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스코, 온전한 사람 온전한 성인 Part 3

2 핵심적인 차원들


주의 : 보스꼬의 성덕에서 두드러지는 면은 물론 무수하다.

그의 인격의 다양성 때문이다. 이제 중에서 개만을 골라

살펴보자.


1 : da mihi animas 신비 신학


소돔의 왕이 아브라함에게 da mihi animas, caetera tolle: 나에게 사람들을 주고 너는 물건들을 가져라 고 말하고, 보스꼬가 오랜 전통에서 얻었던 , 주님, 저에게 영혼을 주시고, 모든 것은 가져가십시오.라고 했던 말들이 귓전에 메아리 친다.

이러한 번역에서 관건이 되는 단어는 animas. 이는 수세기 전부터 그리스도교계에서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나타낸 표현이다. 시간 안에서, 구원과 영원한 멸망 사이에서, 죄와 은총 사이에서,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에서, 하느님과 마귀 사이에서 살지만 불멸하는 그것이다.(스텔라)

보스꼬는 이렇게 썼다 : 영혼을 구한다면 만사가 좋고 항상 즐거우리라. 그러나 영혼에 잘못이 있으면 영혼과 육신, 하느님과 천국을 함께 잃고 영원히 단죄 받으리라.

오늘날에는 인간의 최종 운명과 세상 마지막에 관한 견해가 전보다 포괄적이 되었다. 보스꼬는 그의 시대의 언어로, 사람들이 바라보아야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며, 인간은 땅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의 희망에 대한 증인임을 누구에게나 되풀이 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말을 믿어도 좋은 것이다. 그의 가장 깊은 열망과 간절한 기도는 영혼들을 구하여 하느님 나라에 확실히 들어가게 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사제, 온전히 사제


Da mihi animas 그의 모토요 집념이었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그의 신비학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구원의 신비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도록 불리운 그의 사제직의 당면 과제이기도 했다.

사제로서가 아닌 보스꼬는 생각 수가 없다.

실제로 그의 청소년기에는 사제직을 향한 명백하고 꾸준한 준비 이외에 무엇이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 어서 사제가 되자. 그리하여 청소년 사이에 끼어 놀면서 그들을 돕자. 그리고 그의 일생은 이러한 소원을 풀어나간 외에 무엇이라 있을까?

그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현재의 중재자이신 사제 그리스도를 가능한 완전하게 본받고 싶었고 성사적으로 가장 중재해 주고 싶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빈틈 없는 사제적 책임감이 결코 허물어져 일이 없다.

언제나 사제였고, 온전히 사제였고, 사제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제는 언제나 사제이다. 그의 말은 언제나 사제다워야 한다. 사제가 되었으면 성인 사제가 되어야 한다.

사제라는 말은, 1866 12월에 피렌제에서 있었던 베테노 리카솔리 정관과의 역사적인 대화의 머리에 7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장관님, 보스꼬는 제대에서도 사제요, 고백소 안에서도 사제이며, 그의 아이들 사이에서도 사제, 도리노에서처럼 피렌제에서도 사제, 가난한 사람의 집에서도 사제, 왕과 장관들의 궁전에서도 사제입니다.

당시 사제라는 개념에 자기의 성당이나 자기 울타리 안에만 갇혀있는 폐쇄적인 면이 짙었던 때에, 보스꼬는 선구자적이었으니, 자신의 사명에 온전히 몸을 바친 사제, 성령의 역사적 숨결에 마음을 사제, 사회와 이웃에게로 열린 사제, 모든 이에게, 그러나 특히 청소년들과 미소한 자들에게 봉사하려는 사제임을 행동으로 보였다. 그에게는 영적 생활과 사목 생활이 하나였었다.

사제는 그이 사제직 실천 중에서가 아니면 성화될 수도, 구원될 수도 없다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가 자주 말한 다음과 같은 강력한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사제가 얻는 것은 영혼들이어야 하고 그와 다른 이득은 없어야 한다. 사제는 지옥에 가거나 천당에 가거나 혼자 가지 않고, 그의 의하여 멸망 당했거나 구원받은 영혼들을 데리고 함께 간다.

사제의 말은 언제나 영원한 생명의 소금이어야 하고 어느 곳에서, 누구와 이야기 하거나 그래야 한다. 사제에게 접근한 사람은 누구나 영혼에 유익한 어떤 진리를 받고 돌아가야 한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사 이외의 어떤 다른 관심사도 있어서는 된다.

성부의 계시자요 흠승자이신,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사는, 요약하면, 하느님의 영광, 인간들의 구원이다. 그리고 이들은 정확하게 보스꼬가 그의 생애를 통하여 추구하던 최상의 관심사들이다. 영혼들을 구원하고 성화시키는 일은 그가 진심에서 바라던 소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 4 4, 22 살레시오 수도회 총회에서 이점을 상기 시키셨다: 보스꼬 교육학에는 지극히 종말론적론 가치와 전망이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인 말씀하셨듯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최종적인 구원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자기 영혼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도록 협력하는 보스꼬가 아이들에게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나, 하위 층이나 고위층은 불문하고 항상 되풀이 하던 말씀이다. 영혼의 구원을 부탁한다.

18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발간이 되지 않는 회칙 초안 보면 요한 복음의 유명한 구절이 있다. Ut filios Dei qui erant dispersei congre garet in unum 그리고 이를 해설한다. 요한 복음의 말씀은 거룩하신 구세주께서 하늘에서 땅에 오시어 지상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을 함께 모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나는 말씀을 그대로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 적용할 있다고 본다.

하느님의 흩어진 자녀들을 모아 구원하고자 오신 착한 목자 예수님을 생각할 , 보스꼬는 시대의 청소년, 특히 가장 가나하고 버림 받아 방황하는, 그래서 멸망의 위험이 가장 그러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하여 바치고 싶었다.

영혼들, 모든 영혼들, 그러나 특히 하느님께서 맡겨 주시는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생각은 진심으로 보스꼬의 심중을 가득 채웠다. 이는 그의 내적 활동과, 하느님과의 대화와 자신의 수련에서처럼 가난하고 버림 받은 청소년의 구원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만큼 몰두한 그의 사도활동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고 가장 뿌리 깊은 것이었다.(스텔라) 도메니코 사비오가 그의 방에서 모토가 Da mihi animas cactera tolle: 주여, 내게 영혼을 주시고 외에 다른 것은 가져 가소서였으니, 이는 그이 서품 피정의 결심인 영혼을 구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면, 무엇에서나 항상 고통 당하고, 일하고, 자신을 금할 에서 나온 것이다.

과연 그의 심장은 Da mihi animas 열의로 뛰었다.(비가노)


집념


이것이 평생 그의 집념이었으니 이것으로 살고 이것을 위하여 살았다. 교육자, 사목자, 교리교사, 저술자, 창립자로서의 그의 삶이나, 그가 자주 하던 확신에 다음의 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 아이들이 오라또리오에 온다. 그들의 가족과 보호자들은 공부를 시키기 위하여 보낸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그들의 영혼을 보살펴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발견시키라고 여기에 보내신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수단으로 알아야 하며, 우리의 최상 목표는 그들을 선량하게 만들어 영원히 구원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술은 중요하다. 그러니 예술 중의 예술,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영혼을 하느님께 얻어 드리는 일에 도움이 되면 아무리 돈이 들고, 수고스럽고, 귀찮고, 힘이 들어도 아깝지 않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영혼들을 구할 있다면, 가운데 우리들의 영혼도 구할 있다면, 십자가도 좋고 온갖 박해도 좋습니다. 발도꼬의 기술공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 대한 나의 정은 너희의 영혼을 구하려는 나의 소원에서 나온 것이다. 너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중한 피로 얻은 영혼이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는데 이는 영원한 구원에 너희들을 데리고 가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임종의 침상에서도, 혼수 상태로 머리를 흔들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뛰어, 빨리 뛰어라. 어서 아이들을 구해야지 성모님, 사람들을 도와 주소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의 익을 위하여 것만큼 영혼을 위하여 열성을 쏟았다면, 틀림없이 영혼을 구했을 같다. 예술가가 느끼는 섬광을 인간적인 표현으로 나타내지지 않을 괴로워 하듯이 보스꼬는 그가 살고 느끼는 대로의 영혼 구원에 대한 절박성을 설득 시킬 없을 탄식했다. ! 내가 느끼는 것을 너희들에게 설명할 있다면! 문제가 너무 중요하고 숭고하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는다.

그가 애써 일하고 학교와 작업장들을 세우며, 남녀 설레시오 수도회와 협력자회를 창립하는 모두는 오로지 이러한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였다.

오라또리오의 유일한 목표는 영혼 구원이다. 우리 수도회의 목적은, 회원들의 차원에서 , 그들끼리 정신적으로 하나되어 하느님의 보다 영광과 영혼들의 건강을 위하여 일하자는 초대라 하겠다. 이상 고귀한 목적은 생각할 없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이는 모든 살레시오 회원의 끊임없는 호흡 되어야 했다. 루아 신부는 시성 조사 과정에서 확인했다. 청소년 구원을 향해서가 아니면 걸음을 안했고 말을 안했고 사업 시작을 하지 않았다. 남들이야 재산을 모으고, 쾌락을 찾고 명예를 좇으라 했다. 보스꼬는 진실로 심중에 영혼의 밖에 없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로 Da mihi animas, caetera tolle 말했다. 보스꼬와 오랜 동안을 친숙하게 알베라 신부도 이렇게 증언했다: 그의 일생 신념은 자신을 완전히 바쳐 영혼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었다영혼 구원그것은 그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 있었다.

비오 11세의 지극히 소중한 증언도 있다. 1934 4 3, 베드로 성전에서 살레시오 가족과의 장엄 알현 하신 말씀으로, 시성의 경사와 구원의 성년의 가치 사이의 연관성을 들어 강조하셨다. 보스꼬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오고 여러분에게 가르친 그대로 그리스도교인 다운 삶을 살아라 그러나 오늘 보스꼬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후예가 되는 여러분에게, 특별한 말씀을 하시는 같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방의 첫째 비결을 가르치신다! 이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지배적인 생각이요, 감정이었다 있으리라. 그는 이를 Da mihi animas 라는 표어로 보여 주었다.

그의 사랑은 그의 묵상의 소신이다. 영혼을 자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 하느님께서 생각하시어 일하시고 흘리시고 죽으신 그러한 영혼을 꾸준히 묵상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거기서 보스꼬는 영혼의 비할 없이 높고 귀한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거기서 그의 열망, 그의 기도, Da mihi animas! 나온 것이다. 이는 구세주에 대한 그의 사랑의 표현으로 거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구세주에 대한 사랑이 되고, 구세주에 대한 사랑은 구원된 영혼들, 그의 피로 얻은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되었다.

수도회들은 각자 그들의 카리스마에 맞는 영적 상황의 모토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Ora et labora(기도하고 일하라) 라는 베네딕트회의 모토가 있고 contemplari et contemplate aliis tradere(관상하여 관상한 것을 남에게 전하라)라는 도메니꼬회의 모토가 있으며, Ad majorem Dei gloriam et ad salutem aniutem animarum(하느님의 보다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에)라는 예수회의 모토가 있다.

살레시오회 총장 에지디오 비가노 신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보스꼬 자신이 선택하신 말씀인 미히 아니마스 체떼라 똘레라는 말보다 살레시오적 정신을 말해주는 요약된 표현이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는 무한하신 사랑이신 성자와 성령의 사명 안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난 성삼위의 당신 삶의 신비에 들게 하시는 하느님과의 뜨거운 일치를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모토에서 벗어나는 , 친절이라는 특징을 지닌, 청소년을 향한 총애의 사목적 사랑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이면 보스꼬의 성덕의 면모를 다시 살아내지 못한다.

구해야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지극했다 하여, 우리 성인이 인간을 오로지 영혼으로 알았거나, 육체와 무관한 영혼을 생각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지 않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자유롭고 불면하는 영혼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숨결이라면, 육신도 하나의 은혜인 것이다. 그가 성모성월 책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보는 좋은 자질을 갖춘 그러한 육신을 창조하셨다. 보스꼬는 항상 죄로 상처 입은 이후 육신이 영혼에게 끼치는 위험을 경계하면서도 육신이 지닌 훌륭한 가치들을 칭찬했다. 청소년 지도서에서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 육신을 너무 엄하게 다루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 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즐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영혼 구원에 관하여 때에, 당시의 이원론적 개념과는 멀리, 구체적인 소년을 두고 말했다. 영혼만이 아닌 소년 전체의 구언, 소년 구원, 그리하여 그들을 통하여, 사회 전체의 구언을 희망했다.

보스꼬는 하늘 나라를 위해 있으나 땅에서 마쳐야 하는 사명도 있는 구체적인 소년을 생각했다.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으로서, 하늘 나라 고향을 향하여 순례 중인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이지만, 도한 지상 도시의 시민으로서 자라나야 하고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학문적으로 성숙하고 사회생활에 점차적으로 참여도 해야 하는 모든 요구를 지닌 그런 구체적인 상황이 소년을 생각했다(콜리).

사제- 교육자- 사목 자로서의 보스꼬의 노고는 구체적으로 세가지를 목표로 했다.

첫째 : 가장 가난하고 헤매는 소년들의 물질적인 우선적 필요를 채워 주기, 그러하여 그들에게 의식주 제공 해주기, 어떤 기술이나 직업으로 정직하게 밥벌이를 있게 하기, 내가 방황하고 위태로운 아이들에게 조각을 거부하면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막대한 위험에 놓은 샘이다 라고 말게릿다의 쏠라로 공작에게 썼다.

둘째 : 인내로운 교육활동으로, 그들을 도와 자기 자신들이 되게 하기. 인간적, 사회적 차원에서 씩씩하게 자라나게 하여 정직한 시민 되게 하기. 교육자로서의 소신을 가진 사람이면 모든 귀찮은 일과 수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해야 한다. 제자의 사회적, 도덕적, 학문적인 교육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역설했다.

셋째 : 그리스도교적으로 교육하기. 신념 있게 확신에 튼튼한 신앙 생활을 있도록 청소년들을 지도하기. 신앙 없이는 청소년 교육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말했다. 은총의 생활로, 그리스도와의 우정 안에 살도록 교육하는 일은 청소년을 진정한 성덕의 산정으로 오르게 했다. 이미 회고해 바이나, 보스꼬는 성덕을 교육의 현장에로 끌어들인 지대한 공이 있다. 그리스도교적 교육학이 청소년 성덕의 원천이 되도록 성숙시킨 공이다(비가노). 교회 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그의 교육법의 결과로 도메니꼬 사비오라는 소년이 증거 자로서 시성이 되었다.

브라이도가 적절하게 지적한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보스꼬의 교육활동에서 이루어졌던 세가지 목표는 실제로, 자체 안에 다름 아닌 개인적 지상 조건들을 포함한 유일한 종교적, 도덕적, 초성적 목표였다. Da mihi animas 신비신학에는 인간적 증진과 초성적 증진이 이렇게 불가분적으로 연결 되어 있다. 이러한 불가분성은 오늘날 공의회에서도 말하고 있다: 교회는 인간의 생활 전체에 관여할 의무가 있으니, 하늘 나라 성소와 유관하기에 지상 생활에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Gaudium et spes, 서론)


2 :


일이 하는 주제의 중요성은 시대의 문학 작품들이 극히 찬양하고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이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일은 어쨌든 오늘날의 사회와 문화에서 진정 중요한 비중을 지니고 있다. 일은 인간이 세상에서 해야 사명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일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화 하여 인간의 필요에 적절하게 만든다.

최근에 일의 신학 대두 되고 있다. 신학은 창보와 구속이라는 신비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그리고 이를 구원하시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바탕으로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 에서 일의 영성에 관한 개요를 말씀하시면서 일의 가치와 동시에 이에 관한 모든 우상적인 견해들도 깨우쳐 주셨다. 사실상 일은 자체가 목표가 아니며 절대성이 없다. 그러나 일이 지상에서 인간이 공동 창조자,공동 구속자 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의 자체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동기와 마음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일에 담겨 있는 사랑의 정도에 의하여 결정된다(비가노).

보스꼬는 일을 그의 가치로 삼았다. 일하면서 많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성화 시켰다.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간단 없는 활동


이탈리아의 아카데미 회원인 프란치스꼬 오레스타노는, 보스꼬에 관하여 기록하면서, 그의 인품과 강한 의지를 강조한 다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스꼬 개인과 그의 사업의 특성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보스꼬의 독특성은 여기에 있지 않다. 그가 새로운 시대에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이 일이라는 것을 알아내어, 일과 함께 교육하는 위대한 법칙을 발견해 냈다는 것이 그의 독특성이다. 일을 교육적 도구로 삼은 보스꼬는 일이 여러 의미와 기회에서 인간을 만들어 내는 매우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일이 정신을 귀하게 만들어 주는 탁월한 수단임을 알았다: 그는 편태와 보속을 권하지 않겠다. 다만 , , 일을 하라. 그리고 임종의 침상에서도,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이점을 당부했으니, 그는 그들이 고행에 열심이기 보다, 현대 생활의 필요에 밀접하게 관련된 사회적 군대가 되어 주기를 원했다.

그는 일을 다만 교육적인 도구로서뿐 아니라 삶의 내용으로 삼았다. 가장 평범한 일에 까지도 전적인 품위를 인정 했으며, 그래서 모든 일을 우수하게 내려 노력했고 따라서 고귀하게 만들고자 힘썼다. 그는 결코 일을 재산을 위한 수단으로 알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바르게 판단 하신 대로 그는 부자 되는 일을 불행으로 알았다. 일은 오로지 삶을 가득하게 하고, 삶을 건강하게 하고, 삶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인용구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니, 그의 교육학과 그의 성덕의 아마 가장 독특한 면을 매우 명쾌하게 지적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을 통하여, 일과 더불어 인간과 그리스도인을 찬양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 조건은 있다. 이라는 말이 보스꼬가 생각한 그런 폭을 지녀야 한다. 때로는 수공작, 때로는 기술적인 , 때로는 직업적인 , 혹은 머리를 쓰는 , 학교 공부, 문화 활동, 사도 활동과 교리 수업, 복음화 활동, 사목적 열성도 되고, 때로는 사제적 활동, 전례 행위, 성사 활동 등이 되고, 각가지 형태의 자선 활동이며, 나라에 대한 의무일 때도 있다. 일이란 자신의 지위에 따르는 의무의 수행을 의미한다.


일의 신비적 계단


사도적, 자선적 사회사업적 차원의 일에서, 보스꼬는 최상의 가치를 발견했다. 사람을 성화시키는 거룩한 힘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일을 하느님께 가기 위한 신비적 계단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일을 기도에서 분리시키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와서 분도 성인의 일과 기도라는 요소를 친히 놀라울 만큼 통합한 성인이 있다면 두말 것이 없이 그는 보스꼬이다(살롯띠 추기경). 그러나 기도는 그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면이 아니다. 그의 외투가 아닌 셈이다. 세상에 보이는 면은 끊임 없는, 사심 없는 일이다. 보스꼬는 지극히 구체적인 성인이다. 다소 익은 듯싶으나 진실하다 하겠다. 생활로 옮겨지지 않는 신심을 그는 믿지 않았다. 행동이 되고 능동적인 활동이 되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게 하지 않는 그런 신심을 그는 믿지 않았다(콜리).


덧붙여서 말한다면, 19세기는 아직도 기도가 신자 생활에서 매우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던 때인지라, 보스꼬는 다른 상황이었다면 강조했을 점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과 활동을 성화 시키는 일이 시급했었다. 그것이 그의 카리스마였다.

그는 말이 행위가 되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행위가 말이 되기를 바랬고 그의 생각이 행동할 손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타고난 성격상 그는 활동가, 성취욕이 강한 사람, 조직의 천재 였다. 일이 그의 2 천성이었다. 그는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내게 일이나 피곤이 짐은커녕 오히려 기쁨이 되어 주는 은혜를 주셨다.

활동 추진력은 당시의 새로운 필요에 의하여 강한 자극을 받았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상황이 너무 비참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자렛 집에서의 노동자, 어린이들과 미소한 자들의 친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계속 일하시는 아버지의 사도이셨던 예수님의 모범은 특히 그에게 강하게 작용했다. 그가 회헌을 나의 아버지께서 항상 일하시니 나도 일합니다(요한 5,17)라고 하시며 활동하고 가르치시기 시작(사도 1.1)하셨다는 예수님을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모델로서 제시했다.

회헌 2조에 이렇게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활동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러니 회원들도 내적 외적인 덕의 실천으로 자신을 완성해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보스꼬는 하느님의 말씀을 곧잘 인용했지만, 행동하고 복음을 전하는 활동적인 범주에 속하는 인용구들이 많고, 기도에 관한 인용구는 적은 편이다. 이상하게 보일 있으나, 그이 서간집에 기도에 관하여서는 성서인용이 거의 없다. 다만 번째 선교사 파견 겨우(마태 9,38): 추수 주인에게 청하여 그이 추수 밭에 일꾼을 보내 달라 하시오"(마태 9,38) 인용했다.

예를 들어, 그가 서한 집의 3천장의 편지에서 보면, 자신이 생활해 왔기에 쉽게 그가 인용해 구절 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라"(2디모 4, 5). "적절한 때이거나 적절하지 않는 때이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2디모4, 2). "하느님의 사업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영화로운 일이다. 그는 실용주의자는 아니기에 신앙의 진리나 교회의 가르침을 항상 모든 위에 두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이론보다 실천을 앞세웠고, 추상보다 구체를, 말보다 실제를 앞세우며 행위 없는 신앙을 믿지 않았고, 생활과 관계가 없는 복음도 믿지 않았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만이 빛으로 나왔다.(요한 3, 21 참조)

그는 말했다: "세상이 물질적이 되었으니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좋은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밀실 방에서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기적을 해도 세상은 거들떠 보지 않으며 이상 믿지도 않는다. 세상은 보고 만져 보고 싶어 한다. 현대 세계는 행적을 보고 싶어 하고 사제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수도자는 없이 게으른 생활를 하는 사람, 사회의 진보에 무용한 존재라 여기던 시대였기 , 그는 그의 수도회를 노동의 대법칙 위에 세우고자 했다. 다소 농담조로 말하기를, 그의 수도회의 수도복은 "걷어 올린 소매로 복장이라 했다."



다른 성인들이 기도에 대하여 하던 칭송의 단언들을 보스꼬 일에 대하여 했다. 카빌리아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그의 회원들에게 말씀의 90퍼센트는 , 절제, 가난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이런 성인도 있다니! '아메리카식 성인이라고나 할까? 하신 말씀이 '기도하자' 아니라 '일하자'였다. 체리아도 이렇게 말한다: " 보스꼬 처럼 일하다 라는 동사를 성인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그의 살레시오 회워들이 명랑하고 가난하고 소탈하고, 특히 일을 아주 많이 하기를 바랬다. '!, !, ! 바로 이것이 사제들의 목표요, 영광이 되어야 것이다. 지치지 말고 ,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할 있겠는가!"

그는 일이 호흡처럼 계속 되기를 원했다. "항상 일할 ." 이것이 모든 살레시오 회원의 목표가 되고 계속적인 소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수고가 문제다." '우리 힘이 넘치는 일을 찾도록 것이니, 있는 모든 것을 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게으름과 한가는 그가 매우 싫어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정도였다: "신부는 때문에 죽거나 아니면 악습 때문에 죽는다."

다른 수도회들에게 고통스러운 보속 이나 단식에 해당되는 것이 보스꼬에게 있어서는 일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당부하는 것은 보속이나 엄격한 규칙이 아니라 , ,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제자들이 많은 일들을 하고 있음을 때면 마음 깊이 기뻐하였다. "내가 지부들을 방문하여 일이 아주 많노라 하는 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된다. 일이 있는 곳에는 마귀가 업다." '일이 힘에 겨울 만큼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놀라지 말지니 수고 일은 물질적인 음식 다음가는 양분이 아닌가 한다."

" 베드로 이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시대가 이렇게 어려운 때는 없었다" 것을 확신 했으나 한탄하고 있기 보다는 일을 재가 하자고 했다. "쉬지 않고 일합시다."

비오 9세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수도원이 기도는 조금 하고 일은 많이 한다면, 기도는 많이 하되 거의 하거나 조금 하는 다른 수도원 보다는 나은 조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수련 자들을 제의 방에 가두어 두지 마십시오. 게을러 지기 때문입니다. , 일을 시키십시오!"

이는 보스꼬가 하던 것이었으니, 이런 점을 다른 수도회들은 염려하고 한심스럽게 생각했으며, 교회 당국에서도 그렇게 우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양성상 "수덕을 중심으로 하는 수련" "전통적인" 방법들을 무시하고 조심성 없이 젊은 화원들을 어수선하고 조숙한 사도 활동에로 내보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보스꼬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33년간 경험은 이러한 꾸준한 일이 도덕성을 없이 보호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분주하게 가장 일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 성덕에 대한 칭찬을 듣고, 덕을 소유하게 되고, 사제가 후에는 성직에서 많은 결실을 내는 것을 보았다."

그의 방식은 그의 신비스러운 꿈들에서도 장점이 강조 되고 있으니, 하늘나라에서 내려 증서처럼 그의 삶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1876년의 란쪼의 꿈에서 그를 인도하던 안내자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일하고 있는 방대한 일터를 보여 주면서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의 문장, 너희들의 모토, 너희들의 특징으로 삼아야 말들이니 읽어 보아라. 일과 절제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번영을 가져 오리라. 너는 말을 설명하고, 되풀이 하고 , 강조 하여라."

살레시오 전통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지녀온 꿈은 "10개의 금강석" 꿈으로,"진정한 살레시오 회원의 모델" 대신하는 어느 인물의 겉옷 위에 빛나고 있는 10가지 덕에 관한 내용이다.

개의 금강석에 쓰여진 말이 "", "절제" 였다. 이들은 살레시오 회원의 자태에 짜임새를 갖추어 주려는 양쪽 어깨에 좌우로 놓여 있는 말이다.

끝으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있는 다음 말들을 생각해 보자. " 살레시오 회원이 영혼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쓰러지면, 우리 수도회는 영광을 이루었다고 말하리라. 수도회 위에는 하늘에서 풍성한 축복이 내릴 것이다."

임종 전에 번씩이나 갈이에로 몬시뇰에게 당부한 말은 이것이다. "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말해다오. , "


증거


그러나 보다는 그의 삶의 증거가 있다. 그의 삶은 비오 11세가 정의한 대로, "진정한, 위대한 순교와 같았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숨이 막할 같은 인상을 막중한 일에 싸인 삶이었다."

혼자서 그렇게 많은 일을 있었고 많은 일을 동시에 해냈다는 일은 믿기가 힘든다. 보스꼬 안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일을 하는 같았다고 까빌리아는 기록한다. "교육자요 교육학자, 고아들의 아버지요 방황하는 아이들을 모으는 , 수도회의 창립자, 도움이신 마리아 신비의 전파자, 세계에 확산된 평신도 협회 창시자, 자선 사업을 이르킨 , 지방 선교를 실행한 , 대중적인 책과 종교적 호교론을 대중 작가, 온건하고 가톨릭적인 출판의 주창자, 신자들의 공장과 출판사의 창시자, 수도자적 신심과 자선의 사람이요 공공 이익을 추구한 사람, 모든 것이 동시에 행해지고 진전 되었으니, 마치 그것만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인 했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겉으로는 드러날 일이 없는 개인 사제 안에서 융화되어 나타났다. 모든 것으로 하여 평정을 잃은 일도 없었고 어떤 야단스러운 몸짓도 하지 않았다. 어떤 위대한 명언들을 끌어 대지도 않았다. "

그러나 많은 면들이 그의 일생 전체를 지배해 하나의 깊은 생각으로 통합이 이루어졌으니, 이는 이미 바이지만 영혼들의 구원이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어렸을 부터 가난과 고생 중에 그를 인내로 단련시키셨다. 우리는 그가 일이 많다는 것을 안다. 목동, 발일꾼, 머슴, 재봉사, 대장쟁이, 요리점의 급사, 빵집 일꾼, 공대, 개인 교사, 학생, 제의방 직이. 이발사, 주인에게서 주인에게로 옮겨 다니며 남의 빵을 얻어 먹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안에 지울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언제까지나 가난한 청소년 문제에 지극히 예민하게 되었고 하급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도 마찬 가지였으며, 또한 언제까지나 놀랄만한 노동자요, 실현가가 것이다.

그는 우구쵸니 공작 부인에게 1878년에 이런 편지를 썼다. '일들이 증기 기관차처럼 빨리 달릴 아니라, 진보처럼 진전됩니다. 동안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리고 우리 은인들의 자선으로 20 지부를 있었습니다. 당신의 가족이 얼마나 불어 났는지 보십시오."

그는 옛날 결심에 충실하여 노년에도, 밤에 5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 벨따냐 몬시뇰이 시성조사 과정에서 증언했다. '밤마다 반은 일하면서 보냈다고 있다. 자신이 건강했을 때에는 꼬박 이틀 밤씩을 무엇을 쓰면서 보내기도 했다는 말을 나는 여러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침에는 미사를 드리려 제의방에 나타났고, 시간이고 고백성사를 들어 주었다." 어떤 경우에는 하루에 1시간, 12시간, 혹은 18시간까지도 고백성사를 들어 주었다.

놀라운 속도로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하루에 251장의 편지도 쓰는 그였다. 그는 말하곤 했다. "일이 손가락 밑에서 통과 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대단하다고 속도로 일해냈다." 여러 그는 오후 2시에 책상에 앉아 줄곧 8시까지 하고 나중에 계속하기도 했다. "나는 벌써 여러 달째 오후 2시에 책상에 앉아 8 반에 일어나 저녁밥을 먹으러 가고 있다."

"죽을 정도의 피곤" 그를 억눌렸는데, 자신도 모르게 편지들에 적혀 나온 귀절 들에 이런 것들이 있다. "일이 나를 미치게 만들 같다."

" 어떻게 없을 정도로 피곤하다." "나는 아주 피곤하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었다. 그는 무덤의 휴식 이외에 다른 휴식을 몰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리에로 몬시뇰는 시성 절차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그가 일생에 하루라도 휴가를 내어 쉬어 일이 있는 것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일에 눌려 지치고 피곤한 것을 보시면 ' 용기를 내자. 용기를! 일하자! 항상 일하자. 하늘 나라에 가면 영원한 휴식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과다한 일의 치명자로, 휴식을 모르고 일했다. 그의 담당의사가 짤막하나 흥미로운 전기에 이런 귀절이 있다. "그의 고단한 밤샘일과 그칠새 없는 수고는 그의 생명을 소모시켰다. 처음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나, 그의 서거 8 전인 1880 이후에는 그의 신체는 모든 질병을 집결해 놓은 이동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는 명석하고 활발하게 일했으며 그의 영광스러운 목표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었다."

도리노 대학의 휘쏘레 교수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과중한 때문에 소모되신 분이다.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기름이 떨어져 꺼진 등잔과 같았다." " 사제","19세기 자선사업가", "완벽한 가톨릭 신자"이셨던 그의 근면성은 시대의 사람들의 눈에 믿을 없는 전설적인 것으로 비쳤다. 보스꼬 서거 , 당시의 신문 들은 그의 수고와 근면성을 '기적적"(일루스트라찌오네 포플라테), "거인적"(파뜨리에), "거대하며 최상급"(페르세반란자),"굉장한"(환홀라) 것이라고 각각 정의 했었다. 신문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보스꼬가 이탈리아의 재무부 장관이었다면, 나라는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1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시성 절차 과정에서 신앙의 변호인은 그가 19세기의 교회의 최고 사도들 중의 사람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일과 양과 효과는 기적적이라 만하다. 영혼들을 구원하고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려는 그의 열성은 대단히 뜨겁고 꾸준했으니, 이에 역사는 정당하게 그를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도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3 :

수도회 재속 수도회 성성은, 1980년의 문헌인 '수도 생활의 관상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는 관상적인 모든 불가결한 호흡이다.(5)" 2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정신과 마음을 기우려 하느님께 호흥 하려는"(수도 생활의 쇄신 5) 노력이라고 정의 하였다.

관성적인 차원은 전례나 , 성경이나, 기도의 세계나, 사건과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과 분의 뜻을 만나려는 꾸준한 노력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도록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줌 등에 나타난다. 차원의 넓이는 신자 생활의 폭만큼 넓다.

이제 보스꼬의 기도하는 관상을 살펴보자. 다시 말해서 모든 활동을 제쳐두고 그가 전념한 그의 "형식적" 기도, "기도-실천" 기도 자세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그러나 먼저 빼놓을 없는 질문이 있다. 보스꼬는 기도할 있었나?

이는 허황한 질문이 아니라 바로 장에서 그의 다양하고 계속적인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느 성인의 생활에서나 있는 기도를 그이 생활에서도 뚜렸이 있었냐 하는 문제이다. 일이란 기도에서 빼앗아간 시간으로 여기던 사람들의 적지 않던 당시에 이러한 그의 활동은 흉이 되었다.

실제로 그의 시복조사 과정은 그의 생활에서 기도가 너무 적다는 점이 흠이 되었다. 기도는 개인적, 심리적 차원에서 ,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높임", "청취", "그분과의 대화" 있고, 객관적인 차원에서는 구원 계획에, 그리고 지상에 이미 있는 하느님 나라에 영적으로 "호응함"이라 있는데, 기도는 모든 외적인 활동의 중지와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의 잠심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활동으로 가득한 보스꼬의 생활에서는 모두가 불가능해 보이는 점들이다.

몰론, 우리 성인은 기도했다. 그러나 충분히 기도하지는 않았다는 반박을 받았다. 보스꼬를 전통적인 기준에 따라 인정해 주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의 행동 방식에서 그는 다른 성인들과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시성 절차 과정에서 이런 중언이 있었다. " 하느님의 종이 그의 사업의 확장을 위하여 계속해서 그리고 사방 곳곳에로 원조를 청했다는 것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종은 다른 성인들과는 아주 다르게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필립버 네리 같은 분은 유산을 받지 않기 위하여 적도 했는데, 그는 유산을 받기 위하여 기적을 하셨을 정도이니, 그것으로 오라또리오의 생계를 해결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것은 시대는 쇼따르가 그의 저서 "모든 사도직의 "에서 열광적인 활동을 강력하게 고발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으로는"기도는 사도직의 "이라 했는데 이는 행동의 중요성을 악화시키는 역활을 했다. 쇼따르는 활동을 다소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으니, 조건을 갖추면 사도적 활동 역시 하느님과의 일치의 혼이 된다는 것도 진실이라는 가정에 같아 보인다. 교회헌장은 말한다. "성체로부터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전달되어 오고 키어지며 이는 모든 사도직의 혼을 이룬다."(33)

실제로 보스꼬는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았다. "목표 달성을 위하여 보스꼬는 자신의 지혜와 이니셔티브와 활동을 대단히 중요시 했고 인간적인 모든 수단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하느님의 도움에 보다는 밤낮으로 열심히, 그리하여 의무적인 기도도 바칠 없이 지칠 정도에 이르도록 사람들의 원조를 찾아 동분 서주 하였다."

다른 비판자에 의하면, 기도는 보스꼬의 생애에서 비중을 차지하지 않은 같다는 것이다. "기도라는 주제는 수도회를 신설하는 모든 창립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인데, 보스꼬는 거의 그런 같지 않았다. 염경 기도를 이렇게 소홀한 사람을 어떻게 영웅적이라 있을까?"

상황을 불리하게 만든 것은, 보스꼬가 1848년부터 지병으로 고통 눈의 통증이기도 하지만, 과다한 일을 보아서도 성무일도 바치는 일이 비오 19세로부터 먼저는 구두로, 다음에는 보속 담당부서의 정규 답신으로써 면제 되었다는 사실이다.(19. 11. 1864)

조사과정의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신자적 양심에 비친 성덕의 이상이 너무나 깨끗하고 숭고해서 가벼운 허물 하나만 있어도 후광을 추락시켰다. 트렌토 공의회 이후 그리고 프랑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시대인 들이 지닌 사제상은, 앞서 말한 대로 우선적으로 전례와 기도의 사람이었다. 보스꼬는 생각 없이 예를 들어 그의 스승 가파쏘나 무리알도 같은 다른 도리노 출신 성인들은 전통적인 모델을 따르지 않았으니, 무리알도는 미사 준비 거행 그리고 감사에 4시간이 걸렸다.

보스꼬에게서 아르스의 본당 신부나 다른 위대한 성인 사도들에게서 있는 외적으로 장엄함 기도 모습을 찾으려 하면 실패한다. 체리아 신부는 이렇게 기술했다. " 보스꼬는 다른 서인들처럼 시간을 묵상에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의 기도 방식이 있다는 것과 기도하지 않는다거나 기도를 조금한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보스꼬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증인은 필립비 리날디 신부의 그것이니, 그는 1926 9 29일자로, 시성 담당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 추기경님, 여기서 저의 깊은 확신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경자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 안에서 꾸준히 하느님과 일치하여 지낸 분입니다. 그의 말년에 오전 중에는 각계 각층에서 조언과 강복을 청하러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2시에서 3시에는 매일 그의 방에 들어가 지냈는데, 장상들은 시간에 어느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1883년부터 그의 서거까지, 사제 지망자들의 양성소 책임을 맡고 있었던 지라 어느 때라도 필요하면 찾아가 만날 있게 되어 있어, 제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규정을 무시했습니다. 오라또리오만이 아니라, 란조, 그분이 가시던 산베니뇨 그리고 마티, 도리노에 있는 요한 복음사가의 , 어디에서나, 나는 바로 시간에 그분을 만나 이야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시간에 어디서나 항상, 같이, 손을 모으고 묵상에 잠겨 있는 그를 뵈었습니다."

"기도의 사람" 보스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보스꼬의 기도는 다른 성인들의 그것과 달랐는데, 그렇다고 진실하고 깊은 기도였다는 것은 아니었다. 조사 과정 중에 차차 보스꼬에게서 뜻밖의 놀라운 기도 활동을 나타내 주는 증거들이 나왔다. 외적인 드러난 행위는 없었으나, 기도는 그에게서 언제 어디서나 터져 나왔다.

발베리 신부는 단언했다. "언제나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할 있다. 나는 그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항상 기도 중에 있던 것을 무수히 보았다. 길에서도 기도했다. 여행 중에는 초안을 수정하지 않는 , 항상 기도 중이시던 것을 보았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기차 여행 중에, 절대로 한가하게 있지 말고, 성무일도를 바치거나 묵주의 기도를 하거나 어떤 좋은 책을 읽도록 하자."

어느 순간에 영적 훈계를 청한다 해도 " 마치도 방금 하느님과 대화를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 즉시 훌륭한 영적 생각을 나누어 주곤 했다." 성무일도를 바치기를 면제 받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언제나 바쳤고 아주 열심히 바쳤다. 힘에 부쳐 못할 때에는, 그가 정한 "하느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지 않는 어떤 행위나 말도 하지 않기로 한다" 영웅적인 약속대로 그렇게 하면서 이를 대신했다.

그가 기도할 때에는 "천사 같았다" 증언은 말할 여지도 없는 증언이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기도 했는데 약간 미소를 띠었다. 가까이에 있으면 저절로 기도를 하지 않을 없게 되었다. 나는 그와 35년을 함께 살았는데 그는 항상 기도를 이렇게 했다" 엔리아 수사는 증언했다.

그는 기도를 인간의 유약성을 받아 하느님의 권능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으로 보면서 기도에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했다. 그는 말했다. "기도, 이것은 첫째 가는 일이다." "하늘로부터가 아니면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기도는 " 중의 "이었다. 기도는 '모든 것을 얻어내는 것이며 모든 일에 승리를 가져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고기에게 , 새에게 공기, 사슴에게 샘물, 우리 몸에 따뜻한 열기", "군인에게 "이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에 폭력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체리아는 다음과 같이 있었다. " 보스꼬에게 있어 기도 정신은 훌륭한 지휘관에게 군인 정신, 뛰어난 예술가나 과학자에게 관찰의 정신과 같은 것이었다. 부담 없이 꾸준이 아주 기쁘게 이어지는 정신의 일상 자세라 있었다."

잠자다가 깨어서도 기도하라 했다. " 시간이 되면, 손을 가슴에 얹고 누울 것이다. 잠이 때까지 기도할 것이며, 중에 깨면 다시 기도를 해야 한다. 화살기도를 하고, 성의패나 십자가 혹은 몸에 지닌 매달에 맞출 것이다. 방에는 성수를 약간 두고 신앙으로 십자 성호를 그을 것이다." 여러분을 시대에 맞지 않는 신심 행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그리스도교 신심에 뿌리를 것들이며, 오늘날도 단순한 영혼들에게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이다. 성령께서는 불고 싶으신 대로 부신다. 자유를 막으랴?

그의 사업체도 기도를 바탕으로 세워졌다. "그는 집을 오라또리오라 이름했으니, 기도 만이 우리가 의탁할 있는 힘이라는 것을 분명히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발도꼬에는 기도와 기도정신이 대기 중에 숨쉬고 있었다. 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을 있었고, 그들 중의 대부분이 초대 살레시오 회원이 되었다. 체리아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들이 재주에서나 학식에서나 남다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공동 특징이 있었고, 이것이 초창기 모습을 이루었다. 행동이나 말에서 인애로 부성애가 보였고 신심이 그들 살레시오 생활의 지주라는 것을 모두 있었다. 그들은 많이 기도하며 정성껏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해야 하고 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중시 하고 있었다.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어느 방법으로든 기도를 놓으면 마디도 없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렇지만 기도의 은혜들을 소유한 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우리는 그들이 규칙에 있는 기도나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이상의 것이 아닌 기도를 아주 단순하게 바치는 것을 보아왔다."

보스꼬의 기도는 사도와 교육자의 기도였지만, 어쨌든, 자기 자신의 특유한 기도였다. 본질에 있어서 참되고 완전하며, 형태에 있어서는 명료하고 단순했고, 내용에 있어 다중적이었으며, 표현에 있어 명랑하고 축제적이었다. 진정으로 모든 이가 있는, 어떤 이들과 특히 비천한 이들이 누구나 있는 그런 기도였다.

그의 기도는 특히 활동하는 신자들이나 사도들의 기도로, 활동에 긴밀히 연결된 기도였다. 따라서 세상에서 한가로이 멀리 떨어진 그런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보내는 그런 기도였다. 보스꼬의 표현인 ' 미히 아니마스 체떼라 똘레'( 주여, 제게 영혼들을 주시고, 외에는 가져 가소서) 그의 모토였다가 보다 그가 항상 하던 열렬한 기도였다. 사도적 성격의 기도였으니, 기도의 모든 형태가 그의 특별한 성소와 사명을 나타냈다.

어떤 진정한 사도들의 일생에서나 마찬가지로, 기도는 포기할 없는 불가결의 요소로,, 보스꼬를 행동으로 앞서가고, 동반하고, 뒤따랐다. 기도가 그를 앞서 갔으니, 보스꼬가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뜻에 따라 일을 생각하고 이를 그분의 뜻과 그분의 영광에 맞추어 것은 기도 안에서 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피곤과 시련에서 은혜를 청하고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잠시 쉬어 묵상했으니, 기도는 활동을 동반했다. "힘들고 어려울 용기를 잃지 맙시다. 신뢰를 가지고 하느님께 기도 합시다. 하느님은 당신의 도움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

기도는 또한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그를 뒤따랐다.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하느님은 당신 사업을 아주 멋지게 하신다."

보스꼬의 기도는 그가 '신심업'이라 부르는 기도의 내용으로 되어져 있다. 카빌리아는 기록했다. " 보스꼬는 살베 레지나, 로사리오, 십자가의 등의 어떤 특별한 형태의 기도를 창출해 내지 않았다. 그는 기도문 형식에 관심이 없었고, 어떤 의미에서 기도 형태에도 그랬다.

그는 실천가, 단순화 하는 사람, 내용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창립자로서도 그이 제자들에게 "착한 신자', 신부라면 "착한 신부" 신심 기도 이외의 다른 어떤 공동 신심기도를 바치라 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신부들에게느느 사제 기숙사에서 실천하던 바들을 요구했으니, 정성 어린 미사봉헌, 성무일도, 묵상, 영적 독서 그리고 "착한 신자들의 신심업"들이었다. "착한 신자들의 신심업" 어떤 것이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간단한 기본적인 기도들과 예를 들어 기도는 아닌, 7자기 영적, 물적, 자선 행위와 10계명 등을 외우기 였으니, 이는 교구의 교리서에 있고 영적 저술가들이 제시한 "생활 규칙" 실려 있는 것들로서 보스꼬의 시대에도 불면으로 내려 것들이다. 여기에 점차 다른 매일의. 매주의, 매월의, 매년의 신심업들이 첨가되어 갔다. 이들은 작은 고백성사, 영성체, 성체방문, 매월 선종 연습, 연례 피정 등으로, 신자 생활 관습에 들어 있어 당시에 도리노에서 꽃을 피우고 있던 신심업 들이다. 18세기의 전례에 뒤따르거나 전례 안에 포함되어 화려함을 자랑하던 이러한 신심업에서 보스꼬는 기도생활의 구체적이자 이상적인 지침을 발견했다. 실제로 교회는 성덕에 부적절한 방면은 제시해 일이 없는 교회에서 내놓는 기도들이었다. "착한 신자의 일반 의무" 기초로 했지만, 보스꼬는 그것으로 족해 하지 않았다. 양적으로 그러했으니, 그는 개인적인 이니시티브에 많은 신심업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 지도서" 살펴보면 족하다. 이는 우리 성인이 청소년들에게 만들어 기도서이다.

질적으로도 그러했으니, 보스꼬는 그의 소년들에게 기도의 "" 비오 11세께서 이르신 "숭고한 정확성의 정신' 주입할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주장했다. "기도를 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십자 성호도 긋자." 그리고 보스꼬는 당시의 정신에 따라 신심 기도들을 장려 했지만, 위태로운 감상주의나 과장은 관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해 두자. 항상 그의 기준은 실천적이었고, 진정으로 초성적이었다. 그의 기도 학교에서 거룩하고 영웅적인 소년들이 배출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그의 당시에 보통으로 하던 대로 기도 생활을 우선적으로 수덕적인 기능으로만 알았다고 판단하는 잘못도 범하지 말아야 한다. 보스꼬는 말했다. "신심업은 덕의 자양분, 기둥이요, 향료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있는 것은, 교회와 교황의 지침에 지극히 충실했던 인지라, 오늘날 2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전례적 쇄신 지침들도 열심히 따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나름으로 그리고 시대에서 청소년 전례의 쇄신 자였음을 잊지 말자. 실제로 그는 모두가 참여하는 전례, 자발적이고 이니셔티브가 풍부한, 다양하고 축일적인, 현세에 맞추었으나 영원을 향하는 전례가 되기를 바랬다.


" 짧은 기도"


초기 회헌(1858 - 59)에서 벌써 읽을 있다. " 우리 수도회가 지향하고 있는 활동적인 생활은 회헌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많은 기도를 함께 있는 편의를 주지 않는다."

이러한 표현에서 있는 것은, 함축적으로, 무수한 많은 다른 개인 기도도 있고 권장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들 중에서 보스꼬는 사제 기숙사에서 배운 대로 화살기도에는 비중을 두었다.

화살기도에는 "깨끗하고" "짧은" 수도원식 전통 기도이다. 이는 가대에서 바친 기도를 하루 중에 연장한다. 옛날 사람들은 이를 묵상에서 오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로 간주했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향하여 나르는 신속한 전령"이라 표현했다.

보스꼬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화살기도를 아침의 염경 묵상의 기도의 요약처럼 여겼다. 그는 말했다. "화살기도는 짧게, 염경 묵상 기도를 모아 마음에서 나와 하느님께 간다. 마음의 애정을 하느님께 보내고 영혼의 적과 유혹이나 악습을 부시는 불에 달군 화살이다." 우리 성인에게는 필요한 경우에 사정상 하지 못한 묵상을 대신해 수도 있는 기도였다. "성무 집행으로 못하게 되지 않는 , 매일, 각자, 염경 기도 외에 적어도 30 이상 묵상기도를 바칠 것이다. 그리고 못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최대한 많은 화살기도를 바치고 정해진 신심업을 가로막은 일들을 더욱 애정으로 하느님께 향하게 하여 이를 대신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대치를 상인들의 묵상이라 블렸다. "묵상기도를 하기 바란다. 여행이나 다른 일로 하여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할 경우에는 내가 말하는 상인의 묵상이라도 하기 바란다. 상인들은 이득을 위하여 상품을 어떻게 사고 팔까, 어떤 손해가 있을 있을까, 손해를 어떻게 기워 갚을까, 혹은 했더라면 어떤 이익이 있었을까 등을 생각한다."

화살기도는 쉽고 핵심적이며 은밀하고, 손쉽게 있는 기도로서 그의 생각을 하느님께 깨어 있게 하는 놀라운 도구였다. 그가 만년에 마음에서 튀어 나오던 열심한 화살기도들을 보면 기도가 얼마나 그의 생활에 뿌리 깊은 것이었는지를 알게 준다.

"신심업", "짧은 기도" 보스꼬의 기도의 전부는 아니었다. 우세했거나 혹은 계속적이었던 다른 형태의 기도는 이러한 모양으로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일반적인", "함축된" ,"사실상의", "확산된" 기도이다. 오늘날에는 "삶의 기도", "상황 기도" , "기도 -자세"라고 즐겨 표현한다. 매일의 생활 주에서 하느님께 깨어 주위를 기울임이다.

이는 찬미, 흠승, 봉헌 등의 참된 기도이니, 인간 실존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랑메송의 레온지오의 말을 빌리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하느님께 연결시키고, 그분이 뜻에 유연하게 적응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참된 기도라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생활 스타일, 삶의 전례이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행위를 받아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봉사를 한다. 이는 "항상 기도하라" 복음 말씀을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리제네 이후, 그리스도 전통은 말들을 외적이 기도와 더불어 "착한 ", 혹은 "착한 생활" 풀이하고 있다. 매일 기도한 사람, 그리고 일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착한 일만 하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단언한다. "입으로만 하느님께 노래하지 말고, 착한 일의 성무일도도 손에 들고 노래하라." 성령의 인도로 보스꼬는 바로 이러한 노선에 있었다.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은, 그가 그의 살레시오 회원들을 위하여 회헌을 작성하면서, "신심업" 장에 정식 기도 보다는 "착한 " 관계가 있는 다음 조항을 넣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수도회가 지향하고 있는 활동적인 생활은 회원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많은 기도를 함께 있는 편의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상호 착한 모범과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일반 의무의 완전 이행으로 보충할 것이다." "바른 자세, 분명하고 성의 있는 말씨, 집에서나 밖에서나 말하고 보고 걷는 데서 나타나는 정숙함이 우리 회원들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이는 바울로의 가르침과 하나가 된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십시오.(골로3.17)" 사도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고린 10.31)"

기도를 하건 일을 하건 하느님과의 실제적인 관계를 끊을 없는 일치는 가능하다. 보스꼬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수천 되풀이 하여 "하느님의 영광" 위하여 일하고, 그분의 뜻에 깊이 호응하라고 일렀다.

살레시오 수녀들에게는 "활동 생활과 관상 생활을 동시에 같은 보조로" 하라 했다. 자신 안에 "마르타와 마리아, 사도들의 생활과 천사들의 생활" 그려내라 했다. 그러나 관상과 활동이 우리 성인에게 가지 상반된 움직임이 아니라 개인의 단일한 자세의 가지 존재 양상이었다. 이는 신앙, 희망, 사랑을 통해서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 신자의 마음에 솟아나는 것이다. 활동과 관상, 일과 기도는 하나인 사랑의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 뿐만 아니라 일은 기고라고 말할 있다. 그리고 이는 체리아 신부의 말에 따르면, 보스꼬의 비결 이었고 그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었다. "살레시오 신심의 특수한 차이점은 일이 기도가 되게 하는 점이다." 비오 11세는 이에 대하여 장엄한 확언을 하였다."이는 실제로 그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특징의 하나이니, 다시 말해서 만가지 일을 붙들고 추진해 가면서 묻고 조사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도 그의 정신은 다른 곳에, 항상 높은 곳에, 평화가 항상 흔들리지 않는 곳에 있었으니, 그로 하여 그에게는 일이 그대로 실제적인 기도가 되었다. '일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 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의 원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별하게 기도하지 않은 성인이 없다. 보스꼬 역시 그러하다. 마음 깊이, 아무 흠이 없는, 숨은, 자발적인 기도였으니, 다만 발견할 아는 것만이 필요했다. 놀라울 만큼 일꾼이었으나 그는 위대한 기도자였다. 혼자서 조용히 많은 기도를 했다. 거의 아무도 모르게 했으니, 눈에 뜨이게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의 일이 허락을 하는 , 그의 소년들과 함께 "항상"기도했다. 강론하기 전에, 성무 집행 전에, 중요 인사들을 만나기 전에, 힘들고 까다로운 상황을 처리하기 전에 기도했고, 극도의 시련에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는 교육자로서 소년들의 마음에 기도에 대한 사람을 심어 주기에 지칠 몰랐다. 기도를 좋아하게 만들었고, 기도가 소년들에게 맞게 주었다.

그이 정신을 깊이 이해한 알베라 신부는 단언했다. "신심업도 규정된 보다는 자발적이 되기를 원했다." 낮에 많은 소년들이 성당에 가서 자발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는 몹시 기뻐했다. "이것은 내게 최고의 기쁨이 된다."

양심이 매우 섬세했던 그는 그의 영적 유서 안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자 했다. " 내가 너무 짧게 미사를 준비하거나 감사 드리는 것을 여러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제의 방에서 나를 둘러싸는 사람들 때문에 없이 그렇게 밖에 없었다. 미사 전이든 후든, 기도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런 겸손한 고백은 그가 기도에 부여하는 중요성을 스스로 말해 준다. 교회가 오늘이나 어제나, 세속화된 물질주의와 역사에 부재하시는 듯싶은 하느님의 침묵 등으로 기도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에게 그를 기도의 모델로서 제시하는 것은 까닭이 없지 않는 것이다.


4 : 금욕과 절제의 수덕


쾌락적 추구, 자유방임적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억압적인 것도 거부하는 전적인 자유의 이름으로, 자연주의의 이름으로, 또는 그러한 수덕을 인간을 소외시키는 비정상의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교적 수덕이 거부되고, 이는 하느님의 거부를 낳는다. 사실상 수덕이 어떤 의미가 있고, 타당성, 유효성이 있다면, 죄와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지평 안에서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충실할 때에만 이런 것들이 가능해 진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면서 만이 무엇이 있을 있다는 말이다. 수덕은 구원계획에서 피치 못할 요소로 들어가며 사람에게 그림자가 있듯 그리스도 신자에게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는 사회적 문화적 다양한 상황에서 , 똑같이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가 가르치는 대로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18세기 중엽에 보스꼬가 실천한 거칠고 스파르타식 보속 양상을 경시하는 태도는 온당치 않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이렇게 썼다. "다른 세대에 비하여 하나의 세대가 정당화 되는 것은 세대가 세대보다 낫다는 것에 있지 않고, 세대가 시대에 왔다는 사실에 있다."

오늘날의 수덕은 과거에서나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없이 새로운 문화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개념을 참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 특히 심리학에서 얻은 발견들을, 우리의 신체의 특징을, 성이 지닌 심오한 가치를, 인격활의 과정을, 다양주의의 현황을, 공동체 차원의 중요성을, 사회화의 요구를,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비가노)" 그러므로 인간의 영육의 조화로운 전체를 참고 하는 수덕이 필요하며 사람을 자기헌신적 사랑에로 이끄는 타인에 대한 너그러운 봉사에로 이끄는 수덕, 현대 생활을 억압하는 소외 현상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맞설 있게 하는 수덕, 일의 반복성의 단조로움, 현대생활의 긴장, 인간관계와 공동생활의 피상성과 같은 소외현상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맞설 있게 하는 수덕, "소음의 문명" 속에서 자신을 분실하지 않기 위하여, 보다 이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의미가 있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기 위한 침묵의 수덕, 통신매체의 사용이나 집이나 필요한 오락과 음식을, 자신의 오관 등을 조절할 아는 수덕이 필요하다.

교회는 문화적 전환기를 참조하면서 과거에 했던 금식 등의 보속을 완화 시켰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덕의 엄격성을 일축시킨 것은 아니다. 사랑의 더욱 많은 요구를 중시했다. 절제의 비옥성은 포기에 따르는 고통의 정도나 노력의 정도 여하로 측량되는 것이 아니라

효과로 측량된다. , 복음적인 견지에서 , 절제로 인하여 사랑이 얼마나 진보하였느냐로 측량된다. 얼마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혹은 사랑에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멀리했느냐 하는 등으로 측량한다.

보스꼬의 수덕적 체험은 보스꼬 시대의 것으로 지금은 이미 표현방법상 과거의 것이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적 성격을 초월하여, 사실 자체의 뿌리로 가보자. 정신을 이루는 복음 정신에로 보자. 우리 성인이 가르치시고 실천하신 수덕은 오늘날 우리들의 그리스도교적 감각에도 권해 말이 항상 많다. 그러한 것을 간단하게나마 확인해 보자.



보스꼬의 수덕은 언제나 일과 절제라는 접합 어에서 나타났다. 이는 그의 후예들에게 유산이 것이다. "일과 절제는 살레시오 수도회를 번창 시킬 것이다." " 가지 무기로 우리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을 이겨낼 있을 것이다." 가지 덕은 살레시오 회원의 당당하고 다정한 얼굴에 광채를 보내는 개의 금강석이다. 우리가 그에게서 것은 일은 이미 보스꼬의 꾸준한 수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는 항상 극기와 절제와 고생스러운 생활들의 넓고도 무수한 수덕을 함께 통합시켰다.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에서 절제는 물론 자신을 보호하기, 경향과 욕망의 조절, 일종의 세상 도피, 그러나 더욱 깊게는 다른 여러 덕들의 전제인 "근본적인 태도". 이에 관하여 총장 에제디오 비가노 신부가 열거한 것이 있는데 이는 보스꼬의 절제을 거론하려면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절제는 다른 조절하는 덕들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첫째 덕이다. 다른 덕들은 절제의 주변을 도는 위성과 같다. 육욕에 대한 경향에 금육, 교만의 경향에 겸손, 분노에 온유, 복수에 관용, 육적인 허영에 정숙, 탐식에 절식과 금식, 낭비에 절약, 안일주의에 근검소박."

이러한 절제는 보스꼬에 의하여 실천되었는데, 특히 사목적, 교육적, 사랑의 기능으로, 사랑하는 것으로만 하지 않고, 나아가 '사랑 받게 아는"그런 사랑에 성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소년 교육을 실제로 사람은 양선하고 정의롭고 올바른 태도가 승리하기 위하여 얼마나 또한 어떠한 자기 억제가 요하는지를 경험으로 알고 있다.

보스꼬의 모범은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아주 깊이 사랑하는 교육자이다. 영웅적인 정도의 절제 실천으로 "사랑 받을 알게" 교육자이다. 원칙에 있어서는 흔들림이 없고, 청소년이 지닌 자유와 자발성의 요구를 권위의 요구와 함께 합리적으로 매사에 적용했다. 계속 움직여야 청소년의 욕구를 수용하면서도 허용주의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그러나 슬기롭고 있게 줄도 알았다. 격정을 다스려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사목적 사랑으로 다듬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갔다. 그리하여 내적인 절제의 열매로 꾸준한 회개의 자세, 자기 자신의 주인 되기, 온유와 자애 마음들을 얻어냈다.

그리스도교적 절제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신학적 가치들의 방벽이 된다. 보스꼬는 그의 아들들에게 이를 기억시켰다. '마귀는 우선적으로 무절제한 자들을 유혹한다." 그는 모든 면에서 그가 몹시 마음에 두고 있던 사도적인 일에서도 절제와 중용을 찾았다. "일하라, . 그러나 길게 일할 있는 방식으로 일하라"라고 말했다.

선교사들에게는 이렇게 당부했다. "건강을 돌보아라. 일하여라. 그러나 오로지 체력의 한도 내에서 하여라."

보스꼬의 생각과 살레시오 전통에서 절제는 우선적으로 극기들의 총합이 아니라 "사목적 그리고 교육학적 사랑의 실천에서의 성장"이었다. 보스꼬의 7 후계자인 에지디오 비가노는 권위 있게 이를 단언했다.

"극기 이상으로, 절제는 자신을 사랑에로 내어 주기, 육에서의 방법론적인 훈련이다. 우리에게 사랑하고 사랑 받게 하는 훈련의 길에서 절제는 우리에게 과하는 벌이 아니며 가지치기도 필요한 것이지만, 이는 가지치기의 순간도 아니다. 이는 사랑의 성장의 순간이다. 만일 내가 하느님께 자신을 드렸다면 나는 드리는 능력을 내적으로 키워가야 한다. 드린 것을 은밀히 도로 찾는 것이 모든 것을 억제할 알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하여 보스꼬에게 절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항상 미히 아니마스의 신비신학적 기능으로 피어진다. 주여 저로 하여금 절제의 은혜로 청소년을 구원하게 하소서 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기 지칠 모르게 되풀이 말이 "수도회는 회원들이 일과 절제를 사랑하는 그날까지 존속하리라" 였다.


검소와 금욕


이는 절제라는 덕의 주의를 도는 개의 위성과 같은 덕들로서 보스꼬에게 있어서는 독특한 빛을 띠고 빛나는 덕들인. 그의 식탁의 근검 소박성은 금언적이었다. 사제 기숙사 출신 사제 모두가 그랬지만 교회에서 규정한 금식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였다. 처음에는 토요일, 후에는 금요일, 일주일에 하루는 단식을 했다. 그러나 예외적인 일을 한다는 기색은 없었다.

시성 절차 과정의 모든 증언들이 시종일관 확언하는 것은 그에게서 하등의 특별한 단식이나 보속의 기색이 없었으나 그의 습관적인 소박성과 절제는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라또라오 초창기에 식단은 매우 초라했다. 가난한 농부나 노동자의 밥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빵과 , 야채, 그것도 있었지 않았고 항상 물을 포도주 약간, 이것이 전부였다. 몬시뇰 벤타냐는 이렇게 증언했다. "절제에서 그는 보기 드문 모델이었다. 그는 집에서 안락을 찾는 일이 없었다. 자신이나 남을 위해 조금 낫게 있는 일도 그렇게 하지 않는 같았다."

얼마 후에 음식이 나아지게 되었으니, 그와 함께 남아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식탁에 적응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타고난 판단력으로 초창기의 엄격한 생활태도는 완화되어야 함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구석에는 언제나 전에 지켜오던 것들에 대한 은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는 여러 이렇게 말했다. " 집에서 누구나 빵과 국으로 만족해 줄로 생각했다. 반찬 하나 정도만 하면 훌륭하겠지. 그러나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나로 하여금 점점 다른 수도회의 예를 본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가끔 오라또리오 초창기의 방식으로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필요에 따라 개선해 가면서도 그는 어쨌든 그의 종전의 원칙에 충실했다.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그는 언제나 공동체 음식에 따라갔다. 식사시간 이외에는 먹는 일이 없었다. 어떤 음식에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그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를 아무도 없었다.

기부금을 얻기 위하여 그는 은인들의 식사 초대에 응해야 했다. 그런 식사에 참여 하면서도 베풀어진 음식이 어떤 종류의 음식인지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고 있다. 그는 오로지 경쾌한 농담으로 동참자 들을 즐겁게 하고 모범적인 이야기로 남을 교화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베라째에서의 병고(1871 - 1872), 바로 그의 건강을 쇠진 시킨 병고 , 의사의 명에 의해 포도주를 약간씩 하게 되었는데 포도주는 몽모렌시의 공작 부인이 매달 그에게 보내 주었다. 그는 포도주를 대단히 아껴 들었는데 병으로 일주일을 갔다. 남은 것은 지하실에 모아 두었다는데, 그의 서거 이후에도 오래까지 갔다. 그는 포도주를 친구들과 은인들을 식탁에 초대할 때마다 기꺼이 내어 놓으면서 말했다. "즐기십다. 공작가의 술을 듭시다."

그는 그의 아들들도 자신처럼 근검 소박의 모범이 되기를 원했다. '게으름이나 말다툼을 피하여라. 먹고 마시고 쉬는 일에 대단히 소박하여라. 단식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부 하는 것은 절제이다." 우리 사이에 안일이나 편안이 시작되면 , 그때 우리 수도회는 길을 갔을 것이다."라고 그는 타일렀다.

모든 세대의 수덕 가들처럼 역시 육신적인 금욕과 기도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했다. "육신적인 절제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도 모른다."

검소와 절제는 그의 교육학에서 광범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먹고 마시고 쉬는 대에 절제적인 청소년 사람을 다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가 덕스러워지고 근면해지고 그의 의무에서, 좋은 일에는 항상 기꺼이 나서게 되며 모든 덕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반대로 먹기 잘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잠꾸러기가 있다면 그는 조금씩 모든 악습의 주인이 것이다."

순결과 육적 경향에 대한 금욕은 보스꼬의 생애에서 특수한 빛을 발한다. 리쥬의 성녀 소화데레사는 그의 충만한 사랑에 무언가가 부족하기라도 것처럼, 정결을 거슬리는 유혹을 느껴보지 못했던 일을 슬퍼했다.

보스꼬는 이런 특은 지니지는 않았다. 그는 유혹을 알았고, 육적인 괴로움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을 그의 측근들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루아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런 유혹으로 하여 그의 중에서 추측컨데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니 그는 마시는 일에 절제를 당부했었다. " 증언은 레뮈엥의 것과도 부합된다. "순결에 반대되는 유혹에 대하여 총회의 의원들에게 말씀하신 일이 있다. 나도 거기 있었다. 고기보다 채소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 인간 보스꼬는 유혹의 바람막이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비상하다면 이러한 일선에서도 승리의 싸움을 냈다는 일이다. 성령의 타이르심에 항상 열심히 순종하셨다는 일이다. 정결을 영웅적으로 실천하셨다는 일이다.

얼피 보면 이러한 영웅성은 나타나기보다 짐작되는 같다. 정결의 덕은 너무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이 실천된 보통 이상으로 생활화 , 이는 여러 가지 표현들을 통해 외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니 그리스도교적 안목만 있으면 알아차리게 된다. 따라서 돈보스꼬가 어린 시절 이후 항상 없는 생활을 영위해 왔다는 것은 시성 절차 중에서 나온 증거들이 소리로 합창하여 단언하는 그것이다. 증언들에 의하면 성인은 그의 예민한 감수성과 "사랑 받을 " 아는 그의 놀라운 능력을 키우기 위하여 아주 완벽한 정결의 성을 쌓았었다. 그가 청소년들 사이에 막강한 매력을 지니게 주요 원인이 덕의 광채에 있다고 본다. 그가 있으면 성가신 생각이나 공상 따위들이 햇빛에 안개 스러지듯 하였다. 체롯디는 이렇게 증언했다. " 더할 나위 없는 섬세함으로 지켜온 그의 정신적, 감정적, 육신적 정결에 바로 그의 그리스도교적 위대성에 비결이 있다고 나는 단언할 있다. 그의 태도, 그의 시선, 그의 걸음걸이, 그의 말투, 그의 손동작들에 마저 , 그가 즐겨 예쁜 덕이라 부른 애덕에 반대될 만한 하등의 그림자가 없었다."

그는 청소년을 대할 매우 섬세했고 항상 그들의 작은 인격들을 존중했다. 그의 손에 언제나 기꺼이 입맞추게 허락했으며 어느새 이마에 입맞춤을 받게 때에는 그의 마술적인 "귓속 " 기회로 잡았으니, 이런 말은 마음 깊은 곳으로 심어지곤 했다. 손가락으로 어떤 어이의 뺨을 살짝 때릴 때도 있었으나 아버지다운 행위에는 대단한 초성적인 것이 풍겼었다.

레빌리오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이렇게 쓰다듬어 , 없는 어떤 깨끗하고 아버지다운 것이 있어서 그의 정결의 정신이 우리에게 전해지곤 했다." 그에게서 반감이 보이는 태도나 감각적으로 좋아하는 태도를 일이 없다. 아무리 반대파 신문들이 악의에 눈을 뒤지고 살펴 보아도 점에서 그를 감히 공격할만한 거리는 찾지 못하였다.

에지디오 비가노 신부는 말한다. " 보스꼬의 정신에는 순결의 메시지가 매우 강하다. 살레시오 전통과 초창기의 증언들은 이를 풍부하게 증거한다. 이는 특별한 메시지이다. 순결에 대한 호감이라고 부를 있을 것이다. " 호감은 그의 생애의 불변수이며 그의 정신의 특성이다. 그는 이를 무수히 되풀이 했다. " 프란치스꼬의 아들들이 가난, 이냐시오의 아들들이 순명이 특징이라면 우리 수도회를 특징지어야 하는 것은 정결이다."



그리스도교적 금욕은 외적 내적으로, 아주 넓은 범위를 차지한다. 가금씩 성서가 언급하는 것을 보면, 외적인 재화로부터의 "이탈"(루가 5.11), 자신을 끊기(루가 9.23), 낡은 인간을 그의 정욕과 함께 "벗어 버리기"(골로 3.9),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기"(갈라5.24), "싸움"(2티모4.7),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일종의 "죽음과 묻힘"(골로 3.3)등이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타락하여 상처 입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의 신비에 참여함 없이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지적해 준다. 고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참을 없는 사랑과 충성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서도 보스꼬는 뛰어난 모델이요 지도자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가 명랑하고 호감이 가는 성인, 사랑을 아니라 '사랑 받을 " 알며, 항상 일을 하고 있고, 세상의 봄이요 기쁨인 청소년 가운데 항상 있는 그런 성인이라고 말했었다. 천상 위를 걷는 같은 성인이지만 실은 그에게도 예리하게 찌르는 가시들이 없지 않았다. 보스꼬와 그의 뒤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생애는 "장미꽃 그늘 " 꿈에 분명하고 그려져 있다. 핵심적인 내용만 기억해 보자. 그기 이야기 하는 대로 "복되신 동정녀 자신' 머리 위와 그리고 아래에서 까지 뻗어 나오는 찬란한 장미꽃으로 덮인 길을 건너오라고 권고하였다. "이것이 네가 걸어야 하는 길이다." 멋있고 유쾌한 같아 보였으나 아픈 가시들을 숨기고 있는 길이었다.

이야기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내가 그늘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 보스꼬는 저렇게 언제나 장미꽃 위를 걸어 가는구나. 아무 문제도 없이 평탄하게 걷는구나! 만사가 되는 거야!' 그러나 그들은 발이 무수한 가시로 아프게 찔리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많은 신학생,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의 나의 초대를 받고 아름다운 꽃들을 보며 좋아하면서 나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아프게 찌르는 가시 위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사방에서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속았구나!) 나는 대답했다. "장미 꽃을 밟으며 유쾌하게 걷고 싶은 사람은 되돌아 가시오 그렇지 않은 사람만 나를 따라 오시오."

결국에 보스꼬는 성모님께 꿈을 설명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의 안내자가 되셨던 거룩하신 동정녀는 나에게 물으셨다. '네가 지금 보는 것과 먼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느냐?' 나는 '모르겠어요. 설명을 주십시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분은 말씀하셨다. '네가 걸어온 장미꽃과 가시밭 길은 청소년에 관하여 네가 취해야 주의를 의미한다. 너는 금욕의 구두를 신고 걸어가야 한다. 땅바닥에 나온 가시들은 감각적인 애착, 교육자들을 참된 목표에서 이탈시키는 인간적인 호감과 반감들이다. 이들은 교육자를 진정한 목표에서 이탈시키고 상처를 입히고 그의 사명을 지연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화관에로 나아가서 화관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장미꽃은 너와 모든 협력자들이 지녀야 하는 열렬한 사랑의 상징이다. 가시들은 너희가 만나야 장애, 고통, 불쾌한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말아가. 사랑과 금욕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되어 가시 없는 장미꽃에 이르게 것이다'."

금욕은 절제와 마찬가지로 보스꼬는 우선적으로 교육적, 사목적인 견지에서 "완덕의 기초"라고 정의하였다. "기쁨의 교육학" 중심, 살레시오 생활의 매력적인 정신의 중심에 잇는 십자가의 신비에 무관하지 않은 부분이다. 멀리서 보스꼬를 바라보면서 그의 사업이 놀랍게 번창하는 것을 관찰하는 사람은 그가 걸어간 길은 순탄한 길이었다고 생각할 있다. 그러나 "하느님과 보스꼬" 체리아는 그의 책에서 기록하기를, 그가 길은 금욕의 가시들로 가득했다고 했다. 때어난 가정에서의 가시 간난과 반대가 사제의 길을 험난하게 만들어, 힘들고 머슴살이도 해야 했다.. 오라또리오를 창설할 때의 가시: 집주인들, 본당신부들, 당국자들, 학교기관, 정치가들 편에서 십자가가 왔다. 가톨릭 독서로 인한 가시, 생계 수단의 가시; 집안에는 먹여야 많은 청소년이 있었고 사업은 있으나 확실한 생활자금이 없는 . 그의 동역 자들에게서 오는 가시: 그들을 키워내는데 드는 희생과 고통스러운 이탈. 교구 당국에서의 가시: 오해, 끝도 없는 반대. 살레시오 창립은 갈바리오였다. 다른 종류의 가시도 있었으니 아픈 가시도 아니었으니 이는 건강 때문에 오는 것이었다. 보스꼬는 건강한 체격이었고 힘도 보통이 아니었다. 튼튼하고 장수하는 그런 혈통의 농가 후손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그가 일을 견뎌내던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번의 사경에서 살아난 일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가 일생을 통하여 치른 병들의 목록은 믿지 못할 만큼 길다. 각혈, 끈질긴 눈의 통증은, 마지막 가서는 오른쪽 눈의 실명, 그가 일러 "매일의 십자가" 했었던 발과 다리 붓기, 집요한 두통, 소화불량, 신열, 말년에 가서 호흡까지 곤란하게 척추의 약화, 기타 등등.

비오 11세는 그의 삶을 "진정한 그대로의 치명(...)"이라 정의하였다.

이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영혼들에 대한 사랑에서 받아들인 치명이었다. 그가 이렇게 하는 말을 들었다. "화살기도 하나로도 병이 낫는다면 나는 그것을 하리라." 깨뜨릴 없는 평화와 기쁨으로 장식된 치명, 믿을만한 증언에 의하면 그를 짓누르는 십자가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더욱더 환해지는 그런 기쁨을 담은 치명이었다.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 내렸던 영혼만이 이런 정도에 이룰 있다.

돈보스꼬의 삶은 진정으로 거대하고 간단없는 수덕적 노력으로 특징지어 있다. 그러나 그의 수덕, 고행은 다른 성인들에게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굉장해 보이지 않는다. 매일의 고행, 작은 것들로 고행, 자신의 의무 이행에서 오는 가볍지 않은 계속적인 금욕의 고행, 구체적 상황의 고행, 인간의 공동 삶에서 오는 고행이었다. 자신 안에 우리 주님의 고난을 "되새기기"위하여 방법은 부족함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추위와 더위, , 사물과 사람들과 사건들..... 금욕적으로 살기 위하여 방법은 많이 있다."

그의 유언서 에서 읽어 보자. '너희에게 어떤 특별한 보속이나 금욕을 권하지 않는다. 서로 고통을 참아줄 알고 삶의 슬픈 일들을 그리스도인다운 체념으로 견뎌낼 안다면(...)너희는 공을 쌓게 것이다."

그는 원장들 모두에게 이런 권고를 주었다. " 금욕은 의무를 부지런히 하고 다른 사람들의 성가심을 참아 내는 데에 있게 하여라."

자발적인 금욕의 중요성을 가벼이 여기기 않았으나, 순명에서 오는 것을 중히 여겼다. "보속의 행위를 따러 하느니 차라리 순명의 그것을 하여라." " 들어라. 자신이 변덕에서 어떤 다른 금욕을 하느니 보다 순명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보스꼬에게도 금욕의 동기는 분명하게 우리 죄로 희생되신 그리스도를 따라감에서 오는 요구였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끊으라고 하신다. 목에 십자가를 달라고 하신다."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통 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즐길 없으리라." 그는 되풀이 했다. "감각의 절제라고 부르는 괴로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상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승리하여 나오리라." 그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에 대한 신심을 사랑했다. 맘마 말가릿다가 피곤에 지쳐서 백키로 귀향하려 , 보스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벽에 걸린 십자가고상만을 가르켰다. 사람들이 그가 만든 가톨릭 독서의 어느 책을 금서목록에 넣으려 때도 그는 말할 없이 고통을 겪었는데 그때 그는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 나의 예수님! 당신은 제가 책을 좋은 목적으로 썼다는 것을 아십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랑은 십자가에 못박힌 사랑, 십자가 편에 사랑이라는 것을. " 주님, 얼마든지 십자가을 주십시오. 그는 너무나 알고 있었다. 영혼들을 구할 있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 구원 가운데 우리의 영혼도 구할 있다면 어떤 가시도 박해도 좋습니다."


5 : 성인 창립자


보스꼬는 성인 창립자들의 대열에 드는 분이다. 실제로 그는 위대한 영적 후예들의 시조이다. 남녀 살레시오 수도회와 살레시오 협력자회는 그가 직접 세운 단체다. 이외에도 성령에 의하여 생긴 다른 단체들이 있는데 역시 그의 정신으로 그의 사명을 제각기 특수한 기능으로 실현하고 있다. 이들 모두로 하여 "살레시오 가족" 되는 이들 모든 단체들은 모두 그의 창립자의 카리스마를 이어 받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보스꼬는 그가 '겪은 특수한 성령의 체험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물려 주었으며 이들은 꾸준히 자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상호관계 11)

성령의 은혜인 체험은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보다 닮게 하며, 또한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체험은 항상 신비적 혹은 초자연적 환시에서는 언제나 있는 - 암흑으로 엮어져 있다. 이러한 이중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힘을 초월하는 어떤 사명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특수한 압력을 깨우치게 되고, 그들의 주님의 손에 있는 오로지 겸허한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께 절대 순종이 필요한데 이는 무진장한 창의성인 샘인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이 만나야 하는 반발이나 반대 등을 극복할 아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위에서 쏟아지는 분명한 듯과 밑에서 솟구치는 어두운 세력이 서로 교차한다.

모순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것이 보스꼬의 성덕에서도 형태와 내용을 이루어 주고 있다. 그의 일생의 여러 가지 사건들은 그가 그의 성소와 성덕을 위해 창립자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은 결코 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창립자로서의 그의 삶에서 성령의 활동은 계속적이었다고 말할 있다. 하느님께서는 간접적으로, 시대의 표징이나 사람이나 사물을 통하여 그에게 생각을 주시고 말씀해 주셨고 직접적으로 내적 섬광, 예언적 , 꿈과 환시 등을 통하여 말씀해 주셨다.


자문해 봅시다, 성령의 활동은 그의 삶에 언제 나타났는가? 아주 막연하게나마 청소년에 대하여 지니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지요 전달자가 되어야 부르심을 언제 느끼기 시작했을까?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에게는 " 복음의 형태대로 살아가도록" 촉구했던 "게시" 순간이 있었다. 보스꼬에게 있어서는9세와 10 사이에 고향집에서 꿈이었다. 그의 나중의 고백에서도 점이 들어난다. " 나이 9세와 10 무렵에 우리의 일들이 비상하게 시작 되었다. 우리 마당에는 무수한 소년들이 있었는데 그때 어느 어른이 내게 가까이와 말씀하셨다. '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지 않니?' '가르칠 줄을 모르니까요.' '가거라, . 내가 너를 보낸다.' 이후 나는 어느 누구라도 알아차릴 있게 기쁘게 생활했다.."

꿈은 알려져 있지만, 간단히 다시 훑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린 요한은 소리지르고 떠드는 무수한 아이들 가운데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중에 어떤 아이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도 했다. "" "주먹"으로 그들을 조용히 하려고 했다. 그때 "존경할 만한 품위 높으신 어른" 그에게 가까이 와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성소) "그는 아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어라.(사명) 명령했다. 그들의 마음을 얻되 "때려서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방법),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며 덕행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그의 메시지의 중심 내용) 가르치라고 했다.

꼬마는 일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능력도 없고 배우지도 못했다. 그러나 속의 어른은 그에게 도움을 편다. "내가 선생님을 너에게 보내마. 선생님 밑에서 현명해 것이다. 그분의 지도 없이는 어떤 지혜도 미련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위엄이 가득히 보이는 여인" 등장한다. 그의 "손을 친절하게"잡고 "무수한 이리 " 다른 동물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 여기 일터가 있다. 네가 어디서 일해야 하는지 보아라. 겸손하고, 굳세고, 튼튼해져라. 동물들에게 지금 일어난 일들이 나의 아들들에게 있게 다오." 어린 요한은 눈을 들어 바라 보았다. 사나운 동물들은 어디로 가고 대신 만한 수의 온순한 양들" 보았다. 양들은 깡충깡충 뛰면서 어른과 부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는 설명이 듣고 싶었다. 그는 그만 답답해져서 울었다. 그러자 여인은 "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꿈은 여기서 끝난다. 순간은 보스꼬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우리는 믿고 있다. 이는 그에게 유일한 순간이었으니, 그날 주님은 손을 그의 머리 위에 얹으셨으며, 그의 존재를 온전히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그때부터 하느님은 신비로이 은혜를 주시고 보스꼬는 신비로이 이에 응답하는 일이 시작 되었다.

"아홉 때에 꿈은 보스꼬의 삶의 스타일과 사고방식을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각자의 안에 계시고 세상의 역사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는 방법을 바꿔놓았다. 성인은 이를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 꿈은 일생 동안 삶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꿈의 짜임새는 완벽했다. 보스꼬가, 교황 비오9세의 명에 의해 '주일학교 회고록' 이를 기술할 때는 60 가까운 때였기에 실현된 사실을 돌이켜 확인 있었지만, 아홉 때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에서 이러한 생각은 아직 자연적인 꿈에서 있는 신비 정도로 박에 생각할 없었다. 어떤 초성적인 사제직에 대한 에감이 강하게 들기는 했지만, 아직은 모호해서 두고 봐야 했다. 꿈이 여러 약간의 상이점을 두고 되풀이 되자, 이는 어린이의 마음에 신념을 주고 희망을 주었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의혹이 되기도 하여 그의 어린 시절은 힘겹게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체리아 신부의 표현을 빌면 "성소의 위기' 되어, 수도회에 입회를 생각하게 했다. 사제직에로 부르심 문제 되진 않았으니. 이에 강하게 이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구 신부냐 수사 신부냐였다. 그의 마음은 수도회 쪽에 기울어 있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들어 마음을 먹고 수도회 측에서도 허락이 되었다. 현명한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아주 이상한 '중의 하나였다고 그가 말한 어떤 꿈을 , 그는 마음을 바꾸어 신학교로 들어갔다. 마음 속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다른 , 다른 일터에로 주님은 너를 준비시키신다." 앞서 말했지만, 신학교 생활은 그의 성덕에서 결정적인 게기가 되었는데, 그의 창립자로서의 삶에 더욱 결정적인 계기가 것은 사제 기숙사 체류 이후이다.


속의 소년들


도리노시 인상은 그를 크게 놀라게 했다. 도시 변두리 마을에 있는 방치된 많은 청소년들의 비참한 모습, 일거리를 찾아 방황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에게 새로운 각오를 하게 했다. 그에게 내린 성령은 무수한 '가난하고, 위태롭고, 버려진" 청소년들의 애타는 음성을 통하여 이제 그이 귀에 울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가 꿈에 소년들이며, 이들에게 자신이 파견된 것임을 깨달았다.

보스꼬는 가난한 소년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그것도 있는 대로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헤매는 청소는, 특히 감옥에서 나온 그들을 위하여 일을 시작할 좋은 기회" 오기를 기다렸다. 하느님의 시각은 1841 12 8,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축일에 울렸다. 아씨시의 프란치스꼬 성당 제의 방에서 발토로메오 가렐리을 우연치 않게 만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교리 수업이요, 주일학교의 발상이다.

실제로 이후 소년의 초대로 다른 소년들의 따라왔다. 보스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들은 자라나는 소년들로서 공사장에서 벽을 쌓거나 바닥공사의 여러 가지 일을 맡아 했다."

이렇게 하여 당시에는 조금도 예기하지 못한 보스꼬의 거대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의 사제직이 어떤 방향으로 펴나가게 될지 알지 못했으나 하느님께서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였다. 아브라함처럼 그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수도생활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유명한 란테리가 창립한 동정 마리아 봉헌자회 쪽으로 기울었다. 선교사로 가고 싶은 마음도 매우 커서 목적으로 다른 나라 말들도 공부했다. 그러니 기파쏘 신부의 단호한 거절이 있자 이러한 모든 게획을 포기했다. 어언간 사제 기숙사 체류의 3 기간이 끝나자,, 대교구의 사목활동에 참여할 순간이 왔다. 그에게 선택할 있도록 다음 세가지가 제시 되었다. 사제 기숙사의 강사, 부틸리에라의 보좌신부, 바롤로 후작부인이 세운 성녀 필로메나 병원 원장겸 위안소에서의 보렐 신부의 보조자. 그는 스스로 결정하려 하지 않았다. 가파쏘 신부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말했다. "저는 청소년들을 돌보는 것을 좋아 합니다. 그렇지만 신부님 생각대로 따르겠습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뜻으로 보렵니다." 그의 고백 신부는 물었다. ' 순간 자네의 마음에 있고 자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즉시 대답했다. "도움을 청하는 많은 아이들입니다."

가파쏘 신부는 현명한 사람답게 점을 두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자를 불러 명쾌하게 말했다. "짐을 싸가지고 보렐 신부에게 가게(...).하느님께서는 청소년들을 위한 자네의 모든 보살펴 주실 것이네."

세가지 제안 중에서 이것은 그의 천성에 가장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섭리적이었음이 드러났으니 사제 기숙사에서 시작한 주일학교가 위안소로 와서 계속되고 발전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뚜렷한 방안도 없이, 그이 주일학교는 여러 가지 모험을 하면서 2년이 흘렀고 그러흔 사이에 수가 늘어난 소년들이 보스꼬의 생활을 완전히 차지 하려 하자 위안소 사업의 일을 동시에 하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바롤로 후작부인은 권위주의적으로 보스꼬에게 강요했다. "소년들 사업에서 손을 떼든지 위안소 사업을 그만 두시오." 보스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소년들을 선택했다. 결과 그는 불쾌한 소리를 들으면서 다소 냉정하게 해고 되었다.

'나는 불쾌한 소리를 기꺼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을 맡겼다." 이후 전적으로 보스꼬는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사람이 되어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몸바쳤으며, 아홉 때의 꿈은 여러 자세한 부분들을 제시 하면서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다. 꿈에서 자신은 동물들의 " 이상한 무리" 앞잡이가 되어 있었고, 여자 목동의 차림을 귀부인이 그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하며 이상한 무리를 인도하라고 지시했다. 걸어가는 동안 많은 동물들이 순한 양으로 변했고, 많은 양들이 또한 보스꼬처럼 그들도 꼬마 목자들이 되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항상 주일학교가 있었다. 부인은 주일학교의 미래의 발전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본관 건물, 회랑, 신학생들과 신부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람한 성당이 있으며 그의 안에는 다음과 같은 휘장이 옆으로 쳐있었다. "여기는 나의 , 여기서부터 나의 영광이 번져가리라.( 도무스메아, 인데 글로리아메아)"

그의 일생과 사업에 관하여 위로부터의 빛이 되고 미래를 미리 보았다고 해서 나날의 생활도 평탄하고 내적인 어두움도 없던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1846 4 5, 성지 주일에, 보스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심한 '감각적 ,, 영신적 " 체험했다. 그의 주일학교 위하여 뜰을 빌려 주었던 필리비 형제들에게서 쫓겨난 것이다. 그의 역자들로부터 버림을 당했으며, 기력도 쇠진하고, 건강도 약화되어 깊은 고독을 느꼈다. 다음 주일이 부활절인데 아이들에게 어디서 만나자고 말해야 할까! 끝없는 슬픔이 엄습해왔다. 구석으로 가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께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기도가 터져 나왔다. "나의 하느님, 어디에 아이들을 모아야 합니까? 알려 주세요. 아니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라도 말씀해 주세요."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는 피나르디 헛간 집을 세로 얻었고, 이는 성당이 되었으며, 옆에 붙은 좁다란 땅은 번째 주일학교의 고정된 장소가 되었다. 어려운 길을 지나 섭리는 그가 꿈에서 장소에로 드디어 그를 인도했으니, 이제 거기서 그는 그의 사명을 수행해야 했다. 그에게 창립자가 되어야 뜻이 더욱 분명히 서게 되었는데 1876 그의 원장들에게 다음 이야기에서 이점이 들어난다. "나는 바로 장소에서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의 발걸음을 하나하나와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많이 하고 싶었다. 여기서 하고 싶었다. 당시 가난한 신부였던 나의 같은 생각은 그저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가난한 자의 원을 이루어 주셨다."


밝은 어두움


이렇게 원들의 이루어져, 어떻게 사업이 그의 손을 통해 번창해 나갔는지, 성인은 설명할 길을 모른다. "하느님이 계획이 육화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 모든 것을 섭리하셨으며,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나는 거의 말이 없다. 자신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하느님의 길은 항상 신비스럽고 창립자 보스꼬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에게서 비롯된 적이 없는" 목표는 뚜렷했다. 버림받은 청소년에게 좋은 일을 하되 발도꼬의 풀밭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보스꼬 성인만이 가난한 청소년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제는 아니다. 당시에 다른 기존 시설도 있어서 그쪽으로 함세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그의 주일학교는 더욱 안심하고 나아갈 수도 있었다. 이런 생각들이 자꾸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으므로 누차 일일이 검토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알아 보면 알아 수록,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수록 , 어떤 기존 시설도 결국에는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일학교"(오라또리오) 대한 그의 경험은 너무나 뚜렷했고, 너무나 다른 시설들과도 달랐다. 그의 최초의 발상에 충실 하려면 그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혼자서 밖에 없었다. 그는 혼자서 서서히 흘려 이를 발전시켜 나갔다.. 옛길과 길을 통하여 이끌어 가신 성령은, "이미 탁월해진 동료"들의 도움을 받던 다른 창립자들과는 달리, 보스꼬 자신이 "선택하고, 교육하고, 양성시켜야 " 청소년들의 도움뿐으로 해야 함을 이해시키셨다. 1847 피나르디 성당을 입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관한 그의 흥미 있는 증언들이 있다.

"동정녀 마리아는 환시 중에 재가 일할 일터를 보여 주셨다. 따라서 나는 이미 구성된 어떤 계획이 있었고 , 거기서 조금도 떨어질 없었으며 떨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계획의 성공에 전적인 책임이 있었다. 내가 길을 일목 요연히 보고 있었고 사업에 필요한 방편마저 뚜렷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판단에 좌우되어 계획을 수포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1847 해에도 나는 나의 사명의 수행을 보장해 어떤 시설이 혹시나 있는지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무리 정신과 목표가 거룩한 시설이라 해도, 나의 목적에는 따르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들이 바로 나의 어떤 수도회 입회를 막았다. 나는 결국 혼자 남았다. 공동생활에 이미 익숙하고 사도적의 여러 활동에도 경험이 있는 어떤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꿈들에게 내가 본대로, 자신이 선택하여야 하고, 가르쳐야 하고, 양성해야 어린 소년과 함께 하기 위해 그들을 찾으러 나서야 했다."

이러한 중에는 하느님께로부터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 불가피한 사명을 받았음을 확신한 창립자의 뜻이 보인다. 후대에게 성령의 특수 체험을 전해야 하기에 자신의 성공에 "절대적 책임" 느끼는 이의 확신이 보인다. 이러한 불굴의 확신은 미래의 삶에 대한 모든 불확실성과 실제적인 의심을 이겨내고, 뚜렷한 목표를 향하여 똑바로 나아가는 어떤 예언자를 연상시킨다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신비 가들에게 종종 일어나는 그대로, 보스꼬는 그의 꿈에서 - 선교지의 꿈처럼 천문학적인 차원의 꿈들도 있으니 자아를 벗어나 보스꼬 자신 안에 속속들이 침투하는 환시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오밤 중의 번갯불과도 같았다. 무대를 한번 환희 비춘 다음, 다시 깜깜한 암흑에로 돌아온 같았다. 다시 평상시로 돌아 환시자는 그가 바를 기억해 내고, 이야기 하고, 글로 썼다. 그런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니, 보스꼬가 자서전을 , 수정하고 다시 쓰고 말을 바꾼 수고로운 작업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F.차를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어떤 일정한 수도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고, 이를 실현하려면 구조적인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창립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교회에 있어야 새로운 현존의 형태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 아직 알지 못하였다. 때로는 자신이 세워야 수도회가 어떤 형태이어야 할지도 막연했다. 다만 창립자 자신의 눈에 역력히 드러나는 것은 점진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하는 그의 사업의 풍요성이었다. " 보스꼬의 생애는 다음과 같은 서술 그대로 이다. "나는 항상 주님께서 일러 주시는 대로 주위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예측할 없는, 불확실 하고 곤란한 상황들이 생길 마다 성인은 오래오래 인내로이 영적 식별의 작업을 했다. 그러므로 보스꼬에 대한 더욱 정확한 개념은 하느님과 싸우고 있느느 야곱의 그것이며, 날마다 예측할 없는 난관들 때문에 항상 땅에 다리를 붙이고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만사가 보스꼬에게 분명했지만 만사가 안개에 싸여 있었다. 이러한 이중성은 바로 그의 계획이 하느님의 손에 있다는 객관적인 표시였다. 고속도로 발전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고, 모험적인 전진도 하고 적절한 수정도 하면서 발전할 것이라는 표였다.

피나르디 집을 입수한 것은 약속의 땅에의 도착과 같았지만, 소유주가 것도 아니고, 꿈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하게나마 도리노 생활을 위하여 하느님과, 가파쏘 신부와, 그의 절친한 친구들에게 의탁하며, 부심해야 했다. 사제직 사도활동에서도 친구들과의 의견이 달랐다. 처음에는 악의라기 보다는 몰이해의 희생이 되었다. 본당 사제들의 뜻과도 어긋났기에 빗발 같은 비난을 당했다,"(스텔라) 후에도 보스꼬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어느 그는 바르베리 신부에게 이렇게 털어 놓았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반대하는 셈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법조계가 전적으로 우리를 반대한다. 기존 수도회들도, 자기들은 쇠해가는데 우리는 자꾸 발전하니까 우리를 마지 못한 눈으로 보는 수도 있다. 교구에서나, 가족들에서나, 사회에서 우리 쪽으로 역풍이 분다.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들이 되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의 사업의 주인은 하느님으로, 하느님이 이끌고 가시고, 보스꼬 자신은 도구일 "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확신은 모든 난관 앞에서 불요 불굴하게 했다. "바로 이러한 동기로 하여 나는 모든 역경과 박해 중에서도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셨다."

실제로 발도코에서는, 여러 어려움 중에, 사이에, "특별한 성령의 체험" 피어났으니, 이는 교육적으로 사목적으로 새로운 것이었고, 결과는 보스꼬의 예상을 훨씬 능가했다. 이러한 체험에서 도메니꼬 사비오와 같은 우수한 소년들이 함께했다.

1855 3 25 보스꼬 방에서, 증인도 없이 조용히 루아 신학생은 16세로서 보스꼬의 손에서 유기서원을 발했다. 얼마 다른 서원 자들이 성인의 손에서 약속을 발했다. 이어서 그의 수도회는 신속히 성장했다. 처음에는 피에몬테, 다음에는 이탈리아, 그리고 세계로 확장되었다. 이제 보스꼬는 그의 카리스마를 무한 인내로 가꾸어가야 아니라 역사에 이를 뿌리내리게 하고 교회의 인가와 인정을 받게 해야 했다. 일은 그에게 수십 년이 걸렸다.


수도회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살레시오 수도회가, 그의 회헌이, 인가를 얻게 이야기는 순교의 이야기와 같다. "수도회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많은 반대와 공격을 당해야 하는 일인지를 미리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나는 아마 일을 시작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관계당국으로 보낸 수많은 보고서들이 증명하거니와, 그의 생각은 교회 당국의 생각과 들어 맞지 않았다.

1847 성청에서 회헌을 인가 받게 까지도 보스꼬는 실제로 되어져 나온 그런 수도회를 세울 생각을 같다. 1878 10 18일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 3개년 서원을 넣었다. 애초에 나는 주교를 돕는 수도회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아 달리 밖에 없게 되자 3개년 서원은 우리에게 이득보다는 장애가 되었다." 일년 같은 의견으로 알라씨오에 모인 원장들에게 말했다. "수도회에 대한 다른 생각 때문에 3개년 서원을 넣었었다. 현재와는 아주 다른 구상을 했었다. 그러나 없어 그렇게 되었으니, 그렇게 되게 둡시다." 그러면 교회는 보스꼬의 카리스마를 뒤엎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교회헌장' 말하는 대로 교회의 임무는 "성령을 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검토하여 좋은 것을 간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를 탄생시키는 성령은 교회의 혼이며 따라서 반대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자. 보스꼬의; 수도회를 여러 다른 수도회의 대열에 들게 성청은 그의 수도회로 하여금 자신으로 남아있으면서도 가장 전파될 조건을 갖추게 주었다. 교회의 여러 사건들과 지침의 압력하에서 성인은 아직 불투명한 여러 측면들을 투명하게 했다. 사실상 당시의 사건들은 은총의 전달자 역을 했으니, 애초에 그가 구상했거나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은 그대로의 수도회가 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형성 되어진 수도회가 그가 원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싫어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스텔라)

수도회가 본래의 독창성과 현대성을 잃었다거나 보스꼬의 진면모나 생각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점에 관하여 성인의 3 후계자인 필립보 리날디 신부의 다음 생각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그가 구상한 수도회는 진짜 수도회였지만 전통적인 외적인 면은 갖추지 않았다. 수도 정신, 복음적 권유를 완전히 실천하려는 그것만 있으면 족했다. 나머지는 시대의 필요에 따라 융통성 있게 있다고 믿었다. 인류역사의 안에서 계속 생겨나는 모든 형태의 선업에 맞게 하려는 이러한 융통성은 우리 수도회 회칙의 고유한 정신이다. 정신에 어긋나는 변화가 들어오는 날은 우리의 수도회로서 종말과 같다. " "우리의 존경하올 창립자께서 그의 수도회를 세울 가지신 개념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그의 교육법의 핵심적인 정신을 엄격하게 보존하면서, 동시에 부수적인 것들이 시대에 낙후되고 세월에 따라 변하게 것을 방지하는 그런 천재적 현대성이 들어 있다. 우리의 회헌에는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무궁한 생명력의 숨결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는 어느 시대에나 맞으며 항상 풍부한 생명력이 새로이 샘솟는다."

" 없이 그렇게 되었으니 그렇게 되게 둡시다"하는 그의 말은 따라서 고통스러운 포기가 아니라 끝까지 예언자의 기쁜 "아멘"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살레시오 회헌의 서언에 실린 엄숙한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들인 여러분, 우리의 회헌은 1874 4 3일에 성청으로 부터 최종적으로 인준되었다. 사실을 우리는 우리 수도회의 가장 영광 주의 하나로 알아야 것이다. 우리 회헌을 지키는 일은 안전하고 확실한 기반이 된다는 것이며, 이를 인준한 교회의 최고 으뜸의 판단이 무류이니 회헌들도 무류라고 있다."

성인에게 있어 회헌은 사랑에 이르는 "안전한"길일 아니라, 무궁하게 발전하는 힘찬 그의 카리스마와 그의 정신을 감싸 주는 황금 겉옷이기도 했다. 이러하여 회헌의 중요성과 실천성에 관한 그의 간곡한 당부가 이해 된다.

"회헌의 모든 조항을 나의 기념으로 여겨다오." "수도회 정신을 전파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헌의 준수이다." "좋은 일이라도 회헌에 반대되면 하지 말아라."

아브라함은 그의 여행의 무렵에 가서야 자신에 하느님의 뜻의 깊이와 넓이를 파악했다. 보스꼬에게도 같이 있다.

1887 5월에 로마의 예수성심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 이는 그의 서거 개월 전이다. 15회에 걸쳐 그의 눈은 눈물로 붉어졌다. 그는 고장에 세계에 있는 듯했다. 벡키의 작은 집으로 돌아와, 번째 꿈에서 들은 말을 다시 듣고 있는 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6 : " . . 삼덕" 으로 일하기


성체성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존재양식과 생활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 시키고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소속시켜 준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자녀가 되고, 인간이 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 생활" 가능하도록 성령은 당신 은혜들로서 우리 안에, 신앙과 사랑과 희망의 힘찬 세계를 불어 넣어 주시고 따라서 우리를 완전히 하느님의 세계로 몰입시키신다.

아는 바와 같이, 대신 덕들은 내적 생활의 요체를 이룬다. 어떤 특별한 능력의 ""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존재 구조와 차원전체를 이룬다고 함이 합당하다. 인격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덕들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성모마리아에게 있어 믿는다는 것은 가득 희망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어떤 분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을 의미했다.

성서에서 신앙과 희망과 사랑은 항상 생생하게 하나를 이룬 모습으로 나타난다. 복합적이면서도 하나인 영적인 태도에서 하나이면서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그런 모습이다. 사랑은 신앙과 희망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과 희망은 사랑에 의하여 힘을 얻을 때에야 살아있다.

그들 하나하나의 덕을 따로 떼어 실천한다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을 사랑으로 집약시켜 생활화한다는 일은 중요하다. 보스꼬는 그의 신앙, 사랑, 희망의 체험을 이론화한 일이 없다. 다만 다양한 활동 안에서 이들을 밀도 있게 생활화 했다. 점에 있어 트로화넬로의 강론은 의미가 있을 있다. 1896 9 18 피정의 마무리 강론으로 것으로 10개의 금강석에 관한 꿈의 전반부를 말하고 있다. 보스꼬는 "신앙, 희망, 사랑으로 일하라."라는 주제를 전개한다. 꿈에 나오는 인물이 입고 있던 망토에서 빛나고 있는 "금강석" "" 연결시키고 있고 인물은 보스꼬라고 있다. 다섯 개는 앞가슴에 있는데 세상에 보여져야 하는 살레시오 회원들의 면모를 그리고 있다. 다섯 개는 등에 있는 다소 감추어져 있도록 되어 있다.

가슴에서 빛나고 있는 금강석은 "신앙, 희망, 사랑"이며 사랑은 심장부분에 있다. 오른쪽과 왼쪽 어깨에는 "" "절제" 금강석이 빛나고 있는데, 이들은 살레시오 문장에 나오는 것들로, 위에 것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리날디는 기록한다: "살레시오 생활은, 그의 활동 면에서 , 사랑에 의하여 힘을 얻고 신앙과 희망으로 빛을 얻는 안에서 일과 절제로 되어있다."

보스꼬는 살레시오 회원의 면모를 이상으로 묘사할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보스꼬가, 모든 다른 성인들처럼, 3대신덕을 중히 여겼다는 것은 그의 제자의 전기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그는 도메니꼬 사비오의 전기에서 그의 생생한 신앙, 굳은 희망, 열렬한 사랑을 예찬하였다.

성인의 생각을 정확히 알아 보자.


신앙으로 일합시다.


보스꼬는 설명했다. "멋지다.""잘한다."하는 소리를 들으려는 인간적 속셈으로가 아니라, "주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하여", "기다리는 상급을 생각하면서" 하자고, 신앙은 우리 성인의 생애와 사업과 활동과 그의 현실 전체를 위로부터 비추어 주었다. 신앙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깊은 각성을 그에게 심어 주었다. 그를 인도하였다. 하느님의 눈으로 그리고 그분의 성령으로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했다. 신앙은 진정 그의 모든 행동의 이유가 되었다. 그는 말했다:"신앙은 바로 모든 것을 하게 하는 그것이다. 신앙의 없이는 인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신앙은 매일의 현실을 비판적인 눈으로 초성으로 보게 했고 크나큰 신앙으로 이들을 맞서가도록 그를 인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지극히 어려운 시련 가운데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요구된다." 바오로를 인용하여 가르쳤다:"시련이 오면 용감하게 "신앙의 방패"(에페 6,16) 끌어 안으라고 잘된 일에 대하여 기뻐할 있을 때에도 아직 해야 남은 것을 바라보았으며 신앙이 충분치 못해서 더하지 못했다고 애석해 했다. "100배의 신앙이 있었다면 100배는 했을 것을", 그러나 그는 놀랄만한 신앙인이었으니 "눈에 보이는 분을 뵙기라도 하듯이"(히브11,27)살고, 일하고, 기도했다. 회합 그에게 의견을 물으면, 즉각 대답을 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필요한 빛을 얻으려는 사람처럼 눈을 하늘로 들어 기다린 다음에 신앙에 충만한 대답을 주어다.

체리아는 기록했다: "그의 생애가 신앙의 훈련장이었다. "생각도, 감정표현도, 사업도, 과감한 일들도, 고통이나, 희생이나, 신심수련이나, 기도 정신도 모두 신앙에서 번져 나온 불꽃이었다." 그의 하느님께 대한 그의 신뢰가 무한 했으면서도 매우 자주 되풀이 했다:

"사업이 것이라면 무너져도 좋다."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단언을 했다:"신앙의 빛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만,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발견하고 우리가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사도 17,28) 사실을 인정하고, 만사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가까운 사람이거나 사람이거나, 모든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 뵈옵고, 현세 사물의 참된 의의와 가치를 자체로서나 또는 인간 목적에 관련시켜서 올바로 판단하게 된다."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고령,4). 보스꼬는 이러한 말을 미리 알았다고는 수는 없었으나, 그리스도인다운 감각으로 이미 성령의 감도로 정확하게, 이들을 실천했었다.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 보였으나, 그의 신앙은 모든 것의 혼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눈에 보이는 분을 분이다.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했다. 에지디오 비가노는 기술했다:" 보스꼬는 거의 초성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 전체를 알아차렸다. 학자로서 그리고 저술가로서 그는 구세사의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하여 열광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색가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이야기꾼, 구세사의 이야기꾼, 성인들의 생애와 교회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그의 아들들이 야고보가 말한 "활동적인""역동적인"(야고2,17)신앙을, 골짜기에 산봉우리를 산봉우리에 골짜기를 옮겨 놓을 정도의 신앙을 갖도록 강조했다. 그는 신앙의 적극적인 보호자였으니 신앙을 위하여 청소년의 세대의 "신앙의 둘도 없는 교육자"로서 여러 목숨을 내걸었었다.

"신앙을 가지고 일하라" 그의 권유는 그의 정신에 뿌리 박힌 확신이었을 아니라, 자신의 삶의 표현이요, 존재의 요약이기도 했다.


희망을 가지고 일하라

보스꼬는 언급한다. "피곤하거나, 걱정이 있을 때면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자. 크나큰 상급이 마련되어 죽을 때에, 영원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하늘로부터 위로를 얻던 의인들 같이 하자." 이는 바로 그의 고유 사고방식이었다. 그의 정신은 과거에 고정되어 있거나 당장에로 갇혀 있지 않고, 거의 본능처럼, 궁극적인 실체를 향해 나아간다. 지상 활동에 온전히 몰두 되어 있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발은 땅에 딛고 걷되 보라. 그의 현실주의를 - 마음은 하늘에 살아라.- 보라 그의 희망을-." 그가 지닌 희망은 그을 행동에로 투신케 했다. "용기를 내세요. 일합시다. 언제나 일합시다. 위에서 우리는 영원한 휴식을 갖게 것이니까"하고 그는 자주 되풀이 했다. "항상 일하라"라는 말은, 대체적으로 많은 것을 의미할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구원 계획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일을 위하여 수고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희망은 신앙과 사랑처럼 보스꼬의 삶에서 항상 찾아볼 있던 태도이다. 희망은 성부와 예수님과 마리아의 도우심에 무한히 신뢰하는 것이며 모험적인 일에 과감히 착수하는 성령의 격려의 음성이다. 희망은 비록 날개가 있다 해도 어둠과 유혹이 따르고 싸움과 투쟁과 시련을 동반한다. " 동안 나는 희망과 아울러 번민으로 산다" 그는 마리아 아쑨따 후라싸띠 후작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이러한 견지에서도 보스꼬는 희망의 거인임을 드러난다. 왜냐하면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했고 " 하느님의 힘을 믿으면서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시도할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되풀이 했다. '나를 위로하시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필립4 .13). 용기를 내자. 인내가 부족해지려 때면 희망을 힘을 얻도록 하여라. 그리고 말했다. "난제 부딪혀 갈팡질팡 때가 있다. 그러나 용기를 내자. 하늘에 가면 있다. 그리고 버릇처럼 주님께 대한 가득한 신뢰로 오른 팔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현재의 고통은 우리 안에 나타날 미래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로마8.18)"라는 바올로의 말씀은 그가 인용하던 주제였다. 다시 말해서 그의 희망은 주님의 빠스카와 성령 강림과 교회의 실제와 성사들에서 오는 희망으로, 성령의 열매들의 "이미" 닻을 내린 희망이었기에 흔들림이 없었다. 역사 안에 심어진 거룩한 생명의 성장의 필연성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결코 잃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희망의 "아직 아니" "이미" 불가분의 것으로, 씨앗에 들어있는 잠재적 생명력과 같은 것이다. 보스꼬의 희망은 자신의 성화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불굴의 활동력에서 나오는 매일의 계획에서 생활화 되었다. "살베, 살반도, 살바띠 안녕하세요. 만남을 구원하면서 자신을 구원하시오." 이는 "이미" "아직"으로 그의 희망의 인사였다.

보스꼬의 생애의 희망의 가장 훌륭한 열매들로서 "이미"라는 신앙의 확신에서 나오는 "끼쁨", :"아직"이라는 조건에서 오는 시련에 대한 꾸준한 "인내". 그의 교육적인 민감성, 거기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감성, 관용, 민첩성, 거룩한 것들의 있는데, 이를 모두는 자신의 미래가 헛되이 끝나지 않으리라고 믿고 바라는 이들의 고유한 덕들인 것이다.

보스꼬가 제자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일하라" 말할 , 이는 천국을 바라보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천국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하느님 아버지와 성모 마리아의 전능하신 도움을 믿으면서 세상을 부패시키는 악의 씨들을 쳐부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낙관주의적 정신으로 선을 키워나가면서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라."


사랑으로 일할


이는 보스꼬가 가장 강조하던 점이니 사람들이 하느님 자신이 드러나므로 그분의 모상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의 완성이며 모든 덕의 기본이다. 복음은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한다. 하느님은 항상 윗자리에 두었으니 사랑만이 실제로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원인이요 샘이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사랑할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리고 은혜 위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접목된다(성인 교리서)" " 애을 가지고 일하라" 그의 강론을 보면 보스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길게 다루는 것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의 절대 우위를 부여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 그분은 사랑 받으시고 섬김을 받으실 유일하신 분이다. 그분을 위하여 하는 아무리 작은 선도 갚아 주시는 분이다. 그분의 자애 지극한 아버지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에레31.3참조)"

보스꼬의 하느님께 대한 생각은 하느님이 우리를 아버지처럼 끝없는 자애로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떠나 일이 없으며 당신이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 마련하신 상급에 대한 생각에서 분리되어 일이 없다.

하느님은"무한히 부유하시고 무한히 관대하시다. 당신 사랑을 위하여 하는 작은 하나까지도 너그러운 보답을 내리시며 사랑으로 우리가 하는 어떤 작은 하나까지도 매우 풍성하게 갚아주신다." 말하곤 했다.

"사랑으로 ", "사랑으로 일할 ", 이는 그의 전체이기도 했고, 그의 가장 부탁이기도 했다. 우리의 인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 때문에 숨쉬기를 바랬다. "눈은 하느님을 위하여 보고, 발은 하느님을 위하여 걷고, 손은 하느님을 위하여 움직이고, 심장은 하느님을 위하여 뛰고 우리 전체가 하느님을 위하여 쓰여져야 한다." 이러한 부탁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그의 삶의 반영이었다. 이를 증거하는 것으로 다른 많은 것들 중에 갈리에로 추기경의 말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의 얼굴에서, 그의 전체에서, 강론대 위에서나, 고백실에서나, 사적이거나, 공적인 강화에서 그리고 가족적인 면접 자체에서도 빛났다.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그의 모든 말은 마음에서 울어나는 투명한 사랑을 보였다."

" 사랑은 그의 생애의 하나의 소원, 하나의 열망이었다." 보스꼬는 비록 능숙하게 이를 숨기는 재주가 있다 해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크게 붙들린 사람이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그의 사랑도 이에 못지 않게 강했으니 그들에게서 주님을 간단없이 뵈었던 때문이다.

이웃, 특히 가장 버림받은 청소년에 대한 그의 사랑을 우리가 이미 살펴 대로, 그에게 모성적인 섬세함, 형제적 사랑, 양선, 이해, 감탄 만한 희생 심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에는 근본적으로 그의 고유한 얼굴도 있으니, "사목적""교육적"사랑이다. 사목적 사랑은 착한 목자 그리스도, 성부의 파견자, 당신 집의 열정으로 불타시던 그분의 구원 열정에 참여함이다. 에지디오 비가노는 말한다:"이는 신앙에서 오는 사제적 사랑이다. 구원의 사업에서 악에 대항하여 싸우고 이웃, 특히 청소년을 도우려는 희망에 불타는 사제적 사랑인 것이다."

사목적 사랑은 "다미히 아니마스"(나에게 영혼을 달라) 수덕이다.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수고이다. 그는 단언했다: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 내신 것은 이웃을 위해서다." "각자는 자신의 정신적 무기로, 영혼들을 구원하려 목숨을 바칠 사랑으로, 무장하라."

사목적 사랑과 동시에 교육적 사랑으로 일한다는 : 가지는 서로 비슷하나, 교육적 사랑은 이성, 종료, 자애에 바탕을 그의 예방교육 방법론에서 나온 것이다. " 교육 방법의 근간은 바오로의 고린토 전서 13장의 말씀에 있다" 보스꼬는 그의 "예방교육법" 해설서에 기록했다. 예방교육법적 사랑은 양선 자체가 방법인 사랑이며 예수께서 어린이들, 가장 미소한 자들에게 보이시던 부드럽고 강한 사랑을 담고 있다. 성인은 말했다:"예방교육법은 사랑이며,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다. 청소년 교육은 마음의 일이다. 사랑은 마음들을 묶어주는 매듭이다." 청소년 사이에서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랑은 "마음에는 사랑을 지니고 일에서는 인내를 길러야 한다." 그리고 살레시도적 일은 우선적으로, 계속적인 교육적 관계 안에서 되어 지는 까닭에 겸손이나 순결한 마음 등의 다른 덕들이 갖추어 있기를 원했다. "사랑은 정결, 겸손은 항상 동행하는 영역의, 어느 하나도 다른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제시할 가장 좋은 실천적 모델은 프란체스꼬 살레시오였으니, 구세주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그의 온유함, 그의 부드러움이 좋았다. 그는 대리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사랑하는 달마쪼신부, 하십시오. 그러나 항상 프란체스꼬의 온유함과 읍의 인내로 하십시오."

현대는 일을 우상화한다. 그러나 수평적이며 활동 위주적인 전망으로 오로지 복지사회를 목표로 하는 그런 차원의 일일 뿐이다. 보스꼬 역시 일을 높이 평가했으나, 절대화 하지는 않았고, 인간의 존엄성 보다 위에 두지 않았다. 오로지 인간의 봉사를 위한 사랑의 참된 표현이 되게 했다.

그리스도인 답게 ..애의 실천적 훈련으로서, 일을 이해하고 행동했다. 초성적이며, 성화시키는 그런 일이었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하느님과의 일치, 신적 생활의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7 : 활동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만남의


이미 말했듯이, 보스꼬의 삶에는 강물의 밑바닥처럼 기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기도만이 성인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만나던 유일한 곳은 아니었다. 기도도 일치하면서도 기도만큼 영웅적으로 알고 실천한 것이 있었으니, 이는 하느님과의 실천적 활동적 일치로서 이는 활동 안에서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일치에 관하여 이런 표현이 있다. "활동적인 생활 중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경청하고 내어 드리는 항구한 자세 때문에 활동의 와중에서 성령과 친밀하게 일치할 있다. 그런 하느님은 그분의 전적인 영향 하에서가 아니면 생각하지도, 사랑하지도, 원하거나 행동하지도 않게 우리를 이끄실 밖에 없다."

"실천적 일치"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창조적, 구원적 행위에 따른 차원에서 참여이다. 이는 3가지 활동으로 분류할 있다. 사도직, 자선적, 세속적 보스꼬는 일을 통해 하느님께 갔으며 다양한 활동이 주님과 만나는 일상적 장이 되게 했다. 간단히 살펴보자.


사도 활동을 통한 일치


보스꼬의 사도 활동은, 좁은 의미에서 어떤 다른 자선 활동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적 활동 자체의 계속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활동을 통하여 당신의 구언 메시지를 전하시고 당신의 신적 생명을 나누시며 이런 활동으로 보스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했다. 사제서품의 힘으로 그분의 도구였다. 이는 그의 지향만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우리의 구조 자체가 영적이라는 의미가 된다. 직접적으로 구세주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이럴 사도활동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매우 쉽게 준다, 초성적 차원에서 은총을 나누어 주려면 사도는 진지하게 자신의 사도활동에 있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자신에게서 나와 (=탈혼) 그분과의 흐름에 들어가 점차 그분을 닮으면서 열심히 활동에 열중하기만 하면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 활동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공의회가 사제들에게 권고한 것이다. "사제로서 성덕에 이르는 고유한 길은,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사제로서의 임무를 게으름 없이 성실하게 수행하는 그것이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고령13). 자신의 사도직-복음화 활동, 성사집행, 기도 등을 열심히 하기- 이것이 보스꼬가 자신의 하느님과의 일치를 열심히 살던 위대한 수단의 하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얼마나 그의 사제직이 그의 생애의 구심점이었으며 원칙이었는지를 우리는 앞서 살펴 보았다. 사제직 수행보다 주님께 충실 하는 다른 어떤 사도직을 그에게서 상상하기란 실제로 어렵다.

"청소년의 친구","노동자들의 친구", " 시대의 선구자", 였지만 무엇 보다도 먼저, 주님의 심부름꾼, 주님의 일꾼,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하고 행동하는 하느님의 예언자였다. 다른 사람들의 그의 사업과 과감성에 대하여 놀랄수록 그는 더욱 겸손히 자신을 창조주 하느님 손에 있는 미약한 도구일 뿐으로 알았다. 그는 어느 "일을 진행시킬 수단을 찾아 내는 일은 창조주 주인의 일이지 도구의 일이 아닙니다. 라고 고백했다. 그의 사제직 수행에서 보스꼬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삼았다. 예를 들어서, 미사를 거행하는 그의 태도, 고백성사를 주는 모습, 혹은 그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누구나가 이를 있었다.


자선 활동

활동가인 보스꼬가 사도활 동을 통하여 얼마나 쉽게 하느님과 일치하여 살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방금 언급했다. 이제 하나만 덧붙이자. 그가 하느님과 친교를 누르며 살게 하는 특별한 길이 하나 있었으니, 이는 자선활동이었다. 그의 20권에 달하는 전기에 이런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를 점검해 보는 일이 지금 우리의 일은 아니다. 또한 그의 노고에 의미와 내용을 주던 그의 열심한 자선활동 정신을 되풀이하지도 않겠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하느님과의 꾸준한 일치의 특혜적 수단이 되었지만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보스꼬의 사목적 교육적 자선활동들은 물론 사도 활동에서처럼,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의 연장은 아니지만 그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그의 하느님과의 친밀의 능력이 얼마나 것이었는지에 대하여는 물을 필요가 없다. 이유는 가지이다.

첫째는 이웃을 향한 모든 선행, 형제애의 모든 관계는 항상 성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사라이신 하느님의 행위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든 자선활동은 예수님의 계명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라는 계명을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덕의 요체는 애덕에 있고 애덕은 하느님께로부터 이웃을 분리시키지 않으니, 모든 사랑의 최고의 원천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하여 그레고리오, 베르나르도, 그리고 현대의 모든 성인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그리스도 신자의 삶에서 애덕의 임무를 제해 놓았던 때가 없다. 기도와 애덕의 의무 중에서 항상 애덕의 의무가 시급하다는 것은 누구나가 주장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분명한 뜻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참고 마태25,31-46) 보스꼬는 항상 이러한 시각에서 사랑해 왔다. 보람 있게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 안에 애덕을 지녀야 한다","우리를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굳게 결속시키는 것은 애덕의 유대다"라고 그는 말했다. 청소년은 하느님의 기쁨이요, 눈동자임을 확신했고 끝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총애 했다.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 바로 나의 삶이다."라고 하며 그들을 위하여 "재산과 생명" 바쳤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타고난 천성에서만은 아니었다. 이것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것이긴 했으나 그리스도의 사목적 사랑이 그를 밀어 그들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특혜적인 장소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가난하고 버림 받아 구세주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열심히 그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궁리해 냈다. 그들 안에서 주님의 얼굴을 뵙고 접한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말할 있다.

이웃을 위하여 보스꼬는 문자 그대로 자신을 내주었다. 그러나 이웃 중에서도 특히 청소년은 그가 주님을 만나 뵙는 매일의 성사였다고 것이다. 주고 받는 심오한 기쁨이 그를 채우고 있었다. ",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종일을 뛰다가 피곤에 지친 저녁을 맞는 기쁨이여."


"세속 활동" 통한 일치


다분히 세속적인 활동, 보스꼬의 생애에 가득 넘치는 그런 일상적인 노동, 직업적인 , 학교, 인쇄, 문화활동 등에서도 그는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 그분께 올라가는 길을 보았다.

특히 그저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그것이 건전한 일이기만 하면, 그에게는 하느님 행동하심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니 물건들과 사건들 안에 쓰여 있는 하느님의 좋으신 뜻을 읽는 것과 같았다.

보스꼬는 "일은 주님께, 성모님께. 마음으로 일치하고 가능한 하려고 하는 바른 지향으로 성화 시키기만 하면 된다"라고 바른 지향을 가장 중요시 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그의 생애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목표로 했다. 브라이도 신부가 지적한 대로, 그의 시대와 요구에 대한 진단 평가에서 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세속적인 같아 보이는 그러한 활동에서도 보스꼬의 동기는 분명히 숭고했다. 하느님 나라와 영혼들에 대한 관심이 모든 위에 있었다. 그의 측근들에게 말했다. "수도자들의 시대는 지났다거나, 수도원이 각처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 세상 사람들의 무슨 말을 해도 우리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께 협력할 서이다." 그리고 파리에서도, 피에트로부르그에서도, 런던이나 피렌체에서도, 무기와 전쟁과 정복과 돈에 관한 외에는 토론하는 일이 없다고 개탄했다.

바른 지향을 통한 일의 성화는 떼아르드 샤르댕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활동에 소중한 혼을 불어 넣는다. 바른 지향, 하느님 만을 오로지 섬기려는 의지는, 진정으로 황금 열쇠인 것으로 우리의 내면 세계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열어 주는 것이다.

지향은 성령의 삶의 매우 긍정적인 가치이다. 우리는 행위의 지향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건전한 현실주의로 보스꼬는 착한 지향을 착한 활동에서 분리시키지 않았다. 지옥을 포장한 착한 지향 보다는 활동을 중시했으며, 일이 그렇게 완벽히 되지 않아도 괜찮아 했다. 가능한 만큼 하라고 요구했고 가능한 만큼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바른 지향은 보스꼬가 세속적인 일을 성화시킨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들은 그의 직분상의 의무 였다. 오늘날은 강압이나 의무 따위는 모두 침묵 속에 잠재우려는 경향이다. 보스꼬 시대는 의무의 영성 대단한 전성을 이루었었다. 세속적인 분야에서도 칸트의 윤리는 추종이 있었다. 어떤 곡해된 해석 없이, 제대로 가치가 인정되던 시대이다. 실제로 정당하게 확실히 말할 있는 것은 현실은 세속적인 차원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느님의 질서는 우리의 모든 순간에 충만해 있다. 수천 수만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우리 현실의 의무를 통해 우리 안에 인간이 자라난다.

신망에의 시각으로 사물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면 할수록, 현실에 계시는 그분의 뜻에 맡기기가 쉽다. 보스꼬는 이러한 시각 안에서 살았다. 실제로 그는 정확하게 이행한 의무를 하느님과의 구체적인 일치를 실현하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길로 인정했다.

여기서 그의 제자들과 청소년들에게 하느님이 너를 보고 계신다. 혹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고 일하라는 그의 금언적인 당부가 계속적으로 나왔다. 여기와 지금 계신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느 일을 하거나 우리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 각자는 하느님의 현존 아래 자신의 직책을 이행할 것이다.

보스꼬의 영성은 이것만은 아니라 해도, 분명히 위무의 영성이다. 이를 카빌리아는 권위 있게 단언한다. 의무의 정확성은 보스꼬에게 있어서 성덕의 1, 영성의 조건이었다. 성인 교육자를 조금만 가까이서 접한 사람이면 공동생활에서나 영성 부분에서나 이것이 그의 모든 교육적인 일의 기초였었다는 것을 있었다. 신심 실천도 근면하고 성실한 의무 수행의 확증이 없으면 믿지 않았다.

지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있다. 보스꼬는 세속적인 활동도 일들이 정직한 일이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이런 견해는 전통적인 영성에는 없던 현대적인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착한 지향으로 하는 사람은 영적 생활과 활동적 생활간의 어떤 평행선을 피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인 만큼 보스꼬 안에서 이러한 흔적을 다소 엿볼 있다 해도 당연하리라.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 기타 많은 성인들, 그리고 가파쏘 까지도 그들의 활동 와중에서 기도를 위해 따로 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강한 향수를 항상 느꼈었다. 보스꼬의 삶에서는 전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없다. 밤에 어머니 말게릿다와 함께 아이들의 동안 찢어 옷들을 깁고 있어도, 그보다 사제적인 다른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갈등하지 않았다. 기도와 행동의 분리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것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다. 세속적인 일을 수락하고 이를 변화시켜, 에디지오 비가노가 적절히 이름한 일치의 은혜 되게 했다. 이는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동시에 향하는 사랑의 행동이었다.

그는 성인의 생각을 권위 있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스꼬의 내적 생활의 바로 일치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살레시오적 내면성의 전략적 요소를 발견한다. 어는 것의 일치인가? 흠숭, 경청, 기도 하느님께 향한 시설과 소년들 가운데에서 활약하는 구원의 노력의 일치이다.

노력이 시선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 되고 시선이 노력에서의 일탈이 아니 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힘을 공급하는 그런 일치이다. 이러한 실천보다 말이 쉽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러나 보스꼬는 그렇게 이를 실천했다.

일치의 은혜 그의 영성의 대들보였다고 있다. 기도가 일을 희생시키지 않고 일이 기도를 희생시키지 않는 그런 영성이다. 그러나 사도적, 자선적, 인간화적인 열심한 일과 장시간의 기도 중에서 보스꼬의 카리스마는 행동을 선택했으니, 거기에서 하느님의 뚜렷한 뜻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는 행동에서 하느님과 너무 깊이 일치해 있어서 기도를 아쉬워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또한 기도 중에 하느님과 너무 깊이 일치하여 있어서 행동을 아쉬워하지 않을 정도였다고도 보스꼬는 하느님의 도성에서나 인간들의 도성에서나 편안해 보였으니, 여기서나 거기서나 하느님 안에 묻혀 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자. 기도의 분량 자체가 성덕을 결정하지도 않고 행동의 분량 자체가 그런 것도 아니니, 다만 , , 애의 깊이,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따르느냐에 우리의 기도와 일의 가치가 결정된다 하겠다.

하느님의 뜻이 기도로 부르시면 기도해야 하고, 행동에로 부르시면 행동해야 한다.


8 : 초성적 은혜들


보스꼬의 신비 생활에 대한 언급은 매우 힘든 일이다. 어떤 면으로 보아 논란의 대상이 수가 있긴 하지만 가지만 조심스러이 거론해 보자.


행동의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인은 그의 저서 하느님 사랑 개론에서 가지 혼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거룩한 혼은 자기 종류가 있다. 지성적인 , 감정적인 , 활동적인 . 번째 것은 빛이요, 번째 것은 열정이요, 번째 것은 행동이다. 번째 것은 감탄으로 되어 있고, 번째 것은 열정을 되어 있고, 번째 것은 일로 되어 있다. 처음 둘은 번째 것과 같은 구체성이 부족해서 모조 수도 있고 가짜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기도 중에 하늘에 오르는 하면서도 생활의 혼이 없으면, 드높은 지향으로 하느님께 일치되어 있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혼은 분명히 나쁜 영의 희롱이며 속임수다.

불행히도 성인은 행동의 대한 설명을 하지 않으나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분명히 했다. 보스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다음 구절을 읽어 보자.

훔치지 말라. 속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하느님께 기도하라. 헛맹세를 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라. 살인하지 말라. 모두는 인간의 타고난 이성을 따라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진 재산을 버려라. 가난을 사랑하고 이를 마음의 친구로 찾으며 소중히 하라. 욕이나 멸시, 굴욕이나 박해, 치명들을 기쁨과 행복으로 알아라. 최대한으로 절대적 정결로 자신을 다스리라. 그리고 마침내 죽을 인생에서 세속의 모든 견해에 역류하여 살아라. 끊임없는 포기와 자기 부정, 절제를 하라. 이러한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초성적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 사는 , 우리를 초월하여 사는 것이다. 영월하신 아버지께서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이만큼 자신을 초탈할 없고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삶은 계속적인 , 일과 활동의 무궁한 임에 틀림없다. 바오로는 골로사이 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죽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명은 하느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다. (골로3.3)

보다 실이 활동 혹은 생활의 혼은 복음적 규칙에 완전히 부합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다. 사랑의 절정을 사는, 자신에게서 완전 이탈한, 하느님께 온전히 몰입 삶이다.

행동의 이라는 단어는 보스꼬의 어휘에서는 찾아 없다. 아마 그가 만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머리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라는 이름은 신학교에서 읽은 도서 목록에는 들어 있지 않다. 사제 기숙사에서는 읽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그의 후계자 리날디 신부와 비가노 신부는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보스꼬의 영성의 독특한 표현을 것은 확실하다.


탈혼적인 현상들


혼에서는 하느님께 강하게 몰입되어 얼마 동안 외적인 무감각 상태에 들어간다. 보스꼬의 강심장은 안에서 타는 그의 감정을 밖으로 들어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가서는 역시 매우 높은 수준의 기도를 흔히 동반하는 현상들을 경험했다. 매우 깊은 잠심의 순간들을 그에게서 있었던 것이다. 정보제공 과정에서 체롯디 신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두통 혹은 심장 허약, 혹은 시력이 약해져서 다른 어떤 일을 못하게 되었을 그가 그의 눈이 강한 빛을 견뎌내지 못해 어둠침침한 장소에서 앉아 초라한 소파에 묻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바라보기란 괴롭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항상 평화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손에는 묵주를 들고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화살기도가 새어 나오고 너무 기운이 없어서 말로는 표현할 없었던 손을 가끔 들어 올려 말없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일치를 나타냈다. 그의 생애는, 특히 말년에 가서는 하느님께 드리는 부단한 기도였다고 나는 깊이 확신한다.

보스꼬가 진정으로 혼의 순간을 만난 때는 미사를 드릴 때나, 혼자 그의 방에서 조용히 보낼 때였다.

1878 겨울에 그의 옆에 붙은 경당에서 그의 미사에 복사를 하던 소년은 거양성체 그의 전기에서 읽을 있다 상태가 되어 미사 집전자의 얼굴에서 천국 같은 기분을 보았다. 마치 경당 전체가 밝아지는 같았다. 다음에는 조금씩 그의 발이 바닥에서 들어 올려져 거의 10 정도를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복사는 그의 제의에 손이 닿지 않아 들어 올려 드릴 수가 없었다. 사람 중의 하나인 가로네는 그만 놀라서 정신이 없어 달려 나가 벨또 신부를 외쳐 불렀으나 찾지 못했다. 돌아와 보니 보스꼬는 내려 오고 있었다.

때로는 그의 몸이 변하여 환한 빛을 냈으니, 많은 성인의 전기에서 읽는 것과 같았다. 레뮈엥 신부는 삼일 동안 늦은 저녁에 보스꼬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서 마침내 얼굴 전체가 강하고 투명한 빛을 발산하는 것을 보았다.

흔히 말하듯이, 이러한 신비스러운 현상은, 대체로 신비상태의 관상에 따라 온다. 보스꼬는 은혜를 받았다. 도메니꼬 사비오는 보스꼬가 특별한 그래서 실제로 초자연적인 거이라고 정의 하기를 서운치 않았던 그런 은혜들을 받았었는데, 이들은 성서에서나 성인들의 전기에서 나오는 사실들과 매우 흡사했었다. 보스꼬는 이들을 신비적인 은혜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순결 무구한 , 하느님께 대한 사랑, 천상적인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은 도메니꼬의 정신이 하느님께 습관적으로 몰입되어 있다고 말할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여기서 그가 제자에 관하여 말한 바는 더욱더 스승인 자신에게 관하여 더욱 합당하게 말해질 있다.


행동의 신비가


그의 다양한 활동 중에서 보스꼬는 강한 의미에서 신비가 였었나? 신비 가는 역사가 길고 항상 같은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다. 객관적으로 그리스도적 신비의 은밀한 현실을 말하고 주관적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에 대한, 전혀 뜻밖에 거저 주어지는 경험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신비생활은 좁은 의미와 관상의 은혜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형태는 다양하다. 영혼 깊숙이 계시는 하느님 안에 정신을 읽고 하느님의 행위를 경험하는 그런 신비와는 달리, 활동적인 신비가인 보스꼬는 그의 기도 시간뿐만 아니라, 사도적, 자선적, 인간화적 행위의 실천 장에서도 하느님을 경험했다. 그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실현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만지고 느꼈다.

보스꼬는 구원은 계속 되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지금 순간, 인간과 역사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은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인류는 하느님의 오늘에서 산다. 현실을 그는 믿기만 것이 아니라 강하게 경험하고 살았다. 신비 가들이 말하던 하느님의 접촉, 말씀의 방문이라는 것들은 보스꼬에게 있어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 도상에서 그를 비추는 성광들이었고,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인간적으로 보아 불가능한 일들을 착수하게 그런 것들이다.

그에게는 성인다운 과감 성이 있었다. 하느님의 힘이 자신을 능가시키던 그런 과감 성이다. 예수께서 기도할 기쁨에 넘치셨듯이, 보스꼬도 소년들과 세상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 하느님을 관상할 신비로운 위로에 넘쳤다.

우리는 그가 자신이 하느님과 성모님의 손에서 수동적 능동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얼마나 겸손하게 인정했었는지를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 성모님이 하신다. 하늘에서 순간, 어떤 특별한 도움을 보내주지 않으신다면 보잘것없는 보스꼬가 무엇을 하느냐?

이런 비슷한 표현들은 그의 위대한 영혼의 수직단면이라 있다. 그의 평범한 단순성이 보여 주는 훨씬 이상의 것을 말해주는 것들이다.

행동의 신비 가는, 자연적으로, 고통의 길을 걷는다. 십자가에 박힌 사랑을 살고, 감각과 정신의 경험한다.


결론


보스꼬에게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바는 하느님의 힘의 침투가 외형적인 기도에서보다 행동에서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행동은 능률주의나 수평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었으니, 하느님이 시작이요, 내용이요,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보스꼬의 손을 통해 하느님께로 오르던 신비로운 사다리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나, 이냐시오에게서나 또는 다른 성덕의 거장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듯이, 보스꼬 안에서도 그렇게 한다.

미켈레 바움 가르텐은 다름과 같이 기록했다. 필요한 진리가 일반적으로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나 책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있다. 그런 시대에는 성인들의 행동과 고통이 새로운 낱말을 찾아내서 새로이 진리의 비밀을 알려주어야 한다. 현대가 바로 그런 시대다.

보스꼬가 창조한 새로운 낱말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대인들에게 효과적인 안내표지 판이요, 메시지인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