 거룩한 집에 많
은 희망을 뒀다! 그는 그 안에서 언젠가는 사제 공동체, 선교
센터가 될 모델 또는 교구 본당들을 위한 ‘사제기숙사’의 예시
를 보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너무 거창하고 너무 설익은 꿈이
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미 한 무리의 사제들 생
활을 그들에게 맡겨진 선교 과업에 맞춰 적용하고자 했던 시
도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대수도원의 개혁
젠장맞을 돈! 프랑수아가 자신의 교구를 방문할 때 그는
모든 곳에서 이 문제에 봉착했다. 본당신부들과 보좌신부들
사이에서 그는 확실히 “매우 추천할만한” 사람들을 많이 찾
았다. 그러나 1600년 그가 한 사제에 대해서 릿카리디 대주교
에게 쓴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쓸 수 있겠나? “그는 큰 빈
곤을 견디고 거의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우리는
이 유능한 사제들을 위해 그들의 조건과 직무에 적합한 거처
를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약탈을 고려하더
라도 사브와에 돈이 없는 것은 아녔다.
여기에서 우리는 프랑수아 드 살이 행한 주교직의 가장 섬
세한 요점 중 하나를 만난다. 1606년 보고서에서 그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진솔함으로 그것을 직면해보자. “매년 받는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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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일조는 -바오로 5세에게 보고함- (본당과 사목자를) 유지하
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
다. 문제의 십일조를 받는 장소는 거의 다 대수도원이나 수도
원에 속합니다.”
이 온전히 합법적인 글에서 프랑수아는 이런 경험을 말한
다. “매우 높은 산에 있는 한 성당을 제 눈으로 보고 방문했습
니다. 손발을 사용해서 기어오르지 않는다면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그곳은 가장 가까운 다른 성당에서 역 9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오직 한 본당신부가 두 성당을 관리하며 주
일마다 이곳저곳에서 미사를 드립니다. 그 엄청난 수고, 위험
그리고 불편함 특히 그 지방이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이는
겨울에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
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마을의 남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모든 교회의 권리를 존중하고 십일
조와 첫 소출을 바치고 본당신부를 받지 않았습니까?’ … 사실
모든 것은 가장 가까운 대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대수도원과 수도원이 자신들의 설립 취지
에 부합하는 교회의 ‘사업’을 수행한다면! 아아! 수도서원을
높이 평가하고 많은 수도회 장상들(시토회, 도미니코회, 바르
나바회, 카푸친회 등)로부터 ‘명예회원증lettres de filiation’을 받
아 큰 수도 가족들의 공로와 선행에 동참하는 프랑수아 드 살
이다. 아빌라의 테레사Thérèse d’Avila의 카르멜 수녀회를 프랑스
에 소개했고 방문수녀회를 설립한 그이지만 사브와 내 많은
수도원의 끔찍한 해이함을 고발하고 그들에 대한 극도의 가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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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한 조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서신에는 그리스도인 백
성 안에서 성덕의 화로, 청빈, 사랑을 구축해야 할 수도자들의
이러한 쇠퇴를 슬퍼하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1603년 말 교황대사인 톨로사Tolosa 대주교에게 다음과 같
이 강한 글을 보냈다. “사브와의 수도자들은 트라피스트수도
2)
회만을 제외하고 다 타락에 빠져 있고, 해이함이 완전히 뿌
리 깊게 박혀있어 그 회복을 위해 일반적인 처방으로는 충분
하지 않습니다. 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큰 권위와 인내를
갖추고 상황에 따라 사용할 매우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은
개혁가가 필요합니다. 수도승들이 말싸움에 매우 경험이 많
고 노련하기 때문에, 그의 권한은 매우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이고 소추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개혁을 회피
할 수 있는 수단을 그들에게서 박탈하려면 공작 전하께서 사
브와 상원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개입하도록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1606년 바오로 5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프랑수아는 이
문제가 지닌 큰 어려움에 대해 강조했다. “이 교구 내의 대수
도원들과 수도원들에서 규율이 얼마나 파괴되고 있는지를 본
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트라피스트회와 카프친회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경우에는 금은 재가 되고 포도주는 물과
섞였거나 더 심한 경우 독극물이 되었습니다. 이같이 하여 그
들은 하느님의 원수들에게 하느님을 모욕하게 합니다. 그들
2) 프랑수아는 카프친수도회도 예외로 했다. OEuvres, vol. XXIII, p. 325.
조.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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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이 날마다 ‘이 백성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 시
토수녀회의 대문은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수녀들은
나오고 남자들은 들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같은 편지에서 프랑수아는 이 악을 고치기 위한 방책을 제
시한다. “이 악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수도회의 더 나은 수도
자를 보내거나, 매년 정규적으로 방문하여 강압적인 수단을
쓴다거나, 마지막으로 수도자를 일반 의전사제들로 교체하는
방안 등을 강구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사람이 법
학자 아래에 다시 나타난다. “강압으로 달성되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에 두 번째 방안은 매우 어렵고 또 매우 불확실합니
다.” 대수도원과 수도원의 개혁가인 프랑수아 드 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는 이 사업에서도 못지않게 위대
하거나 영적 자질을 갖췄음을 발견한다. 이에 대한 연구를 원
한다면, 탈루아Talloires의 베네딕토회 수도원 개혁이 좋은 예
가 될 것이다.
이 어려움은 프랑수아 드 살이 지닌 수도자상에 대해 강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수도자가 “단지 그 복장만으로 수도
자 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시토회와 같은 관상적이고 엄
격한 규칙으로도 게으름에 맞서는 보호의 역할을 못 할까? 수
도서원, 봉쇄생활, 장상의 존재 등만으로는 거룩함을 보장하
기에 부족한가? 하느님께 속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영혼이
멀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참된 봉헌생활의 비결은 어디
에 있었던 것일까?
207

21.10 Page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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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영혼의 친구 그리고 「신심생활입문」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신자들과 접촉에서 -가장 비천
한 사람이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단순한 일상의 의
무를 통해 하느님께 밀착되고 그 사랑을 발하는 “매우 아름다
운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이를 어린 시절 자기 가
족들 안에서 보았고, 오랜 시간을 고해소에서 보내며 만났고,
파리 체류 중 아카리 부인의 그룹을 통해, 아니 아카리 부인을
통해 만났다. 심지어 이단의 도시 제네바의 한복판에서 그 놀
라운 호텔 하녀인 자클린 코스트Jacqueline Coste, 방문수녀회의
첫 수녀가 된 그녀를 통해서도 만났다. 마침내 교구 방문 때
보다 가난한 마을들에 숨겨져 있던 많은 이를 만났다. “나는
가장 높고 가장 험한 산골 마을에서 -프랑수아가 1606년 방
문 후 감사를 표하며 썼다- 달콤함과 부드러움이 충만한 하
느님을 만났다. 그곳에서 많은 단순한 영혼들이 모두 진심으
로 성실하게 그분을 사랑하고 경배했으며, 무시무시한 얼음
사이 여기저기에서 그분께 찬양을 드리기 위해 노루와 산양
처럼 달렸다.” 어느 날 그는 한 여성 농부와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귀족 출신 여성에게 이렇게 사과했다.
“딸이여, 나는 이 가난한 농부들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선하고 단순하며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영혼들입니다!” 또한 죄수들 사이에서도 -일부는 프랑수
아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동행해달라고 간청했다- 때때로 완
전한 사랑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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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Pages 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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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Page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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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이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 그에게서 이미 타고난 영적 지도
에 대한 감각이 발전했다. 머리에서 머리로 -마음에서 마음
으로- 프랑수아는 영혼의 충만함을 느꼈다. 확실히 그는 참
되고 진정한 성화를 향해 사람들을 이끌고 자극하는 은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친밀하고 영적인 접촉을 통해
그는 모든 영혼이 자신의 개인적인 은총에 따라 “순수한 사랑
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각자에게 맞는 방
법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는 남녀 수도자들에게만 “영적 도
움”을 베풀지 않았다. 이 놀라운 공지는 그가 그의 모든 본당
신부들에게 보낸 것 같다(1604?). “영혼들 안에서 하느님 성
령의 역사하심을 악령의 장난으로부터 식별하기 위해 고해신
부와 본당신부들에게.” 그러니까, 이 공지에서 영혼들을 대
하는 그 개인적인 비법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의 가장 확실
한 표시는 그것이 참되고 심오한 겸손과 열렬한 사랑에 뿌리
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는 다시 이 황금률을 본다. “내
적인 감정으로 (영혼)을 고취하고, (영혼 속으로) 부드럽게 미
끄러져 들어가며, 양털 위에 비처럼 내려오는 것은 찬란한 성
부의 행복한 이끌어주심의 효과입니다.” 비록 양적으로 풍부
하지만, 그가 쓴 편지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이 훌륭한 영
적 서신에 그는 다른 원칙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프랑수아가
샤르모아지Charmoisy 부인과 나눈 길고도 많은 대화의 메아리
인 영적 ‘기억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면, 「신심생활입문」
이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이 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고
있다. 1608년, 샤르모아지 부인은 다양한 일 때문에 샹베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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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Page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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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몇 달 머물렀다. 이미 얼마 동안 그녀의 영적 지도를 해오던
프랑수아 드 살은 그녀에게 이번 체류 동안 포르니Fournier
부에게 지도를 부탁하라고 조언했다. 그리하여 포르니 신부
는 프랑수아가 그 제자에게 보낸 ‘기억들’을 알게 되었다. 포
르니 신부는 매우 흥분하여 “샤르모아지 부인의 신심을 인도
한 보물들은 반드시 출판되어야 한다.”며 프랑수아에게 요청
했다. 착한 주교는 그 “위대하고 학식 있고 신심 깊은 수도자”
의 판단에 의지하며 동의했다. 당연히 그는 급하게 텍스트를
검토하고 몇 가지 작은 배치를 수정한 후 인쇄소로 넘겼다. 하
갤러리 집의 경당, 안시
210

22.3 Page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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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지만 비엔나 주교에게 글을 쓰면서 사실을 털어놓는다. “주교
님, 이 작업이 어떤 설계나 계획에 따라 수행되지 않았다는 것
을 이미 눈치를 채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게 영적지도를 받
고자 원했던 아름다운 영혼에게 제가 건넸던 기록들입니다.
이 중에는 제가 일주일에 두 번씩 강론한 사순절의 내용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신심생활입문」은 프랑수아 드 살의 일상
적인 영적 지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친밀한 대화를 반영
한다. 같은 편지의 다른 부분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확인한다.
“몽펠리Montpellier의 주교님은 제 권고가 너무 성급하고 간결
하며 충분한 설명을 담고 있지 못하다고 여러 번 알려주셨습
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분의 지적이 옳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자주 보던 어느 한 영혼만을 위해 이 글들을
썼기 때문에 되도록 짧게 썼고, 대신 말로 이어갈 가능성이 있
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또 다른 것을 말씀하셨는데, 간단해
야 할 첫 번째 소개에서 제가 필로테아를Philotha 너무 멀리까
지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다루고 있는 그 영혼이
아무런 수덕생활을 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미 덕행에서 매우 출
중했기에 그리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빨리 진도를 나간
이유이겠습니다.” 이 책은 아무런 이론도 담겨져 있지 않고,
경험을 수집한 것이다. 그것을 거꾸로 이해하지 않기 위해 이
를 모든 영적 서신 및 프랑수아 드 살의 영적 지도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과 다시 대비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에 「서간집」은 영적 우정이라는 특정적인 살레시안 문
제를 제기한다. 살레시안의 우정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단지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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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프랑수아 드 살이 샹탈 부인 및 다른 매우 신심 깊은 사람과 결
부된 느낌만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그 영역을 과도하게 좁
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 프랑수아 드 살에게 있어 우정은
그 이름에 걸맞은 영적 지도를 실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상
적인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우정은 영적 지도를 감싸고 그
것을 능가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여기에 그 성격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있다. 영적인 것이 없으면 우정도 없다. 우정은
거룩한 사랑의 완성을 갈망하고 이 탐구에서 서로를 돕는 두
영혼 사이의 빛 · 거룩한 의지 · 은총 등의 소통이다.
충분한 예가 될 만한 것 두 가지만 보기로 한다. 우선 앙
투앙 파브르 상원의원과 주교 중 어느 쪽이 다른 이의 “원장
일까”라고 누가 말할 것인가? 그들은 정말로 모든 것을 공유
했다. 앙투앙은 프랑수아가 지닌 계획을 신뢰하는 사람이었
고 그 실현을 시도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프랑수아는 앙투앙
에게 협력했다. 예를 들어 그의 이름을 딴 법전을 위해 함께
작업했다. 프랑수아는 앙투앙에게 조언을 줬지만, 종종 그의
의견도 물었다. 그렇게 샤블레 시절에 그는 자신이 토농에 남
아야 하는지, 또는 그의 「논쟁」을 출판해야 하는지 하는 판단
을 그에게 맡겼다. 두 친구는 1606~1607년 겨울에 플로리몽
탄 아카데미l’Académie Florimontane를 ​함​ 께 설립했다. 이것은 어
떤 면에서 안시의 교육을 받은 모든 엘리트와 더 나아가 사브
와의 엘리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으로, 안시의 클로 드 크랑
Hôtel du Clos de Cran 저택에서 나눈 그들 사이의 젊음 가득한 교
류의 열정과 친숙한 대화의 매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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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의 모든 문화와 미덕을 공유했다. “아카데미의 목적은 모든
미덕의 실천, 하느님 지고의 영광, 지고하신 공작께 대한 봉
사 및 공익에 있다.” 아카데미의 정관이 이렇게 시작된다. 플
로리몽탄 아카데미를 ​지​ 탱하고 그것에 혼을 불어넣는 것은 그
들의 우정이었다. 1610년 상원 의장으로 승진한 앙투앙 파브
르가 안시를 떠나 샹베리로 가자 이 훌륭한 기관은 쇠퇴했다.
프랑수아와 앙투앙 사이의 서신은 종종 주교와 상원의장 사
이의 업무적인 서신으로 변하지만, 우정은 지속된다. “우리
의 우정은 끝이 없고 내 마음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서, 그 친구만큼 오래된 것 같습니다.” 한편 1610년에 두 친구
사이에 새로운 유대가 형성되었다. “파브르 양이 -프랑수아
가 2월 5일에 샹탈 부인에게 썼다- 마침내 자기 부친의 허락
을 받아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내 딸
로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를 통해 뭔가 좋은 일
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1610년 성령감림절에 마리-재클
Marie-Jacqueline은 샹탈 부인 그리고 브레샤Bréchard 양과 함께
갤러리Galerie 집으로 들어왔다. 그날 프랑스와 드 살과 앙투앙
파브르 사이의 우정은 충만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프랑수아 드 살의 우정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
름은 샹탈 부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맞다. 특권적이고 총체적
이며 존경스럽고 강한 애착의 증거를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
「영적지도편지」를 여는 것으로 충분하다. 게다가 가장 부드러
운 표현에서도 그의 어조는 친구의 것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대가 내 애정에 대해 온전하고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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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Page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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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한 신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1604년 6월 24일의 편
지를 예로 든다- 또한 모든 힘을 다해 그대의 영혼을 섬기려
는 생생하고 특별한 내 의지를 알아주고 깊이 믿어주길 바랍
니다. 그대의 영혼을 위해 내가 지닌 애정의 질적 수준이나 그
크기 정도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하느
님으로부터 온다는 것과 그렇기에 이를 소중하게 제공하겠다
는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그것이 매일 자라나고 늘어나는 것
을 봅니다. 내 모든 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 하느님이 나를
그대에게 주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내가 그대의 것이라고 여
기십시오.” 그러나 이 우정이 어떻게 처음부터 “거룩한 사랑
의 완성” 수준에서 시작할 수 있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셨다. 하느님께서는 프랑수
아와 샹탈 부인의 디종에서 만남을 경이로운 방식으로 준비
하셨다. 심지어 그들 각자에게 미리 계시를 주셨다. 특히 “(내
가 그대의 영적 지도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그대가 한 선
택은) 옳고 정당한 결단이 지니는 모든 징후를 가지고 있습니
다. -1604년 10월 14일 프랑수아가 남작 부인에게 썼다- 그
대가 거의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연민의 마음으로 그것을 하도
록 이끄는 중요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내가 동의하기 전에 사
안을 검토한 주안점들입니다. 그대나 내가 우리 자신에 자만
하지 않고 훌륭하고 학식 있고 신중한 당신의 고해신부에게
의견을 구했다는 사실, 그대의 의식 속에 일어난 첫 번째 동요
를 두고 혹시 이것이 잘못된 것에 기반을 두지는 않았을까 하
는 우려로 냉각의 시간을 주었다는 사실, 모든 일을 하루 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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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Page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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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새가 아니라 몇 달을 두고 기도로 성찰했다는 사실 등입니다.
이는 모두 하느님의 뜻임을 확인하는 증거들입니다.”
프랑수아는 첫 편지부터 이 우정에 확실한 영적 특성을 부
여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의 관계를 즉시 순수한 사랑의 거
룩한 자유 안에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나는 우리 사이가 자
애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닌 우정의 의무가 아니라면
어떤 의무도 없는 유대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 유대는 성 바
오로 사도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이라고 부른 그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유대가 있고 우리의 사슬이 있습니다. 더 조일
수록 우리에게 더 많은 기쁨과 자유를 줄 것입니다.”
1년 후인 1605년 8월 1일, 그는 샹탈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편지를 다시 썼습니다. “그대에 대한 내 감정의 크
기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
에 비해 훨씬 위에 있습니다. 이 애정은 눈보다 희고 태양보다
더 순수합니다. 이 부재 기간에 그대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도
록 고삐를 자유롭게 두는 이유입니다. 오, 주 하느님, 천국에
서 그 사랑의 바다에 뛰어들 때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게 될까
요. 그대의 개여울에서 이렇게 미리 많이 느끼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우정의 발전을 단계적으로 따르지는 않
겠다. 이 우정은 훗날 성 마리아 방문수도회 설립의 기초가 되
었다. “그대와 함께 있는 내 사랑하는 딸들에게 인사합니다.
-프랑수아는 설립의식이 끝난 며칠 뒤 샹탈 원장수녀에게 편
지를 썼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미로운 내 사랑
이고, 내 사랑하는 딸인 그대는 우리의 것을 모두 당신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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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하기 위해 그대에게 당신을 숨김없이 드러내시는 주님 안에
서 내 참 마음입니다. 이제 나는 밤낮으로 현존해야 하는 우리
수도회를 똑바로 지켜보겠습니다.” 같은 서신에서, 프랑수아
는 이제 자신이 묵상하는 이유가 그의 수취인에게 있음을 말
했다. 이 둘 사이의 모든 것은 사랑과 자유였고, 모든 것은 하
느님 선물의 교환이었다.
성 마리아 방문수녀회와 「신애론」
성 마리아 방문수녀회를 창립하면서 프랑수아는 이미 많
이 있는 수녀원에 다른 하나를 보탠 것이 아니라, 축성 생활
의 새로운 형태를 세운 것이다. 그의 영적 체험과 성찰, 그리
고 영혼들과 접촉 등이 그가 하느님께 봉헌된 삶의 새로운 양
태를 생각하도록 인도해준 독창적인 유형이다. “세상에서 가
장 엄격한 봉쇄수녀원일지라도 하느님과 일치하는 영혼을 만
들어내지 못한다.” 엄청난 금욕과 절제, 가장 가혹한 극기, 높
은 관상, 가장 특별난 황홀경조차도 아니다. 유일하게 효과적
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프랑수아 드 살에게 있어
서 방문수녀회는 진정한 개혁 수도원이다. 사람의 마음이 예
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면, 수도자 삶의 모
든 외양은 아무것도 아니다.
성모님의 방문 정신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데 있어 오직 방
문수녀회 수녀들만이 그 능력과 자격을 가지고 있다.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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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의 규칙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내부에서 규칙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 역사가의 임무는 다르다. 창립에 선행되거나
수반된 문서들을 최선을 다해 수집하고 해석하는 것이 그들
의 임무다. 이 경우 작업은 거대하고 흥미진진하다. 프랑수아
드 살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사건들에 따라 자신의 수도회 설립계획을 발전시켰
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그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 환시가 있
었던 디종에서 시작됐다. “우리 수녀회는 -1610년 5월 24일
예수회 니콜라 폴리앙Nicolas Polliens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디
종 여행의 결실입니다. 그 여행에 대해 자연적 전망에서 사안
들을 바라보는 것이 내게는 절대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은 악인을 중상하는 잔인함보다 차라리 선인의 의견과 자
비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선호하는, 영혼에 대한 봉사에 그
렇게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또 다른 성공을 관통하도록 비밀
스럽게 강요되었습니다.” 1604년 사순절 강론을 디종의 공작
궁 경당에서 하며 샹탈 남작부인과 처음 만났던 그 체류에 대
해 말한다.
하지만 계획이 실현되기까지 넘어야 할 수많은 어려운 단
계들이 있었다. 프랑수아는 3년 동안 자신의 계획을 비밀에
부치고 성찰과 기도를 했다. 그는 이에 대해 샹탈 부인에게도
1604년 8월 상클로드Saint-Claude에서의 접견 때나, 1605년 5
월 그녀가 자신의 지시에 따라 드 살에서 피정하는 동안에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단지 1607년 6월 그녀가 그를 만나러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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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안시, 방문수녀회의 두 번째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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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Pages 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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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시로 왔을 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는 그 순간까지 남작
부인의 속세를 떠나려는 열망에 대해 승인하고 싶지 않았고
격려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성령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많은 미사를 드릴 것입니다. -여
전히 1607년 2월 11일에 그녀에게 대답했다- 사랑하는 딸이
여, 성채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중대한 사안으로 보기 때문
입니다.”
5월에 샹탈 부인의 여행을 계획했다. 6월에 그녀는 안시
에 도착했고 이 체류 기간 동안 성령강림 다음 월요일인 6월 4
일, 프랑수아는 “그녀를 위해 선택한 것을” 선포했다. 7월 2
일, “그녀가 떠난 지 8일째 되는 날에” 그녀에게 썼다. “나는
(이 선택이) 내 영혼에서 점점 더 확고해짐을 느껴집니다. 그
러니 우리가 많은 숙고와 기도와 희생 후에 결심한 것이기에
그대의 마음에 다른 욕망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
고 다른 성소의 탁월함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겸손하
게 이 성소에 머무르십시오. 가장 낮고 품위는 없지만, 그대
의 가능성에 더 적합하고 그대의 미소함에 더 합당할 것입니
다. 그래서 그대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이 결심 안에 단순히 머
무르십시오.”
반면에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과감함과 하느님을
향한 큰 신뢰가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수행하는 데 큰 어려
움이 있음을 안다. -프랑수아가 이미 고백했다- 어떻게 극복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섭리가 피조물
에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 확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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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다.” 3년 후인 1610년 삼위일체 축일인 6월 6일에 샹탈 부인,
샤를로트 드 브레샤, 자클린 파브르가 제네바 주교에 의해 갤
러리로 안내됐다. 하녀인 쟈클린 코스트는 이미 그곳에서 그
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 마리아의 방문수녀회가 이렇게 탄
생했다. 1년 후인 1611년 성 클라우디오 축일에 샹탈 원장수
녀, 브레샤 수녀, 파브르 수녀가 그들의 ‘서원’을 했고 주교는
그들에게 베일을 씌워줬다.
하지만 새 수도회의 회헌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여러
전문가들이 1610~1611년에 그 작업을 하여 1613년 7월~9월
즈음에 마치기로 했다. 그러나 수녀회를 리옹에 설립하는 것
과 관련하여 마퀴몽Marquemont 대주교와 프랑수아 드 살 사이
에 의견대립이 발생했다. 1616년 2월 2일 프랑수아는 결국 그
의 말에 따라 방문수녀회를 정통 양식의 성대수도원으로 변형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616년 8월에서 1617년 1월 사
이에 초본이 완성됐다. 마침내 1618년 7월, 프랑수아는 로마
로부터 방문수녀회를 성대수도원으로 인준한다는 문서를 받
았다. 10월 16일에 그는 안시 방문수녀회 집 갤러리를 “성 아
구스티노 회칙을 따르는 수도원”으로 탈바꿈했다. 하느님께
서 디종에서 수도회를 세우도록 프랑수아에게 영감을 주신 지
14년이 지난 후였다!
프랑수아 드 살이 성 마리아의 방문수도회를 설립한 의도
를 확실하게 이해하려면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이 계획과 관련된 1604~1618년 동안 그의 수도회에 대
한 모든 생각 그리고 그가 당시 지녔던 사도적인 사상을 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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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성해야 한다. 우선, 그의 서신 한 통 한 통을 살펴봐야 한다.
그가 샹탈 남작부인이나 샤를로트 드 브레샤, 자클린 파브르
와 같은 첫 번째 방문수녀들과 교환한 것뿐만 아니라 그가 완
덕을 갈망하는 평신도와 세속 영혼들과 교환한 편지도 살펴
봐야 한다. 또한 회헌과 창립의 문서들을 하나하나 분석할 필
요가 있다. 그래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첫 수녀들의 영혼
과 프랑수아 자신의 영혼에 있는 은총의 손길을 더 깊이 탐구
하고 이 모든 자료를 오랜 작업으로 완성한 「신애론」과 비교
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성 마리아 방문수
녀회의 발전과 교구 안팎에서 행한 주교의 선교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영적담화」가 이것을 증언한다. 그것에 대한 연구는
이 책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몇 가지 사안에만 머물기로 하자. 한 가지 매우 중요
한 사실이 있는 것 같다. 성 마리아의 방문수녀회는 프랑수아
드 살의 영적 교의에서 가장 숭고한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
어 있다. 이는 이상적인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절정이 순수한 사랑임을 보았고, 그 순수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 완전한 자기 부정, 자기애의 완전한 제거가 있었음을 발
견한다. 프랑수아 드 살은 회헌에 ‘수도회 설립의 목적’을 정
의하면서, 이를 기초하여 사람들, 나이와 건강 상태에 상관없
이 모든 사람이 “거룩한 사랑의 완성을 지향하도록” 허용하
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이 수녀회는 약하고 병약한
사람이 그 일원이 되는 것을 어떤 큰 장벽으로도 막을 수 없으
며, 거룩한 사랑의 완성을 기하도록 하기 위해 세워졌다.”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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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Page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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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라서 “선하고 견고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과부”도, 특히 자녀 등 “자기 가족의 생계”를
충분히 마련해 줬다는 조건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이나
어떤 신체적 (병약함) 때문에 더 엄격한 수도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역시 개방되어 있다.
이 문장은 수도생활에 대한 관행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지원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엄격한 규
칙을 잘 지키기 위해 신체적 건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깊은
겸손, 순명, 단순함, 온유, 포기 등의 덕목으로 기꺼이 살고자
하는 건강한 정신”이 더 중요하다. 1619년에 몸이 불편한 후
보자에 대해 프랑수아는 샹탈 원장수녀에게 다음과 같이 썼
다. “나는 규칙에 명시된 병약함에 관한 것이 아닌 한,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이) 소녀의 경우처럼 나약한 지원자들이 수도
원 입회를 거부당해서는 안 된다고 영원히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다리가 없어도 규칙의 기본적인 모든 수행을 할 수 있습
니다. 순명하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침묵을 지키고, 바느질
하고, 먹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옮겨야 하는 다른 수녀들이 이
사랑의 행위를 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을 때 인내심을 갖
기 등 … 나는 그녀가 마음의 절름발이가 아니라면, 받아들이
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봅니다.”
만일 프랑수아 드 살이 자신의 회헌에서 엄격한 금욕을
명백히 삭제했다면, 이는 “사랑의 열정과 매우 내밀한 신심
의 힘이 이 모든 것을 만회한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하느님
과 완전히 생생한 일치를 영혼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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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랑수아는 영적 강인함과 약함에 대해 성 바오로 사도의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Cum infirmor, tunc potens sum.”
와 같은 동일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사랑과 겸손은 함께 가
며 서로 상대에게 의존한다. “나는 여러분의 수도회를 보면
서 -회헌 서문에 썼다- 처음에는 숫자가 적었지만, 하느님
의 지극히 거룩한 사랑 안에서 항상 더 완전해지겠다는 것과
모든 다른 사랑을 부정하고자 하는 큰 열망이 있음을 압니다.
양들의 선익을 위해서 그들이 참된 삶을 얻을 뿐 아니라 차고
넘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친히 하신 우리 주님의 말
씀을 기억하면서, 수도회를 조심스럽게 도와야 함을 느낍니
다.” 서원의 책에서 그는 1611년 6월 6일, 첫 번째 세 수녀의
봉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 수녀회 수녀들의 겸손한 영
광! 우리에게는 사랑의 띠 외에 다른 띠가 없습니다. 즉 완전
한 사랑의 띠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결박합니다.”
수도 생활에 대한 그러한 개념은 이에 헌신하는 영혼들에게
생생한 신앙에 의해 뒷받침되는 견고하고 심오한 영적 양성을
요구한다. 진정한 신심에는 영혼의 큰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음의 힘은 매일의 투쟁으로만 얻을 수 있다. 프랑수아 드 살
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1607년에 샹탈 남작부인에게 그
토록 끈질기게 스쿠폴리Scupoli의 「영적 전투Combat spirituel」라는
책을 읽도록 권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은 내가 가장 아
끼는 책으로 적어도 18년 동안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있습니
다. 매번 읽을 때마다 이익을 얻습니다. 사실 힘의 덕과 덕의
힘은 결코 평화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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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Page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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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그는 샹탈 원장수녀와 최초의 수녀들이 봉헌생활에 입문
하기 전부터 영혼을 양성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
았다. 그는 건물 전체의 안정성과 내구성이 그 기초의 견고성
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1614년 9월과 12
월 사이에 작성된 매우 흥미로운 한 문헌 하느님께 자신을 봉
헌하는 수도회나 여성들의 기숙학교의 존엄성, 고전성, 유용
성, 다양성에 대한 신심 깊은 영혼들의 교육이라는 서문에 이
런 지적을 적어 넣었다. “세상에 불편함이 없는 삶은 없다.”
외로움이나 대화(즉, 공동체 생활), 해박함이나 무지, 잦은 장
상의 교체 혹은 종신으로 모시는 장상, 더 높은 장상들의 방문
이나 그들의 영속적인 한 도시 내 거주, 구걸 또는 자원의 확
실한 소유 등 이 모든 것들은 영적인 삶을 위해 이점도 있고 위
험도 있다. “… 벌통을 관찰하면 꿀벌들이 겨울에는 좁은 공간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반란으로 죽이기까지 하는가 하면, 여
름에는 밖으로 날아가서 길을 잃을 위험도 있다.”
수도자의 영혼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만일 수도원 안에
신심이 살아 있다면 하느님의 좋은 여종을 탄생시키는 데 보
통 수도원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살아있지 않
다면 가장 엄격한 봉쇄수도원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장상
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아버지다운 보살핌으로 자신을 무장
한다면 이제 그곳에는 믿음의 정신이 항상 살아있을 것이다.”
샹탈 원장수녀가 “완덕의 서원”을 하겠다는 영감을 받았고,
1611년 12월 27일에 프랑수아로부터 그렇게 해도 좋다는 허
락받았다. 이는 설립자의 영혼뿐 아니라 설립 전체에 매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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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요한 것이다. 이 영적 교육에서, 프랑수아는 인간의 마음을
가장 중요한 위치, 중심에 두고 그 움직임, 끌림과 혐오, 적
극적임과 미지근한 순간에 대해 연구했다. 그에게 있어 마음
이란 사랑의 장소, 포기와 자기부정의 장소이다. “성령께서
어느 날 당신의 사랑을 우리 안에 가득 채워주시길 희망합니
다. -샹탈 원장수녀에게 썼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그 거룩한
불에게 내어드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가능한 것보다 더 크
게 우리 마음을 비우고, 그분의 불로 채워주시길 항구히 희망
합시다. 사랑하는 원장수녀님, 언젠가 우리가 마음 안에 오로
지 거룩한 삼위일체의 지고한 일치만을 두기 위해 모든 다양
한 것들을 완전히 비우고, 하나가 되게 우리를 변화시킨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여 세세대대 찬
미받으소서. 아멘!”
프랑수아는 마음이라는 주제에 매우 깊이 몰두해 있었다.
“나는 ‘신심’과 완덕의 상징으로 심장을 방문수도회 문장에
새겨 넣길 원했습니다.” 1611년 6월 10일 자 메모는 그가 어떻
게 영감을 얻었는지에 대해 간단히 알려준다. 그날 아침 그는
미사를 집전하러 갤러리에 갈 수 없었고, 그를 롤랑 신부에게
맡기며 샹탈 수녀에게 이렇게 적었다. “이 신부님이 하느님께
서 지난밤에 내게 보내신 생각을 전달할 만큼 적절한 메신저
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방문수녀회는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고유한 문장, 휘장, 제복 등을 가질 만큼 충분한 품위
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수녀님,
그대가 동의한다면 우리의 문장으로 두 개의 화살에 꿰뚫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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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Page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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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며 가시관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심장을 생각했습니다. 이 가
엾은 심장은 십자가에 박혀 높이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에 예수님과 마리아님의 거룩한 이름이 새겨질 것입니다.” 이
상징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수도회는 틀림없이 예수님과 마
리아님의 마음이 하시는 일입니다.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돌
아가심으로 거룩한 마음을 열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러
므로 사랑이 그분께서 겪으신 죽음의 고통을 이길 때 우리의
심장은 진실한 희생을 통해 그분의 머리 위에 놓인 가시관으
로 항상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프랑수아 드
샹탈 수녀의 자필 노트(트레비소 방문수녀원)
226

23.9 Page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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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살에 따르면, 인간 마음의 사랑과 극기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을 언급함으로써만 설명되고 정당화된다. 그의
종교적 개념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가는 것이다. 놀
라운 것은, 이 이상이 수도회의 ‘문장’으로 상징될 뿐만 아니
라 말하자면 그 역사에도 깊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
서 우리는 리옹의 마퀴몽 대주교가 프랑수아 드 살에게 제기
한 문제, 방문회를 봉쇄수도회로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언급
하지 않겠다. 다만 1616년 2월 2일, 프랑수아가 대주교에게
한 멋진 대답만 논하기로 하자. 모든 뉘앙스를 가늠해 볼 때
이 얼마나 가치 있는 글인가! 이 얼마나 살레시안 영성에 잘
통합되는가! 프랑수아는 봉쇄수도원이 지닌 의무에 따라 “병
자 방문”을 폐지해야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희생이자 영적
손실임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고차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수도생활의 본질이 이것에 있지 않다고 그는 인식했다. 그리
고 “방문수도회를 정통적인 수도회의 성격으로 전환해도 그
목적을 정확히 지킬 수 있을 것이기에 제네바의 주교는 리옹
대주교의 뜻에 매우 자유롭고 큰마음으로 동의했다!” 따라서
모든 영혼, 심지어 연약하고 허약한 사람들도 그의 영적 원칙
에 따라 “하느님 사랑의 완성에 임할” 수 있게 하고자 프랑수
아는 “대주교가 하고자 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수도
3)
회의 목적은, 이 갈리아Gaules 지역에서 영혼에 유익을 줘야
할 당위를 요구받듯이 마땅하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호의를 받
3) 로마제국 시대 때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그리고 영국의 남부 지
방 등 갈리아룸 제국의 통치를 받던 지역을 통칭한다(역자 주).
227

23.10 Page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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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는 한, 전통 수도회의 성격으로도 쉽게 담보할 수 있습니다.”
프랑수아가 방문수녀회를 설립하게 한 수도생활에 대한
그의 개념과 그가 「신애론」에서 설명하는 영적 교의가 완벽하
게 일치할 필요는 없다. 수도회와 이 책(1616년 8월에 출간됨)
은 프랑수아의 정신 속에서 함께 성숙했으며, 그 자신도 방문
수도자들에 대한 자신의 보살핌이 책을 쓰는 데 영향을 크게
줬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오래전부터 거룩한 사랑에 대
해 글을 쓸 계획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방문수도회의 설
립과 보살핌)이 글을 쓰게 한 것에 비하면 그 계획은 시시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딸들의 신뢰가 프랑수아의 이론을 수도
생활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로 향하게 한 것이 확실하
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 하여 「신애론」 저술의 영감
에 대한 방문수녀회의 영향을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저
자의 눈에 「신애론」은 “거룩한 사랑의 완성을 기하려는” 영혼
은 물론이고 “세상의 번잡함 속에 사는 평신도” 등을 위한 만
인의 책으로 남아 있는 것 역시 확실하다. 그 책은 무엇보다
도 하느님 뜻에 따른 완전한 포기의 사랑을 드러내는 고결한
표현으로써 모두에게 강론하는 “거룩한 사랑의 삶”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위대하고 기적적인 성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
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
화의 유일한 모델로 제시한다. 「신애론」과 방문수녀회 사이
에 긴밀한 공통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
다. 둘 다 같은 마음, 프랑수아 드 살의 신심 깊고 사도적인 마
음, 복음적인 마음에서 태어났다. 프랑수아는 어느 날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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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Pages 23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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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쇄신
에 예수의 이름을 적힌 목걸이를 달고 있는 샹탈 남작부인에
게 이렇게 썼다. “내 (묵상의) 요점은 주일 기도의 이 질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리다Sanctificetur
nomen tuum. 오 하느님, 가슴에 예수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사
람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지는 날을 보는 기쁨을
누가 제게 주시겠습니까?” 마음의 심연에, 오직 여기에만 영
혼들을 위한, 수도자의 영혼과 세속 사람의 영혼, 일반인의 영
혼과 사제의 영혼 등을 막론하고 영혼들을 위한 진정한 회개
및 개혁이 있다. 이런 그리스도인 신비주의의 엄청난 요약인
「신애론」은 프랑수아 드 살의 기본적인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
다.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사랑의 은총과 열정으로
당신의 사랑을 위해 쓰인 이것, 테오티모Teotimo”의 마지막 장
은 “칼바리오 언덕은 진정한 영적유대의 사관학교”라는 제목
이 붙었다. 사랑의 사관학교? 그것이 바로 그의 전기 작가 앙
리 브레몽Henri Bremond이 성 마리아 방문수녀회에 붙인 이름
4)
이다.
4) H. Bremond, Histoire littéraire du sentiment religieux en France, vol. II, pp. 573-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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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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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9장, 순수 사랑을 향해
세 번째 파리 체류
1618년 10월 중순, 프랑수아 드 살은 생애 세 번째로 파리
를 방문했다. 사실, 파리는 1602년에 자신들을 매료시켰던 이
강론가를 종종 다시 초청했지만, 의심이 많은 샤를 엠마누엘
은 프랑수아가 그곳에 가서 사순절 강론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마침내 공작이 양해하여 파리는 다시 프랑
수아의 강론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사실 사브와 왕자-추기경
은 프랑스 궁정에 가서 공작의 맏아들, 피에몬테의 왕자를 위
해 프랑스의 젊은 크리스틴Christine 공주에게 손을 내밀어야
1)
했다. 특사의 역할은 성공적이었고, 결혼은 1619년 2월에 거
행되었다. 그는 9월이 되어서야 사브와로 떠날 수 있었다. 파
리에서 보낸 1년은 프랑수아에게 매우 사도적인 해였다. 사실
모든 사람이 그의 강론을 듣고 싶어 했고, 그와 대화를 나누
거나 고해성사를 본다든지 조언을 듣고 싶어 했다. “파리에서
1) 사브와의 왕자이자 추기경인 모리스 추기경은 샤를 엠마누엘 1세의 아
들로 사브와 왕가에서 유일하게 추기경으로 임명됐다(그는 1642년 성
직을 사임했다). 그는 크리스틴 공주와 그의 형 빅토르 아마데우스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프랑스로 간 ‘특사’의 일원이었다. 협상은 1년 걸
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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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석상(알랭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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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신앙의 놀랄 만한 성장을 발견했다.”라고 프랑수아는 썼다.
그렇지만, 그는 안시의 친구들과 딸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
았다. 사브와로 매우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하나같이 고결함
이나 영적 차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었다. “나는
분명히 -1619년 6월 23일 샹탈 수녀에게 썼다- 그대의 사랑
하는 영혼에게 선물할 영광스러운 세례자 성 요한의 아름다
운 사막 꽃다발을 마련하고 싶소. 그러나 사막보다 더 메마른
내 영혼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는데, 사실 오늘 아침에 아
직 매우 작은 것이나마 하나 구했습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
느님과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천사 같은 사람을 닮으려 더
이상 본성에 따라 살지 않고 가능한 한 믿음과 희망과 그리스
도의 사랑에 따라 살고 싶다는, 감각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아주 작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 두 가지 대상만, 하나는 자신
을 지고한 사랑으로 납치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극도의 금
욕으로 이끄는 두 대상만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번 파리 체류는 말하자면, 프랑수아 드 살의 삶과 활동
을 요약해주고 그것에 왕관을 씌워준다. 아카리 부인은 죽었
지만, 그녀가 설립하도록 프랑수아가 도움을 주었던 카르멜
수도원은 파리 영성 발전의 중심이 되었다. 프랑수아는 프랑
스에 오라토리오를 소개한 피에르 베룰Pierre Bérulle 그리고 부
르두아즈Bourdoise 신부, 빈센트 드 폴Vincent de Paul 신부와 성직
자 양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또 당시 포트 로아얄
데 샹Port-Royal des Champs 수도원 개혁과 이보다 더 힘든 모뷔송
Maubuisson 수도원 개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던 안젤리 카르노
233

24.6 Page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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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Angélique Arnauld 수녀를 만나 이렇게 조언했다. “너무 엄한 철
야기도와 금욕을 하지 말고(사랑하는 딸이여 내가 조언하는
그대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내 말을 잘 들으시오) 하
느님 사랑, 이웃 사랑, 겸손과 친절이라는 정도를 따라 수도생
활의 포트 로아얄(왕실 항구)로 가십시오.” 1619년 4월 7일,
프랑수아는 파리에 새로운 방문수도원을 설립하고 그 딸들의
지도를 빈센트 드 폴에게 맡겼다. 빈센트 신부는 이후 40년 넘
게 파리 방문수도원을 지도했다. 사브와 주교가 궁정에서 만
난 성직자 중에 루송의 젊은 주교인 아르망 뒤 플레시스 드 리
슐리유Armand du Plessis di Richelieu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
는 나에게 완전한 우정을 약속했고 하느님과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하여 결국에는 내 입장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비
록 프랑수아 드 살이 자기 말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리슐리유
주교는 그런데도 그에 대한 큰 존경을 잃지 않았다.
궁정에 머무르는 동안 뜻하지 않은 심각한 위험이 프랑수
아를 위협했다. 파리 대주교 드 곤디de Gondi 추기경은 드 라 로
슈푸코de la Rochefoucauld 추기경과 뒤 페롱du Perron 추기경의 지
지를 받아 파리에 있는 제네바 주교를 잡아두고 그를 계승권
이 있는 자신의 보좌로 임명할 계획이었다. 왕 루이 13세도 이
계획에 동의했다. 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어려움은 미리 예견
되었고 대안이 마련되었다. 프랑수아의 동생인 장 프랑수아
Jean-François가 제네바 주교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다. (파리
의 주교관이 심지어 그의 축성에 필요한 비용까지 부담할 것
이다!) 프랑수아는 생트 제네비에브Sainte Geneviève의 부유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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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도원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의 어깨를 덮을 자홍색에 관
해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았을 것이다. “복자는 추기경의 호
의에 감사함과 동시에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다른 것에 전념했
다는 것과 더구나 제네바 주교의 무게를 지탱할 힘조차 없다
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이미 늙어가며 많은 질병과 근력이
쇠하여지고 있음을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이듬해 2월 26일, 장 프랑수아가 제네바의 보좌로 승진한
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한 샹탈 수녀에게 프랑수아는 다른 소
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한 응답을 그대로 알려 줬다. “나는
투르에서 (추기경에게) 더는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만 이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 다른 이의 아내
를 억지로 내게 부담 지우는 것은, 그것은 정말 불가능할 것
입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의 유쾌한 작은 공주 마리 크리
스틴Marie Christine의 희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공주는 그의 성
덕에 매료되어 그를 자신의 자선 담당자로 삼고자 했다. 그리
고 적어도 그 명의를 수락하면 그가 기뻐할 조건이 포함될 것
이라는 언질을 받았다. 실제로 그 역할 수행은 동생 장 프랑
수아가 할 것이다!
은퇴와 홀로있기에 대한 열망
“더는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만 이혼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 농담 문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마음의 고백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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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안시, 라 상 수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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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안시로 돌아온 프랑수아는 평소와 같이 자신의 업무과 걱정
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그의 마음 깊
은 곳에서는 ‘홀로있기’를 갈망했던 것 같았다. 얼마 후, 마리
크리스틴 공주의 담당 사제가 그의 형이 “단 한마디도 말을 했
거나 글로 쓰지 않았는데, 어떤 추천을 구하거나 제공한 적도
없는데” 제네바의 보좌로 임명되었다. 프랑수아는 1620년 5
월 14일 샹탈 수녀에게 이렇게 썼다. “내 동생이 주교가 됐습
니다. 그것이 저를 풍요롭게 하지는 않지만, 저를 안심시키고
일에서 물러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리고 드 곤디 추기경의 계획을 암시하면서) 추기경 모자를 쓰
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습니다.”
여름 동안 그는 몽부아롱Mont-Voiron의 은수자들을 위한 회
헌을 검토했다. 그는 다소 유랑하는 은수자들의 삶에 교회의
이상을 소박하게 고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느님
의 더 큰 영광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복
되시고 순결하신 동정녀님께 드리는 경배를 위해, 그들의 영
혼 구원과 이 은수자들 근처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의 성화를
위해, 그리고 이단자들의 개종에 헌신하지 못하더라도 최소
한 이단자들이 참되고 건전한 믿음의 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하
기 위해” 그들은 이곳에서 거룩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프랑
수아의 제시에 따라 관상의 삶과 고행의 삶은 복음적 의미를
재발견했다.
1621년에 접어들며 제네바 주교의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
다. “우리는 식사를 조절하며 살고 있습니다. -9월 21일 샹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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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안시, 방문 성당
238

25 Pages 24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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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수녀에게 썼다- 그리고 내 눈은 물론이고 위장도 견딜 수 없
어 더는 저녁에 글을 쓰지 않습니다. 내가 늙은이로 오래 사는
것은 나에게 달렸지 않을 것입니다.”
가을이 되자 탈루아Talloires의 원장은 프랑수아에게 그가
지시한 대로 상제르망Saint Germain의 은수 수도원이 복원되었
다고 알리고 그에게 성지의 축성을 요청했다.
“그는 그 수도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샤를 아귀스트
드 살의 증언이다- 그리고 칭찬과 칭찬 사이에서 자기 생각
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지고하신 공작님의 뜻에
따라 가능하다면, 이미 내 보좌가 있으니 나는 이곳으로 오겠
습니다. 나는 이 수도원을 택했고 여기서 살겠습니다. 이곳은
나의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북쪽을 향한 창문을 열고
호수와 안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 하느님,
얼마나 아름답고 여기 있는 게 좋은지! 일상의 부담과 더위를
모두 보좌에게 확실히 맡기고 이곳에서 묵주와 펜으로 하느님
과 그분의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아세요. 원장 신부님!(그는
돌아서며 말했다), 좋은 생각들이 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강렬
하고 촘촘하게 머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사실, 그는 여러 작품을 계획했으며 그 제목들은, 시복시
성과정에서 밝힌 증언에 따르면, 그의 영성을 담고 있는 것들
이었다. 우리의 거룩한 믿음의 신비에 대한 친숙한 설명, 네
가지 사랑(하느님, 우리 자신, 친구, 적)론, 그리고 특히 “인
간이 되신 우리 주님의 생애를 묘사하고 복음적 권고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수단을 제시하고자 하는” 신인론Théandr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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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Page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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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역사 등이 그가 생각했던 제목들이다. 프랑수아가 이 작품들
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분명히 그것들은 새
롭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의 영성을 조명했을 것이다. 그러
나 제목만 봐도 그 가르침은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의 내
용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계획에 대한 관심은 계획 자체를 넘어
선다. 왕년 샤블레의 선교사요, 그토록 강론과 고해성사를 사
랑했고 하느님과 교회를 섬기려 자신을 소비하고 완전히 소진
한 주교의 입장에서 밝힌 “이곳에서 묵주와 펜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를 섬기겠습니다.”라는 이 명제는 그의 영적 지향
을 나타내며, 영혼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마치 꼭 거쳐
야 할 한 단계 같은 선택임을 의미한다. 프랑수아의 건강은 악
화하고 있었다. 물론 과중한 일과 여행이 그의 몸과 마음을 더
욱 지치게 했지만, 더 심한 것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겨
진 힘을 하느님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 더 잘 쓰는 길은 기도하
는 것과 (수천 명에게 배포된 소책자 덕분에 형성된) 필로테아
와 테오티모를 찾아가 그들이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바른길”
을 빠른 속도로 전진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비뇽 여행과 선종
“그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3세와 사브와 공작은 아비뇽
Avignon에서 만남을 갖기로 했고(루이 13세가 남방에서 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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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Page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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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망 드 로앙Benjamin de Rohan의 위그노 반란을 진압한 직후) 복
자 프랑수아는 가능한 한 빨리 그리로 가라는 특급 명령을 받
았다.” 주교의 측근들은 큰 불안에 휩싸였다. “이 여행이 주교
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
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에게 “허약한 건강 상태”를 공
작에게 알리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뭘 원하십니까, 하
느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우리는 가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프랑수아 드 살은 하느님과 공작에게 순명하기 위해 죽을
것이다. “죽을 것을 예상하면서 모든 일을 준비하고 엄숙한
유언장을 작성하여 서명하고 적정하게 봉인했다. … 그는 즉
시 그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했다. 모든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자기 죽음을 명시적으로 예언했다.”
프랑수아는 이 이별이 진짜 이별임을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아 모두에게 충격을 줬으나, 그 홀로 놀라운 평온을 유지했
다. 11월 8일 아침에 그는 상트 소스Sainte Source 오라토리오에
서 미사를 집전했다. “나의 사랑하는 딸들 -그는 최고의 명령
처럼 그들에게 말했다- 하느님만이 여러분의 유일한 소망이
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그
분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열망을 지니십시오.”
드디어 출발이다. 프랑수아가 말을 타고 있는 사이 주교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밀 몇 섬을 나눠줬다. 사실 그 당
시 그 지역에는 큰 기근이 있었다.
11월 14일, 프랑수아는 아비뇽에 도착했다. 도시는 약 열
흘 동안 축제가 이어지며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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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Page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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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11월 25일 금요일에 왕과 공작은 아비뇽을 떠나 함께 리옹
으로 올라갔다. 리옹에서 프랑수아는 벨르쿠르Bellecour에 있는
딸들의 수녀원으로 거처를 요청했다. “거룩한 청빈에 대한 사
랑 때문에 그는 방문수녀원 내 정원사의 집, 자신을 만나기 위
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더욱 쉽게 맞을 수 있다고 고집하며 수
녀들의 고해 신부가 살던 곳인, 집이라기보다는 오두막이라
고 해야 맞을 그곳을 선택했다. 게다가 그곳에서는 아주 번거
롭지 않으면서 더 빨리 사랑하는 딸들에게 영적 봉사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곧바로 작은 오두막집을 찾아 줄을 이은 방문자들
은 공식 행사와 강론으로 지친 그의 노쇠한 육신에 무게를 더
했다. “나의 하느님, -1622년 12월 19일 프랑수아가 한 여성
에게 이렇게 썼다- 궁정과 그곳을 지배하는 찬사에서 벗어나
십자가 아래 거룩한 고독 속에서 조용히 사는 사람들은 얼마
나 행복합니까!”
그러나 프랑수아는 자신의 영적 건물에 마지막 손질을 가
하고 행실과 모범을 통해 ‘거룩한 사랑’의 가장 중요한 요구를
우리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영적 지도자의 면모를 드러
낸 프랑수아 드 살의 마지막 행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성에 대해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이 왜곡될 것이다. “언
제나 -1616년 5월, 샹탈 원장수녀에게 편지를 썼다- 혈통, 편
의, 예의, 호응, 동정심, 감사 등과 관련된 타고난 사랑이 언
제 정화되고 하느님 뜻을 위한 가장 순수한 사랑의 완벽한 순
명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요?”
242

25.5 Page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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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이제 샹탈 수녀의 시간이 왔다. “그녀가 자기 내면에 대
해 그분에게 말하지 못한 지 3년 반이 지났습니다.” 프랑수
아가 안시에서 아비뇽으로 내려갔을 때인 11월 10일, 그녀
는 리옹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버지와 딸이 서로 만
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복자 프랑수아는 그녀에게 몽페랑
Montferrand과 생테티엔에 있는 우리 수도원들을 방문하도
록 명령하셨습니다.”
12월 12일 리옹으로 돌아온 샹탈 수녀는 프랑수아를 만나
려고 했다. 더 많은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해 둘 다 “다른 일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유해함(안시, 방문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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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Page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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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에 대한 관심을 멀리했다.” “원장수녀님, -프랑수아가 말했
다- 우리는 몇 시간의 자유시간이 있습니다. 우리 중 누가 먼
저 말을 시작할까요?” “열렬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을 드
러내고 싶었던 우리의 지당한 어머니(쇼지 수녀가 자기 기억
을 더듬으며 말한다)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저요, 주교님 제
발요. 주교님께서 제 마음은 다시 살펴보아 주셔야 합니다.’
… ‘수녀님, -프랑수아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개인적인 사안
에 대해서는 안시에서 말합시다. 여기서는 우리 수도회에 대
한 일을 끝냅시다.’” 샹탈 원장수녀는 자신의 영혼에 관한 것
을 접고 “수도회의 일에 관해 표시한 것을 펼쳤습니다.” 그들
은 “4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다음 프랑수아는 샹
탈 원장수녀에게 그르노블Grenoble, 발롱스Valence, 벨리Belley,
샹베리의 수도원을 방문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그녀를 축복
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영적 우정의 완성은 영혼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온전히 기할 수 있도록 자신을 포기하는 데 있다. 여기에 “거
룩한 사랑의 삶”이라는 종착점이 있다.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지팡이에 영혼을 의지하며 한 단계 한 단계 지향한 목적지다.
이렇게 이 영혼은 “거룩한 사랑의 자유”에 완전히 도달한다.
“성탄절 자정에 그는 방문수녀회의 사랑하는 딸들 앞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다정함이 가득한 권면을 했다. 새벽에는 피
에몬테 왕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줬고 그들 앞에서 성탄 새벽
미사를 집전했다.” 11시에 세 번째 미사를 드렸다. “점심 후
에 방문수녀회 두 딸의 착복식을 하며 매우 거룩한 강론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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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영광(안시, 방문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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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셨습니다.” 이튿날 “그분은 참으로 많고 다양한 일을 하셨습
니다.”
성 요한 복음사가 축일인 12월 27일 화요일 “오후 2시경
그분은 혼절하셨습니다.” 그의 수발을 들던 이들이 달려가 부
축하며 침대에 눕혔다. 그 당시 사용되던 외과적 응급처치로
매우 고통스러웠던 긴 하루의 섬망 끝에 “거룩한 주교는 그의
지극히 순결한 영혼을 하느님께 감미롭고 평온하게 바치셨습
니다.” 때는 12월 28일, 죄없는아기순교자들 축일 저녁 8시였
다. 병마와 섬망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프랑수아는 이 두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예수님! 마리아님!
프랑수아 드 살은 주교로 축성될 당시 밀라노의 주교인 카
를로 보로메오를 모델로 삼았다. 그의 소원은 이뤄졌다. “당
대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그는 “또 다른 성 카를로”가 되었
다. 많은 사람은 감히 한술 더 떠서, 그를 “인간-하느님의 형
상으로 불러야 한다.”고 프랑스의 기사단장 같은 이는 어느
날 왕의 어전회의에서 선언했다. 인간-하느님의 형상? 그렇
다, 마음을 통해 실현했다. 프랑수아 드 살은 예수 그리스도
의 마음과 비슷한 마음을 가졌다.
1619년 또는 1620년의 어느 날 그는 샹탈 원장수녀에게 다
음과 같은 귀중한 고백을 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정중하
게 그리고 다정하게,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더 사랑스럽게
사랑하는 영혼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마음이 그렇게 하
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큰 부드러움은 마음
을 흐리게 하고 어지럽게 하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묵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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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순수 사랑을 향해
방해하고 완전한 포기와 자기애의 죽음을 막기 때문에, 나는
독립적이고 활기차며 여성스럽지 않은 영혼을 사랑합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원장수녀님이 아시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내가 이런 감
정을 느낄 수 있을까요? 네, 사실 나는 그것들을 느낍니다. 그
러나 내가 하느님과 하느님을 위한 모든 영혼 외에는 아무것
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함께
다뤘는지 놀랍습니다.”
“가장 감정적”인 동시에 완벽하게 “무관심”하고 가장 자
유롭다. 얼마나 큰 자신감인가! 여기서 프랑수아는 자신이 어
떤 이상을 추구했고 어떻게 영혼 돌보기를 했는지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라고 덧붙인다. 그
렇다. 그러한 영적 상태는 은총의 신비인 동시에 인간 마음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사랑의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벗어버리며”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철저하게 포기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
이 없다. 결국 이것이 제네바의 주교가 그의 생애와 업적을 통
해 우리에게 밝혀준 비밀이다.
프랑수아 드 살에게 하느님이란 진정 “사람 마음의 하느
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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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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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소개
앙드레 라비에 신부
앙드레 라비에André Ravier 신부(1905-1999)가 쓴 이 성 프랑수
아 드 살 전기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프랑수아 드 살, 학
1)
자이자 성인」 이 나오기 약 20년 전에 출판됐다. 라비에가 사
망한 후 장 생클레어Jean Sainclair는 그의 비망록을 소개하면서
2)
그 삶의 어떤 측면을 조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 그는 교
사, 작가, 교육자였을 뿐 아니라 프랑스 예수회 대학 총장이자
관구장으로서 관리자의 역할도 수행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
만 그는 하느님을 만났고, 다른 많은 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경
험의 가능성을 제공하려 노력했다. 그의 수많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6월 3일 프랑스 쥐라Giura의 폴리니Poligny에서 태
어난 젊은 앙드레 라비에는 돌Dole의 노트르담 드 몽 롤랑Notre
Dame de Mont Roland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철학 학사학위를 받
은 후(1922) 그는 리옹 언덕의 유명한 푸르비에르Fourvière
1) André Ravier, Un sage et un saint, François de Sales, Paris, Nouvelle Cité 1985
2) Compagnie. Courrier de la Province de France, n. 333 (décembre 1999), pp. 191-
1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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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리아 성지에 있는 예수회 수련소에 들어갔다. 리옹 가톨릭대
학교에서 철학 과정을 마친 후 그르노블Grenoble에서 쥘 라슐
Jules Lachelier의 종교철학에서 하느님의 형상에 관한 논문으
로 문학과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37년에 그는 사제로
서품됐다.
군 복무 후, 그는 이저르Yzeure 기숙 학교에서 그리스어, 철
학 및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여기에서 그는 두 명의 동료 예수
회원들과 함께 젊은이들의 영적 보살핌과 더불어 전인적, 인
간적, 종교적, 지적 및 사회적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생회를
설립했다. 여가를 이용해 그는 소르본의 École des hautes études
서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에밀Émile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그는 프랑스 군대의 소위로 징집
되었다. 그는 전쟁의 격동기 초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폭격으로 논문의 거의 모든 자료를 잃었다. 그는 남아 있던 메
모와 단편을 기반으로 텍스트를 다시 작성해야 했다. 1941년
9월, 논문발표 후, 라비에는 리옹으로 돌아갔다. 8년 동안 그
Collège Sainte-Hélène의 학장을, 그리고 그곳의 교장이 되
어 자신의 교육학 공부를 잘 활용했다.
1951년에 그는 프랑스 예수회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비
오 12세의 회칙 「인류의 구원자Humani Generis」가 반포되고 ‘푸
르비에르 사건’이 발생한 직후라 매우 비관적인 순간이었다.
푸르비에르는 프랑스 예수회 신학대학원의 소재지로 그곳에
서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앙리 드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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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Henri de Lubac 등과 같은 매우 저명한 신학자들이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적 가르침은 역사-비판적 방법론
으로 지나치게 치우쳤으며 현세 문화에 너무 얽매였다는 평가
를 받았다. 로마는 강력한 검열로 이에 개입했다. 관구장으로
서 라비에 신부는 학자적 사형 선고를 받은 형제들을 세심하
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들을 이해하고 격려하려 노력했
다. 이는 그가 미국으로 망명한 샤르댕과 나눈 서신에 의해 입
증된다. 당시 드 샤르댕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리옹의
관구장 앙드레 라비에 신부로부터 정말 친절하고 이해심 깊
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장상이 나에게 자유롭고 건설적인 대
화를 요청한 것은 그가 처음입니다. … 이러한 제스처가 어떤
칙령보다 나를 수도회와 더 넓게는 교회에 결속시키는 데 가
3)
치가 있으며,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합니다.”
관구장 임기가 끝났을 때 라비에는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장기인 작가라는 직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아르스의 본
당신부」와 「베르나데트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 그리고 로마
를 방문하여 예수회의 문서고에 몰두한 후 로욜라의 성 이냐
시오 영성에 관한 대중적인 책을 여러 권 썼다. 이 기간에 그
는 「성 프랑수아 드 살」, 「클로드 드 라 콜롬비에르Claudio de la
Colombiere」, 「성 브루노 카루투시안」 및 「성 콜레트 드 코르비
Saint Colette de Corbie」 등을 점차 썼다.
3) Pierre Teilhard de Chardin, Lettres intimes à Auguste Valensin, Bruno de So-
lages, Henri de Lubac, André Ravier 1919-1955. Introduction et notes par Henri
de Lubac, Paris, Aubier Montaigne 1974, p. 418 in n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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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1962년과 1968년 사이에 그는 파리의 생 루이 드 곤자그
Saint Louis de Gonzague 대학의 학장이었다. 그는 이때를 두고 “훌
륭하지만 동시에 어려운 6년”이라고 썼다. 이 시기는 논쟁과
투쟁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가톨릭 대학의 정체성과 사회 문
화적 변화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확
실히 1968년은 그에게 시험의 해였다.
임무를 마치고 그는 파리에서 40km 떨어진 숲이 우거진
지역에 위치한 샹틸리Chantilly의 아름다운 퐁텐Les Fontaines
으로 옮겼다. 그곳은 라비에 신부에게 이상적인 장소였다. 그
는 넓은 도서관과 지적 작업에 필요한 평온함을 마음대로 즐
길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전업 작가가 되었다. 22년 동안
영적, 역사적 성격을 지닌 약 100권의 책, 기사 및 다양한 종
류의 기고문을 출판했다.
작가라는 역할은 단순히 두 번째 직업이나 새로운 직업이
아니었다. 그의 핏속에는 글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비망
록에서 읽은 것처럼 그는 이저르 기숙학교에서 학장으로 재
직하고 관구장으로 있을 때부터 주말의 여가를 모두 글쓰기
에 바쳤다. 그는 여러 수도회의 단행본을 썼다. 그는 문서고
뒤지기를 좋아했다. 그 창립자들의 역사를 재구성할 뿐 아니
라, 그들의 영성과 카리스마적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
게 했다. 그가 책을 쓰는 데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그
는 장소와 사물의 이미지, 사진과 그림, 문서로 내용을 설명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글은 자연스럽게 역사와 영성을 결
합했다. 그래서 그는 성 브루노, 성 프랑수아 드 살, 베르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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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트 수비루,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클로드 드 라 콜롬비에르,
콜레트 드 코르비 및 아르스의 본당 신부 등에 대해 썼다. 그
는 또한 강의 모음집, 일상생활의 영성에 관한 책, 가톨릭 교
육 지침, 교회와 예술 작품에 대한 설명, 침묵의 경험에 대한
묵상집, 다양한 형태의 기도서, 교회 및 루르드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이 책들은 영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글은 그가 죽은 뒤에도 출판되
4)
고 재출판되었다.
말년에 이르러 그의 건강은 몇 년 동안 서서히 악화되었
다. 정신은 맑았지만 걷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는 1994
년에 파리의 옛 시가지에 있는 예수회 요양원으로 옮겨 그곳
에서 계속해서 새 책을 쓰거나 이미 쓴 것들을 개정했다.
글쓰기는 사목활동을 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
하고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그의 방법이었다. 마지막 글 중 하
나에서 그는 자신의 많은 작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자 했던 것, 즉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께 가까
이 갈 수 있는지를 요약한 하느님의 임재와 하느님께 현존이
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당신 자
신을 ‘나는 있는 이다.’라고 정의하시는 그분의 뭔가와 접할
수 있는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분 임재의 ​몇​ 가
지 징후를 인지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하느님은 끊임없이 인
4) 예를 들어: Mystique et pain quotidien, Paris, Parole et Silence 2002; Saint Bru-
no. Le Chartreux, Paris, Lethielleux 32003; En retraite chez soi, Paris, Parole et
Silenc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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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당신을 만나라고 부르시지만, 인
5)
간이 당신을 찾고 만나러 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이다.”
글의 첫 단락에는 개인적이고 심오하며 생생한 신앙 고백
이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언
제나 어디에나 계신다. 모든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이다. 하느님은 자기 모상과 모양대로 만드신 인간 안에 언제
어디서나 계신다. 그것은 역사 전체에 걸쳐 드러났으며 때가
차자 육화라는 계시의 절정으로 표현됐다. 당신의 독생자 안
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는 하느님
을 만나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 그는 인간이 왜 하느님의 임재에 대해 그
렇게 둔감한 상태로 남아 있는지 궁금해 한다. 왜 우리는 듣
지도 보지도 못합니까? 여기에 그의 글을 단순한 신학적 성
찰 이상으로 만드는 매우 개인적인 접촉이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통한 연구와 명상의 결과이다. 그것은 그의 생각과 내
적 삶의 경험에 대한 매우 잘 짜인 종합이다. 그는 독자의 손
을 잡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보여주
며 효과적인 영적 여정을 위한 조언, 그의 위대한 모델이자 탁
월한 원천인 성 프랑수아 드 살에게서 받은 영감의 조언을 제
공한다.
라비에는 하느님의 면전에 자신을 두는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행위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우
5) André Ravier, Présence de Dieu, présence à Dieu, in “Revue des sciences reli-
gieuses » 70 (1996) n. 3, p.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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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리를 보고 계시며 들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를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성부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흐름
에 끊임없이 푹 잠겨 있다. 그곳에서,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프랑수아 드 살이 「신애론」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하느님의 현
존을 깊이 체험할 수 있다.
신자는 하느님 면전에 자신을 두는 것에서 점차 하느님의
현존을 실천으로 살도록 옮겨가야 한다. 이것은 쉽지 않은 과
제라고 라비에는 말한다. 우리가 산만하고 약하기 때문에 우
리 인간 본성이 이를 허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
느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계시며 우리가 누구인지 알
고 계시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엄청나게 사랑
하신다. 그러니까 성 프랑수아 드 살이 가르치는 것처럼, 자
신이 아닌 것이 되기를 꿈꾸지 말고 자기 자신이 되도록 희망
하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
시기에 모든 것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는 뜻이다.
라비에는 다시 한 번 제네바 주교의 말을 인용한다. “사랑
에 빠지는 황홀경의 절정은 자신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며, 자기 뜻에서 만족을 찾지 않고 하
느님의 뜻에서 만족을 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
다 함은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완전히 잃는 것이다. 이것
이 우리 삶의 이유이다. 하느님 안에서 포기, 믿는 이와 창조
주 사이의 완전한 일치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표일 뿐 아
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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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이것이 앙드레 라비에가 쓴 작품의 핵심이자 심장이고 영
혼이다.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삶에서 필요한 유일한 변환,
즉 하느님 안에서 포기와 하느님과 일치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한다. 그의 작품, 책, 글들을 읽고 또다시 읽고 묵상한 후 도달
한 결론은 그가 연구한 성인들이 제시한 길을 그 스스로 가장
먼저 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부
추기는 것을 느낀다.
Wim Collin, s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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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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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랑수아 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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