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irs of the Oratory


돈보스꼬의 회상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또리오 회고록 

에우제니오 체리아 신부 엮음, 김을순 수녀 옮김 




MEMORIE DELL󰡑ORATORIO 
DI S. FRANCESCO DI SALES 
by SAN GIOVANNI BOSCO 

Copyright ⓒ 1946 Societa Editrice Internazionale(SEI)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1997 by Don Bosco Media 
         
차            례 

서  문   
돈보스꼬의 머리말  

■한 꿈으로 아로새겨진 삶 (1815~1825) 
굶주림과 꿈   

■신화적인 시기 (1825-1835) 
1. 꼬마곡예사   
2. 만남들   
3. 희망이 사라졌을 때   
4. 통학하기 위해 먼 길을   
5. 키에리에서 1년 동안 세 학년을 월반   
6. 명랑회  
7. 기쁨과 규율의 날들   
8. 루이지 코몰로와의 만남  
9. 크고 작은 사건들   
10. 유태인 친구 요나 
11. 요술  
12. 요한 보스꼬의 올림픽 경기   
13. 책에 대한 갈증   
14.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큰 이상을 향한 길 (1835-1845) 
1. 착복식   
2. 맘마 말가리다, 마음의 지주   
3. 신학교에서의 생활  
4. 방학  
5. 몬페라토 언덕 위의 자유로운 날들  
6. 저 세상의 소식   
7. 보렐 신부의 조언   
8. 공부에 몰두  
9. 영원한 사제  
10. 말이 마구 날뛸 때  
11. 사제로서의 삶을 배우러  
12. 열여섯 살인데 아무것도 몰라요   
13. 초기 오라또리오  
14. 하느님의 뜻은 발도코에   
15. 반복되는 꿈   
16. 후작부인의 집에서   
17. 쫓겨난 오라또리오 
18. 성 베드로 쇠사슬 성당에서의 실패  
19. 방 세 개와 봄에 쫓겨난 오라또리오  
20. 하늘을 지붕삼은 오라또리오   
21. 카보우르와 이마를 마주 대고  
22. 후작 부인의 최후 통첩   
23. 헛간  

■나무가 자라 가지를 뻗다 (1845-1855) 
1. 오라또리오의 하루  
2. 카를로 알베르토 왕이 오라또리오를 구해 주다   
3. 문맹자들도 배울 권리가   
4. 돈보스꼬가 세상을 떠나야 하는 밤  
5. 어머니와 함께 돌아오다   
6. 첫 청소년 그룹   
7. 발레시아에서 온 첫 고아   
8. 두  번째 오라또리오 
9. 어려운 해인 1848년   
10.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용감한 가르침   
11. 1849,비오 9세를 위한 33리라   
12. 정치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다   
13. 사제들과 젊은이들이 떠나가다   
14. 무거운 고독  
15. 집을 한 채 사고 선술집을 빌리다  
16. 성당과 복권 
17. 4월 26일, 토리노에 재앙이  
18. 밤중에 터지는 폭음 
19. 1853년, 가톨릭 문집이 출간되다        
20. 1854년, 개신교도들과 얼굴을 맞대고   
21. 쿠오르 도로에서의 서투른 음모   
22. 나를 죽이려고 하다  
23. 그리조 


서  문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하여 출판되는 것이다. 
󰡐성 요한 보스꼬의 전기󰡑는 이 󰡐회고록󰡑에 대해서 언급하고 인용도 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의 독자들은 이 회고록이 무엇인지, 왜 신비의 그늘에 싸여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당연히 호기심만을 간직해 왔다. 이 책은 바로 그 호기심을 채워 줄 것이다. 

왜 이제까지 출판을 하지 않았나? 

이 책을 출판하지 못했던 이유가 하나 있었다. 돈보스꼬는 이 회고록 서두에서 󰡒무엇보다도 나는 살레시오회의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하여 이 글을 씁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나 죽은 뒤에도 이 글들이 출판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 두어야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둘째 구절을 각별히 강조했다. 그는 그와 같은 금지로 만족치 않고, 각 단원의 서두에다 󰡐전적으로 살레시오 회원들을 위해서󰡑라는 말을 매번 반복하고 있다. 바로 이 절대적인 명령 때문에 이제까지 출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회고록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을 폭넓게 참고하거나 많은 이야기들을 인용했으며 심지어는 그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분하고, 세분된 상당 부분을 재구성했다. 이와 같은 일들은 회고록을 전부 출판하는 것이 마땅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크게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들과 저자 앞에서는 그러한 정당화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오늘날 우리는 반복되는 그 󰡐금지󰡑란 말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될 것인가? 그 말은 이 글이 살레시오 가족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리상 출판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집 문턱을 넘어서거나 공개 형태를 취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말이다. 
돈보스꼬의 견지에서 그러한 일은 두 가지 이유에서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 개인적인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면서 일반 대중을 독자의 염두에 두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도리어 그러한 의도를 떨쳐 버릴 필요성을 느꼈으리라고 추측된다. 한 가정의 아버지는 집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될 일들도 집안에서는 곧잘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꾸밈없이 빨리 쓴 이 글들은 교정을 했다 하더라도 추고가 부족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면 자기 글을 인쇄에 붙이기 전에 결코 추고를 소홀히 하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책 보급을 배제하는 또 다른 좋은 동기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돈보스꼬가 출판되는 글의 문학 형태를 무시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1877년, 예방 교육에 관한 내용을 마지막 손질할 때, 그것을 인쇄소에 넘기기 전에 작성하고 재작성하고, 손보고 또 손보면서 많은 작업을 했고, 한 절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고백했다.1) 󰡒나는 이 글이 도무지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불평을 했다네. 예전에는 글을 한번 쓰면 다시는 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또 베끼고 네다섯 번 손을 대는데도 불구하고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네.󰡓 그는 회고록을 쓴 지 2년도 안 되어 그런 말을 했다. 돈보스꼬 역시 문체의 형식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이다. 

왜 출판을 하게 되었나? 

그가 독자들의 수효를 상당히 제한한 이유가 위에서 열거한 것 외에 또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미리 덧붙여 두지만, 위와 같은 동기들은 우리에게 아무 부담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긍이 가는 점들이 있다. 오늘 돈보스꼬는 역사의 큰 인물이며 성인들의 반열에 속한다. 역사적인 인물들이 연구가들의 조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면, 하물며 시성된 성인들을 다루는 이 마당에 있어서랴! 
그들이 자기를 자랑하거나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목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회고록에서 부족한 잔손질은 작품의 가치를 감소시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꾸밈없는 그 자연스러움 때문에 진가를 인정하고 음미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라도 돈보스꼬는 고결한 정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혹시 그가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속된 것을 말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은 버려도 된다고 본다. 게다가 돈보스꼬가 제시한 조건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우리에게 제시한 한 명제가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는 1876년 2월 2일 오라또리오에 참석한 분원장들과의 대화 석상에서 살레시오회의 기원을 되돌아보면서 완성된 역사를 기술하기 위해 자료들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 수도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것을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더 명확히 설명했다. 󰡒거기에는 사전에 확인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도회는 초자연적인 어떤 표시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지시가 선행되지 않은 변경이나 완성, 확장은 없습니다. 우리는 일어난 일들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의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고찰이 예상된다. 돈보스꼬를 중심에 놓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일들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엄격한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자아내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표명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더 이상 돈보스꼬나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써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개입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나에 대해서 좋게 말하든 나쁘게 말하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든 상관 없습니다. 하느님 대전에 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결코 아닐테니까요. 하지만 하느님의 사업은 드러나야 합니다.󰡓 끝으로 그는 그 점에 관해서 자신이 쓴 내용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다.2) 
돈보스꼬의 생애와 수도회의 삶이 하나요, 하느님의 업적들을 드러내야 하고, 그런 일에 인간이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는 이러한 이유들이 1876년 당시에 타당했다면, 하물며 돈보스꼬의 사업, 곧 하느님의 사업이 세상에 크게 확장되고 그 사업의 직접적인 도구였던 사람이 성인으로 추앙받는 지금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제는 그 무엇도, 그의 단호한 금지 조차도, 됫박 밑에서 등잔을 꺼내는 일, 다시 말해서 돈보스꼬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평온하고 빛나는 모든 페이지들을 모든 사람의 눈앞에 내놓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왜 회고록을 썼나? 

돈보스꼬가 이 회고록을 자발적으로 쓸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후에 원장들에게한 훈화 석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가 펜을 손에 잡았을 때 회고록 집필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만일 그랬었다면 순명으로 쓰도록 강요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1858년, 그가 처음으로 로마에 갔을 때, 비오 9세는 이미 그에 관해서 뭔가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에게서 오라또리오 사업이 생기게 된 경위에 대해서 직접 듣고 난 교황은 그 사업에 초자연적인 요소가 개입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했다. 
직접 설명을 다 듣고 난 교황은 돈보스꼬에게, 토리노에 돌아가면, 꿈과 그 외의 모든 것을 그대로 자세히 기술하고, 그 기록을 아들들의 격려와 규범으로 그리고 수도회의 유산으로 보존하라고 당부했다.3) 
그러나 돈보스꼬는 그 당부를 이행하지 않은 채 9년이란 세월을 흘려 보냈다. 1867년, 교황을 다시 만났을 때 교황은 전에 그에게 했던 말을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그 일을 염두에 두었느냐고 물었다. 돈보스꼬는 일 때문에 못 했다고 사과드렸다. 그러자 교황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모든 일을 놔두고라도 그것을 쓰십시오. 이번에는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당신 아들들에게 미치게 될 선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4) 
돈보스꼬는 순명할 수밖에 없었고 순명을 했지만 여러 바쁜 일들과 미룰 수 없는 빈번한 여행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긴 와병으로 인해 그 명령을 곧바로 실천에 옮기지 못했었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즉시 그 일에 착수했다. 

본  문 

이제는 그의 회고록을 직접 살펴보자. 우리는 모양이 넓고 두꺼운 3개의 노트로 된 자필 원문을 가지고 있다. 한 쪽 한 쪽 일련번호가 적힌 세 권의 노트는 총 180쪽에 달하고 있고, 모든 지면은 왼쪽 4-5㎝의 여백을 제외하고 온통 글씨로 빽빽하다. 그러나 그 여백들도 깨끗이 비어 있는 게 드물고 덧붙인 말들로 수두룩하다. 원고의 네 쪽만을 제하고는 모두 성인이 직접 쓴 것이다. 이 네 쪽에 대해서는 뒤에 말하겠다. 돈보스꼬가 원고를 다시 읽었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많은 추가와 글줄 사이에 고쳐 써 놓은 글들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색깔의 잉크는 교정을 단번에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준다. 마지막 페이지들 속에서는 여러 다른 필적으로 된 추가와 수정의 글이 나오지만 그것은 돈보스꼬가 기록한 것들을 베껴 놓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돈보스꼬의 유명한 비서인 조아키노 베르토 신부는 돈보스꼬의 자필 원고를 베껴 필사본을 만들었다. 그는 저자의 의도대로 여백의 덧붙임 말들을 본문의 지정된 자리에 편입시켰다. 그는 돈보스꼬의 난해한 필체를 판독하는데 숙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치밀한 것까지 충실하게 옮길 수 있었다. 그는 그 내용들을 6개의 큰 노트에 가득 채워 베껴썼다. 돈보스꼬는 그것을 143쪽까지 검토하면서 단순한 형태로 재손질을 하고 여기저기에 새로운 말들을 덧붙였는데, 어떤 부분은 굉장히 길다.5) 
확실한 출처에 의하면, 그 마지막 서른일곱 면은 그가 죽은 지 20년 후에 베낀 것이기 때문에 그에 의해 검토되지 않았다. 물론 이 필사본이 결정본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면밀히 대조한 후 출판에 붙였다. 

언제 쓰여졌나? 

내부적인 두 요소는 우리에게 회고록이 시작된 연도를 확인케 해 준다. 
원본 29쪽에서 돈보스꼬는 󰡐금년(1873)󰡑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교정할 때 삭제되었고 그대신 날짜가 없는 다른 말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133쪽에서 그는 1846년 7월, 중병에 걸렸다 완쾌된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 후 󰡐27년 동안󰡑 더 이상 󰡐의사와 약이 필요 없었다.󰡑고 단언한다. 무덤에까지 끌고 갔던 중병에서 완전히 회복된 시점으로부터 이것을 계산해 보면 1873년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따라서 회고록이 시작된 연도는 1873년 이후는 아니다. 
회고록 집필을 끝낸 시기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근거도 두 가지가 있다. 돈보스꼬는 원본 158쪽에서 그 시기에 일어났던 일을 말할 때, 괄호 속에 1875년이라고 명기하면서 끝낸다. 그리고 그가 󰡐지금도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필사본 160쪽에서 기록자는 자기 생각대로 1875년이라고 첨부한다. 그 면은 마지막 부분에 속하므로 1875년에 끝냈다고 확실히 추정할 수 있다. 
그는 필사본을 재교정할 때 두 개의 덧붙임 말에서 1878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필사본이 1878년 이전에 씌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내  용 

돈보스꼬의 목적은 살레시오 오라또리오의 기원과 길고도 다사다난했던 초기의 주요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가정과 학교와 사제직의 준비에 관한 풍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가 창시한 섭리의 사업은 아주 크게 확장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그의 계획을 위해 도구로 선택한 사람들을 양성하면서 그 사업을 어떻게 이루어 갔는가를 안다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의 중반부는 머물 곳도, 시설을 마련할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 다만 하느님의 가호로 근근히 지내면서도 사람들의 시끄러운 논의의 대상이 되고, 모든 선을 거부하는 적대자들의 표적이 된 채 몸부림치는 기간을 묘사한 부분이다. 
끝으로 그는 미래를 보장해 주는 토대 위에 조직된 사업의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는 이 모든 기간에 대해서 그의 전기 작가들이 말하고 있는 그 모든 내용을 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주 두드러진 사건, 즉 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건에 국한시킬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이야기 속에 그 어떤 전기 작가도 불어넣을 수 없는 자신의 전 영혼을 송두리째 불어넣고 있다. 
내용은 10년씩 세 간격으로 나누어 행적을 매듭짓는다. 첫 기간은 1825년부터 1835년, 두 번째 기간은 1836년부터 1845년, 세 번째 기간은 1846년부터 1855년까지이다. 저자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서곡으로 펼친다. 내용을 세 부분으로 분류한 까닭은 순전히 기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수도회의 발전 도상에서 10년마다 주목할만한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더 계속해서 쓰지 않았나? 

돈보스꼬는 그의 역사를 계속 써 나갈 생각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계속해서 쓰지 않았을까? 그가 계속 쓸 의도가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할 여지도 없다. 그는 원문 144쪽에서, 1848년 오라또리오의 한 그룹에게 처음으로 실시했던 피정과 그 결실로 이들 중 여럿이 교구 성소와 수도 성소를 선택한 것을 언급한 후, 󰡒이 점에 관해서는 살레시오 수도회 역사편에서 따로 말하겠다.󰡓라고 기록했다. 이 역사의 저자는 누구였겠는가? 그가 1876년 훈화 석상에서 한 말과 결부시키면 그 의문은 밝혀진다. 그는 원장들에게 각 분원의 일지를 쓰라고 간곡히 당부하며 그 규범과 유익성에 대해서 열거했다. 그가 장상들에게 수도회 전체의 역사 편집에 유익한 자료들을 배려하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말을 맺지 않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는 오라또리오에 관한 것들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더 정확히 말해서 1854년까지 요약해서 길게 썼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로써 그는 이미 1876년에 회고록 작성을 마쳤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었던 것이다(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구절이다. 󰡒1854년에 수도회에 대해서 거론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들은 끝없이 광범위해지고 색다른 면모를 취해 갔습니다. 나는 이 일이 후대 사람들에게 아주 유익하고, 하느님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계속 쓰도록 하겠습니다.󰡓(208쪽, 97-8 참조)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계속하지 못했다. 북새질하는 많은 일들과 고령의 쇠진함은 그에게서 가능성을 앗아갔다. 그는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쓰라는 권고를 받은 때까지 기록하는 것에 만족해 했으며, 그것으로써 교황에게 충분히 순명했다고 간주하여 더 이상 쓰지 않았던 것이다. 

문  체 

문체를 올바르게 판단하려면 돈보스꼬를 아버지로 비유한 내용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 가정의 아버지는 가족을 훌륭하게 육성하기 위해 생명을 다 소모하고 어느덧 황혼의 문턱에서 수많은 자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신이 겪은 고생과 직면한 사건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체험을 보화로 삼게 한다. 그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나오는 대로 사랑으로 말한다. 바로 돈보스꼬는 이 󰡐회고록󰡑을 쓸 때 그렇게 했다. 그 밖에도 그는 항상 일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의 요구에 마음쓰는 전문적인 역사가들처럼, 작품에 세밀하고 치밀하게 파고들 시간과 방법이 없었다. 
그는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기억나는 대로 조금씩 기록했다. 필적을 보면 그가 펜을 든 채 적당한 말을 고르지 않았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의 필체는 몹시 서두르는 사람의 필체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연대나 인명, 부수적인 세세한 점에서 그리고 재교정에서조차 표시되지 않은 오자에 대해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재교정에서도 몹시 서두른 흔적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의 권위와 이야기의 신빙성을 잃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 없이, 저자가 빠뜨린 것이나 보지 못한 것을 주해에서 안심하고 수정할 것이다. 제목과 소제목은 원본 그대로 놔뒀다(주: 역자는 그것을 테레시오 보스꼬의 책에 따랐다). 
철자법과 피에몬테에서 사용하는 사투리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의 본문 재구성은 어디까지나 원문에 충실했지만, 구두점 찍기나 뚜렷한 오자를 고치는 일에 있어서는 세심증에 빠지지 않았다. 필사본의 끝없는 대문자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원문에서는 대문자가 인색할 정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비교적 절제된 편이다. 돈보스꼬 개인의 서법을 존중했으며 일체 손대지 않았다. 그러나 사투리나 사투리 형태는 거기에 부합하는 언어로 대치시켰다. 돈보스꼬는 토리노의 인사들처럼 피에몬테 말을 기꺼이 그리고 세련되게 사용했다. 그는 출판될 책을 쓸 때는 조심했지만, 편지와 같이 대중을 목표로 하지 않는 글들은 형태를 추구하지 않고 급히 써 내려갔기 때문에 지방 특유의 언어와 글귀가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이 󰡐회고록󰡑을 부분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피에몬테 말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근과거를 원과거로 바꾸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피에몬테 사투리는 원과거 형태가 없기 때문에 근과거와 원과거를 구분하지 않고 과거 분사와 조동사의 현재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충했다. 다른 출판물들과 우리의 이 회고록의 차이성을 보고 우리가 원문을 자유스럽게 조작했다는 의심을 갖지 않도록 그러한 지적은 필요하다고 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원해서 생략했거나 아니면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을 타인들이 부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도 마찬가지이다. 

해  설 

이 책은 독자들에게 회고록 원본에 해설을 덧붙여 제시한다. 고전 작가의 작품에나 수반될 주해들이 따르는 이러한 페이지들은 아마 비위에 거슬릴지도 모른다. 쓴 글을 단순한 마음으로 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그 글에서 위대한 영혼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돈보스꼬 개인의 추억에 더 깊이 몰입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 먼 추억에 대한 다소의 조명이 힘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매력을 돋우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아무튼 해설이 본문을 질식시키지 않도록 원문을 밝히고 보충하는 데 그치겠다. 주해가 장황하고 그 수효가 너무 많지는 않아도 여기저기 좀 지나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돈보스꼬는, 내용의 배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살레시오 회원들을 상대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아듣는 사람들에게 흔히 하는 식으로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이 󰡐회고록󰡑은 그 배경을 환히 모르는 사람들도 읽고 연구할 수 있기 때문에 설명에다 다소 신경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졌다. 특히 성인의 전기 자료나 수도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때로는 교회적 및 전례적인 개념이나 불가피한 일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을 해 놓았다. 
해설에는 단순한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한 몫할 수 있도록 빛을 부여해 주는 사진도 요구된다. 이 책에 더 많은 사진을 삽입시키지 못한 게 아쉽다. 사진기술이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터이다. 

전기적․심리적․역사적인 문헌 

이 책을 읽기를 권장하는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다른 것들은 다 제쳐두고라도 한 인물에 대해 전기적 또는 심리적인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큰 사건들과 장래성이 풍부한 일정한 기간에 대해서 간과할 수 없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인은 인간들의 찬양을 그에게로 집중시켜 주는 사람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인이라는 말 자체 속에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성인에 대해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알게 되면 한층 더 조명된 유용한 찬양을 드리게 된다. 
그런데 돈보스꼬라 불리는 성인은 본인 스스로 자기에 관한 일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생애와 영혼을 탐색하는 데 독특한 매력을 자아낸다. 이 회고록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그의 표현은 직접적이고도 솔직하며 극도의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도 저자와 독자 사이에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는다. 미사여구조차 없다. 이런 것은 가치 있는 것이라도 주의를 다소 분산시키고 사실들과 그것을 표현하는 기술을 분리시킬 우려가 있다. 아무튼 매혹적인 예술은 숙고를 산만케 하는 영상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회고록에서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빛은 참된 사실들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현란한 빛이 아니라 조용히 깊은 곳을 보게 해 주는 맑은 빛이다. 돈보스꼬가 서술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눈앞에 펼쳐진다. 게다가 그의 언어는 복음에서 말하는 󰡐네󰡑는 󰡐네󰡑, 󰡐아니오󰡑는 󰡐아니오󰡑의 솔직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회고록의 대목을 말할 때 주의 깊게 말함으로써 저자를 돕는다고 믿지만 그건 덜 솔직한, 즉 그의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솔직함 때문에 젊은 시절을 감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단도직입적으로 고백한다. 나이에 따른 열정이나 환경의 힘 같은 것에도 구실을 붙이지 않고, 관대하고 활발하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충동적인 기질을 엄하게 비난하며 선천적으로 비범한 재능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아담의 자녀들이 느끼는 허영심의 충동을 체험하는 사람 안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드러내려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거의 점멸등의 깜빡거림과 같은 짧은 순간의 일들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 속에는 한순간에 빛을 발하다가 사라지고 하느님의 은총의 충동 밑에서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적인 지배력이 드러난다. 
끝으로 돈보스꼬의 양식은 인간답다. 다시 말하면 그 자신처럼 사랑스럽다. 내용 전체에서 겸손하고 너그럽고 사랑 깊은 미풍과도 같은 잔잔하고 평온한 느낌이 풍긴다. 그와 접촉할 수 있는 행운을 지녔던 사람은 그 점을 매번 확인했다. 그가 찬미하든 질책하든, 인정하든 단죄하든, 진담을 하든 농담을 하든 언제나 우리 앞에는 인자한 아버지의 영상이 현존할 뿐이다. 이제 알게 되겠지만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짢은 말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숭배자가 된다. 
그 밖에도 이 회고록에서 몹시 불안했던 한 시대의 정치적 내지 종교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언급이나 판단, 일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돈보스꼬는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내부에 머물기 원하는 가족적 스타일로 단순하게 말한다. 격렬한 투쟁 기간에 그의 활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와 이상을 나누지 않는 반대자들과 접촉해야만 했었다. 그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그들은 잊혀지거나 침묵할 수 없을 정도로 훼방을 놓았다. 정치나 교회에 관한 인물이나 일들에 대해서 스쳐 지나가는 그의 기억과 순백한 관찰력은 우리에게 아주 흥미롭다. 눈으로 목격한 것을 자신의 판단을 통해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곱절로 좋은 계기 

이 󰡐회고록󰡑의 정성어린 출판은 가장 적당한 때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회고록은 돈보스꼬의 사업이 마침내 정착하여 견고한 기초를 놓기 시작한 해와 더불어 막을 내린다. 그와 같은 역사는 100년 전 1846년에 일어난다. 기억에 길이 남을 이 날짜는 수없는 고생, 불안, 고통의 에필로그이며 아주 높고도 아주 멀리 뻗어 나가야 하는 도약의 기원을 수놓는다. 보잘 것 없는 일화의 색채를 띤 사건은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도착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시하시는 보다 더 험난하고 영광스런 목적지로 향하는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을 기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의 말로 직접 기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기념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말은 오늘날 성인의 말이요, 빛을 주고 감화시키고 박차를 가하는 말이다. 
물론, 1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그 사건의 모든 중요성과 모든 가치를 헤아려 볼 수 있다. 그러나 천사와 같은 비오 9세의 슬기로운 통찰력과 권위 있는 명령이 없었다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세계적인 사업의 눈부신 서광을 노래하는 돈보스꼬의 생생한 말들을 다시 상기하는 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회를 맞이하여 우리의 󰡐감사가󰡑는 위대한 교황에게로 올려진다. 교황 비오 11세의 말처럼, 섭리의 우아한 배려로 그의 교황 선출 100주년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또리오 100주년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그들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고 무척 사랑하고 관대하게 도와주고 보호해 준 교황을 길이 추모하고 감사할 것이다. 
이 책에는 󰡐역사 전체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교훈이 함축되어 있다. 돈보스꼬 자신이 그것을 지적한다. 그는 첫 부분에서 󰡒이 일은 무엇에 소용될까요?󰡓라고 질문을 던지고 나서 󰡒과거를 교훈삼아 미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규범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가 살레시오 회원들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확언은 보다 폭넓은 중요성을 띤다. 
우리는, 한 위인이 섭리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결연히 걸어간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의 모범들은 험난한 역경 속에서 목표에 도달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가르침이 되고 있다. 


에우제니아 체리아 신부 



돈보스꼬의 머리말 

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또리오󰡑에 관한 회고록을 쓰라는 권고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내게 이런 권유를 하시는 분은 상당한 권위자1)이신지라 거절하기 힘들었지만,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이 쑥스러워 도무지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최고 권위자께서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복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허물없이 말하는 보잘것없는 일들이지만 살레시오 가족에게 유익한 빛이 되어 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글을 사랑하는  나의 살레시오회 아들들을 위해 씁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나 죽은 뒤에도 이 글들이 출판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 두어야겠습니다.2) 
이 글은 어디에 소용될까요? 
과거를 교훈삼아 미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매순간 모든 것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생애를 셈바치기 위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되면, 나의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에 관한 글을 아주 기쁘게 읽을 것입니다. 
혹시 내가 너무 허세를 부리거나 자만하는 기색이 엿보이거든 너그럽게 눈감아주십시오. 나는 내 일들을 자식들에게 즐겨 말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들들 역시 자기들을 무척 사랑했고, 크고 작은 일들 안에서 언제나 그들의 영적 및 물질적인 선에 마음 썼던 아버지의 작은 모험담을 읽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회고록을 10년 간격3)으로 나누어 쓰겠습니다. 그 각 기간마다 우리 가족은 큰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들들이여! 내가 죽은 후에 이 글을 읽게 되거든, 여러분을 사랑했고, 이 글을 애정의 표시로 남겨 두고 떠난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부디 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한 꿈으로 아로새겨진 삶 (1815 - 1825) 

굶주림과 꿈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부였다 

나는 1815년, 성모 승천 대축일1)에 아스티의 카스텔누오보 시골 모리알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프란치스코2)였고, 어머니는 카프릴리오3)의 말가리다 오키에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부였다. 이들은 노동으로 정직하게 생계를 유지하며, 불필요한 온갖 지출을 피하면서 알뜰살뜰하게 살림을 꾸려 나갔다. 
아버지는 노환으로 시달리는 70세의 할머니와 세 명의 자식들을 부양했다. 맏이는 전처에서 태어난 안토니오4)였고, 둘째는 요셉5)이고 막내 아들은 나 요한(Giovanni)6)이였다. 그 밖에도 아버지의 밭일을 돕는 일꾼이 두 명 있었다. 

아버지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다 

내가 두 살도 채 못 되었을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큰 불행으로 우리를 치셨다.7) 사랑하는 아버지는 한창 나이에 기력이 왕성했고 자식들에게 훌륭한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다가 집에 돌아와 생각없이 서늘한 포도주 저장 창고8)로 내려갔는데, 그날 저녁 열이 심하게 오르고 위험한 폐렴 증상이 나타났다. 백약이 무효였다. 며칠 안 되어 아버지는 사경을 헤맸다. 아버지는 모든 성사를 받은 후 어머니에게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당부를 남긴 채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때는 1817년 5월 12일이었다. 
그날들에 대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가 숨을 거둔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따라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비애에 잠긴 어머니는 거듭 타일렀다. 
󰡒요한아, 어서 이리 온. 엄마랑 나가자.󰡓 
󰡒아빠가 안 가면 나도 안 갈 테야.󰡓 
󰡒가엾은 것, 이제 너는 아빠가 안 계시단다!󰡓9)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울었다.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우리 가족을 비탄에 빠지게 했다. 

흉 년 

목숨을 연명해야 할 식구는 다섯 명이나 되는데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유일한 생명선인 그해 가을걷이는 혹독한 가뭄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물가는 껑충 뛰어올라 밀은 한 말10)에 25프랑,11) 옥수수나 다른 곡류는 16프랑이나 했다. 그 당시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게 들려 준 말에 의하면, 가난한 이들은 병아리콩이나 완두콩, 수프에 넣을 겨 한줌을 구걸하러 다녔고, 굶주리다 못해 입에 풀을 잔뜩 문 채 죽어간 거지들도 눈에 띄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있는 양식을 모두 털어 가족을 먹인 다음, 돈을 모아 베르나르도 카발로라는 이웃 사람에게 주면서 양식을 구해 보라고 했다. 우리 친구 베르나르도는 이 시장 저 시장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다. 엄청난 금액을 치른다 해도 살 수 없었다. 
우리는 그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이튿날 저녁에 그는 텅빈 손으로 돌아왔다.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했다. 우리는 온종일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양식을 꾸어 보려고 애썼으나 아무도 도와줄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셨단다. 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자꾸나.󰡓 
짤막한 기도가 끝나자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극도의 상황에서는 비상 조치를 써야 하는 법이란다.󰡓 
어머니는 외양간으로 가 송아지를 잡았다.12) 베르나르도가 어머니를 도와주었다. 어머니는 그 일부를 재빨리 요리해서 실신할 정도로 허기져 있는 우리에게 저녁으로 주었다. 
그 후에는 더 먼 곳에 가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온 곡식 덕분에 우리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청혼이 

그 혹독한 흉년으로 인해 나의 어머니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고생했을지 상상이 갈 것이다. 우리는 지칠 줄 모르는 노동과 최대의 절약, 기적적인 도움으로 기아를 타개해 나갔다.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내게 여러 번 했고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도 모두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 무시무시한 시기가 지나고 집안 형편이 좀 나아졌을 때 어머니에게 아주 유리한 재혼 신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한 남편을 주셨다가 도로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는 죽을 때에 세 아이를 제게 맡겼지요. 그런데 제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식들을 두고 떠난다면, 저는 얼마나 몹쓸 어미가 되겠습니까!󰡓 
그들은 어머니에게 아이들은 한 후견인이 맡아서 정성껏 돌보아 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덕한 여인은 대답했다. 
󰡒후견인은 친구지만, 저는 제 자식들의 어미입니다. 온 세상의 금을 다 준다 해도 저는 결코 아이들을 버리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키고 순종심을 길러 주며 나이에 맞갖는 일들을 마련해 주려고 애썼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친히 내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형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자 어머니는 아침 저녁으로 나를 그들과 함께 무릎 꿇게 했으며13) 우리는 다 같이 일상 기도와 묵주 기도 15단을 바쳤다. 
나는 어머니가 내 첫고해를 준비해 주던 일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성당에 가 먼저 성사를 본 다음에 나를 고해 사제에게 맡겼으며 성사가 끝난 후에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혼자서도 성사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될 때까지 계속 그렇게 도와주었다. 

읽고 쓰고 일하고 

어느새 나는 아홉 살이 되었다. 어머니는 나를 학교에 보내고 싶어했지만 거리가 워낙 멀어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가 있는 카스텔누오보는 마을에서 5㎞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기숙 학교에 보낼 생각도 했지만, 열다섯 살 난 안토니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타협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겨울 동안 나는 인근 마을 카프릴리오 학교에 다니면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나의 선생님은 아주 경건한 주세페 델악콰 신부님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아주 친절했으며 내 공부와 더 나아가 내 종교 교육에 열의를 쏟아 주었다. 
여름엔 형을 만족시키기 위해 들일을 했다. 

인생을 활짝 열어 주는 꿈 

그 나이에 나는 평생토록 내 뇌리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꿈14) 하나를 꾸었다. 
꿈에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아주 넓은 마당에 서 있는 듯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웃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놀고 있었으며, 적지 않은 아이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욕설을 듣고 나는 곧장 아이들 가운데로 뛰어들면서 주먹질과 고함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애썼다. 
그때, 고상한 옷차림을 한 존귀한 남자 어른 한 분이 나타났다. 그는 하얀 겉옷으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으며 얼굴은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 소년들의 선두에 서라고 말했다. 
󰡒주먹다짐으로 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 이들을 네 친구로 만들어야 하느니라. 그들에게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즉시 설명해 주어라.󰡓 
당황하고 놀란 나는 그분께 나는 그 개구장이들에게 종교에 대해서 말할 능력이 도무지 없는 가난하고 무지한 아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소년들은 말다툼과 고함 소리와 불경한 말을 그치고 말하고 있는 남자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분에게 물었다. 
󰡒제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시는 아저씨는 누구시죠?󰡓 
󰡒그래! 바로 이 일이 네게 불가능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너는 순명으로, 그리고 지식을 연마하여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지식을 연마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네게 스승을 주겠다. 그분의 지도 아래 너는 슬기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분이 안 계시면 모든 지혜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게 말씀하시는 아저씨는 도대체 누구시죠?󰡓 
󰡒나는 네 어머니가 하루에 세 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준 분의 아들이란다.󰡓15) 
󰡒제 어머니께서는 허락없이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러니 아저씨의 이름을 밝혀 주세요.󰡓 
󰡒내 이름은 우리 어머니께 여쭤 보아라.󰡓 
그 순간 나는 그분 곁에서 별처럼 찬란히 빛나는 눈부신 겉옷을 입은 존엄한 여인을 보았다. 부인은 질문과 대답으로 더욱더 혼란에 빠져드는 나를 보더니 당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자, 보아라.󰡓 
눈을 들어 바라보니 소년들은 모두 달아나고 그 대신 염소와 개, 고양이, 곰 등 다른 많은 동물들이 나타났다. 
󰡒자, 여기가 바로 네 일터, 네가 일해야 될 곳이다. 겸손하고 강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라. 지금 이 순간 네가 보고 있는 이 동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너는 장차 내 자녀들을 위해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눈길을 돌리니 맹수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숫자만큼의 온순한 양들이 나타났다. 양들은 그 남자 어른과 부인을 환대하는 듯 그분들 곁을 팔딱팔딱 뛰어다니면서 󰡐매애 매애󰡑 하고 울었다. 
나는 여전히 꿈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부인에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니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부인은 내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어떤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으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멍했다. 주먹질을 한 손은 아팠고 얻어맞은 뺨은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게다가 낯선 아저씨와 부인, 듣고 말한 모든 것들로 머리 속이 꽉차서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산적 두목? 

아침에 즉시 형들에게 꿈이야기를 했더니 형들은 웃어 넘겼다.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자 식구들은 제각기 해몽을 했줬다.16) 
요셉 형은, 
󰡒너는 염소나 양이나 다른 동물들을 치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말했고, 
󰡒사제가 될 꿈인지 누가 알겠니!󰡓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시자 마자 안토니오 형이 심술궂게 대꾸했다. 
󰡒너는 산적 두목이 될 거야.󰡓 
마지막으로 전혀 읽고 쓸 줄도 모르는 할머니가 
󰡒꿈이란 믿을 게 못되느니라.󰡓하고 최종적인 단언을 내렸다. 
나도 할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꿈을 결코 내 머리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다. 앞으로 기록하게 될 일들이 그 사실을 설명해 줄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더 이상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1858년, 살레시오회에 관한 문제로 교황님을 접견하려고 로마에 갔었을 때,17) 교황님은 내게 초자연적인 기미가 보이는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라고 하셨고, 나는 그분에게 처음으로 어릴적 그 꿈 이야기를 해드렸다. 교황님은 그 사실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여 살레시오 회원들을 격려하는 자료로 남겨 두라고 명령하셨다.18) 


신화적인 시기 (1825 - 1835) 

1. 꼬마 곡예사 

키는 작디 작았다 

사람들은 내게 몇 살 때부터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나는 이미 10세 때부터 내 나이에 걸맞는 주일 학교 비슷한 것을 했다. 
나는 아주 어린 꼬마였지만, 친구들의 성향을 연구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의 얼굴을 응시하면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많이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다.1) 
모두가 나를 심판관이나 친구로 삼으려 했다. 한편 나는 가능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악한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놀다가 싸움이 생기면 내 보호를 받으려고 했고 나를 무척 사랑했다. 사실 내 키는 작디 작았지만, 큰 아이들도 두렵게 만드는 힘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복잡한 문제나 일, 말다툼, 논쟁이 벌어지면 나를 심판관으로 세웠고, 내 결정에 따랐다. 

풀밭과 외양간에서 하는 이야기 

그러나 그들을 내 주위로 끌어 모으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들에게 들려주는 내 얘기였다. 강론이나 교리 시간에 들은 예화나 내가 읽은〈프랑스 왕들〉, 〈불쌍한 용사〉, 〈베르톨로 베르톨리노〉 등은 내게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내가 읽고 있는 것을 가까스로 이해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나만 보면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우르르 몰려왔으며,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꽤 많이 모여들었다. 종종 나는 카스텔누오보를 오가는 길에 들판이나 풀밭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곤 했다. 
그들은 다소의 기억력밖에 지닌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소년의 말을 듣고 싶어했다. 나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소경의 나라에서는 애꾸눈도 왕으로 추대된다.󰡑라는 옛날 속담처럼, 그들에게는 내가 훌륭한 박사처럼 보였던 것이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따뜻한 외양간2)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그곳에는 연령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이 모였다. 그들은 대여섯 시간 동안 꼼짝 않고 프랑스 왕족에 대한 낭송을 들으면서 저녁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꼬마 낭독자는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의자 위에 올라가서 책을 읽었다. 우리는 이야기 전후에 성호경을 긋고 성모송을 바쳤기 때문에 󰡐강론을 들으러 가자.󰡑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밧줄 위에서 뛰놀고 춤추며 

좋은 계절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특히 주일에는 동네 아이들만이 아니라 먼데 사는 아이들도 적지 않게 모여들어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나는 이전에 배운 몇몇 놀이를 공연했다. 
장날이나 전시회가 열리는 날에는 야바위꾼과 곡예사들을 보러 갔다. 나는 그들의 요술과 민첩한 동작을 유심히 살펴보고, 집에 돌아오면 그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연습을 할 때마다 심하게 부딪치고 굴러떨어지고 뒹굴었으리라는 것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열한 살에 전문적인 곡예사처럼 요술 주머니 놀이도 하고 공중제비나 물구나무를 서서 걷기도 했으며 밧줄 위에서 걷고, 뛰고, 춤도 추었다. 
주일 오후마다 쇼가 벌어졌다. 
베키에는 여러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내게 많은 도움을 준 아주 튼튼한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는 배나무에 밧줄의 한 쪽 끝을 매고 좀 떨어져 있는 다른 나무에 다른 끝을 매었다. 나무 옆에는 탁자와 요술주머니를 갖다 놓았다. 땅바닥에는 맨몸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융단을 깔았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구경꾼들은 시작을 기다리느라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면 나는 그들을 로사리오 기도에 초대했고 성가 한 곡을 부르게 했다. 그것이 끝나면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강론을 했다. 아니, 아침 미사 때 들은 강론을 반복하거나 책에서 읽었거나 주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강론이 끝나면 짧은 기도를 더 바치고 곧장 놀이로 들어갔다. 설교사는 곡예사로 변했다. 
나는 공중제비를 하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서 걷기도 하며 재주도 넘었다. 그 후에 요술 놀이를 시작했다. 동전들을 삼킨 뒤에 그것을 구경꾼의 코끝에서 낚아챘다. 색구슬이나 달걀을 많아지게도 했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닭을 죽여 토막을 낸 뒤에 즉시 살려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도 했다. 
끝으로 나는 밧줄 위로 뛰어올라가 길처럼 안전하게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춤도 추고 물구나무도 서고 공중 회전도 했다. 
몇 시간 후 피곤해지면 우리는 놀이를 마치고 짤막한 기도를 바친 뒤에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 사람들이나 나쁜 이야기를 한 사람들, 우리와 함께 기도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은 이 모임에서 제외시켰다. 
혹자는 내게, 󰡐요술을 구경하러 가려면 입장권을 사야 하는데 그 돈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마련했다. 축일에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이 과자를 사먹으라고 주는 얼마 안 되는 돈이나 심부름 값, 선물 등을 모으기도 했고, 덫이나 새장, 끈끈이와 올가미로 새를 멋지게 잡기도 했으며, 새둥지를 뒤지는 데도 선수였던 나는 이런 것들을 모아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버섯을 따거나 염색풀3)이나 약초를 캐다 팔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내게,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이 산만한 생활을 하고 요술 놀이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보고도 만족스럽게 여겼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에게 말해 두지만, 어머니는 나를 무척 사랑했고, 나는 어머니를 한없이 신뢰했으므로 그분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살폈으며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셨다. 오히려 내게 무엇인가가 필요하면 그것을 마련해 주셨다. 
내 친구들도 내가 놀이를 하는 데 무엇이든 필요하면 기꺼이 도와주었다. 


2. 만 남 들 

첫 영 성 체 

내가 열한 살 되었을 때 첫영성체4)가 허락되었다. 12세 이전에는 아무에게도 허락이 내리지 않았지만, 나는 작은 교리책을 이미 다 외우고는 있었다. 또 성당이 멀기 때문에5) 본당 신부님은 나를 잘 몰랐고 어머니만이 내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는 내가 하루 빨리 첫영성체 하기를 열망했으므로 힘닿는 대로 나를 정성껏 준비시켰다. 
어머니는 사순절에 매일같이 나를 교리반에 보냈다. 마지막에 나는 시험에 합격했고 날짜도 정해져서 나와 다른 아이들은 부활절에6) 첫영성체를 하기로 되었다. 
사순절 동안 어머니는 내가 고해성사를 볼 수 있도록 세 번이나 이끌어주었다.7) 
󰡒요한아 하느님께서는 네게 큰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 잘 준비해라. 모든 것을 뉘우치고 진실하게 고백하도록 힘써라.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더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그분께 약속드려라.󰡓 
나는 약속했다. 내가 이 약속에 충실했는지 안 했는지는 하느님께서 아신다. 첫영성체 전날 어머니는 기도로 도와주면서 좋은 책도 읽게 해주고 정녕 훌륭한 어머니만이 자기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권고를 해 주었다. 
첫영성체 날 어머니는 내게 아무와도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성찬에로 나를 동반해 주었으며, 시스몬디 보좌 신부님이 모두에게 큰소리로 반복시키시는 대로 나와 함께 준비와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그날 어머니는 내게 이러저런 일을 하나도 시키지 않고 오로지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게 했다. 
이날 어머니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이 말씀을 여러 번 되풀이 하셨다. 
󰡒얘야, 이날은 네게 중요한 날이다. 하느님께서 정녕 네 마음을 소유하셨다고 엄마는 믿고 있다. 이제 죽을 때까지 착하게 살겠다고 그분께 약속드려라. 앞으로는 성체를 자주 모시되 양심에 거리끼는 죄를 가지고 모시지 않도록 조심해라. 언제나 진실하게 고해성사를 보고, 순명을 잘하며 교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으러 나가도록 해라. 그러나 나쁜 말을 하는 아이들은 페스트처럼 피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훈계를 명심하고 지키려고 힘썼다. 그날부터 내 생애는 진보하기 시작했다. 특히 타인에 대한 순종과 온순함에서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누가 내게 명령이나 충고를 하면 아주 비위에 거슬려서 늘 말대답을 하곤 했었다. 
내게 염려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친구들과 어울려 기도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러 갈 성당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리 수업이나 강론을 들으려면 카스텔누오보나 부틸리에라로 가야 했다. 즉 왕복 10㎞를 걸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 곡예의 강론을 기꺼이 들으러 오는 이유의 하나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부틸리에라에서의 순회 피정 

그해(1826) 부틸리에라 마을에 󰡐순회 피정󰡑8)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여러 강론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강론가들의 명성에 이끌려 사방에서 모여왔다. 저녁마다 우리는 종교에 관한 강론을 하나 듣고 묵상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끝나면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순회 피정이 진행되던 어느 날 저녁, 나는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얼마 전에 모리알도 공소 신부9)로 부임해 온 키에리의 칼로소라는 신부님이 있었다. 그는 무척 선량한 노사제였다. 그는 연세가 많아 등이 굽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순회 피정의 강론을 들으려고 그 먼길을 걸어온 것이었다. 

동전 네 닢 

곱슬곱슬한 더벅머리의 키 작은 한 소년이 사람들 틈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본 노사제는 내게 그윽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얘야, 넌 어디서 왔니? 너도 피정에 갔었니?󰡓 
󰡒네, 신부님. 전교사들의 강론을 들으러 갔었어요.󰡓 
󰡒도대체 네가 무얼 알아들었을까! 아마 네 어머니께서 네게 더 적절한 강론을 해 주셨을 게다. 안 그러냐?󰡓 
󰡒네, 그래요. 어머니께서는 제게 자주 좋은 말씀을 해 주세요. 하지만 전교사들의 말씀도 아주 기쁘게 들으러 가고 또 알아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강론에 대해서 나에게 몇 마디 해 주면 동전 네 닢을 주마.󰡓 
󰡒어떤 것에 대해서 말씀드릴까요? 첫 번째 강론에 대해서요 아니면 두 번째 강론에 대해서요?󰡓 
󰡒네 맘대로 하렴. 내겐 몇 마디면 족하니까. 첫 번째 강론에서 다룬 주제를 기억하고 있니?󰡓 
󰡒네, 하느님께 즉시 응답하고, 회개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 강론에서는 무슨 말을 했지?󰡓 노사제는 다소 놀라는 기색으로 물었다. 
󰡒잘 기억하고 있어요. 좋으시다면 모두 말씀드리겠어요.󰡓 
나는 서론과 세 가지 요점, 곧 회개를 미루는 자는 시간과 하느님의 은총과 열의를 잃게 될 큰 위험이 있다는 내용을 거침없이 전개했다. 
칼로소 신부님은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면서 나로 하여금 30분 동안이나 말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후 노사제는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부모님은 누구시지. 학교에는 얼마나 다녔니?󰡓 
󰡒제 이름은 요한 보스꼬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께서는 세 명의 아들을 둔 과부세요. 저는 읽고 쓰는 것을 배웠어요.󰡓 
󰡒라틴 문법은 배웠니?󰡓 
󰡒그게 뭔지도 모르는걸요.󰡓 
󰡒공부는 하고 싶니?󰡓 
󰡒무척요.󰡓 
󰡒그런데 왜 못 하지?󰡓 
󰡒안토니오 형 때문이에요.󰡓 
󰡒형은 네가 공부하는 것을 왜 반대하지?󰡓 
󰡒형은 학교 다니는 것을 싫어했거든요. 그래서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말한답니다. 하지만 전 학교에만 다닐 수 있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공부는 왜 하고 싶지?󰡓 
󰡒신부가 되려구요.󰡓 
󰡒왜 신부가 되고 싶지?󰡓 
󰡒많은 친구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종교에 대해서 말하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죠. 그들은 나쁜 애들이 아니지만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쁜 길로 빠지거든요.󰡓 
그분은 솔직하고 담대한 내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줄곧 나를 쳐다보았다. 어느덧 우리는 갈래 길에 이르렀다. 노사제는 마지막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용기를 잃지 말아라. 내가 너와 네 공부를 위해 신경써주마. 주일에 어머니와 함께 나를 찾아오너라. 모든 게 잘 해결될 테니 두고 보렴.󰡓 
다음 주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신부님을 만나러 갔다. 이리하여 하루에 한 번씩 신부님이 내게 수업을 해 주시기로 했고, 나는 수업 시간 외에는 안토니오 형을 만족시키기 위해 들에 나가 일하기로 했다. 수업은 여름이 지난 후, 밭일이 급하지 않을 때 시작하기로 했으므로 형도 찬성했다. 

지도자를 갖는다는 확신 

칼로소 신부님에게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즉시 그분을 무척 신뢰하게 되었다. 나는 자신을 그분에게 활짝 열었다. 내 생각과 말, 행동을 숨김없이 환히 드러냈다. 그분은 그런 내게 물심 양면으로 적절한 지도를 베풀 수 있었기 때문에 나를 매우 좋아했다. 
처음으로 나는 일정한 지도자, 친구를 갖게 되었다는 뿌듯한 안도감을 맛보았다. 그분은 제일 먼저 내게 내 나이에 맞지 않는 고행을 금했다. 그대신 고해와 영성체를 자주 하라고 격려해 주었으며 매일같이 짤막한 묵상, 더 정확히 말해서 영적 독서를 얼마간 하라고 권유했다. 축일에는 가능한 모든 시간을 그분 곁에서 지냈다. 평일에도 사정이 허락하는대로 미사에 참여하여 그분의 복사 시중을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영적 생활이 무엇인지 음미하기 시작했다.10) 그때까지는 무턱대고 움직이는 기계처럼 아주 물리적으로 행동해 왔었던 것이다. 
9월 중순에 이탈리아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문법을 공부하고 작문 연습을 했다. 성탄절에는 라틴어 문법을 배웠고 부활 무렵에는 이탈리아어를 라틴어로 그리고 라틴어를 이탈리아어로 옮기는 연습을 했다. 
그 시기에도 나는 풀밭과 외양간에서의 공연을 중단하지 않았다. 칼로소 신부님의 모든 이야기와 말씀은 내 강론을 기름지게 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나는 행복했다. 내 모든 소망이 충족된 듯했다. 그러나 새로운 불행, 가혹한 고통이 나의 모든 희망을 앗아 갔다. 

3. 희망이 사라졌을 때 

책과 괭이 

겨울에는 농사를 짓지 않아 한가했기 때문에 안토니오는 내가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봄이 오자 자신은 등뼈가 휘도록 고생하는데 나는 도련님 행세를 하면서 시간을 허비한다는 불평을 하기 시작하었다. 형은 나와 어머니에게 거칠게 이야기했고, 결국 집안의 평화를 깨지 않기 위해 나는 아침 일찍에만 공부를 하러 가고 나머지 시간에는 들일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어떻게 교과서를 공부하고 라틴어 해석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학교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공부를 하려고 힘썼다. 집에 돌아오면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또 한 손에는 문법책을 들고 걸어가면서 라틴어 문법을 복습했다. 일터에 이르면 문법책에 애처로운 눈길을 보낸 뒤에 그것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놓고 다른 식구들과 함께 괭이질을 하고 잡초를 베며 풀을 거두어 모았다. 
간식 시간이 되면 따로 물러나 한 손에는 빵을 들고 한 손에는 문법책을 들고 공부를 했다. 집에 돌아올 때에도 그와 똑같이 했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 시간, 밤잠을 줄인 30분 가량이 쓰기 숙제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많은 일과 큰 열의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 형은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와 요셉 형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명령투로 내게 말했다. 
󰡒그만하면 충분해. 이제는 그 문법책과 끝장을 낼 때도 됐다구. 난 이런 책들을 결코 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 컸고 뼈대도 굵어졌단말야!󰡓 
그 순간 고통과 분노가 울컥 치밀어오른 나는 해서는 안 될 말대답을 하고야 말았다.11) 
󰡒도대체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집 당나귀도 결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지만, 너보다 덩치가 더 크다구. 너도 당나귀처럼 되고 싶어?󰡓 
이 말에 몹시 화가 난 그는 나의 뺨을 마구 때리며 주먹질을 해댔다. 나는 빗발치는 그의 매타작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줌 가득한 행복의 날들 

어머니는 낙심천만했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화에 대해서 알게 된 칼로소 신부님은 어느 날 나를 불러 말했다.12) 
󰡒요한아, 너는 나를 깊이 신뢰하고 있지. 나는 그 신뢰를 헛되이 하고 싶지 않구나. 그 난폭한 형을 놔두고 내게로 오너라.󰡓 
나는 이 친절한 말씀을 곧장 어머니에게 알렸다. 집안의 경사였다. 4월부터13) 나는 칼로소 신부님과 온종일 같이 지냈으며 집에서는 잠만 잤다. 
나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나는 칼로소 신부님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다.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사랑했고 그를 위해 기도했으며 매사에 기쁘게 시중을 들었다. 나는 그를 위해 수고하는 것을 더없는 행복으로 여겼고 그를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쳤을 것이다. 집에서 일주일 공부하는 것보다 그분하고 하루 하는 것이 훨씬 진전이 많았다. 그 하느님의 사람은 나를 무척 사랑했으며 내게 여러 번이나 이렇게 말했다. 
󰡒네 장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네게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 주마. 내가 죽게 되더라도 똑같이 배려해 주마.󰡓 

칼로소 신부가 세상을 떠나다 

만사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한점 아쉬움도 없이 행복의 절정에 달해 있을 때 큰 불행이 내 모든 희망을 앗아 갔다. 
1828년 4월14) 아침, 내가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칼로소 신부님이 보낸 심부름꾼 하나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 신부님이 위독한데 나를 보고싶어하니 어서 가자고 했다. 
나는 뛰는 게 아니라 날아가다시피 했다. 
사랑하는 칼로소 신부님은 자리에 누워 아무 말도 못했다. 뇌일혈로 쓰러진 것이다. 그는 내게 금고의 열쇠를 주면서 아무에게도 주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이틀 간의 고통 끝에15)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내 모든 희망도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이 큰 은인을 위해 늘 기도했으며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 기도할 것이다. 
상속인들이 왔을 때 나는 열쇠와 모든 것16)을 그들에게 넘겨 주었다. 

4. 통학하기 위해 먼 길을 

선량해 보이는 신학생 

그해17)에 거룩한 섭리는 아스티의 주세페 카파소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은인을 만나게 해 주셨다. 1827년 10월 둘째 주일이었다. 모리알도의 주민들은 그 지방의 축일인 하느님의 어머니 성 마리아 축일을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집안일이나 성당일로 분주했다. 그들은 풀밭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놀이를 즐겼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기도 했다. 
나는 온갖 구경을 멀리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반짝이는 눈에 부드러운 자태, 천사 같은 얼굴의 키가 작은 신학생이었다. 
그는 성당 문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매혹당했고 그와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축제를 보러 가시겠어요? 가고 싶으신 데가 있으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어요.󰡓 
그는 내게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아주 상냥하게 내 나이와 공부, 첫영성체를 했는지, 자주 고해성사를 보는지, 교리반에 나가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흔쾌이 대답하고 나서 다시 물었다. 
󰡒어떤 구경거리를 보고 싶으세요?󰡓 
󰡒귀여운 친구야, 사제들이 만드는 구경거리란 성당의 전례란다. 사람들이 거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면 할수록 더욱 성공적인 것이 된단다. 종교예식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므로 열심히 참석해야 하지. 나는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다.󰡓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그 말씀은 맞아요. 하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잖아요. 기도할 때가 있고 놀 때가 있잖아요.󰡓18) 
그는 웃으면서 자신의 인생의 좌우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화를 끝냈다. 
󰡒성직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께 자신을 파는 사람이란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그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한단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선익이란다.󰡓 
나는 말과 태도에서 주님의 정신이 가득 풍기는 그 신학생에게 경탄을 금치 못했으며 그 이름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난 그가 바로 신학교 1학년인 요셉 카파소 신학생임을 알게 되었다. 덕행의 거울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명성은 이미 알고 있었던 터이다. 

불확실한 장래 

말한 대로, 칼로소 신부님의 죽음은 참으로 내게 치명적이었다. 나는 슬피 울었고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자나깨나 그를 생각했다. 
그 정도가 지나치게 되자 어머니는 내 건강을 염려한 나머지, 당분간 나를 카프릴리오에 있는 외할아버지에게로 보냈다. 
그때 나는 꿈을 꾸었다. 그 꿈 속에서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보다도 인간에게 더 큰 희망을 두었다고 크게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한편 나는 어떻게 하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골똘해 있었다.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훌륭한 신부들은 많았지만, 그들과는 조금도 친해질 수 없었다. 때로 길에서 본당 신부님이나 보좌 신부님을 만나면 멀리서 인사를 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점잖게 답례만 하고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여러 번이나 나는 눈물을 머금고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제라면 그렇게 안 할 테야.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좋은 말과 좋은 충고를 해 줄 거야. 본당 신부님과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칼로소 신부님은 내게 이런 기쁨을 주셨는데 왜 다른 신부님들은 그렇게 못 하는 걸까?󰡓 
어머니는 진학의 어려움으로 고민하는 내 고통을 지켜보았다. 이미 20세가 넘은 안토니오에게서는 도저히 승낙을 받아낼 가망이 없었다. 
이리하여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산을 분배하기로 결심했다. 나와 요셉 형이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긴 수속과 상당한 수수료를 내야 하는 큰 손실이 따랐지만 아무것도 어머니의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마침내 어머니와 요셉 형과 나는 한집안에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몇 년 전19)에 세상을 떠났다. 
분가를 하자 십 년 묶은 체증이 내려간 듯했고 드디어 나는 아주 자유스럽게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법률 수속 절차가 완료되기까지는 수 개월이 걸렸다. 1828년20) 성탄 무렵에야 비로소 나는 카스텔누오보 공립 학교21)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열다섯 살이였다. 

재봉사요 가수인 조반니 로베르토 

그 동안 혼자서 공부해 왔던 나는 공립 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선생님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탈리아어 문법을 거의 다시 시작해야만 라틴어 문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매일 집에서 통학을 했다. 오전과 오후, 하루 두 차례에 걸친 왕복 20㎞의 통학길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통학은 도저히 불가능해졌다. 이리하여 나는 조반니 로베르토라는 정직한 재봉사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레고리안 성가와 성악 애호가였다. 나도 목소리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는 마음으로부터 내게 음악을 가르쳐 주었다. 몇 개월 안 가서 나는 성가대에서 그와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여가 시간에는 바느질을 하면서 즐기기도 했다. 단시일에 나는 단추를 달고 옷단을 감치며, 홑겹이나 쌍겹의 바느질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잠바나 바지나 조끼도 재단했다. 나는 일류 재봉사라도 된 듯했다.내가 바느질을 썩 잘하는 것을 본 주인은 아예 자기와 함께 머물면서 재봉일을 하라는 진지한 제안을 했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여가를 선용하기 위해 여러 일을 하기는 했지만, 내 주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친구와 친구가 아닌 사람들 

그해에 나는 몇몇 나쁜 친구들로부터 오는 여러 유혹들을 견뎌내야 했다. 
그들은 수업 도중에 놀러가자며 나를 꾀었다. 내가 돈이 없다고 핑계를 대자, 그들은 돈을 마련하는 방법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주인이나 어머니에게서 돈을 훔치라는 것이었다. 뻔뻔스럽게도 한 급우는 이렇게 나를 부추겼다. 
󰡒너도 눈을 뜰 때가 됐어. 사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구. 눈을 가리고 
있는 사람은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 모르는 법이란 말야. 다른 애들처럼 너도 속편히 즐기려거든 돈을 마련하라구.󰡓 
나는 그에게 이런 대답을 했다고 기억한다. 
󰡒나는 너희들 말을 이해 못 하겠어. 마치도 내게 도둑놈이 되라고 설득시키는 것 같잖아. 하지만, 십계명에서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어. 도둑이 되면 끝이 안 좋은 법이야. 게다가 나의 어머니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계셔. 내가 좋은 일로 돈을 청하면 어머니는 그것을 주신다구. 나는 늘 그분께 순명했고 물론 앞으로도 계속 순명할 거야. 만일 너희 친구들이 도둑질을 한다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거야. 설사 도둑질을 안 한다고 해도 남에게 도둑질을 하라고 권하는 자들은 불량배들이라구.󰡓 
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다시는 내게 그런 제안을 해 오는 아이들이 없었다. 나의 답변은 선생님의 귀에도 들어가 선생님은 나를 더욱더 사랑해 주었다. 심지어는 많은 급우들의 부모님들에게까지도 이 사실이 알려져 그들은 자기 아들들이 내 친구가 되는 것을 기뻐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친구들을 쉽게 선택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모리알도의 소년들처럼 나를 사랑하고 또 내게 복종했다.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갈 때, 또다시 괴로운 일이 생겼다. 
나의 선생님인 비라노 신부님이 아스티 교구에 속한 몬도니오 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아 1830년 4월 (1831년임)에 그곳으로 떠났고 그 후임으로 다른 신부님22)이 왔다. 그는 학급의 질서를 도무지 잡지 못했으며 그 동안 배운 것마저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5. 키에리에서 1년 동안 세 학년을 월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 

많은 시간을 허비한 후, 마침내 나는 키에리로 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때는 1830년23) 이었다. 
수풀 사이에서 자라, 겨우 고장의 몇몇 작은 마을밖에 보지 못했던 사람은 도시를 보고 큰 인상을 받게 된다. 
나는 공부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키에리로 옮겨가 살고 있던 고향 사람 루치아 마티24)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부인은 외아들을 둔 미망인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은 고마운 추억을 지니고 있는 아우스타키오 발림베르티 신부님이었다. 그는 미사 복사를 서라고 나를 초대했으며 도시의 위험을 멀리하라는 등의 좋은 충고를 해 주었다. 그는 나를 장학사나25) 다른 여러 선생님들에게도 소개하곤 했다. 
그때까지 나는 공부를 제대로 못 하고 쉬엄쉬엄 해 왔기 때문에, 오늘의 중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6학년26)에 등록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 당시의 선생님은 역시 정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T.27) 푸네티 신부님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무척 친절했다. 내 나이와 열의에 동정을 금치 못한 선생님은 학교에서도 내게 마음을 써 주었고 집에도 초대하여 내게 보탬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았다. 
내 나이와 키는 같은 반 아이들 사이에 기둥처럼 높아 보였다. 나는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고심했다. 2개월 후에 나는 그 학급에서 1등을 했고, 시험에 통과하여 5학년으로 진급했다. 
급우들의 키가 좀 더 크고 또 담임 선생님은 사랑하올 발림베리 신부님이었기 때문에 나는 기쁘게 새로운 반으로 들어갔다. 
5학년에서도 여러 번 일등을 한 나는 2개월 후에 또다시 예외적으로 시험을 볼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그 시험에도 합격하여 4학년으로 진급했다. 
4학년 담임은 규율에 엄격한 빈첸초 치마 주세페 신부님이었다. 학기 중간에 당신처럼 몸집이 크고 육중한 한 학생이 교실로 들어오는 것을 본 신부님은 농담삼아 말했다. 
󰡒너는 대단한 멍청이냐 아니면 굉장한 천재냐?󰡓 
나는 엄격한 그 모습에 다소 압도된 채 대답했다. 
󰡒그 중간쯤 됩니다. 저는 제 본분을 지키고 학업에 정진하려는 열의가 있는 가난한 젊은이입니다.󰡓 
선생님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전에 없이 다정하게 덧붙였다. 
󰡒열의가 있다니 잘 됐구나. 시간을 허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용기를 내어라. 어려운 일이 생기면 즉시 내게 말하도록 해라. 그럼 도와주마.󰡓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책을 잊어버리고 왔을 때 

내가 4학년에 들어간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나를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든 조그만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선생님은 코르넬리오 네포테가 쓴 아제실라오의 생애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날 책을 잊어버리고 안 가져 온 나는 선생님 몰래 문법책을 앞에 펴놓았다. 급우들은 그것을 눈치챘다. 한 친구가 옆 친구를 쿡 찌르며 킥킥거렸다. 교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선생님이 물었다. 
󰡒무슨 일인지 냉큼 말하지 못해.󰡓 
많은 학생들의 눈길이 내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을 본 선생님은 내게 본문을 읽고 해석해 보라고 했다. 나는 손에 문법책을 들고 일어나서 이미 머리 속에 암기하고 있던 본문을 읽고 해석했다. 급우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와!󰡑하고 감탄사를 발하면서 박수 갈채를 보냈다. 
선생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를 냈다. 그가 규율을 잡지 못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꿀밤을 한 대 주었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것을 살짝 피했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내 문법책에 손을 얹은 채 내 곁에 있는 학생들에게 그 무질서의 원인을 말하라고 했다. 
󰡒보스꼬는 문법책을 손에 쭉 들고 있었는데 마치 코르넬리오 네포테 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읽고 해석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짚고 있던 책을 바라보며 두 구절을 더 읽어 보라고 한 뒤에 말했다. 
󰡒너의 비상한 기억력28) 때문에 용서해 주는 거다. 네 녀석은 행운아야. 그것을 선을 행하는 데 쓰도록 힘써라.󰡓 
4학년을 마치고 나는 좋은 성적으로 3학년에 진급했다. 

6. 명랑회 

자기 희생을 배우다 

이 네 개의 학급을 거치는 동안 나는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급우들을 다루는 비결을 배워야 했다. 
나는 급우들을 착한 아이들과 보통인 아이들, 나쁜 아이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나는 나쁜 아이를 발견하면 언제나 피했다. 보통인 아이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했고 필요할 때는 접근을 했다. 착한 아이들과는 친하게 사귀었다. 
처음엔 도시에 아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아이들과는 적지 않은 씨름을 해야만 했다. 어떤 아이는 연극, 어떤 아이는 돈놀이에로 나를 유혹했고, 또 어떤 아이는 수영을 하러 가자고 꾀이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정원이나 들에서 과일을 훔치라고 일러주기도 했고 또 어떤 아이는 뻔뻔스럽게도, 사탕과자를 손에 넣기 위해 내 주인의 값진 물건들을 훔치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나는 가련한 이 모든 아이들로부터 벗어났다. 나쁜 성품을 알게 되면 절대로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모두에게, 나의 어머니는 나를 집주인에게 맡겼고 또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루치아 부인의 허락 없이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었다. 
루치아 부인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순종은 경제적인 면에도 보탬이 되었다. 부인은 내게 자기 아들을 아주 기쁘게 맡겼다. 그 아이는 활발하고 놀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다. 그는 나보다 학년이 높았지만 부인은 내게 아들의 복습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를 형제처럼 대해 주었다. 다정하게 같이 놀아 주기도 하고29) 조그만 선물도 했다. 또한 성당으로 인도하여 함께 기도도 드렸다. 그는 점차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었고 6개월 후에는 아주 착하고 부지런해졌다. 선생님도 만족했고 성적도 꽤 올랐다. 그의 어머니는 아주 기뻐한 나머지 하숙비를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 

작은 무리의 대장 

파렴치한 일을 하도록 나를 유혹하던 급우들은 자기 의무를 소홀히하는 문제아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작문이나 번역 숙제를 내게 빌리러 오기 시작했다. 
그런 일은 그들의 게으름을 부채질하는 그릇된 우정으로 선생님에게도 미안한 일이고 또 엄격히 금지돼 있다. 
나는 보다 떳떳한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주려고 힘썼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기도 하면서 친구들의 호의와 애정을 얻었다. 그들은 오락이나 이야기를 듣거나 숙제를 하기 위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모리알도와 카스텔누오보의 소년들처럼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리하여 하나의 무리가 형성되었고 우리는 이 집단을 명랑회30)(Societa󰡑 dell󰡑allegria)라고 불렀다. 우리의 목적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회원 각 사람은 모든 이들의 기쁨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독서를 하고, 놀이를 조직하며 대화를 나눌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울함을 초래하는 모든 것, 특히 주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금했다. 하느님을 모독하거나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나쁜 이야기를 하면 명랑회로부터 제명당했다. 우리는 만장 일치로 간단한 규칙을 정했다. 
1. 훌륭한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삼간다. 
2. 학교와 종교의 본분을 정확히 준수한다. 
이런 일로 내 명성은 높아졌고, 나는 많은 급우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832년, 내 급우들은 나를 마치 작은 군대의 대장처럼 떠받들었다. 사방에서 활동을 조직했고, 가정에서 학생들에게 복습을 시켜 달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섭리는 내게 집에 폐를 끼치지 않고도 필요한 옷가지와 교과서 등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내게 열어 주셨다. 

7. 기쁨과 규율의 날들 

너를 바로잡아 줄 친구가 없으면 원수에게 청하라 

명랑회 안에는 모범적인 소년들이 있었다. 토리노의 가릴리아노 굴리엘모와 키에리의 부라이에 파올로가 바로 그런 애들이었다. 이들은 오락 시간에도 기꺼이 참석했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학교에서 주어진 의무에 충실했다. 그들은 언행이 신중하고 신심이 깊었으며 언제나 내게 좋은 충고를 해 주었다. 
축일마다 우리는 학교 모임31)이 끝나는 대로 성 안토니오 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예수회 회원들이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고, 그들은 교리를 아주 훌륭하게 가르쳤다. 그들은 예화들을 들려 주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명랑회는 주 중에 한 회원의 집에 모여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임에는 원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참석했다. 가릴리아노와 부라이에는 착실하게 참여했다. 
우리는 모임 중에 유쾌한 놀이를 하거나 신앙적인 주제로 서로 대화도 나누고 좋은 책을 읽기도 하고 기도도 했다. 또 서로 충고를 해 주면서 결점을 고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충고해 주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숭고한 격언과 󰡐너를 바로잡아 주는 친구가 없으면 그것을 원수에게 청하라.󰡑는 피타고라스의 유명한 말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농담으로라도… 

우리는 이런 모임 외에도 강론을 들으러 갔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자주 했다. 
그 당시에 종교는 교육의 근본 요소 중의 하나였다. 어느 교사가 설사 농담으로라도 상스러운 말이나 반종교적인 말을 하면 즉각 파면되었다. 교사들에게 이런 정도였다면, 규칙을 위반한 학생들에게야 오죽 엄격했겠는가! 아마 여러분은 상상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평일 아침에는 미사를 드렸다. 수업 전후에는 짤막한 기도와 성모송을 바쳤다. 
주일에 학생들은 학교 성당에 모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적 독서를 하고 성모 소일과를 노래했다. 그 후 미사와 강론이 따랐다. 저녁에는 교리와 저녁 기도, 수업이 있었다. 
각 사람은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아무도 이 의무를 소홀히하지 않도록 한 달에 한 번씩 고백성사표가 주어졌으며, 이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라도 학년말 시험이 허락되질 않았다. 
이 엄격한 규율의 효력은 대단했다. 여러 해가 지나도 불경한 언사나 나쁜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며 학생들은 학교와 가정에서 온순하고 공손했다. 학생들의 수효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낙제생이 하나도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인문학과 수사학을 배우는 3학년 때는 급우들 모두가 진급을 했다. 

호감이 가는 의전사제 

그해에 나는 키에리 대성당의 의전사제 말로리아를 고해 신부로 모실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다. 큰 행운이었다. 내가 갈 때마다 그는 아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 당시에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고해성사를 보거나 영성체를 하면 거의 성인처럼 생각했다. 많은 사제들이 자주 성사 보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나 말로리아 신부님만은 달랐다. 그는 성사를 자주 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내가 동료들에게 끌려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은 것은 모두 말로리아 신부님의 줄기찬 격려 덕분이었다.32) 
나는 키에리 시절에도 모리알도의 친구들을 잊은 적이 없다. 나는 목요일에 가끔 그들을 만나러 갔으며, 그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가을 방학에 내가 온다는 것을 안 그들은 멀리까지 나를 마중 나왔으며 언제나처럼 대환영을 해 주었다. 
나는 모리알도에도 명랑회를 조직했다. 해마다 품행이 방정한 아이들이 회원으로 가입되었다. 그러나 품행이 단정치 못하거나 불경하고 나쁜 언사를 사용하는 아이들은 회에서 제명되었다. 

8. 루이지 코몰로와의 만남 

낙제할 뻔하다 

문법과정의 첫 단계를 마치면서33) 교육위원회에서 파견된 교육계의 유명 인사 요셉 가자니 신부님이 주재하는 시험을 치렀다. 
신부님은 내게 무척 인자했다. 고마운 추억으로 간직된 그분과의 만남에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우정이 싹텄다. 그분은 지금(1873년) 그의 고향 오네리아 근처 몰테도 수페리오네에 살고 있다. 그는 여러 자선 사업 중에서 우리 알라시오 학교에서 사제가 되려는 뜻을 품고 공부하는 한 학생의 학비를 매년 대주었다. 
시험은 아주 엄격하게 치러졌다. 우리 수험생들은 45명이었는데 모두가 진급 시험에 합격했다. 오직 나만이 하마터면 낙제할 뻔했다. 해석한 것을 책상 밑으로 해서 한 친구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낙제를 하지 않은 것은 도미니코회의 주시아나 신부님의 보호 덕택이었다. 그 신부님은 내게 다른 해석 문제를 주었는데 다행히 시험을 잘 보아 만점으로 합격했다.34) 
시당국의 호의로 적어도 한 반에 한 명씩은 수업료 12리라를 면제받았다. 이와 같은 혜택을 받으려면 학업 성적과 품행이 만점이어야 했다. 나는 늘 행운을 입어 해마다 수업료를 면제받았다. 
나는 그해에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인 바오로 브라이에를 잃었다. 그는 참으로 경건함과 순종의 덕, 그리고 참신앙의 표양이었다. 바오로는 장기간 앓다 7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35) 그가 짧았던 생애 동안 무척이나 사랑했던 루이지 성인을 따라간 것이다. 학교 전원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학생 전체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 후 오랫동안 방학 중에도 많은 학생들이 그의 영혼을 위해 영성체를 하고 묵주의 기도를 바쳤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처럼 덕이 있는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한 루이지 코몰로라는 또 다른 친구를 통해서 바오로가 남겨 놓은 텅빈 자리를 메꾸어 주시고자 하셨다. 

뺨을 맞고서도 

인문학 과정을 좋은 성적으로 끝낼 무렵, 선생님들 특히 베드로 바누아디 신부님은 내게 수사학 과정36)을 뛰어넘어 철학 과정37)시험을 보라고 권했다. 
나는 시험에 합격했다. 그렇지만 문학을 아주 좋아했던 나는 정상적인 과정38)을 따라 공부하는 것이 더 낫겠다 생각하여 1833~4학년도에39) 수사학 정규 과정을 공부했다. 이리하여 나는 루이지 코몰로를 만나게 되었다. 
이 소중한 친구의 생애40)는 따로 기록해 두었으니 각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리가 알게 된 시절에 대해서만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그해에 우리 학년에서는 󰡐성인 소년󰡑이 전학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성덕으로 명성이 높고 연로한 친자노 본당 신부님의 조카라고 했다. 나는 그 소년을 알고 싶었지만 이름조차 몰랐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많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말타기 놀이를 했다. 대개 제일 산만하고 공부를 싫어하는 학생들이 그 위험한 놀이의 광이요 챔피언이었다. 
학교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15세쯤 된 한 소년은 그 북새통 속에서도 태연하게 자기 자리에 가 앉더니 책을 펴 놓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못된 아이 하나가 그 곁으로 다가가 팔을 잡아끌면서 말타기 놀이를 하러 나오라고 을러댔다. 
󰡒할 줄 몰라. 난 그런 놀이를 해 본 적이 없어.󰡓 소년은 풀이 죽은 채 대답했다. 
󰡒잔소리 마! 안 나오면 발길질을 하고 뺨을 쳐서라도 억지로 끌어낼테니.󰡓 
󰡒때리고 싶다면 때려도 좋아. 하지만 난 그런 놀이를 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 
그 망나니는 소년의 한쪽 팔을 움켜쥐고서 뺨을 내리 두 대 후려쳤 
다. 그걸 보자 내 피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맞은 애는 때린 애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것으로 족하다면, 그만 돌아가. 난 벌써 너를 용서했으니까.󰡓 
이런 영웅적인 행동을 본 나는 불현듯이 그의 이름이 알고 싶어졌다. 
그 소년은 바로 칭송이 자자하던 친자노 본당 신부님의 조카, 루이지 코몰로였다. 

내 앞을 가로막다 

그때부터 나는 그를 친한 친구로 삼았다. 나는 그에게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41)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고 또 서로를 필요로 했다. 나는 영적인 도움이 필요했고 그는 나의 보호를 필요로 했다. 코몰로는 아주 수줍어서 자신에게 모욕을 가하는 심술궂은 아이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지 못했다. 반면에 나는 담력도 있고 힘도 세어서 모두가 나를 두려워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내 실력을 톡톡히 보여 줄 때가 왔다. 
어느 날 몇몇 아이들이 코몰로와 또 다른 훌륭한 소년 안토니오 칸델로를 못살게 굴면서 때리려고 덤벼들었다. 내가 가만 내버려두라고 소리쳤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얘들을 괴롭히는 녀석은 혼내줄 것이다!󰡓 나는 엄포를 놓았다. 
나보다 몸집도 크고 뻔뻔스런 아이들 몇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루이지의 뺨을 두 번이나 찰싹찰싹 내리쳤다. 몹쓸 혈기42)에 자제심을 잃은 나는 눈에 불을 켰다. 손에 몽둥이나 의자를 잡지 못한 나는 그들 중의 한 아이의 어깨를 꽉 움켜잡고는 다른 아이들을 향해 곤봉처럼 마구 휘둘러댔다. 
네 명이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달아났다. 
그때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요란한 아우성 속에서 팔다리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짓들이냐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좌우로 학생들의 뺨을 쳐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내 위에 벼락이 떨어질 찰나였다. 선생님은 내게 그 무질서의 자초지종을 밝히라고 말했다. 내 말이 끝나자 선생님은 거의 믿기 어렵다는 듯이 그 장면을 재현해 보라고 했다. 내가 재현을 하자 선생님은 폭소를 터뜨렸고 아이들도 따라 웃었다.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바람에 선생님은 벌 주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 

단둘이 있게 되자 루이지는 내게 아주 색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요한아, 네 힘에 놀랐어.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친구들을 해치라고 힘을 주신 것은 아니잖아. 그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길 바라셔.󰡓 
참으로 경탄할 만한 애덕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나 자신을 맡겼다. 루이지 코몰로와 굴리엘모 가릴리아노 그리고 나, 우리 셋은 자주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묵상과 영적 독서, 성체 조배 그리고 복사도 하러 갔다. 루이지의 초대는 하도 다정하고 친절해서 도저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는 한 친구와 잡담을 나누며 모자도 벗지 않은 채 성당 문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루이지는 즉시 내게 부드럽게 말했다. 
󰡒요한아, 너는 주님의 집 앞을 지나가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과 얘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구나!󰡓 

9. 크고 작은 사건들 

케익과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앞에서 나는 학교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제는 재미있는 사실을 몇 가지 이야기해 보겠다. 
인문학 과정일 때 나는 하숙집을 바꾸었다.43) 우리 가족과의 친분이 있는 조반니 피안타44)가 키에리에 카페를 개업했는데 자기 집에다 숙소를 정하라고 나를 초대했던 것이다. 그 카페는 나의 선생님인 베드로 바나우디 집 근처이기도 해서 나는 그 초대에 응했다. 
주인은 착한 신자였고 나는 아주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있었기 때문에 윤리․도덕적으로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하숙을 한다는 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었다.45) 
학교 숙제나 공부를 하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는 이 시간들을 이탈리아어나 라틴어 고전 문학을 읽거나, 또는 과자와 술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데 썼다. 
반년이 지났을 즈음에는 커피나 초콜릿 음료를 준비하고 갖가지 종류의 사탕과자, 술, 아이스크림, 청량 음료수 등을 만드는 법도 알게 되었다. 
주인은 내 하숙비를 면제해 주었고 내가 자기네 상점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고는 아예 공부를 그만두고 전적으로 카페에서 일해 달라는 제안을 해 왔다. 그러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 외의 모든 일들은 그저 소일거리와 기분 전환으로 할 뿐이었다. 

익 사 

바나우디 선생님은 진정 교사들의 귀감이었다.46) 그는 결코 체벌을 주는 일이 없었고 학생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했다. 그는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고 학생들은 그를 인자한 아버지처럼 대했다. 
우리는 선생님의 영명 축일에 사랑의 표시로 선물을 한 가지씩 하기로 계획했다. 그래서 시도 짓고 산문도 쓰고 선생님이 특별히 좋아할 만한 선물도 몇 가지 준비하기로 합의를 보았다.47) 축일은 멋지게 끝났다. 바나우디 신부님은 말할 수 없이 흐뭇해 했고, 그 기쁨의 표시로 야외에서 점심 식사를 하도록 우리를 초대했다. 정말 유쾌한 하루였다. 선생님과 우리는 서로 한마음이 되었고 저마다 내심의 기쁨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키에리로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은 손님을 만나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남겨 두고 우리와 헤어졌다. 
그때 상급생 몇 명이 우리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키에리에서 1마일48)정도 떨어져 있는 폰타나 로싸로 수영을 하러 가자고 했다. 나와 몇몇 친구들이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많은 아이들은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으나 다른 아이들은 수영을 하러 갔다. 불행한 결정이었다. 
우리가 집에 도착한 뒤 얼마 안 되어 수영을 하러 갔던 애 하나가 달려왔고 곧이어 또 한 아이가 달려왔다. 그들은 겁에 잔뜩 질린 채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무슨 일이! 필립보가 물에 빠져 죽었어. 우리 보고 수영하러 가자고 우기던 그 필립보 말야.󰡓 
󰡒뭐라구?󰡓 우리는 반문했다. 
󰡒그애는 수영 잘하기로 유명한데!󰡓 
󰡒그런데도 그런 일을 당했어. 필립보는 물이 소용돌이치는 것도 모르고 우리를 부추기기 위해 자기 역량만 믿고 뛰어내린 거야. 우리는 필립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우리가 소리소리 지르자 몇 사람이 달려와 위험을 무릅쓰고 애쓴 끝에 1시간 30분만에 겨우 필립보의 시체를 강가로 끌어낼 수 있었어.󰡓 
그 불행은 우리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그해에도 그 다음해(1834)49)에도 수영을 하러 가자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얼마 전에 나는 옛날 친구들을 몇 명 만난 일이 있는데 그때 우리는 폰타나 로싸에서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불행한 필립보의 비참한 최후를 가슴 아프게 기억했다. 

10. 유태인 친구 요나 

18세에 닥친 위기 

나는 요한 피안타의 카페에 하숙하면서 요나라는 유태인 젊은이50)와 친구가 되었다. 18세인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드물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으며 당구도 무척 잘 쳤다. 
우리는 엘리아 서점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서점에 오게 되면 우선 내 안부를 묻곤 했다. 우리는 무척 친했으며, 나에 대한 그의 우정은 지극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내 방51)에 놀러 왔다. 우리는 피아노를 치거나 함께 노래하고 책도 읽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내가 들려 주는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슬픈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언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는 내게로 달려와 조언을 구했다. 
󰡒사랑하는 요나, 네가 신자라면 즉시 너를 고해성사로 이끌겠다만 네겐 불가능하구나.󰡓 
󰡒뭐 우리 유태인들도 원한다면 고해를 하기도 해.󰡓 
󰡒그래도 고해 신부는 아니잖아. 비밀도 지키지 않고 죄도 사해 줄 수 없으며 아무 성사도 집전할 수 없잖아.󰡓 
󰡒네가 원한다면,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볼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 줘.󰡓 
󰡒너를 인도할 수야 있겠지만, 긴 준비가 필요해.󰡓 
󰡒무슨 준빈데?󰡓 
󰡒고해성사는 세례를 받은 후에 범한 죄들을 사해 주는 거야.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받으려면 우선 세례성사를 받아야 해.󰡓 
󰡒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 
󰡒교리 공부를 하고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믿어야 해. 그래야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어.󰡓 
󰡒세례성사가 내게 무슨 유익을 가져다 주지?󰡓 
󰡒원죄와 지금까지 범한 죄를 용서받게 해 주고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줘. 한마디로 말하면 너를 하느님의 아들로 만들어 주고 천국의 상속인이 되게 해 주는 거야.󰡓 
󰡒우리 유태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니?󰡓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로는 그분을 믿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어.󰡓 
󰡒내가 그리스도 신자가 된다는 걸 어머니가 아시면 아마 큰일 날 거야.󰡓 
󰡒두려워하지 마. 하느님께서는 모든 마음의 주인이셔. 만일 그분께서 널 그리스도교 신자로 부르신다면, 너의 어머니께서 만족하시도록 이끌어주시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네 영혼을 위해 배려해 주실 거야.󰡓 
󰡒너는 내 친구잖아. 네가 만일 나라면 어떻게 하겠니?󰡓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하겠어. 하느님께서는 길을 비추어 주실 거야. 그 동안 이 교리책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해 봐. 그리고 하느님께서 널 비춰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 봐.󰡓 

가정의 비극 

그날부터 요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종종 카페에 들르곤 했는데 당구를 한 판 치고 나면 나를 찾아와 종교와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달 안 가서 그는 성호경과 주의 기도, 성모송, 사도 신경 및 신앙의 주요 교리들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무척 기뻐했으며 날이 갈수록 언행이 훌륭해졌다. 
요나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래서 라켈레라고 불리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그녀는 최근에 아들에 대한 어떤 어렴풋한 소문을 듣고 있었지만, 그게 뭔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의 침대를 정리하다가 그가 공부하고 있는 교리책을 발견했다. 가정의 비극은 여기서 폭발했다. 그녀는 온 집안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지른 뒤에 그 책을 들고 랍비에게로 뛰어갔다. 
나를 의심한 그녀는 급히 나를 찾아왔다.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아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멋진 젊은이인데 반해 어머니는 몹시 흉했다. 한 쪽 눈이 먼데다가 두 귀도 먹고 코는 뭉뚝했다. 이는 거의 다 빠지고, 입은 비뚤어지고 입술은 두툼했다. 턱은 길고 뾰족하며 목소리는 킹킹거리는 강아지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유태인들은 그녀를 보통 󰡐릴리 마녀󰡑52)라고 불렀다.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숨쉴 겨를도 주지 않고 말했다. 
󰡒네 놈이 나쁜 짓을 한 게 틀림없어! 그래 네 이놈! 네 놈이 내 아들 요나를 망쳐 놓은거야. 그 애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어. 아이고 내 아들! 내 아들이 어떻게 되는 거지? 끝내 예수쟁이가 된다면 어떻해! 바로 네 놈 때문이야!󰡓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포착한 나는 아드님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만족하고 감사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침착하게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선행이지? 자기 종교를 배반하라고 꾀는 게 좋은 일이란 말이냐?󰡓 
󰡒고정하시고 제 말좀 들어 보세요. 저는 당신 아드님을 찾아간 일이 없습니다. 저희는 엘리아 서점에서 서로 알게 되어 친구가 되었습니다. 요나는 저를 무척 좋아하고 저도 요나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저는 참된 친구로서 요나가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고, 또 유일한 구원의 길인 저희 종교를 알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요나 어머니, 잘 들어 보세요. 저는 요나에게 책을 한 권 준 일밖에 없고,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한 번 진지하게 공부해 보라고 초대했을 뿐입니다. 설령 요나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 하더라도 유태교를 저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완전하게 사는 겁니다.󰡓 
󰡒불행하게도 그 애가 신자가 된다면 우리의 예언자들을 저버리게 되고 마는 거다. 예수쟁이들은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 모세나 다른 예언자들도 믿지 않잖아!󰡓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성서의 모든 성인 선조들과, 모든 예언자들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록과 그들의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이거든요.󰡓 
󰡒만일 여기에 랍비가 계셨더라면 설명해 주셨을 테지. 난 미시너도 게마라도(탈무드의 두 부분) 모른다구. 아는 것은 오직 내 불쌍한 요나를 망쳤다는 것 뿐이야!󰡓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수차례에 걸쳐 있었던 요나의 어머니와 랍비, 친구들의 공격을 여기에 다 기록하면 굉장히 길어질 것이다. 
누구보다도 요나에게 위협과 폭행이 가해졌다. 그는 모든 것을 꾹 참고 견디면서 교리 공부를 계속했다. 
그의 집은 더 이상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나는 자기 집을 떠나 거의 걸식하다시피 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었다. 나는 한 박식한 신부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요나를 부탁했다. 
신부님은 요나를 돌보면서 세례를 준비시켰다. 
세례받기에 필요한 모든 교리를 다 배우고 난 요나는 신자가 되고 싶어 안달을 했다. 
이리하여 요나는 8월 10일, 키에리의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 사건은 키에리의 주민 전체에게 훌륭한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고, 몇몇 유태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후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나의 대부와 대모는 카를로와 오타비아 베르티네티였다. 그들은 이 갓 입교한 교우를 친아들처럼 생각해 주었다. 이리하여 요나는 그들의 도움으로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정직하게 일하여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요나의 세례명은 루이지53)였다. 

11. 요 술 

나의 걸작품들을 불태워 버리다 

나는 공부를 하면서 노래나 악기 연주, 시낭송, 연극과 같은 여러 즐거운 모임에 기꺼이 참석했다. 그리고 카드와 트럼프, 공, 원반 던지기, 뛰어넘기, 달리기, 죽마 같은 새로운 놀이들도 배웠다. 무척 재미있는 이 모든 놀이에 전문가는 못 되어도 꽤 능숙한 편이었다. 
몇 가지 놀이는 이미 말한 대로 모리알도 풀밭에서 배운 것이고 나머지는 키에리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모리알도에서 초심자였다면 이곳에서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 놀이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놀이들이었기 때문에 흡사 별천지의 놀이처럼 신기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요술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공개적으로 혹은 남몰래 공연을 했다. 
나는 기억력이 썩 좋았기 때문에 고전 시들을 많이 암기했다. 단테와 페트라르카, 타소, 피리니 몬티, 그 밖의 다른 시인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시들을 마음대로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막힘없이 즉석에서 시를 읊을 수 있었다. 
나는 즐거운 모임이나 공연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즉흥시를 읊었다. 나의 이런 작품들은 걸작품들로 간주되었으나 실은 유명한 시인들의 글귀를 여러 상황에 맞게 변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문에 나는 󰡐나의 시󰡑를 절대로 남에게 빌려주지 않았고 혹시 그런 시를 쓰면 즉시 불태워 버렸다.54) 

요술 놀이로 돌아가다 

내 요술 놀이에 대한 사람들의 경탄은 더해만 갔다. 조그만 상자에서 상자보다 더 큰 공들이 무수히 나오고 작은 주머니에서 많은 달걀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가 놀라며 숨을 죽였다. 
더욱더 놀라게 만드는 놀이도 있었다. 나는 구경꾼들의 코끝에서 작은 공들을 모았고, 어느 사람의 지갑 속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를 알아맞히기도 했다. 동전들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 먼지로 변하게도 했고 몇몇 사람들을 불러 구경꾼들 쪽으로 향하게 하면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무서운 짐승들이나 머리가 없는 사람들로 보였다. 
이 마지막 놀이를 본 어떤 사람은 내가 마귀의 힘을 빌어 마술을 하는 마법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토마소 쿠미노의 살아 있는 닭 

곧잘 놀라는 이런 사람들 중에는 새로운 하숙집 주인55)인 토마소 쿠미노도 끼어 있었다. 그는 열심한 신자인데다가 아주 순진했고 농담도 좋아했다. 나는 그를 여러 모로 놀려 주었다. 
그는 자기의 본명 축일에 하숙생들을 위해 젤리로 굳힌 닭고기를 한 마리 정성껏 준비했다. 그는 그것을 냄비에 담아서 식탁으로 가져왔다. 뚜껑을 열자 살아 있는 놀란 닭 한 마리가 푸드득하고 튀어나오더니 사방으로 날면서 꼬꼬댁 꼬꼬댁 하고 울어댔다. 
또 언젠가는 냄비에 스파게티를 넣어서 푹 삶은 뒤에 그걸 그릇에 담으려는 순간 마른 겨로 변한 때도 있었다. 포도주병을 여러 번 채웠지만, 컵에 따르면 번번이 맹물로 변했다. 그리고 물을 마시려고 하면 어느 틈에 컵에는 포도주가 가득 따라져 있었다. 또 과일을 빵으로, 주머니의 동전을 녹슨 양철 조각으로, 모자를 여자용 헝겊 모자로, 개암 열매를 자갈로 변하게 하는 장난도 자주 쳤다. 
어느 순간, 불쌍한 토마소 씨는 겁을 집어먹고 중얼거렸다. 
󰡒인간들은 이런 일들을 할 수 없다구. 하느님께서는 이런 어리석은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실 리가 없어. 이는 분명히 마귀의 장난일 거야.󰡓 
그는 집안 사는 사람들에게는 감히 이런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그 근처에 사는 베르티네티 신부님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것을 백마술56)이라고 판정한 신부님은 학교의 책임자요 대성당의 감목 대리요 주임인 브르치오 신부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브르치오 신부님은 학식이 풍부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얘기 좀 나누러 오라고 나를 불렀다. 

네가 악마를 섬기든가 아니면 악마가 너를 섬기든가 

내가 신부님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성무일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잠깐 기다리라는 표시를 했다. 이윽고 신부님은 다른 사무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그곳에서 그는 내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조는 친절했지만 표정은 근엄했다. 
󰡒얘야, 나는 네 학업과 품행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너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들려 오는 말들이 있더구나. 듣자 하니 뭐 네가 남의 생각도 알아내고, 남의 호주머니에 든 돈의 액수도 알아 맞히고 까만 것을 하얀 것으로 보이게 하고 멀리 있는 것도 알아낸다고 하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네 말을 하고 있단다. 어떤 사람은 네가 마술을 부리고 마귀와 접촉하고 있다고까지 의심하고 있다.󰡓 
󰡒……󰡓 
󰡒자, 솔직하게 말해 보렴. 누가 네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었지? 어디서 배웠지? 툭 터놓고 말해 보렴. 이건 너와 나 사이에 비밀로 남게 될 게다. 너에게 확실히 말해 두지만, 네가 말한 모든 것은 오직 네 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하마.󰡓 
나는 대답할 여유를 5분만 달라고 태연하게 청한 뒤에 신부님에게 정확한 시간을 물었다. 신부님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시계는 잡히지 않았다. 
󰡒시계가 없으시면 제게 5전짜리 동전 한 닢을 주십시오.󰡓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다시 호주머니를 뒤졌지만 지갑이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자 신부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언성을 높였다. 
󰡒못된 녀석 같으니라구! 네가 악마를 섬기든가 아니면 악마가 널 섬기든가 둘 중의 하날 게다. 벌써 넌 시계와 주머니를 훔쳤다구. 나는 널 고발할 수도 있고 몽둥이 찜질도 할 수 있다구.󰡓 
그러나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다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재차 말했다.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자꾸나. 자초지종을 설명해 봐라. 도대체 어떻게 내 시계와 주머니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호주머니 밖으로 나갔단 말이냐? 그 물건들은 어디에 있지?󰡓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감목 대리님, 모든 것을 몇 마디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모든 게 민첩한 동작과 숙달된 묘기에 달려 있습니다.󰡓 
󰡒묘기와 내 시계와 주머니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신부님 방에 들어왔을 때 신부님께서는 한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후 신부님께서는 그 주머니를 기도대 위에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다른 방으로 가실 때 시계를 탁자 위에 놓으신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그것들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믿고 계셨지만 저는 그것들을 재빨리 전등갓 밑에 숨겨 두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전등갓을 쳐들자, 마귀를 통해서 훔쳐 갔다고 믿었던 두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진 신부님은 폭소를 터뜨렸고 몇 가지 실례를 더 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물건들을 사라지게 했다가 다시 나타나게 했다. 신부님은 무척 즐거워했으며 내게 작은 선물을 주면서 말했다. 
󰡒네 친구들에게 가서 놀라움은 무지의 소치라고 말해 주어라.󰡓 

12. 요한 보스꼬의 올림픽 경기 

기차처럼 속력을 내다 

마술에 대한 내 결백이 증명되자 나는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 우리는 모여서 쇼를 벌이며 즐겼다. 
그 당시 키에리에 한 곡예사가 들어왔다. 그는 그의 공연을 놀라운 마라톤 경기로 시작했는데 키에리 거리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단 2분 30초만에 달렸다. 기차와 똑같은 속력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무슨 놀라운 현상이라도 본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극구 칭찬을 했다. 
나는 내 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그 곡예사와 한번 힘과 재주를 겨뤄 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57) 그런데 그만 어떤 경솔한 친구가 그 사실을 그에게 말해 버렸다. 이리하여 나는 곡예사와 대결을 하게 되었다. 한 학생과 프로와의 대결이었다. 
정해진 시합 장소는 포르타 토리네세 가로수길58)이었다. 내기에 건 돈은 20리라였다. 나는 그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명랑회의 여러 친구들이 추렴을 해서 도와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왔다. 
경주가 시작되자 처음에는 그가 나를 몇 미터 앞질렀다. 그러나 나는 금방 그를 따라잡았고 그는 형편없이 처지게 되었다. 경기 도중에 그는 달리기를 멈추고 내게 항복했다. 
󰡒멀리뛰기 내기를 다시 걸겠다. 돈은 40리라야. 그러나 네가 원하면 더 걸 수도 있어.󰡓 

요술 지팡이 놀이 

우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장소를 선택했다. 작은 다리 난간이 가로막고 있는 곳으로 건너 뛰어야 했다. 그가 먼저 뛰었는데 그 누구도 더 멀리 뛸 수 없을 만큼 난간에 바싹 닿을 정도로 건너 뛰었다. 내가 이길 확률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나도 그와 똑같이 뛰었지만 다리 난간에 손을 짚고 개울의 둑을 획 넘어 버렸다.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또다시 내기를 걸겠어. 아무거나 네가 잘하는 걸로 선택해 봐.󰡓 
나는 그의 내기를 받아들였다. 80리라를 걸고 요술 지팡이 놀이를 선택한 나는 가는 막대기를 집어 그 끝에 모자를 걸고 나서 다른 끝을 손바닥 위에 세운 뒤에 그것을 새끼 손가락에서부터 시작하여 약지와 장지, 검지와 엄지 위로 튕겼으며 손등, 팔꿈치, 어깨, 턱, 입술, 코와 이마 위로 계속 튕기다가 똑같은 방법으로 손바닥 위로 돌아오게 했다.59) 
󰡒이번엔 결코 지지 않겠다. 이 놀이는 내 전문이거든.󰡓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는 같은 막대기를 집어 들더니 놀라운 솜씨로 입술까지 튕겨 올렸다. 그러나 코가 너무 큰 탓으로 막대기가 흔들리며 균형을 잃었다. 그러자 그는 그걸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손으로 잡고 말았다. 

우리는 기꺼이 져 주고 싶었다 

그 불쌍한 곡예사는 자기 돈이 깡그리 바닥나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외쳤다. 
󰡒어떤 굴욕이라도 받아들이겠지만 한낱 학생에게 졌다는 수치감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 자, 나는 아직 100프랑이 있으니 그걸 나무타기 시합에 걸겠다. 저 나무의 꼭대기에 가장 가까이 발을 올려 놓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큰길 근처에 있는 한 느릅나무를 가리켰다. 이번에도 우리는 수락했다. 우리는 그가 측은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가 이기게 되기를 바랐다. 그가 망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올라갔다. 그는 아주 높은 곳에까지 발을 올려 놓았다. 한뼘만 더 올라갔더라도 나뭇가지가 부러져 그는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 이상 높이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모두가 말했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하면서 내가 오를 수 있는 제일 높은 지점에까지 올라가서 몸을 거꾸로 세워 그 곡예사의 발이 닿았던 지점에서 약 1미터 이상 더 높은 곳에 발을 올려 놓았다. 
밑에서 요란한 박수 갈채가 터졌다. 

22명의 학생들이 한 식탁에 

내 친구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학우들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문가를 이겼기 때문에 의기양양했다. 
대단히 즐거웠던 목요일의 사건이었다. 나는 네 번이나 곡예사를 이겼기 때문에 영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 가련한 패배자는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그를 동정한 나머지 그가 무레토 레스토랑에서 우리에게 점심을 사 준다는 조건으로 내기에서 땄던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는 감지덕지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 명랑회 회원들 22명은 모두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따라서 내 친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승리를 함께 나누었으며 아주 멋진 식사를 했다. 점심 값은 25리라였고, 곡예사는 215리라60)를 되돌려 받게 된 것이다. 
돈을 거의 되찾게 되어 한숨 놓은 곡예사는 헤어질 때 우리에게 고마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이 이 돈을 돌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쫄딱 망했을 거다. 정말 고맙다. 너희들을 즐거운 맘으로 기억하마. 하지만 다시는 학생들과 내기하지 않겠다.󰡓 

13. 책에 대한 갈증 

밤 시간 3분의 2를 독서로 

아마 여러분은 내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즐기면서 공부는 언제 했지?󰡑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더 많이 공부 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는 학교 공부 시간에만 정신을 차리면 모든 것을 충분히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에 내 기억력은 뛰어나서 내게는 읽는다는 것과 공부한다는 것이 큰 차이가 없었다. 한 번 읽은 책이나 들은 내용은 쉽게 반복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어머니는 내게 적게 자는 습관을 들여 주셨기 때문에 나는 밤 시간의 3분의 2를 독서로 밝혔다. 낮에는 남에게 개인적으로 공부를 가르쳐 주거나 복습시키는 일 같은 여러 자유 활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 모든 것을 우정과 선으로 했지만 많은 이들은 이것에 대해 사례를 했다. 
키에리에는 엘리아라는 유태인의 책방이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라틴 고전문학 전집을 빌려 읽기로 했다. 한 권 빌리는 데 동전 한 닢이었다. 책을 다 읽으면 나는 그것을 돌려주었는데 하루에 한 권씩 읽을 수 있었다.61) 

고전 연구 

중학교 4학년 때 이탈리아 작가들의 글을 읽었다. 
수사학 과정을 밟는 해에는 코르넬리오 네포테, 치체로, 살루스티오, 퀸치오 쿠르치오, 티토 리비오, 코르넬리오 타치토, 오비디오, 비르질리오, 오라치오와 다른 라틴 고전 작가들의 글을 읽었다. 
나는 그 책들을 재미있게 읽고 음미했으며 전부 알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사제가 된 후 수업을 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그 걸작품들을 설명하려고 했을 때 비로소 나는 그 작품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준비와 연구가 필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학교 공부, 복습, 긴긴 독서 등으로 낮 시간과 밤 시간의 상당한 부분을 소요했다. 전날 저녁에 읽기 시작한 티토 리비오의 이야기를 손에 쥔 채 아침 기상 시간을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리듬은 내 건강을 크게 해쳤다. 몇 년 동안 나는 무덤에로 치닫는 듯한 탈진 상태를 견뎌 내야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말라고 항상 권고하는 바이다. 밤은 휴식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도 힘든 공부에 전념을 해서는 안 된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얼마 동안은 지탱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필경 건강을 해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14.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꿈을 믿고 싶지 않았으나 

수사학 과정62)도 끝나 가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결정을 내릴 때가 온 것이다. 
베키에서 꾸었던 꿈은 언제나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꿈은 여러 번 반복되었고63) 점점 더 명료해졌다. 만일 내가 꿈을 믿는다면 사제의 길을 택해야 했고 실제로 내게는 그런 성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꿈을 믿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 삶의 양식,64) 몸에 배인 일정한 습관들,65) 사제들에게 요구되는 덕행에 대한 전적인 결핍은66) 내게 불확실함을 안겨 주었다. 내게는 아주 힘든 결정이었다. 
그때 내 성소에 마음을 써 주는 영적 지도자가 있었다면 정녕 내게 큰 보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보배가 없었다. 훌륭한 신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고해 신부는 있었지만 성소에 대해서는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수도자 및 사제 성소에 관한 책을 읽고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한 끝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67) 나는 속으로 이렇게 뇌였다. 
󰡐내가 교구 신학생이 된다면 실패할 위험이 있다. 사제가 되더라도 사람들 가운데서는 살고 싶지 않다.68) 수도원에 들어가서 공부와 묵상에 전념하겠다. 고요 속에서 나는 격정 특히 내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교만과 더 쉽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일터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나는 콘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청원서를 냈고 시험에 합격하여 입회 허가도 받았다. 이리하여 나는 키에리에 있는 평화의 수도원에 들어갈 모든 채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나는 입회를 앞두고 이상한 꿈을69)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누더기 옷을 걸친 수많은 수도자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당신은 평화를 찾고 있지만, 여기서는 평화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형제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다른 장소, 다른 일터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나는 꿈에 그 형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어떤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고해 신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꿈이니 형제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서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는 타인의 충고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성향을 따라야 합니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지평을 열어 주는 편지 

바로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갈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나는 일시적인 어려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더 큰 장애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나는 친구인 루이지 코몰로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는 내게 9일기도를 하라고 충고했다. 그 동안에 자신은 그의 삼촌인 본당 주임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9일기도 마지막 날, 나는 그와 함께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그 다음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은총의 성모님 제단에서 또 다른 미사 복사를 섰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루이지의 삼촌 코몰로 신부님의 답장을 발견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는 네 친구에게 수도원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하고 싶구나. 신학생이 되는 게 좋으리라고 본다.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바라고 계신 뜻이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성소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버렸으면 한다. 근신과 신심업을 통해서 모든 장애물은 극복될 것이다.󰡓 
나는 그 현명한 충고를 따랐으며 착복식 준비에 도움이 되는 독서나 묵상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토리노에 닥친 콜레라 

수사학 시험에 합격한 나는 곧 이어 신학교 입학에 필요한 시험을 쳤다. 신학교 시험은 일반적으로 또리노에서 보지만 그 해에는 인근에 만연된 콜레라의 위협 때문에 키에리에서 봤다. 시험 장소는 베르티네티 씨70)의 저택으로 당시에 은퇴한 브르치오 신부가 빌렸던 것이다. 그 후 베르티네티 씨는 이 집을 살레시오회에 유산으로 넘겨 주었다. 
나는 여기서 키에리 학교의 종교적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사실을 언급해 보겠다. 나는 이 학교에 4년 간 재학하는 동안 나쁜 이야기나 반종교적인 말을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수사학 과정을 마친 사람들은 25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3명은 의과에 진학했고 한 사람은 상인이 되었으며 나머지 21명은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다. 
방학이 되면 나는 집에 갔는데71) 더 이상 곡예 놀이를 하지 않고 오로지 종교 서적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런 책들을 소홀히했다. 그러나 소년들에게는 여전히 관심을 가졌다. 이야기나 재미있는 놀이, 노래로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큰 아이들 중에서도 신앙의 진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으므로 기도와 더 중요한 다른 것들도 가르쳐 주었다. 오라또리오 비슷한 것이었다. 50명 가량 되는 소년들이 나를 친아버지처럼 사랑하고 따랐다.72) 


큰 이상을 향한 길 (1835 - 1845) 

1. 착복식 

낡은 인간의 옷을 벗고 

나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학교 입학 시험에 원서를 냈다. 영원한 구원이냐 혹은 영원한 멸망이냐는 평상시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중요한 그날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9일기도를 했고 여러 친구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다. 1835년 10월 25일 성 미카엘 축일에 나는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대미사 전에 카스텔누오보의 친자노 본당 신부님이 신학생복을 축성하여 내게 입혀 주었다. 그분은 내게 세속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낡은 인간과 그의 묵은 습관과 태도를 벗겨 주시길 빕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나는 낡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벗겨 내야 하는가! 하느님, 제 나쁜 습관들을 없애 주소서!󰡑 
신부님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의와 진리와 성덕으로 창조된 새 인간을 입혀 주시길 빕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게 하얀 로만 칼라를 끼워 주셨다. 나는 깊이 감동한 채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하느님, 저로 하여금 이 순간 새 인간을 입도록 해주십시오. 이후부터 당신의 거룩한 뜻을 철저히 따르는 새 삶을 살게 해주소서. 정의와 성덕이 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부단한 목표가 되게 해주소서. 오 마리아, 당신은 저의 구원이시나이다.󰡑 

새옷을 입은 꼭두각시처럼 

미사 후 본당 주임은 주보 성인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바르델라라는 마을에 함께 가자고 나를 초대했다. 그 초대는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축제였다. 나는 마치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나온 꼭두각시 같았다. 
이날을 고대하며 여러 주일 동안 준비했는데, 이제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며 즐기려고 모여든 남녀들 틈에 끼여 식사를 해야 했다. 그들은 놀이나 춤이나 시합을 화제거리로 삼는 사람들이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몇 시간 전에 거룩한 옷을 입은 사람이 그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었겠는가? 
본당 신부님은 그 사실을 눈치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부님은 내게 즐거운 분위기였는데 무슨 생각에 그리 골몰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침에 올린 행사와 오후의 행사가 전혀 맞지 않아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술에 거의 만취된 사제들이 손님들 틈에서 익살을 떠는 것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런 사제상에 대해서 거의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만일 그런 신부가 될 것이라면 차라리 지금 당장 이 옷을 벗고 가난한 농부로서 그러나 착한 신자로서 살겠습니다.󰡓 
신부님은 대답했다. 
󰡒세상은 그런 걸세.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네, 악을 피하려면 악을 알아 둘 필요가 있지. 무기를 사용할 줄 모르면 그 누구도 훌륭한 군사가 되지 못하는 법일세. 영혼의 적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일세.󰡓 
나는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되뇌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로 대중 연회에 참석치 않겠다.󰡑 
그 후 나는 내 자신을 깊이 돌아보았고 그때까지 지녀 왔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물론 이제까지의 내가 고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산만하고 교만스러웠으며, 마음의 충족이 아니라 일시적인 기쁨밖에 가져다 주지 못하는 갖가지 놀이와 시합, 뜀뛰기 등에 정신이 잔뜩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결심 

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견고히 다지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결심1) 을 기록했다. 
1. 시장이나 장날에 벌어지는 대중 공연에 참석치 않겠다. 춤이나 연극도 보러 가지 않겠다. 가능한 한 만찬회나 그러한 기회에 참석치 않겠다. 
2. 다시는 요술과 곡예 놀이를 하지 않겠다. 밧줄을 타지 않고, 바이올린2)도 켜지 않으며 사냥을 하러 가지 않겠다. 이 모든 것들은 사제 생활에 상반된다고 생각한다. 
3. 반성하고 생각할 겨를을 찾도록 힘쓰겠다.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겠다. 건강에 필요한 만큼만 수면을 취하겠다. 
4. 지금까지 일반 서적들만 읽었으나 앞으로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종교 서적을 읽겠다. 
5. 정결에 어긋나는 모든 생각과 대화, 말, 독서 등과 힘껏 싸우겠다. 
6. 매일 주님께 기도하겠다. 매일 약간의 묵상과 영적 독서를 하겠다. 
7. 매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어떤 이야기나 사례들을 들려주겠다. 동료들과 친구들, 친척들에게 그렇게 할 것이고 아무도 못 만나게 되면 적어도 어머니에게 얘기하겠다. 
이 모든 결심들은 착복식날 한 것이었다. 나는 그 결심들을 내 마음속 깊이 새기기 위해 성모님 성화 앞에서 그 결심들을 읽고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꼭 지키겠다고 약속드렸다. 

2. 맘마 말가리다, 마음의 지주 

사람을 영예롭게 하는 것은 옷이 아니다 

나는 1835년 10월 30일에 신학교로 들어가야 했다. 따라서 간소한 비품3)이 준비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기뻐했고 나는 그들보다 더 기뻐했다. 
오로지 어머니만이 생각에 잠긴 채 무슨 말을 하려는 양 줄곧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는 떠나기 전날 저녁에 나를 따로 불러 놓고 잊지 못할 말4) 을 했다. 
󰡒요한아, 이제 너는 신학생옷을 입었구나. 나는 한 어머니가 아들의 성공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온갖 위로를 다 맛보고 있단다. 그러나 너를 영예롭게 하는 것은 옷이 아니라 덕행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혹시 어느 날 네 성소에 의심이 든다면 제발 그 옷을 더럽히지 말고 즉시 벗도록 해라. 자신의 의무를 등한시하는 신부를 아들로 두느니보다는 차라리 가난한 농부를 아들로 두는 편을 나는 택하겠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성모님께 바쳤고, 네가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언제나 우리의 이 어머니를 사랑하라고 당부했었지. 요한아, 이제 나는 네게 완전히 그분의 것이 되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깊은 친구들을 사귀도록 해라. 그리고 신부가 되거든 네 주위에 성모님의 신심을 전파하도록 해라.󰡓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머니는 감동에 젖어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어머니, 제게 해 주신 모든 말씀과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어머니의 이 말씀 결코 잊지 않겠어요. 일생 동안 보배처럼 간직하겠어요.󰡓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키에리로 떠났고 같은 날 저녁에 신학교5)에 도착했다. 

벽 위에 붙은 강령 

나는 웃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침실로 올라가 침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가릴리아노라는 친구와 함께 침실과 복도, 운동장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들어 벽 꼭대기에 있는 시계 문자판을 보니, 󰡐괴로운 사람에게는 시간이 느리고 즐거운 사람에게는 빠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가릴리아노에게 말했다. 
󰡒저건 바로 우리의 계획표야! 기쁘게 지내자꾸나. 그럼 시간이 빨리 지나갈 거야.󰡓 
다음날 3일 간의 피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피정을 잘하려고 힘썼다. 
피정이 끝날 무렵 나는 철학 교수인 브라 타르나바시오 신부님을 찾아가 내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웃어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생활규범에 대해서 조언을 청했다. 훌륭한 신부님은 대답했다. 
󰡒한 가지만 권하겠다. 네 의무를 정확히 준수해라.󰡓 
나는 그 권고를 신학교 생활의 토대로 삼고 규칙과 시간표를 정확히 지켰다. 수업 시간, 성당에 가는 시간, 식사 시간, 오락 시간, 취침 시간 등을 알리는 종소리에 한결같이 충실했다. 
이 정확성은 친구들의 우정과 웃어른들의 호평을 사게 했다. 따라서 신학교 6년 간은 퍽 아름다운 체험이 되었다. 

3. 신학교에서의 생활 

시커먼 짐승이라도 만난 듯이 

신학교의 하루 일과는 거의 한결같았다. 먼저 사람들과 일상 생활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 몇 가지 사건들을 이야기하겠다. 
무엇보다도 먼저 웃어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그들을 무척 사랑했다. 그들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방학이나 개학 때는 흔히 학장 신부님이나 웃어른들에게 문안드리러 갔다. 그러나 호통을 맞으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들과 대화를 나누러 가지 않았다. 그들은 한 주에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면서 식사 시간과 소풍 때 감독을 하러 왔는데 그게 전부였다.6) 나는 그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충고도 청하고 마음 속에 있는 질문도 해 보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웃어른이 신학생들 사이로 지나가면 학생들은 무슨 시커먼 짐승이라도 만난 듯이 좌우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이 모든 것은 어서 빨리 신부가 되어 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보살펴 주고 온갖 필요성을 채워 주겠다는 내 마음 속의 열망을 부채질했다. 

성체를 모시기 위해서 쓴 이상한 방법 

이제 동료들에 대해서 한마디 하겠다.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성모님을 사랑하고 학업과 신심업에 열심한 동료들과 사귀었다. 
신학교에는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신학생들도 있었지만 위험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자신의 성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좋은 정신과 의지 없이 신학교에 들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신학교에서 나는 아주 좋지 못한 담화를 하는 것을 들었다. 소지품 검사를 하면 어떤 이들에게서는 풍기 문란하고 반종교적인 책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젊은이들은 발각되는 즉시 퇴학당하거나 아니면 자퇴를 했다. 신학교에서 그들은 페스트였다. 이 페스트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전염되었다. 
나는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아주 모범적인 젊은이들을 친구로 선택했다. 그들은 굴리엘모 가릴리아노와 아빌리아나의 조반니 자코멜리7), 루이지 코몰로8)였다. 이 세 친구들은 내게 있어서 그야말로 보배였다. 
나는 신심업을 철저히 수행했다. 아침마다 미사와 묵상과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다. 식사 시간에는 베르카스텔의 교회사9)를 읽었다. 고해성사는 2주일에 한 번 씩 의무적으로 보았지만 필요한 사람은 매주 토요일마다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성체는 주일과 다른 축일에만 할 수 있었다. 혹시 누가 그 중간에 성체를 영하면 불순명이 되었다. 나는 다른 이들이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동안에 슬그머니 빠져나와 인접해 있는 성 필립보 성당10)으로 들어가 영성체를 하고는 수업 시간이나 자습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부리나케 뒤쫓아갔다. 이러한 행위는 규칙 위반이었다. 웃어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때로는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영성체를 아주 많이 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내 성소의 가장 힘있는 양식이 되어 주었다고 확인할 수 있다. 
성체 신심에 대한 이 제약은 가스탈디 대주교에 의해 시정되었다. 준비되었다고 느끼는 신학생들은 매일이라도 성체를 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킹과 스페이드 

여가 시간에 흔히 하는 놀이는 󰡐집뺏기󰡑였다. 나는 처음엔 이 놀이에 아주 열중했었지만 완전히 포기했던 곡예와 흡사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어떤 날에는 트럼프 놀이를 했다. 얼마 동안 나는 이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특별한 놀이꾼은 아니었지만 거의 항상 이겼다. 놀이가 끝날 무렵이면 내 손에는 동전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들보다 내가 더 슬퍼졌다. 뿐만 아니라 카드 놀이에 정신을 쏟다 보니 공부할 때나 기도할 때도 킹과 스페이드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철학과 2학년 때 이 놀이를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휴식 시간이 좀더 길게 주어지면 우리는 키에리를 둘러싸고 있는 쾌적한 장소로 즐거운 소풍을 나갔다. 그 소풍은 공부에도 도움이 되었다. 교과서 내용을 서로 퀴즈식으로 묻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친구들과 신학교를 산책하면서 재미있고 유익하고 학문적인 것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즐길 수 있었다. 
비가 오거나 궂은 날에는 자주 식당에 모여 학교에 관한 일이나 그 밖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이 󰡐스터디 그룹󰡑의 대표였다. 이 동아리는 내게 큰 즐거움이었고 내 신심과 건강에도 유익했다. 가장 재미있는 질문은 나보다 한 해 늦게 들어온 루이지 코몰로가 곧잘 했다. 훗날 부틸리에라11) 본당 주임이 된 도미니코 페레티노는 웅변가처럼 말을 했고 늘 대답을 잘했다. 가릴리아노는 말을 적게 했지만 아주 주의 깊게 경청했고 단지 몇 가지 생각을 부언하곤 했다. 
우리의 모임에서는 어떤 의문점들이나 학문적인 주제와 주안점에 대한 얘기도 나왔는데 가끔가다 정확한 답변을 해 줄만한 사람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이리하여 우리 각자는 주제를 나누어 일정한 기간을 두고 연구한 뒤에 발표하기도 했다.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루이지 

나의 오락 시간은 루이지에 의해 종종 중단되곤 했다. 그는 내 옷자락을 잡아끌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날 성당으로 인도하여 성체 조배, 임종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게 하거나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로사리오나 성모 일과 기도를 바치게 했다. 
이 놀라운 친구는 내겐 큰 행운이었다. 그는 내게 충고를 해 주고, 바로잡아 주고, 격려와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잡을 줄 알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아주 친절한 사랑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서 주의받는 것이 도리어 기쁠 정도였다. 
우리는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를 본받으려고 했지만 그보다 100㎞는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주의 산만한 친구들에게 물들지 않고 내 성소에 진력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코몰로 덕택이었다. 
내가 한 가지 본받지 못했던 것은 고행이었다. 이 작은 젊은이는12) 겨우 19세였는데 사순절 내내 엄하게 단식을 했으며, 토요일마다 성모님을 위해 단식을 했다. 종종 아침 식사를 걸렀고 어떤 때는 물과 빵만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모욕이나 멸시를 온유하게 참아 견뎠으며 공부와 신심업을 정확히 수행했다. 
이 모든 것들은 나를 경탄케 했다. 그는 내게 있어서 친구라기보다 우상13)이었고 드높은 덕행의 모범이었으며, 선에 대한 끊임없는 자극이었다. 

4. 방 학 

들판에서 곡식을 거두며 

방학은 신학생들에게 있어서 위험한 기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여름 방학이 4개월 반이나14)되었다. 
나는 읽고 쓰는 데다 시간을 썼지만 무익하게 보낼 때도 종종 있었다. 물질적인 일에 열중하기도 했다. 팽이나 나무공을 만들기도 하고, 쇠 따위를 벼리거나 목공일도 했다. 옷을 재단하여 바느질도 하고 구두도 만들었다. 모리알도의 집에는 방학 때 내가 만든 책상, 식탁, 의자 같은 걸작품들15)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낫을 손에 쥐고 풀밭으로 들어가 풀을 베거나 들에 나가 곡식도 거두었다. 포도주 저장 창고로 내려가 술통도 준비하고, 포도를 짓이기기도 했으며, 새 포도주를 짜기도 했다. 
축일에야 비로소 나는 소년들에게 봉사할 수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십육칠 세에 이르도록 신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또한 나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소년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쳤다. 그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학교는 무료였지만 그 대신 나는 소년들에게 끈기와 정신 집중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고백성사 보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시작 단계에서 몇몇 애들은 그 조건을 따르기가 싫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남아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민적인, 서민적인, 서민적인 

나는 본당 신부님의 동의를 얻어 그의 임석하에 강론이나 강의도 했다. 1838년 방학 때는 알피아노의 마을에서 로사리오 성모님 축일에 강론을 했고, 신학교 1학년이 끝났을 때는 카스텔누오보 성당에서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에 강론을 했으며, 카프릴리오에서는 성모님의 탄생에 대해서 강론을 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사방에서 박수 갈채를 받았고 급기야는 허영심에까지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성모님의 탄생에 대해서 강론을 막 끝낸 나는 현명해 보이는 한 사람에게 강론에 대한 소감을 물어 보았다.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연옥 영혼들에 대한 당신의 강론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은 성모님의 영광에 대해서 얘기했는데도 말이다. 
알피노 본당 주임인 요셉 펠레토는 박식하고 신심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도 내 강론에 대한 소감을 물어 보았다. 
󰡒아주 아름답고 질서 정연했네. 어휘도 훌륭하게 구사하고 성서의 내용들을 인용해 가면서 논리적으로 전개했지.󰡓 
󰡒하지만 사람들이 이해했을까요?󰡓 
󰡒조금밖에. 내 동료 신부와 나, 그리고 몇 사람들만 알아들었을 걸세.󰡓 
󰡒아주 쉬운 것들이었는데 어째서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자네에게는 쉽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너무 수준이 높다네. 군데군데 성서의 생각들을 언급하고 교회사의 사건들을 설명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네.󰡓 
󰡒제게 어떤 조언을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라틴어와 그 양식을 버리고, 좋다면 사투리나 이탈리아어를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서민적인, 서민적인, 서민적인16) 양식으로 해야 하네.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실례나 단순하고 실천적인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는 게 좋다네. 사람들은 이해력이 적다는 것을 염두에 두게나. 신앙의 진리는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해야 하네.󰡓 
이 아버지다운 충고는 내 일생의 규범이 되었다. 허영심과 꾸민 표현에 지나지 않는 그 강론들을 생각하노라면 지금도 부끄러워진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내게 그 소중한 교훈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강론이나 교리를 하거나 글을 쓸 때면17) 반드시 그 가르침을 따랐다.18) 

5. 몬페라토 언덕 위의 자유로운 날들 

찻잔과 컵이 날아가다 

나는 방학이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변변치 못한 신학생에게는 은연중에 심각한 위험에 빠지는 일이 종종 생길 수 있었다. 내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어느 해에 몇몇 친척들이 나를 작은 축제일에 초대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 성당 예절에 본당 신부님을 도와줄 신학생이 아무도 없다면서 끈질기게 요청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이에 응했다. 
미사를 드렸다. 미사 때 나는 복사도 서고 노래도 했다. 그 후 점심 시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만사가 순조로웠다. 그러나 포도주가 거나해지자 신학생으로서는 차마 듣기 거북한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나는 말머리를 돌리려고 애써 보았지만 내 목소리는 시끄러운 소음에 묻혀 버리곤 했다.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른 나는 자리를 떠나기로 맘먹고 식탁에서 일어나 모자를 손에 쥐고 나가려고 했으나 아저씨가 나를 말렸다. 이때 이미 만취한 한 손님이 좌중에 있는 이들에게 더 나쁜 욕을 퍼붓자 술에 취한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 그에게 덤벼들었다. 선술집 같은 고함이 터지고 위협하는 소리가 높아 갔다. 잔들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접시와, 병과 수저와 포크도 날아갔다. 어떤 사람은 칼까지 빼 들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여러 번 했던 결심을 새롭게 했다. 그것은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고요히 지내겠다는 것이었다. 

산산조각이 난 바이올린 

또 다른 불쾌한 일이 부틸리에라의 분지, 크로벨리아에서 일어났다. 그날은 바르톨로메오 축일이었는데, 또 다른 아저씨가 날 성당 예절에 초대했다. 
나는 미사 복사를 서고 노래를 했으며 바이올린까지 켜야 했다. 이 악기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악기였지만, 난 신학생복을 입던 날 그걸 포기했었다. 
성당 예식은 아주 순조롭게 끝났다. 
점심은 축일의 주인공인 그 아저씨 집에서 베풀어졌으며 그때까지는 거북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손님들은 내게 오락 삼아서 바이올린을 좀 켜 달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19) 그러자 그자리에 있던 한 음악가가 끈질기게 요청했다. 
󰡒내가 소프라노를 켤 테니 자네는 적어도 반주나 좀 해 주게나.󰡓 
아,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이었던가! 그 요청을 거절하지 못 하고 얼마쯤 바이올린을 켜고 있노라니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발자국 스치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창가로 다가가 보니 마당에서 사람들이 내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나는 손님들에게 말했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입니까? 저는 무도회에 대해서 늘 반대하는 사람인데 도리어 그 춤을 부추기는 사람으로 만든단 말입니까?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나는 바이올린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20) 
혹시 성당에서 켤 기회가 생겨도 다시 그 악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최후의 사냥 

또 다른 사건이 방학 동안에 일어났다. 나는 여름과 가을에 덫이나 새장, 때로는 총으로 새들을 잡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산토끼를 쫓아 들판과 포도밭 사이를 달리고 계곡을 가로질러 언덕들을 뛰어넘었다. 
시간이 꽤 지나, 마침내 나는 사정 거리에 닿은 짐승에게 총을 쏘아 갈빗대를 부수었다. 가련한 짐승은 쓰러졌다. 나는 숨이 끊긴 그 짐승을 보고 큰 슬픔을 느꼈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몇몇 친구들이 포획물을 보고 내게 축하를 해 주는 동안 내 모습을 보니 겉옷은 어디로 달아나고 속옷 바람에다 밀수업자처럼 밀짚 모자만 달랑 남아 있었다. 손에 총을 든 채 이런 모습으로 5㎞나 치달았던 것이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그런 모습에 대해서 사과한 뒤에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것 만큼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지킬 수 있었다. 주님께서 그날의 내 행위를 용서해 주시길! 
이 세 가지 사건은 내게 한 가지 무서운 교훈을 남겨 주었다. 진지하게 하느님을 섬기려면 관상의 시간을 더욱 늘리고 세속적인 낙을 온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즐거움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즐기는 동안에 하는 나쁜 이야기나 옷차림은 모든 덕, 특히 정결이라는 우아한 덕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닭 요리 

하느님께서 코몰로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 전까지 나는 그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방학이 되면 우리는 서로의 집을 자주 왕래했으며 편지도 자주 썼다.21) 나는 코몰로를 거룩한 젊은이로 생각했고 그의 출중한 덕행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공부를 도와주면서 조금이라도 그를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어느 방학 땐가 그는 나와 함께 하루를 보내려고 날 찾아왔다. 나의 가족들은 추수를 하러 들에 나가 있었다. 그는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할 강론을 써서 내게 읽어 보라고 했고 신자들 앞에서 하는 것처럼 내 앞에서 강론을 했다.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되었다. 집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 
󰡒내가 불을 지필 테니 너는 냄비를 준비해. 그리고 뭔가 요리를 해 보자구.󰡓 루이지가 말했다. 
󰡒좋아. 뜰에 나가 닭 한 마리를 잡자. 삶아 고기도 먹고 국물도 먹자.우리 어머니도 그렇게 하시곤 하니까.󰡓 
얼마 후에 우리는 작은 닭 한 마리를 붙잡았다. 이제 할 일은 그것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그걸 잡는단 말인가? 나도 코몰로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우리는 합의를 보았다. 코몰로는 도마 위에 닭의 머리를 기대놓고 나는 작은 낫으로 닭의 머리를 베기로 했다. 내가 일격을 가하자 목이 떨어졌다. 깜짝 놀란 우리는 󰡐으악󰡑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후다닥 도망을 쳤다. 
잠시 후에 루이지가 말했다. 
󰡒정말 우리는 바보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상에 있는 짐승들을 양식으로 주셨는데 왜 이렇게 역겨움을 느껴야 하지?󰡓 
우리는 닭을 집어 용감하게 털을 뽑아 요리를 했고, 맛있게 점심 식사를 했다. 
나는 성모 승천 대축일에 루이지의 강론을 들으러 친자노로 가고 싶었지만, 그날 나도 다른 본당에서 강론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지 못했고, 대신 그 다음날 가보았더니 루이지의 강론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록코에 대해서 즉흥적으로 

그날, 8월 16일은 성 록코 축일이었다. 우리는 이 축일을 󰡐냄비 축일󰡑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친척과 친구들이 서로 점심 식사에 초대해서 즐겁게 지내기 때문이었다. 
이날 내 담력을 증명해 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벌어졌다. 한 신부님이 성 록코에 대해서 강론을 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론대에 오를 시간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친자노 본당 신부님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했다. 인근 마을에서 온 많은 사제들이 축일을 지내기 위해 자리해 있었다. 나는 본당 신부님을 궁지에서 구해 내기 위해 이 신부님 저 신부님에게 다가가 성당에 모인 회중에게 몇 마디 좋은 말을 해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이는 내 간청에 성가신 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갑자기 록코 성인에 대해서 얘기하라니, 정신 나갔군! 그게 뭐 포도주잔이라도 들이키는 건 줄 아는가? 괜히 다른 사람들을 성가시게 굴지 말고 자네가 직접 해 보시지!󰡓 
그 말에 모두가 박수를 쳤다. 창피를 당한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말했다. 
󰡒저는 감히 나설 엄두도 못 냈지만 모두들 거절하시니 대신해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성가 한 곡을 선창했고, 이미 읽은 적이 있는 성인의 생애를 머리 속으로 정리하면서 강론대로 올라갔다. 나는 그렇게 훌륭한 강론을 해 본 적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더 좋은 포도주를 마시게 되길 희망해 

역시 그 방학 중에(1838) 나는 루이지 코몰로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우리는 풀밭과 들판 그리고 포도밭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한 언덕 위로 올라갔다. 
󰡒봐라, 루이지, 금년에는 가뭄이 심해서 작황이 형편없구나! 불쌍한 농부들! 많이 일했는데 거의 아무 결실도 못 보다니!󰡓 
󰡒우리에게 위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손길이야. 그 원인은 우리의 죄에 있어.󰡓 
󰡒내년에는 주님께서 좋은 결실을 맺게 해 주시길 빌어.󰡓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래. 그걸 즐기게 될 사람들은 행복하겠지!󰡓 
󰡒자, 어두운 생각일랑 버리자꾸나. 금년에는 할 수 없지만, 내년에는 풍년이 들어 우리도 더 좋은 포도주를 마시게 될 거야.󰡓 
󰡒넌 마시게 되겠지.󰡓 
󰡒그럼, 넌 계속해서 물만 마실 생각이니?󰡓 
󰡒나는 아주 좋은 포도주를 마시게 되길 희망해.󰡓 
󰡒그게 무슨 말이지?󰡓 
󰡒그냥 흘려 버려. 주님께서 아시니까.󰡓 
󰡒말을 돌리지 말라구. 󰡐아주 좋은 포도주를 마시게 되길 희망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너 혹시 천국엘 가고 싶다는 거냐?󰡓 
󰡒죽은 후에 천국에 가게 될 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걸 갈망하고 있어. 얼마 전부터 나는 하느님의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이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루이지는 기쁨에 찬 얼굴로 이 말을 했다. 그때 그의 건강 상태는 아주 좋았고 나와 함께 신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6. 저 세상의 소식 

서명을 하는 최후의 눈길 

나는 루이지 코몰로의 전기22)를 낼 때, 그의 죽음에 앞서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이야기했다. 그것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은 내가 쓴 책을 읽으면 된다. 
전기에서도 간단히 언급했고, 숱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사건만을 떠올리고자 한다.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나 죽음으로 인한 이별에 대해서도 허심 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정도로 우정이 깊어졌다. 
어느 날 우리는 어떤 성인전의 긴 구절을 함께 읽은 뒤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우리 둘 중에서 먼저 죽는 사람이 저 세상의 소식을 전해 주러 오면 근사할 거야.󰡓 
그 점에 대해서 여러 번 얘기를 나누던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먼저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친구에게 구원되었는지 말해 주러 오기로 하자.󰡓 
나는 이 약속을 중대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우리는 그저 가볍게 이런 약속을 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그런 약속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루이지가 마지막으로 아팠을 때 그 약속을 여러 번 반복하곤 했었다. 더 나아가 그의 마지막 말과 눈빛은 우리가 했던 약속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많은 동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스꼬, 나는 구원되었다! 

루이지 코몰로는 1839년 4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날 저녁 그는 아주 장엄하게 필립보 성당 묘지에23) 안장되었다. 우리의 약속을 알고 있는 동료들은 일어나게 될 일이 궁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 소식이 내 슬픔을 크게 덜어 주리라고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극도로 초조해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침실에는 약 20명의 신학생들이 이미 잠들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밤에 약속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흥분해 있었다. 
11시 30분경에 고막이 터질 듯한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 왔다. 수많은 말들이 끄는 큰 수레가 침실 문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소리는 천둥 소리처럼 더 크게 울렸다. 침실 전체가 진동했다. 깜짝 놀란 신학생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한 구석으로 몰려가 서로 몸을 바싹 붙이고 있었다. 그때 그 격렬하고 요란한 천둥 속에서 루이지 코몰로의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3번24)이나 󰡒보스꼬, 나는 구원되었다!󰡓라고 말했다. 
모든 신학생들이 그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몇몇은 목소리를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학생들은 나처럼 아주 또렷이 알아들었으며 이 사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런 무서움과 놀라움25)을 맛보았기 때문에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결코 이런 종류의 약속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내게 일어났던 것과 흡사한 이런 일을 때때로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7. 보렐 신부의 조언 

소중한 120리라 

신학교에서 나는 행복하게 지냈다. 나는 동료들과 모든 교수님들의 사랑을 받았다. 
학기말 시험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단정한 학생들에게는 60리라의 장학금이 지급되었는데, 하느님의 도움으로 나는 신학교 6년 동안 내내 그 장학금을 받았다. 
신학과 2학년26)때 나는 제의방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별로 힘든 일이 아니었는데도 관대한 웃어른들의 배려로 나는 해마다 60리라를 받았다. 나는 장학금과 제의방직에서 받은 보수로 기숙비의 반액을 지불할 수 있었다. 나머지 반액은 인정 많은 카파소 신부님이 대주었다. 나는 제의방지기로서 램프나 초, 여러 비품들과 전례 비품들을 관리했다. 
금과옥조 

그해에 나는 토리노의 훌륭한 사제들 중의 한 분인 요한 보렐27)신부님을 알게 되는 행운을 입었다. 그는 신학교에 연례 피정 강론을 하러 왔다. 그는 웃음짓는 얼굴로 영적인 생각이 담겨 있는 농담을 하면서 제의실로 들어오곤 했다. 
나는 그의 열심한 미사 준비와 감사 기도, 미사드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가 훌륭한 사제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의 강론을 듣고 나는 그 소박함, 쾌활함, 명백함, 말 마디 마디에서 뿜어 나오는 사랑의 불에 대해서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를 보고 모두가 성인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투어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갔으며 자신의 성소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조언을 청했다. 나도 영적인 문제들을 얘기하러 갔다. 끝으로 나는 그에게 연중과 특히 방학 때 성소의 정신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성체를 자주 영하고 관상의 시간을 많이 가지면, 성소를 보존하고 참된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피정은 모두에게 큰 선익이 되었다. 몇 년 후에도 우리는 그가 했던 강론이나 개인적인 충고를 기억했다. 

8. 공부에 몰두 

지평을 활짝 열어 준 작은 책 한 권 

나는 공부에 대해 잘못된 생각28)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교도들의 고전 문학을 읽었다. 화려한 언어로 구사된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에 빠져들었다. 
반대로 수덕적인 책들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교는 훌륭한 언어나 탁월한 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위대한 교부들의 작품들도 별로 가치 없는 작품들처럼 보였다. 종교적인 원리들은 힘차고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예술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다행히도 주님께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던 내 생각을 바꾸어 주셨다. 철학과 2학년 초에 성체 조배를 하러 갔던 나는 기도책을 찾지 못하고 의자 위에 놓여 있던 준주성범에서 성체에 관한 내용을 찾아 몇 장 읽었다. 나는 그 깊은 내용과 무척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표현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나는 속으로 󰡐아마 이 책의 저자는 대문호일 거야󰡑라고 뇌였다. 
나는 수차례에 걸쳐 그 훌륭한 소책자를 읽어 내려가면서 그 안에는 부피가 두꺼운 고전 작품 속에 담겨 있는 것보다 더 큰 지혜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준주성범29)을 읽은 뒤로 나는 다른 일반 서적들을 손에서 놓았다. 그후 나는 갈메트30)의 신․구약 사화, 주세페 플라비오31)의 유태 기원, 몬시뇰 마르케티의 종교에 관한 논증, 후레시누스32), 발무스33), 주코니34) 의 작품들과 다른 많은 종교 서적들을 읽었다. 플로리35)의 교회사도 무척 좋아해서 피해야 할 책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읽었다, 카발카,36) 파사반티37), 세네리38)의 작품과 엔리온39)의 교회사도 아주 기쁘게 읽었다. 
󰡐그 책들이 학교 공부40)에 지장이 되지는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기억력이 좋아서 학교 공부는 수업 시간에 듣는 것과 교과서를 읽는 것만으로도 넉넉했다. 그러므로 그런 책들은 자습 시간에 읽었다. 웃어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오메로와 이마를 마주대고 

내 마음에 썩 드는 과목은 그리스어였다. 
나는 이 언어를 고등 학교 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여 문법을 배우고 번역을 했다. 
1836년, 이 공부를 심화할 좋은 기회가 생겼다. 토리노가 콜레라41) 의 위협을 받게 되자 예수회 회원들은 카르미네 기숙 학교42) 기숙생들을 도시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기숙생들은 별장이 있는 몬탈도43) 토리네세 성에 머물게 되었다. 
내부 학생들과 외부 학생들을 동시에 수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과외 선생이나 보조원들이 두 배로 더 필요하게 되었다. 혹시 기꺼이 봉사해줄 신학생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예수회 회원들로부터 받은 카파소 신부님은 침실 보조원과 그리스어 과외 선생으로 나를 추천했다. 
이 기회는 나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그리스어에 전념하도록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가르치면서 동시에 깊이 공부했다. 예수회 회원들 가운데는 그리스어에 능통한 비니라는 신부님이 있었는데 그는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넉 달도 채 지나기 전에 그는 내게 신약 성서 전부와 호머(Homer)의 일리어드 오딧세이 첫 두 권과 핀다로와 아나크레온테의 오드 형식의 몇몇 시가를 번역케 했다. 그 훌륭한 신부님은 내 열의에 탄복한 나머지 계속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4년 동안 나는 주일마다 그에게 그리스어에서 이탈리아어로 해석한 문장이나 아니면 이탈리아어에서 그리스어로 작문한 문장을 보냈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정확하게 교정하고 적절한 주의 사항을 기록해서 다시 부쳐 주었다. 이리하여 나는 그리스어를 라틴어처럼 쉽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프랑스어와 히브리어 기초도 공부했다. 이탈리아어와 라틴어 다음으로 내가 몰두했던 어학 공부는 그리스어, 히브리어, 프랑스어였다. 

9. 영원한 사제 

대주교님께 드린 청원 

루이지 코몰로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39년에 나는 신학과 3학년이었는데 이때 4가지 소품과 삭발례를 받았다.44) 
그해 방학 때 나는 1년을 월반하려고 마음 먹었다. 당시에는 그런 허락을 얻기가 꽤 힘들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프란소니 대주교님을 찾아가 만 24세라는 나이를 이유로 들면서, 여름 방학에 4학년 교재들을 공부하여 1840~1학년도에는 5학년 과정을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대주교님은 나를 인자하게 맞아 주었으며 그때까지 치른 내 시험 성적을 보고는 4학년 과정의 모든 시험을 치른다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다. 카스텔누오보의 본당 주임으로서 신학자인 친자노 신부님이 시험관으로 지명되었다. 나는 2개월 동안 공부하여 규정된 시험을 치른 뒤에 차부제품을 받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나를 떨게 하는 생각 

나는 내 생애의 결정적인 그 순간을 곰곰이 그려 보면서 준비가 부족함을45)느꼈다. 그러나 내 성소에 대해서 직접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카파소 신부님에게 의견을 물어 보았다. 그는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정진하면서 자기 말을 따르라고 했다. 
토리노의 선교의 집에서 10일 동안 피정을 했다. 나는 고해 사제에게 내 양심 상태를 밝혀 드러내고 적절한 충고를 받기 위해 총고해를 했다. 계속해서 앞으로 매진하고 싶었지만, 일생 동안 자신을 묶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두렵게 했다. 그래서 나는 고해 사제의 완전한 동의가 있기 전에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그때부터 나는, 󰡐성체를 자주 영하고 관상의 시간을 많이 가지면 성소를 보존하고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보렐 신부님의 말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신학교에 다시 돌아온 나는 5학년에 등록을 했으며 신학생으로서 맡을 수 있는 최대의 책임인 󰡐학생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841년 3월 19일에 나는 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사제 서품은 6월 5일로 정해졌다. 
신학교를 떠나는 날46)은 슬픈 날이었다. 웃어른들은 나를 사랑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사랑을 드러냈으며, 친구들은 나를 무척 좋아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살고 그들은 나를 위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수염을 깎거나, 발레타 모자가 필요하거나, 옷을 꿰매거나 수선할 일이 생기면 모두 내게로 달려왔다. 
6년 동안 살면서 지식과 교양, 사제적 영성을 습득하고 갖가지 친절과 사랑을 받았던 집과의 이별은 무척 쓰라린 일이었다. 

첫 미사 

1841년 6월 5일 삼위일체 대축일 전날 나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47) 
첫 미사는 카파소 신부48)가 수석사제로 있는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성당49)에서 드렸다. 사제의 첫 미사를 드려본 지가 오래된 내 고향에서는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토리노에서 조용히 첫 미사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을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로 여기고 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기억하는 순간에 내 모든 스승들과 영적 물적 은인들을 기억했다. 특히 언제나 큰 은인으로 추모하고 있는 칼로소 신부님을 기억했다. 
월요일에 콘솔라타 성당으로 두 번째 미사를 드리러 갔다. 나는 동정녀 마리아께 당신 아드님에게서 얻어 주신 무수한 은혜에 대해서 감사드렸다. 
화요일에는 성 도미니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곳에는 나의 옛 스승인 주스티아노 신부님이 살고 있었다. 신부님은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미사 동안 내내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그분과 함께 지냈다. 천국과도 같은 날이었다. 
목요일(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이었다)에는 내 고향에서 가족들에 둘러싸여 미사를 드렸다. 성체 거동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성체를 모시고 카스텔누오보 길을 행렬했다. 본당 주임은 내 친척들과 사제들과 마을 유지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모두가 내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애정을 쏟아 주었다. 
그날 저녁에50)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 가까이에 이르러 아홉 살 때 꿈꾼 장소를 바라보노라니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느님의 계획은 얼마나 놀라우신가!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어린아이를 땅에서 들어 올려 당신께서 총애하시는 사람들 틈에 넣어 주신 것이다!󰡑 

10. 말이 마구 날뛸 때 

항상 소년들에게 둘러싸여 

내가 사제 서품을 받은 1841년, 카스텔누오보 본당에는 보좌 신부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5개월 동안 본당 보좌 신부의 일을 대신했다. 나는 본당 사목에서 큰 기쁨을 맛보았다. 주일마다 강론을 하고 환자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줄 수 있는 시험을 아직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고해성사는 주지 못했다. 묘지에도 가고 본당 기록부도 정리하고 영세민 증명서나 다른 서류도 작성했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소년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카스텔누오보의 꼬마 친구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내가 성당에서 나오면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그들은 나를 졸졸 따라다녔으며 나를 환영해 주었다. 모리알도에서도 소년들이 나를 찾아왔다. 또 나의 집 베키로 돌아가면 그곳에서도 소년들이 나를 둘러쌌다. 

말의 머리 위로 날아든 참새 떼 

나는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강론을 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강론이나 이야기를 해 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다. 그해 10월 말에 나는 라부리아노에서 베니뇨 성인에 대해 강론을 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곳은 지금 스칼렌게의 본당 주임인 요한 그라시노 신부님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기쁘게 초대에 응했다. 나는 그 축일을 멋지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강론을 준비하여 이탈리아어로 깨끗하게 써서 연습을 했다. 당연히 결과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의 교만함에 커다란 교훈을 주셨다. 
그날은 마침 주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떠나기 전에 카스텔누오보 사람들을 위해서 미사를 드린 뒤에 시간 안으로 리브리아노에 도착하려고 말을 탔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51) 중간 지점에 이르렀다. 친자노와 베르사노 사이에 있는 카살보르고네 계곡이었다. 그때 기장(역자 주: 포아풀과에 속하는 일년 초)이 뿌려진 들판에서 갑자기 수많은 참새 떼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말은 들판과 풀밭을 미친 듯이 질주했다. 나는 안장에 몸을 단단히 붙이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그것은 말 옆구리로 미끌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걸 바로 잡으려고 애를 쓰는 순간 안장은 벗겨져 달아나고 내 몸은 허공에 떴다가 다시 돌무더기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낯선 집에서 의식을 차리다 

가까운 한 언덕에서 내 가련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한 사람이 그의 일꾼과 함께 나를 도와주러 달려왔다. 그는 기절한 나를 자기 집으로 옮겨 제일 좋은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극진한 간호를 아끼지 않았다. 한 시간 후에 정신이 든 나는 내가 남의 집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의 집이라고 놀라지 마시고 마음 푹 놓으세요. 이미 의사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어요. 딴 사람은 말을 뒤쫓으러 갔고요. 저는 농부지만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많이 편찮으십니까?󰡓 
󰡒오 착한 벗이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큰 애덕을 갚아 주시길 빕니다.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쪽 팔을 움직일 수 없는데 아마 부러진 모양입니다. 제가 있는 곳이 어디지요?󰡓 
󰡒베르사노 언덕 위에 있는 브리나라는 별명52)을 지닌 요한 칼로소의 집이랍니다. 저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남의 도움을 필요로 했었지요. 시장을 자주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에 그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할 이야기야 많지요! 한 가지 들어 보세요. 오래 전에 저는 당나귀를 타고 아스티로 간 적이 있었지요.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답니다. 돌아오는 길에 모리알도 계곡에 이르렀을 때 너무 많은 짐을 싣고 있었던 가련한 당나귀는 길 한복판 진창에 미끄러져 쓰러진 채 꼼짝도 못했지요. 다시 일으켜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어요. 한밤중인데다 비는 오고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했어요. 저는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질렀지요.󰡓 
󰡒……󰡓 
󰡒그러자 몇 분 후에 가까운 집에서 누군가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왔어요. 한 신학생이 횃불을 손에 들고 그의 형과 다른 두 사람을 데리고 저를 도와주러 달려 왔습니다. 그들은 저를 도와 당나귀에서 짐을 내린 뒤에 진창 밖으로 끌어냈어요. 그리고는 저를 그들 집에 묵게 해 주었지요. 제 모든 짐도 운반해 주었구요. 저는 반쯤 죽어 있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흙탕을 뒤집어쓰고 있었지요. 그들은 제 몸을 씻어 주고 아주 훌륭한 저녁 식사를 대접한 다음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자게 해 주었습니다. 
󰡒……󰡓 
󰡒이튿날 떠나기 전에 저는 당연히 사례를 하려고 했지만, 신학생은 󰡐내일 우리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라고 친절하게 말하면서 한사코 거절하더군요.󰡓 

내 눈시울이 빨개진 것을 알아차리다 

그 말에 나는 감동했다. 그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알았다. 
󰡒많이 편찮으세요?󰡓 
󰡒아닙니다. 당신의 얘기가 아름다워 감동했을 뿐입니다.󰡓 
󰡒제가 그 선량한 가정을 위해서 뭔가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할 텐데! 얼마나 착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른답니다.󰡓 
󰡒어떤 가정이었는데요?󰡓 
󰡒보스꼬라고 했어요. 사투리로는 보스케티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감동을 하십니까? 혹시 그 가정을 알고 계십니까? … 그 신학생은 잘 있나요?󰡓 
󰡒친애하는 벗이여, 그 신학생이 바로 지금 당신이 집에 맞아 들인 저입니다. 당신은 그날 밤에 제가 했던 일을 천 배로 갚아 주고 있습니다. 당신 집에 데려다가 이 침대 위에 뉘여 놓으신 이 사람이 바로 그 신학생이랍니다.󰡓 
󰡒……󰡓 
󰡒주님께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 착한 가정과 나의 기쁨과 놀라움은 상상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불행 중에 그토록 사랑스런 친구를 다시 만나게 해 주신 것이다. 그의 부인과 자매, 그리고 다른 친척들과 친구들은 수없이 들어 왔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는 몹시 기뻐했다. 그들은 내게 온갖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잠시 후에 의사가 왔다. 다행히 아무 데도 부러진 데는 없었다. 그래서 며칠 후에 나는 다시 찾은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집에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친밀한 관계로 우정을 나누고 있다.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다시는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강론을 준비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11. 사제로서의 삶을 배우러 

거절한 세 자리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내게 일자리가 세 개 들어왔다. 나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했다. 
제노바의 한 명문가에서는 나를 가정 교사로 초빙했다. 보수로는 1년에 천 리라를 주겠다고 했다. 내 고향 사람들은 내가 그들 사이에 머무는 것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전속 사제의 자리를 수락해 달라고 부탁했고 월급은 보통의 두 배로 주겠다고 보장했다. 카스텔누오보의 보좌 신부 자리도 제공되었다. 
나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몇 년 전부터 나의 영적 지도자요 은인이었던 카파소 신부님의 의견을 듣기 위해 토리노로 갔다. 그 거룩한 신부님은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보장된 두둑한 보수, 친척들과 친구들의 강요, 일에 대한 나의 사목적 열성, 그는 조금도 주저치 않고 말했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말고 이 사제학교로 오게나. 자네에게는 지금 윤리와 강론 공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니까.󰡓 
나는 기쁘게 그의 의견에 따랐다. 이리하여 11월 3일에 나는 사제학교로 들어갔다. 

위대한 선생, 괄라 신부 

신학교에서는 교의적이고 사변적인 것들만을 공부했지만, 윤리적인 것에 대하여는 논의되는 전제들에 한하여 공부했기 때문에 사제학교는 신학교의 공부를 보완해 주는 것으로 사제가 되기 위한 것을 배웠다. 
시간표는 묵상과 영적 독서, 하루 두 차례에 걸친 윤리 수업, 강론 수업, 묵상생활 등으로 짜여져 있었다. 공부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고 좋은 책들을 읽을 시간도 있었다. 
사제학교의 책임자는 지혜와 성덕으로 명성이 높은 신학자 루이지 괄라 신부님과 주세페 카파소 신부님이었다. 
괄라 신부님은 학교의 설립자였다. 나폴레옹 점령 당시(1797~ 1814)에 길이 남을 박애심을 보여 주었던 그는 사심이 없고 학식이 풍부하며 신중성과 기백이 뛰어났다. 그는 신학교를 마친 젊은 사제들이 사목직을 잘 수행하는 법을 배우도록 사제학교를 설립했다. 이 사업은 교회의 선익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피에몬테 교회에 계속 영향을 주고 있는 얀세니즘의 뿌리 몇 개를 뽑았다고 할 수 있다. 
윤리 신학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 중의 하나는 󰡐개연설(probabilismo) 및 엄밀개연설(probabiliorismo)󰡑이라는 것이었다. 엄밀개연설의 선두에는 알라시아나 안토이에 같은 몇몇 엄격한 저술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엄격한 태도는 자칫 잘못하면 얀세니즘적인 태도로 흐를 수 있었다. 개연설주의자들은 성 알퐁소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성인을 󰡐교회 학자󰡑53)라고 선포했다. 그의 생각은 󰡐교황님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교황님은 그의 작품은 안심하고 가르치거나 설교하며 실천하고 따를 수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괄라 신부님은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 주님의 사랑을 놓았다. 이리하여 그는 엄격주의에도 허용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데 성공했다. 그의 덕택으로 성 알퐁소는 피에몬테 신학교의 스승이 되었으며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 

영적 지도자인 카파소 신부 

괄라 신부님의 오른 팔은 카파소 신부님이었다. 그는 놀라운 침착성과 재치 있는 솜씨, 신중성으로 개연설주의자들과 엄밀개연설주의자들 사이에 잔존하는 마지막 앙금을 걷어 내는 데 성공했다. 
사제학교의 또 다른 숨겨진 보물은 펠리체 골초 신부님54)이었다. 그의 질박한 생활 양식은 조용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일, 깊은 겸손, 명석한 두뇌로써, 괄라 신부님과 카파소 신부님의 받침대, 아니 한쪽 팔이 되어 주고 있었다. 
이 토리노의 위대한 세 사제들은 참된 열정을 가지고 감옥과 병원, 설교대와 환자들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애덕의 결실은 도시와 마을, 궁전에서부터 누추한 집에 이르기까지 두루 퍼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섭리께서는 이 세 모델들을 내 앞에 놓아 두셨다. 그들을 삶 속에 본받는 것은 오로지 내게 달려 있었다. 

창살 뒤의 소년들 

카파소 신부님은 6년 전부터 내 영적 지도자였다. 내가 뭔가 좋은 일을 한 것이 있다면 그의 덕택이다. 나는 내 인생 문제 전체를 그와 상의했다. 
그는 제일 먼저 나를 감옥으로 인도했다. 감옥에서 나는 인간의 악과 비참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12세에서 18세가 된 건강하고 영리한 소년들이 하릴없이 벌레에 물어뜯기며 영육간의 빵에 굶주려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불행한 소년들은 우리 고장의 불명예요, 가정의 수치였다. 그들은 자신의 존엄성을 잃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나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은,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생활을 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출옥을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그 까닭은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가 없이 그들이 버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 소년들이 밖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고, 도와주고, 축일에 교리도 가르쳐 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다시는 파멸에 빠지는 일이 없게 되지 않을까? 적어도 그 수효가 줄어들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카파소 신부님에게 털어놓았고 그의 도움으로 그것을 현실에 옮기려고 나는 고심하며 하느님께 의탁했다. 그분의 도우심이 없으면 온갖 노력이 다 허사였기 때문이다. 

12. 열여섯 살인데 아무것도 몰라요 

달아나는 소년 

사제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여러 무리의 소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길이나 광장이나 기숙 학교 제의실 등 어디에서나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직접 돌보아 주지는 못했다. 
한 묘한 사건이 도시의 거리를 방황하는 소년들, 특히 출옥한 소년들을 위해 일하려는 내 계획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1841년 12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었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미사를 드리려고 제의를 입고 있었다. 제의방지기인 주세페 코모티는 한 소년이 구석에 있는 것을 보고 복사를 하라고 불렀다. 
󰡒할 줄 몰라요.󰡓 소년은 풀이 죽은 채 대답했다. 
󰡒이리 와, 복사를 하란 말이야.󰡓 그는 다시 말했다. 
󰡒할 줄 몰라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이런 멍청이 같으니라구! 복사도 못 하면서 제의방엔 왜 들어왔어?󰡓 
제의방지기는 화가 나서 촛불을 켤 때 사용하는 막대기를 집어 소년의 어깨와 머리를 때리자 소년은 달아났다. 나는 제의방지기에게 소리를 질렀다. 
󰡒뭣 하세요? 왜 그런식으로 아이를 때리죠? 그 애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단 말입니까?󰡓 
󰡒미사 시중도 못 들면서 제의방에 들어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이를 때린단 말씀입니까?󰡓 
󰡒그게 신부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있고 말고요. 그 애는 제 친구니까요. 즉시 그 애를 불러 주십시오. 그 애와 할 말이 있습니다.󰡓 
제의방지기는 󰡒얘야, 얘야!󰡓라고 부르면서 소년을 뒤쫓아 갔다. 소년에게로 다가간 그는 아이를 안심시키면서 내게로 데리고 왔고, 혼이 난 소년은 벌벌 떨면서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다정하게 물었다. 
󰡒미사는 벌써 드렸니?󰡓 
󰡒아뇨.󰡓 
󰡒미사를 드리러 오너라. 미사 후에 네게 할 말이 있는데 아마 너도 좋아할 거야.󰡓 
소년은 약속했다. 나는 소년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그 성당 신부님들에게서 받았을지도 모르는 나쁜 인상을 지워 주고 싶었다. 나는 미사를 드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소년을 경당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유쾌한 얼굴로 이제는 아무도 때리지 않을 테니 두려워 말라고 소년을 안심시킨 뒤에 물었다. 
󰡒친구, 이름이 뭐지?󰡓 
󰡒바르톨로메오 가렐리에요.󰡓 
󰡒고향은 어디지?󰡓 
󰡒아스티에요.󰡓 
󰡒아버지는 살아 계시니?󰡓 
󰡒아뇨,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어머니도 돌아가셨구요.󰡓 
󰡒몇 살이지?󰡓 
󰡒열여섯 살이에요.󰡓 
󰡒그래 읽고 쓸 줄은 아니?󰡓 
󰡒아뇨. 전혀.󰡓55) 
󰡒첫영성체는 했니?󰡓 
󰡒아직 안 했어요.󰡓 
󰡒고해성사는 본 적이 있니?󰡓 
󰡒네. 그러나 아주 어렸을 때요.󰡓 
󰡒교리반에 나가니?󰡓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요.󰡓 
󰡒왜?󰡓 
󰡒꼬마들도 대답을 잘 하는데 전 아무것도 몰라서 창피해요.󰡓 
󰡒네게 따로 교리를 가르쳐 준다면 배우러 오겠니?󰡓 
󰡒그럼요.󰡓 
󰡒이 방에서 해도 기쁘게 오겠니?󰡓 
󰡒막대기로 때리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오겠어요.󰡓 
󰡒아무도 너를 못살게 굴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이제 너는 내 친구니까 오히려 존중해 줄 거다. 그럼, 우리 언제 교리를 시작할까?󰡓 
󰡒신부님께서 좋으신 때요.󰡓 
󰡒오늘 저녁에?󰡓 
󰡒좋아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럼요, 당장이라도 좋아요.󰡓 

모든 것이 하나의 교리에서 

나는 일어나서 시작하기 위해 성호경을 그었다. 그러나 나의 학생은 성호경을 긋지 못했다. 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 첫 교리 시간에 그에게 성호경 긋는 법을 가르쳐 주고 창조주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는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근면과 끈기로써 몇 주 안 가서 고백성사와 첫영성체를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익힐 수 있었다. 
이 첫 학생을 따라 다른 아이들도 나오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나는 각자의 수준에 맞는 교리가 필요한 어른들도 모았으며 특별히 감옥에서 나온 젊은이들에게 마음을 썼다. 그때 나는 형무소에서 나온 젊은이들이 그들을 돌보아 주고, 주일에 곁에 있어 주고, 정직한 주인 밑에서 일하도록 일자리를 알선해 주고, 일하는 곳으로 가끔 만나러 가 주면, 과거를 잊어버리고 착하게 살기 시작하며 정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축복하신,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크게 발전한 우리 오라또리오의 기원이다.56) 

13. 초기 오라또리오 

교리 후에 

그 첫 겨울57)에 나는 작은 오라또리오를 굳게 다졌다. 내 목적은 위험에 처한 소년들, 특히 감옥에서 나온 소년들만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질서와 규율의 토대를 잡기 위해 품행이 단정하고 교양 있는 소년들도 초대했다. 이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책을 읽고 성가를 부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시초부터 노래와 재미있는 독서가 없으면 우리의 축일 모임이 영혼 없는 육신58)과 같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842년 2월 21일 성모 자헌 축일(그 당시에는 의무 축일이었음)에 20명의 소년들이 처음으로 성당에서 󰡐라우다테 마리아󰡑(성모님을 찬미하라)를 노래했다.59) 
3월 25일,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아이들의 수효는 이미 30명에 달해 있었다. 그날 우리는 축일을 다소 성대하게 지냈다. 아침에 소년들은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저녁에는 성가를 한 곡 부르고 교리 공부를 한 다음 좋은 이야기를 하나 했다. 우리가 그때까지 모였던 경당은 이제 비좁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제의방 옆에 있는 경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충실한 소년, 요셉 부제티 

이번에는 오라또리오에 대해서 스케치를 해 보겠다. 주일 아침에 각 사람은 편하게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모두가 이 신자의 의무를 한 달에 한 번씩 지켰다. 저녁에는 정해진 시간에 성가를 한 곡 부르고 교리 공부를 했으며 이어서 좋은 이야기를 하나 했다. 그리고 나서는 뭔가 나누어 주었다. 어느 때는 모두에게 그리고 또 어느 때는 제비를 뽑아서 몇 사람에게만 나누어 주었다. 
초기 오라또리오에 나오는 젊은이들 중에서 요셉 부제티60)라는 아주 착실한 젊은이를 기억해 볼 여지가 있다. 그는 돈보스꼬와 오라또리오를 아주 좋아해서 카론노 기릴겔로(지금의 카론노 바레시노)61)에 있는 가족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62)그의 형제 카를로와 안젤로 조수에도 그에 못지 않았다. 요한 가리볼디와 그의 형제도 떠오른다. 그 당시 그들은 단순한 심부름꾼들이었지만 지금은 석공들의 책임자들이다. 
대개 오라또리오는 먼 곳에서 온 채석공과 벽돌공, 미장공, 도로 포장공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토리노의 본당들을 몰랐고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특히 주일에는 갖가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괄라 신부님과 카파소 신부님은 내 활동을 흐뭇하게 여겼다. 그들은 내게 선물할 수 있는 상본이나 안내문, 소책자, 메달, 작은 십자가 등을 주었다. 때로는 몇몇 아이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옷가지를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몇몇 아이들에게는 자립할 때까지 몇 주간씩 빵을 대주기도 했다. 

벽돌공들의 축일 

소년들의 수가 많아지자, 괄라 신부님과 카파소 신부님은 나의 작은 무리를 사제학교 마당에 데리고 가서 놀아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장소만 비좁지 않았더라면 수효는 몇 백명으로 늘어났겠지만, 80명 정도로 제한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고백성사를 볼 때는 괄라 신부님과 카파소 신부님이 와서 그들을 보살펴 주고 좋은 이야기도 해 주었다. 
벽돌공들의 주보인 성녀 안나 축일을 크게 지내게 해 주고 싶었던 괄라 신부님은 미사 후에 신학원에서 아침 식사를 하도록 모든 소년들을 초대했다. 큰 강의실에 100명 가량의 소년들이 모였다. 모두에게 커피와 우유, 초콜릿, 샌드위치, 브리오시 세몰리나, 아이들이 잘 먹는 여러 과자, 빵 등을 나누어 주었다. 
기쁨이 절정에 달했던, 축제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장소만 허락했다면 많은 소년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감옥에 있는 소년들과 계속 접촉을 

주일이면 나는 젊은이들 틈에 묻혀 지냈다. 주간 내에는 그들이 일하는 공장이나 작업장63)으로 그들을 방문하러 갔다. 이러한 만남은 소년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에게 마음을 써 주는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고용주들은 평일과 특히 위험에 빠지기 쉬운 일요일에도 우리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을 기꺼이 채용했다. 
토요일마다 나는 담배나 과일, 빵이 가득 든 주머니를 들고 교도소로 찾아가곤 했다. 내 목적은 불행스럽게 갇혀 있는 소년들과 계속 접촉을 갖고, 그들을 보살펴 주고 친구로 삼으며 그 슬픈 곳에서 나오게 되면 오라또리오로 초대하려는 데 있었다. 

14. 하느님의 뜻은 발도코에 

고해소를 둘러싼 40명의 소년들 

나는 오라또리오를 시작하면서 토리노의 성당들과 자선 병원, 구호소, 교도소, 성 프란치스코 바올라 기숙 학교 등지에서 강론도 했다. 3일기도와 9일기도, 피정 강론에도 주력했다. 
사제학교 2년 과정을 마친 후에 고백성사를 줄 수 있는 자격 시험64)을 치렀다. 그때부터 나는 하느님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용서를 베풀어 줄 수 있었다. 감옥이나 오라또리오, 필요한 모든 곳에서 젊은이들에게 규율과 도덕심을 키워 주어 그들 영혼의 선익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주간 내에 특히 주일에 40명에서 50명 되는 젊은이들이 내 고해소를 둘러싸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웬지 마음이 흐뭇해졌다. 
지금 내가 이야기한 것은 1841년 12월부터 1844년 10월까지, 3년 간 계속되었던 오라또리오의 평상 리듬이었다. 
한편 새로운 사건들과 변화와 고통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준비하시는 섭리의 손길이었다. 

내게 도움을 청하는 소년들의 무리를 보고 
  
3년 간의 윤리 과정65)을 마치자 일정한 곳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친자노 본당 신부이며 루이지 코몰로의 삼촌인 요셉 코몰로 신부는 대주교님에게 나를 그의 본당 관리 책임자로 보내 달라고 청했다. 
노령인데다가 병약해서 본당의 사목을 혼자의 힘으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대주교님은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괄라 신부님은 프란소니 대주교님에게 감사와 더불어 사양하는 편지를 쓰라고 내게 지시했다. 괄라 신부님은 카파소 신부님과 함께 날 위해서 다른 사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66) 
어느 날 카파소 신부님은 나를 당신 사무실로 불러 놓고 말했다. 
󰡒이제 자넨 공부를 끝마쳤으니 일하러 나가야 하네. 하지만 주님의 밭에는 일이 다양한데 자넨 어떤 일에 특히 마음이 끌리나?󰡓 
󰡒신부님께서 제게 권하시는 것을 하겠습니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네. 아스티 부틸리에라의 보좌 신부나 이곳 사제학교의 윤리선생, 아니면 리푸조67) 옆에 있는 작은 병원의 원목신부일세. 어떤 것을 택하겠나?󰡓 
󰡒신부님께서 좋다고 판단하시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이것 혹은 저것에 더 마음이 끌리는 데는 없나?󰡓 
󰡒제 성향은 청소년들에게 전념하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그걸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뜻하시는 대로 결정해 주십시오. 신부님의 권유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자네 마음 속에 있는 게 뭔가? 자네 생각을 휩싸고 있는 것 말일세.󰡓 
󰡒지금 이 순간 저는 제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수많은 소년들 가운데 있는 듯합니다.󰡓 
󰡒그럼 몇 주일 휴가를 지내고 오게나. 돌아올 때 소임지를 말해 주겠네.󰡓 
휴가를 마친 후에 카파소 신부님은 몇 주일이 지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침묵했다. 
󰡒자넨 왜 소임지에 대해서 묻질 않나?󰡓 
󰡒신부님의 결정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 뜻이 개입되는 것을 조금도 원치 않습니다.󰡓 
󰡒그럼 가방을 싸 가지고 보렐 신부님에게로 가 보게나. 거기서 산타 필로메나 병원의 지도 신부로 머물면서 리푸조에서도 일하게 될 걸세. 그 동안 하느님께서는 자네에게 청소년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배려해 주실 걸세.󰡓 

소년들을 어디에? 

얼핏 생각하기에 그 결정은 내 성향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병원의 영적 지도를 맡고 400여 명의 소녀들이 기거하는 시설에서 고백성사를 주어야 했다. 오라또리오를 위해서 일할 시간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 훗날 그것이 증명될 것이다. 
보렐 신부님을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그가 거룩한 사제요 본받을 만한 귀감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를 대할 때마다 나는 그의 사제적 열정에 대해서 늘 감화를 받곤 했다. 그는 좋은 충고를 해 주었고,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격려해 주었다. 
내가 3년 동안 사제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그는 강론과 고백성사를 위해서 나를 여러 번 리푸조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미래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것과 친숙해 있었다. 
우리는 교도 사목의 활성화와 청소년 사도직에 대해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다. 버림받고 나쁜 길로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의 문제는 언제나 토리노 사제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그 젊은이들을 어디에 모은단 말인가? 
󰡒당분간은 자네가 쓰게 될 방에서,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성당에 모았던 아이들과 모임을 가질 수 있을 걸세. 후에 병원 옆에 준비하고 있는 사제관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 가서 보다 나은 장소를 찾아 보기로 하세.󰡓 

15. 반복되는 꿈 

초조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다 

1844년 10월 12일이었다. 나는 소년들에게 오라또리오를 옮겨야만 한다는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어디에 어떻게 모아야 할지 누가 나를 따르고 누가 나를 떠나가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불확실함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녁에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에 나는 또다시 꿈68)을 꾸었다. 아홉 살 때 베키에서 꾸었던 꿈의 연속인 듯했다. 
나는 꿈 속에서 늑대와 염소, 염소 새끼, 어린양과 양, 수양, 개, 새떼들 틈에 있었다. 그것들은 일제히 시끄러운 소리를, 아니 아주 담력이 센 사람들도 기겁을 할만큼 무시무시한 괴성들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목자의 차림을 한 한 부인이 앞장을 서면서 그 이상한 짐승떼를 따라가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여러 곳을 지나가면서 세 번 멈추었다. 그때마다 그 짐승들은 양으로 변했다. 이리하여 양들의 수효는 더욱더 불어났다. 한참 걷고 나니 풀밭이 나왔다. 그곳에서 짐승들은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서로 사이좋게 풀을 뜯어 먹었다. 

양들이 목자로 변하다 

나는 기진맥진하여 길가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목자는 내게 계속 걸어가라고 했다.  
마지막 길을 얼마 더 걷고 나니 회랑으로 둘러싸인 마당69)이 나왔고 그 끝쪽에 성당이 보였다. 양들의 수효는 아주 크게 불어나 있었다. 그 순간 많은 목자들이 그 양들을 돌보러 왔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고 곧 가버렸다.70) 
그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많은 양들이 작은 목자들로 변하여71) 다른 양떼를 돌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어린 목자들의 수효는 점점 더 불어났다. 그러자 그들은 다른 이상한 동물들을 모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무리로 나뉘어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72) 
나는 미사를 드리기 위해 돌아가려고 했지만 부인은 내게 남쪽을 보라고 했다. 내가 눈을 들어 그쪽을 바라보니, 옥수수와 감자, 양배추, 사탕무, 상추와 다른 여러 채소가 심어진 밭73)이 보였다. 부인은 󰡒다시 한번 바라보아라.󰡓하고 말했다. 그곳에서 나는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성당74)을 보았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고 합창이 울려 퍼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미사에 초대되었다. 성당 안에는 하얀 띠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큰 글자로 󰡒Hic domus mea, inde gloria mea󰡓(여기는 나의 집, 여기서 나의 영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건들이 실현되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꿈속에서 나는 계속 목자에게 내가 어디 있으며, 그 걸음과 멈춤, 그 집과 첫번째 성당 그리고 두번째 성당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부인은 대답했다. 
󰡒지금 네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육안으로 보게 될 때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이미 저는 제 육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걸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겠습니다.󰡓 
그 순간 성 프란치스코 성당75)에서 삼종기도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꿈은76)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여기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세세한 것들도 보았다. 그 당시 나는 꿈에 본 것을 그리 믿지 않았고, 그 의미도 별로 깨닫지 못했으나 사건들이 차차 확인되어 감에 따라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 꿈과 다른 꿈은 내 결정들의 지침이 되었다. 

16. 후작 부인의 집에서 

발도코로 내려가다 

10월 13일은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이었다. 나는 소년들에게 오라또리오를 바롤로 후작 부인의 리푸조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그래서 그곳에는 노래하고 뛰놀 수 있는 완전히 우리만의 넓은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신이 났고, 머리 속에 상상하고 있는 새로운 장소를 하루 빨리 보고 싶어서 이사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10월 셋째주, 성모 자헌 축일이었다. 한낮이 좀 지나서 소년들은 새 오라또리오를 찾아서 떼지어 발도코로 내려가고 있었다. 큰 아이, 작은 아이, 기계 견습공, 벽돌공 모두 섞여 있었다. 
그들은 이사람 저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오라또리오가 어디 있죠? 돈보스꼬께서는 어디 계시죠?󰡓 
그 지역에서는 돈보스꼬나 오라또리오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소년들은 놀림감이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나쁜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위협을 하고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고함소리를 들은 나와 보렐 신부님이 함께 밖으로 나갔다. 다행이도 우리가 나타나자 모든 소음과 언쟁이 그쳤다. 그들은 우리에게 달려오면서 오라또리오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오라또리오는 아직 마무리가 안 되었으니까 우선 내 방으로 올라오라고 말했다. 방은 넓었으므로 유용하게 잘 쓸 수 있었다. 사실 그 주일에는 일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더 이상 이렇게 계속해 나갈 수는 없네 

그러나 다음 주일에는 먼저 나오던 아이들만이 아니라 동네 아이들도 나왔다. 그들을 어디에다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방도, 복도도, 계단도 온통 소년들로 꽉 찼다. 
11월 1일 모든 성인들의 축일에 보렐 신부님과 나는 고백성사를 주었다. 그러나 성사를 보고자 하는 아이들은 200명 가량 되었다. 무슨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들을 어떻게 얌전하게 붙잡아 둘 수 있단 말인가? 누구는 불을 켜려고 했고 누구는 그것을 끄려고 했으며, 또 누구는 물을 엎질렀다. 저마다 정돈을 하겠다고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물통과 집게, 손삽, 물주전자, 세숫대야, 의자, 신발, 책들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어느 순간에 가서 보렐 신부님은 말했다. 
󰡒이렇게 계속해 나갈 수는 없네. 더 적합한 장소를 찾아야겠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푸조 입구 위에 있는 나의 방에서 여섯 번의 주일을 지냈다. 

대주교님과의 대화에서 

우선 나는 프란소니 대주교님에게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 그분은 우리 계획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영혼들을 위해서 좋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뭐든지 하게나. 필요하다면 모든 권한도 부여해 주겠네. 바롤로 후작 부인에게 얘기해 보게나. 그럼 적당한 장소를 내줄지도 모르네. 하지만 말 좀 해 보게. 이 소년들이 그들의 본당으로 갈 수는 없겠나?󰡓 
󰡒그들은 거의 모두가 타지방 아이들이고 많은 아이들은 정해진 거주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1년 중 어느 때에만 토리노에 와서 살며 어느 본당에 나가야 될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알아듣기 어려운 사투리를 써서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아이들은 이미 컸기 때문에 작은 아이들과 어울려서 교리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적합한 장소가 따로 필요하겠군. 가 보게나. 난 자네의 계획을 축복해 주겠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와서 말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나 기쁘게 해 주겠네.󰡓 
나는 바롤로 후작 부인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병원은 다음해 8월에 문을 열 예정이었으므로 부인은 리푸조의 사제들이 사용하게 될 넓은 방 두 개를 성당으로 꾸며도 좋다고 허락했다. 

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또리오인가? 

이곳이 바로 주님께서 지정해 주신 오라또리오의 첫 성당이었다. 이곳에 이르려면 병원문을 지나, 코톨렌고 건물 사이에 있는 가로수길을 거쳐서 건물 내부 3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우리는 우리의 오라또리오를 두 가지 이유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 레시오 오라또리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첫째, 바롤로 후작 부인은 이 성인의 이름으로 사제들의 수도회를 설립할 뜻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런 의도에서 우리가 오라또리오로 쓰게 된 장소의 입구에 성인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게 했다.77) 
둘째, 우리의 사도직은 많은 침착성과 온유함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탁월한 온유함과 사도직의 열매를 본받을 수 있는 은혜를 하느님께 전구해 주도록 그를 주보 성인으로 택한 것이다.78) 
또 다른 이유는 반종교적인 오류와 토리노에 침투하기 시작한 개신교와 투쟁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얻어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1844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은 몹시 추웠고 눈이 펑펑 쏟아졌다. 우리는 대주교님의 허락을 얻어 갈망해 마지않던 성당을 축성했다.79) 미사를 드렸고 많은 소년들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나는 오라또리오가 드디어 자리를 잡게 된 것만 같아 기쁨의 눈물 속에 미사를 바쳤다. 마침내 나는 악의 길에 빠질 위험이 있는 가장 버림받은 소년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17. 쫓겨난 오라또리오 

천국같은 7개월 

산타 필로메나 병원에 부속되어 있는 성당에서 오라또리오는 아주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축일이 되면 수많은 소년들이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하기 위해서 몰려왔다. 미사 후에 나는 복음을 간단히 해설했다. 오후에는 교리와 성가, 종교에 대한 짤막한 강론과 성모 호칭기도, 성체 강복이 있었다. 
위와 같은 시간 사이 사이의 휴식 시간에 소년들은 놀이나 시합을 하면서 즐겼다. 대개 막달레나 수녀원과 큰길 사이에 있는 작은 가로수길에서 놀았다. 
그렇게 7개월이 흘러갔다. 우리의 세계는 천국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정한 보금자리와 이별하고 다른 장소를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롤로 후작 부인은 우리의 모든 활동을 좋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1845년 8월 10일, 소녀들을 위한 병원 축복식에 기해서 우리 오라또리오는 빌렸던 장소를 다시 내주어야 했다. 성당과 학교, 오락실로 사용되고 있던 그 두 방은 병원 내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데다가 덧문이 위에서 아래로 쳐져 있었지만 우리는 지시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성 마르티노로 이동 

우리는 대주교님의 추천이 담긴 긴급 청원서를 토리노 시당국에 냈다. 이리하여 오라또리오를 몰라시의 성 마르티노 성당, 즉 몰리니 지역으로 옮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리하여 1845년 7월 어느 주일80)에 우리는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했다. 웃고 떠들고 함성을 지르면서 우리는 사람들이 흔히 이사할 때 하는 것처럼, 저마다 자기 역량에 맞게 걸상과 기도대, 촛대, 의자, 십자가, 크고 작은 액자 등을 들고 갔다. 즐거운 마음으로 이사를 했지만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쉬움이 맴돌았다. 

보렐 신부와 양배추에 관한 강론 

보렐 신부님은 떠날 때와 도착할 때 상황에 알맞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서민적인 맛을 풍기는 독특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친애하는 소년들이여, 양배추가 탐스럽고 아름답게 자라게 하려면 옮겨 심어져야 합니다. 우리 오라또리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오라또리오는 이리저리 옮겨다녔지만81) 옮겨질 때마다 성장했습니다. 오라또리오에 나오는 소년들은 수효가 점점 더 늘어나고 모두들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라또리오가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교리 공부와 노래로 탄생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그 정도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리푸조의 방에서 우리는 기차 여행을 하는 사람들처럼 임시로 머물렀었지요. 그 몇 주 동안에 우리 모두는 고해성사와 교리, 복음 해설 같은 영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변의 풀밭에서 즐겁게 놀기도 했었지요. 그러다 오라또리오는 병원 곁에서 정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찾은 듯했고 큰 평화를 누렸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곳으로 옮겨 오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될까요? 모릅니다.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시다. 그러나 우리의 오라또리오는 옮겨 심은 양배추82)처럼 쑥쑥 자라게 되리라 믿습니다. 덕을 사랑하는 소년들의 수효도 늘어나고,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마음도 더욱더 커지고 주․야간 학교도 증설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살게 될까?󰡑라는 생각에 잠겨 있기 보다는 주님의 손 안에 우리의 모든 걱정을 맡기기로 합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영광과 우리 영혼의 선익을 증진시키는 데 적합한 장소를 언제나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은 고리와 고리가 연결된 쇠사슬과 같은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첫 은총을 받아들이면 다른 더 큰 은총을 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오라또리오의 목적에 응답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복된 고향에 다다를 때까지 덕행으로 살아 나간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선업으로써 획득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큰 감동으로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이상하고 불안한 소리 

새 오라또리오의 생활은 리푸조에서처럼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려움이 따랐다. 미사를 드리거나83) 성체 강복을 줄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소년들은 우리 오라또리오의 근본 요소인 성체84)를 영하지 못했다. 오락 시간도 크게 방해를 받았다. 소년들은 말과 수레들이 지나 다니는 길가나 성당 앞 마당에서 놀았다. 그 이상 달리 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그 적은 것이나마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우리는 보다 나은 장소가 생기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새로운 고통이 우리를 엄습했다. 
몰리니 가족과 그 집에 딸린 일꾼들은 우리 소년들의 뜀박질, 노래소리, 때때로 떠드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시당국에다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라또리오의 모임에 대해 위험하고 언제 어느 때 폭동과 혁명으로 변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아이들이 내 모든 지시에 즉각적으로 따랐기 때문이다. 
소년들이 성당 안팎을 부수고 도로 포장을 파괴한다는 터무니없는 말들도 했다. 만일 우리가 그곳에서 바로 물러나지 않으면 토리노가 우루루 무너져내리기라도 할 듯했다. 

무서운 고발장 

소문이 나돌대로 나돌더니, 급기야 몰리니의 비서가 우리에 대한 온갖 소문들을 열거한 과장된 편지를 토리노의 시장에게 띄웠다. 우리의 오라또리오는 부도덕의 온상이라는 단정까지 하면서 몰리니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무를 계속 이행해 나가기가 힘들고 평온히 지낼 수도 없다는 말로 고발장을 끝맺었다. 
시장은 그 고발들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오라또리오를 즉시 다른 데로 옮기라는 강경한 지시가 담긴 공문을 우리에게 보냈다. 
무척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집을 비워 주는 도리밖에 없었다.85) 
시장은 진상을 조사하도록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벽과 도로 포장 그리고 성당은 손상된 게 하나도 없었다. 한 아이가 못으로 벽에 살짝 금을 낸 게 그 전부였다.86)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었다. 문제의 고발장을 쓴 장본인은87) 그 후부터 오른 손이 떨려서 다시는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3년 후에 세상을 떠났고, 길가에 버려진 그의 아들은 발도코의 오라또리오로 도움을 청하러 왔으며 그곳에서 빵과 잠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것 또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18. 성 베드로 쇠사슬 성당에서의 실패 

가정부의 비뚤어진 헝겊 모자 

시장과 시당국은 우리에 대한 고발들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요청과 대주교님의 권고로 성 베드로 쇠사슬 성당88)으로 알려져 있는 성 십자가의 체노타피오 성당과 그 마당에서 우리의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성 마르티노에서 2개월을 보낸 뒤 우리는 또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89) 새 장소는 오라또리오에 아주 적합한 것처럼 보였다. 긴 회랑이며, 넓은 마당, 전례 거행에 맞는 성당은 소년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들은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무서운 적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적은 가까이에 있는 묘지에서 잠자고 있는 유령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 본당 신부의 가정부였다. 이 여인은 소년들의 노래 소리와 떠들썩함, 함성을 듣자마자 밖으로 뛰어나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그녀는 헝겊 모자를 비뚤어지게 쓰고 양손을 허리에 짚은 채 신나게 놀고 있는 소년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한 어린 소녀와 개, 고양이, 닭들이 우리를 향해서 아우성을 쳤다. 마치 유럽 전쟁이라도 터진 듯했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가까이 다가가 그 소년들은 나쁜 애들이 아니며 씩씩하게 놀지만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로 몸을 돌리면서 악담을 퍼부었다. 

테시오 신부의 마지막 편지 

그 순간 나는 오락을 중단시키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교리 공부를 조금 하고 성당에 들어가서 로사리오 기도를 바친 뒤에 그곳에서 나왔다. 다음 주에는 좀더 조용히 다시 모이게 되길 희망하면서…….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됐다. 
가정부는 저녁에 돌아온 본당신부에게 우리를 심하게 고자질했다. 돈보스꼬와 그의 소년들은 혁명가들이고 신성한 장소를 더럽히는 어중이떠중이라고 되는 대로 지껄였다. 급기야 본당 신부는 그 가정부의 말을 받아 시청에 편지 한 통을 쓰고 말았다. 
얼마나 지독한 편지였던지 우리 중 누군가가 그곳에 다시 나타나면 즉시 체포하라는 영장이 발부되었다. 
말하기는 애석한 일이지만 그 편지는 테시오 신부의 마지막 편지였다. 그는 그 편지를 월요일에 썼는데 몇 시간 후에 뇌일혈로 쓰러져 즉시 시체로 변했다.90) 이틀 후에 가정부도 죽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91) 그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과, 특히 소년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모두가 이 불행한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성 베드로 쇠사슬 성당에서는 모임이 금지되었다. 우리의 모임을 어디에서 가질 수 있겠는가? 나도 몰랐다. 이 사실을 소년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몰랐다. 

19. 방 세 개와 봄에 쫓겨난 오라또리오 

토리노 길가의 오라또리오 

다음 주일에 수많은 소년들은 성 베드로 쇠사슬 성당으로 갔다. 시당국에서 모임을 금지한 사실을 미처 알려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이 사방으로 잠겨 있는 것을 본 소년들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병원으로 물밀듯이 몰려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내 방에는 성당 비품들과 오락 기구들이 쌓여 있었고 소년들은 내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모을 한 뼘의 땅마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괴로움을 감춘 채 기쁜 표정을 지었으며, 오로지 내 머리 속과 하느님의 계획 속에만 있는 미래의 오라또리오에 관한 놀라운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축일을 즐겁게 지내게 해 주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사시와 필로네의 마돈나, 캄파냐의 마돈나, 카푸치니의 산, 수페르가까지 소풍을 나갔다. 
그 성당들에서 아침 미사를 드리고 복음을 해설했다. 오후에는 약간의 교리와 이야기를 했고 성가도 몇 곡 불렀다. 그리고는 그곳을 빙빙 돌면서 구경을 하거나 소풍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은 오라또리오의 모든 이상을 한낱 물거품으로 만드는 듯했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모레타 집에서의 첫 야간 학교 

1845년 11월이 다가왔다. 야외로 소풍을 나가거나 걷기에는 적합치 않은 계절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보렐 신부님과 상의하여 지금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거의 맞은편 가까이에 있는 모레타 신부님의 방 세 개를 빌렸다. 현재 그 집은 다시 고쳐 지었다. 
우리는 여기서 4개월을 보냈다. 아주 비좁았지만 적어도 소년들을 모아92)가르치고 모두에게 고백성사를 줄 수 있었다. 그해 겨울에 우리는 야간 학교93)도 개설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는 이런 형태의 시도가 처음94)이었기 때문에 떠들썩했다. 좋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그 즈음에 아주 이상한 몇 가지 뜬 소문이 나돌았다. 어떤 이들은 돈보스꼬를 혁명가라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이단자 혹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토리노의 신부들이 명확히 알고 싶어하다 

토리노의 두 본당 신부들이 그들 동료 사제들을 대표해서 나를 만나러 왔다. 그들은 말했다. 
󰡒이 오라또리오는 소년들을 본당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어요. 머지않아 본당 신부들은 자기 본당이 텅비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거예요. 하느님 앞에 책임져야 할 아이들을 알 수조차 없게 될 거란 말입니다. 돈보스꼬, 아이들 모으는 것을 그만 중지하고 그들을 자기 본당으로 보내세요.󰡓 
󰡒제가 모으고 있는 소년들의 거의 대부분은 본당 신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본당이나 본당 신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지요?󰡓 
󰡒거의 모두가 타지방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일자리를 찾으러 도시로 나왔다가 찾지 못하고 아이들을 그냥 이곳에 버려둔 채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또 일자리를 찾아서 혼자 도시로 나온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보이 지방, 스위스, 아오스타, 비엘라, 노바라, 롬바르디아에서 온 아이들입니다.󰡓 
󰡒왜 해당되는 본당에 다니도록 도와주지 않는 건가요?󰡓 
󰡒그들은 본당을 알지도 못합니다.󰡓 
󰡒왜 알도록 도와주지 않죠?󰡓 
󰡒불가능하니까요. 그들은 각양각색의 사투리를 쓰고 거주지가 불확실하며, 도시의 지리를 모르기 때문에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아주 어렵습니다. 게다가 그들 중의 많은 젊은이들은 18세에서 20세, 때로는 25세에 달한 이미 장성한 어른들인데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누가 그들을 그들보다 교리를 더 잘 알고 있는 8세나 10세 된 꼬마들 교리반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께서 그들을 소속 본당으로 데리고 가셔서 교리를 가르쳐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몸이 하나니 모든 본당에는 갈 수 없고 고작해야 한 본당밖에 갈 수 없지요. 유일한 방법은 각 본당 신부님이 오셔서 자기 본당 아이들을 모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산만하고 거친 아이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오락이나 소풍에 끌려서 교리도 배우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니까 각 본당에서는 그들을 모아 재미있는 놀이로 즐겁게 해 줄 장소가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장소도 없거니와 주일에 신부들은 그런 일을 할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그럼 계속하세요. 그 동안 우리가 상황을 연구해 보겠어요.󰡓 

봄에 또 쫓겨난 오라또리오 

토리노의 본당 주임신부들은 오라또리오를 승인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분분했다. 
보르고 도라의 아고스티노 가티노 본당 주임과 성 아고스티노의 폰자니 본당 주임이 내게 다음과 같은 결과를 전해 주었다. 
󰡒토리노의 본당 신부님들이 함께 모여 오라또리오의 타당성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찬성이나 반대의 이유, 그리고 우려할 만한 점과 희망 등을 비교 검토한 뒤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각 본당 신부가 자기 본당에 오라또리오를 열 수 없는 실정이므로 특별한 어떤 결정이 내리지 않는 한 그 일을 계속하도록 돈보스꼬를 부추기라고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1846년 봄이 왔다. 모레타 집에는 세입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함성과 끊임없이 들락날락거리는 소음에 정신이 빠져서 당장 우리의 모임을 중단하지 않으면 모두들 나가겠다고 주인에게 엄포를 놓았다. 착한 모레타 신부님은 만일 오라또리오의 생명을 생기차게 유지해 나가기 원한다면 젊은이들을 모을 만한 다른 장소를 즉시 찾아 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 하늘을 지붕삼은 오라또리오 

언덕 위에서 고백성사를 

1846년 3월 우리는 또다시 극심한 불편과 아쉬움 속에서 보따리를 쌌다. 우리는 필립보 형제에게서 풀밭 하나를 빌렸다(지금은 주물 공장이 들어섰음).95) 나는 뻥하니 뚫린 하늘 아래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생울타리로 둘러쳐진 풀밭 위에 놓여졌다. 300명에서 400명에 달하는 소년들은 하늘을 지붕삼은 그 오라또리오에서 지상 낙원을 발견한 듯했다. 
그러나 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미사는 어디서 드린단 말인가? 성체는 어떻게 나누어 주고 기도는 어떻게 시켜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고작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약간의 교리와 성가 몇 곡과 저녁 기도를 바치는 것이었다. 기도가 끝나면 보렐 신부님과 나는 둔덕이나 의자 위에 올라가 젊은이들에게 짧게 강론을 했다. 그들은 언제나 열심히 들었다. 
고백성사는 이렇게 했다. 
주일이 되면 나는 아침 일찍 풀밭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꽤 많은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도랑가에 앉아 원하는 사람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다른 아이들은 성사를 준비하거나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그것이 끝나면 놀이를 했다.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수페르가로 

아침나절 일정한 시각에 나팔을 불면 젊은이들이 모두 모였다. 나팔소리가 한 번 더 나면 침묵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할 것인지 알렸다.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는 캄파냐의 마돈나, 콘솔라타, 스투피니지 성당이나 상기한 다른 성당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먼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꽤 오래 걸어야만 했다. 수페르가로 갔던 일을 하나 기록해 보겠다. 그러면 다른 경우도 상상이 갈 것이다. 
젊은이들은 풀밭에서 자유로이 공놀이, 투판, 죽마 놀이를 했다. 북소리가 나면 즉시 집합과 출발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먼저 우리는 미사를 드리러 갔다. 9시 조금 지나서 우리는 수페르가로 출발했다. 누구는 빵광주리, 누구는 치이즈나 살라미, 누구는 과일 바구니나 다른 필요한 것들을 운반했다. 도시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일단 도시를 벗어나면 고함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나 계속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갔다.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떠들썩한 함성 

대성당에 이르는 비탈 기슭에서 우리는 화사하게 마구를 멘 멋진 조랑말을 만났다. 수페르가의 안셀메티 본당 주임 신부님이 보낸 것이었다. 우리를 앞서 간 보렐 신부님의 편지도 발견했다. 나는 말 위에 올라앉아 그 편지를 큰 소리로 읽었다. 󰡒안심하고들 오십시오. 수프와 요리 접시와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와󰡑하는 함성과 열렬한 박수 갈채가 터졌다. 
우리는 노래를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조랑말과 함께 대성당으로 향했다. 조랑말 곁에 있는 애들은 짐승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귀나 코, 꼬리를 잡기도 했다. 순한 짐승은 모든 것을 온순하게 참아 견뎠으며 잔등에 탄 사람에게 더 많은 인내를 보여 주었다. 
그 북새통 속에서 우리는 북과 나팔, 기타로 구성된 우리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불협 화음을 이루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지만, 소년들의 목소리와 함께 어울려 놀라운 화음으로 변화되어 들판을 메아리쳤다. 

하늘을 향한 폭죽 

언덕 꼭대기에서 우리는 실컷 웃고 장난치고 노래하며 소리소리 질렀다. 그 후 땀에 푹 젖은 소년들을 성당 뜰에 모아 놓고 허기를 채워 주는 데 필요한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 잠깐 쉰 뒤에 다시 아이들을 모아 성전과 지하에 있는 무덤과 카를로 알베르토 왕이 나라의 모든 주교들의 후원을 얻어 세운 종교 학원에 대한 놀라운 역사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96) 
학원장인 굴리엘모 아우디시오가 모두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해 주었고, 본당 주임은 포도주와 과일을 내놓았다. 
오후에 우리는 2시간 동안 그곳을 구경한 후 성당에 모였다. 
사람들도 많이 와 있었다. 오후 3시에 나는 강론대에 올라가 짤막한 얘기를 했다. 성체 강복 전에 우리 성가대원들은 맑은 목소리로 딴둠에르고를 멋지게 불렀고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후 6시에는 소광장에서 기구를 하늘로 띄웠다. 그 후 아주 훌륭한 대접을 해 준 은인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 뒤에 다시 토리노로 출발하여 노래하고 웃고 뛰고 기도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도시에 도착하면 자기 집이 나오는 대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리푸조에 이르니 그날 사용한 용품들을 운반한 건장한 소년들 칠팔 명만이 남았다. 

21. 카보우르와 이마를 마주 대고 

만일 이 신부가 군대 지휘관이라면 

이와 같은 소풍은 젊은이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아 주었고 오라또리오의 기도, 놀이, 소풍은 어느덧 그들의 삶이 되었다. 모든 소년들은 나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내 모든 지시에 즉각적으로 따랐을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뭔가 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어느 날 한 경찰관이 풀밭에서 떠들썩하게 뛰노는 400명의 소년들을 내가 손짓 하나로 조용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만일 이 신부님이 군대 지휘관이라면 세계의 그 어떤 막강한 군대라도 무찌를 수 있겠는 걸.󰡓 
정말로 소년들의 애정과 복종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돈보스꼬가 그의 소년들과 작당해서 언제 어디서 혁명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소문을 나돌게 했다. 

경찰국장이 인내를 잃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지만 시당국에서는 그 사실을 믿게 되었다. 특히 카밀로와 구스타보의 아버지로 부시장 및 경찰국장을 겸임하고 있던 카보르 후작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그는 나를 시청에 불러 놓고 나에 대해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 뒤에 말을 맺었다. 
󰡒훌륭하신 신부님, 제 의견에 따르도록 하십시오. 그 부랑아들을 돌려보내란 말씀입니다. 그들은 신부님과 시당국에 걱정만 끼칠 따름입니다. 저는 그 모임이 위험하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그냥 놔둘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불쌍한 아이들의 삶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경제적인 원조도 바라지 않고 다만 그들을 모을 수 있는 장소만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방법으로 부랑자들과 감옥에 가는 젊은이들의 수효를 줄일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신부님, 그건 틀린 생각입니다. 신부님의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거듭 말해 두지만, 신부님의 그 모임은 위험하단 말입니다. 전 어떤 장소도 내줄 수 없습니다. 신부님은 어디서 집세와 그 많은 비용들을 끌어댈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더 이상 그 떠돌이 모임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후작님께서는 제 수고가 헛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만, 제가 얻은 결과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다가 나쁜 길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떳떳한 직업을 알선해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또다시 감옥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도움은 이제까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숭고한 계획을 실현하시기 위해 때로는 비천한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그만두시고 제 말을 따르세요. 저는 더 이상 신부님의 모임을 허락하지 못 하겠습니다.󰡓 
󰡒후작님,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위험한 길로 들어설지도 모르는 수많은 아이들을 위해서 허락해 주십시오.󰡓 
󰡒그만하십시오! 저는 지금 토론을 벌이려는 게 아닙니다. 신부님은 무질서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합법적인 허락이 없으면 그 어떤 모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신부님은 모르십니까?󰡓 
󰡒제 모임은 정치적인 목적이 없습니다. 저는 대주교님의 허락으로 불쌍한 소년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을 따름입니다.󰡓 
󰡒대주교님께서 이런 사실들을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물론 소상히 알고 계십니다. 저는 그분의 동의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 이런 모임을 허락 못 하겠습니다.󰡓 
󰡒후작님께서는 대주교님의 허락으로 하는 교리마저 금하실 생각입니까?󰡓 
󰡒만일 대주교님께서 이 우스꽝스런 모임을 집어치우라고 하시면 순명할 생각입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웃어른의 뜻에 따라 시작했고 또 계속해 왔습니다. 그분께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즉시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가보십시오. 대주교님과 이야기하겠습니다. 만일 그분께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할 수 없이 원치 않는 방법을 쓰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걸 명심해 두십시오.󰡓 
이 시점에서 나는 당분간은 우리를 평화롭게 내버려 두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니 빌려준 장소를 즉시 해약한다는 필립보 형제의 편지가 와 있었다. 
󰡒당신의 소년들은 우리의 풀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하도 짓밟아서 뿌리까지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밀린 세를 면제해 드리겠으니 15일 이내로 풀밭을 비워 주십시오. 더 이상은 연기해 드릴 수 없습니다.󰡓 
내 모든 어려움을 알게 된 여러 친구들은 헛된 일이니 오라또리오를 해산하라고 충고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내가 늘상 소년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고는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가련한 돈보스꼬, 정말로 돌았군요! 

어느 날 보렐 신부님은 세바스티아노 파키오티 신부님과 다른 신부님들 앞에서 내게 말했다. 
󰡒몽땅 잃지 않으려면 뭔가 살려야 하네. 큰 아이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제일 어린 꼬마들 20명만 데리고 있기로 하세.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동안에 하느님께서는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실 걸세.󰡓 
󰡒다른 적당한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장소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넓은 운동장이며, 성당과 회랑이 딸린 수많은 소년들이 들어갈 집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제들과 신학생들도 있구요.󰡓 나는 대답했다. 
󰡒그런 것들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보렐 신부님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자 보렐 신부님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가련한 돈보스꼬, 정말로 머리가 돌았군요!󰡓 
그는 내 손을 잡고 입을 맞춘 뒤 나를 방에 홀로 남겨두고 파키오티 신부님과 다른 신부님들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22. 후작 부인의 최후 통첩 

신부님이 무리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 

돈보스꼬에 대해서 떠도는 여러 소문들은 바롤로 후작 부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더욱 초조하게 하는 것은 토리노의 시당국이 내 계획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 방에 들어와 말을 꺼냈다. 
󰡒저는 신부님이 제 사회사업체를 위해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매우 만족하고 있어요. 소녀들에게 음악과 성가, 그레고리안 성가, 수학 그리고 십진법까지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있어요.󰡓 
󰡒감사하실 일이 못 됩니다. 그것은 사제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니까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할 말이 또 있어요. 저는 신부님이 과로로 건강을 해치고 있는 게 안쓰러워요. 신부님이 제 사업들을 이끌어 가시면서 동시에 버림받은 소년들에게 전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요. 이제 그 소년들의 수효는 엄청나게 늘어났어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요. 앞으로는 신부님이 꼭 하셔야 할 일, 즉 병원일만 하도록 하세요. 감옥이나 코톨렌고에는 더 이상 가지 마시고, 소년들을 위한 일도 중단하시구요. 신부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후작 부인, 하느님께서는 지금까지 절 도와주셨고 앞으로도 계속 도와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해야 할 많은 일들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와 파카오티 신부님과 보렐 신부님이 모두 해낼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신부님이 무리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너무 많은 일들은 싫든 좋든 신부님의 건강과 제 사업에 지장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신부님의 정신 건강에 대해서 떠도는 소문과 오라또리오에 대한 시당국의 반대는 저로 하여금 이런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그게 뭐지요?󰡓 
󰡒신부님께서는 오라또리오를 선택하시든가 아니면 리푸조를 선택하시든가 하셔야겠어요. 생각해 보시고 대답해 주세요.󰡓 
󰡒제 대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부인께서는 돈이 있으시니까 사업에 필요한 사제들을 얼마든지 구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제 불쌍한 소년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제가 이 순간 그들을 저버리면 모든 게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리푸조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하더라도 해고를 받아들이고 버림받은 소년들에게 전념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지요?󰡓 
󰡒하느님께서는 항상 저를 도와주셨고 앞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어머니처럼 충고하겠어요 

󰡒하지만 신부님은 지금 과로하고 있어요. 여기서 나가신다면 빚에 몰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제게로 오시겠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명확히 말해 두지만 신부님의 소년들을 위해서는 일 전 한 푼도 안 드리겠어요.97) 어머니처럼 하는 제 충고를 받아들이세요. 저는 계속 봉급을 드리겠어요. 원하신다면 더 올려 드릴 수도 있어요. 신부님은 그 돈을 가지고 어디로 가셔서, 1년이나 2년, 3년, 5년이라도 좋으니 푹 쉬도록 하세요.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리푸조로 돌아오세요. 언제나 환영해 드리겠어요. 만일 이것을 거절하시면 신부님을 위해서 신부님을 해고하는 도리밖에 없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후작 부인, 저는 이미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 생명을 청소년들의 선익을 위해 바쳤습니다. 제게 베푸시려는 관대한 희사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주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는 길에서 멀리 떠날 수 없습니다.󰡓 
󰡒제 사업보다 당신의 떠돌이 소년들98)을 선택하시겠단 말씀이죠? 그렇다면 당장 끝장입니다. 오늘 저녁으로 사람을 교체하겠어요.󰡓 
나는 그녀에게, 갑자기 해고를 하면 나와 그녀에게 명예롭지 못한 의심을 일으키기 쉬우니 침착하게 행동하는 게 좋겠으며, 우리 두 사람 모두가 어느 날 하느님의 심판 대전에서 셈하게 될 애덕을 보존하자고 말했다. 
󰡒석 달 간의 여유를 드리겠어요. 그 후에는 제 병원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겨 주셔야 해요.󰡓 
나는 하느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이 말을 받아들였다. 
한편 돈보스꼬가 미쳤다는 소문은99) 날로 더 퍼져 나갔다. 내 친구들은 괴로워했다. 웃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날 멀리했다. 대주교님은 개입하지 않았고 카파소 신부님은 때를 기다리라고 했으며,100) 보렐 신부님은 침묵했다.101) 나의 모든 협력자들은 400명 가량 되는 소년들 가운데 나를 홀로 내버려두었다. 

정신 병원으로 간 두 신부 

그러는 동안 일단의 저명 인사들이 내 건강을 돌보기로 작정하였다. 
󰡒돈보스꼬는 고착 증세가 있네. 잘 치료를 하지 않으면 불행하게도 정신 병자가 되고 말 걸세. 그를 정신병원으로 데리고 가세나. 그곳에서 검사를 하면 의사들이 처방을 내려 줄 걸세.󰡓 
나를 마차에 실어 정신 병원으로 데려 갈 책임을 맡은 두 명의 신부가 왔다. 그들은 내게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나서 내 건강과 오라또리오 미래의 건물, 성당 등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끝내 한숨을 깊이 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었군.󰡓 
그들은 마차를 가리키면서 함께 소풍을 가자고 나를 초대했다. 
󰡒바람 좀 쏘이면 좋을 걸세.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세.󰡓 
나는 그들이 내게 꾸미려는 술책을 대뜸 알아차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그들과 함께 마차로 가서 그들 보고 먼저 마차에 오르라고 우겼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마차문을 재빨리 닫고 마부에게 말했다. 
󰡒빨리 정신 병원으로 가세요. 그곳에서 이 두 사제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102) 

23. 헛 간 

하느님께서 말더듬이를 보내 주시다 

위에서 언급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103) 풀밭에서 오라또리오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주일이 왔다. 1846년 4월 5일104)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내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모두가 눈치 채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즐겁게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 내 사도직을 통해 영글고 있는 풍요로운 수확으로 여겨지는 아이들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일꾼들이 없었다. 일꾼이라고는 피곤에 지치고 건강마저 악화된 나 한 사람 뿐이었다. 나는 이 아이들을 다시 모을 수 있게 될까? 어디에? 감회가 깊었다. 
나는 한쪽으로 물러나 혼자 거닐면서 눈물을 흘렸다. 󰡐하느님, 이 소년들을 모을 장소를 왜 분명히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디인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이 말을 마치자마자 판크라치오 소아베라는 사람이 다가와 혀를 더듬거리며 말했다. 
󰡒신부님이 라보라토리오(작업장)를 찾는다는 게 사실인가요?󰡓 
󰡒라보라토리오가 아니라 오라또리오입니다.󰡓 
󰡒오라또리오와 라보라토리오가 같은 건지는 모릅니다만 아무튼 자리가 있으니 보러 오시지요. 정직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피나르디 씨의 소유인데105) 계약을 맺으러 가셨으면 좋겠어요.󰡓 

벌레먹은 나무 층계와 발코니 

바로 그때 󰡐성 베드로의 가족󰡑이라고 불이우는 자선 사업의 창립자요, 신학교 동창인 베드로 메를라 신부106)님이 왔다. 아주 훌륭한 신부님이었다. 그는 감옥 생활을 했거나 아니면 이때문에 직장을 얻지 못하는 여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한 자선 단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메를라 신부님은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숱한 아이들 틈에 혼자 있는 친구인 나를 도와주려고 기쁘게 달려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 난 자네가 그렇게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처음 보네.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생겼나?󰡓 
󰡒불행이라기보다는 아주 난처한 일일세. 오늘 이 장소도 마지막이라네. 이제 2시간 후면 밤이 되고 아이들을 돌려보내야 되는데, 다음 주에 어디로 모이라고 말해야 될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일세. 여기 한 친구가 와서 쓸만한 장소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잠깐 내 대신 아이들을 봐 주게나. 그럼 한번 둘러보고 빨리 오겠네.󰡓 
나는 판크라치오 소아베와 함께 벌레먹은 나무 층계와 발코니가 있는 초라한 2층집에 도착했다. 이 집은 밭과 풀밭과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막 층계를 오르려고 하자 피나르디 씨는 말했다. 
󰡒아닙니다. 신부님께 빌려 드릴 장소는 저 뒤에 있습니다.󰡓 

긴 헛간 

그것은 집 벽에 기대어 세운 긴 헛간107)이었고 그 지붕 끝은 땅에서 1m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낮아 겨우 창고나 나무광으로밖에 쓸 수 없는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지붕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너무 낮아서 못 쓰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신부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고쳐 드리죠.󰡓 피나르디 씨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땅을 파고 층계를 만들고 바닥을 새로 해 드립죠. 여기다 신부님의 라보라토리오를 세우십쇼.󰡓108) 
󰡒라보라토리오가 아니라 소년들을 모을 오라또리오, 작은 성당입니다.󰡓 
󰡒아, 그러면 더욱 좋죠. 잘 해 드릴테니 계약을 맺읍시다. 저도 성가대원이랍니다. 신부님을 거들어 드리러 오죠. 저와 집사람을 위해서 의자도 두 개 가져옵죠. 또 저희 집엔 전등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이리로 가져옵죠. 자 그럼, 어서 계약을 맺읍시다.󰡓 
그 선량한 사람은 자기 집에 성당을 갖게 된다는 기쁨에 흠뻑 젖어 있는 듯했다. 
󰡒좋은 친구처럼 베풀어 주시는 당신의 친절과 호의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바닥을 50㎝ 정도 파내 주시겠다고 확실히 말씀해 주시면 수락하겠습니다. 그런데 얼마에 빌려주실 생각이십니까?󰡓 
󰡒300리라입니다. 더 준다고들 하지만 특별히 공익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쓰시려는 신부님 쪽을 택하렵니다.󰡓 
󰡒소년들이 올 수 있도록 헛간 주위에 있는 좁은 땅을 빌려주시고 다음 주에 소년들과 함께 올 수 있게 해 주신다면 320리라를 드리지요.󰡓 
󰡒좋습니다요. 계약은 끝났습니다.109)주일에 오시면 모든 게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풀밭에서의 마지막 로사리오 기도 

나는 소년들에게로 달려와 그들을 내 주위에 모아 놓고 소리쳤다. 
󰡒얘들아, 힘을 내라. 우리는 이제까지보다 훨씬 안정된 오라또리오를 구했단다. 우리는 성당과 학교 그리고 뛰놀 수 있는 마당도 갖게 되었단다. 이번 주일날, 돌아오는 주일날 피나르디 씨 집에 마련된 새 오라또리오로 가게 되었단 말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손가락으로 장소를 가리켰다. 
소년들은 내 말을 듣고 열광했다. 어떤 아이는 줄달음질을 쳤고, 어떤 아이는 기뻐서 껑충껑충 뛰었으며, 어떤 아이는 놀라서 꼼짝도 안했고, 어떤 아이는 함성을 지르고 어떤 아이는 너무도 좋아했다. 
우리는 가슴 속에 크나큰 기쁨을 안고 있었지만 어떻게 표현할 줄을 몰랐다. 그날 아침에 우리는 들판의 성모님께 기도하러 갔었는데,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성모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풀밭에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다. 그 후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별 아쉬움 없이 우리의 풀밭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할 수 있었다. 더 좋은 장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주일은 4월 12일, 부활 대축일이었다. 우리는 피나르디의 헛간으로 성당 비품과 오락 용구들을 운반했고 새로운 집을 소유하러 갔다. 

나무가 자라 가지를 뻗다 (1845 - 1855) 

1. 오라또리오의 하루 

3년 간의 보증 

새 성당은 아주 초라했다.1) 그래도 3년을 보장해 주는 정식 계약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언제 또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없었다. 
이 작은 성당은 내게 있어서 꿈 속에 󰡐이 집은 나의 집, 여기서 나의 영광이 흘러 나오리라.󰡑라고 씌여 있던 장소처럼 여겨졌다.2)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달랐다. 
우리 오라또리오 근처에는 불행하게도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들이 있는 곳3)으로,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자르디니에라라는 여관4)이 있었다. 특히 일요일이 되면 술꾼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기적인 모임은 시작되었다. 
일들이 마무리되자,5) 대주교님은 그 누추한 집을 축성하여 성당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때는 1846년 4월 12일, 부활 주일이었다. 대주교님은 자신의 흐뭇한 마음을 표하기 위해, 오라또리오가 리푸조에 있었을 때 이미 베풀었던 모든 허락을 갱신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은 성당에서도 미사를 드리고 3일기도, 9일기도를 바치며 피정을 하고 성체도 영하며 견진성사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대주교님은 오라또리오에 다니는 모든 소년들에게 피나르디 성당에서 부활 영성체를 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내려 주었다. 그 당시 부활 영성체는 소속 본당에서 해야만 했었다. 


성서 이야기를 연재로 

안정된 장소, 대주교님의 승인, 장엄한 예절, 음악, 정원에서6) 들려 오는 소년들의 떠들썩한 즐거움은 젊은이들을 사방에서부터 끌어들였다. 나를 홀로 내버려두고 떠났던 사제들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세페 트리베로 신부님과 자친토 카르파노 신부님, 조반니 볼라 신부님, 로베르토 무리알도 신부님,7) 그리고 언제나 든든한 보렐 신부님8) 등이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주일을 다음과 같이 지냈다. 
아침 일찍 성당을 열고 소년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성사는 미사 때까지 계속되었다. 미사 시간은 8시로 정해져 있었지만, 성사를 보려는 모든 소년들을 위해서 종종 9시나 그 이후로 늦춰지기도 했다. 
혹시 다른 신부님이 있으면 소년들을 보살피고 교송으로 기도를 바치도록 도와주었다. 
미사 중에 준비된 아이들은 성체를 영했다. 미사가 끝난 후 나는 작은 강론대로 올라가 복음을 해설했다. 이 시간은 정기적인 성서 이야기 시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 내용에 여러 장소와 다양한 시대적 삶의 양식을 덧붙여 묘사해 가면서 소박하고 서민적인 방법으로 얘기했다. 
이 이야기는 큰 아이, 작은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했고 함께 일하는 신부님들까지 즐겨 들었다. 강론 후에는 한낮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다. 

교리, 로사리오, 저녁기도 

오후 1시에는 오락 시간을 가졌다. 공굴리기나 목발, 딱총, 나무칼, 운동 기구 등을 가지고 놀았다. 오후 2시 반에는 교리를 시작했다. 그 당시 오라또리오에 다니는 소년들은 배우는 것이 아주 더뎠다. 성모송을 노래로 한 번 배우려 해도 여러 번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내가 노래를 그치면 400명이 되는 소년들 중에서 계속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저녁 기도를 노래로 조금씩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아베 마리 스텔라, 그 다음엔 마니피캇,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시편 하나를 배웠고 후렴도 배웠다. 1년이 걸려서야 우리는 겨우 성모님의 저녁 기도를 전부 노래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저녁 기도가 끝나면 구체적인 예를 든 짤막한 이야기를 해줬다. 덕에 대해서 말하고 나쁜 습관과 싸워 이기도록 하라는 권유였다. 모든 것은 성모 호칭기도 노래와 성체 강복으로 끝났다. 

귀엣말 

성당에서 나오면 자유 시간이 시작되었다. 각자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어떤 아이는 계속해서 교리 공부를 했고 또 어떤 아이는 노래 연습을 하거나 독서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저녁 때까지 뜀을 뛰고 달음질을 치면서 놀았다. 내가 가르치는 대로 모든 놀이 용구, 심지어는 베키 풀밭에서 배웠던 주사위통, 밧줄, 막대기 같은 요술 놀이 용구까지도 우리의 놀이에 총동원되었다. 이런 수단을 통해서 나는 그 수많은 소년들의 규율을 잡을 수 있었다. 그들 중의 많은 아이들에게 󰡐말이나 노새처럼 발굽으로 땅을 긁어대지만, 알아듣지는 못한다.󰡑라는 말을 적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주 무지한 아이들에게서도 성당이나 신부님들에 대한 크나큰 존경심, 종교에 대해서 알려는 강한 열정을 보고 언제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긴 오락 시간을 이용하여 각 소년들에게 접근했다. 귀엣말로 어떤 아이에게는 말을 좀 더 잘 들으라고 부탁했고, 어떤 아이에게는 자기 의무를 정확히 준수하라고 했으며, 어떤 아이에게는 교리반에 잘 나오라고 했다. 또 어떤 아이에게는 고백성사를 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오락 시간은 소년들이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아침에 고백성사를 기쁘게 보러 나오도록 이끄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무릎을 꿇고 고백성사를 보아라 

이와 같은 중요한 의무를 오래도록 소홀히 하는 아이를 보면 놀이를 중단시키고 성사를 보게 했다. 많은 일화 가운데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고백성사를 보고 부활절 때 영성체를 하라는 나의 권고를 여러 번 받은 소년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약속만 하고는 통 지키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성당 예절이 끝난 후에 그는 놀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사방 팔방 치달으면서 이 세상에 있는지 저 세상에 있는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볼 일이 있으니 제의방으로 따라오라고 급히 말했다. 
소년은 놀이차림 그대로 오려고 했지만, 나는 윗도리를 입고 오라고 일렀다. 제의방에 이르자 나는 소년에게 말했다. 
󰡒이 기도대에 무릎을 꿇어라.󰡓 
그는 그 기도대를 운반하라는 줄 알고 그것을 움직이려 했다. 
󰡒아니, 있는 대로 그냥 두렴.󰡓 
󰡒그럼 제게 뭘 바라세요?󰡓 
󰡒고백성사!󰡓 
󰡒준비가 안 되었는데요.󰡓 
󰡒알고 있단다.󰡓 
󰡒그럼요?󰡓 
󰡒그럼 준비해라. 준비가 되면 성사를 보도록 하자.󰡓 
󰡒좋아요. 잘하셨어요. 정말이지 저는 그게 필요했거든요. 이렇게 절 붙드시길 잘하셨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친구들이 부끄러워서 결코 오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성무일도를 바치는 동안에 소년은 얼마간 준비한 다음에 성사를 잘 보았고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신심 행위를 아주 꾸준하게 수행하는 소년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돈보스꼬께서는 검은새를 새장에 잡아 넣기 위해 훌륭한 작전을 쓰셨다.󰡓 
땅거미가 지면 성당으로 모이라는 종을 쳤다. 우리는 짤막한 기도나 로사리오 기도, 삼종 기도를 바쳤으며 󰡐예수 마리아의 이름은 늘 찬미받으소서!󰡑라는 노래로 하루의 일과를 끝맺었다. 

론도에서 마지막 노래를 

오라또리오에서의 작별은 잊지 못할 정경을 이루었다. 성당에서 나오면 소년들은 수없이 인사를 하면서 서로서로 꼭 붙어서서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얘들아, 밤이 되었다. 어서들 집으로 돌아가거라. 가족들이 기다린다.󰡓하고 말해 보았댔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내 주위로 다가와 가장 건장한 아이들 여섯이 팔로 의자를 만들었다. 그러면 나는 옥좌 위에 오르듯이 그 위에 타지 않고는 못 배겼다. 소년들은 질서 정연하게 여러 줄로 서서 팔의자에 나를 태우고는9) 노래하고 웃고 떠들면서 론도라는 원형 광장까지 줄을 지어 걸어갔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또다시 노래 몇 곡을 부른 뒤 󰡐예수 마리아의 이름은 늘 찬미받으소서󰡑라는 장엄한 노래로 끝을 맺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조용해졌다. 그러면 나는 모두에게 밤인사와 한 주간을 축원하는 인사를 했다. 그러면 소년들은 목청을 돋우어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나는 옥좌 위에서 내려 올 수 있었다. 소년들은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좀 큰 아이들은 피곤하여 녹초가 된 나를 집10)까지 바래다 주었다. 

2. 카를로 알베르토 왕이 오라또리오를 구해 주다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는 듯 

오라또리오에는 질서와 규율, 평온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장 카보르 후작은 우리의 모임을 위험시하여 오라또리오의 문을 닫게 하려고 했다. 
내가 항상 대주교님의 지지를 받고 일을 추진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주교관에서 시당국의 최고 평의원들로 구성된 재무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평의원들의 손에 시의 모든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재무 위원회의 장(당시 카보르 후작)은 시장보다 더 큰 권한을 쥐고 있었으며 시의 대관, 국무 위원, 최고 원로 의원이라고 불리웠다. 
󰡒그 평의원들이 내 거실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최후의 심판이라도 시작되는 줄 알았네.󰡓 훗날 대주교님이 내게 한 말이다. 
그들은 오라또리오를 놓고 길게 논의했다. 결국 그들은 오라또리오가 공중의 안녕 질서에 위태롭기 때문에 기필코 금지하고 해산시켜야 한다는 데로 의견을 모았다. 

왕의 개입 

그런데 오라또리오의 은인인 주세페 프로바나11) 백작도 재무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그 당시 카를로 알베르토 왕은 그에게 감독관 곧 재무 회계직을 맡겼다. 백작은 왕과 자기 개인의 이름으로 내게 여러 번이나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카를로 알베르토 왕은 오라또리오에 대한 소식을 기쁘게 듣곤 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축일을 지낸 후 보낸 보고서나 프로바나 백작이 해 주는 말을 유쾌하게 들었다. 
그는 우리가 서민층 젊은이들에게 하는 일은 마치 선교사들이 낯선 땅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무척 존중한다는 말을 내게 여러 번 전해 왔었다. 왕은 우리와 같은 사업이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 퍼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새해가 되면 왕은 󰡐돈보스꼬의 개구장이들에게󰡑라고 쓴 연하장과 3천리라를 보내 왔다. 
그는 재무 위원회가 우리 오라또리오를 폐쇄하기 위해 토론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프로바나 백작을 불러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의 뜻을 전하게 했다. 
󰡒왕은 이 모임이 장려되고 보호되기를 바란다. 혹시 무질서의 위험이 생기거든 미리 손을 써서 막도록 하라.󰡓 
프로바나 백작은 열띤 토론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다가 오라또리오를 폐쇄하고 해산시킨다는 결정에 이르자, 일어나서 왕의 뜻을 전했다. 카를로 알베르토 왕은 우리의 작은 사업을 당신 보호하에 두었다. 
왕의 뜻 앞에 부시장과 재무 위원회는 침묵했다. 

오라또리오에 경찰이 

부시장은 또다시 나를 긴급히 불렀다. 그는 여전히 위협하는 어조로 나에게 완고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저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열의를 가지고 일하지만 위험천만하단 말입니다. 공중의 안녕 질서는 전부 제 어깨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 신부님과 그 모임을 감시하기 위해서 경찰들을 보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무질서한 일이 생기면 신부님의 개구장이들을 즉시 해산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그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흥분한 까닭은 아마 그를 몹시 괴롭히던 병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보르 부시장이 시청에 출근할 수 있었던 날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발에 생긴 통풍으로 고통을 겪던 그는 몇 개월 후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전 6개월12)동안 그는 주일마다 경찰 몇 명을 보내어 온종일 우리와 함께 지내게 하면서 성당 안팎에서 행하는 모든 일과 말들을 철저히 감시하게 했다. 어느 날 그는 이 경찰들 중의 한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 당신은 그 어중이떠중이들 틈에서 무엇을 보고 들었소?󰡓 
󰡒후작님, 우리는 수많은 소년들이 가지각색으로 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당에서는 머리가 쭈뼛해질 정도로 무서운 강론을 들었습니다. 돈보스꼬는 지옥이나 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도 고백성사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13) 
󰡒정치에 대해서는?󰡓 
󰡒정치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년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못 알아 들을 것입니다. 혹시 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저마다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카보르 후작이 죽자, 시당국에서는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1877년까지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 주었다.14) 

3. 문맹자들도 배울 권리가 

근본 주제 : 교리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성당에서 오라또리오를 시작할 때부터 나는 학교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어떤 젊은이들은 나이가 많은데도 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말로만 가르치는 교리는 그들에게 지루하고 싫증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몇 번 나오다가는 그만두곤 하는 일이 생겼다. 
이미 야간 학교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장소도 없고 도와줄 선생님들도 없어서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리푸조와 모레타의 집에서 정기적인 주일 주간 학교와 야간 학교를 실시했었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우리는 한 번에 한 주제만을 다루었다. 예를 들어 알파벳과 음절 나누기를 한 주나 두 주 동안 반복했다. 그 다음 소책자 교리를 가지고 처음 문제 두 개와 대답을 읽고 또 읽었다. 이렇게 주간 수업을 했다. 다음 주에는 또 다른 질문과 대답을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나는 여덟 주에 걸쳐서 일부 아이들에게 교리책 전체를 혼자서 읽고 공부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방법은 특히 큰 아이들에게 시간을 절약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육성으로만 교리를 배운다면 교리를 충분히 익혀 고백성사를 받기까지 수년이라는 긴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교리를 배우고, 읽고, 쓰고 

주일 학교가 많은 소년들에게 좋은 결실을 맺었지만 어떤 아이들에게는 충분치 못했다. 기억력이 나빴기 때문에 지난 주에 배운 것을 다음 주에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리하여 나는 리푸조에서부터 야간 학교를 시작했다. 모레타의 집에서는 보다 정기적으로 운영했고, 안정된 발도코에서는 더욱더 완전을 기했다. 
정기적인 야간 학교는 좋은 성과를 내었다. 절실하게 필요한 읽고 쓰기를 배우러 나오도록 많은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근본 목적인 종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도모해 주었다. 

꼬마 선생님들의 시기 

날마다 새 학급을 늘려야 했다. 어디서 그 많은 선생님을 구해 올 수 있을까? 그 해결책으로 도시의 몇몇 소년들에게 무료로 이탈리아어와 라틴어, 프랑스어, 수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이 와서 교리를 가르치고 주일 학교와 야간 학교를 도와 주게 했다. 이 작은 선생님들은 처음에는 8명 내지 10명이었으나 그들의 수효는 차츰 늘어났다. 그들과 더불어 󰡐학생들󰡑의 부류가 생기게 되었다. 
최초의 󰡐선생님들󰡑은 내가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성당에 있을 때부터 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 도시에서 훌륭한 직장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목수 선생인 조반니 코리아스코, 장식품 상점 주인인 펠리체 베르냐노, 전문 기술 과정 선생님인 파올로 델피노 등이 머리에 떠오른다. 리푸조에서는 지금 식료품 잡화상을 운영하는 안토니오 멜라노테, 과자 제조인 조반니 멜라노테, 중개인 펠리체 페레로, 작곡가 베드로 페레로, 제재소 주인 조반니 파올라 등이 도와주었다. 그들에 이어서 루이지 젠타, 비토리오 모냐와 다른 이들도 왔지만 나를 도와준다는 약속을 지키질 못했다. 그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서 나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지만 불행하게도 도와줄 단계가 되면 거의 모두가 나를 저버리고 떠났다. 
그들에 이어 토리노의 훌륭한 신자들이 왔다. 철물점을 하는 주세페 갈리아르디와 주세페 피노, 금은 세공품상 비토리오 리트네르와 다른 이들이 아주 오랫동안 나를 도와주었다. 어떤 사제들은 특별히 미사와 강론 그리고 큰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도와주었다. 

돈보스꼬는 왜, 어떻게 성서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가? 

큰 문제는 책의 부족이였다. 소책자 교리가 끝나면 종교 수업이나 독서를 할 책이 하나도 없었다. 흔히 학교에서 사용하는 󰡐성서 이야기󰡑를 살펴 보았지만 우리 학생들에게 맞지 않았다. 일반적인 결점은 대중적인 언어가 아니고 젊은이들에게 걸맞지 않는 이야기와 소년들과 무관한 문제들을 길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 많은 사실들이 젊은이들의 도덕적 감각을 위태롭게 만드는 양식으로 쓰여져 있었다.15) 그 밖에도 대개가 신앙의 근본 진리들을 명시하지 않았다.16) 
하느님께 드려야 할 외적 예배나 연옥의 실재, 고백성사나 성체성사 등도 소홀히 다루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런 종류의 교육이 절대로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결점들을 보완하고 쉬운 언어와 대중적인 양식으로 성서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근사한 책을 쓸 수는 없었지만 청소년들의 선익을 위해서 열의를 다해 집필에 전념했다. 이리하여 학교 교재로서 성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몇 개월 동안 공부 한 뒤에 우리는 주일 학교에서 배운 것에 대해서 경시 대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아포르티 신부님, 본콤파니 공작, 부시장 베드로 바리코, 대학 교수 주세페 라이네리와 같은 저명 인사들 앞에서 성서 이야기와 지리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다. 그들의 대답은 박수 갈채를 터뜨리게 했다. 

길거리에서 책으로 

주일 학교와 야간 학교에서 거둔 좋은 성과에 힘을 얻은 나는 문학과 성서 외에도 수학과 미술을 첨가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는 이런 야간 학교가 처음인지라 여기저기서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많은 교사들과 저명 인사들이 우리 오라또리오를 자주 방문했다. 토리노 시당국에서는 긍정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우리 야간 학교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주세페 두프레 기사관을 대표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들은 이탈리아어 발음, 수학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몇몇 구절을 낭송시켰다. 끝으로 그들은 18세에서 20세에 이르는 문맹자들이 교양과 학문에 그토록 빠른 진전을 보이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나이든 수많은 젊은이들이 길거리를 배회하지 않고 저녁에 모여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고 그곳을 떠나갔다. 
조사단의 보고서를 읽은 시당국에서는 1878년까지 상금으로 우리에게 연 300프랑을 주었다. 그 보조금은 1878년에 중단되었고 다른 기관으로 넘어갔다. 그 이유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 당시 신앙과 자선으로 토리노에 잘 알려진 고넬라 기사는 자선단체의 원장이었다. 그 역시 우리 학교를 여러 번 방문했으며 다음해에 그의 사업 안에 우리와 똑같은 학교와 방법을 도입했다. 그는 자선단체의 운영자들에게 이것을 보고하자 그들은 우리 학교에 상금 천 프랑을 주기로 결의했다. 
시당국에서도 우리의 방법을 본받았다. 몇 년 안 가서 야간 학교는 피에몬테의 주요 도시 전역에 확산되었다. 

기도책과 수학책 

한편 또 다른 필요성이 생겼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맞는 기도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기도서들은 아주 많았고 저자들도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개 이 저자들은 청소년 독자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유식한 사람들이나 어른 및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도, 유태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 냈다. 
너무도 음험한 이단이 매일 조용히 퍼져나가는 것을 본 나는 젊은이들에 알맞는 책을, 그들의 종교적 심성에 적절한 책을, 성서에 바탕을 두면서도 가톨릭 교회의 근본을 간단 명료하게 제시해주는 책을 편찬하기 시작했다.이것이 바로 󰡐준비된 젊은이󰡑(giovane proveduto)17)였다. 
수학과 미터법을 가르치는 데도 똑같은 어려움이 따랐다.18) 미터법은 1850년 초에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여러 학교에서는 이미 1846년부터 그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교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단순하게 변형시킨 미터법 책을 썼다. 

4. 돈보스꼬가 세상을 떠나야 하는 밤 

돈보스꼬를 찾아 사시의 포도밭 사이로 

일이 너무 많았다. 감옥과 코톨렌고의 병원, 리푸조, 오라또리오, 여러 학교에서 일을 했다. 밤에는 소년들에게 필요한 책들을 썼다. 워낙 좋지 않았던 내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고 의사들은 전적인 휴식을 권유했다. 
나를 무척 아끼는 보렐 신부님은 사시19)의 본당 신부님에게로 가서 몇 주일 지내라고 나를 그곳으로 보냈다. 나는 주간에는 쉬고 주일이 되면 일하러 오라또리오로 갔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적인 해결책이 못 되었다. 소년들은 떼를 지어 나를 방문하러 왔다.20) 그리고 사시의 아이들까지 오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나는 토리노에서보다도 더 바쁘게 되었고 내 작은 꼬마들은 나를 보기 위해 4㎞나 되는 길을 달려와야만 했다. 
오라또리오의 소년들만 사시로 달려오는 게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도학교의 형제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까지도 합세하게 되었다. 많은 일화들 가운데 한 가지만 들어 보겠다. 
형제회 수사들이 가르치는 󰡐산타 바르바라 학교󰡑 학생들이 피정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내게 고백성사를 보는 습관이 있던 그들은 피정이 끝날 무렵에 떼를 지어서 나를 찾아 오라또리오로 왔다. 나를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내가 사시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토리노에서 4㎞나 되는 그곳을 향해 출발을 했다.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을 모르는 아이들은 돈보스꼬를 찾아 풀밭과, 들판, 포도밭 사이를 헤맸다. 마침내 먼 길을 걸어오느라 땀에 젖고 피곤과 배고픔으로 지쳐 있는 데다가 흙투성이가 된 400명 가량의 소년들이 나타나 내게 고백성사를 청했다. 
󰡒저희는 피정을 했어요. 모두 착한 사람이 되고 싶고 고백성사를 보고 싶어요. 선생님들께 허락을 받고 여기 온 거예요.󰡓하고 그들은 내게 말했다. 

소년들은 어떻게 되었나?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걱정스레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기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들을 학교로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타일러 보았으나 그들은 막무가내로 고백성사를 보겠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본당 신부님, 보좌 신부님, 선생 신부님 한 명과 나, 이렇게 4명이 고백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고백성사를 다 주려면 15명의 신부님이 필요했다. 
한편 학교에서는 초조해 하기 시작했다. 피정을 마치기 위해 선생님들과 강론 신부님들, 초대받은 몇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미사를 거행하고 소년들에게 영성체를 나누어 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소년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로 당혹한 순간이었다. 
소년들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주의를 단단히 받았다. 

죽을 준비가 

사시에서 녹초가 되어 집에21) 돌아온 나는 침대로 옮겨졌다. 병의 증세는 심상치않았다. 폐렴과 기침과 고열이 덮쳤다. 팔 일 동안 나는 사경을 헤맸다. 노자성체와 병자성사까지 받았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젊은이들을 두고 가는 게 섭섭했지만 오라또리오의 안정된 기반22)을 잡고 죽는 게 기뻤다. 
내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소년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탄에 빠졌다. 소년들의 무리가 내 병실 문을 두드렸고 울면서 내 병의 증세를 물었다. 그들은 병세를 알려 주면 줄수록 더 많이 물었다. 
나는 그들이 간호사23)와 주고받는 말을 듣고는 감격했다. 
그 후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사랑으로 행한 여러 영웅적인 행위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며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했다. 콘솔라타 성당에서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위로의 성모님󰡑 성화 앞에서 날 위해 기도했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그 앞에서 기도했다. 아침에 일하러 나가는 소년들은 그들을 대신해서 제단 앞에 머물러 줄 촛불을 켜 놓았다. 밤늦게까지 많은 아이들이 하느님의 어머니께 불쌍한 돈보스꼬를 낫게 해 주십사고 애원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다 

많은 아이들이 한 달 동안 또는 1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성모님께 했다. 일생 동안 바치겠다고 한 아이들도 있었다. 빵과 물만으로 몇 개월 몇 년, 일생 동안 단식을 하겠다고 약속한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많은 소년 벽돌공들이 몇 주일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면서 빵과 물만으로 단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잠시라도 틈만 나면 급히 성체 앞으로 나아갔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의사들이 마지막 밤이라고 진단을 내린 밤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의사들의 말을 믿었다. 완전히 탈진 상태인데다 계속해서 피를 토했기 때문이다. 한밤중이 지났을 때 졸음이 왔다.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위독한 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를 보러 온 보타 의사 선생님과 카파소 신부님은 받은 은혜에 대해서 콘솔라타 성모님께 감사드리러 가라고 했다. 
소년들은 나를 보기 전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실로 며칠 후에 그들은 나를 보았다. 나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오라또리오로 향했고, 그들은 울며 노래하며 나를 맞아 주었다. 그 감동은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가를 부른 뒤에 환호성과 열광으로 나를 둘러쌌다. 
나는 즉시 중요한 일에 손을 썼다. 내 생명이 위독할 때 적지 않은 아이들이 깊이 생각지도 않고 지키기 불가능한 거창한 서원과 약속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간단하고 가벼운 것으로 바꾸어 주었다. 

언덕들 사이에서 

리푸조를 작별하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던 때였다. 1846년 7월 초에 그 중병에 걸렸던 것이다. 
나는 베키 집으로 몇 개월 휴양24)을 하러 떠났다. 그곳에 오래 머물러야만 했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휴식과 안정을 취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모두들 내게 본래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토리노 밖에 있는 낯선 곳에 가서 몇 년 동안 쉬라고 권유했다. 대주교님과 카파소 신부님의 생각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게는 청소년들을 저버린다는 게 너무도 가슴 아팠다. 결국 그들은 2년 동안 고백성사와 강론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나를 다시 오라또리오로 돌아오게 해 주었다. 
나는 이에 순명하지 않았고 오라또리오에 돌아온 다음 전처럼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27년이 되도록25) 내게는 의사나 약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나는 육신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일이 아니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5. 어머니와 함께 돌아오다 

모든 행운이 광주리 속에 

집에서 휴양을 한 지도 몇 개월이 되자 매일같이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거나 빨리 그들 가운데로 돌아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왔다. 나는 내 사랑하는 소년들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휴양 올 때 리푸조를 떠났으니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수고와 비용을 요하는 사업을 무슨 수로 지탱해 나간단 말인가? 또 나와 내게 딸려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 시기에 피나르디의 집에 방 두 개가 비게 되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나와 나의 어머니를 위해서 빌렸다.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제 저는 발도코로 가야 해요. 일할 사람을 하나 둬야 하는데 그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서 제가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어요.󰡓 
어머니는 내 말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답했다. 
󰡒네 생각에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면 난 떠날 각오가 되어 있다.󰡓26) 
어머니는 큰 희생을 하신 것이다. 바로 살림은 윤택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집안의 가장이었고 애나 어른들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는 여왕이었으니까. 
베키에서 우리는 몇 가지 긴요한 필수품들을 먼저 부쳤다. 리푸조에 있던 물건들은 이미 새로운 거처로 옮겨져 있었다. 떠나기 전에 어머니는 광주리에 옷가지와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고 나는 성무일도서와 미사경본, 책 몇 권과 아주 필요한 노트들을 챙겼다. 이것이 우리의 총재산이었다. 우리는 베키에서 토리노까지 걸어갔다. 우리는 키에리에서 잠깐 멈춘 뒤에 1846년 11월 3일 저녁에 발도코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없는 텅빈 방을 둘러보더니 농담을 했다. 
󰡒베키에서는 집안을 다스리고 이것저것 지시하느라고 상당히 바빴는데 여기서는 다스릴 일도 없고 명령을 할 사람도 없으니 퍽 한가하겠구나!󰡓 

어머니의 혼수품 

그러나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가며 집세는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많은 소년들이 일하러 나가는 데 필수적인 것들인 빵과 신발과 옷을 수시로 청했다. 
우리는 집에서 얼마간의 포도주와 밀, 옥수수, 콩을 가져오게 했고 살림을 시작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포도밭 하나와 약간의 밭을 팔았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던 혼수품도 가져오게 하여 미사 제의를 만드는 데 썼고, 천은 제대보와 영대, 장백의, 소백의, 성작 수건을 만들었다. 모든 것은 말가리다 가스탈디 부인27)의 손을 거쳤으며 그때부터 그 부인은 오라또리오에 필요한 물건들에 마음을 써 주었다. 
어머니는 그 밖에도 반지와 금목걸이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팔아 성당에 필요한 짠 끈과 집기들을 구입했다. 언제나 기분이 유쾌한 어머니는 어느 날 웃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를 빈털터리 나그네로 여긴다면 세상은 불행하다네.󰡓 

여러 교실과 좁은 공간 

집안이 좀 정리되자 나는 또 다른 방 하나를 빌려 제의실로 꾸몄다. 
학교가 없기 때문에 얼마 동안 수업을 어머니의 방과 부엌에서 했다. 
그러나 개구장이들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거나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기가 일쑤였다. 교실은 제의실과 성당을 여러 군데로 나누어서 썼다. 그렇기 때문에 큰 목소리로 읽거나 노래를 부르고, 늦게 온 아이들이 성당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닐 때는 서로 방해가 되었다. 
몇 개월 후에 나는 다른 방 2개를 더 빌릴 수 있었다. 이리하여 야간 학교는28)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이미 언급한 대로 1846~7년 겨울에 우리의 야간 학교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매일 저녁 평균 300여 명29)의 젊은이들이 나왔다.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과목은 언어와 수학이었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언제나 노래와 음악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6. 첫 청소년 그룹 

규칙과 회합 

발도코에서 생활이 안정되자 나는 우리 오라또리오에 일치의 정신과 규율, 운영을 도모해 줄 수 있는 요소들을 부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나는 규칙30)을 작성했다. 그 규칙에서 나는 이미 오라또리오에서 행하고 있는 것들과 행해야 하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히 열거했다. 이 규칙서는 인쇄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읽어 볼 수 있었다. 
이 소규칙의 효과는 대단했다. 각 사람은 자기가 할 일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고, 나는 각 사람에게 자기 임무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했다. 그렇게 해서 각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를 수행하게 되었다. 많은 주교님들과 본당 신부님들은 그 규칙 복사본을 청해서 그들의 교구나 마을에 오라또리오 사업을 도입하려고 힘썼다. 
오라또리오의 규율과 운영의 기틀이 잡히자, 젊은이들 안에 주님과의 친교의 불을 당겨 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성 루이지회를 조직했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맞는 짤막한 규칙을 작성하여 대주교님에게 보여 드렸다. 대주교님은 그 규칙을 읽고 다른 이들의 의견도 물어 본 뒤에 그것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1847년 4월 12일에 특별한 은사와 함께 그 규칙을 인준했다. 
이 성 루이지회는 소년들 가운데 분발심을 불러일으켜 모두가 등록을 하려고 했다. 나는 입회 조건으로 성당 안팎에서의 좋은 표양과 나쁜 대화를 피하고 성사를 자주 보는 등 두 가지를 제시했다. 이 신심회는 소년들의 그리스도교적 삶을 두드러지게 향상시켜 주었다. 

처음으로 대주교가 오라또리오에 

나는 젊은이들이 성 루이지 축일 전 여섯 주간을 열심히 지내도록 하기 위해 성인의 성화상을 하나 구입했고 기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고백성사를 볼 수 있는 편리를 제공해 주었다. 
오라또리오에 다니는 젊은이들 중에는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성 루이지 축일을 기해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준비시키기로 결심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러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도움으로 나는 그들을 준비시킬 수 있었다. 이리하여 성 루이지 축일에는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처음으로 대주교님이 오라또리오를 방문하여 젊은이들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 우리는 작은 성당 문 앞에 관람석을 준비해 놓고 거기에 대주교님을 모셨다. 나는 그 기회에 맞는 몇 마디를 했고 몇몇 아이들이 󰡐나폴레옹 병장󰡑이란 주제의 짧은 연극을 했다. 그날의 축제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기 위해 갖은 익살을 다 떠는 재미있는 병장의 이야기였다. 
대주교님은 껄껄 웃으면서 무척 즐거워했다. 그렇게 많이 웃어 본 적은 생전 처음이라고 했다. 
대주교님은 모두에게, 발전하는 오라또리오를 보니 큰 위안이 된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라또리오에 다니라고 소년들을 격려했으며 당신을 반갑게 맞아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미사가 거행되었고 300여 명의 소년들이 성체를 모셨다. 그 후 견진성사가 거행되었다. 의식을 거행하기 전, 주교님의 머리에 관을 씌워 드리는 순간이었다. 대주교님은 그곳이 대성당이 아니라는 것을 깜빡 잊고31) 고개를 번쩍 쳐드는 바람에 관이 성당 천정에 부딪쳤다. 장내는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뤘다. 대주교님은 오라또리오를 흐뭇하게 기억하면서 이 에피소드를 자주 떠올리곤 했다. 
로스미니 수도원 원장은 우리의 사업을 낯선 땅에서 펼치는 선교 사업에 비유하기도 했다. 
소중한 기록 

프란소니 대주교님과 함께 대성당의 두 의전사제와 다른 여러 신부님들이 왔다. 대주교님은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난 후에 여러 기록을 했다. 견진성사를 받은 모든 소년의 성과 이름 옆에 장소, 날짜, 대주교님의 이름과 대부들의 이름을 명기했다. 그 기록이 끝나자 그것을 본당별로 구분했다. 그 후 그것은 주교관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다시 각 본당 주임에게로 보내졌다. 

7. 발레시아에서 온 첫 고아 

건초광의 좀도둑들 

종교와 교양 과정 교육을 개설하여 실시하고 있는 동안에 크고 긴급한 또 다른 일에 대해 마음을 써야 했다. 토리노에서 이주해 온 많은 소년들은 착실하게 노동을 하면서 훌륭한 신자답게 살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에는 필요한 빵도, 옷도 없었고 특히 잠잘 곳이 없었다. 나는 밤에 잠 잘 곳이 없는 몇몇 젊은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보려고 노력했다. 건초장에 짚을 깔고 덮을 것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가련한 소년들은 여러 번이나 담요나 홑이불을 훔쳐 갔고, 나중에는 팔기 위해 짚마저 걷어 갔다. 

맘마 말가리다의 부엌에서 잠을 자다 

비가 쏟아지는 5월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15세 가량된 소년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우리 집 문을 두드리며 빵과 잠자리를 청했다. 나의 어머니는 그를 부엌 화덕 옆으로 데리고 가서 소년이 몸을 덥히고 옷을 말리는 동안에 기운을 차리도록 빵과 수프를 주었다. 나는 그에게 학교에 다녔는지, 가족들이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내게 대답했다. 
󰡒저는 불쌍한 고아예요. 발레디세시아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왔어요. 3리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 떨어지고 일자리는 구하지도 못 했어요. 이제 제게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어요.󰡓 
󰡒첫영성체는 했니?󰡓 
󰡒아뇨.󰡓 
󰡒견진은?󰡓 
󰡒아직 안 받았어요.󰡓 
󰡒고백성사는 본 적이 있니?󰡓 
󰡒가끔요.󰡓 
󰡒이제 어디로 갈 작정이지?󰡓 
󰡒모르겠어요. 제발 한 구석에서 밤을 지내게 해 주세요.󰡓 
그 말을 하고 나서 소년은 울었다. 어머니도 눈물을 흘렸고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네가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재워 주겠다만, 다른 애들은 내 담요를 가져갔고, 너도 뭘 가져갈지도 모르잖니?󰡓 
󰡒아닙니다. 아주머니. 안심하세요. 저는 가난하지만, 한 번도 남의 물건을 훔쳐 본 적이 없습니다.󰡓 
󰡒얘야, 네 생각에 괜찮다면 오늘은 이 애를 여기서 재우기로 하자. 내일은 주님께서 배려해 주실 게다.󰡓 
󰡒여기라니, 여기가 어딥니까, 어머니?󰡓 
󰡒여기 부엌!󰡓 
󰡒냄비마저 가져가게요!󰡓 
󰡒그런 일이 없도록 내가 신경을 쓰마.󰡓 
󰡒그럼, 그렇게 하세요.󰡓 
어머니는 소년과 함께 밖으로 나가 벽돌 몇 장을 주워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걸 네 귀퉁이에 받침대로 놓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깐 다음 짚으로 오라또리오의 첫 잠자리를 마련했다. 잠자리가 준비되자 어머니는 소년에게 일의 필요성과 성실성, 종교에 대해서 짤막한 훈화32)를 한 뒤에 그와 함께 기도를 하려고 했다. 
󰡒할 줄 몰라요.󰡓 소년이 대답했다. 
󰡒우리와 함께 하자꾸나.󰡓 어머니는 말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위험을 막기 위해서 부엌문은 다음날 아침까지 잠가 두기로 했다. 
이 소년이 바로 우리 집의 최초의 기숙생이었다.33) 그의 뒤를 이어서 다른 소년34) 그리고 또 다른 소년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해 1847년에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두 명35)으로 제한했다. 

새로운 방들과 새로운 음악 

나는 많은 소년들에게 거처를 제공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 베푸는 모든 도움이 허사가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엄청난 비용이 든다 할지라도 더 많은 방들을 빌리려고 애썼다. 
그렇게 하여 기숙사 외에도 음악 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845년에 이미 시작한 그 음악 학교는 최초로 생긴 음악 학교로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한꺼번에 음악을 배우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만36) 해도 음악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선생을 구해서 개인 수업을 받는 게 통례였었다. 
소년들이 참여했다. 매일 저녁 내가 음악 수업을 할 때면 루이지 로시, 주세페 블란키, 체루티 선생들과 루이지 나시 의전사제 같은 유명 인사들이 참관을 하러 왔다.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없다는 복음 말씀과 반대되는 사례였다. 나의 음악적 재능은 저명한 그들에 비하면 백만분의 일도 못 되었지만 그들 앞에서 음악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음악을 배우러 오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을 지켜보러 오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오늘 우리의 모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방법과 똑같은 것이었다. 

8. 두 번째 오라또리오 

세탁업자들과의 싸움 

학교의 규모가 커질수록 소년들의 수효도 늘어났다. 주일에는 소년들을 운동장이나 성당에 다 모을 수 없었다. 
나는 보렐 신부님과 상의하여 다른 지역에 제2의 오라또리오를 열기로 했다. 우리는 가로수 때문에 사람들이 플라타너스길이라고 부르는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 거리 포르타 누오바에 작은 집37) 한 채를 세냈다. 
우리는 그 집을 얻기 위해 살고 있던 사람들과 심한 다툼을 벌여야 했다. 그 집에는 세탁업자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한사코 그 옛 보금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잘 구슬려서 배상금을 지불하고 싸움이 터지지 않도록 일을 잘 마무리지었다. 
집과 공터는 발리엔티 씨의 소유였고, 그 후 주셉페 투르바노 기사에게 상속됐다. 집세는 1년에 450리라였다. 오라또리오는 성 루이지 곤자가에게 봉헌되었다.38) 

신학교 땅 

1847년에 보렐 신부님과 나는 새 오라또리오를 열었다.39) 많은 소년들이 그곳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주일마다 발도코 오라또리오로 모여들던 소년들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 새로운 오라또리오의 운영40)을 자친토 카르파노 신부님이 맡아 몇 년 동안 순전히 무료로 봉사해 주었다. 발도코 오라또리오를 위해서 쓴 규칙은 성 루이지 오라또리오에도 완전히 적용되었다. 
같은 해에 우리에게 도움을 청해 오는 수많은 소년들을 숙박시키기 위해 모레타 집 전체를 샀다. 그러나 그 집을 우리의 필요성에 맞게 개조해 보려고 했지만 벽이 너무 약한 데다가 아주 유리한 조건으로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다시 팔기로 했다.41) 
그 대신 우리는 토리노 신학교42)의 부지 한 쪽(약 1,200평)을 샀다. 후에 세워진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과 우리의 젊은 기능공들을 위한 작업장이 설치된 곳43)이었다. 

9. 어려운 해인 1848년 

피나르디 성당에 총탄이 

그해에 정치와 여론은 극적인 색채를 띠어 종잡을 수 없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헌법44)을 승인했다. 많은 이들이 헌법과 더불어 선․악을 자유자재로 행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확신은 유태인들과 개신교도들에게 부여한 자유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가톨릭 신자와 다른 종교인들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정치계에서는 사실이었지만 종교적인 의무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 시기에 젊은이들 사이에는 과격한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여러 지점과 길거리 광장에 모여 사제들과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종교에 대한 온갖 모욕적인 언동이 󰡐훌륭한 일󰡑로 간주되었다. 나는 집안과 길에서 여러 번 습격을 당했다. 
하루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총알이 창문으로 날아와 내 팔과 가슴 사이의 옷을 뚫고 날아가 벽에 박혔다. 
또 한 번은 대낮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데 내가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긴 칼을 빼들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나는 내 방으로 급히 피신하여 문을 잠금으로써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보렐 신부님도 총탄과 칼부림에서 기적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 난폭한 젊은이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험한 직장들 

타락한 사상과 가치관들이 만연하는 그 시기에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청소년 근로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방 2개를 더 빌려 한결같이 집이 없고 위험에 빠지기 쉬운 청소년들 15명을 기숙시켰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어려움이 있었다. 집 내부에 작업장이 없기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은 토리노 시내로 일을 하러 가는 데 따르는 도덕적인 위험이 아주 크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만나는 동료 근로자들과 보고 듣는 이야기는, 오라또리오에서 심어 주려고 애쓰는 좋은 씨앗들을 앗아가기 쉽상이었다. 
그리스도교적인 진리를 확인하고 강화함으로써 하루 중에 만났던 문제거리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는 저녁 기도 후에 짤막한 훈화45)를 하기 시작했다. 
직공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다. 학급을 여러 반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공부에 앞선 학생들은 주세페 본자니노 선생님에게 문법 강의를 들으러 다녔으며, 또 다른 학생들은 마태오 피코 신부님에게 수사학을 배우러 다녔다. 아주 좋은 학교들이었지만 학생들은 오가는 길에 위험을 많이 만났다. 
1856년에 가서야 아주 편리하게 오라또리오 안에 모든 학교와 작업장들을 설치하게 되었다. 

수프를 국자로 떠 주면서 해 준 좋은 말 한마디 

1846년, 부패한 사상과 행위는 극도에 달해 집안일을 돕는 사람들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집안일은 나와 어머니가 도맡아 했다. 내 소임은 부엌일을 하고 식탁을 준비하며, 집안을 청소하고 장작을 패고, 속옷․바지․손수건․홑이불․잠바를 만들고, 그것이 헤지면 기우는 것이었다. 빵을 나누어 주거나 수프를 떠 주면서 편리하게 좋은 충고나 정다운 말을 건네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하면서 나는 젊은이들의 그리스도교적 삶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첫 피정 

나는 집안일과 오라또리오에서 수업을 거들어 줄 사람의 필요성을 날로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휴일에 어떤 사람을 초대해서 야외나 내 고향 카스텔누오보를 같이 가기도 하고, 어떤 이들과는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저녁에 초대해서 당시 만연하고 있는 유해한 사상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들을 읽거나 쓰게 했다. 이 모든 것은 1841년부터 1848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내 목적은 공동 생활에 적합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알고, 선택46)해서 나와 함께 머물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목적에서 나는 1848년에 소피정47)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나는 50명의 소년들을 집에 모았다. 그들은 나와 함께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나 침대가 부족했으므로 일부는 자기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왔다갔다 하면 강론과 침묵을 통해서 얻게 되는 모든 것들을 날려버릴 위험도 있었다. 피정은 일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다음 토요일 저녁에 끝났다. 
피정은 아주 잘 되었다. 내가 오랫동안 헛수고만 했던 많은 소년들이 진지하게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수도자가 되었고, 또 어떤 이들은 평신도로 남았지만, 그들은 모두 오라또리오 친구들에게 신자 생활의 모범이 되었다.48) 여기에 대해서는 살레시오 수도회 역사에서 자세히 말하겠다.49) 


본당 없는 소년들의 본당 

이 즈음에 어떤 사제들, 특히 보르고 도라, 카르미네, 성 아고스티노 본당 주임들은 오라또리오에서 성사를 집행하는 점에 대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대주교님에게 피력했다. 대주교님은 오라또리오에 다니는 소년들에게 부활 때 성체를 분배해 주고 견진성사를 준비시킬 권한을 부여한다는 교서를 보냈다. 본당에서 거행하는 모든 전례 예식을 거행할 수 있는 권한도 갱신해 주었다. 대주교님은 󰡒오라또리오는 본당 없는 버림받은 소년들의 본당이 되어 줄 것이다.󰡓50) 라고 말했다. 

10.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용감한 가르침 

최초의 합창단 

젊은이들의 종교 및 윤리적 생활은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노력을 배가해야 했다. 주․야간 학교와 노래 교실 외에도 피아노, 오르간 및 다른 악기 교실도 열었다. 이리하여 나는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는 성악, 오르간, 피아노 같은 기악 선생이 되었고 내 열의는 모든 것을 메꾸어 주었다. 우리는 작은 합창단을 조직하여 처음에는 오라또리오에서 실시했고, 그 다음에는 토리노․리볼리․몬칼리에리․키에리와 다른 장소에도 선을 보였다. 우리 합창단원들은 루이지 나시 의전사제와 미켈란젤로 키아텔리노 신부가 조직하고 지도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오케스트라를 동반한 은구슬을 굴리는 듯한 합창과 독창, 이중창, 같은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합창단은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사방에서 우리의 음악이 입에 오르내렸고 큰 축일 때마다 다투어 우리의 합창단을 초대했다. 나시 신부님과 기아텔리노 신부님은 떠오르는 우리 󰡐필하모니󰡑의 반주자들이기도 했다. 
해마다 우리는 콘솔라타 대성당으로 종교 행사를 거행하러 갔다.51) 그해에는 오라또리오에서 출발하여 대성당까지 행렬을 했는데 길거리에 울려 퍼지는 우리의 노래 소리는 수많은 군중을 매혹시켰다. 나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고 소년들은 영성체를 하고 노래를 했다. 그 후 지하 성당으로 내려가 모두에게 좋은 말을 해 주었다. 뜻밖에도 마리아 봉헌회 수사님들52)이 성전 회랑 아래서 우리 소년들에게 멋진 아침 식사를 제공해 주었다. 

시당국의 원조 

이런식으로 인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소년들을 모았고, 도덕성과 권위에 대한 존중을 매우 신중하게 고취시키고 또 거룩한 성사에 자주 참여할 것을 권장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보기 드문 우리의 모습은 화제거리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토리노 시당국은 우리에 관해 떠도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몬칼보라 일컫는 카펠로의 베드로 로폴로 기사와 두프레 기사 분단장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들은 우리의 활동을 조사한 뒤에 만족했으며 오라또리오에 대해서 좋은 보고서를 썼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찬사의 편지와 더불어 천 리라가 상금53)으로 수여되었다. 그해부터 시당국에서는 해마다 우리에게 보조금을 보내오다가 이미 언급한 대로 1878년부터는 원조를 끊었다. 서민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야간 학교를 지속시키기 위해 그 슬기로운 관리자들이 예산 안에 넣었던 보조금은 그렇게 해서 중단되었다. 
우리의 교육 방법을 도입해서 야간 학교와 음악 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자선단체는 고빌라 기사를 위시한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 단체는 호감과 후원의 표시로 우리에게 천 리라54)를 기부했다. 

용감한 소년들의 순례 

매년 성목요일에 우리 소년들은 휴식의 제대를 참배하기 위해 토리노의 여러 본당을 순례했다. 그러나 그때는 무질서한 시기였기 때문에 못된 패거리들이 오라또리오의 소년들을 놀리고 모욕했다. 그래서 어떤 소년들은 두려워서 아무 성당에도 나가려고 들지 않았다. 
나는 모든 소년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해 단체로 󰡐십자가 아래 어머니󰡑라는 성가를 노래하면서55) 행렬을 지어 성당을 방문했다.56) 결과는 예상을 초월했다. 행렬을 하는 동안에 큰 아이, 작은 아이, 부짓집 아이, 가난한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아이들이 우리 무리에 섞여 성체를 흠숭하러 갔다. 우리는 질서 정연하고 평화스럽게 기도하고 노래할 수 있었다. 
그해 성목요일에 오라또리오에서는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족례󰡑57)를 거행했다. 선택된 12명의 소년들은 󰡐열두 제자들󰡑이라고 불리웠다. 세족례가 끝난 뒤에 나는 소년들과 참석한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을 우리의 검소한 식탁에 초대했다. 나는 그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또 그해에 소성당 벽에 십자가의 길 14처를58) 걸어 놓고 장엄하게 축성을 했다. 
나는 각 처마다 짧은 기도를 바쳤고 소년들은 성가 후렴을 불렀다.이리하여 이탈리아와 온 세계의 정치 분야에 변화를 일으키는 심각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오라또리오는 견고하게 그 기초를 다져 나갔다. 

11. 1849년, 비오 9세를 위한 33리라 

해산된 신학생들이 오라또리오에 

그해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전해에 시작한 피에몬테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이탈리아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공립 학교는 잠시 휴교했으며 신학교, 특히 키에리와 토리노의 신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군인들이 주둔해 있었다. 
그 결과 우리 교구의 신학생들은 보금자리와 선생들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충격을 받은 나는 피나르디의 집 전체를 다 빌렸다.59) 그것은 큰 일은 아니었지만 그 엄청난 사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교실을 늘리고, 성당을 증축하고, 놀이터를 확장하여 기숙생들을 30명으로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주요 목적은 교구 신학생들60)을 모집하는 것이었는데 그 목적은 달성되었다. 오라또리오의 집은 거의 20년 동안 교구 신학교가 되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피나르디 집 전체를 빌리려고 했을 때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은 시끄럽게 항의를 했으며, 나와 어머니 그리고 피나르디 씨에게도 협박을 했다. 나는 많은 돈을 쏟아 부어야 했고, 마침내 건물 전체가 우리의 차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20년 동안 악습과 죄악에 물들어 왔던 불건전한 장소는 우리의 소유물이 되었다. 이제 나는 운동장과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뒷편에 있는 집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교황님을 위한 성금 

1848년 말에 정치적인 사건으로 인해 교황 비오 9세는 로마에서 가예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위대한 교황님은 여러 번이나 우리에게 친절과 호의를 보여 주었었다.61) 
교황님이 가예타에서 물질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고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토리노에서는 󰡐성 베드로의 기부금󰡑이라고 불리우는 모금 운동62)이 일어났다. 
프란치스코 발리노티 참사 위원과 구스타보 카보르로 구성된 위원회가 우리 오라또리오에도 왔다. 소년들 사이에서 모금한 돈은 33리라였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우리는 교황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도록 편지를 곁들여 보냈다. 
교황님은 무척 기뻐했다. 교황님은 당시 토리노의 교황대사63)였고 후에 안코나의 대주교가 된 안노누치 추기경님에게 보낸 편지를64) 통해서 감사를 표했다. 추기경님은 교황님이 우리의 봉헌금에 무척 감동했고 곁들인 편지에 더더욱 감동했다는 말을 우리에게 전하라는 전갈을 받았다고 했다. 교황님은 답례로 당신의 강복과 720개의 묵주를65) 우리에게 보내 주었다. 그것은 1850년 7월 20일에 장엄하게 소년들에게 분배되었다(그 기회에 인쇄된 소책자와 여러 신문의 조항들을 보라).66) 

세 번째 오라또리오 

발도코와 성 루이지 오라또리오에 몰려드는 소년들의 수효는 나날이 늘어갔다. 이리하여 우리는 세 번째 오라또리오를 열었다. 오라또리오의 이름은 󰡐수호천사󰡑였고 장소는 바를로 후작 부인이 후에 산타 줄리아 성당을 지은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반킬리아 마을이었다. 
이 오라또리오는 몇 년 전에 요한 코키67) 신부님이 세운 것으로서 발도코의 오라또리오와 비슷했다. 그러나 코키 신부님은 조국에 대한 사랑에 불타올라 젊은이들에게 총과 칼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리하여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선두에 서서 진군했다. 
코키 신부님의 오라또리오는 1년 동안 문이 닫혀 있었고, 그 후 우리는 그것을 빌렸다. 그 집은 내게 정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요한 볼라 신부님이 관리해 준 이 오라또리오는 1871년 장소를 본당으로 옮길 때까지68) 같은 자리에서 계속되었다. 바롤로 후작 부인은 성당과 장소를 본당69)의 소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쓴다는 조건으로 그것을 오라또리오에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계속하고 있다. 

오라또리오의 첫 신학생 

그 시기에 내무부 장관이 파견한 대표단이 우리의 사업을 방문하기 위해 발도코 오라또리오에 왔다. 그들은 친절하고 다정스럽게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국회에 긴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1850년 3월 29일자 피에몬테 가제타 신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길고도 열띤 토론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국회는 보조금으로 300리라를 우리에게 보내 왔고, 그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우르바노 라타치는 2천 리라를 보내 왔다. 
그해 10월 말에 드디어 우리 학생들 중의 하나가 신학생복을 입었다. 아스카니오 사비오70)라고 불리는 오라또리오의 첫 신학생은 지금 리푸조의 원장이 되어있다. 

12. 정치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다 

애국자들의 조끼 

그 시절에 이상스런 사건 하나가 우리의 생활을 크게 방해했다. 국민축제일이라는 명목하에 도시와 마을에서 거듭 반복되고 있는 공공집회에 우리 오라또리오를 가담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 운동에 참가하고 애국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은 앞가리마를 탄 곱슬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꼭 끼는 가지각색의 조끼를 입었으며, 가슴에 꽃 모양의 모포와 메달을 달고 손에는 삼색기를 들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치장을 한 그들은 국가 통일 노래를 부르면서 행진에 가담했다. 

후작과의 대화 

그 시위 행진의 주창자인 로베르토 다젤리오 후작은 우리를 그 시위에 정식으로 초대했다. 내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남에 눈에 잘 뜨이도록 모든 것을 배려했다. 빅토리오 광장, 토리노의 모든 단체 곁에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 놓았던 것이었다.71) 어떻게 해야만 할까? 거절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이탈리아의 적으로 선언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응한다는 것은 내가 아주 위험스럽게 여기고 있는 일정한 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72) 
󰡒후작님, 오라또리오는 공공 단체가 아니라 가족입니다. 시내 곳곳에서 모여온 젊은이들은 법인 단체가 아닙니다. 만일 제가 시민들의 자선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이것을 저의 시설인양 내세운다면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바로 그때문에 신부님께서는 참가하셔야 됩니다. 시민들의 자선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결코 현대적인 제도들과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부님께 유리할 것입니다. 기부금도 늘어나고. 시당국도 신부님의 일에 큰 관심을 갖게 하겠습니다.󰡓 
󰡒후작님, 정치에 관한 모든 것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제 신조입니다. 절대로 그 찬․반에 손을 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할 작정입니까?󰡓 
󰡒버림받은 소년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선을 베풀고 싶습니다. 종교적으로 착한 신자가 되고 문명 사회에서 정직한 시민이 되도록 말입니다.󰡓 
󰡒하고자 하는 모든 말은 알아듣겠소만, 신부님께서는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만일 신부님께서 이런 원칙을 고집하신다면 모든 이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신부님의 사업은 지탱해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을 관찰하고 인식하며 과거와 현대의 제도들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단 말입니다.󰡓 
󰡒후작님의 선의와 제게 주시고자 하시는 충고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신부가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곳에 초대해 주신다면 즉시 제 모든 것과 생명까지라도 바치기 위해 그 어디라도 마다 않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정치적인 일에는 손을 대고 싶지 않습니다.󰡓 
그 유명한 애국자는 내 의견을 바꾸어 놓지 못하고 떠나갔다. 그때부터 그는 우리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의 뒤를 따라 많은 평신도와 사제들도 나를 저버렸다. 지금 내가 이야기한 사건 이후로 나는 홀로 남게 되었다. 

13. 사제들과 젊은이들이 떠나가다 

조각난 신문 

위에서 말한 축일 다음 주 오후 2시에 나는 소년들과 함께 운동장에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내 곁에서 󰡐아르모니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내 일을 도와주던 신부님들이 가슴에 삼색기를 달고 나타났다. 손에는 반성직자적인 󰡐오피니오네󰡑73)란 신문마저 들려 있었다. 사도적 열성과 총명함으로 내게 존경을 받고 있던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옆에서 아르모니아 신문을 들고 있는 아이를 가리키면서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부끄러운 일이군! 이런 감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건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아이의 손에서 신문을 잡아채어 조각조각 찢어 땅바닥에 내던지더니 침을 뱉고 짓밟아 버렸다. 정치적인 분노를 그런 식으로 터뜨린 그는 내 코밑에다 󰡐오피니오네󰡑를 들이댔다. 
󰡒이거야말로 좋은 신문이네. 참되고 정직한 모든 시민들이 읽어야 할 신문은 바로 이거란 말일세.󰡓 
나는 그의 말과 태도에 당혹감을 느꼈다. 좋은 표양만을 주어야 할 그 장소에서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그런 주제는 우리끼리 따로 다루자고 부탁했다. 
󰡒천만에 말씀! 더 이상 사적으로나 비밀리에 다루어져서는 안 되네. 모든 것은 백주에 말하고 행해져야 하네.󰡓 

떼지어 밖으로 

그때 종소리가 울렸다. 성당에 가는 시간이었다. 그들 중의 한 신부는 젊은이들에게 짤막한 강론을 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좋지 않은 말을 했다. 이야기는 온통 자유와 해방, 독립에 관한 것이었다. 
그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나는 제의방에서 내가 강론할 수 있는 기회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부는 이야기를 끝낸 뒤 강복을 주고는, 즉시 자기를 따라오라고 사제들과 젊은이들을 부추겼다. 
그들은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깃발을 열광적으로 흔들면서 콘테 데이 카푸치노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번 시위가 국가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오라또리오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장엄한 선언을 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한마디 할 겨를도 없는 사이에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의무가 무엇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사제들에게 그들이 오라또리오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엄하게 금지한다고 전했다. 소년들에게는 다시 오라또리오로 돌아오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씩 내게 말하러 오라고 일렀다. 
일은 잘 해결되었다. 그 사제들 중에서 다시 돌아오려고 애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젊은이들은 사과를 했고 속임수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순명으로 규율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14. 무거운 고독 

신학생들도 떠나가다 

그러나 나는 홀로 남았다. 주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고백성사를 주었고 9시가 되면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했다. 그 후 노래와 국어 공부가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1시, 점심 식사가 끝나면 오락과 교리, 저녁 기도, 수업, 성체 강복이 계속되었고 그 다음에는 밤까지 놀이와 노래, 수업을 했다. 
평일에는 하루 종일 소년 기능공들의 일을 돌보아 주고74) 15명의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저녁에는 프랑스어와 수학, 노래, 음악, 피아노, 오르간 수업을 했다. 나는 내가 그 모든 일들을 어떻게 지탱해냈는지 모른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에 보렐 신부님은 내게 큰 위로와 상당한 힘이 되어 주었다. 그 경탄할 사제는 여러 가지 일로 바쁜 데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나를 도와주러 왔다. 소년들에게 고백성사를 주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줄이기도 했으며 강론을 하기 위해 얼마 안 되는 휴식시간마저 포기했다. 
이 어려운 상황은 사비오와 벨리아, 바케타 같은 신학생들의 도움을 받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오래 가지 않아 나를 저버렸다. 그들은 어떤 사람의 권유로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마리아 봉헌 수도회에 입회했던 것이다. 

로스미니가 오라또리오의 소년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다 

어느 주일에 나는 두 사제의 방문을 받았다. 마침 교리 시간이었다. 
소년들은 제각기 자기 반으로 가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사제들은 내 곁으로 다가와 자기들 앞에 펼쳐진 정경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오라또리오의 기원과 체제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나는 겨우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좀 도와주십시오. 신부님께서는 제대 뒤로 가십시오. 신부님께 큰 애들의 수업을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는 - 키가 더 큰 사람에게 말했다. - 아주 산만한 애들을 맡기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교리를 썩 잘 가르치는 것을 보고, 한 사람에게는 짤막한 강론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또 한 사람에게는 성체 강복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두 사제는 아주 친절하게 응해 주었다. 키가 큰 사제는 후에 비제바노의 주교가 된 데 가우덴치 참사위원이었고, 또 다른 사제는 사랑의 수도회 창립자인 안토니오 로스미니 원장 신부75) 였다. 
그때부터 두 사제들은 오라또리오의 친구요 은인들이 되었다. 

15. 집을 한 채 사고 선술집을 빌리다 

물러서는 자에게는 100리라의 벌금을 

1849년은 숱한 노고와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가시 많고 결실 없는 해였으나, 폭풍도 가라앉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1850년의 서곡이었다. 
피나르디 집으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여기저기 떠버리고 다녔다. 
󰡒우리가 풍류를 즐기며 재미를 톡톡히 보던 집이 이제 신부의 손에, 그것도 정말 참기 어려운 신부의 손으로 넘어가다니 이 얼마나 역겨운 일이오!󰡓 
그들은 내가 내는 돈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을 피나르디 씨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피나르디 씨는 옳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벌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야기의 결말을 내기 위해 그 집을 아주 사라는 제안을 내게 여러 번 했다. 그러나 그가 요구하는 금액은 8만 리라라는 엄청난 액수였다. 실제로는 그 값의 삼분의 일밖에 안 나가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종종 보여 주신다. 여기에 그 실례가 있다. 
어느 주일날, 보렐 신부님이 강론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훼방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운동장 입구에서 파수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 피나르디 씨가 나타났다. 
󰡒잠깐! 돈보스꼬께서는 제 집을 사셔야 합죠.󰡓 그는 농담조로 말했다. 
󰡒잠깐! 피나르디 씨가 제값에 주신다면 당장 사고말고요.󰡓 
󰡒제값에 드립죠.󰡓 
󰡒얼만데요?󰡓 
󰡒청하시는 가격에 드리죠.󰡓 
󰡒값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어서 말씀해 보시라구요.󰡓 
󰡒말씀을 드릴 수가 없는 걸요.󰡓 
󰡒왜죠?󰡓 
󰡒아주 낮은 값이니까요. 흥정하시는 분의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리고 싶지 않거든요.󰡓 
󰡒생각하시는 대로 말해 보시라구요.󰡓 
󰡒그 집을 제값에 주시겠습니까?󰡓 
󰡒신사의 약속입죠. 드리다마다요.󰡓 
󰡒악수해 주십시오. 그럼 값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얼마를 주겠소?󰡓 
󰡒저와 당신의 친구에게 집 값을 감정해 보았는데 시가로 2만 6천 리라 내지 2만 8천리라 정도라고 하더군요. 저는 결말을 짓기 위해 3만 리라를 드리겠습니다.󰡓 
󰡒덤으로 제 마누라에게 500리라 짜리 브로치를 선물해 주시겠소?󰡓 
󰡒좋습니다.󰡓 
󰡒현금으로 지불해 주시겠죠?󰡓 
󰡒현금으로 지불하겠습니다.󰡓 
󰡒언제 서류를 작성할까요?󰡓 
󰡒언제든지.󰡓 
󰡒15일 안에 전액을 지불하는 것으로 합시다.󰡓 
󰡒좋으신 대로.󰡓 
󰡒누구든지 해약하는 사람에게는 100리라의 벌금을 물기로 하죠.󰡓 
󰡒좋습니다.󰡓 
그 일은 5분 내에 결정되었다. 그러나 3만 리라를 15일 내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때 아름다운 섭리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 저녁, 주일에는 대개 안 오는 카파소 신부님이 날 찾아왔다. 경건한 카사자 리카르디 공작 부인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된다고 생각되는 일에 사용해 달라면서 내게 1만 리라를 보내 주었다고 했다. 그 다음 날에는 2만 리라를 투자하려고 토리노에 온 로스미니회의 한 수도자가 날 찾아와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그 돈을 피나르디 집 값을 치르기 위해 이자로 빌려 달라고 했다. 이리하여 돈이 마련되었다. 은행 계약 절차에 따르는 수수료 3천 리라는 코타 씨에 의해 충당되었다. 

웃고 떠드는 자들의 선술집 

피나르디의 집을 매입한 나는 󰡐자르디니에라󰡑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일마다 놀기를 일삼는 자들이 모이는 선술집이었다. 오르간과 피리, 클라리넷, 기타, 바이올린, 저음 관현악기, 콘트라베이스가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합주도 종종 있었으며 거기에 술취한 노래 소리까지 곁들여졌다. 
선술집으로 쓰는 그 벨레자의 집 건물과 우리 오라또리오 사이에는 낮은 담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성당의 노래소리는 자르디니에라의 고함소리와 음악과 술병 부딪치는 소리에 묻혀 흐지부지해졌다. 그 외에도 피나르디 집 문 앞에는 자르디니에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얼마나 방해가 되었고 소년들에게 얼마나 위험스러웠겠는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그 집을 사기로 마음먹었으나 도저히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집을 빌리기로 했다. 집주인은 승락했지만 선술집 여주인은 엄청난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이리하여 나는 선술집을 통채로 빌리겠다는 제안을 했다. 집세를 내고, 식탁과 긴 의자, 의자, 접대용 고객 의자와 포도주 저장 창고와 부엌의 모든 가구 부속품들은 사기로 했다. 
모든 것에 비싼 값을 치렀지만 마침내 그 장소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곳은 즉시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때까지 발도코의 피나르디 집 곁에 있던 풍기문란한 집은 폐쇄되었다. 

16. 성당과 복권 

헛간 성당에서 소년들이 졸도하다 

피나르디 집과 자르디니에라에서 겪었던 정신적인 불편은 사라졌다. 이제는 전례 거행에 보다 적합하고 점점 더 늘어나는 젊은이들의 수효에 맞갖는 성당76)을 생각해야 했다. 
헛간에 꾸몄던 성당을 좀 넓히긴 했지만 너무 낮고 협소했다. 게다가 그곳에 들어가려면 두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겨울과 장마철에는 물에 잠겼고, 여름에는 더위와 악취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주일마다 졸도한 소년의 팔을 붙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했다. 
그러므로 통풍이 잘 되고 위생적이며 소년들의 수효에 맞갖는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설계는 블라키에르 기사가 했다. 현재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과 피나르디 집 전체를 증․개축하는 것이었다. 공사는 페데리코 보카 씨가 시행했다. 1851년 7월 20일에 교구의 사무장 모레노 의전사제가 초석을 강복하고 주세페 코타가 주춧돌을 놓았다. 
바베라 신부님은 달려온 수많은 군중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좀 높은 땅 위로 올라가 즉석에서 놀라운 연설을 했다. 

씨앗과 같은 주춧돌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가 강복하여 이 성당에 주춧돌로 놓은 이 돌은 두 가지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많은 소년들이 쉬러 올 나무로 성장하게 될 겨자씨를 의미하고, 또 하나는 이 사업이 예수 그리스도님이신 머릿돌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적들이 그것을 파괴시키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겠지만 다 허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레라 신부님은 그 두 가지 의미를 전개해 나갔다. 청중들은 매우 만족했으며 그를 웅변적인 강론가로 느꼈다. 
그 즐겁고 떠들썩한 축제는 사방에서 소년들을 불러 모았다. 하루 매 시각마다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었으며 오라또리오에 기숙케 해 달라고 간청하는 젊은이들도 많아 그들의 수효는 그해에 50명이 넘었다. 소년들이 시내로 일하러 나가는 게 점점 더 위험해졌기 때문에 집안에 여러 작업장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건물의 기초를 닦고 벽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 돈이 바닥났다. 약간의 집과 땅을 팔아 3만 5천 리라를 댔으나 봄볕에 눈녹듯 사라졌다. 성당 건축이 거의 완공될 무렵에 가서야 교구 사무장이 9천 리라를 건네주었다. 비엘라의 베드로 로사나 주교님은 오라또리오가 특히 비엘라의 소년 벽돌공들에게 크게 유익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의 교구 본당 신부님들에게 회람서한을 보내어 모금 운동을 실시케 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비엘라 주교의 서한 

 경애하는 신부님들께 

정녕 끝없는 사랑에 고무된 저명하고 경건한 사제, 돈보스꼬는 보르고 도라와 마르티네토 사이에 있는 넓고 인구 많은 지역 광장이나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버림받은 모든 소년들을 주일과 축일에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즐겁게 해 주고 그리스도교적인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모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원이 너무 많아서 사용하던 성당이 비좁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곳에 몰려드는 600명 이상의 소년들을 삼분의 일도 수용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사랑으로 고무된 돈보스꼬는 소년들의 필요에 맞갖는 성당 건립이라는 힘든 일에 손을 댔습니다. 그는 건축에 필요한 상당한 비용을 충당키 위해 가톨릭 신자들에게 애덕에서 우러나오는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각별한 신뢰를 가지고 저를 통해 우리 지방과 교구에 도움의 손길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의 오라또리오에 다니는 600명 이상의 소년들 가운데서 삼분의 일 이상(200명이상)이 이 비엘라의 소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의 많은 젊은이들이 돈보스꼬의 집에 기거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있으며 음식과 옷을 무료로 제공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보스꼬는 우리에게 애덕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정의의 차원에서도 도움을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선량한 신자들에게 그 흥미진진한 사업에 대해서 알리고, 부유층의 인사들에게도 호소해 주십시오. 아울러 이 목적으로 어느 주일을 모금의 날로 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금된 돈은 그 액수와 본당 이름을 명기한 쪽지와 더불어 교구청으로 보내 주십시오. 
어둠의 자식들은 그들의 형제들을 파멸로 이끄는 오류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전의 문을 여는데,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과 그들의 형제들, 그들 고향 사람들에게 진리와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성당 건립에 그들 못지 않게 기여할 수 없단 말입니까? 저는 우리에게 도착될 기부금으로 하느님의 사람인 돈보스꼬의 일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유익하고 우리 시대에 절실한 이 사업에 대한 우리 교구 신자들의 조명된 의식적인 선의를 피부로 접하게 되길 아울러 희망합니다. 이 기회를 통해 제 존경과 애정을 재확인합니다. 



                                            1851년 9월 13일, 비엘라 
                                           요한 베드로 주교 』 
최초의 복권 

모금된 액수는 천 리라였다. 그러나 그것은 메마른 땅 위에 내린 한 방울의 물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작은 기증품을 받아 경품으로 거는 복권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선물이 3천 3백 개 모였다. 교황님과 왕, 대비, 왕비와 모든 왕족들이77) 선물을 보내 주어 이채를 띠었다. 
그 복권의 프로그램과 규칙78)을 기록해 본다. 
한 장에 반 리라씩 하는 복권은 매진되었다. 시청에서 추첨을 할 때도 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사려고 애를 썼으며 어떤 사람은 복권 값을 10배로 더 내겠다고까지 했지만 복권이 더 이상 없었다. 
당첨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물을 다시 기부했다. 거기에서도 큰 수입을 올렸다. 비용도 적지 않게 들었지만 수익금은 정확하게 2만 6천 리라였다. 

17. 4월 26일, 토리노에 재앙이 

화약고가 터지다 

1852년 4월 26일, 경매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동안 성 베드로 쇠사슬 성당 묘지 가까이에 있는 화약고가 터졌다. 그 터지는 소리는 무섭고 끔찍했다. 그 근처의 많은 건물들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으며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며 화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28명이나 사망했다. 
만약 사키79)라는 상사가 목숨을 걸고 불길이 더 큰 화약고로 번지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더라면 토리노시 전체가 파괴되었을 것이다. 
건성으로 지은 오라또리오의 집도 상당히 많은 손상을 입었다. 상원 의회에서는 집 수리를 위해 300리라를 원조해 주었다. 
여기에 대해서 소년 기능공 가브리엘 파시오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해 보겠다. 그 전해에 이 소년은 병이 위중해져 삶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다. 소년은 고열에 시달린 채 정신없이 되풀이했다. 
󰡒토리노에 재앙이! 토리노에 재앙이!󰡓 
친구들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니?󰡓 
󰡒큰 재난이 위협하고 있어.󰡓 
󰡒어떤 재난인데?󰡓 
󰡒무시무시한 지진이야.󰡓 
󰡒언제쯤 일어나겠니?󰡓 
󰡒내년이야. 4월 26일에 토리노에 재앙이 올 거야.󰡓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니?󰡓 
󰡒오라또리오와 그곳에 사는 이들을 보호해 주도록 루이지 성인께 기도해.󰡓 
이리하여 모든 소년들의 원의에 의해 우리는 아침 저녁 기도에 루이지 성인의 이름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덧붙였다. 사실 우리는 겪은 위험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피해를 입은 편이며 다친 소년들도 없었다.80) 

새 성당을 위한 시와 축제 

그 동안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 건축은 신속히 진행되어 11개월만에 준공되었다. 1852년 6월 20일 성당은 성대하게 축성되었다. 
우리는 운동장 입구에 커다란 아아치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대문자로 이런 말을 써 놓았다. 
󰡒우리는 팔방에 황금 글씨로 󰡐오늘이여, 영원히 만만세󰡑라고 기록하리.󰡓 
내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주세페 블란키 선생님은 그날의 찬미가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집안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서쪽에서 태양이 떠올라 
동쪽으로 넘어가고, 
온갖 샘이 원천으로 
거슬러올라가기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못할 
이 아름다운 날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으리. 
또 다른 시도 뜨거운 마음으로 낭송하고 노래했다. 

새가 둥지를 틀고 
평화로이 쉬기 위해 
이 가지 저 가지 
우람한 나무 찾듯 
10여 년 간 우리 
보금자리 찾아 헤맸네.81) 

많은 신문들이 우리의 축제를 보도했다. 
성당이 준공되자 갖가지 비품이 필요했으나 시민들의 자선이 쇄도해 이를 채웠다. 주세페 두프레 기사 분단장은 성 루이지에게 봉헌된 성당을 아름답게 꾸며 주었으며 지금도 성당을 단장해 주는 대리석 제대를 마련해 주었다. 또 다른 은인은 연주석을 만들게 하고 그곳에 외부 젊은이들을 위한 오르간을 들여 놓았다. 미켈레 스칸나가티 씨는 필요한 모든 촛대들을 샀다. 파사티 후작은 성모님의 제대를 세우고, 그것을 구리 촛대로 장식케 했으며 후에는 성모상을 마련해 주었다. 카파소 신부님은 강론대를 마련해 주었다. 큰 제대는 프란치스코  발라우리가 마련해 주었고 그의 아들 베드로 신부님이 완성해 주었다. 이리하여 새 성당은 짧은 시일 안에 평일과 축일 행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게 되었다. 
공제 조합 

같은 해 6월 1일에 우리는 󰡐공제 조합󰡑82)을 시작했다. 우리의 젊은 근로자들이 반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노동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목적은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 그 후 1857년에 공제 조합은 오늘날(1875년)까지 계속되고 있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지회로 개편되었다. 

18. 밤중에 터지는 폭음 

새벽과 폭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새 성당83)과 제의실84)과 종탑85)은 소년들의 축일 전례 거행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고 주․야간학교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날마다 내게 기숙생으로 받아 달라고 청하는 모든 불쌍한 소년들을 어디에 재워야 한단 말인가? 1년 전에 발생한 화약고의 폭발은 우리가 샀던 피나르디 집을 거의 파괴시켜 놓았다. 
그 절박한 순간에 나는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옛 건물을 계속해서 활용키 위해 피나르디 집을 이어 붙여서 새로운 건물의 날개를 짓기 시작했다(현재 건물 중앙에 있는 계단에서부터 󰡐돈보스꼬의 방󰡑까지를 포함). 
늦은 가을이었지만, 일은 빨리 진척되어 머지않아 지붕을 올리게 되었다. 이미 대들보가 제자리에 놓여지고 석가래는 못으로 박았으며 기와도 대들보 위에 쌓여져 제자리로 옮겨질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는 밤낮으로 쏟아져 대들보와 석가래를 적시고 석고덩어리, 생석회가 물에 흘러내려 결국엔 벽돌과 물에 씻긴 담만이 남게 되었다. 

혼비백산하다 

모든 이들이 잠을 자고 있는 한밤중에 돌연히 굉음이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져 공포감을 일으켰다. 잠이 깬 소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도 모른 채 담요나 홑이불을 움켜쥐고 침실을 뛰쳐나갔다. 혼비백산한 아이들은 절박한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무턱대고 달렸다. 
소음과 혼란이 더욱더 거세지면서 지붕의 뼈대와 기와, 벽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와르르 무너졌다. 
새 건물은 낮고 낡은 건물에 기대져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무너지는 건물에 깔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전율을 자아내게 하는 몸서리쳐지는 소음 외에는 다친 사람이 없었다. 
아침이 되자 시당국에서 보낸 기사들이 현장을 조사하러 왔다. 가베티 기사는 바닥에서 뽑힌 높은 벽기둥이 한 침실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소리쳤다. 
󰡒콘솔라타 성모님께 감사하러들 가십시오. 저 벽기둥은 기적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만일 저것이 떨어졌다면 아래 침실에서 자고 있던 돈보스꼬와 30명의 소년들이 매장되었을 것입니다.󰡓86)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탓으로 제일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벽돌과 기와를 쌓는 업자였다. 우리의 피해는 1만 리라였다. 이 사건은 1852년 12월 2일 한밤중에 일어났다. 
덮쳐 오는 이러한 슬픈 사건들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의 불행을 덜어 주시는 하느님의 어지신 손길이 있었다. 만일 그 재난이 2시간 전에만 일어났었다 하더라도 야간 학교 학생들은 모조리 묻혀 버렸을 것이다. 학교는 10시에 파했고, 교실에서 나온 300명87)의 소년들은 공사 중인 건물 사이에서 30분 이상 뛰놀았었다. 그리고 그 재앙은 그들이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무엇을? 

너무 늦은 계절이라 공사를 끝낼 수도 시작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반쯤 못 쓰게 된 작은 집 어디에다 그 많은 소년들을 재울 수 있겠는가? 
할 수 없이 우리는 옛날 헛간 성당의 담을 튼튼하게 고친 다음 그것을 침실로 개조했다. 교실은 새 성당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성당은 주일에는 성당으로 쓰고 평일에는 학교로 썼다. 
그해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 옆면에 종각을 세웠다. 
우리의 은인인 미켈레 스칸나가티가 큰 제대의 모든 촛대들을 선사해 주었다. 이 촛대들은 지금도 이 성당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19. 1853년, 가톨릭 문집이 출간되다 

65명의 소년들과 수많은 은인들 

계절이 바뀌자마자 무너진 집을 일으켜 세우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원활하게 진척되어 10월에 건물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장소가 절박했기 때문에 날다시피 그 집에 입주했다. 나는 하느님의 은혜로 지금도 여전히 머물고 있는 이 방으로 제일 먼저 이사를 했다. 옮긴 학생들의 수효는 무려 65명에 달했지만 우리는 식당과 침실, 교실을 적절하게 배정할 수 있었다. 
많은 은인들이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주세페 두프레 기사는 성 루이지 성당의 제대를 꾸미고 온 성당을 석회로 미장을 해 주었으며 성당 안에 대리석 난간도 마련해 주었다. 도미니코 프라사티 후작은 도금한 촛대들과 성모님 제단을 위한 작은 난간을 선사해 주었다. 두 번째로 성 루이지 협회의 단장으로 선출된 우리의 유명한 은인 가이스 공작은 더 이상 우리에게 빵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제빵업자에게 묵은 빚, 1200리라를 갚아 주었으며 우리의 종각을 위한 종도 사주었다. 그 종은 정다운 소축제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우리의 가티노 본당 주임이 그 종을 축성하러 왔고 도시에서 모여온 사람들에게 짤막한 강론을 했다. 예절 후에 촌극을 공연하여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가이스 공작은 금실로 아름답게 수놓은 천개(성체 거동을 위한)와 다른 성당 비품들을 선물했다.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 

마침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은 이제 전례 거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래 전부터 바라 마지않던 40시간 성체 조배를 처음으로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큰 장식은 없었지만 신자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 종교적인 열성을 채워 주고 모두가 편리하게 고유의 신심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40시간 성체 조배 후에 일주일 동안 강론을 하고 고백성사를 주었다. 문자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백성사를 보러 왔다. 이 신심 행사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 다음해에도 40시간 성체 조배와 강론 그리고 고백성사를 계속했으며 사람들은 언제나 많이 참석했다. 

유태인들과 개신교도들이 열을 올리다 

그해 3월에 월간 가톨릭 문집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847년 유태인들과 개신교 신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자 가톨릭 신자들, 특히 젊은이들의 손에 해독제를 쥐어 줄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정부는 그 해방의 선언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려고 했던 것이지 가톨릭교에 해를 끼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개종 운동을 벌였다. 세 가지 신문(󰡐희소식󰡑, 󰡐복음의 빛󰡑, 󰡐피에몬테의 로간티노󰡑)과 성서와 다른 여러 주제를 다룬 책들이 발간되었다. 그들은 자기네 학교나 써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취직을 시켜 주고 금전이나 옷, 식품을 대주는 구체적인 방법도 썼다. 
정부에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묵과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두둔해 주는 결과를 낳았다. 개신교 신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재정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개종운동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그때까지 그들을 보호하고 방어해 주던 사회 법률에 의지한 나머지,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몇 가지 신문과 몇몇 문화 사업밖에 없었다. 일반 대중의 손에 들어갈 수 있는 정기 간행물이나 책자가 아무것도 없었다. 

돈보스꼬가 투쟁을 시작하다 

이러한 필요성에 고무된 나는 그 즈음에 가톨릭 교회에 관한 글을 체계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비망록󰡑이란 제목의 책자를 펴냈다. 나는 그 책을 특히 피정이나 전교 강연회 때 젊은이들과 성인들 사이에 보급시켰다. 그 인쇄물들과 소책자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짧은 시일에 많이 보급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내게 가톨릭 종교의 근본 진리에 대한 쉬운 지식을 전파할 수 있는 대중적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가톨릭 신자들을 개신교의 함정에서 지키려는 목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에게 고함󰡑88)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행했다. 
그 책들은 놀랍게 보급되었다. 2년 만에 2백만 부를 돌파했다. 이와 같은 성공은 선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지만, 포교에 경쟁자가 따르는 것을 원치 않는 개신교도들을 격노케 했다. 

나는 그 일에 서명을 하지 않겠소 

나는 일반 대중을 위해 책을 쓰고 출판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가톨릭 문집󰡑89)을 계획했다. 
첫 소책자들을 준비한 나는 그것을 즉시 발간하려고 했지만 예상도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상에 선뜻 나서는 주교님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베르첼리, 비엘라 그리고 카살레의 주교님들은 개신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위험하다며 거절했다. 그 시기에 리용에 거주하고 있던 프란소니 대주교님은 문집 발행을 인준하고 격려했지만, 교회 검열관으로나마 이름을 내밀려는 주교님이 없었다. 
대주교님의 부탁으로 총대리 주세페 자파타 신부님이 첫 소책자를 겨우 반쯤 검토하고 나더니 도로 돌려주며 말했다. 
󰡒자네 작품을 도로 가져 가게나. 나는 그 밑에 서명을 하고 싶지 않네. 세메네스와 팔마의 살해 사건은 너무나도 최근의 일일세(가톨릭 라바로 신문 사장은 살해되었다. 그 신문의 기자인 몬시뇰 팔마는 교황청 안에서 피살되었다. 이 두 사건들은 1848년에 일어났다). 자넨 적들에게 도전을 하고 정면으로 공격을 가하고 있네만, 나는 적절한 후퇴 작전을 쓰고 싶네.󰡓 
나는 총대리 신부님의 동의 아래 모든 것을 대주교님에게 보고했다. 대주교님은 원고를 이브라의 모레노 주교님에게 보내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에서 대주교님은 모레노 주교님에게 가톨릭 문집을 그의 보호와 권한 아래 두고 겸열관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몬시뇰 모레노는 이에 기꺼이 응했다. 그는 그의 총대리 피놀리 변호사를 교회 검열관으로 위임했으나 출판시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계획을 짰다. 이리하여 1853년 3월 1일에 󰡐가톨릭의 가르침󰡑90)이란 첫 소책자가 나오게 되었다. 

20. 1854년, 개신교도들과 얼굴을 맞대고 

나와 논쟁을 벌이기 위해 번갈아 발도코에 

가톨릭 문집은 대체적으로 호응이 좋았다. 독자들의 수효가 의외로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개신교도들을 격분케 했다. 그들은 그들의 신문과 󰡐복음문고󰡑로써 가톨릭 문집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독자들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돈보스꼬를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아무도 자기들의 논리에 당해 낼만한 사람이 없다고 확신한 그들은 나와 논쟁을 벌이기 위해 번갈아 발도코에 내려왔다. 그들 말에 의하면 가톨릭 신부들은 모조리 얼간이들이라 단 두 마디로 포대에 집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때는 혼자서, 어떤 때는 둘씩, 또는 떼를 지어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언제나 그들의 말에 경청했다. 그들은 내 난처한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못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웃사람에게 가서 답을 얻어 오라고 일러 주곤 했다. 
아마데오 베르토, 메일레와 다른 여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내 입을 막고 우리 소책자들의 출판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나를 설득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이 점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을 언급해 두는 게 좋겠다고 본다. 

가톨릭 문집을 중단하시오 

5월 어느 주일, 두 신사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러 오겠다고 알렸다.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내 칭찬을 한바탕 늘어놓은 뒤에 용건을 꺼냈다. 
󰡒신학자이신 신부님은 대중에게 책을 읽히고 이해시키는 뛰어난 재주를 타고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재주를 학문이나 예술이나 상업을 증진시키고 인류의 선에 이바지하는 데 쓰시도록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가톨릭 문집에 일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일에 제 온 정력을 쏟을 생각입니다.󰡓 
󰡒가톨릭 문집보다도 청소년들을 위해서 어떤 좋은 책을 쓰시는 게 훨씬 나을 것입니다. 역사와 지리, 물리, 기하학 같은 책 말씀입니다.󰡓 
󰡒왜 제가 가톨릭 문집에 전념할 수 없다는 거지요?󰡓 
󰡒이미 많은 이들이 기름에 튀기고 또 튀긴 주제들이니까요.󰡓 
󰡒이런 주제들이 많은 이들에 의해 학문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대중적인 양식으로 펴낸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문집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신부님께 아무런 물질적인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안한 책들을 쓰신다면, 주님께서 신부님에게 맡기신 성스런 단체들도 물질적인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자, 받으십시오. 여기에 이미 약간의 돈이 있습니다(천 리라짜리 수표 4장이었다). 이 기부금은 그 전부가 아닙니다. 더 많은 돈을 드리겠습니다.󰡓 
󰡒왜 제게 돈을 주시려는 거죠?󰡓 
󰡒우리가 언급한 책들을 쓰시도록 격려하고 또 훌륭한 오라또리오에 협조하기 위해서지요.󰡓 
󰡒미안합니다만, 돈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저는 다른 책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가톨릭 문집에 전념하겠습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일이라면 어째서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제 일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왜 돈을 낭비하려는 거죠?󰡓 

집 밖으로 나가면 살아 돌아갈 것 같소? 

󰡒행하는 일에 대해서 심사숙고 해 보십시오. 거절을 하시면 안 됩니다. 사업에 피해를 입고, 좋지 않은 결과나 위험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신사 여러분, 당신들이 제게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겠습니다. 명확히 말해 두지만, 전 제가 진리 편에 서 있을 때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 신부가 될 때, 교회와 불쌍한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서 봉헌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계속해서 가톨릭 문집을 위해 일할 생각입니다.󰡓 
󰡒당신은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단 말이오. 당신은 나쁜 일을 하면서 우리를 모욕하고 있는 거요. 만일 당신이 밖으로 나오면 무사하게 살아 돌아갈 것 같소?󰡓 그들은 일어서서 협박조로 말했다. 
󰡒여러분은 가톨릭 신부들을 모르고 있군요. 그들은 목숨이 있는 날까지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일합니다. 만일 그들이 이것 때문에 죽게 된다면 큰 행운이요 최대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그 순간 그들의 모습을 보니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난 그들이 내 몸에 손을 댈까 두려웠다. 그래서 일어나 나와 그들 사이에 의자를 놓고 말했다. 
󰡒만일 무력으로 한다면 나는 여러분에 대해서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신부들의 힘은 인내와 용서입니다. 자, 어서들 나가십시오.󰡓 
나는 방문을 열고 말했다. 
󰡒부제티,91) 이 신사 분들을 철문까지 모셔다 드리게. 길을 모르시니까.󰡓 
그들은 당황해서 말했다. 
󰡒더 적당한 때에 두고 봅시다.󰡓 
그들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과 얼굴로 방을 나갔다. 
이 사건은 여러 신문, 특히 󰡐아르모니아󰡑 신문에 공개되었다. 

21. 쿠오르 도로에서의 서투른 음모 

독을 넣은 포도주 

개신교나 프리이 메이슨 비밀 결사단에서 꾸민 은밀한 음모92)라고 여겨지는 몇몇 사건들을 이야기해 보겠다. 
어느 날 저녁, 소년들에게 수업을 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와서 죽어가는 환자가 있으니 󰡐쿠오르 도로󰡑라는 선술집93)으로 급히 와 달라고 나를 불렀다. 나는 즉시 그들을 따라 나서긴 했지만, 체격이 좋은 젊은이들 몇 명을 대동했다. 
󰡒학생들을 귀찮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신부님을 환자에게로 모셔갔다가 집으로 모셔다 드릴 테니까요.󰡓 그들은 말했다. 
󰡒염려들 마십시오. 이 학생들은 그저 가벼운 산책을 할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환자에게 고백성사를 주는 동안 계단 밑에 머물러 있을 겁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쿠오르 도로󰡑에 이르자 그들은 내게 말했다. 
󰡒이리로 잠깐 들어오셔서 좀 쉬시죠. 그 동안 신부님께서 오셨다고 환자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들은 나를 일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놀음을 일삼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한 후 밤을 까먹고 있었다. 
그들은 오만가지 찬사와 박수로써 나를 환영했다. 밤을 함께 먹자고 권했지만 나는 방금 식사를 했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포도주 한 잔 드시지요. 맛이 좋을 겁니다. 아스티 방면에서 온 것이거든요.󰡓 그들은 강요했다.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식사 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기 때문에 그걸 마시면 제게 해롭습니다.󰡓 
󰡒한 모금의 술은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순순히 마시거나 아니면 억지로 

모두에게 포도주를 따랐다. 그러나 내 자리에 오자 한 사람이 다른 병을 집으러 갔다. 그들의 나쁜 생각을 환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잔을 들어 건배한 뒤에 마시지 않고 도로 식탁에 내려 놓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불쾌합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실례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하지만 전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마시지 않겠단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셔야 할걸요!󰡓 
그리고 나서 한 사람은 내 왼쪽 어깨를 붙들고 또 한 사람은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우리는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소. 순순히 마시든가 아니면 억지로 마시든가 하시오.󰡓 
󰡒제가 꼭 마시길 바란다면 적어도 이 팔이나 놓으시오. 나는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 그걸 내 젊은이들 중의 한 사람에게 주겠소. 그가 내 대신 마실 것이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문쪽으로 성큼 걸어나가 문을 활짝 열고 젊은이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필요 없소. 다른 이들이 마실 필요는 없소. 안심하시오. 우리는 즉시 환자에게 알리러 가겠소. 그러니 이 젊은이들은 계단 밑에 가 있으라고 하시오.󰡓 
물론 나는 그 술잔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내게 그것을 마시게 하려는 그들의 수작을 파헤쳐 보려고 꾸민 연극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그들은 나를 2층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환자 한 명이 누워 있었는데 가서 보니 바로 나를 부르러 온 그 작자였다. 그는 내가 묻는 말을 듣더니 폭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성사는 내일 아침에 봅시다!󰡓 
우리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내 친구 한 명이 나를 불렀던 사람들의 의도를 알아 보니 어떤 사람이 준비해 놓은 포도주를 내게 마시게 한다는 조건으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한턱 냈다는 것이었다. 

22. 나를 죽이려고 하다 

돈보스꼬를 살해하기 위해 160리라를 

나에 대한 습격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 같지만 불행하게도 사실들이며 많은 증인들이 있다. 더 괴이한 일이 여기에 또 있다. 
8월 어느 날 저녁 6시 경에 나는 오라또리오 철문에서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자객이다! 자객!󰡓 
내가 아주 잘 알고 또 선을 베푼 일이 있는 한 사나이가 속옷 바람으로 손에 칼을 든 채 내게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돈보스꼬를 내놔라! 돈보스꼬를 내놔라!󰡓 
모두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한 신학생을 나로 착각하고는 계속해서 그를 쫓아갔다. 그러다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몸을 돌려 나를 찾았다. 내가 피나르디 집94) 계단으로 뛰어올라가 철문 빗장을 막 질렀을 때 그가 덮쳤다. 그는 문을 두들기고 고함을 지르며 철문 빗장을 물어뜯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고 나는 안전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그에게 덤벼들어 박살을 내려고 했지만 나는 그냥 내버려두라고 계속 말렸다. 그들은 내 말에 순종했다. 나는 사람들을 경찰서에 보내어 경찰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밤 9시 30분이 되어서야 경찰들이 와서 그를 연행해 갔다. 
다음날 지방 경찰서장은 경찰관 한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불운한 자를 용서해 주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늘 하듯이 용서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법의 이름으로 사람들과 시민의 거주지를 좀더 잘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자는 바로 그 이튿날 같은 시각에 나의 집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나를 보호하지 않는 것을 본 내 친구 하나가 그 자를 만나 의중을 떠 보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돈을 받았소. 나를 보낸 자들이 내게 주는 만큼의 액수를 준다면 돈보스꼬를 무사하게 내버려두겠소.󰡓 
만료된 고용료 80리라와 선불 80리라를 주어 그 사건도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즉시 또 다른 일이 생겼다. 

어둠 속에서 빗발치는 몽둥이 

한 달 후 어느 주일 저녁, 나는 리푸조 가까이에 있는 사르디의 집으로 급히 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죽어 가는 환자에게 고백성사를 달라는 것이었다. 앞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불안해진 나는 큰 아이들 몇 명을 동반했다.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소년들은 가서 놀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그 말은 내게 더욱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젊은이들 몇 명을 계단 밑에서 기다리게 했다. 주세페 부제티와 자친토 아르나우드95)는 환자의 방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일층 층계까지 나를 따라왔다. 
방에 들어가니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여인이 보였다. 나는 그곳에 있는 네 사람에게 고백성사를 시작할 테니까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고백성사를 보기 전에 나는 저 못된 사람이 내게 뒤집어 씌운 중상 모략을 취소해 주길 바란다구요.󰡓 노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싫소.󰡓 그 중의 한 사람이 대답했다. 
󰡒입닥쳐!󰡓 또 한 사람이 일어나며 소리질렀다. 그러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다. 
󰡒안 하면 널 목졸라 죽이겠다. 목졸라 죽인단 말야.󰡓 끔찍한 저주의 말과 욕설이 혼잡스럽게 방안에 악마의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그 사악한 북새통에서 등불이 꺼졌다. 고함소리가 더욱더 요란하게 진동을 하더니 앉아 있던 내게로 몽둥이가 날아왔다. 나는 나를 해하려는 그들의 속셈을 즉시 알아차렸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던 나는 의자를 집어 머리 위로 뒤집어 쓴 채 빗발치는 몽둥이 속을 뚫고 문쪽으로 뛰쳐나갔다. 
그 악마의 집에서 뛰쳐나온 나는 소음과 고함소리를 듣고 필사적으로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던 내 젊은이들의 팔 사이로 몸을 내던졌다.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단지 의자의 등을 잡고 있던 왼쪽 엄지 손가락을 몽둥이로 얻어맞아 손가락 뼈 반과 손톱이 달아났을 뿐이다. 지금도 그 흉터가 남아 있으나 더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충격이었다. 
나는 그 폭행의 원인을 결코 알아내지 못했지만 아마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개신교도들을 곤경에 빠지게 만드는 일을 중단시키기 위해 내 생명을 앗아가려는 수작을 꾸민 것이라고 생각된다. 

23. 그 리 조 

내 곁에서 큰 개를 보았을 때 

그리조라는 개96)는 많은 논의와 추측의 대상이 되었다. 여러분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개를 보았고 쓰다듬어 주기까지97)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이 개에 대해서 떠도는 여러 이상한 말들을 흘려 버리고 진실만을 열거해 보기로 하겠다. 
자주 일어나는 나쁜 사건들 때문에 나는 혼자서 토리노 시를 오가지 않기로 했다. 그 당시에 오라또리오 쪽으로 나 있는 건물 중에서 제일 마지막 건물은 정신 병원이었다. 거기서부터는 잡목과 아카시아로 덮인 들판이었다. 
어느 어두운 저녁, 좀 늦은 시각에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큰 개가 옆에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개는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지도 않았고 마치 내가 자기 주인이나 되는 양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개는 오라또리오까지 나를 따라왔다. 그날 일어난 일이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리조는 여러 모로 나를 도와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중 몇 가지 사실을 이야기해 보겠다. 
1854년 11월 말, 안개가 자욱이 끼고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저녁에 나는 시내에서 혼자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인적이 없는 길을 피하기 위해 큰솔라타 성당에서 코톨렌고를 향해 뻗은 길로 내려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나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걸음을 빨리 하면 그들도 걸음을 빨리 했고 내가 걸음을 늦추면 그들도 걸음을 늦추었다. 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들은 잽싸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뒤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은 내게로 성큼 달려오더니 아무 말도 없이 겉옷으로 내 얼굴을 뒤집어씌웠다. 나는 말려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헛수고였다. 한 사나이는 손수건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리조가 나타나 곰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두 발로 한 사나이의 얼굴을 덮쳤고 입으로는 다른 사나이를 물고 늘어졌다. 이제 그들은 나보다 먼저 개를 생각해야 했다. 
󰡒이 개를 불러 주시오.󰡓 그들은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질렀다. 
󰡒나를 가만히 가게 내버려 둔다면 개를 부르겠소.󰡓 
󰡒당장 불러 주시오.󰡓 그들은 애원했다. 
그리조는 성난 늑대나 곰처럼 계속 으르렁거렸고 그들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 그리조는 내곁에 붙어서 코톨렌고 병원까지 따라왔다. 놀란 나는 병원으로 들어가 코톨렌고 수도자들이 친절하게 대접해 주는 음료수로 기운을 차린 뒤 든든하게 호위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돈보스꼬의 개를 못살게 굴지 마 

내가 혼자서 건물을 지나 나무 사이로 들어가는 저녁이면 언제나 그리조가 길 어디에선가 나타났다. 오라또리오의 젊은이들은 여러 번이나 그 개를 보았다. 어느 날 개는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큰 구경거리였다. 
어떤 아이는 막대기로 개를 때리려 했고 어떤 아이는 돌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자 주세페 부제티가 말렸다. 
󰡒돈보스꼬의 개를 못살게 굴지 마.󰡓 
그러자 그들은 개를 쓰다듬고 환영하면서 내게로 데리고 왔다. 나는 식당에서 몇몇 사제, 신학생들과 나의 어머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모두가 기겁을 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나의 그리조입니다. 그냥 오게 내버려두십시오.󰡓 
그리조는 식탁 둘레를 한 바퀴 크게 돌고 나서 기쁘게 내게로 다가왔다. 나도 개를 쓰다듬어 주면서 수프와 빵과 반찬을 주었지만 개는 모든 것을 사양했고 냄새조차 맡으려 들지 않았다. 
󰡒그럼 뭘 원하지?󰡓 
나는 덧붙였다. 
개는 귀를 쫑긋거리고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먹지 않으려거든 그럼, 가만히 있거라.󰡓 나는 말했다. 
개는 계속 기쁜 낯으로 무슨 말이나 저녁 인사98)를 하려는 양, 내 식탁보 위에 머리를 기댔다. 소년들은 감탄하고 즐거워하면서 개를 문밖으로 배웅해 주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친구가 데려다 주는 마차를 타고 늦게 집에 돌아왔다고 기억한다. 

사라진 그리조 

내가 그리조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99) 1866년, 모리알도에서 몬쿠코에 있는 내 친구 루이지 몰리아의 집으로 갈 때였다. 부틸리에라의 본당 주임은 나를 얼마간 배웅해 주었다. 길을 반쯤 갔을 때 밤이 되었다. 
󰡐만일 여기 나의 그리조가 있다면 아주 안심하겠는데…….󰡑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서 나는 마지막 빛줄기를 의지삼아 가파른 풀밭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그리조가 아주 기쁜 모습으로 나타나 남은 길, 즉 3㎞를 동반해 주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몰리아의 집에 이르자, 그들은 내 개를 보고는 집 뒤로 오라고 했다. 그리조가 마당에 있는 두 개들과 맞붙어 싸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서로 갈갈이 물어뜯을 겁니다.󰡓 루이지 몰리아는 내게 말했다. 나는 온 가족과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갔고, 나의 그리조는 방 한구석에 쉬게 놔두었다. 식사가 끝나자 루이지는 말했다. 
󰡒그리조에게도 저녁을 주어야 겠어요.󰡓 
우리는 음식을 얼마간 들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찾아 보았지만 개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놀랐다. 문도 창문도 닫혀 있었고 마당에 있는 개들도 그리조가 나갔다는 표시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윗층에 있는 방들도 둘러보았지만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많은 탐색과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그리조라는 개와의 마지막 만남이다. 나는 한 번도 그 개의 주인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 짐승이 내가 큰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정말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100) 
(돈보스꼬의 오라또리오 회고록은 여기서 끝난다: 편집자 주)